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이 나라의 북서쪽 끝, 숲이 우거진 언덕과 작고 고요한 호수들 사이에 커다란 시토회 수도원 마울브론이 있다.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들은 널찍하고 튼튼하며 잘 보존된 채 서 있어서 눌러살고 싶어질 만큼 탐나는 거처가 될 만하다. 안팎이 다 화려한 데다, 수백 년을 지나는 동안 고요하고 아름다운 초록빛 둘레와 기품 있게, 깊숙이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수도원을 찾아가는 사람은 높은 담을 터서 낸 그림 같은 문을 지나 넓고 아주 고요한 광장으로 들어선다. 거기에는 샘물이 흐르고, 늙고 엄숙한 나무들이 서 있으며, 양옆으로는 오래되고 튼튼한 돌집들이, 안쪽으로는 웅장한 본당의 정면이 서 있다. 그 정면에는 '낙원'이라고 부르는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현관이 붙어 있는데, 우아하고 매혹적인 그 아름다움은 견줄 데가 없다. 교회의 육중한 지붕 위에는 바늘처럼 뾰족하고 우스꽝스러운 작은 탑 하나가 올라타 있는데, 저것이 어떻게 종을 매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고스란히 남은 회랑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작품이며, 보석처럼 귀한 샘 예배당을 품고 있다. 힘차고 기품 있는 교차 궁륭을 얹은 경이로운 방인 수사 식당, 그리고 기도실과 면회실, 평수사 식당, 수도원장 거처와 교회 두 채가 묵직하게 맞붙어 늘어서 있다. 그림 같은 담장과 돌출창, 문과 작은 뜰, 방앗간 하나와 살림집들이 이 육중하고 오래된 건물들을 아늑하고 명랑하게 둘러싸고 있다. 넓은 앞마당은 고요히 비어 있고, 잠결에 제 나무들의 그림자와 장난을 친다. 다만 점심 뒤 한 시간 동안만 덧없는 가짜 생기가 그 위에 감돈다. 그때면 젊은이 한 무리가 수도원에서 나와 넓은 마당에 흩어지고, 약간의 움직임과 외침과 이야기와 웃음소리를 몰고 와서 이따금 공놀이도 하다가, 한 시간이 지나면 재빨리, 흔적도 없이 담 뒤로 사라진다. 이 마당에 서서 이런 생각을 해 본 사람이 적지 않다. 여기야말로 알찬 삶과 기쁨이 있을 자리다, 여기서는 무언가 살아 있고 행복을 주는 것이 자라야 한다, 여기서는 성숙하고 선한 사람들이 기쁜 생각을 품고 아름답고 명랑한 작품을 지어내야 한다.
정부는 사랑 어린 배려로, 언덕과 숲 뒤에 숨어 세상과 멀리 떨어진 이 훌륭한 수도원을 개신교 신학교 학생들에게 내주었다. 아름다움과 고요가 감수성 예민한 어린 마음들을 감싸 주도록 하려는 뜻이다. 동시에 그곳의 젊은이들은 도시와 가정생활이 끼치는 마음을 흩뜨리는 영향에서 떨어져 있고, 바삐 일하며 돌아가는 삶이라는 해로운 광경을 보지 않고 지낸다. 그 덕분에 젊은이들에게 몇 해 동안이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공부를, 딸린 과목들까지 합쳐, 아주 진지하게 삶의 목표로 여기게 할 수 있고, 젊은 영혼들의 목마름을 송두리째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부와 즐거움 쪽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여기에 중요한 요소로 기숙 생활이 더해진다. 스스로를 길들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압박과, 한 식구라는 소속감이 그것이다. 신학생들을 제 돈으로 먹이고 공부시켜 주는 정부는 이렇게 하여, 제 학생들이 남다른 정신의 자식이 되도록, 그래서 훗날 언제 어디서든 그 정신으로 알아볼 수 있게 되도록 손을 써 두었다. 세련되고 확실하게 낙인을 찍는 법이요, 스스로 원해서 매인 농노 신분을 뜻깊게 보여 주는 상징이다. 그래서 이따금 고삐를 끊고 뛰쳐나가는 야생아들을 빼면, 슈바벤의 신학생은 누구든 평생 신학생 출신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사람은 얼마나 저마다 다르며, 그들이 자라는 환경과 형편은 또 얼마나 저마다 다른가! 정부는 제가 돌보는 아이들에게서 그 다름을 일종의 정신의 제복, 혹은 하인의 제복으로 공평하고 철저하게 고르게 맞춘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아직 어머니가 있었던 사람은 평생 그 무렵을 고마움과 미소 어린 감동으로 떠올린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렇지 못해서 아무 감동 없이 그 시절을 넘겼지만, 그래도 낯선 어머니들을 아주 많이 지켜볼 수 있었고, 그 광경은 그에게 묘한 인상을 남겼다.
벽장을 죽 둘러 세운 큰 복도들, 도르멘트라고 부르는 그곳에는 궤짝과 바구니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고, 부모를 따라온 소년들은 자잘한 살림살이를 풀어 정리하느라 바빴다. 저마다 번호가 매겨진 벽장 하나와, 공부방에 번호가 매겨진 책꽂이 하나를 배정받았다. 아들과 부모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짐을 풀었고, 사환은 그 사이를 군주처럼 거닐며 이따금 친절한 충고를 건넸다. 꺼낸 옷을 펼치고, 셔츠를 개고, 책을 쌓고, 장화와 실내화를 줄지어 늘어놓았다. 준비물은 큰 것들이 누구나 똑같았다. 가져와야 할 속옷의 최소 가짓수와 그 밖의 살림 가운데 중요한 것들이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긁어 새긴 양철 세숫대야들이 나와 세면실에 놓였고, 그 옆에 해면과 비누 그릇, 빗과 칫솔이 자리를 잡았다. 그 밖에도 저마다 등잔 하나와 석유 통 하나, 식기 한 벌을 가져왔다.
소년들은 하나같이 몹시 분주하고 들떠 있었다. 아버지들은 웃음을 띠고 거들어 보려 했고, 자꾸 회중시계를 들여다보며 꽤 따분해하다가 슬그머니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의 영혼은 어머니들이었다. 어머니들은 옷과 속옷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주름을 펴고 끈을 바로잡은 다음, 이리저리 꼼꼼히 맞춰 보며 되도록 깔끔하고 쓰기 편하게 벽장 안에 나누어 넣었다. 그 사이사이로 타이르는 말과 충고와 다정한 말이 함께 흘러들었다.
"새 셔츠는 특히 아껴 입어야 한다. 3마르크 50페니히나 들었어."
"빨랫감은 네 주마다 기차 편으로 부쳐라. 급하면 우편으로 보내고. 검은 모자는 일요일에만 쓰는 거야."
뚱뚱하고 푸근해 보이는 아주머니 하나가 높직한 궤짝 위에 앉아서 아들에게 단추 다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집 생각이 나거든 언제든 편지만 하렴. 성탄절까지 그렇게 무섭게 오래 남은 것도 아니잖니." 다른 데서는 이런 말이 들렸다.
예쁘고 아직 꽤 젊은 어머니 하나는 꽉 찬 아들의 벽장을 훑어보고는, 쌓아 둔 속옷 더미와 웃옷과 바지를 어루만지듯 손으로 쓸었다. 그 일을 마치자 이번에는 제 아들, 어깨가 떡 벌어지고 볼이 통통한 사내아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들은 부끄러워서 쑥스럽게 웃으며 손을 밀어냈고, 행여 다정해 보일세라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기까지 했다. 작별은 아들보다 어머니에게 더 힘들어 보였다.
다른 아이들은 그 반대였다. 그 아이들은 바삐 움직이는 어머니를 어쩔 줄 모르고 멍하니 바라보았고, 할 수만 있으면 다시 따라서 집으로 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서나 작별이 두려운 마음과 한껏 북받친 정과 그리움이, 남들이 보는 앞이라는 부끄러움 그리고 갓 사내가 된 아이의 고집스러운 체면과 힘겹게 다투고 있었다. 실컷 울고 싶은 아이들도 일부러 태평한 얼굴을 지어 보이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그러면 어머니들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거의 모두가 궤짝에서 꼭 필요한 것 말고도 사치품을 몇 가지 꺼냈다. 사과 한 자루, 훈제 소시지 하나, 구운 과자 한 바구니 같은 것들이었다. 스케이트를 가져온 아이도 많았다. 영악해 보이는 자그마한 젊은이 하나는 햄을 통째로 하나 가져와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는데, 그것을 숨기려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어느 아이가 집에서 곧장 왔고, 어느 아이가 이미 다른 학교나 기숙사에서 지내 보았는지는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에게서도 흥분과 긴장이 엿보였다.
기벤라트 씨는 아들의 짐 푸는 일을 거들었는데, 그 솜씨가 영리하고 실속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끝냈고, 한동안 한스와 함께 따분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도르멘트에 서 있었다. 사방에서 아버지들은 타이르고 가르치고, 어머니들은 달래고 충고하고, 아들들은 가슴을 졸이며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보이자, 그도 제 한스에게 인생길에 가져갈 황금 같은 말 몇 마디쯤은 들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는 한참을 궁리하며 말 없는 아들 곁을 괴로운 얼굴로 서성거리다가, 갑자기 말문을 터뜨려 엄숙한 상투어들을 골라 엮은 작은 명구집 하나를 쏟아 놓았다. 한스는 의아해하며 잠자코 그 말을 받아들였는데, 그러다 옆에 서 있던 어느 목사가 이 아버지다운 연설을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지켜보는 것을 보자 부끄러워져서 연설하는 사람을 한쪽으로 끌고 갔다.
"그러니까, 집안 이름을 빛내 줄 테지? 윗사람들 말도 잘 듣고?"
"네, 그럼요." 한스가 말했다.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독하게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한스도 꽤나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때로는 가슴 졸이는 호기심으로 창 너머 고요한 회랑을 내려다보았는데, 예스럽고 은자다운 회랑의 위엄과 고요는 위층에서 떠들썩한 젊은 삶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때로는 바삐 움직이는 동급생들을 수줍게 바라보았는데, 그 가운데 아는 얼굴은 아직 하나도 없었다. 슈투트가르트 시험장에서 함께 시험을 친 그 아이는 괴핑겐에서 갈고닦은 그 능란한 라틴어에도 불구하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적어도 한스 눈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그는 앞으로 함께 공부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든 소년의 준비물이 종류와 수가 그렇게 비슷한데도, 도시 아이와 농부의 아들을, 넉넉한 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를 가려내기는 쉬웠다. 부잣집 아들이 신학교에 오는 일은 물론 드문데, 이는 한편으로는 부모의 자존심이나 더 깊은 통찰을,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재능을 짐작하게 한다. 그래도 교수나 고위 관리 가운데에는 제 수도원 시절을 떠올리며 아들을 마울브론으로 보내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래서 검은 웃옷을 입은 마흔 명의 꼬마들 사이에서도 옷감과 재단이 이것저것 달랐고, 몸가짐과 사투리와 태도는 그보다 더 달랐다. 팔다리가 뻣뻣하고 깡마른 슈바르츠발트 아이들, 짚단처럼 노란 머리에 입이 큼직하고 혈색 좋은 알프 고원 아들들, 거침없고 명랑한 몸가짐에 날랜 저지대 아이들, 그리고 뾰족한 구두를 신고 망가진, 아니 세련되었다고 해야 할 사투리를 쓰는 말쑥한 슈투트가르트 아이들이 있었다. 이 젊은 꽃봉오리들 가운데 거의 다섯에 하나는 안경을 썼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냘프고 우아하기까지 한, 어머니 품만 알던 슈투트가르트 도련님 하나는 빳빳한 고급 펠트 모자를 쓰고 점잔을 빼고 있었는데, 그 낯선 치장이 벌써 첫날부터 동급생 가운데 짓궂은 아이들의 입맛을 다시게 해, 나중에 놀려 대고 혼내 줄 마음을 먹게 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눈이 더 밝은 구경꾼이라면 이 겁먹은 작은 무리가 이 나라의 젊은이 가운데서 결코 허투루 고른 것이 아님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깔때기로 부어 넣은 듯한 티가 나는 평범한 머리들 곁에, 섬세한 아이들도, 고집스럽고 단단한 아이들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런 아이들의 매끈한 이마 뒤에는 더 높은 삶이 아직 반쯤 꿈속에 잠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가운데에는 영리하고 끈질긴 슈바벤의 머리도 한둘 끼어 있었을지 모른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따금 넓은 세상 한복판으로 비집고 들어가, 늘 조금은 메마르고 고집스러운 제 생각을 새롭고 강력한 체계의 중심으로 만들어 온 그런 머리들 말이다. 슈바벤은 세상에서 가장 잘 길든 신학자들로 저 자신과 세상을 채워 줄 뿐 아니라, 철학적 사변이라는 오래된 재능도 자랑스럽게 지니고 있으며, 그 재능에서 이미 여러 번 이름난 예언자나 이단자가 나왔다.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위대한 전통은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이제는 부리가 날카로운 북쪽의 독수리에게 순한 병아리처럼 몸을 기대고 있는 이 기름진 땅도, 적어도 신학과 철학이라는 정신의 영역에서만은 아직도 세상에 확실한 영향을 미친다. 그 밖에도 이 백성 안에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형식과 꿈꾸는 시를 즐기는 마음이 살아 있어서, 때때로 시를 짓는 사람과 시인이 자라 나오는데, 그들은 결코 나쁜 축에 들지 않는다. 물론 요즘 들어서는 그들도 별로 대접받지 못한다. 시에서도 북쪽에 사는 우리의 형님들이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쪽 말을 촌스럽다 여기고 더 날카로운 혀로 가락을 정하는데, 그 가락은 때로는 흙냄새를, 때로는 베를린의 세련미를 좇으며, 날렵한 기세로 말하자면 우리의 구닥다리 리라보다 훨씬 낫다. 안타깝게도 여기서나 다른 데서나 거기에 대들어, 저 자랑스러운 베를린 사람들이 갓 입은 아직 새파란 고색을 벗겨 내려 들 수는 없다. 우리도 누구에게나 제 몫을 기꺼이 허락한다. 우리 슈바벤 사람에게는 고요한 숲 위로 아득한 옛 영광의 몇 조각이 잠들어 꿈꾸는 우리의 옛 슈타우펜을, 다른 이들에게는 매끈하고 깔끔하기 짝이 없는 찻길이 번쩍이는 대포 곁을 지나가는 그들의 촐레른을.1 둘 다 나름대로 좋은 데가 있지 않은가.
마울브론 신학교의 시설과 관습에는 겉으로 보아서는 슈바벤다운 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도원 시절부터 남은 라틴어 이름들 곁에 고전풍 상표가 새로 몇 개 더 붙어 있었다. 학생들이 나뉘어 든 방들은 포룸, 헬라스, 아테네,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렸고, 가장 작은 마지막 방 이름이 게르마니아라는 것은 게르만의 현재를 될 수 있는 대로 로마와 그리스의 꿈결 같은 그림으로 바꾸어 놓을 까닭이 있다는 뜻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겉치레일 뿐이었고, 실은 히브리어 이름이 더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래서 즐거운 우연의 장난으로, 아테네 방에는 마음 넓고 말 잘하는 아이들이 아니라 하필이면 고지식하고 따분한 아이 몇이 들었고, 스파르타 방에는 전사나 금욕가가 아니라 한 줌의 쾌활하고 흥청거리는 청강생들이 살게 되었다. 한스 기벤라트는 동급생 아홉 명과 함께 헬라스 방에 배정되었다.
그래도 저녁에 처음으로 아홉 아이와 함께 서늘하고 썰렁한 침실에 들어가 좁은 학생 침대에 누웠을 때, 그는 마음이 묘했다. 천장에는 커다란 석유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 불그레한 불빛 아래서 옷을 벗었고, 열 시 15분이 되면 사환이 그 불을 껐다. 이제 아이들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침대 둘 사이마다 옷을 얹은 작은 의자가 하나씩 놓였고, 기둥에는 아침 종을 당기는 줄이 늘어져 있었다. 아이들 가운데 두셋은 서로 아는 사이라 조심스럽게 몇 마디 속삭였지만 곧 잠잠해졌다. 나머지는 서로 낯설어서 저마다 조금 짓눌린 채 죽은 듯 조용히 누워 있었다. 잠든 아이들에게서는 깊은 숨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자면서 팔을 움직이면 아마포 이불이 바스락거렸다. 아직 깨어 있는 아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한스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는 옆 아이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얼마 뒤 한 칸 건너 침대에서 묘하게 겁에 질린 소리를 들었다. 거기 누운 아이 하나가 담요를 머리 위까지 끌어 덮고 울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듯 나직한 그 흐느낌에 한스는 이상하게 마음이 술렁였다. 그 자신은 집이 그립지 않았지만, 집에 있던 조용하고 작은 제 방이 아쉬웠다. 거기다 알 수 없는 새것과 수많은 동급생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이 겹쳤다. 아직 자정이 되기도 전에 침실에서 깨어 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슬픈 아이와 고집스러운 아이, 쾌활한 아이와 겁 많은 아이 할 것 없이, 어린 잠꾸러기들은 줄무늬 베개에 뺨을 묻은 채 나란히 누워 똑같이 달콤하고 깊은 휴식과 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오래된 뾰족한 지붕과 탑, 돌출창, 첨탑 장식, 성가퀴, 뾰족아치 회랑 위로 창백한 반달이 떠올랐다. 그 빛은 처마 돌림띠와 문턱에 내려앉고, 고딕 창과 로마네스크 문 위로 흘러, 회랑 샘의 크고 기품 있는 수반 속에서 파리한 금빛으로 떨렸다. 노르스름한 빛줄기와 빛 조각 몇이 세 개의 창으로 헬라스 방 침실에도 들어와, 옛날 대대로 이 집에 살던 수도사들의 꿈 곁에 그랬던 것처럼, 잠든 소년들의 꿈 곁에 다정한 이웃으로 머물렀다.
이튿날 기도실에서 엄숙한 입학식이 열렸다. 교사들은 프록코트를 입고 서 있었고, 원장(Ephorus)이 연설을 했으며, 학생들은 생각에 잠겨 몸을 구부린 채 의자에 앉아 이따금 뒤쪽에 앉은 부모를 곁눈질하려 애썼다. 어머니들은 생각에 잠겨 웃음 띤 얼굴로 아들들을 바라보았고, 아버지들은 꼿꼿이 앉아 연설을 따라가며 진지하고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랑스럽고 갸륵한 감정과 아름다운 희망으로 그들의 가슴은 부풀었고, 오늘 자기가 금전상의 이득을 받고 제 아이를 국가에 팔아넘긴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하나씩 이름이 불려 대열 앞으로 나갔고, 원장과 악수를 하며 입학이 허락되고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이로써 그 아이는 처신만 잘하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국가가 먹여 주고 자리를 마련해 주는 몸이 되었다. 그것을 어쩌면 아주 공짜로 얻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훨씬 엄숙하고 가슴 뭉클하게 느껴진 것은 아버지 어머니와 작별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부모들은 걸어서, 또는 우편 마차를 타고, 또는 서둘러 잡아탄 온갖 탈것에 실려 남겨진 아들들의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손수건들이 온화한 9월의 공기 속에 오래도록 나부꼈고, 마침내 숲이 떠나는 사람들을 품어 버리자, 아들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부모님들은 떠나셨네." 사환이 말했다.
이제 아이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알아 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방마다 저희끼리였다. 잉크병에 잉크를, 등잔에 기름을 채우고, 책과 공책을 정리하며 새 방에 정을 붙여 보려 했다. 그러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말을 걸고, 고향이 어디인지, 그동안 어느 학교에 다녔는지 묻고, 함께 진땀을 흘린 주 시험을 떠올렸다. 이 책상 저 책상 둘레에 수다 떠는 무리가 생겨났고, 여기저기서 소년다운 맑은 웃음소리가 조심스레 터져 나왔으며, 저녁이 되자 같은 방 친구들은 긴 바닷길 끝에 이른 배의 승객들보다 훨씬 더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한스와 함께 헬라스 방에 사는 동급생 아홉 가운데 넷은 개성이 뚜렷한 아이들이었고, 나머지는 대체로 괜찮은 보통 아이들이었다. 먼저 오토 하르트너가 있었다. 슈투트가르트 교수의 아들로, 재능 있고 차분하며 자신만만하고 몸가짐에 흠잡을 데가 없었다. 몸집이 크고 당당하게 자랐으며 옷을 잘 입었고, 확고하고 다부진 태도로 방 아이들을 압도했다.
그다음은 카를 하멜, 알프 고원 작은 마을 촌장의 아들이었다. 그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모순투성이였고, 겉보기에 굼뜬 성미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벗어나면 격정적이고 날뛰며 난폭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다시 제 속으로 기어들었다. 그러면 그가 말 없는 관찰자인지, 아니면 그저 음흉한 겁쟁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보다 눈에 띄지만 덜 복잡한 인물은 헤르만 하일너였다. 슈바르츠발트의 좋은 집안 아들이었다. 첫날부터 벌써 그가 시인이자 멋쟁이 문사라는 것이 알려졌고, 주 시험의 작문을 육보격으로 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말이 많고 활발했으며, 좋은 바이올린을 하나 지녔고, 제 됨됨이를 겉에 드러내 놓고 다니는 듯했는데, 그 됨됨이는 주로 감상과 경솔함이 아직 덜 익은 채 젊게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눈에 덜 띄게나마 더 깊은 것도 속에 지니고 있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나이보다 앞서 자라서, 벌써 시험 삼아 저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라스 방에서 가장 별난 아이는 에밀 루치우스였다. 속을 알 수 없고 머리칼이 희끄무레한 금발의 작달막한 아이로, 늙은 농부처럼 질기고 부지런하고 메말랐다. 몸집과 생김새는 아직 덜 자랐는데도 소년 같은 인상을 주지 않았고, 어디로 보나 어른 같은 데가 있었다. 이제 더는 고칠 데가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첫날부터 다른 아이들이 따분해하고, 수다를 떨고, 낯선 곳에 정을 붙이려 애쓰는 동안, 그는 조용하고 태연하게 문법책 앞에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고는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아야 하는 사람처럼 줄기차게 공부했다.
이 조용한 괴짜의 속셈은 차츰차츰 드러났고, 그는 지독하게 영악한 구두쇠이자 이기주의자로 밝혀졌다. 그런데 바로 그 악덕들에서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오히려 일종의 존경, 적어도 너그러운 묵인을 얻었다. 그에게는 교묘한 절약과 이익의 체계가 있었는데, 그 하나하나의 묘수는 아주 천천히 드러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체계는 아침 일찍 일어날 때부터 시작되었다. 루치우스는 세면실에 맨 먼저 들어가거나 맨 나중에 들어갔다. 남의 수건과, 될 수 있으면 남의 비누까지 써서 제 것을 아끼려고. 그렇게 해서 그의 수건은 늘 두 주, 아니 그보다 더 오래 버텼다. 그런데 수건은 일주일마다 갈아야 했고, 월요일 오전마다 사환장이 그것을 검사했다. 그래서 루치우스도 월요일 아침마다 번호가 붙은 제 못에 새 수건을 걸었지만, 점심시간이면 다시 걷어 깔끔하게 개어 함에 도로 넣고 그 대신 아껴 둔 헌 수건을 걸어 두었다. 그의 비누는 단단해서 거품이 잘 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몇 달이고 갔다. 그렇다고 에밀 루치우스가 겉모습을 소홀히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늘 말쑥해 보였고, 가느다란 금발을 꼼꼼히 빗어 가르마를 탔으며, 속옷과 옷을 더없이 아껴 입었다.
세면실에서 나오면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으로는 커피 한 잔과 각설탕 한 개, 그리고 작은 빵 하나가 나왔다. 대부분은 그것을 넉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여덟 시간을 자고 나면 대개 아침 배가 몹시 고프기 때문이다. 루치우스는 만족했다. 날마다 나오는 각설탕을 먹지 않고 아껴 두었다가 언제나 살 사람을 찾아냈다. 두 개에 1페니히, 혹은 스물다섯 개에 공책 한 권이었다. 저녁이면 비싼 기름을 아끼려고 곧잘 남의 등잔 불빛 아래서 공부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그가 가난한 집 아이였던 것도 아니었다. 꽤 넉넉한 집 출신이었다. 대개 아주 가난한 집 아이들은 살림을 꾸리고 아낄 줄을 모르고, 오히려 가진 만큼 늘 써 버리며, 모아 둔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나 에밀 루치우스는 제 체계를 물건과 손에 잡히는 재물에만 넓힌 것이 아니라, 정신의 나라에서도 할 수 있는 한 제 이익을 짜내려 했다. 이 점에서 그는 영리하게도 모든 정신적 재산은 상대적인 값어치밖에 없다는 것을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노력은 나중에 시험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과목을 가꾸는 데만 쏟았고, 나머지 과목에서는 그럭저럭 보통 성적에 겸손하게 만족했다. 그는 제가 배우고 해낸 것을 언제나 동급생들의 성적에만 견주어 재었다. 두 배를 알고 2등을 하느니 절반만 알고 1등을 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저녁에 동급생들이 온갖 소일거리와 놀이와 책 읽기에 빠져 있을 때도 그는 조용히 앉아 공부했다. 다른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그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이따금 시샘 없이 즐거운 눈길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도 모두 공부했다면 그의 수고는 남는 장사가 아니었을 테니까.
이 모든 꾀와 잔재주를 두고 이 부지런한 공부벌레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나치게 하고 너무 이익만 따지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그도 곧 어리석은 짓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수도원의 수업은 모두 공짜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이용해 바이올린 수업을 받아 보자는 생각을 해냈다. 그에게 미리 배운 것이 좀 있었다거나, 귀가 조금 밝거나 재능이 있었다거나, 하다못해 음악을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는 결국 바이올린도 라틴어나 산수처럼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들은 바로는 음악은 나중에 살아가는 데 쓸모가 있고 사람을 인기 있고 호감 가게 만든다고 했으며, 어쨌든 이 일에는 돈이 한 푼도 들지 않았다. 학생용 바이올린도 신학교에서 내주었기 때문이다.
루치우스가 찾아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음악 교사 하스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노래 시간에 그를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에 루치우스가 내놓는 솜씨는 동급생들을 모두 몹시 즐겁게 했지만, 교사인 그는 절망에 빠뜨렸다. 교사는 아이를 말려 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상대를 잘못 만났다. 루치우스는 섬세하고 겸손하게 웃으며 제 정당한 권리를 내세웠고, 음악을 향한 열망을 누를 길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연습용 바이올린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을 받아 들고, 한 주에 두 번 수업을 받으며 날마다 반 시간씩 연습했다. 그러나 첫 연습 시간이 끝나자 같은 방 친구들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그 지독한 신음 소리는 사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뒤로 루치우스는 바이올린을 들고 연습할 조용한 구석을 찾아 쉴 새 없이 수도원 안을 헤매고 다녔고, 그런 구석에서는 긁고 끽끽거리고 낑낑대는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와 이웃을 불안하게 했다. 시인 하일너의 말로는, 고문당하는 늙은 바이올린이 벌레 먹은 구멍마다에서 살려 달라고 절망적으로 애원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진전이 없자 시달리던 교사는 신경이 곤두서고 거칠어졌으며, 루치우스는 점점 더 필사적으로 연습했고, 지금껏 자기만족에 차 있던 장사꾼 같은 얼굴에 쓰라린 근심의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마침내 교사가 그는 전혀 가망이 없다며 수업을 계속하기를 거절하자, 이 홀린 배움의 열성가는 피아노를 골라 그것으로도 길고 열매 없는 몇 달 동안 애를 쓰다가, 마침내 기진맥진해서 조용히 그만두었다. 그러나 훗날 몇 해가 지나 음악 이야기가 나오면, 그는 자기도 예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둘 다 배웠으나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안타깝게도 이 아름다운 예술과 차츰 멀어졌을 뿐이라고 넌지시 내비치곤 했다.
그리하여 헬라스 방은 우스꽝스러운 식구들 덕에 자주 즐거울 수 있었다. 멋쟁이 문사 하일너도 우스운 장면을 여러 번 연출했기 때문이다. 카를 하멜은 비꼬기 잘하는 재치 있는 관찰자 노릇을 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위여서 얼마간 우위에 섰지만, 존경받는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는 변덕스러웠고, 일주일에 한 번쯤은 몸싸움으로 제 힘을 시험해 보고 싶어 했는데, 그럴 때면 사납고 거의 잔인하기까지 했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런 일들을 놀라며 지켜보았고, 착하지만 조용한 친구로서 묵묵히 제 길을 갔다. 그는 부지런했다. 루치우스 못지않게 부지런해서 같은 방 친구들에게서 존중을 받았다. 다만 하일너만은 예외였다. 하일너는 천재다운 경솔함을 제 깃발에 써 붙인 아이라, 이따금 한스를 공부벌레라고 비웃었다. 대체로 한창 빠르게 자라는 나이의 이 많은 소년들은 서로 잘 어울렸다. 물론 저녁마다 도르멘트에서 벌어지는 주먹다짐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어른이 된 기분을 느끼려고 열심히 애썼고, 선생들이 아직은 낯설게 "자네"라고 불러 주는 것에 걸맞게 학문적인 진지함과 바른 몸가짐을 보이려 했으며, 방금 떠나온 라틴어 학교를 갓 대학에 들어간 학생이 김나지움을 돌아보듯 적어도 그만큼은 거만하고 딱하다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따금 그 꾸며 낸 위엄을 뚫고 꾸밈없는 개구쟁이 기질이 터져 나와 제 권리를 내세웠다. 그러면 도르멘트에는 허공을 가르는 시원한 주먹질과 소년들의 짭짤한 욕지거리가 메아리쳤다.
이런 학교의 장이나 교사라면, 함께 지낸 지 몇 주가 지나면서 소년들의 무리가 가라앉는 화학 혼합물처럼 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배울 것 많고 더없이 즐거울 것이다. 그 혼합물 속에서는 흔들리는 구름과 덩어리가 뭉쳤다가 다시 풀리고 다른 모양을 이루다가, 마침내 단단한 결정 몇 개가 생겨난다. 처음의 수줍음을 이겨 내고 모두가 서로 넉넉히 알게 되자, 출렁이며 서로를 찾아 헤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무리가 생기고, 우정과 반감이 드러났다. 같은 고향 사람이나 예전 학교 친구끼리 뭉치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은 새로 알게 된 아이들에게 마음을 돌렸다. 도시 아이는 농부 아들에게, 알프 고원 사람은 저지대 사람에게로, 다양함과 서로 채워 줌을 향한 은밀한 충동을 따라서였다. 어린 존재들은 망설이며 서로를 더듬어 찾았고, 같다는 의식 곁에 따로 서고 싶은 욕구가 생겼으며, 이렇게 하여 소년들 가운데 적지 않은 아이에게서 처음으로 싹트는 인격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잠에서 깨어났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애정과 질투의 작은 장면들이 벌어졌고, 그것이 우정의 동맹과 공공연한 고집스러운 적대로 자라났으며, 경우에 따라 다정한 사이와 친구끼리의 산책으로 끝나거나, 아니면 매서운 씨름과 주먹다짐으로 끝났다.
한스는 겉으로는 이런 법석에 끼지 않았다. 카를 하멜이 대놓고 거세게 우정을 청해 왔을 때, 그는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 하멜은 곧바로 스파르타 방의 아이 하나와 친구가 되었고, 한스는 혼자 남았다. 그는 강한 감정에 이끌려, 우정의 나라가 그리움의 빛깔로 지평선 위에 복되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고, 그 나라는 그를 고요한 충동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수줍음이 그를 붙잡았다. 어머니 없이 엄하게 자란 소년 시절 동안 그에게서는 남에게 다가가 기대는 재주가 시들어 버렸고, 겉으로 열광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소름이 끼쳤다. 거기다 소년의 자존심과, 마지막으로 그 몹쓸 공명심이 더해졌다. 그는 루치우스와 달리 참된 앎을 구했지만, 루치우스처럼 공부에서 자기를 떼어 놓을 만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부지런히 책상 앞에 붙어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이 우정을 즐기는 것을 보면 시샘과 그리움에 시달렸다. 카를 하멜은 맞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가 와서 그를 힘껏 끌어당기려 했다면 그는 기꺼이 따라갔을 것이다. 수줍은 처녀처럼 그는 가만히 앉아서 누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 자기보다 더 강하고 용감해서, 자기를 끌고 가 억지로라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누군가를.
이런 일들 말고도 수업이, 특히 히브리어가 할 일을 많이 주었으므로, 처음 얼마 동안의 시간은 젊은이들에게 무척 빨리 지나갔다. 마울브론을 둘러싼 숱한 작은 호수와 못들은 창백한 늦가을 하늘과, 시들어 가는 물푸레나무와 자작나무와 참나무, 그리고 긴 땅거미를 비추었다. 아름다운 숲에는 겨울을 앞둔 마지막 춤판이 신음하며 환호하며 휘몰아쳤고, 벌써 여러 번 엷은 서리가 내렸다.
서정적인 헤르만 하일너는 마음 맞는 친구를 얻으려 애썼지만 헛일이었다. 이제 그는 날마다 외출 시간이면 홀로 숲속을 헤매었고, 특히 숲 속 못을 좋아했다. 갈대에 둘러싸이고 늙어 시들어 가는 활엽수 우듬지가 드리운, 우울한 갈색 못이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 숲 구석이 이 몽상가를 힘차게 끌어당겼다. 여기서 그는 꿈꾸듯 회초리로 고요한 물 위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레나우의 「갈대의 노래」를 읽고, 물가의 낮은 골풀 속에 누워 죽음과 사라짐이라는 가을의 주제를 곰곰이 생각할 수 있었다. 그동안 떨어지는 나뭇잎과 헐벗은 우듬지의 웅성거림이 거기에 쓸쓸한 화음을 보태 주었다. 그러다 그는 곧잘 주머니에서 작고 검은 공책을 꺼내 연필로 시 한두 줄을 적어 넣었다.
10월도 다 저물어 가는 어느 어스레한 한낮, 홀로 산책하던 한스 기벤라트가 같은 곳에 들어섰을 때에도 하일너는 그러고 있었다. 한스는 이 젊은 시인이 작은 수문의 널빤지 다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공책을 무릎에 얹고,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생각에 잠겨 입에 물고 있었다. 그 옆에는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한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 하일너. 뭐 해?"
"호메로스 읽는 중. 넌, 기벤라트 꼬마?"
"못 믿겠는걸. 너 뭐 하는지 난 벌써 알아."
"그래?"
"그럼. 시 썼지."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지."
"여기 앉아!"
기벤라트는 하일너 곁 널빤지에 앉아 물 위로 다리를 늘어뜨리고, 여기저기서 갈색 나뭇잎이 하나 또 하나 고요하고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빙글빙글 떨어져 내려 소리 없이 갈색빛 수면에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긴 쓸쓸하다." 한스가 말했다.
"그래, 그래."
둘은 어느새 등을 대고 길게 누워 있었다. 그러자 가을빛 둘레에서는 드리운 우듬지 몇 개만 겨우 보일 뿐, 그 대신 섬 같은 구름이 고요히 떠가는 연푸른 하늘이 눈앞에 드러났다.
"구름 참 예쁘다!" 한스가 느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기벤라트 꼬마." 하일너가 한숨을 쉬었다. "저런 구름이라도 됐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
"그럼 우린 저 위에서 돛을 달고 가는 거야. 숲이며 마을이며 고을이며 나라를 넘어서, 멋진 배처럼. 너 배 본 적 없어?"
"없어, 하일너. 넌?"
"있지. 그런데 세상에, 넌 그런 건 하나도 모르잖아. 공부하고 애쓰고 달달 외우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날 바보로 아는 거야?"
"그런 말 안 했어."
"네 생각만큼 그렇게 멍청하진 않아. 그건 그렇고 배 얘기 더 해 봐."
하일너는 몸을 돌리다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이제 그는 배를 깔고 엎드려 두 팔꿈치를 괴고 두 손으로 턱을 받쳤다.
"라인강에서 그런 배를 봤어. 방학 때." 그가 말을 이었다. "한번은 일요일이었는데, 밤에 배 위에서 음악을 하고 색색 등불을 달았지. 불빛이 물에 비치고, 우리는 음악을 들으며 강을 따라 내려갔어. 사람들은 라인 포도주를 마셨고, 처녀들은 하얀 옷을 입고 있었어."
한스는 귀를 기울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그 배가 음악과 붉은 등불과 하얀 옷의 처녀들을 싣고 여름밤을 가르며 가는 것을 보았다. 하일너는 말을 이었다. "그래, 지금하고는 달랐지. 여기서 그런 걸 아는 놈이 누가 있어? 죄다 따분한 놈들, 죄다 음흉한 겁쟁이들뿐이야! 죽어라 일하고 제 몸을 들볶으면서, 히브리어 자모보다 높은 건 아무것도 몰라. 너도 다를 거 없어."
한스는 입을 다물었다. 이 하일너라는 아이는 아무래도 별난 사람이었다. 몽상가, 시인. 한스는 벌써 여러 번 그를 두고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하일너는 공부를 지독히도 적게 했는데도 아는 것이 많았고, 대답도 잘할 줄 알았으며, 그러면서도 또 그런 지식을 업신여겼다.
"여기서는 호메로스를 그렇게 읽는단 말이야." 하일너는 계속 비웃었다. "『오디세이아』가 무슨 요리책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시간에 두 줄, 그러고 나서 낱말 하나하나를 되새김질하고 뜯어보지. 구역질이 날 때까지. 그런데 수업이 끝날 때면 꼭 이렇게 말해. '자네들도 보다시피 시인이 이 대목을 얼마나 멋지게 굴렸나. 자네들은 방금 시 짓기의 비밀을 엿본 걸세!' 그저 불변화사와 부정과거 둘레에 뿌리는 소스 같은 거지. 그래야 아주 숨이 막혀 죽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꼴이라면 호메로스 같은 건 몽땅 갖다 버려도 좋아. 도대체 그 옛날 그리스 나부랭이가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야? 우리 가운데 누가 한번 조금이라도 그리스 사람처럼 살아 보려고 들면 당장 쫓겨날걸. 그러면서 우리 방 이름은 헬라스야! 순 웃기는 얘기지! 왜 '휴지통'이나 '노예 우리'나 '겁쟁이 굴'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고전이라는 건 죄다 사기야."
그는 허공에 침을 뱉었다.
"그런데, 너 아까 시 쓰고 있었지?" 이번에는 한스가 물었다.
"응."
"뭐에 대해서?"
"여기, 이 못하고 가을에 대해서."
"보여 줘!"
"안 돼. 아직 다 못 썼어."
"다 쓰면?"
"그래, 그러지 뭐."
두 아이는 일어나 천천히 수도원으로 돌아갔다.
"봐, 저게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 제대로 본 적 있어?" '낙원' 앞을 지나갈 때 하일너가 말했다. "홀이며 아치 창이며 회랑이며 식당이며, 고딕이고 로마네스크고, 죄다 화려하고 정교한 예술가의 솜씨야. 그런데 이 요술이 다 누굴 위한 거지? 목사가 되려는 가난한 꼬마 서른여섯 명을 위해서야. 국가는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지."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한스가 아는 걱정과 바람이 그 아이에게는 아예 없었다. 하일너에게는 저만의 생각과 말이 있었고, 그는 더 뜨겁고 자유롭게 살았으며, 기이한 괴로움을 앓았고, 둘레의 모든 것을 업신여기는 듯했다. 그는 오래된 기둥과 담장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그리고 제 영혼을 시에 비추어 내고 상상으로 저만의, 살아 있는 듯한 삶을 지어내는 신비롭고 기이한 재주를 부렸다. 그는 날래고 고삐가 풀려 있었으며, 한스가 한 해 동안 할 농담보다 더 많은 농담을 하루에 했다. 그는 우울했고, 제 슬픔을 낯설고 드물고 귀한 물건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
바로 그날 저녁에 하일너는 방 아이들 모두에게 제 얼룩덜룩하고 눈에 띄는 기질을 한 번 보여 주었다. 동급생 하나, 오토 벵거라는 허풍선이 소인배가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한동안 하일너는 침착하고 재치 있게 굴며 여유를 보였지만, 그러다 욱해서 따귀를 한 대 올려붙였고, 그러자 곧 두 맞수는 사납게 뒤엉켜 떨어질 줄 모르고 서로 물고 늘어진 채, 키를 잃은 배처럼 들이받고 반원을 그리고 경련하듯 꿈틀대며 헬라스 방 안을 휩쓸고 다녔다. 벽을 따라, 의자를 넘어, 바닥에서, 둘 다 말없이 헐떡이고 씩씩대며 거품을 물었다. 동급생들은 비평가 같은 얼굴로 곁에 서서 지켜보며, 엉켜 굴러오는 덩어리를 피하고 제 다리와 책상과 등잔을 건지면서 즐거운 긴장 속에 결판을 기다렸다. 몇 분 뒤 하일너가 간신히 일어나 몸을 빼내고는 숨을 몰아쉬며 섰다. 꼴이 엉망이었다. 눈은 벌겋고 셔츠 깃은 찢어졌으며 바지 무릎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맞수가 또 덤벼들려 했지만 하일너는 팔짱을 끼고 서서 거만하게 말했다. "난 더 안 해. 치고 싶으면 쳐." 오토 벵거는 욕을 하며 가 버렸다. 하일너는 제 책상에 기대어 스탠드 등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점점 더 많이. 그것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우는 것은 신학생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틀림없이 가장 창피한 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숨기려고 조금도 애쓰지 않았다. 방을 나가지도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등잔 쪽으로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눈물을 닦지도 않았고 주머니에서 손을 빼지조차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그를 둘러싸고 호기심과 심술이 섞인 눈으로 구경했는데, 마침내 하르트너가 그 앞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 "야, 하일너, 창피하지도 않냐?"
우는 아이는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둘레를 둘러보았다.
"창피해하라고? 너희 앞에서?" 이윽고 그가 큰 소리로 경멸하듯 말했다. "천만에, 이 친구야."
그는 얼굴을 닦고 짜증스럽게 웃더니, 제 등잔을 불어 끄고 방을 나갔다.
한스 기벤라트는 그 장면 내내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저 놀라고 겁먹은 눈으로 하일너 쪽을 곁눈질했을 뿐이었다. 15분 뒤에 그는 용기를 내어 사라진 아이를 따라가 보았다. 하일너는 어둡고 싸늘한 도르멘트에서 깊숙한 창턱 하나에 꼼짝 않고 앉아 회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보니 그의 어깨와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머리가 묘하게 진지하고 소년답지 않아 보였다. 한스가 다가가 창가에 멈춰 섰을 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고, 한참 뒤에야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지도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나야." 한스가 수줍게 말했다.
"무슨 볼일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도로 가도 되겠네."
한스는 마음이 상해서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때 하일너가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마." 그가 일부러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이제 두 아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마 둘 다 이 순간 처음으로 상대의 얼굴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소년다운 그 매끈한 얼굴 뒤에 저만의 별난 구석을 지닌 남다른 한 사람의 삶이, 저 나름의 무늬가 새겨진 남다른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그려 보려 했을 것이다.
헤르만 하일너가 천천히 팔을 뻗어 한스의 어깨를 잡고, 두 얼굴이 바짝 맞닿을 때까지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한스는 갑자기 묘하게 화들짝 놀라며, 상대의 입술이 제 입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전혀 낯선 답답함으로 가슴이 뛰었다. 어두운 도르멘트에 둘이 함께 있는 것과 이 갑작스러운 입맞춤은 무언가 모험 같고 새롭고, 어쩌면 위험한 일이었다. 이러다 들키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끔찍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입맞춤이 아까 운 일보다 다른 아이들에게 훨씬 더 우습고 창피하게 보이리라는 것을 어떤 확실한 느낌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피가 머리로 세차게 솟구쳤고, 할 수만 있으면 달아나고 싶었다.
이 작은 장면을 본 어른이 있었다면, 그는 어쩌면 남몰래 흐뭇해했을지도 모른다. 수줍은 우정 고백에 담긴 서툴고 겁먹은 다정함과, 두 아이의 진지하고 갸름한 얼굴이 흐뭇했을 것이다. 두 얼굴은 다 예쁘고 앞날이 기대되었으며, 반은 아직 아이다운 귀여움을 지니고 반은 벌써 젊은 시절의 수줍고 아름다운 반항기가 스쳐 가고 있었다.
차츰 어린 무리는 함께 사는 데 익숙해졌다. 서로를 알게 되었고, 누구나 누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짐작하는 바가 생겼으며, 우정도 숱하게 맺어졌다. 함께 히브리어 낱말을 외우는 친구 짝이 있었고,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산책을 하거나 실러를 읽는 친구 짝이 있었다. 라틴어는 잘하고 산수는 못하는 아이들이, 라틴어는 못하고 산수는 잘하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공동 작업의 열매를 함께 누리기도 했다. 다른 종류의 계약과 재산 공유를 바탕으로 한 우정도 있었다. 이를테면 모두가 부러워하던 그 햄 주인은 제 짝이 될 반쪽을 슈탐하임에서 온 원예사의 아들에게서 찾아냈는데, 그 아이는 함 바닥에 근사한 사과를 그득 깔아 두고 있었다. 햄 주인은 언젠가 햄을 먹다가 목이 말라 그 아이에게 사과 하나를 청하고 그 대가로 햄을 권했다. 둘은 마주 앉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 끝에 햄이 떨어지면 곧바로 새 햄이 올 것이며, 사과 주인도 봄이 한참 깊을 때까지 아버지가 쌓아 둔 사과로 버틸 수 있으리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탄탄한 관계가 이루어졌고, 그 관계는 더 이상적이고 더 뜨겁게 맺어진 여러 동맹보다 훨씬 오래갔다.
외톨이로 남은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 루치우스가 있었는데, 예술을 향한 그의 욕심 사나운 사랑은 그때 아직 한창 꽃피어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짝도 있었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짝으로 꼽힌 것은 헤르만 하일너와 한스 기벤라트, 경솔한 아이와 성실한 아이, 시인과 공부벌레였다. 둘 다 영리하고 재능 있는 축에 들기는 했지만, 하일너는 반쯤은 비꼬는 뜻으로 천재라는 평판을 누렸고, 한스에게서는 모범생 냄새가 풍겼다. 그래도 아이들은 둘을 꽤 내버려 두었다. 저마다 제 우정에 매여 있었고, 저희끼리 지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저마다의 관심과 일에 빠져 있었다고 해서 학업이 뒷전으로 밀린 것은 아니었다. 학업은 오히려 큰 악장이자 장단이었고, 그 곁에서 루치우스의 음악과 하일너의 시 짓기는 온갖 동맹과 다툼과 이따금의 주먹다짐과 함께 그저 하찮은 변주와 자잘한 곁다리 놀이로 흘러갔을 뿐이다. 무엇보다 히브리어가 일거리를 주었다. 여호와의 낯설고 아득히 오래된 언어는, 딱딱하고 메마른데도 아직 신비롭게 살아 있는 나무처럼 젊은이들의 눈앞에서 낯설고 울퉁불퉁하고 수수께끼같이 자라 올랐다. 기묘하게 뻗은 가지들은 눈길을 끌었고, 이상한 빛깔과 향기를 지닌 꽃들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 가지와 구멍과 뿌리에는 천 년 묵은 정령들이 섬뜩하게, 또는 다정하게 깃들어 살았다. 환상적이고 무시무시한 용들,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옛이야기들, 주름지고 엄숙하고 메마른 노인의 머리들이 아름다운 소년과 눈길 고요한 처녀나 싸움에 능한 여인들 곁에 있었다. 아늑한 루터 성경에서는 아득하고 꿈결같이 울렸고 구약의 안개에 부드럽게 싸여 있던 것이, 이제 거칠고 진짜인 그 언어 속에서 피와 목소리를 얻고, 낡고 굼뜨지만 질기고 으스스한 생명을 얻었다. 적어도 하일너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하일너는 날마다, 때마다 모세 오경 전체를 저주하면서도, 낱말을 모두 알고 읽기에서 더는 틀리지 않는 참을성 많은 숱한 학생들보다 그 안에서 더 많은 생명과 영혼을 찾아내고 빨아들였다.
그 곁에는 신약성경이 있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더 부드럽고 밝고 내면적이었으며, 그 언어는 덜 오래되고 덜 깊고 덜 풍부하지만 더 섬세했고, 젊고 열렬하며 꿈꾸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오디세이아』가 있었다. 힘차고 듣기 좋게, 굳세고 고르게 흘러가는 그 시행들에서는 하얗고 둥근 물의 요정의 팔처럼, 가라앉아 버린 삶, 형식이 맑고 행복했던 삶의 소식과 예감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때로는 힘차게 윤곽을 그은 투박한 한 획 속에서 단단히 손에 잡혔고, 때로는 몇몇 낱말과 시행에서 그저 꿈과 아름다운 예감으로 어렴풋이 비쳐 나왔다.
그 곁에서 역사가 크세노폰과 리비우스는 사라져 버리거나, 적어도 덜 빛나는 별로서 거의 빛도 없이 겸손하게 한쪽에 비켜서 있었다.
한스는 친구에게는 모든 것이 자기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놀라며 알아차렸다. 하일너에게는 추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머릿속에 그려 보고 상상의 빛깔로 칠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럴 수 없는 것은 모두 내키지 않아 하며 내버려 두었다. 그에게 수학은 음흉한 수수께끼를 잔뜩 짊어진 스핑크스였다. 그 차갑고 사악한 눈길은 제물을 꼼짝 못 하게 했고, 그는 그 괴물을 멀찍이 돌아서 피해 다녔다.
두 아이의 우정은 묘한 관계였다. 하일너에게 그것은 즐거움이자 사치, 편안함이거나 변덕이기도 했지만, 한스에게는 때로는 자랑스럽게 지키는 보물이었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다. 그때까지 한스는 저녁 시간을 언제나 공부에 썼다. 그런데 이제는 헤르만이 달달 외우기에 싫증이 나면 거의 날마다 건너와서 책을 빼앗고 그를 붙들어 두었다. 마침내 한스는 친구가 그토록 좋으면서도 저녁마다 그가 올까 봐 떨었고, 아무것도 빼먹지 않으려고 의무로 정해진 자습 시간에 두 배로 열심히, 서둘러 공부했다. 하일너가 이론으로까지 그의 부지런함과 싸우기 시작하자 한스는 더욱 괴로웠다.
"그건 날품팔이 노릇이야." 이런 말이 나왔다. "너는 그 공부를 다 좋아서, 스스로 원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 그저 선생들이 무섭거나 네 아버지가 무서워서 하는 거지. 1등이나 2등을 하면 너한테 무슨 득이 있는데? 나는 20등이지만 그렇다고 너희 공부벌레들보다 멍청하지는 않아."
하일너가 교과서를 어떻게 다루는지 처음 보았을 때도 한스는 기겁을 했다. 한번은 한스가 강의실에 책을 두고 와서, 다음 지리 시간 준비를 하려고 하일너의 지도책을 빌렸다. 그런데 하일너가 지면을 통째로 연필로 칠해 놓은 것을 보고 그는 소름이 끼쳤다. 피레네반도의 서해안은 기괴한 옆얼굴로 그려져 있었는데, 코는 포르투에서 리스본까지 뻗어 있었고, 피니스테레곶 언저리는 곱슬곱슬한 머리 장식으로 꾸며졌으며, 상비센테곶은 멋지게 꼬아 올린 텁수룩한 턱수염의 끝이 되어 있었다. 장마다 그 꼴이었다. 지도 뒷면의 하얀 바탕에는 풍자 그림이 그려지고 뻔뻔한 장난 시가 적혀 있었으며, 잉크 얼룩도 빠지지 않았다. 한스는 제 책을 성물이나 보물처럼 다루는 데 익숙했으므로, 이런 대담한 짓들을 반은 신전 모독으로, 반은 범죄이기는 하나 그래도 영웅다운 위업으로 느꼈다.
착한 기벤라트는 친구에게 그저 기분 좋은 장난감, 말하자면 집고양이 같은 것일 뿐이라고 보일 수도 있었고, 한스 자신도 이따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일너는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에게 매달렸다. 그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고, 제 말을 들어 주고, 저를 우러러보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 학교와 삶을 두고 혁명적인 연설을 늘어놓을 때 조용히, 귀가 솔깃해서 들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우울한 때가 찾아오면 위로해 주고, 그 무릎에 머리를 묻을 수 있는 누군가도 필요했다. 그런 기질의 사람들이 다 그렇듯 이 젊은 시인도 까닭 없는, 조금은 교태 섞인 우울의 발작을 앓았다. 그런 우울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어린 영혼이 소리 없이 작별을 고하는 데, 한편으로는 아직 갈 곳 없이 넘쳐흐르는 힘과 예감과 욕망에, 또 한편으로는 사내가 되어 가는 몸의, 아직 깨닫지 못한 어두운 충동에 있다. 그럴 때면 그는 동정받고 귀여움받고 싶은 병적인 욕구에 사로잡혔다. 예전에 그는 어머니의 귀염둥이였고, 아직 여자를 사랑할 만큼 무르익지 않은 지금은 고분고분한 친구가 그의 위로자 노릇을 했다.
그는 곧잘 저녁이면 죽을 만큼 불행한 얼굴로 한스를 찾아와 공부하던 그를 데려가서는, 함께 도르멘트로 나가자고 졸랐다. 거기 차가운 복도에서, 또는 높고 어스레한 기도실에서 둘은 나란히 이리저리 걷거나, 오들오들 떨며 창가에 앉았다. 그러면 하일너는 서정에 젖어 하이네를 읽는 젊은이들처럼 온갖 처량한 하소연을 늘어놓았고, 조금은 유치한 슬픔의 구름에 휩싸였다. 한스는 그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에게 인상을 남겼고 이따금 그에게 옮아 오기까지 했다. 예민한 멋쟁이 문사는 특히 날이 흐리면 발작에 시달렸고, 하소연과 신음은 대개 늦가을의 비구름이 하늘을 어둡게 덮고, 그 뒤에서 흐린 베일과 틈새로 내다보며 감상적인 달이 제 길을 그려 가는 저녁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면 그는 오시안풍의 기분2에 흠뻑 빠져 안개 같은 비애 속으로 녹아들었고, 그 비애는 한숨과 말과 시가 되어 아무 죄 없는 한스에게 쏟아졌다.
이런 처량한 수난 장면에 짓눌리고 시달린 한스는 남은 시간이면 서두르듯 공부에 뛰어들었지만, 공부는 점점 더 힘들어졌다. 예전의 두통이 다시 찾아온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피곤한 시간이 점점 잦아지고, 꼭 해야 할 것만 하려 해도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는 것이 그를 몹시 걱정스럽게 했다. 그 별난 아이와의 우정이 자기 진을 빼고, 지금껏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제 안의 어떤 부분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하일너가 어둡고 울적해질수록 한스는 그가 더 안쓰러웠고, 친구에게 자기가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의식은 그를 더 다정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병든 비애의 버릇이 그저 넘쳐 나는 건강하지 못한 충동을 내뿜는 것일 뿐, 본디 하일너의 됨됨이에 속한 것이 아님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하일너를 충실하고 진심으로 우러렀다. 친구가 제 시를 읽어 주거나, 시인으로서 품은 이상을 이야기하거나, 실러와 셰익스피어의 독백을 열정적으로, 큰 몸짓을 섞어 낭송할 때면, 한스에게는 그가 자기에게는 없는 마법의 재주 덕분에 하늘을 거닐고, 신 같은 자유와 불 같은 열정 속에서 움직이며, 호메로스의 하늘 사자처럼 날개 달린 신을 신고 자기와 자기 같은 아이들에게서 멀리 날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까지 시인들의 세계는 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대수롭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 그는 처음으로, 아름답게 흐르는 말과 속이는 그림과 아첨하는 운율의 기만적인 힘을 아무 저항 없이 느꼈고, 새로 열린 이 세계를 향한 경외는 친구를 향한 감탄과 어우러져 떼어 낼 수 없는 하나의 감정으로 자라났다.
그사이 등잔 없이는 몇 시간밖에 공부할 수 없는, 폭풍 치는 어두운 11월의 날들이 왔고, 폭풍이 굴러가는 거대한 구름 산들을 캄캄한 하늘 높이 몰아가며 신음하거나 다투듯이 오래되고 튼튼한 수도원 건물에 부딪치는 새카만 밤들이 왔다. 나무들은 이제 잎을 다 떨구었다. 다만 나무 많은 그 고장의 왕인, 우람하고 가지가 울퉁불퉁한 참나무들만은 시든 잎을 단 우듬지로 다른 어떤 나무보다 더 시끄럽고 퉁명스럽게 웅성거렸다. 하일너는 아주 침울해져서, 요즘은 한스 곁에 앉아 있기보다 외딴 연습실에서 혼자 바이올린을 사납게 켜거나 동급생들과 시비를 붙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날 저녁 그 방을 찾아가 보니 열성가 루치우스가 악보대 앞에서 연습하고 있었다. 하일너는 화가 나서 돌아갔다가 반 시간 뒤에 다시 왔다. 루치우스는 아직도 연습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하지." 하일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연습하려는 사람이 너만 있는 줄 알아? 네 깽깽이질은 그러잖아도 온 동네 골칫거리라고."
루치우스는 물러서려 하지 않았고, 하일너는 거칠어졌다. 그래도 루치우스가 태연히 다시 긁어 대기 시작하자, 하일너는 악보대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렸다. 악보가 방 안으로 흩날렸고 악보대가 연주자의 얼굴을 쳤다. 루치우스는 몸을 굽혀 악보를 주웠다.
"원장님한테 이를 거야."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하일너가 사납게 소리쳤다. "그럼 내가 덤으로 개 걷어차듯 한 방 공짜로 먹였다는 것도 같이 일러." 그러고는 당장 그 말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루치우스는 옆으로 펄쩍 비켜 달아나 문에 이르렀다. 쫓는 아이가 뒤를 따랐고, 복도와 넓은 방을 지나, 계단과 마루를 넘어, 수도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날개 건물까지 뜨겁고 요란한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곳에는 원장 관사가 조용하고 점잖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일너는 원장의 서재 문 바로 앞에서야 겨우 도망자를 따라잡았다. 루치우스가 이미 문을 두드리고 열린 문간에 서 있을 때,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약속한 발길질을 마저 먹었고, 문을 닫을 겨를도 없이 폭탄처럼 지배자의 지성소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원장은 젊은이들의 타락을 두고 화려한 연설을 했고, 루치우스는 깊이 생각에 잠겨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으며, 하일너에게는 무거운 감금 처분이 내려졌다.
"이런 처벌은 여러 해 동안 이곳에서 한 번도 없었네." 원장이 하일너에게 호통쳤다. "자네가 십 년 뒤에도 잊지 못하게 해 주겠네. 나머지 너희에게는 이 하일너를 본보기로 세운다."
학년 전체가 하일너를 겁먹은 눈으로 곁눈질했다. 그는 창백하고 고집스러운 얼굴로 서서 원장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속으로 그를 우러르는 아이가 많았는데도,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떠들썩하게 복도를 메웠을 때 그는 나병 환자처럼 따돌림을 받으며 혼자 남았다. 이제 그의 편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제 의무였으리라는 것을 그는 똑똑히 느꼈고, 자신이 비겁하다는 느낌에 괴로웠다. 불행하고 부끄러워서 그는 창가 구석에 몸을 붙이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친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고, 남의 눈에 띄지 않고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거운 감금 처분을 받은 학생은 수도원에서 꽤 오랫동안 낙인이 찍힌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이제부터 특별히 감시를 받는다는 것, 그와 어울리면 위험하고 평판이 나빠진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국가가 학생들에게 베푸는 은혜에는 날카롭고 엄한 규율이 걸맞아야 한다는 것은 입학식 날의 그 거창한 연설에도 벌써 나왔던 말이다. 한스도 그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친구에 대한 의무와 공명심 사이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그의 이상은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이름난 시험들을 치르고, 한몫하는 데 있었다. 다만 낭만적이고 위험한 몫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겁에 질려 제 구석에 머물러 있었다. 아직은 앞으로 나서서 용감해질 수 있었지만, 순간순간 그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의 배신은 이미 행동이 되어 있었다. 하일너는 그것을 똑똑히 알아차렸다. 이 정열적인 소년은 다들 자기를 피하는 것을 느꼈고 그 까닭도 알았지만, 한스만은 믿고 있었다. 지금 느끼는 아픔과 분노 곁에서는 지금껏 품어 온 알맹이 없는 하소연이 그 자신에게도 공허하고 우습게 보였다. 그는 잠시 기벤라트 곁에 멈춰 섰다. 창백하고 거만한 얼굴로 그는 나직이 말했다. "넌 비열한 겁쟁이야, 기벤라트. 퉤!" 그러고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가 버렸다.
다른 생각과 일거리가 젊은이들을 붙들어 둔 것은 다행이었다. 그 일이 있고 며칠 뒤 갑자기 눈이 내리더니, 이어서 서리가 맑게 내린 겨울 날씨가 찾아왔다. 눈싸움도 하고 스케이트도 탈 수 있었고, 모두가 이제 문득 성탄절과 방학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야기를 했다. 하일너에게는 눈길이 덜 갔다. 그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거만한 얼굴로 조용히, 고집스럽게 돌아다니며 아무와도 말하지 않았고, 검은 방수포 표지에 「한 수도사의 노래」라는 제목을 단 공책에 자주 시를 적었다.
참나무와 오리나무, 너도밤나무와 버드나무에는 서리와 얼어붙은 눈이 섬세하고 환상적인 모양으로 매달렸다. 못마다 맑은 얼음이 추위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회랑 안뜰은 고요한 대리석 정원처럼 보였다. 즐겁고 들뜬 명절 기분이 방마다 번졌고, 성탄을 앞둔 설렘은 흠잡을 데 없이 점잖은 두 교수에게조차 너그러움과 명랑한 들뜸의 엷은 빛을 입혔다. 교사와 학생 가운데 성탄절에 무덤덤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일너도 덜 이를 악물고 덜 비참해 보이기 시작했고, 루치우스는 방학 때 어떤 책과 어떤 신발 한 켤레를 가져갈지 궁리했다. 집에서 오는 편지에는 아름답고 무언가를 예감하게 하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 빵 굽는 날 이야기, 곧 닥칠 깜짝 선물에 대한 귀띔, 그리고 다시 만날 기쁨.
방학을 맞아 떠나기 전에 학년 전체, 특히 헬라스 방은 작고 유쾌한 일을 하나 더 겪었다. 교사들을 저녁 성탄 잔치에 초대하기로 했는데, 잔치는 가장 큰 방인 헬라스 방에서 열기로 했다. 축사 하나, 낭송 둘, 플루트 독주 하나, 바이올린 이중주 하나가 준비되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우스운 순서도 하나 꼭 넣어야 했다. 아이들은 의논하고 흥정하고, 제안했다가 물리기를 거듭했지만 뜻이 모이지 않았다. 그때 카를 하멜이 지나가는 말로, 가장 웃기는 건 사실 에밀 루치우스의 바이올린 독주일 거라고 했다. 그 말이 먹혔다. 부탁하고 약속하고 으름장을 놓아서, 아이들은 이 불운한 악사가 나서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정중한 초대장과 함께 교사들에게 보낸 프로그램에는 특별 순서로 "「고요한 밤」, 바이올린을 위한 노래, 궁정 연주가 에밀 루치우스 연주"라고 적혔다. 그 칭호는 그가 외딴 음악실에서 부지런히 연습한 덕에 얻은 것이었다.
원장과 교수들, 조교들, 음악 교사와 사환장이 초대를 받아 잔치에 나왔다. 루치우스가 하르트너에게서 빌린 검은 연미복을 입고, 머리를 빗고 옷을 다려 입은 채, 그 부드럽고 겸손한 웃음을 띠고 나서자 음악 교사의 이마에 진땀이 솟았다. 그가 허리 굽혀 인사하는 것부터가 벌써 웃어 달라는 청 같았다. 「고요한 밤」은 그의 손가락 아래서 가슴을 에는 탄식, 신음하는 고통스러운 수난의 노래가 되었다. 그는 두 번이나 다시 시작했고, 가락을 찢고 토막 냈으며, 발로 박자를 구르며 서리 내린 날의 나무꾼처럼 일했다.
원장은 즐겁게 음악 교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 교사는 분개해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루치우스는 노래를 세 번째 시작했다가 이번에도 막히자, 바이올린을 내리고 청중 쪽으로 돌아서서 변명했다. "안 되겠습니다. 바이올린 켜 본 게 겨우 지난가을부터라서요."
"됐네, 루치우스." 원장이 외쳤다. "애써 줘서 고맙네. 계속 그렇게 배우게. 고난을 넘어 별로!"
12월 24일에는 새벽 세 시부터 모든 침실이 북적이고 떠들썩했다. 창마다 결이 고운 성에꽃이 두툼하게 피어 있었고, 세숫물은 얼어붙었으며, 수도원 마당에는 살을 에는 엷은 찬바람이 스쳐 갔지만,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당에서는 커다란 커피 통들이 김을 올렸고, 곧이어 외투와 목도리로 몸을 감싼 학생들이 어두운 무리를 지어, 희미하게 빛나는 하얀 들판을 지나고 말없는 숲을 지나 멀리 떨어진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모두 수다를 떨고 농담을 하고 큰 소리로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저마다 남모를 바람과 기쁨과 기다림으로 가득했다. 온 나라 곳곳, 도시와 마을과 외딴 농가의 따뜻하고 명절답게 꾸민 방에서 부모와 형제자매가 저희를 기다린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대부분에게는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첫 성탄절이었고, 대부분은 사람들이 사랑과 자랑으로 자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
눈 덮인 숲 한가운데 있는 작은 역에서 아이들은 매서운 추위 속에 기차를 기다렸는데, 그렇게 한마음으로 사이좋고 즐겁게 모여 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하일너만 말없이 혼자 있었고, 기차가 오자 동급생들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혼자 다른 칸으로 갔다. 다음 역에서 갈아탈 때 한스는 그를 한 번 더 보았지만, 부끄러움과 뉘우침은 잠깐 스쳤을 뿐 집으로 가는 흥분과 기쁨 속에 금세 다시 가라앉았다.
집에 와 보니 아버지는 싱글벙글 흡족해했고, 선물을 그득 차린 탁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벤라트 씨네 집에 제대로 된 성탄절이란 없었다. 노래도, 명절의 들뜬 기쁨도 없었고, 어머니가 없었고, 성탄 나무가 없었다. 기벤라트 씨는 명절을 쇨 줄 몰랐다. 그래도 아들이 자랑스러워서 이번에는 선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한스는 다른 성탄절을 겪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얼굴빛이 좋지 않다고, 너무 마르고 너무 창백하다고 하면서, 수도원에서는 밥을 그렇게 조금 주느냐고 물었다. 그는 극구 아니라고 하면서 잘 지낸다고, 다만 두통이 자주 날 뿐이라고 했다. 이 일로 목사가 그를 위로했는데, 목사도 젊은 시절에 두통을 앓았다고 했다. 그것으로 만사가 해결되었다.
강은 매끈하게 얼어붙어 명절 내내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스는 새 옷을 입고 초록색 신학생 모자를 쓴 채 거의 온종일 밖에서 지냈다. 옛 학교 친구들보다 훌쩍 자라,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층 높은 세계로 올라가 버린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