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편 적정성에 부합하는 여러 정념의 정도에 관하여
머리말
우리 자신과 유별나게 관련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모든 정념의 적정성, 곧 관찰자가 함께 따라갈 수 있는 정도는 어떤 중간치에 있음이 분명하다. 정념이 너무 높거나 너무 낮으면 관찰자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사로운 불행과 침해에서 오는 슬픔과 분개는 너무 높아지기 쉽고, 사람들 대부분에게서 실제로 그렇다. 또 이런 일은 더 드물게 일어나지만, 그것이 너무 낮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지나침을 무름과 광란이라 이름하고, 그 모자람을 둔함과 무감각과 기개의 결여라 부른다. 우리는 그 어느 쪽에도 들어갈 수 없고, 그것을 보면 놀라고 당황할 뿐이다.
그러나 적정성의 지점이 놓이는 이 중간치는 정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정념에서는 높고 어떤 정념에서는 낮다. 아주 강하게 드러내면 온당치 못한 정념이 있는데, 그것을 가장 높은 정도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누구나 인정하는 경우에조차 그렇다. 반대로 어떤 정념은 그 자체가 그만큼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모르나, 가장 강하게 드러낸 것이 많은 경우에 지극히 우아하게 보인다. 앞의 것은 어떤 이유로 동감이 거의 또는 전혀 따라붙지 않는 정념이고, 뒤의 것은 다른 이유로 동감이 가장 크게 따라붙는 정념이다. 인간 본성의 여러 정념을 모두 살펴보면, 그것들이 온당하다거나 온당치 못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오로지 사람들이 그 정념에 동감하려는 마음이 더 큰지 작은지에 정확히 비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장 몸에서 비롯하는 정념에 관하여
1. 몸의 어떤 처지나 상태에서 일어나는 정념을 강한 정도로 드러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함께 있는 이들은 같은 상태에 있지 않으므로 그 정념에 동감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격렬한 허기는 많은 경우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온당치 못하며, 탐하듯 먹는 일은 어디서나 무례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허기에도 어느 정도의 동감은 있다. 함께 있는 이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은 보기 좋고, 역겨움을 드러내는 표현은 모두 거슬린다. 건강한 사람에게 익은 몸의 상태는, 이런 거친 표현을 써도 된다면, 그의 위가 앞의 것과는 쉽게 박자를 맞추게 하고 뒤의 것과는 맞추지 못하게 한다. 농성전이나 항해의 일지에서 그 서술을 읽을 때 우리는 극심한 허기가 불러오는 괴로움에 동감할 수 있다. 우리는 당하는 쪽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 보고, 그리하여 그들을 반드시 헤집어 놓을 슬픔과 두려움과 경악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다. 우리 스스로도 그 정념을 어느 정도 느끼고 그래서 그것에 동감한다. 그러나 그 서술을 읽는다고 우리가 배고파지지는 않으므로, 이런 경우에조차 우리가 그들의 허기에 동감한다고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자연이 두 성을 맺어 주는 그 정념도 사정이 같다. 본래 모든 정념 가운데 가장 격렬한 것이지만, 그것을 강하게 드러내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온당치 못하며, 그것을 가장 온전히 누리는 일이 사람의 법과 신의 법 모두에게서 전혀 흠 없는 것으로 인정되는 사이에서조차 그렇다. 그러나 이 정념에도 어느 정도의 동감은 있는 듯하다. 여자에게 남자에게 하듯 말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 여자와 함께 있으면 더 흥겹고 더 유쾌하고 더 살피는 마음이 우리에게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되며, 여성에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남자는 남자들에게조차 어느 정도 업신여김을 받는다.
몸에서 비롯하는 모든 욕구에 대한 우리의 반감이 이러하다. 그것을 강하게 드러낸 것은 모두 역겹고 거슬린다. 몇몇 옛 철학자에 따르면 이것은 우리가 짐승과 함께 지니는 정념이며, 인간 본성의 고유한 성질과 아무 연관이 없으므로 그 까닭으로 인간의 품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짐승과 함께 지니는 정념에는 분개, 타고난 정서, 심지어 감사처럼 그 까닭만으로는 그토록 짐승 같아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다. 다른 사람에게서 몸의 욕구를 볼 때 우리가 품게 되는 그 유별난 혐오의 참된 원인은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느끼는 사람 자신에게도 그 욕구가 채워지는 순간 그것을 불러일으켰던 대상은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게 되고, 그 대상이 앞에 있는 것조차 흔히 거슬리게 된다. 그는 조금 전에 자신을 사로잡았던 매력을 헛되이 두리번거리며 찾고, 이제 자기 자신의 정념 안으로도 남과 마찬가지로 거의 들어가지 못한다. 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상을 물리라고 이른다. 가장 뜨겁고 열렬한 욕망의 대상도, 그것이 몸에서 비롯하는 정념 말고 다른 어떤 정념의 대상도 아니라면, 우리는 똑같이 다룰 것이다.
몸의 이런 욕구를 다스리는 데에 절제라고 제대로 불리는 덕이 있다. 건강과 재산에 대한 고려가 정해 주는 한계 안에 그것을 붙들어 두는 일은 신중의 몫이다. 그러나 우아함이, 적정성이, 섬세함과 조심스러움이 요구하는 한계 안에 그것을 가두어 두는 일은 절제가 맡은 직무다.
2. 같은 이유로 몸의 고통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 일은 그 고통이 아무리 견딜 수 없는 것이라 해도 언제나 사내답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몸의 고통에도 상당한 동감이 있다. 이미 말한 대로, 남의 다리나 팔을 겨눈 매가 막 떨어지려는 것을 내가 보면 나는 저절로 움츠러들며 내 다리나 내 팔을 뒤로 뺀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떨어지면 나는 그것을 어느 정도 느끼고 당하는 쪽과 더불어 나도 아프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아픔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지나칠 만큼 가벼운 것이어서, 그 까닭으로 그가 격하게 소리를 지르면 나는 그와 함께 갈 수 없으므로 반드시 그를 업신여기게 된다. 몸에서 비롯하는 모든 정념이 이와 같다. 그것은 동감을 전혀 불러일으키지 못하거나, 불러일으켜도 당하는 쪽이 느끼는 격렬함에 전혀 걸맞지 않은 정도의 동감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상상력에서 비롯하는 정념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내 몸의 틀은 함께 있는 이의 몸에 일어난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상상력은 그보다 잘 늘어나서,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내가 친하게 지내는 이들의 상상력이 지닌 모양과 짜임을 더 쉽게 받아들인다. 그 까닭으로 사랑이나 야망에서 겪는 좌절은 가장 큰 몸의 재앙보다 더 많은 동감을 불러낸다. 그런 정념은 오로지 상상력에서 일어난다. 재산을 모두 잃은 사람은 몸이 건강하다면 몸으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그가 겪는 고통은 오직 상상력에서 오는데, 상상력은 품위의 상실, 벗들의 외면, 적들의 경멸, 남에게 매인 처지, 궁핍과 비참이 빠르게 자기에게 닥쳐오는 것을 그에게 그려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그 까닭으로 그에게 더 강하게 동감하는 것은, 우리 몸이 그의 몸에 맞추어 형태를 잡는 것보다 우리 상상력이 그의 상상력에 맞추어 형태를 잡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다리를 잃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는 것보다 대체로 더 실제적인 재앙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상실에 파국이 걸려 있는 비극이라면 우스꽝스러운 비극이 될 것이다. 다른 종류의 불행은 아무리 하찮게 보일지라도 훌륭한 비극을 여러 편 낳는 계기가 되었다.
고통만큼 빨리 잊히는 것은 없다.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 그 괴로움은 통째로 끝나고, 그것을 떠올려도 우리는 더 이상 어떤 흔들림도 느끼지 않는다. 그때는 우리 자신조차 앞서 품었던 불안과 번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벗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더 오래가는 불편을 낳는다. 그것이 빚어내는 괴로움은 그 말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를 흔드는 것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상상력이 그린 관념이다. 우리의 불편을 낳는 것이 관념인 까닭에, 시간과 다른 일들이 그것을 우리 기억에서 어느 정도 지워 줄 때까지 상상력은 그 생각에서 안으로 계속 쓰리고 곪는다.
고통은 위험이 따르지 않는 한 결코 아주 생생한 동감을 불러내지 못한다. 우리는 당하는 쪽의 두려움에는 동감하지만 그 괴로움에는 동감하지 않는다. 그런데 두려움은 오로지 상상력에서 나오는 정념이며, 상상력은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겪을 수 있는 것을, 우리 불안을 키우는 불확실함과 흔들림과 함께 그려 보인다. 통풍이나 치통은 지독하게 아프지만 동감을 아주 적게 불러일으키고, 더 위험한 병은 고통이 거의 따르지 않아도 가장 높은 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사람들은 외과 수술을 보면 정신을 잃고 속이 뒤집히며, 살을 가르는 데서 오는 몸의 고통이 그들에게는 가장 지나친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우리는 몸속의 병에서 오는 고통보다 밖의 원인에서 오는 고통을 훨씬 더 생생하고 또렷하게 떠올린다. 이웃이 통풍이나 결석으로 시달릴 때 나는 그의 괴로움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한다. 그러나 칼에 베이거나 상처를 입거나 뼈가 부러졌을 때 그가 겪을 것은 아주 또렷하게 떠올린다. 그러나 그런 대상이 우리에게 그토록 격한 영향을 미치는 주된 원인은 그것이 새롭다는 데 있다. 해부를 12차례 지켜보고 절단 수술도 그만큼 지켜본 사람은 그 뒤로는 이런 수술을 모두 아주 대수롭지 않게, 흔히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바라본다. 비극을 500편 넘게 읽거나 무대에서 보았다 해도, 그 비극이 우리에게 그려 보이는 대상에 대한 감수성이 그처럼 온전히 줄어드는 일은 좀처럼 없다.
몇몇 그리스 비극에는 몸의 고통이 주는 괴로움을 그려 보임으로써 연민을 불러일으키려는 시도가 있다. 필록테테스는 고통이 극에 이르러 소리를 지르고 정신을 잃는다.1 히폴리토스와 헤라클레스는 둘 다 가장 혹독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헤라클레스의 굳센 마음조차 그 고통을 버텨 내지 못했던 듯하다.2 그러나 이 모든 경우에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정이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필록테테스의 곪은 발이 아니라 그의 외로움이며, 그 외로움이 그 매혹적인 비극 전체에 상상력에 그토록 잘 맞는 아득하고 거친 기운을 퍼뜨린다. 헤라클레스와 히폴리토스의 괴로움이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은 오직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리 보기 때문이다. 그 영웅들이 회복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그려 보인 것이 전혀 우스꽝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괴로움이 복통에 있는 비극이라면 그것이 어떤 비극이겠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지독한 고통은 없다. 몸의 고통을 그려 보여 연민을 불러일으키려는 이런 시도는 그리스 연극이 본을 보인 것 가운데 품위를 가장 크게 깨뜨린 것에 든다고 볼 수 있다.
몸의 고통에 우리가 느끼는 동감이 적다는 것이 그것을 견디는 데서 한결같음과 참음이 적정성을 얻는 바탕이다. 가장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무름을 조금도 새어 나오게 하지 않고, 신음을 내뱉지 않으며, 우리가 온전히 들어갈 수 없는 정념에는 조금도 굽히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가장 높은 감탄을 얻는다. 그의 굳셈은 그가 우리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과 무감각에 박자를 맞출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그가 그러기 위해 들이는 아량 있는 노력에 감탄하며 온전히 함께 간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시인하고, 인간 본성이 흔히 무르다는 것을 겪어 왔기에 그가 시인을 받을 만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이상히 여긴다. 이상히 여기는 마음과 놀람이 섞여 생기를 얻은 시인이 감탄이라고 제대로 불리는 감정을 이루며, 이미 말한 대로 갈채가 그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2장 상상력이 얻은 특정한 방향이나 습성에서 비롯하는 정념에 관하여
상상력에서 나오는 정념 가운데서도 상상력이 얻은 남다른 방향이나 습성에서 비롯하는 정념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 해도 동감을 거의 얻지 못한다. 사람들의 상상력은 그 특정한 방향을 얻지 못했으므로 그 정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정념은 삶의 어떤 시기에는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정될 수 있다 해도 언제나 어느 정도 우스꽝스럽다. 오래도록 서로에게 생각을 붙들어 둔 남녀 두 사람 사이에 저절로 자라나는 그 강한 애착이 그러하다. 우리 상상력은 사랑에 빠진 이의 상상력과 같은 물길을 따라 흐른 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의 감정이 지닌 간절함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벗이 침해를 당했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분개에 동감하고, 그가 분노하는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도 분노한다. 벗이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의 감사 안으로 들어가고 그에게 은혜를 베푼 이의 공로를 아주 높이 느낀다. 그러나 벗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의 정념이 그런 종류의 어떤 정념만큼이나 이치에 맞는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는 있어도, 우리 자신이 같은 종류의 정념을, 그것도 그가 그 정념을 품은 바로 그 사람을 향해 품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정념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 말고는 누구에게나 대상의 값에 전혀 걸맞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사랑은 어느 나이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에 용서받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므로 언제나 웃음거리가 된다. 그것을 진지하고 강하게 드러낸 것은 모두 제삼자에게 우스꽝스러워 보이며, 사랑에 빠진 이가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에게는 좋은 벗일 수 있어도 다른 누구에게도 그렇지 않다. 그 자신도 이를 알고 있으며, 제정신을 지키는 동안에는 자기 정념을 놀림과 조롱으로 다루려 애쓴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어조뿐이며, 그것이 우리 자신도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유일한 어조이기 때문이다. 카울리와 프로페르티우스는 자기 애착의 격렬함을 부풀리는 일을 그칠 줄 모르는데, 우리는 그들의 무겁고 현학적이며 길게 늘어지는 사랑에는 싫증이 난다.3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흥겨움과 호라티우스의 멋스러움은 언제나 마음에 든다.4
그러나 우리가 이런 종류의 애착에 제대로 된 동감을 느끼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조차 그 특정한 사람을 향한 정념을 품는 데 다가가지 않는다 해도, 우리 자신이 같은 종류의 정념을 품어 본 적이 있거나 품게 될 수도 있는 까닭에, 그 정념이 채워짐으로써 주어질 행복에 대한 그 높은 희망 안으로도, 그것이 어그러질 때 두려워하는 그 지독한 괴로움 안으로도 어렵지 않게 들어간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은 정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마음을 끄는 다른 정념들, 곧 희망과 두려움과 온갖 종류의 괴로움을 낳는 계기가 되는 처지로서다. 항해에 대한 서술에서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이 허기가 아니라 그 허기가 낳는 괴로움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랑에 빠진 이의 애착 안으로 우리가 제대로 들어가지는 못해도, 그가 그 애착에서 끌어내는 아득한 행복에 대한 기대에는 어렵지 않게 함께 간다. 어떤 처지에 놓여 게으름으로 늘어지고 욕망의 격렬함에 지친 마음이 고요와 평온을 간절히 바라고, 자기를 헤집는 그 정념이 채워지는 데서 그것을 찾으리라 기대하며, 우아하고 부드럽고 열정적인 티불루스가 그토록 즐겨 뒤로 미루는 그 목가적인 평온과 은거의 삶을 스스로 그려 보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느낀다.5 시인들이 축복받은 섬을 두고 그리는 것과 같은 삶, 벗과 자유와 쉼이 있는 삶, 수고와 근심에서, 그리고 그것을 따라다니는 모든 소란스러운 정념에서 풀려난 삶이다.6 이런 종류의 장면조차 이미 누리는 것으로 그려질 때보다 바라는 것으로 그려질 때 우리 마음을 가장 크게 끈다. 사랑에 섞여 들고 어쩌면 사랑의 바탕이기도 한 그 정념의 거친 결은 그것이 채워지는 일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이 당장 손에 쥔 것으로 그려질 때에는 전체를 거슬리게 만든다. 그 까닭으로 행복한 정념은 두려움에 떨거나 서글픈 정념보다 우리 마음을 훨씬 덜 끈다. 그처럼 자연스럽고 마음에 드는 희망을 어그러뜨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우리를 떨게 하며, 그리하여 우리는 사랑에 빠진 이의 불안과 걱정과 괴로움 전부 안으로 들어간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어떤 비극과 연애 이야기에서는 이 정념이 그토록 놀랍게 마음을 끄는 것으로 나타난다. 『고아』에서 우리를 붙드는 것은 카스탈리오와 모니미아의 사랑이라기보다 그 사랑이 낳는 괴로움이다.7 두 연인이 아무 위험도 없는 장면에서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말하는 대목을 집어넣는 작가는 동감이 아니라 웃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런 종류의 장면이 비극에 들어오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어느 정도 적정하지 않으며, 거기서 드러나는 정념에 동감해서가 아니라 그 정념이 채워지는 데 따라붙을 것이라고 관객이 미리 보는 위험과 어려움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참고 보아 주는 것이다.
사회의 규범이 이 무름에 관하여 여성에게 지우는 삼감은 그것을 여성에게서 한결 유별나게 괴로운 것으로 만들고, 바로 그 까닭으로 더 깊이 마음을 끄는 것으로 만든다. 우리는 같은 이름의 프랑스 비극에 그려진 페드르의 사랑에, 그 사랑에 따라붙는 모든 도를 넘음과 죄에도 불구하고 매혹된다.8 바로 그 도를 넘음과 죄가 어느 정도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더 끌리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뉘우침과 소름과 절망이 더 자연스럽고 더 마음을 끄는 것이 된다.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사랑이라는 처지에서 일어나는 이차적인 정념은 모두 반드시 더 맹렬하고 격렬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제대로 동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이차적인 정념뿐이다.
그러나 대상의 값에 그토록 터무니없이 걸맞지 않은 모든 정념 가운데, 가장 무른 마음에게조차 그 안에 우아하거나 마음에 드는 무엇이 있어 보이는 것은 사랑뿐이다. 우선 사랑은 그 자체로는 우스꽝스러울 수는 있어도 본래 미움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 결과가 흔히 치명적이고 끔찍하기는 해도 그 뜻하는 바가 남을 해치려는 것인 경우는 드물다. 게다가 그 정념 자체에는 적정성이 거의 없지만, 언제나 그것을 따라다니는 정념 가운데 몇몇에는 적정성이 상당히 있다. 사랑 안에는 인간애와 도량과 다정함과 우애와 존중이 짙게 섞여 있다. 이 정념들은 곧 설명할 이유로 다른 어떤 정념보다 우리가 가장 크게 동감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들이며, 그것이 어느 정도 지나치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조차 그렇다. 우리가 그 정념들에 느끼는 동감은 그것들이 따라다니는 정념을 덜 거슬리게 만들고, 흔히 그 정념과 함께 가는 온갖 악덕에도 불구하고 우리 상상 속에서 그것을 떠받쳐 준다. 한쪽 성에서는 그것이 반드시 파멸과 오명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가장 덜 치명적이라고 여겨지는 다른 쪽 성에서는 거의 언제나 일할 힘의 상실과 의무의 방기, 명성은 물론 예사로운 평판까지 업신여기는 태도가 따라붙는데도 그렇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따라붙는다고 여겨지는 감수성과 도량의 정도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사랑은 허영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실제로 느꼈다면 자기에게 아무 명예도 되지 않을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를 좋아한다.
같은 종류의 이유로 우리 자신의 벗, 우리 자신의 공부, 우리 자신의 직업을 말할 때에도 어느 정도 삼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모두 우리 마음을 끄는 것과 같은 정도로 함께 있는 이들의 마음을 끌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삼가는 태도의 결여 때문에 사람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에게 나쁜 벗이 된다. 철학자는 철학자에게만 벗이 되고, 어떤 모임의 일원은 자기네 작은 패거리에게만 벗이 된다.
3장 비사회적 정념에 관하여
또 다른 한 무리의 정념이 있는데, 그것은 상상력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거나 그것을 우아하다거나 어울린다고 여길 수 있게 되려면, 길들지 않은 본성이 끌어올릴 높이보다 훨씬 낮은 자리까지 언제나 끌어내려져야 한다. 미움과 분개, 그리고 그것들이 갈라져 나온 온갖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 정념 모두에서 우리의 동감은 그 정념을 느끼는 사람과 그 정념의 대상이 되는 사람 사이에서 갈린다. 이 두 사람의 이해는 정면으로 맞선다. 그 정념을 느끼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동감이 우리에게 바라게 하는 것을, 상대편에 대하여 함께 느끼는 마음은 우리에게 두려워하게 한다. 둘 다 사람이므로 우리는 둘 다 걱정하며, 한쪽이 겪을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쪽이 겪은 일에 대한 우리의 분개를 눌러 놓는다. 그러므로 자극을 받은 사람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그를 본래 움직이는 정념에 반드시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동감에서 나온 정념을 모두 본래의 정념보다 못한 것으로 만드는 그 일반적인 원인 때문만이 아니라, 이 경우에만 있는 특유한 원인, 곧 다른 한 사람을 향한 우리의 반대편 동감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분개가 우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이 되려면, 다른 거의 모든 정념보다 더 낮추어져서 그것이 본래 오를 높이 아래로 끌어내려져야 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남에게 가해진 침해를 아주 강하게 느낀다. 비극이나 연애 이야기에 나오는 악당은 주인공이 우리의 동감과 정서의 대상이 되는 만큼이나 우리의 의분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오셀로를 높이 보는 만큼 이아고를 몹시 싫어하고, 한쪽의 괴로움에 마음 아파하는 만큼 다른 쪽이 벌 받는 것에 기뻐한다.9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 동포에게 가해진 침해에 그토록 강하게 함께 느끼는 마음을 지닌다 해도, 당하는 쪽이 분개하는 것으로 보일수록 그 침해에 더 분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그에게 기개가 결여되었다거나 두려움이 그가 참은 동기였다고 보이지만 않는다면, 그의 참음과 부드러움과 인간애가 클수록 그를 해친 사람을 향한 분개가 더 높아진다. 그 사람됨이 사랑을 부르는 것일수록 사람들은 그 침해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더 사무치게 느낀다.
그러나 이 정념들은 인간 본성이 지닌 성격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여겨진다. 모욕을 받고도 그것을 물리치려 하거나 갚으려 하지 않고 고분고분 가만히 앉아 굽히는 사람은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 우리는 그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그의 행동을 비천한 마음이라 부르며, 그의 적수가 부린 오만함에 못지않게 그의 행동에 실제로 성이 난다. 누구든 모욕과 부당한 대우에 참으며 굽히는 것을 보면 거리의 군중조차 격분한다. 그들은 이 오만함에 분개가 돌아가기를, 그것도 그 오만함을 당한 사람 자신이 분개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성이 나서 그에게 스스로를 지키라고, 아니면 스스로 갚으라고 외친다. 마침내 그의 의분이 일어나면 그들은 진심으로 갈채를 보내고 그 의분에 동감한다. 그것은 그의 적을 향한 그들 자신의 의분에 생기를 불어넣고, 그들은 그가 이번에는 그 적을 치는 것을 보며 기뻐하며, 그 갚음이 도를 넘지 않는 한 그 침해가 자기들에게 가해졌던 것처럼 실제로 흡족해한다.
그런데 이 정념들이 개인을 모욕하거나 해치는 일을 위험하게 만듦으로써 그 개인에게 지니는 효용이 인정되고, 또 정의와 정의를 고르게 집행하는 일의 지킴이로서 공중에게 지니는 효용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는 것이 뒤에 밝혀지겠지만, 그래도 그 정념 자체에는 거슬리는 무엇이 있어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을 우리가 반감을 느끼는 자연스러운 대상으로 만든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분노를 드러내는 일은, 그의 부당한 대우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그저 알리는 선을 넘어서면, 그 특정한 사람에 대한 모욕일 뿐 아니라 함께 있는 모든 이에 대한 무례로 여겨진다.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이라면 그처럼 요란하고 거슬리는 감정에 우리가 굽히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어야 한다. 마음에 드는 것은 이 정념들이 멀리 미치는 결과이며, 당장의 결과는 그 정념이 향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해코지다. 그러나 어떤 대상을 상상력에 마음에 들게 하거나 거슬리게 하는 것은 멀리 미치는 결과가 아니라 당장의 결과다. 감옥은 궁전보다 공중에게 분명히 더 유용하며, 앞의 것을 세우는 사람은 뒤의 것을 짓는 사람보다 대체로 훨씬 더 올바른 애국의 정신에 이끌린다. 그러나 감옥의 당장의 결과, 곧 그 안에 갇힌 불행한 자들이 자유를 잃고 있다는 사실은 거슬리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멀리 미치는 결과를 따라가 볼 틈을 내지 않거나, 너무 먼 거리에서 보아 그것에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옥은 언제나 거슬리는 대상일 것이며, 그것이 본래 뜻한 목적에 더 잘 맞을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반대로 궁전은 언제나 마음에 들 것이지만, 그것이 멀리 미치는 결과는 흔히 공중에게 해로울 수 있다. 궁전은 사치를 북돋우고 풍속이 허물어지는 본을 보이는 데 쓰일 수 있다. 그러나 궁전의 당장의 결과, 곧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편안함과 즐거움과 흥겨움은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이고 상상력에 마음에 드는 관념을 수없이 불러일으키므로, 상상력은 대체로 그것에 머물러 있고 더 멀리 있는 결과를 따라가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악기나 농기구를 모아 만든 전승 기념 장식을 그림이나 치장 벽토로 본떠 놓은 것은 우리 집의 넓은 방과 식당에 흔하고 보기 좋은 장식이 된다. 같은 종류의 장식을 외과 도구로, 곧 해부용 칼과 절단용 칼, 뼈를 자르는 톱, 두개골을 뚫는 기구 따위로 짜 놓았다면 터무니없고 소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외과 도구는 농기구보다 언제나 더 곱게 닦여 있고 대체로 그것이 뜻한 목적에 더 섬세하게 맞추어져 있다. 그것이 멀리 미치는 결과, 곧 환자의 건강도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당장의 결과가 아픔과 고통인 까닭에 그것을 보는 일은 언제나 우리 마음을 거스른다. 전쟁의 도구는 그 당장의 결과가 똑같이 아픔과 고통인 듯이 보여도 마음에 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동감을 품지 않는 적들의 아픔과 고통이다. 우리 쪽에서 보면 그 도구는 용기와 승리와 명예라는 마음에 드는 관념과 곧바로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 도구 자체는 옷차림에서 가장 고귀한 부분의 하나를 이루고, 그것을 본뜬 것은 건축에서 가장 훌륭한 장식의 하나를 이룬다고 여겨진다. 마음의 성질도 사정이 같다. 옛 스토아 학파는 세계가 지혜롭고 힘 있고 선한 신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섭리로 다스려지는 까닭에, 낱낱의 사건이 모두 우주의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을 이루며 전체의 일반적인 질서와 행복을 북돋우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지녔다.10 그러므로 사람들의 악덕과 어리석음도 그들의 지혜나 덕과 마찬가지로 이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을 이루며,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는 그 영원한 기예를 통하여 자연이라는 저 큰 체계의 번영과 완성으로 똑같이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색은 마음에 아무리 깊이 뿌리내렸다 해도, 당장의 결과는 그토록 파괴적이고 멀리 미치는 결과는 상상력이 따라가기에 너무 먼 악덕에 대한 우리의 타고난 혐오를 줄이지는 못했다.
우리가 지금 살펴 온 정념들도 사정이 같다. 그것의 당장의 결과가 너무나 거슬리는 것이어서, 그 정념이 가장 정당하게 돋우어진 때조차 그 안에는 우리를 역겹게 하는 무엇이 여전히 있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우리가 알기 전에는 그 표현이 우리를 그 정념에 동감하도록 기울게 하고 준비시키지 못하는 정념은 이것뿐이다. 비참함이 내는 구슬픈 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우리는 그 소리가 나오는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을 수 없다. 그 소리가 우리 귀에 닿는 순간 그것은 그의 운에 우리 마음을 쓰게 하고, 그 소리가 이어지면 우리로 하여금 거의 저절로 그를 도우러 달려가게 만든다. 웃음 띤 얼굴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시름에 잠긴 사람조차 흥겹고 가벼운 기분으로 끌어올려, 그 얼굴이 드러내는 기쁨에 동감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그전까지 생각과 근심으로 쪼그라들고 내려앉았던 자기 가슴이 그 순간 펴지고 들뜨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미움과 분개를 드러낸 것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분노가 내는 쉬고 요란하고 어긋나는 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우리에게 두려움이나 반감이 일어난다. 우리는 아픔과 괴로움으로 소리치는 사람에게 달려가듯 그 소리를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여자들과 신경이 약한 남자들은 자기가 그 분노의 대상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떨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들이 두려움을 품는 것은 자기를 그 대상이 된 사람의 처지에 놓아 보기 때문이다. 더 굳센 마음을 지닌 이들조차 흔들린다. 두려워할 만큼은 아니지만 분노할 만큼은 흔들리는데, 분노란 그들이 상대의 처지에 놓였다면 느꼈을 정념이기 때문이다. 미움도 사정이 같다. 앙심을 드러낸 것만으로는 그것을 드러낸 사람 말고 다른 누구에게도 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두 정념은 본래 우리 반감의 대상이다. 그것이 거슬리고 요란하게 나타나는 모습은 우리의 동감을 결코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결코 준비시키지 못하며, 흔히 어지럽힌다. 슬픔이 그것을 지닌 사람에게 우리를 끌어당겨 붙드는 힘은, 원인을 모르는 동안 이 정념들이 우리를 그에게서 역겹게 떼어 놓는 힘보다 더 크지 않다. 사람들을 서로에게서 떼어 놓는 그 거칠고 사랑을 부르지 않는 감정이 더 어렵게, 더 드물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자연의 뜻이었던 듯하다.
음악이 슬픔이나 기쁨의 억양을 본뜰 때 그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그 정념을 일으키거나, 적어도 그 정념을 품기 쉬운 기분으로 우리를 놓아 둔다. 그러나 음악이 분노의 음을 본뜰 때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일으킨다.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감탄과 경건함은 모두 본래 음악에 어울리는 정념이다. 그것들이 내는 본래의 음조는 모두 부드럽고 맑고 노래 같다. 그리고 그것들은 고른 쉼으로 나뉘는 마디로 저절로 드러나며, 그 까닭으로 곡조에 맞는 가락이 규칙적으로 돌아오는 것에 쉽게 맞추어진다. 반대로 분노의 소리와 그것에 가까운 모든 정념의 소리는 거칠고 어긋난다. 그 마디도 모두 고르지 않아서 때로는 아주 길고 때로는 아주 짧으며, 고른 쉼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음악이 그런 정념을 본뜨는 일은 어렵고, 그것을 본뜨는 음악은 가장 마음에 드는 음악이 아니다. 한 공연 전체가 사회적이고 마음에 드는 정념을 본뜨는 것으로 이루어져도 아무 부적정성이 없다. 그러나 미움과 분개를 본뜨는 것만으로 온통 이루어진 공연이라면 괴이한 공연이 될 것이다.
그 정념들이 관찰자에게 거슬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도 덜 거슬리지 않다. 미움과 분노는 선한 마음의 행복에 가장 큰 독이다. 그 정념을 느끼는 바로 그 안에는 거칠고 어긋나고 뒤틀리게 하는 무엇, 가슴을 찢고 헤집어 놓는 무엇이 있어서, 행복에 그토록 꼭 필요하고 감사와 사랑이라는 반대편 정념이 가장 잘 길러 주는 그 마음의 가라앉음과 평온을 온통 허물어 버린다. 도량이 크고 인간애가 있는 사람들이 가장 아까워하기 쉬운 것은 함께 사는 이들의 배신과 배은망덕으로 잃은 것의 값이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잃었든 그것 없이도 대체로 아주 행복할 수 있다. 그들을 가장 크게 흔드는 것은 배신과 배은망덕이 자기에게 행해졌다는 관념이며,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어긋나고 거슬리는 정념이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자기가 입은 침해의 주된 부분을 이룬다.
분개를 채우는 일이 온전히 마음에 들게 되고 관찰자가 우리의 갚음에 속속들이 동감하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것이 갖추어져야 하는가? 우선 그 자극은, 우리가 어느 정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끝없는 모욕에 내놓이게 될 만한 것이어야 한다. 더 작은 잘못은 언제나 그냥 지나치는 편이 낫고, 다툼의 사소한 계기마다 불이 붙는 그 뒤틀리고 트집 잡는 기질보다 더 하찮은 것은 없다. 우리가 분개해야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그 거슬리는 정념의 광란을 느끼기 때문이라기보다, 분개의 적정성을 느끼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것을 기대하고 요구한다고 느끼기 때문이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 품을 수 있는 정념 가운데, 그 정당함을 이토록 의심해야 하고, 그것을 놓아 주는 일에 대하여 우리의 타고난 적정성의 감각에 이토록 조심스럽게 물어야 하며, 공평한 관찰자의 감정이 어떠할지를 이토록 부지런히 헤아려야 하는 정념은 없다. 아량, 곧 사회에서 자기 자리와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만이 이 거슬리는 정념의 표현을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 동기다. 이 동기가 우리의 말투와 몸가짐 전체에 그 성격을 새겨 놓아야 한다. 그것은 꾸밈없고 열려 있고 곧아야 하며, 단호하되 독단에 빠지지 않고, 높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짜증과 낮은 욕설에서 벗어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량이 크고 솔직하며 우리를 해친 사람에 대해서까지 온당한 배려로 가득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가 짐짓 드러내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의 태도 전체에서, 정념이 우리의 인간애를 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고 우리가 갚음이 이르는 말에 굽힌다면 그것은 마음에 걸리면서, 어쩔 수 없어서, 크고 거듭된 자극의 결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분개가 이렇게 지켜지고 조건을 갖출 때, 그것은 도량이 크고 고귀한 것이라고까지 인정될 수 있다.
4장 사회적 정념에 관하여
방금 말한 그 한 무리의 정념을 대개 그토록 우아하지 못하고 거슬리게 만드는 것이 갈린 동감이라면, 그와 맞서는 또 한 무리의 정념이 있어서 겹쳐진 동감이 그것을 거의 언제나 유별나게 마음에 들고 어울리는 것으로 만든다. 도량과 인간애와 다정함과 연민, 서로 나누는 우애와 존중, 곧 사회적이고 인애로운 정서는 모두, 우리 자신과 유별나게 이어진 이들을 향한 것일 때조차 얼굴이나 행동에 드러나면 거의 모든 경우에 이해관계 없는 관찰자를 흡족하게 한다. 그 정념을 느끼는 사람에 대한 관찰자의 동감은 그 정념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 대한 그의 걱정과 정확히 겹친다. 사람으로서 뒤쪽 사람의 행복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그 관심은, 같은 대상에 자기 감정을 쏟고 있는 앞쪽 사람의 감정에 관찰자가 함께 느끼는 마음을 생기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인애로운 정서에 동감하려는 가장 강한 마음의 기울기를 지닌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마음에 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만족 안으로도,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의 만족 안으로도 들어간다. 미움과 의분의 대상이 되는 일이 용감한 사람이 적에게서 두려워할 수 있는 모든 재앙보다 더 큰 아픔을 주는 것과 같이,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데에는 만족이 있으며, 섬세하고 감수성 있는 사람에게 그 만족은 거기서 얻기를 바랄 수 있는 모든 이득보다 행복에 더 중요하다. 벗들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고 그들의 가장 애틋한 사랑을 죽고 죽이는 미움으로 바꾸어 놓는 일을 즐기는 자의 사람됨만큼 혐오스러운 사람됨이 또 있는가? 그러나 그토록 미움을 받는 이 침해의 끔찍함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우애가 이어졌다면 그들이 서로에게서 기대할 수 있었을 그 자잘한 도움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데 있는가? 그것은 그 우애 자체를 그들에게서 빼앗는 데, 둘 다 그토록 큰 만족을 얻어 왔던 서로의 정서를 강탈하는 데 있다. 그것은 그들 마음의 어울림을 어지럽히고 그전까지 그들 사이에 있었던 그 행복한 교류를 끝내 버리는 데 있다. 이 정서와 저 어울림과 이 교류가 거기서 흘러나올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모든 자잘한 도움보다 행복에 더 중요하다는 것은 애틋하고 섬세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람 가운데 가장 거칠고 투박한 세간의 사람들도 느끼는 바다.
사랑의 감정은 그 자체로 그것을 느끼는 사람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을 달래고 가라앉히며, 목숨의 움직임을 돕고 몸의 건강한 상태를 북돋우는 듯하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이 된 사람에게 그것이 반드시 일으킬 감사와 만족을 알고 있음으로써 그것은 한결 더 기쁜 것이 된다. 서로를 향한 그 마음은 그들을 서로에게서 행복하게 하고, 서로를 향한 그 마음에 대한 동감은 그들을 다른 모든 사람에게 마음에 드는 이로 만든다. 온 집안에 서로를 향한 사랑과 존중이 자리 잡은 가정,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벗이 되어 한쪽의 공손한 정서와 다른 쪽의 너그러운 허락이 만드는 차이 말고는 어떤 차이도 없는 가정, 거침없음과 애틋함, 서로 주고받는 놀림과 서로에게 베푸는 다정함이 이해의 다툼으로 형제가 갈리지 않았고 사랑을 두고 겨루는 일로 자매가 등지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가정, 그리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평화와 명랑함과 어울림과 만족의 관념을 안겨 주는 가정을 우리는 얼마나 기쁘게 바라보는가? 반대로 어긋나는 다툼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절반을 나머지 절반과 맞세워 놓은 집, 짐짓 꾸민 매끄러움과 고분고분함 가운데서 의심 어린 눈길과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정념이 그들 안에서 타고 있는 서로에 대한 시샘, 손님이 있어서 지워진 모든 억누름을 뚫고 순간마다 터져 나올 참인 그 시샘을 드러내 보이는 집에 들어갈 때 우리는 얼마나 불편해지는가?
사랑을 부르는 그 정념들은 지나치다고 인정될 때조차 결코 반감을 사지 않는다. 우애와 인간애에서 오는 무름에조차 마음에 드는 무엇이 있다. 너무 애틋한 어머니, 너무 너그러운 아버지, 너무 도량이 크고 정이 많은 벗은 그 천성이 무른 까닭에 때로는 일종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일 수 있으나, 그 마음 안에는 사랑이 섞여 있다. 그러나 그들을 미움과 반감으로, 심지어 업신여김으로 바라보는 일은 사람 가운데 가장 짐승 같고 하잘것없는 자들이 아니라면 결코 없다. 우리가 그들의 애착이 도를 넘었다고 나무랄 때에는 언제나 걱정과 동감과 다정함이 함께 있다. 인간애가 극에 이른 사람됨에는 어찌할 바 없음이 있어서, 그것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끈다. 그것 자체에 그것을 우아하지 못하게 하거나 거슬리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이 세상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는데, 세상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고, 또 그것을 지닌 사람을 슬며시 스며드는 거짓의 배신과 배은망덕에, 그리고 수없이 많은 아픔과 불편에 먹이로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아픔과 불편은 모든 사람 가운데 그가 가장 겪지 않아도 될 것이고, 대체로 모든 사람 가운데 그가 가장 견디지 못할 것이기도 하다. 미움과 분개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그 혐오스러운 정념으로 너무 격하게 기울어진 사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혐오의 대상이 되며, 우리는 그런 사람을 들짐승처럼 모든 문명한 사회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5장 이기적 정념에 관하여
서로 맞서는 그 두 무리의 정념, 곧 사회적 정념과 비사회적 정념 말고도 그 사이에서 일종의 중간 자리를 차지하는 또 한 무리가 있는데, 그것은 한쪽 무리가 때로 그러하듯 우아한 적도 없고 다른 쪽 무리가 때로 그러하듯 미움을 부르는 적도 없다.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좋은 운이나 나쁜 운 때문에 품게 되는 슬픔과 기쁨이 이 세 번째 무리의 정념을 이룬다. 그것이 지나칠 때조차 지나친 분개만큼 거슬리는 일은 없는데, 어떤 반대편 동감도 우리를 그것에 맞서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그 대상에 가장 잘 맞을 때조차 공평한 인간애와 올바른 인애만큼 마음에 드는 일은 없는데, 어떤 겹친 동감도 우리를 그것의 편에 서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픔과 기쁨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으니, 우리는 대체로 작은 기쁨과 큰 슬픔에 가장 잘 동감하려 한다. 운이 갑자기 뒤집혀 전에 살던 처지보다 크게 높은 삶의 자리로 한꺼번에 들어 올려진 사람은 가장 가까운 벗들의 축하가 모두 온전히 진심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보아도 틀림없다. 벼락출세한 사람은 공로가 아무리 크더라도 대체로 거슬리며, 시샘의 감정이 흔히 우리가 그의 기쁨에 진심으로 동감하는 것을 막는다. 그에게 얼마간의 판단력이 있다면 그는 이를 알고 있으며, 좋은 운에 들떠 보이는 대신 할 수 있는 만큼 자기 기쁨을 눌러 가리고 새 처지가 그에게 저절로 일으키는 그 마음의 들뜸을 억누르려 애쓴다. 그는 앞선 자리에서 그에게 어울렸던 것과 같은 옷차림의 꾸밈없음과 같은 몸가짐의 조심스러움을 짓는다. 그는 옛 벗들에게 갑절로 마음을 쓰고, 어느 때보다 더 자기를 낮추고 부지런히 살피며 고분고분하려 애쓴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처지에서 우리가 가장 시인하는 행동이다. 우리가 그의 행복에 품는 동감보다 그가 자기 행복에 대한 우리의 시샘과 반감에 더 많이 동감해야 한다고 우리가 기대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하고도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우리는 그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진심인지 의심하고, 그는 이런 억누름에 지쳐 간다. 그러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대개 옛 벗들을 모두 뒤에 남겨 두는데, 그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몇몇은 어쩌면 스스로 낮추어 그에게 매인 사람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새 벗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가 자기들과 대등한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된 새 교분의 자부심은 그가 자기들보다 높아진 것에 옛 교분의 자부심이 상했던 만큼이나 상하며, 어느 쪽에게든 이런 분함을 달래려면 가장 끈질기고 물러서지 않는 조심스러움이 필요하다. 그는 대개 너무 빨리 지치고, 한쪽의 뚱하고 의심 많은 자부심과 다른 쪽의 건방진 업신여김에 부추김을 받아 앞쪽은 본체만체 다루고 뒤쪽은 짜증으로 다루다가, 마침내 오만함이 몸에 붙어 모두의 존중을 잃는다. 사람의 행복의 주된 부분이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데서 온다면,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그런 갑작스러운 운의 변화가 행복에 크게 이바지하는 일은 드물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더 차근차근 높은 자리로 나아가는 사람, 그가 이르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그의 승진의 걸음마다 그를 정해 놓는 사람, 그래서 그 자리가 실제로 왔을 때 그 안에 터무니없는 기쁨을 일으킬 수 없는 사람, 그리고 그를 두고 그가 앞질러 간 이들에게 질투를, 뒤에 남겨 둔 이들에게 시샘을 이치에 맞게 일으킬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덜 중요한 원인에서 흘러나오는 그 작은 기쁨에는 더 쉽게 동감한다. 큰 번영 속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여느 삶의 자잘한 일들, 곧 어젯밤을 함께 보낸 벗들, 우리 앞에 놓였던 대접, 무슨 말이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 나누는 이야기의 사소한 대목 하나하나, 그리고 사람의 삶의 빈자리를 채우는 그 모든 하찮은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만족을 아무리 많이 드러내도 지나치다고 하기 어렵다. 몸에 붙은 명랑함보다 더 우아한 것은 없으며, 그것은 언제나 흔한 일들이 주는 자잘한 즐거움을 남달리 맛보는 데에 바탕을 둔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것에 동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같은 기쁨을 일으키고, 이 행복한 기질을 지닌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과 같은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온갖 사소한 것이 우리에게도 나타나게 만든다. 이 때문에 흥겨움의 시절인 젊음이 그토록 쉽게 우리의 정서를 붙든다. 젊음과 아름다움의 혈색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그 눈에서 반짝이는 듯한 그 기쁨을 향한 기울기는, 같은 성을 지닌 사람에게서 볼 때조차 늙은 이들까지 여느 때보다 더 기쁜 기분으로 끌어올린다. 그들은 한동안 자기 몸의 쇠함을 잊고, 오래도록 낯설게 지내 온 그 마음에 드는 관념과 감정에 자기를 맡긴다. 그러나 그토록 큰 행복이 앞에 있어 그것을 다시 가슴으로 불러들일 때, 그것은 헤어진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던 옛 벗처럼 그 자리를 차지하며, 그들은 이 오랜 헤어짐 때문에 그것을 더 진심으로 껴안는다.
슬픔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작은 속상함은 아무 동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지만 깊은 괴로움은 가장 큰 동감을 불러낸다. 거슬리는 자잘한 일마다 불편해지는 사람, 요리사나 집사가 자기 직무의 아주 작은 조목이라도 어기면 마음을 상하는 사람, 예의의 가장 높은 격식에서 흠이 하나라도 보이면 그것이 자기에게 보인 것이든 다른 누구에게 보인 것이든 다 알아채는 사람, 친한 벗이 오전에 만났을 때 아침 인사를 하지 않은 것과 자기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형제가 줄곧 콧노래를 부른 것을 언짢게 여기는 사람, 시골에서는 날씨가 나빠서, 여행길에서는 길이 나빠서, 도시에서는 벗의 결여와 모든 여흥의 심심함 때문에 기분을 잃는 사람, 이런 사람은, 내가 말하거니와, 그럴 얼마간의 이유가 있다 해도 많은 동감을 만나는 일이 드물 것이다. 기쁨은 즐거운 감정이어서 우리는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기꺼이 자기를 그것에 맡긴다. 그러므로 시샘에 눈이 흐려지지 않은 때라면 우리는 남에게서 그것을 보고 어렵지 않게 동감한다. 그러나 슬픔은 아픈 것이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의 불행일 때조차 마음은 저절로 그것에 맞서고 그것에서 물러난다. 우리는 그것을 아예 품지 않으려 애쓰거나, 품은 뒤에는 되도록 빨리 떨쳐 내려 애쓴다. 슬픔에 대한 우리의 반감이 아주 사소한 계기에 우리 자신의 경우에 그것을 품는 것을 언제나 막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반감은 그와 같은 하찮은 원인에서 일어난 슬픔을 남에게서 볼 때 우리가 그것에 동감하는 것은 늘 막는다. 동감에서 나온 우리 정념은 본래의 정념만큼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에게는 악의가 있어서, 그것은 자잘한 불편에 대한 동감을 모두 막을 뿐 아니라 그 불편을 어느 정도 재미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놀림을, 그리고 함께 있는 이가 사방에서 떠밀리고 재촉받고 놀림받을 때 그에게서 보이는 작은 속상함을 즐거워한다. 예사로운 교양만 갖춘 사람도 자잘한 일이 자기에게 줄 수 있는 아픔을 감추며, 사교에 더 온전히 길들여진 사람은 함께 있는 이들이 자기를 두고 그럴 것임을 알기에 그런 일을 모두 스스로 먼저 놀림거리로 돌린다.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관계된 모든 일이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헤아리는 습성을 익혀 두었기에, 그 하찮은 재난은 남들이 반드시 그렇게 볼 것이라고 그가 알고 있는 그 우스꽝스러운 빛으로 그 자신에게도 나타난다.
반대로 깊은 괴로움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아주 강하고 아주 진실하다.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우리는 비극이 꾸며 보이는 장면에조차 눈물을 흘린다. 그러므로 당신이 두드러진 재난 아래서 애쓰고 있다면, 어떤 뜻밖의 불행으로 가난에, 병에, 불명예와 좌절에 빠졌다면, 당신 자신의 잘못이 그 일부의 계기였다 해도 당신은 대체로 모든 벗의 가장 진실한 동감에, 그리고 자기 이해와 명예가 허락하는 한에서는 그들의 가장 다정한 도움에도 기댈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불행이 이처럼 끔찍한 종류가 아니라면, 야망에서 조금 어그러진 것뿐이라면, 사랑하던 여인에게 버림받은 것뿐이거나 아내에게 쥐여 사는 것뿐이라면, 아는 사람 모두의 놀림을 셈에 넣어 두라.
주
1. 옮긴이 — 필록테테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기원전 409년 상연)의 주인공이다. 뱀에 물린 발의 상처가 낫지 않아 렘노스섬에 홀로 버려진 그리스 궁수로, 스미스가 말하는 「외로움」은 이 유기를 가리킨다.
2. 옮긴이 — 히폴리토스가 죽는 대목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기원전 428년), 헤라클레스가 독이 묻은 옷 때문에 죽는 대목은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에 나온다.
3. 옮긴이 — 에이브러햄 카울리(1618~1667)는 영국 시인, 섹스투스 프로페르티우스(기원전 50년경~기원전 15년경)는 로마의 연가 시인이다.
4. 옮긴이 — 오비디우스(기원전 43~기원후 17)와 호라티우스(기원전 65~기원전 8)는 로마의 시인이다.
5. 옮긴이 — 알비우스 티불루스(기원전 55년경~기원전 19)는 로마의 연가 시인으로, 시골에서 사랑하는 이와 한가롭게 사는 삶을 되풀이 노래했다.
6. 옮긴이 — 원문의 Fortunate Islands. 고대 시인들이 서쪽 바다 끝에 있다고 노래한 낙원으로, 「축복받은 자들의 섬」이라고도 한다.
7. 옮긴이 — 토머스 오트웨이(1652~1685)의 비극 『고아』(The Orphan, 1680). 카스탈리오와 모니미아는 그 남녀 주인공이다.
8. 옮긴이 — 장 라신(1639~1699)의 비극 『페드르』(Phèdre, 1677). 페드르는 그리스 신화의 파이드라를 프랑스어로 옮긴 이름이며, 앞에 나온 히폴리토스가 그 상대 인물이다.
9. 옮긴이 — 셰익스피어(1564~1616)의 비극 『오셀로』(1604년경)의 두 인물이다.
10. 옮긴이 — 스토아 학파는 기원전 3세기 초 제논(기원전 334년경~기원전 262년경)이 아테네에서 세운 학파다. 세계가 이성을 지닌 섭리로 다스려진다고 보아, 낱낱의 일이 전체의 질서 안에서 제자리를 지닌다고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