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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6부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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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3편 시인의 원리에 관하여 세워진 여러 체계에 대하여

머리말

덕의 본성에 관한 탐구에 이어 도덕철학에서 무게 있는 다음 물음은 시인의 원리에 관한 것, 곧 어떤 성격을 우리에게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들고, 우리가 어떤 행위의 흐름을 다른 것보다 앞세우게 하며, 하나는 옳다 하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 이름 짓게 하고, 하나는 시인과 명예와 상의 대상으로 다른 하나는 비난과 책망과 벌의 대상으로 여기게 하는 그 마음의 힘 또는 기능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원리에 관하여 세 가지 서로 다른 설명이 주어져 왔다. 어떤 이들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동이든 남의 행동이든 오직 자애심에서, 곧 그것이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불이익으로 기울어 있다고 보는 어떤 관점에서 시인하고 부인한다. 또 다른 이들에 따르면 이성, 곧 우리가 참과 거짓을 가르는 데 쓰는 바로 그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행동에서든 정서에서든 무엇이 걸맞고 무엇이 걸맞지 않은지를 가릴 수 있게 해 준다. 또 다른 이들에 따르면 이 구분은 온전히 직접적인 감정과 느낌의 결과이며, 어떤 행동이나 정서를 바라볼 때 그것이 우리에게 불어넣는 만족이나 역겨움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자애심과 이성과 감정이 시인의 원리로 지목되어 온 세 가지 서로 다른 근원이다.

그 서로 다른 체계들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가기 전에 나는 다음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곧 이 둘째 물음을 어떻게 정하는가는 사변에서는 가장 큰 무게를 지니지만 실천에서는 아무런 무게도 지니지 않는다. 덕의 본성에 관한 물음은 낱낱의 여러 경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에 관한 우리 관념에 반드시 얼마간 영향을 미친다. 시인의 원리에 관한 물음은 그런 효과를 도무지 미칠 수 없다. 그 서로 다른 관념이나 감정이 우리 안의 어떤 꾸밈새나 어떤 짜임에서 일어나는지를 살피는 일은 철학적 호기심의 문제일 뿐이다.

1장 시인의 원리를 자애심에서 끌어내는 체계들에 대하여

시인의 원리를 자애심에서 설명하는 이들이 모두 그것을 같은 꼴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의 서로 다른 체계에는 모두 상당한 혼란과 정확하지 못함이 있다. 홉스1 씨와 그를 따르는 많은 이들에 따르면23 사람이 사회 속으로 피해 들어가도록 떠밀리는 것은 그가 자기와 같은 부류에게 품는 어떤 자연스러운 사랑 때문이 아니라 남의 도움 없이는 편안하게도 안전하게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사회는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고, 그것을 받쳐 주고 잘되게 하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무엇이든 그는 멀리서나마 자기 자신의 이익으로 기울어 있다고 여기며, 거꾸로 그것을 어지럽히거나 무너뜨릴 것 같은 것은 무엇이든 얼마간 자기 자신에게 해롭거나 나쁜 것으로 본다. 덕은 인간 사회를 크게 받쳐 주는 것이고 악덕은 그것을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마음에 들고 뒤의 것은 모든 사람을 거스르는데, 그가 앞의 것에서는 자기 존재의 편안함과 안전에 그토록 없어서는 안 될 것의 번영을 미리 보고 뒤의 것에서는 그것의 무너짐과 어지러움을 미리 보기 때문이다.

덕이 사회의 질서를 북돋우는 쪽으로 기울어 있고 악덕이 그것을 어지럽히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머리를 식히고 철학적으로 헤아릴 때 앞의 것에 매우 큰 아름다움을 되비쳐 주고 뒤의 것에 매우 큰 추함을 되비쳐 준다. 내가 앞선 자리에서 지적한 대로 이것은 의문에 부칠 수 없는 일이다. 인간 사회를 어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빛 아래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크고 거대한 기계처럼 보이며, 그 규칙 있고 어울리는 움직임이 천 가지 마음에 드는 결과를 낳는다. 사람의 재주가 만들어 낸 다른 아름답고 고귀한 기계에서 그 움직임을 더 매끄럽고 쉽게 만드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무엇이든 이 효과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내고 거꾸로 그 움직임을 막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무엇이든 그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같이, 이를테면 사회의 바퀴에 먹인 고운 윤과 같은 덕은 반드시 마음에 들고, 바퀴를 서로 부딪치고 갈리게 만드는 그 더러운 녹과 같은 악덕은 그에 못지않게 반드시 거스른다. 그러므로 시인과 부인의 기원에 관한 이 설명은 그것을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끌어내는 한, 효용에 아름다움을 주는 그 원리, 곧 내가 앞선 자리에서 설명해 둔 그 원리로 흘러 들어간다. 그리고 이 체계가 지닌 그럴듯함의 겉모습은 모두 거기에서 끌어내어진 것이다. 그 저자들이 갈고 닦인 사회의 삶이 미개하고 홀로 있는 삶보다 나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로움을 그려 보일 때, 앞의 삶을 지켜 나가는 데 덕과 좋은 질서가 없어서는 안 됨을 길게 늘어놓고 악덕이 널리 퍼지고 법에 따르지 않는 일이 어김없이 뒤의 삶을 되불러오는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논증할 때, 독자는 그들이 자기에게 열어 보이는 그 관점의 새로움과 웅대함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는 여태 한 번도 눈여겨보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덕에서 보고 새로운 추함을 악덕에서 뚜렷이 보며, 흔히 그 발견에 너무 기뻐하여 다음을 돌아볼 틈을 좀처럼 내지 못한다. 곧 이 정치적 관점은 그가 살아오면서 여태 한 번도 떠올려 본 적이 없는 것이므로, 그가 그 서로 다른 성질을 늘 그렇게 여겨 온 그 시인과 부인의 바탕일 수는 도무지 없다.

다른 한편으로 그 저자들이 우리가 사회의 번영에 두는 관심과 그 때문에 우리가 덕에 베푸는 존중을 자애심에서 끌어낼 때, 그들이 뜻하는 바는 오늘 우리 시대의 우리가 카토4의 덕에 갈채하고 카틸리나의 악행을 증오할 때 우리 감정이 앞의 사람에게서 받는 어떤 이로움이나 뒤의 사람에게서 겪는 어떤 손해에 관한 관념에 휘둘린다는 것이 아니다. 그 철학자들에 따르더라도 우리가 덕 있는 성격을 존중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성격을 비난한 까닭은, 그 먼 시대와 먼 나라에서 사회가 번영했는지 무너졌는지가 지금 우리 시대의 우리 행복이나 비참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 감정이 그 어느 쪽에서든 실제로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우리가 여기는 어떤 이로움이나 손해에 휘둘린다고 상상한 적이 없고, 우리가 그 먼 시대와 먼 나라에 살았더라면 우리에게 돌아왔을 이로움이나 손해에, 또는 우리 시대에 우리가 같은 종류의 성격을 만난다면 지금도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는 이로움이나 손해에 휘둘린다고 여겼다. 요컨대 그 저자들이 더듬어 찾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뚜렷하게 펼쳐 보일 수 없었던 생각은, 그렇게 맞서는 성격에서 나오는 이로움을 받거나 손해를 겪은 이들의 감사나 분개에 우리가 느끼는 그 간접적인 동감이었다. 그리고 우리 갈채나 의분을 불러낸 것이 우리가 얻거나 겪은 것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동무들과 더불어 사회 안에서 행동한다면 얻거나 겪을 수 있는 것에 대한 헤아림이나 상상이라고 그들이 말할 때, 그들이 또렷하지 않게 가리키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동감은 어떤 뜻에서도 이기적인 원리로 여겨질 수 없다. 내가 그대의 슬픔이나 그대의 의분에 동감할 때 내 감정이 자애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될 수야 있다. 그것이 그대의 처지를 내 일로 삼아 가까이 끌어오는 데서, 곧 나 자신을 그대의 자리에 놓고 그리하여 같은 사정에서라면 내가 무엇을 느낄지 헤아려 보는 데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감이 당사자와 처지를 상상으로 맞바꾸어 보는 데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적정하다 하더라도, 이 상상 속의 맞바꿈이 나 자신의 사람과 성격에서 일어난다고 여겨지는 것은 아니며 내가 동감하는 그 사람의 사람과 성격에서 일어난다고 여겨진다. 그대가 외아들을 잃은 일로 내가 그대와 함께 슬퍼할 때, 그대의 비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나는 이러한 성격과 이러한 직업을 지닌 내게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이 불행히도 죽는다면 내가 무엇을 겪을지를 헤아리지 않는다. 내가 헤아리는 것은 내가 정말로 그대라면 무엇을 겪을지이며, 나는 그대와 사정을 맞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과 성격까지 맞바꾼다. 그러므로 내 비통은 온전히 그대 때문이고 조금도 나 자신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금도 이기적이지 않다. 나 자신의 사람과 성격으로 내게 닥친 것이나 나에게 이어진 것을 상상하는 데서 일어나지조차 않고 온전히 그대에게 이어진 것에만 매여 있는 것을 어떻게 이기적인 정념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 남자도 해산하는 자리에 있는 여자에게 동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사람과 성격으로 그 아픔을 겪는다고 스스로 헤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도 그렇다. 그러나 모든 감정과 정서를 자애심에서 끌어내는, 그리하여 세상에서 그토록 큰 소리를 낸, 그러면서도 내가 아는 한 여태 온전하고 뚜렷하게 설명된 적이 없는 인간 본성에 관한 그 설명 전체는, 내가 보기에는 동감의 체계를 얼마간 어수선하게 잘못 알아들은 데서 일어난 듯하다.

2장 이성을 시인의 원리로 삼는 체계들에 대하여

자연 상태가 전쟁 상태이며 시민 정부가 세워지기 전에는 사람들 사이에 안전하거나 평화로운 사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홉스 씨의 학설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사회를 지키는 일은 시민 정부를 받치는 일이었고 시민 정부를 무너뜨리는 일은 사회를 끝장내는 일과 같았다. 그러나 시민 정부가 있고 없음은 최고 통치자에게 바쳐지는 복종에 달려 있다. 그가 자기 권위를 잃는 순간 모든 통치는 끝난다. 그러므로 자기 보존이 사람들에게 사회의 번영을 북돋우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무엇이든 갈채하고 그것을 해칠 것 같은 것은 무엇이든 비난하도록 가르치는 것과 같이, 그들이 한결같이 생각하고 말하려 한다면 바로 그 같은 원리가 그들에게 모든 경우에 시민 통치자5에게 복종하는 일을 갈채하고 모든 불복종과 반역을 비난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칭찬받을 만하다는 관념과 비난받을 만하다는 관념 자체가 복종과 불복종의 관념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민 통치자의 법이 무엇이 정의롭고 무엇이 불의한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에 관한 유일하고 궁극적인 잣대로 여겨져야 한다.

홉스 씨가 이 관념들을 퍼뜨림으로써 드러내어 밝힌 의도는, 사람들의 양심을 교회 권력이 아니라 곧바로 시민 권력에 매어 두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시대의 본보기로 말미암아 교회 권력의 사나움과 야심을 사회의 어지러움을 낳는 으뜸 근원으로 여기도록 배워 온 터였다. 이 때문에 그의 학설은 신학자들에게 남달리 거슬렸고, 신학자들은 그에 따라 매우 날카롭고 매서운 말로 그를 향한 의분을 쏟아 내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옳음과 틀림 사이에 자연스러운 구분이 없으며 이 구분이 흔들리고 바뀌는 것이어서 시민 통치자의 한낱 제멋대로인 의지에 달려 있다고 여겼으므로, 건전한 모든 도덕론자에게도 거슬렸다. 그러므로 사물에 관한 이 설명은 온 사방에서 온갖 종류의 무기로, 머리를 식힌 이성으로도 노기 띤 열변으로도 공격받았다.

그토록 미움을 부르는 학설을 논박하려면, 모든 법이나 실정 제도에 앞서 마음이 자연에 의하여 어떤 기능을 받아 지니고 있었고, 그 기능으로 어떤 행동과 정서에서는 옳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이 있다는 성질을, 다른 행동과 정서에서는 틀렸고 비난받을 만하고 악덕에 물들었다는 성질을 가려냈음을 증명해야 했다.

커드워스6 박사가 정당하게 지적한 대로7 법은 그 구분의 본래 근원일 수 없었다. 그러한 법을 놓고 보면 그것에 따르는 것이 옳고 따르지 않는 것이 틀렸거나, 아니면 따르든 따르지 않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르든 따르지 않든 아무래도 좋은 법이 그 구분의 근원일 수 없음은 분명하였다. 따르는 것이 옳고 따르지 않는 것이 틀린 법도 그럴 수 없었다. 이것조차 옳음과 틀림의 관념을 앞서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법에 따르는 일이 옳음의 관념에 들어맞고 따르지 않는 일이 틀림의 관념에 들어맞음을 여전히 앞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모든 법에 앞서 그 구분의 관념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마음이 이 관념을 이성에서 끌어냈다는 결론이 반드시 따라 나오는 듯하였다. 이성은 참과 거짓의 차이를 가리켜 보이는 것과 같은 꼴로 옳음과 틀림의 차이를 가리켜 보였다. 어떤 점에서는 참이지만 다른 점에서는 꽤 성급한 이 결론은, 인간 본성에 관한 추상적 학문이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었고 사람 마음의 서로 다른 기능들이 지닌 저마다 다른 직분과 힘이 꼼꼼히 살펴져 서로 갈라지기 전인 그 시절에 더 쉽게 받아들여졌다. 홉스 씨와의 이 논쟁이 가장 뜨겁고 가장 날카롭게 벌어지던 때에는, 그러한 관념이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길 만한 다른 어떤 기능도 떠올려진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때 널리 퍼진 학설은, 덕과 악덕의 본질이 사람의 행동이 윗사람의 법에 들어맞는가 어긋나는가에 있지 않고 이성에 들어맞는가 어긋나는가에 있다는 것이었으며, 이리하여 이성이 시인과 부인의 본래 근원이며 원리로 여겨졌다.

덕이 이성에 들어맞음에 있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참이며, 이 기능은 어떤 뜻에서 시인과 부인의, 그리고 옳고 틀림에 관한 모든 든든한 판단의 근원이며 원리로 아주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행동을 다스려야 할 그 정의의 일반 규칙을 발견하는 것은 이성으로써다. 그리고 우리가 늘 지니고 다니면서 그에 따라 우리 행위의 흐름을 될 수 있는 대로 잘 꾸며 보려 애쓰는 그 더 어렴풋하고 정해지지 않은 관념, 곧 무엇이 신중한지, 무엇이 격에 맞는지, 무엇이 도량이 크거나 고귀한지에 관한 관념을 우리가 이루는 것도 같은 기능으로써다. 도덕의 일반 준칙은 다른 모든 일반 준칙과 같이 경험과 귀납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아주 여러 가지 낱낱의 경우에 무엇이 우리 도덕 기능을 기쁘게 하거나 기쁘지 않게 하는지, 그 기능이 무엇을 시인하거나 부인하는지를 눈여겨보고, 이 경험에서 귀납하여 그 일반 규칙을 세운다. 그런데 귀납은 언제나 이성의 작용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모든 일반 준칙과 관념을 이성에서 끌어낸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적정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도덕 판단의 더 큰 부분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이것들로써이며, 만약 그 판단이 온전히 직접적인 감정과 느낌처럼 그토록 많은 흔들림에 놓인 것에, 곧 건강과 기분의 서로 다른 상태가 그토록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지극히 미덥지 못하고 위태로울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틀림에 관한 우리의 가장 든든한 판단이 이성의 귀납에서 끌어내어진 준칙과 관념으로 다스려지므로, 덕이 이성에 들어맞음에 있다고 아주 적정하게 말할 수 있고 그만큼 이 기능은 시인과 부인의 근원이며 원리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의심할 나위 없이 도덕의 일반 규칙의 근원이며 우리가 그 규칙으로 이루는 모든 도덕 판단의 근원이라 하더라도, 옳고 틀림에 관한 첫 지각이 이성에서 끌어내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그 일반 규칙이 이루어지는 바탕이 되는 낱낱의 경험 안에서조차 온전히 터무니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첫 지각은 어떤 일반 규칙이 그 위에 세워지는 다른 모든 실험과 마찬가지로 이성의 대상일 수 없고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도덕의 일반 규칙을 이루는 것은, 아주 여러 가지 사례에서 어떤 행위의 흐름은 한결같이 어떤 꼴로 마음을 기쁘게 하고 다른 행위의 흐름은 그에 못지않게 한결같이 마음을 기쁘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다. 그런데 이성은 어떤 특정한 대상을 그 자체를 위하여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들 수 없다. 이성은 이 대상이 자연히 기쁘거나 기쁘지 않은 다른 어떤 것을 얻는 수단임을 보여 줄 수 있고, 이렇게 하여 다른 무엇을 위하여 그것을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이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는 것은 무엇도 그 자체를 위하여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덕이 낱낱의 모든 사례에서 반드시 그 자체를 위하여 기쁨을 주고 악덕이 그에 못지않게 확실히 마음을 기쁘지 않게 한다면, 이러한 길로 우리를 앞의 것과 화해시키고 뒤의 것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이성일 수 없고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일 수밖에 없다.

쾌락과 아픔은 바람과 싫어함의 큰 대상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이성으로 갈라지지 않고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으로 갈라진다. 그러므로 덕이 그 자체를 위하여 바랄 만한 것이고 악덕이 같은 꼴로 싫어함의 대상이라면, 그 서로 다른 성질을 애초에 가르는 것은 이성일 수 없고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이다.

그러나 이성이 어떤 뜻에서 시인과 부인의 원리로 정당하게 여겨질 수 있으므로, 이 감정들은 주의를 두지 않은 탓에 오래도록 애초에 이 기능의 작용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도덕적 구분이 어떤 점에서 이성에서 일어난다고 말해질 수 있고 어떤 점에서 직접적인 감각과 느낌에 바탕을 두는지를 얼마간이라도 정확하게 갈라낸 첫 사람이 된 공로는 허치슨8 박사에게 있다. 그는 『도덕감각론 해설』에서 이것을 그토록 온전하게, 또 내 의견으로는 그토록 되받아칠 수 없게 설명해 놓았으므로, 이 문제를 두고 아직도 어떤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두 가지 말고 다른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다. 곧 그 신사가 써 놓은 것에 주의를 두지 않은 탓이거나, 어떤 표현의 꼴에 미신처럼 매달리는 탓이다. 뒤의 것은 배운 이들 사이에서 그리 드물지 않은 약함이며, 특히 지금 다루는 것처럼 깊이 이해가 걸린 주제에서는 덕 있는 사람조차 자기가 익숙해진 한 구절의 적정성마저 놓아 버리기를 흔히 꺼린다.

3장 감정을 시인의 원리로 삼는 체계들에 대하여

감정을 시인의 원리로 삼는 체계는 서로 다른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I. 어떤 이들에 따르면 시인의 원리는 특유한 본성을 지닌 어떤 감정에, 곧 어떤 행동이나 정서를 바라볼 때 마음이 발휘하는 특유한 지각의 힘에 바탕을 둔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 기능을 마음에 드는 꼴로 건드리고 다른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꼴로 건드리므로, 앞의 것에는 옳고 칭찬받을 만하고 덕이 있다는 성격이 찍히고 뒤의 것에는 틀렸고 비난받을 만하고 악덕에 물들었다는 성격이 찍힌다. 이 감정은 다른 모든 감정과 다른 특유한 본성을 지녔고 특유한 지각의 힘이 낳은 결과이므로, 그들은 그것에 특유한 이름을 주어 도덕감각9이라 부른다.

II. 또 다른 이들에 따르면 시인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여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새로운 지각의 힘을 끌어들일 까닭이 없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연은 다른 모든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가장 엄격한 절약으로 움직이며 하나의 같은 원인에서 여러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여태 늘 눈여겨져 온 힘이며 마음이 뚜렷이 받아 지니고 있는 힘인 동감이,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이 특유한 기능에 돌려진 모든 결과를 설명하기에 넉넉하다.

I. 허치슨 박사는10 시인의 원리가 자애심에 바탕을 두지 않았음을 증명하려고 큰 수고를 들였다. 또 그것이 이성의 어떠한 작용에서도 일어날 수 없음을 논증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남은 길은 그것을 특유한 종류의 기능, 곧 자연이 이 하나의 특정하고 무게 있는 결과를 낳으려고 사람의 마음에 주어 둔 기능으로 여기는 것밖에 없었다. 자애심과 이성이 둘 다 제외되었을 때, 이 목적에 어떤 점에서든 답할 수 있는 다른 알려진 마음의 기능이 있다는 생각은 그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이 새로운 지각의 힘을 도덕감각이라 부르고, 그것이 바깥의 감각들과 얼마간 비슷하다고 여겼다. 우리를 둘러싼 물체들이 어떤 꼴로 바깥의 감각들을 건드림으로써 소리와 맛과 냄새와 빛깔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사람 마음의 여러 정서도 어떤 꼴로 이 특유한 기능을 건드림으로써 사랑을 부르는 것과 미움을 부르는 것, 덕이 있는 것과 악덕에 물든 것, 옳은 것과 틀린 것이라는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마음이 그 모든 단순 관념을 끌어내는 여러 감각 또는 지각의 힘은11 이 체계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직접 감각 또는 앞서는 감각이라 불리고 다른 하나는 반성 감각 또는 뒤따르는 감각이라 불렸다. 직접 감각은 다른 어떤 것을 앞서 지각함을 앞세우지 않는 종류의 것들을 마음이 지각하게 해 주는 기능이었다. 그리하여 소리와 빛깔은 직접 감각의 대상이었다. 소리를 듣거나 빛깔을 보는 일은 다른 어떤 성질이나 대상을 앞서 지각함을 앞세우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반성 감각 또는 뒤따르는 감각은 다른 어떤 것을 앞서 지각함을 앞세우는 종류의 것들을 마음이 지각하게 해 주는 기능이었다. 그리하여 어울림과 아름다움은 반성 감각의 대상이었다. 어떤 소리의 어울림이나 어떤 빛깔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 소리나 그 빛깔을 지각해야 한다. 도덕감각은 이런 종류의 기능으로 여겨졌다. 로크12 씨가 반성이라 부르는 기능, 곧 그가 사람 마음의 서로 다른 정념과 감정에 관한 단순 관념을 끌어낸 그 기능은 허치슨 박사에 따르면 직접적인 내부 감각이었다. 다시 그 서로 다른 정념과 감정의 아름다움이나 추함, 덕이나 악덕을 우리가 지각하게 해 주는 기능은 반성적인 내부 감각이었다.

허치슨 박사는 이 학설이 자연의 유추에 들어맞으며 마음이 도덕감각과 똑같이 닮은 여러 다른 반성 감각을 받아 지니고 있음을 보임으로써 이 학설을 더욱 받쳐 주려 애썼다. 곧 바깥 대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아는 감각, 우리와 같은 피조물의 행복이나 비참에 우리가 동감하게 해 주는 공공 감각, 수치와 명예의 감각, 그리고 우스운 것을 알아보는 감각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재간 있는 철학자가 시인의 원리가 바깥의 감각들과 얼마간 비슷한 특유한 지각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증명하려고 들인 온갖 수고에도, 이 학설에서 따라 나온다고 그 자신이 인정하는 몇 가지 결론이 있으며 아마도 많은 이들은 그것을 이 학설을 논박하기에 넉넉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가 허용하는 바로13 어떤 감각의 대상에 속하는 성질은 가장 큰 터무니없음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그 감각 자체에 돌려질 수 없다. 보는 감각을 검다거나 희다고 부르고, 듣는 감각을 크다거나 작다고 부르고, 맛보는 감각을 달다거나 쓰다고 부를 생각을 여태 한 사람이 누가 있었는가? 그리고 그에 따르면 우리 도덕 기능을 덕이 있다거나 악덕에 물들었다거나 도덕적으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부르는 것도 그와 똑같이 터무니없다. 그 성질은 그 기능의 대상에 속하며 그 기능 자체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잔인함과 불의를 가장 높은 덕으로 시인하고 공정과 인간애를 가장 딱한 악덕으로 부인할 만큼 터무니없게 짜여 있다면, 그러한 마음의 짜임은 참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나 사회에나 불편한 것으로, 또 그것 자체로 낯설고 놀랍고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야 있겠지만, 가장 큰 터무니없음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악덕에 물들었다거나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이름 지어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건방진 폭군이 명한 야만스럽고 마땅한 까닭 없는 처형을 놓고 감탄하며 갈채를 외쳐 대는 사람을 우리가 본다면, 우리는 이 처신을 가장 높은 정도로 악덕에 물들었고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이름 짓는 데서 어떤 큰 터무니없음을 저지른다고 분명히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드러내는 것은 비뚤어진 도덕 기능, 곧 이 끔찍한 행동을 고귀하고 아량 있고 위대한 것으로 여겨 터무니없이 시인하는 마음뿐인데도 그렇다. 내가 떠올려 보기로는 그러한 관찰자를 보면 우리 가슴은 한동안 당하는 쪽에 대한 동감을 잊고, 그토록 몹시 미운 못난 자를 생각하며 끔찍함과 증오밖에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시샘과 두려움과 분개라는 센 정념에 몰려 그리한 것일 수 있고 그 때문에 더 너그러이 봐줄 여지가 있는 폭군보다도 그를 더 몹시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관찰자의 감정은 아무런 원인도 동기도 없어 보일 것이고, 따라서 가장 온전하고 완전하게 증오스러워 보일 것이다. 우리 가슴이 이런 종류의 감정이나 정서의 비틀림보다 더 들어가기를 꺼릴 만한 것, 또는 더 큰 미움과 의분으로 물리칠 만한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마음의 짜임을 한낱 낯설거나 불편한 무엇일 뿐이고 어떤 점에서도 악덕에 물들거나 도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도덕적 비뚤어짐의 맨 마지막이며 가장 무서운 단계로 여길 것이다.

이와 달리 올바른 도덕 감정은 자연히 얼마간 칭찬받을 만하고 도덕적으로 좋은 것으로 보인다. 자기의 책망과 갈채를 모든 경우에 대상의 값이나 값없음에 가장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은 도덕적 시인까지도 얼마간 받아 마땅해 보인다. 우리는 그의 도덕 감정이 지닌 섬세한 정확함에 감탄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판단을 이끌며, 그 드물고 놀라운 올바름 때문에 우리 놀라움과 갈채까지 불러낸다. 물론 그러한 사람의 행위가 남의 행위에 관한 그의 판단이 지닌 정확함과 꼼꼼함에 어떤 점에서든 맞아떨어질 것이라고 우리가 언제나 확신할 수는 없다. 덕은 감정의 섬세함만이 아니라 습성과 마음의 결단까지 요구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감정의 섬세함이 가장 완전한 자리에 습성과 결단이 이따금 없다. 그러나 이 마음의 성향은 이따금 온전하지 못함이 따라붙을 수 있다 하더라도 크게 죄가 되는 어떤 것과도 나란히 있을 수 없으며, 완전한 덕의 건물을 그 위에 세울 수 있는 가장 행복한 바탕이다. 뜻은 아주 좋고 자기가 의무라 생각하는 것을 진지하게 하려고 마음먹으면서도 자기 도덕 감정이 거칠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다.

아마도 이렇게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곧 시인의 원리가 바깥의 감각들과 어떤 점에서든 비슷한 어떠한 지각의 힘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이 하나의 특정한 목적에만 답하고 다른 목적에는 답하지 않는 특유한 감정에 바탕을 두고 있을 수 있다. 시인과 부인은 서로 다른 성격과 행동을 바라볼 때 마음에 일어나는 어떤 느낌이나 감정이라고 주장될 수 있으며, 분개를 상해를 아는 감각이라 부르고 감사를 이로움을 아는 감각이라 부를 수 있듯이 이것도 옳음과 틀림의 감각 또는 도덕감각이라는 이름을 아주 적정하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물에 관한 이 설명은 앞의 설명과 같은 반론에는 놓이지 않을지 몰라도, 그에 못지않게 되받아칠 수 없는 다른 반론에 놓인다.

첫째로, 어떤 특정한 감정이 어떤 변화를 겪든 그것은 그 감정을 그런 종류의 감정으로 가려내 주는 일반적인 특징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이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낱낱의 경우에 겪을 수 있는 어떠한 변화보다도 언제나 더 두드러지고 눈에 띈다. 그리하여 분노는 특정한 종류의 감정이며, 따라서 그 일반적인 특징은 그것이 낱낱의 경우에 겪는 모든 변화보다 언제나 더 잘 가려진다. 남자를 향한 분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여자를 향한 분노와 얼마간 다르고, 그것은 또 아이를 향한 분노와 다르다. 그 세 경우마다 분노라는 일반적인 정념은 그 대상의 특정한 성격에서 서로 다른 변형을 받는데,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이를 쉽게 눈여겨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모든 경우에 그 정념의 일반적인 특징이 우세하다. 이 특징을 가려내는 데는 섬세한 눈썰미가 필요하지 않다. 거꾸로 그 변화를 알아내는 데는 매우 섬세한 주의가 있어야 한다. 앞의 것은 누구나 눈여겨보고 뒤의 것은 좀처럼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인과 부인이 감사와 분개처럼 다른 모든 감정과 다른 특정한 종류의 감정이라면, 그 어느 것이 어떤 변화를 겪더라도 그것을 그런 특정한 종류의 감정으로 새겨 주는 일반적인 특징을 맑고 또렷하고 쉽게 가려지는 꼴로 여전히 지니고 있으리라고 우리는 기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경우에 시인하거나 부인할 때 실제로 무엇을 느끼는지에 주의를 두어 보면, 한 경우의 우리 감정이 다른 경우의 감정과 흔히 온전히 다르고 그 둘 사이에서 어떠한 공통된 특징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다정하고 섬세하고 인간애가 있는 감정을 바라볼 때 품는 시인은, 크고 담대하고 아량 있어 보이는 감정에 우리가 마음을 맞을 때 품는 시인과 아주 다르다. 그 둘에 대한 우리 시인은 서로 다른 경우에 완전하고 온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앞의 것에는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뒤의 것에는 마음이 들어 올려지며, 그 둘이 우리 안에 불러내는 감정 사이에는 어떠한 닮음도 없다. 그러나 내가 세우려 애써 온 그 체계에 따르면 사정은 반드시 이러해야 한다. 그 두 경우에 우리가 시인하는 사람의 감정은 서로 아주 맞서는 것이고 우리 시인은 그 맞서는 감정에 동감하는 데서 일어나므로, 한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다른 경우에 우리가 느끼는 것과 어떠한 닮음도 지닐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우리가 시인하는 그 감정과 공통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다른 어떤 정념이 자기의 적정한 대상을 볼 때 일어나듯 그 감정을 바라볼 때 일어나는 특유한 감정에 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부인에 관해서도 같은 말이 들어맞는다. 잔인함에 대한 우리의 끔찍해하는 마음은 치사함에 대한 우리의 업신여김과 어떠한 닮음도 지니지 않는다. 그 서로 다른 두 악덕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과 그 감정과 처신을 우리가 헤아리는 사람의 마음 사이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종류의 어긋남이다.

둘째로, 나는 시인되거나 부인되는 사람 마음의 서로 다른 정념이나 정서가 도덕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적정한 시인과 적정하지 않은 시인도 우리 자연스러운 감정에는 같은 성격이 찍힌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이미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이 체계에 따르면 우리가 적정한 시인이나 적정하지 않은 시인을 어떻게 시인하거나 부인하는지 묻고 싶다. 이 물음에 주어질 수 있는 이치에 맞는 답은 내가 떠올려 보기로는 하나뿐이다. 우리 이웃이 제삼자의 행위를 두고 품는 시인이 우리 자신의 시인과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그의 시인을 시인하고 그것을 얼마간 도덕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기며, 거꾸로 그것이 우리 자신의 감정과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부인하고 얼마간 도덕적으로 나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 한 경우에는 보는 쪽과 보이는 쪽 사이의 감정이 맞아떨어지는가 맞서는가가 도덕적 시인이나 부인을 이룬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한 경우에 그렇다면 왜 다른 모든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지 나는 묻고 싶다. 그 감정을 설명하기 위하여 새로운 지각의 힘을 끌어들이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시인의 원리를 다른 모든 것과 다른 특유한 감정에 매어 두는 모든 설명에 나는 이렇게 반론하고 싶다. 곧 섭리가 의심할 나위 없이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도록 뜻해 둔 이 감정이 여태 그토록 적게 눈여겨져서 어떤 언어에서도 이름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낯선 일이다. 도덕감각이라는 낱말은 아주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고 아직 영어의 한 부분을 이룬다고 여겨질 수 없다. 시인이라는 낱말도 이 종류의 무엇을 남달리 가리키는 데 쓰이게 된 것은 겨우 요 몇 해 안의 일이다. 말의 적정한 쓰임에서 우리는 온전히 우리 만족에 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시인하며, 건물의 모양도 기계의 꾸밈새도 고기 요리의 맛도 시인한다. 양심이라는 낱말은 우리가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데 쓰는 어떤 도덕 기능을 곧바로 가리키지 않는다. 양심은 참으로 그러한 기능이 있음을 앞세우며, 그 지시에 맞게 또는 어긋나게 행동했다는 우리 의식을 적정하게 나타낸다. 사랑과 미움과 기쁨과 슬픔과 감사와 분개, 그리고 모두가 이 원리의 대상이라 여겨지는 그토록 많은 다른 정념이 저마다 이름을 얻어 알려질 만큼 무게를 지니게 되었는데, 그 모두를 다스리는 주권자가 여태 그토록 적게 마음에 두어져서 몇몇 철학자를 빼고는 아직 아무도 그것에 이름을 하나 베풀 값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우리가 어떤 성격이나 행동을 시인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앞의 체계에 따르면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 네 가지 근원에서 끌어내어진다. 첫째, 우리는 행위자의 동기에 동감한다. 둘째, 우리는 그의 행동에서 이로움을 받는 이들의 감사 속으로 들어간다. 셋째, 우리는 그의 행위가 그 두 동감이 대개 작용하는 그 일반 규칙에 들어맞았음을 눈여겨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행동을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의 행복을 북돋우는 쪽으로 기울어 있는 처신 체계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헤아릴 때, 그것은 우리가 잘 꾸며진 기계에 돌리는 아름다움과 다르지 않은 아름다움을 이 효용에서 끌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한 낱낱의 경우에 이 네 원리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나온다고 인정해야 할 모든 것을 덜어 낸 뒤에 무엇이 남는지 나는 알고 싶다. 그리고 누구든 이 남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혀 준다면, 나는 이 남는 것을 도덕감각이나 다른 어떤 특유한 기능에 돌리는 것을 거리낌 없이 허락하겠다. 아마도 이렇게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곧 이 도덕감각이라 여겨지는 것과 같은 특유한 원리가 있다면, 우리가 기쁨과 슬픔과 희망과 두려움을 다른 어떠한 감정과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으로 흔히 느끼듯이 우리는 낱낱의 어떤 경우에 그것을 다른 모든 것에서 떼어 내고 갈라낸 것으로 느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떠올려 보기로는 이것은 주장조차 될 수 없다. 이 원리가 동감이나 반감과도, 감사나 분개와도, 어떤 행동이 세워진 규칙에 들어맞는지 어긋나는지에 대한 지각과도, 마지막으로 생명 없는 대상이 불러내는 것이든 생명 있는 대상이 불러내는 것이든 아름다움과 질서에 대한 그 일반적인 심미안과도 섞이지 않고 홀로 스스로를 발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례를 나는 여태 하나도 들은 적이 없다.

II. 우리 도덕 감정의 기원을 동감에서 설명하려 하면서도 내가 세우려 애써 온 체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체계가 있다. 그것은 덕을 효용에 놓고, 관찰자가 어떤 성질의 효용을 살펴볼 때 느끼는 기쁨을 그 성질에 영향을 받는 이들의 행복에 동감하는 데서 설명하는 체계다. 이 동감은 우리가 행위자의 동기 속으로 들어가는 데 쓰는 동감과도 다르고, 그의 행동으로 이로움을 받는 이들의 감사와 함께 가는 데 쓰는 동감과도 다르다. 그것은 우리가 잘 꾸며진 기계를 시인할 때 쓰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어떠한 기계도 마지막에 든 그 두 동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이미 이 논의의 4부에서 이 체계에 관하여 얼마간 설명한 바 있다.

주

  1. 1. 옮긴이 —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 영국의 철학자로 『리바이어던』을 썼다.

  2. 2. 푸펜도르프. 맨더빌.

  3. 3. 옮긴이 — 스미스가 원주에 이름만 적어 둔 두 사람은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 1632~1694)와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이다. 앞은 독일의 자연법학자이고 뒤는 『꿀벌의 우화』를 쓴 영국의 저술가다. 저본의 철자는 Puffendorff 다.

  4. 4. 옮긴이 — 카토(Marcus Porcius Cato, 기원전 95~46).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로 덕의 본보기로 꼽혔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 기원전 108~62)는 기원전 63년 로마에서 반란을 꾸민 인물이다.

  5. 5. 옮긴이 — civil magistrate. 교회 권력과 맞세워 쓰는 말로, 세속의 정치 권력을 맡은 통치자를 뜻한다.

  6. 6. 옮긴이 — 랠프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1688).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에 드는 영국의 신학자로 『불변의 도덕』을 썼다.

  7. 7. 『불변의 도덕』 1권.

  8. 8. 옮긴이 —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글래스고 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스미스의 스승이었다.

  9. 9. 옮긴이 — 허치슨의 술어 moral sense. 옳음과 틀림을 곧바로 알아보는 마음의 별개 기능을 뜻한다.

  10. 10. 『덕에 관한 탐구』.

  11. 11. 『정념론』.

  12. 12. 옮긴이 —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의 철학자로 『인간 지성론』을 썼다. 여기서 반성(reflection)은 마음이 자기 안의 작용을 살펴 관념을 얻는 일을 뜻한다.

  13. 13. 『도덕감각론 해설』 1절 237쪽 이하. 제3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