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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베아트리체

내 벗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방학이 끝나자 나는 S 시로 떠났다. 부모가 둘 다 함께 와서, 김나지움 선생 한 사람이 꾸리는 소년 하숙집에 갖은 정성을 다해 나를 맡겼다. 이제 자기들이 나를 어떤 일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내버려 두는지 알았다면, 부모는 경악해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을 것이다.

문제는 여전히, 세월이 지나면 내가 착한 아들이자 쓸모 있는 시민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내 본성이 다른 길로 몰려갈지였다. 아버지의 집과 정신의 그늘 아래서 행복해 보려던 내 마지막 시도는 오래 이어졌고, 한때는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끝내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견신례 뒤의 방학 동안 처음으로 느끼게 된 기이한 공허와 외로움은(이 공허, 이 희박한 공기를 나는 나중에 얼마나 더 알게 되었던가!) 그리 빨리 지나가지 않았다. 고향과의 작별은 이상하리만큼 쉬웠다. 더 서글퍼하지 않는 것이 사실 부끄러웠다. 누이들은 까닭 없이 울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나는 언제나 감정이 풍부한 아이였고, 근본은 꽤 착한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바깥 세계에 아무 관심도 없었고, 며칠이고 내 안에 귀를 기울여, 거기 땅 밑에서 웅웅거리는 금지되고 어두운 물줄기들을 듣는 일에만 매달렸다. 나는 아주 빨리, 그것도 지난 반년 사이에야 부쩍 자라서, 키만 껑충하고 마르고 덜 여문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소년다운 사랑스러움은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고, 이런 나를 누가 사랑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나 스스로도 느꼈으며, 나도 나 자신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막스 데미안이 몹시 그리울 때가 많았다. 그러나 그 애를 미워할 때도 적지 않았고, 내 삶이 가난해진 것을 그 애 탓으로 돌렸다. 나는 그 가난을 추한 병처럼 떠안았다.

우리 하숙집에서 나는 처음에 사랑도 존중도 받지 못했다. 다들 처음에는 나를 놀려 대다가 이윽고 내게서 물러났고, 나를 겉으로만 얌전한 음흉한 녀석, 불쾌한 괴짜로 여겼다. 나는 그 역할이 마음에 들어 오히려 부풀렸고, 겉으로는 늘 더없이 사내다운 세상 경멸처럼 보이는 고독 속으로 앙심을 품고 틀어박혔다. 그러면서 남몰래 나를 갉아먹는 서글픔과 절망의 발작에 자주 시달렸다. 학교에서는 집에서 쌓아 둔 지식을 밑천 삼아 버틸 수 있었다. 반이 예전 학교보다 조금 뒤처져 있었고, 나는 또래들을 아이들이라며 조금 깔보는 버릇이 들었다.

그렇게 한 해 남짓이 흘러갔다. 방학에 처음 집에 다니러 가서도 새로운 울림은 없었다. 나는 기꺼이 다시 떠났다.

11월 초였다. 나는 어떤 날씨에도 생각에 잠겨 잠깐씩 산책하는 버릇이 들었는데, 그런 산책길에서 자주 일종의 환희를, 우울과 세상 경멸과 자기 경멸로 가득한 환희를 맛보았다. 그렇게 어느 날 저녁, 나는 축축하게 안개 낀 어스름 속에 도시 근교를 거닐었다. 한 공원의 넓은 가로수 길은 완전히 텅 비어 나를 불러들였고, 길에는 떨어진 잎이 두툼하게 깔려 있어 나는 어두운 쾌감에 젖어 발로 그 잎을 헤집었으며, 축축하고 쓴 냄새가 났고, 멀리 있는 나무들이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크게, 그림자처럼 솟아 나왔다.

가로수 길 끝에서 나는 망설이며 멈춰 서서 시커먼 잎을 응시했고, 풍화와 시듦의 젖은 냄새를 게걸스럽게 들이마셨다.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냄새에 화답하며 그것을 반겼다. 아, 삶은 얼마나 싱거운 맛이었던가!

옆길에서 깃 달린 외투를 펄럭이며 누군가 걸어왔다. 내가 그냥 지나치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어이, 싱클레어!"

그가 다가왔다. 우리 하숙집 최고참인 알폰스 베크였다. 나는 늘 베크를 보는 것이 좋았고, 다만 다른 모든 어린 녀석들에게 하듯 나에게도 늘 빈정거리며 아저씨 노릇을 하는 것 말고는 그에게 아무 불만이 없었다. 베크는 곰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져 있었고, 하숙집 주인을 꽉 쥐고 흔든다는 말이 있었으며, 김나지움 학생들 사이에 도는 숱한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하나?" 큰 학생들이 어쩌다 우리 같은 어린 녀석에게 몸을 낮춰 줄 때 쓰는 말투로 베크가 너그럽게 소리쳤다. "자, 내기할까? 시 쓰고 있었지?"

"그럴 리가." 나는 퉁명스럽게 잘라 말했다.

베크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옆에서 걸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겪는 일이었다.

"내가 그런 걸 모를까 봐 걱정할 건 없어, 싱클레어. 저녁에 안개 속을 이렇게 가을 생각에 잠겨 걷다 보면 뭔가 있지. 그럴 땐 시를 쓰고 싶어지는 법이야, 나도 알아. 죽어 가는 자연이니, 그걸 닮은 잃어버린 청춘이니 하는 것 말이야, 당연히. 하인리히 하이네를 보시라, 이거지."

"난 그렇게 감상적이지 않아." 나는 버텼다.

"흠, 됐어! 하지만 이런 날씨엔 말이지, 포도주 한 잔쯤 하는 조용한 곳을 찾는 게 사람한테 좋을 것 같군. 잠깐 같이 가겠나? 마침 나 혼자거든. 아니면 싫은가? 네가 모범생이라면야, 이 친구야, 내가 너를 꾀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

곧 우리는 변두리의 작은 술집에 앉아 미심쩍은 포도주를 마시며 두툼한 잔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튼 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곧 포도주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무척 말이 많아졌다. 내 안에 창문 하나가 활짝 열려 세상이 비쳐 드는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끔찍하게 오랫동안 나는 마음속 이야기를 하나도 털어놓지 못했던가! 나는 공상에 빠져들었고, 그 한가운데서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바탕 늘어놓았다!

베크는 즐겁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내가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베크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나를 대단한 녀석, 천재적인 악동이라고 불렀고, 쌓이고 쌓인 말하고 털어놓고 싶은 욕구를 한껏 쏟아 내고, 인정받고, 나이 많은 사람에게 무언가로 여겨지는 기쁨에 내 가슴은 한껏 부풀어 올랐다. 베크가 나를 천재적인 악동이라고 불렀을 때, 그 말은 달콤하고 독한 포도주처럼 내 영혼으로 흘러들었다. 세상은 새로운 빛깔로 불탔고, 생각들이 수백 갈래의 대담한 샘에서 흘러들었으며, 정신과 불이 내 안에서 활활 타올랐다. 우리는 선생들과 동무들 이야기를 했고, 나는 우리가 서로를 멋지게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리스 사람들과 이교 이야기를 했고, 베크는 기어이 나에게서 연애 모험을 털어놓게 하려 했다. 거기서 나는 끼어들 수가 없었다. 겪은 것이 없었고, 이야기할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느끼고, 지어내고, 공상한 것은 뜨겁게 들어앉아 있었지만, 포도주로도 풀려 나와 남에게 전할 수 있게 되지는 않았다. 여자애들에 대해서는 베크가 훨씬 많이 알았고, 나는 그 동화 같은 이야기에 달아올라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나는 믿을 수 없는 것들을 알게 되었다. 한 번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밋밋한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알폰스 베크는 아마 열여덟 살쯤이었는데 벌써 경험을 쌓았다. 그 가운데 하나로, 여자애들이란 다 그렇고 그래서 그저 아양 떨고 정중한 대접만 받고 싶어 하는데, 그것도 꽤 괜찮기는 하지만 진짜는 아니라고 했다. 성숙한 여자들에게서 성공을 기대하는 편이 낫고, 여자들이 훨씬 영리하다고 했다. 이를테면 공책과 연필을 파는 가게를 하는 야겔트 부인, 그 부인과는 이야기가 통한다고, 그 가게 계산대 뒤에서 이미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는 어떤 책에도 다 담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깊이 홀리고 멍해져 앉아 있었다. 물론 나라면 야겔트 부인을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적어도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꿈도 꾸지 못한 샘들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거기에는 거짓된 울림이 섞여 있었고,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맛보다 하찮고 평범한 맛이 났다. 그래도 어쨌든 그것은 현실이었고, 삶이자 모험이었으며, 그것을 겪고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바로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우리의 대화는 조금 아래로 내려와 무언가를 잃었다. 나도 이제는 천재적인 꼬마가 아니라, 그저 어른 남자의 말을 듣는 소년일 뿐이었다. 그래도 몇 달 몇 달 동안 내 삶이었던 것에 비하면 이것은 감미로웠고, 낙원 같았다. 게다가 차츰 느끼기 시작했지만, 술집에 앉아 있는 것부터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까지, 이것은 금지된 일, 아주 금지된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거기서 정신을 맛보았고, 혁명을 맛보았다.

그날 밤이 아주 또렷하게 기억난다. 늦은 시각, 흐릿하게 타는 가스등 곁을 지나 서늘하고 축축한 밤길을 둘이 함께 걸어 돌아올 때, 나는 처음으로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은 아름답지 않았고, 몹시 괴로웠다. 그런데도 거기에도 무언가가 있었다. 매력이, 달콤함이 있었고, 반란이자 광란이었으며, 삶이자 정신이었다. 베크는 나를 풋내기라고 매섭게 나무라면서도 꿋꿋이 나를 돌보았고, 반쯤 업다시피 해서 하숙집으로 데려가서는, 열려 있는 복도 창문으로 나와 자기를 몰래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죽은 듯한 잠 끝에 아파하며 깨어나 술이 깨자, 터무니없는 비탄이 나를 덮쳤다. 나는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낮에 입던 셔츠를 아직 입고 있었고, 옷과 신발은 바닥에 흩어져 담배와 토사물 냄새를 풍겼다. 두통과 메스꺼움과 미칠 듯한 갈증 사이로, 오랫동안 마주 보지 않았던 그림 하나가 영혼 앞에 떠올랐다. 고향과 부모의 집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이들과 정원이 보였고, 고향의 고요한 내 침실이 보였고, 학교와 장터 광장이 보였고, 데미안과 견신례 수업이 보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밝았고, 모든 것이 광채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모든 것이 놀랍고 신성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이제 나는 알았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것이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바로 이 시간에야 가라앉고 저주받아 더는 내 것이 아니었고, 나를 내쫓았고, 역겨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득히 먼 가장 황금빛 어린 시절의 정원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스럽고 다정한 모든 것, 어머니의 입맞춤 하나하나, 성탄절 하나하나, 집에서 맞던 경건하고 밝은 일요일 아침 하나하나, 정원의 꽃 한 송이 한 송이, 그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내가 발로 짓밟았다! 지금 누가 나를 잡으러 와서 나를 묶고 인간쓰레기이자 성전을 더럽힌 자로 교수대에 끌고 간다 해도, 나는 그것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기꺼이 갔을 것이며, 그것을 옳고 좋은 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속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세상을 경멸하며 돌아다니던 내가! 정신으로 자부하며 데미안의 생각을 함께 생각하던 내가! 이게 나였다. 인간쓰레기에 돼지 새끼, 술에 취해 더럽혀지고, 역겹고 비열하고, 소름 끼치는 충동에 덜미를 잡힌 거친 짐승이! 이게 나였다. 모든 것이 깨끗함과 광채와 사랑스러운 여림이었던 그 정원들에서 온 내가, 바흐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술에 취해 걷잡을 수 없이, 툭툭 바보같이 터져 나오던 내 웃음소리가 아직도 역겨움과 분노 속에 귀에 들렸다. 그게 나였다!

그런데도 이 괴로움을 겪는 것은 거의 쾌락이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는 눈멀고 무디게 기어 다녔고, 그토록 오랫동안 내 가슴은 말없이 가난해진 채 구석에 앉아 있었기에, 이런 자기 고발도, 이 전율도, 영혼의 이 모든 소름 끼치는 느낌도 반가웠다. 그래도 그것은 느낌이었고, 그래도 불꽃이 솟았고, 그래도 거기서 심장이 꿈틀댔다! 혼란스럽게도 나는 비참함 한가운데서 해방 같은 것, 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겉으로 보면 나는 제법 내리막을 달리고 있었다. 첫 도취는 곧 첫 도취가 아니게 되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술판과 말썽이 잦았는데, 나는 거기 끼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어린 축이었고, 곧 마지못해 끼워 주는 꼬마가 아니라 우두머리이자 별이, 이름난 대담한 술집 단골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완전히 어두운 세계에, 악마에게 속했고, 그 세계에서 멋진 녀석으로 통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비참한 기분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부서뜨리는 광란 속에 살았고, 동무들 사이에서 우두머리이자 대단한 녀석, 지독하게 배짱 좋고 재치 있는 놈으로 통하는 동안, 내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에 찬 영혼이 불안에 떨며 퍼덕이고 있었다. 언젠가 일요일 오전 술집을 나서다가 길에서 갓 빗은 머리에 나들이옷을 입고 밝고 즐겁게 노는 아이들을 보고 눈물이 났던 일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그리고 싸구려 술집의 더러운 탁자에서 엎질러진 맥주 웅덩이 사이로, 듣도 보도 못한 냉소로 친구들을 즐겁게 하고 때로는 기겁하게 만드는 동안, 숨은 가슴속에서 나는 내가 비웃는 모든 것을 경외했고, 속으로 울면서 내 영혼 앞에, 내 과거 앞에, 내 어머니 앞에,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내가 동무들과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들 사이에서 외로운 채로 남았던 것, 그래서 그토록 괴로워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나는 가장 거친 녀석들의 마음에 쏙 드는 술집 영웅이자 독설가였다. 선생과 학교와 부모와 교회에 대한 생각과 말에서 나는 정신을 보였고 용기를 보였으며, 음담패설도 견뎌 냈고 어쩌다 직접 하나 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동무들이 여자를 찾아갈 때 나는 한 번도 끼지 않았다. 말로만 보면 닳고 닳은 난봉꾼이어야 했는데도, 나는 혼자였고, 사랑을 향한 뜨거운 그리움, 가망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나보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은 없었고, 나보다 수줍은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이따금 젊은 시민 집안의 처녀들이 예쁘고 깔끔하게, 밝고 우아하게 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면, 그들은 내게 놀랍고 깨끗한 꿈이었고, 나에게는 천 배나 과분하고 깨끗했다. 한동안은 야겔트 부인의 문방구에도 갈 수 없었다. 부인을 보며 알폰스 베크가 들려준 이야기를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새로 어울린 무리 속에서도 늘 외롭고 다르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나는 그 무리에서 더 벗어나지 못했다. 퍼마시고 허풍 치는 것이 정말로 즐거웠던 적이 있는지 나는 정말 이제 모르겠다. 또 나는 술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매번 그 뒤끝을 괴롭게 치렀다. 모든 것이 억지 같았다. 나는 해야만 하는 것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 혼자 있는 것이 무서웠고, 늘 나를 사로잡는 숱한 여리고 수줍고 다정한 마음의 움직임이 두려웠으며, 그토록 자주 찾아오는 여린 사랑의 생각이 두려웠다.

무엇보다 내게 없는 것은 하나, 벗이었다. 무척 좋아하는 학교 동무가 두셋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착한 아이들 축에 속했고, 내 악덕은 오래전부터 누구에게도 비밀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피했다. 다들 나를 발밑 땅이 흔들리는 구제 불능의 노름꾼으로 여겼다. 선생들은 내 사정을 많이 알고 있었고, 나는 여러 번 엄한 벌을 받았으며, 결국 내가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은 다들 기다리는 일이었다. 나 자신도 그것을 알았다. 나는 오래전부터 더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고, 이대로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느낌 속에 이리저리 빠지고 속여 가며 간신히 버텨 나갔다.

신이 우리를 외롭게 하여 우리 자신에게로 이끌 수 있는 길은 많다. 그때 신은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었다. 그것은 고약한 꿈 같았다. 오물과 끈적거림을 지나, 깨진 맥주잔과 냉소적인 수다로 지새운 밤들을 지나, 넋이 나간 몽상가 하나가 쉬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추하고 더러운 길을 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게 나다. 공주에게 가는 길에 똥물 웅덩이에,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한 뒷골목에 빠져 꼼짝 못 하게 되는 그런 꿈이 있다. 내가 그랬다. 이렇게 그리 고상하지 못한 길을 거쳐 나는 외로워지고, 나와 어린 시절 사이에 무자비하게 빛나는 파수꾼들이 지키는 잠긴 에덴의 문을 세우게 될 운명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시작이었고, 나 자신을 향한 그리움의 깨어남이었다.

하숙집 주인의 편지를 받고 놀란 아버지가 처음으로 S 시에 나타나 불시에 내 앞에 섰을 때, 나는 아직 소스라치며 몸을 떨었다. 그해 겨울이 끝나 갈 무렵 아버지가 두 번째로 왔을 때 나는 이미 굳어지고 무심해져서, 아버지가 꾸짖든 사정하든 어머니를 들먹이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는 끝내 몹시 화를 내며, 내가 달라지지 않으면 망신과 치욕 속에 학교에서 쫓겨나게 하고 감화원에 처넣겠다고 했다. 그러라지! 그때 아버지가 떠날 때 나는 아버지가 딱했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고 나에게 이르는 길을 더는 찾지 못했으며, 순간순간 나는 아버지가 그런 꼴을 당해도 싸다고 느꼈다.

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술집에 눌러앉고 허세를 부리는, 내 나름의 기이하고 그리 보기 좋지 않은 꼴로 나는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항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나 자신이 망가졌고, 이따금 일은 대충 이렇게 보였다. 세상이 나 같은 사람을 쓸 수 없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더 나은 자리도 더 높은 과제도 없다면,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은 그냥 망가질 수밖에. 손해는 세상이 보라지.

그해 성탄 방학은 무척 우울했다. 어머니는 나를 다시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더 자라 있었고, 여윈 얼굴은 잿빛으로 망가져 보였으며, 얼굴 근육은 늘어지고 눈가는 벌겋게 짓물러 있었다. 막 돋기 시작한 콧수염과 얼마 전부터 쓴 안경 때문에 어머니 눈에 나는 더욱 낯설었다. 누이들은 뒤로 물러서서 킥킥거렸다. 모든 것이 언짢았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눈 대화도 언짢고 쓰라렸고, 친척 몇 사람과 나눈 인사도 언짢았으며, 무엇보다 성탄 전야가 언짢았다. 내가 태어난 뒤로 성탄 전야는 우리 집의 큰 날, 축제와 사랑과 감사의 저녁, 부모와 나 사이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저녁이었다. 이번에는 모든 것이 그저 답답하고 거북하기만 했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들에서 밤에 자기 양 무리를 지키던 목자들 이야기가 담긴 복음서를 읽었고, 여느 때처럼 누이들은 선물 탁자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서 있었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즐겁지 않게 울렸고, 그 얼굴은 늙고 옹색해 보였으며, 어머니는 슬퍼했고, 나에게는 선물도 축하 인사도, 복음서도 촛불 켠 나무도 모두 똑같이 괴롭고 달갑지 않았다. 생강빵은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더 달콤한 추억을 구름처럼 짙게 뿜어냈다. 전나무는 향기를 풍기며 이제는 없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저녁과 명절이 어서 끝나기만을 바랐다.

겨울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 얼마 전에는 교사 회의에서 엄중한 경고를 받고 퇴학시키겠다는 위협까지 받았다. 오래가지 않을 터였다. 뭐,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막스 데미안에게 유난히 앙심을 품고 있었다. 그동안 그 애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S 시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그 애에게 두 번 편지를 썼지만 답장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방학 때도 그 애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알폰스 베크와 마주쳤던 바로 그 공원에서, 이른 봄 가시덤불이 막 푸르러지기 시작할 무렵, 한 처녀가 내 눈에 띄었다. 나는 역겨운 생각과 근심을 가득 안고 혼자 산책하고 있었다. 건강이 나빠졌고, 게다가 늘 돈에 쪼들려서, 동무들에게 빚을 지고, 집에서 다시 돈을 받아 내려고 꼭 필요한 지출을 지어내야 했으며, 여러 가게에 엽궐련이니 그 비슷한 것들의 외상값이 불어나게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런 근심이 아주 깊이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머지않아 이곳 생활이 끝나 내가 물에 빠져 죽거나 감화원에 끌려가게 된다면, 그런 자잘한 일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그런 보기 싫은 일들과 줄곧 얼굴을 마주하고 살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웠다.

그 봄날 공원에서 나는 한 젊은 숙녀와 마주쳤는데, 그 처녀에게 몹시 끌렸다. 키가 크고 날씬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으며, 영리해 보이는 소년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곧바로 그 처녀가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유형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 처녀는 내 공상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나보다 그리 나이가 많지는 않았겠지만 훨씬 더 다 자라 있었고, 우아하고 윤곽이 또렷했으며, 벌써 거의 숙녀였지만, 얼굴에 장난기와 소년 같은 기색이 살짝 비쳐서 나는 그것이 더없이 좋았다.

나는 사랑에 빠진 처녀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 처녀에게도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인상은 지금까지의 어느 것보다 깊었고, 이 사랑이 내 삶에 미친 힘은 엄청났다.

갑자기 내 앞에 다시 하나의 그림이, 높고 우러르는 그림이 서 있었다. 아, 내 안에서 경외하고 숭배하고 싶은 소망만큼 깊고 격렬한 욕구, 격렬한 충동은 없었다! 나는 그 처녀에게 베아트리체1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테를 읽은 적은 없었지만, 복제화를 간직해 두었던 영국 그림 한 점에서 베아트리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그림 속의 베아트리체는 영국 라파엘전파의 처녀상이었는데, 팔다리가 아주 길고 날씬했으며, 좁고 긴 머리에 정신이 깃든 손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아름다운 젊은 처녀는 그 그림과 꼭 닮지는 않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날씬함과 소년 같은 몸매를 지녔고, 얼굴에도 정신이 깃든, 혼이 서린 기색이 얼마쯤 있었다.

나는 베아트리체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때 베아트리체는 내게 가장 깊은 힘을 미쳤다. 베아트리체는 자기 그림을 내 앞에 세웠고, 내게 성소를 열어 주었으며, 나를 신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나는 술판과 밤의 쏘다님을 끊었다. 나는 다시 혼자 있을 수 있었고, 다시 즐겨 책을 읽었고, 다시 즐겨 산책을 했다.

갑작스러운 개심 때문에 나는 놀림을 꽤 받았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사랑하고 숭배할 것이 있었고, 다시 이상이 생겼으며, 삶은 다시 예감과 알록달록한 신비로운 어스름으로 가득했으니, 그 덕에 놀림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나 자신 안에 집을 찾았다. 비록 우러르는 그림의 노예요 종으로서였지만.

그 시절을 나는 어떤 감동 없이는 떠올릴 수 없다. 다시 나는 무너져 버린 한 시기의 잔해로 '밝은 세계'를 지어 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썼고, 다시 내 안의 어둡고 악한 것을 떨쳐 버리고 온전히 밝은 곳에, 신들 앞에 무릎 꿇고 머물고 싶다는 단 하나의 갈망 속에 살았다. 그래도 이번의 '밝은 세계'는 얼마쯤 내가 지어낸 것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로, 책임 없는 아늑함 속으로 도망쳐 기어드는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지어내고 스스로에게 요구한, 책임과 자기 단련이 따르는 새로운 섬김이었다. 내가 괴로워하며 늘 달아나기만 하던 성의 충동은 이제 이 거룩한 불 속에서 정신과 경건함으로 정화되어야 했다. 이제 캄캄한 것도, 추한 것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신음하며 지새우는 밤도, 음란한 그림 앞에서 두근거리는 가슴도, 금지된 문 앞에서 엿듣는 일도, 음탕함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 모든 것 대신 나는 베아트리체의 그림을 모신 제단을 차렸고, 베아트리체에게 나를 바치면서 정신과 신들에게 나를 바쳤다. 어두운 힘들에게서 빼낸 삶의 몫을 나는 밝은 힘들에게 제물로 바쳤다. 내 목표는 쾌락이 아니라 깨끗함이었고, 행복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정신이었다.

베아트리체를 섬기는 이 제의로 내 삶은 송두리째 달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숙한 냉소가였던 내가 이제 성자가 되기를 목표로 삼은 신전지기가 되었다. 나는 익숙해졌던 고약한 생활을 끊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바꾸려 했고, 모든 것에 깨끗함과 고귀함과 품위를 들이려 했으며, 먹고 마시는 일에서도, 말과 옷차림에서도 그것을 생각했다. 나는 아침을 찬물로 몸을 씻는 일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억지로 그렇게 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진지하고 품위 있게 행동했고, 몸을 꼿꼿이 세웠고, 걸음을 더 느리고 점잖게 했다. 보는 사람에게는 우스워 보였을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는 온통 예배였다.

새 마음가짐을 드러내려고 찾아낸 갖가지 새로운 수련 가운데 하나가 내게 중요해졌다. 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영국의 베아트리체 그림이 그 처녀와 충분히 닮지 않았다는 데서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그 처녀를 나를 위해 그려 보고 싶었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안고 나는 내 방에(얼마 전부터 내 방이 따로 생겼다) 좋은 종이와 물감과 붓을 모았고, 팔레트와 물컵과 사기 접시와 연필을 갖추었다. 작은 튜브에 든 고운 템페라 물감을 사 왔는데 그것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그 가운데 불타는 듯한 산화크롬 초록이 있었는데, 그것이 작고 하얀 접시에서 처음 빛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작했다. 얼굴을 그리는 것은 어려웠으므로 먼저 다른 것으로 연습해 보고 싶었다. 무늬와 꽃과 공상으로 지어낸 작은 풍경을, 예배당 옆의 나무 한 그루를, 사이프러스가 서 있는 로마식 다리를 그렸다. 때로는 이 놀이 같은 일에 완전히 빠져들어, 물감 상자를 받은 아이처럼 행복했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베아트리체를 그리기 시작했다.

몇 장은 완전히 망쳐서 치워 버렸다. 이따금 길에서 마주치는 그 처녀의 얼굴을 떠올리려 하면 할수록 그림은 더 안 되었다. 마침내 나는 그것을 단념하고, 그냥 공상을 따라, 이미 그리기 시작한 것에서, 물감과 붓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이끄는 손길을 따라 얼굴 하나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은 꿈에서 본 듯한 얼굴이었고, 나는 그것이 그리 불만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곧바로 시도를 이어 갔고, 새로 그리는 장마다 조금씩 더 또렷하게 말을 걸어왔으며, 결코 현실에 가까워지지는 않았지만 그 유형에는 가까워졌다.

나는 점점 더, 꿈꾸는 듯한 붓으로 본보기 없는 선을 긋고 면을 채우는 데 익숙해졌다. 놀이하듯 더듬어 가는 손에서, 무의식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선과 면이었다. 마침내 어느 날 나는 거의 정신이 없는 채로 얼굴 하나를 다 그렸는데, 그 얼굴은 앞의 것들보다 더 강하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것은 그 처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럴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다. 그것은 다른 것,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덜 소중하지는 않았다. 처녀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젊은 남자의 머리처럼 보였다. 머리카락은 내 예쁜 처녀처럼 밝은 금발이 아니라 붉은 기가 감도는 갈색이었고, 턱은 강하고 단단했지만 입은 붉게 피어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조금 뻣뻣하고 가면 같았지만 인상이 강했고 숨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다 그린 그림 앞에 앉아 있자니 묘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일종의 신상이나 거룩한 가면 같았다. 반은 남자고 반은 여자이며, 나이가 없고, 꿈꾸는 만큼 의지가 굳세고, 굳어 있는 만큼 남몰래 살아 있었다. 이 얼굴은 내게 할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내게 속해 있었고, 내게 무언가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누구와 닮았는지는 몰랐다.

그 초상은 한동안 내 모든 생각과 함께했고 내 삶을 나누었다. 나는 그것을 서랍 속에 숨겨 두었다. 아무도 그것을 찾아내 나를 비웃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작은 내 방에 혼자 있게 되면 나는 곧바로 그림을 꺼내 그것과 사귀었다. 저녁이면 침대 맞은편 벽지에 핀으로 꽂아 놓고 잠들 때까지 바라보았고, 아침에 맨 처음 눈길이 닿는 곳도 거기였다.

바로 그 무렵 나는 어릴 때 늘 그랬듯이 다시 꿈을 많이 꾸기 시작했다. 몇 해 동안 꿈을 하나도 꾸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꿈이 다시 찾아왔다. 전혀 새로운 그림들이었는데, 그림으로 그린 그 초상이 거기 자꾸자꾸 나타나서 살아 움직이며 말을 했고, 내게 다정하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일그러져 괴물 같은 얼굴이 되었고 때로는 한없이 아름답고 조화롭고 고귀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그런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갑자기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기막히게 낯익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어머니처럼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아득한 옛날부터 내게로 향해 있었던 것 같았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채로 나는 그 그림을, 갈색의 숱 많은 머리카락을, 반쯤 여자 같은 입을, 기이하게 밝은 기운이 도는 강한 이마를(물감이 마르면서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응시했고, 그러는 동안 내 안에서 깨달음이, 다시 찾아냄이, 앎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그 얼굴 앞에 서서 바로 코앞에서 들여다보았다. 크게 뜬, 초록빛이 도는, 꼼짝 않는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는데, 오른쪽 눈이 다른 눈보다 조금 높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 오른쪽 눈이 움찔했다. 가볍고 섬세하게, 그러나 똑똑히 움찔했고, 그 움찔함으로 나는 그 그림을 알아보았다…

어떻게 그것을 이토록 늦게야 알아챌 수 있었을까!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나중에 나는 그 그림을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데미안의 실제 얼굴과 자꾸자꾸 견주어 보았다. 비슷하기는 했지만 전혀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것은 데미안이었다.

어느 초여름 저녁, 서쪽으로 난 내 창으로 햇빛이 비스듬히 붉게 비쳐 들었다. 방 안이 어둑해졌다. 그때 나는 베아트리체의 초상을, 아니 데미안의 초상을 창살에 핀으로 꽂아 놓고 저녁 해가 그것을 꿰뚫고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자는 생각을 했다. 얼굴은 윤곽 없이 흐려졌지만, 붉은 테를 두른 눈과 이마의 밝음과 강렬하게 붉은 입이 화면에서 깊고 거칠게 타올랐다. 그 빛이 이미 꺼진 뒤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 앞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차츰 이것은 베아트리체도 데미안도 아니고, 나 자신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은 나와 닮지 않았다. 닮아서도 안 된다고 나는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내 안의 것, 내 운명, 혹은 내 다이몬2이었다. 내가 언젠가 다시 벗을 찾는다면 내 벗은 이런 모습일 것이었다. 내가 언젠가 연인을 얻는다면 내 연인은 이런 모습일 것이었다. 내 삶이 이러하고 내 죽음이 이러할 것이었다. 이것이 내 운명의 울림이고 리듬이었다.

그 몇 주 동안 나는 책을 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읽은 어떤 책보다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뒤로도 책을 그렇게 체험한 일은 드물었다. 어쩌면 니체 정도일까. 그것은 노발리스3의 책 한 권으로, 편지와 잠언이 실려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많은 것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를 끌어당기고 휘감았다. 그 잠언 가운데 하나가 이제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펜으로 초상 아래에 적었다. "운명과 심성은 한 개념의 두 이름이다." 이제 나는 그 말을 이해했다.

내가 베아트리체라고 부른 그 처녀와는 그 뒤에도 자주 마주쳤다. 이제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부드러운 어울림을, 느낌 같은 예감을 느꼈다. 너는 나와 이어져 있다. 그러나 네가 아니라 네 그림만이. 너는 내 운명의 한 조각이다.


막스 데미안을 향한 그리움이 다시 거세졌다. 몇 해째 나는 그 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방학 때 딱 한 번 그 애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이제 보니 나는 이 짧은 만남을 내 기록에서 빼먹었고, 그것이 부끄러움과 허영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그것을 지금 채워 넣어야 한다.

그러니까 어느 방학 때, 술집을 드나들던 시절의 그 싫증 난 듯하고 늘 조금 지친 얼굴로 지팡이를 휘두르며 고향 도시를 어슬렁거리면서, 예전 그대로인, 내가 경멸하는 속물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예전의 내 벗이 맞은편에서 걸어왔다. 그 애를 보자마자 나는 움찔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프란츠 크로머가 떠올랐다. 데미안이 그 이야기를 정말로 잊어버렸으면! 그 애에게 그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몹시 거북했다. 사실 바보 같은 어린애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빚은 빚이었다…

그 애는 내가 인사를 할지 기다리는 것 같았고, 내가 되도록 태연하게 인사하자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다시 그 애의 악수였다! 그토록 단단하고,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고, 사내다운!

그 애는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많이 컸군, 싱클레어." 그 애 자신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똑같이 늙었고, 똑같이 젊었다.

그 애는 나와 함께 걸었다. 우리는 산책을 하며 하찮은 이야기만 했고, 그때 일은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그 애에게 여러 번 편지를 쓰고도 답장을 받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아, 그 애가 그것도, 그 멍청하고 멍청한 편지들도 잊어버렸으면! 그 애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베아트리체도 초상도 없었고, 나는 아직 거친 시절 한가운데 있었다. 도시 밖에서 나는 그 애에게 함께 술집에 가자고 했다. 그 애는 따라왔다. 나는 허세를 부리며 포도주 한 병을 시켜 따르고는 그 애와 잔을 부딪쳤고, 대학생들의 술 마시는 관습에 아주 익숙한 체하며 첫 잔도 단숨에 비웠다.

"술집에 자주 다니나 봐?" 데미안이 물었다.

"아, 그렇지 뭐." 나는 나른하게 말했다. "달리 뭘 하겠어? 그래도 결국은 이게 제일 재미있거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거기엔 아주 아름다운 데가 있긴 해. 도취, 바쿠스적인 것 말이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술집에 자주 눌러앉는 사람들 대부분한테서는 그게 완전히 사라져 버렸어. 오히려 술집을 드나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속물스러운 일 같거든. 그래, 하룻밤 내내, 횃불을 밝히고, 진짜 아름다운 도취와 비틀거림에 빠지는 거라면 몰라! 하지만 그렇게 늘, 한 잔 또 한 잔, 그건 진짜가 아니지 않아? 이를테면 파우스트가 저녁마다 단골 술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

나는 술을 마시며 적의를 품고 그 애를 쳐다보았다.

"그거야 누구나 파우스트는 아니잖아." 나는 짧게 내뱉었다.

그 애는 조금 멈칫하며 나를 보았다.

그러다 예전의 그 싱그러움과 여유로운 우월함으로 웃었다.

"자, 그런 걸 두고 다퉈서 뭐 하겠어? 어쨌든 술꾼이나 난봉꾼의 삶이 흠잡을 데 없는 시민의 삶보다는 아마 더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어디선가 읽은 건데, 난봉꾼의 삶은 신비가가 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가운데 하나래. 예언자가 되는 건 늘 성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이거든. 그 사람도 그 전에는 쾌락을 즐기는 한량이었지."

나는 의심이 들었고, 그 애에게 가르침을 받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래, 사람마다 취향이 있는 거지 뭐! 솔직히 말해서, 난 예언자니 뭐니 하는 게 되는 데는 전혀 관심 없거든."

데미안은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다 안다는 듯 나를 번득 쏘아보았다.

"싱클레어, 이 친구야." 그 애가 천천히 말했다. "너한테 언짢은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런데 말이야, 네가 지금 무슨 목적으로 그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시는지는 우리 둘 다 모르잖아. 네 안에서 네 삶을 만드는 그것은 벌써 알고 있지. 그걸 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말이야. 아, 미안. 이제 집에 가 봐야 해."

우리는 짧게 작별했다. 나는 몹시 언짢은 기분으로 그대로 앉아 남은 포도주를 다 마셨고, 나가려다가 데미안이 벌써 값을 치른 것을 알고 더욱 화가 났다.

이 작은 일에서 내 생각은 다시 멈춰 섰다. 생각은 데미안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도시 밖의 그 술집에서 그 애가 한 말이 기이하리만큼 싱싱하게,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올랐다. "그걸 안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아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말이야!"

나는 창에 걸려 이제 완전히 빛이 꺼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눈이 아직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데미안의 눈길이었다. 아니면 내 안에 있는 그 누군가의 눈길이었다. 모든 것을 아는 그 누군가의.

데미안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나는 그 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 애에게 닿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애가 아마 어디선가 대학에 다니고 있으리라는 것, 그 애가 김나지움을 마친 뒤 그 애의 어머니가 우리 도시를 떠났다는 것만 알았다.

크로머와의 일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막스 데미안에 대한 모든 기억을 내 안에서 끄집어냈다. 그 애가 언젠가 내게 했던 말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다시 울려 왔던가.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오늘도 여전히 뜻이 있었고, 절실했고, 나와 상관이 있었다! 그리 즐겁지 않았던 마지막 만남에서 그 애가 난봉꾼과 성자에 대해 한 말도 갑자기 내 영혼 앞에 환히 떠올랐다. 내게도 꼭 그렇게 되지 않았던가? 새로운 삶의 충동과 함께 바로 그 반대의 것이, 깨끗함을 향한 갈망이, 거룩한 것을 향한 그리움이 내 안에서 살아날 때까지, 나는 도취와 오물 속에서, 마비와 길 잃음 속에서 살지 않았던가?

그렇게 나는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새 밤이 깊었고 밖에서는 비가 내렸다. 기억 속에서도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그 애가 밤나무 아래서 프란츠 크로머 일로 나를 캐묻고 내 첫 비밀을 알아맞혔던 그 시간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나눈 이야기들이, 견신례 수업들이 하나씩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스 데미안과의 맨 처음 만남이 떠올랐다. 그때 무엇이 문제였던가? 곧바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고 완전히 그 안에 잠겨 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도 다시 떠올랐다. 그 애가 카인에 대한 생각을 들려준 뒤 우리는 우리 집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그 애는 우리 집 대문 위,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넓어지는 쐐기돌에 박힌 오래되고 닳은 문장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이 관심을 끈다고, 그런 것은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데미안과 그 문장 꿈을 꾸었다. 문장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었다. 데미안이 그것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작고 잿빛일 때도 많았고, 엄청나게 크고 빛깔이 여럿일 때도 많았지만, 그 애는 그것이 언제나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내게 설명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 애는 나에게 그 문장을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것을 삼키자, 삼켜 버린 문장의 새가 내 안에서 살아나 나를 가득 채우고 안에서부터 나를 먹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져 나는 엄청나게 놀랐다. 죽을 듯한 두려움에 휩싸여 나는 벌떡 일어나며 잠에서 깼다.

정신이 들고 보니 한밤중이었고, 방 안으로 비가 들이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났다가 바닥에 놓인 무언가 밝은 것을 밟았다. 아침에 보니 그것은 내가 그린 그림이었다. 젖은 바닥에 떨어져 울퉁불퉁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는 그것을 말리려고 압지 사이에 끼워 무거운 책에 넣어 두었다. 이튿날 다시 보니 그림은 말라 있었다. 그러나 달라져 있었다. 붉은 입이 빛이 바래고 조금 가늘어졌다. 이제 그것은 완전히 데미안의 입이었다.

이제 나는 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장의 새였다.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더는 또렷이 알지 못했고, 그 물건이 오래되고 여러 번 페인트가 덧칠된 탓에 몇몇 부분은 가까이서 보아도 잘 알아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새는 무언가 위에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어쩌면 꽃 위에, 어쩌면 바구니나 둥지 위에, 아니면 나무 우듬지 위에. 나는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어렴풋한 욕구에 이끌려 나는 처음부터 강한 색을 썼고, 내 그림 속 새의 머리는 누런 금빛이었다. 기분 내키는 대로 계속 그려 며칠 만에 그 그림을 다 그렸다.

이제 그것은 날카롭고 대담한 새매의 머리를 한 맹금이었다. 새는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몸의 반쯤을 어두운 둥근 세계 속에 박은 채, 거대한 알에서 나오듯 그 세계에서 몸을 빼내며 위로 솟고 있었다. 그 그림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이 내 꿈에 나왔던 그 빛깔 고운 문장인 것만 같았다.

데미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 해도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무렵 모든 일을 할 때 그랬던 꿈결 같은 예감 속에서, 그것이 그 애에게 닿든 닿지 않든 새매를 그린 그 그림을 그 애에게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림에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내 이름도 적지 않았다. 가장자리를 정성껏 잘라 내고, 큰 종이 봉투를 사서 내 벗의 예전 주소를 적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부쳤다.

시험이 다가왔고, 나는 여느 때보다 학교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내가 갑자기 고약한 행실을 고친 뒤로 선생들은 나를 다시 너그럽게 받아 주었다. 지금도 나는 좋은 학생은 아니었겠지만, 반년 전만 해도 내가 벌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것이 누구에게나 뻔해 보였다는 것을 나도 다른 누구도 더는 떠올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제 다시 예전 같은 어조로, 꾸짖음도 위협도 없이 편지를 써 보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든 누구에게든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 변화가 부모와 선생들의 바람과 맞아떨어진 것은 우연이었다. 그렇게 달라졌어도 나는 다른 사람들 곁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누구와도 가까워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외로워질 뿐이었다. 나는 어딘가를 향해, 데미안을 향해, 먼 운명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으니까. 모든 것은 베아트리체에서 시작되었지만, 얼마 전부터 나는 내가 그린 그림들과 데미안 생각에 파묻혀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에 살았고, 그래서 베아트리체마저 눈에서도 생각에서도 완전히 놓쳐 버렸다. 내 꿈과 기대와 내면의 변모에 관해서는 누구에게도 한마디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내가 그러고 싶었더라도.

하지만 어떻게 내가 그것을 바랄 수 있었겠는가?

주

  1. 1. 단테 『신곡』에서 단테를 천국으로 이끄는 인도자. 단테가 평생 우러른 여인이다.

  2. 2. 그리스어 daimon. 소크라테스가 자기 안에서 들린다고 한 내면의 목소리.

  3. 3. 노발리스(1772~1801). 독일 낭만주의 시인. 『밤의 찬가』와 소설 『푸른 꽃』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