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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ath the WheelChapter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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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가을이 벌써 깊어 가고 있었다. 검은 전나무 숲 사이로 드문드문 선 활엽수들이 횃불처럼 노랗고 붉게 빛났고, 골짜기에는 벌써 짙은 안개가 끼었으며, 강은 아침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김을 피워 올렸다.

신학교를 그만둔 창백한 소년은 여전히 날마다 바깥을 쏘다녔다. 그는 맥이 없고 피곤했으며, 가질 수도 있었을 얼마 안 되는 사람 사귐마저 피했다. 의사는 물약과 간유와 달걀과 냉수마찰을 처방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건강한 삶이라면 어느 것이나 알맹이와 목표가 있어야 하는데, 젊은 기벤라트는 그것을 잃어버렸다. 이제 아버지는 아들을 서기로 만들든지 수공업을 배우게 하든지 하기로 마음먹었다. 소년은 아직 허약해서 우선 기운을 좀 더 차려야 했지만, 머지않아 아들 일을 진지하게 다잡을 때가 올 터였다.

처음의 어지러운 인상들이 누그러지고 자살 자체도 더는 믿지 않게 된 뒤로, 한스는 들뜨고 오락가락하던 불안에서 벗어나 한결같은 우울로 넘어갔고, 부드러운 진흙 바닥에 빠져들 듯이 천천히, 속절없이 그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그는 가을 들판을 쏘다니며 계절의 기운에 굴복했다. 저물어 가는 가을과 소리 없이 지는 잎, 갈색으로 바래 가는 풀밭과 짙은 아침 안개, 무르익어 피곤한 듯 죽고만 싶어 하는 초목을 보며 그는, 모든 병자가 그렇듯이, 무겁고 가망 없는 기분과 슬픈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는 함께 스러지고, 함께 잠들고, 함께 죽고 싶었고, 그의 젊음이 그것을 거스르며 조용한 끈기로 삶에 매달리는 것을 괴로워했다.

그는 나무들이 노래지고, 갈색이 되고, 헐벗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숲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젖빛 안개를 바라보았으며, 마지막 과일 따기가 끝난 뒤 생명이 꺼져 이제 아무도 울긋불긋 시들어 가는 과꽃을 돌아보지 않는 뜰들을 바라보았고, 멱 감기도 낚시도 끝나 버린 강, 마른 잎에 뒤덮이고 서리 내린 강가에는 끈질긴 무두장이들만 남아 버티는 그 강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강은 사과즙 찌꺼기를 잔뜩 싣고 흘렀다. 압착장마다, 방앗간마다 사람들이 지금 부지런히 사과즙을 짜고 있었고, 도시에서는 살며시 괴어 오르는 과일즙 냄새가 골목마다 감돌았다.

아랫방앗간에서는 구두장이 플라이크도 작은 압착기 하나를 빌려서, 한스를 사과즙 짜는 데 불렀다.

방앗간 앞마당에는 크고 작은 사과 압착기와 수레, 과일을 가득 담은 바구니와 자루, 함지와 큰 통과 양동이와 술통, 갈색 찌꺼기를 쌓은 산더미, 나무 지렛대와 손수레와 텅 빈 짐수레가 늘어서 있었다. 압착기들은 일하며 삐걱대고, 끽끽거리고, 신음하고, 염소처럼 매애 울었다. 대부분 초록 칠을 했는데, 이 초록이 찌꺼기의 누런 갈색과 사과 바구니들의 빛깔과 연초록 강물과 맨발의 아이들과 맑은 가을 햇살과 어우러져, 보는 사람마다 즐거움과 삶의 기쁨과 넘치는 풍요를 느끼며 마음이 끌리게 했다. 으깨지는 사과가 내는 우지끈 소리는 시큼하게 입맛을 돋우어서, 다가와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얼른 사과 하나를 주먹에 쥐고 한 입 베어 물지 않고는 못 배겼다. 대롱에서는 달콤한 햇즙이 굵은 줄기로 흘러나왔다. 붉은빛 도는 노란 즙이 햇빛 속에서 웃었다. 다가와서 그것을 본 사람은 한 잔만 달라고 청해 얼른 맛을 보지 않고는 못 배겼고, 그러고 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시울을 적시며 단맛과 흐뭇함이 온몸을 흘러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달콤한 사과즙은 그 즐겁고 진하고 기막힌 향기로 사방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이 향기야말로 한 해를 통틀어 가장 고운 것, 무르익음과 거둠의 정수다. 겨울을 코앞에 두고 이 향기를 이렇게 들이마시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는 동안 숱한 좋은 것, 놀라운 것을 고마운 마음으로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5월의 비와 쏴 하고 쏟아지는 여름비와 서늘한 가을 아침 이슬, 다정한 봄 햇살과 이글이글 뜨거운 여름 뙤약볕, 하얗고 장밋빛으로 빛나던 과일 꽃, 거두기 전 과일나무의 무르익은 붉은 갈색 윤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 한 해가 돌아가며 데려온 아름답고 즐거운 모든 것을.

누구에게나 빛나는 날들이었다. 부자들과 거드름쟁이들은 몸소 나와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한, 곱고 살진 제 사과를 손에 들어 무게를 가늠하고, 열두 자루나 그 이상 되는 제 자루를 세고, 은으로 된 휴대용 잔으로 맛을 보며, 자기네 사과즙에는 물 한 방울 안 들어간다고 누구에게나 들리게 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과일 자루가 하나뿐이었고, 유리잔이나 질그릇 사발로 맛을 보며 물을 탔지만, 그렇다고 덜 자랑스럽거나 덜 즐겁지는 않았다. 무슨 까닭에선지 사과즙을 아예 짤 수 없는 사람은 아는 사람과 이웃을 찾아 이 압착기에서 저 압착기로 돌아다니며 어디서나 한 잔씩 얻어 마시고 사과 하나씩 주머니에 받아 넣었고, 아는 체하는 말로 자기도 이 일을 웬만큼은 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가난하든 부자든 수많은 아이가 작은 잔을 들고 돌아다녔는데, 저마다 베어 먹던 사과 하나와 빵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과즙을 짤 때 빵을 넉넉히 먹으면 나중에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말이 옛날부터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백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여 외쳤다. 아이들 법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은 모두 바쁘고 들뜨고 즐거웠다.

"이리 와, 한네스! 이쪽으로! 딱 한 잔만!"

"고맙구먼, 그런데 벌써 배가 살살 아파."

"첸트너(50킬로그램)에 얼마 줬어?"

"4마르크. 그래도 일등품이야. 자, 맛 좀 봐!"

이따금 작은 사고가 났다. 사과 자루 하나가 너무 일찍 풀려 사과가 몽땅 땅바닥으로 굴러 나왔다.

"빌어먹을, 내 사과! 여보들, 좀 거들어 줘요!"

모두 함께 주워 담았고, 개구쟁이 몇만 그 틈에 한몫 챙기려 들었다.

"주머니에 넣으면 안 돼, 이 망할 녀석들! 먹는 거야 들어가는 만큼 먹어도 되지만, 넣어 가는 건 안 돼. 거기 서, 이 덜떨어진 녀석아!"

"어이, 이웃 양반, 그렇게 뻐기지 말고! 여기 맛 좀 봐요!"

"꿀맛이네! 영락없는 꿀맛이야. 몇 통이나 짜시오?"

"작은 통으로 둘뿐이오. 그래도 못한 건 아니라오."

"한여름에 사과즙을 안 짜는 게 다행이지. 그랬다간 죄다 그 자리에서 퍼마셔 버릴 거야."

올해도 빠지면 안 되는 투덜이 노인 몇이 와 있다. 그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손수 사과즙을 짜지 않지만 무엇이든 더 잘 알고, 과일을 거저나 다름없이 얻던 옛날 옛적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때는 모든 것이 훨씬 싸고 좋았고, 설탕을 넣는다는 건 아예 몰랐으며, 무엇보다 그 시절에는 나무들이 열매를 맺는 것부터가 전혀 달랐다.

"그때는 수확이라고 말할 만했지. 나한테 사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놈 혼자서 다섯 첸트너는 떨궈 냈구먼."

그러나 세월이 아무리 나빠졌어도 투덜이 노인들은 올해도 맛보기를 실컷 거들고, 아직 이가 남은 노인들은 저마다 제 사과를 우물우물 씹는다. 한 노인은 큼직한 배를 몇 개 억지로 먹고는 지독한 배앓이를 얻었다.

"내 말이 그거야." 노인이 투덜댄다. "옛날엔 저런 걸 열 개는 먹었는데." 그러고는 꾸밈없는 한숨을 쉬며, 배앓이가 나기 전까지 배를 열 개나 먹어 치울 수 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북새통 한가운데에 플라이크 씨가 압착기를 세워 두고 나이 많은 견습공에게 일을 거들게 했다. 그는 바덴 지방에서 사과를 들여왔고, 그의 사과즙은 늘 최상품이었다. 그는 조용히 흐뭇해하며 누구에게나 '맛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아이들은 더 흐뭇해서 둘레를 뛰어다니며 신이 나 사람 무리에 섞여 휩쓸렸다. 그러나 가장 흐뭇한 것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견습공이었다. 위쪽 숲 속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 오랜만에 다시 바깥에서 힘차게 몸을 놀리며 실컷 일할 수 있어 뼛속까지 좋았고, 달콤한 햇즙도 기막히게 잘 넘어갔다. 건강한 시골 소년의 얼굴이 사티로스 가면처럼 히죽거렸고, 그의 구두장이 손은 어느 일요일보다도 깨끗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마당에 들어섰을 때 말없이 쭈뼛거렸다.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첫 압착기에서부터 누가 잔을 내밀었다. 나숄트네 리제였다. 그는 맛을 보았고, 들이켜는 순간 달콤하고 힘찬 사과즙 맛과 함께 지난 가을들의 웃음 띤 추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으며, 다시 한 번 조금 끼어들어 즐겁게 놀고 싶은 수줍은 마음도 함께 일었다. 아는 사람들이 말을 걸고 잔을 권했으며, 플라이크네 압착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모두의 즐거움과 술이 그를 사로잡아 딴사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아주 쾌활하게 구두장이에게 인사하고, 사과즙 짤 때 흔히 하는 농담을 몇 마디 했다. 구두장이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즐겁게 그를 맞았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 파란 치마를 입은 처녀 하나가 오더니 플라이크와 그의 견습공에게 웃어 보이고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아, 그렇지." 구두장이가 말했다. "얘는 하일브론에서 온 내 조카다. 이 애야 물론 다른 가을걷이에 익숙하지. 고향에서는 포도주가 많이 나니까."

처녀는 열여덟이나 열아홉쯤 되어 보였고, 저지대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몸놀림이 재고 쾌활했으며,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몸매가 좋고 풍만했다. 동그란 얼굴에서는 따뜻하게 바라보는 검은 눈과 입 맞추고 싶어지는 예쁜 입술이 쾌활하고 영리해 보였고, 통틀어 말하자면 건강하고 명랑한 하일브론 처녀로는 보였지만 경건한 구두장이의 친척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처녀는 아무리 보아도 이 세상 사람이었고, 그 눈은 저녁과 밤에 성경과 고스너의 『보석 상자』1를 읽곤 하는 사람의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갑자기 다시 근심스러운 얼굴이 되어, 에마가 얼른 가 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에마는 그대로 남아 웃고 재잘거렸고 어떤 농담에도 재빨리 받아쳤으며, 한스는 부끄러워져서 아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처녀들과 어울리는 일은 그러잖아도 끔찍했는데, 이 처녀는 이토록 생기 있고 말이 많으며 그가 곁에 있든 말든, 그가 수줍어하든 말든 거의 개의치 않았으므로,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조금 마음이 상해서 수레바퀴에 스친 길 달팽이처럼 더듬이를 거두어들이고 움츠러들었다. 그는 가만히 있으면서 따분해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도 되지 않아서, 그 대신 방금 누가 죽기라도 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마 자신은 더더욱 그랬다. 한스가 얻어들은 바로는 에마는 두 주 전부터 플라이크네 집에 다니러 와 있었는데, 벌써 온 도시 사람을 다 알았다.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햇즙을 맛보고, 농담을 하고 조금 웃다가 다시 돌아와 열심히 일하는 시늉을 했으며, 아이들을 안아 주고 사과를 나누어 주며 주위에 웃음과 흥을 뿌렸다. 골목 개구쟁이를 만나면 누구에게나 말을 걸었다. "사과 줄까?" 그러고는 뺨이 빨간 예쁜 사과를 하나 집어 두 손을 등 뒤로 감추고 알아맞혀 보라고 했다. "어디 맞혀 봐, 오른손? 왼손?" 그러나 사과는 한 번도 맞힌 손에 들어 있지 않았고, 아이들이 투덜대기 시작해야 비로소 사과를 하나 내주었는데, 그것도 더 작고 퍼런 것이었다. 에마는 한스에 관해서도 들은 것이 있는 듯, 늘 두통을 앓는다는 게 그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써 이웃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스가 슬그머니 빠져나가 집에 갈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플라이크가 그의 손에 지렛대를 쥐여 주었다.

"자, 이제 네가 좀 해라. 에마가 도와줄 거다. 나는 작업장에 가 봐야겠다."

구두장이는 갔고, 견습공은 안주인과 함께 사과즙을 날라 가라는 분부를 받았다. 그래서 한스는 에마와 단둘이 압착기에 남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원수와 싸우듯이 일했다.

그러다가 지렛대가 왜 이렇게 무겁게 돌아가나 이상하게 여기며 고개를 들자, 처녀가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삼아 지렛대에 몸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한스가 이번에는 화가 나서 다시 당기자 에마는 또 한 번 그렇게 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처녀의 몸이 버티고 있는 지렛대를 밀다 보니 갑자기 부끄럽고 가슴이 답답해졌고, 차츰 돌리던 손을 아주 멈추고 말았다. 달콤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젊은 처녀가 당돌하게 그의 얼굴을 보며 웃었을 때, 에마가 갑자기 달라 보였다. 더 친해진 듯하면서도 더 낯설었다. 이제 그도 조금 웃었다. 서툴게, 허물없이.

그리고 이윽고 지렛대는 아주 멈추었다.

그러자 에마가 말했다. "우리 너무 애쓰지 말아요." 그러고는 방금 자기가 마시던, 반쯤 남은 잔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 한 모금의 사과즙은 아주 독하고 아까 것보다 더 달게 느껴졌고, 다 마시고 나서 그는 빈 잔을 아쉬운 듯 들여다보며, 심장이 왜 이렇게 세차게 뛰는지, 숨쉬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의아해했다.

그러고 나서 둘은 다시 조금 일했다. 처녀의 치맛자락이 자기를 스치고 처녀의 손이 자기 손에 닿을 수밖에 없도록 자리를 잡으려 애쓰면서도, 한스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런데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두렵고도 황홀하여 심장이 멎는 듯했고, 기분 좋게 달콤한 기운 빠짐이 그를 덮쳐 무릎이 조금 떨리고 머릿속에서 어지러운 소리가 웅웅거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랐지만, 그는 에마의 말에 꼬박꼬박 대꾸했고, 에마가 웃으면 따라 웃었으며, 에마가 바보 같은 장난을 치면 몇 번 손가락을 들어 을러 보였고, 에마의 손에서 잔을 두 번 더 받아 비웠다. 동시에 숱한 기억이 떼를 지어 그의 곁을 달려 지나갔다. 저녁이면 대문간에서 사내들과 함께 서 있던 하녀들, 이야기책에서 읽은 몇 문장, 그때 헤르만 하일너가 해 준 입맞춤, 그리고 "처녀애들"이니 "애인이 있으면 어떤지"니 하는 숱한 말과 이야기와 학생들의 은밀한 수다였다. 그리고 그는 비탈길에서 짐을 끄는 말처럼 숨을 헐떡였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둘레의 사람들과 법석은 울긋불긋 웃는 구름 같은 것으로 녹아 버렸으며, 낱낱의 목소리와 욕지거리와 웃음소리는 하나로 뭉쳐 흐릿하게 웅웅대는 소리에 묻혔고, 강과 옛 다리는 멀리 그림 속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에마도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는 에마의 얼굴을 더는 보지 못했다. 보이는 것은 그저 검고 즐거운 눈과 붉은 입, 그 뒤의 하얗고 뾰족한 이뿐이었다. 그 몸도 흩어져 버려서 그는 그 낱낱만을 보았다. 검은 스타킹 위의 단화 한 짝이 보이는가 하면 목덜미에서 헤매는 곱슬머리 한 타래가 보였고, 파란 천 속으로 사라지는 햇볕에 그을린 동그란 목이 보이는가 하면 팽팽한 어깨와 그 아래 숨결 따라 오르내리는 물결이 보였으며, 또 불그스름하게 비쳐 보이는 귀가 보였다.

그리고 또 얼마쯤 지나 에마가 잔을 함지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는데, 그때 함지 가장자리에서 에마의 무릎이 그의 손목을 눌렀다. 그도 몸을 굽혔다. 그러나 더 천천히 굽혔고, 얼굴이 에마의 머리카락에 닿을 듯했다. 머리카락에서는 희미한 향기가 났고, 그 아래 헝클어진 곱슬머리의 그늘 속에서 아름다운 목덜미가 따뜻한 갈색으로 빛나며 파란 윗옷 허리로 이어졌는데, 잔뜩 당겨진 훅 사이 틈으로 그 살결이 조금 더 비쳐 보였다.

에마가 다시 몸을 일으킬 때, 에마의 무릎이 그의 팔을 따라 미끄러지고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스치고, 몸을 굽혔던 탓에 에마의 얼굴이 새빨개졌을 때, 한스의 온몸으로 세찬 전율이 달려갔다. 그는 창백해졌고, 한순간 깊고 깊은 피로를 느껴 압착기 나사를 붙들어야 했다. 심장이 경련하듯 오르내렸고, 두 팔은 힘이 빠져 어깨가 아팠다.

그때부터 그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처녀의 눈길을 피했다. 그 대신 에마가 다른 데를 볼 때면 처음 겪는 쾌락과 양심의 가책이 뒤섞인 마음으로 에마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찢어졌고, 아득한 푸른 해안을 거느린 새롭고 낯설게 마음을 끄는 땅이 그의 영혼 앞에 열렸다. 제 안의 이 두근거림과 달콤한 괴로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아직 몰랐다. 아니, 어렴풋이 짐작만 했고, 제 안에서 무엇이 더 큰지, 괴로움인지 쾌락인지도 몰랐다.

쾌락은 그의 젊은 사랑의 힘이 거둔 승리와, 거대한 삶에 대한 첫 예감을 뜻했다. 그리고 괴로움은 아침의 평화가 깨졌다는 것, 그의 영혼이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나라를 떠났다는 것을 뜻했다. 첫 난파를 가까스로 벗어난 그의 가벼운 조각배는 이제 새로운 폭풍의 손아귀에 들었고, 기다리고 있는 여울과 목을 부러뜨릴 암초 가까이로 들어섰다. 그 사이를 지날 때는 아무리 잘 이끌린 젊음에게도 길잡이가 없고, 저마다 제 힘으로 길과 구원을 찾아야 한다.

마침 견습공이 돌아와 압착기 일을 넘겨받은 것은 다행이었다. 한스는 한동안 더 머물렀다. 에마가 한 번 더 몸을 스치거나 다정한 말을 건네 주기를 아직 바랐다. 에마는 다시 남의 압착기들을 돌며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한스는 견습공 보기가 쑥스러워서 15분쯤 뒤 작별 인사도 없이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아름답고 가슴 설레게. 찌꺼기를 먹고 살찐 참새들이 시끄럽게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늘은 이토록 높고 아름답고 그리움에 젖은 듯 파랬던 적이 없었다. 강이 이토록 맑고 초록빛 도는 파란색으로 웃는 거울이었던 적도, 둑이 이토록 눈부시게 하얗게 부서지며 소리친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새로 칠한 고운 그림처럼 맑고 산뜻한 유리창 뒤에 서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큰 잔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제 가슴속에서도 그는 묘하게 대담한 감정들과 처음 품어 보는 강렬한 희망들이 숨 막히게 세차게, 두렵고도 달콤하게 출렁이는 것을 느꼈고, 그와 함께 이건 꿈일 뿐이고 결코 이루어질 리 없다는, 수줍게 의심하는 두려움도 느꼈다. 이 엇갈린 감정들은 부풀어 올라 어둡게 솟구치는 샘이 되었다. 무언가 너무도 센 것이 그의 안에서 풀려나 숨통을 트려는 것 같았다. 어쩌면 흐느낌일지도, 어쩌면 노래나 외침이나 큰 웃음일지도 몰랐다. 집에 와서야 이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집에서는 물론 모든 것이 여느 때와 같았다.

"어디 갔다 오냐?" 기벤라트 씨가 물었다.

"방앗간에 있는 플라이크 아저씨네서요."

"그 사람은 얼마나 짰냐?"

"두 통인 것 같아요."

그는 아버지가 사과즙을 짤 때 플라이크네 아이들을 불러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럼." 아버지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나는 다음 주에 짠다. 그때 데려오기만 해라!"

저녁 식사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한스는 뜰로 나갔다. 전나무 두 그루 말고는 푸른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개암나무 회초리를 하나 꺾어 공중에 휙휙 휘두르고, 그것으로 시든 잎을 이리저리 들쑤셨다. 해는 벌써 산 뒤로 넘어갔고, 산의 검은 윤곽이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그려진 전나무 우듬지들을 인 채 초록빛 도는 파랗고 촉촉하게 맑은 저녁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노랗고 갈색으로 불그레하게 물든 길쭉한 잿빛 구름 하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배처럼 천천히, 흐뭇하게, 엷은 금빛 공기 속을 지나 골짜기 위쪽으로 떠갔다.

저녁의 무르익고 빛깔 그득한 아름다움이 낯설고도 묘하게 그를 사로잡았고, 한스는 뜰을 거닐었다. 이따금 그는 멈춰 서서 눈을 감고 에마를 떠올려 보려 했다. 압착기 맞은편에 서 있던 모습, 제 잔으로 그에게 마시게 하던 모습, 함지 위로 몸을 굽혔다가 얼굴을 붉히며 다시 일어서던 모습을. 그는 에마의 머리카락과 꼭 끼는 파란 옷을 입은 몸매와 목과, 검은 잔머리로 갈색 그늘이 진 목덜미를 보았고, 그 모든 것이 그를 쾌락과 떨림으로 가득 채웠다. 다만 그 얼굴만은 아무리 해도 더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해가 지고 나서도 그는 서늘함을 느끼지 못했고, 깊어 가는 어스름을 이름 모를 비밀로 가득 찬 너울처럼 느꼈다. 그는 자기가 하일브론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핏속에서 깨어나는 사내다움이 벌이는 일은 낯설고 신경이 곤두서며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상태로만 어렴풋이 짐작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는 동안, 달라진 제 모습을 안고 오래 눈에 익은 것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이 그에게는 묘했다. 아버지와 늙은 하녀와 식탁과 그릇과 방 전체가 갑자기 늙어 버린 것 같았고, 그는 방금 먼 여행에서 돌아오기라도 한 듯 그 모든 것을 놀라움과 낯섦과 다정함이 섞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 죽음의 나뭇가지에 마음을 두던 무렵, 그는 같은 사람들과 같은 물건들을 작별하는 사람의 서글프고도 초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돌아옴이었고, 놀라움이었고, 미소였고, 다시 가짐이었다.

밥을 다 먹고 한스가 막 일어나려는데 아버지가 늘 하던 대로 짤막하게 말했다. "기계공이 되고 싶으냐, 서기가 되고 싶으냐, 한스?"

"왜요?" 한스가 놀라서 되물었다.

"다음 주 말에 기계공 슐러네로 들어갈 수도 있고, 다다음 주에 시청에 견습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잘 생각해 봐라!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한스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물음에 그는 어리둥절하고 눈앞이 아찔했다. 몇 달 동안 낯설어진 나날의 바쁘고 싱싱한 삶이 뜻밖에 그 앞에 나타나, 꾀는 얼굴과 을러대는 얼굴을 하고서 약속하며 요구했다. 그는 기계공에도 서기에도 딱히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수공업의 고된 몸일이 조금 겁났다. 그때 학교 친구 아우구스트가 떠올랐다. 아우구스트는 기계공이 되었으니 그에게 물어볼 수 있을 터였다.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그의 생각은 점점 흐려지고 빛이 바랬고, 그 일이 그렇게 급하고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른 무언가가 그를 몰아대며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불안하게 현관 복도를 오락가락하다가 갑자기 모자를 집어 들고 집을 나서 천천히 골목으로 나갔다. 오늘 에마를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가까운 술집에서 고함 소리와 쉰 목소리의 노래가 건너왔다. 여러 창에 불이 켜져 있었고, 여기저기서 하나 또 하나 불이 켜지며 어두운 공기 속에 희미한 붉은 빛을 드리웠다. 팔짱을 낀 처녀들이 길게 한 줄로 늘어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즐겁게 골목을 내려갔다. 그 줄은 흔들리는 불빛 속에서 비틀거리며, 젊음과 기쁨의 따뜻한 물결처럼 잠들어 가는 골목들을 흘러갔다. 한스는 오래도록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었다. 커튼을 친 창문 뒤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렸다. 우물가에서는 한 아낙이 상추를 씻고 있었다. 다리 위에서는 젊은이 둘이 저마다 애인을 데리고 거닐었다. 하나는 처녀의 손을 느슨하게 잡고 그 팔을 흔들며 시가를 피웠다. 두 번째 쌍은 천천히, 서로 꼭 껴안은 채 걸어갔다. 젊은이는 처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처녀는 어깨와 머리를 젊은이의 가슴에 바싹 기대었다. 한스는 그런 모습을 백 번은 보았으면서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 그것에는 은밀한 뜻이, 흐릿하지만 음탕하게 달콤한 의미가 있었다. 그의 눈길은 그 한 쌍에 머물렀고, 그의 상상은 무언가를 예감하며 곧 손에 잡힐 깨달음 쪽으로 밀려갔다. 숨이 막히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흔들린 채, 그는 자기가 큰 비밀에 다가섰다고 느꼈다. 그것이 황홀한 것인지 무서운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그 둘 다를 떨면서 미리 조금씩 맛보았다.

플라이크네 작은 집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지만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열한두 살 소년이던 시절 자주 이곳에 오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플라이크는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지옥이며 악마며 유령에 관해 쏟아지는 그의 호기심 어린 물음을 끝까지 받아 주었다. 그런 추억이 거북했고 양심에 찔렸다. 그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다. 사실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몰랐다. 그래도 무언가 은밀하고 금지된 것 앞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데서 구두장이의 집 문 앞에 들어가지도 않고 서 있는 것은 구두장이에게 잘못하는 일 같았다. 그리고 구두장이가 자기가 거기 서 있는 것을 보거나 지금 문을 열고 나온다면 아마 꾸짖지도 않고 웃어 버릴 것이었다.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는 집 뒤로 살금살금 돌아갔고, 이제 뜰 울타리에서 불 켜진 거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구두장이는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무언가를 꿰매거나 뜨개질을 하는 것 같았고, 맏아들은 아직 자지 않고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에마는 아무래도 치우는 중인 모양으로 이리저리 오가서, 그는 에마를 늘 잠깐씩밖에 볼 수 없었다. 어찌나 조용한지 골목에서 아주 멀리 나는 발소리까지, 그리고 뜰 너머 강물이 나직이 흐르는 소리까지 똑똑히 들렸다. 어둠과 밤 냉기가 서둘러 짙어졌다.

거실 창들 옆으로 그보다 작은 복도 창 하나가 어둡게 나 있었다. 한참 뒤 이 작은 창에 흐릿한 형체 하나가 나타나 몸을 내밀고 어둠 속을 내다보았다. 한스는 몸매를 보고 에마인 것을 알아보았고, 두근거리는 기대로 심장이 멎었다. 에마는 창가에 선 채 오래도록 가만히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에마가 자기를 보는지, 알아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에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갈피 못 잡는 두려움 속에서 에마가 자기를 알아보기를 바라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리고 흐릿한 형체가 다시 창에서 사라지더니 곧바로 작은 뜰 문이 딸깍 소리를 냈고 에마가 집에서 나왔다. 한스는 처음에 놀라서 달아나려 했지만 넋을 놓고 울타리에 기댄 채로, 처녀가 어두운 뜰을 지나 천천히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에마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그를 몰아댔지만 그보다 센 무언가가 그를 붙잡았다.

이제 에마는 바로 그의 앞에 섰다. 반걸음도 안 되는 거리에, 사이에는 낮은 울타리뿐이었다. 에마는 그를 유심히, 묘하게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에마가 나직이 물었다.

"뭘 원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에마가 자기에게 말을 놓았다는 것이 쓰다듬는 손길처럼 그의 살갗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마는 울타리 너머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수줍고 다정하게 그 손을 잡아 살며시 쥐었다가, 손이 빠져나가지 않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어 따뜻한 처녀의 손을 가만가만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손이 순순히 그에게 맡겨져 있자 그는 그 손을 제 뺨에 댔다. 파고드는 쾌락과 묘한 따뜻함과 행복한 피로가 물밀듯 그의 온 존재를 휩쓸었다. 둘레의 공기는 미지근하고 따뜻한 산바람이 불어올 때처럼 눅눅하게 느껴졌고, 그에게는 골목도 뜰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가까이 있는 환한 얼굴 하나와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뿐이었다.

그리고 처녀가 아주 나직이 물었을 때, 그 말은 아득히 먼 밤 저편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나한테 입 맞춰 줄래?"

환한 얼굴이 다가왔다. 몸의 무게에 울타리 널빤지가 조금 바깥쪽으로 휘었고, 헝클어진 채 은은히 향기 나는 머리카락이 한스의 이마를 스쳤으며, 하얗고 넓은 눈꺼풀과 검은 속눈썹에 덮인 감은 두 눈이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다. 수줍은 입술로 처녀의 입에 닿았을 때 세찬 전율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그 순간 떨며 다시 물러섰지만, 에마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싸 안고 제 얼굴을 그의 얼굴에 대고 누르며 그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에마의 입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입이 바싹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의 목숨을 다 마셔 버리려는 듯이. 깊은 기운 빠짐이 그를 덮쳤다. 낯선 입술이 그에게서 떨어지기도 전에 떨리는 쾌락은 죽을 것 같은 피로와 괴로움으로 바뀌었고, 에마가 그를 놓아주었을 때 그는 비틀거리며 경련하듯 오그린 손가락으로 울타리를 붙들었다.

"있잖아, 내일 저녁에 또 와." 에마는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집 안으로 돌아갔다. 에마가 나와 있던 것은 5분도 되지 않았지만, 한스에게는 긴 세월이 흐른 것 같았다. 그는 텅 빈 눈길로 에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울타리 널을 붙잡고 있었고, 한 걸음 떼기에도 너무 피곤했다. 그는 꿈꾸듯 제 핏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피는 머릿속에서 망치질하듯 울렸고, 고르지 않게 아픈 물결을 이루며 심장에서 밀려 나갔다가 되돌아오면서 그의 숨을 막았다.


그때 방 안에서 문이 열리고 구두장이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때까지 작업장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누가 자기를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덮쳐 그는 그 자리를 떴다. 그는 조금 취한 사람처럼 천천히, 내키지 않는 듯 휘청휘청 걸었고, 걸음마다 무릎이 꺾일 것만 같았다. 졸린 박공과 흐린 붉은 창 눈을 단 어두운 골목들이 창백한 무대 배경처럼 그의 곁을 흘러 지나갔고, 다리와 강과 마당과 뜰도 그렇게 지나갔다. 무두장이 거리의 우물이 묘하게 크고 울리는 소리로 찰랑였다. 꿈에 사로잡힌 채 한스는 대문을 열고, 칠흑같이 어두운 통로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 문 하나를 열고 닫고 또 하나를 열고 닫은 뒤, 거기 놓인 탁자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자기가 집에, 제 방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동안이 지나서야 옷을 벗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넋이 나간 채 옷을 벗고, 벗은 채로 창가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가을밤의 냉기에 몸이 떨려 베개 속으로 쫓겨 들어갔다.

금방 잠들 것 같았다. 그러나 눕자마자, 몸이 조금 따뜻해지자마자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피가 고르지 않게 세차게 끓어올랐다. 눈을 감기만 하면 처녀의 입이 아직도 제 입에 붙어서 영혼을 빨아내고 괴로운 열기로 그를 채우는 것만 같았다.

그는 늦게야 잠이 들었고, 쫓기듯 달아나며 이 꿈에서 저 꿈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무섭도록 깊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더듬더듬 손을 뻗다가 에마의 팔을 잡았고, 에마가 그를 끌어안았고, 둘은 함께 천천히 떨어지며 따뜻하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구두장이가 거기 서서 왜 이젠 자기를 찾아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한스는 웃음이 터졌고, 그러자 그것이 플라이크가 아니라 헤르만 하일너라는 것을 알았다. 하일너는 마울브론 기도실 창턱에 그와 나란히 앉아 농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사라졌고, 그는 사과 압착기 앞에 서 있었다. 에마가 지렛대에 몸을 버티고 있었고, 그는 온 힘을 다해 거기 맞섰다. 에마가 몸을 기울여 그의 입을 찾았다. 사방이 고요해지고 칠흑같이 캄캄해졌으며, 이제 그는 다시 따뜻하고 검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어지럼과 죽음의 공포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시에 원장이 연설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것이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아침 늦게까지 잤다. 맑고 금빛 나는 날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뜰을 오락가락하며 잠을 깨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지만, 끈적하고 졸린 안개에 싸여 있었다. 그는 뜰의 맨 마지막 꽃인 보랏빛 과꽃이 아직 8월인 것처럼 햇빛 속에 아름답게 웃으며 서 있는 것을 보았고, 따뜻하고 정다운 빛이 이른 봄인 것처럼 말라 버린 잔가지와 가지와 헐벗은 덩굴 둘레로 다정하게, 아양을 떨듯 흘러넘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보기만 할 뿐 겪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와 상관이 없었다. 갑자기 또렷하고 강한 추억 하나가 그를 사로잡았다. 이 뜰에서 아직 그의 토끼들이 뛰놀고 그의 물레바퀴와 작은 망치 방아가 돌아가던 시절의 추억이었다. 세 해 전의 어느 9월 날이 떠올랐다. 스당 기념일2 전날 저녁이었다. 아우구스트가 담쟁이를 들고 그를 찾아왔고, 둘은 깃대를 반들반들하게 닦고 금빛 꼭대기에 담쟁이를 매달며 내일 이야기를 하고 내일을 고대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둘은 잔치를 앞둔 예감과 큰 기쁨으로 가득했고, 깃발은 햇빛 속에 반짝였으며, 안나는 자두 케이크를 구웠고, 밤에는 높은 바위 위에서 스당 기념 불을 피우기로 되어 있었다.

한스는 왜 하필 오늘 그 저녁이 떠오르는지, 왜 이 추억이 그토록 아름답고 힘찬지, 또 왜 그것이 자기를 그토록 비참하고 슬프게 하는지 몰랐다. 이 추억의 옷을 입고 그의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이 작별하려고 한 번 더 즐겁게 웃으며 그의 앞에 일어섰다는 것을, 그리고 지나가 버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큰 행복의 가시를 남기고 가려 한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그가 느낀 것은 다만, 이 추억이 에마와 어젯밤을 생각하는 마음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그때의 행복과 함께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안에서 일어섰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금빛 깃대 꼭대기가 반짝이는 것을 다시 보는 듯했고, 친구 아우구스트의 웃음소리를 듣는 듯했으며, 갓 구운 케이크 냄새를 맡는 듯했다. 그 모든 것이 그토록 밝고 행복했는데 그에게서 그토록 멀어지고 낯설어져 버려서, 그는 커다란 가문비나무의 거친 줄기에 기대어 가망 없는 흐느낌을 터뜨렸고, 그 흐느낌이 잠시나마 위안과 구원이 되어 주었다.

점심때 그는 아우구스트에게 달려갔다. 아우구스트는 이제 수석 견습공이 되어 있었고 몸이 몰라보게 벌어지고 자라 있었다. 한스는 기계공이 되는 일을 두고 자기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게 말이야, 좀 그래." 아우구스트가 세상 물정에 밝은 얼굴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게 좀 그렇다니까. 넌 약골이잖아. 첫해엔 대장일 할 때마다 그 빌어먹을 메질을 줄곧 해야 하는데, 앞메는 수프 숟가락이 아니거든. 쇠도 날라야 하고 저녁엔 치워야 하고, 줄질에도 힘이 들어. 처음에 뭘 좀 할 줄 알게 될 때까지는 헌 줄만 받는데, 그건 하나도 안 깎이고 원숭이 엉덩이처럼 반들반들하다고."

한스는 곧바로 기가 죽었다.

"그럼, 그만두는 게 낫겠네?" 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이, 누가 그렇대! 굼벵이처럼 굴지 마! 그냥 처음엔 춤판이 아니라는 거지. 그거 말고는, 그래, 기계공이란 근사한 거야, 알지? 머리도 좋아야 해. 안 그러면 대장장이나 되는 거지. 여기 좀 봐!"

그는 반들반들한 강철로 정교하게 만든 작은 기계 부품 몇 개를 가져와 한스에게 보여 주었다.

"봐, 여기선 반 밀리미터도 어긋나면 안 돼. 나사만 빼고 전부 손으로 만든 거야. 눈을 똑바로 뜨고 해야 한다고! 이제 이걸 갈고 담금질만 하면 끝이야."

"응, 멋지다. 내가 알기만 하면…"

아우구스트가 웃었다.

"겁나? 그래, 견습공은 들볶이기 마련이야. 그건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나도 있잖아.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네가 다음 금요일에 시작하면, 그때 나는 딱 견습 두 해를 채우고 토요일에 첫 주급을 받거든. 그럼 일요일엔 한판 벌이는 거야. 맥주도 있고 케이크도 있고, 다들 오고, 너도 오는 거야. 그럼 우리가 어떻게 노는지 한번 보게 될걸. 어때, 놀랍지! 게다가 우리 예전에도 그렇게 좋은 친구였잖아."

식사 때 한스는 아버지에게 기계공을 하고 싶다고, 일주일 뒤에 시작해도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래, 좋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오후에 한스를 데리고 슐러네 작업장에 가서 그를 견습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한스는 그 일을 벌써 다 잊은 거나 다름없었고, 저녁에 에마가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만 생각했다. 벌써부터 숨이 막혔고, 시간은 너무 길었다가 너무 짧았다가 했으며, 그는 뱃사공이 여울로 떠밀려 가듯 만남을 향해 떠밀려 갔다. 그날 저녁에는 밥 먹는 것은 말도 꺼낼 수 없었고, 우유 한 잔도 겨우 넘겼다. 그러고는 집을 나섰다.

모든 것이 어제와 같았다. 어둡고 졸린 골목들, 붉은 창들, 가로등의 어스름, 천천히 거니는 연인들.

구두장이네 뜰 울타리에서 그는 크나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했고, 어둠 속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이 도둑처럼 느껴졌다. 1분도 채 기다리지 않았는데 에마가 그의 앞에 서서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쓸어 주고 뜰 쪽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에마는 그를 끌고 덤불로 둘러싸인 길을 지나 조용히 뒷문으로 해서 캄캄한 집 안 통로로 들어갔다.

거기서 둘은 지하실 맨 위 계단에 나란히 앉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캄캄한 데서 서로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처녀는 기분이 좋아서 속삭이며 거침없이 재잘거렸다. 에마는 이미 입맞춤을 여러 번 맛보았고 사랑의 일에 밝아서, 수줍고 다정한 이 소년이 그저 안성맞춤이었다. 에마는 그의 야윈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이마와 눈과 뺨에 입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 차례가 되어 다시 그렇게 길게, 빨아들이듯 입 맞추자 소년은 어지러워져 넋을 놓고 축 늘어져 에마에게 기대었다. 에마는 나직이 웃으며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에마는 쉬지 않고 재잘거렸고, 그는 듣고 있으면서도 무엇을 듣는지 몰랐다. 에마는 손으로 그의 팔과 머리카락과 목과 손을 쓸어 주었고, 제 뺨을 그의 뺨에, 제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는 잠자코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달콤한 오싹함과 깊고 행복한 두려움에 가득 차서, 이따금 열에 들뜬 사람처럼 짧고 가볍게 움찔하면서.

"너 참 별난 애인이다!" 에마가 웃었다. "아무것도 못 하잖아."

그리고 에마는 그의 손을 잡아 제 목덜미와 머리카락 속을 쓸게 하고는 그 손을 제 가슴에 얹고 몸을 바싹 갖다 댔다. 그는 부드러운 생김새와 낯설고 달콤한 출렁임을 느꼈고, 눈을 감은 채 끝없는 깊이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안 돼요! 이제 그만해요!" 에마가 다시 입 맞추려 하자 그가 밀어내며 말했다. 에마는 웃었다.

그리고 에마는 그를 가까이 끌어당겨 팔로 감싸 안고는 그의 옆구리를 제 옆구리에 꼭 붙였다. 에마의 몸이 느껴지자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너도 나 좋아해?" 에마가 물었다.

그는 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고, 한참 동안 계속 끄덕였다.

에마는 한 번 더 그의 손을 잡더니 장난스레 제 코르셋 속으로 밀어 넣었다. 낯선 생명의 맥박과 숨결이 그렇게 뜨겁고 가까이 느껴지자 그는 심장이 멎는 듯했고, 숨이 하도 가빠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손을 빼며 신음하듯 말했다. "이제 집에 가야 해요."

일어서려다 그는 비틀거렸고, 하마터면 지하실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왜 그래?" 에마가 놀라 물었다.

"모르겠어요. 너무 피곤해요."

에마가 뜰 울타리까지 가는 길에 그를 부축하며 몸을 바싹 붙인 것도 그는 느끼지 못했고, 에마가 잘 자라고 인사하고 그의 뒤로 작은 문을 닫은 것도 듣지 못했다. 그는 골목을 지나 집에 왔지만 어떻게 왔는지 몰랐다. 큰 폭풍이 자기를 휩쓸어 가는 것 같기도 했고, 거센 물결이 자기를 흔들흔들 실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좌우의 창백한 집들과, 그 위 높이 솟은 산등성이와 전나무 우듬지와 밤의 어둠과 크고 고요한 별들을 보았다. 그는 바람이 부는 것을 느꼈고, 강물이 다리 기둥을 스치며 흘러가는 소리를 들었으며, 물속에 비친 뜰과 창백한 집들과 밤의 어둠과 가로등과 별들을 보았다.

다리 위에서 그는 앉아야 했다. 너무 피곤해서 집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난간에 걸터앉아 물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은 다리 기둥에 몸을 비비고, 둑에서 소리치고, 방앗간 쇠살대에서 풍금처럼 울었다. 손은 차가웠고, 가슴과 목에서는 피가 막혔다가 거꾸러질 듯 몰려가며 눈앞을 캄캄하게 했고, 다시 갑작스러운 물결이 되어 심장으로 흘러가 머리를 어지럼으로 가득 채웠다.

그는 집에 와서 제 방을 찾아 눕자마자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엄청난 공간을 지나 깊은 곳에서 더 깊은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한밤중에 그는 괴롭고 기진맥진해서 깨어났고, 아침까지 잠과 깸 사이에 누워 목마른 그리움에 가득 찬 채 다스릴 수 없는 힘들에 이리저리 내던져지다가, 이른 새벽에 마침내 그의 모든 괴로움과 답답함이 긴 울음으로 터져 나와 눈물에 젖은 베개 위에서 다시 한 번 잠이 들었다.

주

  1. 1. 고스너의 『보석 상자』는 날마다 읽을 성경 구절과 묵상을 모은 경건 서적이다.

  2. 2. 스당 기념일은 1870년 9월 2일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이긴 날을 기리는 독일의 명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