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요약과 결론
자연선택 이론에 놓인 난점의 요약. 그 이론에 유리한 일반적 사정과 특수한 사정의 요약. 종이 불변한다고 널리 믿게 된 원인. 자연선택 이론을 어디까지 넓힐 수 있는가. 이 이론을 받아들일 때 자연사 연구에 미칠 영향. 맺는 말.
이 책 전체가 하나의 긴 논증이므로, 중심이 되는 사실과 추론을 짧게 요약해 두면 독자에게 편리할 것이다.
자연선택을 통한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에 맞서 여러 무거운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 반론들이 지닌 힘을 남김없이 드러내려고 애썼다. 더 복잡한 기관과 본능이, 사람의 이성과 닮기는 했으되 그보다 뛰어난 수단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저마다 그것을 지닌 개체에게 이로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은 변이가 쌓여서 완성되었다는 것보다 처음에 더 믿기 어려워 보이는 말은 없다. 그렇지만 이 난점은 우리의 상상에는 도저히 넘을 수 없을 만큼 커 보여도, 다음의 명제들을 인정한다면 실재하는 난점으로 볼 수 없다. 곧 우리가 살펴볼 만한 어떤 기관이나 본능이든 그 완전함에는 여러 등급이 있어서 저마다 제 나름으로 쓸모 있는 등급들이 지금 실제로 있거나 있을 수 있었다는 것, 모든 기관과 본능이 아무리 작은 정도로나마 변이한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구조나 본능에서 이로운 쪽으로 벗어난 것을 저마다 보존하는 쪽으로 이끄는 생존경쟁이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이 명제들이 참이라는 데는 다툴 여지가 없다.
많은 구조가 어떤 등급을 밟아 완성되었는지는 짐작조차 몹시 어렵다는 것이 분명하며, 끊기고 쇠해 가는 생물 무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Natura non facit saltum」1이라는 격률이 말해 주듯이 우리는 자연에서 기묘한 등급을 하도 많이 보기에, 어떤 기관이나 본능이, 또는 어떤 생물 전체가 여러 등급을 밟아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을 리 없다고 말할 때에는 몹시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연선택 이론에 유달리 어려운 사례가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묘한 것 하나는 같은 개미 무리 안에 뚜렷이 갈리는 두세 계급의 일꾼, 곧 번식력 없는 암컷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난점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는지 보이려고 애썼다.
종을 처음 교배했을 때 거의 어김없이 나타나는 불임성은 변종을 교배했을 때 거의 어김없이 나타나는 가임성과 매우 두드러진 대조를 이루는데, 이에 관해서는 8장 끝에 실은 사실의 요약을 읽어 주기를 독자에게 청한다. 내가 보기에 그 사실들은 이 불임성이 두 나무를 서로 접붙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주어진 성질이 아니라, 서로 교배한 종들의 생식 계통이 체질에서 서로 다른 데 딸려 오는 것임을 결정적으로 보여 준다. 같은 두 종을 서로 바꾸어 교배할 때, 곧 한 종을 먼저 아비로 쓰고 다음에 어미로 쓸 때 그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데서 우리는 이 결론이 참임을 본다.
변종을 서로 교배했을 때의 가임성과 그 혼종 자손의 가임성을 어김없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대체로 가임인 것이 놀랄 일도 아니다. 변종의 체질도 생식 계통도 깊이 변화했을 법하지 않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렇다. 게다가 실험에 쓰인 변종은 대부분 사육 아래에서 생겨났는데, 사육은 보기에 불임성을 없애는 쪽으로 기우는 듯하니 그것이 불임성을 만들어 내기도 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잡종의 불임성은 첫 교배의 불임성과는 사뭇 다른 경우다. 잡종의 생식 기관은 기능이 어느 정도 힘을 잃은 상태인 데 반해 첫 교배에서는 양쪽의 기관이 모두 온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생물이 조금 다른 새로운 생활 조건 탓에 체질이 흐트러져 어느 정도 불임이 되는 것을 우리는 늘 보고 있으니, 잡종이 어느 정도 불임인 것에 놀랄 것은 없다. 잡종의 체질은 서로 다른 두 짜임새가 섞여 이루어진 것이므로 흐트러지지 않을 도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평행 관계는 또 하나의 평행하되 방향은 정반대인 사실 무리가 뒷받침한다. 곧 모든 생물은 생활 조건이 조금 바뀌면 기운과 가임성이 늘고, 조금 변화한 형태나 변종의 자손은 교배를 거치면 기운과 가임성이 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생활 조건의 큰 변화와 크게 변화한 형태들 사이의 교배가 가임성을 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 조건의 작은 변화와 덜 변화한 형태들 사이의 교배가 가임성을 늘린다.
지리적 분포로 눈을 돌리면,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이 만나는 난점은 충분히 무겁다. 같은 종의 모든 개체, 그리고 같은 속이나 그보다 높은 무리에 드는 모든 종은 공통의 어버이에게서 내려왔어야 하며, 따라서 지금 세계의 아무리 멀고 외딴 곳에서 발견되더라도 그것들은 잇따른 세대를 거치는 동안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건너갔어야 한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우리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렇지만 어떤 종은 매우 오랜 기간, 햇수로 재면 엄청나게 긴 기간 동안 종 고유의 같은 형태를 지켜 왔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으므로, 같은 종이 이따금 널리 퍼져 있다는 것에 너무 무게를 두어서는 안 된다. 아주 긴 시간 동안에는 여러 수단을 통해 널리 이주할 기회가 언제나 넉넉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끊어지거나 동강 난 분포 범위는 중간 지역에서 그 종이 절멸한 것으로 설명될 때가 많다. 근래의 시기에 지구에 영향을 미친 갖가지 기후 변화와 지리적 변화가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우리가 아직 매우 모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러한 변화가 이주를 크게 도왔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 예로 나는 빙하기2가 세계 곳곳에서 같은 종과 대표종의 분포에 얼마나 강한 영향을 미쳤는지 보이려고 애썼다. 이따금 작용하는 수많은 운반 수단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직 깊이 모른다. 매우 멀고 외딴 지역에 사는 같은 속의 서로 다른 종에 관해서는, 변화의 과정이 느릴 수밖에 없었던 만큼 온갖 이주 수단이 아주 긴 기간에 걸쳐 쓰일 수 있었을 터이고, 따라서 같은 속의 종이 널리 퍼져 있다는 난점은 어느 정도 가벼워진다.
자연선택 이론에서는 끝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간 형태가 있어서 각 무리의 모든 종을 오늘날의 변종만큼이나 고운 등급으로 이어 주고 있었어야 하니, 왜 우리는 그 잇는 형태들을 우리 둘레 어디서나 보지 못하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왜 모든 생물이 풀어낼 수 없는 혼돈 속에 뒤섞여 있지 않은가? 지금 있는 형태에 관해서는, 우리에게는 그것들 사이를 곧바로 잇는 고리를 (드문 경우를 빼고는) 찾아낼 권리가 없으며 다만 각 형태와 절멸해 밀려난 어떤 형태 사이의 고리를 찾아낼 권리가 있을 뿐임을 떠올려야 한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넓은 지역, 그리고 한 종이 차지한 구역에서 그와 가까운 종이 차지한 다른 구역으로 옮겨 가는 동안 기후와 그 밖의 생활 조건이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조금씩 달라지는 넓은 지역에서라도, 그 중간 지대에서 중간 변종을 자주 찾으리라고 기대할 정당한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어느 한 시기에 변화를 겪고 있는 종은 몇 되지 않으며 모든 변화가 느리게 이루어진다고 믿을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중간 지대에 처음에는 아마 있을 중간 변종이 양쪽의 가까운 형태에게 밀려나기 쉽다는 것도 보였다. 뒤의 것들은 수가 더 많으므로 대체로 수가 더 적은 중간 변종보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개량될 터이며, 그리하여 중간 변종은 결국 밀려나고 절멸하게 된다.
세계의 살아 있는 주민과 절멸한 주민 사이를, 그리고 잇따르는 시기마다 절멸한 종과 그보다 더 오래된 종 사이를 잇는 무한한 고리가 절멸해 버렸다는 이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왜 모든 지질 누층이 그러한 고리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왜 화석 유해를 모아 놓은 어떤 수집품도 생명의 형태가 등급을 이루며 변전해 왔다는 뚜렷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런 증거를 만나지 못하며, 이것이 내 이론에 맞서 들이댈 수 있는 수많은 반론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가장 힘센 것이다. 또 왜 가까운 종으로 이루어진 무리 전체가, 물론 그렇게 보일 뿐인 때가 많기는 하지만, 여러 지질 단계에 갑작스레 나타난 듯이 보이는가? 왜 우리는 실루리아계3 아래에서 실루리아기 화석 무리의 조상들의 유해가 담긴 두꺼운 지층 더미를 찾지 못하는가? 내 이론대로라면 세계 역사에서 아득히 오래되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 시대에 그러한 지층이 어딘가에는 쌓였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물음들과 무거운 반론들에 나는, 지질 기록이 대다수 지질학자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불완전하다는 가정 위에서만 답할 수 있다. 얼마만큼의 생물 변화든 그것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 반박은 할 수 없다. 흘러간 시간은 사람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박물관에 든 표본의 수는, 분명히 살았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대에 견주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종을 하나 또는 여럿의 종의 어버이로 알아보려면 그것들의 과거 상태 곧 어버이 상태와 현재 상태 사이를 잇는 중간 고리를 여럿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러 고리를 우리가 찾아내리라고는 지질 기록이 불완전한 탓에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지금 있는 의심스러운 형태 가운데 아마 변종일 것을 여럿 들 수 있겠으나, 뒷날의 시대에 화석 고리가 하도 많이 발견되어 박물학자들이 흔한 견해에 따라 이 의심스러운 형태들이 변종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할 수 있게 되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어떤 두 종 사이의 고리가 대부분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는 한, 고리나 중간 변종이 하나 발견되더라도 그것은 그저 또 하나의 구분되는 종으로 분류될 것이다. 세계에서 지질학적으로 탐사된 곳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화석 상태로, 적어도 많은 수로 보존될 수 있는 생물은 몇몇 강에 드는 것뿐이다. 널리 퍼져 사는 종이 가장 많이 변이하고 변종은 처음에 한 지역에만 있을 때가 많은데, 이 두 원인이 모두 중간 고리를 발견할 가망을 낮춘다. 지역 변종은 상당히 변화하고 개량되기까지는 다른 먼 지역으로 퍼져 나가지 않으며, 마침내 퍼져 나가 어느 지질 누층에서 발견되면 그곳에 갑자기 창조된 듯이 보여 그저 새로운 종으로 분류될 것이다. 대부분의 누층은 띄엄띄엄 쌓였고, 그것이 쌓인 기간은 종 고유의 형태가 이어지는 평균 기간보다 짧았으리라고 나는 믿는 쪽으로 기운다. 잇따르는 누층들은 엄청나게 긴 공백의 시간으로 서로 갈라져 있다. 뒷날의 깎임을 견딜 만큼 두껍게 화석을 품은 누층은 바다 밑바닥이 가라앉는 곳에 많은 퇴적물이 쌓일 때에만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융기하는 시기와 높이가 그대로인 시기가 번갈아 드는 동안 기록은 비어 있을 것이다. 뒤의 시기에는 아마 생명의 형태에 변이가 더 많았을 터이고, 침강하는 시기에는 절멸이 더 많았을 것이다.
가장 낮은 실루리아계 지층 아래에 화석을 품은 누층이 없다는 것에 관해서는, 나는 9장에서 내놓은 가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질 기록이 불완전하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겠으나, 그것이 내가 요구하는 정도까지 불완전하다는 데 동의하려 드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충분히 긴 시간의 간격을 놓고 보면 지질학은 모든 종이 변했다고 뚜렷이 선언하며, 그것들은 내 이론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변했다. 느리게, 그리고 등급을 밟아 변했기 때문이다. 잇따르는 누층에서 나온 화석 유해가 시간상 서로 멀리 떨어진 누층에서 나온 화석보다 언제나 훨씬 가까운 사이라는 데서 우리는 이것을 뚜렷이 본다.
내 이론에 맞서 정당하게 들이댈 수 있는 몇 가지 주된 반론과 난점을 모두 모으면 이러하며, 나는 이제 그것들에 줄 수 있는 답과 설명을 짧게 요약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난점들을 너무나 무겁게 느껴 왔으므로 그 무게를 의심할 수가 없다. 그러나 특히 눈여겨볼 것은, 더 중요한 반론들이 우리가 모른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문제들에 걸려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모르는지조차 모른다. 우리는 가장 단순한 기관과 가장 완전한 기관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이행의 등급을 모두 알지 못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작용한 갖가지 분포 수단을 우리가 다 안다고 내세울 수 없고, 지질 기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안다고 내세울 수도 없다. 이 여러 난점이 무겁기는 하지만, 내 판단으로 그것들이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을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이제 논증의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 보자. 사육 아래에서 우리는 많은 변이를 본다. 이것은 주로 생식 계통이 생활 조건의 변화에 유달리 민감한 데서 오는 듯하다. 그리하여 이 계통은 힘을 아주 잃지 않은 한 어버이 형태와 똑같은 자손을 낳는 데 실패한다. 변이는 복잡한 여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성장의 상관이, 쓰임과 쓰이지 않음이, 그리고 생활의 물리적 조건이 곧바로 미치는 작용이 변이를 다스린다. 우리가 사육하는 생물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 양이 컸으며 변화가 오랜 기간에 걸쳐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은 안전하게 미루어 알 수 있다. 생활 조건이 같은 채로 머무는 한,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유전된 변화는 거의 무한한 수의 세대에 걸쳐 계속 유전되리라고 믿을 근거가 있다. 다른 한편 변이가 한번 작용하기 시작하면 아주 그치지는 않는다는 증거가 우리에게 있다. 가장 오래전부터 사육해 온 생물에서도 새로운 변종이 여전히 이따금 생겨나기 때문이다.
사람이 실제로 변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뜻하지 않게 생물을 새로운 생활 조건에 내놓을 뿐이고, 그러면 자연이 그 짜임새에 작용해 변이를 일으킨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이 그에게 준 변이를 고를 수 있고 실제로 고르며, 그리하여 그것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쌓아 간다. 그는 이렇게 하여 동물과 식물을 자기의 이익이나 즐거움에 맞춘다. 그는 이 일을 체계를 세워 할 수도 있고, 품종을 바꾸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이 그때그때 자기에게 가장 쓸모 있는 개체를 남겨 두는 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할 수도 있다. 그가 잇따르는 세대마다 배우지 못한 눈으로는 도무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은 개체 차이를 골라내어 품종의 성격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선택 과정이야말로 가장 뚜렷이 구분되고 가장 쓸모 있는 사육 품종을 만들어 낸 큰 힘이었다. 사람이 만들어 낸 품종 가운데 많은 것이 자연의 종이 지닌 성격을 상당히 띠고 있다는 것은, 그 가운데 아주 많은 것이 변종인지 본디부터 있던 종인지를 두고 풀리지 않는 의심이 있다는 데서 드러난다.
사육 아래에서 그토록 효과 있게 작용해 온 원리가 자연 아래에서는 작용하지 않았으리라고 볼 뚜렷한 이유는 없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생존경쟁 속에서 유리한 개체와 품종이 보존되는 데서 우리는 가장 힘세고 늘 작용하는 선택의 수단을 본다. 생존경쟁은 모든 생물에게 공통된 높은 기하급수적 증가 비율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온다. 이 높은 증가율은 계산으로, 유별난 계절이 잇따를 때의 결과로, 그리고 3장에서 설명한 귀화의 결과로 증명된다. 살아남을 수 있는 수보다 많은 개체가 태어난다. 저울 위의 낟알 하나가 어느 개체가 살고 어느 개체가 죽을지를, 어느 변종이나 종이 수를 늘리고 어느 것이 수를 줄이거나 끝내 절멸할지를 결정할 것이다. 같은 종의 개체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가장 가까이 경쟁하게 되므로 경쟁은 대체로 그들 사이에서 가장 모질 것이다. 같은 종의 변종들 사이에서도 거의 그만큼 모질 것이고, 그다음으로 모진 것이 같은 속의 종들 사이의 경쟁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계단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생물들 사이에서도 경쟁이 매우 모질 때가 많다. 어떤 나이에나 어떤 계절에나 한 생물이 그와 경쟁하는 것들보다 아주 조금이라도 유리하거나, 둘레의 물리적 조건에 아무리 작은 정도로나마 더 잘 들어맞으면 그것이 저울을 기울게 할 것이다.
암수가 갈린 동물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암컷을 차지하려는 수컷들 사이에 경쟁이 있을 터이다. 가장 기운찬 개체, 또는 자기의 생활 조건과 가장 잘 싸워 온 개체가 대체로 가장 많은 자손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성공은 특별한 무기나 방어 수단을 지녔는지에, 또는 수컷의 매력에 달려 있을 때가 많으며, 아주 작은 유리함이 승리를 가져올 것이다.
지질학이 어느 땅에서나 큰 물리적 변화가 있었다고 뚜렷이 선언하고 있으니, 생물이 사육 아래 조건이 바뀔 때 대체로 변이해 온 것과 꼭 같이 자연 아래에서도 변이했으리라고 우리는 기대할 만했다. 그리고 자연 아래에 조금이라도 변이가 있다면, 자연선택이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설명할 길 없는 사실이 될 것이다. 자연 아래의 변이량이 엄격히 한정된 양이라는 주장이 자주 나왔지만, 그 주장은 도무지 증명될 수 없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형질에만, 그것도 마음 내키는 대로 작용하면서도 짧은 기간 안에 자기가 사육하는 생물에서 한낱 개체 차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큰 결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자연 아래의 종에 적어도 개체 차이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차이 말고도, 모든 박물학자는 분류 저작에 적어 둘 만큼 뚜렷이 구분된다고 그들이 여기는 변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왔다. 개체 차이와 작은 변종 사이에, 또는 더 뚜렷이 구분되는 변종과 아종과 종 사이에 누구도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다. 박물학자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수많은 대표 형태에 매기는 등급이 얼마나 서로 다른지를 보라.
그렇다면 자연 아래에 변이가 있고 또 늘 작용하고 선택할 채비가 되어 있는 힘센 작인이 있는데, 생물에게 그 지극히 복잡한 삶의 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쓸모 있는 변이가 보존되고 쌓이고 유전되리라는 것을 무엇 때문에 의심하겠는가? 사람이 참을성으로 자기에게 가장 쓸모 있는 변이를 골라낼 수 있다면, 자연은 왜 바뀌어 가는 생활 조건 아래에서 자기가 낳은 살아 있는 것들에게 쓸모 있는 변이를 골라내지 못하겠는가? 오랜 세월 동안 작용하면서 생물 하나하나의 체질과 구조와 습성 전체를 엄격히 살펴 좋은 것은 편들고 나쁜 것은 물리치는 이 힘에 무슨 한계를 지을 수 있겠는가? 각 형태를 삶의 가장 복잡한 관계에 느리고 아름답게 맞추어 가는 이 힘에 나는 아무 한계도 볼 수 없다. 자연선택 이론은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그럴듯해 보인다. 나는 이미 그에 맞서는 난점과 반론을 될 수 있는 대로 공정하게 요약했다. 이제 이 이론에 유리한 특별한 사실과 논거로 눈을 돌려 보자.
종이란 두드러지게 구분되는 영속적인 변종일 뿐이며 종마다 처음에는 변종으로 있었다고 보면, 특별한 창조 행위로 생겨났다고 흔히 여겨지는 종과 이차적인 법칙으로 생겨났다고 인정되는 변종 사이에 왜 경계선을 그을 수 없는지를 알 수 있다. 같은 견해에서 우리는 한 속의 많은 종이 생겨나 지금 번성하고 있는 지역마다 그 종들이 왜 많은 변종을 내놓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종을 만드는 공장이 활발히 돌아간 곳에서는 대체로 그것이 아직도 돌아가고 있으리라고 기대할 만한데, 변종이 발단기의 종이라면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많은 변종 곧 발단기의 종을 내놓는 큰 속의 종들은 어느 정도까지 변종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작은 속의 종들보다 적은 차이로 서로 갈리기 때문이다. 큰 속에서 서로 가까운 종들은 또한 분포 범위가 좁아 보이며 다른 종을 둘러싸고 작은 무리를 이루어 모여 있는데,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변종을 닮았다. 종이 저마다 따로 창조되었다는 견해에서는 이런 것들이 기묘한 관계이지만, 모든 종이 처음에는 변종으로 있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종은 저마다 기하급수적인 번식 비율 때문에 수가 터무니없이 늘어나려는 경향이 있고, 각 종의 변화한 후손은 습성과 구조가 더 다양해져 자연의 살림에서 서로 크게 다른 여러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될수록 그만큼 더 수를 늘릴 수 있게 되므로, 자연선택에는 어느 한 종에서 나온 자손 가운데 가장 많이 갈라진 것을 보존하려는 꾸준한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변화가 오래 이어지는 동안 같은 종의 변종들을 특징짓는 작은 차이는 같은 속의 종들을 특징짓는 더 큰 차이로 커지는 경향이 있다. 새롭고 개량된 변종은 더 오래되고 덜 개량된 중간 변종을 어김없이 밀어내고 절멸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종은 상당한 정도로 뚜렷이 구분되는 대상이 된다. 큰 무리에 드는 우세한 종은 새롭고 우세한 형태를 낳는 경향이 있고, 그리하여 큰 무리마다 더욱 커지는 동시에 형질이 더욱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모든 무리가 그렇게 커지는 데 성공할 수는 없으니 세계가 그것들을 다 담지 못할 터이고, 따라서 더 우세한 무리가 덜 우세한 무리를 이긴다. 큰 무리가 계속 커지고 형질이 갈라지는 이 경향은, 절멸이 많이 일어나리라는 거의 피할 수 없는 사정과 더불어 모든 생명 형태가 무리 아래 무리로 배열되어 몇 안 되는 큰 강 안에 모두 들어가는 것을 설명해 준다. 그 배열은 지금 우리 둘레 어디서나 보이며 온 시간에 걸쳐 널리 퍼져 있었다. 모든 생물이 이렇게 무리를 이룬다는 이 웅대한 사실은 내가 보기에 창조 이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자연선택은 오직 작고 잇따르며 유리한 변이를 쌓음으로써만 작용하므로 크거나 갑작스러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아주 짧고 느린 걸음으로만 작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식에 새로운 것이 더해질 때마다 더욱 엄밀히 옳은 것이 되어 가는 「Natura non facit saltum」이라는 격률은 이 이론에서 그대로 이해된다. 자연이 변이에는 아낌이 없으면서 새로운 고안에는 인색한 까닭을 우리는 뚜렷이 알 수 있다. 그러나 종이 저마다 따로 창조되었다면 왜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많은 사실도 이 이론으로 설명된다. 새가 딱따구리의 형태를 하고서 땅 위의 곤충을 잡아먹도록 창조되었다는 것, 헤엄치는 일이 없거나 드문 고지대거위가 물갈퀴 달린 발을 지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 지빠귀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물속 곤충을 먹도록 창조되었다는 것, 바다제비가 바다오리나 논병아리의 삶에 알맞은 습성과 구조를 지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기묘한가! 끝없이 이어지는 다른 사례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종마다 끊임없이 수를 늘리려 애쓰고 자연선택은 저마다의 느리게 변이하는 후손을 자연에서 비어 있거나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자리에 맞출 채비를 언제나 갖추고 있다고 보면, 이 사실들은 더 이상 기묘하지 않으며 어쩌면 미리 내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연선택은 경쟁을 통해 작용하므로 각 나라의 주민을 그 이웃들이 다다른 완전함의 정도에 견주어서만 맞추어 놓는다. 그러니 어느 한 나라의 주민이, 흔한 견해대로라면 그 나라를 위해 특별히 창조되고 맞추어졌을 터인데도 다른 땅에서 온 귀화 생물에게 지고 밀려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또 자연의 온갖 고안이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 절대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고 해서, 그리고 그 가운데 얼마가 우리가 알맞다고 여기는 바에 어긋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벌의 침이 벌 자신의 죽음을 부르는 것, 수벌이 단 한 번의 행위를 위해 그토록 엄청난 수로 태어났다가 번식력 없는 자매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 우리 전나무가 놀랄 만큼 많은 꽃가루를 헛되이 버리는 것, 여왕벌이 번식력 있는 제 딸들을 본능적으로 미워하는 것, Ichneumonidæ4가 애벌레의 산 몸속에서 먹고 자라는 것, 그 밖에 그런 사례들에 놀랄 것이 없다. 자연선택 이론에서 정작 놀라운 것은 절대적 완전함에 모자라는 사례가 더 많이 관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변이를 다스리는 복잡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법칙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이른바 종 고유의 형태를 만들어 낸 법칙과 같다. 어느 쪽에서나 물리적 조건이 곧바로 미친 영향은 작았던 듯하다. 그런데도 변종이 어떤 지대에 들어가면 그것들은 이따금 그 지대에 고유한 종의 형질 얼마를 띠게 된다. 변종에서나 종에서나 쓰임과 쓰이지 않음이 어느 정도 결과를 낳은 듯하다. 이를테면 집오리와 거의 같은 상태로 날 수 없는 날개를 지닌 로거헤드오리5를 볼 때, 또는 이따금 눈이 먼 채로 굴을 파는 투쿠투쿠6를 보고 이어서 늘 눈이 멀어 있고 눈이 살가죽에 덮인 어떤 두더지를 볼 때, 또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어두운 동굴에 사는 눈먼 동물을 볼 때 이 결론을 물리치기는 어렵다. 변종에서나 종에서나 성장의 상관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해 온 듯하니, 한 부분이 변화하면 다른 부분도 어쩔 수 없이 변화한다. 변종에서나 종에서나 오래전에 잃어버린 형질로 되돌아가는 일이 일어난다. 말 속의 여러 종과 그 잡종에서 어깨와 다리에 줄무늬가 이따금 나타나는 것은 창조 이론으로는 얼마나 설명할 길이 없는가! 이 여러 종이, 집비둘기의 여러 품종이 푸르고 줄무늬가 있는 바위비둘기에게서 내려온 것과 꼭 같이 줄무늬 있는 조상에게서 내려왔다고 믿는다면 이 사실이 얼마나 간단히 설명되는가!
종이 저마다 따로 창조되었다는 흔한 견해에서는, 왜 종 고유의 형질 곧 같은 속의 종들을 서로 가르는 형질이, 그것들이 모두 함께 지니는 속의 형질보다 더 변이하기 쉬워야 하는가? 이를테면 한 속에 든 어느 한 종에서, 따로 창조되었다는 다른 종들이 서로 다른 빛깔의 꽃을 지녔을 때가 그 속의 모든 종이 같은 빛깔의 꽃을 지녔을 때보다 왜 꽃 빛깔이 더 변이하기 쉬워야 하는가? 종이 형질이 높은 정도로 영속하게 된 뚜렷이 구분되는 변종일 뿐이라면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은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뒤로 어떤 형질에서 이미 변이해 왔고 그 형질로 말미암아 종으로서 서로 구분되기에 이르렀으므로, 바로 그 형질이, 엄청나게 오랜 기간 변하지 않은 채 유전되어 온 속의 형질보다 여전히 더 변이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속의 어느 한 종에서 매우 유별나게 발달한, 따라서 우리가 자연스레 미루어 알 수 있듯이 그 종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 왜 유달리 변이하기 쉬워야 하는지는 창조 이론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내 견해에서는 이 부분이 여러 종이 공통의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뒤로 유별나게 많은 변이와 변화를 겪었으며, 따라서 이 부분이 대체로 아직도 변이하기 쉬우리라고 기대할 만하다. 그러나 박쥐의 날개처럼 가장 유별나게 발달한 부분이라도, 그것이 여러 하위 형태에 두루 있는 것이라면, 곧 매우 오랜 기간 유전되어 온 것이라면 다른 어떤 구조보다 더 변이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오래 이어진 자연선택이 그것을 한결같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으로 눈을 돌리면, 그 가운데 얼마가 놀랍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잇따르는 작고 이로운 변화의 자연선택이라는 이론에서 몸의 구조보다 더 큰 난점을 내놓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연이 같은 강에 드는 서로 다른 동물에게 저마다의 본능을 줄 때 왜 등급을 밟아 나아가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등급의 원리가 꿀벌의 놀라운 건축 능력에 얼마나 많은 빛을 던지는지 보이려고 애썼다. 습성이 본능을 바꾸는 데 이따금 작용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님은, 오래 이어진 습성의 결과를 물려받을 자손을 남기지 않는 중성 곤충의 경우에서 보는 그대로다. 같은 속의 모든 종이 공통의 어버이에게서 내려왔고 많은 것을 함께 물려받았다는 견해에서 우리는, 가까운 종들이 상당히 다른 생활 조건 아래 놓였는데도 어떻게 거의 같은 본능을 따르는지를, 이를테면 남아메리카의 지빠귀가 왜 우리 영국 종처럼 진흙으로 둥지를 바르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본능이 자연선택을 거쳐 느리게 얻어졌다는 견해에서는, 어떤 본능이 보기에 완전하지 않고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는 것도, 많은 본능이 다른 동물에게 괴로움을 준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종이 뚜렷이 구분되는 영속적인 변종일 뿐이라면, 왜 그 교배된 자손이 어버이를 닮는 정도와 방식에서, 잇따른 교배를 거쳐 서로에게 흡수되는 데서, 그 밖의 그러한 점에서, 변종이라고 인정된 것들의 교배된 자손과 똑같이 복잡한 법칙을 따르는지를 우리는 곧바로 알 수 있다. 다른 한편 종이 따로 창조되었고 변종이 이차적인 법칙으로 생겨났다면 이것들은 기묘한 사실이 될 것이다.
지질 기록이 지극히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기록이 내놓는 사실들은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을 뒷받침한다. 새로운 종은 느리게, 그리고 잇따르는 간격을 두고 무대에 올라왔으며, 같은 시간이 흐른 뒤의 변화량은 무리마다 크게 다르다. 생물 세계의 역사에서 그토록 두드러진 몫을 해 온 종과 종의 무리 전체의 절멸은 자연선택의 원리에서 거의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온다. 오래된 형태는 새롭고 개량된 형태에게 밀려날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생식의 사슬이 한번 끊어지고 나면 하나의 종도 종의 무리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우세한 형태가 차츰 퍼져 나가고 그 후손이 느리게 변화하는 까닭에, 생명의 형태는 긴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온 세계에서 동시에 변한 듯이 보인다. 각 누층의 화석 유해가 그 위아래 누층의 화석 사이에서 어느 정도 중간 성격을 띤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계승의 사슬에서 중간에 놓여 있다는 것으로 간단히 설명된다. 절멸한 모든 생물이 오늘날의 생물과 같은 체계에 들어 같은 무리에 들거나 중간 무리에 든다는 웅대한 사실은, 살아 있는 것과 절멸한 것이 공통의 어버이에게서 나왔다는 데서 따라 나온다. 오래된 조상에게서 내려온 무리들은 대체로 형질이 갈라져 왔으므로, 그 조상은 그 이른 후손과 더불어 뒤의 후손에 견주면 중간 성격을 띨 때가 많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화석이 오래된 것일수록 왜 지금 있는 무리와 그에 가까운 무리 사이에서 어느 정도 중간에 서는 일이 잦은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의 형태는 대체로 어떤 막연한 뜻에서 오래되어 절멸한 형태보다 더 높다고 여겨진다. 뒤의 더 개량된 형태가 생존경쟁에서 더 오래되고 덜 개량된 생물을 이겨 냈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그만큼 더 높다. 끝으로 같은 대륙에서 가까운 형태가 오래 이어진다는 법칙, 곧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대류, 아메리카의 Edentata7 같은 사례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한정된 땅 안에서는 오늘날의 것과 절멸한 것이 계승을 통해 자연히 가까운 사이일 터이기 때문이다.
지리적 분포로 눈을 돌려, 지난날의 기후 변화와 지리적 변화 때문에, 그리고 이따금 작용하는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흩어짐의 수단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세계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많은 이주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으로 분포의 큰 중심 사실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생물이 공간을 가로질러 분포하는 모습과 시간을 가로질러 지질학적으로 잇따르는 모습 사이에 왜 그토록 두드러진 평행 관계가 있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어느 쪽에서나 생물은 보통의 생식이라는 끈으로 이어져 있었고 변화의 수단도 같았기 때문이다. 나그네라면 누구나 놀랐을 저 놀라운 사실, 곧 같은 대륙에서 가장 다양한 조건 아래, 더위와 추위 아래, 산과 저지대에서, 사막과 늪에서 큰 강마다 그 주민 대부분이 뚜렷이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의 온전한 뜻을 우리는 본다. 그것들은 대체로 같은 조상과 같은 초기 이주자의 후손일 터이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이주라는 이 같은 원리에, 대부분의 경우 변화가 더해진 것으로, 그리고 빙하기의 도움을 받아, 우리는 가장 멀리 떨어진 산에서 가장 다른 기후 아래 몇몇 식물이 같고 다른 많은 식물이 가까운 사이인 것을, 또한 북쪽과 남쪽의 온대에 사는 바다 주민 얼마가 열대의 바다 전체로 갈라져 있으면서도 가까운 사이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두 지역이 삶의 물리적 조건은 같이 내놓더라도, 그 두 곳이 오랜 기간 서로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면 그 주민이 크게 다르다고 해서 놀랄 것이 없다. 생물과 생물의 관계가 모든 관계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또 두 지역은 어떤 제삼의 원천에서 또는 서로에게서 여러 시기에 저마다 다른 비율로 이주자를 받아들였을 터이므로, 두 지역에서 변화가 밟아 간 길은 어쩔 수 없이 서로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와 그 뒤의 변화라는 이 견해에서, 우리는 왜 대양의 섬에 사는 종은 적은데 그 가운데 많은 것이 그 섬에만 있는 고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개구리나 땅에 사는 포유류처럼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없는 동물이 왜 대양의 섬에 살지 않는지, 그리고 다른 한편 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는 박쥐의 새롭고 고유한 종이 왜 어느 대륙에서든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토록 자주 발견되는지를 우리는 뚜렷이 알 수 있다. 대양의 섬에 고유한 박쥐 종이 있으면서 다른 모든 포유류는 없다는 따위의 사실은 따로따로의 창조 행위라는 이론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두 지역에 서로 가깝거나 서로를 대표하는 종이 있다는 것은,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에서는 같은 어버이가 지난날 두 지역에 모두 살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가까운 종이 두 지역에 많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두 곳에 함께 있는 같은 종이 얼마쯤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거의 어김없이 발견한다. 서로 가깝되 구분되는 종이 많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종의 의심스러운 형태와 변종도 많이 나타난다. 어느 지역의 주민이든 이주자가 건너왔을 만한 가장 가까운 원천의 주민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매우 널리 들어맞는 규칙이다. 갈라파고스제도와 후안페르난데스제도8, 그리고 그 밖의 아메리카 섬들에 사는 거의 모든 식물과 동물이 이웃한 아메리카 본토의 식물과 동물에 가장 두드러지게 가까운 사이라는 데서, 그리고 케이프베르데제도와 그 밖의 아프리카 섬들의 것이 아프리카 본토의 것에 가까운 사이라는 데서 우리는 이것을 본다. 이 사실들이 창조 이론으로는 아무 설명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보아 온 대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생물이 무리 아래 무리를 이루고 절멸한 무리가 오늘날의 무리 사이에 끼어들 때가 많은 하나의 웅대한 자연 체계를 이룬다는 사실은, 절멸과 형질 분기라는 사정을 거느린 자연선택 이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각 강 안의 종과 속이 서로 맺는 유연관계가 왜 그토록 복잡하고 에두른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어떤 형질이 분류에 다른 형질보다 훨씬 쓸모 있는지를, 왜 적응 형질이 그 생물에게는 더없이 중요한데도 분류에서는 거의 아무 중요성도 없는지를, 왜 흔적 부분에서 나온 형질이 그 생물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데도 분류에서는 높은 값어치를 지닐 때가 많은지를, 그리고 왜 발생학적 형질이 모든 형질 가운데 가장 값진지를 안다. 모든 생물의 참된 유연관계는 유전 곧 계승을 함께함에서 온다. 자연 체계는 계보에 따른 배열이며, 거기서 우리는 아무리 생명에 대한 중요성이 작더라도 가장 영속하는 형질을 통해 계승의 선을 찾아내야 한다.
사람의 손, 박쥐의 날개, 쇠돌고래의 지느러미, 말의 다리에서 뼈대의 얼개가 같다는 것, 기린의 목과 코끼리의 목을 이루는 척추뼈의 수가 같다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실은 느리고 작은 변화가 잇따랐다는 계승 이론에서 대번에 저절로 설명된다. 쓰임새가 그토록 다른데도 박쥐의 날개와 다리에서, 게의 턱과 다리에서, 꽃의 꽃잎과 수술과 암술에서 본새가 비슷하다는 것도, 각 강의 이른 조상에서는 같았던 부분이나 기관이 차츰 변화해 왔다는 견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잇따르는 변이가 늘 이른 나이에 일어나지는 않으며 그에 맞갖은 이르지 않은 시기에 유전된다는 원리에서, 우리는 왜 포유류와 새와 파충류와 물고기의 배아가 그토록 서로 비슷하고 다 자란 형태와는 그토록 다른지를 뚜렷이 알 수 있다. 공기로 숨 쉬는 포유류나 새의 배아가, 잘 발달한 아가미의 도움으로 물에 녹은 공기를 마셔야 하는 물고기의 배아처럼 아가미 틈과 고리 모양으로 도는 동맥을 지닌 것에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아도 된다.
쓰이지 않음은 때로 자연선택의 도움을 받아, 어떤 기관이 습성이 바뀌거나 생활 조건이 바뀌어 쓸모없어졌을 때 그것을 줄이는 쪽으로 기우는 일이 많다. 이 견해에서 우리는 흔적 기관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뚜렷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쓰이지 않음과 선택은 대체로 생물이 다 자라 생존경쟁에서 제 몫을 다해야 할 때에 그 생물에게 작용할 터이므로 삶의 이른 시기에 어떤 기관에 작용할 힘은 거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그 기관은 이 이른 나이에는 그리 줄어들거나 흔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테면 송아지는 이가 잘 발달했던 이른 조상에게서 윗턱의 잇몸을 결코 뚫고 나오지 않는 이를 물려받았다. 다 자란 짐승에서는 이 이가 잇따르는 세대를 거치는 동안 쓰이지 않음 때문에, 또는 혀와 입천장이 자연선택을 거쳐 이의 도움 없이도 뜯어 먹기에 알맞게 된 덕분에 줄어들었다고 우리는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송아지에서는 그 이가 선택에도 쓰이지 않음에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남았고, 맞갖은 나이에 유전된다는 원리에 따라 아득한 시기로부터 오늘까지 유전되어 온 것이다. 생물 하나하나와 기관 하나하나가 특별히 창조되었다는 견해에서는, 배아 송아지의 이나 어떤 딱정벌레의 맞붙은 딱지날개 밑에 든 쪼그라든 날개 같은 부분이 그토록 자주 쓸모없다는 뚜렷한 낙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설명할 길이 없는가! 자연은 흔적 기관과 상동 구조를 통해 자기의 변화 설계를 드러내 보이려고 애써 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한사코 이해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나는 이제 종이 변해 왔으며 잇따르는 작고 유리한 변이가 보존되고 쌓임으로써 지금도 느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내게 철저히 확신시킨 주된 사실과 고려를 요약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살아 있는 가장 뛰어난 박물학자와 지질학자가 모두 종이 변한다는 이 견해를 물리쳐 왔는가 하고 물을 수 있다. 자연 상태의 생물이 아무 변이도 겪지 않는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오랜 세월에 걸친 변이량이 한정된 양이라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 종과 뚜렷이 구분되는 변종 사이에 분명한 구별은 그어진 적이 없고 그어질 수도 없다. 종을 서로 교배하면 어김없이 불임이고 변종은 어김없이 가임이라고, 또는 불임성이 특별히 주어진 성질이며 창조의 표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세계의 역사가 짧다고 여기는 동안에는 종이 불변하는 산물이라는 믿음을 피하기가 거의 어려웠다. 그리고 이제 시간의 흐름에 대해 얼마간 생각을 얻고 나서는, 우리는 종이 변전을 겪었다면 지질 기록이 그 변전의 뚜렷한 증거를 우리에게 내주었을 만큼 완전하다고 증명도 없이 너무 쉽게 가정해 버린다.
그러나 한 종이 다른 구분되는 종을 낳았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우리가 본디 꺼리는 주된 까닭은, 중간 단계를 우리 눈으로 보지 못하는 큰 변화라면 무엇이든 인정하기를 우리가 늘 더디어 한다는 데 있다. 이 어려움은 라이엘9이 내륙에 길게 뻗은 벼랑이 생겨난 것도 큰 골짜기가 파인 것도 해안 물결의 느린 작용 때문이라고 처음 주장했을 때 그토록 많은 지질학자가 느낀 어려움과 같다. 마음은 1억 년이라는 말의 온전한 뜻을 도무지 붙잡지 못하며, 거의 무한한 수의 세대에 걸쳐 쌓인 수많은 작은 변이를 더해 그 온전한 결과를 알아볼 수도 없다.
이 책에 초록의 형태로 담은 견해가 참임을 나는 온전히 확신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나와는 정반대인 관점에서 바라본 수많은 사실이 머릿속에 쌓여 있는 노련한 박물학자를 설득하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창조의 설계」나 「설계의 통일」 따위의 말 아래 우리의 무지를 감추고, 사실을 다시 말해 놓았을 뿐인데도 설명을 했다고 여기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타고난 성향 때문에 일정한 수의 사실을 설명해 내는 것보다 설명되지 않은 난점에 더 무게를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내 이론을 물리칠 것이 분명하다. 마음이 매우 유연하고 종이 불변한다는 데 이미 의심을 품기 시작한 몇몇 박물학자는 이 책에서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미래를, 이 문제의 양쪽을 치우침 없이 바라볼 수 있을 젊고 떠오르는 박물학자들을 믿음을 가지고 바라본다. 종이 변한다고 믿게 된 사람은 누구든 자기의 확신을 양심껏 밝힘으로써 좋은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주제를 뒤덮고 있는 편견의 짐은 오직 그렇게 해야만 걷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높은 박물학자 몇 사람이 요즈음, 속마다 종이라고 여겨져 온 수많은 것이 참된 종이 아니지만 다른 종은 참된 종이다, 곧 따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펴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기묘한 결론이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기들 스스로 특별한 창조물이라고 여겼고 대다수 박물학자가 아직도 그렇게 바라보며 따라서 참된 종의 겉으로 드러난 특징을 모두 갖춘 수많은 형태가 변이로 생겨났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금 다를 뿐인 다른 형태에는 같은 견해를 넓히기를 마다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느 것이 창조된 생명 형태이고 어느 것이 이차적인 법칙으로 생겨난 것인지를 가려낼 수 있다고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고도 내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한쪽 경우에는 변이를 참된 원인(vera causa)10으로 인정하면서 다른 쪽 경우에는 두 경우의 구별을 대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그것을 물리친다. 언젠가는 이것이 선입견의 눈멂을 보여 주는 진기한 본보기로 들리는 날이 올 것이다. 이 저자들은 기적 같은 창조 행위에도 보통의 출생에 놀라는 것 이상으로 놀라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지구의 역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기에 어떤 원소의 원자들이 갑자기 번쩍 살아 있는 조직으로 바뀌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정말로 믿는가? 그들은 창조 행위가 있었다고 상정되는 때마다 개체 하나가 생겨났다고 믿는가, 아니면 여럿이 생겨났다고 믿는가? 무한히 많은 온갖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알이나 씨앗으로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다 자란 것으로 창조되었는가? 그리고 포유류의 경우에 그것들은 어미의 자궁에서 양분을 받은 거짓 표를 지닌 채 창조되었는가? 박물학자들은 종이 변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어떤 난점에 대해서든 온전한 설명을 내놓으라고 아주 마땅하게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기 쪽에서는 종이 처음 나타난 일이라는 주제 전체를 그들이 경건한 침묵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덮어 두고 만다.
내가 종의 변화라는 주장을 어디까지 넓히는지 물을 수 있다. 이 물음에 답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살펴보는 형태가 서로 멀수록 논거의 힘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무게 있는 논거 얼마는 매우 멀리까지 미친다. 강 전체의 모든 구성원은 유연관계의 사슬로 서로 이어질 수 있고, 모두가 무리 아래 무리라는 같은 원리로 분류될 수 있다. 화석 유해는 때로 지금 있는 목들 사이의 매우 넓은 틈을 메우는 쪽으로 기운다. 흔적 상태의 기관은 이른 조상이 그 기관을 온전히 발달한 상태로 지니고 있었음을 뚜렷이 보여 주며,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그 후손에게 엄청나게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반드시 뜻하게 된다. 강 전체에 걸쳐 갖가지 구조가 같은 본새로 이루어져 있고, 배아 시기에는 종들이 서로 매우 닮아 있다. 그러므로 변화를 동반한 계승 이론이 같은 강의 모든 구성원을 아우른다는 것을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나는 동물이 많아야 네다섯 조상에게서, 식물은 그와 같거나 그보다 적은 수의 조상에게서 내려왔다고 믿는다.
유추를 따르면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동물과 식물이 어떤 하나의 원형에서 내려왔다고 믿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추는 속이는 길잡이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화학적 조성에서, 배아 소포11에서, 세포 구조에서, 성장과 번식의 법칙에서 많은 것을 함께 지닌다. 같은 독이 식물과 동물에 비슷하게 작용할 때가 많다는 하찮은 사정에서도, 또 혹벌12이 내놓는 독이 들장미나 참나무에 기괴한 혹을 자라게 한다는 데서도 우리는 이것을 본다. 그러므로 나는 유추에서,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생물이 아마도 생명이 처음 불어넣어진 어떤 하나의 원시 형태에서 내려왔으리라고 미루어 알 수밖에 없다.
이 책에 담긴 종의 기원에 대한 견해가, 또는 그와 비슷한 견해가 널리 인정될 때 자연사에 상당한 혁명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렴풋이 내다볼 수 있다. 분류학자들은 지금처럼 자기 일을 이어 갈 수 있을 테지만, 이 형태가 저 형태가 본질에서 종인가 하는 어른거리는 의심에 끊임없이 시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결코 작지 않은 안도가 되리라는 것을 나는 경험에서 말하며 틀림없다고 느낀다. 영국의 산딸기13 50종쯤이 참된 종인지 아닌지를 두고 벌이는 끝없는 다툼도 그칠 것이다. 분류학자는 다만 어떤 형태가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다른 형태와 견주어 한결같고 뚜렷이 구분되는지를, 그리고 정의할 수 있다면 그 차이가 종 고유의 이름을 붙일 만큼 중요한지를 결정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물론 이것이 쉬우리라는 말은 아니다). 뒤의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고려 사항이 될 것이다. 지금은 어떤 두 형태 사이의 차이가 아무리 작더라도 중간 등급으로 이어져 있지 않으면 대다수 박물학자가 그것으로 두 형태를 모두 종의 자리로 올리기에 넉넉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는 종과 뚜렷이 구분되는 변종 사이의 유일한 구별이, 뒤의 것은 오늘날 중간 등급으로 이어져 있음이 알려져 있거나 그렇게 믿어지는 데 반해 종은 지난날에 그렇게 이어져 있었다는 것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두 형태 사이에 중간 등급이 지금 있는지를 고려하는 일을 아주 물리치지는 않으면서도, 우리는 그 둘 사이의 실제 차이의 양을 더 조심스럽게 달아 보고 더 높이 값매기게 될 것이다. 프림로즈와 카우슬립14처럼 지금은 한낱 변종이라고 널리 인정되는 형태가 앞으로 종 고유의 이름을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학문의 말과 일상의 말이 서로 들어맞게 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속이 편의를 위해 만든 인위적인 묶음일 뿐이라고 인정하는 박물학자들이 속을 다루듯이 종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마음 밝아지는 전망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종」이라는 말의, 발견된 적도 없고 발견될 수도 없는 본질을 찾는 헛된 일에서 풀려날 것이다.
자연사의 다른 더 일반적인 분야들은 흥미가 크게 높아질 것이다. 박물학자들이 쓰는 유연관계, 친연, 유형의 공통, 어버이임, 형태학, 적응 형질, 흔적 기관과 퇴화 기관 따위의 말은 비유이기를 그치고 뚜렷한 뜻을 지니게 될 것이다. 미개인15이 배를 바라보듯이, 곧 자기의 이해를 아주 넘어선 무엇인가를 바라보듯이 생물을 바라보는 일을 우리가 그만둘 때, 자연이 낳은 모든 것을 저마다 역사를 지닌 것으로 여길 때, 복잡한 구조와 본능을 저마다 그것을 지닌 자에게 쓸모 있는 수많은 고안이 더해진 것으로 바라보기를, 마치 어떤 위대한 기계 발명품을 수많은 일꾼의 노동과 경험과 이성과 심지어 그들의 실수까지 더해진 것으로 바라보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바라볼 때, 그렇게 생물 하나하나를 바라볼 때 자연사 연구가 얼마나 더 흥미로워질 것인지를 나는 경험에서 말한다!
변이의 원인과 법칙에 대하여, 성장의 상관에 대하여, 쓰임과 쓰이지 않음의 결과에 대하여, 바깥 조건이 곧바로 미치는 작용에 대하여, 그 밖의 여러 가지에 대하여 웅대하고 거의 발길이 닿지 않은 탐구의 들판이 열릴 것이다. 사육 생물에 대한 연구는 값어치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다. 사람이 길러 낸 새로운 변종 하나가, 이미 기록된 무한히 많은 종에 종 하나를 더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의 분류는 그렇게 만들 수 있는 한에서 계보가 될 것이며, 그때에야 비로소 창조의 설계라 부를 만한 것을 참으로 내놓게 될 것이다. 분명한 목표를 눈앞에 두게 되면 분류의 규칙도 더 단순해질 것이 틀림없다. 우리에게는 족보도 문장도 없으므로, 오래 유전되어 온 온갖 종류의 형질을 통해 우리의 자연 계보에서 갈라져 나온 수많은 계승의 선을 찾아내고 좇아가야 한다. 흔적 기관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구조의 성질에 대해 틀림없이 말해 줄 것이다. 변칙적이라 불리고 장난스럽게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불러도 좋을 종과 종의 무리는 오래된 생명 형태의 모습을 그리는 데 우리를 도울 것이다. 발생학은 각 큰 강의 원형이 지녔던, 어느 정도 흐려진 구조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일 것이다.
같은 종의 모든 개체가, 그리고 대부분의 속에서 서로 가까운 모든 종이 그리 아득하지 않은 시기 안에 하나의 어버이에게서 내려왔고 어느 한 탄생지에서 옮겨 왔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게 될 때, 그리고 이주의 여러 수단을 더 잘 알게 될 때, 지난날의 기후 변화와 땅 높이의 변화에 지질학이 지금 던지고 있고 앞으로도 던질 빛의 도움으로 우리는 온 세계 주민들이 지난날 어떻게 옮겨 다녔는지를 훌륭하게 좇아갈 수 있게 될 것이 틀림없다. 지금도 한 대륙의 양쪽에 사는 바다 주민의 차이를, 그리고 그 대륙의 갖가지 주민이 지녔을 법한 이주 수단에 비추어 그 주민들의 성질을 견주어 보면 옛 지리에 얼마간 빛을 던질 수 있다.
고귀한 학문인 지질학은 기록이 지극히 불완전한 탓에 영예를 잃는다. 유해를 품은 지각은 잘 채워진 박물관이 아니라 어쩌다가 드문 간격을 두고 모은 빈약한 수집품으로 보아야 한다. 화석을 품은 큰 누층이 쌓인 것은 유별난 사정이 겹친 덕분이었으며, 잇따르는 단계 사이의 빈 간격은 아득히 긴 기간이었음이 인정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뒤의 생물 형태를 견주어 이 간격의 길이를 얼마간 안전하게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같은 종을 몇 안 되게 품은 두 누층을 생명 형태가 잇따르는 전반적인 모습만으로 엄격히 같은 시대의 것이라고 맞세우려 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종은 기적 같은 창조 행위나 큰 격변이 아니라 느리게 작용하며 지금도 있는 원인으로 생겨나고 절멸하며, 또 생물 변화의 모든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뀐, 어쩌면 갑자기 바뀐 물리적 조건과는 거의 무관한 것, 곧 생물과 생물이 서로 맺는 관계이고 한 생물의 개량은 다른 생물의 개량이나 절멸을 불러오므로, 잇따르는 누층의 화석에서 나타나는 생물 변화의 양은 아마도 실제로 흐른 시간의 꽤 괜찮은 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여러 종이 한 덩어리로 뭉쳐 오랜 기간 변하지 않은 채로 있을 수도 있고, 바로 그 기간 안에 그 가운데 몇몇 종이 새로운 나라로 옮겨 가 낯선 이웃과 경쟁하게 되어 변화할 수도 있으니, 우리는 생물 변화가 시간의 자로서 지니는 정확함을 지나치게 높이 보아서는 안 된다. 지구 역사의 이른 시기에는 생명 형태가 아마 더 적고 더 단순했을 터이므로 변화의 속도도 아마 더 느렸을 것이고, 생명이 처음 동틀 무렵 가장 단순한 구조의 형태가 아주 적게 있었을 때에는 변화의 속도가 극도로 느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알려진 대로의 세계 역사 전체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길기는 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절멸한 후손과 살아 있는 후손의 조상인 첫 생물이 창조된 뒤로 흘러간 세월에 견주면 한낱 시간의 조각으로 인정될 것이다.
먼 미래에 나는 훨씬 더 중요한 연구가 펼쳐질 들판을 본다. 심리학은 새로운 토대 위에, 곧 정신의 힘과 능력이 저마다 등급을 밟아 얻어질 수밖에 없다는 토대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사람의 기원과 그 역사에 빛이 던져질 것이다.
가장 이름 높은 저자들도 종이 저마다 따로 창조되었다는 견해에 온전히 만족하는 듯하다. 내 마음에는, 창조주가 물질에 새겨 넣은 법칙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와 더 잘 들어맞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세계 주민이 생겨나고 절멸한 일이 개체의 출생과 죽음을 정하는 것과 같은 이차적인 원인에 말미암았다는 쪽이다. 내가 모든 생물을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실루리아계의 첫 층이 쌓이기 훨씬 전에 살았던 몇 안 되는 생물의 직계 후손으로 바라볼 때, 그것들은 내게 고귀해지는 듯이 보인다. 과거로 미루어 보면 지금 살아 있는 어느 종도 제 모습을 바꾸지 않은 채 먼 미래에 물려주지는 않으리라고 우리는 안전하게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살아 있는 종 가운데 아주 먼 미래에 어떤 종류의 자손이든 물려줄 것은 매우 적을 것이다. 모든 생물이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을 보면 속마다 종의 대다수가, 그리고 많은 속에서는 모든 종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아주 절멸해 버렸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하고 널리 퍼져 있으며 더 크고 우세한 무리에 드는 종이 끝내 이기고 새롭고 우세한 종을 낳으리라고 미래를 예언하듯 내다볼 수 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 형태가 실루리아기 훨씬 전에 살았던 것들의 직계 후손이므로, 우리는 생식을 통한 보통의 이어짐이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으며 어떤 큰 재앙도 온 세계를 황폐하게 만든 적이 없음을 확신해도 좋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와 똑같이 헤아릴 수 없이 긴 안전한 미래를 얼마간 믿음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자연선택은 오직 생물 하나하나의 이로움에 의해서, 또 그 이로움을 위해서만 일하므로 몸과 마음의 모든 자질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기울 것이다.
온갖 종류의 수많은 식물이 뒤덮고, 덤불에서는 새가 노래하고, 갖가지 곤충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축축한 흙 속으로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뒤얽힌 강둑을 바라보는 일은, 그리고 이렇게 정교하게 지어진 형태들이, 저마다 그토록 다르고 그토록 복잡하게 서로에게 기대어 있으면서도, 모두 우리 둘레에서 작용하는 법칙으로 생겨났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은 흥미롭다. 이 법칙들을 가장 넓은 뜻으로 헤아리면 이러하다. 번식을 동반한 성장, 번식에 거의 함축되어 있는 유전, 생활의 바깥 조건이 간접으로 또 직접으로 미치는 작용과 쓰임과 쓰이지 않음에서 오는 변이성, 생존경쟁으로 이끌 만큼 높은 증가 비율,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는 자연선택이니, 자연선택은 형질 분기와 덜 개량된 형태의 절멸을 거느린다. 이리하여 자연의 전쟁에서, 굶주림과 죽음에서, 우리가 마음에 그릴 수 있는 가장 드높은 것, 바로 고등 동물이 생겨나는 일이 곧바로 따라 나온다.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곧 생명은 그 여러 힘과 더불어 처음에 몇 안 되는 형태에, 또는 하나의 형태에 불어넣어졌고, 이 행성이 중력의 정해진 법칙을 따라 돌고 도는 동안,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 더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놀라운 끝없는 형태가 전개되어 왔으며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16.
주
1. Natura non facit saltum —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는 뜻의 라틴어 격률이다. 린네를 비롯한 당대 박물학자들이 즐겨 인용했고, 다윈은 자기 이론이 요구하는 점진성을 뒷받침하는 말로 이 책에서 거듭 끌어온다.
2. 빙하기 — 원문은 the Glacial period. 다윈 당시 아가시 등이 세운 개념으로, 북반구가 얼음에 덮였던 가까운 과거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책 11장과 12장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3. 실루리아계 — 원문은 the Silurian system. 머치슨이 세운 구분이며, 다윈 당시에는 화석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시기로 여겨져 오늘날의 캄브리아기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여기 들어 있었다. 따라서 다윈이 말하는 「실루리아계 아래」는 오늘날의 선캄브리아 시대에 해당한다.
4. Ichneumonidæ — 맵시벌과. 다른 곤충의 애벌레 몸속이나 몸 위에 알을 낳는 기생벌 무리다. 7장에도 나왔다.
5. 로거헤드오리 — 원문은 the logger-headed duck. 남아메리카 남단에 사는 Tachyeres속의 오리로, 몸이 무겁고 날개가 작아 날지 못한다. 5장과 6장에서 배오리라는 이름으로도 나왔다.
6. 투쿠투쿠 — 원문은 the tucutucu. 남아메리카에 사는 굴 파는 설치류 Ctenomys속을 그 울음소리를 따라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 중에 이 동물을 관찰했다.
7. Edentata — 빈치류. 나무늘보·아르마딜로·개미핥기 따위가 드는 무리로, 다윈은 남아메리카에서 이 무리의 거대한 화석을 발견했다. 오늘날의 분류는 다윈 당시와 다르다.
8. 후안페르난데스제도 — 칠레 앞바다의 화산섬 무리다. 뒤에 나오는 케이프베르데제도는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의 화산섬 무리로, 다윈은 비글호 항해의 첫 기항지로 이곳에 들렀다.
9. 라이엘 —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 영국의 지질학자로 《지질학 원리》(1830~1833)에서 지금 작용하는 힘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 지형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가까운 벗이자 이 책 전체의 시간 논증이 기대고 있는 사람이다.
10. 참된 원인(vera causa) — 라틴어로, 눈앞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것이 확인된 원인을 뜻한다. 뉴턴에게서 비롯해 당대 과학철학에서 설명의 자격을 따질 때 쓰던 말이다.
11. 배아 소포 — 원문은 germinal vesicles. 알 속에서 관찰되던 둥근 주머니를 가리켜 당시에 쓰던 말로, 오늘날 난모세포의 핵에 해당한다.
12. 혹벌 — 원문은 the gall-fly. 식물에 알을 낳아 혹(충영)을 만들게 하는 벌 무리다.
13. 영국의 산딸기 — 원문은 British brambles. Rubus(산딸기속)의 식물로, 영국에서 이 무리를 종으로 얼마나 잘게 나눌 것인지가 당대 분류학의 이름난 논쟁거리였다.
14. 프림로즈와 카우슬립 — 둘 다 Primula속의 식물로 프림로즈는 Primula vulgaris, 카우슬립은 Primula veris에 해당한다. 영국에 흔한 앵초 무리이며, 둘이 같은 종의 변종인지 서로 다른 종인지가 당시에 오래 다투어졌다. 2장과 8장에도 나왔다.
15. 미개인(savage) — 다윈 당시 유럽 박물학자들이 문자를 쓰지 않는 수렵·채집 사회의 사람을 가리켜 쓰던 말이다. 오늘날에는 쓰지 않으며, 수렵채집민이라 부르거나 개별 집단의 고유 명칭으로 부른다. 당대의 사고를 보이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16. 전개되어 왔으며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 원문은 have been, and are being, evolved. evolved는 이 책 전체에서 오직 이 자리, 마지막 문장의 마지막 낱말로 단 한 번 나온다. 명사 evolution은 초판 원문에 한 번도 나오지 않으며, 다윈이 자기 이론을 부르는 말은 descent with modification(변화를 동반한 계승)이다. 그래서 이 번역에서는 전권에 걸쳐 「진화」라는 말을 쓰지 않았고, 이 마지막 낱말도 「전개되어 왔다」로 옮겼다. 1859년의 evolve는 오늘날의 evolution보다 「펼쳐지다」에 가까운 뜻이었다. 「진화」가 다윈의 이론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은 스펜서를 비롯한 뒷사람들을 거친 훨씬 뒤의 일이며, 다윈 자신은 6판(1872)에 이르러서야 이 책 본문에 evolution을 들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