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이 책은 찰스 다윈의 《On the Origin of Species》 1859년 초판을 한국어로 완역한 것이다. 요약하거나 간추리지 않았다. 원문 한 문단이 번역문 한 문단이며, 열다섯 개 장의 문단 수가 원문과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다.
왜 초판인가
다윈은 살아 있는 동안 이 책을 여섯 판까지 고쳤다. 마지막 6판(1872)은 저자가 손본 최종본이지만, 13년 동안 쏟아진 반론에 답하며 유보를 겹겹이 덧붙인 판이기도 하다. 그 반론 가운데 상당수는 20세기에 해소되었다. 젠킨의 혼합유전도, 켈빈이 계산한 지구의 나이도 지금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판은 다윈이 논증을 처음 내놓았을 때의 모습이다. 군더더기가 가장 적고 뼈대가 가장 또렷하다. 오늘 이 책을 읽어 무언가를 얻으려는 사람에게는 이 판이 낫다고 보았다.
「진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원문에 evolution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evolved가 책을 통틀어 단 한 번,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낱말로 나올 뿐이다.
다윈이 자기 이론을 부르는 말은 descent with modification, 곧 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 그는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고, 이 책에서 그 조심스러움은 장식이 아니라 논증의 일부다. 현대 독자에게 익숙하다는 이유로 「진화」를 흩뿌리면 다윈이 쓰지 않은 말로 다윈을 옮기는 것이 되고, 그가 돌려 말한 자리가 모두 평평해진다. 그래서 이 번역은 본문 어디에도 「진화」를 쓰지 않았다. 마지막 낱말도 「전개되어 왔다」로 옮겼다. 그 자리에 각주를 달아 두었다.
같은 이유로 「적자생존」도 쓰지 않았다. 스펜서의 이 표현을 다윈이 받아들인 것은 5판(1869)에서다. 초판에는 없는 말이다.
당대의 말을 그대로 두었다
본문에는 오늘날 쓰지 않는 말이 나온다. savage(미개인), negro(흑인), Hottentot(호텐토트), Esquimaux(에스키모) 같은 19세기 박물학자의 어휘다.
순화하지 않았다. 이 책은 사료이기도 하다. 다윈이 어떤 언어 안에서 생각했는지가 지워지면, 그가 《인간의 유래》(1871)에서 노예제를 정면으로 반대한 일도, 당대 다원발생설과 그가 어디서 갈라섰는지도 읽을 수 없게 된다. 역자가 본문을 손보면 독자는 판단할 재료 자체를 잃는다.
대신 각주를 달았다. 각주에는 그 말이 당시 무엇을 가리켰는지, 오늘날 통용되는 명칭은 무엇인지, 그리고 원문을 그대로 두었다는 사실을 적었다. 예컨대 호텐토트는 현재 코이코이족이라 부르며, Hottentot은 남아프리카에서 멸칭으로 분류된다. 각주에서 다윈을 꾸짖지는 않았다. 사실만 적고 판단은 읽는 이에게 맡긴다.
race는 생물의 계통을 뜻할 때 모두 품종으로 옮겼다. 책의 부제에 나오는 Favoured Races도 인종이 아니라 품종이다. 다만 다윈이 사람 집단을 가리켜 쓴 세 자리(6장·11장·13장)만은 인종으로 옮겼다. 사람에게 「품종」을 쓰면 원문에 없는 뜻이 실리기 때문이다.
도해에 대하여
4장의 「형질 분기」 도해는 이 책에 실린 단 하나의 그림이다. 그런데 이 번역이 저본으로 삼은 전자 텍스트에는 도판이 빠져 있다. 그래서 본문의 서술만 가지고 새로 그렸다. 원종의 배치, 갈라지는 가지의 수, 끊긴 가지가 뜻하는 것, 가로선의 압축 구간까지 모두 다윈이 본문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그 밖에
- 각주는 모두 옮긴이가 붙인 것이다. 원문에는 각주가 없다. - 각주로 다윈을 교정하지 않았다. 그가 틀린 자리도 그대로 옮겼다. 5장에서 그는 획득형질의 유전에 상당한 무게를 싣는데, 오늘날 폐기된 설명이다. 덧칠하면 그가 무엇을 몰랐는지가 지워지고, 무엇을 해냈는지도 함께 지워진다. - 라틴어 학명은 옮기지 않았다. 확립된 한국어 통용명이 있을 때만 첫 등장에 괄호로 병기했다. 없는 이름은 지어내지 않았다. - 단위는 원문대로 두었다. 피트·마일·야드·패덤을 미터법으로 바꾸지 않고, 첫 등장에 각주로 환산값을 적었다. - 저본 말미의 색인은 싣지 않았다. 종이책 쪽번호에 기대어 있어 전자책에서 쓸모가 없다. - 저본의 오식은 조용히 고치지 않고 각주에 밝혔다.
권리
찰스 다윈(1809~1882)의 원저는 퍼블릭 도메인이다. 영어가 원문이므로 중간 역자가 없고, 따라서 중역이 아니다. 이 한국어 번역은 CC BY-NC 4.0으로 공개한다. 출처를 밝히면 자유로이 나누어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