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해협에서는 안개 경적이 쉴 새 없이 신음했고, 나는 반쯤 앓는 사람처럼 뒤척이며 기괴한 현실과 사납고 무서운 꿈 사이를 오갔다. 새벽녘 택시 한 대가 개츠비네 진입로를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에게 해 줄 말이, 경고해 둘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날이 밝으면 이미 늦을 것 같았다.
잔디밭을 가로질러 가 보니 현관문은 아직 열려 있었고, 개츠비는 홀의 탁자에 기대선 채 낙담 때문인지 졸음 때문인지 몸이 축 늘어져 무거워 보였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가 힘없이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는데, 네 시쯤 데이지가 창가로 나와서 잠깐 서 있더니 불을 껐어요."
그날 밤 담배를 찾아 넓은 방들을 뒤지고 다닐 때만큼 그 집이 거대해 보인 적은 없었다. 우리는 커다란 천막 같은 커튼들을 밀어젖히고 전등 스위치를 찾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어두운 벽을 더듬어 나갔는데, 한 번은 내가 유령 같은 피아노 건반 위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물에 첨벙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했다. 어디에나 영문 모를 만큼 먼지가 수북했고, 여러 날 창 한 번 열지 않은 것처럼 방마다 퀴퀴한 냄새가 났다. 처음 보는 탁자 위에서 담배 보관함을 찾아냈는데, 안에는 묵어서 바싹 마른 담배 두 개비가 들어 있었다. 우리는 응접실의 프랑스식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어둠 속으로 담배 연기를 내보내며 앉아 있었다.
"어디든 좀 떠나 계세요." 내가 말했다. "경찰이 그 차를 찾아낼 게 거의 확실해요."
"지금 떠나라고요, 올드 스포트?"
"애틀랜틱시티에 가서 일주일쯤 지내시든가, 아니면 몬트리올로 올라가시든가요."
그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데이지가 어떻게 할지 알기 전에는 도저히 데이지를 두고 떠날 수 없었으니까. 그는 마지막 남은 희망 같은 것을 움켜쥐고 있었고, 나는 차마 그 손을 억지로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댄 코디와 함께한 젊은 날의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는데, 톰의 단단한 악의에 부딪혀 '제이 개츠비'가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고 오래도록 남몰래 이어 온 그 호화로운 연극도 끝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무엇이든 거리낌 없이 인정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어 한 것은 데이지 이야기였다.
데이지는 개츠비가 처음으로 알게 된 '좋은 집안' 아가씨였다. 남에게 밝히지 않은 이런저런 신분으로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닿은 적은 있었지만, 그럴 때면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철조망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데이지는 가슴이 뛰도록 탐나는 여자였다. 처음에는 캠프 테일러의 다른 장교들과 어울려, 나중에는 혼자서 데이지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아름다운 집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집에 숨 막힐 듯한 긴장이 서린 까닭은 거기 데이지가 산다는 데 있었다. 훈련소에 있는 제 천막이 개츠비에게 그렇듯, 그 집은 데이지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 집에는 무르익은 신비가 감돌았다. 위층에는 다른 어느 집보다 아름답고 서늘한 침실들이 있을 것만 같았고, 복도마다 즐겁고 눈부신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벌써 곰팡내를 풍기며 라벤더와 함께 장롱 깊숙이 넣어 둔 연애가 아니라, 싱싱하게 숨 쉬는 연애, 올해 나온 번쩍이는 자동차와 꽃이 채 시들지도 않은 무도회의 향기가 나는 연애의 기척이 있었다. 이미 많은 남자가 데이지를 사랑했다는 것도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 때문에 개츠비의 눈에는 데이지의 값어치가 더 올라갔다. 그 남자들이 집 안 어디에나 머물러 있는 것 같았고, 아직도 떨림이 가시지 않은 감정들이 그림자와 메아리가 되어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하지만 개츠비는 자기가 데이지의 집에 와 있는 것이 어마어마한 우연 덕분이라는 걸 알았다. 제이 개츠비로서 맞이할 앞날이 아무리 찬란하다 해도, 지금은 과거도 없고 돈 한 푼 없는 젊은이일 뿐이었고, 군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망토는 언제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릴지 몰랐다. 그래서 주어진 시간을 한껏 이용했다.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게걸스럽게, 염치도 없이 손에 넣었다. 그러다 마침내 바람 한 점 없는 10월의 어느 밤, 데이지를 가졌다. 데이지의 손을 만질 자격조차 실은 없었으므로, 바로 그 때문에 가졌다.
개츠비는 자기 자신을 경멸했을 수도 있었다. 거짓 구실로 데이지를 가진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있지도 않은 수백만 달러를 내세웠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일부러 데이지가 마음을 놓게 만들었고, 자기가 데이지와 거의 같은 계층 출신이라고, 데이지를 넉넉히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게 내버려 두었다. 사실 그에게는 그럴 형편이 전혀 없었다. 뒤에서 든든히 받쳐 줄 번듯한 집안도 없었고, 얼굴 없는 정부가 변덕을 한 번 부리기만 하면 세상 어디로든 날려 갈 신세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경멸하지 않았고, 일도 상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마 처음에는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겨서 떠날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성배를 좇는 길에 제 몸을 바쳐 버린 뒤였다. 데이지가 특별하다는 건 알았지만, '좋은 집안' 아가씨가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데이지는 부유한 제 집 속으로, 부유하고 충만한 제 삶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개츠비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그는 자기가 데이지와 결혼했다고 느꼈다. 그뿐이었다.
이틀 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숨이 가빴던 쪽은, 어쩐지 배신당한 쪽은 개츠비였다. 데이지네 현관은 별빛으로 환했는데, 그 별빛마저 돈을 주고 사들인 호사 같았다. 데이지가 그에게로 몸을 돌리자 등나무 소파가 멋들어지게 삐걱거렸고, 그는 그 묘하고 사랑스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데이지는 감기에 걸린 탓에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잠기고 매혹적이었다. 개츠비는 부가 가두어 간직해 주는 젊음과 신비를, 수많은 옷가지의 싱그러움을, 그리고 가난한 이들의 뜨거운 몸부림 위에서 은처럼 빛나며 안전하고 도도하게 서 있는 데이지를 벅차도록 실감했다.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말로는 다 못 합니다, 올드 스포트. 한동안은 데이지가 차라리 저를 차 버렸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더군요. 데이지도 저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요. 데이지는 제가 아는 게 많은 줄 알았습니다. 제가 아는 게 자기가 아는 것과 달랐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저는 제 야망하고는 한참 먼 데서 시시각각 더 깊이 사랑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 아무래도 좋아졌습니다. 앞으로 제가 무얼 할 건지 데이지한테 이야기해 주는 게 더 즐거운데, 굳이 큰일을 해서 뭐 하겠습니까?"
해외로 떠나기 전 마지막 오후, 개츠비는 데이지를 품에 안고 오랫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추운 가을날이었다. 방에는 불이 타고 있었고 데이지의 두 뺨은 발그레했다. 이따금 데이지가 몸을 움직이면 그는 팔을 조금 고쳐 둘렀고, 한 번은 데이지의 검고 윤기 흐르는 머리칼에 입을 맞추었다. 이튿날로 다가온 긴 이별에 대비해 깊은 추억 하나를 남겨 주려는 듯, 그 오후는 한동안 두 사람을 고요하게 해 주었다. 사랑을 나눈 한 달 동안, 데이지가 말없는 입술로 그의 윗옷 어깨를 스칠 때만큼, 잠든 사람을 어루만지듯 개츠비가 데이지의 손가락 끝을 가만히 만질 때만큼 두 사람이 가까웠던 적은 없었고, 그토록 깊이 마음이 오간 적도 없었다.
전쟁에서 개츠비는 눈부시게 잘 해냈다. 전선에 나가기 전에 이미 대위였고, 아르곤 전투를 치른 뒤에는 소령으로 진급해 사단 기관총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휴전이 되자 미친 듯이 귀국하려고 애썼지만, 무슨 착오인지 오해인지 때문에 엉뚱하게도 옥스퍼드로 가게 되었다. 이제 애가 타기 시작했다. 데이지의 편지에서 신경이 곤두선 절망 같은 것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데이지로서는 개츠비가 왜 올 수 없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깥세상의 압력이 데이지를 짓누르고 있었다. 데이지는 그를 만나고 싶었고, 곁에 있는 그를 느끼고 싶었고, 결국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안심을 얻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데이지는 젊었고, 그 인공적인 세계에는 난초와, 기분 좋고 명랑한 속물근성과, 한 해의 박자를 정하며 삶의 슬픔과 은근한 암시를 새 곡조에 담아내는 악단들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밤새도록 색소폰들이 '빌 스트리트 블루스(Beale Street Blues)'1의 가망 없는 넋두리를 울부짖는 사이, 금빛 은빛 무도화 백 켤레가 반짝이는 먼지를 쓸며 스텝을 밟았다. 차를 마시는 잿빛 오후에도 이 나직하고 달콤한 열기로 쉼 없이 고동치는 방들이 늘 있었고, 싱그러운 얼굴들은 서글픈 호른 소리에 날려 무도장 바닥을 떠도는 장미 꽃잎처럼 이리저리 흘러 다녔다.
데이지는 계절을 따라 이 어스름한 세계를 다시 누비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루에도 대여섯 남자와 대여섯 번씩 약속을 잡았고, 침대 곁 바닥에서 야회복의 구슬 장식과 시폰 자락이 시들어 가는 난초들과 뒤엉켜 있는 채로 새벽녘에야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그러는 내내 데이지의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결정을 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데이지는 제 삶이 지금 당장 모양을 갖추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결정은 어떤 힘이, 사랑이든 돈이든 의심할 여지 없는 실리든, 가까이 손 닿는 곳에 있는 힘이 내려 주어야 했다.
봄이 한창일 때 톰 뷰캐넌이 나타나면서 그 힘은 모양을 갖추었다. 톰은 몸집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건실하게 묵직했고, 데이지는 우쭐했다. 틀림없이 얼마간의 갈등이 있었을 테고, 얼마간의 안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 편지가 개츠비에게 닿았을 때 그는 아직 옥스퍼드에 있었다.
이제 롱아일랜드에 새벽이 와 있었다. 우리는 아래층의 나머지 창문들을 마저 열며 돌아다녔고, 집 안은 잿빛에서 금빛으로 바뀌어 가는 빛으로 가득 찼다. 나무 그림자 하나가 이슬 위로 불쑥 드리웠고, 푸른 잎사귀들 사이에서 유령 같은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공기 속에는 바람이라 하기도 어려울 만큼 느릿하고 기분 좋은 움직임이 있었다. 서늘하고 아름다운 하루가 되리라는 약속이었다.
"데이지는 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츠비가 창가에서 돌아서더니 따지듯 나를 보았다. "기억하셔야 합니다, 올드 스포트. 아까 오후에 데이지는 몹시 흥분해 있었어요. 그 사람이 데이지가 겁을 먹도록 그런 얘기들을 늘어놓았으니까요. 저를 무슨 싸구려 사기꾼처럼 보이게 만들었지요. 그 바람에 데이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거의 몰랐습니다."
그는 침울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물론 두 사람이 막 결혼했을 무렵에는 데이지가 그 사람을 잠깐, 정말 잠깐 사랑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때도 저를 더 사랑했겠지만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더니 그는 불쑥 묘한 말을 꺼냈다.
"어쨌거나 그건 그저 개인적인 일이었을 뿐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 말을 달리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그가 이 일을 두고 품은 관념에는 도저히 잴 수 없는 강렬함이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 말고는.
개츠비가 프랑스에서 돌아왔을 때 톰과 데이지는 아직 신혼여행 중이었다. 그는 남은 군대 봉급을 마지막 한 푼까지 털어, 비참하지만 뿌리칠 수 없는 여행길에 올라 루이빌로 갔다. 거기서 일주일을 머물며, 11월의 밤을 가로질러 두 사람의 발소리가 나란히 또각거리던 거리들을 걸었고, 데이지의 흰 차를 타고 달려가던 외진 곳들을 다시 찾았다. 데이지의 집이 언제나 다른 집들보다 신비롭고 화사해 보였듯이, 데이지가 떠나고 없는데도 그가 떠올리는 그 도시에는 서글픈 아름다움이 배어 있었다.
조금만 더 애써 찾았더라면 데이지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고, 자기가 데이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거라고 느끼며 그는 루이빌을 떠났다. 그는 이제 빈털터리여서 보통 객차를 탔는데, 객차 안은 더웠다. 객차 끝의 트인 승강대로 나가 접이식 의자에 앉자, 역이 미끄러지듯 멀어지고 낯선 건물들의 뒷모습이 지나갔다. 이윽고 기차는 봄 들판으로 나섰고, 노란 전차 한 대가 잠시 기차와 경주하듯 나란히 달렸다. 그 전차 안에는 언젠가 무심한 거리에서 데이지 얼굴의 창백한 마법을 보았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철로가 휘어지자 기차는 이제 해를 등지고 달렸다. 점점 낮게 가라앉는 해는, 데이지가 숨 쉬며 살던 도시, 이제 사라져 가는 그 도시 위로 축복을 내리듯 제 빛을 넓게 펼치는 것 같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한 가닥 공기라도 움켜쥐려는 듯이, 데이지가 자기를 위해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 그곳의 한 조각이라도 건져 내려는 듯이.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흐려진 눈앞을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렸고, 그는 그 가장 싱그럽고 가장 좋은 부분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아침을 다 먹고 현관으로 나간 것은 아홉 시였다. 밤사이 날씨가 확 달라져서 공기에서 가을 내음이 났다. 개츠비가 예전에 부리던 하인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은 정원사가 계단 아래로 다가왔다.
"오늘 수영장 물을 빼려고 합니다, 주인님. 이제 곧 낙엽이 지기 시작할 텐데, 그러면 꼭 배수관이 말썽을 부리거든요."
"오늘은 하지 마세요." 개츠비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미안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올드 스포트, 제가 여름 내내 저 수영장을 한 번도 안 썼다는 거 아십니까?"
나는 시계를 보고 일어섰다.
"기차 시간까지 12분 남았네요."
시내에 가고 싶지 않았다. 일다운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을 상태였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나는 개츠비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 기차를 놓치고, 다음 기차까지 놓치고 나서야 겨우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전화할게요." 마침내 내가 말했다.
"꼭 그러십시오, 올드 스포트."
"정오쯤 전화할게요."
우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데이지도 전화하겠지요." 그는 내가 그렇다고 맞장구쳐 주기를 바라는 듯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겠죠."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는 악수를 했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산울타리에 막 다다르려는데 문득 무언가가 생각나서 돌아섰다.
"그 사람들, 다 썩어 빠진 족속이에요." 나는 잔디밭 너머로 소리쳤다. "그 빌어먹을 무리를 몽땅 합쳐도 당신 하나만 못해요."
나는 그 말을 한 것이 두고두고 다행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내가 건넨 칭찬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개츠비는 먼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얼굴 가득 그 빛나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우리가 줄곧 그 사실을 두고 신이 나서 한통속이었다는 듯이. 화려한 분홍색 넝마 같은 그 양복이 흰 계단 위에 밝은 빛깔의 점 하나를 찍어 놓았고, 나는 석 달 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그의 저택에 처음 갔던 밤을 떠올렸다. 그날 잔디밭과 진입로는 주인이 속으로 썩었으리라 짐작하는 얼굴들로 붐볐고, 그는 저 계단에 서서 썩을 줄 모르는 제 꿈을 감춘 채 손님들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그동안 베풀어 준 환대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는 늘 그 일로 그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안녕히 계세요." 내가 소리쳤다. "아침 잘 먹었어요, 개츠비."
시내에 올라가서는 끝도 없이 많은 주식의 시세를 한동안 목록으로 옮겨 적어 보려 했지만, 이내 회전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어 버렸다. 정오가 되기 직전 전화벨에 잠이 깼고, 나는 이마에 땀이 솟은 채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조던 베이커였다. 조던은 자주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다. 호텔이며 클럽이며 남의 집을 오가는 조던의 행방이 워낙 일정치 않아서, 달리는 연락이 닿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평소 전화선을 타고 건너오는 조던의 목소리는 싱그럽고 서늘해서, 초록 골프장에서 골프채가 떠 올린 잔디 한 조각이 사무실 창문으로 날아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그 목소리가 거칠고 메마르게 들렸다.
"데이지네 집에서 나왔어." 조던이 말했다. "지금 헴프스테드인데, 오후에 사우샘프턴으로 내려갈 거야."
데이지의 집을 나온 건 아마 눈치 있는 처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게 거슬렸고, 이어진 조던의 말에 몸이 굳어 버렸다.
"어젯밤엔 나한테 별로 다정하지 않더라."
"그런 판국에 그게 무슨 상관이었겠어?"
잠깐 말이 끊겼다. 그러다가 조던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보고 싶어."
"나도 보고 싶어."
"사우샘프턴에 가지 말고 오후에 시내로 들어갈까?"
"아니…… 오늘 오후는 안 될 것 같아."
"그럼 됐어."
"오늘 오후는 정말 안 돼. 이런저런……"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말을 주고받다가, 어느 순간 뚝 끊기듯 더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누가 먼저 딸깍 소리가 나도록 수화기를 내려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만은 안다. 설령 이 세상에서 다시는 조던과 말을 나누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날만큼은 찻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분 뒤 개츠비의 집에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어서 네 번이나 다시 걸었고, 마침내 짜증이 난 교환원이 디트로이트에서 걸려 올 장거리 전화 때문에 회선을 비워 두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시간표를 꺼내 세 시 오십 분 기차에 작은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생각을 좀 해 보려 했다. 막 정오였다.
그날 아침 기차로 잿더미 곁을 지날 때, 나는 일부러 객차 반대편으로 건너가 앉았다. 그 근처에는 하루 종일 호기심 어린 사람들이 몰려 있을 것 같았다. 꼬마들은 흙먼지 속에서 거뭇한 얼룩을 찾아다니고, 말 많은 사내 하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 떠들어 대다가 그 이야기가 본인에게조차 점점 실감이 나지 않아 더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될 테고, 그러면 머틀 윌슨의 비극적인 업적도 잊히고 말 터였다. 이제 조금 거슬러 올라가, 전날 밤 우리가 떠난 뒤 정비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머틀의 동생 캐서린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날 밤에는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는 제 원칙을 깬 모양인지, 캐서린은 도착했을 때 술에 취해 정신이 흐리멍덩해서 구급차가 벌써 플러싱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다. 사람들이 겨우 그걸 납득시키자 캐서린은 곧바로 기절해 버렸다. 이 일에서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대목은 그것 하나뿐이라는 듯이. 친절해서였는지 호기심 때문이었는지, 누군가 캐서린을 자기 차에 태우고 언니의 시신이 간 길을 뒤따라갔다.
자정이 한참 지나도록, 얼굴이 바뀌어 가는 구경꾼들이 정비소 앞으로 물결처럼 밀려들었다 빠져나가기를 되풀이했고, 그동안 조지 윌슨은 안쪽 소파에서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한동안은 사무실 문이 열려 있어서, 정비소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저도 모르게 안을 흘끗 들여다보았다. 마침내 누군가 이건 너무한다며 문을 닫았다. 미케일리스와 다른 사내 몇이 윌슨 곁을 지켰다. 처음에는 너덧 명, 나중에는 두세 명이었다. 그보다 더 나중에는 미케일리스가 제 가게로 돌아가 커피 한 주전자를 끓여 오는 동안, 마지막까지 남은 낯선 사내에게 15분만 더 있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그 뒤로 미케일리스는 새벽까지 윌슨과 단둘이 그곳에 있었다.
세 시쯤 되자 윌슨이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말의 결이 달라졌다. 한결 조용해지더니 노란 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노란 차가 누구 것인지 알아낼 방법이 있다고 선언하듯 말하더니, 두어 달 전 아내가 얼굴에 멍이 들고 코가 퉁퉁 부은 채 시내에서 돌아온 적이 있다고 불쑥 털어놓았다.
그러나 제 입으로 그 말을 하고 나자 윌슨은 움찔하더니, 다시 신음하는 목소리로 "오, 하느님!" 하고 부르짖기 시작했다. 미케일리스는 서툴게나마 윌슨의 정신을 딴 데로 돌려 보려 했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조지? 자, 잠깐만 좀 가만히 앉아서 내 말에 대답해 봐요. 결혼한 지 얼마나 됐어요?"
"12년 됐어요."
"애는 가져 본 적 있어요? 자, 조지, 가만 좀 있어 봐요. 묻잖아요. 애를 가져 본 적 있어요?"
딱딱한 갈색 딱정벌레들이 흐릿한 전등에 자꾸 툭툭 부딪쳤다. 바깥 길로 자동차가 요란하게 내달릴 때마다, 미케일리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몇 시간 전에 서지 않고 가 버린 그 차처럼 들렸다. 시신이 누워 있던 작업대에 얼룩이 져 있어서 정비소 쪽으로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미케일리스는 사무실 안만 불편하게 서성였는데, 날이 새기 전에 그 방에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다 알게 될 정도였다. 이따금은 윌슨 곁에 앉아 좀 더 진정시켜 보려고 애썼다.
"가끔 나가는 교회 있어요, 조지? 오랫동안 안 나갔어도 괜찮아요. 내가 교회에 전화해서 신부님더러 좀 와 달라구 하면, 그분이 조지하고 얘기를 좀 나눠 줄 수도 있잖아요, 네?"
"다니는 데 없어요."
"이럴 때를 위해서라도 교회는 있어야 해요, 조지. 전에는 교회에 나가 봤을 거 아니에요. 결혼식도 교회에서 올리지 않았어요? 이봐요, 조지, 내 말 좀 들어 봐요. 교회에서 결혼하지 않았어요?"
"그건 옛날 일이에요."
대답하느라 애쓰는 사이 몸을 흔들던 박자가 흐트러졌고, 윌슨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빛바랜 두 눈에 반쯤은 뭔가 아는 듯하고 반쯤은 어리둥절한 그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거기 서랍 좀 봐요." 윌슨이 책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 서랍요?"
"저 서랍, 저거요."
미케일리스는 손에 가장 가까운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가죽에 은실을 땋아 넣은 작고 값비싼 개 목줄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아하니 새로 산 물건 같았다.
"이거요?" 미케일리스가 목줄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윌슨은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오후에 찾았어요. 집사람이 그걸 두고 뭐라고 둘러대려고 했는데, 뭔가 수상하다는 걸 알았어요."
"부인이 그걸 샀다는 말이에요?"
"얇은 종이에 싸서 자기 서랍장 위에 올려 뒀더라고요."
미케일리스는 거기서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지 못했고, 윌슨의 아내가 개 목줄을 샀을 만한 이유를 열두어 가지나 늘어놓았다. 그런데 어쩌면 윌슨은 그런 설명 가운데 몇 가지를 전에 머틀에게서 이미 들었는지도 몰랐다. 윌슨이 다시 "오, 하느님!" 하고 속삭이기 시작했으니까. 달래던 사람은 미처 꺼내지 못한 설명 몇 가지를 허공에 남겨 둔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럼 그놈이 집사람을 죽였네요." 윌슨이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이 딱 벌어졌다.
"누가요?"
"알아낼 방법이 있어요."
"조지, 지금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어요." 친구가 말했다. "너무 힘든 일을 겪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예요. 아침까지 가만히 좀 앉아 있어 봐요."
"그건 살인이에요."
"사고였어요, 조지."
윌슨은 고개를 저었다. 두 눈이 가늘어지고 입이 살짝 벌어지면서, 다 안다는 듯한 "흥!"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난 알아요." 윌슨이 딱 잘라 말했다. "난 사람을 잘 믿는 축이라, 누구한테도 나쁜 맘 같은 건 안 먹어요. 그래도 한번 알게 된 건 확실히 알아요. 그 차에 탄 남자예요. 집사람은 그 남자한테 말을 하려고 뛰어나갔는데, 그놈은 차를 세우려 들지 않았어요."
미케일리스도 그 장면을 보았지만 거기에 무슨 특별한 뜻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윌슨 부인이 어느 특정한 차를 세우려 했다기보다는 남편에게서 달아나던 중이었다고 믿었다.
"부인이 어떻게 그런 여자였겠어요?"
"속을 알 수 없는 여자예요." 윌슨은 그걸로 대답이 된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아……"
윌슨은 다시 몸을 흔들기 시작했고, 미케일리스는 목줄을 손에 쥐고 배배 꼬며 서 있었다.
"혹시 내가 전화해서 불러 줄 만한 친구 없어요, 조지?"
덧없는 기대였다. 미케일리스는 윌슨에게 친구가 없으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윌슨이라는 사람은 제 아내 하나 채워 주기에도 모자랐다. 조금 뒤 방 안에 변화가 생긴 것을, 창가로 푸른 기운이 살아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미케일리스는 반가웠다. 다섯 시쯤 되자 바깥이 제법 푸르러져서 전등을 탁 꺼도 될 만했다.
윌슨의 초점 잃은 눈길이 잿더미 쪽으로 향했는데, 그 위에서는 작은 잿빛 구름들이 야릇한 모양을 지으며 희미한 새벽바람에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집사람한테 얘기했어요." 한참 말이 없던 끝에 윌슨이 중얼거렸다. "날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못 속인다고요. 집사람을 창가로 데려가서……" 윌슨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뒤쪽 창가로 걸어가더니, 얼굴을 유리에 바짝 대고 기대섰다.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하느님은 아셔. 당신이 한 짓을 하나도 빠짐없이. 날 속일 수는 있어도 하느님은 못 속여!'"
그 뒤에 서 있던 미케일리스는, 스러져 가는 밤 속에서 창백하고 거대하게 막 떠오른 T. 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을 윌슨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
"하느님은 다 보고 계세요." 윌슨이 되뇌었다.
"저건 광고판이에요." 미케일리스가 달래듯 일러 주었다. 무언가에 떠밀리듯 미케일리스는 창가를 떠나 방 안을 되돌아보았다. 그러나 윌슨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댄 채 그 자리에 오래도록 서서, 어스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섯 시쯤 되자 미케일리스는 녹초가 되었고, 밖에서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자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간밤에 함께 윌슨을 지키다가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미케일리스는 아침을 세 사람분 지었고, 그 사내와 둘이서 먹었다. 윌슨은 이제 한결 조용했다. 미케일리스는 잠을 자러 집에 갔다가 네 시간 뒤에 깨어 서둘러 정비소로 돌아왔는데, 윌슨은 사라지고 없었다.
윌슨은 내내 걸어서 움직였는데, 나중에 그 발자취를 추적해 보니 포트루스벨트로, 다시 개즈힐(Gad's Hill)로 이어져 있었다. 개즈힐에서는 먹지도 않을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한 잔을 샀다. 몹시 지쳐서 느릿느릿 걸었던 모양이다. 개즈힐에 이른 것이 정오였으니까. 거기까지는 그가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밝히기가 어렵지 않았다. "좀 미친 사람처럼 구는" 남자를 보았다는 사내아이들도 있었고, 길가에 선 남자가 이상한 눈으로 노려보더라는 운전자들도 있었다. 그러다 세 시간 동안 윌슨의 모습이 사라졌다. 경찰은 윌슨이 미케일리스에게 "알아낼 방법이 있다"고 했다는 말을 근거로, 그 세 시간 동안 그 일대 정비소를 하나하나 돌며 노란 차를 수소문했으리라고 짐작했다. 한편으로 그를 보았다고 나서는 정비소 사람은 끝내 하나도 없었으니, 어쩌면 윌슨에게는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낼 더 쉽고 확실한 방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시 반에 윌슨은 웨스트에그에 있었고, 거기서 누군가에게 개츠비의 집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니까 그 무렵 윌슨은 이미 개츠비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두 시에 개츠비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누구든 전화를 하면 수영장으로 알려 달라고 집사에게 일러두었다. 그러고는 차고에 들러 여름 내내 손님들을 즐겁게 해 주던 공기 매트리스를 꺼냈고, 운전사가 거들어 바람을 넣었다.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붕 없는 차를 밖으로 내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른쪽 앞 흙받이를 손봐야 할 형편이었으니까.
개츠비는 매트리스를 어깨에 메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한 번은 멈춰 서서 매트리스를 조금 고쳐 멨는데, 운전사가 거들어 드릴까 하고 묻자 고개를 젓고는 이내 노랗게 물들어 가는 나무들 사이로 사라졌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집사는 잠도 자지 않고 네 시까지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가 온다 해도 전해 줄 사람이 없어진 지 한참 뒤까지. 나는 개츠비 자신도 전화가 오리라고 믿지 않았고, 어쩌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정말 그랬다면, 그는 예전의 그 따뜻한 세계를 잃어버렸다고, 단 하나의 꿈을 안고 너무 오래 살아온 대가를 비싸게 치렀다고 느꼈을 것이다. 섬뜩한 나뭇잎들 사이로 낯선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것이고, 장미란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겨우 막 생겨난 풀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얼마나 날것 그대로인지 깨닫고 몸을 떨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 실재하지 않으면서 물질이기만 한 세계. 가엾은 유령들이 공기처럼 꿈을 들이마시며 우연에 떠밀려 떠도는 곳…… 윤곽 없는 나무들 사이로 그를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오던, 저 잿빛의 환영 같은 형상처럼.
울프심이 뒤를 봐주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운전사는 총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그는 그 소리를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나는 역에서 곧장 개츠비의 집으로 차를 몰았는데, 그 집에서 누군가 불안해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허둥지둥 현관 계단을 뛰어 올라간 그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알았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거의 아무 말도 없이 우리 넷, 운전사와 집사와 정원사와 나는 서둘러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한쪽 끝에서 새로 흘러든 물줄기가 반대쪽 끝의 배수구를 향해 밀려가느라, 물이 희미하게,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움직이고 있었다. 물결의 그림자라고 하기도 어려운 잔물결을 타고, 짐을 실은 매트리스가 수영장을 따라 제멋대로 떠내려갔다. 수면에 주름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작은 바람 한 줄기로도, 우연한 짐을 싣고 가던 그 우연한 행로는 흐트러졌다. 나뭇잎 한 무더기가 와 닿자 매트리스는 천천히 돌면서, 컴퍼스의 다리처럼 물 위에 가느다란 붉은 원을 그렸다.
우리가 개츠비를 떠메고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뒤에야 정원사가 조금 떨어진 풀밭에서 윌슨의 시신을 발견했고, 그리하여 번제2는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