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링 효과, 첫 숫자 하나가 가격과 협상을 정하는 법
정가 옆에 그어진 빨간 줄, 연봉 협상의 첫 숫자. 처음 본 숫자가 판단을 끌고 가는 앵커링 효과를 고전 실험과 재현 논란, 협상 연구로 살펴보고 휘둘리지 않는 법을 정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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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쇼핑몰에서 운동화를 봤어요. 「정가 189,000원」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고, 그 아래 큼직하게 「99,000원」. 47% 할인이었어요. 저는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나중에 알았죠. 그 운동화는 다른 곳에서 늘 9만 원대에 팔리고 있었고, 189,000원에 산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다는 걸요. 제가 산 건 운동화가 아니라 빨간 줄이었어요.
처음 본 숫자가 이후 판단을 끌어당기는 현상을 앵커링 효과라고 해요. 배가 닻을 내리면 그 둘레에서만 움직이듯, 우리 판단도 첫 숫자 둘레에서 맴돈다는 뜻이에요.
돌림판이 정한 아프리카
이 현상을 처음 실험으로 보여 준 건 아모스 트버스키와 대니얼 카너먼이에요. 1974년 『사이언스』 논문에 실린 실험이 특히 유명해요.
참가자들 앞에서 0부터 100까지 적힌 돌림판을 돌려요. 사실 이 돌림판은 10이나 65에서만 멈추게 조작되어 있었어요. 그다음 질문을 해요. 「유엔 회원국 가운데 아프리카 나라의 비율은 방금 나온 숫자보다 높을까요, 낮을까요?」 그리고 「정확히 몇 퍼센트일까요?」
돌림판이 10에서 멈춘 사람들의 답은 중앙값 25%였어요. 65에서 멈춘 사람들은 45%였고요. 돌림판 숫자가 아프리카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모두 뻔히 봤는데도 그랬어요. 사람들은 첫 숫자에서 출발해 조금씩 고쳐 나가지만, 충분히 멀리 가지 못하고 멈춰요. 연구자들은 이걸 「기준점과 조정」이라고 불렀어요.
사회보장번호 끝자리 실험과 재현 논란
앵커링을 더 극적으로 보여 준 실험도 있어요. 댄 애리얼리, 조지 로웬스타인, 드라젠 프렐렉이 2003년에 낸 연구예요. MIT 학생들에게 무선 키보드, 와인, 초콜릿 같은 물건을 보여 주고, 먼저 자기 사회보장번호 끝 두 자리를 적게 했어요. 그 숫자를 달러로 쳤을 때 살 의향이 있는지 물은 다음, 실제로 얼마까지 낼지 적게 했죠.
끝자리가 가장 큰 무리는 가장 작은 무리보다 대체로 세 배쯤 높은 값을 불렀어요. 무선 키보드를 두고 한쪽은 평균 55.64달러, 다른 쪽은 16.09달러를 적었어요. 자기 번호가 키보드 값과 상관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학생들이었는데요.
그런데 이 대목에는 조심할 점이 있어요. 2014년 『미국 경제학 리뷰』에 실린 자카리아스 마니아디스, 파비오 투파노, 존 리스트의 재현 연구는 이런 앵커링 결과가 생각만큼 튼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증거를 내놓았어요. 같은 방식으로 다시 해 본 결과가 원래 연구만큼 뚜렷하지 않았던 거예요. 연구진은 한두 번의 극적인 결과보다 독립적인 재현 몇 번이 훨씬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강조했어요. 앵커링 자체는 여러 연구에서 되풀이해 확인된 현상이지만, 「아무 숫자나 보여 줘도 값이 세 배로 뛴다」 같은 극적인 크기는 조금 걸러 들을 필요가 있어요.
전문가도 닻에 걸려요
「그건 학생들이니까 그렇지, 전문가는 다르겠지」 싶을 수 있어요. 애리조나대의 그레고리 노스크래프트와 마거릿 닐은 1987년 그 질문을 부동산에서 확인했어요.
대학생 54명과 평균 경력 9년의 부동산 중개인 47명에게 같은 집을 보여 줬어요. 집을 직접 둘러보게 하고, 넓이와 시설, 근처의 최근 거래 내역까지 똑같은 자료를 줬죠. 다른 건 딱 하나, 매물로 내건 가격이었어요. 11만 9,900달러부터 14만 9,900달러까지 네 가지 중 하나를 보여 줬어요.
중개인들의 집값 평가는 내건 가격에 크게 끌려갔어요. 가장 낮은 가격을 본 중개인들은 평균 11만 4,204달러로, 가장 높은 가격을 본 중개인들은 12만 8,754달러로 평가했어요. 같은 집인데 1만 4천 달러 넘게 차이가 났죠. 경험이 닻을 끊어 주지는 못했던 거예요.
닻이 무서운 건 우리가 닻에 걸린 줄 모른다는 거예요. 중개인들에게 「내건 가격이 평가에 영향을 줬나요?」 하고 물으면 대개 아니라고 할 거예요. 자기는 근처 거래 내역과 집 상태를 보고 판단했다고 믿으니까요. 앵커링은 판단의 재료가 아니라 판단의 출발점을 건드려서, 결론까지 가는 길은 내가 걸었다고 느끼게 만들어요.
협상에서는 첫 제안이 닻이에요
앵커링이 가장 실감 나게 작동하는 곳은 협상이에요. 애덤 갈린스키와 토마스 무스바일러는 2001년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에 세 번의 실험 결과를 냈어요. 사는 쪽이든 파는 쪽이든 먼저 제안한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얻었고, 첫 제안은 최종 합의 가격을 강하게 예측했어요. 얼굴을 맞댄 협상에서도, 이메일 협상에서도 그랬어요.
그런데 이 연구에는 희망적인 대목도 있어요. 상대가 첫 제안과 어긋나는 정보에 집중하면 첫 제안의 힘이 사라졌어요. 상대에게 다른 대안이 있다는 사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저선, 내가 원래 정한 목표 같은 것들이요. 닻이 내려와도 내가 붙들 다른 숫자가 있으면 덜 끌려간다는 거죠.
첫인상과 혼인하지 말라
17세기 스페인의 그라시안은 『세상을 보는 지혜』 227번 잠언에 앵커링을 이렇게 적어 두었어요.
첫인상에 매이는 사람이 되지 말라. 어떤 이들은 처음 들은 말과 혼인하니 나머지 말은 모두 첩이 되고, 거짓은 언제나 앞질러 오기 때문에 나중에는 진실이 들어설 자리가 아예 남지 않는다.
「처음 들은 말과 혼인한다」는 표현이 기가 막히죠. 그라시안은 이런 사람의 그릇을 새 항아리에 비유해요. 처음 담긴 술 냄새가 좋든 나쁘든 배어 버린다고요. 빨간 줄이 그어진 189,000원이 제 항아리에 처음 담긴 술이었어요.
한번 의식하고 나면 닻은 어디에나 있어요. 식당 메뉴판 맨 위의 유난히 비싼 코스 요리는 많이 팔리지 않아도 제 몫을 해요. 그 아래 메뉴들이 상대적으로 적당해 보이게 만드니까요. 「최대 70% 할인」의 70, 「1인 1일 한정」의 희소성, 중고 거래에서 판매자가 먼저 부르는 가격도 모두 닻이에요. 저는 중고 거래를 할 때 상대가 가격을 묻기 전에 시세를 먼저 찾아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것만으로 「네고」가 훨씬 덜 무서워졌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 이렇게 해요. 물건을 사기 전에 정가가 아니라 다른 곳의 실제 판매가를 먼저 봐요. 연봉이나 견적 협상을 앞두고는 상대가 숫자를 꺼내기 전에 내 목표와 내 대안을 종이에 먼저 적어 두고요. 그러면 상대의 첫 숫자가 들어와도 제 항아리엔 이미 제가 고른 술이 담겨 있어요. 『세상을 보는 지혜』에는 이런 협상가의 잠언이 300개나 있으니, 다음 협상 전날 밤 몇 개만 골라 읽어도 든든해요.
참고한 자료
- Tversky & Kahneman (1974) 돌림판 실험 요약, Read the Sequences "Anchoring and Adjustment"
- Ariely, D., Loewenstein, G., & Prelec, D. (2003). "Coherent Arbitrariness": Stable Demand Curves Without Stable Preferences.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PDF)
- Maniadis, Z., Tufano, F., & List, J. A. One Swallow Doesn't Make a Summer: New Evidence on Anchoring Effects (University of Southampton discussion paper; American Economic Review 2014)
- EdgeProp. Northcraft & Neale (1987),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39(1) 소개
- London Business School. Galinsky, A. D., & Mussweiler, T. (2001). First offers as anchor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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