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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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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의 한계에 대하여

그렇다면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주권의 정당한 한계는 무엇인가? 사회의 권위는 어디서 시작되는가? 인간 삶의 얼마만큼이 개별성에 배정되어야 하고, 얼마만큼이 사회에 배정되어야 하는가?

저마다 자기에게 더 특별히 관계되는 것을 가진다면 저마다 제 몫을 제대로 받을 것이다. 개별성에는 주로 개인이 이해관계를 가지는 삶의 부분이 속해야 하고, 사회에는 주로 사회가 이해관계를 가지는 부분이 속해야 한다.

사회가 계약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사회적 의무를 그로부터 끌어내려고 계약을 꾸며 내는 것이 어떤 좋은 목적에도 이바지하지 않는다 해도, 사회의 보호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 이익에 대한 보답의 의무를 지며, 사회 안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각자가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 어떤 일정한 행동 노선을 지키도록 얽매여야 함을 없어서는 안 될 일로 만든다. 이 행동은 첫째로 서로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데, 더 정확히 말하면 명시적인 법 조항으로든 암묵적인 양해로든 권리로 여겨져야 하는 어떤 이익들을 해치지 않는 데 있고, 둘째로 사회나 그 구성원을 침해와 괴롭힘에서 지키는 데 드는 노동과 희생의 제 몫을(어떤 공평한 원리에 따라 정해질 몫을) 각자가 지는 데 있다. 이 조건들을 사회가 강제하는 것은 정당하며, 그 이행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 자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든 그렇다.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으로 다인 것도 아니다. 개인의 행위는 남들의 확립된 권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침해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으면서도 남들에게 해로울 수 있고, 또는 그들의 복리에 대한 마땅한 배려를 갖추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럴 때 잘못을 저지른 자는 법으로는 아니더라도 의견으로 정당하게 처벌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행동의 어느 부분이라도 남들의 이익에 불리하게 영향을 미치는 순간 사회는 그것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며, 그것에 간섭함으로써 일반의 복리가 증진될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토론에 열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행동이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의 이익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때, 또는 남들이 그러기를 좋아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필요가 없을 때에는(관계된 사람들이 모두 성년이고 보통 정도의 이해력을 지녔다고 할 때) 그런 문제를 품어 볼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 모든 경우에는 그 행위를 하고 그 결과를 감당할 완전한 자유가,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있어야 한다.

이 교설을 두고, 인간은 삶에서 서로의 행동에 관여할 일이 없으며 자기 자신의 이익이 걸리지 않는 한 서로가 잘 행하는지 잘 있는지에 마음 쓸 필요가 없다고 내세우는 이기적 무관심의 교설이라고 여긴다면 크게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남들의 좋음을 증진하려는 사심 없는 노력은 줄어들 것이 아니라 크게 늘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심 없는 선의는 사람들을 그들에게 좋은 쪽으로 설득할 도구를 채찍과 회초리 말고도, 말 그대로의 것이든 비유로서의 것이든 그런 것 말고도 찾아낼 수 있다.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덕을 낮게 볼 사람은 누구보다도 내가 아니다. 그 덕은 중요성에서 사회적인 덕에 다만 다음가며, 다음간다고 하는 것조차 맞는지 모르겠다. 그 둘을 길러 내는 것은 교육의 일로서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조차도 강제로만이 아니라 확신과 설득으로 작동하며, 교육의 시기가 지난 뒤에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덕을 심어 주어야 할 때에는 오직 앞의 것으로만 해야 한다. 인간은 서로에게, 더 나은 것을 더 못한 것과 가려내도록 도와줄 의무와 앞의 것을 고르고 뒤의 것을 피하도록 격려할 의무를 진다. 그들은 서로가 자기의 더 높은 능력을 더 많이 쓰도록, 그리고 자기의 감정과 목표를 어리석은 대상과 사색이 아니라 지혜로운 대상과 사색으로, 사람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높이는 대상과 사색으로 더 많이 향하도록 언제까지나 서로를 자극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도, 몇 사람이 모이더라도, 나이가 익은 다른 인간에게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자기 삶으로 하기로 선택한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자격은 없다. 그 자신의 행복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은 그 자신이다. 강한 개인적 애착이 있는 경우를 빼면 다른 어떤 사람이 그것에 가질 수 있는 이해관계는 그 자신이 가진 것에 비하면 하찮다. 사회가 한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가지는 이해관계는(남들에 대한 그의 행동에 관한 것을 빼면) 부분적이고 아주 간접적이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감정과 처지에 관해서라면 가장 평범한 남자나 여자라도 다른 누가 가질 수 있는 것을 헤아릴 수 없이 넘어서는 앎의 수단을 가지고 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일에서 그의 판단과 목적을 뒤집으려는 사회의 간섭은 일반적인 추정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 추정은 통째로 틀린 것일 수도 있고, 옳다 하더라도 그런 사례의 사정을 다만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이들보다 조금도 더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개별 사례에 잘못 적용될 공산이 반반이다. 그러므로 인간사의 이 영역에서 개별성은 자기에게 맞는 활동의 장을 가진다. 인간이 서로에 대해 하는 행동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예상해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일반적인 규칙이 대체로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에서는 그의 개인적 자발성이 자유롭게 행사될 자격을 가진다. 그의 판단을 도울 고려 사항과 그의 의지를 굳게 할 권고를 남들이 그에게 내놓을 수 있고, 심지어 들이밀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 심판자는 그 자신이다. 조언과 경고를 거스르고 그가 저지를 법한 모든 잘못은, 남들이 그에게 좋다고 여기는 것으로 그를 억지로 몰아가도록 허락하는 데서 오는 해로움에 견주면 훨씬 가볍다.

어떤 사람이 남들에게서 받는 감정이 그의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자질이나 결함에 조금도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가 자기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이끄는 자질 가운데 어느 것에서 뛰어나다면 그는 그만큼 감탄의 마땅한 대상이다. 그는 인간 본성의 이상적 완전함에 그만큼 더 가까이 있다. 그가 그런 자질에서 심하게 모자라다면 감탄과 반대되는 정서가 따를 것이다. 어리석음에도 어떤 정도가 있고, 이른바(이 말에 트집 잡을 데가 없지는 않지만) 취향의 저열함이나 타락에도 어떤 정도가 있어서, 그것이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하지만 그를 필연적으로 또 마땅히 언짢게 여겨지는 대상으로, 극단적인 경우에는 경멸의 대상으로까지 만든다. 반대되는 자질을 마땅한 힘으로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도 사람은 우리가 그를 바보로, 또는 낮은 등급의 존재로 판단하고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판단과 느낌은 그가 피하고 싶어 할 사실이므로, 그가 스스로를 내놓는 다른 어떤 불쾌한 결과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미리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은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다. 사실 이 호의가 지금의 통상적인 예절 관념이 허락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리낌 없이 베풀어진다면, 그리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버릇없다거나 건방지다고 여겨지지 않고 솔직하게 지적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여러 가지로 어떤 사람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의견에 따라 행동할 권리를 가지는데, 그의 개별성을 누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행사하는 것으로서 그렇다. 예를 들어 우리는 그와 교제하기를 구해야 할 의무가 없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피할 권리가 있다(피한다는 것을 내놓고 과시할 권리는 없지만). 우리에게 가장 마음에 맞는 교제를 고를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본보기나 대화가 그와 어울리는 이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칠 법하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남들에게 그를 조심하라고 경고할 권리가 있고 어쩌면 그렇게 할 의무도 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호의를 베풀 때 우리는 그보다 남들을 앞세울 수 있다. 다만 그의 향상에 이바지하는 호의는 예외다. 이런 여러 가지로 사람은 곧바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잘못 때문에 남들의 손에서 아주 심한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 벌을 받는 것은 그것이 그 잘못 자체의 자연스러운, 이른바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인 한에서일 뿐이고, 처벌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내려지기 때문이 아니다. 무분별함과 고집과 자만을 드러내는 사람, 알맞은 살림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 해로운 방종을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 감정과 지성의 즐거움을 희생시키며 동물적 즐거움을 좇는 사람은 남들의 의견에서 낮추어지고 그들의 호의적인 정서를 덜 받게 되리라고 예상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사회적 관계에서 남다른 뛰어남으로 그들의 호의를 얻을 만했고 그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으로는 영향받지 않는, 그들의 호의를 받을 자격을 세워 두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것을 두고 불평할 권리가 없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하다. 남들의 부정적인 판단에서 엄격히 떼어 낼 수 없는 불편함이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좋은 것에 관계되면서도 남들과의 관계에서 남들의 이익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자기 행동과 성격의 그 부분 때문에 사람이 겪어야 할 유일한 것이다.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전혀 다른 처우를 요구한다. 그들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 자기 자신의 권리로 정당화되지 않는 손실이나 손해를 그들에게 입히는 것, 그들을 대할 때 거짓과 표리부동을 쓰는 것, 그들보다 나은 처지를 불공정하거나 야박하게 쓰는 것, 침해받는 그들을 지켜 주지 않고 이기적으로 물러나 있는 것까지도, 이런 것들은 도덕적 비난의, 그리고 중대한 경우에는 도덕적 응보와 처벌의 알맞은 대상이다. 그리고 이 행위들만이 아니라 그 행위로 이끄는 성향도 제대로 말해 비도덕적이며, 혐오에까지 이를 수 있는 못마땅함의 알맞은 대상이다. 잔인한 성향, 악의와 심술, 모든 격정 가운데 가장 반사회적이고 가장 밉살스러운 것인 질투, 속마음을 감추는 것과 진실하지 못함, 넉넉한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것과 도발에 걸맞지 않게 큰 원한, 남을 위에서 누르기를 좋아하는 것, 자기 몫보다 더 많은 이득을 독차지하려는 욕심(그리스인이 말한 πλεονεξία1), 남을 낮추는 데서 만족을 얻는 교만, 자기와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모든 의심스러운 문제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결정하는 이기심, 이런 것들은 도덕적 악덕이고 나쁘고 밉살스러운 도덕적 성격을 이룬다. 앞에서 말한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잘못과는 다르니, 그 잘못은 제대로 말해 비도덕이 아니고 어느 정도까지 치닫든 사악함을 이루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만큼의 어리석음이든, 또는 개인적 품위와 자존의 결여든 그것의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남들에 대한 의무를 어기는 일이 그 안에 들어 있을 때뿐이고, 개인이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은 바로 그 남들 때문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라고 불리는 것은 사정이 그것을 동시에 남들에 대한 의무로 만들지 않는 한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라는 말이 신중함 이상의 무엇을 뜻할 때, 그것은 자존이나 자기 발달을 뜻한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사람은 자기 동료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 가운데 어느 것에 대해서도 그가 그들에게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인류에게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중함이나 개인적 품위의 결함 때문에 사람이 마땅히 받게 되는 존중의 상실과, 남들의 권리를 침해한 죄 때문에 그에게 돌아가야 할 비난 사이의 구별은 이름만의 구별이 아니다. 그가 우리에게 그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일에서 우리를 언짢게 하는지, 아니면 그런 권리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일에서 언짢게 하는지에 따라 그에 대한 우리의 감정에도 우리의 행동에도 엄청난 차이가 생긴다. 그가 우리를 언짢게 하면 우리는 우리의 언짢음을 표현할 수 있고, 우리를 언짢게 하는 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에게서도 멀찍이 떨어져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자기 잘못의 벌을 이미 다 치르고 있거나 치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칠 것이다. 그가 잘못 다루어 자기 삶을 망친다면 우리는 그 때문에 그 삶을 더욱 망쳐 놓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며, 그를 벌하고 싶어 하기보다는 그의 행동이 그에게 가져오게 되는 해로움을 그가 어떻게 피하거나 고칠 수 있는지 보여 주어 그의 벌을 덜어 주려고 애쓸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딱하게 여겨지는 대상일 수 있고 어쩌면 싫어지는 대상일 수도 있으나, 노여움이나 원한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는 그를 사회의 적처럼 다루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 관심이나 걱정을 보이며 선의로 끼어들지 않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정당하다고 여길 최악의 조치는 그를 그 자신에게 맡겨 두는 것이다. 그가 자기 동료들을 개별로든 전체로든 보호하는 데 필요한 규칙을 어겼다면 사정은 아주 다르다. 그럴 때 그의 행위가 낳는 나쁜 결과는 그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고 남들에게 떨어진다. 그리고 사회는 모든 구성원의 보호자로서 그에게 되갚아야 하고, 처벌한다는 뚜렷한 목적으로 그에게 고통을 주어야 하며, 그 고통이 넉넉히 혹독한지 살펴야 한다. 앞의 경우에 그는 우리 법정에 선 범법자이고, 우리는 그를 재판하는 자리에 앉는 것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우리 자신의 판결을 집행하도록 요구받는다. 뒤의 경우에 그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며, 우리가 그에게 그 자신의 일에서 허락하는 것과 똑같은 자유를 우리 자신의 일을 정리하는 데 쓰는 데서 우연히 따라올 수 있는 것만이 예외다.

어떤 사람의 삶에서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부분과 남들에게 관계되는 부분 사이에 여기서 그어 놓은 구별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사회의 한 구성원이 하는 행동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다른 구성원들에게 아무래도 좋은 일일 수 있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완전히 외따로 떨어진 존재인 사람은 없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심각하게 또는 영구히 해로운 일을 하면서 그 폐해가 적어도 가까운 인연들에게 미치지 않기란 불가능하고, 그 폐해는 자주 그들보다 훨씬 멀리까지 미친다. 그가 자기 재산을 해치면 그 재산에서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도움을 얻던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보통 공동체의 일반 자원을 많든 적든 줄인다. 그가 자기 몸이나 마음의 능력을 무너뜨리면, 자기 행복의 얼마쯤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던 모든 이에게 해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동료들 일반에게 지고 있는 봉사를 할 자격을 스스로 잃고, 어쩌면 그들의 애정이나 선의에 짐이 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아주 흔하다면, 저질러지는 어떤 죄도 좋음의 일반 총량을 그보다 더 많이 깎아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끝으로, 사람이 자기 악덕이나 어리석음으로 남들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해도 그는 그럼에도 자기 본보기로 해를 끼치는 것이니, 그의 행동을 보거나 알게 되어 물들거나 잘못 이끌릴 수 있는 이들을 위하여 스스로를 통제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잘못된 행동의 결과가 악덕에 빠진 개인이나 생각 없는 개인에게만 가둬질 수 있다 하더라도, 스스로를 이끌기에 뚜렷이 알맞지 않은 이들을 사회가 그들 자신의 이끎에 내버려 두어야 하겠느냐고 덧붙일 것이다. 아이들과 미성년자를 그들 자신으로부터 지켜 주는 보호가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한다면,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그와 똑같이 없는 성년의 사람들에게도 사회가 그것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똑같이 지지 않겠는가? 도박이나 술 취함이나 절제 없음이나 게으름이나 더러움이 법으로 금지된 행위의 많은 것 또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행복에 해롭고 향상에 그만큼 큰 걸림돌이라면, 법이 실행 가능성과 사회적 편의에 어긋나지 않는 한 이런 것들도 억누르려고 애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리고 법의 피할 수 없는 불완전함을 보태어 채우는 것으로서, 적어도 의견이 이 악덕들에 맞서는 강력한 감시를 조직하고 그것을 행한다고 알려진 이들에게 사회적 벌을 엄하게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는 개별성을 제한하거나 삶에서 새롭고 독창적인 실험을 시도하는 것을 막는 문제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막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지금까지 시도되고 유죄로 판정되어 온 것들, 어느 누구의 개별성에도 유용하거나 알맞지 않다는 것을 경험이 보여 준 것들뿐이다. 도덕적 진리나 신중함에 관한 진리가 확립된 것으로 여겨질 만한 어느 정도의 시간과 경험의 양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바라는 것은 다만 세대를 이어 가며 앞선 이들에게 치명적이었던 바로 그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끼치는 폐해가 그와 가까이 얽힌 이들에게, 그들의 공감을 통해서도 그들의 이익을 통해서도 심각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더 작은 정도로는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온전히 인정한다. 이런 종류의 행동으로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에 대한 분명하고 지목할 수 있는 의무를 어기게 될 때, 그 경우는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부류에서 벗어나 그 말의 제대로 된 뜻에서 도덕적 못마땅함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무절제나 낭비 때문에 빚을 갚을 수 없게 되거나, 가족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떠맡은 뒤에 같은 이유로 그들을 먹여 살리거나 가르칠 수 없게 된다면, 그는 마땅히 비난받고 정당하게 처벌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이나 채권자에 대한 의무를 어긴 것 때문이고 낭비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바쳐졌어야 할 재원이 가장 신중한 투자를 하려고 그들에게서 돌려졌다 해도 도덕적 죄책은 똑같았을 것이다. 조지 반웰2은 정부(情婦)에게 줄 돈을 얻으려고 삼촌을 죽였지만, 장사를 시작하려고 그렇게 했다 해도 마찬가지로 교수형을 당했을 것이다. 또 나쁜 버릇에 빠져 가족에게 슬픔을 안기는 사람의 흔한 경우에, 그는 몰인정하거나 은혜를 모른다고 꾸짖음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악덕이 아닌 버릇을 기르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그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나 개인적 인연으로 편안함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괴로운 것이라면 그는 그런 꾸짖음을 받을 수 있다. 더 절박한 어떤 의무에 밀린 것도 아니고 허용될 수 있는 자기 우선으로 정당화되는 것도 아닌데 남들의 이익과 감정에 일반적으로 마땅한 배려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못함 때문에 도덕적 못마땅함의 대상이 되지만, 그 못함의 원인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으로 멀찍이 이끌었을지 모르는, 다만 자기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잘못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동으로 대중에 대해 자기에게 맡겨진 어떤 분명한 의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사회적 죄를 지은 것이다. 다만 술에 취했다는 것만으로 처벌되어야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군인이나 경찰관은 근무 중에 술에 취한 것으로 처벌되어야 한다. 요컨대 개인에게든 대중에게든 분명한 손해가 있거나 손해의 분명한 위험이 있을 때마다, 그 경우는 자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도덕이나 법의 영역에 놓인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의무를 어기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 말고 지목할 수 있는 어떤 개인에게 알아볼 만한 상처를 입히는 것도 아닌 행동으로 사람이 사회에 일으키는, 단지 우발적인, 또는 이른바 추정적(推定的) 손상에 관해서라면, 그 불편은 인간 자유라는 더 큰 좋음을 위하여 사회가 감당할 만한 것이다. 다 자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것으로 처벌받아야 한다면, 나로서는 사회가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내세우지도 않는 이익을 사회에 줄 능력을 그들이 해치지 못하게 막는다는 구실 아래 그러는 것보다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러는 편이 낫겠다. 그러나 사회가 자기의 더 약한 구성원들을 이성적 행동의 통상적 기준까지 끌어올릴 수단이, 그들이 무언가 비이성적인 일을 하기를 기다린 다음 그것 때문에 법으로든 도덕으로든 그들을 처벌하는 것 말고는 없다는 듯이 이 문제를 논하는 데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사회는 그들의 존재의 이른 부분 내내 그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에게는 삶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그들에게 갖추어 줄 수 있는지 시험해 볼 어린 시절과 미성년의 온 기간이 있었다. 지금 있는 세대는 다가올 세대의 훈련과 그 전체 사정의 주인이다. 물론 그들을 완전히 지혜롭고 선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자기 자신이 선함과 지혜에서 그토록 한심하게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최선의 노력이 개별 사례에서 늘 가장 성공한 노력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자라나는 세대를 전체로서 자기만큼 선하게, 그리고 자기보다 조금 더 선하게 만드는 일은 완전히 잘 할 수 있다. 사회가 자기 구성원 가운데 상당한 수를 멀리 있는 동기를 이성적으로 헤아리는 것에 움직여지지 못하는 한갓 아이로 자라게 내버려 둔다면, 그 결과는 사회가 자기 자신을 탓할 일이다. 교육의 모든 힘으로만이 아니라 통용되는 의견의 권위가 스스로 판단하기에 가장 알맞지 않은 마음들에 언제나 행사하는 우세로 무장하고 있고, 자기를 아는 이들의 언짢음이나 경멸을 받게 된 사람에게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자연스러운 벌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사회는 이 모든 것 말고도 개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에서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강제할 권력까지 필요하다고 내세우지 말라. 그런 일에서는 정의와 정책의 모든 원리에 따라 결정이 그 결과를 감당할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어야 한다. 게다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더 나은 수단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헛되게 만드는 데, 더 못한 수단에 의지하는 것보다 더 크게 이바지하는 것은 없다. 신중함이나 절제로 억지로 몰아가려는 이들 가운데 활력 있고 독립적인 성격이 만들어지는 재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그 멍에에 반항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남들이 그들 자신에게 관계되는 일에서 자기가 그들을 해치지 못하게 막을 권리를 가지는 것처럼 자기에게 관계되는 일에서 자기를 통제할 권리도 가진다고는 결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로챈 권위에 정면으로 맞서고 그것이 명하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을 보란 듯이 하는 것이 기개와 용기의 표시로 여겨지기가 쉬워진다. 청교도3의 광신적인 도덕적 불관용에 뒤이어 찰스 2세 시대에 나타난 상스러움의 유행이 그러하였다. 악덕에 빠진 자나 방종한 자가 남들에게 보이는 나쁜 본보기로부터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에 관해서라면, 나쁜 본보기가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특히 잘못을 저지른 자가 벌을 받지 않은 채로 남들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본보기가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남들에게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행위자 자신에게는 큰 해를 끼친다고 여겨지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이들이 그 본보기가 전체로 보아 해롭기보다는 이롭기 마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하겠다. 그 본보기가 잘못된 행동을 드러내 보인다면, 그 행동이 정당하게 비난받는 것이라면 모든 경우 또는 대부분의 경우에 그 행동에 따라온다고 여겨져야 하는 괴롭거나 사람을 낮추는 결과도 함께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 자신에 관한 행동에 대중이 간섭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논거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은 이러하다. 대중이 실제로 간섭할 때에는 잘못 간섭하고 잘못된 자리에 간섭할 공산이 크다. 사회적 도덕의 문제, 곧 남들에 대한 의무의 문제에서는 대중의 의견, 곧 압도하는 다수의 의견이 자주 틀리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옳을 법하다. 그런 문제에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판단하는 것뿐이고, 어떤 행동 양태가 행해지도록 허락되었을 때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를 판단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동의 문제에서 소수에게 법으로 들씌워지는 그와 같은 다수의 의견은 옳을 만큼이나 틀릴 법하다. 이런 경우에 여론이 뜻하는 것은 잘 봐주어야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에 대해 가지는 의견일 뿐이고, 아주 자주 그것조차 뜻하지 못한다. 대중은 자기가 비난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의 즐거움이나 편의를 아주 완전한 무관심으로 지나쳐 버리고 자기 자신의 취향만을 헤아린다. 자기가 싫어하는 어떤 행동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침해로 여기고 자기 감정에 대한 모욕이라고 분개하는 이들이 많다. 종교적 편협에 빠진 자가 남들의 종교적 감정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그들이 그 가증스러운 예배나 신조를 고집함으로써 자기 감정을 무시하고 있다고 되받아치는 일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의견에 대해 사람이 가지는 감정과, 그가 그 의견을 가진다는 데 기분이 상한 다른 사람의 감정 사이에는 대등함이 없다. 도둑이 지갑을 가져가고 싶어 하는 것과 정당한 주인이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것 사이에 대등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람의 취향은 그의 의견이나 그의 지갑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에게만 고유하게 관계되는 일이다. 확실하지 않은 모든 일에서 개인들의 자유와 선택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두며 보편적 경험이 유죄로 판정한 행동 양태만을 삼가라고 요구하는 이상적인 대중을 머릿속에 그리기는 누구에게나 쉽다. 그러나 자기의 감시에 그런 한계를 정해 놓은 대중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가? 대중이 언제 보편적 경험을 두고 스스로 애를 쓴 적이 있는가? 개인 자신에 관한 행동에 간섭할 때 대중이 생각하는 것은 자기와 다르게 행동하거나 느끼는 것이 얼마나 괘씸한가 하는 것 말고는 거의 없다. 그리고 얄팍하게 가려진 이 판단 기준이 모든 도덕론자와 사변적 저술가의 10분의 9에 의해 종교와 철학의 명령으로 인류 앞에 치켜들려 있다. 그들은 어떤 것이 옳은 까닭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그렇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우리 자신과 다른 모든 이를 얽매는 행동의 법을 우리 자신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찾으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딱한 대중이 이 지시를 적용해서, 좋음과 나쁨에 대한 자기 자신의 개인적 감정이 어지간히 만장일치를 이루고 있다면 그것을 온 세상에 강제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가리킨 해로움은 이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대 이 나라의 대중이 자기 자신의 취향에 도덕법의 성격을 부당하게 입히는 사례들을 내가 하나하나 밝혀 주기를 어쩌면 기대할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있는 도덕 감정의 일탈에 관한 논설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곁들여서, 그리고 예시로 논의되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다. 그렇지만 내가 내세우는 원리가 중대하고 실제적인 무게를 지닌다는 것, 그리고 내가 상상 속의 해로움에 맞서 장벽을 세우려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보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른바 도덕적 감시의 경계를 개인의 가장 의심할 것 없이 정당한 자유를 침범할 때까지 넓히는 것이 모든 인간 성향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에 든다는 것을, 넉넉한 사례로 보이기는 어렵지 않다.

첫 사례로, 자기와 종교적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종교적 의례를, 특히 자기네 종교적 금기를 지키지 않는다는 것 말고는 나을 바 없는 근거로 사람들이 품는 반감을 생각해 보라. 꽤 사소한 보기를 들면, 무슬림4가 그리스도교도에게 품는 미움을 돋우는 데 그리스도교도의 신조나 관행 가운데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사실보다 더 크게 이바지하는 것은 없다. 무슬림이 허기를 달래는 이 특정한 양태를 바라보는 것보다 더 꾸밈없는 역겨움으로 그리스도교도와 유럽인이 바라보는 행위는 거의 없다. 그것은 첫째로 그들의 종교를 거스르는 죄다. 그러나 이 사정은 그들의 거부감의 정도도 종류도 결코 설명해 주지 못한다. 포도주도 그들의 종교가 금하고 있고 그것을 마시는 것은 모든 무슬림이 잘못으로 여기지만 역겨운 것으로는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부정한 짐승」의 고기에 대한 그들의 반감은 본능적인 반감을 닮은 그 독특한 성격을 지니는데, 부정함이라는 관념이 한번 감정 속에 깊이 가라앉으면 자기 개인의 습관이 꼼꼼하게 깨끗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이들에게조차 언제나 그런 반감을 일으키는 듯하고, 힌두교도5에게 그토록 격렬한 종교적 부정함의 정서가 그 놀라운 보기다. 이제 다수가 무슬림인 어떤 인민 가운데서 그 다수가 나라의 경계 안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고집한다고 생각해 보자. 이슬람교 나라들에서 이것은 조금도 새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6 그것은 여론의 도덕적 권위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것일까? 만일 아니라면 왜 아닌가? 그 관행은 그런 대중에게 정말로 구역질나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그것이 신에게 금지되고 혐오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 금지를 종교적 박해라고 비난할 수도 없다. 그것은 그 기원에서는 종교적일지 모르지만 종교 때문의 박해는 아닐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의무로 삼는 종교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이다. 버텨 낼 수 있는 유일한 비난의 근거는, 개인들의 개인적 취향과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일에 대중이 간섭할 일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조금 더 가까운 데로 오면, 스페인 사람 다수는 로마 가톨릭이 아닌 다른 어떤 길로 최고 존재를 예배하는 것을 심한 불경으로, 그 존재를 가장 높은 정도로 거스르는 일로 여긴다. 그리고 스페인 땅에서 다른 어떤 공적 예배도 합법이 아니다. 남유럽 전체의 인민은 혼인한 성직자를 불경할 뿐 아니라 부정하고 무례하고 상스럽고 역겨운 것으로 본다. 개신교도는 이 완전히 진심인 감정과, 그것을 가톨릭이 아닌 이들에게 강제하려는 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지만 남들의 이익에 관계되지 않는 일에서 인류가 서로의 자유에 간섭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어떤 원리로 이 경우들을 앞뒤 맞게 빼놓을 수 있겠는가? 또 신과 사람이 보기에 추문이라고 자기가 여기는 것을 억누르고 싶어 한다고 누가 사람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개인적 비도덕으로 여겨지는 것을 금지하는 데에, 이 관행들을 불경으로 여기는 이들의 눈에 그것을 억누르는 근거로 세워진 것보다 더 강한 근거를 보일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박해자의 논리를 받아들여 우리는 옳으므로 남들을 박해해도 되고 그들은 틀렸으므로 우리를 박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뜻이 없다면,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면 심한 부정의라고 우리가 분개할 원리를 인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앞의 사례들에 대해, 부당하기는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에서 끌어온 것이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이 나라에서 의견이 고기를 삼가도록 강제할 법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자기 신조나 성향에 따라 예배하는 것이나 혼인하거나 혼인하지 않는 것을 두고 간섭할 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보기는 우리가 그 위험을 결코 다 지나오지 못한 자유에 대한 간섭에서 가져오겠다. 뉴잉글랜드에서 그러했고 공화국 시대의 영국에서 그러했듯이, 청교도가 넉넉히 강력했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들은 모든 공적 오락과 거의 모든 사적 오락을 눌러 없애려고 애썼고 상당히 성공했다. 특히 음악과 춤과 공개 경기, 또는 소일을 목적으로 하는 다른 모임과 연극이 그러했다. 이 나라에는 그 도덕 관념과 종교 관념에 따르면 이 오락들이 유죄로 판정되는 사람들의 큰 집단이 아직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로 이 왕국의 지금의 사회적 정치적 상태에서 우세한 힘인 중간 계급에 속해 있으므로, 이런 정서를 지닌 사람들이 언젠가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공동체의 나머지 부분은 자기에게 허락될 오락이 더 엄격한 칼뱅주의자와 감리교도의 종교적 도덕적 정서로 규제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들은 상당히 단호하게, 남의 일에 끼어드는 이 경건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기 일이나 신경 쓰라고 하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자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즐거움은 누구도 누려서는 안 된다고 내세우는 모든 정부와 모든 대중에게 해 주어야 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세우는 원리가 인정된다면, 그것이 나라의 다수나 그 밖에 우세한 힘의 뜻대로 행해지는 데 누구도 이치에 맞게 반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한 신앙 고백이 잃은 땅을 되찾는 데 언젠가 성공한다면, 쇠퇴한다고 여겨지던 종교가 그토록 자주 그렇게 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니, 모든 사람은 뉴잉글랜드의 초기 정착민이 이해한 그리스도교 공화국의 관념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 하나의 있을 수 있는 일을, 어쩌면 마지막에 말한 것보다 실현될 법한 일을 머릿속에 그려 보자. 민중적인 정치 제도를 동반하든 그렇지 않든, 근대 세계에 사회의 민주적 구성을 향한 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이 경향이 가장 완전하게 실현된 나라, 곧 사회도 정부도 가장 민주적인 나라인 미국에서는, 자기가 겨루기를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번쩍거리거나 더 비싼 생활 양식의 겉모습이 나타나면 그것을 언짢게 여기는 다수의 감정이 어지간히 효력 있는 사치 금지법으로 작동하며, 연방의 많은 곳에서는 아주 큰 소득을 가진 사람이 민중의 못마땅함을 사지 않으면서 그것을 쓸 길을 찾기가 정말로 어렵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지금 있는 사실을 나타낸 것으로는 의심할 것 없이 많이 부풀려진 것이지만, 그것이 묘사하는 사태는 개인들이 자기 소득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 대중이 거부권을 가진다는 관념과 결합한 민주적 감정의, 생각할 수 있고 있을 수 있는 결과일 뿐 아니라 있을 법한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회주의 의견이 상당히 널리 퍼진다고 더 가정하기만 하면, 아주 적은 어떤 액수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는 것이나 손으로 하는 노동으로 벌지 않은 소득을 가지는 것이 다수의 눈에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원리에서 이와 비슷한 의견이 이미 장인 계급 사이에 널리 퍼져 있고, 주로 그 계급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이들, 곧 그 계급 자신의 구성원들을 억누르며 짓누른다. 많은 산업 부문에서 직공의 다수를 이루는 솜씨 나쁜 일꾼들이, 솜씨 나쁜 일꾼도 솜씨 좋은 일꾼과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하고 성과급으로든 다른 것으로든 누구도 남들이 그것 없이 벌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뛰어난 솜씨나 부지런함으로 벌도록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단호히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솜씨 좋은 일꾼이 더 유용한 봉사에 대해 더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을, 그리고 고용주가 그것을 주는 것을 막으려고 도덕적 감시를 쓰는데, 그 감시는 때때로 물리적인 것이 된다. 대중이 사적인 일에 어떤 관할권을 가진다면, 나는 이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다고도, 어떤 개인의 특정한 대중이 일반 대중이 사람들 일반에 대해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권위를 그 개인의 행동에 대해 주장한다고 탓할 수 있다고도 보지 못하겠다.

그러나 가정으로 꾸며 낸 경우에 오래 머물지 않더라도, 우리 시대에 사생활의 자유에 대한 심한 월권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고, 더 심한 월권이 성공하리라는 어느 정도의 기대와 함께 위협으로 다가와 있으며, 대중에게 무제한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들이 제기되어 있다. 곧 자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법으로 금지할 권리만이 아니라, 자기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다다르려고 자기도 무해하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얼마든지 금지할 권리까지 있다는 주장이다.

무절제를 막는다는 이름 아래, 잉글랜드의 어느 식민지 하나와 미국의 거의 절반의 인민이 의료 목적을 빼고는 발효 음료를 어떤 용도로도 쓰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 판매의 금지는 사실상, 그리고 의도한 대로, 그 사용의 금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법을 집행하는 것이 실행 불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그 법을 채택했던 여러 주에서, 그 법의 이름이 나온 주까지 포함해 그것이 폐지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나라에서 비슷한 법을 밀어붙이려는 시도가 시작되었고 자칭 박애주의자 다수가 상당한 열성으로 그것을 추진하고 있다. 이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그 단체, 곧 스스로 「동맹」7이라 부르는 그것은, 그 간사와, 정치가의 의견이 원리에 근거해야 한다고 여기는 아주 드문 잉글랜드 공인 가운데 한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가 공개되면서 어느 정도 악명을 얻었다. 이 편지에서 스탠리 경이 맡은 몫은, 그가 공적으로 나선 몇몇 자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은 자질이 정치 생활에서 두드러지는 이들 사이에서 불행히도 얼마나 드문지 아는 사람들이 이미 그에게 걸어 놓은 희망을 굳혀 줄 만하다. 「편협과 박해를 정당화하는 데 비틀어 쓰일 수 있는 어떤 원리가 인정되는 것을 깊이 한탄하겠다」는 그 동맹의 대변자는, 그런 원리를 이 단체의 원리로부터 가르는 「넓고 건널 수 없는 장벽」을 짚어 보이겠다고 나선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과 의견과 양심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는 내가 보기에 입법의 영역 밖에 있다. 사회적 행위와 습관과 관계에 딸린 모든 것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 자체에 주어진 재량권에만 종속되는 것으로서 그 영역 안에 있다.」 이 둘 가운데 어느 것과도 다른 제3의 부류, 곧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행위와 습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발효 술을 마시는 행위가 속하는 것은 분명히 이 부류인데도 그렇다. 그렇지만 발효 술을 파는 것은 장사이고 장사는 사회적 행위다. 그러나 문제 삼아 항의되는 침해는 파는 자의 자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고 소비하는 자의 자유에 대한 것이다. 국가가 그에게 포도주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일부러 만드는 것이나 그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간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민으로서, 나의 사회적 권리가 다른 사람의 사회적 행위로 침해될 때마다 입법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제 이 「사회적 권리」의 정의를 보자. 「무엇이든 나의 사회적 권리를 침해한다면 독한 술의 거래가 분명히 그렇게 한다. 그것은 사회적 무질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자극함으로써 나의 첫째 권리인 안전의 권리를 무너뜨린다. 그것은 내가 세금을 내어 떠받치고 있는 비참을 만들어 내는 데서 이익을 얻음으로써 나의 평등의 권리를 침해한다. 그것은 내가 가는 길을 위험으로 둘러싸고, 내가 서로 돕고 오가기를 요구할 권리가 있는 사회를 약하게 하고 그 기강을 무너뜨림으로써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 자유롭게 발달할 나의 권리를 막는다.」 「사회적 권리」의 이론이라니, 이런 것이 전에는 아마 뚜렷한 말로 나온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말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라 이러하다. 다른 모든 개인이 모든 면에서 정확히 마땅히 해야 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모든 개인의 절대적인 사회적 권리이며, 누구든 아주 작은 세부에서라도 그러지 못하면 나의 사회적 권리를 어기는 것이고 그로써 내가 입법부에 그 고충을 없애 달라고 요구할 자격을 얻게 된다. 이토록 괴물 같은 원리는 자유에 대한 어떤 개별적인 간섭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그것이 정당화하지 못할 자유의 침해는 없다. 그것은 어떤 자유에 대한 권리도, 어쩌면 의견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에만 품을 자유를 빼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해롭다고 여기는 의견이 누구의 입에서든 나오는 순간, 그것은 그 동맹이 나에게 돌린 모든 「사회적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이다. 이 교설은 인류 모두에게 서로의 도덕적 지적 완전함, 심지어 신체적 완전함에 대한 기득 이익을 돌리며, 그 완전함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기준에 따라 정의하게 된다.

개인의 정당한 자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의 또 하나의 중요한 보기로, 다만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승리를 거두며 실행된 것이 안식일 엄수 입법8이다. 삶의 절박한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 주에 하루는 평소의 일과를 삼가는 것이, 유대인을 빼면 누구에게도 종교적으로 얽매는 힘이 조금도 없다 하더라도 매우 유익한 관습임에는 의심이 없다. 그리고 이 관습은 근면한 계급들 사이에 그렇게 하자는 일반적인 합의 없이는 지켜질 수 없으므로, 어떤 사람들이 일함으로써 남들에게 같은 필요를 들씌울 수 있는 한, 법이 특정한 날에 산업의 더 큰 활동을 멈추게 하여 각자에게 남들이 그 관습을 지킬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허용될 만하고 옳은 일일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이 그 관행을 지키는 데 남들이 가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근거한 이 정당화는, 사람이 자기 여가를 쓰기에 알맞다고 생각할 수 있는 스스로 고른 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오락에 대한 법적 제한에 대해서도 그것은 조금도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의 오락이 다른 이들의 그날의 일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유익한 휴식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즐거움만으로도, 그 일이 자유롭게 선택되고 자유롭게 그만둘 수 있는 것이라면 몇 사람의 노동에 값한다. 모두가 일요일에 일한다면 엿새 임금으로 이레의 일을 내주어야 할 것이라고 직공들이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옳다. 그러나 일자리의 큰 덩어리가 멈추어 있는 한, 남들의 즐거움을 위해 그래도 일해야 하는 적은 수의 사람은 그에 비례해 늘어난 벌이를 얻는다. 그리고 그들이 보수보다 여가를 더 좋아한다면 그 일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더 나은 해결책을 찾는다면, 그 특정한 계급의 사람들을 위해 한 주의 다른 어느 날에 쉬는 날을 관습으로 세우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요일의 오락에 대한 제한을 옹호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것이 종교적으로 잘못이라는 것일 수밖에 없으니, 이는 입법의 동기로서 아무리 간절히 항의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Deorum injuriæ Diis curæ.」9 사회나 그 관리 가운데 누구라도, 우리 동료들에게 저지른 잘못이 아니면서 전능자를 거슬렀다고 여겨지는 죄를 갚아 줄 위임을 높은 곳에서 받았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신앙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한 사람의 의무라는 관념은 여태 저질러진 모든 종교적 박해의 토대였고, 그것이 인정된다면 그 박해들을 온전히 정당화할 것이다. 일요일에 철도 여행을 멈추게 하려는 되풀이되는 시도에서, 박물관을 여는 데 저항하는 데서, 그리고 그와 같은 것에서 터져 나오는 감정에 옛 박해자의 잔인함은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리키는 마음 상태는 근본에서 같다. 그것은 남들이 자기 종교가 허락하는 일을 하는 것을, 박해자의 종교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것은 신이 잘못 믿는 자의 행위를 혐오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그를 건드리지 않고 두면 우리를 죄 없다고 보아 주지 않으리라는 믿음이다.

인간의 자유를 흔히 이토록 하찮게 여긴다는 이 보기들에, 이 나라의 언론이 모르몬교10라는 놀라운 현상을 다루어야 한다고 느낄 때마다 터져 나오는 노골적인 박해의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새 계시라고 주장되는 것과 그 위에 세워진 종교, 곧 뻔히 보이는 속임수의 산물이며 그 창시자에게 있는 남다른 자질의 명망으로 떠받쳐지지도 않은 것이 신문과 철도와 전신의 시대에 수십만 명에게 믿어지고 한 사회의 토대가 되었다는 예상 밖의, 그리고 가르침을 주는 사실을 두고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은 이러하다. 이 종교도 다른 더 나은 종교들처럼 순교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예언자이자 창시자가 자기 가르침 때문에 군중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 그를 따르던 다른 이들도 같은 무법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그들이 처음 자라난 나라에서 한 무리로 힘에 밀려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사막 가운데 외딴 은거지로 내몰린 지금, 이 나라의 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원정군을 보내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도록 힘으로 강요하는 것이 옳다고(다만 그것이 편하지 않을 뿐이라고) 내놓고 선언한다. 이렇게 종교적 관용의 통상적인 억제를 뚫고 나오는 반감을 가장 크게 자극하는 모르몬교도 교설의 조항은 일부다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슬림과 힌두교도와 중국인에게는 허락되어 있으면서도, 영어를 말하고 자기가 일종의 그리스도교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행할 때에는 꺼지지 않는 적의를 일으키는 듯하다. 이 모르몬교의 제도를 나보다 더 깊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다른 이유들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자유의 원리로 조금이라도 옹호되기는커녕 그 원리를 곧바로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공동체의 절반에게 채워진 사슬을 더 단단히 죄어 박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을 그 절반에 대한 의무의 상호성에서 풀어 주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 관계는 그 안에 있는, 그리고 그것으로 고통받는다고 볼 수 있는 여자들 쪽에서 보아도 혼인 제도의 다른 어떤 형태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아무리 놀랍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세상의 통상적인 관념과 관습에서 설명을 얻는다. 여자에게 혼인이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그 관념과 관습이, 많은 여자가 아예 아내가 되지 못하는 것보다 여러 아내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다른 나라들에게 그런 결합을 인정하라거나 모르몬교도의 의견을 이유로 자기 주민의 어느 부분을 자기 나라 법에서 풀어 주라고 요구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이견을 가진 이들이 남들의 적대적인 정서에 정당하게 요구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양보했고, 자기네 교설이 받아들여지지 않던 나라를 떠나 자기들이 처음으로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든 지구의 먼 구석에 자리를 잡았을 때, 그들이 다른 국민에게 어떤 침략도 하지 않고 자기네 방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떠날 완전한 자유를 허락한다면, 그들이 거기서 자기가 원하는 법 아래 사는 것을 횡포의 원리 말고 어떤 원리로 막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몇몇 점에서 상당한 값어치를 지닌 근래의 어떤 저술가는, 자기가 보기에 문명에서 뒷걸음질인 것을 끝내려고 이 일부다처 공동체에 맞서 (그 자신의 말을 쓰면) 십자군이 아니라 문명군11을 일으키자고 제안한다. 나에게도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어떤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에게 문명화되기를 강요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다. 나쁜 법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다른 공동체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그들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이 나서서,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이가 만족하고 있는 듯한 사태를 몇천 마일 떨어져 있고 그 일에 아무 몫도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추문이 된다는 이유로 끝내라고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러고 싶다면 그것에 반대하여 설교할 선교사를 보내게 하라. 그리고 어떤 공정한 수단으로든(가르치는 이들의 입을 막는 것은 그런 수단이 아니다) 자기네 인민 사이에서 비슷한 교설이 퍼져 나가는 것에 맞서게 하라. 야만이 세상을 혼자 차지하고 있을 때에 문명이 야만을 이겨 냈다면, 야만이 제대로 눌린 뒤에 되살아나 문명을 정복할까 두렵다고 내세우는 것은 지나치다. 이렇게 자기가 무찌른 적에게 무너질 수 있는 문명이라면, 그 문명은 먼저 그렇게까지 타락해서 그것이 세운 사제와 교사도, 다른 누구도 그것을 위해 일어설 능력이 없거나 그 수고를 하려 하지 않게 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런 문명은 물러나라는 통고를 빨리 받으면 받을수록 좋다. 그것은 활력 있는 야만인들에게(서로마 제국12이 그랬듯이) 파괴되고 다시 태어날 때까지 나쁜 데서 더 나쁜 데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주

  1. 1. 옮긴이 주. 원문 the πλεονεξἱα [Greek: pleonexia] of the Greeks.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는 자기 몫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을 뜻하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정의를 논할 때 쓴 말이다. 저본의 대괄호 안 로마자 표기는 전자 텍스트를 만들며 그리스 문자를 옮겨 적어 둔 것이므로 본문에 옮기지 않았다.

  2. 2. 옮긴이 주. 원문 George Barnwell. 조지 릴로의 희곡 《런던 상인》(1731)의 주인공으로, 정부(情婦)의 꾀임에 빠져 삼촌을 죽이고 교수형을 당하는 견습 상인이다. 밀 당대 잉글랜드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3. 3. 옮긴이 주. 원문 the Puritans. 16세기와 17세기에 잉글랜드 국교회를 더 철저히 개혁하려 한 개신교도를 가리키며, 오늘날에도 청교도로 부른다. 앞에 나온 공화국 시대(the Commonwealth)는 잉글랜드 내전 뒤 왕이 없던 1649년부터 1660년까지이고, 찰스 2세 시대는 왕정이 복고된 1660년 뒤다. 뉴잉글랜드는 청교도가 건너가 정착한 북아메리카 북동부다.

  4. 4. 옮긴이 주. 원문은 Mahomedans와 Mussulmans이고 형용사로는 Mahomedan이다. 밀 당대 영어의 표기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을 가리켰다. 오늘날 통용되는 명칭은 무슬림(Muslims) 또는 무슬림이다. 이 번역은 밀이 쓴 말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5. 5. 옮긴이 주. 원문은 Hindoos다. 밀 당대 영어의 표기로, 인도 아대륙의 힌두교 신자를 가리켰다. 오늘날 통용되는 표기는 Hindus이고 우리말로는 힌두교도다. 이 번역은 밀이 쓴 말을 그대로 옮겼다.

  6. 6. 봄베이의 파르시13 사례가 여기에 들어맞는 흥미로운 보기다. 부지런하고 진취적인 이 종족, 곧 페르시아 배화교도의 후손들이 칼리프들을 피해 고국을 떠나 인도 서부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힌두교도 군주들에게서 관용을 허락받았다. 그 지역이 나중에 이슬람교 정복자들의 지배 아래 떨어지자 파르시는 돼지고기를 삼간다는 조건으로 그들에게서 관용의 연장을 얻어 냈다. 처음에는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었던 것이 제2의 천성이 되어, 파르시는 오늘까지도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둘 다 삼간다. 그들의 종교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지만 이 이중의 금기는 그들 종족의 관습으로 자라날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동방에서 관습은 하나의 종교다.

  7. 7. 옮긴이 주. 원문 the "Alliance". 1853년에 결성된 영국 금주 동맹(United Kingdom Alliance)으로, 술의 거래를 법으로 금지할 것을 주장한 단체다. 앞에서 「그 법의 이름이 나온 주」라 한 것은 1851년에 처음 금주법을 둔 미국 메인주를 가리키며, 그래서 그 법을 메인법(Maine Law)이라 불렀다. 스탠리 경은 에드워드 헨리 스탠리(1826~1893)로, 뒤에 제15대 더비 백작이 되었다. 원문 its Secretary는 그 단체의 간사를 뜻하므로 「간사」로 옮겼다.

  8. 8. 옮긴이 주. 원문 Sabbatarian legislation. 안식일에 노동과 오락을 금하도록 한 입법을 가리킨다. 잉글랜드에서는 일요일에 적용되었으므로 일요일 규제법이라고도 한다.

  9. 9. 옮긴이 주. 라틴어로, 「신들에게 저지른 잘못은 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를 뜻한다. 타키투스 《연대기》 제1권 73장에서 온 말이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옮김을 여기 덧붙였다.

  10. 10. 옮긴이 주. 원문은 Mormonism과 Mormonite다. 1830년 미국에서 조지프 스미스가 창시한 종교와 그 신자를 가리킨다. 밀 당대 영어에서는 신자를 Mormonite로도 적었고 오늘날에는 Mormon으로 적으며, 이 교단의 지금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다. 본문에서 군중에게 죽임을 당한 창시자는 스미스(1805~1844)이고, 사막 가운데 외딴 은거지는 신자들이 1847년부터 자리를 잡은 유타의 솔트레이크 계곡이다.

  11. 11. 옮긴이 주. 원문 not a crusade, but a civilizade. 밀이 인용한 저술가가 crusade(십자군)를 본떠 만든 말로, 문명을 앞세워 일으키는 원정을 뜻한다. 우리말에 대응하는 낱말이 없으므로 「문명군」으로 옮겼다.

  12. 12. 옮긴이 주. 원문 the Western Empire. 395년 이후 둘로 갈린 로마 제국의 서쪽, 곧 476년에 무너진 서로마 제국을 가리킨다.

  13. 13. 옮긴이 주. 원문은 Parsees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피해 페르시아에서 인도 서부로 옮겨 간 조로아스터교 신자와 그 후손을 가리킨다. 오늘날 통용되는 표기는 Parsis이고 우리말로는 파르시다. 밀이 쓴 the Persian fire-worshippers는 조로아스터교 예배에서 불이 차지하는 자리를 두고 당대 영어에서 쓰인 말로, 「페르시아 배화교도」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