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3편 행위의 적정성에 관한 인류의 판단에 번영과 역경이 미치는 영향
1장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대체로 기쁨에 대한 동감보다 더 생생한 감각이지만, 당사자가 자연히 느끼는 것의 격렬함에는 흔히 훨씬 더 못 미친다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기쁨에 대한 동감보다 더 참된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사람들의 눈에 띄어 왔다. 동감이라는 낱말은 그 가장 본래적이고 원초적인 뜻에서 남의 즐거움이 아니라 남의 괴로움을 함께 느끼는 마음을 가리킨다. 근래의 어느 명민하고 치밀한 철학자는 우리가 기쁨에 대해서도 참된 동감을 가지며 축하가 인간 본성의 한 원리임을 논증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연민이 그러한 원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여긴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아무도 없었다.
우선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어떤 뜻에서 기쁨에 대한 동감보다 더 두루 미친다. 슬픔이 지나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어느 만큼 함께 느낄 수 있다. 물론 이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시인을 이루는 저 완전한 동감, 곧 감정의 온전한 조화와 일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우리는 당하는 쪽과 더불어 울고 부르짖고 통곡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약함과 그 정념이 도를 넘은 정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두고 자주 매우 뚜렷한 염려를 느낀다. 그러나 남의 기쁨에 온전히 들어가 그와 함께 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기쁨에 대해 아무런 존중도 함께 느끼는 마음도 갖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줄 수 없는 저 무절제하고 분별없는 기쁨에 겨워 뛰고 춤추는 사람은 우리의 경멸과 의분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고통은 마음의 것이든 몸의 것이든 즐거움보다 더 찌르는 감각이며, 고통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당하는 쪽이 자연히 느끼는 것에 크게 못 미치기는 해도 대체로 즐거움에 대한 동감보다 더 생생하고 또렷한 지각이다. 다만 뒤의 것이 본래의 정념이 지닌 자연스러운 생기에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점은 곧바로 보이려 한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우리는 남의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감을 자주 억누르려 애쓴다. 당하는 쪽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않을 때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그것을 될 수 있는 대로 가라앉히려 애쓰지만, 늘 성공하지는 못한다. 우리가 그것에 맞서 버티는 일과 마지못해 그것에 굴복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필연히 더 각별히 눈여겨보게 만든다. 그러나 기쁨에 대한 동감에 우리가 이렇게 맞설 일은 결코 없다. 그 자리에 시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동감으로 기울 마음을 조금도 느끼지 않으며, 시샘이 없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동감에 몸을 맡긴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시샘을 늘 부끄럽게 여기는 까닭에, 그 거북한 감정 때문에 남의 기쁨에 동감할 자격을 잃었을 때에도 자주 동감하는 척하고 때로는 참으로 동감하고 싶어 한다. 마음속으로는 어쩌면 참으로 언짢으면서도 우리는 이웃의 좋은 운수를 두고 기쁘다고 말한다. 우리는 슬픔에 대한 동감을 떨쳐 버리고 싶을 때 자주 그것을 느끼고, 기쁨에 대한 동감을 가졌으면 반가울 때 자주 그것을 놓친다. 그러므로 자연히 우리 앞에 떠오르는 뻔한 관찰은, 슬픔에 동감하려는 우리의 성향은 매우 강하고 기쁨에 동감하려는 우리의 기울기는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이 있음에도 나는 감히 이렇게 주장하려 한다. 그 자리에 시샘이 없을 때 기쁨에 동감하려는 우리의 성향은 슬픔에 동감하려는 성향보다 훨씬 더 강하며, 유쾌한 감정을 함께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괴로운 감정을 두고 우리가 품는 마음보다 당사자들이 자연히 느끼는 것의 생기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다.
우리는 온전히 함께 갈 수 없는 저 지나친 비탄에 대해서는 어느 만큼 너그럽다. 당하는 쪽이 자기 감정을 관찰자의 감정과 온전한 조화와 일치에 이르도록 끌어내리기까지 얼마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 일에 실패해도 우리는 쉽게 용서한다. 그러나 기쁨의 무절제에 대해서는 그런 너그러움이 없다. 기쁨을 우리가 온전히 들어갈 수 있는 정도로 끌어내리는 데 그만큼 큰 노력이 필요하다고는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재난 아래에서도 자기 슬픔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가장 높은 찬탄을 받을 만해 보이지만, 번영이 가득한 가운데서 똑같이 자기 기쁨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무런 칭찬도 받을 만해 보이지 않는다. 당사자가 자연히 느끼는 것과 관찰자가 온전히 함께 갈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이 앞의 경우에 뒤의 경우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몸이 건강하고 빚이 없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의 행복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운수가 더 보태지는 일이 모두 남는 것이라고 해도 옳을 터이며, 그가 그런 일로 크게 들뜬다면 그것은 가장 경박한 들뜸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처지야말로 인류의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상태라 불러도 좋다. 오늘의 세상이 비참하고 타락했다고 하는 저 지당한 한탄이 있음에도, 이것이 실로 사람 대부분의 상태다. 그러므로 사람 대부분은 이 처지에 무엇이 보태져 동료의 마음에 일으킬 만한 기쁨이라면 그 기쁨 전부로 자기를 끌어올리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이 상태에 보탤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거기서 덜어 낼 수 있는 것은 많다. 이 처지와 인간 번영의 가장 높은 정점 사이의 간격은 하찮을 뿐이지만, 이 처지와 비참의 가장 깊은 바닥 사이의 거리는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엄청나다. 이 때문에 역경은 당하는 쪽의 마음을 그 자연스러운 상태 아래로 필연히 끌어내리는데, 그 정도는 번영이 그를 그 상태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씬 크다. 그러므로 관찰자는 그의 슬픔에 온전히 동감하여 박자를 완전히 맞추기가 그의 기쁨에 속속들이 들어가기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며, 슬픔의 경우에 기쁨의 경우보다 자기 마음의 자연스럽고 예사로운 기질에서 훨씬 더 멀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슬픔에 대한 우리의 동감이 기쁨에 대한 동감보다 흔히 더 찌르는 감각이면서도 당사자가 자연히 느끼는 것의 격렬함에는 늘 훨씬 더 못 미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쁨에 동감하는 일은 유쾌하며, 시샘이 그것을 거스르지 않는 곳에서는 우리의 마음이 그 즐거운 감정의 가장 높은 황홀에 흐뭇하게 스스로를 내던진다. 그러나 비탄과 함께 가는 일은 괴로우며, 우리는 늘 마지못해 그 속으로 들어간다1. 비극의 상연을 지켜볼 때 우리는 그 연희가 불어넣는 저 동감의 슬픔에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맞서 버티며, 더는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에 몸을 맡긴다. 그러고도 우리는 우리의 심란함을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에게서 감추려 애쓴다. 눈물을 흘리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숨기며, 이 지나친 유약함에 들어와 주지 않는 관찰자들이 그것을 아녀자 같은 무름이나 약함으로 여기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 불운이 우리의 연민을 불러내는 딱한 사람은 우리가 그의 슬픔에 얼마나 마지못해 들어올지를 느끼고 있으므로, 두려움과 망설임을 품은 채 자기 비탄을 우리에게 내놓는다. 그는 그 비탄의 절반을 삼켜 버리기까지 하며, 사람들의 이러한 매정함 때문에 자기 괴로움을 가득 풀어놓기를 부끄러워한다. 기쁨과 성공에 겨워 마음껏 날뛰는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시샘이 우리를 그에게 맞서도록 끌어들이지 않는 곳에서는 그는 우리의 가장 온전한 동감을 기대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진심으로 그와 함께 갈 마음이 있음을 온전히 믿고, 환호의 외침으로 자신을 알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서 웃는 것보다 우는 것을 우리가 더 부끄러워할 까닭이 무엇인가? 한쪽을 할 참된 사정이 다른 쪽을 할 사정만큼 자주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관찰자들은 괴로운 감정보다 유쾌한 감정에서 우리와 함께 가 줄 가망이 더 크다고 우리는 늘 느낀다. 가장 무서운 재난에 짓눌려 있을 때조차 하소연하는 일은 언제나 처량하다. 그러나 승리의 개가는 언제나 꼴사나운 것은 아니다. 물론 신중은 번영을 더 절제하여 지니라고 자주 권할 것이다. 신중은 바로 이 개가가 무엇보다도 잘 불러일으키는 저 시샘을 피하라고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윗사람에게 아무런 시샘도 품지 않는 군중이 개선 행렬이나 공식 입성에서 보내는 환호는 얼마나 진심에서 나오는가? 그리고 처형장에서 그들의 비탄은 흔히 얼마나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는가? 장례에서 우리의 슬픔은 대개 꾸며 낸 무거움에 지나지 않지만, 세례나 혼례에서 우리의 흥겨움은 언제나 마음에서 나오며 꾸밈이 없다. 이런 자리와 이처럼 기쁜 모든 자리에서 우리의 흐뭇함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아도 흔히 당사자들의 흐뭇함만큼 생생하다. 우리가 벗들을 마음으로부터 축하할 때면, 인간 본성의 수치이지만 그런 일은 드물기는 해도, 그들의 기쁨은 말 그대로 우리의 기쁨이 된다. 그 순간 우리는 그들만큼 행복하다. 우리의 가슴은 참된 즐거움으로 부풀어 넘친다. 기쁨과 흐뭇함이 우리 눈에서 반짝이며, 우리 얼굴의 온갖 표정과 우리 몸의 온갖 몸짓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괴로움에 잠긴 벗들을 위로할 때, 그들이 느끼는 것에 비하여 우리가 느끼는 것은 얼마나 적은가? 우리는 그들 곁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자기 불운의 사정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동안 무겁고 주의 깊게 듣는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가 매 순간 저 자연스러운 정념의 북받침에 끊기고 그 북받침이 흔히 이야기 도중에 그들의 목을 거의 메게 하는 듯할 때, 우리 가슴의 맥없는 감정은 그들의 황홀에 박자를 맞추기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들의 정념이 자연스러우며 같은 처지에서 우리 자신이 느낄 만한 것보다 더 크지도 않음을 알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수성 결여를 속으로 꾸짖기까지 하며, 어쩌면 그 때문에 억지 동감을 끌어올리기도 하는데, 그렇게 일으킨 동감은 언제나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옅고 가장 덧없는 것이어서 대개 우리가 그 방을 나서자마자 스러져 영영 없어진다. 자연은 우리 자신의 슬픔을 우리에게 잔뜩 지워 놓았을 때 그것으로 넉넉하다고 여긴 듯하며, 그래서 남의 슬픔을 덜어 주도록 우리를 떠밀기에 필요한 만큼을 넘어서는 몫은 그 슬픔에서 더 나누어 지라고 우리에게 명하지 않았다.
남의 괴로움에 대한 이 둔한 감수성 때문에, 큰 고난 가운데서 보이는 아량은 언제나 그토록 신령스럽게 아름다워 보인다. 자잘한 재앙이 여럿 겹친 가운데서도 명랑함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의 행동은 품위 있고 유쾌하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재난을 똑같이 견뎌 내는 사람은 죽을 운명을 타고난 자를 넘어선 존재로 보인다. 그의 처지에 놓인 이들을 자연히 흔들고 어지럽히는 저 격렬한 감정을 잠잠하게 하려면 얼마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지를 우리는 느낀다. 그가 자신을 그토록 온전히 다스릴 수 있음을 보고 우리는 놀란다. 그와 동시에 그의 굳건함은 우리의 무감함과 완전히 들어맞는다. 그는 우리가 갖지 못했음을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며 부끄러워하는 저 더 섬세한 정도의 감수성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 사이에는 가장 완전한 일치가 있고, 그 때문에 그의 행동에는 가장 완전한 적정성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 본성이 으레 약하다는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 그가 지켜 낼 수 있으리라고 우리가 도리에 맞게 기대할 수는 없었던 적정성이다. 그토록 고귀하고 도량이 큰 노력을 감당할 수 있는 저 마음의 힘을 우리는 놀라움과 경탄으로 우러른다. 이미 여러 번 말한 바와 같이, 놀라움과 경이가 섞여 생기를 얻은 온전한 동감과 시인의 감정이 바로 찬탄이라 옳게 불리는 것을 이룬다. 카토2는 사방에서 적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 맞설 수도 없고 그들에게 굽히기는 떳떳하지 못하다 여겨, 그 시대의 드높은 격률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불운 앞에서 결코 움츠러들지 않았고, 우리가 늘 그토록 내주기 싫어하는 저 가련한 동감의 눈물을 비참한 자의 애처로운 목소리로 결코 구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내다운 굳셈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그 마지막 결심을 실행하기 바로 전에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함으로 벗들의 안전을 위한 모든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무감함을 설파한 저 위대한 사람 세네카3에게 이 모습은 신들조차 즐거움과 찬탄으로 바라볼 만한 광경으로 비쳤다.
예사로운 삶에서 이러한 영웅다운 아량의 사례를 만날 때면 우리는 언제나 몹시 마음이 움직인다. 우리는 슬픔의 온갖 약함에 몸을 맡기는 이들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듯한 이들을 위하여 더 잘 울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바로 이 경우에 관찰자의 동감에서 나온 비탄은 당사자 안에 있는 본래의 정념을 넘어서는 듯이 보인다. 소크라테스4가 마지막 잔을 마실 때 그의 벗들은 모두 울었으나, 그 자신은 가장 흥겹고 가장 명랑한 평온을 드러냈다. 그런 모든 자리에서 관찰자는 자기의 동감에서 나온 슬픔을 이기려고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그는 그 슬픔이 자기를 도를 넘고 적정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끌고 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기 가슴의 감수성을 기쁘게 여기며, 흐뭇함과 자기 시인 속에서 그 슬픔에 몸을 맡긴다. 그러므로 그는 벗의 재난을 두고 자연히 떠오를 수 있는 가장 침울한 생각들을 기꺼이 마음껏 품는데, 그 벗을 향하여 그는 어쩌면 전에는 한 번도 그토록 예민하게 느껴 본 적 없는 부드럽고 눈물겨운 사랑의 정념을 느낀다. 그러나 당사자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그는 자기 처지에서 자연히 무섭거나 거북한 것이라면 무엇에서든 될 수 있는 대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러한 사정에 너무 진지하게 주의를 쏟으면 자기에게 너무 격렬한 인상이 새겨져 더는 절제의 테두리 안에 머물 수도, 관찰자들의 온전한 동감과 시인의 대상이 될 수도 없게 될까 그는 두려워한다. 그러므로 그는 유쾌한 것에만, 곧 자기 행동의 영웅다운 아량으로 이제 받게 될 갈채와 찬탄에만 생각을 붙든다. 자기가 그토록 고귀하고 도량이 큰 노력을 감당할 수 있음을 느끼는 일, 이 무서운 처지에서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여전히 행동할 수 있음을 느끼는 일이 그에게 생기를 주고 기쁨으로 그를 황홀하게 하며, 그가 이렇게 자기 불운을 딛고 얻은 승리에 의기양양해하는 듯한 저 개가의 흥겨움을 지탱하게 해 준다.
반대로 자기에게 닥친 어떤 재난 때문에 슬픔과 낙담에 잠긴 사람은 늘 어느 정도 비천하고 경멸스럽게 보인다. 우리는 그가 자신을 위해 느끼는 것,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의 처지에 있었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느낄 것을 그를 위해 느끼도록 스스로를 몰아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멸시한다. 어쩌면 부당하게 멸시하는 것이겠으나, 본성에 의해 우리가 거스를 수 없이 그렇게 정해지는 감정을 부당하다고 볼 수 있다면 말이다. 슬픔의 약함은 우리 자신을 위해 느끼는 것보다 남을 위해 느끼는 것에서 일어날 때를 빼면 어떤 점에서도 결코 유쾌하게 보이지 않는다. 자애롭고 존경을 부르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은 크게 책잡히지 않고 그 약함에 몸을 맡길 수 있다. 그의 슬픔은 주로 떠난 어버이에 대한 일종의 동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애에서 나온 이 감정에 선선히 들어간다. 그러나 그가 자기에게만 관계된 어떤 불운 때문에 똑같은 약함을 마음껏 드러낸다면, 그는 더는 그런 너그러움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빌어먹는 신세와 파산으로 몰리더라도, 가장 무서운 위험에 내몰리더라도, 심지어 공개 처형으로 끌려 나가 처형대 위에서 눈물 한 방울을 흘린다면, 그는 용감하고 도량이 큰 모든 사람의 눈에 영영 자기를 망신시키는 셈이 된다. 그를 향한 그들의 연민은 그래도 매우 강하고 매우 진실할 것이다. 다만 그 연민이 이 지나친 약함에는 여전히 못 미칠 터이므로, 그들은 세상의 눈앞에서 그렇게 자기를 드러낸 사람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그들을 슬픔이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물들일 것이며, 그가 그렇게 스스로 짊어진 불명예는 그들에게 그 불운 가운데 가장 한심한 대목으로 보일 것이다. 싸움터에서 그토록 여러 번 죽음을 무릅쓴 저 담대한 비롱 공작5이 처형대 위에서 자기가 떨어진 처지를 보고 또 자신의 경솔함이 그토록 불행하게도 자기를 내던진 저 은총과 영광을 떠올리며 울었다는 것이, 그의 기억을 얼마나 망신시켰던가!
2장 야망의 기원과 지위의 구별에 관하여
사람들이 우리의 슬픔보다 우리의 기쁨에 더 온전히 동감하는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를 내보이고 우리의 가난을 감춘다. 우리의 곤궁을 세상의 눈앞에 드러내야 하는 일, 그리고 우리의 처지가 온 인류의 눈에 열려 있음에도 우리가 겪는 것의 절반조차 아무도 헤아려 주지 않음을 느끼는 일만큼 창피한 것은 없다. 아니, 우리가 부를 좇고 가난을 피하는 것도 주로 사람들의 감정을 이렇게 헤아리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온갖 수고와 부산함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탐욕과 야망의, 재물과 권력과 남보다 앞섬을 좇는 일의 끝은 무엇인가? 자연이 요구하는 것을 채우기 위함인가? 가장 비천한 노동자의 품값도 그것을 채울 수 있다. 그 품값이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집과 가족의 안락을 마련해 준다는 것을 우리는 본다. 그의 살림살이를 엄히 살펴본다면, 그가 그 품값의 큰 부분을 남는 것으로 볼 만한 편의에 쓰며 특별한 자리에서는 허영과 남다름에조차 얼마쯤 내놓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처지를 우리가 꺼리는 원인은 무엇이며, 삶의 높은 지위에서 길러진 이들은 왜 노동조차 하지 않으면서 그와 똑같이 단순한 음식을 먹고 똑같이 낮은 지붕 아래 살며 똑같이 보잘것없는 옷을 입는 신세로 내려앉는 일을 죽음보다 나쁘게 여기는가? 그들은 오두막보다 궁전에서 자기 위가 더 좋아지거나 잠이 더 깊어진다고 여기는가? 그와 반대되는 일이 그토록 자주 관찰되었으며, 설령 한 번도 관찰된 적이 없었더라도 참으로 너무나 뻔한 것이어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사람의 온갖 다른 지위를 두루 관통하며 흐르는 저 겨루기는 어디서 일어나며, 우리가 처지를 낫게 하는 일이라 부르는 저 큰 인생의 목적으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이익은 무엇인가? 남의 눈에 보이는 것, 남이 마음을 써 주는 것, 동감과 흐뭇함과 시인으로 남이 눈여겨봐 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그 목적에서 끌어내고자 할 수 있는 이익의 전부다.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허영이지 편안함이나 즐거움이 아니다. 그런데 허영은 언제나 우리가 주목과 시인의 대상이라는 믿음 위에 서 있다. 부자가 자기 부를 자랑하는 것은, 그 부가 자연히 세상의 주목을 자기에게 끌어오며 자기 처지의 이점이 그토록 쉽게 자기에게 불어넣는 저 모든 유쾌한 감정에서 사람들이 자기와 함께 갈 성향을 지녔음을 그가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그의 가슴은 안에서 부풀어 넓어지는 듯하며, 그는 자기 재물이 가져다주는 다른 모든 이점보다 이 점 때문에 그 재물을 더 아낀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자기 가난을 부끄러워한다. 그는 가난이 자기를 사람들의 시야 밖에 놓아 버리거나, 설령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 눈여겨본다 해도 자기가 겪는 비참과 곤궁은 거의 함께 느껴 주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는 두 가지 모두에서 창피를 겪는다. 눈에 띄지 않는 것과 부인당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지만, 그늘에 묻혀 있음은 명예와 시인의 햇빛으로부터 우리를 덮어 버리는 까닭에, 아무도 우리를 눈여겨보지 않음을 느끼는 일은 인간 본성의 가장 유쾌한 희망을 필연히 꺾고 가장 간절한 욕망을 어그러뜨린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채로 나가고 들어오며, 사람들 한복판에 있을 때에도 자기 누옥에 갇혀 있을 때와 똑같은 그늘 속에 있다. 그의 처지에 놓인 이들을 사로잡는 저 미천한 걱정과 괴로운 마음 씀은 흥청거리며 즐기는 이들에게 아무런 재미도 주지 않는다. 그들은 그에게서 눈을 돌리며, 그의 곤궁이 너무 극심하여 그를 보지 않을 수 없게 될 때에도 그것은 오직 그토록 거북한 대상을 자기들 가운데서 내쫓기 위함일 뿐이다. 운 좋은 자와 오만한 자는 사람의 비참이 감히 자기들 앞에 나서고 그 역겨운 꼴로 자기들 행복의 고요를 어지럽히려 든다며 그 무례를 괴이하게 여긴다. 반대로 지위와 남다름을 지닌 사람은 온 세상이 눈여겨본다. 누구나 그를 보고 싶어 하고, 적어도 동감으로나마 그의 형편이 자연히 그에게 불어넣는 저 기쁨과 의기양양함을 품어 보고 싶어 한다. 그의 행동은 세상이 마음 쓰는 대상이다. 그에게서 떨어지는 말 한마디, 몸짓 하나도 온통 소홀히 지나쳐지는 일이 거의 없다. 큰 모임에서 모두가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그이며, 그가 각인할 저 움직임과 방향을 받으려고 사람들의 정념이 모두 기다리는 듯한 대상도 그다. 그의 행동이 온통 터무니없지만 않다면, 그는 매 순간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자기를 주위 모든 이의 관찰과 함께 느끼는 마음의 대상으로 만들 기회를 갖는다. 바로 이것이, 그것이 씌우는 구속에도 그것에 따르는 자유의 상실에도 아랑곳없이, 위대함을 시샘의 대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좇는 동안 반드시 치러야 하는 저 모든 수고와 모든 불안과 모든 창피를,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것을 손에 넣음으로써 영영 잃게 되는 저 모든 여유와 모든 편안함과 모든 걱정 없는 안심을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벌충해 준다.
위대한 이들의 처지를 상상이 즐겨 덧칠하는 저 눈속임의 빛깔로 바라볼 때, 그것은 완전하고 행복한 상태의 추상적 관념과 거의 같아 보인다. 깨어 있는 꿈과 부질없는 공상 속에서 우리가 우리 모든 욕망의 마지막 대상으로 스스로에게 그려 온 바로 그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상태에 있는 이들의 흐뭇함에 남다른 동감을 느낀다. 우리는 그들의 모든 기울기를 편들고 그들의 모든 소망을 밀어 준다. 그토록 유쾌한 처지를 무엇인가가 망치고 흐려 놓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는가 하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들이 죽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하며, 죽음이 마침내 그런 완전한 누림에 끝을 낸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혹하게 보인다. 자연이 자기 모든 자식을 위하여 마련해 둔 저 미천하나 넉넉한 집으로 그들을 그 높은 자리에서 억지로 끌어내리는 일은 잔혹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위대한 왕이여, 영원히 사시라! 이것은 경험이 그 터무니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동방의 아첨하는 투로 우리가 선선히 그들에게 바쳤을 인사다. 그들에게 닥치는 모든 재난, 그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해악은 관찰자의 가슴에 똑같은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을 때 느낄 것보다 열 배나 많은 연민과 분개를 일으킨다. 비극에 알맞은 소재를 내주는 것은 오직 왕들의 불운이다. 이 점에서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불운과 닮았다. 이 두 처지야말로 무대에서 우리의 마음을 끄는 으뜸의 것이다. 이성과 경험이 그와 반대되는 것을 아무리 말해 주어도, 상상의 선입견은 이 두 상태에 다른 어떤 것보다 뛰어난 행복을 붙여 놓기 때문이다. 그토록 완전한 누림을 어지럽히거나 그것에 끝을 내는 일은 모든 해악 가운데 가장 흉악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 군주의 목숨을 노려 음모를 꾸미는 반역자는 다른 어떤 살인자보다 더 큰 괴물로 여겨진다. 내전에서 흘린 모든 무고한 피가 찰스 1세6의 죽음만큼 의분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인간 본성에 낯선 이가, 아랫사람의 비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윗사람의 불운과 괴로움을 두고는 애석함과 의분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았다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고통이 더 쓰라리고 죽음의 경련이 더 무서운 것이려니 하고 여기기 쉬울 것이다.
지위의 구별과 사회의 질서는 부유하고 힘 있는 이들의 모든 정념과 함께 가려는 사람들의 이 성향 위에 세워져 있다. 윗사람에게 우리가 고분고분한 것은 그들의 호의에서 이익을 얻으리라는 사사로운 기대에서보다 그들 처지의 이점에 대한 우리의 찬탄에서 더 자주 일어난다. 그들이 베푸는 혜택은 몇 사람에게밖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의 운수는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을 끈다. 우리는 완전함에 그토록 가까이 다가간 행복의 체계를 완성하도록 그들을 돕고 싶어 하며, 그들에게 은혜를 입힌다는 허영이나 명예 말고는 다른 어떤 보답도 없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들을 섬기고자 한다. 또한 그들의 기울기에 우리가 따르는 것도 그러한 복종의 효용이나, 그 복종으로 가장 잘 받쳐지는 사회의 질서를 헤아리는 데 주로 또는 온통 근거를 두고 있지도 않다. 사회의 질서가 그들에게 맞서야 한다고 요구하는 듯이 보일 때조차 우리는 좀처럼 그렇게 하도록 스스로를 몰아가지 못한다. 왕은 백성의 종이며 공공의 편의가 요구하는 대로 복종되고 저항되고 폐위되고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은 이성과 철학의 교설이지만, 자연의 교설은 아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들 자신을 위하여 그들에게 복종하고, 그들의 높은 자리 앞에서 떨며 몸을 굽히고, 그들의 미소를 어떤 봉사에도 넉넉히 보답하는 상으로 여기고, 그들의 노여움을 거기서 다른 어떤 재앙도 따라오지 않더라도 모든 창피 가운데 가장 혹독한 것으로 두려워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어떤 점에서든 그들을 사람으로 대하고 예사로운 자리에서 그들과 따지고 다투기에는 그만한 결단이 필요하여, 친숙함과 사귐의 도움을 함께 받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견뎌 낼 아량을 지닌 사람은 드물다. 가장 강한 동기와 가장 격렬한 정념인 두려움과 미움과 분개도 그들을 존경하려는 이 자연스러운 성향과 균형을 맞추기에 좀처럼 넉넉하지 않다. 백성의 대다수가 폭력으로 그들에게 맞서거나 그들이 처벌되거나 폐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기에 이르려면, 그 전에 그들의 행실이 정당하게든 부당하게든 저 모든 정념을 가장 높은 정도로 자극했어야 한다. 백성이 이만큼 이르렀을 때에도 그들은 매 순간 마음이 누그러지기 쉬우며, 자기들이 타고난 윗사람으로 여겨 오던 이들에게 바치던 습관 어린 공경의 상태로 쉽게 되돌아간다. 그들은 자기 군주가 창피를 겪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다. 연민이 곧 분개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들은 지난 모든 노여움의 빌미를 잊으며, 그들의 낡은 충성의 원리가 되살아나서, 그 낡은 주인의 무너진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전에 그것에 맞설 때와 똑같은 격렬함으로 달려간다. 찰스 1세의 죽음은 왕가의 복위를 가져왔다. 배를 타고 달아나려다 군중에게 붙잡힌 제임스 2세7를 향한 연민은 혁명을 거의 막을 뻔했고, 그 일이 전보다 더 무겁게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위대한 이들은 그토록 헐한 값으로 세상의 찬탄을 손에 넣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하는 듯한가, 아니면 자기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것을 땀이나 피로 사야 한다고 여기는 듯한가? 젊은 귀족은 자기 지위의 품위를 지탱하고 조상의 덕이 자기 집안을 끌어올려 준 저 시민들에 대한 우월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어떤 중요한 재주를 익히도록 배우는가? 지식으로인가, 부지런함으로인가, 참을성으로인가, 자기를 억누름으로인가, 아니면 어떤 종류의 덕으로인가? 자기의 모든 말과 모든 움직임이 남의 마음에 걸리는 까닭에, 그는 예사로운 행동의 낱낱을 습관처럼 헤아리게 되고 저 모든 자잘한 의무를 가장 정확한 적정성으로 해내려고 힘쓴다. 자기가 얼마나 많이 관찰되며 사람들이 자기의 모든 기울기를 얼마나 편들어 주려 하는지를 의식하는 까닭에, 그는 가장 대수롭지 않은 자리에서도 그 생각이 자연히 불어넣는 저 거침없음과 높은 태를 지니고 행동한다. 그의 기품과 태도와 몸가짐은 낮은 지위에 태어난 이들이 좀처럼 다다를 수 없는 저 우아하고 아름다운 우월감을 온통 드러낸다. 이것이 그가 사람들을 자기 권위에 더 쉽게 굽히게 하고 그들의 기울기를 자기 뜻대로 다스리려고 쓰는 기술이며, 이 일에서 그가 실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위와 앞섬이 받쳐 주는 이 기술은 예사로운 자리에서는 세상을 다스리기에 넉넉하다. 루이 14세8는 치세의 대부분 동안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온 유럽에서 위대한 군주의 가장 완전한 본보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가 이 큰 명성을 얻게 한 재능과 덕은 무엇이었는가? 그가 벌인 모든 일의 빈틈없고 굽힘 없는 정의였는가, 그 일들에 따라온 헤아릴 수 없는 위험과 어려움이었는가, 아니면 그것들을 좇을 때의 지치지 않고 늦추지 않는 전념이었는가? 그의 넓은 지식이었는가, 그의 섬세한 판단이었는가, 아니면 그의 영웅다운 용맹이었는가? 이 자질 가운데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는 우선 유럽에서 가장 힘 있는 군주였고 따라서 왕들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의 사관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몸매의 아름다움과 용모의 장엄한 미려함에서 자기 궁정의 모든 사람을 뛰어넘었다. 고귀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목소리는 그가 앞에 있음만으로 주춤하던 마음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걸음과 몸가짐은 그와 그 지위에만 어울릴 만한 것이었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라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가 자기에게 말을 거는 이들에게 안겨 준 어려움은 자기 우월함을 느끼는 저 은밀한 흐뭇함을 흡족하게 했다. 그에게 청을 넣다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고 끝을 맺지 못한 채, 폐하, 부디 제가 폐하의 적들 앞에서는 이렇게 떨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한 늙은 장교는 자기가 청한 것을 얻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이 하찮은 재주가 그의 지위에, 그리고 물론 어지간한 수준을 크게 넘지는 않은 듯한 다른 재능과 덕에 얼마간 받쳐져, 이 군주를 당대의 존중 속에 자리 잡게 했고 후세에서조차 그의 기억에 대한 적잖은 존경을 끌어냈다. 그 자신의 시대 사람들과 견주어 그의 앞에서는 다른 어떤 덕도 아무런 공로를 지니지 못한 듯이 보였다. 지식과 부지런함과 용맹과 선행은 그 앞에서 떨고 주춤하며 품위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낮은 지위의 사람이 자기를 남다르게 드러내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재주로써가 아니다. 예절은 위대한 이들의 덕인 정도가 너무 커서, 그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명예를 거의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들의 태도를 흉내 내며 예사로운 행동의 뛰어난 적정성으로 두드러지려 드는 겉멋 든 자는 자기의 어리석음과 뻔뻔함 때문에 두 몫의 경멸을 상으로 받는다. 아무도 눈여겨볼 값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이 방을 걸어 지나가는 동안 자기 머리를 어떻게 들고 팔을 어떻게 놓을지를 무엇 때문에 몹시 걱정해야 하는가? 그는 참으로 아무 쓸모없는 주의에 사로잡혀 있고, 게다가 다른 어떤 사람도 함께 가 줄 수 없는 자기 중요함의 느낌을 드러내는 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가장 완전한 겸손과 꾸밈없음에, 자리에 함께한 이들에게 바쳐야 할 존경과 어긋나지 않을 만큼의 무심함을 더한 것이 사사로운 사람의 행동에서 으뜸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그가 자기를 남다르게 드러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더 중요한 덕으로써여야 한다. 그는 위대한 이들에게 딸린 사람들과 균형을 맞출 만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을 얻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그들에게 값을 치를 다른 자금이 없고 오직 자기 몸의 노동과 자기 마음의 활동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가 갈고닦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들이다. 그는 자기 직업에서 남보다 뛰어난 지식을 얻고 그것을 행하는 데서 남보다 뛰어난 부지런함을 얻어야 하며, 노동에서 참을성이 있어야 하고 위험에서 단호해야 하고 곤궁에서 굳건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벌이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함,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일의 좋은 판단으로써, 또 그 일을 좇을 때의 혹독하고 늦추지 않는 전념으로써 이 재능을 세상의 눈앞에 내놓아야 한다. 정직과 신중, 도량과 솔직함이 모든 예사로운 자리에서 그의 행동을 특징지어야 하며, 그와 동시에 그는 적정성을 지니고 행동하기에 가장 큰 재능과 덕이 필요하면서도 명예롭게 자기 몫을 다해 내는 이들에게는 가장 큰 갈채가 돌아오는 저 모든 처지에 앞장서 뛰어들어야 한다. 자기 처지에 짓눌린 기개와 야망의 사람은 자기를 남다르게 드러낼 어떤 큰 기회를 얼마나 참을성 없이 둘러보는가?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는 형편이라면 그에게 바람직하지 않게 보이는 것이 없다. 그는 나라 밖의 전쟁이나 나라 안의 분란의 조짐조차 흐뭇하게 내다보며, 그것들에 따르는 온갖 혼란과 피 흘림을 꿰뚫어 보면서 사람들의 주목과 찬탄을 자기에게 끌어올 수 있는 저 바라 마지않던 기회가 나타날 가망을 은밀한 황홀과 기쁨으로 본다. 반대로 온 영광이 예사로운 행동의 적정성에 놓여 있고 그것이 가져다줄 수 있는 미천한 명성에 만족하며 다른 어떤 명성도 얻을 재능이 없는 지위와 남다름의 사람은, 어려움이나 곤궁이 따라올 수 있는 일로 자기를 번거롭게 하기를 꺼린다. 무도회에서 돋보이는 것이 그의 큰 개가이고, 연애의 수작에서 성공하는 것이 그의 가장 높은 공훈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꺼리는데, 그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고, 위대한 이들은 아랫사람을 결코 자기와 같은 피붙이로 보지 않는 까닭이며, 또한 용기의 결여에서도 아니고, 그 점에서 그가 모자라는 일은 드문 까닭이다. 그것은 그런 처지에서 요구되는 덕을 자기가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며 세상의 주목이 다른 이들에게 끌려가 자기에게서 틀림없이 떠나 버리리라는 의식에서다. 그는 얼마쯤 작은 위험에 자기를 내놓고 그것이 유행하는 때라면 한 차례 출정할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참을성과 부지런함과 굳셈과 생각의 전념을 끊임없이 오래 쏟으라고 요구하는 처지라면 그는 그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쳐 떤다. 이러한 덕은 그 높은 자리에 태어난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정부에서, 심지어 군주국에서도 가장 높은 관직은 대체로 중간과 낮은 지위에서 길러진 사람들이 차지하고 행정의 온갖 세부도 그들이 이끌어 간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부지런함과 능력으로 앞에 나아간 이들이며, 자기보다 윗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이의 시샘에 짓눌리고 그들의 분개에 맞서면서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이들은 그들을 처음에는 경멸로 바라보고 그다음에는 시샘으로 바라본 뒤에, 마침내 나머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굽실거려 주기를 바라는 바로 그 비굴한 비천함으로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데 만족한다.
위대함에서 떨어지는 일을 그토록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정서를 손쉽게 지배하던 이 힘을 잃는 일이다. 마케도니아 왕의 집안이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9에게 끌려 개선 행렬에 나섰을 때, 그들의 불운은 로마 백성의 주목을 정복자와 나누어 갖게 했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는 왕가의 아이들을 보고, 관찰자들은 온 나라의 기쁨과 번영 가운데서도 가장 부드러운 슬픔과 연민에 사무쳤다. 왕이 그다음으로 행렬에 나타났는데, 그는 자기 재난이 하도 커서 어리둥절하고 얼이 빠져 모든 감정을 앗긴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벗들과 신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나아가면서 자주 무너진 임금에게 눈길을 던졌고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늘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온 행동은 그들이 자기 불운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의 더 큰 불운에 온통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냈다. 반대로 도량이 큰 로마인들은 그를 멸시와 의분으로 바라보았고, 그러한 재난 아래에서 차마 살아가리만큼 마음이 비천할 수 있는 사람을 아무런 연민도 받을 값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 재난이란 대체 어느 정도였는가? 사관들의 대부분에 따르면 그는 남은 날들을 힘 있고 인간애가 있는 백성의 보호 아래, 그 자체로 시샘을 받을 만해 보이는 상태, 곧 넉넉함과 편안함과 여유와 안전의 상태에서 보내게 되어 있었고, 그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으로도 떨어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자기의 모든 움직임을 늘 시중들던 저 찬탄하는 어리석은 자와 아첨꾼과 딸린 자들의 무리에 더는 둘러싸일 수 없었다. 그는 더는 뭇사람의 눈길을 받을 수 없었고, 자기를 그들의 존경과 감사와 사랑과 찬탄의 대상으로 만들 힘도 그에게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여러 나라의 정념이 더는 그의 기울기에 맞추어 빚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왕에게서 모든 감정을 앗아 간 것, 그의 벗들이 자기 불운을 잊게 한 것, 그리고 어떻게 사람이 차마 살아남으리만큼 마음이 비천할 수 있는지 로마의 아량으로는 좀처럼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 견딜 수 없는 재난이었다.
“사랑에는 흔히 야망이 뒤따르지만, 야망에 사랑이 뒤따르는 일은 좀처럼 없다”고 라로슈푸코 공10은 말한다. 저 정념은 한번 가슴을 온통 차지하고 나면 맞수도 후계자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상의 찬탄을 손에 넣는 데, 아니 그것을 바라는 데에조차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다른 모든 즐거움이 시들어 스러진다. 스스로 편안해지려고 야망을 이기고 더는 다다를 수 없게 된 저 명예를 멸시해 보려 애쓴 물러난 정치가 가운데 성공할 수 있었던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 그 대부분은 자기의 대수롭잖음을 생각하며 속이 타는 채로, 사사로운 삶의 일거리에는 마음이 붙지 않은 채로, 지난 위대함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면 아무 누림도 없이, 그것을 되찾으려는 어떤 헛된 계획에 매달릴 때가 아니면 아무 흐뭇함도 없이 나날을 가장 맥없고 가장 무미한 게으름 속에서 보냈다. 그대는 궁정의 거만한 굴종과 그대의 자유를 결코 맞바꾸지 않고 자유롭고 두려움 없고 남에게 매이지 않은 채 살기로 진심으로 마음먹었는가? 그 덕스러운 결심을 이어 갈 길이 하나 있는 듯하며, 어쩌면 하나밖에 없다. 그토록 적은 이들만이 돌아올 수 있었던 그곳에 결코 들어서지 말 것이며, 야망의 테두리 안에 결코 들어오지 말 것이며, 그대보다 앞서 이미 인류의 절반의 주목을 독차지한 저 땅의 주인들과 그대를 견주는 일조차 하지 말 것이다.
두루 미치는 동감과 주목의 시야에 자기를 가장 잘 들여놓는 저 처지에 서는 일이 사람들의 상상에는 그토록 엄청나게 중요해 보인다. 그리하여 시 참사원11의 아내들 사이를 갈라놓는 저 큰 목표인 자리는 인생의 노고 절반의 끝이 되며, 탐욕과 야망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온갖 소란과 부산함, 온갖 약탈과 부정의 원인이 된다. 분별 있는 사람은 자리를 참으로 멸시한다고들 한다. 곧 그들은 식탁의 상석에 앉는 일을 멸시하며, 가장 작은 이점으로도 뒤집을 수 있는 저 하찮은 사정으로 누가 자리에 함께한 이들에게 지목되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지위와 남다름과 앞섬을 멸시하는 사람은 없으며, 오직 인간 본성의 예사로운 기준보다 아주 많이 올라가거나 아주 많이 내려앉은 사람만이 그것을 멸시한다. 곧 지혜와 참된 철학에 하도 굳건히 서서, 자기 행실의 적정성이 자기를 시인의 정당한 대상으로 만드는 한 남이 자기에게 마음을 써 주지 않고 자기를 시인해 주지 않더라도 별 대수롭지 않다고 만족하는 사람이거나, 자기 비천함의 관념에 하도 익숙해지고 게으르고 멍한 무심함에 하도 깊이 빠져, 남보다 뛰어나려는 욕망을, 아니 그 바람마저 거의 다 잊어버린 사람만이 그러하다.
3장 스토아 철학에 관하여
사람들이 삶의 여러 처지에 매기기 쉬운 존중의 여러 등급, 그 근거를 이렇게 살펴보면, 그들이 대체로 어떤 처지를 다른 처지보다 지나치게 앞세우는 일에는 어지간히 아무런 바탕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적정성을 지니고 행동할 수 있음,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사람들의 시인에 걸맞은 대상으로 만듦이 우리가 보이려 애써 온 바와 같이 어떤 처지를 다른 처지보다 우리에게 권하는 으뜸의 것이라면, 이것은 모든 처지에서 똑같이 다다를 수 있다. 행실의 가장 고귀한 적정성은 번영에서와 마찬가지로 역경에서도 지탱될 수 있으며, 앞의 쪽에서 얼마쯤 더 어렵기는 하나 바로 그 때문에 더 찬탄을 받을 만하다. 위험과 불운은 영웅됨의 알맞은 학교일 뿐 아니라, 그 덕을 잘 드러내어 세상의 온 갈채를 그것에 끌어올 수 있는 유일하게 알맞은 무대다. 온 삶이 고르고 끊기지 않은 번영의 한 줄기였고 어떤 위험도 무릅써 본 적 없으며 어떤 어려움도 만나 본 적 없고 어떤 곤궁도 넘어 본 적 없는 사람은 낮은 정도의 찬탄밖에 일으킬 수 없다. 시인과 이야기 작가가 자기들이 우리의 마음을 끌고자 하는 저 인물들에게 가장 큰 빛을 줄 모험의 연속을 지어내려 할 때, 그 모험은 모두 다른 종류다. 그것은 빠르고 갑작스러운 운수의 뒤바뀜이며, 그 속에 놓인 이들을 광란과 착란이나 처참한 절망으로 몰아가기 가장 쉬운 처지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그들의 영웅은 그토록 큰 적정성으로, 적어도 그토록 큰 기개와 굽히지 않는 결단으로 행동하여 여전히 우리의 존중을 얻어 낸다. 카토와 브루투스와 레오니다스의 불운한 아량이 성공한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12의 아량만큼 찬탄의 대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도량이 큰 마음에게 그것이 그만큼 시샘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공한 정복자들의 운수에 더 눈부신 빛이 따르는 듯이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두 처지의 이점을 한데 잇기 때문이다. 곧 번영의 빛을, 담대함과 용맹으로 위험을 만나고 어려움을 넘어섬으로써 일어나는 저 높은 찬탄에 잇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에게 삶의 여러 처지가 모두 같았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말하기로는, 자연은 어떤 대상은 우리가 고르도록 권하고 다른 어떤 대상은 우리가 부인하도록 권하였다. 우리의 으뜸되는 욕구는 건강과 힘과 편안함, 그리고 마음과 몸의 모든 자질에서 이루는 완전함을 좇도록, 또 이것들을 키우거나 지켜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곧 재물과 권력과 권위를 좇도록 우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같은 본래의 원리가 그 반대되는 것을 피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본래의 욕구와 혐오가 향하는 저 첫째 대상들을 고르거나 물리고 앞세우거나 미루는 데서, 자연은 또한 지켜야 할 어떤 질서와 적정성과 아름다움이 있으며 그것이 저 대상들을 손에 넣는 일 자체보다 행복과 완전함에 헤아릴 수 없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우리의 으뜸되는 욕구와 혐오의 대상을 좇거나 피해야 하는 것은 주로 이 아름다움과 적정성을 헤아리면 그러한 행실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이에 따라 이끄는 데 인간 본성의 행복과 영광이 놓여 있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정해 준 저 규칙에서 벗어나는 데 인간 본성의 가장 큰 비참과 가장 온전한 타락이 놓여 있었다. 이 질서와 적정성의 겉모습은 참으로 어떤 형편에서 다른 형편보다 더 쉽게 지켜졌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 곧 자기 정념이 아무런 알맞은 다스림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된 아름다움과 적정성을 지니고 행동하기가 어떤 처지에서나 똑같이 불가능하였다. 들뜬 무리가 그를 찬탄할지도 모르고 그들의 무지한 칭찬에 그의 허영이 이따금 부풀어 자기 시인에 가까운 무엇이 될지도 모르나, 그래도 그가 자기 가슴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눈길을 돌릴 때면 그는 자기 동기 전부의 터무니없음과 비천함을 속으로 알고 있었고, 자기가 받을 만하다고 아는 경멸, 그리고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빛으로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본다면 틀림없이 그에게 쏟아부을 저 경멸을 생각하며 속으로 얼굴을 붉히고 떨었다. 반대로 지혜로운 사람, 곧 자기 정념이 모두 자기 본성의 으뜸되는 원리인 이성과 적정성에 대한 사랑에 완전히 굴복한 사람에게는, 시인을 받을 만하게 행동하기가 어떤 자리에서나 똑같이 쉬웠다. 그가 번영에 있었다면 그는 쉽게 다스릴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를 유혹이 적은 형편에 자기를 붙여 준 것에 유피테르13께 감사를 올렸다. 그가 역경에 있었다면 그는 똑같이, 이 인생이라는 광경을 이끄는 이에게, 자기에게 기운찬 맞수를 붙여 준 것에 감사를 올렸다. 그 겨룸은 더 격렬하겠으나 그 승리는 더 영광스럽고 그만큼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자신의 아무런 잘못 없이 우리에게 닥친,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완전한 적정성을 지니고 처신하는 저 곤궁에 무슨 부끄러움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므로 거기에는 아무런 재앙도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가장 큰 좋음과 이익이 있다. 용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어떤 경솔함 때문도 아니게 운수가 자기를 몰아넣은 저 위험 속에서 의기양양해한다. 그 위험은 저 영웅다운 담대함을 발휘할 기회를 주며, 그 발휘는 남보다 뛰어난 적정성과 마땅히 받을 찬탄을 의식하는 데서 흘러나오는 저 드높은 기쁨을 준다. 자기 모든 훈련의 주인이 된 사람은 가장 힘센 자와 자기 힘과 활동을 겨루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와 똑같이 자기 모든 정념의 주인이 된 사람은 우주를 관장하는 이가 자기를 어느 형편에 놓는 것이 알맞다고 여기든 그 형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 신적 존재의 너그러움은 그에게 어떤 처지에서도 그것을 넘어서게 해 주는 덕을 마련해 주었다. 즐거움이라면 그는 그것을 멀리할 절제를 지니고 있고, 고통이라면 그는 그것을 견딜 한결같음을 지니고 있으며, 위험이나 죽음이라면 그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아량과 굳셈을 지니고 있다. 그는 섭리가 정한 운명을 결코 탓하지 않으며, 자기가 어그러졌을 때 우주가 어지럽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는 자애심이 넌지시 일러 주는 대로, 자기를 자연의 다른 모든 부분과 갈라져 떨어진 하나의 전체, 스스로에 의하여 스스로를 위하여 보살펴져야 할 전체로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 본성과 세계의 위대한 정신이 자기를 바라볼 것이라고 스스로 상상하는 그 빛으로 자기를 바라본다. 그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저 신적 존재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며, 자기를 전체의 편의에 따라 처리되어야 하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하는 저 거대하고 끝없는 체계의 한 원자, 한 알로 여긴다. 인생의 모든 일을 이끄는 지혜를 확신하는 까닭에, 그는 어떤 몫이 자기에게 떨어지든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우주의 여러 부분의 모든 이음과 매임을 자기가 다 알았더라면 바로 그 몫을 자기 스스로 바랐을 것임에 만족한다. 그것이 삶이라면 그는 살기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것이 죽음이라면, 자연이 여기서 자기가 있어야 할 까닭을 더는 갖지 않을 터이므로 그는 자기가 불려 가는 곳으로 기꺼이 간다. 어느 스토아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어떤 운수가 닥칠 수 있든 나는 똑같은 기쁨과 흐뭇함으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부유함이든 가난함이든, 즐거움이든 고통이든, 건강이든 병이든 다 한가지다. 또한 나는 신들이 어떤 점에서든 내 정해진 몫을 바꾸어 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그들에게 무엇이든, 그들의 너그러움이 이미 베풀어 준 것을 넘어서 청한다면, 그것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그들이 바라는지 미리 알려 달라는 것이겠고, 그리하여 내가 내 뜻으로 스스로 그 형편에 나를 놓고 그들이 나누어 준 몫을 얼마나 명랑하게 껴안는지를 보여 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겠다. 에픽테토스14는 말한다. 내가 배를 타고 나아가려 할 때면15 나는 가장 좋은 배와 가장 좋은 뱃사공을 고르고, 내 형편과 의무가 허락하는 가장 좋은 날씨를 기다린다. 신들이 내 행실을 이끌도록 내게 준 원리인 신중과 적정성이 나에게 이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배의 튼튼함이나 뱃사공의 솜씨로도 버텨 내지 못할 듯한 폭풍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 결과를 두고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모두 이미 해 놓았다. 내 행실을 이끄는 이들은 나에게 비참해지라고, 불안해하고 낙담하고 두려워하라고 결코 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을지 항구에 닿을지는 유피테르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온전히 그의 결정에 맡기며, 그가 어느 쪽으로 정할 듯한지를 헤아리느라 결코 내 잠을 깨뜨리지 않고, 무엇이 오든 똑같이 개의치 않고 똑같이 마음 놓은 채 받아들인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었다. 그것은 아량의 가장 고귀한 가르침을 주는 철학이며, 영웅과 애국자를 길러 내는 가장 좋은 학교이며, 그 가르침의 대부분에는 아무런 반론도 있을 수 없다. 다만 그들이 인간 본성의 손이 도무지 닿지 않는 완전함을 겨냥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는 저 명예로운 반론 하나만은 있을 수 있다. 지금은 그것을 살펴보려고 멈추지 않으려 한다. 나는 앞서 말한 것을 뒷받침하여, 가장 무서운 재난이 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재난은 아니라는 점만 말해 두려 한다. 큰 불운 아래서보다 작은 재앙 아래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흔히 더 창피하다. 앞의 것은 아무런 동감도 일으키지 않지만, 뒤의 것은 당하는 쪽의 괴로움에 다가가는 동감은 일으키지 못할지라도 매우 생생한 연민은 불러낸다. 그러므로 뒤의 경우에 관찰자들의 감정은 당하는 쪽의 감정에서 덜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들의 온전하지 못한 함께 느끼는 마음은 그가 자기 비참을 버텨 내는 데 얼마간 도움을 준다. 흥겨운 모임 앞에서 신사는 피와 상처를 뒤집어쓰고 나타나기보다 오물과 누더기를 뒤집어쓰고 나타나는 일을 더 창피하게 여길 것이다. 뒤의 처지는 그들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끌겠지만, 앞의 처지는 그들의 웃음을 자극할 것이다. 죄인을 형틀16에 세우라고 명하는 판관은 그를 처형대로 보내라고 선고했을 때보다 그를 더 크게 불명예에 빠뜨린다. 몇 해 전 자기 군대의 앞에서 장군 한 사람을 지팡이로 때린 저 위대한 군주는 그를 돌이킬 수 없이 망신시켰다. 그의 몸을 총으로 쏘아 관통했더라면 그 벌은 훨씬 작았을 것이다. 명예의 법17에 따르면 지팡이로 때리는 일은 불명예를 씌우지만 칼로 치는 일은 그렇지 않은데, 그 까닭은 뻔하다. 저 더 가벼운 벌이 불명예를 모든 재앙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여기는 신사에게 내려질 때, 인간애가 있고 도량이 큰 국민 사이에서는 그것이 어느 벌보다도 가장 무서운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 지위의 사람에 관해서는 그런 벌이 두루 치워졌으며, 법은 여러 자리에서 그들의 목숨을 거두면서도 거의 모든 자리에서 그들의 명예를 존중한다. 지체 있는 사람을 매질하거나 그를 어떤 죄 때문이든 형틀에 세우는 일은 러시아의 정부를 빼면 어떤 유럽의 정부도 저지를 수 없는 만행이다.
용감한 사람은 처형대로 끌려가는 일로는 경멸받을 만해지지 않으나, 형틀에 세워지는 일로는 그렇게 된다. 앞의 처지에서 그의 행동은 그에게 두루 미치는 존중과 찬탄을 얻어 줄 수 있다. 뒤의 처지에서는 어떤 행동도 그를 유쾌하게 만들 수 없다. 관찰자들의 동감이 앞의 경우에 그를 받쳐 주어, 자기 비참을 자기 혼자만 느끼고 있다는 저 의식인 부끄러움, 모든 감정 가운데 가장 견딜 수 없는 그 부끄러움에서 그를 지켜 준다. 뒤의 경우에는 아무런 동감도 없다. 설령 조금 있다 해도 그것은 하찮은 그의 고통에 대한 동감이 아니라, 그 고통에 따라오는 동감의 결여를 그가 의식하는 데 대한 동감이다. 그것은 그의 슬픔에 대한 동감이 아니라 그의 부끄러움에 대한 동감이다. 그를 측은히 여기는 이들은 그를 위하여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도 똑같이 풀이 죽으며, 죄로써는 아니어도 벌로써 자기가 돌이킬 수 없이 낮추어졌다고 느낀다. 반대로 결단을 지니고 죽는 사람은 자연히 존중과 시인의 곧은 눈길로 바라보이는 까닭에, 그 자신도 똑같이 굽히지 않는 얼굴을 지닌다. 그리고 그 죄가 그에게서 남들의 존경을 앗아 가지 않는다면 그 벌은 결코 그것을 앗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기 처지가 누군가에게 경멸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리라는 의심을 품지 않으며, 적정성을 지니고 완전한 고요뿐 아니라 개가와 드높음의 기품까지도 갖출 수 있다.
“큰 위험에는 그 매력이 있다”고 레츠 추기경18은 말한다. “일을 그르칠 때조차 얻을 영광이 얼마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위험에는 무서운 것밖에 없다. 성공의 결여에는 늘 명성의 상실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의 격률은 우리가 바로 지금 벌에 관하여 살펴본 것과 같은 바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덕은 고통과 가난과 위험과 죽음을 넘어서며, 그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데 자기 힘을 끝까지 쏟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자기 비참이 모욕과 조롱에 드러나는 일, 개선 행렬에 끌려가는 일, 경멸의 손가락이 가리키도록 세워지는 일은 그 한결같음이 훨씬 더 꺾이기 쉬운 처지다. 사람들의 경멸에 견주면 다른 모든 재앙은 쉽게 견딜 수 있다.
주
1. 늘 유쾌한 것인 시인의 감정을 내가 동감 위에 세웠으므로, 거북한 동감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내 체계와 어긋난다는 반론이 나에게 제기되었다. 나는 이렇게 답한다. 시인의 감정에는 눈여겨보아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관찰자의 동감에서 나온 정념이고, 둘째는 자기 안의 이 동감의 정념과 당사자 안의 본래 정념이 완전히 일치함을 그가 살펴보는 데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시인의 감정을 본래 이루는 것은 뒤의 감정이며, 그것은 늘 유쾌하고 즐겁다. 앞의 것은 본래 정념의 성질에 따라 유쾌할 수도 거북할 수도 있는데, 앞의 것은 그 본래 정념의 특징을 늘 어느 정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소리가 각각 따로 들으면 거칠 수 있으나, 그 둘이 완전한 화음을 이룬다면 그 어울림과 일치를 지각하는 일은 유쾌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2. 옮긴이 — 카토.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소카토), 기원전 95~46년. 로마의 정치가. 카이사르에게 맞선 원로원파의 지도자였다.
3. 옮긴이 — 세네카.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기원전 4년경~기원후 65년.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 카토의 죽음을 다룬 대목은 『섭리에 관하여』에 있다.
4. 옮긴이 — 소크라테스. 기원전 470년경~399년. 아테네의 철학자. 독배를 마시는 장면은 플라톤의 『파이돈』에 나온다.
5. 옮긴이 — 비롱 공작. 샤를 드 공토, 비롱 공작, 1562~1602년. 프랑스의 원수. 앙리 4세에게 반역을 꾀한 죄로 참수되었다.
6. 옮긴이 — 찰스 1세. 1600~1649년. 잉글랜드 왕. 내전에서 패한 뒤 처형되었다.
7. 옮긴이 — 제임스 2세. 1633~1701년. 잉글랜드 왕. 본문의 「혁명」은 그가 왕위에서 밀려난 1688년의 명예혁명을, 앞의 「왕가의 복위」는 1660년의 왕정복고를 가리킨다.
8. 옮긴이 — 루이 14세. 1638~1715년. 프랑스 왕. 저본의 Lewis XIV는 당대 영어의 표기다. 인용된 사관은 볼테르로 알려져 있다.
9. 옮긴이 — 파울루스 아이밀리우스.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 기원전 229년경~160년. 로마의 집정관. 기원전 168년 피드나에서 마케도니아를 꺾었다. 본문의 「마케도니아 왕」은 페르세우스다.
10. 옮긴이 — 라로슈푸코 공.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 1613~1680년. 프랑스의 문인. 『잠언집』의 저자다.
11. 옮긴이 — 시 참사원. 원문 alderman. 도시 자치체의 참사원. 본문의 「자리」는 원문 place이며, 공식 석상에서의 서열을 뜻한다.
12. 옮긴이 —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기원전 85~42년. 레오니다스는 기원전 540년경~480년, 테르모필라이에서 전사한 스파르타 왕. 카이사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00~44년.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기원전 356~323년.
13. 옮긴이 — 유피테르. 로마 신화의 최고신. 스토아 학파는 이 이름으로 우주를 이끄는 섭리를 가리켰다.
14. 옮긴이 — 에픽테토스. 50년경~135년경. 스토아 철학자. 이 대목은 아리아노스가 엮은 『담화록』의 내용이다.
15. 옮긴이 — 저본에는 이 자리가 fail(실패하다)로 인쇄되어 있으나, 뒤에 배와 뱃사공과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sail(항해하다)의 오식이다. 여기서는 sail로 읽어 옮겼다.
16. 옮긴이 — 형틀. 원문 pillory. 죄인의 목과 손을 나무 틀에 끼운 채 사람들 앞에 세워 두고 창피를 주던 형구.
17. 옮긴이 — 명예의 법. 원문 laws of honour. 결투를 비롯하여 신사 계층이 명예를 다루던 당대의 관행을 이르는 말이며, 제정된 법률이 아니다.
18. 옮긴이 — 레츠 추기경. 장 프랑수아 폴 드 공디, 1613~1679년.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정치가. 『회상록』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