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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권

1 전체의 실체는 순순히 따르고 쉽게 모양을 바꾼다. 그 실체를 다스리는 이성은 해를 끼칠 까닭을 자기 안에 하나도 품고 있지 않다. 그 이성에는 악덕이 없어서 무엇에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그 때문에 해를 입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 이성에 따라 생겨나고 끝을 맺는다.

2 마땅한 일을 할 때 추위에 떨면서 하든 따뜻하게 하든, 졸면서 하든 잠을 넉넉히 자고 하든, 욕을 먹으면서 하든 칭찬을 받으면서 하든, 죽어 가면서 하든 다른 무엇을 하면서 하든 개의치 마라. 죽는 것도 삶에서 하는 일 가운데 하나다. 그러니 그 일에서도 지금 눈앞의 것을 잘 처리하면 그것으로 넉넉하다.

3 안을 보라. 무엇이든 그것 고유의 성질도, 그 값어치도 놓치지 마라.

4 눈앞의 모든 것은 머지않아 변할 것이다. 실체가 하나라면 김이 되어 피어오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흩어질 것이다.

5 다스리는 이성은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질료를 두고 하는지 안다.

6 가장 좋은 복수는 그와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7 한 가지만 즐기고 거기서 쉬어라. 신을 기억하며, 공동체를 위한 행동에서 공동체를 위한 다음 행동으로 옮겨 가는 것.

8 지도 이성(hēgemonikon)은 스스로를 깨우고 돌려세우며, 자기 자신을 원하는 대로 만들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만든다.

9 모든 일은 우주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밖에서 감싸는 것이든, 안에 감싸여 있는 것이든, 바깥에 따로 매달린 것이든, 다른 어떤 본성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10 뒤죽박죽과 얽힘과 흩어짐이거나, 하나 됨과 질서와 섭리이거나 둘 중 하나다. 앞의 것이라면, 이처럼 아무렇게나 엉겨 붙은 덩어리, 이런 뒤범벅 속에 머물고 싶어 할 까닭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흙이 될까"1 하는 것 말고 내가 무엇에 마음을 쓰겠는가? 무엇 때문에 동요하는가? 내가 무엇을 하든 흩어짐은 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뒤의 것이라면, 나는 다스리는 이를 공경하고, 흔들림 없이 서서, 그를 믿고 마음을 놓는다.

11 주변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흐트러진 것 같거든, 얼른 너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꼭 그래야 하는 만큼 이상으로 박자를 놓치지 마라. 거듭 조화로 돌아올수록 너는 조화를 더 잘 다스리게 될 것이다.

12 너에게 계모와 친어머니가 함께 있다면, 계모도 받들어 모시겠지만 그래도 늘 어머니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 너에게는 궁정과 철학이 그렇다. 자주 철학에게로 돌아와 그 품에서 쉬어라. 철학 덕분에 궁정의 일도 너에게 견딜 만해 보이고, 그 안에 있는 너도 남들에게 견딜 만한 사람이 된다.

13 고기 요리나 그런 먹을거리를 앞에 두고 이건 물고기의 주검이고 저건 새나 돼지의 주검이라고 떠올려 보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또 팔레르눔 포도주는 포도송이를 짠 즙일 뿐이고, 자줏빛 단을 두른 옷은 조개 피에 적신 양털일 뿐이라고, 그리고 성교는 내장 한 토막을 비비다가 몇 번 경련하며 점액을 조금 내보내는 일일 뿐이라고 떠올려 보는 것은. 이런 인상이야말로 사물 자체에 가 닿고 그 속을 꿰뚫어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보게 한다. 평생 이렇게 해야 한다. 사물이 너무 그럴듯해 보일 때는 옷을 벗겨 그 하찮음을 똑똑히 보고, 그것을 근사해 보이게 하는 사연을 걷어 내야 한다. 허영은 무서운 협잡꾼이어서, 네가 가장 진지한 일에 몰두한다고 여길 때 너를 가장 깊이 홀린다. 크라테스가 다름 아닌 크세노크라테스를 두고 무슨 말을 하는지 보라.2

14 많은 사람이 감탄하는 것은 대부분 가장 일반적인 부류, 곧 응집 상태(hexis)나 생장하는 본성(physis)이 하나로 묶어 주는 것들로 돌아간다. 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나무 같은 것이다. 그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은 영혼이 묶어 주는 것들, 이를테면 양 떼나 소 떼로 돌아간다. 그보다 더 교양 있는 사람들이 감탄하는 것은 이성적 영혼이 묶어 주는 것들로 돌아간다. 다만 보편적인 영혼이 아니라 기술이 있거나 다른 무엇에 능한 영혼이고, 그도 아니면 그저 노예를 많이 거느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시민다운 이성적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다른 것에는 더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 자기 영혼이 이성에 맞고 공동체에 맞게 자리 잡고 움직이도록 지켜 내며, 같은 종족과 힘을 모아 그 일을 해 나간다.

15 어떤 것은 생겨나려고 서두르고, 어떤 것은 지나간 것이 되려고 서두른다. 생겨나는 것 가운데 일부는 벌써 꺼져 버렸다. 흐름과 바뀜이 우주를 쉼 없이 새롭게 한다. 시간의 끊임없는 흐름이 끝없는 영원을 늘 새롭게 내놓듯이. 발 디디고 설 수도 없는 이 강물 속에서, 곁을 스쳐 달려가는 것들 가운데 무엇을 귀하게 여기겠는가? 곁을 날아 지나가는 참새 한 마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것과 같다. 저마다의 목숨도 그런 것이다. 피에서 피어오르는 김이고, 공기에서 들이쉬는 숨이다. 우리가 순간마다 하듯 공기를 한 번 들이쉬었다가 돌려주는 것은, 어제나 그제 태어나며 얻은 숨 쉬는 힘 전부를 처음 그것을 빨아들인 곳에 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16 식물처럼 숨을 내뿜는 것은 귀하지 않다. 가축이나 들짐승처럼 숨 쉬는 것도, 인상이 찍히는 것도, 충동에 꼭두각시처럼 끌려다니는 것도, 떼 지어 모이는 것도, 영양을 섭취하는 것도 귀하지 않다. 영양을 섭취하는 것은 먹고 남은 찌꺼기를 내보내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귀한가? 박수를 받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혀들이 쳐 주는 박수도 아니다. 많은 사람의 칭송이란 혀가 부딪는 소리일 뿐이니까. 그러니 보잘것없는 명성도 내려놓은 셈이다. 그러면 귀한 것으로 무엇이 남는가? 내 생각에는 자기 본바탕에 맞게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다. 온갖 보살핌과 기술이 이끌어 가는 곳도 거기다. 모든 기술은 만들어진 것이 그것을 만든 목적에 걸맞게 되기를 겨냥한다. 나무 심는 사람도, 포도나무를 가꾸는 사람도, 망아지를 길들이는 사람도, 개를 돌보는 사람도 그것을 찾는다. 아이를 이끌고 가르치는 일은 또 무엇을 바라고 애쓰는가? 그러니 귀한 것은 여기에 있다. 이것만 잘되어 있으면 너는 다른 것은 하나도 손에 넣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그러면 너는 자유롭지도, 스스로 넉넉하지도, 흔들림 없지도 못할 것이다. 그것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의심하며, 네가 귀하게 여기는 것을 가진 자들에게 음모를 꾸밀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한마디로 그런 것 가운데 하나라도 아쉬운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울 수밖에 없고, 게다가 신들을 자주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네 마음 앞에서 염치를 차리고 그 마음을 귀히 여기면 너는 너 자신에게 흡족하고, 함께하는 이들과 잘 어울리며, 신들과 한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신들이 나누어 주고 정해 둔 것을 모두 찬양하는 사람 말이다.

17 위로, 아래로, 빙빙 돌며 원소들은 움직인다. 그러나 덕의 움직임은 그 어느 것과도 다르다. 그것은 더 신성한 무엇이어서, 헤아리기 어려운 길을 따라 나아가며 순탄하게 제 길을 간다.

18 사람들이 하는 짓 좀 보라. 같은 시대에 함께 사는 사람들은 칭찬하려 하지 않으면서, 본 적도 없고 앞으로 볼 일도 없는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은 대단하게 여긴다. 이것은 앞서 산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는 것과 거의 다를 바 없다.

19 너 혼자 해내기 어렵다고 해서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지 마라. 오히려 사람에게 가능하고 사람에게 맞는 일이라면 너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라.

20 체육관에서 누가 손톱으로 할퀴거나 머리로 들이받아 상처를 내도, 우리는 그것을 문제 삼지도 않고 언짢아하지도 않으며, 나중에 그를 음흉한 자로 의심하지도 않는다. 물론 조심은 한다. 그러나 적으로 대하거나 의심하며 조심하는 것이 아니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피할 뿐이다. 삶의 다른 자리에서도 그렇게 하자. 함께 훈련하는 상대 같은 이들이 하는 일은 많이 눈감아 주자. 앞서 말했듯이 의심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그저 피할 수 있으니까.

21 누가 내 판단이나 행동이 옳지 않다고 반박하여 내게 보여 줄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바꾸겠다. 나는 진리를 찾는다. 진리 때문에 해를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를 입는 것은 자기기만과 무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다.

22 나는 내가 마땅히 할 일을 한다. 다른 것들은 나를 끌어당기지 못한다. 그것들은 영혼이 없거나, 이성이 없거나, 길을 잃고 길을 모르는 것들이니까.

23 이성 없는 동물과 사물과 눈앞에 놓인 것들은, 이성 있는 자가 이성 없는 것을 부리듯 도량 넓고 떳떳하게 부려라. 사람은 이성이 있으니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하라. 무슨 일을 하든 신들을 불러라. 이 일을 얼마나 오래 할지는 마음 쓰지 마라. 그렇게 보낸 세 시간이면 넉넉하다.

24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노새 몰이꾼은 죽어서 같은 처지가 되었다. 둘 다 우주의 같은 씨앗 이성(spermatikoi logoi)으로 다시 거두어졌거나, 똑같이 원자로 흩어졌다.

25 똑같은 한순간에 우리 각자 안에서 몸의 일과 영혼의 일이 얼마나 많이 한꺼번에 일어나는지 생각해 보라. 그러면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하나이자 전부인 것 안에서 훨씬 더 많은 일이, 아니 일어나는 모든 일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26 누가 너에게 안토니누스라는 이름을 어떻게 쓰느냐고 묻는다면, 목청을 돋워 한 글자 한 글자 내뱉겠느냐? 그 사람들이 화를 낸다고 너도 맞받아 화를 내겠느냐? 차분히 한 자씩 짚어 가며 끝까지 불러 주지 않겠느냐?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마땅히 할 일은 모두 몇 개의 마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 마디를 하나하나 지키면서, 허둥대지 말고, 짜증 내는 사람에게 맞받아 짜증 내지도 말고, 앞에 놓인 일을 차근차근 끝마쳐야 한다.

27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고 이롭다고 보이는 것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한가. 그런데 그들이 잘못한다고 네가 분개할 때, 너는 어찌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셈이다. 그들은 어떻든 자기에게 맞고 이로운 것을 향해 움직이니까.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분개하지 말고 가르치고 보여 주어라.

28 죽음은 쉼이다. 감각이 받는 충격에서, 충동이 잡아당기는 꼭두각시 줄에서, 생각이 이리저리 오가는 일에서, 살을 섬기는 수고에서 놓여나는 쉼.

29 몸은 아직 삶에 지쳐 쓰러지지 않았는데 영혼이 먼저 지쳐 쓰러지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30 황제 티를 내지 않도록, 물들지 않도록 조심하라.3 그런 일은 정말 일어난다. 그러니 너 자신을 지켜라. 소박하고, 선하고, 순수하고, 진중하고, 꾸밈없고, 정의를 사랑하고, 신을 공경하고, 너그럽고, 정이 깊고, 마땅한 일에 힘차게 나서는 사람으로. 철학이 너를 만들고자 했던 그런 사람으로 끝까지 남도록 힘써 싸워라. 신들을 우러르고, 사람들을 지켜라. 삶은 짧다. 땅 위의 삶이 맺는 열매는 하나뿐이다. 거룩한 마음가짐과 공동체를 위한 행동. 모든 일을 안토니누스의 제자답게 하라.4 이성에 맞는 일이라면 힘차게 해내던 그를, 어디서나 한결같던 그를 기억하라. 그의 거룩함과 맑게 갠 얼굴, 온화함, 헛된 명성을 좇지 않는 마음, 일을 제대로 붙잡으려는 열의를 기억하라. 그는 무엇이든 먼저 꼼꼼히 들여다보고 똑똑히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그냥 넘기지 않았다. 부당하게 자기를 탓하는 사람들을 맞받아 탓하지 않고 견뎌 냈고, 무슨 일에도 서두르지 않았으며, 중상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람의 됨됨이와 행동을 꼼꼼히 살피되 꾸짖지 않았고, 겁이 많지도 의심이 많지도 않았으며 궤변을 늘어놓지도 않았다. 집과 잠자리와 옷과 음식과 시중드는 사람에서 적은 것으로 만족했고, 일을 사랑하고 참을성이 깊었다. 먹는 것이 소박해서 정해진 때가 아니면 뒤를 볼 일도 없었으니, 저녁까지 한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벗과의 사귐은 굳고 한결같았다. 자기 의견에 거리낌 없이 맞서는 사람을 참아 주었고, 누가 더 나은 것을 보여 주면 기뻐했다. 신을 공경했으나 미신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야 마지막 때가 찾아와도, 그가 그랬듯이 너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

31 술에서 깨어나듯 정신을 차리고 너 자신을 다시 불러들여라. 잠에서 깨어 너를 괴롭힌 것이 꿈이었음을 알았거든, 깨어 있는 지금, 꿈속의 것들을 보았듯이 이것들을 보라.

32 나는 하찮은 몸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 몸에게는 모든 것이 선도 악도 아닌 것(adiaphora)이다. 몸은 무엇을 가려 마음 쓸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에게는 자기 활동이 아닌 것이 모두 선도 악도 아닌 것이다. 마음의 활동은 모두 마음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활동 가운데서도 마음이 다루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것뿐이다. 앞으로 올 활동과 지나간 활동은 그것대로 이미 선도 악도 아닌 것이니까.

33 발이 발의 일을 하고 손이 손의 일을 하는 한, 수고는 손에게도 발에게도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의 일을 하는 한, 수고는 사람인 그에게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다. 본성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에게 나쁜 것도 아니다.

34 강도와 남창과 아비를 죽인 자와 폭군이 얼마나 큰 쾌락을 누렸던가.

35 손으로 일하는 장인들이 어느 정도는 문외한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기 기술의 이치만큼은 꽉 붙들고 거기서 물러서기를 견디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건축가와 의사가 자기 기술의 이치를 존중하는 것이 사람이 자기 이성을 존중하는 것보다 더하다면, 기막힌 일이 아니냐? 그 이성은 사람이 신들과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인데.

36 아시아와 유럽은 우주의 한 귀퉁이다. 온 바다는 우주의 물 한 방울이다. 아토스산은 우주의 흙덩이 하나다. 지금이라는 시간 전체는 영원 속의 한 점이다. 모든 것이 작고, 쉽게 바뀌고,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은 저기서, 저 공통의 지도 이성에서 비롯한다. 거기서 곧바로 나오거나 그 결과로 뒤따라 나온다. 그러니 사자의 쩍 벌린 아가리도, 독도, 온갖 해로운 것도, 가시나 진창처럼 저 장엄하고 아름다운 것들에 딸려 생겨난 것이다. 그것들을 네가 공경하는 것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여기지 말고, 모든 것의 샘을 헤아려 보라.

37 지금 일어나는 일을 본 사람은 모든 것을 보았다. 영원 전부터 일어난 일도, 끝없는 앞날에 일어날 일도. 모든 것은 같은 종류이고 같은 모습이니까.

38 우주 안의 모든 것이 서로 묶여 있고 서로 이어져 있음을 자주 생각하라. 어찌 보면 모든 것은 서로 얽혀 있고, 그래서 모두 서로에게 벗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 뒤에 차례로 오는 것은 팽팽히 당기는 움직임과, 함께 숨 쉬는 기운과, 실체가 하나로 묶여 있음 덕분이다.

39 네 몫으로 떨어진 일에 너 자신을 맞추어라. 함께 제비를 뽑아 너와 한데 묶인 사람들을 사랑하라. 다만 진심으로.

40 도구든 연장이든 그릇이든, 무엇이든 만들어진 목적대로 제 일을 하면 잘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만든 이가 곁에 없다. 그러나 자연이 하나로 묶어 둔 것들은 그것을 만든 힘이 안에 있고 늘 머물러 있다. 그러니 그 힘을 더욱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네가 그 힘의 뜻에 맞게 지내고 살아간다면, 모든 것이 네 뜻에 맞게 되어 간다고 여겨야 한다. 우주에서도 제 일은 이렇게 제 뜻에 맞게 되어 간다.

41 의지(prohairesis) 밖에 있는 것 가운데 무엇이든 네가 그것을 너에게 선이나 악으로 세워 둔다면, 그런 악을 만나거나 그런 선을 놓쳤을 때 너는 신들을 탓하고, 그 일을 불러온 사람들이나 불러올 것 같은 사람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런 것을 두고 가리고 따지느라 정말 많은 불의를 저지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달린 것만을 선과 악으로 판단한다면, 신을 탓하거나 사람에게 적으로 맞설 까닭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

42 우리는 모두 하나의 결과를 위해 함께 일한다. 어떤 이는 알고서 깨어 지켜보며, 어떤 이는 영문도 모른 채. 내 생각에 헤라클레이토스가 잠든 사람들도 일꾼이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에 함께 일하는 자라고 말한 것도 그런 뜻이다.5 저마다 다른 몫으로 함께 일한다. 일어나는 일을 탓하고, 거스르고 없애려 드는 사람조차 넘치도록 함께 일한다. 우주에는 그런 사람도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이제 네가 너 자신을 어느 쪽에 세우는지 잘 알아 두어라. 만물을 다스리는 이는 어떻게든 너를 잘 쓸 것이고, 함께 일하고 함께 거드는 이들의 한 부분으로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너는 크리시포스가 말한, 연극 속의 싸구려 우스개 대사 같은 부분은 되지 마라.6

43 해가 비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더냐? 아스클레피오스가 열매를 맺게 하는 여신7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더냐? 별들은 저마다 어떠냐? 서로 다르지만 같은 일을 위해 함께 일하지 않느냐?

44 신들이 나와 나에게 일어나야 할 일을 두고 숙고했다면, 잘 숙고했을 것이다. 숙고하지 않는 신이란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그리고 무슨 까닭으로 신들이 나에게 해를 끼치려 들겠는가? 그래서 신들에게, 혹은 신들이 무엇보다 보살피는 공동체에 무슨 득이 생기겠는가? 신들이 나 하나를 두고 따로 숙고하지 않았다 해도, 공동의 일은 틀림없이 숙고했다. 그 일에 뒤따라 일어나는 이 일들도 나는 반가이 맞고 달게 받아야 한다. 만약 신들이 아무것도 숙고하지 않는다면(이렇게 믿는 것은 거룩한 도리에 어긋난다. 그렇게 믿는다면 제사도 기도도 맹세도 그만두고, 신들이 곁에 있고 함께 사는 듯이 우리가 일마다 하는 다른 일도 모두 그만두자), 그러니까 신들이 우리 일은 무엇 하나 숙고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을 두고 숙고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무엇이 이로운지 살피는 것도 내 몫이다. 저마다에게 이로운 것은 자기 본바탕과 본성에 맞는 것이다. 그리고 내 본성은 이성적이고 시민답다. 안토니누스인 나에게8 도시이자 조국은 로마이고, 사람인 나에게는 우주다. 그러니 이 두 도시에 이로운 것만이 나에게 좋은 것이다.

45 저마다에게 일어나는 일은 전체에 이롭다. 이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대체로 이것도 보게 될 것이다. 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롭다. 다만 여기서 '이롭다'는 말은 선도 악도 아닌 것에 쓸 때처럼 좀 더 넓은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46 원형 경기장이나 그런 곳의 구경거리가 늘 똑같은 것만 보여 줘서 네 속을 메스껍게 하고 한결같음이 구경을 지겹게 만들듯이, 삶 전체에서도 그런 일을 겪는다. 위로 보나 아래로 보나 모든 것이 같은 것이고 같은 데서 나온다. 그러니 언제까지란 말인가?

47 온갖 사람, 온갖 일을 하던 사람, 온갖 민족의 사람이 죽었음을 끊임없이 생각하라. 그렇게 내려와 필리스티온과 포이보스와 오리가니온에까지 이르도록.9 이제 다른 부류로 옮겨 가 보라. 우리도 결국 그곳으로 옮겨 가야 한다. 그토록 많은 뛰어난 연설가들, 헤라클레이토스와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같은 그토록 많은 엄숙한 철학자들, 옛날의 그토록 많은 영웅들, 그 뒤의 그토록 많은 장군과 폭군들이 간 곳으로. 거기에 에우독소스, 히파르코스, 아르키메데스, 그 밖에 날카롭고 도량 크고 부지런하고 재주 넘치고 고집 센 이들, 메니포스10처럼 덧없고 하루살이 같은 인간의 삶 자체를 비웃던 이들도 있다. 이들이 모두 오래전에 누워 있음을 생각하라. 그게 그들에게 무슨 끔찍한 일인가?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또 어떤가? 여기서 값진 것은 하나뿐이다. 진실과 정의를 지키며, 거짓말하는 자와 불의한 자에게도 너그럽게 한평생을 살아가는 것.

48 기운을 내고 싶을 때는 함께 사는 사람들의 장점을 떠올려라. 이 사람의 부지런함, 저 사람의 염치, 또 다른 사람의 아낌없는 나눔, 그 밖에 저마다의 무엇을. 함께 사는 이들의 됨됨이에 덕의 모습이 비치고, 그것이 될 수 있는 한 한데 모여 있을 때만큼 기쁜 것은 없다. 그러니 그것들을 늘 가까이 두어라.

49 몸무게가 몇 리트라밖에 안 되고 삼백 리트라가 아니라고 언짢으냐?11 그렇다면 몇 해까지만 살고 그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고 언짢아할 것도 없다. 실체 가운데 네게 정해진 만큼에 만족하듯이, 시간도 그렇게 하라.

50 그들을 설득하려 애써라. 그러나 정의의 이치가 그렇게 이끈다면 그들이 원하지 않더라도 행하라. 누가 힘으로 가로막거든 흔쾌히, 괴로워하지 말고 물러서서, 그 가로막힘을 다른 덕을 닦는 데 써라. 그리고 네 충동에는 처음부터 단서(hypexairesis)가 붙어 있었고 너는 불가능한 것을 바라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그러면 무엇을 바랐는가? 바로 그렇게 단서를 단 충동이다. 그것은 이루었다. 우리가 하려고 나섰던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51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남의 행동을 자기 선으로 여기고, 쾌락을 좋아하는 자는 자기가 겪는 느낌을 자기 선으로 여긴다. 그러나 지각 있는 사람은 자기 행동을 자기 선으로 여긴다.

52 이 일을 두고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고 영혼이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다. 사물 자체에는 우리 판단을 만들어 낼 본성이 없다.

53 남이 하는 말에 한눈팔지 않고 귀 기울이는 버릇을 들여라. 할 수 있는 한 말하는 사람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라.

54 벌 떼에 이롭지 않은 것은 벌 한 마리에게도 이롭지 않다.

55 내가 키를 잡을 때 뱃사람들이, 내가 치료할 때 환자들이 나를 헐뜯는다 한들, 어떻게 해야 내가 배에 탄 이들을 살리고 치료받는 이들을 낫게 할지, 그것 말고 다른 무엇에 마음을 쓰겠는가?

56 나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가 벌써 떠나갔는가.

57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꿀이 쓰게 느껴지고, 미친개에게 물린 사람에게는 물이 무섭고, 어린아이에게는 공이 멋져 보인다. 그런데 나는 왜 화를 내는가? 아니면 너는 그릇된 생각이, 황달 환자 몸속의 쓸개즙이나 미친개에 물린 사람 몸속의 독보다 힘이 약하다고 여기느냐?

58 네 본성의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을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공통의 자연이 지닌 이성을 거스르는 일은 너에게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59 그들이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얻으려고, 어떤 행동으로 그러는지 보라. 세월은 얼마나 빨리 모든 것을 덮어 버릴 것인가. 이미 얼마나 많은 것을 덮어 버렸는가.

주

  1. 1. 호메로스 《일리아스》 7.99 "너희는 모두 물과 흙이 되어 버려라"에서 따온 말.

  2. 2. 크라테스는 견유학파 철학자, 크세노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제자로 아카데메이아를 이끈 철학자. 크라테스가 한 말은 전하지 않는다.

  3. 3. 원어 apokaisarousthai는 '카이사르가 되어 버리다'라는 뜻으로, 마르쿠스가 지어낸 말로 보인다. '물들다'는 황제의 자줏빛 옷을 떠올리게 한다.

  4. 4. 마르쿠스의 양아버지이자 앞선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

  5. 5. 헤라클레이토스 단편 75(딜스-크란츠). 이 대목으로만 전한다.

  6. 6. 스토아학파 철학자 크리시포스는 희극에 끼어든 저속한 대사가 그 자체로는 하찮아도 작품 전체에는 보탬이 된다고 했다(플루타르코스 《스토아학파의 공통 관념 비판》 14).

  7. 7. 원어 Karpophoros(열매를 맺게 하는 이).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의 별칭.

  8. 8.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 자신의 이름이기도 하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9. 9.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마르쿠스 가까이에서 근래에 죽은 사람들로 보인다.

  10. 10. 에우독소스와 히파르코스는 천문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수학자, 메니포스는 인간사를 비웃는 글을 쓴 견유학파 작가.

  11. 11. 리트라(litra)는 로마의 무게 단위 리브라(libra)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다. 1리브라는 약 330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