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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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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이 무렵 어느 날 아침, 뉴욕에서 온 야심만만한 젊은 기자 하나가 개츠비의 집 문 앞에 나타나 무슨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할 말이라니, 무엇에 관해서 말입니까?" 개츠비가 정중하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뭐든 발표하실 성명 같은 거요."

영문 모를 5분이 지나고서야 드러난 바로는, 그 남자는 신문사에서 오가는 말 가운데 개츠비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 무슨 일과 엮여서 나온 이름인지는 밝히려 들지 않았거나 본인도 잘 몰랐다. 그날은 쉬는 날이었는데도 그는 갸륵하게 제 발로 나서서 '한번 보려고'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되는대로 찔러본 셈이었지만 기자의 직감은 옳았다. 그 집에서 대접을 받고는 그것만으로 그의 과거에 관한 권위자가 되어 버린 수백 명이 여기저기 퍼뜨린 탓에, 개츠비의 악명은 여름 내내 불어나 이제 조금만 더 나가면 신문에 날 판이었다. '캐나다로 통하는 지하 파이프라인'1 같은 당대의 전설들이 그에게 들러붙었고, 그가 실은 집이 아니라 집처럼 생긴 배에 살면서 롱아일랜드 해안을 따라 몰래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는 이야기도 끈질기게 떠돌았다. 이렇게 지어낸 이야기들이 노스다코타의 제임스 개츠에게 왜 흐뭇한 일이었는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제임스 개츠. 그것이 그의 진짜 이름, 적어도 법적인 이름이었다. 이름을 바꾼 것은 열일곱 살 때, 그것도 그의 출세가 첫발을 떼는 것을 지켜본 바로 그 순간, 그러니까 슈피리어호에서 가장 음흉한 모래톱 위에 댄 코디의 요트가 닻을 내리는 광경을 본 순간이었다. 그날 오후 찢어진 초록색 저지에 캔버스 바지 차림으로 호숫가를 어슬렁거리던 사람은 제임스 개츠였지만, 노 젓는 배를 빌려 요트 투올로미호까지 저어 가서 바람이라도 한 번 들이치면 30분 안에 배가 두 동강 날 수도 있다고 코디에게 알려 준 사람은 이미 제이 개츠비였다.

내 생각에 그 이름은 그때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부모는 게으르고 변변찮은 농사꾼이었는데, 그의 상상력은 한 번도 그들을 제 부모로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사실 롱아일랜드 웨스트에그의 제이 개츠비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플라톤적 관념에서 솟아났다. 그는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이 말에 무슨 뜻이 있다면 글자 그대로의 뜻이다. 그러니 그는 아버지의 일2을 해야 했다. 거대하고 속되며 겉만 번지르르한 아름다움을 섬기는 일을. 그래서 열일곱 살 소년이 지어낼 법한 딱 그런 제이 개츠비를 지어냈고, 그 관념에 끝까지 충실했다.

일 년 넘게 그는 슈피리어호 남쪽 기슭을 따라 떠돌며 조개를 캐거나 연어를 잡거나, 그 밖에도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며 살았다. 볕에 그을려 단단해져 가는 몸은 반은 사납고 반은 느긋한 그 상쾌한 나날의 노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갔다. 일찍 여자를 알았으나 여자들이 떠받들어 버릇을 망쳐 놓는 바람에 도리어 여자를 경멸하게 되었는데, 어린 처녀들은 뭘 몰라서였고 나머지 여자들은 그가 걷잡을 수 없는 자기도취 속에서 당연하게 여기던 일들을 두고 호들갑을 떨어서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서는 늘 거센 소요가 일었다. 밤이면 잠자리까지 더없이 기괴하고 황당한 공상들이 따라붙었다. 세면대 위에서 시계가 째깍거리고 바닥에 뒤엉켜 널린 옷가지를 달이 젖은 빛으로 흠뻑 적시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형언할 수 없이 현란한 우주 하나가 저절로 실을 자아내듯 풀려 나왔다. 밤마다 그 공상의 무늬에 무언가를 덧대다 보면 이윽고 졸음이 어느 선명한 장면 위로 내려앉아 그 장면을 망각의 품에 끌어안았다. 한동안 이런 몽상은 그의 상상력이 빠져나갈 숨구멍이 되어 주었으니, 현실이란 실은 현실이 아니라는 흡족한 암시였고 세상이라는 반석이 요정의 날개 위에 든든히 세워져 있다는 약속이었다.

장차 누릴 영광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그는 몇 달 전 미네소타 남부의 작은 루터교 대학인 세인트올라프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보낸 2주 동안 그는 그 학교가 제 운명의 북소리에, 아니 운명 그 자체에 사납도록 무관심한 데 낙담했고, 학비를 벌려고 떠맡은 청소부 일을 경멸했다. 그러고는 다시 슈피리어호로 흘러 돌아왔고, 댄 코디의 요트가 기슭 가까운 얕은 물에 닻을 내린 그날에도 여전히 할 일을 찾고 있었다.

그때 코디는 쉰 살이었다. 네바다의 은광이, 유콘이, 1875년 이래 금속을 좇아 일어난 온갖 광풍이 빚어낸 사내였다. 몬태나 구리를 사고팔아 몇 곱절의 백만장자가 되었을 무렵에는 몸은 튼튼했지만 정신은 흐리멍덩해지기 직전이었고, 이를 눈치챈 셀 수 없이 많은 여자가 그의 돈을 우려내려 들었다. 신문기자 엘라 케이는 코디의 약해진 틈을 파고들어 맹트농 부인3 노릇을 하다가 끝내 그를 요트에 태워 바다로 내보냈다. 그리 향기롭지 못한 그간의 곡절은 1902년, 부풀리기 좋아하는 신문들 덕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지나치게 손님을 반기는 해안들을 따라 5년째 떠돌던 코디가 리틀걸만(Little Girl Bay)에 제임스 개츠의 운명으로 나타났다.

노를 쉬며 난간을 두른 갑판을 올려다보는 젊은 개츠에게, 그 요트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화려함이었다. 짐작건대 그는 코디를 보고 웃었을 것이다. 자기가 웃으면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걸 그즈음에는 이미 알아냈을 테니까. 아무튼 코디는 몇 가지를 물었고(그 가운데 한 질문이 갓 지은 그 이름을 끌어냈다), 이 젊은이가 눈치 빠르고 야심이 터무니없이 크다는 걸 알았다. 며칠 뒤 코디는 그를 덜루스로 데려가 파란 윗옷 한 벌과 흰 즈크 바지 여섯 벌, 요트 모자 하나를 장만해 주었고, 투올로미호가 서인도 제도와 바버리 해안4을 향해 떠날 때 개츠비도 함께 떠났다.

그는 이렇다 할 직함 없이 코디 개인에게 고용된 몸이라, 코디 곁에 있는 동안 사무장, 항해사, 선장, 비서, 심지어 간수 노릇까지 번갈아 맡았다. 술 깬 댄 코디는 술 취한 댄 코디가 머지않아 무슨 흥청망청한 짓을 벌일지 알았으므로, 그런 사태에 대비해 개츠비를 점점 더 믿고 의지했다. 이 관계는 5년 동안 이어졌고, 그동안 배는 대륙을 세 바퀴 돌았다. 어느 날 밤 보스턴에서 엘라 케이가 배에 오르고 일주일 뒤 댄 코디가 주인 된 도리도 없이 덜컥 죽어 버리지만 않았더라면, 그 관계는 한없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개츠비의 위층 침실에 걸려 있던 코디의 초상을 나는 기억한다. 머리가 희끗하고 혈색이 불콰한 데다 굳고 텅 빈 얼굴을 한 그 사내는, 미국이 지나온 어느 한 시기에 변경의 사창가와 술집에 들끓던 야만스러운 폭력을 동부 해안으로 도로 실어 온 개척 시대의 난봉꾼이었다. 개츠비가 술을 그토록 조금 마신 것도 따지고 보면 코디 때문이었다. 흥청대는 파티가 무르익으면 여자들이 개츠비의 머리칼에 샴페인을 문질러 바르는 일이 이따금 있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술을 멀리하는 버릇을 들였다.

그리고 그가 유산을 물려받은 것도 코디에게서였다. 25,000달러였다. 그러나 그 돈을 받지는 못했다. 자기를 겨냥해 쓰인 법률상의 술수가 무엇이었는지 끝내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수백만 달러 가운데 남은 돈은 고스란히 엘라 케이에게 넘어갔다. 그에게 남은 것은 기막히게도 제격인 교육이었고, 제이 개츠비의 막연한 윤곽에는 어느새 살이 올라 한 사람의 실체가 갖추어져 있었다.

개츠비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지만, 그의 내력을 두고 처음 떠돌던, 털끝만큼도 사실이 아닌 그 터무니없는 소문들을 깨뜨려 놓고 싶어서 여기에 적어 둔다. 게다가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혼란에 빠져 있던 때, 그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믿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무렵이었다. 그래서 개츠비가 말하자면 한숨 돌리던 이 짧은 멈춤을 틈타 이런 오해들을 치워 두려 한다.

내가 그의 일에 얽혀 들던 것도 그 무렵 잠시 멈추었다. 몇 주 동안 나는 개츠비를 보지도, 전화로 목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대개 뉴욕에서 조던과 이리저리 쏘다니며 노망기가 든 조던의 고모에게 잘 보이려고 애썼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일요일 오후 그의 집에 건너갔는데, 도착한 지 2분도 안 되어 누군가가 한잔하자며 톰 뷰캐넌을 데리고 들어왔다. 당연히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정말로 놀라운 건 그런 일이 그때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말을 타고 온 일행은 세 사람이었다. 톰과 슬론이라는 남자, 그리고 갈색 승마복을 입은 예쁜 여자였는데, 여자는 전에도 그 집에 와 본 적이 있었다.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현관 앞에 선 개츠비가 말했다. "이렇게 들러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 사람들이 그런 인사에 신경이나 썼을까!

"어서 앉으십시오. 담배나 시가 태우시지요." 그는 부지런히 방 안을 돌아다니며 벨을 눌러 댔다. "마실 것을 금방 내오겠습니다."

톰이 와 있다는 것만으로 그는 몹시 동요했다. 그러나 톰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온 목적이 그것뿐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므로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대접하기 전까지는 어차피 마음을 놓지 못했을 것이다. 슬론 씨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레모네이드라도? 아니요, 됐습니다. 샴페인 조금?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고맙지만…… 죄송합니다……

"오시는 길은 즐거우셨습니까?"

"이 근방은 길이 아주 좋더군요."

"아무래도 자동차들이……"

"그렇죠."

개츠비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방금 처음 보는 사람처럼 소개를 받은 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에 어디선가 뵌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뷰캐넌 씨."

"아, 그럼." 톰은 무뚝뚝하게나마 예의를 차려 말했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게 뻔했다. "만났었지. 아주 잘 기억하고말고."

"2주쯤 전에요."

"맞아. 여기 닉하고 같이 있었지."

"부인을 압니다." 개츠비가 거의 공격적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톰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 근처 살아, 닉?"

"바로 옆집이야."

"그래?"

슬론 씨는 대화에 끼지 않고 거만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고 있었고, 여자 역시 아무 말이 없었는데, 하이볼 두 잔을 비우고 나더니 뜻밖에도 살갑게 굴기 시작했다.

"다음 파티에는 우리 다 같이 올게요, 개츠비 씨." 여자가 제안했다. "어때요?"

"물론이지요. 와 주시면 저야 기쁘지요."

"거 좋겠군요." 슬론 씨가 고마운 기색도 없이 말했다. "자…… 슬슬 집에 가 봐야겠는데."

"서두르지 마십시오." 개츠비가 붙잡았다. 이제 그는 평정을 되찾았고, 톰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저녁이라도……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시지요? 뉴욕에서 다른 분들이 들를지도 모르니까요."

"저녁은 저희 집에 와서 드세요." 부인이 열성스럽게 말했다. "두 분 다요."

'두 분'에는 나도 들어 있었다. 슬론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그가 말했다. 그 여자에게만 한 말이었다.

"진심이에요." 부인이 우겼다.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자리도 넉넉하고요."

개츠비가 어쩔까 묻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는 가고 싶었고, 슬론 씨가 자기를 못 오게 하기로 작정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저는 못 갈 것 같네요." 내가 말했다.

"그럼 개츠비 씨는 오세요." 부인이 이번에는 개츠비에게만 공을 들이며 졸랐다.

슬론 씨가 여자의 귀에 입을 바짝 대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지금 출발하면 안 늦어요." 부인이 들으란 듯 큰 소리로 우겼다.

"저는 말이 없습니다." 개츠비가 말했다. "군대에서는 말을 탔지만 말을 사 본 적은 없어서요. 제 차로 뒤따라가야겠군요.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남은 우리는 현관으로 걸어 나갔고, 거기서 슬론과 그 부인은 한쪽으로 비켜서서 열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 친구 정말 올 모양이네." 톰이 말했다. "저 여자가 자기 오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모르나?"

"여자 쪽에서 오라고 하잖아."

"저 여자 집에서 큰 만찬이 있는데, 저 친구는 가 봤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야." 톰이 얼굴을 찌푸렸다. "저 친구가 대체 어디서 데이지를 만난 건지 모르겠군. 정말이지, 내 생각이 구식인지는 몰라도 요즘 여자들은 너무 쏘다녀서 영 마음에 안 들어. 별별 해괴한 놈들을 다 만나고 다닌다니까."

갑자기 슬론 씨와 그 부인이 계단을 내려가 말에 올랐다.

"가자고." 슬론 씨가 톰에게 말했다. "늦었어. 가야 해." 그러고는 나에게 말했다. "우린 못 기다리고 갔다고 그 사람한테 좀 전해 주겠어요?"

톰과 나는 악수를 했고 나머지는 서로 쌀쌀하게 고개만 까딱했는데, 그들이 빠른 걸음으로 말을 몰아 진입로를 내려가 8월의 무성한 잎 그늘 아래로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개츠비가 모자와 얇은 외투를 손에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톰은 데이지가 혼자 쏘다니는 게 확실히 마음에 걸렸던 모양으로, 바로 다음 토요일 밤에는 데이지와 함께 개츠비의 파티에 왔다. 그날 저녁 유난히 숨 막히는 기운이 감돌았던 건 어쩌면 톰이 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데, 그해 여름 개츠비가 연 파티들 가운데 그 파티만 유독 기억에 도드라진다. 같은 사람들, 적어도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고, 샴페인도 똑같이 넘쳐 났으며, 온갖 빛깔과 온갖 음조가 뒤섞인 소란도 똑같았지만, 공기 속에는 무언가 불쾌한 것이, 전에는 없던 날 선 기운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게 느껴졌다. 아니면 그저 내가 익숙해져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새 웨스트에그를 그 나름의 기준과 그 나름의 거물들을 갖춘,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세계로, 누구에게 뒤진다는 의식이 없기에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세계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제 데이지의 눈을 통해 그곳을 다시 보고 있었던 셈이다. 제 나름대로 애써 적응해 온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다시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서글프다.

두 사람은 해 질 녘에 도착했는데, 우리가 반짝이는 수백 명 사이로 거닐며 나아가는 동안 데이지의 목소리는 목 안에서 소곤소곤 온갖 재주를 부렸다.

"난 이런 게 너무 설레." 데이지가 속삭였다. "오늘 저녁 아무 때나 나한테 키스하고 싶어지면, 닉, 말만 해. 기꺼이 자리를 마련해 줄게. 내 이름만 대면 돼. 아니면 초록 카드를 내밀든가. 내가 초록 카드를 나눠 주는 중이……"

"둘러봐요." 개츠비가 권했다.

"둘러보고 있어요. 정말 근사한……"

"이름만 들어 보신 분들 얼굴이 많이 보이실 겁니다."

톰의 오만한 눈이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

"우린 별로 나다니질 않아서." 톰이 말했다. "실은 여기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막 생각하던 참이야."

"저분은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개츠비가 흰 자두나무 아래 위엄 있게 자리 잡은, 눈부시고 사람이라기보다는 난초에 가까운 여자를 가리켰다. 톰과 데이지는 지금껏 유령처럼 화면 속에만 있던 영화계 명사를 알아볼 때 으레 따라오는 그 묘하게 비현실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그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워요." 데이지가 말했다.

"저분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남자가 그 감독이고요."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격식을 차려 이 무리 저 무리로 옮겨 다녔다.

"뷰캐넌 부인…… 그리고 뷰캐넌 씨……"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가 덧붙였다. "폴로 선수이십니다."

"아, 아니야." 톰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난 아니라고."

그러나 개츠비는 그 말의 울림이 마음에 들었던 게 분명했다. 그날 저녁 내내 톰은 '폴로 선수'로 불렸으니까.

"유명한 사람을 이렇게 많이 만나 본 건 처음이에요." 데이지가 탄성을 질렀다. "그 남자 좋던데요. 이름이 뭐였죠? 코가 좀 파르스름하던 사람이요."

개츠비는 그게 누구인지 일러 주면서 군소 영화 제작자라고 덧붙였다.

"아무튼 난 그 사람이 좋았어요."

"폴로 선수 노릇은 좀 사양하고 싶은데." 톰이 기분 좋게 말했다. "이 유명한 사람들은 그냥…… 그러니까, 망각 속에서 구경하는 편이 좋겠어."

데이지와 개츠비는 춤을 추었다. 개츠비가 우아하고 점잖은 폭스트롯을 추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나는데, 그가 춤추는 모습은 그때 처음 보았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은 한가로이 우리 집으로 건너가 30분 동안 계단에 앉아 있었고, 그동안 나는 데이지의 부탁대로 정원에 남아 망을 보았다. "불이 나거나 물난리가 날지도 모르잖아." 데이지가 이유를 댔다. "아니면 하느님이 무슨 조화를 부리실지도 모르고."

톰이 제 망각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드러낸 건 우리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을 무렵이었다. "저쪽 사람들하고 먹어도 괜찮겠지?" 그가 말했다. "웬 친구가 아주 웃기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거든."

"그래, 가." 데이지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주소라도 적어 두고 싶으면 여기 내 조그만 금색 연필 있어."…… 잠시 뒤 데이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여자애가 '천하긴 해도 예쁘다'고 내게 말했고, 나는 개츠비와 단둘이 보낸 30분을 빼면 데이지가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우리가 앉은 식탁은 유난히 술기운이 오른 자리였다. 그건 내 탓이었다. 개츠비는 전화를 받으러 불려 갔고, 나는 불과 2주 전에 바로 이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렸으니까. 그러나 그때 나를 즐겁게 했던 것이 이제는 공기 속에서 곪아 가고 있었다.

"좀 어때요, 베데커 양?"

질문을 받은 아가씨는 내 어깨에 기대 푹 쓰러지려다 번번이 실패하던 참이었다. 그 물음에 아가씨는 몸을 곧추세우고 눈을 떴다.

"뭐어?"

내일 이 동네 클럽에서 같이 골프를 치자며 데이지를 조르던, 몸집이 크고 굼뜬 여자가 베데커 양을 두둔하고 나섰다.

"아, 이제 괜찮아요. 칵테일을 대여섯 잔 마시면 늘 저렇게 소리를 질러 대거든요. 술은 좀 멀리하라고 내가 늘 말하는데."

"멀리한다니까." 피고가 맥없이 우겼다.

"네가 소리 지르는 게 들려서 내가 여기 시벳 박사님한테 그랬잖아. '박사님, 도와주셔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야 얘도 고마워하겠지." 또 다른 친구가 고마운 기색도 없이 말했다. "근데 얘 머리를 수영장에 처박는 바람에 드레스가 흠뻑 젖었잖아."

"난 머리를 수영장에 처박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질색이야." 베데커 양이 웅얼거렸다. "뉴저지에서 한번은 사람들이 날 물에 빠뜨려 죽일 뻔했다니까."

"그러니까 술을 멀리해야지." 시벳 박사가 받아쳤다.

"사돈 남 말 하시네!" 베데커 양이 사납게 소리쳤다. "당신 손 떨리잖아. 당신한테는 절대 수술 안 받을 거야!"

그런 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거의 마지막 장면은 데이지와 나란히 서서 그 영화감독과 그의 '스타'를 지켜보던 모습이다. 두 사람은 여전히 흰 자두나무 아래 있었는데, 창백하고 가느다란 달빛 한 줄기가 사이에 끼어 있을 뿐 얼굴이 거의 맞닿아 있었다. 문득 그 감독이 이만큼 가까워지려고 저녁 내내 아주 천천히 여자 쪽으로 몸을 기울여 왔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그는 마지막으로 한 치를 더 숙이더니 여자의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난 저 여자 좋아." 데이지가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것 같아."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데이지의 비위를 거슬렀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게 몸짓이 아니라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데이지는 웨스트에그에, 브로드웨이가 롱아일랜드의 한 어촌에 씨를 뿌려 낳아 놓은 이 전례 없는 '장소'에 질겁했다. 낡은 완곡어법의 굴레 밑에서 들썩이는 그 날것의 활력에, 그리고 이곳 주민들을 무(無)에서 무로 가는 지름길로 몰아대는 너무도 노골적인 운명에 질겁했다. 데이지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바로 그 단순함 속에서 무언가 끔찍한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이 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함께 현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이 앞쪽은 어두웠고, 환한 문 하나만이 10제곱피트쯤 되는 빛을 부드럽고 까만 새벽 속으로 쏘아 보내고 있었다. 이따금 위층 옷방 블라인드에 그림자 하나가 어른거리다가 다른 그림자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끝없이 이어지는 그림자들의 행렬이 보이지 않는 거울 앞에서 연지를 바르고 분을 두드렸다.

"대체 이 개츠비라는 작자는 뭐 하는 사람이야?" 톰이 불쑥 따져 물었다. "무슨 거물 밀주업자라도 되나?"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어?" 내가 물었다.

"들은 게 아니야. 내가 짐작한 거지. 이런 신흥 부자들은 상당수가 그냥 거물 밀주업자야. 너도 알잖아."

"개츠비는 아니야." 내가 짧게 잘라 말했다.

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진입로의 자갈이 그의 발밑에서 자그락자그락 밟혔다.

"하긴, 이런 동물원을 끌어모으느라 어지간히 용을 썼겠지."

산들바람이 데이지의 모피 깃에 서린 잿빛 안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우리가 아는 사람들보다는 재미있잖아." 데이지가 애써 말했다.

"그렇게 재미있어 보이진 않던데."

"재미있었다니까."

톰이 웃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여자애가 찬물로 샤워 좀 시켜 달라고 했을 때 데이지 얼굴 봤어?"

데이지가 음악에 맞춰 쉰 듯하면서도 리듬을 타는 속삭임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낱말 하나하나에서 전에는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없을 의미를 끌어냈다. 가락이 높아지면 목소리는 그 가락을 따라가며 음역이 낮은 여자 목소리들이 흔히 그러듯 달콤하게 갈라졌고, 음이 바뀔 때마다 데이지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마법이 조금씩 공기 속으로 흘러넘쳤다.

"초대도 안 받고 오는 사람이 많아." 데이지가 불쑥 말했다. "그 여자애도 초대받은 게 아니었어. 그냥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데, 그 사람은 너무 점잖아서 싫단 소리를 못 하는 거야."

"그 작자가 누군지, 뭘 해서 먹고사는지 알고 싶어." 톰이 고집했다. "그리고 꼭 알아내 볼 생각이야."

"지금 당장 말해 줄 수 있어." 데이지가 대답했다. "약국을 몇 군데 했었대.5 아주 여러 군데. 혼자 힘으로 일으킨 거래."

늑장을 부리던 리무진이 그제야 진입로를 굴러 올라왔다.

"잘 자, 닉." 데이지가 말했다.

데이지의 눈길이 나를 떠나 불 밝힌 계단 꼭대기를 찾았는데, 거기 열린 문으로는 그해에 유행한 깔끔하고 서글픈 작은 왈츠 '새벽 세 시(Three O'Clock in the Morning)'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쨌거나 개츠비의 파티에는 바로 그 격식 없는 무심함 속에, 데이지의 세계에는 전혀 없는 낭만적인 가능성들이 있었다. 저 위, 그 노래 속의 무엇이 데이지를 다시 안으로 부르는 것 같았을까? 어슴푸레하고 헤아릴 길 없는 이 시간들 속에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믿기지 않는 손님이, 한없이 드물고 경탄할 만한 누군가가 찾아올지도 몰랐다. 정말로 눈부신 어느 젊은 아가씨가 나타나 개츠비를 한 번 싱그럽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법 같은 만남의 한순간만으로, 흔들림 없던 그 5년의 헌신을 지워 버릴지도 몰랐다.

그날 밤 나는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개츠비가 손이 빌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해서, 나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한밤의 수영 패거리가 몸은 식고 기분은 들뜬 채 검은 해변에서 뛰어 올라올 때까지, 머리 위 손님방들의 불이 다 꺼질 때까지 정원을 서성거렸다. 마침내 그가 계단을 내려왔을 때, 볕에 그은 얼굴 살갗은 여느 때와 달리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눈은 빛나면서도 지쳐 있었다.

"데이지는 마음에 안 들어 했어요." 그가 대뜸 말했다.

"당연히 좋아했죠."

"마음에 안 들어 했어요." 그가 고집했다. "즐겁지 않았던 거예요."

그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가 말로 다 할 수 없이 낙담해 있음을 짐작했다.

"데이지가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가 말했다. "이해시키기가 어려워요."

"파티 얘기예요?"

"파티요?" 그는 손가락을 탁 튕겨 그동안 자기가 열었던 파티를 모조리 날려 버렸다. "올드 스포트, 파티는 중요하지 않아요."

개츠비는 데이지가 톰에게 가서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보다 덜한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데이지가 그 한마디로 4년을 지워 버리고 나면, 두 사람은 좀 더 현실적인 조치들을 정할 수 있을 터였다. 그중 하나는, 데이지가 자유로운 몸이 되면 두 사람이 루이빌로 돌아가 데이지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계획이었다. 꼭 5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그런데 데이지는 이해를 못 해요." 그가 말했다. "예전에는 이해했는데요. 우린 몇 시간이고 앉아서……"

그는 말을 끊고, 과일 껍질과 내버려진 파티 선물과 짓밟힌 꽃들이 흩어진 쓸쓸한 길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저라면 데이지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겠어요." 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과거를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과거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요?"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물론 되풀이할 수 있어요!"

그는 정신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과거가 바로 여기, 제 집 그늘 속에,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는 곳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걸 예전하고 똑같이 되돌려 놓을 겁니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데이지도 알게 될 거예요."

그는 과거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들어 보니 무언가를,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 같은 것을, 데이지를 사랑하는 데 쏟아부어 버린 그 무언가를 되찾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그의 삶은 혼란스럽고 어지러웠지만, 어느 출발점으로 딱 한 번만 돌아가 모든 것을 천천히 되짚어 갈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었는지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5년 전 어느 가을밤, 두 사람은 낙엽이 지는 거리를 걷다가 나무가 없고 보도가 달빛에 하얗게 물든 곳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거기 멈춰 서서 서로에게로 몸을 돌렸다. 서늘한 밤이었다. 한 해에 두 번 돌아오는 환절기의 그 신비로운 설렘이 깃든 밤. 집집마다 켜진 고요한 불빛이 어둠 속으로 웅웅거리며 번져 나갔고, 별들 사이에서는 무언가가 술렁이며 부산을 떨었다. 개츠비는 곁눈으로 보았다. 보도블록들이 정말로 사다리를 이루어 나무들 위 어느 비밀스러운 곳까지 뻗어 올라가고 있었고, 혼자서 오르기만 한다면 그는 거기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일단 거기 이르면 삶의 젖꼭지를 물고 빨 수 있었고, 무엇에도 비길 데 없는 경이의 젖을 꿀꺽꿀꺽 들이켤 수 있었다.

데이지의 하얀 얼굴이 그의 얼굴 가까이 올라오자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개츠비는 알고 있었다. 이 여자에게 입을 맞추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제 환상을 언젠가 스러질 이 여자의 숨결에 영원히 맺어 버리면, 제 마음은 다시는 하느님의 마음처럼 뛰놀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별에 대고 친 소리굽쇠의 떨림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서. 그러고는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자 데이지는 그를 위해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났고, 육화(incarnation)는 완성되었다.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듣는 내내, 그 끔찍한 감상벽 속에서조차, 나는 오래전 어디선가 들었던 무언가를, 붙잡힐 듯하다가 빠져나가는 어떤 리듬을, 잃어버린 말들의 한 조각을 떠올렸다. 한순간 어떤 구절이 내 입안에서 모양을 갖추려 했고, 내 입술은 말 못 하는 사람의 입술처럼 벌어졌다. 놀라서 새어 나온 한 가닥 숨결보다 더 많은 무언가가 그 위에서 몸부림치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입술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고, 내가 거의 떠올릴 뻔했던 그것은 영영 전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주

  1. 1. 캐나다에서 국경 너머로 술을 몰래 끌어오는 땅속 파이프라인이 있다는 소문. 금주법 시대에 캐나다는 미국으로 밀수되는 술의 주요 공급처였다.

  2. 2. 신약성경 누가복음 2장 49절에서 빌린 말. 성전에서 사흘 만에 찾아낸 열두 살 예수가 부모에게 한 대답을 킹제임스 성경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로 옮겼다. 한국어 성경은 대개 '아버지 집에 있어야'로 옮긴다.

  3. 3. 맹트농 부인(Madame de Maintenon, 1635~1719). 루이 14세의 서자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로 궁정에 들어와 왕의 신임을 얻었고, 왕비가 죽은 뒤 왕과 비밀리에 결혼해 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휘둘렀다.

  4. 4.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오늘날의 모로코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해안을 가리키던 옛 이름. 샌프란시스코의 이름난 환락가도 같은 이름으로 불렸다.

  5. 5. 금주법 시대에도 의사가 처방하면 약국에서 '약용' 위스키를 팔 수 있었다. 그래서 약국은 밀주를 유통하는 흔한 위장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