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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제7장 에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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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에바 부인

방학 중에 나는 몇 해 전 막스 데미안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한번 찾아갔다. 늙은 부인 하나가 정원을 거닐고 있기에 말을 걸었더니, 그 집이 자기 집이라고 했다. 데미안 가족에 대해 물었다. 부인은 그들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어디 사는지는 알지 못했다. 내가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꼈는지 부인은 나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가죽 앨범 하나를 찾아내더니 그 안에서 데미안 어머니의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나는 그분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작은 초상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 꿈의 영상이었다! 바로 그 여인이었다. 크고 거의 남자 같은 여인의 모습, 아들을 닮았고, 어머니다운 데와 엄격한 데와 깊은 정열이 함께 서린 얼굴, 아름답고 유혹적이면서 아름답고 다가갈 수 없는, 다이몬이자 어머니, 운명이자 연인인 그 모습. 바로 그 여인이었다!

내 꿈의 영상이 이 땅 위에 살아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자, 사나운 기적처럼 무언가가 나를 꿰뚫고 지나갔다! 그렇게 생긴 여인이, 내 운명의 얼굴을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은 어디 있을까? 어디에? 그리고 그 여인은 데미안의 어머니였다!

그 뒤 곧 나는 여행을 떠났다. 기이한 여행이었다!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좇아 쉴 새 없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늘 그 여인을 찾았다. 어떤 날은 그 여인을 떠올리게 하고 그 여인과 어딘가 울림이 닮고 그 여인과 비슷한 모습들만 줄줄이 만났고, 그 모습들은 뒤엉킨 꿈속에서처럼 나를 낯선 도시의 골목으로, 기차역으로, 기차 안으로 꾀어 들였다. 또 어떤 날은 내가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달았다. 그럴 때면 공원이든 호텔 정원이든 대합실이든 어딘가에 하릴없이 앉아 내 안을 들여다보며 그 영상을 내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려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영상은 이제 수줍어하며 쉬이 달아났다. 잠은 도무지 오지 않았고, 낯선 풍경 사이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만 15분씩 깜빡 졸았다. 한번은 취리히에서 어떤 여자가 나를 따라왔다. 예쁘장하고 조금 뻔뻔한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를 거의 쳐다보지도 않고, 공기라도 지나치듯 그냥 걸어갔다. 다른 여자에게 단 한 시간이라도 마음을 내주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는 편이 나았다.

운명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느꼈고, 이루어질 날이 가까웠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내가 그것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나는 조바심으로 미칠 것 같았다. 언젠가 어느 기차역에서, 인스브루크였던 것 같은데, 막 떠나는 기차의 창가에서 그 여인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 하나를 보고는 며칠 동안이나 괴로워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모습이 밤에 꿈속에 다시 나타났고, 나는 이 사냥이 얼마나 뜻 없는 일인지 부끄럽고 허전한 느낌으로 깨어나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몇 주 뒤 나는 H 시의 대학에 입학했다. 모든 것이 실망스러웠다. 내가 듣던 철학사 강의는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벌이는 법석과 마찬가지로 알맹이 없이 공장에서 찍어 낸 듯했다. 모든 것이 그렇게 틀에 박혀 있었고, 누구나 남들이 하는 대로 했으며, 소년 같은 얼굴들에 떠오른 달아오른 쾌활함은 서글플 만큼 텅 비어 기성품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자유로웠다. 하루를 온전히 내 것으로 쓸 수 있었고, 도시 밖의 오래된 담장 안에서 조용하고 아름답게 살았으며, 책상 위에는 니체 몇 권을 놓아두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았고, 그의 영혼의 외로움을 느꼈고, 그를 쉼 없이 몰아대던 운명의 냄새를 맡았고, 그와 함께 괴로워했으며, 그토록 가차 없이 제 길을 간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어느 늦은 저녁, 가을바람이 부는 가운데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술집들에서 학생 조합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열린 창문으로 담배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고, 노랫소리가 두툼한 물결이 되어 쏟아져 나왔는데, 크고 힘찼지만 날개가 없었고 생기 없이 한결같았다.

나는 길모퉁이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두 술집에서 젊은이들의 쾌활함이 꼬박꼬박 정해진 대로 치러지며 밤 속으로 울려 퍼졌다. 어디에나 공동체, 어디에나 한데 모여 웅크리기, 어디에나 운명을 내려놓고 따뜻한 무리의 곁으로 도망치기!

내 뒤로 두 남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한 토막 들려왔다.

"흑인 마을의 젊은이들 숙소와 꼭 같지 않소?" 한 사람이 말했다. "무엇 하나 다를 게 없소. 문신까지 아직 유행이니. 보시오, 저것이 젊은 유럽이오."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 무언가를 일깨우듯, 낯익게 울렸다. 나는 어두운 골목으로 그 두 사람을 뒤따라갔는데, 한 사람은 작고 맵시 있는 일본인이었고,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 그의 누르스름한 얼굴이 웃음을 띠고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때 다른 한 사람이 다시 말했다.

"글쎄, 당신네 일본이라고 더 나을 것도 없을 거요. 무리를 따라 달리지 않는 사람은 어디서나 드무오. 여기에도 몇은 있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기쁨 섞인 놀라움으로 나를 꿰뚫었다. 나는 말하는 사람을 알았다. 데미안이었다.

바람 부는 밤, 나는 어두운 골목들을 지나 그와 일본인을 뒤따르며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며 데미안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한껏 즐겼다. 그 목소리에는 예전의 그 음색이 있었고, 예전의 그 아름다운 확신과 고요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나를 휘어잡던 예전의 그 힘이 그대로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좋았다. 나는 그를 찾아냈다.

변두리 어느 길 끝에서 일본인은 작별을 고하고 어느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데미안은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왔고, 나는 걸음을 멈춘 채 길 한가운데서 그를 기다렸다. 그가 꼿꼿하고 탄력 있게, 갈색 고무 외투를 입고 가느다란 지팡이를 팔에 건 채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채로 바라보았다. 그는 한결같은 걸음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내 바로 앞까지 와서 모자를 벗더니, 굳게 다문 입과 넓은 이마 위의 독특한 밝음을 지닌, 예전 그대로의 밝은 얼굴을 내게 보여 주었다.

"데미안!" 내가 외쳤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드디어 왔군, 싱클레어!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었나?"

"꼭 알았던 건 아니지만, 분명히 그러길 바랐지. 너를 본 건 오늘 저녁이 처음이야. 너, 아까부터 줄곧 우리 뒤를 따라왔잖아."

"그럼 나를 금방 알아봤단 말이군?"

"물론이지. 너도 변하긴 했어. 하지만 너한테는 표가 있거든."

"표? 무슨 표?"

"예전에 우리는 그걸 카인의 표라고 불렀지. 아직 기억한다면 말이야. 그건 우리의 표야. 너는 늘 그걸 지니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네 친구가 된 거고. 하지만 지금은 그게 더 또렷해졌어."

"몰랐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한번은 내가 네 초상을 그린 적이 있어, 데미안. 그런데 그게 나하고도 닮아서 놀랐지. 그게 그 표였나?"

"그거였어. 네가 이제 와 줘서 다행이야! 어머니도 기뻐하실 거야."

나는 덜컥 놀랐다.

"네 어머니? 여기 계신가? 그분은 나를 전혀 모르실 텐데."

"아니, 어머니는 너를 알고 계셔. 네가 누군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보실 거야. 너, 오랫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지."

"아, 편지를 쓰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었지만 되지 않더군. 얼마 전부터 곧 너를 찾게 되리라는 느낌이 들었네. 날마다 그날을 기다렸지."

그가 내 팔에 자기 팔을 끼고 함께 걸었다. 그에게서 고요가 흘러나와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우리는 곧 예전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시절과 견신례 수업을 떠올렸고, 그때 방학 중의 그 불행했던 만남도 떠올렸지만, 우리 사이의 가장 이르고 가장 단단한 끈, 프란츠 크로머와 있었던 일만은 이번에도 입에 오르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는 기이하고 예감에 찬 이야기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데미안이 일본인과 나누던 이야기를 이어받아 대학생들의 생활을 두고 말하다가, 거기서 동떨어져 보이는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데미안의 말 속에서 그것들은 하나로 깊이 이어졌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이 시대에 찍힌 특징에 대해 말했다. 어디서나 뭉치고 무리를 짓는 일이 판을 치지만, 자유와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학생 조합과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런 공동체는 모두 억지로 지어진 것이고, 불안과 두려움과 난처함에서 생겨난 집단이며, 속은 썩고 낡아서 무너지기 직전이라고 했다.

"공동체는," 데미안이 말했다. "아름다운 거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어디서나 피어나는 걸 보는 그건 공동체가 전혀 아니야. 공동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데서 새로 생겨날 거고, 한동안 세계의 모습을 바꿔 놓을 거야. 지금 있는 공동체라는 건 그저 무리 짓기일 뿐이지. 사람들은 서로가 무서워서 서로에게로 도망치는 거야. 신사들은 신사들끼리,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끼리, 학자들은 학자들끼리! 그럼 왜 무서워할까? 사람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할 때만 무서워하거든. 그들이 무서워하는 건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 적이 없어서야. 저마다 제 안의 알 수 없는 것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만 모인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기 삶의 법칙이 이제 맞지 않는다는 걸, 자기가 낡은 석판에 새겨진 대로 살고 있다는 걸, 그들의 종교도 도덕도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 걸맞지 않는다는 걸 느껴. 백 년 넘게 유럽은 그저 연구하고 공장만 지어 왔어! 그들은 사람 하나 죽이는 데 화약이 몇 그램 드는지는 정확히 알면서, 신에게 어떻게 기도하는지는 모르고, 한 시간이나마 즐겁게 지내는 법조차 모르지. 저런 대학생 술집을 한번 봐! 아니면 부자들이 드나드는 유흥가는 또 어떻고! 가망이 없어! 싱클레어, 이 친구야, 그 모든 것에서는 밝은 것이 하나도 나올 수 없어. 그렇게 겁에 질려 뭉치는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하고 악의로 가득해서, 누구도 남을 믿지 않아. 그들은 이제 이상도 아닌 이상에 매달리고, 새 이상을 내세우는 사람은 누구든 돌로 쳐. 나는 충돌이 일어나리라는 걸 느껴. 그건 올 거야, 내 말을 믿어, 곧 올 거야! 물론 그런다고 세상이 '개선'되지는 않을 거야. 노동자들이 공장주를 때려죽이든,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을 쏘든, 주인만 바뀔 뿐이지. 하지만 헛된 일은 아닐 거야. 그 일로 오늘날의 이상들이 아무 값어치도 없다는 게 드러날 거고, 석기 시대의 신들이 깨끗이 치워질 거야. 지금 이대로의 이 세계는 죽고 싶어 해. 무너지고 싶어 하고, 결국 그렇게 될 거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내가 물었다.

"우리? 아, 어쩌면 우리도 함께 무너지겠지. 우리 같은 사람도 얼마든지 때려죽일 수 있으니까. 다만 그런다고 우리가 끝장나는 건 아니야. 우리에게서 남는 것, 아니면 우리 가운데 살아남는 사람들 주위로 미래의 의지가 모여들 거야. 우리 유럽이 한동안 기술과 학문의 장터 소음으로 덮어 버렸던 인류의 의지가 드러날 거야. 그리고 그때 드러나겠지. 인류의 의지는 언제 어디서도 오늘날의 공동체들, 국가와 민족, 협회와 교회의 의지와 같지 않다는 게. 자연이 인간을 두고 바라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너와 내 안에 쓰여 있어. 그건 예수 안에 쓰여 있었고, 니체 안에 쓰여 있었어. 오늘날의 공동체들이 무너지고 나면, 물론 날마다 다르게 보일 수 있는 흐름이긴 하지만, 오로지 중요한 이런 흐름들이 들어설 자리가 생길 거야."

밤늦게 우리는 강가의 어느 정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데미안이 말했다. "곧 와! 우리는 너를 몹시 기다리고 있어."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서늘해진 밤길을 걸어 먼 귀갓길에 올랐다. 여기저기서 집으로 돌아가는 대학생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비틀비틀 시내를 지나갔다.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쾌활함과 내 외로운 삶이 맞서 있다는 것을 나는 자주 느꼈다. 결핍감을 느낄 때도 많았고, 비웃음을 느낄 때도 많았다. 그러나 오늘처럼, 그것이 나와 얼마나 상관이 없는지, 그 세계가 내게 얼마나 멀고 사라져 버린 세계인지를 고요와 은밀한 힘을 품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향 도시의 관리들이 생각났다. 늙고 점잖은 신사들이었는데, 그들은 술로 지새운 학창 시절의 기억에 마치 복된 낙원의 기념품에 매달리듯 매달렸고, 시인이나 다른 낭만주의자들이 어린 시절에 바치는 것과 같은 숭배를 대학 시절의 사라진 "자유"에 바쳤다.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어딘가 자기 뒤쪽에서 찾았다. 자기 자신의 책임을 떠올리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일깨움받게 될까 봐 그저 두려웠던 것이다. 몇 해 동안 퍼마시고 환호하다가, 그러고는 어딘가로 기어 들어가 나라의 녹을 먹는 근엄한 신사가 되었다. 그래, 우리 사이는 썩어 있었다, 썩어 있었다. 그리고 이 대학생들의 어리석음은 다른 백 가지보다 덜 어리석고 덜 나빴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내 하숙방에 돌아와 잠자리를 찾을 무렵에는 그런 생각들이 모두 날아가 버렸고, 내 온 마음은 이날이 내게 준 커다란 약속에 매달려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당장 내일이라도 데미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대학생들은 술판을 벌이고 얼굴에 문신을 하든 말든, 세상은 썩어서 몰락을 기다리든 말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오직 내 운명이 새로운 영상으로 내 앞에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아침 늦게까지 깊이 잤다. 새날은 내게 엄숙한 축일처럼 밝았다. 소년 시절의 성탄절 이후로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축일이었다. 나는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설렜지만 두려움은 조금도 없었다. 내게 중요한 날이 밝았다는 것을 느꼈다. 내 둘레의 세상이 달라져 있는 것이 보였고 또 느껴졌다. 세상은 기다리고 있었고, 뜻으로 가득했고, 엄숙했다. 소리 없이 내리는 가을비마저 아름답고 고요했으며, 진지하고도 기쁜 음악이 가득한 축일 같았다. 처음으로 바깥 세계가 내 안의 세계와 맑게 어우러져 울렸다. 그럴 때 영혼은 축일을 맞고, 그럴 때 삶은 살 만하다. 어느 집도, 어느 진열창도, 골목의 어느 얼굴도 거슬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대로 있었지만, 일상과 익숙함의 텅 빈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기다리는 자연이었고, 경건하게 운명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 나는 큰 축일 아침에, 성탄절과 부활절에 세상을 그렇게 보았다. 이 세상이 아직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는 내 안으로만 파고들어 살면서, 바깥의 것을 느끼는 감각이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눈부신 빛깔을 잃는 일은 어린 시절을 잃는 일과 어쩔 수 없이 맞물려 있고, 영혼의 자유와 어른다움을 얻으려면 이 사랑스러운 반짝임을 포기하는 값을 치러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제 나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묻혀 어두워져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자유로워져 어린 시절의 행복을 단념한 사람으로서도 세상이 빛나는 것을 보고 어린아이의 눈이 느끼던 내밀한 전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황홀하게 깨달았다.

간밤에 막스 데미안과 헤어졌던 그 변두리 정원을 다시 찾아갈 시간이 왔다. 비에 젖어 잿빛이 된 키 큰 나무들 뒤에 숨어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밝고 아늑한 그 집의 커다란 유리 벽 뒤로는 키 큰 꽃나무들이 보였고, 반짝이는 창 너머로는 그림과 줄지어 꽂힌 책이 있는 어두운 방의 벽이 보였다. 현관문을 열자 바로 작고 따뜻한 홀이었고,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검은 옷을 입은 말 없는 늙은 하녀가 나를 안으로 들이고 내 외투를 받아 주었다.

하녀는 나를 홀에 혼자 남겨 두었다. 둘러보는 순간 나는 곧장 내 꿈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어두운 나무 벽 위쪽, 어느 문 위에 검은 액자에 유리를 끼운 낯익은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금빛 누런 새매 머리를 하고 세계의 껍데기에서 몸을 솟구쳐 빠져나오는 내 새였다. 나는 가슴이 벅차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내가 일찍이 해 온 모든 일, 겪어 온 모든 일이 이 순간 대답이 되고 이루어짐이 되어 내게 돌아오는 것만 같아서, 가슴이 그토록 기쁘면서도 아팠다. 번개처럼 빠르게 수많은 영상이 내 영혼 앞을 스쳐 갔다. 아치형 대문 위에 낡은 돌 문장이 붙어 있던 고향의 아버지 집, 그 문장을 그리던 소년 데미안, 원수 크로머의 사악한 주문에 걸려 두려움에 얽매여 있던 소년 시절의 나, 학생 시절 작은 방의 고요한 책상에 앉아 그리움의 새를 그리던, 제 실로 짠 그물에 영혼이 얽혀 있던 젊은 날의 나. 그 모든 것,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의 그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다시 울렸고, 내 안에서 긍정되고 대답되고 옳다고 인정받았다.

젖은 눈으로 나는 내 그림을 바라보며 내 안을 읽었다. 그때 내 눈길이 아래로 내려갔다. 새 그림 아래, 열린 문간에 검은 옷을 입은 키 큰 여인이 서 있었다. 그 여인이었다. 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시간도 나이도 없고 영혼이 깃든 의지로 가득 찬 그 얼굴로, 아름답고 기품 있는 여인은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 눈길은 이루어짐이었고, 그 인사는 집에 돌아옴을 뜻했다. 나는 말없이 두 손을 내밀었다. 여인은 단단하고 따뜻한 손으로 내 두 손을 잡았다.

"싱클레어로군요. 금방 알아보았어요. 어서 와요!"

목소리는 깊고 따뜻했고, 나는 그것을 달콤한 포도주처럼 들이켰다. 그리고 이제 고개를 들어 그 고요한 얼굴을, 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을, 싱그럽고 무르익은 입술을, 표를 지닌 자유롭고 왕 같은 이마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여인에게 말하며 그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평생을 줄곧 길 위에서 보낸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돌아왔습니다."

여인은 어머니처럼 미소 지었다.

"집으로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해요." 여인이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정다운 길들이 한데 모이는 곳에서는, 한동안 온 세상이 고향처럼 보이지요."

여인은 내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느꼈던 것을 말로 해 주었다. 그 목소리도, 그 말도 아들의 것과 무척 닮았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더 무르익었고, 더 따뜻했고, 더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막스가 예전에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듯, 그의 어머니도 다 자란 아들을 둔 어머니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굴과 머리칼 위로 감도는 기운은 그토록 젊고 감미로웠고, 금빛 도는 살결은 그토록 팽팽하고 주름 하나 없었으며, 입술은 그토록 꽃처럼 피어 있었다. 여인은 내 꿈속에서보다 더 왕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었고, 그 곁에 있는 것은 사랑의 행복이었으며, 그 눈길은 이루어짐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내 운명이 내게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영상이었다. 더는 엄하지 않고, 더는 외롭게 만들지 않는, 아니, 무르익고 기쁨에 찬 영상! 나는 아무런 결심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맹세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의 목표에, 길 위의 높은 자리에 이르렀고, 거기서부터 앞으로 이어질 길이 넓고 찬란하게 펼쳐져 보였다. 약속의 땅들을 향해 뻗어 가고, 가까운 행복의 나무 우듬지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온갖 즐거움이 가득한 가까운 정원들이 서늘한 바람을 보내는 길이었다. 내 앞날이 어떻게 되든, 나는 이 여인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목소리를 들이켜고, 그 곁에서 숨결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 여인이 내게 어머니가 되든, 연인이 되든, 여신이 되든, 그저 거기 있어 주기만 한다면! 내 길이 그 여인의 길 가까이에만 있다면!

여인은 위쪽에 걸린 내 새매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만큼 우리 막스를 기쁘게 한 건 없었어요." 여인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나도 그랬고요. 우리는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림이 왔을 때, 싱클레어가 우리에게 오는 길 위에 있다는 걸 알았지요. 싱클레어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하루는 내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어요. '이마에 표가 있는 아이가 있어요. 그 애는 제 친구가 되어야 해요.' 그게 싱클레어였어요. 쉽지 않았지요. 하지만 우리는 믿고 있었어요. 한번은 방학에 집에 와 있을 때 막스를 다시 만났지요. 그때 열여섯 살쯤이었을 거예요. 막스가 그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내가 말을 끊었다. "아, 그 이야기를 하더란 말씀입니까! 그때가 제 생애에서 가장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요. 막스가 내게 말했어요. '이제 싱클레어 앞에는 가장 힘든 일이 놓여 있어요. 그 애는 한 번 더 공동체 속으로 도망치려고 해 보고 있어요. 술집 패거리까지 되었어요. 하지만 잘되지 않을 거예요. 그 애의 표는 가려져 있지만 남몰래 그 애를 태우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나요?"

"아, 그렇습니다, 그랬습니다, 바로 그랬습니다. 그 뒤에 저는 베아트리체를 만났고, 그다음에 마침내 다시 인도자 한 분이 제게 왔습니다. 피스토리우스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저는, 제 소년 시절이 왜 그토록 막스에게 묶여 있었는지, 왜 제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부인, 아니, 어머니, 저는 그 무렵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누구에게나 길은 그토록 어려운 것입니까?"

여인은 공기처럼 가벼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태어나는 일은 언제나 어려워요. 알잖아요, 새는 알에서 나오느라 애를 쓰지요. 돌아보고 물어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어렵기만?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그보다 더 아름다운 길, 더 쉬운 길을 알았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려웠습니다." 나는 잠결처럼 말했다. "꿈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어려웠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꿰뚫어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자기 꿈을 찾아야 해요. 그러면 길이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이어지는 꿈은 없어요. 어느 꿈이든 새 꿈이 그 자리를 이어받으니, 어떤 꿈도 붙잡아 두려고 해서는 안 돼요."

나는 깊이 놀랐다. 이것은 벌써 경고인가? 벌써 나를 밀어내는 것인가?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목적지를 묻지 않고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 꿈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 새 그림 아래에서 제 운명이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어머니처럼, 그리고 연인처럼. 저는 그 운명의 것이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 꿈이 싱클레어의 운명인 동안은, 그 꿈에 충실해야 해요." 여인이 진지하게 확인해 주었다.

슬픔이 나를 사로잡았고, 이 마법에 걸린 시간 속에서 죽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일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올라 나를 덮치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울지 않았던가! 나는 홱 여인에게서 돌아서서 창가로 가, 화분에 심은 꽃들 너머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하게 울렸지만, 가장자리까지 포도주를 가득 채운 잔처럼 다정함이 넘쳤다.

"싱클레어, 아직 어린애로군요! 운명은 싱클레어를 사랑해요. 충실하기만 하면, 언젠가 운명은 꿈꾸던 그대로 온전히 싱클레어의 것이 될 거예요."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여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게는 친구가 몇 있어요." 여인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주 적은, 아주 가까운 친구 몇이요. 그 사람들은 나를 에바 부인1이라고 불러요. 싱클레어도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도 좋아요."

여인은 나를 문으로 데려가 문을 열고 정원 쪽을 가리켰다. "막스는 저 바깥에 있을 거예요."

키 큰 나무들 아래에서 나는 넋이 나가고 뒤흔들린 채 서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깨어 있는지 그 어느 때보다 꿈을 꾸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뭇가지에서 빗방울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나는 강기슭을 따라 길게 뻗은 정원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마침내 찾아낸 데미안은 사방이 트인 정원의 작은 집에서 웃통을 벗은 채, 매달아 놓은, 모래를 채운 작은 주머니를 상대로 권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멈춰 섰다. 데미안은 눈부시게 멋져 보였다. 넓은 가슴, 단단한 남자다운 머리,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 치켜든 두 팔은 강하고 다부졌고, 움직임은 엉덩이와 어깨와 팔의 관절에서 솟아 나왔다. 마치 샘물이 놀이하듯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데미안!" 내가 외쳤다. "거기서 뭘 하고 있나?"

그가 즐겁게 웃었다.

"연습하는 중이야. 그 작은 일본인하고 레슬링 시합을 하기로 약속했거든. 그 녀석은 고양이처럼 날래고, 물론 고양이만큼 음흉하기도 해. 하지만 나를 당해 내지는 못할 거야. 그 녀석한테 갚아 줄 아주 작은 굴욕 하나가 있거든."

그는 셔츠와 웃옷을 걸쳤다.

"어머니한테는 벌써 다녀왔어?" 그가 물었다.

"그래. 데미안, 네 어머니는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 에바 부인! 그 이름이 그분께 꼭 맞는군. 그분은 모든 존재의 어머니 같네."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겨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써 그 이름을 알아? 자랑스러워해도 돼, 이 녀석아! 첫 시간에 벌써 그 이름을 들은 건 네가 처음이야."

그날부터 나는 아들처럼, 형제처럼, 그러나 또한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그 집을 드나들었다. 등 뒤로 쪽문을 닫을 때면, 아니, 멀리서 정원의 키 큰 나무들이 눈에 들어오기만 해도 나는 부유하고 행복했다. 바깥에는 "현실"이 있었다. 바깥에는 거리와 집들, 사람들과 제도들, 도서관과 강의실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안에는 사랑과 영혼이 있었고, 여기에는 동화와 꿈이 살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과 담을 쌓고 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속에서 자주 세상 한복판에서 살았고 다만 다른 밭에서 살았을 뿐이며, 우리를 대부분의 사람들과 갈라놓은 것은 경계가 아니라 다른 눈으로 보는 일, 그것 하나였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 속에 하나의 섬을, 어쩌면 하나의 본보기를, 어쨌든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알리는 예고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외로웠던 나는, 완전한 홀로됨을 맛본 사람들 사이에서 가능한 공동체를 알게 되었다. 다시는 행복한 사람들의 식탁으로, 즐거운 사람들의 잔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보아도 다시는 시샘이나 그리움이 밀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표"를 지닌 사람들의 비밀에 입문하게 되었다.

표를 지닌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기이하게, 아니 미쳤고 위험하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깨어난 사람들, 혹은 깨어나는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점점 더 온전히 깨어 있기를 바라며 애썼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애쓰고 행복을 찾는 방향은, 자기 생각과 이상과 의무를, 자기 삶과 행복을 점점 더 단단히 무리의 것에 묶어 두는 쪽이었다. 거기에도 애씀이 있었고, 거기에도 힘과 위대함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표를 지닌 우리가 새로운 것, 홀로 선 것, 미래의 것을 향한 자연의 의지를 나타내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려는 의지 속에 살았다. 그들에게 인류는, 그들도 우리처럼 인류를 사랑했지만, 이미 완성되어 지키고 보호해야 할 무엇이었다. 우리에게 인류는 먼 미래였다. 우리 모두가 그리로 가는 길 위에 있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알지 못하고 그 법칙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은 미래였다.

에바 부인과 막스와 나 말고도, 가깝게 또는 멀게, 아주 갖가지 부류의 구도자들이 우리 모임에 끼어 있었다. 그 가운데 몇은 남다른 오솔길을 걸었고, 자기만의 동떨어진 목표를 세웠으며, 특별한 견해와 의무에 매달렸다. 점성술사와 카발라 신봉자들이 있었고, 톨스토이 백작을 따르는 사람도 하나 있었고, 갖가지 여리고 수줍고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 새로운 종파의 신도들, 인도의 수행을 닦는 사람들, 채식하는 사람들 등이 있었다. 이 모든 사람과 우리가 정신적으로 함께 지닌 것은 사실 저마다 남이 품은 은밀한 삶의 꿈에 내어 주는 존중밖에 없었다. 우리와 더 가까운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과거에 인류가 신들과 새로운 소망의 영상을 찾아 헤맨 자취를 좇았고, 그들의 연구는 자주 내 피스토리우스의 연구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책을 들고 와서 옛 언어로 된 글을 번역해 주었고, 옛 상징과 의식의 그림을 보여 주었으며, 지금까지 인류가 지녀 온 이상이라는 재산 전체가 무의식의 영혼이 꾼 꿈들, 인류가 더듬더듬 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예감을 좇아간 꿈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옛 세계의 경이롭고 머리 천 개 달린 신들의 실타래를, 그리스도교로 돌아서는 전환이 동터 오기까지 두루 훑어 나갔다. 외로운 경건한 이들의 고백도 알게 되었고, 민족에서 민족으로 건너가며 종교가 바뀌어 온 자취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모은 모든 것에서 우리 시대와 지금의 유럽에 대한 비판이 저절로 나왔다. 이 유럽은 엄청난 노력으로 인류에게 강력한 새 무기들을 만들어 주었지만, 끝내 정신이 깊이, 마침내는 비명을 지를 만큼 황폐해지는 데 이르렀다. 온 세상을 얻고 그 대가로 제 영혼을 잃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신자들이 있었고, 특정한 희망과 구원의 가르침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유럽을 개종시키려는 불교도들도 있었고, 톨스토이의 제자들도 있었고, 다른 고백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좁은 모임의 우리는 귀 기울여 들었지만, 그 어느 가르침도 하나의 상징 이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표를 지닌 우리에게는 미래를 빚어내는 일에 대한 걱정이 맡겨져 있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어떤 고백도, 어떤 구원의 가르침도 처음부터 죽어 있고 쓸모없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이것만을 의무이자 운명으로 느꼈다. 우리 저마다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제 안에서 움직이는 자연의 씨앗에 온전히 걸맞게 그 뜻대로 살아서, 불확실한 미래가 무엇을 가져오든 그 모든 것에 언제든 우리가 채비가 되어 있게 하는 것.

말로 했든 하지 않았든, 새로 태어남과 지금 있는 것의 붕괴가 가까이 와 있고 벌써 느껴진다는 것이 우리 모두의 느낌 속에 또렷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이따금 내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 올지는 생각조차 할 수 없어. 유럽의 영혼은 끝없이 오랫동안 묶여 있던 짐승이야. 그 짐승이 풀려나면 처음 하는 몸짓이 가장 사랑스럽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토록 오랫동안 거듭거듭 거짓말로 덮고 마비시켜 온 영혼의 참된 고난이 드러나기만 한다면, 길이 곧든 굽든 상관없어. 그때가 우리의 날이 될 거야. 그때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거야. 인도자나 새로운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법은 우리가 살아서 보지 못할 테니까, 오히려 기꺼이 따르는 사람들로서, 운명이 부르는 곳으로 함께 가서 거기 설 각오가 된 사람들로서. 봐,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상이 위협받으면 믿을 수 없는 일까지 할 각오가 되어 있어. 하지만 새로운 이상이, 어쩌면 위험하고 섬뜩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성장의 움직임이 문을 두드릴 때는 아무도 그 자리에 없어. 그때 그 자리에 있으면서 함께 갈 몇 안 되는 사람들, 그게 우리일 거야. 그러라고 우리는 표를 받은 거야. 카인이 두려움과 미움을 불러일으키고, 그 시대의 인류를 좁은 목가에서 위험한 넓은 세계로 몰아내라고 표를 받았듯이. 인류의 행로에 힘을 미친 사람들은 누구든 가릴 것 없이, 운명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럴 능력과 힘을 가질 수 있었어. 모세와 붓다에게도 들어맞고, 나폴레옹과 비스마르크에게도 들어맞아. 어떤 물결을 섬기게 되는지, 어느 극에서 다스림을 받는지는 그 사람이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야. 비스마르크가 사회민주당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맞춰 자기를 바꿨다면 영리한 신사는 되었겠지만 운명의 사람은 되지 못했을 거야. 나폴레옹도, 카이사르도, 로욜라도, 모두가 그랬어! 이건 늘 생물학적으로, 진화의 역사로 생각해 봐야 해! 땅 표면이 뒤집히면서 물에 살던 짐승들이 뭍으로, 뭍에 살던 짐승들이 물로 내던져졌을 때, 새롭고 전에 없던 일을 해내고 새롭게 적응해서 자기 종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운명을 맞을 각오가 된 개체들이었어. 그게 그전에 제 종 안에서 보수적이고 지키는 쪽으로 뛰어났던 개체들이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별종과 혁명가들이었는지, 그건 몰라. 그들은 채비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자기 종을 새로운 진화로 건너가게 구해 낼 수 있었어. 그건 알지. 그러니 우리도 채비를 하고 있자는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에바 부인도 자주 함께 있었지만, 부인 자신은 이런 투로 말에 끼어들지 않았다. 부인은 우리 가운데 자기 생각을 털어놓는 누구에게나 믿음과 이해로 가득한 듣는 이였고 메아리였으며, 마치 모든 생각이 부인에게서 나와 부인에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부인 곁에 앉아 있는 것, 이따금 그 목소리를 듣는 것, 부인을 감싼 무르익음과 영혼의 기운에 함께 깃드는 것, 그것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내 안에서 무슨 변화가, 흐려짐이나 새로워짐이 일어나고 있으면 부인은 그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잠결에 꾸는 꿈들이 부인에게서 온 계시처럼 여겨졌다. 나는 그 꿈들을 자주 부인에게 이야기했고, 부인에게는 그 꿈들이 다 알아들을 만하고 자연스러웠으며, 부인이 맑은 느낌으로 따라오지 못할 만큼 기이한 꿈은 없었다. 한동안 나는 낮에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그대로 본뜬 듯한 꿈들을 꾸었는데, 온 세상이 들끓고 있고 나는 혼자서 혹은 데미안과 함께 숨을 죽이고 커다란 운명을 기다리는 꿈이었다. 운명은 가려져 있었지만 어딘가 에바 부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인에게 선택받느냐 버림받느냐, 그것이 운명이었다.

이따금 부인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꿈은 다 꾼 게 아니에요, 싱클레어. 제일 좋은 걸 잊어버렸어요…" 그러면 그것이 다시 생각나는 일도 있었고, 나는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때때로 나는 불만에 차서 욕망에 시달렸다. 부인을 곁에 두고 보면서 끌어안지 못하는 것을 더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도 부인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한번은 내가 며칠 발길을 끊었다가 넋 나간 얼굴로 돌아오자, 부인은 나를 한쪽으로 데려가 말했다. "스스로 믿지도 않는 소망에 몸을 내맡겨서는 안 돼요. 무엇을 바라는지 나는 알아요. 그 소망을 내려놓을 수 있든지, 아니면 온전히 제대로 바라든지 해야 해요. 이루어질 것을 마음속으로 완전히 확신할 만큼 그렇게 빌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이루어짐도 와 있어요. 그런데 싱클레어는 바라고는 다시 뉘우치고, 그러면서 두려워해요. 그걸 모두 이겨 내야 해요. 동화 하나를 들려줄게요."

그리고 부인은 별을 사랑한 한 젊은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이는 바닷가에 서서 두 손을 뻗어 별을 우러러 기도했고, 별을 꿈꾸었으며, 생각을 별에게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별을 사람이 끌어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혹은 안다고 믿었다. 이루어질 희망 없이 별 하나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고 여겼고, 이 생각으로 체념과 말 없고 충실한 고통의 시 한 편을 삶 전체로 지어 올렸다. 그 고통이 그를 더 낫게, 더 맑게 만들어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모두 별을 향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가 다시 밤에 바닷가 높은 벼랑 위에 서서 별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리움이 가장 커진 한순간, 그는 뛰어올라 별을 향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뛰어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는 번개처럼 생각했다. 어차피 안 될 일이야! 그러자 그는 저 아래 바닷가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사랑할 줄을 몰랐다. 뛰어오르던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짐을 단단히, 의심 없이 믿을 영혼의 힘이 그에게 있었더라면, 그는 위로 날아올라 별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빌어서는 안 돼요." 부인이 말했다. "요구해서도 안 되고요. 사랑은 제 안에서 확신에 이를 힘이 있어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더는 끌려가지 않고 끌어당기지요. 싱클레어, 그 사랑은 지금 내게 끌려오고 있어요. 그 사랑이 언젠가 나를 끌어당기면, 그때 나는 갈 거예요. 나는 선물을 주고 싶지 않아요. 얻어지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때에 부인은 내게 다른 동화를 들려주었다. 희망 없이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완전히 제 영혼 속으로 물러나 사랑으로 불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세상을 잃었다. 푸른 하늘도 푸른 숲도 더는 보이지 않았고, 시냇물도 그에게는 소리를 내지 않았고, 하프도 울리지 않았으며, 모든 것이 가라앉아 그는 가난하고 비참해졌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자라났고,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기를 단념하느니 차라리 죽고 망가지는 편을 훨씬 더 바랐다. 그때 그는 자기 사랑이 제 안의 다른 모든 것을 태워 버린 것을 느꼈다. 사랑은 강해져서 끌어당기고 또 끌어당겼고, 아름다운 여인은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여인이 왔고, 그는 여인을 끌어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러나 여인이 그의 앞에 섰을 때, 여인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잃어버린 온 세상을 제게로 끌어당겼다는 것을 몸서리치며 느끼고 보았다. 세상은 그의 앞에 서서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하늘과 숲과 시냇물, 모든 것이 새로운 빛깔로 싱그럽고 찬란하게 그에게 다가왔고, 그의 것이 되었고, 그의 말을 했다. 그는 여인 하나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온 세상을 가슴에 품었고, 하늘의 별 하나하나가 그의 안에서 타오르며 그의 영혼 속으로 기쁨을 반짝반짝 쏟아 넣었다. 그는 사랑했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찾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하면서 자기를 잃으려고 사랑한다.

에바 부인을 향한 내 사랑이 내 삶의 유일한 내용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부인은 날마다 다르게 보였다. 이따금 나는 내 존재가 끌려가며 향하는 것이 부인이라는 사람 자체가 아니라, 부인은 내 내면의 상징일 뿐이고 나를 더 깊이 나 자신 안으로 이끌려고 할 뿐이라고 분명히 느끼는 것 같았다. 나를 뒤흔드는 불타는 물음들에 내 무의식이 내놓는 대답처럼 들리는 말을 부인에게서 들을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또 부인 곁에서 감각의 욕망으로 불타오르고, 부인이 만졌던 물건에 입을 맞추는 순간도 있었다. 그리고 차츰 감각의 사랑과 감각 너머의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 겹쳐졌다. 그러다 보니 집에 있는 내 방에서 고요하고 깊은 마음으로 부인을 생각하다가, 부인의 손이 내 손안에, 부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있는 것을 느끼는 것 같은 일도 있었다. 아니면 부인 곁에 있으면서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부인과 이야기하며 그 목소리를 듣는데도, 부인이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의 사랑을 오래도록, 죽지 않게 지닐 수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책을 읽다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면, 그것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과 같은 느낌이었다. 부인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무르익은 향기로운 온기를 미소에 담아 보내 주면, 나는 내 안에서 한 걸음 나아갔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게 중요하고 운명인 것은 모두 부인의 모습을 띨 수 있었다. 부인은 내 생각 하나하나로 바뀔 수 있었고, 내 생각 하나하나가 부인으로 바뀔 수 있었다.

부모 곁에서 지내야 하는 성탄절 휴가를 나는 두려워했다. 두 주 동안 에바 부인에게서 떨어져 지내는 것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집에 있으면서 부인을 생각하는 것은 근사한 일이었다. H 시에 돌아와서도 나는 이틀을 더 부인의 집에 가지 않았다. 부인이 감각으로 곁에 있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 이 확신과 이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꿈속에서는 부인과 내가 하나가 되는 일이 새로운 비유의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부인은 바다였고, 나는 흘러가 그 바다로 들어갔다. 부인은 별이었고, 나 자신도 별이 되어 부인에게로 가고 있었으며, 우리는 만나서 서로 끌리는 것을 느꼈고, 함께 머물며 가까이서 소리를 내는 원을 그리며 영원토록 행복하게 서로의 둘레를 돌았다.

다시 처음 부인을 찾아갔을 때 나는 이 꿈을 이야기했다.

"아름다운 꿈이네요." 부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 꿈을 참으로 만드세요!"

이른 봄 무렵, 나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하루가 찾아왔다. 홀에 들어서니 창 하나가 열려 있었고, 미지근한 바람이 히아신스의 짙은 향기를 방 안 가득 굴려 보내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나는 계단을 올라 막스 데미안의 공부방으로 갔고, 늘 그랬듯 문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들어섰다.

방은 어두웠고 커튼이 모두 쳐져 있었다. 막스가 화학 실험실을 꾸며 놓은 작은 옆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고, 그쪽에서 비구름 사이로 비치는 봄 햇살의 밝고 흰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나는 커튼 하나를 걷었다.

그때 커튼 친 창가 가까이 놓인 걸상에 막스 데미안이 이상하게 변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번개처럼 한 가지 느낌이 나를 꿰뚫었다. 이건 전에 한 번 겪은 일이다! 그는 두 팔을 꼼짝 않고 늘어뜨려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었고, 조금 앞으로 기울인 얼굴은 눈을 뜬 채 눈길이 없이 죽어 있었으며, 눈동자에는 유리 조각에 비치듯 작고 날카로운 빛 하나가 죽은 듯 반짝였다. 창백한 얼굴은 자기 안으로 가라앉아, 엄청나게 굳어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그것은 신전 입구에 걸린 아주 오래된 짐승 가면 같았다. 그는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기억이 몸서리치듯 나를 덮쳤다. 이렇게, 바로 이렇게 나는 그를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여러 해 전,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였다. 그때도 눈은 이렇게 안쪽을 향해 굳어 있었고, 두 손은 이렇게 생기 없이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얼굴 위를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그리고 그는 그때, 어쩌면 여섯 해 전쯤, 꼭 이렇게 늙어 보이면서 시간을 벗어나 있었고, 그 얼굴의 주름 하나도 오늘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살그머니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서 에바 부인과 마주쳤다. 부인은 창백했고 지쳐 보였는데 그것은 내가 부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그때 그림자 하나가 창을 스쳐 지나가더니 눈부시게 흰 햇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막스 방에 갔었습니다." 내가 빠르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잠들어 있는 건지, 깊이 잠겨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한 번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설마 깨우지는 않았겠지요?"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막스는 제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다시 나왔습니다. 에바 부인, 말씀해 주십시오, 막스가 어떻게 된 겁니까?"

부인은 손등으로 이마를 쓸었다.

"걱정 말아요, 싱클레어. 막스에게는 아무 일도 없어요. 자기 안으로 들어간 거예요. 오래가지는 않을 거예요."

부인은 일어나 막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도 정원으로 나갔다.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래서 홀을 이리저리 거닐며 정신이 아찔하도록 향기를 뿜는 히아신스 냄새를 맡고, 문 위의 내 새 그림을 바라보며, 이날 아침 집 안에 가득 찬 이상한 그림자를 가슴 답답하게 들이마셨다. 이게 무엇일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에바 부인은 곧 돌아왔다. 검은 머리칼에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부인은 안락의자에 앉았다. 피로가 부인을 덮고 있었다. 나는 부인 곁으로 가서 몸을 굽히고, 머리칼에 맺힌 빗방울을 입술로 거두었는데, 부인의 눈은 맑고 고요했지만 빗방울은 눈물 같은 맛이 났다.

"막스를 보러 가 볼까요?" 내가 속삭이며 물었다.

부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아요, 싱클레어!" 부인은 마치 제 안에 걸린 주문을 깨뜨리려는 듯 큰 소리로 타일렀다. "이제 가세요. 나중에 다시 와요. 지금은 이야기할 수가 없어요."

나는 그 집을 나와 도시를 벗어나 산 쪽으로 걸어갔다. 비스듬히 가늘게 내리는 비가 마주 들이쳤고, 구름은 무거운 압력에 눌려 무엇이 두려운 듯 낮게 몰려 지나갔다. 아래쪽에는 바람이 거의 없었지만 높은 곳에서는 폭풍이 이는 듯했고, 강철 같은 잿빛 구름 사이로 해가 창백하고 날카롭게 몇 번이나 잠깐씩 비쳤다.

그때 하늘 저편에서 성근 누런 구름 한 덩이가 밀려왔다. 그 구름은 잿빛 벽에 부딪혀 쌓였고, 바람은 몇 초 만에 누런빛과 푸른빛으로 하나의 그림을, 커다란 새 한 마리를 빚어냈는데, 그 새는 푸른 뒤엉킴에서 몸을 떨치고 나와 넓은 날갯짓으로 하늘 깊숙이 사라졌다. 그러자 폭풍 소리가 들렸고, 우박 섞인 비가 후드득 쏟아졌다. 짧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섬뜩한 소리를 내는 천둥이 채찍질당한 풍경 위에서 터졌고, 곧이어 다시 햇살 한 줄기가 뚫고 나와, 가까운 산들의 갈색 숲 위에서 창백한 눈이 희미하게, 현실이 아닌 듯 빛났다.

몇 시간 뒤 흠뻑 젖고 바람에 시달린 몰골로 돌아오자, 데미안이 몸소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위층 자기 방으로 올라갔는데, 실험실에서는 가스 불꽃이 타고 있었고 종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그가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앉아." 그가 권했다. "피곤하겠군. 날씨가 지독했어. 밖에서 어지간히 돌아다닌 게 보여. 차가 곧 올 거야."

"오늘 무슨 일이 있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그깟 뇌우 하나만은 아닐 거야."

그가 살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뭘 봤어?"

"그래. 구름 속에서 잠깐 그림 하나를 똑똑히 봤네."

"어떤 그림?"

"새였어."

"새매? 그거였어? 네 꿈의 새?"

"그래, 내 새매였어. 누렇고 어마어마하게 컸고, 푸르스름하게 검은 하늘 속으로 날아 들어갔네."

데미안이 깊이 숨을 내쉬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늙은 하녀가 차를 내왔다.

"들어, 싱클레어. 그런데 네가 그 새를 우연히 본 건 아닐 것 같은데?"

"우연히? 그런 걸 우연히 보나?"

"좋아, 아니지. 그건 무언가를 뜻해. 뭘 뜻하는지 알아?"

"아니. 그저 그게 하나의 뒤흔들림을, 운명의 한 걸음을 뜻한다는 것만 느끼네. 우리 모두와 상관있는 일 같아."

그는 격하게 방 안을 오락가락했다.

"운명의 한 걸음!"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간밤에 나도 같은 꿈을 꿨어. 그리고 어머니도 어제 같은 걸 말하는 예감을 느끼셨고. 나는 꿈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어. 나무 기둥인지 탑인지에 걸린 사다리였어. 꼭대기에 오르니 온 땅이 보였어. 커다란 평원이었는데, 도시와 마을들이 불타고 있었어. 아직 다 이야기할 수는 없어. 나도 아직 다 분명하지 않거든."

"그 꿈을 너 자신에 관한 걸로 푸나?" 내가 물었다.

"나에 관해? 물론이지. 자기와 상관없는 꿈을 꾸는 사람은 없어. 하지만 나 혼자만 상관있는 건 아니야. 그건 네 말이 맞아. 나는 내 영혼 속의 움직임을 알려 주는 꿈과, 온 인류의 운명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다른 꿈, 아주 드문 꿈을 꽤 정확히 가려내. 그런 꿈은 드물게 꾸었고, 예언이었다고, 그리고 그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꿈은 하나도 없었어. 풀이가 너무 불확실하거든. 하지만 이건 분명히 알아. 나는 나 하나에만 관계되지 않는 무언가를 꿈꿨어. 이 꿈은 내가 전에 꾼 다른 꿈들에 이어져 있고, 그 꿈들을 계속 이어 가고 있거든. 싱클레어, 내가 너한테 벌써 말했던 그 예감들은 바로 이런 꿈들에서 온 거야. 우리 세계가 꽤 썩었다는 건 우리도 알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계가 무너진다느니 하는 예언을 할 까닭이 못 돼. 그런데 나는 몇 해 전부터 꿈을 꾸어 왔고, 그 꿈들에서 미루어 보면, 아니 느끼면, 뭐라고 해도 좋아, 아무튼 그 꿈들에서 낡은 세계의 붕괴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느껴. 처음에는 아주 희미하고 먼 예감이었는데, 점점 더 또렷하고 강해졌어. 아직은 무언가 크고 무시무시한 것이 다가오고 있고 그게 나와도 상관있다는 것밖에는 몰라. 싱클레어, 우리가 이따금 이야기했던 그 일을 우리는 겪게 될 거야! 세계는 새로워지고 싶어 해. 죽음의 냄새가 나. 죽음 없이 오는 새것은 없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해." 나는 덜컥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꿈의 나머지는 이야기해 줄 수 없나?" 나는 머뭇거리며 부탁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문이 열리고 에바 부인이 들어왔다.

"둘이 여기 같이 앉아 있었구나! 얘들아, 설마 슬퍼하는 건 아니겠지?"

부인은 싱그러워 보였고 이제 조금도 지쳐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이 부인에게 미소를 지었고, 부인은 겁먹은 아이들에게 오는 어머니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슬퍼하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 그냥 이 새로운 징조들을 두고 조금 수수께끼를 풀어 보았을 뿐이에요. 하지만 별일 아니에요. 오려는 것은 갑자기 와 있을 거고,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때 저절로 알게 될 거예요."

그러나 내 마음은 언짢았다.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 홀을 지나 나올 때, 히아신스 향기가 시들고 김빠지고 시체 같은 냄새로 느껴졌다. 우리 위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 있었다.

주

  1. 1. 에바(Eva)는 성경의 하와를 독일어로 부르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