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두 세계
나는 내 이야기를, 열 살에서 열한 살쯤 되어 우리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겪은 한 가지 일에서 시작하려 한다.
많은 것이 거기서 내게 향기처럼 밀려와, 어두운 골목과 밝은 골목과, 집과 탑과, 시계 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얼굴과, 아늑하고 따스한 온기가 가득한 방과 비밀과 깊은 유령의 두려움이 가득한 방이, 아픔과 기분 좋은 전율로 내 속을 건드린다. 따스하고 비좁은 냄새가, 토끼와 하녀들의 냄새가, 집에서 쓰는 상비약과 말린 과일의 냄새가 난다. 두 세계가 거기서 뒤섞여 흘렀고, 낮과 밤이 서로 다른 두 극에서 찾아왔다.
한 세계는 아버지의 집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 좁아서 실은 내 부모만을 품고 있었다. 이 세계는 내게 거의 다 낯익었다. 그 세계의 이름은 어머니와 아버지였고, 사랑과 엄격함, 모범과 학교였다. 이 세계에는 은은한 광채와 맑음과 깨끗함이 속해 있었고, 여기에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과 씻은 손과 깨끗한 옷과 좋은 예절이 제집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서는 아침 찬송을 불렀고, 여기서는 성탄절을 지냈다. 이 세계에는 미래로 곧게 뻗은 선과 길이 있었고, 의무와 죄, 양심의 가책과 고해, 용서와 좋은 결심, 사랑과 공경, 성경 말씀과 지혜가 있었다. 우리의 미래는 이 세계에 속해야 했고, 그러니 미래는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반듯해야 했다.
그런데 다른 세계는 바로 우리 집 한가운데서 벌써 시작되었고, 전혀 달랐다. 냄새가 달랐고, 쓰는 말이 달랐고, 약속하고 요구하는 것이 달랐다. 이 두 번째 세계에는 하녀와 떠돌이 직공, 유령 이야기와 추문이 있었고, 엄청나고 마음을 홀리고 무시무시하고 수수께끼 같은 것들이 울긋불긋 넘쳐흘렀다. 도살장과 감옥, 술주정뱅이와 악다구니하는 여편네들, 새끼를 낳는 소, 쓰러진 말, 도둑이 들었다는 이야기와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이야기와 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이 모든 아름답고도 소름 끼치는, 사납고 잔혹한 것들이 사방에, 바로 옆 골목에, 바로 옆집에 있었다. 순경과 부랑자가 돌아다녔고, 술주정뱅이들은 제 아내를 때렸고, 저녁이면 공장에서 젊은 처녀들이 실뭉치처럼 엉켜 쏟아져 나왔고, 늙은 여자들은 사람에게 마법을 걸어 병들게 할 수 있었고, 숲에는 도둑들이 살았고, 불을 지른 자들은 헌병에게 붙잡혔다. 어디서나 이 두 번째의 격렬한 세계가 솟아나고 냄새를 풍겼다. 어디서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우리 방들만 빼고. 그리고 그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다. 여기 우리 집에 평화와 질서와 고요가, 의무와 떳떳한 양심이, 용서와 사랑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 시끄럽고 요란하고 음울하고 난폭한 모든 것도 있다는 것, 그래도 어머니에게로 한달음에 뛰어가기만 하면 거기서 달아날 수 있다는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두 세계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였다! 이를테면 우리 집 하녀 리나는, 저녁 예배 때 거실 문가에 앉아 씻은 두 손을 반듯하게 펴 놓은 앞치마 위에 얹고 맑은 목소리로 찬송을 따라 부를 때면 온전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우리에게, 밝고 올바른 쪽에 속했다. 그러다 곧이어 부엌이나 장작 헛간에서 내게 머리 없는 난쟁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나, 푸줏간의 작은 가게에서 이웃 여편네들과 말다툼을 벌일 때면, 리나는 딴사람이 되었고, 다른 세계에 속했고, 비밀에 둘러싸였다. 모든 것이 그랬고,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랬다. 물론 나는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고 내 부모의 아이였다. 그러나 눈을 돌리고 귀를 기울이는 곳마다 다른 것이 있었고, 그것이 자주 낯설고 으스스했어도, 거기 가면 으레 양심이 찔리고 겁이 났어도, 나는 그 다른 것 속에서도 살았다. 때로는 오히려 금지된 세계에서 사는 것이 가장 좋았고, 밝은 쪽으로 돌아오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꼭 필요하고 좋은 일이었다 해도 덜 아름다운 곳으로, 더 따분하고 더 쓸쓸한 곳으로 돌아가는 일과 거의 다르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따금 나는 알았다. 내 삶의 목표는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그렇게 밝고 깨끗하고 그렇게 의젓하고 반듯한 사람이 되는 데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길이 멀었다. 거기까지 가려면 학교를 오래 다니고 공부하고 갖가지 시험을 치러야 했으며, 그 길은 줄곧 다른 세계, 더 어두운 세계 곁을 지나고 그 한복판을 꿰뚫고 나 있었으니, 그 세계에 눌러앉아 그 속에 가라앉아 버리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일을 겪은 탕자들의 이야기가 있었고, 나는 그런 이야기를 열을 올려 읽었다. 거기서는 언제나 아버지에게로, 선한 것에게로 돌아오는 일이 그토록 구원 같고 장엄했으며, 나도 그것만이 올바르고 선하고 바랄 만한 것이라고 진심으로 느꼈다. 그런데도 이야기 가운데 악한 자들과 길 잃은 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목이 훨씬 더 마음을 끌었고, 말해도 되고 털어놓아도 된다면, 탕자가 뉘우치고 다시 집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 차라리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말은 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어딘가에, 예감이나 가능성으로, 느낌의 맨 밑바닥에 있었을 뿐이다. 악마를 떠올릴 때면, 악마가 저 아래 길거리에 변장을 하고 있든 맨얼굴로 있든, 혹은 장터나 술집에 있는 모습은 아주 쉽게 그려 볼 수 있었지만, 우리 집에 있는 모습은 결코 그려지지 않았다.
누이들도 밝은 세계에 속했다. 누이들은 본성이 나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더 가깝다고 나는 자주 느꼈다. 나보다 착하고 얌전하고 흠이 적었다. 누이들에게도 모자란 데가 있고 못된 버릇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리 깊지 않았고, 악과 닿는 일이 그토록 무겁고 괴로워지는 나와는 달랐다. 내게는 어두운 세계가 훨씬 가까이 서 있었다. 누이들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끼고 받들어야 할 사람들이었고, 누이들과 다투고 나면 나중에 제 양심 앞에서는 언제나 내가 나쁜 쪽이었고, 먼저 일을 벌인 쪽이었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쪽이었다. 누이들을 모욕하면 곧 부모를, 선하고 다스리는 것을 모욕하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누이들보다는 차라리 가장 막돼먹은 골목 녀석들과 훨씬 쉽게 나눌 수 있는 비밀도 있었다. 날이 밝고 양심이 말짱한 좋은 날이면, 누이들과 놀면서 착하고 다정하게 굴고, 스스로가 착하고 고귀한 빛에 싸여 있는 모습을 보는 일이 더없이 즐거울 때가 많았다. 천사라면 이렇겠지! 그것이 우리가 아는 가장 높은 것이었고, 우리는 성탄절과 행복처럼 밝은 소리와 향기에 둘러싸인 천사가 되는 것을 달콤하고 멋진 일로 여겼다. 아, 그런 시간과 날들은 얼마나 드물게만 찾아왔던가! 착하고 해롭지 않은, 허락된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누이들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열을 내고 사납게 굴어 다툼과 불행을 불러오기 일쑤였고, 그러다 분노가 덮치면 끔찍해져서, 하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얼마나 못된 짓인지 깊고 뜨겁게 느껴지는 짓을 하고 말을 했다. 그러고 나면 뉘우치며 가슴을 쥐어뜯는 고약하고 캄캄한 시간이 왔고, 용서를 비는 쓰라린 순간이 왔고, 다시 한 줄기 밝은 빛이, 몇 시간이나 몇 순간 동안 아무 갈등 없는 고요하고 고마운 행복이 찾아왔다.
나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 시장 아들과 산림 감독관 아들이 같은 반이어서 이따금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둘 다 사나운 녀석들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세계, 허락된 세계에 속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가 평소에 깔보던 초등학교 다니는 이웃 사내아이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 가운데 한 아이 이야기로 나는 내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학교가 쉬는 어느 날 오후, 나는 고작 열 살을 조금 넘겼을 때였는데, 이웃 사내아이 둘과 어울려 쏘다니고 있었다. 그때 더 큰 아이 하나가 끼어들었다. 열셋쯤 된 억세고 거친 녀석으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재단사의 아들이었다. 그 애 아버지는 술꾼이었고 온 식구가 평판이 나빴다. 프란츠 크로머를 나는 잘 알았고, 무서워했으며, 그 애가 이제 우리 무리에 끼어든 것이 달갑지 않았다. 크로머는 벌써 어른 남자 같은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고, 공장에 다니는 젊은 녀석들의 걸음걸이와 말버릇을 흉내 냈다. 크로머를 앞세우고 우리는 다리 옆으로 해서 강가로 내려가, 다리의 첫 번째 아치 밑에 세상을 피해 숨어들었다. 둥글게 휜 다리 벽과 느릿느릿 흐르는 물 사이의 좁은 강가는 온통 쓰레기투성이여서, 깨진 그릇 조각과 잡동사니와 녹슨 철사 뭉치가 엉켜 있었고 그 밖의 오물도 널려 있었다. 거기서는 이따금 쓸 만한 물건이 나왔다. 우리는 프란츠 크로머의 지휘 아래 그 일대를 뒤져 찾은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면 크로머는 그것을 제 주머니에 넣거나 물로 내던졌다. 납이나 놋쇠나 주석으로 된 물건이 섞여 있나 잘 보라고 시켰고, 그런 것은 죄다 챙겼다. 뿔로 만든 낡은 빗 하나도 챙겼다. 크로머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몹시 가슴이 답답했다. 아버지가 알면 이런 아이와 어울리지 못하게 하리라는 것을 알아서가 아니라, 프란츠 그 애가 무서워서였다. 크로머가 나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끼워 주고 대해 주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크로머가 명령하면 우리는 따랐다. 나는 그 애와 처음 어울린 날이었는데도, 꼭 오래된 관습 같았다.
마침내 우리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프란츠는 물에 침을 뱉었는데 그 모습이 꼭 어른 남자 같았다. 이 빠진 틈으로 침을 뱉어 원하는 곳을 정확히 맞혔다. 이야기가 시작되었고, 아이들은 학교에서 세운 갖가지 무용담과 못된 장난을 늘어놓으며 뽐내고 으스댔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바로 그 침묵 때문에 눈에 띄어 크로머의 화가 내게로 쏠리지 않을까 겁이 났다. 내 두 동무는 처음부터 내게서 떨어져 크로머 편에 붙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이방인이었고, 내 옷차림과 몸가짐이 그들 눈에 거슬린다는 것을 느꼈다. 라틴어 학교 학생에다 귀한 집 도련님인 나를 프란츠가 좋아할 리 없었고, 나머지 둘도 일이 벌어지기만 하면 나를 모른 체하고 내버려 두고 가리라는 것을 나는 똑똑히 느꼈다.
결국 나는 순전히 겁이 나서 나도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청난 도둑 이야기를 하나 지어내고 나 자신을 그 주인공으로 삼았다. 에크뮐레 방앗간 옆 과수원에서 한 동무와 함께 밤중에 사과를 한 자루 가득 훔쳤는데, 그것도 흔한 사과가 아니라 레네트니 골드파르메네니 하는 제일 좋은 품종만 골라 훔쳤다고 나는 이야기했다. 당장의 위험을 피해 나는 이 이야기 속으로 달아났다. 이야기를 지어내고 들려주는 일은 내게 익숙했다. 이야기가 금방 끝나 버려 혹시 더 고약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나는 내 솜씨를 한껏 뽐냈다. 우리 가운데 하나는 늘 망을 봐야 했고 그동안 다른 하나는 나무에 올라가 사과를 떨어뜨렸는데, 자루가 너무 무거워서 끝내는 자루를 다시 열고 절반은 두고 와야 했지만, 반 시간 뒤에 다시 가서 그것마저 가져왔다고 나는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얼마쯤 박수를 기대했다. 끝에 가서는 나도 열이 올라 지어내는 재미에 취해 있었다. 어린 두 녀석은 잠자코 눈치만 보았지만, 프란츠 크로머는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나를 꿰뚫을 듯이 쳐다보더니 위협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 정말이야?"
"그럼." 내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진짜로, 틀림없이?"
"응, 진짜로, 틀림없이." 속으로는 겁이 나 숨이 막힐 지경이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 우겼다.
"맹세할 수 있어?"
나는 덜컥 놀랐지만 곧바로 그렇다고 했다.
"그럼 말해 봐. 하느님과 영생을 걸고!"
나는 말했다. "하느님과 영생을 걸고."
"흥, 그래." 크로머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고, 크로머가 곧 일어나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자 기뻤다. 다리 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 쭈뼛쭈뼛 말했다.
"그렇게 서두를 거 없어." 프란츠가 웃었다. "우린 가는 길이 같잖아."
크로머는 느릿느릿 걸어갔고 나는 감히 달아나지 못했는데, 크로머는 정말로 우리 집 쪽으로 걸어갔다. 집 앞에 다다라 우리 집 현관문과 두툼한 놋쇠 손잡이가, 창에 비친 햇빛과 어머니 방의 커튼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아, 집에 돌아왔다! 아, 밝은 곳으로, 평화 속으로 돌아오는 좋고 복된 귀가!
재빨리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가 등 뒤로 문을 쾅 닫으려는 참에, 프란츠 크로머가 비집고 같이 들어왔다. 안뜰 쪽에서만 빛이 들어오는 서늘하고 어둑한 타일 복도에서 크로머는 내 곁에 바싹 서서 내 팔을 붙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니까, 야!"
나는 질겁해서 크로머를 쳐다보았다. 내 팔을 움켜쥔 손아귀가 쇠처럼 단단했다. 크로머가 무슨 꿍꿍이인지, 혹시 나를 두들겨 패려는 건 아닌지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했다. 지금 소리를 지르면, 크게 마구 소리를 지르면, 위층에서 누군가 제때 내려와 나를 구해 줄까? 하지만 나는 그만두었다.
"왜 그래?" 내가 물었다. "뭘 어쩌려고?"
"별거 아냐. 너한테 하나만 더 물어보려고. 딴 놈들은 들을 필요 없어."
"그래? 응, 뭘 더 말해 달라는 건데? 나 위에 올라가 봐야 한단 말이야."
"너 알지?" 프란츠가 나직하게 말했다. "에크뮐레 방앗간 옆 과수원이 누구 건지."
"아니, 몰라. 방앗간 주인 거 아닐까."
프란츠는 팔로 나를 휘감더니 바짝 끌어당겨서, 나는 바로 코앞에서 그 얼굴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크로머의 눈은 사악했고, 웃음은 고약했으며, 얼굴에는 잔인함과 힘이 가득했다.
"그래, 애송이, 과수원이 누구 건지 내가 말해 줄 수 있지. 사과를 도둑맞았다는 건 나도 진작부터 알았어. 그리고 그 아저씨가, 누가 과일을 훔쳤는지 일러 주는 사람한테는 누구든 2마르크를 주겠다고 한 것도 알지."
"아, 하느님!" 나는 소리쳤다. "그래도 너, 그 사람한테 아무 말 안 할 거지?"
크로머의 명예심에 호소해 봤자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꼈다. 크로머는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였고, 그 애에게 고자질은 죄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똑똑히 느꼈다. 이런 일에서 '다른' 세계 사람들은 우리와 달랐다.
"아무 말 안 한다고?" 크로머가 웃었다. "친구야, 내가 무슨 가짜 돈 만드는 놈이라서 2마르크짜리 동전을 내 손으로 찍어 낼 수 있는 줄 아냐? 난 가난뱅이야. 너처럼 부자 아버지도 없어. 2마르크를 벌 수 있으면 벌어야지. 어쩌면 더 줄지도 모르고."
크로머가 갑자기 내 팔을 놓았다. 우리 집 복도에서는 더 이상 평화와 안전의 냄새가 나지 않았고, 세계가 내 둘레에서 무너져 내렸다. 크로머는 나를 고발할 것이고, 나는 범죄자였고, 누군가 아버지에게 그 일을 알릴 것이고, 어쩌면 경찰까지 올지도 몰랐다. 혼돈의 온갖 공포가 나를 덮치려 했고, 추하고 위험한 모든 것이 나를 치려고 늘어섰다. 내가 실제로는 훔치지 않았다는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맹세까지 했다. 아, 하느님, 하느님!
눈물이 솟았다. 돈을 치르고라도 풀려나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미친 듯이 주머니란 주머니를 다 뒤졌다. 사과도, 주머니칼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시계가 떠올랐다. 낡은 은시계였는데 가지 않아서 그냥 '멋으로' 차고 다니던 것이었다.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시계였다. 나는 얼른 그것을 꺼냈다.
"크로머." 내가 말했다. "있잖아, 날 일러바치면 안 돼. 그러면 너 나쁜 거야. 내 시계 줄게, 자, 봐.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가져도 돼. 은으로 만든 거고 속도 좋아. 조금 고장 난 데가 있을 뿐이야. 고치기만 하면 돼."
크로머는 빙긋 웃으며 시계를 커다란 손에 받아 들었다. 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그 손이 얼마나 거칠고 내게 뼛속 깊이 적대적인지, 그 손이 내 삶과 평화를 어떻게 움켜쥐려 하는지 느꼈다.
"그거 은이야…"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네 은 따위, 그 낡아 빠진 시계 따위 알 게 뭐야!" 크로머가 한껏 깔보며 내뱉었다. "너나 가서 고쳐!"
"하지만 프란츠." 크로머가 가 버릴까 봐 겁에 질려 떨면서 나는 소리쳤다. "조금만 기다려! 시계 가져가! 정말 은이란 말이야, 진짜로, 정말로. 그리고 나 이거 말고는 아무것도 없잖아."
크로머는 차갑고 깔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한테 갈지 알겠지. 아니면 경찰한테 말해도 되고. 경사 아저씨랑 나는 잘 아는 사이거든."
크로머가 가려고 돌아섰다. 나는 소매를 붙잡았다. 그래서는 안 됐다. 크로머가 이대로 가 버리면 닥쳐올 그 모든 일을 견디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훨씬 나았다.
"프란츠." 나는 흥분으로 목이 쉰 채 애원했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그렇지, 그냥 장난이지?"
"그래, 장난이지. 하지만 너한테는 비싼 장난이 될 수도 있어."
"프란츠,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 줘! 뭐든지 할게!"
크로머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또 웃었다.
"바보처럼 굴지 마!" 크로머가 짐짓 사람 좋은 척하며 말했다. "너도 나만큼 잘 알잖아. 나는 2마르크를 벌 수 있어. 그리고 나는 그런 돈을 내다 버릴 만큼 부자가 아니야. 그건 너도 알지. 그런데 넌 부자잖아. 시계까지 있고. 나한테 2마르크만 주면 돼. 그러면 다 괜찮아."
나는 그 셈법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2마르크라니! 그것은 내게 10마르크나 100마르크나 1,000마르크만큼이나 엄청나고 손에 닿지 않는 돈이었다. 나는 돈이 없었다. 어머니 곁에 작은 저금통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는 삼촌들이 다녀가거나 그런 일이 있을 때 받은 10페니히, 5페니히짜리 동전이 몇 닢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나이에는 아직 용돈도 받지 않았다.
"나 아무것도 없어." 나는 풀이 죽어 말했다. "돈은 하나도 없어. 그 대신 다른 건 뭐든지 줄게. 인디언 책도 있고, 장난감 병정도 있고, 나침반도 있어. 가져다줄게."
크로머는 대담하고 사악한 입을 한 번 실룩거리더니 바닥에 침을 뱉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크로머가 명령하듯 말했다. "그 고물 나부랭이는 너나 가져. 나침반이라니! 이제 나 더 화나게 하지 마, 알아들어? 돈이나 내놔!"
"하지만 없단 말이야. 난 돈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럼 내일 2마르크 가져와. 학교 끝나고 저 아래 장터에서 기다릴게. 그걸로 끝. 돈 안 가져오면, 두고 봐!"
"응, 하지만 어디서 구하라는 거야? 맙소사, 나 정말 없는데…"
"너네 집엔 돈이 넉넉하잖아. 그건 네가 알아서 해. 그럼 내일 학교 끝나고. 그리고 말해 두는데, 안 가져오면…" 크로머는 무시무시한 눈길을 내 눈에 쏘아 박더니 다시 한 번 침을 뱉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내 삶은 부서졌다. 달아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까, 아니면 물에 빠져 죽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렷한 그림이 아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우리 집 계단 맨 아랫단에 걸터앉아 몸을 잔뜩 웅크리고 불행에 나를 내맡겼는데, 장작을 가지러 바구니를 들고 내려온 리나가 거기서 울고 있는 나를 찾아냈다.
나는 리나에게 위에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올라갔다. 유리문 옆 옷걸이에는 아버지의 모자와 어머니의 양산이 걸려 있었고, 그 모든 물건에서 고향과 다정함이 내게로 흘러와서, 내 마음은 탕자가 오래된 고향 집 방들의 모습과 냄새를 반기듯 애원하며 고마워하며 그것들을 반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고, 나는 죄를 짊어진 채 낯선 물결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모험과 죄악에 얽혀 들었으며, 원수에게 위협받고 있었고, 위험과 두려움과 수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자와 양산, 정다운 오래된 사암 바닥, 복도 장 위에 걸린 커다란 그림, 그리고 안쪽 거실에서 들려오는 큰누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어느 때보다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소중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위안도 든든한 재산도 아니었고 온통 나를 꾸짖었다. 이 모든 것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 밝음과 고요에 함께할 수 없었다. 내 발에는 매트에 문질러도 닦이지 않는 진흙이 묻어 있었고, 나는 고향 세계가 알지 못하는 그림자를 몸에 달고 들어왔다.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비밀을 품었고 얼마나 많은 불안을 겪었던가. 하지만 오늘 내가 이 방들에 끌고 들어온 것에 비하면 모두 놀이요 장난이었다. 운명이 나를 뒤쫓아 왔고, 어머니도 막아 줄 수 없는, 어머니가 알아서는 안 되는 손들이 나를 향해 뻗쳐 있었다. 내 죄가 도둑질이든 거짓말이든 (나는 하느님과 영생을 걸고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내 죄는 이것이나 저것이 아니었다. 내 죄는 악마에게 손을 내주었다는 데 있었다. 나는 왜 따라갔던가? 왜 크로머에게, 아버지에게 했던 어느 때보다 더 고분고분 복종했던가? 왜 그런 도둑질 이야기를 거짓으로 지어냈던가? 왜 범죄를 무슨 무용담처럼 자랑했던가?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쥐고 있었고, 이제 원수가 내 뒤를 쫓고 있었다.
한순간 나는 더는 내일이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내 길이 이제 점점 더 내리막으로, 어둠 속으로 이어지리라는 끔찍한 확신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내 잘못에서 새로운 잘못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내가 누이들 앞에 나타나는 일도 부모에게 건네는 인사와 입맞춤도 거짓이라는 것, 내가 부모에게 숨기는 운명과 비밀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느꼈다.
아버지의 모자를 바라보다가 한순간 믿음과 희망이 번쩍 일었다. 아버지에게 다 말하고, 아버지의 판결과 벌을 달게 받고, 아버지를 내 비밀을 함께 아는 사람이자 나를 구해 줄 사람으로 삼자. 그것은 그저 지금껏 여러 번 치러 낸 것과 같은 속죄, 무겁고 쓰라린 한 시간, 뉘우침으로 가득한 무거운 용서 빌기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얼마나 달콤하게 들렸던가! 얼마나 아름답게 마음을 끌었던가! 그러나 그것은 될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이제 내게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나 혼자 스스로 삼켜 내야 할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나는 바로 지금 갈림길에 서 있었고, 어쩌면 이 시간부터 영영 나쁜 것에 속하게 되어 악한 자들과 비밀을 나누고, 그들에게 매이고, 그들에게 복종하고, 끝내 그들과 같은 무리가 되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어른 남자 노릇을, 영웅 노릇을 했고, 이제 거기서 비롯된 일을 짊어져야 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아버지가 내 젖은 신발을 두고 나무란 것이 차라리 반가웠다. 그 덕에 아버지의 눈길이 딴 데로 쏠려 더 고약한 일을 알아채지 못했고, 나는 꾸지람을 들으면서 속으로 그것을 그 다른 일에다 슬쩍 갖다 붙였다.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 이상하게 새로운 느낌 하나가 번득였다. 미늘이 잔뜩 달린 사악하고 날카로운 느낌, 나는 아버지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이었다! 한순간 나는 아버지의 무지를 얼마쯤 경멸했고, 젖은 장화를 두고 꾸짖는 것이 쩨쩨해 보였다. '아버지가 아시기만 한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살인을 자백해야 할 판에 훔친 빵 하나 때문에 심문받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추하고 역겨운 느낌이었지만, 강했고 깊은 매혹이 있었으며, 그 어떤 생각보다도 단단히 나를 내 비밀과 내 죄에 묶어 두었다. 어쩌면 크로머는 지금쯤 벌써 경찰에 가서 나를 일러바쳤고, 사람들이 여기서 나를 어린애처럼 바라보는 동안 내 머리 위로는 폭풍우가 몰려들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체험 전체에서 오래도록 중요하게 남은 것은 이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난 첫 번째 금이었고, 내 어린 시절의 삶이 기대어 서 있던 기둥들, 누구든 자기 자신이 되기 전에 부서뜨려야만 하는 그 기둥들에 들어간 첫 칼자국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이런 체험들이 모여 우리 운명의 안쪽 선, 본질의 선을 이룬다. 그런 칼자국과 금은 다시 아물고, 나아서 잊히지만, 가장 은밀한 방 안에서는 여전히 살아서 피를 흘린다.
나 자신도 곧바로 그 새로운 느낌에 소름이 끼쳤고, 그것을 용서받으려고 당장이라도 아버지의 발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용서를 빌어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현자 못지않게 아이도 깊이 느끼고 안다.
나는 내 일을 곰곰이 생각하고 내일 빠져나갈 길을 궁리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날 저녁 내내 나는 오로지 달라진 거실 공기에 익숙해지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벽시계와 식탁, 성경과 거울, 책꽂이와 벽에 걸린 그림들이 말하자면 내게 작별을 고했고, 나는 얼어붙는 가슴으로 내 세계가, 착하고 행복했던 내 삶이 과거가 되어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내가 새로 돋은,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뿌리로 저 바깥 어둡고 낯선 곳에 박혀 붙들려 있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처음으로 나는 죽음을 맛보았다. 그리고 죽음은 쓰다. 죽음은 태어남이며, 무시무시한 새로움 앞의 두려움이고 불안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기뻤다! 그 전에 마지막 연옥처럼 저녁 예배를 치러야 했는데, 우리는 거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 하나를 불렀다. 아, 나는 따라 부르지 않았고, 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쓸개즙이요 독이었다. 아버지가 축복 기도를 할 때도 나는 따라 기도하지 않았으며, 아버지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소서!" 하고 끝맺자 경련 같은 것이 일어 나를 그 둥근 자리에서 떼어 냈다. 하느님의 은총은 그들 모두와 함께했지만, 더는 나와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차갑게 식고 몹시 지쳐서 자리를 떴다.
침대에 누워 한참이 지나고 따스함과 아늑함이 다정하게 나를 감싸자, 내 마음은 두려움 속에서 다시 한 번 뒤로 헤매어 가 지나간 일 둘레를 불안하게 퍼덕였다.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내게 잘 자라고 인사했고, 어머니의 발소리는 아직 방 안에 울리고 있었으며, 어머니가 든 촛불 빛은 아직 문틈에서 빛나고 있었다. 이제,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어머니가 한 번 더 돌아올 거야. 어머니는 알아챘어. 내게 입을 맞추고 물어볼 거야. 다정하게, 무언가 약속하듯이 물어볼 거야. 그러면 나는 울 수 있고, 목에 걸린 돌이 녹아 버리고, 나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다 말할 거야. 그러면 다 괜찮아지고, 구원이 올 거야! 그리고 문틈이 벌써 어두워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귀를 기울이며, 그 일이 꼭, 꼭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는 현실로 돌아와 내 원수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애가 똑똑히 보였다. 한쪽 눈을 가늘게 찡그리고, 입은 거칠게 웃고 있었다. 그 애를 바라보며 피할 수 없는 일을 꾸역꾸역 속으로 삼키는 사이, 크로머는 점점 더 커지고 추해졌고, 그 사악한 눈은 악마처럼 번득였다. 크로머는 내가 잠들 때까지 바로 곁에 있었다. 그런데 막상 꿈에서는 그 애도 오늘 일도 나오지 않았고, 부모와 누이들과 내가 배를 타고 가는데 휴일의 평화와 광채만이 우리를 감싸는 꿈을 꾸었다.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나는 아직 그 복된 기쁨의 뒷맛을 느꼈고, 누이들의 하얀 여름옷이 햇빛 속에서 반짝이는 것이 아직 눈에 선했는데, 그 모든 낙원에서 굴러떨어져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돌아와서는 사악한 눈을 한 원수와 다시 마주 섰다.
아침에 어머니가 서둘러 들어와 벌써 늦었는데 왜 아직 누워 있느냐고 소리쳤을 때 나는 안색이 나빴고, 어머니가 어디 아프냐고 묻자 나는 토했다.
그것으로 무언가 얻은 듯싶었다. 나는 조금 아파서 카밀레 차를 마시며 한나절 누워 있어도 되는 것을, 어머니가 옆방에서 정리하는 소리와 리나가 바깥 복도에서 푸줏간 사람을 맞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학교 가지 않는 오전은 마법에 걸린 듯한 동화 같은 시간이었다. 그럴 때면 햇살이 방 안으로 장난치듯 들어왔는데, 그것은 학교에서 초록 커튼을 내려 가리던 그 햇살과 같은 햇살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도 아무 맛이 없었고, 어딘가 거짓된 소리가 났다.
아, 내가 죽어 버렸다면! 그러나 나는 여느 때처럼 조금 몸이 좋지 않을 뿐이었고,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것으로 학교는 피할 수 있었지만, 열한 시에 장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크로머만큼은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다정함도 이번에는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귀찮았고 아팠다. 나는 곧 다시 잠든 척하며 궁리했다. 아무리 궁리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열한 시에 장터에 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열 시에 살그머니 일어나 이제 다시 괜찮아졌다고 말했다. 이럴 때 늘 그렇듯이, 다시 침대에 눕든지 아니면 오후에 학교에 가든지 하라는 말이 떨어졌다. 나는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계획을 하나 세워 두었던 것이다.
돈 없이 크로머에게 갈 수는 없었다. 내 것인 작은 저금통을 손에 넣어야 했다. 거기 든 돈으로는 모자란다는 것을,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얼마쯤은 되었고, 얼마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며 적어도 크로머의 비위만큼은 맞춰 놓아야 한다고 어떤 직감이 냄새를 맡듯 내게 일러 주었다.
양말 바람으로 어머니 방에 살금살금 들어가 어머니 책상에서 내 저금통을 꺼낼 때는 기분이 고약했다. 그러나 어제만큼 고약하지는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려 목이 졸리는 것 같았고, 아래층 계단참에서 처음 살펴보다가 저금통이 잠겨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아지지 않았다. 저금통을 비틀어 여는 것은 아주 쉬웠다. 얇은 양철 창살 하나만 찢으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찢는 순간 가슴이 아팠다. 그제야 나는 도둑질을 저지른 셈이었다. 그때까지는 설탕 조각이나 과일 같은 것을 몰래 집어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훔친 것이었다. 비록 내 돈이었는데도. 나는 내가 다시 한 걸음 크로머와 그 애의 세계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그렇게 한 수 한 수 차근차근 내리막을 걷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오기를 부려 거기 맞섰다. 악마가 나를 잡아가든 말든,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는 겁에 질려 돈을 셌다. 저금통 안에서는 그렇게 가득 찬 소리가 났는데, 손에 쏟아 놓고 보니 비참하리만큼 적었다. 65페니히였다. 나는 저금통을 아래층 복도에 숨기고 돈을 꼭 쥔 채, 지금껏 그 문을 나설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집을 나섰다. 위층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아직 시간이 넉넉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구름 아래로, 나를 쳐다보는 집들과 나를 의심하는 사람들 곁을 지나, 달라져 버린 도시의 골목골목을 에돌아 슬금슬금 걸었다. 가는 길에, 학교 동무 하나가 언젠가 가축 시장에서 탈러 은화 한 닢을 주웠던 일이 떠올랐다. 하느님이 기적을 베풀어 나에게도 그런 것을 줍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제 기도할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해도 저금통이 다시 멀쩡해지지는 않을 터였다.
프란츠 크로머는 멀리서 나를 보았지만, 아주 느릿느릿 내게로 다가오면서 나를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 오자 크로머는 따라오라고 명령하듯 눈짓을 하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태연히 걸어갔다. 슈트로 골목을 내려가 작은 다리를 건너, 마지막 집들이 있는 곳까지 가서 짓다 만 새 건물 앞에 멈췄다. 거기서는 일하는 사람이 없었고, 문도 창도 없는 벽만 휑하니 서 있었다. 크로머는 주위를 둘러보고 문간으로 들어갔고, 나도 뒤따랐다. 크로머는 벽 뒤로 들어서더니 나를 손짓해 부르고는 손을 내밀었다.
"가져왔어?" 크로머가 차갑게 물었다.
나는 주먹 쥔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크로머가 펼친 손바닥에 돈을 쏟았다. 마지막 5페니히짜리가 짤랑 소리를 다 내기도 전에 크로머는 벌써 다 세어 놓았다.
"65페니히잖아." 크로머가 그렇게 말하고 나를 쳐다보았다.
"응."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야. 모자란다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이게 다야. 더는 없어."
"너 좀 더 똑똑한 줄 알았는데." 크로머가 거의 부드럽다 싶은 투로 나무랐다. "신사들 사이에선 질서가 있어야지. 난 정당하지 않은 건 하나도 받을 생각 없어. 너도 알잖아. 네 푼돈 도로 가져가, 자! 다른 사람은, 누군지 알지? 나랑 값을 깎자고 들지 않아. 그 사람은 제값을 쳐줘."
"하지만 정말, 정말 더는 없단 말이야! 그건 내 저금통이었어."
"그건 네 사정이고. 하지만 나도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진 않아. 넌 나한테 아직 1마르크 35페니히 빚졌어. 그건 언제 받을 수 있어?"
"아, 틀림없이 줄게, 크로머! 지금은 모르겠지만… 곧 돈이 더 생길지도 몰라. 내일이나 모레쯤. 아버지한테 이 말을 할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건 내 알 바 아냐. 난 너한테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그런 놈이 아니야. 알다시피 난 점심 전에라도 내 돈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난 가난해. 넌 좋은 옷을 입고 있고, 점심도 나보다 좋은 걸 먹잖아. 하지만 아무 말 안 할게. 좋아, 조금 기다려 주지. 모레 오후에 휘파람으로 부를 테니 그때 정리해. 내 휘파람 소리 알지?"
크로머가 휘파람을 불어 보였다. 여러 번 들은 소리였다.
"응." 내가 말했다. "알아."
크로머는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가 버렸다. 우리 사이에 거래가 하나 있었을 뿐,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도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를 갑자기 다시 듣는다면 나는 소스라칠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그 소리를 자주 들었고, 언제나 끊임없이 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 휘파람이 파고들지 않는 곳도, 놀이도, 일도, 생각도 없었다. 그 소리가 나를 매이게 했고, 그 소리가 이제 내 운명이었다. 부드럽고 빛깔 고운 가을 오후면 나는 내가 무척 좋아하던 우리 집의 작은 꽃밭에 나가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러면 기이한 충동이 일어 지나간 시절의 사내아이 놀이를 다시 하곤 했다. 말하자면 나보다 어린 아이, 아직 착하고 자유롭고 죄 없고 안전한 아이 노릇을 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로, 늘 기다리면서도 늘 소스라치게 훼방 놓고 불시에 덮쳐 오는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와서 실을 끊고 상상을 부서뜨렸다. 그러면 나는 가야 했고, 나를 괴롭히는 그 애를 따라 고약하고 추한 곳으로 가서 그간의 일을 고하고 돈 독촉을 받아야 했다. 그 모든 일은 아마 몇 주 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몇 해, 아니 영원처럼 느껴졌다. 돈이 있을 때는 드물었다. 리나가 장바구니를 부엌 식탁에 놓아둘 때 거기서 훔친 5페니히나 10페니히짜리 동전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크로머는 나를 꾸짖고 경멸을 퍼부었다. 자기를 속이고 자기의 정당한 권리를 가로채려는 것도 나였고, 자기 것을 훔치는 것도 나였고, 자기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나라고 했다! 살면서 곤궁이 그토록 가슴 가까이 차오른 적은 많지 않고, 그보다 더 큰 절망과 더 큰 굴종을 느껴 본 적은 드물다.
저금통은 놀이용 칩으로 채워 제자리에 갖다 두었고,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도 언제 내게 들이닥칠지 몰랐다. 크로머의 거친 휘파람 소리보다도, 어머니가 조용히 내게 다가올 때가 더 무서울 때가 많았다. 혹시 저금통 일을 물으러 오는 건 아닐까?
내가 여러 번 돈 없이 내 악마 앞에 나타나자, 크로머는 다른 수를 써서 나를 괴롭히고 부려 먹기 시작했다. 나는 크로머 대신 일을 해야 했다. 크로머는 제 아버지 심부름을 다녀야 했는데, 그것을 내가 대신 다녀와야 했다. 아니면 크로머는 내게 어려운 일을 해내라고 시켰다. 10분 동안 한 발로 깡충깡충 뛰라거나, 지나가는 사람의 웃옷에 종잇조각을 붙이라거나. 여러 밤 꿈속에서도 나는 이 고역을 이어 갔고, 가위에 눌려 땀에 젖은 채 누워 있었다.
한동안 나는 앓았다. 자주 토했고 쉽게 오한이 났으며, 밤이면 땀을 흘리며 열에 들떠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나를 무척 걱정해 주었는데, 나는 그 걱정을 믿음으로 갚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괴로웠다.
한번은 저녁에 내가 벌써 침대에 들었을 때 어머니가 초콜릿 한 조각을 가져왔다. 착하게 군 날 저녁이면 잠들기 전에 그런 위로의 한 입을 자주 받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일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거기 서서 초콜릿 조각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너무 괴로워서 고개만 저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겨우 이렇게 내뱉을 수 있었다. "싫어요! 싫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는 초콜릿을 머리맡 탁자에 올려놓고 나갔다. 이튿날 어머니가 그 일을 캐물으려 하자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의사를 데려왔는데, 의사는 나를 진찰하더니 아침마다 찬물로 몸을 닦으라고 처방했다.
그 무렵 내 상태는 일종의 광기였다. 우리 집의 반듯한 평화 한가운데서 나는 유령처럼 겁에 질려 괴로워하며 살았고, 다른 식구들의 삶에 끼지 못했으며, 단 한 시간이라도 나를 잊는 일이 드물었다. 짜증이 나서 자주 나를 다그치던 아버지에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차갑게 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