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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정론6부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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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2편 덕의 본성에 관하여 제시된 여러 설명에 대하여

머리말

덕의 본성, 곧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한 성격을 이루는 마음의 기질에 관하여 제시된 여러 설명은 세 가지 부류로 줄일 수 있다. 어떤 이들에 따르면 덕 있는 마음의 기질은 어느 한 종류의 정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정서를 적정하게 다스리고 이끄는 데 있으며, 정서는 그것이 쫓는 대상과 그것을 쫓는 격렬함의 정도에 따라 덕이 있기도 하고 악덕에 물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저자들에 따르면 덕은 적정성에 있다.

또 다른 이들에 따르면 덕은 우리 자신의 사적 이익과 행복을 사려 깊게 추구하는 데, 곧 오직 이 목적만을 겨누는 이기적 정서를 적정하게 다스리고 이끄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저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덕은 신중에 있다.

또 다른 한 무리의 저자들은 덕이 우리 자신의 행복을 겨누는 정서가 아니라 오직 남의 행복을 겨누는 정서에만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 따르면 사심 없는 인애만이 어떤 행동에 덕의 성격을 찍어 줄 수 있는 유일한 동기다.

덕의 성격은 적정하게 다스려지고 이끌리는 한 우리 모든 정서에 가림 없이 돌려져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가운데 어느 한 부류나 한 갈래에 한정되어야 함이 분명하다. 우리 정서를 가르는 큰 구분은 이기적인 것과 인애로운 것으로 갈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덕의 성격이 적정하게 다스려지고 이끌리는 한 우리 모든 정서에 가림 없이 돌려질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사적 행복을 곧바로 겨누는 정서에 한정되거나 남의 행복을 곧바로 겨누는 정서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덕이 적정성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신중에 있거나 인애에 있어야 한다. 이 셋 말고 덕의 본성에 관하여 다른 어떤 설명이 주어질 수 있다고 떠올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나는 이 셋 가운데 어느 것과도 겉으로는 달라 보이는 다른 모든 설명이 바탕에서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와 어떻게 맞아떨어지는지를 뒤에 보이려 애쓰겠다.

1장 덕이 적정성에 있다고 하는 체계들에 대하여

플라톤1과 아리스토텔레스2, 그리고 제논3에 따르면 덕은 행위의 적정성에 있으며, 곧 우리가 행동하게 되는 그 정서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걸맞은가에 있다.

1. 플라톤의 체계4에서 영혼은 세 가지 서로 다른 기능 또는 계층으로 이루어진 작은 국가 또는 공화국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는 판단하는 기능, 곧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적정한 수단이 무엇인가를 정할 뿐 아니라 어떤 목적이 쫓기에 알맞은가, 또 그 하나하나에 어느 정도의 상대적 가치를 두어야 하는가까지 정하는 기능이다. 플라톤은 이 기능을 이성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참으로 적정하게 그리 불리는 이름이며, 그는 그것을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가 될 권리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 이름 아래 그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능뿐 아니라 욕망과 정서의 적정성 또는 부적정성을 판단하는 기능까지 아울렀음이 분명하다.

이 다스리는 원리에 자연히 딸린 것이면서도 그 주인에게 거스르고 나서기 쉬운 여러 정념과 욕구를 그는 두 가지 부류 또는 계층으로 줄였다. 첫째는 자부심과 분개에 바탕을 둔 정념, 곧 스콜라 학자들이 영혼의 노여워하는 부분이라 부른 것에 바탕을 둔 정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야심, 적의, 명예를 사랑하는 마음과 수치를 두려워하는 마음, 승리와 우위와 복수를 바라는 마음, 요컨대 우리 말에서 비유로 흔히 기개 또는 타고난 불이라 부르는 것에서 일어난다고, 또는 그것을 드러낸다고 여겨지는 모든 정념이 여기에 들었다. 둘째는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정념, 곧 스콜라 학자들이 영혼의 탐하는 부분이라 부른 것에 바탕을 둔 정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에는 몸의 모든 욕구와 편안함과 안전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감각의 모든 충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울러졌다.

우리가 지배하는 원리가 지시하는 그 행위의 계획, 곧 머리가 식은 모든 시간에 우리 자신이 쫓기에 가장 적정한 것으로 스스로 세워 두었던 그 계획을 깨고 들어가는 일은, 그 두 갈래 정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떠밀릴 때, 곧 다스릴 수 없는 야심과 분개에 떠밀리거나 지금 당장의 편안함과 쾌락이 끈덕지게 졸라 대는 데 떠밀릴 때가 아니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계층의 정념이 그토록 우리를 잘못 이끌기 쉽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인간 본성의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여겨진다. 첫째 것은 우리를 상해에서 지켜 내고 세상에서 우리 지위와 품위를 내세우며, 우리가 고귀하고 명예로운 것을 겨누게 하고 마찬가지로 행동하는 이들을 알아보게 하도록 주어진 것이고, 둘째 것은 몸을 지탱하고 그 필요를 채우도록 주어진 것이다.

지배하는 원리의 힘과 날카로움과 완전함에 신중이라는 본질적인 덕이 놓였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신중은 쫓기에 적정한 목적과 그것을 이루기에 적정한 수단을 일반적이고 학문적인 관념에 바탕을 두어 정당하고 맑게 가려내는 데 있었다.

첫째 갈래 정념, 곧 영혼의 노여워하는 부분에 속한 정념이 이성의 이끎 아래 명예롭고 고귀한 것을 쫓는 가운데 모든 위험을 업신여기게 해 주는 그만한 정도의 힘과 굳음을 지니고 있었을 때, 그것은 굳셈과 아량의 덕을 이루었다. 이 체계에 따르면 이 계층의 정념은 다른 계층보다 더 도량이 크고 더 고귀한 본성을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여러 경우에 낮고 짐승 같은 욕구를 막고 붙잡아 두는 이성의 보조자로 여겨졌다.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가 부인하는 일을 하도록 떠밀 때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에게 분노하며, 흔히 우리 자신의 분개와 의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그리고 우리 본성의 노여워하는 부분은 이렇게 이성의 편에 서서 탐하는 부분에 맞서도록 불려 나온다.

우리 본성의 그 세 부분이 서로 온전히 어우러졌을 때, 노여워하는 정념도 탐하는 정념도 이성이 시인하지 않는 어떠한 충족도 겨누지 않고, 또 이성이 이 정념들이 스스로 기꺼이 이행하려 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명하지 않았을 때, 이 행복한 가라앉음, 이 완전하고 온전한 영혼의 어울림은 그들의 말에서 한 낱말로 표현되는 그 덕을 이루었다. 우리는 그 낱말을 흔히 절제라 옮기지만, 좋은 기질, 또는 마음의 차분함과 절도라 옮기는 것이 더 적정할 것이다.

네 가지 으뜸 덕 가운데 마지막이며 가장 큰 덕인 정의는 이 체계에 따르면 마음의 그 세 기능이 저마다 다른 기능의 직분을 침범하려 들지 않고 자기의 적정한 직분 안에 머물 때, 이성이 이끌고 정념이 따를 때, 그리고 정념이 저마다 자기의 적정한 의무를 다하고 자기의 적정한 대상을 향하여 거리낌 없이 쉽게, 또 자기가 쫓는 것의 가치에 걸맞은 그만한 정도의 힘과 기운으로 스스로를 발휘할 때 자리를 잡았다. 플라톤이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몇몇을 뒤따라 정의라 이름 지은 그 온전한 덕, 그 완전한 행위의 적정성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스어에서 정의를 나타내는 낱말에는 여러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 둘 만하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다른 모든 언어에서 이에 대응하는 낱말에도 같은 여러 뜻이 있으므로, 그 여러 뜻 사이에는 어떤 자연스러운 친연이 있을 것이다. 한 뜻에서 우리는 이웃에게 어떠한 적극적인 해도 끼치지 않고 그의 몸이나 그의 재산이나 그의 명성에 곧바로 상해를 입히지 않을 때 그에게 정의를 행한다고 말해진다. 이것이 내가 앞에서 다룬 그 정의이며, 그것을 지키는 일은 힘으로 강제될 수 있고 그것을 어기면 벌을 받게 된다. 다른 뜻에서 우리는 이웃의 성격과 그의 처지, 그리고 그와 우리 자신의 이어짐이 우리가 느끼기에 걸맞고 적정하게 만드는 그 모든 사랑과 존경과 존중을 그를 향하여 품고 또 그에 맞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해진다. 우리와 이어져 있는 공로 있는 사람을 모든 점에서 해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를 섬기고 공평한 관찰자가 그를 보고 기뻐할 그 자리에 그를 놓아 주려 스스로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에게 불의를 행한다고 말해지는 것은 바로 이 뜻에서다. 이 낱말의 첫째 뜻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학자들이 교환적 정의라 부르는 것, 그리고 그로티우스5가 채워 주는 정의6라 부르는 것과 맞아떨어지는데, 그것은 남의 것에서 손을 거두는 데, 그리고 우리가 적정하게 강제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스스로 나서서 하는 데 있다. 이 낱말의 둘째 뜻은 어떤 이들이 분배적 정의7라 불러 온 것, 그리고 그로티우스의 나누어 주는 정의8와 맞아떨어지는데, 그것은 적정한 선행에, 우리 것을 알맞게 쓰는 데, 그리고 우리 처지에서 그것이 쓰이기에 가장 걸맞은 자선이나 도량의 목적에 그것을 돌리는 데 있다. 이 뜻에서 정의는 사회적 덕 모두를 아우른다. 정의라는 낱말이 이따금 받아들여지는 또 다른 뜻이 있는데, 앞의 두 뜻 어느 것보다도 더 넓으면서도 마지막 뜻과는 매우 가깝고, 내가 아는 한 이 뜻 또한 모든 언어를 꿰고 있다. 어떤 특정한 대상을 공평한 관찰자에게 그것이 받아 마땅해 보이거나 자연히 불러일으키기에 알맞아 보이는 그만한 정도의 존중으로 값있게 여기지 않는 듯할 때, 또는 그만한 정도의 열의로 쫓지 않는 듯할 때 우리가 불의하다고 말해지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뜻에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나 그림을 넉넉히 감탄하지 않을 때 그것에 불의를 행한다고 말해지고, 지나치게 감탄할 때 그것에 정의보다 더한 것을 행한다고 말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기 이익의 어떤 특정한 대상에 넉넉한 주의를 두지 않는 듯할 때 우리 자신에게 불의를 행한다고 말해진다. 이 마지막 뜻에서 정의라 불리는 것은 행위와 처신의 정확하고 완전한 적정성과 같은 것을 뜻하며, 그 안에 교환적 정의와 분배적 정의 양쪽의 직분뿐 아니라 신중과 굳셈과 절제라는 다른 모든 덕의 직분까지 아우른다. 플라톤이 자기가 정의라 부르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히 이 마지막 뜻에서이며, 따라서 그에 따르면 정의는 그 안에 모든 종류의 덕의 완전함을 아우른다.

덕의 본성, 곧 칭찬과 시인의 적정한 대상이 되는 그 마음의 기질에 관하여 플라톤이 제시한 설명은 이러하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모든 기능이 다른 기능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기의 적정한 영역 안에 머물며 자기에게 속한 바로 그만한 정도의 힘과 기운으로 자기의 적정한 직분을 다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다. 그의 설명이 행위의 적정성에 관하여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과 모든 점에서 맞아떨어짐이 분명하다.

2.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9 덕은 올바른 이성에 따른 중용의 습성에 있다. 그에 따르면 개개의 덕은 모두 서로 맞서는 두 악덕 사이의 일종의 중간에 놓이는데, 그 하나는 어떤 특정한 종류의 대상에 지나치게 움직여져서 어긋나고 다른 하나는 너무 적게 움직여져서 어긋난다. 그리하여 굳셈 또는 용기의 덕은 비겁과 주제넘은 경솔이라는 서로 맞서는 두 악덕의 중간에 놓이는데, 그 하나는 두려움의 대상에 지나치게 움직여져서 어긋나고 다른 하나는 너무 적게 움직여져서 어긋난다. 그리하여 검약의 덕 또한 탐욕과 낭비의 중간에 놓이는데, 그 하나는 자기 이익의 대상에 두어야 할 적정한 주의가 넘치는 데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모자라는 데 있다. 아량도 마찬가지로 오만이라는 넘침과 소심이라는 모자람의 중간에 놓이는데, 그 하나는 우리 자신의 값과 품위에 대한 감정이 너무 터무니없이 큰 데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너무 약한 데 있다. 덕에 관한 이 설명 또한 행위의 적정성과 부적정성에 관하여 앞에서 말한 것과 꽤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따로 지적할 필요가 없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10 덕은 그 절도 있고 올바른 정서 자체에 있다기보다 이 절도의 습성에 있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덕이 어떤 행동의 성질로 여겨질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의 성질로 여겨질 수도 있음을 알아 두어야 한다. 행동의 성질로 여겨질 때, 덕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더라도 그 행동이 흘러나오는 정서의 이치에 맞는 절도에 있으며, 그 성향이 그 사람에게 습성으로 굳어 있는지 어떤지는 상관이 없다. 사람의 성질로 여겨질 때, 덕은 이 이치에 맞는 절도의 습성에, 곧 그것이 그 마음의 늘 그러한 성향이 된 데 있다. 그리하여 이따금 도량이 크게 발동하는 데서 흘러나온 행동은 의심할 나위 없이 도량이 큰 행동이지만, 그것을 한 사람이 반드시 도량이 큰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것이 그가 여태 한 그런 종류의 행동 가운데 단 하나뿐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행동을 하게 만든 동기와 마음의 성향은 매우 정당하고 적정한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행복한 기분은 그 성격 안의 한결같거나 오래가는 무엇의 결과라기보다 우연한 기분의 결과였던 듯하므로, 그것은 그 일을 한 사람에게 큰 명예를 되비쳐 줄 수 없다. 어떤 성격을 도량이 크다거나 자선을 베푼다거나 어떤 점에서 덕이 있다고 이름 지어 부를 때, 우리는 그 이름들 하나하나가 나타내는 성향이 그 사람의 늘 그러한 성향임을 뜻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이든 낱낱의 행동은 그것이 아무리 적정하고 걸맞은 것이라 하더라도 사정이 그러함을 보이는 데는 거의 무게가 없다. 낱낱의 행동 하나로 그것을 한 사람에게 어떤 덕의 성격을 찍기에 넉넉하다면, 사람들 가운데 가장 쓸모없는 자들도 모든 덕을 제 것이라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 신중하게, 정의롭게, 절제 있게, 굳세게 행동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낱낱의 행동이 아무리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도 그것을 한 사람에게 되비쳐 주는 칭찬은 매우 적은 데 반해, 행위가 여느 때에는 매우 반듯한 사람이 한 낱낱의 악덕에 물든 행동 하나는 그의 덕에 대한 우리 의견을 크게 깎아내리고 때로는 아주 무너뜨려 버린다. 이런 종류의 행동 하나는 그의 습성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가 여느 때의 처신의 흐름으로 보아 우리가 떠올리기 쉬웠을 만큼 믿고 기댈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넉넉히 보여 준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11 덕이 실천의 습성에 있다고 했을 때 아마도 플라톤의 학설에 맞서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무엇이 하기에 알맞고 무엇이 피하기에 알맞은가에 관한 정당한 감정과 이치에 맞는 판단만으로도 가장 완전한 덕을 이루기에 넉넉하다는 의견이었던 듯하다. 플라톤에 따르면 덕은 일종의 학문으로 여겨질 수 있었고, 그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맑게 또 논증적으로 보면서도 그에 맞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념은 의심스럽고 확실하지 않은 의견에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우리를 만들 수는 있으나, 뚜렷하고 분명한 판단에 어긋나게는 그럴 수 없다. 이와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의 어떠한 확신도 뿌리 깊은 습성을 이겨 낼 수 없으며, 좋은 도덕은 앎에서가 아니라 행동에서 일어난다는 의견이었다.

3. 스토아학파 학설의 창시자인 제논에 따르면12, 모든 동물은 자연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돌보도록 맡겨져 있었고, 자기의 존재뿐 아니라 자기 본성의 서로 다른 모든 부분을 그것들이 이를 수 있는 가장 좋고 가장 완전한 상태로 지켜 내려 애쓸 수 있도록 자애심이라는 원리를 받아 지니고 있었다.

사람의 자애심은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그의 몸과 몸의 서로 다른 모든 부분, 그의 마음과 마음의 서로 다른 모든 기능과 힘을 껴안았고, 그 모두를 가장 좋고 가장 완전한 상태로 지키고 지탱하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이 존재의 상태를 받쳐 주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무엇이든 자연에 의하여 그에게 고르기에 알맞은 것으로 가리켜졌고, 그것을 무너뜨리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무엇이든 물리치기에 알맞은 것으로 가리켜졌다. 그리하여 건강과 힘과 날램과 몸의 편안함, 그리고 이것들을 늘려 줄 수 있는 밖의 이로움, 곧 부와 권력과 명예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존경과 존중은 자연히 우리에게 택할 만한 것으로, 또 그것을 가지는 편이 그 반대보다 나은 것으로 가리켜졌다. 다른 한편으로 병과 허약함과 몸이 둔해짐과 몸의 아픔,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일으키거나 불러들이는 쪽으로 기우는 밖의 모든 불편, 곧 가난과 권위의 결여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업신여김이나 미움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꺼리고 피해야 할 것으로 가리켜졌다. 그 서로 다른 두 부류의 대상에는 저마다 같은 부류의 다른 것들보다 고름이나 물리침의 대상이 되는 정도가 더 큰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첫째 부류에서는 건강이 힘보다, 힘이 날램보다 분명히 나아 보였고, 명성이 권력보다, 권력이 재물보다 나아 보였다. 그리고 둘째 부류에서도 그와 같이 병은 몸이 둔해지는 것보다 더 피해야 할 것이었고, 오욕은 가난보다, 가난은 권위의 결여보다 더 피해야 할 것이었다. 덕과 행위의 적정성은 서로 다른 모든 대상과 사정을 그것들이 자연에 의하여 고름이나 물리침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진 정도에 따라 고르고 물리치는 데 있었고, 우리에게 놓인 여러 고름의 대상을 다 얻을 수 없을 때에는 그 가운데서 언제나 가장 고를 만한 것을 골라내는 데, 또 우리에게 닥친 여러 물리침의 대상을 다 피하는 것이 우리 힘 안에 없을 때에는 그 가운데서 가장 덜 피해야 할 것을 골라내는 데 있었다. 이렇게 정당하고 정확한 가려냄으로 고르고 물리침으로써, 곧 모든 대상에 그것이 이 자연스러운 사물의 등급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따라 마땅히 받을 바로 그만한 정도의 주의를 베풂으로써,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우리는 덕의 본질을 이루는 그 완전한 행위의 곧음을 지켰다. 이것이 그들이 한결같이 사는 것, 자연에 따라 사는 것, 그리고 자연 또는 자연의 창조자가 우리 행위를 위하여 지시해 둔 그 법과 이끎에 따르는 것이라 부른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적정성과 덕에 관한 스토아학파의 관념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옛 소요학파의 관념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두 체계를 서로 크게 갈라놓은 것은 그들이 요구한 자기 통제의 정도가 달랐다는 점이다. 소요학파는 얼마간의 마음의 흔들림을 인간 본성의 약함에 걸맞은 것으로, 또 사람처럼 온전하지 못한 피조물에게 쓸모 있는 것으로 허용하였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자기 자신의 불운이 아무런 격렬한 비통도 불러일으키지 않고 자기 자신이 입은 상해가 아무런 생생한 분개도 불러내지 않는다면, 이성, 곧 무엇이 옳고 무엇이 하기에 알맞은지를 정해 주는 일반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은 그가 앞의 것을 피하거나 뒤의 것을 물리치도록 떠밀기에는 흔히 너무 약할 것이었다. 이와 달리 스토아학파는 가장 완전한 무정념을 요구하였고, 마음의 평정을 조금이라도 어지럽힐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경솔과 어리석음의 결과로 여겼다. 소요학파는 관찰자가 인간애를 다하여 애쓰면 어떤 정념에 동감할 수 있는 한 그 정념이 적정성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와 달리 스토아학파는 관찰자의 동감을 얼마라도 요구하는 정념, 곧 관찰자가 그 감정의 격렬함에 발을 맞추기 위하여 자기 마음의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상태를 어느 점에서라도 바꾸도록 요구하는 정념은 모두 적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 듯하다. 그들이 생각한 바로는 덕 있는 사람은 용서나 시인을 얻으려고 더불어 사는 이들의 도량에 기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또 그 자체를 위해서는 바람의 대상도 싫어함의 대상도, 기쁨의 대상도 슬픔의 대상도 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 그가 어떤 일을 다른 일보다 앞세우고 어떤 처지는 고름의 대상으로 삼고 다른 처지는 물리침의 대상으로 삼았다면13, 그것은 그가 한쪽을 그 자체로 어느 점에서든 다른 쪽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거나 이른바 운 좋은 처지에서 자기 행복이 흔히 괴로운 처지로 여겨지는 것에서보다 더 온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동의 적정성, 곧 신들이 그의 행위를 이끌도록 그에게 준 그 규칙이 그가 이렇게 고르고 물리치기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러운 기울어짐의 으뜸 대상 가운데, 곧 자연이 애초에 우리에게 택할 만한 것으로 권한 것들 가운데에는 우리 가족과 우리 친척과 우리 친구와 우리 나라와 인류, 그리고 온 우주의 번영이 있었다. 또 자연은 둘의 번영이 하나의 번영보다 나은 것과 같이 여럿이나 모두의 번영은 끝없이 더 나은 것이 틀림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또 우리 자신은 하나일 뿐이므로, 우리 번영이 전체의 번영이나 전체의 상당한 부분의 번영과 어긋나는 자리에서는 어디서나 우리 번영이 우리 자신의 고름에서조차 그토록 크게 더 나은 것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지혜롭고 힘 있고 선한 신의 섭리로 이끌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전체의 번영과 완전함으로 기울어 있음을 믿어도 좋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가난이나 병이나 다른 어떤 재난에 놓여 있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정의와 남에 대한 우리 의무가 허락하는 한 이 언짢은 사정에서 우리 자신을 건져 내려고 온 힘을 다하여 애써야 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한 뒤에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우주의 질서와 완전함이 그동안 우리가 이 처지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한다는 것에 만족하고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전체의 번영이 우리에게조차 우리 자신처럼 하찮은 한 부분보다 나아 보여야 하므로, 우리 본성의 완전함이 놓여 있는 그 온전한 감정과 행위의 적정성과 곧음을 지키려 한다면 우리 처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 순간부터 우리 고름의 대상, 나아가 우리 바람의 대상까지 되어야 했다. 물론 우리 자신을 빼낼 어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것을 붙잡는 것이 우리 의무가 되었다. 우주의 질서가 더 이상 우리가 이 처지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지 않음이 분명하였고, 세상의 위대한 지휘자가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그토록 맑게 가리켜 보임으로써 그 처지를 떠나라고 우리에게 뚜렷이 부르고 있었다. 우리 친척과 우리 친구와 우리 나라의 역경도 사정이 같았다. 더 거룩한 어떤 의무도 어기지 않고 그들의 재난을 막거나 끝낼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리하는 것이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 의무였다. 행동의 적정성, 곧 유피테르가 우리 행위를 이끌도록 우리에게 준 그 규칙이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함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할 힘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면, 우리는 그때 이 일을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운 좋은 일로 여겨야 했다. 그것이 전체의 번영과 질서로 가장 많이 기울어 있음을 믿어도 좋았기 때문이고,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지혜롭고 공평하다면 무엇보다 바라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14는 말한다. “어떤 뜻에서 어떤 것은 우리 본성에 따른 것이라 말해지고 다른 것은 그것에 어긋난다고 말해지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른 모든 것에서 떼어 내어 따로 있는 것으로 여기는 그 뜻에서다. 그렇게 보면 늘 깨끗한 것이 발의 본성에 따른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몸의 나머지에서 떼어 낸 무엇이 아니라 발로서 여긴다면, 그것은 때로 흙을 밟아야 하고 때로 가시를 딛어야 하며 때로는 온 몸을 위하여 잘려 나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것이 이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발이 아니다. 우리 자신에 관해서도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너는 무엇인가? 사람이다. 너 자신을 떼어 내어 따로 있는 무엇으로 여긴다면, 늙도록 사는 것과 부유한 것과 건강한 것이 너의 본성에 맞는다. 그러나 너 자신을 사람으로, 또 전체의 한 부분으로 여긴다면, 그 전체를 위하여 너는 때로 병들어야 하고 때로 바닷길의 불편에 놓여야 하며 때로 궁핍해야 하고, 마침내는 아마도 제때보다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너는 무엇을 두고 불평하는가? 그렇게 함으로써, 발이 발이기를 그치는 것과 같이 너도 사람이기를 그친다는 것을 너는 모르는가?”15

우주의 질서에 이렇게 스스로를 맡기는 일,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전체의 이익과 견주어 저울에 올려질 때 온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 태도가 그 적정성을 끌어낼 수 있는 곳은, 내가 정의의 적정성이 그 위에 세워져 있음을 보이려 애써 온 그 원리 말고는 없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에는 그것이 이렇게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되는 데 기꺼이 따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 견주어 보아 그토록 업신여길 만한 것으로 보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맞서는 이익들을 남의 눈으로 바라볼 때다. 당사자 말고 모든 사람에게는 부분이 전체에 자리를 내주는 것보다 이성과 적정성에 더 맞는 일이 있을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이성에 맞는 것이 그의 이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 자신도 이 희생을 시인하고 그것이 이성에 들어맞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의 모든 정서는 이성과 적정성에 온전히 맞고, 이 다스리는 원리들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스스로 나서서 그것과 맞아떨어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사물이 이렇게 놓여 있는 데 따르는 것을 결코 거리끼지 않을 수 있었다.

4. 이 옛 체계들 말고도 덕이 적정성에, 곧 우리가 행동하게 되는 그 정서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나 대상에 걸맞은가에 있다고 하는 몇몇 근래의 체계가 있다. 덕을 사물들의 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데, 곧 어떤 행동을 어떤 사물이나 어떤 관계에 들이대는 데 있을 수 있는 걸맞음이나 어긋남에 따라 우리 행위를 다스리는 데 놓는 클라크16 박사의 체계, 덕을 사물의 진실에 따라, 그 적정한 본성과 본질에 따라 행동하는 데, 곧 사물을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 바대로 다루고 그것이 그렇지 않은 바대로 다루지 않는 데 놓는 울러스턴17 씨의 체계, 덕을 정서의 적정한 균형을 지키는 데, 그리고 어떠한 정념도 자기의 적정한 영역을 넘어가도록 허용하지 않는 데 놓는 섀프츠베리18 경의 체계는 모두 똑같은 하나의 근본 관념을 얼마간 정확하지 못하게 서술한 것이다.

그 체계들 하나하나에서 주어진, 또는 적어도 주어지도록 뜻하고 겨눈 덕에 관한 서술은 근래의 저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솜씨에서 그리 운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미치는 데까지는 의심할 나위 없이 아주 정당하다. 적정성 없이는 덕이 없고, 적정성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얼마간의 시인이 마땅히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서술은 온전하지 못하다. 적정성이 덕 있는 모든 행동에 없어서는 안 될 성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나 유일한 성분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을 베푸는 행동에는 그것이 시인뿐 아니라 보답까지 받아 마땅해 보이게 만드는 또 다른 성질이 들어 있다. 그 체계들 가운데 어느 것도 그런 행동에 마땅히 주어져야 할 것으로 보이는 그 더 높은 정도의 존중을, 또는 그런 행동이 자연히 불러일으키는 그 감정의 다름을 쉽게도 넉넉하게도 설명하지 못한다. 악덕에 관한 서술도 더 온전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부적정성이 악덕에 물든 모든 행동에 없어서는 안 될 성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나 유일한 성분인 것은 아니며, 아주 해롭지 않고 하찮은 행동에도 가장 높은 정도의 터무니없음과 부적정성이 있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에게 해로운 쪽으로 기우는 의도된 행동에는 그 부적정성 말고도 그것만의 어떤 특유한 성질이 있어서, 그 때문에 그것은 부인뿐 아니라 벌까지 받아 마땅해 보이고, 단지 싫어하는 마음의 대상이 아니라 분개와 복수의 대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체계들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가 그런 행동에 느끼는 그 더 높은 정도의 증오를 쉽게도 넉넉하게도 설명하지 못한다.

2장 덕이 신중에 있다고 하는 체계들에 대하여

덕이 신중에 있다고 하는 체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고 또 상당한 나머지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은 에피쿠로스19의 체계다. 그러나 그는 자기 철학의 주된 원리를 모두 자기보다 앞서간 이들 가운데 몇몇에게서, 특히 아리스티포스20에게서 빌려 왔다고 이야기된다. 다만 그의 적들이 이렇게 주장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원리를 적용하는 그의 솜씨는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21 몸의 쾌락과 아픔이 자연스러운 바람과 싫어함의 유일한 궁극적 대상이었다. 그것이 언제나 그 정념들의 자연스러운 대상이라는 것은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쾌락이 때로 피해야 할 것으로 보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쾌락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누림으로써 우리가 더 큰 어떤 쾌락을 잃거나 이 쾌락을 바랄 만한 정도보다 더 피해야 할 어떤 아픔에 우리 자신을 내놓게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픔이 때로 택할 만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픔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견딤으로써 우리가 더욱 큰 아픔을 피하거나 훨씬 더 무게 있는 어떤 쾌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의 아픔과 쾌락이 언제나 바람과 싫어함의 자연스러운 대상이라는 것은 넉넉히 분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또 그것이 그 정념들의 유일한 궁극적 대상이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분명하다고 그는 여겼다. 그에 따르면 그 밖에 바라거나 피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그 두 감각 가운데 어느 하나를 낳는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였다. 쾌락을 가져오는 쪽으로 기울어 있음이 권력과 재물을 바랄 만한 것으로 만든 것과 같이, 아픔을 낳는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 있음이 가난과 하찮음을 싫어함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명예와 명성이 값있게 여겨진 것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존중과 사랑이 쾌락을 가져오는 데나 아픔에서 우리를 지켜 내는 데나 가장 큰 무게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거꾸로 오욕과 나쁜 평판을 피해야 했던 것은 우리와 더불어 살던 이들의 미움과 업신여김과 분개가 모든 안전을 무너뜨리고 반드시 우리를 가장 큰 몸의 재앙에 내놓았기 때문이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마음의 모든 쾌락과 아픔은 끝내 몸의 쾌락과 아픔에서 끌어내어졌다. 마음은 몸이 지난날 누린 쾌락을 생각하고 앞으로 올 쾌락을 바랄 때 행복하였고, 몸이 앞서 견뎌 낸 아픔을 생각하고 그 뒤에 같거나 더 큰 아픔이 올까 두려워할 때 비참하였다.

그러나 마음의 쾌락과 아픔은 끝내 몸의 것에서 끌어내어진 것이면서도 그 본래의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몸은 지금 이 순간의 감각만을 느끼는 데 반해 마음은 지난 것과 올 것까지, 앞의 것은 기억으로 뒤의 것은 미리 맛봄으로 느꼈고, 따라서 훨씬 더 많이 겪고 훨씬 더 많이 누렸다. 우리가 가장 큰 몸의 아픔에 놓여 있을 때 거기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우리를 주로 괴롭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겪음이 아니라 지난 것에 대한 고뇌에 찬 기억이거나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더욱 끔찍한 두려움임을 언제나 알게 될 것이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각 순간의 아픔을 그 자체로, 앞서 오는 모든 것과 뒤따라 오는 모든 것에서 잘라 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눈여겨볼 값도 없는 하찮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몸이 겪는다고 말할 수 있는 전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장 큰 쾌락을 누릴 때에도, 몸의 감각 곧 지금 이 순간의 감각은 우리 행복의 작은 부분밖에 이루지 않으며 우리 누림은 주로 지난 것에 대한 즐거운 돌아봄이나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더욱 기쁜 미리 맛봄에서 일어나고, 마음이 언제나 그 즐김의 훨씬 가장 큰 몫을 보탠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행복과 비참이 주로 마음에 달려 있으므로, 우리 본성의 이 부분이 잘 놓여 있고 우리 생각과 의견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바와 같다면 우리 몸이 어떤 꼴로 움직여지는지는 그리 무게가 없었다. 큰 몸의 아픔에 놓여 있더라도 우리 이성과 판단이 자기의 우위를 지킨다면 우리는 여전히 상당한 몫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난 쾌락에 대한 기억과 앞으로 올 쾌락에 대한 바람으로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 있었고, 이런 처지에서조차 우리가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봄으로써 우리 아픔의 매서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곧 그것은 몸의 감각, 지금 이 순간의 아픔일 뿐이어서 그것만으로는 결코 매우 크지 않았다. 또 곧 그것이 이어질까 두려워하는 데서 우리가 겪는 고뇌는 무엇이든 마음이 지닌 어떤 의견의 결과이며, 그 의견은 더 정당한 감정으로 바로잡힐 수 있었다. 우리 아픔이 격렬하다면 아마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오래 이어진다면 아마도 견딜 만한 것이어서 편안한 틈이 여러 번 허용될 것이며, 어떻든 죽음은 우리를 건져 내려고 늘 가까이에 부르면 닿을 곳에 있고 그에 따르면 죽음은 아픔이든 쾌락이든 모든 감각을 끝내 버리므로 재앙으로 여겨질 수 없다고 헤아려 봄으로써 그러하였다. 우리가 있을 때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없으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적극적인 아픔의 실제 감각이 그 자체로 그토록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면, 쾌락의 감각은 더욱 바랄 것이 못 되었다. 본디 쾌락의 감각은 아픔의 감각보다 훨씬 덜 날카로웠다. 그러므로 뒤의 것이 잘 놓인 마음의 행복에서 그토록 아주 적은 것밖에 덜어 낼 수 없다면, 앞의 것은 거기에 무엇 하나 보태기도 어려웠다. 몸이 아픔에서 벗어나 있고 마음이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 있을 때, 몸의 쾌락이라는 감각이 그 위에 덧붙는 것은 그리 무게가 없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처지를 여러 가지로 만들 수는 있어도 이 처지의 행복을 늘린다고 적정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안온함 또는 평정에 인간 본성의 가장 완전한 상태, 곧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온전한 행복이 있었다. 자연스러운 바람의 이 큰 목적을 얻는 것이 모든 덕의 유일한 목표였고, 그에 따르면 덕은 그 자체를 위하여 바랄 만한 것이 아니라 이 처지를 가져오는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 바랄 만하였다.

예를 들어 신중은 이 철학에 따르면 모든 덕의 근원이자 원리이면서도 그 자체를 위하여 바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행동의 가장 먼 결과까지 늘 살피고 늘 주의를 기울이는 그 꼼꼼하고 수고로우며 빈틈없는 마음의 상태는 그 자체를 위하여 즐겁거나 마음에 드는 것일 수 없고, 가장 큰 좋음을 가져오고 가장 큰 재앙을 막는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일 수 있었다.

쾌락을 삼가는 것, 곧 누리려는 우리 타고난 정념을 잡고 붙들어 두는 것은 절제의 직분이었으나 그 자체를 위하여 바랄 만한 것일 수 없었다. 이 덕의 값은 모두 그 효용에서, 곧 앞으로 올 더 큰 것을 위하여 지금의 누림을 미루게 해 주거나 그 누림에서 따라올 수 있는 더 큰 아픔을 피하게 해 주는 데서 일어났다. 요컨대 절제는 쾌락에 관한 신중일 뿐이었다.

수고를 버티는 것, 아픔을 견디는 것, 위험이나 죽음에 스스로를 내놓는 것, 곧 굳셈이 흔히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그 처지는 분명 자연스러운 바람의 대상이 되는 정도가 더욱 낮았다. 그것은 오직 더 큰 재앙을 피하려고 골라진 것이었다. 우리는 가난이 주는 더 큰 수치와 아픔을 피하려고 수고를 받아들였고, 쾌락과 행복의 수단이며 도구인 우리 자유와 재산을 지키려고, 또는 그 안에 우리 자신의 안전이 반드시 들어 있는 우리 나라를 지키려고 위험과 죽음에 우리 자신을 내놓았다. 굳셈은 우리가 지금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로서 이 모든 일을 즐거이 하게 해 주었고, 실상으로는 아픔과 수고와 위험을 적정하게 값하고 더 큰 것을 피하려고 언제나 더 작은 것을 고르는 신중이며 좋은 판단이며 마음의 침착함일 뿐이었다.

정의도 사정이 같다. 남의 것에서 손을 거두는 일은 그 자체를 위하여 바랄 만한 것이 아니었고, 내 것을 내가 가지는 편이 그대가 가지는 편보다 그대에게 더 좋을 수야 없었다. 그러나 그대는 내게 속한 것이라면 무엇에서든 손을 거두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의 분개와 의분을 불러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대 마음의 안온함과 평정은 온전히 무너질 것이다. 그대는 사람들이 언제든 그대에게 내리려 벼르고 있다고 그대가 떠올릴 그 벌, 그리고 그대 자신의 상상 속에서는 어떠한 힘도 어떠한 재주도 어떠한 숨김도 그대를 지켜 주기에 결코 넉넉하지 않을 그 벌을 생각하며 두려움과 당혹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웃이나 친척이나 친구나 은인이나 윗사람이나 대등한 사람으로서 남들이 우리에게 놓일 수 있는 여러 관계에 따라 그들에게 적정하게 좋은 직분을 행하는 데 있는 저 다른 종류의 정의도 같은 이유로 권해진다. 이 서로 다른 모든 관계에서 적정하게 행동하는 일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존중과 사랑을 가져오고, 그러지 않는 일은 그들의 업신여김과 미움을 불러일으킨다. 앞의 것으로 우리는 자연히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평정, 곧 우리 모든 바람의 크고 궁극적인 목표를 지키게 되고 뒤의 것으로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위태롭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덕 가운데 가장 무게 있는 덕인 정의의 덕 전체는 우리 이웃에 관한 조심스럽고 신중한 행위일 뿐이다.

덕의 본성에 관한 에피쿠로스의 학설은 이러하다. 가장 사랑을 부르는 몸가짐을 지닌 사람으로 그려지는 이 철학자가 다음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뜻밖으로 보일 만하다. 곧 그 덕들이나 그에 맞서는 악덕들이 우리 몸의 편안함과 안전에 관하여 어느 쪽으로 기울어 있든 그것이 남에게 자연히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그 다른 모든 결과보다 훨씬 더 열렬한 바람이나 싫어함의 대상이 된다는 것, 사랑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과 존경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과 존중의 적정한 대상이 되는 것은 잘 놓인 모든 마음에게 사랑과 존경과 존중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모든 편안함과 안전보다 더 값있게 여겨진다는 것, 거꾸로 미움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과 업신여김을 부르는 사람이 되는 것과 의분의 적정한 대상이 되는 것은 미움이나 업신여김이나 의분에서 우리 몸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무섭다는 것, 그리고 따라서 앞의 성격을 바라는 우리 마음과 뒤의 성격을 싫어하는 우리 마음이 그 어느 것이든 몸에 낳을 만한 결과를 헤아리는 데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체계는 의심할 나위 없이 내가 세우려 애써 온 체계와 온전히 어긋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사물에 관한 이 설명이 어떤 상에서, 곧 자연의 어떤 특정한 관점이나 국면에서 그럴듯함을 끌어내는지를 알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자연의 창조자가 지혜롭게 꾸며 둔 바로, 덕은 예사로운 모든 경우에 이 삶에 관해서조차 참된 지혜이며 안전과 이로움을 둘 다 얻는 가장 확실하고 가장 빠른 수단이다. 우리가 벌인 일에서 우리가 잘되거나 어긋나는 것은 흔히 우리에 대하여 품어지는 좋거나 나쁜 의견에,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이 우리를 돕거나 막으려는 전반적인 성향에 매우 많이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의 이로운 판단을 얻고 이롭지 않은 판단을 피하는 가장 좋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쉽고 가장 빠른 길은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 자신을 앞의 판단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고 뒤의 판단의 적정한 대상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소크라테스22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는 좋은 음악가라는 명성을 바라는가? 그것을 얻는 유일하게 확실한 길은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군으로서든 정치가로서든 그대 나라를 섬길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가? 이 경우에도 가장 좋은 길은 실제로 전쟁과 통치의 기술과 경험을 얻어 참으로 장군이나 정치가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차분하고 절제 있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람으로 헤아려지고 싶다면, 이 명성을 얻는 가장 좋은 길은 차분하고 절제 있고 정의롭고 공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대가 참으로 그대 자신을 사랑을 부르고 존경을 부르는 사람, 곧 존중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대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사랑과 존경과 존중을 곧 얻지 못할까 두려워할 일은 없다.” 그러므로 덕을 실천하는 일이 대체로 그토록 이롭고 악덕을 실천하는 일이 그토록 우리 이익에 어긋나므로, 그 맞서는 기울어짐을 헤아려 보는 일은 의심할 나위 없이 앞의 것에 아름다움과 적정성을 더 찍어 주고 뒤의 것에 새로운 추함과 부적정성을 찍어 준다. 이리하여 절제와 아량과 정의와 선행은 그 자체의 적정한 성격 아래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높은 지혜이며 가장 참된 신중이라는 성격이 덧붙은 아래에서 시인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에 맞서는 악덕인 무절제와 소심과 불의와 악의 또는 치사한 이기심은 그 자체의 적정한 성격 아래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며 약함이라는 성격이 덧붙은 아래에서 부인된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덕에서 이 종류의 적정성만을 눈여겨본 듯하다. 그것은 남을 설득하여 행위를 반듯하게 하도록 애쓰는 이들에게 가장 떠오르기 쉬운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실천으로, 또 어쩌면 자기 좌우명으로도 덕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자기에게 큰 효과를 미칠 것 같지 않음을 뚜렷이 보일 때, 그들 행위의 어리석음과 그들 자신이 끝내 그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이 겪게 될 것 같은지를 그려 보이는 것 말고 어떻게 그들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모든 덕을 이 한 종류의 적정성으로 몰아 올림으로써 에피쿠로스는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어떤 성벽에, 그러나 특히 철학자들이 자기 재간을 펼쳐 보이는 큰 수단으로서 남다른 애착으로 기르기 쉬운 어떤 성벽에, 곧 모든 나타남을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원리로 설명하려는 성벽에 스스로를 내주었다. 그리고 그가 자연스러운 바람과 싫어함의 으뜸 대상을 모두 몸의 쾌락과 아픔으로 돌렸을 때 이 성벽에 더욱더 스스로를 내주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원자론 철학의 위대한 옹호자, 곧 물체의 모든 힘과 성질을 가장 뚜렷하고 낯익은 것, 곧 물질의 작은 부분들의 모양과 움직임과 배열에서 끌어내는 데 그토록 큰 즐거움을 느낀 그 사람은, 마찬가지로 마음의 모든 감정과 정념을 가장 뚜렷하고 낯익은 것에서 설명했을 때 비슷한 만족을 느꼈음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에피쿠로스의 체계는 덕이 자연스러운 바람의 으뜸 대상23을 얻기에 가장 걸맞은 꼴로 행동하는 데 있다고 한 점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제논의 체계와 뜻이 맞았다. 그것은 다른 두 점에서 그 모두와 달랐다. 첫째는 그 자연스러운 바람의 으뜸 대상에 관하여 그것이 제시한 설명에서 달랐고, 둘째는 덕의 뛰어남에 관하여, 곧 그 성질이 마땅히 존중되어야 하는 이유에 관하여 그것이 제시한 설명에서 달랐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바람의 으뜸 대상은 몸의 쾌락과 아픔에 있었고 그 밖의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반해 다른 세 철학자에 따르면 앎이라든가 우리 친척과 우리 친구와 우리 나라의 행복이라든가, 그 자체를 위하여 끝내 바랄 만한 다른 대상이 많았다.

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덕은 그 자체를 위하여 쫓기에 마땅한 것이 아니었고 그 자체가 자연스러운 욕구의 궁극적 대상 가운데 하나도 아니었으며, 아픔을 막고 편안함과 쾌락을 가져오는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에만 택할 만한 것이었다. 거꾸로 다른 세 사람의 의견에서 덕은 자연스러운 바람의 다른 으뜸 대상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만 바랄 만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그 모두보다 더 값있는 무엇으로서 바랄 만한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사람은 행동을 위하여 태어났으므로 그의 행복은 그가 겪는 감각의 마음에 듦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능동으로 힘써 행하는 일의 적정성에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3장 덕이 인애에 있다고 하는 체계들에 대하여

덕이 인애에 있다고 하는 체계는 내가 이미 설명한 체계들만큼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지만 그래도 매우 오랜 옛것이다. 그것은 아우구스투스24 시대 무렵과 그 뒤에 스스로를 절충학파라 부른 철학자들, 곧 주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의견을 따른다고 주장하였고 그 때문에 흔히 후기 플라톤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 철학자들 가운데 대다수의 학설이었던 듯하다.

이 저자들에 따르면 신의 본성에서는 인애 또는 사랑이 행동의 유일한 원리였고, 다른 모든 속성이 힘써 발휘되는 것을 이끌었다. 신의 지혜는 그의 선함이 일러 준 그 목적들을 이루어 낼 수단을 찾아내는 데 쓰였고, 그의 끝없는 힘은 그것을 이루어 내는 데 발휘되었다. 그러나 인애는 여전히 으뜸이며 지배하는 속성이었고, 다른 속성은 그것에 딸려 있었으며,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신의 작용이 지닌 뛰어남 전체 또는 도덕성 전체가 끝내 그것에서 끌어내어졌다. 사람의 마음이 지닌 완전함과 덕은 모두 신의 완전함을 얼마간 닮거나 그것에 얼마간 함께 참여하는 데, 따라서 신의 모든 행동을 움직인 그 인애와 사랑이라는 같은 원리로 채워지는 데 있었다. 이 동기에서 흘러나온 사람의 행동만이 참으로 칭찬받을 만하였고, 신이 보시는 앞에서 조금이라도 공로를 내세울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어울리는 대로 신의 행위를 본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끝없는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겸손하고 경건한 감탄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에 그 신적인 원리를 길러 우리 자신의 정서를 그의 거룩한 속성에 더 많이 닮게 하고 그리하여 그의 사랑과 존중의 더 적정한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자선과 사랑의 행동으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신과 직접 말을 나누고 서로 통하는 그 상태에 이르렀는데, 우리를 거기까지 들어 올리는 것이 이 철학의 큰 목표였다.

이 체계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옛 교부 여러 사람에게 크게 존중되었고, 종교개혁 뒤에는 경건과 학식에서 가장 뛰어나고 몸가짐이 가장 사랑을 부르는 몇몇 신학자가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특히 랠프 커드워스 박사와 헨리 모어 박사, 그리고 케임브리지의 존 스미스 씨25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옛사람이든 근래의 사람이든 이 체계를 받든 모든 이 가운데 고인이 된 허치슨26 박사가 의심할 나위 없이 견줄 것 없이 가장 날카롭고 가장 또렷하고 가장 철학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가장 무게 있는 점으로는 가장 차분하고 가장 사려 깊었다.

덕이 인애에 있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여러 나타남이 받쳐 주는 생각이다. 적정한 인애는 모든 정서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며, 이중의 동감으로 우리에게 권해지고, 그 기울어짐이 반드시 선을 베푸는 쪽이므로 감사와 상의 적정한 대상이 되며, 이 모든 까닭으로 우리 자연스러운 감정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 뛰어난 공로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는 것을 이미 말한 바 있다. 또 인애의 약함조차 우리에게 그리 언짢지 않은 데 반해 다른 모든 정념의 약함은 언제나 몹시 역겹다는 것도 말한 바 있다. 지나친 악의나 지나친 이기심이나 지나친 분개를 몹시 싫어하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 그러나 치우친 우정에 아주 지나치게 스스로를 내주는 것조차 그만큼 거스르지는 않는다. 적정성을 조금도 헤아리거나 마음에 두지 않고 스스로를 발휘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끄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인애로운 정념뿐이다. 이 행위로 자기가 비난의 적정한 대상이 되는지 시인의 적정한 대상이 되는지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좋은 직분을 계속 행하는 그저 본능적인 선의에조차 마음에 드는 무언가가 있다. 다른 정념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적정성의 느낌에게 버려지는 순간, 적정성의 느낌이 그것과 함께 가지 않는 순간, 그것은 마음에 드는 것이기를 그친다.

인애가 그것에서 흘러나오는 행동에 다른 무엇보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베푸는 것과 같이, 인애의 결여, 나아가 그에 맞서는 기울어짐은 그런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면 무엇에든 남다른 추함을 옮겨 준다. 해로운 행동이 흔히 벌을 받을 만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이웃의 행복에 넉넉한 주의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는 것 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 말고도 허치슨 박사는27 인애로운 정서에서 흘러나왔다고 여겨지는 어떤 행동에서 다른 어떤 동기가 드러날 때마다 이 행동의 공로에 대한 우리 느낌은 그 동기가 그 행동을 움직였다고 여겨지는 만큼 딱 그만큼 깎인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감사에서 흘러나왔다고 여겨진 행동이 어떤 새로운 호의를 바라는 데서 일어난 것으로 드러난다면, 또는 공공심에서 흘러나왔다고 받아들여진 것이 돈으로 받을 상을 바라는 데서 비롯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런 드러남은 이 두 행동 가운데 어느 쪽에서든 공로나 칭찬받을 만함이라는 생각을 온전히 무너뜨려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동기가 섞이는 일은 값싼 쇠붙이가 섞이는 것과 같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떤 행동에 속했을 공로를 깎거나 아주 없애 버리므로, 덕은 순수하고 사심 없는 인애에만 있을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고 그는 여겼다.

거꾸로 흔히 이기적인 동기에서 흘러나왔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인애로운 동기에서 일어난 것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그 공로에 대한 우리 느낌을 크게 높인다. 어떤 사람이 친구로서 좋은 직분을 행하고 자기 은인에게 적정하게 갚으려는 뜻 말고는 다른 어떤 뜻도 없이 자기 재산을 늘리려 애썼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그를 더욱더 사랑하고 존중할 뿐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적은 어떤 행동에 덕의 성격을 찍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애뿐이라는 결론을 더욱더 굳혀 주는 듯하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여긴 바로 덕에 관한 이 설명이 정당함을 분명히 증명해 주는 것은, 행위의 곧음에 관한 결의론자들의 모든 다툼에서 공공의 좋음이 그들이 끊임없이 돌아가 기댄 척도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류의 행복을 늘리는 쪽으로 기우는 것이면 무엇이든 옳고 칭찬받을 만하며 덕이 있고 그 반대되는 것은 틀렸으며 비난받을 만하고 악덕에 물렸다는 것을 두루 인정하고 있었다고 그는 지적하였다. 수동적 복종과 저항권에 관한 근래의 논쟁28에서 사리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된 유일한 점은, 특권이 침범되었을 때 두루 복종하는 편이 한때의 반란보다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인지 여부였다. 대체로 보아 인류의 행복으로 가장 많이 기우는 것이 도덕에서도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는지는 단 한 번도 문제로 삼아지지 않았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러므로 인애가 어떤 행동에 덕의 성격을 베풀 수 있는 유일한 동기였으므로, 어떤 행동에서 드러난 인애가 클수록 그것에 속할 칭찬도 커야 했다.

큰 공동체의 행복을 겨눈 행동은 더 작은 체계의 행복만을 겨눈 행동보다 더 널리 퍼진 인애를 보여 주었으므로, 그와 마찬가지로 그 몫에 맞추어 더 덕이 있기도 했다. 그러므로 모든 정서 가운데 가장 덕이 있는 것은 지성을 지닌 모든 존재의 행복을 자기 대상으로 껴안은 정서였다. 거꾸로 덕의 성격이 어느 점에서든 속할 수 있는 정서 가운데 가장 덕이 적은 것은 아들이나 형제나 친구 같은 한 개인의 행복보다 더 멀리는 겨누지 않은 정서였다.

우리 모든 행동을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큰 좋음을 늘리는 데로 이끄는 데, 낮은 모든 정서를 인류의 전반적인 행복에 대한 바람 아래 두는 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여럿 가운데 하나로만 여겨 자기 번영을 전체의 번영과 어긋나지 않거나 그것에 이바지하는 데까지만 쫓는 데 덕의 완전함이 있었다.

자애심은 어느 정도로든 어느 방향으로든 결코 덕이 있을 수 없는 원리였다. 그것은 전반적인 좋음을 가로막을 때마다 악덕에 물렸다. 그것이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행복을 돌보게 만드는 것 말고 다른 결과를 낳지 않을 때 그것은 그저 해가 없을 뿐이었고, 아무런 칭찬도 받을 만하지 않았지만 아무런 비난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기 이익에서 나오는 어떤 강한 동기가 있었음에도 이루어진 인애로운 행동은 그 때문에 더욱 덕이 있었다. 그것은 인애라는 원리의 힘과 기운을 보여 주었다.

허치슨 박사는29 자애심이 어떤 경우에도 덕 있는 행동의 동기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르면 자기 시인의 즐거움을 헤아리는 것, 곧 우리 자신의 양심이 보내는 마음 편한 갈채를 헤아리는 것조차 인애로운 행동의 공로를 깎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이기적인 동기여서, 그것이 어떤 행동에 이바지하는 한 사람의 행위에 덕의 성격을 찍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인 그 순수하고 사심 없는 인애가 약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예사로운 판단에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보내는 시인을 이렇게 헤아리는 일이 어떤 행동의 덕을 어느 점에서든 깎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는커녕, 오히려 덕이 있다는 이름을 받을 만한 유일한 동기로 보인다.

사랑을 부르는 이 체계가 덕의 본성에 관하여 제시한 설명은 이러하다. 이 체계는 모든 정서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사람의 가슴에서 기르고 받쳐 주는 남다른 기울어짐을 지니고 있으며, 자애심의 불의를 막을 뿐 아니라 그 원리에 움직여진 이들에게 그것이 결코 어떠한 명예도 되비쳐 줄 수 없는 것으로 그려 내어 얼마만큼은 그 원리를 아주 물리치게 하는 기울어짐까지 지니고 있다.

내가 이미 설명한 다른 체계 가운데 어떤 것이 선행이라는 으뜸 덕의 남다른 뛰어남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넉넉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이 체계는 그 반대의 흠, 곧 신중과 조심과 빈틈없음과 절제와 한결같음과 굳건함이라는 낮은 덕에 대한 우리 시인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넉넉히 설명하지 못하는 흠을 지닌 듯하다. 우리 정서가 바라보는 데와 겨누는 데, 그리고 그것이 낳는 쪽으로 기우는 선을 베푸는 결과와 해를 끼치는 결과가 이 체계에서 조금이라도 눈여겨보아지는 유일한 성질이다. 정서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에 대하여 지니는 적정성과 부적정성, 걸맞음과 걸맞지 않음은 아주 무시되어 있다.

우리 자신의 사적 행복과 이익을 헤아리는 것도 여러 경우에 매우 칭찬받을 만한 행동의 원리로 보인다. 절약과 부지런함과 사려와 주의와 생각을 쏟는 습성은 대체로 자기 이익에서 나오는 동기로 길러진다고 여겨지면서도 동시에 매우 칭찬받을 만한 성질, 곧 모든 사람의 존중과 시인을 받을 만한 성질로 받아들여진다. 이기적인 동기가 섞이는 일이 인애로운 정서에서 일어나야 할 행동의 아름다움을 흔히 흐리는 듯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자애심이 결코 덕 있는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이 특정한 경우에 인애라는 원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만큼의 힘을 지니지 못하고 그 대상에 아주 걸맞지 않아 보인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 성격은 분명히 온전하지 못하고 대체로 보아 칭찬보다 비난을 받을 만해 보인다. 반면에 자애심만으로도 우리를 떠밀기에 넉넉해야 할 행동에 인애로운 동기가 섞이는 일은 그 적정성이나 그것을 행한 사람의 덕에 대한 우리 느낌을 깎기가 그만큼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이기심이 모자란다고 의심할 마음이 선뜻 들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인간 본성의 약한 쪽이 아니며, 우리가 의심하기 쉬운 결점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과 친구를 헤아리는 마음이 없다면 자기 보존만으로도 그를 떠밀기에 넉넉해야 할 만큼 자기 건강과 자기 목숨과 자기 재산을 적정하게 돌보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가 참으로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결점일 것이다. 다만 그것은 사람을 업신여김이나 미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의 대상이 되게 만드는 사랑을 부르는 결점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그의 성격이 지닌 품위와 존경을 부르는 성질을 얼마간 깎아내린다. 조심성 없음과 절약의 결여는 두루 부인되는데, 그것이 인애의 결여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의 대상에 두어야 할 적정한 주의의 결여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결의론자들이 사람의 행위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자주 정하는 데 쓰는 척도가 그 행위가 사회의 복리나 어지러움으로 기우는 방향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사회의 복리를 헤아리는 것이 행동의 유일한 덕 있는 동기여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맞섬이 있을 때 그것이 다른 모든 동기에 맞서 저울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만이 따라 나온다.

인애는 아마도 신에게는 행동의 유일한 원리일 수 있으며, 그렇다고 우리를 설득하는 쪽으로 기우는, 그럴듯하지 않지 않은 논변이 여러 가지 있다. 밖의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자기 안에서 행복이 온전한, 홀로 서 있으며 모든 점에서 완전한 존재가 어떤 다른 동기에서 행동할 수 있는지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신의 경우가 어떻든 사람처럼 온전하지 못한 피조물, 곧 그 존재를 지탱하는 데 밖의 것이 그토록 많이 필요한 피조물은 흔히 다른 여러 동기에서 행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 존재의 본성 자체로 보아 마땅히 우리 행위를 자주 움직여야 할 그 정서가 어떤 경우에도 덕이 있어 보일 수 없거나 누구에게서도 존중과 기림을 받을 만하지 않다면, 인간 본성의 처지는 남다르게 가혹할 것이다.

덕을 적정성에 놓는 체계, 그것을 신중에 놓는 체계, 그리고 그것이 인애에 있다고 하는 체계, 이 세 체계가 덕의 본성에 관하여 제시된 주된 설명이다. 덕에 관한 다른 모든 서술은 그것이 아무리 달라 보인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어느 하나로 쉽게 줄일 수 있다.

덕을 신의 뜻에 따르는 데 놓는 체계는 덕이 신중에 있다고 하는 체계에 넣어도 좋고 덕이 적정성에 있다고 하는 체계에 넣어도 좋다. 우리가 왜 신의 뜻에 따라야 하는가를 물을 때, 우리가 그에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심하여 묻는다면 그것은 가장 높은 정도로 불경하고 터무니없는 물음이 되겠으나, 이 물음은 서로 다른 두 대답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가 신의 뜻에 따라야 하는 것은 그가 끝없는 힘을 지닌 존재여서 우리가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영원히 상을 주고 우리가 그러지 않으면 우리에게 영원히 벌을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어떤 종류의 상과 벌을 헤아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피조물이 자기 창조자에게 따르는 것, 곧 한계 있고 온전하지 못한 존재가 끝없고 헤아릴 수 없는 완전함을 지닌 존재에게 스스로를 맡기는 것에는 들어맞음과 걸맞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두 대답 가운데 어느 하나 말고 이 물음에 다른 어떤 대답이 주어질 수 있다고 떠올리기는 불가능하다. 첫째 대답이 적정한 것이라면 덕은 신중에, 곧 우리 자신의 궁극의 이익과 행복을 적정하게 추구하는 데 있다. 우리가 신의 뜻에 따를 의무를 지는 것이 바로 이 까닭이기 때문이다. 둘째 대답이 적정한 것이라면 덕은 적정성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따를 의무를 지는 근거는 겸손과 복종의 감정이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의 뛰어남에 걸맞거나 들어맞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덕을 효용에 놓는 체계도 덕이 적정성에 있다고 하는 체계와 맞아떨어진다. 이 체계에 따르면 그 사람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마음에 들거나 이로운 마음의 성질은 모두 덕이 있는 것으로 시인되고 그 반대되는 것은 악덕에 물린 것으로 부인된다. 그러나 어떤 정서가 마음에 드는 정도나 그 효용은 그 정서가 어느 정도까지 머물러 있도록 허용되는가에 달려 있다. 모든 정서는 얼마간의 절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쓸모가 있고, 모든 정서는 적정한 한계를 넘어설 때 이롭지 않다. 그러므로 이 체계에 따르면 덕은 어느 한 정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서의 적정한 정도에 있다. 이 체계와 내가 세우려 애써 온 체계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이 체계가 이 적정한 정도를 재는 자연스럽고 본래적인 척도로 동감이나 관찰자의 대응하는 정서가 아니라 효용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4장 방종의 체계에 대하여

내가 여기까지 설명한 모든 체계는 악덕과 덕이 무엇에 있든 그 둘 사이에 실제의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고 상정한다. 어떤 정서의 적정성과 부적정성 사이에, 인애와 다른 어떤 행동의 원리 사이에, 참된 신중과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나 서두르는 경솔 사이에는 실제의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또 그 모두는 대체로 칭찬받을 만한 성향을 북돋우고 비난받을 만한 성향을 물리치는 데 이바지한다.

그 가운데 어떤 체계에 관해서는 그것이 얼마만큼은 정서의 균형을 깨뜨리고 마음이 몇몇 행동의 원리에 마땅히 기울어야 할 몫을 넘어서서 남다르게 기울도록 만드는 쪽으로 기운다는 말이 어쩌면 맞을 것이다. 덕을 적정성에 놓는 옛 체계들은 주로 크고 경외를 일으키며 존경을 부르는 덕, 곧 자기 다스림과 자기 통제의 덕, 다시 말해 굳셈과 아량과 운에 매이지 않음과 아픔이나 가난이나 유배나 죽음 같은 밖에서 오는 모든 일을 업신여기는 것을 권하는 듯하다. 행위의 가장 고귀한 적정성이 펼쳐지는 것은 이렇게 크게 힘써 행하는 데서다. 부드럽고 사랑을 부르며 온화한 덕, 곧 너그러운 인간애의 모든 덕은 그에 견주어 거의 힘주어 말해지지 않으며, 거꾸로 특히 스토아학파에게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가슴에 품지 않는 것이 마땅한 한갓 약함으로 흔히 여겨진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인애의 체계는 그 더 온순한 덕을 모두 가장 높은 정도로 기르고 북돋우면서도 마음의 더 경외를 일으키고 더 존경을 부르는 성질은 아주 소홀히 하는 듯하다. 그것은 그 성질에 덕이라는 이름조차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을 도덕적 능력이라 부르며, 적정하게 덕이라 이름 지어진 것에 마땅히 주어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존중과 시인을 받을 만하지 않은 성질로 다룬다. 오직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겨누는 행동의 원리는 모두, 그럴 수 있다면, 더욱 나쁘게 다룬다. 그 원리는 그 자체의 공로를 지니기는커녕, 인애와 함께 작용할 때 인애의 공로를 깎는다고 그 체계는 주장한다. 그리고 신중이 사적 이익을 늘리는 데만 쓰일 때에는 결코 덕으로 떠올려질 수조차 없다고 그 체계는 단언한다.

또 덕이 신중에만 있다고 하는 체계는 조심과 경계와 차분함과 사려 깊은 절도의 습성을 가장 높이 북돋우면서도, 사랑을 부르는 덕과 존경을 부르는 덕을 똑같이 끌어내려 앞의 것에서는 그 아름다움을 모두 벗겨 내고 뒤의 것에서는 그 웅대함을 모두 벗겨 내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흠이 있음에도 그 세 체계 하나하나의 전반적인 기울어짐은 사람의 마음이 지닌 가장 좋고 가장 칭찬받을 만한 습성을 북돋우는 쪽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대체로, 또는 어떤 철학의 규칙에 따라 살겠다고 주장하는 그 소수만이라도 그 가운데 어느 하나의 가르침으로 자기 행위를 다스린다면 사회에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 하나하나에서 값있으면서도 그것만의 것인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가르침과 권함으로 마음에 굳셈과 아량을 불어넣는 것이 가능하다면, 적정성에 관한 옛 체계들이 이 일을 하기에 넉넉해 보일 것이다. 또는 같은 수단으로 마음을 누그러뜨려 인간애에 이르게 하고 우리와 더불어 사는 이들을 향한 친절과 두루 미치는 사랑의 정서를 깨우는 것이 가능하다면, 인애의 체계가 우리에게 내놓는 그림 가운데 몇몇이 이 결과를 낳을 수 있어 보일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체계는 세 체계 가운데 의심할 나위 없이 가장 못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서 사랑을 부르는 덕과 존경을 부르는 덕을 실천하는 일이 이 삶에서조차 우리 자신의 이익과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안전과 고요함에 얼마나 많이 이바지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행복을 편안함과 안전을 얻는 데 놓았으므로, 덕이 그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을 얻는 가장 좋고 가장 확실한 수단일 뿐 아니라 유일한 수단임을 보이려 남다르게 힘썼다. 덕이 우리 안의 평정과 마음의 평화에 미치는 좋은 결과는 다른 철학자들이 주로 기려 온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 대목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도 주로 그 사랑을 부르는 성질이 우리 밖의 번영과 안전에 미치는 영향을 힘주어 말하였다. 그의 글이 옛 세상에서 서로 다른 모든 철학 진영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이 읽힌 것은 이 까닭이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체계를 크게 적대한 키케로30가 덕만으로도 행복을 지키기에 넉넉하다는 자기의 가장 마음에 드는 증거를 빌려 오는 곳이 바로 그다. 세네카31는 에피쿠로스의 학파에 가장 맞서는 학파인 스토아학파의 사람이면서도 다른 누구보다 이 철학자를 더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악덕과 덕의 구별을 아주 없애 버리는 듯하고 그 때문에 그 기울어짐이 온통 해로운 다른 몇몇 체계가 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라로슈푸코32 공작과 맨더빌33 박사의 체계다. 이 두 저자의 생각은 거의 모든 점에서 틀린 것이지만, 인간 본성에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면 언뜻 보아 그들 편을 드는 듯한 나타남이 몇 가지 있다. 이 나타남은 먼저 라로슈푸코 공작의 우아함과 섬세한 정확함으로 가볍게 그려졌고 뒤에는 맨더빌 박사의 생생하고 재미있으면서도 거칠고 투박한 말솜씨로 더 넉넉하게 그려졌는데, 그리하여 그들의 학설에는 참됨과 그럴듯함의 기운이 씌워져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속이기가 매우 쉽게 되었다.

두 저자 가운데 더 조리 있는 맨더빌 박사는 적정성의 느낌에서, 곧 기림을 받을 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것을 헤아리는 데서 행해지는 것이면 무엇이든 칭찬과 기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곧 그가 부르는 대로 허영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여긴다. 그는 사람이 본디 남의 행복보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훨씬 더 이해가 걸려 있으며, 마음속에서 남의 번영을 자기 것보다 참으로 앞세우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가 그러는 듯이 보일 때마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속이고 있고 그때에도 다른 모든 때와 똑같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믿어도 좋다. 그의 다른 이기적인 정념 가운데 허영은 가장 강한 것에 들며, 그는 언제나 주위 사람의 갈채에 쉽게 추어올려지고 크게 기뻐한다. 그가 자기 이익을 자기 동료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하는 듯이 보일 때, 그는 이 행위가 그들의 자애심에 크게 마음에 들 것이며 그들이 그에게 가장 터무니없는 칭찬을 퍼부어 자기 만족을 나타내는 일을 거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의 의견으로는 그가 이것에서 기대하는 즐거움이 그것을 얻으려고 내놓는 이익보다 저울에서 무겁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 그의 행위는 실상으로는 다른 어떤 경우와 똑같이 이기적이며 똑같이 비천한 동기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추어올려지고 또 그것이 온전히 사심 없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스스로를 추어올린다. 이렇게 상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신의 눈에서도 남의 눈에서도 어떠한 기림도 받을 만해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모든 공공심, 곧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앞세우는 일은 모두 사람들을 속이는 한갓 사기이며, 그토록 많이 자랑되고 사람들 사이에 그토록 많은 겨룸의 계기가 되는 그 사람의 덕은 아첨이 자부심에게서 낳은 자식일 뿐이다.

가장 도량이 크고 가장 공공심 있는 행동이 어떤 뜻에서 자애심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여겨질 수 없는지는 지금은 검토하지 않겠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를 결정하는 일은 덕의 실재성을 세우는 데 아무런 무게가 없다. 자애심이 자주 덕 있는 행동의 동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명예롭고 고귀한 일을 하려는 바람, 곧 우리 자신을 존중과 시인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려는 바람을 적정하게 허영이라 부를 수는 없다는 것만을 보이려 애쓰겠다. 근거 있는 명성과 평판을 사랑하는 마음, 곧 참으로 값할 만한 것으로 존중을 얻으려는 바람조차 그 이름을 받을 만하지 않다. 앞의 것은 덕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인간 본성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좋은 정념이다. 뒤의 것은 참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의심할 나위 없이 앞의 것보다 낮은 정념이지만 품위에서 그 바로 뒤에 오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로도 칭찬받을 만하지 않은 성질이나 자기가 칭찬받기를 기대하는 그만한 정도로는 칭찬받을 만하지 않은 성질로 칭찬을 바라는 사람, 곧 자기 성격을 옷차림과 거느린 것들이라는 하찮은 꾸밈이나 그와 똑같이 하찮은 예사로운 처신의 재주 위에 세우는 사람이 허영의 잘못을 지닌다. 참으로 칭찬받을 만한 것이면서도 자기에게 속하지 않음을 자기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칭찬을 바라는 사람이 허영의 잘못을 지닌다. 자기에게 아무런 자격도 없는 대단한 사람의 티를 내는 속 빈 멋쟁이, 결코 일어난 적 없는 모험의 공로를 제 것으로 삼는 어리석은 거짓말쟁이, 자기에게 아무런 자격도 없는 것의 저자로 자기를 내세우는 미련한 표절꾼이 바로 이 정념으로 꾸짖어질 만하다. 또 존중과 시인의 말 없는 감정에 흡족해하지 않는 사람, 곧 그 감정 자체보다 그것이 요란하게 표현되고 환호로 나타나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한 사람, 자기 칭찬이 자기 귓가에 울릴 때 말고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 사람, 가장 애타는 끈덕짐으로 존경의 모든 밖의 표시를 구하는 사람, 직함과 치레말과 찾아와 주는 것과 시중받는 것과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삼가 받드는 티와 주의로 눈여겨보아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허영의 잘못을 지닌다고 말해진다. 이 하찮은 정념은 앞의 두 정념 어느 것과도 아주 다르며, 앞의 둘이 사람들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가장 큰 이들의 정념인 것과 같이 이것은 가장 낮고 가장 작은 이들의 정념이다.

그러나 이 세 정념, 곧 우리 자신을 명예와 존중의 적정한 대상으로 만들려는 바람 또는 명예롭고 값할 만한 것이 되려는 바람, 그 감정을 참으로 받을 만함으로써 명예와 존중을 얻으려는 바람, 그리고 어떻게든 칭찬을 얻으려는 하찮은 바람은 크게 다르고, 앞의 둘은 언제나 시인되는 데 반해 뒤의 것은 업신여김을 받는 일을 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는 어떤 멀찍한 친연이 있다. 그리고 이 생생한 저자의 재미있고 즐거운 말솜씨가 그것을 과장하여, 그가 자기 독자를 속일 수 있게 만들었다. 허영과 참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는 친연이 있는데, 이 두 정념이 모두 존중과 시인을 얻는 것을 겨누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점에서 다르다. 곧 한쪽은 정당하고 이치에 맞고 공평한 정념인 데 반해 다른 쪽은 부당하고 터무니없고 웃음거리가 되는 정념이다. 참으로 값할 만한 것으로 존중을 바라는 사람은 자기가 정당하게 자격을 지닌 것, 그리고 얼마간의 상해 없이는 그에게 거절될 수 없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거꾸로 그것을 다른 어떤 조건으로 바라는 사람은 자기에게 아무런 정당한 자격이 없는 것을 요구한다. 앞의 사람은 쉽게 만족하고, 우리가 자기를 넉넉히 존중하지 않는다고 시샘하거나 의심하기 쉽지 않으며, 우리가 그를 헤아린다는 밖의 표시를 많이 받는 일에 좀처럼 애태우지 않는다. 거꾸로 뒤의 사람은 결코 만족될 수 없고, 우리가 자기를 자기가 바라는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는 시샘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 자기가 받을 만한 것보다 더 많이 바란다는 것을 스스로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갖추는 데서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을 치명적인 모욕으로, 또 가장 굳게 마음먹은 업신여김의 표현으로 여긴다. 그는 가만있지 못하고 참지 못하며 우리가 자기에 대한 모든 존경을 잃어버렸을까 늘 두려워하고, 이 까닭으로 존중의 새로운 표현을 얻으려 언제나 애태우며, 끊임없이 시중을 받고 추어올려지는 것 말고는 기분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명예롭고 값할 만한 것이 되려는 바람과 명예와 존중을 바라는 마음 사이에도, 곧 덕을 사랑하는 마음과 참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도 친연이 있다. 그 둘은 명예롭고 고귀한 것이 참으로 되는 것을 둘 다 겨눈다는 점에서만 서로 닮은 것이 아니라, 참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정하게 허영이라 불리는 것과 닮은 그 점, 곧 남의 감정을 얼마간 참조한다는 점에서까지 서로 닮았다. 덕을 그 자체를 위하여 바라고 사람들이 자기에 대하여 실제로 지니는 의견이 무엇인지는 가장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가장 큰 아량을 지닌 사람도, 그 의견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며, 그리고 자기가 명예를 얻지도 갈채를 받지도 못할지라도 여전히 명예와 갈채의 적정한 대상이며 사람들이 머리가 식고 공정하고 스스로 한결같으며 자기 행위의 동기와 사정을 적정하게 알게 된다면 자기에게 명예를 주고 갈채를 보내는 일을 거르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알고 있음으로 여전히 기뻐한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실제로 품어지는 의견은 업신여기지만, 자기에 대하여 마땅히 품어져야 할 의견은 가장 값있게 여긴다. 자기가 그 명예로운 감정을 받을 만하다고 스스로 여길 수 있기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 성격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지니든 자기가 그들의 처지에 스스로를 놓고 그들의 의견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마땅히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헤아릴 때 자기 자신이 언제나 그것에 대하여 가장 높은 생각을 지닐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행위의 크고 높은 동기였다. 그러므로 덕을 사랑하는 마음에도 남의 의견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이성과 적정성에서 마땅히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얼마간의 참조가 있으므로, 이 점에서까지 그것과 참된 영광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는 얼마간의 친연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둘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도 있다. 오직 무엇이 옳고 무엇이 하기에 알맞은지를 헤아리는 데서, 곧 무엇이 존중과 시인의 적정한 대상인지를 헤아리는 데서 행동하는 사람은 그 감정이 자기에게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 본성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숭고하고 신을 닮은 동기에서 행동한다. 다른 한편으로 시인을 받을 만하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그것을 얻으려 애태우는 사람은 그도 대체로는 칭찬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그의 동기에는 사람의 약함이 더 많이 섞여 있다. 그는 사람들의 무지와 불의로 낯이 깎일 위험에 놓이며, 그의 행복은 자기 맞수의 시샘과 세상의 어리석음에 내놓여 있다. 거꾸로 앞의 사람의 행복은 운에서도 자기와 더불어 사는 이들의 변덕에서도 아주 안전하고 아주 매여 있지 않다. 사람들의 무지가 자기에게 던질 수 있는 업신여김과 미움을 그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며, 그것으로 낯이 조금도 깎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의 성격과 행위에 대한 그릇된 생각에서 그를 업신여기고 미워한다. 그들이 그를 더 잘 안다면 그를 존중하고 사랑할 것이다. 적정하게 말하면 그들이 미워하고 업신여기는 것은 그가 아니라 그들이 그로 잘못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다. 가면 무도회에서 우리 원수의 옷차림으로 만나게 된 우리 친구는, 그 가장 아래에서 우리가 그에게 의분을 터뜨린다면 낯이 깎이기보다 더 즐거워할 것이다. 참된 아량을 지닌 사람이 부당한 책망에 놓였을 때 지니는 감정이 이러하다. 그러나 인간 본성이 이만한 정도의 굳건함에 이르는 일은 좀처럼 없다.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약하고 가장 쓸모없는 자들 말고는 거짓 영광에 크게 기뻐하지 않으나, 이상하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일로 거짓 오욕은 흔히 가장 단단히 마음먹은 듯 보이는 이들의 낯을 깎을 수 있다.

맨더빌 박사는 흔히 덕이 있다고 헤아려지는 그 모든 행동의 근원으로 허영이라는 하찮은 동기를 그려 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의 덕이 다른 여러 점에서 온전하지 못함을 가리켜 보이려 애쓴다. 그가 주장하기로 사람의 덕은 어느 경우에나 자기가 주장하는 그 온전한 자기 부정에 미치지 못하며, 정념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흔히 정념에 숨어서 스스로를 내주는 것일 뿐이다. 쾌락에 관하여 우리가 스스로를 거두는 일이 가장 금욕적인 끊음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그는 그것을 거친 사치와 감각의 탐닉으로 다룬다. 그에 따르면 인간 본성을 지탱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것이면 무엇이든 사치이므로, 깨끗한 셔츠를 입는 데나 편리한 집에 사는 데에도 악덕이 있다. 가장 적법한 맺음에서 성으로 기울어짐에 스스로를 내주는 일을 그는 그 정념을 가장 해롭게 충족시키는 일과 똑같은 감각의 탐닉으로 여기며, 그토록 값싸게 실천될 수 있는 그 절제와 그 정결을 비웃는다. 그의 추론이 지닌 재간 있는 궤변은 다른 여러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말이 여러 뜻을 지닌다는 데 가려져 있다. 우리 정념 가운데에는 언짢고 거스르는 정도를 나타내는 이름 말고는 다른 이름이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관찰자는 그 정념을 다른 어떤 정도에서보다 이 정도에서 눈여겨보기 쉽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감정에 부딪칠 때, 그것이 자기에게 얼마간의 반감과 불편함을 줄 때 그는 반드시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고, 그로부터 자연히 그것에 이름을 붙이게 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의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와 어울릴 때 그는 그것을 아주 지나쳐 버리기가 매우 쉽고, 그것에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거나, 어떤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정념이 그렇게 눌리고 붙들린 뒤에 여전히 머물러 있도록 허용되는 정도를 나타내는 이름이라기보다 그 정념이 눌리고 붙들려 있음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리하여 쾌락을 사랑하는 마음과 성을 사랑하는 마음34이라는 예사로운 이름은 그 정념의 악덕에 물렸고 거스르는 정도를 가리킨다. 다른 한편으로 절제와 정결이라는 낱말은 그 정념이 여전히 머물러 있도록 허용되는 정도를 가리킨다기보다 그것이 붙들리고 눌려 있음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가 그 정념이 여전히 얼마간 머물러 있음을 보일 수 있을 때, 그는 자기가 절제와 정결이라는 덕의 실재성을 온전히 무너뜨렸고 그것이 사람들의 주의 없음과 순박함을 속이는 것일 뿐임을 보였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덕은 자기가 다스리려 하는 정념의 대상에 온전히 무감각해질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 정념의 격렬함을 개인을 해치지 않고 사회를 어지럽히지도 거스르지도 않을 만큼까지 붙들어 두는 것을 겨눌 뿐이다.

어느 정도로든 어느 방향으로든 악덕에 물린 정념이면 그 정념을 온통 악덕에 물린 것으로 그려 내는 것이 맨더빌 박사 책35의 큰 오류다. 이리하여 그는 남의 감정이 무엇인가에든 마땅히 무엇이어야 하는가에든 얼마간 참조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허영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가 자기가 좋아하는 결론, 곧 사적인 악덕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결론을 세우는 것은 이 궤변을 통해서다. 장려함을 사랑하는 마음, 우아한 기예와 사람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것들에 대한 심미안, 옷차림이나 가구나 거느린 것들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면 무엇에든, 또 건축과 조각과 그림과 음악에 대한 심미안이 그 처지가 아무런 불편 없이 그 정념에 스스로를 내주도록 허용하는 이들에게서조차 사치와 감각의 탐닉과 과시로 여겨져야 한다면, 사치와 감각의 탐닉과 과시가 공공의 이익임은 확실하다. 그가 그런 욕된 이름을 붙이기에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그 성질이 없다면 세련된 기예는 결코 북돋움을 받을 수 없어 쓰일 데가 없어 시들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 전에 널리 퍼져 있었고 덕을 우리 모든 정념을 뿌리째 뽑아내고 없애 버리는 데 놓았던 몇몇 세간의 금욕 학설이 이 방종의 체계의 참된 바탕이었다. 맨더빌 박사는 두 가지를 증명하기가 쉬웠다. 첫째는 이 온전한 이김이 사람들 사이에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두루 일어난다면 모든 산업과 교역을, 나아가 어떻게 보면 사람의 삶의 모든 일을 끝내 버려 사회에 해로울 것이라는 점이다. 이 명제 가운데 첫째로 그는 참된 덕이 없으며 그러하다고 주장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한갓 사기임을 증명한 듯이 보였고, 둘째로 사적인 악덕이 공공의 이익이며 그것 없이는 어떠한 사회도 잘되거나 피어날 수 없음을 증명한 듯이 보였다.

한때 세상에서 그토록 많은 소리를 낸 맨더빌 박사의 체계는 이러하며, 그것이 없었더라도 있었을 만큼보다 더 많은 악덕의 계기가 되지는 어쩌면 결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원인에서 일어난 그 악덕에게 더 뻔뻔하게 나타나도록, 또 여태 들어 본 적 없는 방탕한 대담함으로 자기 동기가 썩었음을 드러내어 말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이 체계가 아무리 무너뜨리는 것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간 참됨에 맞닿아 있지 않았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을 속일 수도 없었을 것이고 더 나은 원리를 벗으로 삼는 이들 사이에 그토록 널리 퍼진 놀라움을 일으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연철학의 한 체계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고 오랫동안 세상에서 매우 두루 받아들여지면서도 자연에 아무런 바탕도 두지 않고 참됨과 어떤 종류의 닮음도 지니지 않을 수 있다. 데카르트36의 소용돌이는 매우 재간 있는 한 나라에서 백 년에 가까운 동안 하늘에 있는 물체들의 회전에 관한 가장 만족스러운 설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놀라운 결과의 원인이라 주장된 것이 실제로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주 있을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돌려진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없음이 모든 사람이 납득할 만큼 증명되었다. 그러나 도덕철학의 체계는 사정이 다르며, 우리 도덕감정의 기원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그토록 심하게 우리를 속일 수도 없고 참됨과의 모든 닮음에서 그토록 멀리 떠날 수도 없다. 어떤 여행자가 먼 나라에 관하여 설명할 때 그는 가장 근거 없고 터무니없는 꾸며 낸 이야기를 가장 확실한 사실로 삼아 우리의 잘 믿는 마음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우리 이웃에서 일어나는 일과 우리가 사는 바로 그 교구의 일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고 주장할 때에는, 여기서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눈으로 일을 살피지 않을 만큼 조심성이 없다면 그가 여러 점에서 우리를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가 우리에게 들이대는 가장 큰 거짓조차 참됨과 얼마간 닮아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상당한 참됨이 섞여 있기까지 해야 한다. 자연철학을 다루며 우주의 큰 현상의 원인을 정한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매우 먼 나라의 일에 관하여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어서, 그 나라에 관해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우리에게 말할 수 있고, 그 이야기가 있을 법해 보이는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믿음을 얻는 데 절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가 우리 욕망과 정서의 기원, 곧 시인과 부인이라는 우리 감정의 기원을 설명하겠다고 내놓을 때에는 우리가 사는 바로 그 교구의 일뿐 아니라 우리 집안의 일에 관하여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자기를 속이는 집사를 믿는 게으른 주인과 같이 우리는 속아 넘어가기가 매우 쉽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참됨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지 않는 어떠한 설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 적어도 그 항목 가운데 몇몇은 정당해야 하고 가장 지나치게 부풀려진 것조차 얼마간의 바탕을 지녔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 속임은 우리가 기울이려 하는 그 조심성 없는 살핌으로도 들통날 것이다. 어떤 자연스러운 감정의 원인으로 그것과 아무런 이어짐도 없고 그런 이어짐을 지닌 다른 어떤 원리와도 닮지 않은 원리를 정하는 저자는 가장 사려 없고 가장 경험 없는 독자에게도 터무니없고 웃음거리로 보일 것이다.

주

  1. 1. 옮긴이 — 플라톤(Plato, 기원전 428?~347?). 고대 그리스 철학자.

  2. 2. 옮긴이 —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 플라톤의 제자이며 소요학파의 창시자.

  3. 3. 옮긴이 — 키티온의 제논(Zeno of Citium, 기원전 335?~263?).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4. 4. 플라톤 de Rep.(『국가』) 4권을 보라.

  5. 5. 옮긴이 — 휘호 흐로티위스(Hugo Grotius, 1583~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로 자연법학의 틀을 세웠다. 통용 표기는 그로티우스다.

  6. 6. 옮긴이 — 라틴어 justitia expletrix. 남의 것을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채워지는 정의, 곧 강제될 수 있는 완전한 권리에 대응한다.

  7. 7.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배적 정의는 이와 조금 다르다. 그것은 공동체의 공공 재원에서 나오는 상을 적정하게 분배하는 데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 2장을 보라.

  8. 8. 옮긴이 — 라틴어 justitia attributrix. 제 것을 알맞은 곳에 나누어 주는 정의, 곧 강제될 수 없는 불완전한 권리에 대응한다.

  9. 9.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5장 이하, 그리고 3권 5장 이하를 보라.

  10. 10.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1장, 2장, 3장, 4장을 보라.

  11. 11. 아리스토텔레스 『대윤리학』 1권 1장을 보라.

  12. 12. 키케로 『선악의 한계에 관하여』 3권을 보라. 또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in Zenone(『제논 편』) 7권 4절을 보라.

  13. 13. 이 표현 가운데 몇몇은 영어에서 조금 어색하게 들린다. 그것은 스토아학파의 전문 용어를 글자대로 옮긴 것이다.

  14. 14. 옮긴이 — 에픽테토스(Epictetus, 55?~135?). 스토아학파 철학자로, 본인은 글을 남기지 않았고 제자 아리아노스가 그 말을 적어 전하였다.

  15. 15. 아리아노스 2권 5장.

  16. 16. 옮긴이 — 새뮤얼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 영국의 신학자·철학자.

  17. 17. 옮긴이 — 윌리엄 울러스턴(William Wollaston, 1659~1724). 영국의 철학자로 『자연 종교의 서술』을 썼다.

  18. 18. 옮긴이 — 제3대 섀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 쿠퍼(Anthony Ashley Cooper, 1671~1713). 영국의 도덕철학자.

  19. 19. 옮긴이 —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270).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

  20. 20. 옮긴이 — 키레네의 아리스티포스(Aristippus, 기원전 435?~356?). 쾌락을 좋음으로 삼은 키레네학파의 창시자.

  21. 21. 키케로 『선악의 한계에 관하여』 1권을 보라.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10권.

  22. 22. 옮긴이 — 소크라테스(Socrates, 기원전 470?~399). 고대 그리스 철학자.

  23. 23. 라틴어 prima naturæ(자연이 가장 먼저 권하는 것).

  24. 24. 옮긴이 — 아우구스투스(Augustus, 기원전 63~기원후 14). 로마의 초대 황제.

  25. 25. 옮긴이 — 랠프 커드워스(Ralph Cudworth, 1617~1688), 헨리 모어(Henry More, 1614~1687), 존 스미스(John Smith, 1618~1652). 이른바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에 드는 신학자들이다.

  26. 26. 옮긴이 — 프랜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글래스고 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스미스의 스승이었다.

  27. 27. 『덕에 관한 탐구』 1절과 2절을 보라.

  28. 28. 옮긴이 — 1688년 명예혁명을 둘러싸고 영국에서 벌어진 논쟁. 군주에게 언제나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군주가 신민의 권리를 침범할 때 저항할 수 있는가를 다투었다.

  29. 29. 『덕에 관한 탐구』 2절 4항. 또한 『도덕감각론 해설』 5절 마지막 문단.

  30. 30. 옮긴이 —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 로마의 정치가·웅변가·철학 저술가.

  31. 31. 옮긴이 — 세네카(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32. 32. 옮긴이 — 라로슈푸코 공작 프랑수아(François de La Rochefoucauld, 1613~1680). 프랑스의 저술가로 『잠언집』을 남겼다. 사람의 모든 덕을 자애심으로 돌려 설명하였다.

  33. 33. 옮긴이 —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1670~1733). 네덜란드 태생의 영국 저술가로 『꿀벌의 우화』를 썼다.

  34. 34. 사치와 음욕.

  35. 35. 『꿀벌의 우화』.

  36. 36. 옮긴이 —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 하늘의 물체가 미세한 물질의 소용돌이에 실려 움직인다는 우주론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