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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햄스터가 모아 둔 양식으로 버티듯이, 한스는 예전에 쌓아 둔 학식으로 얼마 동안은 더 목숨을 이어 갔다. 그다음에는 괴로운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이따금 짧고 힘없는 새 출발이 그것을 끊어 놓기는 했으나, 그 출발이 하도 가망이 없어서 그 자신도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제 그는 쓸데없이 애쓰기를 그만두고, 모세 오경 뒤를 따라 호메로스를, 크세노폰 뒤를 따라 대수를 내던졌으며, 교사들 사이에서 자기 평판이 좋음에서 그런대로로, 그런대로에서 보통으로, 그리고 마침내 0점으로 한 계단씩 떨어져 가는 것을 흔들림 없이 지켜보았다. 두통이 다시 예사가 된 요즈음, 두통이 없을 때면 그는 헤르만 하일너를 생각하고, 눈을 크게 뜬 채 가벼운 꿈을 꾸고, 몇 시간이고 반쯤 생각에 잠긴 채 멍하니 지냈다. 갈수록 늘어나는 모든 교사의 꾸지람에 그는 요즘 들어 사람 좋은, 순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젊고 친절한 교사인 조교 비드리히만이 이 힘없는 웃음을 보며 마음 아파했고, 길에서 벗어난 소년을 가엾이 여겨 너그럽게 대해 주었다. 나머지 교사들은 그에게 분개해서, 경멸하며 본체만체하는 것으로 벌을 주거나, 이따금 빈정거림으로 간질여 그의 잠든 공명심을 깨워 보려 했다.

"혹시 주무시는 중이 아니시라면, 이 문장을 좀 읽어 주십사 부탁드려도 되겠나?"

원장은 점잖게 분개했다. 이 허영심 많은 사내는 제 눈빛의 힘을 대단하게 여겼기에, 위엄 있게 을러대며 눈알을 굴릴 때마다 기벤라트가 번번이 순하고 고분고분한 웃음으로 맞서면 제정신을 잃을 만큼 화가 났고, 그 웃음 때문에 차츰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그렇게 한심하게 웃지 말게. 자네는 오히려 울어야 할 처지야."

그보다 마음을 더 움직인 것은 아버지의 편지였다. 아버지는 질겁해서 제발 마음을 고쳐먹으라고 애원했다. 원장이 기벤라트 씨에게 편지를 썼고, 기벤라트 씨는 혼비백산했다. 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이 착실한 사람이 쓸 줄 아는, 기운을 북돋우고 도덕적으로 분개하는 온갖 상투어를 모아 놓은 것이었으나,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울먹이는 듯한 처량함이 배어 나와 아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원장에서부터 기벤라트 씨에 이르기까지, 교수들과 조교들까지, 제 의무에 충실한 이 청소년의 인도자들은 모두 한스에게서 나쁜 요소를, 자기들 소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억지로라도 힘을 써서 좋은 길로 되돌려 놓아야 할 고집 세고 게으른 무엇을 보았다. 아마 그 동정심 많은 조교 말고는, 야윈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힘없는 웃음 뒤에서 가라앉아 가는 영혼 하나가 괴로워하며,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겁에 질려 절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학교와, 한 아버지와 몇몇 교사의 야만스러운 공명심이 그들 앞에 순진하게 활짝 열려 있던 여린 아이의 영혼 속에서 거리낌 없이 날뛰어, 이 연약하고 섬세한 존재를 이 지경까지 몰고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본 사람도 없었다. 왜 그 아이는 가장 예민하고 가장 위험한 소년 시절에 날마다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했던가? 왜 사람들은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고, 라틴어 학교 친구들과 일부러 멀어지게 하고, 낚시와 어슬렁거리기를 금하고, 초라하고 사람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공명심이라는 텅 비고 천박한 이상을 그에게 주입했던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마땅히 누려야 할 방학조차 허락하지 않았던가?

이제 너무 몰아친 망아지는 길가에 쓰러져 더는 쓸모가 없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군청 의사는 다시 한 번, 이것은 그저 신경이 쇠약해진 상태일 뿐이고 주로 몸이 자라느라 생긴 것이라고 했다. 한스가 방학 동안 실컷 몸조리를 하고, 넉넉히 먹고, 숲으로 많이 쏘다니면 차차 나아질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일은 그렇게까지 가지도 못했다. 방학을 아직 세 주 앞둔 어느 날 오후 수업에서 한스는 교수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교사가 아직 야단을 치고 있는 사이 한스는 걸상에 털썩 주저앉더니 겁에 질려 떨기 시작했고, 이윽고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 울음 발작을 터뜨려 수업이 통째로 중단되었다. 그 뒤로 그는 반나절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튿날 수학 시간에 그는 칠판에 기하 도형을 하나 그리고 증명을 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앞으로 나갔으나 칠판 앞에서 어지러워졌다. 분필과 자를 쥔 채 칠판 위를 아무 뜻 없이 이리저리 휘젓다가 둘 다 떨어뜨렸고, 그것을 주우려고 몸을 굽혔을 때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군청 의사는 제 환자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 꽤 못마땅했다. 그는 말을 조심스럽게 골라 하면서 당장 요양 휴가를 명하고, 신경과 의사에게 보이라고 권했다.

"저 애는 이러다 무도병까지 걸리겠습니다." 의사가 원장에게 속삭였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언짢고 못마땅한 얼굴 표정을 아버지처럼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바꾸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 일은 그에게 쉬웠고 또 썩 잘 어울렸다.

원장과 의사는 저마다 한스의 아버지에게 편지를 한 통씩 써서 소년의 주머니에 넣어 주고 그를 집으로 보냈다. 원장의 언짢음은 깊은 근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일너 사건으로 이제 막 술렁인 학무 당국이 이 새로운 불행을 두고 무어라 생각하겠는가? 모두가 놀랍게 여겼지만 그는 이 일에 걸맞은 연설마저 하지 않았고, 마지막 몇 시간 동안은 한스에게 섬뜩할 만큼 상냥했다. 이 아이가 요양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알았다. 몸이 낫는다 해도, 지금 벌써 한참 뒤처진 이 학생이 놓친 몇 달은커녕 몇 주도 따라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기운을 북돋우듯 다정하게 "또 보세" 하며 그를 떠나보내기는 했다. 그러나 그 뒤로 헬라스 방에 들어가 빈 책상 셋을 볼 때마다 마음이 거북해졌고, 재주 있는 학생 둘이 사라진 데에는 어쩌면 자기에게도 얼마쯤 잘못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속으로 억누르느라 애를 먹었다. 그러나 용감하고 도덕적으로 굳센 사람답게 그는 이 쓸데없고 음울한 의심을 제 영혼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떠나는 신학생 뒤로 교회와 문과 박공과 탑을 거느린 수도원이 가라앉았고, 숲과 겹겹이 달아나는 언덕들이 가라앉았으며, 그 자리에 바덴 접경 지대의 기름진 과수 풀밭이 떠올랐다. 이어 포르츠하임이 나왔고, 그 바로 뒤에서 슈바르츠발트의 검푸른 전나무 산이 시작되었다. 숱한 개울 골짜기에 갈라진 산들은 한여름 뙤약볕 속에서 여느 때보다 더 파랗고 서늘했으며 더 짙은 그늘을 약속하는 듯했다. 소년은 바뀌어 가며 점점 더 고향다워지는 풍경을 즐겁지 않은 것도 아닌 마음으로 바라보았으나, 고향 도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아버지가 떠오르자 맞이할 일이 괴롭고 두려워서 작은 여행의 즐거움이 송두리째 망가지고 말았다. 슈투트가르트로 시험을 보러 가던 길과 마울브론에 입학하러 가던 여행이 그때의 긴장과 겁먹은 기쁨과 함께 다시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이 이제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그는 원장만큼이나 잘 알았다. 자기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제 신학교도 공부도 공명심에 찬 모든 희망도 끝장이 났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슬프지 않았다. 다만 자기가 희망을 저버린 아버지, 실망한 아버지가 두려워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지금 바라는 것은 쉬고, 실컷 자고, 실컷 울고, 실컷 꿈꾸고, 그 모든 시달림 끝에 한 번쯤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채 가만히 놓여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는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고 두려워했다. 기차 여행이 끝나 갈 무렵 그는 두통이 심하게 났고, 이제 기차가 그가 가장 좋아하던 고장, 예전에 열정을 다해 산마루와 숲을 쏘다니던 곳을 지나가는데도 더는 창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겁이 나 있었는데도 하마터면 눈에 익은 고향 역에서 내리는 것을 놓칠 뻔했다.

이제 그는 우산과 여행 가방을 든 채 거기 서서 아버지의 눈길을 받았다. 원장이 보낸 마지막 보고를 받고 나서, 잘못되어 가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실망과 분개는 넋이 나갈 듯한 공포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한스가 폭삭 망가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으리라 상상했는데, 막상 보니 야위고 허약하기는 해도 아직 멀쩡하게 제 발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것은 그가 숨기고 있는 두려움, 의사와 원장이 편지에 쓴 신경병에 대한 소름 끼치는 공포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지금껏 신경병을 앓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집안사람들은 그런 환자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이해할 생각도 없이 비웃거나, 정신 병원 사람들을 두고 말하듯 경멸 섞인 동정을 보였다. 그런데 이제 제 아들 한스가 그런 탈을 달고 집에 돌아왔다.

첫날 소년은 꾸지람을 듣지 않고 맞아들여진 것이 기뻤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그를 대하는 조심스럽고 겁먹은 배려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보기에도 억지로 애를 써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이따금 그는 아버지가 묘하게 살피는 눈길로, 섬뜩한 호기심을 품고 자기를 바라보고, 목소리를 죽인 거짓된 말투로 말을 걸며, 자기가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지켜본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는 더욱 주눅이 들었고, 자기 상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으면 그는 몇 시간이고 바깥 숲 속에 누워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 좋았다. 거기서는 이따금 옛날 소년 시절의 행복이 희미하게 되비쳐 상처 입은 그의 영혼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꽃이나 딱정벌레를 보는 기쁨, 새소리를 엿듣거나 짐승 발자국을 쫓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잠깐뿐이었다. 대개 그는 이끼 위에 맥없이 누워 무거운 머리로 무엇이든 생각해 보려고 헛되이 애쓰다가, 꿈이 다시 찾아와 그를 먼 다른 곳으로 데려가곤 했다. 그는 거의 늘 두통을 앓았고, 수도원이나 라틴어 학교를 떠올리면 그 많은 책과 과목과 의무가 사나운 가위눌림처럼 그를 덮쳤으며, 지끈거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리비우스와 카이사르, 크세노폰과 산수 문제들이 어지럽고 괴로운 춤을 추었다.

한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친구 헤르만 하일너가 죽어서 들것에 누워 있었고, 그는 그리로 가려 했으나 원장과 교사들이 그를 떠밀었고, 그가 다시 다가설 때마다 아프게 쥐어박았다. 신학교 교수들과 조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장과 슈투트가르트 시험관들까지 모두 성난 얼굴로 거기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었다. 들것 위에는 물에 빠져 죽은 힌두가 누워 있었고, 높은 실크해트를 쓴 그 우스꽝스러운 아버지가 굽은 다리로 서글프게 그 곁에 서 있었다.

또 이런 꿈도 꾸었다. 그는 달아난 하일너를 찾아 숲 속을 달렸고, 나무줄기들 사이로 저 멀리 하일너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또 보았지만, 부르려고 하면 번번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일너는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하일너가 멈춰 서서 그를 다가오게 하더니 말했다. "있지, 나 애인 있어." 그러고는 지나치게 큰 소리로 웃으며 덤불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아름답고 야윈 사내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고요하고 신성한 눈과 아름답고 평화로운 손을 지닌 사람이었고, 그는 그 사람에게 달려갔다. 모든 것이 다시 흩어져 버렸고, 그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복음서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우튀스 에피그논테스 아우톤 페리에드라몬." 그러자 이번에는 페리에드라몬이 무슨 활용형인지, 그 동사의 현재와 부정사와 완료와 미래는 어떻게 되는지 생각해 내야 했고, 단수와 양수와 복수로 끝까지 활용해 보아야 했으며, 조금이라도 막히면 겁에 질려 땀을 흘렸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면 머릿속이 온통 헐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저도 모르게 얼굴이 체념과 죄책감에 찬 그 졸린 웃음으로 일그러지면 곧바로 원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멍청한 웃음은 뭔가? 자네가 웃기까지 할 처지인가!"

이따금 나은 날이 있기는 했으나 전체로 보면 한스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는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뒷걸음질하는 듯했다. 예전에 어머니를 치료하다가 사망 진단을 내렸고 가끔 가벼운 통풍을 앓는 아버지를 보러 오던 집안 주치의는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날마다 자기 소견을 말하기를 미루었다.

그 몇 주 동안에야 한스는 라틴어 학교의 마지막 두 해 동안 자기에게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동급생들은 더러는 떠났고, 더러는 견습공이 되어 돌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그 누구와도 그를 잇는 것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그가 찾아갈 일이 없었으며, 누구도 그에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늙은 교장이 두 번 그에게 다정한 말을 몇 마디 건넸고, 라틴어 교사와 목사도 길에서 그에게 호의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한스는 이제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더는 이것저것 쑤셔 넣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고, 갖가지 씨앗을 뿌릴 밭도 아니었다. 그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은 이제 보람 없는 일이었다.

목사가 그를 조금이라도 돌봐 주었더라면 좋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목사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줄 수 있었던 것, 곧 학문이나 적어도 학문을 찾는 일은 예전에 소년에게 아낌없이 주었고, 그 이상은 그에게 없었다. 세상에는 라틴어 실력은 의심받아 마땅하고 설교도 뻔한 샘에서 길어 온 것이지만, 온갖 고통에 따뜻한 눈길과 다정한 말을 지녔기에 힘든 때면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가는 목사들이 있다. 그는 그런 목사가 아니었다. 기벤라트 씨 역시 친구나 위로자가 되어 주지 못했다. 한스에게 실망한 언짢음을 감추려고 온갖 애를 쓰기는 했지만.

그래서 한스는 버림받고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작은 뜰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숲에 누워 몽상이나 저를 괴롭히는 생각에 빠져 지냈다. 책을 읽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읽다 보면 이내 머리와 눈이 아팠고, 어느 책이든 펼치기만 하면 곧바로 수도원 시절의 유령과 거기서 느낀 불안이 되살아나, 그를 숨 막히고 겁나는 꿈의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게 붙잡아 두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곤궁하고 외로운 처지에 놓인 병든 소년에게 또 다른 유령이 거짓 위로자로 다가와, 차츰 낯익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었다. 총 한 자루를 구하거나 숲 속 어딘가에 올가미를 매다는 일쯤은 쉬웠다. 거의 날마다 이런 생각이 산책길을 따라다녔고, 그는 조용히 외떨어진 곳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다가 마침내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 자리를 하나 찾아내어 그곳을 자기가 죽을 자리로 아주 정해 두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곳을 찾아가 앉아서, 머지않아 사람들이 거기서 죽은 자기를 발견하리라고 상상하며 묘한 기쁨을 맛보았다. 밧줄을 맬 나뭇가지도 정해 두었고 튼튼한지도 시험해 보았다. 이제 앞을 가로막는 어려움은 하나도 없었다. 띄엄띄엄 오래 쉬어 가며, 아버지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와 헤르만 하일너에게 보내는 아주 긴 편지도 차츰 써 두었다. 시신 곁에서 발견되도록.

준비를 해 두고 이제 틀림없다는 느낌이 들자 그의 마음은 한결 나아졌다. 그 운명의 나뭇가지 아래 앉아 있노라면 짓누르던 것이 물러가고 거의 즐겁기까지 한 편안함이 찾아드는 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아버지도 아들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알아차렸고, 한스는 아버지가 그 기분을 기뻐하는 모습을 빈정거리는 재미로 지켜보았다. 그 기분의 까닭은 그저 머지않아 끝장이 나리라는 확신일 뿐인데도.

왜 자기가 벌써 오래전에 그 아름다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지 않은지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생각은 굳었고 죽음은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당분간은 기분이 좋았고, 먼 여행을 떠나기 전에 흔히 그러듯이 이 마지막 날들에 아름다운 햇빛과 외로운 몽상을 한껏 맛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떠나는 것이야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 뜻으로 조금 더 옛 터전에 머물면서, 자기의 위험한 결심을 꿈에도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에게는 각별히 쓰디쓴 기쁨이었다. 의사를 만날 때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고 보라지!"

운명은 그가 제 어두운 계획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었고, 그가 날마다 죽음의 잔에서 쾌락과 생명력 몇 방울을 맛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망가진 어린 존재야 대단할 것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제 원을 다 그려야 했고, 삶의 쓰디쓴 단맛을 조금이라도 더 맛보기 전에는 판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벗어날 수 없이 괴롭히던 상상은 드물어졌고, 그 자리를 피곤한 채 될 대로 되라는 마음, 아프지 않은 나른한 기분이 차지했다. 그런 기분 속에서 한스는 시간과 날들이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았고, 무심히 허공을 쳐다보았으며, 이따금 몽유병자 같거나 어린애 같아 보였다. 한번은 나른하고 어스름한 기분으로 작은 뜰의 전나무 아래 앉아, 저도 모르게 오래된 노래 한 구절을 거듭거듭 흥얼거렸다. 라틴어 학교 시절에 배운 노래가 마침 떠오른 참이었다.

아, 나는 너무 피곤해,
아, 나는 너무 지쳤어,
지갑에도 돈 한 푼 없고
주머니에도 한 푼 없네.

그는 옛 가락에 맞추어 흥얼거렸고, 스무 번째로 다시 부르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창가 가까이 서서 그것을 듣고는 크게 놀랐다. 메마른 성품의 아버지로서는 이 생각 없고 기분 좋게 멍한 흥얼거림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고,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을 가망 없는 정신 박약의 징후로 풀이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더욱 걱정스럽게 지켜보았고, 소년은 물론 그것을 알아채고 괴로워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밧줄을 들고 가서 그 튼튼한 나뭇가지를 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사이 더운 계절이 왔고, 주 시험과 그때의 여름 방학 뒤로 벌써 한 해가 지났다. 한스는 이따금 그 일을 떠올렸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는 꽤 무디어져 있었다. 다시 낚시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에게 부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가에 설 때마다 그 생각이 그를 괴롭혔고, 그는 이따금 아무도 보지 않는 강가에 오래 머물며 소리 없이 헤엄치는 어두운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뜨거운 눈으로 좇았다. 저녁 무렵이면 날마다 강을 따라 조금 올라가 멱을 감았는데, 그 길에 늘 게슬러 감독관의 작은 집 앞을 지나야 했으므로, 세 해 전에 그가 홀딱 빠졌던 에마 게슬러가 다시 집에 와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궁금해서 몇 번 뒤를 따라 바라보았지만 그 아이는 예전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에마 게슬러는 팔다리가 가녀린 아주 고운 계집아이였는데, 이제는 키가 자랐고 몸짓이 모가 났으며, 아이답지 않은 유행 머리를 하고 있어 그것이 모습을 아예 망쳐 놓았다. 긴 치마도 어울리지 않았고, 숙녀처럼 보이려는 애씀도 영락없이 딱했다. 한스는 그 아이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면서도 그 무렵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얼마나 묘하게 달콤하고 어둡고 따뜻한 마음이 되었던가를 생각하면 서글펐다. 아무튼 그때는 모든 것이 달랐다.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즐겁고, 훨씬 더 생기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가 아는 것이라곤 라틴어, 역사, 그리스어, 시험, 신학교, 그리고 두통뿐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옛날이야기 책과 도둑 이야기 책이 있었고, 작은 뜰에서는 손수 만든 망치 방아가 돌아갔으며, 저녁이면 나숄트네 대문간에서 리제가 들려주는 모험 이야기를 함께 들었다. 한동안은 이웃의 늙은 그로스요한, 별명 가리발디를 강도 살인범으로 여기고 꿈에까지 보았고, 한 해 내내 달마다 무엇인가를 고대했다. 건초 말리기를, 클로버 베기를, 또 첫 낚시나 가재잡이를, 홉 따기와 자두 털기를, 감자 줄기 태우는 불을, 타작이 시작되는 날을 기다렸고, 그 사이사이 정다운 일요일과 명절마다 따로 또 들떴다. 그때는 신비로운 마법으로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직 많이 있었다. 집과 골목, 계단과 헛간 다락, 우물과 울타리, 온갖 사람과 짐승이 그에게는 정답고 낯익거나, 수수께끼처럼 마음을 끌었다. 홉을 딸 때는 일손을 거들며 큰 처녀들이 부르는 노래를 귀 기울여 들었고, 그 노래에서 몇 구절을 외워 두었다. 대개는 우스워서 웃음이 나는 것이었으나 몇몇은 묘하게 구슬퍼서, 듣고 있으면 목이 메었다.

그 모든 것이 가라앉아 끝나 버렸는데, 그때 그는 곧바로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리제 곁에서 보내던 저녁들이 끝났고, 다음에는 일요일 오전의 금빛 피라미 잡이가, 그다음에는 옛날이야기 책 읽기가 끝났으며,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홉 따기와 뜰의 망치 방아까지 끝나 버렸다. 아, 그 모든 것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

그리하여 일찍 철든 이 젊은이는 병든 나날 속에서 현실이 아닌 두 번째 어린 시절을 겪게 되었다. 학교 선생들에게 어린 시절을 도둑맞은 그의 마음은 이제 갑자기 터져 나온 그리움에 이끌려 그 아름답고 어슴푸레한 세월로 달아났고, 추억의 숲 속을 홀린 듯 헤매었다. 그 추억들의 힘과 선명함은 어쩌면 병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예전에 실제로 겪을 때 못지않은 따뜻함과 열정으로 다시 겪었다. 속고 짓밟힌 어린 시절이 오래 막혀 있던 샘처럼 그의 안에서 터져 나왔다.

나무는 꼭대기를 잘리면 흔히 뿌리 가까이에서 새싹을 틔운다. 그처럼 꽃필 무렵에 병들어 시든 영혼도 흔히 시작의 봄 같은 시절, 예감으로 가득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곤 한다. 마치 거기서 새 희망을 찾아내고 끊어진 삶의 실을 다시 이을 수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뿌리에서 난 싹은 물이 올라 서둘러 무성하게 자라지만, 그것은 겉보기 삶일 뿐이고 거기서 다시 나무가 되는 일은 결코 없다.

한스 기벤라트도 그러했다. 그러니 꿈길을 따라 어린 시절의 나라를 헤매는 그를 잠시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기벤라트 씨네 집은 옛 돌다리 가까이 서서, 성격이 아주 다른 두 골목이 만나는 모퉁이를 이루었다. 그 집이 속한다고 쳐 주고 실제로도 속해 있던 한쪽 골목은 이 도시에서 가장 길고 넓고 점잖은 거리로, 무두장이 거리라 불렸다. 다른 한쪽은 가파르게 비탈을 올라가는 짧고 좁고 초라한 골목으로, '매' 골목이라 불렸다. 오래전에 문을 닫은 아주 오래된 여관의 간판이 매였던 데서 온 이름이었다.

무두장이 거리에는 집집마다 착실하고 견실한 토박이 시민들만 살았다. 제집과 교회의 제 좌석과 제 뜰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그 뜰들은 뒤쪽으로 층층이 가파르게 비탈을 타고 올라가, 1870년에 쌓아 노란 금작화가 우거진 철둑에 울타리가 닿아 있었다. 점잖기로 무두장이 거리와 겨룰 수 있는 곳은 장터 광장뿐이었다. 그곳에는 교회와 군청, 법원과 시청과 교구장 관저가 서 있었고, 그 깔끔한 위엄이 영락없이 도시다운 고상한 인상을 주었다. 무두장이 거리에는 관청 건물이야 하나도 없었지만, 당당한 현관문을 단 옛 시민 집과 새 시민 집, 예쁘고 고풍스러운 목골조 집들, 산뜻하고 밝은 박공들이 있었다. 그리고 집이 한 줄로만 늘어서 있다는 것이 이 거리를 한결 다정하고 아늑하고 환하게 만들었다. 길 건너편에는 들보 난간을 두른 담장 아래로 강이 흘러갔기 때문이다.

무두장이 거리가 길고 넓고 환하고 널찍하고 점잖았다면, '매' 골목은 그 정반대였다. 여기에는 얼룩지고 부스러지는 회벽에, 눌러 찌그러뜨린 모자를 떠올리게 하는 박공이 앞으로 늘어지고, 여기저기 갈라지고 기운 문과 창, 굽은 굴뚝과 망가진 빗물 홈통을 단 기울고 어두운 집들이 서 있었다. 집들은 서로 자리와 빛을 빼앗았고, 골목은 좁고 괴상하게 휘었으며 늘 어스름에 싸여 있었는데, 그 어스름은 비 오는 날이나 해가 진 뒤면 축축하고 고약한 어둠으로 바뀌었다. 창마다 장대와 줄에 빨래가 언제나 잔뜩 널려 있었다. 골목은 작고 초라했지만 그 안에 북적이는 가족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셋방살이하는 사람들과 잠자리만 빌려 쓰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기울고 늙어 가는 집들의 구석구석에 사람이 빽빽이 살았고, 가난과 악덕과 질병이 그곳에 눌러살았다. 경찰과 병원은 나머지 도시 전체를 합친 것보다 이 몇 채 안 되는 매 골목 집들 때문에 더 바빴다. 장티푸스가 돌면 거기서 돌았고, 살인이 한 번 났다 하면 그것도 거기서 났으며, 도시에 도둑질이 생기면 사람들은 맨 먼저 매 골목부터 뒤졌다. 떠돌이 행상들이 거기에 묵어 가는 집을 두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우스꽝스러운 광택 가루 장수 호테호테와, 온갖 범죄와 악덕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따라다니는 칼 가는 사람 아담 히텔도 있었다.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처음 몇 해 동안 한스는 매 골목에 자주 드나들었다. 짚빛 머리에 옷이 해진, 수상쩍은 사내아이 패거리와 어울려 그 이름난 로테 프로뮐러가 들려주는 살인 이야기를 듣곤 했다. 로테 프로뮐러는 작은 술집 주인과 이혼한 여자로 감옥에서 다섯 해를 살고 나왔다. 한때는 이름난 미인이어서 공장 일꾼들 사이에 애인을 수두룩하게 두었고, 여러 번 추문과 칼부림의 빌미가 되었다. 이제 로테는 혼자 살면서, 공장이 파한 뒤 저녁마다 커피를 끓이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냈다. 그럴 때면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아낙네들과 젊은 일꾼들 말고도 늘 이웃 아이들 한 무리가 문지방에 서서 넋을 잃고 오싹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검은 돌 화덕 위에서는 주전자의 물이 끓었고, 그 곁에서 타는 수지 양초가 파란 숯불과 함께 사람으로 꽉 찬 어두운 방을 기묘하게 일렁이며 비추었으며, 그 빛은 듣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벽과 천장에 어마어마하게 크게 던져 방 안을 유령 같은 움직임으로 가득 채웠다.

그곳에서 여덟 살 소년은 핑켄바인 형제를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엄한 금지를 무릅쓰고 한 해쯤 그들과 우정을 나누었다. 형제의 이름은 돌프와 에밀로, 이 도시에서 가장 약삭빠른 골목 개구쟁이였다. 과일 서리와 자잘한 숲 도둑질로 이름이 났고, 숱한 재주와 장난에 도가 튼 아이들이었다. 둘은 부업으로 새알과 납 탄알, 새끼 까마귀와 찌르레기와 토끼를 사고팔았고, 금지된 밤낚시를 놓았으며, 도시의 어느 뜰에서나 제집처럼 굴었다. 아무리 뾰족한 울타리도, 유리 조각을 아무리 빽빽하게 꽂은 담장도 그들이 쉽게 넘어가지 못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스가 따른 것은 '매' 골목에 사는 헤르만 레히텐하일이었다. 그는 고아였고, 병약하고 조숙하고 남다른 아이였다. 한쪽 다리가 너무 짧아서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고, 골목 놀이에 끼지 못했다. 몸은 야위었고, 핏기 없이 고통이 밴 얼굴에 일찍부터 쓴맛을 아는 입매와 지나치게 뾰족한 턱을 하고 있었다. 온갖 손재주에 놀랄 만큼 능했고, 특히 낚시에 엄청난 열정이 있었는데, 그 열정을 한스에게 옮겨 주었다. 한스는 그때 아직 낚시 허가증이 없었지만 둘은 그래도 남몰래 숨은 곳에서 낚시를 했다. 사냥이 즐거움이라면, 다들 알다시피 밀렵은 더없는 쾌락이다. 다리를 저는 레히텐하일은 한스에게 낚싯대로 쓸 가지를 제대로 자르는 법, 말총을 땋는 법, 낚싯줄을 물들이는 법, 실 올가미를 꼬는 법, 낚싯바늘을 벼리는 법을 가르쳤다. 날씨를 살피는 법, 물을 지켜보고 밀기울을 풀어 흐리게 하는 법, 알맞은 미끼를 고르고 제대로 꿰는 법도 가르쳤고, 물고기 종류를 가려보는 법, 낚시하는 동안 물고기의 기척을 엿듣는 법, 낚싯줄을 알맞은 깊이에 두는 법도 가르쳤다. 말없이, 오직 본보기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그는 한스에게 손놀림과, 당겨야 할 순간과 늦춰야 할 순간을 아는 섬세한 감각과, 그것 없이는 섬세한 낚시가 있을 수 없는 손의 그 묘한 예민함을 전해 주었다. 가게에서 살 수 있는 근사한 낚싯대와 코르크와 유리 낚싯줄과 그 밖의 온갖 공들여 만들어 파는 낚시 도구를 그는 열심히 경멸하고 비웃었으며, 부분 부분을 다 손수 만들어 맞추지 않은 낚싯대로는 도저히 고기를 낚을 수 없다고 한스에게 믿게 했다.

핑켄바인 형제와는 화를 내며 갈라섰지만, 조용하고 다리를 저는 레히텐하일은 다툼 없이 한스를 떠났다. 어느 2월 날 그는 초라한 작은 침대에 몸을 누이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의자에 놓인 옷가지 위에 얹어 두고는,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빠르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매 골목은 그를 곧바로 잊었고, 한스만이 오래도록 그를 좋게 기억했다.

그러나 매 골목의 별난 주민이 그로써 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술버릇 때문에 쫓겨난 우편배달부 뢰텔러를 누가 몰랐겠는가? 그는 두 주마다 곤드레만드레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거나 밤중에 소동을 벌였지만, 그 밖에는 어린아이처럼 착했고 늘 호의에 차서 웃었다. 그는 한스에게 타원형 담뱃갑의 코담배를 맡게 해 주었고, 이따금 한스에게서 물고기를 얻어 버터에 구운 다음 한스를 불러 같이 먹었다. 그에게는 유리 눈알을 박은 말똥가리 박제와, 가늘고 고운 소리로 낡은 춤곡을 연주하는 오래된 오르골이 있었다. 그리고 맨발로 다닐 때조차 늘 소매 끝동을 단 아주 늙은 기계공 포르슈를 누가 몰랐겠는가? 옛 방식대로 엄한 시골 학교 선생의 아들인 그는 성경 절반과, 귀가 따갑도록 많은 속담과 교훈 격언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눈처럼 흰 머리도, 그가 아낙네들 앞에서 바람둥이 노릇을 하고 툭하면 술에 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술이 얼큰하게 오르면 그는 기벤라트 씨네 집 모퉁이에 박힌 차막이 돌 위에 즐겨 앉아, 지나가는 사람마다 이름을 불러 세워 놓고 격언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한스 기벤라트 2세, 내 귀한 아들아, 내 말을 들어라! 집회서는 뭐라고 하느냐? 악한 꾀를 내지 않아 그 일로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아름다운 나무에 달린 푸른 잎이 더러는 떨어지고 더러는 다시 돋아나듯이, 사람의 일도 그와 같아서 더러는 죽고 더러는 태어난다. 자, 이제 집에 가거라, 이 물개 녀석아."

이 늙은 포르슈는 경건한 격언과는 별개로 유령 따위에 관한 어둡고 전설 같은 이야기를 잔뜩 품고 있었다. 그는 유령이 나도는 곳을 알았고, 제 이야기를 믿는 마음과 못 믿는 마음 사이를 늘 오락가락했다. 대개는 미심쩍다는 듯, 허풍 섞어 하찮게 여기는 투로, 이야기와 듣는 사람들을 다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시작했지만, 이야기하는 동안 차츰 겁에 질려 몸을 움츠리고 목소리를 점점 낮추다가 마침내 나직하고 파고드는 듯한 으스스한 속삭임으로 끝맺었다.

이 가난하고 작은 골목에는 얼마나 많은 으스스한 것, 속을 알 수 없는 것, 어둡게 마음을 끄는 것이 들어 있었던가! 철공 브렌들레도 가게가 망하고 손질하지 않은 작업장이 아주 엉망이 된 뒤로 이 골목에 살았다. 그는 반나절씩 작은 창가에 앉아 북적이는 골목을 음울하게 내다보았고, 이따금 이웃집의 옷 해지고 씻지 않은 아이 하나가 손에 걸리면 남이 괴로워하는 것을 즐기는 사나운 마음으로 그 아이를 괴롭혀, 귀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온몸이 시퍼렇게 되도록 꼬집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연 철사 한 토막에 목을 매어 제 집 계단에 매달려 있었는데, 몰골이 하도 끔찍해서 아무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다가, 늙은 기계공 포르슈가 뒤쪽에서 함석 가위로 철사를 잘랐다. 그러자 혀를 빼문 시체가 앞으로 고꾸라져 계단을 굴러 내려가 질겁한 구경꾼들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한스는 밝고 넓은 무두장이 거리에서 어둡고 축축한 매 골목으로 들어설 때마다, 그 묘하게 숨 막히는 공기와 함께 황홀하면서도 오싹한 가슴 졸임에 사로잡혔다. 호기심과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과 모험을 예감하는 행복이 뒤섞인 기분이었다. 매 골목은 아직 옛이야기나 기적이나 듣도 보도 못한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마법과 유령 놀음이 그럴듯하고 있을 법한 곳이었으며, 전설이나, 교사들이 압수하곤 하던 그 추문투성이 로이틀링겐 민중본1을 읽을 때와 똑같이 아프도록 달콤한 전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책들은 존넨비르틀레, 신더한네스, 메서카를레, 포스트미헬 같은 어두운 영웅과 흉악범과 모험가 들의 악행과 그 벌을 다루었다.

그러나 매 골목 말고도, 다른 어디와도 다른 곳이 또 하나 있었다. 무언가를 겪고 듣고, 어두운 다락과 낯선 방들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곳이었다. 바로 가까이 있는 큰 무두질 공장, 그 오래되고 거대한 집이었다. 그곳에서는 어둑한 다락에 커다란 가죽들이 걸려 있었고, 지하실에는 덮개를 씌운 구덩이와 들어가면 안 되는 통로가 있었으며, 저녁이면 리제가 아이들 모두에게 아름다운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곳은 건너편 매 골목보다 더 조용하고 다정하고 사람 사는 곳다웠지만 수수께끼 같기는 못지않았다. 무두질 직인들이 구덩이와 지하실과 무두 껍질 마당과 다락에서 일하는 모습은 신기하고 별났고, 휑하니 입을 벌린 커다란 방들은 조용했으며 끌리는 만큼 으스스했다. 기운 세고 무뚝뚝한 집주인은 식인귀처럼 두려움을 사서 다들 피해 다녔고, 리제는 그 별난 집 안을 요정처럼 돌아다녔다. 리제는 모든 아이와 새와 고양이와 강아지를 지켜 주는 어머니였고, 선량함과 신기하기 짝이 없는 옛이야기와 노래 구절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소년의 생각과 꿈은 이제 오래전에 멀어진 이 세계 속을 헤매었다. 크나큰 실망과 절망에서 벗어나 그는 지나간 좋은 시절로 달아났다. 그때 그는 아직 희망으로 가득했고, 세상이 엄청나게 큰 마법의 숲처럼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숲은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곳에 무시무시한 위험과 마법에 걸린 보물과 에메랄드 성들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이 황야에 조금 들어갔으나 기적이 나타나기도 전에 피곤해져 버렸고, 이제 다시 수수께끼처럼 어스름한 입구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쫓겨난 사람으로서, 하릴없는 호기심을 품고.

한스는 몇 번 '매' 골목을 다시 찾아갔다. 그곳에는 옛 어스름과 옛 고약한 냄새, 옛 구석들과 빛 없는 계단참이 그대로 있었다. 문 앞에는 또다시 머리 센 늙은이들이 앉아 있었고, 씻지 않은 짚빛 머리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다. 기계공 포르슈는 더 늙어서 한스를 더는 알아보지 못했고, 그의 수줍은 인사에 비웃듯 염소처럼 매애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로스요한, 별명 가리발디는 죽었고 로테 프로뮐러도 죽었다. 우편배달부 뢰텔러는 아직 있었다. 그는 개구쟁이들이 자기 오르골을 망가뜨렸다고 하소연하더니 코담배를 권하고는 이내 돈을 우려내려 했다. 끝으로 핑켄바인 형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하나는 지금 시가 공장에 다니며 벌써 어른처럼 술을 퍼마시고, 다른 하나는 교회 축일에 칼부림을 벌이고 달아나 벌써 한 해째 소식이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이 딱하고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그는 무두질 공장으로 건너갔다. 마치 그 오래된 큰 집에 그의 어린 시절이 잃어버린 온갖 기쁨과 함께 숨어 있기라도 한 듯이, 무언가가 그를 대문간을 지나 축축한 마당 너머로 이끌었다.

구부러진 계단과 돌을 깐 현관 마루를 지나 캄캄한 계단에 이르자, 그는 더듬더듬 다락까지 올라갔다. 거기에는 가죽들이 펼쳐 걸려 있었고, 그는 그 매캐한 가죽 냄새와 함께 갑자기 몰려나오는 추억을 구름째 들이마셨다. 다시 내려온 그는 뒷마당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무두질 구덩이들과, 무두 껍질 덩이를 말리는 좁은 지붕 덮인 높은 시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담장 옆 걸상에 리제가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깎을 감자 한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둘레에서는 아이 몇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스는 어두운 문간에 멈춰 서서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땅거미가 내리는 무두장이네 뜰에는 커다란 평화가 가득했다. 마당 담 너머로 흘러가는 강물이 희미하게 소리를 낼 뿐, 들리는 것이라고는 리제가 감자를 깎는 칼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이야기하는 그 목소리뿐이었다. 아이들은 쪼그리고 앉아 거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리제는 성 크리스토포루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밤중에 어떤 아이의 목소리가 그를 불러 강을 건네 달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한스는 한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캄캄한 현관 마루를 지나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다시 아이가 되어 저녁마다 무두장이네 뜰에서 리제 곁에 앉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매 골목만큼이나 무두장이네 집도 피해 다녔다.

주

  1. 1. 로이틀링겐 민중본은 로이틀링겐에서 찍어 낸, 도적 이야기 따위를 실은 싸구려 통속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