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이웃
이따금 낚시를 함께 다니는 동무가 있었다. 그는 읍 반대편에서 마을을 가로질러 내 집까지 왔는데, 끼니를 낚는 일은 그것을 먹는 일만큼이나 어울려 노는 일이었다.
은자. 세상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세 시간째 스위트펀 위로 매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군. 비둘기들은 다들 홰에서 잠들었는지 날갯짓 하나 없어. 방금 숲 너머에서 울린 게 농가의 점심 나팔이었나? 일꾼들이 소금에 절여 삶은 쇠고기와 사과술과 옥수수빵을 먹으러 들어오겠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제 몸을 들볶을까? 먹지 않는 자는 일할 필요도 없는데. 얼마나 거두었으려나. 보스 짖는 소리에 도무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는 그런 데서 누가 살겠나? 게다가 아, 그 살림살이! 이렇게 맑은 날 악마의 문손잡이를 반짝반짝 닦고 악마의 통을 박박 문질러야 한다니! 집 같은 건 아예 두지 않는 게 낫지. 이를테면 속 빈 나무 하나쯤. 그러고는 아침 방문이니 만찬회니! 딱따구리 하나 두드리고 갈 뿐이야. 아, 거기는 사람이 우글거려. 볕도 너무 뜨겁고. 내가 보기엔 다들 삶 속으로 너무 깊숙이 태어났어. 나한테는 샘에서 길어 온 물이 있고 선반에는 흑빵 한 덩이가 있지. 쉿!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군.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마을 사냥개가 사냥 본능에 끌려 들어왔나? 아니면 이 숲에 들어왔다는 그 길 잃은 돼지일까? 비 온 뒤에 그 발자국을 본 적이 있는데. 빠르게 다가오는군. 내 옻나무와 들장미가 떨고 있어. 아니, 시인 양반, 자넨가? 오늘 세상은 마음에 드나?
시인. 저 구름 좀 보게, 어떻게 걸려 있는지! 오늘 본 것 가운데 저게 제일 굉장하군. 옛 그림에도 저런 건 없고 외국 땅에도 없어. 스페인 앞바다에 나갔을 때라면 모를까. 저게 진짜 지중해 하늘이지. 나도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 낚시나 갈까 했네. 시인에게는 그게 진짜 생업이야. 내가 배운 일이라고는 그것뿐이고. 자, 가세.
은자. 그 말은 못 뿌리치겠군. 내 흑빵도 곧 떨어질 테고. 곧 기꺼이 같이 가겠네만, 지금 막 진지한 명상 하나를 마무리하는 참이야. 거의 끝에 다 온 것 같아. 그러니 잠깐만 혼자 있게 해 주게. 그래도 늦어지지 않게 그동안 자네는 미끼를 파 두게. 이 근방은 땅에 거름을 준 적이 없어서 지렁이 구경하기가 어렵다네. 그 종족은 거의 멸종했지. 입맛이 너무 당기지만 않으면 미끼 파는 재미가 고기 낚는 재미와 거의 맞먹는데, 오늘은 그 재미를 자네 혼자 다 누리게. 저 아래 고추나물이 흔들리는 땅콩 덤불 사이에 삽을 꽂아 보게. 김매듯이 풀뿌리 사이를 잘 살피면 뗏장 세 장을 뒤집을 때마다 지렁이 한 마리는 틀림없이 나올 걸세. 더 멀리 가 보고 싶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짓은 아니야. 내가 겪어 보니 좋은 미끼는 거의 거리의 제곱에 맞추어 늘어나더군.
은자 혼자. 가만있자, 어디까지 했더라? 아마 거의 이런 마음이었지. 세상이 대략 이런 각도로 놓여 있었어. 천국으로 갈까, 낚시하러 갈까? 이 명상을 곧 끝내 버리면 이렇게 달콤한 기회가 또 올까? 나는 평생 그 어느 때보다 사물의 정수 속으로 녹아들 뻔했는데. 생각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군. 그게 소용이 있다면 휘파람이라도 불어 불러들이련만. 생각이 먼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내밀 때 "생각해 보지" 하고 미루는 게 현명한 일일까? 내 생각은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았고, 나는 그 길을 다시 찾을 수가 없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몹시 흐릿한 날이었어. 공자의 그 세 문장을 한번 읊어 볼까. 그러면 그 상태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지. 그게 울적함이었는지 막 움트던 황홀이었는지도 모르겠어. 비망. 같은 종류의 기회는 언제나 단 한 번뿐이다.
시인. 어떤가, 은자 양반, 너무 이른가? 온전한 놈으로 꼭 열세 마리 잡았네. 그 밖에 성치 않거나 덜 자란 놈도 몇 있지만 그건 잔챙이 고기한테 쓰면 되지. 바늘을 그리 많이 가리지 않으니까. 마을 지렁이들은 너무 크단 말이야. 피라미가 꼬챙이는 건드리지도 않고 한 마리로 한 끼를 때울 정도라니까.
은자. 그럼 됐네, 가세. 콩코드강으로 갈까? 물이 너무 불지만 않았으면 거기 재미가 쏠쏠하지.
우리가 바라보는 바로 이 사물들이 왜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가? 마치 이 틈새는 생쥐가 아니면 아무것도 메울 수 없었다는 듯이, 사람은 왜 하필 이런 종의 짐승들을 이웃으로 두었는가? 내가 보기에 필페이 상회1는 짐승을 가장 잘 써먹었다. 짐승은 모두 어떤 뜻에서는 짐 나르는 짐승, 우리 생각의 얼마쯤을 실어 나르도록 지어진 짐승이기 때문이다.
내 집에 드나들던 생쥐는 이 나라에 들여왔다고들 하는 흔한 생쥐가 아니라,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야생의 토박이 종이었다. 한 마리를 이름난 박물학자에게 보냈더니 그가 무척 흥미로워했다. 내가 집을 짓고 있을 때 이 생쥐 한 마리가 집 밑에 둥지를 틀었는데, 마루널을 두 겹째 깔고 대팻밥을 쓸어 내기도 전부터 점심때면 꼬박꼬박 나와서 내 발치의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곤 했다. 아마 사람을 그때 처음 보았을 것이다. 생쥐는 곧 아주 허물없어져서 내 신발 위를 달려 지나가고 옷을 타고 오르곤 했다. 몸놀림이 다람쥐를 닮아서 다람쥐처럼 짧게 몇 번씩 솟구치며 방의 벽을 쉽사리 타고 올랐다. 마침내 어느 날 내가 작업대에 팔꿈치를 괴고 있는데, 생쥐는 내 옷을 타고 올라와 소매를 따라 달리더니 내 점심을 싼 종이 둘레를 빙빙 돌았고, 나는 종이를 바짝 끌어안고 이리저리 피하며 생쥐와 까꿍 놀이를 했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치즈 한 조각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쥐고 가만히 있자, 생쥐는 다가와 내 손바닥에 앉아서 그것을 갉아 먹고는 파리처럼 얼굴과 앞발을 닦고 걸어가 버렸다.
곧 피비딱새 한 마리가 내 헛간에 둥지를 틀었고, 개똥지빠귀 한 마리는 몸을 지키려고 집에 기대어 자란 소나무에 둥지를 지었다. 6월에는 그토록 수줍은 새인 자고새(Tetrao umbellus)가 새끼들을 데리고 집 뒤 숲에서 집 앞으로 내 창 앞을 지나갔는데, 암탉처럼 꼬꼬 소리를 내며 새끼들을 부르는 몸짓 하나하나가 제가 숲의 암탉임을 보여 주었다. 사람이 다가가면 새끼들은 어미의 신호에 따라 회오리바람에 쓸려 가듯 갑자기 흩어지는데, 마른 잎과 잔가지를 어찌나 똑같이 닮았는지 많은 길손이 새끼들 한가운데 발을 들여놓고서, 어미 새가 푸드득 날아오르는 소리와 애타게 부르며 야옹거리는 소리를 듣거나 길손의 눈길을 끌려고 날개를 질질 끄는 모습을 보면서도 새끼들이 바로 곁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다. 어미는 이따금 사람 앞에서 깃털을 흐트러뜨린 채 뒹굴고 빙빙 돌아서, 잠깐 동안은 그게 무슨 짐승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새끼들은 꼼짝 않고 납작 웅크리고서 흔히 머리를 나뭇잎 밑에 들이밀고 멀리서 내리는 어미의 지시에만 귀를 기울이며, 사람이 다가가도 다시 달아나 제 자리를 드러내는 일이 없다. 밟을 수도 있고, 일 분 동안 눈길을 주고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때 새끼들을 펼친 손바닥에 올려놓은 적이 있는데, 그래도 그것들은 어미와 본능을 따라 겁내지도 떨지도 않고 거기 웅크리고 있는 일에만 마음을 썼다. 이 본능은 어찌나 완벽한지, 한번은 새끼들을 다시 나뭇잎 위에 놓아 주다가 하나가 잘못해서 옆으로 넘어졌는데, 십 분 뒤에 보니 다른 새끼들과 함께 정확히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이 새끼들은 대부분의 새 새끼처럼 깃도 나지 않은 핏덩이가 아니라 병아리보다도 더 온전히 자랐고 일찍 깨친다. 뜨인 채 고요한 그 눈에 담긴, 놀랍도록 어른스러우면서도 천진한 표정은 무척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온갖 지성이 거기 비치는 듯하다. 그 눈은 어린것의 순수함만이 아니라 경험으로 맑아진 지혜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눈은 새와 함께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눈이 비추는 하늘과 나이가 같다. 숲은 이런 보석을 다시 내놓지 않는다. 길손이 이토록 맑은 우물을 들여다볼 일은 흔치 않다. 무지하거나 무모한 사냥꾼은 흔히 이런 때 어미를 쏘아 버려서, 이 순진한 것들이 어슬렁거리는 짐승이나 새의 먹이가 되거나 저희가 그토록 닮은 썩어 가는 낙엽 속에 차츰 섞여 들게 내버려 둔다. 암탉이 품어 깐 새끼들은 무슨 기척만 있으면 곧바로 흩어져 그대로 사라진다고 한다. 다시 불러 모으는 어미의 소리를 끝내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내 암탉이고 병아리였다.
숲에는 숨어 지내기는 해도 야생으로 자유롭게 살면서 읍 가까이에서 여전히 제 목숨을 이어 가는, 사냥꾼만 눈치채는 생물이 놀랄 만큼 많다. 수달은 여기서 얼마나 숨어서 잘 사는지! 수달은 길이가 4피트, 어린 사내아이만큼 자라는데도 어쩌면 사람 눈에 한 번도 띄지 않는다. 전에 나는 내 집이 지어진 자리 뒤의 숲에서 너구리를 보았고, 밤이면 아마 그 낑낑대는 소리도 여전히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대개 씨를 심고 나서 한낮에 한두 시간 그늘에서 쉬며 점심을 먹고, 내 밭에서 반 마일 떨어진 브리스터 언덕 밑에서 스며 나와 늪 하나와 개울 하나의 근원이 되는 샘가에서 책을 조금 읽었다. 그리로 가려면 어린 리기다소나무가 빽빽한 풀 덮인 우묵한 땅을 몇 차례 내려가 늪 둘레의 더 큰 숲으로 들어가야 했다. 거기 아주 외지고 그늘진 곳, 가지를 넓게 펼친 스트로브잣나무 밑에는 앉을 만한 깨끗하고 단단한 잔디밭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었다. 나는 샘을 파내어 맑은 회색 물이 고이는 우물을 만들었는데, 거기서는 물을 흐리지 않고 한 통 가득 떠낼 수 있었고, 호수 물이 가장 따뜻해지는 한여름이면 물을 길으러 거의 날마다 그리로 갔다. 멧도요도 새끼들을 데리고 그리로 와서 진흙 속 벌레를 찾아 부리로 쑤셨는데, 어미는 새끼들 위로 겨우 1피트 높이로 날며 둑을 따라 내려가고 새끼들은 그 밑에서 떼 지어 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나를 알아보면 어미는 새끼들을 두고 내 둘레를 빙빙 돌며 4, 5피트 안까지 점점 다가왔고, 날개와 다리가 부러진 시늉을 하며 내 주의를 끌어 새끼들을 빼돌리려 했다. 그때 새끼들은 이미 어미가 이른 대로 가냘프고 가는 소리로 삐삐 울며 한 줄로 늪을 지나 행군을 시작한 뒤였다. 어미 새는 보이지 않는데 새끼들 삐삐 우는 소리만 들릴 때도 있었다. 거기서는 멧비둘기들이 샘 위에 앉아 있거나 내 머리 위 부드러운 스트로브잣나무 가지에서 가지로 푸드덕거리며 옮겨 다녔고, 가장 가까운 가지를 타고 쪼르르 내려오는 붉은다람쥐는 유난히 사람을 따르고 호기심이 많았다. 숲속 마음에 드는 자리에 오래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거기 사는 것들이 저마다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보다 덜 평화로운 일들도 목격했다. 어느 날 장작더미, 아니 그루터기 더미로 나갔다가 큰 개미 두 마리가 서로 맹렬하게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한 마리는 붉었고 다른 한 마리는 그보다 훨씬 커서 길이가 거의 반 인치나 되는 검은 개미였다. 일단 맞붙자 둘은 결코 놓지 않고 나뭇조각 위에서 쉴 새 없이 버둥거리고 엎치락뒤치락 뒹굴었다. 더 둘러보니 놀랍게도 나뭇조각마다 그런 싸움꾼들로 덮여 있었다. 그것은 일대일 결투(duellum)가 아니라 전쟁(bellum), 두 개미 종족 사이의 전쟁이었고, 붉은 개미가 늘 검은 개미에 맞섰으며, 흔히 붉은 개미 둘이 검은 개미 하나와 붙었다. 이 미르미돈 군단이 내 장작 마당의 언덕과 골짜기를 모두 뒤덮었고, 땅에는 벌써 죽은 것과 죽어 가는 것이 붉은 개미 검은 개미 할 것 없이 널려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목격한 단 하나의 전투, 전투가 한창일 때 내가 밟아 본 단 하나의 전장이었다. 서로를 몰살하는 전쟁, 한쪽에는 붉은 공화파, 다른 쪽에는 검은 제국파. 사방에서 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람의 병사들도 그토록 굳세게 싸운 적은 없었다. 나는 나뭇조각들 사이 볕 드는 작은 골짜기에서 서로 단단히 끌어안은 한 쌍을 지켜보았는데, 한낮인 지금부터 해가 질 때까지, 아니면 목숨이 꺼질 때까지 싸울 기세였다. 몸집 작은 붉은 투사는 바이스처럼 적의 앞머리에 들러붙어, 그 싸움터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내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적의 더듬이 하나를 뿌리께에서 갉아 대고 있었다. 다른 더듬이는 이미 떨어져 나가게 만든 뒤였다. 그동안 힘센 검은 개미는 붉은 개미를 이쪽저쪽으로 내동댕이쳤고, 가까이 들여다보니 벌써 그의 팔다리 여럿을 떼어 낸 뒤였다. 그들은 불도그보다 더 끈질기게 싸웠다.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함성은 분명 "이기지 못하면 죽음을"이었다. 그사이 붉은 개미 한 마리가 홀로 이 골짜기의 비탈을 따라 다가왔는데, 몹시 흥분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이미 제 적을 해치웠거나 아직 싸움에 끼지 않았을 텐데, 팔다리가 하나도 축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뒤쪽이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방패를 들고 돌아오든지 방패에 실려 돌아오든지 하라고 일러 두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따로 떨어져 분노를 키우다가 이제 제 파트로클로스의 원수를 갚거나 그를 구하러 온 어느 아킬레우스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서 이 고르지 못한 싸움을 보았고(검은 개미가 붉은 개미보다 거의 두 배는 컸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싸우는 둘에게서 반 인치 떨어진 곳에 자세를 잡고 섰다. 그러고는 틈을 노리다가 검은 전사에게 덤벼들어 그의 오른쪽 앞다리 뿌리께부터 작전을 시작했고, 적에게는 제 팔다리 가운데 어느 것을 고를지 맡겨 두었다. 그리하여 셋이 목숨을 걸고 한 덩어리로 묶였으니, 마치 다른 어떤 자물쇠나 접착제도 부끄럽게 만드는 새로운 끌어당김이 발명된 듯했다. 이쯤 되자 그들이 저마다 군악대를 어느 높직한 나뭇조각 위에 세워 두고 그동안 국가를 연주하게 해서 굼뜬 자를 북돋우고 죽어 가는 투사들을 격려하고 있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나 자신도 마치 그들이 사람이기라도 한 듯 얼마쯤 흥분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차이는 줄어든다. 그리고 미국의 역사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콩코드의 역사에는, 거기 나선 수로 보나 드러난 애국심과 영웅심으로 보나 이 싸움과 잠시라도 견줄 만한 싸움은 분명 기록되어 있지 않다. 수로 보나 살육으로 보나 그것은 아우스터리츠였고 드레스덴이었다. 콩코드 전투!2 애국파 쪽에서 둘이 죽고 루서 블랜처드가 다쳤다! 그런데 여기서는 개미 한 마리 한 마리가 다 버트릭이었고("쏘라! 제발 쏘라!"), 수천 마리가 데이비스와 호스머의 운명을 나누었다. 거기에는 돈 받고 싸우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 조상들 못지않게 원칙을 위해 싸웠지 차에 붙는 3펜스 세금을 피하려고 싸운 게 아니라는 데 의심이 없으며, 이 전투의 결과는 그 일에 관계된 이들에게 적어도 벙커힐 전투의 결과만큼은 중요하고 기억할 만할 것이다.
나는 내가 특히 자세히 그린 셋이 버둥거리던 나뭇조각을 집어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 결말을 보려고 창턱 위에 놓고 큰 유리컵을 엎어 씌웠다. 처음 말한 붉은 개미에게 현미경을 대어 보니, 그는 적의 남은 더듬이마저 끊어 놓고 이제 가까운 앞다리를 부지런히 갉아 대고 있었지만, 그 자신의 가슴은 다 찢겨 나가 거기 있는 급소를 검은 전사의 턱 앞에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검은 전사의 흉갑은 붉은 개미가 뚫기에는 너무 두꺼운 듯했다. 고통받는 붉은 개미의 검붉은 홍옥 같은 눈은 전쟁만이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나움으로 번득였다. 그들은 유리컵 밑에서 반 시간을 더 버둥거렸고, 다시 보았을 때 검은 병사는 적들의 머리를 몸통에서 끊어 낸 뒤였는데, 아직 살아 있는 머리들은 안장 앞머리에 매단 끔찍한 전리품처럼 그의 양옆에 대롱대롱 매달려 여전히 어느 때보다 단단히 붙어 있는 듯했다. 그는 더듬이도 없고 다리라고는 한 짝 토막만 남은 데다 상처가 몇 군데인지도 모를 몸으로 힘없이 버둥거리며 그 머리들을 떼어 내려 애썼고, 반 시간이 더 지나서야 마침내 해냈다. 내가 유리컵을 들어 올리자 그는 그 불구의 몸으로 창턱을 넘어 가 버렸다. 그가 마침내 그 싸움에서 살아남아 어느 앵발리드 같은 상이군인 요양원에서 남은 날을 보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 뒤로 그의 근면은 별로 쓸모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편이 이겼는지도, 전쟁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도 끝내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남은 하루 내내, 마치 내 집 문 앞에서 사람의 전투를, 그 몸부림과 사나움과 살육을 목격하고 감정이 들끓고 할퀴인 듯한 기분이었다.
커비와 스펜스는 개미들의 전투가 오래전부터 이름났고 그 날짜까지 기록되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목격한 듯한 근대 저자는 위베르 하나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아이네아스 실비우스는 배나무 줄기에서 큰 종과 작은 종이 몹시 끈질기게 벌인 한 전투를 아주 자세히 서술한 뒤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 싸움은 에우게니우스 4세의 교황 재위 중에, 이름난 법률가 니콜라우스 피스토리엔시스가 보는 앞에서 벌어졌는데, 그는 전투의 전말을 더없이 충실하게 전했다." 큰 개미와 작은 개미 사이의 비슷한 교전을 올라우스 마그누스도 기록했는데, 거기서는 이긴 작은 개미들이 제 병사들의 주검은 묻어 주고 거인 적들의 주검은 새의 먹이로 버려두었다고 한다. 이 일은 폭군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에서 쫓겨나기 전에 일어났다. 내가 목격한 전투는 포크 대통령 시절, 웹스터의 도망 노예법3이 통과되기 다섯 해 전에 벌어졌다.
지하 식료품 가게에서 진흙거북이나 쫓는 게 고작인 보스라는 마을 개가 여럿, 주인 몰래 숲에 들어와 그 육중한 엉덩이를 놀리며 옛 여우 굴과 우드척 굴에 코를 대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어쩌면 숲을 날렵하게 누비며 아직도 숲속 주민들에게 타고난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하찮은 똥개 한 마리에게 이끌려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길잡이보다 한참 뒤처져서는, 살펴보려고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린 작은 다람쥐를 향해 개의 탈을 쓴 황소처럼 짖어 대고, 다시 그 무게로 덤불을 휘며 느릿느릿 뛰어가서는 길 잃은 날쥐 족속 하나를 쫓고 있다고 상상한다. 한번은 고양이 한 마리가 호수의 돌 많은 기슭을 따라 걷는 것을 보고 놀랐다. 고양이는 집에서 그렇게 멀리까지 돌아다니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놀란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평생 깔개 위에 누워 지낸 더없이 집고양이다운 고양이도 숲에서는 아주 제집처럼 굴고, 그 은밀하고 살금살금한 거동으로 정식 주민들보다 더 토박이임을 보여 준다. 한번은 딸기를 따다가 숲에서 새끼 고양이들을 거느린 어미 고양이를 만났는데, 아주 야생이 되어 있었고 새끼들도 모두 어미처럼 등을 세우고 나를 향해 사납게 캭캭거렸다. 내가 숲에 살기 몇 해 전,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링컨의 농가 가운데 하나인 길리언 베이커 씨네에 이른바 "날개 달린 고양이"가 있었다. 1842년 6월 그 고양이를 보러 찾아갔을 때 고양이는 늘 하던 대로 숲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었다(나는 그것이 수컷인지 암컷인지 확실히 몰라서 흔히 하는 대로 암컷으로 친다). 그러나 안주인 말로는, 그 고양이가 한 해 남짓 전 4월에 이 근처에 나타났다가 마침내 집 안으로 들였다고 했다. 털빛은 짙은 갈색이 도는 회색에 목에 흰 반점이 있고 발이 희며, 여우처럼 숱 많은 큰 꼬리가 있었다. 겨울이면 털이 두툼하게 자라 옆구리를 따라 납작하게 펼쳐지면서 길이 10인치나 12인치, 너비 2½인치의 띠를 이루고 턱 밑에는 토시처럼 자랐는데, 윗면은 헐겁고 아랫면은 펠트처럼 엉겨 있다가 봄이면 이 덧붙은 것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했다. 그들은 그 고양이의 "날개" 한 쌍을 내게 주었고, 나는 지금도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 막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날다람쥐나 다른 야생 동물의 피가 섞인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럴 법도 하다. 박물학자들에 따르면 담비와 집고양이 사이에서 번식력 있는 잡종이 났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고양이를 길렀다면 바로 이런 고양이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시인이 타는 말에도 날개가 있는데, 시인의 고양이라고 날개가 없어야 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가을이면 아비(Colymbus glacialis)가 여느 해처럼 털갈이를 하고 멱을 감으러 호수에 와서,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그 야생의 웃음소리로 숲을 울렸다. 아비가 왔다는 소문이 돌면 밀댐의 사냥꾼들이 모두 경계 태세에 들어가 경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둘씩 셋씩, 특허 받은 소총과 원뿔 탄환과 망원경을 들고 온다. 그들은 가을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며 숲을 헤치고 오는데, 아비 한 마리에 사람이 적어도 열이다. 어떤 이들은 호수 이쪽에, 어떤 이들은 저쪽에 자리를 잡는다. 가엾은 새가 어디에나 한꺼번에 있을 수는 없으니, 여기서 잠기면 저기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친절한 10월의 바람이 일어 나뭇잎을 바스락거리게 하고 수면에 잔물결을 일으키면, 적들이 망원경으로 호수를 샅샅이 훑고 총소리로 숲을 울려 대도 아비는 소리도 모습도 찾을 길이 없다. 물결은 너그럽게 일어나 성난 듯 부서지며 모든 물새의 편을 들고, 우리 사냥꾼들은 읍으로, 가게로, 하다 만 일로 퇴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뜻을 이루는 일도 너무 잦았다. 이른 아침 물 한 통 길으러 가면 나는 이 위풍당당한 새가 몇 로드 앞에서 내 집 앞 작은 만을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가 어떻게 몸을 놀리는지 보려고 배를 타고 따라잡으려 하면, 그는 물속으로 잠겨 감쪽같이 사라져서 어떤 때는 해가 기울 무렵에야 다시 눈에 띄었다. 그러나 물 위에서라면 내가 그를 당하고도 남았다. 그는 대개 비가 올 때 떠났다.
아주 고요한 10월 어느 오후, 북쪽 기슭을 따라 노를 저어 가던 때였다. 아비들은 바로 그런 날이면 박주가리 솜털처럼 호수에 내려앉는다. 호수 위를 둘러보며 아비를 찾았지만 헛일이었는데, 갑자기 한 마리가 내 몇 로드 앞에서 기슭을 떠나 호수 가운데로 미끄러져 나가다가 야생의 웃음을 터뜨려 제 자리를 드러냈다. 내가 노를 저어 쫓자 그는 잠겼지만, 다시 떠올랐을 때 나는 전보다 가까이 있었다. 그는 다시 잠겼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가 갈 방향을 잘못 짚어서, 그가 떠올랐을 때 우리는 50로드나 떨어져 있었다. 그 틈을 벌려 놓는 데 내가 한몫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길고 크게 웃었는데, 이번에는 전보다 웃을 까닭이 더 있었다. 그가 어찌나 교활하게 몸을 놀리는지 나는 그의 여섯 로드 안으로도 다가갈 수 없었다. 수면에 떠오를 때마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물과 땅을 침착하게 살폈고, 물이 가장 넓게 펼쳐져 있고 배에서 가장 먼 곳에 떠오를 수 있도록 길을 고르는 듯했다. 그가 얼마나 빨리 마음을 정하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그는 곧장 나를 호수의 가장 넓은 곳으로 끌고 갔고, 거기서 그를 몰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제 머릿속으로 한 가지를 생각하는 동안 나는 내 머릿속으로 그의 생각을 알아맞히려 애썼다. 그것은 호수의 매끄러운 수면 위에서 벌어진, 사람 대 아비의 멋진 놀이였다. 갑자기 상대의 말이 판 밑으로 사라지면, 문제는 그의 말이 다시 나타날 곳에 가장 가까이 내 말을 놓는 것이다. 어떤 때 그는 배 바로 밑을 지나간 듯 뜻밖에도 내 맞은편에서 떠올랐다. 그는 숨이 어찌나 길고 지칠 줄 모르는지 가장 멀리 헤엄쳐 간 뒤에도 곧바로 다시 뛰어들었고, 그러면 깊은 호수의 매끄러운 수면 밑 어디쯤을 그가 물고기처럼 내달리고 있을지 어떤 꾀로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호수의 가장 깊은 바닥까지 다녀올 시간도 능력도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의 호수들에서는 송어를 잡으려고 놓은 낚싯바늘에 아비가 수면 밑 80피트에서 걸린 적이 있다고 한다. 월든은 그보다 더 깊지만. 다른 세계에서 온 이 어설픈 손님이 제 떼 사이를 내달리는 것을 보고 물고기들은 얼마나 놀랄까! 그런데도 그는 물 위에서처럼 물속에서도 제 길을 확실히 아는 듯했고, 거기서 훨씬 더 빨리 헤엄쳤다. 한두 번은 그가 수면 가까이 올라와 정찰하려고 머리만 내밀었다가 곧바로 다시 잠기는 자리에 이는 잔물결을 보았다. 나는 그가 어디서 떠오를지 계산하려 애쓰느니 노를 놓고 쉬며 그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한쪽 수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거듭거듭 뒤에서 그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웃음소리가 들려와 나를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꾀를 부려 놓고 왜 그는 떠오르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그 큰 웃음소리로 제 자리를 드러냈을까? 그 흰 가슴만으로도 충분히 들키지 않았을까? 과연 얼간이 소리를 들을 만한 새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가 떠오를 때면 대개 물 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로도 그를 찾아냈다. 그러나 한 시간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생생해 보였고, 여전히 기꺼이 잠겼으며, 처음보다 더 멀리 헤엄쳤다. 그가 수면에 떠올라 깃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가슴으로 그토록 태연히 미끄러져 가고, 모든 일은 물밑에서 물갈퀴 달린 발이 다 하는 모습은 놀라웠다. 그의 평소 울음은 이 악마 같은 웃음이었지만 물새 소리 같은 데가 조금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나를 가장 감쪽같이 따돌리고 멀찍이 떠올랐을 때면 길게 끄는,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울부짖음을 내었는데, 아마 어떤 새보다도 늑대 소리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짐승이 주둥이를 땅에 대고 작정한 듯 길게 울부짖을 때처럼. 이것이 그의 아비 울음이었다. 아마 여기서 들을 수 있는 가장 야생의 소리일 것이며, 숲을 멀리 널리 울렸다. 나는 그가 제 재주를 믿고 내 애쓰는 꼴을 비웃느라 웃는다고 결론지었다. 그 무렵 하늘은 흐렸지만 호수가 워낙 잔잔해서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도 그가 수면을 깨는 자리가 보였다. 그의 흰 가슴, 고요한 공기, 잔잔한 물이 모두 그에게 불리했다. 마침내 50로드 떨어진 곳에 떠오른 그가 아비들의 신에게 도와 달라고 비는 듯 그 긴 울부짖음을 한 번 내자, 곧바로 동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수면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온 하늘을 안개 같은 비로 채웠다. 나는 마치 아비의 기도가 응답을 받고 그의 신이 나에게 노한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그가 거친 물결 위로 멀리 사라져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을날이면 나는 몇 시간이고 오리들이 사냥꾼에게서 멀리 떨어져 꾀 있게 이리저리 뱃머리를 틀며 호수 가운데를 지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루이지애나의 늪지 물길에서라면 그런 재주를 부릴 필요가 덜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날아오를 때면 오리들은 이따금 꽤 높이 떠서 하늘의 검은 티끌처럼 호수 위를 빙빙 돌았는데, 그 높이에서는 다른 호수들과 강까지 쉽게 내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내가 벌써 오래전에 그리로 가 버렸겠거니 생각할 즈음이면, 4분의 1마일을 비스듬히 날아 내려와 아무도 없는 먼 곳에 내려앉곤 했다. 그러나 월든 한가운데 떠 있으면서 안전 말고 무엇을 얻었는지는 나도 모른다. 나와 같은 까닭으로 그 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