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의 함정, 2,400년 전 역사가는 정말 전쟁을 예언했을까
미중 정상회담에까지 등장한 '투키디데스의 함정'.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원래 문장과 이 이론을 둘러싼 반론을 따라가며, 역사로 지금을 읽는 법을 생각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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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4일, 베이징 인민대회당. 분홍색과 흰색 꽃이 놓인 긴 탁자 너머로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해요. "미국과 중국은 이른바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넘어 대국 관계의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을까요?"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그가 옅은 미소를 띠고 이 말을 했다고 전했어요.
정상회담 첫 회담 자리에서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사람의 이름이 나온 거예요. 저는 이 기사를 읽다가 조금 엉뚱한 궁금증이 생겼어요. 투키디데스 본인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까, 아니면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하고 되물었을까. 마침 우리 서가에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으니, 원래 문장부터 찾아보기로 했어요.
'함정'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이 표현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하버드 케네디스쿨의 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이에요. 2012년 『파이낸셜 타임스』 칼럼에서 쓰기 시작했고, 2015년 『애틀랜틱』에 「투키디데스의 함정: 미국과 중국은 전쟁으로 가고 있는가」를 실으면서 유명해졌어요. 2017년에는 같은 주제로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이라는 책을 냈고요.
주장의 뼈대는 단순해요. 떠오르는 세력이 기존 패권국을 위협하는 상황이 지난 500년 동안 열여섯 번 있었고, 그중 열두 번이 전쟁으로 끝났다는 거예요. 열여섯 번 중 열두 번이면 75%. 숫자만 보면 섬뜩하죠.
그런데 앨리슨의 하버드 벨퍼센터 소개 글을 읽어 보면 방점이 다른 데 찍혀 있어요. 이 책의 목표는 전쟁을 예언하는 게 아니라 막는 것이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적어 두었어요. 나머지 네 번은 상상력 있는 외교로 전쟁을 피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함정'이라는 이름은 "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앞에 구덩이가 있으니 눈을 뜨고 걸으라"는 경고에 가까워요. 다만 이름이 워낙 강렬해서, 뉴스에서는 앞쪽 절반만 남고 뒤쪽 절반은 자주 잘려 나가요.
투키디데스가 실제로 쓴 문장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장군이었고, 자기가 직접 겪은 전쟁을 기록했어요. 1권 첫머리에서 그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30년 휴전을 깨뜨린 까닭을 설명하겠다며, 양쪽이 내세운 불만부터 적겠다고 해요.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여요.
진짜 까닭은 공식적으로 가장 많이 가려져 있던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본다. 아테네의 힘이 커진 것, 그리고 그것이 스파르타에 불러일으킨 불안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함정 이론의 출발점이 바로 이 문장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우리 번역은 그리스어 원전이 아니라 리처드 크롤리가 1874년에 낸 영어 번역을 옮긴 거예요. 책 맨 앞 일러두기에도 그렇게 밝혀 두었고요. 크롤리는 이 대목을 "made war inevitable"이라고 옮겼고, 우리도 그 결을 따라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썼어요.
흥미롭게도 앨리슨이 인용한 것도 이 크롤리 번역이었어요. 호주전략정책연구소의 앨런 뱀은 2017년 글에서 바로 이 점을 짚었어요. 홉스는 같은 대목을 '전쟁을 불가피하게 했다(necessitated)'고, 조엣은 '스파르타인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forced)'고 옮겼다는 거예요. 뱀은 그리스어 동사를 가장 문자 그대로 풀면 "말하자면 싸우도록 몰아붙였다"에 가깝다고 봤어요. '운명처럼 정해졌다'와 '등을 떠밀었다'는 꽤 다른 이야기죠. 번역을 하는 입장에서 저는 이 대목이 뜨끔했어요. 낱말 하나가 2,400년 뒤 국제 정치의 공기를 바꿀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문장에서 제가 더 오래 붙들게 된 건 '불가피'가 아니라 앞부분이었어요. 투키디데스는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 '공식적으로 가려져 있던' 진짜 까닭을 나눠요. 그 진짜 까닭은 힘의 크기 자체가 아니라, 그 힘이 상대에게 일으킨 감정이었어요. 불안이요.
함정 이론에 쏟아진 반론
앨리슨의 이론은 인기만큼 비판도 많이 받았어요. 몇 가지만 추려 볼게요.
국제정치학자 조지프 나이는 2017년, 무엇을 '사례'로 세느냐가 분명하지 않아 숫자 자체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어요. 제1차 세계대전 같은 사례를 잘못 짚었다고도 했고요. 영국의 전략사학자 로런스 프리드먼은 함정이라는 틀이 별 도움이 안 되는 구성물이라고까지 말했어요. 역사학자 아서 월드런은 도널드 케이건과 에른스트 배디언 같은 고대사 연구자들이 일찍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도 그런 '함정'은 없었다고 보여 주었다며 반박했고요. 2021년 할 브랜즈와 마이클 베클리는 중국이 지금 떠오르는 중이라기보다 정점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보고, 진단부터 틀렸다고 주장했어요.
저는 어느 쪽이 맞다고 판정할 자격은 없어요. 다만 이 논쟁을 읽고 나니 하나는 분명해졌어요. 역사는 공식이 아니라는 것. 투키디데스 자신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는 이 책을 쓰는 이유를 밝히는 대목에서, 지나간 일을 정확히 알아 앞일을 풀이하려는 사람에게 쓸모가 있기를 바란다며 이렇게 써요.
인간사의 흐름으로 보아 앞일은 지나간 일을 그대로 비추지는 않더라도 닮기는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로 비추지 않는다'와 '닮는다' 사이. 역사를 읽는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딱 거기인 것 같아요.
두려움은 사람의 판단을 어떻게 바꿀까
1권에는 전쟁 직전 스파르타에서 열린 동맹 회의 장면이 나와요. 그 자리에 있던 아테네 사절은 자기들이 제국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해요. 두려움과 명예와 이익이라는 가장 강한 세 동기의 압력 때문이라고요. 남의 나라 회의장에서 이렇게 솔직할 수 있나 싶은데, 그래서 더 사람 냄새가 나요.
이 세 낱말을 국제 정치에서 잠깐 내려놓고 우리 일상에 대 보면 이상하게 익숙해요. 팀에 일 잘하는 후배가 들어왔을 때, 옆 가게에 비슷한 메뉴의 새 가게가 문을 열었을 때, 같이 시작한 동기가 먼저 승진했을 때. 상대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먼저 움직여요. 괜히 정보를 덜 나누고, 먼저 선을 긋고, 상대의 작은 행동을 공격으로 읽어요. 그러면 상대도 그걸 느끼고 똑같이 굳어지죠. 커지는 힘보다 그 힘을 바라보는 불안이 관계를 먼저 망가뜨리는 거예요.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나중에 돌아보면 상대는 그냥 자기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었고, 싸움을 시작한 건 제 쪽의 두려움이었어요. 투키디데스가 '공식적으로 가장 많이 가려져 있던' 까닭이라고 부른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두려움은 대개 자기 이름을 걸고 나서지 않아요. 원칙이나 정의, 공정 같은 더 그럴듯한 이름 뒤에 숨죠.
오늘 가져갈 생각 하나
뉴스에서 "불가피하다"는 말을 들을 때, 저는 이제 세 가지를 물어보려고 해요. 지금 누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 두려움은 어떤 명분 뒤에 숨어 있는가.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앨리슨의 열여섯 사례 가운데 네 번은 사람들이 그 선택을 찾아낸 경우였어요.
투키디데스는 자기 책을 "한때의 갈채를 얻으려는 글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재산으로 썼다"고 했어요. 2,400년 뒤 정상회담 테이블에 그의 이름이 오른 걸 보면 허풍은 아니었던 셈이에요. 다만 그 재산을 제대로 쓰려면 한 줄 요약보다 문장 앞뒤를 같이 읽어야 해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은 전쟁의 진짜 까닭을 찾아가는 추리 소설처럼 읽히니, 오늘 저녁 첫 장만 펼쳐 보셔도 좋겠어요.
참고한 자료
- "Beyond the pomp and pageantry, Xi Jinping sent a message to Donald Trump", The Christian Science Monitor, 2026-05-15
- Graham Allison, "The Thucydides Trap: Are the U.S. and China Headed for War?", The Atlantic, 2015-09-24 (하버드 케네디스쿨 서지 정보)
- Belfer Center for Science and International Affairs, "Overview: Thucydides's Trap" (Destined for War, 2017 소개)
- Allan Behm, "The Thucydides Trap … or a trap for young players", The Strategist (ASPI), 2017-11-16
- Wikipedia, "Thucydides Trap" (나이·프리드먼·월드런·브랜즈와 베클리의 비판 정리와 각 원문 서지)
-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권(크롤리 영역 1874년판을 옮긴 EtherXync 한국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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