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151~225
151 미리 생각하라, 오늘은 내일을 위해, 나아가 여러 날 뒤를 위해. 가장 큰 대비는 대비할 시간을 마련해 두는 것이다. 미리 대비한 사람에게는 우연이 없고, 채비를 갖춘 사람에게는 곤경이 없다.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생각을 미루어서는 안 되고 생각이 늘 앞서가야 하니, 가장 설익은 고비는 거듭 생각해 얻은 무르익은 판단으로 미리 막아 두라. 베개는 말 없는 시빌라1다. 일을 베고 자는 것이 일에 깔려 뜬눈으로 지새우는 것보다 낫다. 어떤 사람은 먼저 하고 나중에 생각하는데, 그것은 결과를 찾는다기보다 핑계를 찾는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은 앞에도 뒤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옳은 길을 잡으려면 평생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거듭된 숙고와 대비가 앞질러 살 힘을 준다.
152 자기를 빛바래게 할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 그가 더 나아서든 더 못해서든. 완전함에서 앞서는 쪽이 존중에서도 앞선다. 상대는 언제나 주역을 맡고 자기는 조역을 맡으니, 혹 얼마간 값을 쳐 받더라도 그것은 상대가 먹다 남긴 부스러기다. 달은 홀로 있는 동안에는 별들 사이에서 으뜸으로 빛나지만, 해가 뜨면 보이지 않거나 아예 사라진다. 자기를 가리는 사람 곁에 서지 말고,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사람 곁에 서라. 그렇게 해서 마르티알리스의 사려 깊은 파불라2는 아름다워 보일 수 있었고, 못나거나 꾀죄죄한 시녀들 사이에서 빛났다. 그렇다고 곁에 둔 사람 탓에 옆구리를 앓아서도 안 되고, 자기 신용을 깎아 남을 높여서도 안 된다. 자기를 만들어 갈 때는 탁월한 사람들과 다니고, 다 만들어진 뒤에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라.
153 큰 빈자리를 메우러 들어가는 일은 피하라. 굳이 나선다면 앞사람을 넘어설 자신이 있을 때만 하라. 앞사람과 겨우 같아지는 데도 곱절의 값어치가 든다. 뒤에 오는 사람이 자기를 아쉬워하게 할 만한 사람이면 그것이 책략이듯, 앞서 물러난 사람이 자기를 가리지 않게 하는 것은 묘수다. 큰 빈자리는 메우기 어렵다. 지나간 것은 늘 더 나아 보였고, 앞사람이 먼저 와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같아지는 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질을 더 보태야 사람들의 헤아림 속에서 앞사람이 차지한 높은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
154 쉽게 믿지도, 쉽게 마음을 주지도 말라. 무르익은 사람은 믿기를 더디 하는 데서 알아본다. 거짓말은 예사이니 믿는 일은 예사롭지 않게 하라. 가볍게 움직인 사람은 나중에 낯을 붉힌다. 그러나 남이 하는 말을 의심한다는 티를 내서는 안 되니, 말하는 사람을 속이는 자나 속은 자로 대하는 셈이어서 무례를 넘어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더 큰 해는 따로 있다. 믿지 않는 것은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는 표지다. 거짓말쟁이에게는 두 가지 화가 있으니, 남을 믿지도 못하고 남에게 믿기지도 않는다. 듣는 사람은 판단을 미루는 것이 슬기롭고, 말을 전하는 사람은 믿음의 보증을 그 말의 출처에 미루면 된다. "쉽게 마음을 주는 것도 분별없음의 한 가지다." 말로도 거짓을 하지만 일로도 거짓을 하며, 일로 하는 속임이 더 해롭다.
155 격정에 빠지는 기술. 할 수만 있다면 분별 있는 성찰이 범속한 충동을 앞질러 막게 하라. 분별 있는 사람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격정에 빠질 때의 첫걸음은 자기가 격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니, 그래야 감정을 다스리며 들어가 노여움이 필요한 데까지만 재어 보고 그 이상은 가지 않는다. 이 높은 성찰을 지닌 채 노여움에 들어가고 노여움에서 나오라. 멈출 줄 알라, 제때 제대로. 달리기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멈추는 일이다. 광기의 고비에서 슬기를 지키는 것은 판단력의 큰 증거다. 지나친 격정은 모두 이성에서 미끄러져 내려가지만, 이 노련한 주의가 있으면 이성을 짓밟는 일도, 양식(良識, sindéresis)의 경계를 넘는 일도 없다. 격정을 잘 다루려면 늘 주의의 고삐를 쥐고 가야 한다. 그러면 말 위에서 슬기로운 첫 사람3이, 어쩌면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
156 골라서 사귄 벗. 벗은 사려로 시험하고 운으로 검증해야 하며, 의지뿐 아니라 지성의 심사도 거쳐야 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잘 골라야 할 일인데도 가장 마음을 덜 쓰는 일이다. 어떤 벗은 비집고 들어와서 생기고, 대부분은 우연히 생긴다. 사람은 그가 사귀는 벗으로 정의된다. 현자가 무지한 자와 뜻이 맞은 적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즐겨 찾는다고 해서 가깝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니, 그 사람의 그릇을 믿어서라기보다 그 익살이 주는 즐거운 한때 때문일 수 있다. 정실에서 난 우정이 있고 사통으로 난 우정이 있다. 사통의 우정은 쾌락을 위한 것이고, 정실의 우정은 좋은 성취를 많이 낳는다. 사람을 보고 사귄 벗은 적고, 운을 보고 사귄 벗은 많다. 벗 하나의 좋은 지성이 다른 많은 이의 선한 의지보다 더 쓸모 있다. 그러니 운수에 맡기지 말고 골라야 한다. 지혜로운 벗은 근심을 덜어 줄 줄 알고, 어리석은 벗은 근심을 실어 온다. 벗을 잃고 싶지 않거든 그들에게 너무 큰 운을 바라지도 말라.
157 사람을 잘못 보지 말라, 그보다 나쁘고 그보다 쉬운 착각은 없다. 값에 속는 편이 물건에 속는 편보다 낫다. 사람만큼 속을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도 없다. 사물을 이해하는 것과 사람을 아는 것은 다르니, 사람의 기질을 꿰뚫고 사람마다 다른 기분을 가려내는 것은 큰 철학이다. 책을 공부해 두듯 사람도 공부해 두어야 한다.
158 벗을 쓸 줄 알라. 여기에도 사려의 기술이 있으니, 어떤 벗은 멀리 둘 때 좋고 어떤 벗은 가까이 둘 때 좋으며, 때로는 마주 앉아 이야기하기에는 좋지 않던 벗이 편지를 주고받기에는 좋다. 곁에 있을 때는 참을 수 없던 흠도 거리가 걸러 준다. 벗에게서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쓸모도 얻어야 한다. 벗은 선(善)의 세 성질, 다른 이들 말로는 존재의 세 성질4을 갖추어야 한다. 하나이고, 선하고, 참되어야 한다. 벗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벗은 드물고, 고를 줄 모르면 더 드물어진다. 벗을 지킬 줄 아는 것은 벗을 만드는 것보다 큰일이다. 오래갈 벗을 찾으라. 처음에는 새 벗이라도 오랜 벗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족하다. 가장 좋은 벗은 단연 간이 잘 밴 벗이다. 겪어 보느라 소금 한 섬5을 다 먹더라도. 벗 없이 사는 것만 한 사막은 없다. 우정은 좋은 것을 불리고 나쁜 것을 나누며, 사나운 운에 맞서는 하나뿐인 약이요 영혼이 숨 돌릴 곳이다.
159 어리석은 자를 참을 줄 알라. 현자는 늘 참을성이 모자랐다. 지식을 더하는 사람은 조바심도 더하기6 때문이다. 많이 아는 사람은 만족시키기 어렵다. 에픽테토스7에 따르면 삶의 가장 큰 규칙은 참는 것이고, 그는 지혜의 절반을 여기에 모았다. 어리석음을 모두 견뎌야 한다면 참을성이 무척 많이 들 것이다. 때로는 가장 많이 기대는 사람에게서 가장 많이 참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를 이기는 연습에 요긴하다. 참음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평화가 나고, 그 평화가 이 땅의 행복이다. 참을 기개가 없는 사람은 자기 안으로 물러나 숨을 일이다. 자기 자신만큼은 견딜 수 있다면 말이다.
160 주의 깊게 말하라, 맞수에게는 경계하느라, 다른 이에게는 품위를 지키느라. 말을 내보낼 시간은 언제나 있지만, 거두어들일 시간은 없다. 유언장을 쓰듯 말해야 한다. 말이 적을수록 송사도 적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 중요한 일을 위해 연습해 두어야 한다. 감춤에는 신성의 빛이 어린다. 말이 헤픈 사람은 지기도 쉽고 설복당하기도 쉽다.
161 달콤한 흠을 알라. 가장 완전한 사람도 흠 몇 가지는 피하지 못하고, 그 흠과 혼인하거나 첩살림을 차린다. 재치에도 흠이 있고, 재치가 클수록 흠도 크다. 아니면 더 눈에 띄거나. 당사자가 그 흠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흠을 사랑해서다. 두 가지 화가 겹친다. 격정에 빠지는 것, 그것도 악덕에 빠지는 것. 그런 흠은 완전함에 찍힌 점이어서, 바깥 사람들의 눈에 거슬리는 만큼 당사자의 귀에는 듣기 좋게 울린다. 여기서 자기를 이기고 다른 돋보이는 점들에 이 행복을 보태 주는 것이 늠름한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걸려, 감탄하는 숱한 좋은 점을 기려야 할 때 눈에 걸리는 곳에서 멈추어 서서는 그 흠을 다른 자질에까지 흠이 되는 것처럼 헐뜯는다.
162 경쟁심과 적의를 이길 줄 알라. 업신여김은 분별 있는 일이라 해도 이제는 모자라다. 아량이 더 낫다. 헐뜯는 사람을 좋게 말해 주는 일에는 아무리 갈채를 보내도 모자라다. 공로와 자질로 하는 복수보다 영웅다운 복수는 없다. 공로와 자질은 시샘을 이기고 시샘을 괴롭힌다. 행복 하나하나가 나쁜 감정을 묶은 밧줄을 한 번 더 죄는 일이요, 겨룸의 상대가 누리는 영광은 맞수에게 지옥이다. 남의 행복에서 독을 얻는 것, 이것을 가장 큰 형벌로 친다. 시샘하는 사람은 한 번에 죽지 않고 시샘받는 사람이 갈채의 함성 속에 살아 있는 횟수만큼 죽으니, 한쪽 명성의 영생과 다른 쪽의 영벌이 서로 겨룬다. 한쪽은 영광을 누리느라 죽지 않고, 다른 쪽은 고통을 겪느라 죽지 않는다. 명성의 나팔은 한 사람에게는 불멸을 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을 알리며, 시샘에 매달린 그를 목매달림의 형벌에 처한다.
163 불행한 사람을 동정하다가 운 좋은 사람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된다. 어떤 이의 불운은 흔히 다른 이의 행운이니, 다른 많은 사람이 불운하지 않았다면 한 사람이 행운을 누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으레 사람들의 호의를 얻는다. 사람들은 쓸모없는 총애로 운의 냉대를 벌충해 주려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잘나갈 때 모두에게 미움받던 사람이 기울었을 때 모두에게 동정받는 것을 보았다. 높이 오른 사람에게 품던 복수심이 떨어진 사람에게 품는 연민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영민한 사람은 운수의 패가 어떻게 섞이는지 살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불운한 사람하고만 다니며, 어제 운이 좋다고 피하던 사람을 오늘은 불행하다고 곁에 둔다. 그것은 때로 타고난 바탕이 고귀하다는 증거는 되어도 영민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164 몇 가지는 공중에 띄워 보라. 받아들여지는지 시험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보려는 것이다. 잘될지, 마음에 들지 미심쩍은 일이면 더욱 그렇다. 그러면 잘 풀릴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밀고 나갈지 물러설지 정할 여지가 남는다. 이렇게 사람들의 의지를 떠보면 주의 깊은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 발을 딛고 섰는지 알게 되니, 청할 때도 바랄 때도 다스릴 때도 이만한 대비가 없다.
165 깨끗하게 싸우라. 슬기로운 사람도 싸움에 떠밀릴 수는 있지만, 더러운 싸움에 떠밀리지는 않는다. 사람은 저마다 남이 떠미는 대로가 아니라 제 사람됨대로 행해야 한다. 경쟁심 속에서도 보이는 아량은 갈채받는다. 힘으로 이기려고만 싸울 것이 아니라 싸우는 품새로도 이겨야 한다. 비열하게 이기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항복이다. 너그러움은 언제나 우월함이었다. 올바른 사람은 금지된 무기를 쓰지 않는다. 끝난 우정에서 얻은 무기를 갓 시작된 미움에 쓰는 것이 바로 그런 짓이니, 믿고 맡긴 것을 복수에 써서는 안 된다. 배신의 냄새가 나는 것은 모두 좋은 이름을 더럽힌다. 지킬 것이 많은 인물에게서는 티끌만 한 비천함도 더 낯설다. 고귀함과 비천함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아량과 너그러움과 신의가 세상에서 사라지더라도 제 가슴속에서는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으라.
166 말의 사람과 행동의 사람을 가려내라. 벗을, 사람을, 직분을 가려내는 일처럼 이것도 더없이 정밀해야 한다. 이것들은 서로 크게 다르다. 좋은 말은 없되 나쁜 행동도 없는 것은 나쁘다. 나쁜 말은 없되 좋은 행동도 없는 것은 더 나쁘다. 바람일 뿐인 말을 먹고 살 수는 없고, 예절을 먹고 살 수도 없다. 예절은 예절 바른 속임이다. 등불로 새를 잡는 것이야말로 진짜 눈을 홀리는 일이다. 허영에 들뜬 사람은 바람을 받고도 흡족해하지만, 말은 행동의 담보여야 하고 그러니 그만한 값을 지녀야 한다. 열매는 맺지 않고 잎만 내는 나무는 대개 고갱이가 없다. 그런 나무도 알아 두어야 한다. 어떤 나무는 쓸모 때문에, 어떤 나무는 그늘 때문에.
167 스스로 도울 줄 알라. 큰 곤경에서 굳센 마음보다 좋은 길동무는 없고, 마음이 약해지면 마음 가까이 있는 힘들이 그 몫을 메워야 한다. 자기를 부릴 줄 아는 사람에게는 고생이 줄어든다. 운에 굴복하지 말라. 굴복하면 운이 끝내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서 자기를 거의 돕지 못하고, 견딜 줄 몰라 고난을 곱절로 만든다. 자기를 이미 아는 사람은 숙고로 제 약함을 구하고, 사려 깊은 사람은 모든 것에서, 별에게서마저 이겨 나온다.
168 어리석음의 괴물이 되지 말라. 허영에 들뜬 사람, 잘난 체하는 사람, 고집쟁이, 변덕쟁이, 제 생각에 갇힌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꾸며 대는 사람, 익살꾼, 새것에 들뜬 사람, 엉뚱한 소리를 즐기는 사람, 패를 가르는 사람, 그리고 절도 없는 온갖 사람이 다 그런 괴물이다. 모두 주책의 괴물이다. 마음의 기괴함은 모두 몸의 기괴함보다 흉하다. 더 높은 아름다움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흔한 어지러움을 누가 바로잡겠는가? 양식이 없는 곳에는 이끌어 줄 여지가 남지 않고, 남의 비웃음을 돌아보고 살펴야 할 자리에 상상 속 갈채를 두고 그릇되게 품은 자만이 들어앉는다.
169 백 번 맞히기보다 한 번 그르치지 않는 데 주의하라. 눈부신 해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지만, 가려진 해는 모두가 쳐다본다. 범속한 입방아는 맞힌 것은 세지 않고 그르친 것만 센다. 선한 사람이 갈채로 알려지기보다 악한 사람이 험담으로 더 잘 알려진다. 많은 사람이 죄를 짓고서야 알려졌으며, 모든 성취를 다 모아도 아주 작은 흠 하나를 지우기에는 모자란다. 누구나 착각에서 깨어나 알아 두라. 적의는 나쁜 일은 모두 적어 두고 좋은 일은 하나도 적지 않는다.
170 모든 일에 예비를 남겨 두라. 그래야 자기의 무게를 지킨다. 가진 밑천을 다 써서는 안 되고 있는 힘을 매번 다 꺼내서도 안 되며, 앎에도 남겨 둔 몫이 있어야 하니, 그것이 완전함을 곱절로 만드는 일이다. 일이 잘못될 고비에 기댈 곳이 언제나 있어야 한다. 구원군이 공격보다 더 큰 일을 한다. 값어치도 있고 신용도 주기 때문이다. 슬기는 언제나 안전한 쪽으로 나아갔다. 이런 뜻에서는 저 매콤한 역설도 참이다. 절반이 전체보다 많다8.
171 총애를 헛되이 쓰지 말라. 큰 벗은 큰 고비를 위해 있다. 큰 신뢰를 작은 일에 써서는 안 된다. 호의를 허비하는 일이다. 신성한 닻9은 언제나 마지막 위험을 위해 아껴 둔다. 작은 일에 큰 것을 마구 쓰면 나중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힘이 되어 주는 사람만큼 힘이 되는 것은 없고 오늘날 총애만큼 귀한 것도 없으니, 총애는 세상에서 일을 이루기도 허물기도 하며 재치를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 자연과 명성이 현자에게 베푼 것을 운은 시샘했다. 재산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지키고 붙들어 둘 줄 아는 것이 더 낫다.
172 잃을 것이 없는 사람과 맞붙지 말라. 기울어진 싸움이다. 상대는 부끄러움마저 잃고 왔으니 거리낌 없이 덤비고, 가진 것을 다 털어 버려 더 잃을 것이 없으니 온갖 주책에 몸을 던진다. 값을 매길 수 없는 명망을 그토록 잔인한 위험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얻는 데 여러 해가 걸린 명망도 하찮은 체면 한 점 때문에 한순간에 잃는다. 무안 한 번이 빛나는 땀을 숱하게 얼려 버린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잃을 것이 많아 멈칫한다. 자기 신용을 살피다 보니 상대의 신용도 살피고, 주의하며 나서니 조심스럽게 나아가며, 그 덕에 분별이 제때 물러나 신용을 안전한 곳에 거두어들일 시간을 얻는다. 이긴다 해도, 잃을 위험에 몸을 내놓은 순간 이미 잃은 것은 되찾지 못한다.
173 교제에서 유리처럼 굴지 말라. 우정에서는 더욱. 어떤 사람은 아주 쉽게 깨져 속이 무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자기 자신은 서운함으로, 남들은 짜증으로 가득 채운다. 그 성품이 눈동자보다 여려서 농담으로도 진심으로도 건드릴 수 없다. 티끌 하나에도 상하니 탓할 거리까지 갈 것도 없다. 그런 사람과 사귀는 이는 늘 그 여린 데를 살피며 무척 조심해야 하고, 아주 가벼운 무안에도 언짢아하니 그들 앞에서는 바람결까지 살펴 주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대개 제멋대로이고, 제 입맛의 노예라서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짓밟으며, 하찮은 제 체면을 우상처럼 섬긴다. 사랑하는 사람(amante)의 성품은 견디고 버티는 데서 그 절반이 금강석(diamante)이다.
174 서둘러 살지 말라. 일을 나눌 줄 아는 것이 일을 누릴 줄 아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삶은 남았는데 행복은 바닥난다. 즐거움을 누리지 못해 그르쳐 놓고는, 한참 앞서가 버린 뒤에야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삶의 역마꾼이니, 누구에게나 흐르는 시간의 달음박질에 저마다 타고난 허둥거림까지 보탠다. 평생 걸려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을 하루에 삼키려 든다. 행복을 앞당겨 살며 다가올 해들을 먹어 치우고, 그렇게 서두르니 무엇이든 금세 끝장낸다. 알고 싶어 하는 데도 절도가 있어야 어설프게 알지 않는다. 날은 많고 행운은 적다. 누릴 때는 천천히, 일할 때는 서둘러. 공적은 해치우면 좋고, 즐거움은 해치우면 나쁘다.
175 알찬 사람. 알찬 사람은 알차지 않은 사람에게 흡족해하지 않는다. 알맹이 위에 서지 않은 탁월함은 불행하다. 사람처럼 보인다고 다 사람은 아니다. 속임수로 된 사람이 있으니, 망상으로 잉태해 사기를 낳는다. 그들과 닮은 사람들이 또 있어 그들을 떠받치는데, 이들은 속임수가 약속하는 불확실한 것은 많다고 더 좋아하고 진실이 보장하는 확실한 것은 적다고 덜 좋아한다. 결국 그들의 변덕은 탈이 난다. 올곧음이라는 바탕이 없기 때문이다. 참된 명망은 오직 진실만이 줄 수 있고, 알맹이만이 쓸모가 된다. 사기 하나에는 다른 사기가 숱하게 필요하니, 건물 전체가 망상이고 허공에 세웠으니 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엉터리는 늙도록 가는 법이 없다. 약속하는 것이 많다는 것만 보아도 의심하기에 족하다. 지나치게 많은 것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176 알라, 아니면 아는 사람의 말을 들으라. 지성 없이는 살 수 없으니 제 것이든 빌린 것이든 있어야 하는데, 세상에는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고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리석음의 흠은 고칠 길이 없다. 무지한 사람은 자기를 모르니 자기에게 모자란 것을 찾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현자라고 믿지만 않았어도 현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슬기의 신탁은 드문데도 하는 일 없이 지낸다. 아무도 물으러 오지 않기 때문이다. 조언을 구한다고 위대함이 줄지도 않고 그릇이 의심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조언을 잘 구하면 그릇이 신용을 얻는다. 이치로 다투라, 불운과 다투지 않으려면.
177 교제에서 허물없이 굴지 말라. 스스로 그렇게 굴지도 말고, 남이 그렇게 굴게 두지도 말라. 허물없이 구는 사람은 올곧음이 주던 우위를 곧 잃고, 이어서 존중도 잃는다. 별은 우리와 스치지 않으니 그 광채를 지킨다. 신성에는 체통이 따라야 하고, 인간다움은 무엇이든 업신여김을 부른다. 사람의 일은 많이 가질수록 하찮게 여겨지니, 가까이 나누다 보면 조심해서 가려 두던 불완전함까지 나누게 되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허물없이 지내서는 안 된다. 윗사람과는 위험해서, 아랫사람과는 품위가 떨어져서 안 되고, 어리석어서 뻔뻔한 데다 베푼 총애를 총애로 알지 못한 채 당연히 받을 몫으로 여기는 천한 무리와는 더욱 안 된다. 헤픈 것은 범속함에서 뻗은 가지다.
178 마음을 믿으라. 검증된 마음이면 더욱. 마음이 하는 말을 거스르지 말라. 마음은 흔히 가장 중요한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집 안의 신탁이다. 많은 사람이 자기가 두려워하던 것으로 죽었다. 그러나 손쓰지 않고 두려워만 해서 무엇에 쓰랴? 어떤 사람은 남보다 뛰어난 타고난 바탕 덕에 마음이 무척 충직해서, 그 마음이 늘 미리 일러 주고 불행이 다가오면 경종을 울려 손을 쓰게 한다. 화를 맞아들이러 나가는 것은 슬기가 아니다. 그러나 화를 이기려고 마주 나가는 것은 슬기다.
179 비밀을 지키는 힘은 그릇의 봉인이다. 비밀 없는 가슴은 펼쳐 놓은 편지다. 바닥이 깊은 곳에 깊은 비밀이 있으니, 그런 곳에는 중요한 것이 가라앉을 너른 품과 후미가 있다. 이 힘은 자기를 크게 다스리는 데서 나오며, 여기서 자기를 이기는 것이 참된 승리다. 속을 털어놓은 상대의 수만큼 그들에게 공물10을 바친다. 분별의 건강은 안의 절제에 달려 있다. 비밀을 지키는 힘이 맞는 위험은 남의 떠보기이니, 비틀어 짜내려고 반박하기도 하고 가장 입이 무거운 주의 깊은 사람마저 튀어나오게 하려고 슬쩍 던지는 말11을 쓰기도 한다. 할 일은 말하지 말고, 말할 일은 하지 말라.
180 적이 할 법한 일에 맞추어 움직이지 말라. 어리석은 자는 무엇이 이로운지 깨닫지 못하니 슬기로운 사람이 짐작하는 대로 하지 않고, 사려 깊은 사람은 간파당하고 대비까지 된 의도를 뒤집으려 할 것이니 역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은 양쪽에서 따져 보고 이쪽저쪽으로 뒤집어 보아, 지붕에 두 비탈을 내듯 마련해 두어야 한다. 생각은 사람마다 갖가지다. 어느 쪽에도 기울지 말고 주의를 기울이라. 일어날 일보다 일어날 수 있는 일에.
181 거짓말은 하지 말되, 참말을 다 하지도 말라. 진실만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은 없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심장에서 피를 뽑는 일이다. 진실을 말할 줄 아는 데도, 묻어 둘 줄 아는 데도 그만큼 솜씨가 든다. 거짓말 하나로 올곧음이 쌓은 신용을 모두 잃는다. 속은 사람은 모자라다는 말을, 속인 사람은 못됐다는 말을 듣는데, 못된 쪽이 더 나쁘다. 참말이라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나에게 중요해서, 어떤 것은 남에게 중요해서다.
182 누구에게나 한 알의 대담함을 지니는 것은 중요한 슬기다. 남을 헤아리는 마음을 눅여 두려워할 만큼 높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하며, 상상에 마음을 내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사귀어 보기 전까지는 대단해 보이지만, 가까이 겪어 보면 존중보다는 깨어남(desengaño)을 얻었다. 누구도 사람이라는 좁은 한계를 넘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이 하나씩 있다. 어떤 이는 재치에, 어떤 이는 천성에. 지위는 겉보기 권위를 줄 뿐 사람 자신의 권위가 따르는 일은 드무니, 운수는 흔히 직책의 높음을 공로의 낮음으로 앙갚음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상상은 언제나 앞질러 가서 사물을 실제보다 훨씬 크게 그린다. 있는 것만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는 것까지 품는다. 경험으로 깨어난 이성이 상상을 바로잡게 하라. 그러나 어리석음이 대담해서도, 덕이 겁을 먹어서도 안 된다. 단순함에게도 자신감이 도움이 되었다면, 값어치와 앎에게는 얼마나 더 도움이 되겠는가!
183 생각을 너무 굳게 움켜쥐지 말라. 어리석은 자는 모두 제 생각에 갇혀 있고, 제 생각에 갇힌 자는 모두 어리석다. 소견이 그를수록 고집은 세다. 자기가 옳은 것이 뻔한 경우에도 물러서는 것이 선량한 마음이니, 그래도 그에게 이치가 있었음은 다들 알고 물러서는 아량은 다들 알아준다. 고집으로 버티다 잃는 것이 이겨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많다. 그것은 진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무례를 지키는 것이다. 설득하기 어려운 쇠머리가 있고 그 극단은 고칠 길이 없는데, 거기에 변덕과 제 생각에 갇힌 고집까지 겹치면 어리석음과 풀 수 없는 혼인을 맺어 버린다. 굳셈은 의지에 있어야지 판단력에 있어서는 안 된다. 예외는 있다. 지고 말 일을 그냥 두지 않으려는 경우, 두 번 지지 않으려는 경우다. 한 번은 소견에서, 또 한 번은 실행에서.
184 격식을 따지지 말라, 왕에게서조차 그런 티 내기는 별난 짓으로 소문났다. 체면을 따지는 사람은 성가시고, 이 까다로움에 물든 나라도 있다. 어리석음의 옷은 이런 체면의 바늘땀으로 꿰매니, 그런 사람은 제 체면을 우상처럼 섬기면서도 무엇이든 그 체면을 상하게 할까 겁내어 그 체면이 하찮은 것 위에 서 있음을 드러낸다. 존경받도록 마음 쓰는 것은 좋지만, 인사치레의 대가로 통해서는 안 된다. 격식 없는 사람에게 뛰어난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예절을 꾸며서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자잘한 체면에 매달리는 사람은 큰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185 신용을 단 한 번의 시험에 걸지 말라, 그 한 번이 잘못되면 손해를 되돌릴 수 없다. 한 번쯤 그르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첫 번째는 더욱 그렇다. 사람이 늘 때를 만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날이 있다'는 말이 생겼다. 그러니 두 번째 시도를 첫 번째에 받쳐 두어, 첫 번째를 그르치면 두 번째가 그것을 메워 주고 첫 번째를 맞히면 첫 번째가 두 번째를 미리 갚아 주게 하라. 언제나 더 나아질 길이 있어야 하고, 더 높은 데 호소할 길이 있어야 한다. 일은 우연에, 그것도 숱한 우연에 달려 있어서 잘 풀리는 행복은 드물다.
186 흠을 알아보라, 아무리 권위를 등에 업었더라도. 올곧은 사람은 악덕이 비단옷을 걸쳤더라도 악덕을 알아보아야 한다. 악덕은 때로 금관을 쓰지만 그렇다고 그 잘못12을 감추지는 못한다. 그 사람이 고귀하다고 해서 악덕이 비천함의 종살이를 벗지는 못한다. 악덕이 돋보이는 자리에 놓일 수는 있어도, 악덕이 돋보임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저 영웅에게 저런 흠이 있었다는 것은 보면서, 그 흠 때문에 영웅이 된 것이 아님은 보지 못한다. 윗사람의 본보기는 말재주가 어찌나 좋은지 추함마저 남에게 설득해 낸다. 아첨은 때로 얼굴의 추함까지 흉내 냈으나, 그런 추함이 위대한 사람에게서는 가려져도 비천한 사람에게서는 혐오받는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다.
187 좋은 일은 모두 손수 하고, 미움받을 일은 모두 남을 시켜 하라. 앞의 것으로는 애정을 얻고, 뒤의 것으로는 적의를 비켜 간다. 큰 사람에게는 은혜를 입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큰 즐거움이다. 그것이 너그러움의 행복이다. 남을 언짢게 하고 자기는 언짢아지지 않는 일은 드물다. 가여워서든 고까워서든. 윗자리의 원인은 어르거나 으르지 않고는 움직이지 않는다. 선은 직접 내리고, 악은 남을 거쳐 내리라. 불만의 매가 떨어질 자리를 마련해 두라. 그 매란 미움과 험담이다. 범속한 무리의 분노는 흔히 개의 분노와 같아서, 제가 다친 까닭은 모른 채 연장에 덤벼들고, 연장은 주된 허물이 없는데도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벌을 받는다.
188 칭찬할 거리를 지니고 다니라. 그것은 안목의 신용을 세워 주니, 그 안목이 아주 좋은 것에 길들어 있음을 보여 주고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높이 칠 때도 믿을 만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앞서 완전함을 알아본 사람은 나중에도 완전함을 높이 칠 줄 안다. 이야기할 거리와 본받을 거리를 주고, 갈채받는 식견을 퍼뜨린다. 눈앞에 있는 이들의 완전함에 예절을 파는 노련한 솜씨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늘 헐뜯을 거리를 지니고 다니며, 없는 사람을 업신여겨 있는 사람에게 아첨한다. 겉만 보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먹힌다. 이 사람 앞에서 저 사람을 몹시 헐뜯는 수를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어제의 극치보다 오늘의 평범을 더 높이 치는 것을 정략으로 삼는다. 주의 깊은 사람은 이렇게 다가오는 묘수를 알아보아 한쪽의 과장에 기죽지도 다른 쪽의 아첨에 우쭐하지도 말아야 하며, 그들이 이쪽에서나 저쪽에서나 똑같이 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말뜻을 뒤바꾸어 언제나 자기가 선 자리에 맞춘다.
189 남의 결핍을 이용하라. 결핍이 욕망에 이르면 가장 잘 듣는 조임쇠가 된다. 철학자들은 결핍을 무(無)라 했고 정치가들은 전부라 했다. 정치가들이 결핍을 더 잘 알았다. 어떤 사람은 남의 욕망을 디딤돌 삼아 제 목적을 이룬다. 기회를 이용하고, 얻기 어렵게 만들어 입맛을 돋운다. 가진 것의 미지근함보다 격정의 몸부림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가로막힐수록 욕망은 더 달아오른다. 뜻을 이루는 큰 묘수는 의존을 남겨 두는 것이다.
190 무엇에서든 위안을 찾으라. 쓸모없는 사람에게도 위안이 있으니, 오래 산다는 것이다. 위안 없는 고생은 없다. 어리석은 자의 위안은 운이 좋다는 것이고, 그래서 '못난 여자의 행운'13이라는 말도 생겼다. 오래 살려면 값어치가 적은 것이 한 방법이다. 금 간 그릇은 끝내 깨지지 않고 오래 버텨 사람을 짜증 나게 한다. 운은 가장 중요한 사람들을 시샘하는 듯하니, 쓸모없는 사람에게는 오래 사는 것을, 중요한 사람에게는 짧게 사는 것을 짝지어 주어, 중요한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은 끝없이 남는다. 그렇게 보여서든, 정말 그래서든. 불운한 사람은 운수와 죽음이 입을 맞추어 잊어버리는 듯하다.
191 지나친 예절에 흡족해하지 말라, 그것은 속임의 한 가지다. 어떤 사람은 홀리는 데 테살리아의 약초14가 필요 없으니, 모자를 한 번 멋지게 벗어 드는 것만으로 어리석은 자들을, 아니 허영에 들뜬 사람들을 홀린다. 체면에 값을 매기고는 좋은 말 몇 마디의 바람으로 값을 치른다. 모든 것을 약속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셈이며, 약속은 어리석은 자를 미끄러뜨리는 비탈이다. 참된 예절은 갚아야 할 빚이고, 꾸민 예절은 속임이며, 유난스러운 예절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품위가 아니라 의존이다. 그들이 절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운이다. 아첨도 알아본 자질이 아니라 바라는 이득에 바친다.
192 크게 평화로운 사람, 오래 사는 사람. 살려면 남도 살게 두라. 평화로운 사람은 살 뿐 아니라 다스린다. 듣고 보되 입은 다물어야 한다. 다툼 없는 낮이 단잠 드는 밤을 만든다. 오래 살고 즐겁게 사는 것은 두 사람 몫을 사는 것이요, 평화의 열매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다. 무엇이든 정색하고 받아들이는 것만큼 엉뚱한 짓은 없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 가슴을 꿰뚫게 두는 것이나, 정작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이 안으로도 들어오지 않게 두는 것이나 똑같이 어리석다.
193 남의 일을 들고 들어와 제 일을 들고 나가는 사람을 조심하라. 꾀를 막는 데는 알아차림만 한 것이 없다. 눈치 빠른 사람에게는 잘 알아듣는 사람으로 맞서라. 어떤 사람은 제 일을 남의 일로 꾸미니, 의도를 풀 해독표가 없으면 남의 이익을 불 속에서 꺼내 주느라 제 손을 데는 일에 걸핏하면 말려든다.
194 자기와 자기 일을 슬기롭게 헤아리라. 삶을 시작할 때는 더욱. 누구나 자기를 높이 생각하며, 보잘것없는 사람일수록 더하다. 저마다 제 운을 꿈꾸고 자기를 경이로 상상한다. 희망은 터무니없이 부풀어 오르고 나중에 경험은 그 가운데 아무것도 이루어 주지 않으니, 참된 현실에 깨어나는 일이 그 헛된 상상에게는 고문이 된다. 슬기로 이런 헛짚음을 바로잡으라. 가장 좋은 것을 바랄 수는 있지만, 무엇이 오든 담담히 받으려면 언제나 가장 나쁜 것을 예상해야 한다. 과녁을 맞히려고 조금 높이 겨누는 것은 솜씨지만, 빗나갈 만큼 높이 겨누어서는 안 된다. 직분을 처음 맡을 때 이렇게 헤아림을 고쳐 잡는 일이 꼭 필요하다. 경험 없는 자만은 흔히 과녁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어리석음에 두루 듣는 약으로 건전한 머리만 한 것이 없다. 저마다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와 자기 신분을 알라. 그러면 헤아림을 현실에 맞출 수 있다.
195 높이 칠 줄 알라. 무엇에선가 남의 스승이 되지 못할 사람은 없고, 앞선 사람을 앞서지 못할 사람도 없다. 사람마다 그에게서 얻을 것을 얻어 낼 줄 아는 것은 쓸모 있는 앎이다. 현자는 모든 사람을 높이 친다. 사람마다 지닌 좋은 점을 알아보고, 일이 잘되기까지 얼마나 드는지 알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람을 업신여긴다. 좋은 것을 몰라서, 그리고 나쁜 것을 골라서.
196 자기 별을 알라. 별 하나 없을 만큼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은 없다. 불운하다면 자기 별을 몰라서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왜 그런지도 모르게 군주와 권세가 곁에 자리를 얻으니, 그 운수가 총애를 쉽게 얻게 해 주었을 뿐이고 솜씨가 할 일은 그 운수를 거드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은 현자들의 호의를 얻는다. 어떤 사람은 이 나라보다 저 나라에서 더 받아들여졌고, 저 도시보다 이 도시에서 더 좋게 보였다. 어떤 직분과 신분에서 다른 데보다 행운이 더 따르기도 한다. 공로가 같은데도, 아니 똑같은데도 말이다. 운수는 제 마음대로, 제가 원할 때 패를 섞는다. 저마다 자기 운수를 알고, 자기의 미네르바15도 알아야 한다. 여기에 잃느냐 얻느냐가 걸려 있다. 운수를 따르고 거들 줄 알라. 둘을 뒤바꾸지 말라. 가까이서 부르는 작은곰자리16를 두고 북쪽을 잘못 잡는 일이 될 것이다.
197 어리석은 자에게 얽히지 말라. 어리석은 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자이고, 알아보고도 떼어 내지 않는 사람은 더 어리석은 자다. 그들은 겉으로 사귀기에도 위험하고, 속을 털어놓기에는 해롭다. 한동안은 제 조심과 남의 단속으로 버티더라도 끝내는 어리석은 짓을 하거나 어리석은 말을 하고, 늦어졌다면 그것은 더 거창하게 하려고 늦어진 것이다. 제 신용이 없는 사람이 남의 신용을 도울 수는 없다. 그들은 더없이 불운하다. 그것은 어리석음 위에 덧난 혹이며, 어리석음과 불운은 둘 다 옮는다. 그들에게 덜 나쁜 점이 딱 하나 있으니, 슬기로운 사람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지만 그들은 현자에게 식견을 주든 본때를 보여 주든 큰 도움이 된다.
198 자기를 옮겨 심을 줄 알라. 값어치를 인정받으려면 떠나야 하는 나라가 있고, 큰 자리일수록 더하다. 고국은 바로 그 탁월한 사람들의 계모이니, 시샘이 제 고향 땅인 듯 그곳을 다스리고, 사람들은 그가 이른 위대함보다 그가 처음에 지녔던 불완전함을 더 잘 기억한다. 바늘 하나도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가 존중을 얻었고, 유리 조각 하나가 옮겨 왔다는 것만으로 금강석을 업신여김받게 했다. 바깥 것은 모두 존중받는다. 멀리서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 만들어져 완전한 모습으로 손에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 구석에서는 업신여김을 받다가 오늘날 세상의 자랑이 된 사람들을 보았다. 고향 사람에게도 바깥사람에게도 존중받는데, 바깥사람은 멀리서 보아서, 고향 사람은 멀리 있어서다. 과수원의 통나무일 때 알던 사람은 제단 위의 조각상을 제대로 우러르지 못한다.
199 비집고 들어가지 말고 슬기롭게 자기 자리를 만들 줄 알라. 존중에 이르는 참된 길은 공로의 길이다. 솜씨가 값어치 위에 서 있다면 그것은 존중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올곧음만으로는 모자라고 애써 청하기만 하는 것은 비천하니, 그렇게 얻은 것은 진흙투성이로 도착해 명망에 먹칠을 하기 때문이다. 자격을 갖추는 것과 자기를 내세울 줄 아는 것, 그 둘의 중간에 길이 있다.
200 바랄 것을 남겨 두라, 행복해서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몸은 숨 쉬고, 정신은 숨 가쁘게 바란다. 모든 것을 다 가지면 모든 것이 깨어남이요 불만일 것이다. 지성에도 언제나 알 거리가 남아 있어야 호기심이 먹이를 얻는다. 희망은 숨을 불어넣는다. 행복에 배가 터지도록 물리면 죽는다. 상을 줄 때는 결코 다 채워 주지 않는 것이 솜씨다. 바랄 것이 없으면 모든 것이 두렵다. 불행한 행복이다. 욕망이 끝나는 곳에서 두려움이 시작된다.
201 멍청해 보이는 사람은 모두 멍청하고, 멍청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절반은 멍청하다. 어리석음이 세상을 차지해 버렸고 지혜가 조금 있다 해도 하늘의 지혜에 대면 미련함17인데,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기가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남들은 모두 어리석다고 규정하는 사람이다. 현자가 되려면 현자로 보이는 것으로는 모자라고, 스스로 현자로 여기는 것으로는 더욱 모자라다. 자기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는 사람이고, 남들은 보는데 자기는 못 본다는 것을 못 보는 사람이 못 보는 사람이다. 온 세상이 어리석은 자로 가득한데도 자기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 그렇지 않을까 의심하는 사람조차 하나도 없다.
202 말과 행동이 완성된 사내를 만든다. 아주 좋은 것을 말하고 아주 영예로운 것을 행해야 하니, 앞의 것은 머리의 완전함이고 뒤의 것은 마음의 완전함이며, 둘 다 기개의 높음에서 난다. 말은 행동의 그림자다. 말은 여자요 행동은 사내다. 기리는 사람이 되기보다 기림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말하기는 쉽고 행하기는 어렵다. 공적은 삶의 알맹이요, 격언은 그 장식이다. 행동의 탁월함은 남고, 말의 탁월함은 지나간다. 행동은 주의의 열매다. 한쪽은 지혜롭고, 다른 쪽은 공적을 세운다.
203 자기 시대의 탁월한 사람들을 알라. 그들은 많지 않다. 온 세상에 불사조 한 마리, 대장군(Gran Capitán)18 같은 사람 하나, 완벽한 웅변가 하나, 한 세기에 현자 하나, 여러 세기에 탁월한 왕 하나. 평범한 사람은 수로도 값으로도 흔하고, 탁월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드물다. 완전함을 다 갖추어야 하고, 등급이 높을수록 그 끝에 이르기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카이사르와 알렉산드로스에게서 '대(大)'라는 칭호를 빌려 갔지만 헛일이었으니, 행동이 없으면 이름은 한 줌 바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네카 같은 사람은 드물었고, 명성이 기린 아펠레스19는 하나뿐이다.
204 쉬운 일은 어려운 일처럼, 어려운 일은 쉬운 일처럼 손대야 한다. 앞의 것은 자신감이 방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뒤의 것은 자신 없음이 기죽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일을 안 되게 하려면 다 된 일로 여기기만 하면 된다. 반대로 부지런함은 불가능을 평평하게 고른다. 큰일은 깊이 생각하지도 말고 나서기만 하면 된다. 어려움이 눈에 들어오면 머뭇거리게 되기 때문이다.
205 업신여김을 부릴 줄 알라. 무엇을 얻으려면 업신여기는 것이 한 수다. 대개 찾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나중에 무심할 때 손에 들어온다. 이 세상 것은 모두 영원한 것의 그림자라서 그림자의 성질을 나누어 가지니, 쫓는 사람에게서는 달아나고 달아나는 사람은 뒤쫓는다. 업신여김은 또한 가장 노련한 복수다. 현자들의 하나뿐인 격률은 펜으로 자기를 변호하지 않는 것이니, 펜은 자국을 남기고 무례를 벌하기보다 경쟁심을 빛내 주고 말기 때문이다. 자격 없는 자들의 꾀는 큰 사람에게 맞서는 것이다. 바로는 기림받을 자격이 없으니 에둘러서라도 기림받으려는 속셈이다. 뛰어난 상대가 상대해 주지 않았다면 이름도 남기지 못했을 사람이 많다. 잊어 주는 것만 한 복수는 없다. 그들을 제 하찮음의 먼지 속에 묻어 버리는 일이다. 무모한 자들은 세상과 세기의 경이에 불을 질러 영원히 남으려 한다20. 험담을 잠재우는 기술은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맞서면 해를 입고, 믿어 주면 신용을 잃는다. 경쟁심만 흐뭇하게 할 뿐이니, 그런 흠의 그림자 하나만으로도 가장 큰 완전함을 아주 가리지는 못해도 그 빛을 바래게는 하기 때문이다.
206 어디에나 범속한 무리가 있음을 알라, 코린트21 한복판에도, 가장 고귀한 집안에도. 누구나 제 집 문 안에서 그것을 겪는다. 그런데 범속한 무리가 있고, 범속한 무리 위의 범속한 무리(revulgo)가 있으니, 이쪽이 더 나쁘다. 특별한 범속은 깨진 거울 조각처럼 흔한 범속과 성질이 똑같고 더 해롭기까지 해서, 어리석게 말하고 주책없이 헐뜯으니, 무지의 수제자요 어리석음의 대부요 뜬소문의 동맹이다. 그 무리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서는 안 되고, 그 무리가 느끼는 것에는 더욱 그렇다. 그 무리에서 벗어나려면 그 무리를 알아야 한다. 거기 끼는 사람으로서도, 그 표적으로서도. 어리석음은 무엇이든 범속함이고, 범속한 무리는 어리석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207 자제를 지키라. 뜻밖의 일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일을 굽어보고 있어야 한다. 격정의 충동은 슬기를 미끄러뜨리는 비탈이고, 거기서 자기를 잃을 위험이 있다. 사람은 분노나 기쁨의 한순간에, 담담한 여러 시간에 나아갈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가 버린다. 때로는 잠깐 내달렸다가 평생 낯을 붉힌다. 남의 교활한 의도는 이렇게 분별을 시험하는 덫을 놓아 땅을 엿보듯 속마음을 엿본다. 그런 의도는 비밀을 짜내는 조임쇠를 쓰며, 그 조임쇠는 흔히 가장 큰 밑천까지 바닥나도록 짜낸다. 자제를 그 책략을 꺾는 책략으로 삼으라. 다급할 때는 더욱. 격정이 고삐 풀린 말처럼 날뛰지 않게 하려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니, 말 위에서도 슬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크게 슬기로운 사람이다. 위험을 헤아리는 사람은 조심스럽게 간다. 말은 던지는 사람에게는 가벼워 보여도 받아서 저울질하는 사람에게는 무겁다.
208 어리석은 자의 고질로 죽지 말라. 흔히 현자는 슬기가 모자라 죽고, 반대로 어리석은 자는 조언을 배불리 듣고도 죽는다. 어리석게 죽는 것은 생각이 넘쳐 죽는 것이다. 어떤 이는 느끼기 때문에 죽고, 어떤 이는 느끼지 않기 때문에 산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마음 아파 죽지 않아서 어리석고, 어떤 이는 마음 아파 죽어서 어리석다. 너무 많이 알아서 죽는 사람은 어리석다. 이렇게 어떤 이는 알아듣는 탓에 죽고, 어떤 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덕에 산다. 그러나 어리석음으로 죽는 사람은 많아도, 죽는 어리석은 자는 드물다.
209 흔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 아주 특별한 슬기다. 흔한 어리석음은 널리 퍼져 큰 힘을 얻었으니, 저 혼자만의 무지에는 굴복하지 않던 사람도 모두가 함께 빠진 무지에서는 벗어날 줄 몰랐다. 아무도 제 운수에는, 그것이 가장 좋은 운수라도 만족하지 않고, 제 재치에는, 그것이 가장 나쁜 재치라도 불만이 없는 것은 범속함이다. 누구나 제 행복에는 불만이면서 남의 행복은 탐낸다. 또 오늘 사람은 어제의 것을 칭찬하고, 이쪽 사람은 저쪽 것을 칭찬한다. 지나간 것은 모두 더 나아 보이고, 먼 것은 모두 더 높이 쳐진다. 모든 것을 비웃는 사람이나 모든 것에 속을 썩이는 사람이나 똑같이 어리석다.
210 진실을 다룰 줄 알라. 진실은 위험하지만 올바른 사람은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여기에 솜씨가 있어야 한다. 마음을 고치는 노련한 의사들은 진실을 달게 하는 법을 찾아냈으니, 진실이란 깨어남에 닿는 순간 쓴맛 가운데서도 가장 쓴 정수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좋은 말씨가 제 솜씨를 부린다. 같은 진실로 어떤 이는 상대를 어루만지고, 어떤 이는 상대를 두들겨 팬다. 지금 사람에게는 옛사람을 빌려 말해야 한다. 잘 알아듣는 사람에게는 패를 살짝 엿보이는 것으로 족하다. 그래도 안 되면 입을 다물 때가 온다. 군주는 쓴 약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깨어남에 금을 입히는 기술이 있다.
211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기쁨이고,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괴로움이다. 그 가운데 있는 세상에는 둘 다 있다. 우리는 두 극단 사이에 있으니 둘 다 맛본다. 운수는 번갈아 온다. 모든 것이 행복일 수도, 모든 것이 역경일 수도 없다. 이 세상은 영(零)이다. 홀로는 아무 값도 없고, 천국과 나란히 놓으면 큰 값이 된다.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슬기이고, 새것에 들뜨는 것은 현자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연극처럼 갈수록 얽히다가 끝에 가서 풀린다. 그러니 잘 끝맺는 데 주의하라.
212 기술의 마지막 수는 늘 남겨 두라. 그것이 큰 스승의 일이니, 큰 스승은 묘수를 가르치는 바로 그때도 묘수를 쓴다. 언제나 윗사람으로, 언제나 스승으로 남아야 한다. 기술을 전할 때도 기술을 부려야 한다. 주는 샘을 마르게 해서는 안 되듯, 가르치는 샘도 마르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명망과 의존을 지킨다. 남을 즐겁게 할 때나 가르칠 때나, 늘 감탄에 먹이를 주어 키우면서 완전함은 한 걸음씩만 앞으로 내보이라는 저 큰 가르침을 잊지 말고 지켜야 한다. 모든 일에 예비를 두는 것은 살아가고 이기는 큰 규칙이었고, 가장 높은 직분에서는 더욱 그랬다.
213 반박할 줄 알라. 그것은 떠보는 큰 수다. 자기가 말려들려는 것이 아니라 남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감정을 튀어나오게 하는 조임쇠는 이것뿐이다. 미지근하게 믿는 척하는 것은 비밀을 토하게 하는 구토제요, 가장 굳게 닫힌 가슴을 여는 열쇠다. 의지와 판단력을 함께 떠보는 일은 아주 미묘하게 이루어진다. 상대가 수수께끼처럼 던진 말을 영민하게 깔보면 가장 깊은 비밀까지 사냥할 수 있고, 그 비밀을 부드럽게 한 입씩 끌어내어 혀끝까지 올라오게 하고 마침내 꾸민 속임의 그물에 걸려들게 한다. 주의 깊은 사람이 말을 아끼면 상대는 조심하던 것을 내던지고 속내를 드러내니, 그러지 않으면 헤아릴 길 없던 마음이다. 꾸며 낸 의심은 호기심이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아내는 가장 정교한 곁쇠다. 배울 때도 제자가 스승에게 반박하는 것은 좋은 수이니, 스승은 진실을 풀어 밝히고 그 근거를 대려고 더 애쓰게 되고, 이렇게 절도 있는 반박이 온전한 가르침의 계기가 된다.
214 어리석음 하나를 둘로 만들지 말라. 하나를 기우려다 넷을 더 저지르는 일은 아주 흔하다. 주책 하나를 더 큰 주책으로 변명하는 것은 거짓말의 혈통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이 어리석음의 혈통이니, 어느 쪽이든 하나를 버티려면 숱한 다른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쁜 송사는 늘 변호가 더 나빴다. 화 자체보다 더 나쁜 화는 그 화를 덮을 줄 모르는 것이다. 불완전함이 짊어진 짐은 다른 불완전함을 숱하게 이자로 낳는 것이다. 가장 큰 현자도 한 번의 방심에는 빠질 수 있지만 두 번은 아니다. 그것도 지나가다 빠질 뿐 눌러앉지는 않는다.
215 두 번째 의도로 다가오는 사람을 조심하라. 흥정꾼의 책략은 상대의 의지를 방심시켜 놓고 치는 것이다. 의지는 넘어오는 순간 넘어진다. 그들은 의도를 이루려고 의도를 감추고 실행에서 첫째가 되려고 의도를 둘째 자리에 두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곳에서 화살은 빗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의도가 이토록 깨어 있으니 주의도 잠들어서는 안 된다. 의도가 숨으려고 둘째가 되면, 주의는 알아채려고 첫째가 되어야 한다. 조심은 그가 다가오는 꾸밈을 알아차리고, 그가 바라는 지점에 이르려고 이리저리 찔러 보는 끝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하나를 내밀고 다른 것을 노리며, 교묘하게 돌아서 제 의도의 과녁을 맞힌다. 그러니 무엇을 내어 주는지 알아야 하고, 때로는 알아들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216 풀어 말하는 힘을 지니라. 그것은 막힘없는 말솜씨일 뿐 아니라 생각의 활달함(despejo)이다. 어떤 사람은 잘 잉태하고도 잘 낳지 못한다. 맑음이 없으면 영혼의 자식들, 곧 생각과 결정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그릇은 많이 담고 조금 따르는 저 항아리와 같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한다. 의지에 결단이 있다면 지성에는 풀어 밝힘이 있다. 둘 다 큰 탁월함이다. 맑은 재치는 갈채받고 흐린 재치는 알아듣지 못하는 덕에 우러름을 받았으며, 때로는 범속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둡게 말하는 편이 좋을 때도 있다. 그러나 말하는 사람 머릿속에 제 말에 맞는 생각이 없다면, 듣는 사람이 그 말을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217 영원히 사랑하지도, 영원히 미워하지도 말라. 오늘의 벗을 내일의 적으로, 그것도 가장 나쁜 적으로 여기고 믿어야 하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만큼 대비할 때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여겨야 한다. 우정을 버리고 달아난 자에게 무기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 무기로 가장 큰 싸움을 건다. 적에게는 반대로 하라. 화해의 문을 늘 열어 두되, 그 문은 아량의 문이어야 한다. 그 문이 가장 안전하다. 예전의 복수가 나중에 괴로움이 된 적이 있고, 남에게 해코지하며 맛본 기쁨이 슬픔이 된다.
218 오기로가 아니라 주의로 행하라. 오기(tema)는 모두 종기(postema)다. 격정이 낳은 딸이라서 무엇 하나 바르게 한 적이 없다. 모든 것을 작은 싸움으로 만드는 사람이 있다. 교제의 산적이라, 하는 일마다 승리이기를 바라고 평화롭게 나아갈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을 명령하고 다스리는 자리에 두면 해로우니, 다스림을 패거리 싸움으로 만들고 자식처럼 품어야 할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세우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술수로 꾸미고 제 꾸밈의 열매로 얻으려 한다. 그러나 그 엉뚱한 기분이 드러나면 남들은 곧 그들과 겨루고 그들의 망상을 가로막으려 해서,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짜증을 배 터지게 먹고, 누구나 그들의 언짢음을 거든다. 이런 사람은 소견이 다쳤고, 때로는 마음까지 상했다. 이런 괴물을 대하는 길은 지구 반대편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곳 사람들의 야만이 이들의 사나움보다는 견딜 만할 것이다.
219 꾸밈의 사람으로 통하지 말라. 이제는 꾸밈없이 살 수 없다 해도. 교활하기보다 분별 있으라. 교제의 담백함은 누구에게나 반갑지만, 누구나 제 집에서 그렇게 살려 하지는 않는다. 진솔함이 단순함의 극단에 빠져서도, 영민함이 꾀의 극단에 빠져서도 안 된다. 영민한 사람이라 두려움받기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우러름받으라. 진솔한 사람은 사랑받지만 속는다. 가장 큰 꾸밈은 꾸밈을 감추는 것이어야 한다. 꾸밈은 속임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황금시대에는 꾸밈없음이 꽃피었고, 잘못투성이인 이 쇠의 시대에는 악의가 꽃핀다.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라는 신용은 명예롭고 믿음을 낳지만, 꾸밈 많은 사람이라는 신용은 궤변 같아서 의심을 낳는다.
220 사자 가죽을 입을 수 없거든 여우 가죽을 입으라22. 때에 물러설 줄 아는 것이 앞서는 것이다. 뜻을 이루는 사람은 명망을 잃지 않는다. 힘이 모자라면 솜씨로. 이 길로든 저 길로든. 용기의 큰길로든, 꾸밈의 지름길로든. 힘보다 재주가 더 많은 일을 해냈고, 현자가 용사를 이긴 일이 그 반대보다 많았다. 얻을 수 없을 때는 업신여길 차례다.
221 말썽을 부르는 사람이 되지 말라, 자기가 말려들어서도, 남을 끌어들여서도. 자기 체통에도 남의 체통에도 걸리는 돌부리 같은 사람이 있어, 언제나 어리석음을 저지를 채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아주 쉽게 부딪치고, 부딪치면 불행하게 깨진다. 하루에 짜증 백 번으로는 모자란다. 기분이 늘 결을 거슬러 있어서, 있는 사람마다, 있는 것마다 반박한다. 판단력을 거꾸로 신고 다녀서 무엇이든 못마땅해한다. 그러나 슬기를 가장 크게 시험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잘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니, 주책이라는 드넓은 나라에는 괴물이 많다.
222 삼가는 사람, 분별 있다는 증거. 혀는 맹수라서, 한번 풀려나면 다시 사슬에 묶기가 몹시 어렵다. 혀는 영혼의 맥이라, 현자는 거기서 영혼의 상태를 안다. 주의 깊은 사람은 여기서 마음의 움직임을 짚는다. 탈은 가장 자제해야 할 사람이 가장 자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현자는 짜증과 다툼을 피하며, 자기가 얼마나 자기의 주인인지 보여 준다. 두루 살피며 나아간다. 저울질에서는 야누스, 살펴 확인하는 데서는 아르고스23다. 모모스24는 가슴에 작은 창이 없다고 아쉬워할 것이 아니라 손에 눈이 없다고 아쉬워했어야 옳았다.
223 너무 유별나지 말라, 일부러 꾸며서든 모르고 그래서든. 어떤 사람은 버릇 같은 행동으로 눈에 띄게 유별나지만, 그것은 남다름이라기보다 흠이다. 얼굴의 유별난 추함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있듯이, 이런 사람은 몸가짐의 어떤 지나침으로 알려진다. 유별나게 구는 것은 손가락질받는 데밖에 쓸모가 없으니, 그 주책맞은 남다름은 어떤 이에게는 웃음을, 어떤 이에게는 짜증을 번갈아 불러일으킨다.
224 일을 잡을 줄 알라. 결을 거슬러 잡지 말라, 일이 결을 거슬러 오더라도. 모든 일에는 겉과 안이 있다. 가장 좋고 이로운 것도 날을 잡으면 다친다. 반대로 가장 거슬리는 것도 손잡이를 잡으면 자기를 지켜 준다. 많은 일이 괴로움이 되었지만, 그 이로운 점을 헤아렸다면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에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이 있으니, 솜씨는 이로운 쪽을 찾아낼 줄 아는 데 있다. 같은 것도 다른 빛에 비추어 보면 전혀 다른 빛깔을 띤다. 행복의 빛에 비추어 보라. 선과 악의 고삐를 뒤바꾸어 쥐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무엇에서나 기쁨을 찾고, 어떤 사람은 괴로움을 찾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운이 뒤집힐 때 막아 주는 큰 방패요, 어느 때 어느 직분에나 맞는 삶의 큰 규칙이다.
225 자기의 으뜸가는 흠을 알라. 이 흠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가장 뛰어난 자질에 맞서 무게를 다는 추다. 타고난 성향이 그 흠을 편들면 흠은 폭군처럼 사람을 휘어잡는다. 그 흠과 싸움을 시작하라. 그 흠을 경계하겠다고 널리 알리고 첫걸음으로 선전 포고문을 내야 하니, 흠은 알려지는 순간 꺾이고, 당사자가 남들이 보는 대로 그 흠을 헤아리면 더욱 그렇다. 자기의 주인이 되려면 늘 자기를 지켜보아야 한다. 불완전함의 이 우두머리가 항복하면 나머지도 모두 끝난다.
주
1. 신의 뜻을 받아 앞일을 말하던 고대의 무녀.
2.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램』 8권 79편에 나오는 여자(Fabulla). 늙거나 못생긴 벗들만 데리고 다녀 자기가 예뻐 보이게 했다.
3. 스페인 속담 「말 위에서 슬기로운 사람은 없다(no hay hombre cuerdo a caballo)」를 깔고 하는 말.
4. 스콜라 철학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지닌다고 본 세 초월적 속성, 곧 하나임(unum), 선함(bonum), 참됨(verum).
5. 사람을 알려면 그와 소금 여러 말을 함께 먹어야 한다는 옛말(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8권, 키케로 『우정에 관하여』 19장). 원문의 fanega는 곡식을 되는 단위이고, salado(짠)는 「재치 있는」이라는 뜻도 겸한다.
6. 『전도서』 1장 18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한다」를 비튼 말. 원문은 ciencia(지식)와 impaciencia(조바심)로 소리를 맞춘다.
7. 1~2세기의 스토아 철학자. 아울루스 겔리우스(『아티카의 밤』 17권 19장)는 그가 삶의 요체를 「참고 삼가라」 두 마디로 줄였다고 전한다.
8. 헤시오도스 『일과 날』 40행 「어리석은 자들은 절반이 전체보다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에서 온 역설.
9. 배에 싣는 닻 가운데 가장 큰 것. 마지막 위급할 때만 내렸다. 고대 그리스 이래 「최후의 의지처」를 뜻하는 관용 표현이다.
10. 원문 pecho는 「가슴」이면서 옛 스페인에서 평민이 바치던 「공물」이기도 하다. 가슴을 열어 보인 상대마다 공물을 바치는 처지가 된다는 말놀이.
11. 원문은 varillas(가는 막대). 남을 떠보려고 슬쩍 던지는 말.
12. 원문 yerro(잘못)는 hierro(쇠)와 소리가 같아, 「금관」과 「쇠」를 맞세우는 말놀이가 된다.
13. 스페인 속담 「못난 여자에게는 행운이 따른다(ventura de fea)」. 예쁜 여자보다 못난 여자가 오히려 팔자가 좋다는 말이다.
14. 그리스 북부 테살리아는 예로부터 마녀와 사랑의 약초로 이름난 땅이었다.
15. 로마의 지혜의 여신. 저마다 타고난 재능을 가리킨다.
16. 원문은 bocina(나팔). 북극성을 품은 작은곰자리를 그 모양을 따서 이렇게 불렀고, 뱃사람은 이 별로 북쪽을 잡았다.
17.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이니」(『고린도전서』 3장 19절)를 받은 말.
18. 스페인의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1453~1515)의 별칭. 이사벨 여왕 아래에서 그라나다 전쟁과 이탈리아 전쟁을 이끌어 「대장군(el Gran Capitán)」이라 불렸다.
19.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 화가(기원전 4세기). 고대 제일의 화가로 꼽혔다.
20. 기원전 356년, 이름을 남기려고 세계 일곱 불가사의의 하나인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에 불을 지른 헤로스트라토스를 가리킨다.
21. 고대 그리스의 부유한 상업 도시. 사치와 세련으로 이름났다.
22. 사자 가죽이 닿지 않는 곳에는 여우 가죽을 이어 대야 한다는 스파르타 장군 리산드로스의 말(플루타르코스 『리산드로스전』 7장)에서 온 격언.
23. 야누스는 앞뒤로 얼굴이 둘인 로마의 신, 아르고스는 온몸에 눈이 백 개 달린 그리스 신화의 거인.
24. 흠잡기를 일삼던 그리스 신화의 신. 신들이 만든 사람을 보고, 가슴에 창을 내어 속마음이 보이게 하지 않았다고 탓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