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위대한 개츠비1장
차례
로그인

다시 한번 젤다에게

그렇다면 금빛 모자를 써라, 그것으로 그 여자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높이 뛸 수 있다면, 그 여자를 위해서도 뛰어올라라.

마침내 그 여자가 이렇게 외칠 때까지.

"연인이여, 금빛 모자를 쓴,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이여,

나는 당신을 가져야겠어요!"

토머스 파크 던빌리어스

1장

지금보다 어리고 마음이 여리던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충고를 하나 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아직도 곱씹는다.

"누굴 비판하고 싶어질 때는 말이다." 아버지는 말했다. "세상 사람이 다 너만큼 좋은 조건을 타고나지는 않았다는 걸 기억해라."

아버지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부자는 말수가 적으면서도 이상하게 서로 잘 통하는 사이여서, 나는 그 말에 훨씬 많은 뜻이 담겨 있다는 걸 알아들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그 버릇 덕분에 별난 사람들이 내게 속을 털어놓았고, 덕분에 지겨운 인간들에게 붙들려 시달리기도 했다. 멀쩡한 사람에게 이런 구석이 보이면 비뚤어진 사람들은 금세 알아채고 달라붙기 마련이다. 대학 시절 내가 정치꾼이라는 억울한 소리를 들은 것도 그래서였다. 거칠고 이름 없는 사내들의 은밀한 슬픔을 내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고백은 대부분 내가 청한 게 아니었고, 누가 속을 털어놓으려는 낌새가 보이면 나는 곧잘 자는 척하거나, 딴생각에 잠긴 척하거나, 짐짓 퉁명스럽게 굴었다. 젊은 남자가 털어놓는 속내란, 적어도 그걸 풀어내는 말투란 대개 어디서 빌려온 것이고 감춘 데가 빤히 보이기 마련이니까.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건 끝없이 희망을 품는 일이다. 기본적인 도리를 아는 감각은 사람마다 타고나는 몫이 다르다. 아버지가 짐짓 점잔을 빼며 한 말이고, 나도 점잔을 빼며 되풀이하는 말이다. 그걸 잊어버리면 뭔가 놓칠 것 같아서 나는 아직도 조금 두렵다.

이렇게 내 너그러움을 자랑해놓고 이제 와서 그 너그러움에도 한계가 있다고 털어놓아야겠다. 사람의 행실은 단단한 바위 위에 설 수도 있고 축축한 늪 위에 설 수도 있다. 그런데 어느 선을 넘어가면 나는 그게 무엇 위에 서 있든 상관하지 않게 된다. 지난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세상이 온통 반듯해지기를, 사람들이 다들 줄을 맞춰 서서 영원히 도덕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랐다. 남의 마음속을 특별히 들여다보게 되는 그런 어수선한 경험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오직 개츠비만은 예외였다. 이 책에 이름을 준 그 사내, 내가 꾸밈없이 경멸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바로 그 개츠비만은 그 반작용에서 빠져 있었다. 사람됨이란 게 성공한 몸짓을 끊이지 않고 이어가는 일이라면, 그에게는 어딘가 눈부신 데가 있었다. 삶이 건네는 약속을 알아채는 감각이 남달라서, 만 마일 밖의 지진까지 잡아내는 정밀한 기계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그 예민함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되는 물렁한 감수성과는 전혀 달랐다. 희망을 품는 비범한 재능, 낭만적 감수성(romantic readiness)이었고, 나는 그런 것을 다른 누구에게서도 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개츠비는 결국 괜찮은 사람이었다. 내가 한동안 사람들의 어그러진 슬픔과 숨 가쁜 환희에 마음을 닫아버린 건 개츠비 때문이 아니라, 그를 갉아먹은 것들과 그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돌던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

우리 집안은 삼대째 이 중서부 도시에서 행세깨나 하며 넉넉하게 살아왔다. 캐러웨이 가문은 그런대로 한 문중을 이루고 있고, 우리가 버클루 공작가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집안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 계보를 실제로 연 사람은 할아버지의 형인데, 그는 1851년에 이곳으로 와서 남북전쟁에는 대리인을 사서 내보내고, 지금 아버지가 이어받은 철물 도매업을 시작했다.

나는 이 큰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그를 닮았다고들 한다. 특히 아버지 사무실에 걸린 저 무뚝뚝한 초상화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1915년에 뉴헤이븐을 졸업했다.1 아버지보다 꼭 사반세기 늦은 셈이다. 얼마 뒤에는 세계대전이라고 불리는 저 뒤늦은 게르만족 대이동에 참가했다. 반격전이 어찌나 신났던지 돌아와서는 도무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세상의 따뜻한 중심이던 중서부가 이제는 우주의 너덜너덜한 변두리처럼 보였다. 그래서 동부로 가서 채권업을 배우기로 했다. 아는 사람이 죄다 채권업에 있었으니 독신 남자 하나쯤은 더 먹여 살릴 수 있으리라 싶었다. 고모와 삼촌들은 나를 어느 예비학교에 넣을지 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 일을 두고 의논하더니, 마침내 아주 심각하고 망설이는 얼굴로 "글쎄, 그래, 그러지" 하고 말했다. 아버지가 일 년 치 생활비를 대주기로 했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뤄지다가 1922년 봄에 나는 동부로 왔다. 아주 눌러앉을 작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시내에 방을 얻는 게 맞았다. 그런데 계절이 따뜻했고, 나는 널찍한 잔디밭과 정겨운 나무가 있는 고장에서 막 올라온 참이어서, 사무실의 젊은 친구가 시내로 통근할 만한 교외에 집을 같이 얻자고 했을 때 참 좋은 생각이다 싶었다. 집은 그가 찾아냈다. 한 달에 80달러짜리, 비바람에 시달린 판지 같은 방갈로였는데, 막판에 회사가 그를 워싱턴으로 보내는 바람에 나 혼자 시골로 나가게 되었다. 나에게는 개가 한 마리 있었고, 낡은 닷지 한 대와 핀란드인 가정부가 있었다. 개는 며칠 만에 달아나버렸다. 가정부는 잠자리를 봐주고 아침을 지어주었으며, 전기난로 앞에서 혼자 핀란드말로 무슨 지혜로운 소리를 중얼거리곤 했다.

하루 이틀은 적적했다. 그러다 어느 아침, 나보다도 늦게 이사 온 듯한 남자가 길에서 나를 붙들었다.

"웨스트에그 마을은 어떻게 갑니까?" 그가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길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어느새 적적함이 가셔 있었다. 나는 안내인이었고 길잡이였고 최초의 정착민이었으며, 그 사람은 길 하나 물어본 것만으로 나에게 이 동네의 시민권을 쥐여준 셈이다.

그렇게 햇살이 쏟아지고, 빨리 돌린 영화 속 장면처럼 나무마다 잎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가운데, 나는 여름과 함께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저 낯익은 확신을 품었다.

우선 읽을거리가 잔뜩 있었다. 숨통을 틔워주는 싱그러운 공기에서 끌어낼 건강도 넉넉했다. 나는 은행업과 신용과 투자증권에 관한 책을 열두 권 샀다. 조폐국에서 갓 나온 새 돈처럼 붉고 금빛 나는 책들이 책장에 늘어서서, 마이더스와 모건과 마이케나스만 알던 빛나는 비밀을 펼쳐 보이겠노라 약속했다.2 그 밖에도 여러 책을 읽겠다는 거창한 뜻을 품고 있었다. 대학 시절 나는 제법 문학청년이었다. 한 해는 《예일 뉴스》에 아주 엄숙하고 뻔한 사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제 그런 것들을 내 삶에 다시 불러들여, 모든 전문가 가운데 가장 옹색한 전문가인 저 '균형 잡힌 인간'이 되어볼 참이었다. 그저 말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인생이란 결국 창 하나로 내다볼 때 훨씬 잘 보이는 법이니까.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기묘한 동네에 집을 얻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뉴욕에서 정동쪽으로 뻗어나간 저 가늘고 소란스러운 섬에 있는 동네였다. 그 섬에는 진기한 자연물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별난 땅 모양이 두 군데 있었다. 시내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는 거대한 달걀 두 개가 바다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는데, 윤곽이 서로 똑같은 데다 만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좁은 물길 하나로만 갈라져 있었다. 그 바다가 롱아일랜드해협이었다. 서반구를 통틀어 파도가 가장 잔잔한, 앞마당처럼 널따란 바다였다. 두 땅이 완전한 타원은 아니었다. 콜럼버스 이야기에 나오는 달걀처럼 맞닿는 쪽 끝이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그래도 생김새가 저렇게 닮은 건 머리 위를 나는 갈매기들에게 두고두고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날개 없는 자들에게 더 흥미로운 건 저 둘이 모양과 크기를 빼면 무엇 하나 닮은 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웨스트에그에 살았다. 둘 중에서 말하자면 덜 세련된 쪽이었다. 물론 이건 두 동네 사이의 기괴하고 적잖이 불길한 대비를 담기에는 지극히 겉핥기식 딱지에 지나지 않는다. 내 집은 달걀의 맨 끝, 해협에서 50야드밖에 안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한 철에 12,000달러니 15,000달러니 하는 값에 세를 놓는 거대한 저택 두 채 사이에 낀 집이었다. 오른쪽 집은 어느 기준으로 보나 어마어마했다. 노르망디의 어느 시청을 그대로 본뜬 건물이었다. 한쪽에 탑이 서 있고, 덜 자란 담쟁이가 수염처럼 성글게 덮였지만 그 아래는 티 하나 없이 새것이었으며, 대리석 수영장과 40에이커가 넘는 잔디밭과 정원까지 딸려 있었다. 그게 개츠비의 저택이었다. 아니, 그때는 개츠비 씨를 몰랐으니 그런 이름의 신사가 사는 저택이었다고 해야겠다. 내 집은 볼품없었다. 그래도 볼품없는 축에서도 작은 편이라 남들 눈에 안 띄고 넘어갔다. 덕분에 나는 바다를 볼 수 있었고 이웃집 잔디밭도 얼마쯤 볼 수 있었으며 백만장자들 곁에 산다는 위안까지 누렸다. 이 모두가 한 달에 80달러였다.

그 좁은 물길 건너편에서는 세련된 이스트에그의 흰 궁전들이 물가를 따라 반짝였고, 이 여름의 이야기는 내가 톰 뷰캐넌네로 저녁을 먹으러 차를 몰고 건너간 그 저녁에 비로소 시작된다. 데이지는 나와 육촌뻘이었고 톰은 대학 때부터 알던 사이여서,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시카고에서 두 사람과 이틀을 보내기도 했다.

데이지의 남편은 운동으로 이룬 것이 여럿이지만, 그중에서도 뉴헤이븐 미식축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엔드로 꼽히던 사람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전국구 인물이었다. 스물한 살에 그 좁은 분야의 꼭대기를 찍어버려서, 그 뒤로는 무엇을 해도 맥이 빠지는 그런 부류의 사내였다. 집안은 엄청난 부자였고, 대학 때도 그의 헤픈 씀씀이는 입에 오르내렸다. 그런데 이제는 시카고를 떠나 동부로 옮겨 왔는데, 그 씀씀이가 사람 기를 죽일 정도였다. 이를테면 레이크포리스트에서 폴로 조랑말을 한 무리 끌고 왔다. 내 또래 사내가 그런 짓을 할 만큼 부자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왜 동부로 왔는지는 모른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프랑스에서 일 년을 보냈고, 그다음에는 폴로를 치고 부자들끼리 어울려 지내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았다. 이번에는 아주 자리를 잡는 것이라고 데이지는 전화로 말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데이지의 속마음이야 들여다볼 수 없었으나, 톰은 되찾을 수 없는 어느 미식축구 경기의 그 극적인 소용돌이를 조금은 애틋하게 찾아 헤매며 영영 떠돌 것 같았다.

그리하여 바람이 따뜻하던 어느 저녁, 나는 사실상 거의 알지 못하는 두 옛 친구를 보러 이스트에그로 차를 몰았다. 두 사람의 집은 내 예상보다도 더 화려했다. 물길을 내려다보는, 붉고 흰 조지 왕조풍 식민지 양식의 화사한 저택이었다. 잔디밭은 해변에서 시작해 현관문을 향해 사분의 일 마일을 달려오면서 해시계와 벽돌길과 불타는 화단을 뛰어넘었고, 마침내 집에 다다라서는 달려온 기세를 못 이긴 듯 환한 덩굴이 되어 벽을 타고 올라갔다. 정면은 한 줄로 늘어선 프랑스식 창문이 끊어놓았는데, 금빛을 되비추며 빛나는 그 창들이 바람 따뜻한 오후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앞에 승마복 차림의 톰 뷰캐넌이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다.

톰은 뉴헤이븐 시절과 달라져 있었다. 이제 서른, 몸이 다부지고 머리는 밀짚색이었으며 입매가 굳고 태도가 거만했다. 번들거리는 오만한 두 눈이 얼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래서 늘 공격적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마복의 곱상한 맵시로도 그 몸뚱이의 어마어마한 힘은 감출 수 없었다. 반들거리는 장화를 가득 채우다 못해 맨 위 끈까지 팽팽하게 당기는 듯했고, 얇은 상의 아래 어깨가 움직일 때면 근육 덩어리가 밀려다니는 게 보였다. 온몸의 힘을 한 점에 실어 낼 수 있는 몸, 잔인한 몸이었다.

말할 때의 목소리는 거칠고 쉰 데다 음까지 높아서, 그가 풍기는 까탈스러운 인상을 더했다. 목소리에는 아버지 같은 경멸이 한 자락 배어 있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사람을 대할 때조차 그랬으니, 뉴헤이븐에 그를 뼛속까지 미워한 사내들이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의 태도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내 의견이 최종이라고는 생각하지 마. 내가 너보다 힘이 세고 사내답다고 해서 하는 소리는 아니야." 우리는 4학년 때 같은 클럽에 있었다. 한 번도 가깝게 지낸 적은 없지만, 나는 늘 그가 나를 인정하고 있으며 자기 나름의 거칠고 뻣뻣한 애틋함으로 내가 자기를 좋아해주기를 바란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볕이 드는 현관에서 몇 분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자리 괜찮지." 톰이 말했다. 눈은 쉬지 않고 이리저리 번득였다.

톰이 내 한쪽 팔을 잡아 몸을 돌리더니 넓적한 손을 들어 앞쪽 경치를 죽 훑자, 그 손짓 안에 움푹 꺼진 이탈리아식 정원과, 짙고 향이 강한 장미가 심긴 반 에이커와, 앞바다에서 물결에 부딪히는 뭉툭한 모터보트가 들어왔다.

"석유업자 드메인 거였어." 톰은 정중하면서도 불쑥 나를 다시 돌려세웠다. "안으로 들어가지."

우리는 높다란 복도를 지나 장밋빛으로 환한 공간으로 들어섰다. 양쪽 끝의 프랑스식 창문이 그 방을 집에 아슬아슬하게 붙들어두고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린 채 바깥의 싱그러운 풀밭을 배경으로 희게 빛났다. 풀밭은 집 안까지 조금 자라 들어온 것처럼 보였다. 산들바람이 방을 가로질러 불면서 한쪽 끝의 커튼은 안으로, 다른 쪽 커튼은 밖으로 밀어냈다. 바람은 창백한 깃발처럼 나부끼는 커튼을 웨딩케이크에 크림을 입힌 것 같은 천장 쪽으로 말아 올리더니, 포도줏빛 양탄자 위로 잔물결처럼 번져 가며 바다 위를 지나는 바람처럼 그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방에서 완전히 붙박여 있는 물건은 커다란 소파 하나뿐이었다. 그 위에 젊은 여자 둘이 둥실 얹혀 있었다. 닻줄에 매인 커다란 풍선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둘 다 흰옷 차림이었다. 드레스 자락이 물결치며 나부꼈는데, 방금 집 밖을 한 바퀴 날고 들어와 바람에 떠밀려 도로 내려앉은 것 같았다. 나는 커튼이 채찍처럼 후려치며 탁탁거리는 소리와 벽에 걸린 그림이 앓는 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서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톰 뷰캐넌이 뒤쪽 창문을 닫았고, 방 안에 갇혔던 바람이 잦아들면서 커튼도 양탄자도 젊은 여자 둘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둘 중 어린 쪽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긴 의자 끝자락에 온몸을 쭉 뻗은 채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턱을 조금 치켜들고 있었는데, 떨어지기 쉬운 뭔가를 그 위에 얹고 균형을 잡는 것 같았다. 곁눈으로 나를 보았다 해도 그런 기색은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고, 오히려 내 쪽에서 불쑥 들어와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마터면 중얼거릴 뻔했다.

다른 여자, 데이지는 일어나려는 시늉을 했다. 성의 있는 표정으로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더니 이내 웃었는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사랑스러운 작은 웃음이었고, 나도 따라 웃으며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난 행복해서 마, 마비가 됐어."

데이지는 무슨 재치 있는 말이라도 한 듯이 다시 웃고는 잠시 내 손을 잡은 채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서 나만큼 보고 싶었던 사람은 없다고 약속하는 눈빛. 그게 그 사람 방식이었다. 데이지는 균형을 잡고 있는 저 여자의 성이 베이커라고 나직이 흘리듯 알려주었다. 데이지가 소곤거리는 건 사람들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수작일 뿐이라고 흉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흉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고 그렇다고 매력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베이커 양은 입술을 달싹였고, 알아채기 힘들 만큼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머리를 도로 젖혔는데, 균형을 잡고 있던 그 물건이 조금 흔들려서 가슴이 철렁했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또다시 사과의 말이 내 입가에 떠올랐다. 저렇게 남의 도움 없이 자기 안에서 완결된 모습을 보면 나는 거의 언제나 얼이 빠진 채 감탄하고 만다.

나는 다시 사촌을 바라보았다. 데이지는 낮고 설레는 목소리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귀가 저절로 오르내리며 따라가게 되는 목소리,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표의 배열 같은 목소리였다. 그 얼굴은 슬프면서도 사랑스러웠고 그 안에 환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환한 눈과 환하고 정열적인 입이. 그런데 그 목소리에는 한때 데이지를 마음에 두었던 남자라면 잊기 어려운 들뜸이 있었다. 노래하듯 끌어당기는 힘, 속삭이는 '들어봐', 방금 전까지 즐겁고 신나는 일을 하고 있었으며 다음 한 시간 안에도 즐겁고 신나는 일이 기다린다는 약속이.

나는 동부로 오는 길에 시카고에 하루 들렀던 이야기며, 열댓 사람이 나를 통해 안부를 전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다들 내 얘기 해?" 데이지가 황홀한 목소리로 외쳤다.

"온 동네가 적막강산이야. 차란 차는 죄다 왼쪽 뒷바퀴를 근조 화환처럼 검게 칠했고, 북쪽 해안에서는 밤새도록 곡소리가 그치질 않아."

"근사해라! 톰, 우리 돌아가자. 내일!" 그러더니 데이지는 뜬금없이 덧붙였다. "너 우리 애 좀 봐야 하는데."

"보고 싶어."

"자고 있어. 세 살이야. 한 번도 못 봤지?"

"한 번도."

"그러니까 봐야 한다니까. 걔는……"

방 안을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던 톰 뷰캐넌이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요즘 뭐 하고 지내, 닉?"

"채권 일 해."

"어디서?"

내가 회사 이름을 댔다.

"들어본 적 없는데." 톰이 단정 짓듯 말했다.

그 말이 거슬렸다.

"듣게 될 거야." 나는 짧게 대꾸했다. "동부에 계속 있으면 듣게 돼."

"아, 동부엔 계속 있을 거야. 걱정 마." 톰은 데이지를 흘끗 보았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뭔가 더 있나 살피는 눈치였다. "딴 데서 살면 내가 빌어먹을 멍청이지."

이때 베이커 양이 "그럼요!" 하고 어찌나 불쑥 말했는지 나는 흠칫했다. 내가 방에 들어온 뒤로 그 여자가 뱉은 첫마디였다. 본인도 나만큼이나 놀랐는지 하품을 하더니, 빠르고 능란한 동작 몇 번으로 몸을 일으켜 방 안에 우뚝 섰다.

"몸이 뻣뻣해요." 베이커 양이 투덜거렸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 저 소파에 누워 있었더니."

"나 보고 뭐라 하지 마." 데이지가 받아쳤다. "오후 내내 뉴욕 가자고 꼬드긴 게 난데."

"고맙지만 됐어요." 베이커 양은 방금 식료품실에서 들어온 칵테일 넉 잔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저는 완전히 훈련 중이라서요."

주인은 못 믿겠다는 눈으로 그 여자를 보았다.

"훈련 중이시라!" 톰은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잔 바닥에 겨우 한 방울 남은 것을 털어 내듯이. "도대체 자네가 무슨 수로 일을 해내는지 나는 모르겠어."

나는 베이커 양을 보면서 그 여자가 '해내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나는 그 여자를 보는 게 좋았다. 호리호리하고 가슴이 작은 여자였고 자세가 꼿꼿했는데, 어깨를 뒤로 젖혀 사관생도처럼 상체를 세움으로써 그 꼿꼿함을 더 두드러지게 했다. 창백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고, 볕에 시달린 잿빛 눈이 나를 마주 보았다. 정중하게 맞받는 호기심이 담긴 눈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여자를, 아니면 이 여자의 사진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트에그에 사신다고요." 그 여자가 깔보는 투로 말했다. "거기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거기서 아는 사람이 하나도……"

"개츠비는 아시겠죠."

"개츠비?" 데이지가 캐물었다. "무슨 개츠비?"

내 이웃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저녁 준비가 되었다는 전갈이 오자, 톰 뷰캐넌은 긴장된 팔을 내 팔 밑에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더니, 체커 말을 다른 칸으로 옮기듯 나를 방에서 밀어냈다.

가느다랗고 나른한 몸에 손을 가볍게 허리에 얹고, 두 젊은 여자가 우리를 앞질러 장밋빛 현관으로 나갔는데, 노을을 향해 열린 그곳에는 잦아든 바람 속에서 초 네 자루가 식탁 위에 흔들리고 있었다.

"초는 왜?" 데이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못마땅해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초를 툭툭 꺼버렸다. "2주만 있으면 일 년 중 낮이 제일 긴 날이야." 데이지는 우리 모두를 환하게 바라보았다. "다들 일 년 중 제일 긴 날을 기다리다가 놓쳐버리지 않아? 나는 늘 제일 긴 날을 기다리다가 놓쳐."

"뭐라도 계획을 세워야죠." 베이커 양이 하품을 하며 침대에 들어가듯 식탁 앞에 앉았다.

"그래." 데이지가 말했다. "뭘 계획하지?" 그러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뭘 계획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데이지의 눈길이 겁먹은 표정으로 제 새끼손가락에 딱 멈췄다.

"이것 봐!" 데이지가 하소연했다. "다쳤어."

우리 모두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당신이 그랬어, 톰." 데이지가 나무라듯 말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건 알아. 그래도 당신이 그랬어. 이게 다 짐승 같은 남자랑 결혼한 값이지. 크고 우람하고 덩치만 산만 한……"

"난 그 '덩치'라는 말 질색이야." 톰이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농담이라도 싫어."

"덩치." 데이지가 기어이 되뇌었다.

이따금 데이지와 베이커 양은 동시에 말했다. 나서지 않으면서 실없이 주고받는 그 말은 결코 수다라고 할 것도 못 되었고, 두 사람의 흰 드레스나 아무런 욕망 없는 무심한 눈만큼이나 서늘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있었고 톰과 나를 받아들였으며, 즐겁게 해주려고도, 즐거워해주려고도 딱 예의를 차릴 만큼만 애썼다. 조금 있으면 저녁 식사가 끝나고, 그보다 조금 더 있으면 이 저녁도 끝나서 아무렇지 않게 치워지리라는 걸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서부와는 딴판이었다. 서부에서는 저녁이 끊임없이 어긋나는 기대 속에서, 아니면 그 순간 자체에 대한 순전한 초조함 속에서 한 대목에서 다음 대목으로 서둘러 떠밀려 끝을 향해 갔다.

"너랑 있으면 내가 야만인이 된 것 같아, 데이지." 코르크 냄새가 나지만 그런대로 인상적인 클라레 두 잔째를 마시며 내가 털어놓았다. "농작물 얘기 같은 건 좀 못 해?"

특별한 뜻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뜻밖의 방향으로 받아들여졌다.

"문명이 산산조각 나고 있어." 톰이 사납게 끼어들었다. "난 세상일에 아주 지독한 비관론자가 됐다고. 고더드라는 사람이 쓴 《유색 제국의 발흥》 읽어봤어?"

"아니, 못 읽었는데." 그 어조에 적잖이 놀라며 내가 대답했다.

"훌륭한 책이야. 다들 읽어야 해. 요지는 이거야.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백인종이 아주 물속에 잠겨버린다는 거지. 전부 과학적인 얘기야. 다 입증됐다고."

"톰이 아주 심오해지셨어." 데이지가 생각 없는 서글픔이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긴 단어가 잔뜩 든 깊은 책을 읽으신대. 우리 그 단어가 뭐였더라……"

"이 책들은 다 과학적이라니까." 톰이 짜증스레 데이지를 흘겨보며 우겼다. "이 양반이 전부 계산해놨어. 지배 인종인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안 그러면 저 다른 인종들이 세상을 좌우하게 된다고."

"우리가 눌러버려야지." 데이지가 이글거리는 해를 향해 사납게 윙크하며 속삭였다.

"캘리포니아에 사셔야겠네요……" 베이커 양이 말을 꺼냈지만 톰이 의자에서 육중하게 몸을 뒤척이며 말을 잘랐다.

"요지는 우리가 노르딕이라는 거야. 나도, 너도, 자네도, 그리고……" 아주 짧게 머뭇거린 뒤 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데이지도 끼워주었고, 데이지는 나에게 또 윙크를 했다. "그리고 문명을 이루는 건 다 우리가 만들어냈어. 아, 과학이니 예술이니 그런 것들 말이야. 알겠어?"

톰이 그렇게 몰두하는 데는 어딘가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는데, 예전보다 한층 날이 선 그 자기만족이 이제는 그에게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곧이어 안에서 전화벨이 울리고 집사가 현관을 떠나자, 데이지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 집안 비밀 하나 알려줄게." 데이지가 신이 나서 속삭였다. "집사 코 얘기야. 집사 코 얘기 듣고 싶지?"

"그거 들으려고 오늘 밤 온 거야."

"저 사람이 원래부터 집사는 아니었거든. 뉴욕에서 200명분 은식기를 갖춘 어느 집의 은 닦는 사람이었어. 아침부터 밤까지 은을 닦아야 했는데, 결국 그게 코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 거야……"

"사태가 점점 나빠졌죠." 베이커 양이 거들었다.

"그래. 사태가 점점 나빠져서 결국 그 자리를 그만둬야 했어."

한순간 마지막 햇살이 낭만적인 애정을 담고 데이지의 상기된 얼굴에 내려앉았고, 그 목소리는 내가 숨죽여 듣도록 나를 앞으로 끌어당겼는데, 이윽고 빛이 스러졌다. 빛줄기들은 아쉬움을 못 이겨 머뭇거리며 하나씩 그 얼굴을 떠났다. 해 질 녘 정겨운 거리를 떠나는 아이들처럼.

집사가 돌아와 톰의 귀에 대고 뭐라고 중얼거리자 톰은 얼굴을 찌푸리더니 의자를 밀치고 말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톰이 자리를 비우자 마음속에서 뭔가가 되살아난 듯 데이지는 다시 몸을 기울였고, 목소리가 환하게 노래하듯 울렸다.

"우리 식탁에 네가 앉아 있으니 참 좋다, 닉. 너를 보면 꼭 장미 같아. 완전히 장미야. 안 그래?" 데이지는 확인을 받으려고 베이커 양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장미 같지 않아?"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장미와 손톱만큼도 닮은 데가 없다. 데이지는 그저 즉흥으로 지껄였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사람을 흔드는 온기가 흘러나왔고, 마치 그 숨 가쁘고 설레는 말 한마디 속에 심장이 숨어서 이쪽으로 건너오려 애쓰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냅킨을 식탁에 던지고는 실례한다며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베이커 양과 나는 아무 뜻도 담지 않으려 애쓴 짧은 눈길을 주고받았다. 내가 막 입을 열려는데 그 여자가 화들짝 몸을 세우더니 경고하듯 "쉿!" 했다. 건너편 방에서 낮게 억눌린, 격정 어린 웅얼거림이 들려오자 베이커 양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몸을 기울여 들으려 했다. 그 웅얼거림은 알아들을 만해지려다 말고 잦아들었다가, 흥분해서 치솟았다가, 이내 뚝 그쳤다.

"아까 말씀하신 그 개츠비 씨가 제 이웃인데요……" 내가 말을 꺼냈다.

"조용히요. 무슨 일인지 듣고 싶으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물었다.

"그럼 모르신다는 말씀이에요?" 베이커 양이 정말로 놀라서 말했다. "다들 아는 줄 알았는데."

"저는 모릅니다."

"저기……" 그 여자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톰한테 뉴욕에 여자가 있어요."

"여자가 있다고요?" 나는 멍하니 되뇌었다.

베이커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식사 시간에 전화하지 않을 정도의 염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 그래요?"

내가 그 말뜻을 채 새기기도 전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가죽 부츠가 자박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톰과 데이지가 식탁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어!" 데이지가 팽팽한 명랑함으로 외쳤다.

데이지는 자리에 앉아 베이커 양을, 이어 나를 살피듯 흘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잠깐 밖을 봤는데 바깥이 아주 낭만적이야. 잔디밭에 새가 한 마리 있는데 아무래도 큐너드나 화이트스타 라인을 타고 건너온 나이팅게일 같아.3 저렇게 노래를 하는 걸 보면……" 목소리가 노래하듯 올라갔다. "낭만적이지, 톰?"

"아주 낭만적이지." 그러고는 침울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저녁 먹고 나서 아직 밝으면 마구간에 데려가고 싶은데."

안에서 전화벨이 깜짝 놀라게 울렸다. 데이지가 톰을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젓자 마구간 이야기는, 실은 모든 이야기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식탁에서 보낸 그 마지막 5분의 부서진 조각들 가운데 내가 기억하는 것은 초에 다시 불이 붙었다는 것, 아무 의미도 없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모두를 똑바로 쳐다보고 싶으면서 동시에 어떤 눈길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데이지와 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어지간히 단단한 냉소를 익힌 듯한 베이커 양조차, 다섯 번째 손님이나 다름없던 그 전화벨의 날카로운 쇳소리를 머릿속에서 온전히 지워내지는 못했으리라 싶다. 어떤 기질의 사람에게는 이 상황이 흥미롭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내 본능은 당장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말 이야기는 두말할 것 없이 다시 나오지 않았다. 톰과 베이커 양은 몇 발짝쯤 되는 땅거미를 사이에 두고 서재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갔는데,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한 시신 곁에서 밤을 새우러 가는 사람들 같았다. 나는 관심 있는 척하면서도 귀는 좀 어두운 척하며 이어진 베란다를 지나 앞쪽 현관까지 데이지를 따라갔다. 짙은 어스름 속에서 우리는 등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데이지는 제 얼굴의 사랑스러운 윤곽을 더듬어보기라도 하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눈길은 서서히 우단 같은 땅거미 속으로 옮겨 갔다. 격한 감정이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게 보여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혀줄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딸 이야기였다.

"우리 서로 잘 모르지, 닉." 데이지가 불쑥 말했다. "사촌인데도 말이야. 내 결혼식에도 안 왔잖아."

"전쟁에서 못 돌아왔을 때야."

"그렇지." 데이지가 머뭇거렸다. "저기, 나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어, 닉. 그래서 뭐든 꽤 냉소적이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기다렸지만 데이지는 더 말하지 않았고, 잠시 뒤 나는 다소 맥없이 딸 이야기로 돌아갔다.

"이제 말도 하고 밥도 먹고 다 하겠네."

"응, 그럼." 데이지는 넋 놓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있잖아, 닉. 그 애가 태어났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줄게. 들어볼래?"

"듣고 싶어."

"내가 이런저런 것들을 어떻게 여기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그 애가 태어난 지 한 시간도 안 됐을 때였어. 톰은 어디 있었는지 하느님만 아시지. 나는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완전히 버림받은 기분이었고, 간호사한테 대뜸 아들이냐 딸이냐 물었어. 딸이라기에 고개를 돌리고 울었지. '그래.' 내가 말했어. '딸이라서 다행이야. 그리고 바보였으면 좋겠어. 이 세상에서 여자애가 될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나은 건 그거니까. 예쁘고 조그만 바보.'

"그러니까 난 어차피 다 끔찍하다고 생각해." 데이지는 확신에 찬 투로 말을 이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 제일 앞서간다는 사람들은 다. 그리고 난 알아. 안 가본 데 없고 안 본 것 없고 안 해본 것 없거든." 눈길이 도전하듯 주위를 훑었다. 어딘가 톰을 닮은 눈길이었다. 그러고는 짜릿한 경멸을 담아 웃었다. "세련됐지. 맙소사, 나 정말 세련됐어!"

그 목소리가 뚝 끊겨 더 이상 내 주의를, 내 믿음을 붙들지 않게 된 순간, 나는 방금 그 말의 근본적인 불성실함을 느꼈다.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마치 이 저녁 전체가 나에게서 한몫의 감정을 받아내려는 어떤 속임수였던 것처럼. 나는 기다렸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데이지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에 완연한 능글맞은 미소를 띠고 나를 보았는데, 자기와 톰이 속한 어지간히 고상한 비밀 결사의 회원증을 방금 내보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안에서는 진홍빛 방이 불빛으로 활짝 피어 있었다. 톰과 베이커 양은 긴 소파의 양 끝에 앉아 있었고, 베이커 양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를 소리 내어 읽어주고 있었다. 억양 없이 웅얼거리는 낱말들이 서로 이어 붙어 사람을 달래는 가락이 되었다. 등불은 톰의 장화 위에서는 밝게, 베이커 양의 가을 낙엽 같은 노란 머리 위에서는 흐릿하게 빛났고, 가느다란 팔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 위를 따라 반짝였다.

우리가 들어서자 베이커 양이 손을 들어 우리를 잠시 잠자코 있게 했다.

"다음 호에 계속." 베이커 양은 잡지를 탁자에 던지며 말했다.

무릎을 안절부절 움직이며 몸이 제 존재를 주장했고, 베이커 양은 일어섰다.

"열 시네." 천장에서 시각을 찾아낸 듯한 말투였다. "착한 아이는 잘 시간."

"조던이 내일 시합에 나가." 데이지가 설명했다. "웨스트체스터에서."

"아, 조던 베이커 씨였군요."

이제야 그 얼굴이 낯익었던 까닭을 알았는데, 애슈빌과 핫스프링스와 팜비치의 스포츠계를 담은 수많은 사진 화보에서 그 기분 좋게 깔보는 표정이 나를 내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비난조의 언짢은 이야기였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오래전에 잊어버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베이커 양이 나직이 말했다. "여덟 시에 깨워줘."

"일어나기만 한다면."

"일어날게. 안녕히 가세요, 캐러웨이 씨. 또 봬요."

"그럼, 또 보고말고." 데이지가 못을 박았다. "실은 내가 중매를 좀 서볼까 해. 자주 놀러 와, 닉. 내가 어떻게든 둘을 엮어줄게. 왜 있잖아, 실수인 척 이불장에 둘이 가둬놓는다든가, 배에 태워서 바다로 밀어버린다든가, 뭐 그런 거……"

"안녕히 주무세요." 베이커 양이 계단에서 외쳤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괜찮은 애야." 잠시 뒤 톰이 말했다. "저렇게 전국을 쏘다니게 두면 안 되는데."

"누가 못하게 하는데?" 데이지가 차갑게 물었다.

"집안에서."

"집안이라고 해봐야 천 살쯤 먹은 고모 하나야. 게다가 닉이 돌봐줄 거잖아, 그렇지, 닉? 저 애 이번 여름에 주말마다 여기 와서 지낼 거야. 가정적인 분위기가 아주 도움이 될 것 같아."

데이지와 톰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뉴욕 사람이야?" 내가 얼른 물었다.

"루이빌. 우리 새하얀 소녀 시절을 거기서 같이 보냈지. 우리 아름답고 새하얀……"

"베란다에서 닉하고 마음을 터놓고 얘기 좀 나눴나?" 톰이 불쑥 캐물었다.

"내가?" 데이지가 나를 보았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노르딕 인종 얘기를 한 것 같아. 응, 분명히 그랬어. 어쩌다 그 얘기가 슬금슬금 나와서, 정신 차려보니까……"

"닉, 들리는 말을 다 믿진 마." 톰이 나에게 충고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들었다고 가볍게 대꾸했고, 몇 분 뒤 집에 가려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문까지 나를 배웅하고는 환한 네모난 불빛 속에 나란히 섰고, 내가 시동을 걸자 데이지가 다짜고짜 외쳤다. "잠깐!"

"물어본다는 걸 깜빡했는데 중요한 거야. 너 서부에서 어떤 여자애랑 약혼했다던데."

"맞아." 톰이 상냥하게 거들었다. "약혼했다고 들었어."

"헛소문이야. 난 너무 가난해."

"그래도 우린 들었어." 데이지가 우겼다. 다시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모습이 나를 놀라게 했다. "세 사람한테서 들었으니까 사실이겠지."

물론 나는 무슨 말인지 알고 있었지만 약혼 비슷한 것도 한 적이 없었고, 소문이 결혼 예고를 대신 내주었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가 동부로 온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소문 때문에 오랜 친구를 안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소문에 떠밀려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두 사람이 이렇게 관심을 보이니 조금 마음이 움직였고, 손 닿지 않는 부자처럼만 보이던 사람들이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차를 몰고 나오면서 나는 혼란스러웠고 조금 역겨웠다. 내가 보기에 데이지는 아이를 안고 당장 그 집을 뛰쳐나와야 했다. 하지만 그 사람 머릿속에 그런 뜻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톰으로 말하자면, 그가 '뉴욕에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책 한 권 때문에 우울해졌다는 사실에 비하면 오히려 덜 놀라웠다. 톰은 무언가에 떠밀려 케케묵은 사상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제 튼튼한 몸뚱이 하나만 믿던 그 오만이 이제는 명령하는 데 익숙한 그의 마음을 더는 채워 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길가 술집 지붕 위에도, 새 빨간 주유기가 불빛 웅덩이 속에 나앉은 길가 정비소 앞에도 이미 여름이 깊어 있었다. 웨스트에그의 내 집에 이르러서는 차를 헛간에 넣고, 마당에 버려진 잔디 롤러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요란하고 환한 밤이 남았다. 나무에서는 날갯짓 소리가 났고, 대지가 풀무를 활짝 열어 개구리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동안 오르간 소리 같은 것이 끊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고양이의 그림자가 달빛을 가로질러 아른거렸고, 그것을 보려고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님을 알았다. 50피트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의 형체가 이웃집 저택의 그늘에서 빠져나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은빛 후춧가루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유로운 몸짓과 잔디를 딛고 선 저 안정된 자세로 보아, 우리 동네 하늘 가운데 어디까지가 제 몫인지 가늠하러 개츠비 씨 본인이 나온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불러보기로 했다. 저녁 자리에서 베이커 양이 그의 이름을 꺼냈으니 인사를 트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그러나 나는 부르지 않았다. 그가 혼자 있는 것으로 족하다는 기색을 문득 내비쳤기 때문이다. 그는 기묘한 몸짓으로 어두운 물을 향해 두 팔을 뻗었고,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나는 그가 떨고 있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바다 쪽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아주 작고 아득한 초록 불빛(the green light) 하나가 있을 뿐이었는데, 어느 선착장 끝일지도 몰랐다. 개츠비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사라지고 없었고, 나는 다시 그 어수선한 어둠 속에 혼자였다.

주

  1. 1. 뉴헤이븐(New Haven)은 예일 대학교가 있는 도시. 예일 출신들은 학교 이름 대신 도시 이름으로 모교를 가리켰다.

  2. 2. 마이더스는 손대는 것마다 금으로 변하게 한 프리기아의 왕, 모건(J. P. Morgan)은 당대 미국 금융계의 거물, 마이케나스는 고대 로마의 부호이자 문예 후원자.

  3. 3. 큐너드(Cunard)와 화이트스타(White Star)는 당시 대서양을 오가던 대표적인 여객선 회사. 타이태닉호가 화이트스타 소속이었다. 미국에 없는 나이팅게일이 유럽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는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