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끝까지 못 읽어도 괜찮을까, 생각을 바꾸는 한 문장 독서
완독만이 독서의 성과일까요? 성인 독서량 2.4권 시대에 '몇 권 읽었나' 대신 '어떤 문장을 만났나'로 독서를 세어 보는 법을 월든과 명상록으로 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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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 책갈피가 꽂힌 채 멈춘 책이 몇 권 있나요? 저는 세어 보다가 그만뒀어요. 일곱 권째에서 민망해졌거든요. 어떤 책은 3장에, 어떤 책은 거의 끝에 책갈피가 있어요. 그 책들을 볼 때마다 숙제를 미룬 기분이 들었어요. 다 못 읽었으니 안 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런데 그 일곱 권 가운데 한 권에서 건진 문장 하나를 저는 몇 년째 들고 다녀요. 힘든 날이면 꺼내 보는 문장이에요. 그 책은 완독하지 못했어요. 이건 실패한 독서였을까요?
2.4권이라는 숫자 앞에서
올해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를 보면, 지난 1년 동안 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 가운데 하나라도 읽은 성인은 38.5%였어요. 2023년 조사보다 4.5%포인트 줄었어요. 성인 한 사람이 1년에 읽은 책은 평균 2.4권으로, 이전 조사의 3.9권에서 1.5권이 빠졌고요. 책을 읽기 어려운 이유로는 일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답이 가장 많았고, 책 말고 다른 매체와 콘텐츠를 이용한다는 답이 24.3%로 뒤를 이었어요.
이 숫자를 보면 걱정이 먼저 들어요. 그리고 걱정 다음에는 대개 이런 처방이 따라와요. 한 달에 한 권, 1년에 50권, 독서 챌린지, 완독 인증. 연말이 다가오면 '올해 읽은 책' 결산 사진이 쏟아지고, 거기 끼지 못한 사람은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죠.
권수를 세는 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숫자는 습관을 만드는 데 꽤 쓸모가 있어요. 다만 숫자가 독서의 성과 자체로 바뀌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재기 쉬운 것이 목표가 될 때
경제학에는 「굿하트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어요. 인류학자 메릴린 스트래선이 1997년 논문에서 정리한 표현이 널리 알려졌는데, "측정값이 목표가 되면 그것은 더는 좋은 측정값이 아니다"라는 뜻이에요. 원래는 통화 정책과 대학 평가를 두고 나온 이야기지만, 책장 앞에서도 똑같이 들어맞아요.
'몇 권 읽었나'는 재기 쉬워요. '그 책이 나를 얼마나 바꿨나'는 재기 어렵고요. 그래서 우리는 재기 쉬운 쪽을 성과로 삼아요. 그러면 얇은 책을 고르게 되고, 어려운 대목은 건너뛰게 되고, 마음에 걸리는 문장 앞에서 멈추는 대신 다음 장으로 넘어가게 돼요. 멈추면 권수가 늦어지니까요. 저도 그랬어요. 독서 앱의 진행률 막대를 채우는 재미에 빠졌던 해에 저는 가장 많이 읽었고, 가장 적게 기억해요.
반대쪽 함정도 있어요. 완독을 성과로 삼으면, 끝까지 못 갈 것 같은 책은 아예 펼치지 않게 돼요. 다 읽을 자신이 없으니 시작을 안 하는 거죠. 책갈피가 꽂힌 채 멈춘 책들이 주는 죄책감이 다음 책의 첫 장까지 막아 버려요.
소로가 센 것은 권수가 아니었어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는 「독서」라는 장이 있어요. 숲속 오두막에서 2년 넘게 살면서 고전을 곁에 둔 사람이 쓴 글이라, 읽으라는 잔소리가 가득할 것 같은데 의외로 이런 대목이 나와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 한 권을 읽은 날을 제 삶의 새 시대의 시작으로 삼았던가! 우리의 기적을 풀이해 주고 새로운 기적을 드러내 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해 있을 것이다.
소로가 세는 단위는 '책 한 권을 읽은 날'이에요. 몇 권이 아니라 어느 날이요. 바로 앞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도 말해요. 우리의 처지에 꼭 맞추어 건네진 말들이 있을 것이고, 그 말을 정말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세상의 얼굴을 새롭게 보여 줄 거라고요. 독서의 성과를 '건네진 말을 알아들은 순간'에서 찾고 있는 거예요.
그로부터 1,700년쯤 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문장을 모으는 사람이었어요. 전쟁터 막사에서 자기 자신에게 쓴 메모가 『명상록』인데, 3권 14장에서 그는 스스로를 이렇게 다그쳐요.
더는 헤매지 마라. 너는 네 작은 비망록도, 옛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행적도, 늙어서 읽으려고 책에서 가려 뽑아 모아 둔 글들도 끝내 읽지 못할 것이다.
황제에게도 '나중에 읽으려고' 쌓아 둔 발췌 더미가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는 그 더미를 다 읽는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인정해요. 그러니 지금 할 수 있을 때 너 자신을 도우라고요. 저는 이 대목이 위로로 읽혀요. 다 읽지 못하는 건 게으른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는 뜻이니까요. 중요한 건 쌓아 둔 양이 아니라, 지금 꺼내 쓸 수 있는 문장 하나예요.
한 문장은 끝까지 읽기의 적이 아니에요
여기서 오해 하나는 풀고 갈게요. 저는 지난주에 「AI 요약 시대에 원문을 끝까지 읽는 이유」라는 글을 썼어요. 요약은 영수증이고 완독은 한 끼라고요. 그러니 오늘 글이 "그러니 끝까지 안 읽어도 돼요"로 들리면 곤란해요. 제 생각은 오히려 그 반대예요. 끝까지 읽기와 한 문장 만나기는 서로를 돕는 사이예요.
먼저, 생각을 바꾸는 문장은 대개 처음 읽을 때 눈에 안 들어와요. 그 글에서 예로 든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떠올려 볼게요. 3장에서 조던이 "전 무신경한 사람이 싫어요"라고 말할 때는 그냥 연애 대사예요. 9장에서 닉이 톰과 데이지를 "무신경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순간, 3장의 그 한 줄이 갑자기 무게를 얻어요. 한 문장의 힘은 그 문장까지 걸어온 거리에서 나와요. 그래서 한 문장을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계속 읽는 거예요.
그다음, 한 문장을 만난 경험이 다시 끝까지 읽게 만들어요. 책에서 나를 위해 쓰인 것 같은 문장을 한 번이라도 만난 사람은, 다음 책을 펼칠 때 기대하는 게 달라져요. 이 책에도 그런 문장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요. 그 기대가 지루한 중반부를 건너게 해 줘요. 권수 목표로는 잘 안 생기는 힘이에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끝까지 가지 못한 책이 있어도 괜찮아요. 거기서 한 문장을 건졌다면 그 책은 이미 제 몫을 했어요. 나중에 다시 열 때는 그 문장이 책갈피 노릇을 해 줄 거예요. 저는 그 일곱 권 가운데 두 권을 그렇게 다시 열었어요.
올해 결산은 문장으로 해 볼까요
그래서 요즘 저는 독서를 이렇게 세요. 권수는 따로 적지 않고, 수첩 맨 뒤에 '올해 나를 멈춰 세운 문장'만 적어요. 규칙은 셋뿐이에요.
- 글자 그대로 옮겨 적기.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내 말이 돼 버려요. 원문 그대로 적어야 몇 달 뒤에 다시 읽었을 때 그날의 내가 왜 멈췄는지 보여요.
- 옆에 한 줄만 덧붙이기. "왜 이 문장에서 멈췄지?" 길게 쓸 필요 없어요. "요즘 일 때문에" 정도면 충분해요.
- 다 읽었는지는 묻지 않기. 3장에서 멈춘 책의 문장도 똑같이 한 줄이에요.
이렇게 적다 보면 재미있는 게 보여요. 문장 목록이 곧 그해의 내가 무엇을 고민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되거든요. 책 제목 50개보다 문장 다섯 개가 그해를 더 정확하게 말해 줄 때가 많아요.
독서율 38.5%라는 숫자를 바꾸는 건 제 힘으로 안 되는 일이에요. 그래도 '나는 책을 못 읽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오늘 바꿀 수 있어요. 끝까지 못 읽은 책에서 건진 문장이 하나라도 있다면, 당신은 이미 책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온 사람이에요. 오늘 밤에는 책갈피가 꽂힌 그 책을 다시 꺼내서, 멈췄던 쪽부터 딱 한 장만 읽어 보면 어떨까요. 거기 당신을 위해 건네진 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월든』의 「독서」 장은 에테르 라이브러리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어요.
참고한 자료
- 헤럴드경제, 「'1년에 책 한 권' 성인 10명 중 4명도 안 돼」(문화체육관광부 「202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보도), 2026: https://www.heraldk.com/article/2026030517535929005
-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문화체육관광부 「202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 발표, 2024: https://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928309
- Marilyn Strathern, "'Improving ratings': audit in the British University system", European Review, 1997: https://www.Gwern.net/doc/statistics/decision/1997-strathern.pdf
- Wikipedia, "Goodhart's law": https://en.wikipedia.org/wiki/Goodhart%27s_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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