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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을 고를 때 조금만 더 찬찬히 생각한다면 모든 사람이 어쩌면 본디 공부하는 사람, 지켜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의 본성과 운명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흥미로운 것이 틀림없으니까. 우리 자신이나 후손을 위해 재산을 모을 때, 가문이나 나라를 세울 때, 명성을 얻을 때조차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그러나 진리를 다룰 때 우리는 죽지 않으며, 어떤 변화도 사고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 가장 오래된 이집트나 힌두의 철학자는 신상에 드리운 베일 한 자락을 들어 올렸다. 그 떨리는 옷자락은 아직도 들린 채로 있고, 나는 그가 보았던 것만큼 싱싱한 영광을 바라본다. 그때 그토록 대담했던 것은 그 사람 안의 나였고, 지금 그 광경을 다시 보는 것은 내 안의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옷자락에는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았고, 그 신성이 드러난 뒤로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다. 우리가 참으로 살려 쓰는 시간, 살려 쓸 수 있는 시간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내 거처는 생각에도 진지한 독서에도 대학보다 나았다. 나는 보통의 순회 대출 도서관이 닿는 곳 밖에 있었지만, 세상을 두루 도는 책들의 힘이 미치는 곳으로는 어느 때보다 가까이 들어와 있었다. 그 책들의 문장은 처음에는 나무껍질에 쓰였고, 지금은 그저 이따금 아마포 종이에 옮겨 적힐 뿐이다. 시인 미르 카마르 우딘 마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앉은 채로 영혼의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 나는 책에서 이 덕을 보았다. 포도주 한 잔에 취하는 것, 비밀스러운 가르침의 술을 마셨을 때 나는 이 즐거움을 맛보았다." 나는 여름 내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책상에 두었지만 그 책장을 들여다본 것은 이따금일 뿐이었다. 처음에는 집도 마저 지어야 하고 콩밭도 매야 해서 쉴 새 없이 손으로 일하느라 더 공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앞으로 그런 책을 읽게 되리라는 기대로 버텼다. 일하는 틈틈이 얄팍한 여행기를 한두 권 읽다가 그 짓이 부끄러워져서,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스스로 물었다.

공부하는 사람은 호메로스나 아이스킬로스를 그리스어로 읽더라도 방탕이나 사치에 빠질 위험이 없다.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얼마쯤 그들의 영웅을 본받고 아침 시간을 그들의 책장에 바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책은 우리 모국어의 글자로 찍혀 있더라도 타락한 시대에는 언제나 죽은 말로 쓰인 책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낱말 하나, 행 하나의 뜻을 애써 찾아야 하고, 우리가 지닌 지혜와 용기와 너그러움을 다 짜내어 흔한 쓰임새가 허락하는 것보다 더 큰 뜻을 짐작해 내야 한다. 값싸고 다산하는 요즘의 인쇄기는 온갖 번역을 쏟아 냈지만 고대의 영웅적인 작가들에게 우리를 가까이 데려다주는 일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외로워 보이고, 그들을 찍은 글자도 여전히 드물고 진기해 보인다. 고대 언어의 낱말 몇 개만 배우더라도, 그 낱말들이 거리의 하찮음에서 솟아올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일깨우고 자극해 준다면, 젊은 날과 값비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 농부가 어디서 들은 라틴어 몇 마디를 기억해 되풀이하는 것도 헛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따금 고전 공부가 마침내 더 근대적이고 실용적인 공부에 자리를 내주리라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모험을 아는 학생은 언제나 고전을 공부할 것이다. 그 고전이 어떤 언어로 쓰였든, 얼마나 오래되었든. 고전이란 사람이 기록한 가장 고귀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전은 썩지 않은 단 하나의 신탁이며, 그 안에는 가장 근대적인 물음에 대해서도 델포이와 도도나가 준 적 없는 답이 들어 있다. 자연이 늙었다고 자연을 공부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잘 읽는 것, 곧 참된 책을 참된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수련이며, 요즘의 풍습이 높이 치는 어떤 수련보다도 읽는 사람을 더 고되게 부린다. 그것은 운동선수가 받았던 것 같은 훈련, 거의 평생을 이 목표에 꾸준히 바치는 마음을 요구한다. 책은 쓰일 때만큼 찬찬히, 삼가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그 책을 쓴 민족의 말을 할 줄 아는 것으로도 모자라다. 말하는 언어와 글로 쓴 언어, 귀로 듣는 언어와 눈으로 읽는 언어 사이에는 잊지 못할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대개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 소리이고 혀이고 사투리일 뿐이며 거의 짐승의 것이어서, 우리는 그것을 짐승처럼 모르는 사이에 어머니에게서 배운다. 뒤의 것은 앞의 것이 무르익고 경험을 쌓은 것이다. 앞의 것이 어머니의 말이라면 뒤의 것은 아버지의 말로, 삼가고 가려 뽑은 표현이며 귀로 듣기에는 너무 뜻이 깊어서, 그것을 말하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중세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그저 말할 줄만 알던 숱한 사람들은 우연히 그렇게 태어났다고 해서 그 언어로 쓰인 천재의 작품을 읽을 자격을 얻지는 못했다. 그 작품들은 그들이 아는 그리스어나 라틴어가 아니라 가려 뽑은 문학의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더 고귀한 말을 배우지 않았고, 그 작품들을 적은 종이마저 그들에게는 폐지였으며, 그들은 그 대신 값싼 당대 문학을 귀히 여겼다. 그러나 유럽의 여러 민족이 아직 거칠기는 해도 저마다 뚜렷한 글말을 갖추어, 일어나는 제 문학에 쓰기에 넉넉해졌을 때 비로소 학문이 되살아났고, 학자들은 그 먼 거리에서 고대의 보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로마와 그리스의 군중이 들을 수 없었던 것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몇몇 학자가 읽었고, 지금도 그것을 읽는 사람은 몇몇 학자뿐이다.

웅변가가 이따금 터뜨리는 웅변에 우리가 아무리 감탄하더라도, 가장 고귀한 글말은 대개 덧없는 입말보다, 별이 박힌 하늘이 구름보다 뒤에 있고 위에 있는 만큼 멀리 뒤에, 또 위에 있다. 거기에 별이 있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그 별을 읽는다. 천문학자들은 끝없이 별을 풀이하고 관찰한다. 별은 우리의 일상 잡담이나 김 서린 입김처럼 피어올랐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광장에서 웅변이라 불리는 것도 서재에서 보면 대개 수사일 뿐이다. 웅변가는 덧없는 계기의 영감에 몸을 맡기고, 눈앞의 군중, 곧 자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더 고른 삶 자체가 그의 계기이며, 웅변가에게 영감을 주는 사건과 군중에는 오히려 마음이 흐트러질 사람이어서, 인류의 지성과 건강에게, 어느 시대에든 자기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한다.

알렉산드로스가 원정길에 『일리아스』를 값진 상자에 넣어 가지고 다닌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글로 쓴 말은 유물 가운데서도 가장 귀한 유물이다. 그것은 다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우리와 더 가까우면서도 더 보편적이다. 삶 자체에 가장 가까운 예술 작품이다. 그것은 모든 언어로 옮겨질 수 있고, 읽힐 뿐 아니라 실제로 모든 사람의 입술에서 숨결이 되어 나올 수 있다. 화폭이나 대리석에 그려지고 새겨질 뿐 아니라 삶의 숨결 자체에서 깎아 낼 수 있다. 옛사람이 생각을 적은 기호가 오늘 사람의 말이 된다. 이천 번의 여름은 그리스 문학의 기념비에, 그리스의 대리석에 그러했듯, 좀 더 무르익은 금빛, 가을빛만을 입혔을 뿐이다. 그 기념비들은 저마다 고요한 천상의 공기를 모든 땅에 품고 가서 시간의 부식을 막아 왔기 때문이다. 책은 세상이 소중히 간직한 재산이며, 세대와 민족이 물려받기에 알맞은 유산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좋은 책들은 어느 오두막 선반에나 저절로, 마땅히 꽂혀 있다. 그 책들에게는 스스로 내세울 송사가 없지만, 읽는 사람을 깨우치고 북돋우는 동안에는 그의 상식이 그 책들을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그 책을 쓴 이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자연스럽고 거스를 수 없는 귀족이며, 왕이나 황제보다 더 큰 힘을 인류에게 미친다. 글을 모르고 어쩌면 글을 업신여기는 장사꾼이 수완과 부지런함으로 그토록 바라던 여가와 독립을 얻어 부와 유행의 무리에 끼게 되면, 그는 마침내 어쩔 수 없이 그보다 더 높지만 아직 다가갈 수 없는 지성과 천재의 무리로 눈을 돌리고, 자기 교양이 모자라다는 것과 자기 재산이 모두 헛되고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만을 절감하며, 자기가 그토록 아프게 느끼는 지적 교양의 결핍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고 애씀으로써 자기가 분별 있는 사람임을 한 번 더 보여 준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한 가문을 일으킨 사람이 된다.

고대의 고전을 그것이 쓰인 언어로 읽는 법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인류의 역사를 아주 불완전하게밖에 알지 못할 것이다. 놀랍게도 그 고전들은 어떤 근대 언어로도 옮겨 적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명 자체를 그런 옮겨 적기로 볼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호메로스는 아직 영어로 인쇄된 적이 없고, 아이스킬로스도, 베르길리우스조차도 그렇다. 아침 그 자체만큼이나 세련되고 단단하게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작품들인데도. 뒷날의 작가들은 그 재능을 우리가 어떻게 말하든, 옛사람의 공들인 아름다움과 마무리, 평생을 바친 영웅적인 문학의 수고에 견줄 만한 적이 설령 있었다 해도 드물다. 옛사람을 잊자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알았던 적이 없는 사람들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귀 기울이고 그들을 제대로 알아볼 학식과 재능을 갖추었을 때 그들을 잊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그 유물과, 그보다 더 오래되고 고전 이상이지만 더욱 알려지지 않은 여러 민족의 경전이 한층 더 쌓이고, 바티칸들이 『베다』와 『젠드아베스타』와 성경으로, 호메로스와 단테와 셰익스피어로 가득 차고, 앞으로 올 모든 세기가 차례로 제 전리품을 세계의 광장에 쌓아 놓을 때, 그 시대는 참으로 풍요로울 것이다. 그만큼 쌓인 더미라면 우리는 마침내 하늘에 오르기를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아직 인류에게 읽힌 적이 없다. 위대한 시인만이 그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작품들은 군중이 별을 읽듯이, 잘해야 점성술로 읽혔을 뿐 천문학으로 읽힌 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셈을 배워 장부를 적고 장사에서 속지 않으려 하듯, 하찮은 편의를 채우려고 글 읽기를 배웠다. 고귀한 지적 수련으로서 읽는 일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모른다. 그러나 높은 뜻에서 독서라 할 만한 것은 이것뿐이다. 사치품처럼 우리를 달래 잠재우고 그사이 더 고귀한 능력을 잠들게 내버려 두는 읽기가 아니라, 발끝으로 서야 읽을 수 있고 우리가 가장 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을 바쳐야 하는 읽기 말이다.

글자를 익혔으면 문학에서 가장 좋은 것을 읽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제까지나 '에이, 비, 에이비' 하는 철자 연습과 한 음절 낱말만 되뇌며, 넷째 반이나 다섯째 반의 가장 낮은 맨 앞 걸상에 평생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좋은 책 한 권, 곧 성경을 읽거나 남이 읽어 주는 것을 듣고 어쩌면 그 지혜에 죄를 깨우쳤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남은 평생을 이른바 쉬운 읽을거리 속에서 그저 식물처럼 살며 제 능력을 흩어 버린다. 우리 순회 도서관에는 『리틀 리딩(Little Reading)』이라는 여러 권짜리 책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내가 가 보지 못한 같은 이름의 읍 이야기인 줄 알았다. 가마우지나 타조처럼 이런 것은 무엇이든 소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고기와 채소로 배를 가득 채운 뒤에도 그렇다. 아무것도 버리지 않으려 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런 사료를 대는 기계라면 이들은 그것을 읽는 기계다. 그들은 제뷸런과 소프로니아에 관한 구천 번째 이야기를 읽는다. 두 사람이 어떻게 누구도 해 본 적 없는 사랑을 했는지, 그 참된 사랑의 길도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무튼 그 사랑이 어떻게 달리다가 비틀거리고 다시 일어나 나아갔는지를! 어느 가엾은 불운아가 어떻게 뾰족탑 꼭대기에 올라갔는지를 읽는다. 그는 종루까지도 올라가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괜히 그를 거기까지 올려놓은 행복한 소설가는 온 세상이 모여 와서 듣도록 종을 친다. 오, 세상에! 그가 어떻게 다시 내려왔는지! 나로 말하면, 소설 세계의 이처럼 높이 오르려는 영웅들은 모두 사람 모양 바람개비로 바꾸어 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옛사람들이 영웅을 별자리 사이에 올려놓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녹슬 때까지 거기서 빙빙 돌게 하고, 내려와서 장난질로 정직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일은 아예 없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 소설가가 종을 치면 예배당이 타서 무너지더라도 나는 꿈쩍하지 않으련다. "『발끝깡충뜀의 도약』, 중세 연애담, 『찔끔똑딱땡』의 이름난 작가 지음, 매달 분책 발간 예정. 주문 쇄도. 한꺼번에 몰려오지 마시오."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접시만 한 눈으로, 꼿꼿하고 원시적인 호기심으로, 지칠 줄 모르는 모래주머니로 읽는다. 그 모래주머니의 주름은 아직 갈아 세울 필요도 없다. 네 살배기 꼬마가 걸상에 앉아 금박 표지를 입힌 2센트짜리 『신데렐라』를 읽는 꼴과 꼭 같다. 내가 보기에는 발음이나 억양이나 강세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교훈을 끄집어내거나 집어넣는 솜씨도 더 늘지 않는다. 그 결과는 흐려진 눈, 생명의 흐름이 고이는 것, 모든 지적 능력이 녹아내리고 허물처럼 벗겨져 나가는 것이다. 이런 생강 과자는 거의 어느 화덕에서나 순밀이나 호밀과 옥수수 가루 빵보다 더 부지런히 날마다 구워지고, 더 확실한 시장을 찾는다.

가장 좋은 책들은 좋은 독자라 불리는 사람들에게조차 읽히지 않는다. 우리 콩코드의 교양이란 무엇에 이르는가? 이 읍에는 아주 드문 몇 사람을 빼면, 모두가 읽고 철자를 댈 줄 아는 영문학에서조차 가장 좋은 책, 아니 아주 좋은 책을 즐기는 취향이 없다. 여기서나 다른 곳에서나 대학을 나왔다는 사람들, 이른바 교양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조차 실은 영국 고전을 거의 또는 전혀 모른다. 그리고 인류가 기록한 지혜, 곧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고대의 고전과 여러 경전에 관해서라면, 그것과 친해지려는 노력은 어디서나 아주 미약하다. 나는 중년의 나무꾼 한 사람을 아는데, 그는 프랑스어 신문을 받아 본다. 그의 말로는 소식 때문이 아니라(그는 그런 것을 넘어선 사람이다) "솜씨를 녹슬지 않게 하려고"서다. 그는 캐나다 태생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내가 물으면, 그는 그 일 말고는 영어를 놓지 않고 더 늘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개 하는 일이나 하려고 바라는 일도 이 정도이며, 그들은 그런 목적으로 영어 신문을 받아 본다. 영어로 쓰인 가장 좋은 책 가운데 하나를 막 읽고 나온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그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얼마나 찾아낼까? 아니면 이른바 글 모르는 사람들조차 그 찬사를 익히 아는 그리스나 라틴의 고전을 원문으로 막 읽고 나왔다고 하자. 그는 말을 건넬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사실 우리 대학에는 그 언어의 어려움을 깨쳤으면서 그리스 시인의 재치와 시의 어려움도 그만큼 깨쳐서, 날카롭고 영웅적인 독자에게 나누어 줄 공감을 지닌 교수가 거의 없다. 그리고 거룩한 경전, 곧 인류의 성경들로 말하자면, 이 읍에서 그 제목이라도 내게 말해 줄 사람이 누가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히브리 민족 말고 다른 민족에게도 경전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다. 누구든 은화 1달러를 줍기 위해서라면 꽤 먼 길을 돌아간다. 그런데 여기 금 같은 말이 있다. 옛날의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한 말이며, 그 뒤 모든 시대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 값어치를 우리에게 보증해 온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쉬운 읽을거리, 초급 독본과 교과서까지만 읽기를 배우고, 학교를 마치면 소년과 초보자를 위한 『리틀 리딩』과 이야기책을 읽는다. 그래서 우리의 독서와 대화와 생각은 모두 아주 낮은 수준에 머물러, 피그미족과 난쟁이에게나 어울린다.

나는 우리 콩코드 땅이 낳은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 여기서는 이름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과 사귀고 싶다. 아니면 나는 플라톤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그의 책을 끝내 읽지 않을 것인가? 플라톤이 같은 읍 사람인데 한 번도 그를 보지 못한 것처럼, 바로 옆집 이웃인데 그가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하고 그 말의 지혜에 귀 기울인 적도 없는 것처럼. 그런데 실제로는 어떤가? 그에게서 죽지 않을 것을 담은 『대화편』이 바로 옆 선반에 꽂혀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읽은 적이 없다. 우리는 못 배우고 천하게 살며 글을 모른다. 이 점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같은 읍 사람의 무지와, 아이와 약한 머리를 위한 것만 읽을 줄 아는 사람의 무지를 그리 크게 가르지 않는다. 우리는 옛날의 훌륭한 사람들만큼 훌륭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박새만 한 인간 족속이어서, 지적으로 날아오른다 해도 일간 신문의 단보다 그리 높이 오르지 못한다.

모든 책이 그 독자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우리의 처지에 꼭 맞추어 건네진 말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 말을 정말로 듣고 알아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아침이나 봄보다도 우리 삶에 더 이롭고, 어쩌면 우리에게 세상의 얼굴을 새롭게 보여 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 한 권을 읽은 날을 제 삶의 새 시대의 시작으로 삼았던가! 우리의 기적을 풀이해 주고 새로운 기적을 드러내 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해 있을 것이다. 지금은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어딘가에는 말로 적혀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어지럽히고 당혹하게 하고 갈피를 못 잡게 하는 바로 그 물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 모두에게 차례로 찾아왔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마다 제 능력껏 말과 삶으로 그 물음에 답했다. 게다가 지혜와 함께 우리는 너그러움도 배울 것이다. 콩코드 변두리 어느 농장의 외로운 품팔이꾼은 두 번째로 태어나는 남다른 종교 체험을 했고, 그가 믿기로는 신앙 때문에 말 없는 엄숙함과 배타 속으로 내몰렸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로아스터는 수천 년 전에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체험을 했다. 다만 그는 지혜로워서 그 체험이 보편적인 것임을 알았고, 그에 걸맞게 이웃을 대했으며, 사람들 사이에 예배를 만들어 세웠다고까지 전한다. 그렇다면 그 품팔이꾼은 겸손하게 조로아스터와 마음을 나누고, 모든 훌륭한 사람들의 너그럽게 하는 힘을 빌려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도 마음을 나누고, "우리 교회" 따위는 내버려 두게 하라.

우리는 19세기에 속해 있고 어느 민족보다도 빠르게 걸음을 내딛고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 마을이 제 교양을 위해 하는 일이 얼마나 적은지 생각해 보라. 나는 같은 읍 사람들에게 아첨하고 싶지도, 그들의 아첨을 받고 싶지도 않다. 그래 봐야 어느 쪽도 나아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에게는 자극이 필요하다. 지금의 우리 꼴대로 소처럼 막대기에 찔려야 종종걸음이라도 친다. 우리에게는 그런대로 괜찮은 보통 학교 제도가 있지만 그것은 어린아이만을 위한 학교다. 겨울에 여는, 반쯤 굶주린 라이시엄1과 근래 주에서 권해 겨우 시작한 보잘것없는 도서관을 빼면 우리 자신을 위한 학교는 없다. 우리는 마음의 양식보다 몸의 양식이나 몸의 병에 거의 무엇이든 더 많은 돈을 쓴다. 이제는 보통이 아닌 학교를 가질 때다. 어른이 되기 시작하면서 교육을 그만두지 않을 때다. 이제는 마을이 대학이 되고, 마을의 나이 든 주민들이 대학의 연구원이 되어, 정말로 형편이 그만큼 넉넉하다면 남은 평생 여가를 누리며 교양 학문을 닦을 때다. 세상이 언제까지나 파리 하나, 옥스퍼드 하나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학생들이 여기서 하숙하며 콩코드 하늘 아래에서 교양 교육을 받을 수는 없는가? 우리도 아벨라르 같은 사람을 모셔다 강의를 들을 수는 없는가? 아아! 소에게 꼴을 먹이랴 가게를 보랴 우리는 너무 오래 학교에서 멀어져 있고, 우리의 교육은 딱하게도 내버려져 있다. 이 나라에서는 마을이 어떤 점에서 유럽 귀족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마을이 예술을 후원해야 한다. 마을은 그럴 만큼 넉넉하다. 모자라는 것은 너그러움과 세련됨뿐이다. 마을은 농부와 장사꾼이 값지게 여기는 것에는 돈을 넉넉히 쓰면서도,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훨씬 더 값지다고 아는 것에 돈을 쓰자고 하면 몽상이라 여긴다. 이 읍은 운이 좋았든 정치 덕이든 읍 회관 하나에 1만 7천 달러를 썼지만, 그 껍데기 속에 넣을 참된 알맹이인 살아 있는 지혜에는 아마 백 년이 지나도 그만큼 쓰지 않을 것이다. 겨울 라이시엄에 해마다 모이는 125달러의 기부금은 이 읍에서 걷는 같은 액수의 어떤 돈보다 잘 쓰인다. 우리가 19세기에 산다면 왜 19세기가 주는 이점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우리 삶이 어떤 점에서든 촌스러워야 하는가? 신문을 읽을 거라면 왜 보스턴의 잡담은 건너뛰고 세계에서 가장 좋은 신문을 당장 받아 보지 않는가? 여기 뉴잉글랜드에서 "중립 가정" 신문의 묽은 죽이나 빨고 『올리브 가지』나 뜯어 먹을 것이 아니라. 모든 학회의 보고서가 우리에게 오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무엇을 아는지 우리가 알아볼 것이다. 왜 우리가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을 하퍼 앤드 브러더스나 레딩 출판사에 맡겨야 하는가? 교양 있는 귀족이 자기 교양에 이바지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곧 천재와 학식과 재치와 책과 그림과 조각과 음악과 과학 기구 따위를 제 곁에 모아 두듯이 마을도 그렇게 하게 하라. 우리의 필그림 선조들이 어느 해 추운 겨울을 황량한 바위 위에서 교사 하나, 목사 하나, 교회지기 하나, 교구 도서관 하나, 읍 행정위원 셋으로 났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지 말게 하라. 함께 힘을 모아 행동하는 것이 우리 제도의 정신에 맞는다. 그리고 나는 우리 형편이 더 넉넉한 만큼 우리 재력이 귀족의 재력보다 크다고 확신한다. 뉴잉글랜드는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모두 불러 가르치게 하고 그동안 돌아가며 그들을 먹이고 재워도, 조금도 촌스럽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보통이 아닌 학교다. 귀족 대신 귀한 사람들의 마을을 갖자. 필요하다면 강 위의 다리 하나를 덜 놓고 거기서는 좀 돌아가더라도, 우리를 둘러싼 더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적어도 아치 하나는 걸치자.

주

  1. 1. 라이시엄: 강연과 토론으로 어른을 가르치던 미국 읍마다의 모임. 소로도 콩코드 라이시엄에서 강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