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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제2장 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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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카인

내 괴로움에서 나를 건져 낸 구원은 전혀 뜻밖의 쪽에서 왔고, 그와 함께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내 삶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내 안에서 계속 힘을 미치고 있다.

얼마 전 우리 라틴어 학교에 새 학생이 하나 들어왔다. 우리 도시로 이사 온 넉넉한 과부의 아들이었고, 소매에 검은 상장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애는 나보다 높은 학년이었고 나이도 몇 살 위였지만, 모두가 그랬듯 나도 곧 그 애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 기이한 학생은 겉보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것 같았고 누구에게도 사내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으며, 유치한 우리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그 애는 어른 남자처럼, 아니 신사처럼 낯설고 이미 다 자란 모습으로 움직였다. 인기는 없었다. 놀이에 끼지 않았고 싸움에는 더더욱 끼지 않았으며, 다만 선생들을 대할 때의 자신만만하고 단호한 말투만은 다른 아이들 마음에 들었다. 그 애의 이름은 막스 데미안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이따금 있는 일이었지만, 어느 날 무슨 까닭인지 아주 넓은 우리 교실에 다른 반이 하나 더 들어와 앉게 되었다. 데미안의 반이었다. 우리 꼬마들은 성경 이야기 시간이었고, 큰 아이들은 작문을 써야 했다. 선생이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우리 머릿속에 두들겨 넣는 동안 나는 자꾸만 데미안 쪽을 건너다보았는데, 그 얼굴이 묘하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영리하고 밝고 더없이 단단한 그 얼굴이 정신을 모아 주의 깊게 과제 위에 숙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애는 숙제를 하는 학생이 아니라 제 문제를 파고드는 연구자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그 애가 그리 달갑지 않았고, 오히려 무언가 반감이 있었다. 그 애는 내게 너무 우월하고 차가웠고, 그 됨됨이가 너무 도전적으로 확신에 차 있었으며, 그 눈에는 아이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어른의 표정이, 조금 슬프면서 그 속에 조롱이 번득이는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좋든 싫든 나는 그 애를 줄곧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 애가 한 번이라도 나를 쳐다보면 깜짝 놀라 눈길을 거두었다. 오늘 그때 학생이던 그 애의 모습을 곰곰이 떠올려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애는 모든 면에서 다른 모든 아이와 달랐고, 철저히 저만의 개성이 찍혀 있었으며, 그래서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도 눈에 띄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썼고, 농부 아이들 사이에 섞여 그들과 같아 보이려고 갖은 수고를 다하는 변장한 왕자처럼 옷을 입고 행동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애가 내 뒤에서 걸어왔다. 다른 아이들이 흩어지고 나자 그 애는 나를 앞질러 와서 인사를 했다. 그 인사도 우리 학생들 말투를 흉내 내긴 했지만, 아주 어른스럽고 정중했다.

"같이 좀 걸을까?" 그 애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우쭐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집이 어디인지 설명해 주었다.

"아, 거기?" 데미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 집이라면 알아. 너희 집 현관문 위에 기이한 게 하나 붙어 있잖아, 그걸 보자마자 관심이 가더라."

나는 그 애가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알아듣지 못했고, 그 애가 나보다 우리 집을 더 잘 아는 것 같아서 놀랐다. 아치형 대문 꼭대기에 쐐기돌로 일종의 문장(紋章)이 박혀 있기는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닳아 납작해지고 여러 번 페인트가 덧칠되어 있었으며, 내가 아는 한 우리나 우리 집안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난 그거 잘 몰라." 나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새인가 뭐 그런 건데, 아주 오래된 거래. 이 집이 옛날에 수도원에 딸린 집이었다나 봐."

"그럴 수도 있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한번 잘 봐 둬! 그런 건 꽤 재미있을 때가 많거든. 내 생각엔 새매 같아."

우리는 계속 걸었고, 나는 몹시 쑥스러웠다. 갑자기 데미안이 무언가 우스운 것이 떠오른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까 너희 수업을 나도 들었지." 데미안이 활기차게 말했다. "이마에 표를 달고 다닌 카인1 이야기 말이야, 그렇지? 그 이야기 마음에 들어?"

아니, 우리가 배워야 했던 것 가운데 무엇이든 마음에 든 적은 거의 없었지만, 꼭 어른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아서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 이야기가 꽤 마음에 든다고 했다.

데미안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나한테 그런 척 안 해도 돼, 이 친구야. 그런데 그 이야기는 정말 꽤 기이해. 수업 시간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들 대부분보다 훨씬 더 기이한 것 같아. 선생님은 별말 안 하고 그냥 신이니 죄니 하는 뻔한 얘기만 했잖아. 그런데 내 생각엔…" 데미안은 말을 끊고 빙긋 웃더니 물었다. "그런데 이런 얘기 관심 있어?"

"그래, 그러니까 내 생각엔,"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카인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볼 수도 있어. 우리가 배우는 것들은 대부분 물론 옳고 맞는 말이야. 하지만 그걸 전부 선생들하고는 다르게 볼 수도 있거든. 그러면 대개 훨씬 더 그럴듯한 뜻이 나와. 이를테면 이 카인 말이야, 그리고 그 이마의 표 말이야. 우리가 배운 설명으로는 영 개운하지가 않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가 싸우다가 제 형제를 때려죽이는 일이야 물론 있을 수 있고, 그러고 나서 겁이 나서 꼬리를 내리는 것도 있을 수 있지. 그런데 그 비겁함 때문에 일부러 훈장까지 받는다는 건, 그 훈장이 그 사람을 지켜 주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겁먹게 한다는 건 꽤 이상하지 않아?"

"그러네." 나는 흥미가 생겨 말했다. 그 이야기가 나를 붙들기 시작했다. "그럼 그 이야기를 어떻게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데?"

데미안이 내 어깨를 탁 쳤다.

"아주 간단해! 처음부터 있었던 것, 그 이야기가 시작된 바탕은 표였어.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얼굴에 다른 사람들을 겁먹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거야. 사람들은 감히 그 남자를 건드리지 못하고, 그 남자한테, 그리고 그 자식들한테 기가 눌렸지. 그런데 그건 아마, 아니 틀림없이, 우체국 소인처럼 정말로 이마에 찍힌 표는 아니었을 거야. 살다 보면 그렇게 거칠게 돌아가는 일은 드물거든. 오히려 거의 알아챌 수 없는 무언가 으스스한 것, 사람들이 늘 보아 익숙한 것보다 눈빛에 정신과 대담함이 조금 더 담겨 있는 것이었겠지. 그 남자에게는 힘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 남자를 꺼렸어. 그 남자에게는 '표'가 있었던 거지. 그걸 사람들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었어.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한테 편하고 자기가 옳다고 해 주는 쪽을 원하거든. 사람들은 카인의 자식들이 무서웠어, 그들에게는 '표'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표를 있는 그대로, 남보다 뛰어나다는 영예로 설명하지 않고 그 반대로 설명한 거야. 그 표를 단 녀석들은 으스스하다고 했지. 실제로도 그랬고. 용기와 기개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눈에 언제나 몹시 으스스하거든. 겁이 없고 으스스한 한 족속이 돌아다닌다는 건 아주 불편한 일이었어. 그래서 사람들은 그 족속에게 앙갚음하려고, 그동안 견뎌 온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벌충해 보려고, 그 족속에게 별명과 꾸며 낸 이야기를 덧씌운 거야. 알겠어?"

"응… 그러니까… 그럼 카인은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야? 그리고 성경에 있는 이야기도 다 사실은 참말이 아니라는 거야?"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그렇게 오래된, 아주 오래된 이야기들은 언제나 참말이야. 하지만 언제나 올바르게 기록되거나 올바르게 설명되는 건 아니지. 간단히 말해, 내 생각에 카인은 멋진 녀석이었는데 사람들이 그 사람을 무서워했다는 그 이유 하나로 이런 이야기를 덧씌운 거야. 그 이야기는 그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벌리는 그런 소문이었는데, 카인과 그 자식들이 정말로 일종의 '표'를 달고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랐다는 점에서는 아주 참말이었지."

나는 몹시 놀랐다.

"그럼 사람을 죽인 그 일도 참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나는 마음이 흔들려서 물었다.

"아니, 그건 참말이야! 틀림없이 참말이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죽였어. 그게 정말 제 형제였는지는 의심해 볼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사람은 형제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때려죽인 거야. 어쩌면 영웅다운 일이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어쨌든 다른 약한 자들은 이제 두려움에 떨면서 크게 불평했는데, 누가 그들한테 '왜 너희도 그냥 그자를 때려죽이지 않느냐?' 하고 물으면, '우리는 겁쟁이니까'라고는 하지 않고 '그럴 수 없다. 그자에게는 표가 있다. 신이 그자에게 표를 찍었다!' 했지. 속임수는 대충 그렇게 생겨났을 거야. 아, 내가 너를 너무 붙잡아 두었네. 그럼 잘 가!"

데미안은 알트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 나를 혼자 남겨 두었고, 나는 어느 때보다도 어리둥절했다. 그 애가 가 버리자마자, 그 애가 한 말이 전부 하나도 빠짐없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카인이 고귀한 사람이고, 아벨이 겁쟁이라니! 카인의 표가 영예라니! 터무니없었고, 신을 모독하는 불경한 소리였다. 그러면 하느님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잖아, 아벨을 사랑하셨잖아? 아니, 말도 안 돼! 나는 데미안이 나를 놀리면서 살얼음판 위로 꾀어내 미끄러지게 하려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짐작했는데, 그 애는 지독하게 영리한 녀석이었고, 말솜씨도 대단했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아니…

그래도 나는 지금까지 성경 이야기든 다른 이야기든 이토록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프란츠 크로머를 이렇게 까맣게, 몇 시간 동안, 저녁 내내 잊은 적도 없었다. 집에서 나는 성경에 실린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는데, 이야기는 짧고 분명했고, 거기서 특별하고 은밀한 해석을 찾는다는 건 정말 미친 짓이었다. 그렇다면 살인자는 누구나 자기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는 자라고 우길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건 헛소리였다. 다만 데미안이 그런 것을 말하는 품만은 근사했다.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가볍고 멋들어지게, 게다가 그런 눈을 하고서!

물론 나 자신에게도 무언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 몹시 어긋난 것이 있었다. 나는 밝고 깨끗한 세계에서 살았고, 나 자신도 일종의 아벨이었는데, 이제는 그토록 깊이 '다른' 세계에 빠져 그토록 타락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따지고 보면 그게 다 내 탓은 아니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 그때 기억 하나가 번쩍 떠올라 한순간 숨이 막힐 뻔했다. 지금의 비참함이 시작된 그 고약한 저녁, 아버지와 그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한순간 아버지와 아버지의 밝은 세계와 지혜를 한꺼번에 꿰뚫어 보고 경멸했다! 그래, 그때 카인이고 표를 단 나 자신이, 이 표는 치욕이 아니라 영예이며 나는 내 악함과 내 불행 덕분에 아버지보다, 착하고 경건한 사람들보다 더 높이 서 있다고 상상했다.

그때 내가 그 일을 이렇게 또렷한 생각의 모습으로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으니, 그것은 그저 느낌들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자부심으로 가득 채우는 이상한 마음의 움직임들이 한꺼번에 확 타올랐을 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데미안은 겁 없는 자들과 겁쟁이들을 두고 얼마나 이상하게 말했던가! 카인의 이마에 있는 표를 얼마나 묘하게 풀이했던가! 그러면서 그 애의 눈, 어른의 것 같은 그 기이한 눈은 얼마나 기이하게 빛났던가! 그리고 흐릿하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애 자신이, 이 데미안이 일종의 카인이 아닐까? 자기가 카인과 닮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왜 카인을 편들까? 그 애 눈빛에는 왜 저런 힘이 있으며, 따지고 보면 경건하고 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인 '다른 사람들', 그 겁 많은 사람들을 두고 왜 저렇게 비웃듯이 말할까?

나는 이 생각들을 끝맺지 못했다. 우물에 돌 하나가 떨어졌다. 그 우물은 내 어린 영혼이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카인과 살인과 표에 얽힌 이 일은 깨달음과 의심과 비판을 향한 내 모든 시도가 저마다 출발하는 지점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데미안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카인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도 데미안에게 마음이 쏠려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새로 온 애'를 두고 숱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문들을 지금 다 기억할 수만 있다면 하나하나가 그 애를 비추는 빛이 될 테고, 하나하나 풀이해 볼 수 있을 텐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처음에 데미안의 어머니가 아주 부자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뿐이다. 또 그 어머니는 교회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아들도 가지 않는다고들 했다. 유대인이라고 아는 체하는 아이도 있었지만, 몰래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일 수도 있었다. 그다음에는 막스 데미안이 장사라는 옛날이야기 같은 소문이 돌았다. 확실한 것은, 데미안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거절당하자 겁쟁이라고 부른 그 반에서 제일 힘센 아이를 데미안이 무시무시하게 꺾어 놓았다는 사실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이들 말로는, 데미안이 한 손으로 그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꽉 누르기만 했는데 아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 아이는 나중에 슬그머니 자리를 떴으며 며칠 동안 팔을 쓰지 못했다고 했다. 하룻저녁은 그 아이가 죽었다는 말까지 돌았다. 한동안은 무슨 말이든 떠돌았고, 무슨 말이든 믿었으며, 모든 것이 흥미진진하고 신기했다. 그러다 한동안은 다들 시들해졌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우리 학생들 사이에 새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니, 데미안이 여자애들과 가깝게 어울리고 '다 안다'는 소문이었다.

그사이 프란츠 크로머와 얽힌 내 일은 피할 수 없는 길을 따라 계속 흘러갔다. 나는 크로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로머가 중간중간 며칠씩 나를 내버려 둘 때도 나는 여전히 그 애에게 묶여 있었다. 꿈속에서 크로머는 내 그림자처럼 나와 함께 살았고, 현실에서 내게 하지 않은 일을 내 상상은 꿈속에서 크로머에게 시켰으며, 그 꿈속에서 나는 완전히 크로머의 노예가 되었다. 나는 현실보다 이런 꿈속에서 더 많이 살았고(나는 늘 꿈을 많이 꾸는 아이였다), 이 그림자들에게 힘과 생명을 빼앗겼다. 무엇보다 크로머가 나를 학대하는 꿈을, 나에게 침을 뱉고 내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앉는 꿈을 자주 꾸었고, 더 고약하게는 크로머가 나를 꾀어 무거운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꿈, 아니 꾀는 것이 아니라 그 막강한 힘으로 그냥 억지로 시키는 꿈을 꾸었다. 이런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꿈, 반쯤 미쳐서 깨어난 그 꿈은 내 아버지를 죽이려 덤비는 꿈이었다. 크로머는 칼을 갈아 내 손에 쥐여 주었고, 우리는 가로수 길의 나무들 뒤에 서서 누군가를 노리며 숨어 있었다. 누구를 노리는지 나는 몰랐다. 그런데 누군가 걸어오고, 크로머가 내 팔을 꾹 눌러 내가 찔러야 할 사람이 저 사람이라고 알려 주었을 때, 그것은 내 아버지였다. 그때 나는 잠에서 깼다.

이런 일들 속에서도 나는 카인과 아벨은 아직 생각했지만, 데미안은 거의 떠올리지 않았다. 데미안이 처음으로 다시 내게 다가온 것은, 기이하게도 역시 꿈속에서였다. 나는 또 내가 학대당하고 폭행당하는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크로머가 아니라 데미안이 내 위에 무릎을 꿇고 올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새로운 일이었고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크로머에게서 괴로워하고 몸부림치며 당했던 모든 것을 나는 데미안에게서는 기꺼이, 두려움만큼이나 큰 환희가 담긴 느낌으로 당했다. 이 꿈을 나는 두 번 꾸었고, 그 뒤로는 다시 크로머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꿈속에서 겪은 일과 현실에서 겪은 일을 나는 이제 더는 정확히 가르지 못한다. 어쨌든 크로머와의 고약한 관계는 제 길을 갔고, 마침내 자잘한 도둑질로 모은 돈으로 그 애에게 빚진 액수를 다 갚았을 때에도 끝나기는커녕 이어졌다. 아니, 이제 크로머는 그 도둑질을 알고 있었다. 돈이 어디서 났느냐고 늘 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 때보다도 크로머의 손아귀에 있었다. 크로머는 아버지에게 다 말하겠다고 자주 위협했고, 그럴 때면 두려움보다도, 처음부터 내가 직접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깊은 후회가 더 컸다. 그렇지만 그토록 비참했으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뉘우치지는 않았다. 적어도 늘 뉘우치지는 않았고, 이따금 모든 것이 이래야만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내 위에 액운이 드리워 있었고, 그것을 뚫고 나가려 해 봐야 소용없었다.

아마 부모는 내 이런 상태로 적잖이 괴로워했을 것이다. 낯선 정신이 나를 덮쳤고, 나는 그토록 정답던 우리 식구들 사이에 더는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듯 미칠 듯한 향수가 자주 나를 덮쳤다. 사람들은, 특히 어머니는 나를 악당보다는 환자처럼 대했다. 그러나 사정이 실제로 어떤지는 두 누이의 태도에서 가장 잘 보였다. 몹시 조심스러우면서도 나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그 태도에는, 내가 일종의 무엇에 씐 아이여서 꾸짖기보다는 딱하게 여겨야 하지만 그래도 바로 그 안에 악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 또렷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나는 느꼈고, 그 기도가 헛되다는 것도 느꼈다. 마음을 가볍게 하고 싶은 그리움, 제대로 고해하고 싶은 갈망이 자주 불타올랐지만,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모든 것을 제대로 말하고 설명하지는 못하리라는 것도 미리 느꼈다. 사람들이 그것을 다정하게 받아들이고, 나를 무척 아끼고, 아니 딱하게 여겨 주겠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일종의 탈선으로 여기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것은 운명이었는데도.

아직 열한 살도 안 된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사람도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자기 감정의 일부를 생각으로 바꾸는 법을 배운 어른은 아이에게서 그런 생각을 찾아보다가 찾지 못하면, 아이에게는 체험도 없다고 여겨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그때만큼 깊이 겪고 괴로워한 적이 드물다.


비 오는 어느 날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그 애가 성터 광장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는 거기 서서 기다리며, 시커멓게 물이 뚝뚝 듣는 나무들에서 쉴 새 없이 떨어지는 젖은 밤나무 잎을 발로 헤집고 있었다. 돈은 없었지만 크로머에게 무엇이라도 줄 수 있도록 케이크 두 조각을 몰래 챙겨 지니고 있었다. 나는 진작부터 이렇게 어딘가 구석에 서서 그 애를 기다리는 데, 그것도 자주 아주 오래 기다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고, 사람이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듯 그것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크로머가 왔다. 오늘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크로머는 내 옆구리를 몇 번 쿡쿡 쥐어박고, 웃고, 케이크를 빼앗아 가고, 심지어 눅눅한 담배 한 개비를 권하기까지 했는데(나는 받지 않았다), 여느 때보다 다정했다.

"참." 크로머가 가면서 말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말해 두는데, 다음번엔 네 누나를 데려와도 되겠다. 큰누나 말이야. 이름이 뭐랬지?"

나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리둥절해서 크로머를 쳐다보기만 했다.

"못 알아들어? 네 누나를 데려오라고."

"응, 크로머, 하지만 그건 안 돼. 나는 그러면 안 되고, 누나도 따라오지 않을 거야."

나는 그것이 또 하나의 괴롭힘이자 핑계일 뿐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크로머는 자주 그랬다. 무언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 나를 겁에 질리게 하고 모욕을 준 다음, 못 이기는 척하며 조금씩 흥정에 응해 주는 것이 크로머의 오랜 버릇이었다. 그러면 나는 돈이나 다른 것을 바쳐서 풀려나야 했다.

이번에는 전혀 달랐다. 내가 거절했는데도 크로머는 거의 화를 내지 않았다.

"흥, 그래." 크로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난 네 누나랑 알고 지내고 싶어. 언젠간 될 거야. 그냥 누나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면, 내가 거기 끼어들게. 내일 휘파람으로 부를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하자."

크로머가 가고 나자 문득 그 애가 바라는 것의 뜻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나는 아직 완전히 아이였지만, 사내아이와 여자아이가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서로 무언가 은밀하고 상스럽고 금지된 짓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더러…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갑자기 또렷해졌다!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곧바로 섰지만, 그러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크로머가 내게 어떻게 앙갚음할지는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나를 위한 새로운 고문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로는 아직 모자랐던 것이다.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텅 빈 광장을 하염없이 걸었다. 새로운 괴로움, 새로운 노예살이!

그때 싱그럽고 낮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달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뒤따라 달려왔고, 손 하나가 뒤에서 부드럽게 나를 붙잡았다. 막스 데미안이었다.

나는 순순히 붙잡혔다.

"너였어?"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깜짝 놀랐잖아!"

데미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지금처럼 어른의 것, 위에 서서 꿰뚫어 보는 사람의 것이었던 적은 없었고, 우리는 그동안 오래 서로 말을 나누지 않은 터였다.

"미안해." 데미안이 정중하면서도 아주 단호한 그 말투로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그렇게 쉽게 놀라면 안 돼."

"그래도 놀랄 수도 있잖아."

"그런 것 같네. 그런데 봐. 너한테 아무 짓도 안 한 사람 앞에서 네가 그렇게 움찔하면, 그 사람은 생각하기 시작해. 이상하게 여기고 궁금해하면서, 네가 참 기이하게 잘 놀란다고 생각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은 겁을 먹고 있을 때만 그렇게 움찔한다고 생각하지. 겁쟁이들은 늘 겁을 먹고 있거든. 그런데 내 생각에 넌 사실 겁쟁이는 아니야. 그렇지? 아, 물론 영웅도 아니지. 네가 무서워하는 일들이 있고,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있어. 그런데 그런 건 절대 있으면 안 돼. 그래, 사람을 무서워하는 일은 절대 있으면 안 되거든. 너 나는 안 무섭지? 아니면 무서워?"

"아, 아니, 전혀."

"그거 봐. 그런데 네가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있지?"

"모르겠어… 날 좀 내버려 둬.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데미안은 나와 걸음을 맞추었다(나는 달아날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옆에서 그 애의 눈길이 느껴졌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봐." 데미안이 다시 말을 꺼냈다. "내가 너한테 좋은 뜻으로 이러는 거라고. 어쨌든 나를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너랑 실험을 하나 해 보고 싶어. 재미도 있고, 너도 거기서 아주 쓸모 있는 걸 하나 배울 수 있을 거야. 잘 봐! 그러니까 나는 가끔 독심술이라는 재주를 부려 보는데, 마법 같은 건 하나도 없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면 아주 묘해 보여서 사람들을 꽤 놀라게 할 수 있어. 자, 한번 해 보자. 그러니까 나는 네가 좋거나, 네게 관심이 있어서, 네 속이 어떤지 알아내고 싶은 거야. 그러려고 벌써 첫걸음을 뗐어. 내가 너를 놀라게 했고, 그러니까 넌 잘 놀라는 아이라는 거지. 그렇다면 네가 무서워하는 일과 사람이 있다는 거야. 그게 어디서 올까? 사람은 누구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누군가를 무서워한다면, 그건 그 누군가에게 자기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힘을 스스로 내주었기 때문이야. 이를테면 네가 무슨 나쁜 짓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알고 있다고 해 봐. 그러면 그 사람이 너를 휘두를 힘을 갖게 되지. 알아듣겠어? 뻔하잖아, 그렇지?"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 애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언제나처럼 진지하고 영리했고 너그럽기도 했지만, 다정한 기색은 조금도 없이 오히려 엄했으며, 거기에는 정의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고, 그 애는 마법사처럼 내 앞에 서 있었다.

"알아들었어?" 데미안이 한 번 더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했잖아, 독심술은 우스워 보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되는 거라고, 이를테면 내가 언젠가 너한테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해 줬을 때 네가 나를 두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나는 꽤 정확히 말해 줄 수 있어. 뭐, 그건 지금 얘기할 게 아니고. 네가 언젠가 내 꿈을 꾸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그냥 두자! 넌 영리한 애야. 대부분은 너무 멍청하거든! 나는 믿을 만한 영리한 애하고 가끔 이야기하는 게 좋아. 너도 괜찮지?"

"응, 그럼. 그런데 나는 도무지 모르겠어…"

"그 재미있는 실험이나 계속하자!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낸 건 이거야. 소년 S는 잘 놀란다. 누군가를 무서워한다. 아마 그 다른 사람과 자기한테 몹시 거북한 비밀을 하나 나눠 갖고 있다. 대충 맞아?"

꿈속에서처럼 나는 그 애의 목소리에, 그 애의 힘에 굴복해 고개만 끄덕였다. 저건 나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닐까? 모든 것을 아는 목소리가? 모든 것을 나 자신보다 더 잘, 더 또렷하게 아는 목소리가?

데미안이 내 어깨를 힘껏 쳤다.

"그러니까 맞구나. 그럴 줄 알았어. 이제 딱 하나만 더 묻자. 아까 저기서 가 버린 녀석 이름이 뭔지 알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건드려진 내 비밀이 아프게 몸을 웅크리며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빛 속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무슨 녀석? 아무도 없었어. 나 혼자였어."

데미안이 웃었다.

"그냥 말해!" 데미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뭐야?"

나는 속삭였다. "프란츠 크로머 말이야?"

데미안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넌 눈치가 빠르구나. 우린 친구가 될 거야. 그런데 이제 너한테 말해 줄 게 있어. 그 크로머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나쁜 놈이야. 얼굴만 봐도 불한당이라는 걸 알겠어! 넌 어떻게 생각해?"

"응, 맞아." 나는 한숨을 토했다. "그 애는 나빠. 사탄이야! 하지만 그 애가 아무것도 알면 안 돼! 제발, 그 애가 아무것도 알면 안 돼. 너 그 애 알아? 그 애도 너 알아?"

"걱정 마! 그 녀석은 갔고, 나를 몰라. 아직은. 하지만 꼭 한번 알고 지내고 싶긴 해. 초등학교 다니지?"

"응."

"몇 학년?"

"5학년. 하지만 그 애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제발,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걱정 마, 너한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마 그 크로머 얘기를 좀 더 해 줄 생각은 없겠지?"

"못 해! 싫어, 날 내버려 둬!"

데미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쉽네." 그러다 데미안이 말했다. "실험을 더 해 볼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널 괴롭힐 생각은 없어. 그래도 그 녀석을 무서워하는 게 옳지 않다는 건 너도 알지, 그렇지? 그런 두려움은 우리를 완전히 망가뜨리니까 떨쳐 내야지, 네가 제대로 된 사내가 되고 싶으면 그걸 꼭 떨쳐 내야 하거든. 알겠어?"

"그래, 네 말이 다 맞아… 하지만 안 돼. 넌 모르잖아…"

"내가 꽤 많은 걸 안다는 건 봤잖아.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혹시 그 녀석한테 돈을 빚졌어?"

"응, 그것도 있어.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야. 말할 수 없어, 못 해!"

"그러니까 네가 그 녀석한테 빚진 만큼 내가 돈을 줘도 소용없다는 거지? 그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그리고 부탁이야.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한마디도! 그러면 난 불행해진단 말이야!"

"나를 믿어, 싱클레어. 너희 비밀은 나중에 언젠가 나한테 털어놓게 될 거야…"

"절대, 절대 안 해!" 나는 격하게 소리쳤다.

"네 마음대로 해. 내 말은 그냥, 어쩌면 나중에 언젠가 나한테 더 말해 줄지도 모른다는 거야. 물론 네가 원해서. 설마 내가 크로머 그 녀석처럼 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 아니… 하지만 넌 아무것도 모르잖아!"

"전혀 몰라. 그냥 생각해 볼 뿐이야. 그리고 나는 절대 크로머처럼 굴지 않을 거야. 그건 믿어도 돼. 넌 나한테 빚진 것도 없잖아."

우리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고, 나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데미안이 아는 것은 갈수록 더 수수께끼 같았다.

"이제 집에 갈게." 데미안이 그렇게 말하고 빗속에서 로덴 외투를 더 단단히 여몄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만 다시 말해 둘게. 그 녀석을 떨쳐 내야 해! 정 다른 수가 없으면 때려죽여 버려!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나는 감탄할 거고, 그게 마음에 들 거야. 나도 도와줄게."

나는 다시 겁이 났다. 카인 이야기가 갑자기 다시 떠올랐다. 내 둘레에 으스스한 것이 너무 많았고, 나는 으스스해져서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막스 데미안이 빙그레 웃었다. "그냥 집에 가! 그건 우리가 어떻게든 해결할 거야. 때려죽이는 게 제일 간단하겠지만. 이런 일에서는 제일 간단한 게 언제나 제일 좋거든. 네 친구 크로머 손에 붙들려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어."

집에 돌아오니 꼭 한 해 동안 떠나 있었던 것만 같았고,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나와 크로머 사이에 미래 같은 것, 희망 같은 것이 서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몇 주 몇 주 동안 내 비밀을 안고 얼마나 끔찍하게 혼자였는지 알았다. 그리고 곧바로, 부모 앞에서 고해하면 마음은 가벼워지겠지만 완전히 구원받지는 못하리라는, 여러 번 곰곰이 생각했던 일이 떠올랐는데, 이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낯선 남에게 거의 고해를 한 셈이었고, 구원의 예감이 짙은 향기처럼 내게로 훅 날아왔다!


그래도 내 두려움은 아직 한참 가시지 않았고, 나는 원수와 길고 무시무시한 실랑이를 벌여야 하리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이 그토록 조용히, 완전히 은밀하고 잠잠하게 흘러가서 그만큼 더 기이했다.

우리 집 앞에서 들리던 크로머의 휘파람 소리가 그쳤다. 하루, 이틀, 사흘, 한 주 내내. 나는 감히 그것을 믿지 못했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바로 그때 크로머가 갑자기 다시 거기 서 있지 않을까 속으로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러나 크로머는 사라졌고,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새로 얻은 자유를 미심쩍어하며 나는 여전히 그것을 제대로 믿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프란츠 크로머와 마주쳤다. 크로머는 자일러 골목을 내려오다가 곧장 나와 맞닥뜨렸는데, 나를 보자 움찔하더니 얼굴을 험하게 일그러뜨리고는,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두말없이 휙 돌아서 오던 길로 도로 가 버렸다.

그것은 내게 듣도 보도 못한 순간이었다! 내 원수가 내게서 달아났다! 나의 사탄이 나를 무서워했다! 기쁨과 놀라움이 온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 무렵 데미안이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내가 말했다.

"좋은 아침이야, 싱클레어. 네가 어떻게 지내나 한번 들어 보고 싶었어. 이제 크로머가 너를 가만 내버려 두지, 그렇지?"

"네가 그렇게 한 거야?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도무지 모르겠어. 그 애가 아예 나타나지 않아."

"잘됐네. 혹시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나면(안 그럴 것 같지만, 워낙 뻔뻔한 녀석이니까) 데미안을 생각하라고만 해."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가 그 애한테 싸움을 걸어서 두들겨 팼어?"

"아니, 그런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냥 너하고 이야기하듯이 그 녀석하고도 이야기했을 뿐이야. 그러면서 너를 가만 내버려 두는 게 자기한테 이득이라는 걸 깨우쳐 줄 수 있었지."

"아, 설마 그 애한테 돈을 준 건 아니지?"

"아니, 이 녀석아. 그 길은 네가 이미 가 봤잖아."

내가 아무리 캐물으려 해도 데미안은 몸을 빼고 가 버렸고, 나는 그 애에게 품었던 예전의 그 답답한 감정, 고마움과 꺼림, 감탄과 두려움, 호감과 마음속의 거부감이 기이하게 뒤섞인 감정과 함께 남겨졌다.

나는 머지않아 데미안을 다시 만나서 이 모든 일에 대해, 그리고 카인 이야기에 대해서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리라 마음먹었다.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고마움이란 애초에 내가 믿는 덕목이 결코 아니며, 그것을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나는 생각하기에, 내가 막스 데미안에게 보인 그 철저한 배은망덕에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 애가 나를 크로머의 발톱에서 풀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병들고 망가진 채 살았으리라고 오늘 나는 확신한다. 이 해방을 그때도 나는 이미 내 어린 삶의 가장 큰 체험으로 느꼈지만, 나를 풀어 준 그 사람은 그 애가 기적을 이루어 내자마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쪽에 내버려 두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 배은망덕은 내게 기이하지 않다. 내게 이상한 것은 오직 그때 내가 보인 호기심의 결여뿐이다. 데미안 덕분에 처음 닿게 된 그 비밀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단 하루라도 태연히 계속 살아갈 수 있었으며, 카인에 대해, 크로머에 대해, 독심술에 대해 더 듣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누를 수 있었을까?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랬다. 나는 갑자기 악마의 그물에서 풀려난 나를 보았고, 세상이 다시 밝고 즐겁게 내 앞에 펼쳐진 것을 보았으며, 더는 두려움의 발작과 목을 조르는 가슴 두근거림에 시달리지 않았다. 주문이 풀렸다. 나는 더는 고통받는 저주받은 자가 아니라, 다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내 본성은 되도록 빨리 다시 균형과 평온을 찾으려 했고, 그래서 무엇보다 그 숱한 추하고 위협적인 것을 멀리 밀어내 잊으려 애썼다. 내 죄와 두려움의 그 길고 긴 이야기가 놀랍도록 빨리 기억에서 빠져나갔고, 겉보기에는 아무 흉터도 흔적도 남기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나를 도와주고 구해 준 이를 그만큼 빨리 잊으려 했던 까닭도 오늘 나는 이해한다. 저주받은 그 눈물의 골짜기에서, 크로머 밑에서 겪은 끔찍한 노예살이에서, 나는 다친 영혼의 모든 충동과 힘을 다해 예전에 행복하고 만족했던 곳으로 달아났다. 다시 열린 잃어버린 낙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로, 누이들에게로, 깨끗함의 향기로, 하느님의 마음에 들던 아벨의 경건함으로.

데미안과 짧은 대화를 나눈 바로 이튿날, 되찾은 자유를 마침내 완전히 믿게 되어 더는 다시 빠질까 두렵지 않게 되자, 나는 그토록 자주 간절히 바랐던 일을 했다. 고해를 한 것이다. 나는 어머니에게 가서 자물쇠가 망가지고 돈 대신 놀이용 칩이 든 작은 저금통을 보여 주었고, 내 잘못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사악한 괴롭힘꾼에게 묶여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저금통을 보았고, 달라진 내 눈빛을 보았고, 달라진 내 목소리를 들었고, 내가 나았다는 것을, 내가 어머니에게 돌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벅찬 감정으로 내가 다시 받아들여지는 잔치를, 탕자의 귀향을 치렀다. 어머니는 나를 아버지에게 데려갔고, 이야기는 되풀이되었으며, 물음과 놀라움의 외침이 쏟아졌고, 부모는 둘 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랜 근심에서 풀려나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근사했고, 모든 것이 이야기책에서처럼 되었으며, 모든 것이 놀라운 조화 속으로 풀려 들어갔다.

이 조화 속으로 나는 이제 진정한 열정으로 달아났다. 다시 평화를 찾고 부모의 믿음을 되찾았다는 것을 나는 아무리 누려도 모자랐다. 나는 집안의 모범 소년이 되었고, 어느 때보다 누이들과 많이 놀았으며, 예배 때면 구원받고 회심한 자의 환희에 찬 마음으로 정다운 옛 찬송을 따라 불렀다. 진심이었고,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은 전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내가 데미안을 잊어버린 일을 참되게 설명해 주는 단 하나의 지점이 있다. 나는 데미안에게 고해를 했어야 했다! 그 고해는 덜 그럴싸하고 덜 감동적이었겠지만, 내게는 더 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내 모든 뿌리로 예전의 낙원 같은 세계에 매달렸고, 집에 돌아와 은총 속에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결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았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 애 역시, 크로머와는 달랐지만 그래도 역시, 그 애 역시 유혹하는 자였고, 그 애 역시 나를 두 번째 세계, 악하고 나쁜 세계와 이어 주었는데, 나는 이제 그 세계를 영영 알고 싶지 않았다. 나 자신이 방금 다시 아벨이 된 지금, 나는 아벨을 저버리고 카인을 찬양하는 일을 거들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사정이다. 그러나 속사정은 이랬다. 나는 크로머와 악마의 손에서 구원받았지만, 내 힘과 내 공로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세상의 길을 걸어 보려 했지만, 그 길은 내게 너무 미끄러웠다. 이제 다정한 손 하나가 붙잡아 나를 구해 주자, 나는 더는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어머니의 품으로, 울타리 쳐진 경건하고 온순한 어린 시절의 아늑함 속으로 달려 돌아갔다. 나는 실제보다 더 어리고 더 의존적이고 더 아이답게 굴었다. 크로머에게 매였던 것을 새로운 매임으로 바꾸어야 했다. 혼자서 걸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눈먼 마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옛날의 사랑하는 '밝은 세계'에 매이는 쪽을 골랐다. 그것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데미안 곁에 머물며 그 애에게 나를 맡겨야 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때는 그 애의 낯선 생각을 정당하게 불신해서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두려움일 뿐이었다. 데미안은 부모가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훨씬 더 많은 것을 내게 요구했을 것이고, 부추기고 타이르고 비웃고 빈정거려 가며 나를 더 홀로 서게 하려 했을 것이다. 아, 오늘 나는 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는 길을 걷는 일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반년쯤 뒤에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산책길에 아버지에게 어떤 사람들이 카인을 아벨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무척 놀라더니, 그것은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견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런 생각은 이미 초대 그리스도교 시대에 나타났고 여러 종파에서 가르쳤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를 '카인파'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 물론 이 터무니없는 가르침은 우리의 믿음을 부서뜨리려는 악마의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카인이 옳고 아벨이 그르다고 믿는다면, 거기서 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결론이, 그러니까 성경의 신은 올바르고 유일한 신이 아니라 거짓 신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카인파도 그와 비슷한 것을 가르치고 설교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이단은 오래전에 인류에게서 사라졌으며, 내 학교 동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알게 되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라고 했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그만두라고 나를 엄하게 타일렀다.

주

  1. 1. 창세기 4장 15절의 「표」. 개역개정은 「가인」으로 적으나 이 책은 문학의 관용대로 「카인」으로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