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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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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효용이 시인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1장 효용의 외관이 기예의 모든 산물에 부여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리고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이 미치는 폭넓은 영향에 대하여

효용이 아름다움의 주된 원천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아름다움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주의 깊게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린 바다. 집의 편리함은 그 집의 균정함과 마찬가지로 관찰자에게 즐거움을 주며, 관찰자는 마주 놓인 창들의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이나 문이 건물 한가운데에 정확히 놓이지 않은 것을 볼 때와 똑같이 그 반대되는 결함을 볼 때에도 마음이 상한다. 어떤 체계나 기계가 그것이 본래 노린 목적을 이루기에 걸맞다는 것이 그 전체에 어떤 적정성과 아름다움을 부여하여 그것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일 자체를 유쾌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 뚜렷하여 아무도 그것을 지나쳐 본 적이 없다.

효용이 왜 즐거움을 주는지, 그 원인 또한 근래에 어느 재치 있고 유쾌한 철학자가 밝혀 놓았다1. 그는 가장 깊은 사유에 가장 우아한 표현을 아울렀으며, 가장 알기 어려운 주제를 가장 온전한 맑음으로뿐 아니라 가장 생생한 웅변으로 다루는 남다르고 복된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대상의 효용은 그것이 가져다주기에 알맞은 즐거움이나 편리함을 그 주인에게 끊임없이 떠올려 줌으로써 주인을 즐겁게 한다. 주인은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즐거움을 마음에 떠올리며, 그 대상은 그리하여 끊이지 않는 만족과 누림의 원천이 된다. 관찰자는 동감을 통해 주인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며, 그 대상을 똑같이 유쾌한 모습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이들의 궁전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 주인이어서 그토록 솜씨 있고 재치 있게 마련된 편의를 차지하고 있다면 누릴 만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편리하지 못함의 외관이 왜 그 임자에게나 관찰자에게나 거북한 것이 되는지도 그와 같이 설명된다.

그러나 기예의 어떤 산물이 지닌 이 걸맞음, 이 복된 고안이 흔히 그것이 본래 노린 목적 자체보다 더 값지게 여겨진다는 것, 그리고 어떤 편리함이나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의 정확한 맞춤이, 그 수단의 값어치가 온전히 그것을 얻는 데에 있다고 보이는 그 편리함이나 즐거움 자체보다 오히려 더 자주 대접받는다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아직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바다. 그럼에도 사정이 매우 자주 그러하다는 것은 인간 삶의 가장 하찮은 일에서나 가장 중대한 일에서나 수천 가지 사례로 알 수 있다.

사람이 자기 방에 들어와 의자들이 모두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을 보면 그는 하인에게 화를 내며, 그것이 그렇게 어지러이 놓인 것을 그대로 보고 있기보다 아마도 스스로 수고를 들여 의자를 모두 등을 벽에 대어 제자리에 놓을 것이다. 이 새로운 배치가 지닌 적정성은 오직 바닥을 비워 거리낌 없게 둔다는 더 나은 편리함에서 나온다. 그 편리함을 얻으려고 그는 그것이 없어서 겪을 수 있었던 모든 불편보다 더 많은 수고를 제 발로 짊어진다. 의자 하나에 그저 앉아 버리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었고, 그것이 바로 수고가 끝난 뒤에 그가 아마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원한 것은 이 편리함 자체라기보다 그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사물의 그 배치였던 듯하다. 그럼에도 그 배치를 끝내 권하는 것은, 또 그 배치에 그 적정성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 편리함이다.

마찬가지로, 하루에 2분 이상 늦게 가는 시계는 시계에 까다로운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 그는 아마 그것을 2기니에 팔아 치우고 보름에 1분 이상 늦지 않는 다른 시계를 50기니에 산다2. 그러나 시계의 유일한 쓸모는 우리에게 몇 시인지를 알려 주어, 우리가 그 점을 몰라서 약속을 어기거나 다른 어떤 불편을 겪는 일을 막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계에 그토록 까다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늘 더 꼼꼼하게 시간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까닭으로 지금이 하루의 몇 시인지를 정확히 알려고 더 애타게 마음 쓰는 것도 아님이 드러난다. 그의 마음을 끄는 것은 이 지식을 얻는 일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얻는 데 쓰이는 기계의 완전함이다.

하찮은 효용밖에 없는 자잘한 물건에 돈을 쏟아붓다가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장난감 애호가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그 효용이라기보다 그 효용을 가져다주기에 알맞게 만들어진 기계의 맞춤새다. 그들의 주머니는 모두 자그마한 편의품으로 불룩하다3.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지니고 다니려고 다른 사람의 옷에는 없는 새 주머니를 고안해 낸다. 그들은 무게로 보아, 그리고 때로는 값으로 보아도 흔한 유대인 행상의 물건 상자4에 못하지 않을 만큼 많은 장식거리를 잔뜩 지고 돌아다닌다. 그중 어떤 것은 때로 얼마쯤 쓸모가 있을 수도 있으나, 그 모두는 어느 때라도 없어도 아주 잘 지낼 수 있는 것이고, 그 효용을 다 합쳐도 그 짐을 지고 다니는 고단함에 견줄 값이 못 됨은 분명하다.

우리 행위가 이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그런 하찮은 대상에 관해서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사로운 삶과 공적인 삶 양쪽에서 가장 진지하고 가장 중대한 추구들의 숨은 동기인 경우가 흔하다.

하늘이 노여움으로 야심을 내려 준 가난한 이의 아들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면서 부자의 처지를 감탄한다. 그는 아버지의 오두막이 자기가 지내기에 너무 좁다고 여기고, 궁전에서라면 더 편안히 머물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다. 그는 걸어 다녀야 하는 것이나 말을 타는 고단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자기보다 높은 이들이 수레에 실려 다니는 것을 보고, 그런 것을 하나 가진다면 불편을 덜 겪으며 다닐 수 있으리라고 상상한다. 그는 자기가 천성으로 게으르고 제 손으로 자기 일을 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적게 하고 싶어 함을 느끼며, 하인이 여럿 딸려 있으면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으리라고 판정한다. 그는 이것들을 모두 손에 넣으면 흡족하게 가만히 앉아 조용히 지내며, 자기 처지가 지닌 행복과 평온을 생각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누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복됨의 먼 관념에 홀린다. 그것은 그의 공상 속에서 더 높은 등급에 속한 존재들의 삶처럼 보이며, 거기에 이르기 위해 그는 부와 높은 지위를 쫓는 데 자기 평생을 바친다.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편의를 얻으려고 그는 애쓰기 시작한 첫해에, 아니 첫 달에 벌써, 그것들이 없어서 평생에 걸쳐 겪을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많은 몸의 고단함과 더 많은 마음의 불편을 짊어진다. 그는 힘겨운 어떤 직업에서 두드러져 보이려고 공부한다. 가장 가차 없는 부지런함으로 그는 모든 경쟁자보다 뛰어난 재능을 얻으려고 밤낮으로 애쓴다. 그는 다음으로 그 재능을 사람들 눈앞에 내놓으려 애쓰고, 똑같이 부지런히 쓰임을 받을 기회를 하나하나 청한다. 이를 위해 그는 온 인류의 마음을 얻으려 굽신거리고, 자기가 미워하는 이들을 섬기며, 자기가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고분고분하다. 평생에 걸쳐 그는 어쩌면 끝내 이르지 못할 어떤 인공의 우아한 안식이라는 관념을 쫓으며, 그것을 위해 언제라도 자기 힘 안에 있는 참된 평온을 희생한다. 그리고 만일 늙어 빠진 끝에 마침내 그것에 이른다 해도, 그것이 그가 그것을 얻으려고 버렸던 그 낮은 자리의 안전과 흡족함보다 어떤 점에서도 나을 바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삶의 마지막 찌꺼기에 이르러, 몸은 고역과 병으로 시들고5 마음은 적들의 옳지 못함에서, 또는 벗들의 배신과 배은에서 자기가 겪었다고 상상하는 수천 가지 상처와 낙심의 기억으로 쓸리고 헝클어진 그때에야, 그는 비로소 부와 높은 지위가 하찮은 효용밖에 없는 자잘한 물건에 지나지 않으며, 장난감 애호가의 족집게 주머니6만큼이나 몸의 편안함이나 마음의 평온을 얻는 데 알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또 그것들도 족집게 주머니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이로움이 편리한 정도보다 그것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에게 더 번거로운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한쪽의 편의가 다른 쪽의 편의보다 얼마쯤 더 눈에 띈다는 것 말고는 다른 참된 차이가 없다. 위대한 이들의 궁전과 정원과 마차와 딸린 무리는 그 뚜렷한 편리함이 누구의 눈에나 들어오는 대상이다. 그것들은 그 주인이 우리에게 그 효용이 어디에 있는지 가리켜 보여 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제 발로 선선히 그 속으로 들어가며, 동감을 통해 그것들이 주인에게 주기에 알맞은 만족을 누리고 그리하여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이쑤시개나 귀이개나 손톱 깎는 기계나 그 밖의 같은 종류의 자잘한 물건이 지닌 진기함은 그만큼 뚜렷하지 않다. 그것들의 편리함이 어쩌면 똑같이 클지도 모르나 그만큼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우리는 그것을 가진 사람의 만족 속으로 그만큼 선선히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부와 높은 지위의 웅대함보다 허영의 재료로 삼기에 덜 이치에 닿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 뒤의 것이 지닌 유일한 이점이 있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그토록 자연스러운 저 남과 달라 보이려는 사랑을 더 실하게 채워 준다. 황량한 섬에서 홀로 살아가야 할 사람에게는 궁전이 자기 행복과 누림에 가장 이바지할지, 아니면 족집게 주머니에 흔히 담기는 그런 자그마한 편의품 한 벌이 가장 이바지할지가 어쩌면 의심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견줄 것이 없다. 여기서도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당사자의 감정보다 관찰자의 감정을 더 크게 헤아리며, 그의 처지가 그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지보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더 헤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찰자가 왜 부유하고 높은 이들의 처지를 그토록 감탄하며 도드라지게 보는지 따져 보면, 그것은 그들이 누리는 것으로 여겨지는 더 나은 편안함이나 즐거움 때문이라기보다 그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이루 셀 수 없는 인공의 우아한 고안들 때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실제로 더 행복하다고 상상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이 행복의 수단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가 감탄하는 주된 원천은 그 수단들이 본래 노린 목적에 재치 있고 솜씨 있게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병의 노곤함과 늙음의 지침 속에서는 높은 지위가 주는 허황하고 텅 빈 남다름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다.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에게 그것들은 예전에 자기를 끌어들였던 그 고된 추구를 더 이상 권할 힘이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야심을 저주하며, 젊음의 편안함과 게으름을, 영원히 달아나 버린 그 즐거움들을, 그리고 손에 넣고 보니 아무런 참된 만족도 줄 수 없는 것을 위해 자기가 어리석게 희생해 버린 그 즐거움들을 헛되이 아쉬워한다. 울화나 병으로 자기 처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자기 행복에 정말로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보게 된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높은 지위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때 권력과 부는 그 본디 모습대로, 곧 몸에 몇 가지 시시한 편리함을 가져다주려고 고안된 거대하고 번거로운 기계로 나타난다. 그것은 가장 섬세하고 연약한 태엽들로 이루어져 있어 가장 애타는 주의로 손질해 두어야 하고, 우리가 온갖 조심을 다해도 언제든 조각조각 터져 그 폐허로 그 불행한 임자를 짓눌러 버릴 채비가 되어 있다. 그것은 세우는 데 한 생애의 노고가 드는 거대한 건물이며,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언제라도 덮쳐 버릴 듯 위협하고, 서 있는 동안에도 그를 얼마쯤 작은 불편에서 지켜 줄지는 몰라도 계절의 더 가혹한 사나움에서는 하나도 막아 주지 못하는 건물이다. 그것은 여름 소나기는 막아 주되 겨울 폭풍은 막아 주지 않으며, 그를 늘 예전과 똑같이, 때로는 예전보다 더, 근심과 두려움과 슬픔에, 병과 위험과 죽음에 드러난 채로 둔다.

그러나 병들었을 때나 기운이 가라앉았을 때 누구에게나 낯익은 이 울화의 철학이 인간이 바라는 그 큰 대상들을 이렇게 온통 깎아내린다 해도, 몸이 더 낫고 마음이 더 좋을 때에는 우리가 그것들을 더 유쾌한 모습으로 바라보지 않는 일이 없다. 아픔과 슬픔 속에서는 우리 자신의 사람됨 안에 갇혀 조그맣게 웅크린 듯 보이는 우리 상상은, 편안함과 번성의 때에는 우리 주위의 모든 것으로 펼쳐진다. 그때 우리는 위대한 이들의 궁전과 살림 운영에 두루 미치는 그 편의의 아름다움에 홀리며, 모든 것이 그들의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그들의 결여를 미리 막고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고 그들의 가장 하찮은 욕망까지 즐겁게 달래 주도록 맞추어져 있음에 감탄한다. 이 모든 것이 줄 수 있는 참된 만족을, 그것을 가져다주기에 알맞은 그 배치의 아름다움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헤아려 본다면, 그것은 늘 가장 높은 정도로 업신여길 만하고 시시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추상하여 철학으로 보는 일이 드물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그것을, 그것을 만들어 내는 그 체계나 기계나 살림 운영의 질서와 규칙 있고 어울리는 움직임과 자연스레 뒤섞어 버린다. 부와 높은 지위의 즐거움은 이렇게 겹쳐 놓고 보면 뭔가 웅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것으로 상상에 닿으며, 그것을 얻는 일은 우리가 거기에 그토록 쏟기 쉬운 온갖 고역과 근심을 들일 값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연이 이렇게 우리를 속여 주는 것은 잘된 일이다. 인류의 부지런함을 일으켜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속임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땅을 갈고 집을 세우고 도시와 국가를 세우게 하고, 인간 삶을 고귀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모든 학문과 기예를 찾아내고 다듬게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들은 이 땅덩이의 온 얼굴을 온통 바꾸어, 자연의 거친 숲을 유쾌하고 기름진 들로 바꾸었고, 길 없고 메마른 바다를 먹고살 새 밑천으로, 또 땅 위 여러 나라를 잇는 큰 한길로 만들었다. 땅은 이 인류의 노고로 자기 본래의 기름짐을 두 배로 늘리고 더 많은 무리의 주민을 먹여 살려야 하게 되었다. 거만하고 매정한 지주가 자기 넓은 밭을 바라보며 제 형제들의 결여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 속에서 그 밭에 자라는 수확을 몽땅 자기가 먹어 치운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눈이 배보다 크다는 투박하고 세간의 속담이 그에게만큼 온전히 들어맞은 적은 없었다. 그의 배의 들이는 그 욕망의 어마어마함에 아무런 비례를 이루지 못하며, 가장 비천한 농부의 배보다 더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머지는 그가 나누어 줄 수밖에 없다. 그 자신이 쓰는 그 얼마간을 가장 섬세하게 마련해 주는 이들에게, 그 얼마간을 먹을 궁전을 꾸며 갖추어 주는7 이들에게, 높은 지위의 살림에 쓰이는 온갖 장식거리와 자잘한 물건을 갖추어 두고 손질해 주는 이들에게 나누어 줄 수밖에 없으며, 그들은 모두 그의 사치와 변덕에서, 그의 인간애나 정의에서는 헛되이 바랐을 그 삶의 필수품의 몫을 얻는다. 땅의 산물은 어느 때에나 그것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그 수에 가까운 주민을 먹여 살린다. 부자는 그 무더기에서 가장 값지고 유쾌한 것만 골라낼 뿐이다. 그들은 가난한 이보다 조금 더 쓸 뿐이며, 그들의 천성인 이기심과 탐욕에도 불구하고, 또 그들이 뜻하는 것이 오직 자기 편리함뿐이고 자기가 부리는 수천 사람의 노고에서 그들이 노리는 유일한 목적이 자기의 허황하고 채울 수 없는 욕망을 채우는 것뿐이라 해도, 그들은 자기가 이루어 낸 모든 개량의 산물을 가난한 이와 나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8, 땅이 그 모든 주민에게 똑같은 몫으로 나뉘었더라면 이루어졌을 것과 거의 같은 삶의 필수품의 분배를 이루어 내며, 그리하여 그것을 뜻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 채 사회의 이익을 밀고 나아가 종족이 불어날 수단을 마련해 준다. 섭리가 이 땅을 몇몇 군주 같은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 섭리는 그 나눔에서 빠진 듯 보이는 이들을 잊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들도 땅이 내는 모든 것에서 자기 몫을 누린다. 인간 삶의 참된 행복을 이루는 것에서 그들은 자기보다 그토록 위에 있어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점에서도 못하지 않다.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평화에서 삶의 모든 등급은 거의 같은 자리에 있으며, 한길가에서 볕을 쬐는 걸인은 왕들이 싸워서 얻으려는 그 안전을 가지고 있다.

같은 원리, 같은 체계에 대한 사랑, 질서와 기예와 고안의 아름다움에 대한 같은 헤아림이 공공의 복리를 밀고 나아가는 제도들을 권하는 데에도 자주 쓰인다. 애국자가 공공 행정9의 어느 부분을 개량하려고 힘을 쏟을 때, 그의 행위가 늘 그 이로움을 거둘 이들의 행복에 대한 순수한 동감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공공심을 지닌 사람이 한길을 고치는 일을 북돋우는 것이 짐꾼과 마차꾼과 함께 느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일은 흔하지 않다. 입법부가 아마나 양모 제조업을 밀어 올리려고 상금과 그 밖의 장려를 마련할 때, 그 행위가 값싼 옷감이나 고운 옷감을 입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동감에서 나오는 일은 드물고, 제조업자나 상인에 대한 동감에서 나오는 일은 더욱 드물다. 행정의 완성, 교역과 제조업의 확장은 고귀하고 웅대한 대상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일이 우리를 즐겁게 하며, 그것을 밀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에나 우리의 이해가 걸린다. 그것들은 통치라는 큰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루며, 정치라는 기계의 바퀴는 그것들 덕분에 더 어울려 더 수월하게 돌아가는 듯 보인다. 우리는 그토록 아름답고 웅대한 체계의 완성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그 움직임의 규칙 바름을 조금이라도 어지럽히거나 무겁게 할 수 있는 걸림돌은 무엇이든 치워 낼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모든 통치 체제는 그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행복을 밀고 나아가는 정도에 비례해서만 값이 있다. 그것이 그 체제의 유일한 쓸모이자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체계를 세우려는 어떤 정신에서, 기예와 고안에 대한 어떤 사랑에서, 때로 목적보다 수단을 더 값지게 여기는 듯하고, 동료 인간이 겪거나 누리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이나 느낌에서보다 어떤 아름답고 질서 있는 체계를 완성하고 개량한다는 관점에서 그들의 행복을 밀고 나아가려 애타게 바라는 듯하다. 가장 큰 공공심을 지닌 사람이면서 다른 점에서는 인간애의 느낌에 그리 밝지 않음을 보인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거꾸로 가장 큰 인간애를 지닌 사람이면서 공공심은 온통 결여한 듯 보이는 이들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 아는 사람의 테두리 안에서 두 종류의 사례를 다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저 이름난 모스크바 나라의 입법자10보다 인간애가 적고 공공심이 많은 사람이 일찍이 있었던가? 거꾸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마음씨 좋았던 영국의 제임스 1세11는 자기 나라의 영예에도 이익에도 정념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야심에 거의 죽어 있는 듯 보이는 사람의 부지런함을 깨우고자 한다면, 부유하고 높은 이들의 행복을 그에게 그려 보이는 것, 그들이 대체로 볕과 비를 가리고 지내며 좀처럼 굶지 않고 좀처럼 춥지 않으며 지침이나 어떤 종류의 결여에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해 주는 것은 흔히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가장 웅변다운 권고도 그에게 거의 아무런 효험이 없을 것이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그들 궁전의 여러 방이 지닌 편리함과 배치를 그에게 그려 보여야 하고, 그들 마차 행렬의 적정성을 그에게 풀어 주어야 하며, 그들을 시중드는 이들의 수와 순서와 여러 맡은 일을 그에게 가리켜 보여야 한다. 무엇이든 그에게 자취를 남길 수 있다면 이것이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볕과 비를 가리고, 그들을 굶주림과 추위에서, 결여와 지침에서 건지는 데에만 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기 나라의 이익에 아무 마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의 가슴에 공공의 덕을 심어 주고자 한다면,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백성이 얼마나 더 나은 이로움을 누리는지, 그들이 더 잘 머물고 더 잘 입고 더 잘 먹는다는 것을 그에게 말해 주는 일은 흔히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런 헤아림은 흔히 큰 자취를 남기지 못한다. 그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공공 행정의 큰 체계를 그려 보이고, 그 여러 부분의 이어짐과 매임을, 서로에 대한 그 아래위 관계를, 그리고 사회의 행복에 두루 도움이 되는 그 쓰임새를 풀어 주며, 그 체계가 어떻게 그 자신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지, 무엇이 지금 거기서 그것이 자리 잡는 것을 막고 있는지, 그 걸림돌을 어떻게 치울 수 있을지, 그리고 통치라는 기계의 여러 바퀴가 서로 갈리거나 서로의 움직임을 늦추지 않으면서 어떻게 더 어울려 더 매끄럽게 돌아가게 될 수 있을지를 보여 준다면, 그를 설득할 가망이 더 클 것이다. 사람이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얼마쯤 공공심에 북돋워짐을 느끼지 않는 일은 좀처럼 있을 수 없다. 그는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 걸림돌을 치우고 그토록 아름답고 질서 있는 기계를 움직이게 하고 싶은 어떤 욕망을 느낄 것이다. 정치를, 시민 통치의 여러 체계와 그 이로움과 해로움을, 우리 자신의 나라의 체제와 그 처지와 다른 나라에 대한 이해를, 그 교역과 방비를, 그것이 시달리는 불리함과 그것이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을, 앞의 것을 어떻게 치우고 뒤의 것을 어떻게 막을지를 배우는 것만큼 공공심을 밀고 나아가는 것은 없다. 이 점에서 정치에 관한 논의는 옳고 이치에 닿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색의 모든 작업 가운데 가장 쓸모 있는 것이다. 그중 가장 약하고 가장 나쁜 것조차 효용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것들은 적어도 사람들의 공공의 정념을 북돋우고, 사회의 행복을 밀고 나아갈 수단을 찾아 나서도록 그들을 일으키는 데 쓰인다.

2장 효용의 외관이 사람의 성격과 행위에 부여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리고 이 아름다움의 지각이 어디까지 시인의 본래 원리 가운데 하나로 여겨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사람의 성격도 기예의 고안이나 시민 통치의 제도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을 밀고 나아가기에 알맞을 수도 있고 어지럽히기에 알맞을 수도 있다. 신중하고 공정하며 부지런하고 굳세고 차분한 성격은 그 사람 자신에게나 그와 이어진 모든 이에게나 번성과 만족을 약속한다. 거꾸로 경솔하고 건방지며 게으르고 무르고 탐닉하는 성격은 그 개인에게는 파멸을, 그와 얽힌 모든 이에게는 불행을 미리 알린다. 앞의 마음결은 적어도 가장 유쾌한 목적을 가져다주려고 이제까지 만들어진 가장 완전한 기계에 딸릴 수 있는 온갖 아름다움을 지니며, 뒤의 마음결은 가장 어설프고 서툰 고안이 지닌 온갖 추함을 지닌다. 지혜와 덕이 두루 퍼지는 것만큼 인류의 행복을 밀고 나아갈 수 있는 통치 제도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통치는 그 지혜와 덕의 결여를 메우는 온전하지 못한 처방일 뿐이다. 그러므로 시민 통치가 그 효용을 이유로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이든 지혜와 덕에 훨씬 더 높은 정도로 딸릴 수밖에 없다. 거꾸로 사람들의 악덕만큼 파멸을 부르고 허물어뜨리는 시민 통치술이 무엇이겠는가? 나쁜 통치가 낳는 치명적인 결과는 오직 그것이 인간의 악함이 불러오는 해악을 넉넉히 막아 주지 못하는 데서 나올 뿐이다.

성격이 그 쓸모나 불편함에서 얻는 듯 보이는 이 아름다움과 추함은 인류의 행위와 처신을 추상하여 철학으로 헤아려 보는 이들에게 특히 남다르게 다가오기 쉽다. 철학자가 왜 인간애는 시인을 받고 잔혹함은 단죄를 받는지 따져 보러 나설 때, 그는 잔혹함이나 인간애의 어느 하나의 개별 행위에 대한 관념을 아주 맑고 또렷하게 스스로 세우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그 성질들의 일반적인 이름이 그에게 떠올려 주는 흐릿하고 정해지지 않은 관념에 그저 만족한다. 그러나 행위의 적정성이나 부적정성, 공로나 과오가 아주 뚜렷하고 알아볼 수 있게 드러나는 것은 오직 개별 사례에서다. 개별 사례가 주어질 때에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서와 행위자의 정서 사이의 어울림이나 어긋남을 또렷이 지각하고, 앞의 경우에는 그를 향해 사회적인 감사가 일어남을 느끼며 뒤의 경우에는 동감에서 비롯한 분개가 일어남을 느낀다. 덕과 악덕을 추상하여 일반적으로 헤아릴 때에는, 덕과 악덕이 이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데 쓰는 그 성질들이 크게 사라져 버리는 듯하고, 그 감정 자체도 덜 뚜렷하고 덜 알아볼 만한 것이 된다. 거꾸로 그때는 앞의 것이 낳는 복된 결과와 뒤의 것이 낳는 치명적인 결과가 눈앞에 떠올라, 마치 어느 쪽의 다른 모든 성질에서 두드러져 따로 나서는 듯 보인다.

효용이 왜 즐거움을 주는지 처음으로 밝힌 저 재치 있고 유쾌한 저자는 사물을 이렇게 보는 관점에 워낙 깊이 사로잡혀, 덕에 대한 우리의 시인 전체를 효용의 외관에서 나오는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으로 풀어 버리기에 이르렀다. 그가 살핀 바로는 마음의 성질 가운데 덕스럽다고 시인을 받는 것은 그 사람 자신에게나 남들에게 쓸모 있거나 유쾌한 것뿐이며, 악덕스럽다고 부인을 받는 것은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기우는 것뿐이다. 그리고 자연은 참으로 우리의 시인과 부인의 감정을 개인의 편리함과 사회의 편리함에 그토록 복되게 맞추어 놓은 듯하여, 가장 엄격하게 따져 보면 사정이 어디서나 그러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우리의 시인과 부인의 첫째 원천도 주된 원천도 이 효용이나 해로움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그 감정들이 이 효용이나 해로움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대한 지각으로 더 높아지고 더 생생해지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그 감정들이 본래부터 또 그 본질에서 이 지각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한다.

우선 첫째로, 덕에 대한 시인이 편리하고 잘 고안된 건물을 우리가 시인할 때의 그 감정과 같은 종류의 감정이라는 것, 또는 우리가 사람을 칭찬하는 데에 서랍장을 칭찬하는 것과 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그리고 둘째로, 따져 보면 마음의 어떤 성향이 지닌 쓸모가 우리 시인의 첫째 근거인 일은 드물고, 시인의 감정에는 효용의 지각과는 사뭇 다른 적정성의 감각이 늘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덕스럽다고 시인을 받는 모든 성질에서 이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체계에 따르면 본래 우리 자신에게 쓸모 있다는 이유로 값지게 여겨지는 성질에서나, 남들에게 쓸모 있다는 이유로 존중받는 성질에서나 그러하다.

우리 자신에게 가장 쓸모 있는 성질은 첫째로 뛰어난 이성과 이해력이며, 이로써 우리는 우리 모든 행위의 먼 결과를 알아보고 거기서 나올 만한 이로움이나 해로움을 미리 볼 수 있다. 둘째는 자기 통제이며, 이로써 우리는 앞날의 어느 때에 더 큰 즐거움을 얻거나 더 큰 아픔을 피하려고 지금의 즐거움을 삼가거나 지금의 아픔을 견딜 수 있게 된다. 이 두 성질이 하나로 합쳐진 데에 신중이라는 덕이 있으며, 그것은 모든 덕 가운데 개인에게 가장 쓸모 있는 덕이다.

그 성질의 첫째 것에 관해서는 앞서 다른 자리에서, 뛰어난 이성과 이해력이 본래 옳고 바르고 정확하다는 이유로 시인을 받는 것이지 단지 쓸모 있거나 이롭다는 이유로 시인을 받는 것이 아님을 살핀 바 있다. 인간 이성의 가장 크고 가장 감탄받는 발휘가 드러난 곳은 더 알기 어려운 학문, 특히 수학의 더 높은 부분이다. 그러나 그 학문들이 개인에게나 공공에게 지니는 효용은 그리 뚜렷하지 않고, 그것을 증명하려면 늘 아주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 학문들을 처음으로 사람들의 감탄에 권해 준 것은 그 효용이 아니었다. 이 성질은 그런 숭고한 발견에 스스로 심미안이 없어 그것을 쓸모없다고 깎아내리려 애쓴 이들의 책망에 얼마간 답할 필요가 생기기까지는 거의 내세워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욕구를 다른 자리에서 더 온전히 채우려고 그것을 억누르는 그 자기 통제는 효용이라는 면에서만큼이나 적정성이라는 면에서도 시인을 받는다.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 우리 행위를 움직이는 감정은 관찰자의 감정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관찰자는 지금 우리 욕구가 보내는 부추김을 느끼지 않는다12. 그에게는 우리가 일주일 뒤나 1년 뒤에 누릴 즐거움이 우리가 이 순간에 누릴 즐거움과 똑같이 이해가 걸린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을 위해 앞날을 희생할 때 우리 행위는 그에게 가장 높은 정도로 터무니없고 지나친 것으로 보이며, 그는 그것을 움직이는 원리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거꾸로 우리가 앞으로 올 더 큰 즐거움을 확보하려고 지금의 즐거움을 삼갈 때, 우리가 감각에 곧바로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먼 대상에도 이해가 걸린 듯이 행할 때, 우리의 정서가 그의 정서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므로 그는 우리 행동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적은지를 그가 경험으로 알고 있으므로, 그는 우리 행위를 적잖은 정도의 놀라움과 감탄으로 바라본다. 여기에서, 재산을 얻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을 겨누지 않는다 해도 검약과 부지런함과 열심을 꾸준히 이어 가는 일을 모든 사람이 자연히 우러르는 그 두드러진 존중이 일어난다. 이렇게 행하는 사람이, 멀지만 큰 이로움을 얻기 위해 지금의 즐거움을 모두 내어놓을 뿐 아니라 마음과 몸의 가장 큰 노고까지 견디는 그 굳센 단단함은 우리 시인을 불러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행위를 다스리는 듯 보이는 자기 이익과 행복에 대한 그 관점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자연히 세우는 관념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의 감정과 우리 감정 사이에는 가장 온전한 맞아떨어짐이 있으며, 그러면서도 인간 본성의 예사로운 약함에 대한 우리 경험으로 보아 그것은 우리가 이치에 맞게 기대할 수 있었던 맞아떨어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행위를 시인할 뿐 아니라 얼마쯤 감탄하며, 그것이 적잖은 정도의 갈채를 받을 만하다고 여긴다. 행위자를 이런 행위의 결로 버티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 마땅한 시인과 존중을 스스로 아는 것뿐이다. 우리가 10년 뒤에 누릴 즐거움은 우리가 오늘 누릴 수 있는 즐거움에 견주면 우리 이해가 워낙 적게 걸려 있고, 앞의 것이 불러일으키는 정념은 뒤의 것이 불러오기 쉬운 그 격한 감정에 견주면 천성으로 워낙 약하므로, 한쪽으로 행할 때 우리가 모두의 존중과 시인을 받을 만하다는 것과 다른 쪽으로 처신할 때 우리가 그들의 업신여김과 비웃음의 적정한 대상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 곧 적정성의 감각이 그것을 받쳐 주지 않는다면 앞의 것이 뒤의 것에 결코 맞설 저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애와 정의와 도량과 공공심은 남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성질이다. 인간애와 정의의 적정성이 어디에 있는지는 앞서 다른 자리에서 풀어 놓았으며, 거기서 그 성질들에 대한 우리의 존중과 시인이 행위자의 정서와 관찰자들의 정서 사이의 어울림에 얼마나 많이 달려 있는지를 보였다.

도량과 공공심의 적정성은 정의의 적정성과 같은 원리 위에 세워져 있다. 도량은 인간애와 다르다. 언뜻 보면 그토록 가까이 이어진 듯한 그 두 성질이 늘 같은 사람에게 딸려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애는 여자의 덕이고 도량은 남자의 덕이다. 흔히 우리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마음을 지닌 아름다운 성은 도량은 그만큼 지니는 일이 드물다. 여자가 큰 증여를 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은 시민법의 한 관찰이다1314. 인간애는 오직, 관찰자가 당사자들의 감정과 함께 지니는 그 섬세한 함께 느끼는 마음에 있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고통에 비통해하고 그들이 받은 해를 분개하며 그들의 좋은 운을 기뻐하는 데에 있다. 가장 인간애다운 행위는 자기 부정도, 자기 통제도, 적정성의 감각을 크게 발휘하는 일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그 섬세한 동감이 저절로 우리에게 하도록 부추기는 것을 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량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우리 자신보다 어떤 다른 사람을 앞세우고 우리 자신의 크고 중대한 이익을 벗이나 윗사람의 같은 크기의 이익에 희생할 때에만 도량이 큰 것이다. 자기 야심의 큰 대상이었던 어떤 자리에 대한 자기 주장을 다른 이의 공적이 그 자리에 더 큰 자격이 있다고 상상하여 내놓아 버리는 사람, 자기 벗의 목숨이 더 중대하다고 판정하여 그것을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람, 이 둘은 어느 쪽도 인간애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관계된 것보다 그 다른 사람에게 관계된 것을 더 섬세하게 느껴서 행하는 것도 아니다. 그 둘은 서로 맞서는 그 이익들을 자기에게 자연히 보이는 빛으로 헤아리지 않고 남들에게 보이는 빛으로 헤아린다. 곁에서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 다른 사람이 성공하거나 목숨을 건지는 것이 자기 일보다 더 이해가 걸린 일일 수 있음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 둘 자신에게는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다른 사람의 이익에 자기 이익을 희생할 때, 그들은 자기를 관찰자의 감정에 맞추며, 아량을 한 번 발휘하여 어떤 제삼자에게라면 자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다고 자기가 느끼는 그 사물의 관점에 따라 행한다. 자기 장교의 목숨을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병사는, 만일 자기 잘못 없이 그 장교가 죽는 일이 일어났다면 어쩌면 그 죽음에 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 자신에게 닥친 아주 작은 재난이 훨씬 더 생생한 슬픔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갈채를 받아 마땅하도록 행하려 애쓰고 공평한 관찰자가 자기 행위의 원리 속으로 들어오게 하려 애쓸 때, 그는 자기 말고 누구에게나 자기 목숨이 자기 장교의 목숨에 견주면 시시한 것임을, 그리고 앞의 것을 뒤의 것에 희생할 때 자기가 공평하게 곁에서 보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연히 떠오를 생각에 아주 적정하게 또 걸맞게 행하는 것임을 느낀다.

공공심을 더 크게 발휘하는 경우도 이와 같다. 젊은 장교가 자기 군주의 영토에 얼마 되지 않는 땅을 더하려고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은, 그 새 영토를 얻는 일이 그 자신에게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보다 더 바랄 만한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는 자기 목숨이 자기가 섬기는 나라를 위해 한 왕국을 통째로 정복하는 것보다 무한히 더 값지다. 그러나 그가 그 두 대상을 서로 견주어 볼 때, 그는 그것을 자기에게 자연히 보이는 빛으로 바라보지 않고 자기가 싸워 주는 나라에 보이는 빛으로 바라본다. 그 나라에는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 가장 중대하고 한 사사로운 사람의 목숨은 거의 아무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그가 자기를 그 나라의 처지에 놓아 볼 때, 그는 자기 피를 흘려 그토록 값진 목적을 밀고 나아갈 수 있다면 그 피를 아무리 아끼지 않아도 지나치지 않음을 곧바로 느낀다. 이렇게 의무와 적정성의 감각에서 모든 자연스러운 기울어짐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을 거스르는 데에 그 행위의 영웅스러움이 있다. 사사로운 자리에 있을 때는 미노르카15를 나라가 잃는 것보다 1기니를 잃는 것에 더 심각하게 마음이 어지러워질 정직한 영국인이 많이 있으나, 그런 그도 만일 그 요새를 지키는 일이 자기 힘 안에 있었다면 자기 잘못으로 그것이 적의 손에 넘어가게 하기보다 차라리 자기 목숨을 천 번이라도 희생했을 것이다. 첫째 브루투스16가 자기 아들들이 갓 일어선 로마의 자유를 거스르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형에 끌어냈을 때, 그는 오직 자기 가슴에만 물어보았더라면 더 강한 것으로 보였을 정서를 더 약한 정서에 희생한 것이다. 브루투스는 천성으로 자기 아들들의 죽음에, 그토록 큰 본보기가 없어서 로마가 겪었을 만한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마음이 움직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아버지의 눈으로 보지 않고 로마 시민의 눈으로 보았다. 그는 뒤의 사람됨의 감정 속으로 워낙 철저히 들어가, 자기가 그들과 이어져 있는 그 매임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 시민에게는 브루투스의 아들들조차 로마의 가장 작은 이익과 저울에 놓이면 업신여길 만한 것으로 보였다. 이런 경우와 이런 종류의 다른 모든 경우에서, 우리의 감탄은 그 효용에 바탕을 두기보다 그런 행위가 지닌 뜻밖의, 그러기에 크고 고귀하고 높은 적정성에 바탕을 둔다. 이 효용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게 될 때 그 행위에 틀림없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부여하며, 그 때문에 그 행위를 우리 시인에 한층 더 권해 준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주로 되새겨 생각하고 사색하는 사람들이 지각하는 것이며, 그런 행위를 인류의 대다수가 지닌 자연스러운 감정에 처음으로 권해 주는 성질은 결코 아니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시인의 감정이 이 효용의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에서 일어나는 한 그것이 남들의 감정과는 어떤 종류의 관계도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사회와 아무런 오고 감 없이 어른으로 자라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다면, 그럼에도 그 자신의 행위가 자기 행복이나 불이익으로 기울어지는 방향 때문에 그에게 유쾌하거나 거북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신중과 절제와 좋은 처신에서 이런 종류의 아름다움을, 그 반대되는 처신에서 추함을 지각할 수 있을 것이며, 앞의 경우에는 자기 기질과 성격을 우리가 잘 고안된 기계를 헤아릴 때의 그런 만족으로 바라보고, 뒤의 경우에는 우리가 아주 어설프고 서툰 고안을 여길 때의 그런 싫음과 못마땅함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이 지각은 오직 심미안의 문제일 뿐이고, 적정하게 말해 심미안이라 불리는 것이 그 올바름 위에 세워지는 그런 종류의 지각이 지닌 온갖 무름과 섬세함을 지니고 있으므로, 홀로 있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아마 그것에 크게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그에게 떠오른다 해도, 사회와 이어지기에 앞서서는 그 이어짐의 결과로 지닐 효험을 결코 그에게 지니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 추함을 생각하며 안으로 부끄러워 풀이 꺾이지도 않을 것이고, 그 반대되는 아름다움을 스스로 아는 데서 마음속 은밀한 뽐냄으로 들뜨지도 않을 것이다. 그는 앞의 경우에 상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기뻐 뛰지도 않을 것이고, 뒤의 경우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의심으로 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감정은 모두 그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재판관인 어떤 다른 존재의 관념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 뽐냄이나 자기 자신을 단죄하는 부끄러움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행위를 판정하는 이 중재자의 판결에 동감함으로써다.

주

  1. 1. 옮긴이 — 데이비드 흄(1711~1776). 스코틀랜드 철학자로 스미스의 벗이었다. 효용이 즐거움을 주는 까닭은 그의 『인간 본성론』(1739~1740)과 『도덕 원리에 관한 탐구』(1751)에서 다루어진다. 2장에서 스미스가 「저 재치 있고 유쾌한 저자」라 부르는 사람도 그다.

  2. 2. 옮긴이 — 기니. 18세기 영국의 금화로 21실링, 곧 1파운드 1실링에 해당했다.

  3. 3.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fluffed 로 적었다. 다른 판본은 stuffed(잔뜩 채워진)로 읽으므로 그에 따라 옮겼다.

  4. 4. 옮긴이 — 저본의 Jew's-box. 18세기 영국에서 잡화를 상자에 지고 다니며 팔던 행상을 가리키던 당대 표현이다.

  5. 5.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wailed(울부짖은)로 적었다. 다른 판본은 wasted(시든)로 읽으므로 그에 따라 옮겼다.

  6. 6. 옮긴이 — 저본의 tweezer-case. 족집게·귀이개·손톱 다듬는 칼 따위를 담아 몸에 지니고 다닌 18세기의 작은 도구 주머니다.

  7. 7.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sit up 으로 적었다. 다른 판본은 fit up(꾸며 갖추다)으로 읽으므로 그에 따라 옮겼다.

  8. 8. 옮긴이 — 「보이지 않는 손」. 스미스는 이 표현을 『국부론』(1776) 제4편에서도 쓴다.

  9. 9. 옮긴이 — 저본의 police. 18세기 영어에서 이 낱말은 오늘날의 경찰이 아니라 도로·치안·물가·위생을 아우르는 공공 행정 전반을 뜻했다.

  10. 10. 옮긴이 — 표트르 1세(1672~1725). 러시아의 차르로 군제와 관제를 두루 고쳤다. 모스크바 나라는 당대 서유럽에서 러시아를 부르던 이름이다.

  11. 11. 옮긴이 — 제임스 1세(1566~1625).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로서 1603년 잉글랜드 왕위를 겸하여 두 나라를 한 사람의 왕 아래 두었다.

  12. 12.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felicitations(축하)로 적었다. 다른 판본은 solicitations(부추김, 조름)로 읽으므로 그에 따라 옮겼다.

  13. 13. Raro mulieres donare solent. (여자가 증여하는 일은 드물다.)

  14. 14. 옮긴이 — 원저자 주의 라틴어는 로마법에서 온 격언이다. 여기서 시민법은 로마법과 그것을 이어받은 대륙의 법 전통을 가리킨다.

  15. 15. 옮긴이 — 미노르카. 지중해 서부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으로 1708년부터 영국이 차지했다가 1756년 7년 전쟁 중 프랑스에 잃었다.

  16. 16. 옮긴이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기원전 509년 로마 공화정을 세운 초대 집정관으로 전해지며, 왕정을 되살리려 음모를 꾸민 두 아들에게 스스로 사형을 집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