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개츠비를 둘러싼 호기심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어느 토요일 밤 그 집에 불이 켜지지 않았고, 그렇게 그의 트리말키오1 노릇은 시작될 때만큼이나 영문 모르게 막을 내렸다. 기대에 부풀어 그 집 진입로로 꺾어 들어온 자동차들이 겨우 1분쯤 머물다가는 뾰로통하게 도로 빠져나간다는 걸, 나는 아주 서서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싶어 알아보러 건너갔더니, 악당처럼 험상궂게 생긴 처음 보는 집사 하나가 문간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미심쩍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개츠비 씨가 어디 편찮으신가요?"
"아니." 잠시 뒤 그는 늑장을 부리듯 마지못해 "요" 자를 덧붙였다.
"통 안 보이셔서 좀 걱정이 됐어요. 캐러웨이가 다녀갔다고 전해 주세요."
"누구?" 그가 무례하게 되물었다.
"캐러웨이요."
"캐러웨이라. 알았어요, 전하죠."
그러더니 대뜸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우리 집 핀란드인 가정부가 전해 준 말로는, 개츠비가 일주일 전에 집안 하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내보내고 그 자리에 대여섯 명을 새로 들였다고 했다. 새로 온 사람들은 웨스트에그 마을에 나와 상인들한테 뒷돈을 받아 챙기는 일도 없이, 필요한 물건을 그때그때 전화로 딱 적당한 만큼만 주문해 들였다. 식료품 가게 배달 소년은 그 집 부엌이 꼭 돼지우리 같더라고 전했고, 마을에서는 새로 온 사람들이 애당초 하인이 아니라는 쪽으로 대체로 의견이 모였다.
이튿날 개츠비가 전화를 걸어왔다.
"어디 떠나세요?" 내가 물었다.
"아닙니다, 올드 스포트."
"하인들을 다 내보내셨다면서요."
"입이 무거운 사람들을 두고 싶었습니다. 데이지가 꽤 자주 건너오거든요. 오후에요."
그러니까 뜨내기손님들로 들끓던 그 거대한 객줏집이, 데이지의 눈에 스친 못마땅한 기색 하나에 카드로 지은 집처럼 그만 폭삭 무너져 내린 셈이었다.
"울프심이 좀 챙겨 주고 싶어 하던 사람들입니다. 다들 형제자매간이고요. 전에는 작은 호텔을 했답니다."
"그렇군요."
그가 전화를 건 건 데이지의 부탁 때문이었는데, 내일 데이지네 집에 점심을 먹으러 와 줄 수 있겠느냐며 베이커 양도 온다고 했다. 30분 뒤에는 데이지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고, 내가 온다는 걸 알고는 안도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하필 이런 자리를 골라 한바탕 소동을 벌이리라고는, 더구나 개츠비가 정원에서 대강 그려 보인 그 꽤나 괴로운 장면을 벌이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이튿날은 푹푹 쪘다. 그해 여름의 거의 마지막 날이었고, 틀림없이 가장 더운 날이었다. 내가 탄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와 햇빛 속으로 나서자, 부글부글 끓는 듯한 정오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은 내셔널 비스킷 회사 공장에서 울리는 뜨거운 기적 소리뿐이었다. 객차의 밀짚 좌석은 당장이라도 불이 붙을 것 같았다. 옆자리 여자는 한동안 흰 블라우스 속으로 얌전하게 땀을 흘리더니, 손가락 밑에서 신문이 눅눅해지자 쓸쓸한 비명을 한 번 지르고는 절망한 듯 깊은 더위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여자의 지갑이 바닥에 철썩 떨어졌다.
"어머나!" 여자가 숨을 헉 들이켰다.
나는 지친 몸을 굽혀 지갑을 주운 다음, 딴마음이 없다는 걸 보여 주려고 팔을 한껏 뻗어 모서리 끝만 겨우 쥔 채 여자에게 돌려주었지만, 여자를 비롯해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의심했다.
"덥네요!" 차장이 낯익은 얼굴들에게 말했다. "날씨 한번 대단하죠!…… 더워요!…… 더워!…… 더워!…… 이만하면 덥다 소리 나오시죠? 덥죠? 안 그래요……?"
차장의 손을 거쳐 돌아온 내 정기 승차권에는 그 손이 남긴 거뭇한 얼룩이 배어 있었다. 이런 더위에, 자기가 입 맞추는 달아오른 입술이 누구의 것인지, 심장 위 잠옷 주머니를 축축하게 적시는 머리가 누구의 것인지 신경 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뷰캐넌네 집 복도를 타고 희미한 바람 한 줄기가 불어 나오며, 현관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던 개츠비와 나에게까지 안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실어 날랐다.
"주인어른의 몸 말씀입니까?" 집사가 송화구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죄송합니다만 부인, 그건 대령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한낮엔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거든요!"
실제로 집사가 한 말은 이랬다. "네…… 네…… 알아보겠습니다."
집사는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땀에 살짝 번들거리는 얼굴로 우리의 빳빳한 밀짚모자를 받으러 다가왔다.
"마님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십니다!" 집사는 쓸데없이 방향까지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런 더위에는 군더더기 몸짓 하나하나가 모두 함께 나눠 쓰는 생명의 곳간을 욕보이는 짓이었다.
차양으로 그늘을 넉넉히 드리운 방은 어둑하고 서늘했다. 데이지와 조던은 커다란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선풍기가 노래하듯 일으키는 바람에 맞서 제 흰 드레스가 날리지 않게 몸무게로 눌러 두고 있는 은빛 우상 한 쌍 같았다.
"우린 꼼짝도 못 해." 두 사람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볕에 그은 살갗 위로 하얗게 분을 바른 조던의 손가락이 잠시 내 손안에 머물렀다.
"그런데 운동선수 토머스 뷰캐넌 씨께서는?" 내가 물었다.
바로 그때 복도 전화기 앞에서 퉁명스럽고 먹먹하게 쉰 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츠비는 진홍빛 양탄자 한가운데 서서 넋을 잃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데이지는 그런 개츠비를 보며 달콤하고 사람을 들뜨게 하는 그 웃음을 웃었다. 그러자 가슴께에서 분가루가 조그맣게 훅 일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소문으로는 말이야." 조던이 속삭였다. "지금 저 전화 건 사람이 톰의 여자래."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복도의 목소리가 짜증스럽게 높아졌다. "좋아, 그렇다면 그 차는 절대 안 팔겠어…… 내가 무슨 의무가 있는 것도 절대 아니고…… 그리고 점심시간에 그 일로 귀찮게 구는 건, 그건 절대 못 참아!"
"전화를 끊어 놓고 혼자 저러는 거야." 데이지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니야, 안 그래." 내가 장담했다. "진짜 거래야. 마침 내가 좀 알거든."
톰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두꺼운 몸뚱이로 잠깐 문간을 꽉 메우더니, 서둘러 방으로 들어왔다.
"개츠비 씨!" 톰은 싫은 기색을 용케 감춘 채 넓적하고 납작한 손을 내밀었다. "반갑군, 선생…… 닉……"
"시원한 마실 것 좀 만들어 줘." 데이지가 외쳤다.
톰이 다시 방을 나가자 데이지는 일어나 개츠비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내가 당신 사랑하는 거 알죠?" 데이지가 나직이 속삭였다.
"여기 숙녀가 있다는 걸 잊었나 보네." 조던이 말했다.
데이지는 미심쩍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도 닉한테 키스하면 되잖아."
"어쩜 저렇게 천하고 상스러운 애가 다 있담!"
"상관없어!" 데이지는 소리치더니 벽돌 벽난로 앞에서 탭댄스를 추듯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더위가 생각났는지 죄지은 사람처럼 소파에 도로 앉았는데, 바로 그때 갓 빨아 다린 옷차림의 유모가 어린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귀하신 보배애." 데이지가 두 팔을 벌리고 노래하듯 불렀다. "널 사랑하는 엄마한테 오렴."
유모가 손을 놓아주자 아이는 방을 가로질러 쪼르르 달려와서는 엄마 드레스 속으로 수줍게 파고들었다.
"우리 귀하신 보배애! 엄마가 우리 애기 노리끼리한 머리에 분 묻혔어? 자, 이제 똑바로 서서 해 봐. 안녕하세요오."
개츠비와 나는 차례로 허리를 숙여, 마지못해 내민 그 조그만 손을 잡았다. 그 뒤로도 개츠비는 놀란 눈으로 줄곧 아이를 바라보았는데, 그때까지 그는 그 아이가 정말로 이 세상에 있다고는 한 번도 믿어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점심 먹기 전에 옷 갈아입었어." 아이가 신이 나서 데이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가 우리 딸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지." 데이지는 아이의 작고 하얀 목에 하나 잡힌 주름에 얼굴을 묻었다. "요 꿈같은 것, 요 녀석. 어쩜 이렇게 꿈같은 쪼끄만 게 다 있을까."
"응." 아이가 태연하게 인정했다. "조던 이모도 하얀 옷 입었어."
"엄마 친구들 어때?" 데이지가 아이를 돌려세워 개츠비와 마주 보게 했다. "다들 예쁘지?"
"아빠는 어딨어?"
"얘는 아빠를 안 닮았어요." 데이지가 설명했다. "날 닮았죠. 머리칼도 얼굴 생김새도 다 날 닮았어요."
데이지는 소파에 도로 등을 기댔다. 유모가 한 걸음 나서며 손을 내밀었다.
"가요, 패미."
"잘 가, 우리 아가!"
버릇 잘 든 아이는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보면서도 유모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문밖으로 끌려 나갔는데, 바로 그때 얼음이 가득 들어 달그락거리는 진 리키 넉 잔을 뒤에 거느리고 톰이 돌아왔다.
개츠비가 잔을 집어 들었다.
"정말 시원해 보이는군요." 그가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길게, 게걸스럽게 들이켰다.
"어디서 읽었는데, 해가 해마다 뜨거워진다더군." 톰이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서 머지않아 지구가 해 속으로 떨어진다는 거야. 아니, 잠깐…… 정반대지…… 해가 해마다 식어 간다는 거였어.
"밖으로 나가지." 톰이 개츠비에게 권했다. "집 구경 좀 시켜 주고 싶은데."
나도 두 사람을 따라 베란다로 나갔다. 더위에 괴어 버린 초록빛 해협 위에서는 작은 돛 하나가 더 시원한 바다를 향해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는데, 개츠비는 잠시 그 돛을 눈으로 좇다가 손을 들어 물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제 집이 바로 맞은편입니다."
"그렇군."
우리의 눈길은 장미 화단과 뜨거운 잔디밭을 넘고, 물가를 따라 복더위가 남기고 간 잡초 섞인 쓰레기를 넘어 위로 올라갔다. 배의 하얀 날개는 파랗고 서늘한 하늘 끝을 배경 삼아 천천히 나아갔고, 그 앞에는 가리비 껍데기처럼 물결이 주름진 대양과 축복이 넘치는 섬들이 펼쳐져 있었다.
"저런 게 진짜 스포츠지." 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친구하고 저기 한 시간쯤 나가 있어 봤으면 좋겠군."
우리는 더위를 막느라 그곳 역시 어둑하게 가려 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고, 신경이 곤두선 채 들뜬 기분을 차가운 에일과 함께 꿀꺽꿀꺽 목구멍으로 넘겼다.
"오늘 오후엔 우리 뭐 하지?" 데이지가 외쳤다. "그리고 내일은, 또 앞으로 30년 동안은?"
"우울한 소리 좀 하지 마." 조던이 말했다. "가을이 와서 공기가 선선해지면 인생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돼."
"그래도 너무 덥단 말이야." 데이지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얼굴로 우겼다. "게다가 다 너무 뒤죽박죽이야. 우리 다 같이 시내에 가자!"
데이지의 목소리는 더위를 헤치고 버둥거리며 나아갔다. 더위에 부딪치고, 그 무의미한 더위를 주물러 어떻게든 모양을 빚어 가면서.
"마구간을 차고로 고쳤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 톰은 개츠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고를 마구간으로 고친 사람은 내가 처음일걸."
"시내 갈 사람?" 데이지가 끈질기게 다그쳤다. 개츠비의 눈길이 데이지 쪽으로 둥실 떠 갔다. "아." 데이지가 소리쳤다. "당신은 참 시원해 보여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텅 빈 허공에 단둘이 남은 것처럼 서로를 바라보았다. 데이지가 애써 식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당신은 언제 봐도 참 시원해 보여요." 데이지가 되뇌었다.
데이지는 방금 개츠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톰 뷰캐넌은 그걸 보았다. 톰은 경악했다. 입이 살짝 벌어진 채로 그는 개츠비를 보았다가, 오래전에 알던 누군가를 이제야 알아본 사람처럼 다시 데이지를 보았다.
"당신은 그 광고에 나오는 남자를 닮았어요." 데이지가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그 광고 알죠? 그 남자 나오는……"
"좋아." 톰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시내 가는 거라면 난 얼마든지 좋아. 자, 다 같이 시내로 가자고."
톰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눈길은 여전히 개츠비와 제 아내 사이를 번득이며 오갔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들!" 톰의 참을성에 조금 금이 갔다. "대체 왜들 이래? 시내에 갈 거면 출발하자고."
애써 성질을 누르느라 떨리는 손으로 톰은 잔에 남은 마지막 에일을 입으로 가져갔고, 우리는 데이지의 목소리에 떠밀려 자리에서 일어나 이글거리는 자갈 진입로로 나섰다.
"그냥 이렇게 가자고?" 데이지가 반대했다. "이대로? 담배 한 대 피울 틈도 안 주고?"
"점심 내내 다들 피웠잖아."
"아이, 좀 재밌게 놀자." 데이지가 톰에게 사정했다. "이렇게 더운데 티격태격할 기운도 없어."
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좋을 대로 해." 데이지가 말했다. "가자, 조던."
두 사람이 채비를 하러 위층으로 올라간 사이, 우리 남자 셋은 그 자리에 서서 뜨거운 자갈을 발로 이리저리 뒤적였다. 서쪽 하늘에는 벌써 은빛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개츠비가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지만, 그가 입을 다물기도 전에 톰은 벌써 홱 돌아서서 무슨 말이 나오려나 기다리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마구간은 여기 있습니까?" 개츠비가 애써 물었다.
"길 따라 사분의 일 마일쯤 내려가면 있어."
"아."
잠시 말이 끊겼다.
"시내엔 뭐 하러 가자는 건지 모르겠군." 톰이 사납게 내뱉었다. "여자들은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한번 박히면……"
"마실 것 좀 가져갈까?" 데이지가 위층 창문에서 소리쳤다.
"위스키 좀 가져올게." 톰이 대답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개츠비가 뻣뻣하게 내 쪽으로 돌아섰다.
"저 사람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군요, 올드 스포트."
"데이지는 목소리에 속이 다 드러나요." 내가 한마디 했다. "그 목소리엔 뭔가가 가득해서……" 나는 머뭇거렸다.
"그 여자 목소리엔 돈이 가득해요." 그가 불쑥 말했다.
바로 그거였다.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 목소리엔 돈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 한없이 오르내리던 매력, 짤랑거리는 그 소리, 심벌즈가 부르는 그 노래의 정체가 바로 돈이었다…… 하얀 궁전 높은 곳에 사는 왕의 딸, 황금의 아가씨……
톰이 1쿼트들이 술병을 수건에 둘둘 싸며 집에서 나왔고, 그 뒤로 금속 광택이 도는 천으로 지은 꼭 끼는 작은 모자를 쓰고 가벼운 망토를 팔에 걸친 데이지와 조던이 따라 나왔다.
"다 같이 제 차로 가시겠습니까?" 개츠비가 권했다. 그는 뜨겁게 달아오른 초록색 가죽 좌석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늘에 세워 둘 걸 그랬군요."
"기어는 보통 차하고 같은가?" 톰이 따지듯 물었다.
"네."
"그럼 그쪽이 내 쿠페를 몰고 와. 이 차는 내가 몰고 시내까지 가지."
개츠비는 그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기름이 별로 없을 텐데요." 그가 반대했다.
"기름이야 넉넉하지." 톰이 떠들썩하게 말하고는 연료계를 들여다보았다. "떨어지면 약국에 들르면 돼. 요즘은 약국에서 뭐든 살 수 있잖아."
겉보기에 아무 뜻도 없는 이 말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데이지는 얼굴을 찌푸린 채 톰을 보았다. 그리고 개츠비의 얼굴 위로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는 표정 하나가 스쳐 지나갔는데, 분명히 처음 보는 표정이면서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누가 말로 묘사하는 것만 들어 본 듯한 표정이었다.
"가자, 데이지." 톰이 손으로 데이지를 개츠비의 차 쪽으로 떠밀며 말했다. "이 서커스 마차에 태워 주지."
톰이 차 문을 열었지만 데이지는 제 몸을 두른 톰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당신은 닉하고 조던 태우고 가. 우린 쿠페로 따라갈게."
데이지는 개츠비 곁에 바싹 붙어 걸으며 손끝으로 그의 윗옷을 매만졌다. 조던과 톰과 나는 개츠비의 차 앞자리에 나란히 올라탔고, 톰이 낯선 기어를 이리저리 조심스레 밀어 넣자 차는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두 사람은 금세 뒤로 멀어져 보이지 않았다.
"봤어?" 톰이 다그쳤다.
"뭘?"
톰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다가, 조던과 내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꽤나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톰이 넌지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한테는 가끔…… 거의 예지력 같은 게 있어서, 뭘 해야 할지 알려 준다고. 안 믿을지도 모르지만, 과학적으로……"
톰은 말을 멈추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사태가 그를 따라잡아, 이론의 심연 가장자리에서 도로 끌어냈다.
"그 작자 뒷조사를 좀 해 봤어." 톰이 말을 이었다. "진작 알았으면 더 깊이 파고들 수도 있었는데……"
"그럼 영매라도 찾아갔었다는 거예요?" 조던이 익살스럽게 물었다.
"뭐?" 우리가 웃자 톰은 어리둥절해서 우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영매?"
"개츠비 일로요."
"개츠비 일로! 아니, 그런 데 안 갔어. 그 작자 과거를 좀 조사해 봤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 사람이 옥스퍼드 출신이라는 걸 알아내셨고요." 조던이 친절하게 거들었다.
"옥스퍼드 출신!" 톰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옥스퍼드 좋아하네! 분홍색 양복이나 입고 다니는 작자가."
"그래도 옥스퍼드 출신은 맞아요."
"뉴멕시코주 옥스퍼드겠지." 톰이 경멸하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면 그 비슷한 데든가."
"이봐요, 톰. 그렇게 속물처럼 굴 거면 그 사람을 왜 점심에 불렀어요?" 조던이 뾰로통하게 따졌다.
"데이지가 불렀지. 우리가 결혼하기 전부터 알던 사이래. 어디서 알았는지는 하느님이나 아시겠지!"
에일 기운이 가시자 이제 우리는 모두 짜증이 나 있었고, 그걸 알았기에 한동안 말없이 차를 몰았다. 그러다 빛이 바랜 T. J. 에클버그 박사의 눈이 길 저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나는 기름이 얼마 없을 거라던 개츠비의 말이 그제야 생각났다.
"시내까지 갈 만큼은 있어." 톰이 말했다.
"그래도 바로 여기 정비소가 있잖아요." 조던이 반대했다. "이 찜통더위에 차가 서 버리는 건 싫어요."
톰이 조바심을 내며 발 브레이크와 손 브레이크를 한꺼번에 걸었고, 우리 차는 먼지를 피워 올리며 미끄러지다가 윌슨의 간판 아래서 덜컥 멈춰 섰다. 잠시 뒤 주인이 가게 안쪽에서 나와 퀭한 눈으로 차를 바라보았다.
"기름 좀 넣어!" 톰이 거칠게 소리쳤다. "우리가 뭐 하러 섰겠어? 경치 구경하러?"
"몸이 아픕니다." 윌슨이 꼼짝도 하지 않고 말했다. "하루 종일 아팠습니다."
"어디가 아픈데?"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내가 알아서 넣을까?" 톰이 다그쳤다. "전화로는 멀쩡하던데."
윌슨은 기대 서 있던 문간 그늘에서 힘겹게 몸을 떼어 내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료 탱크 뚜껑을 돌려 열었는데, 햇빛 아래서 보니 그 얼굴이 푸르죽죽했다.
"점심 드시는데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돈이 몹시 급해서 그렇습니다. 그 헌 차를 어떻게 하실 건지 궁금했습니다."
"이 차는 어때?" 톰이 물었다. "지난주에 샀지."
"보기 좋은 노란 차군요." 윌슨이 펌프 손잡이를 힘겹게 당기며 말했다.
"사고 싶나?"
"어림도 없지요." 윌슨이 힘없이 웃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그 헌 차로는 돈을 좀 만질 수 있을 겁니다."
"갑자기 돈은 어디 쓰게?"
"여기서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떠나고 싶습니다. 집사람하고 서부로 갈 생각입니다."
"마누라가 가고 싶어 한다고?" 톰이 흠칫 놀라 소리쳤다.
"10년째 그 얘기만 해 왔습니다." 윌슨은 펌프에 잠시 몸을 기대고 손으로 햇빛을 가렸다. "이제는 가고 싶든 말든 가게 될 겁니다. 제가 데리고 떠날 겁니다."
쿠페가 흙먼지를 휘날리며 우리 곁을 휙 지나갔고, 흔드는 손 하나가 번쩍 스쳤다.
"얼마야?" 톰이 거칠게 물었다.
"요 이틀 사이에 뭔가 수상한 걸 눈치챘습니다." 윌슨이 말했다. "그래서 떠나려는 겁니다. 그래서 차 일로 자꾸 성가시게 해 드린 거고요."
"얼마야?"
"1달러 20센트입니다."
사정없이 두들겨 대는 더위에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가슴이 철렁했다가 윌슨의 의심이 아직 톰에게까지 내려앉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윌슨은 머틀이 자기와는 아무 상관 없는 딴 세상에서 무슨 삶인가를 따로 꾸리고 있다는 걸 알아챘고, 그 충격으로 몸까지 병이 나 버린 참이었다. 나는 윌슨을 보고, 이어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그와 비슷한 사실을 알아낸 톰을 보다가, 지능을 따지든 인종을 따지든 사람들 사이에 아픈 사람과 성한 사람의 차이만큼 깊은 차이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윌슨은 너무 아파서 죄지은 사람처럼,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느 가엾은 처녀를 덜컥 임신시켜 놓은 사람처럼.
"그 차는 넘겨주지." 톰이 말했다. "내일 오후에 보내 줄게."
그 일대는 오후의 환한 햇볕 아래서도 늘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불안하게 했는데, 이때 나는 뒤에 뭔가 있다는 경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돌렸다. 잿더미 위로는 T. J. 에클버그 박사의 거대한 눈이 불침번을 서고 있었지만, 잠시 뒤 나는 20피트도 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눈이 유난히 뚫어지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정비소 위층 창문 하나에 커튼이 조금 걷혀 있었고, 머틀 윌슨이 거기서 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넋을 놓았는지 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고, 그 얼굴에는 감정이 하나씩 차례로 스며 올라왔다. 천천히 현상되는 사진 속에 사물이 하나둘 드러나듯이. 묘하게 낯익은 표정이었다. 여자들 얼굴에서 자주 본 표정이었는데, 머틀 윌슨의 얼굴에서는 까닭도 목적도 알 수 없어 보였다. 그러다 나는 질투 어린 공포로 휘둥그레진 그 눈이 톰이 아니라, 머틀이 톰의 아내로 잘못 알고 있는 조던 베이커에게 박혀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단순한 사람이 겪는 혼란만 한 혼란은 없다. 차를 몰고 그곳을 떠나는 동안, 공포가 뜨거운 채찍처럼 톰을 후려치고 있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안전하고 누구도 넘볼 수 없던 그의 아내와 그의 여자가 걷잡을 수 없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톰은 데이지를 따라잡는 한편 윌슨을 뒤에 떨쳐 내려는 두 가지 목적으로, 본능에 떠밀려 가속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시속 50마일로 애스토리아를 향해 내달렸고, 그러다 마침내 고가 철도의 거미줄 같은 철골들 사이로 느긋하게 달리는 파란 쿠페가 눈에 들어왔다.
"50번가 근처 큰 영화관들은 시원해요." 조던이 넌지시 말했다. "난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 없는 여름 오후의 뉴욕이 좋아요. 뭔가 아주 관능적인 데가 있거든요. 너무 익어서, 온갖 희한한 과일이 손안으로 툭툭 떨어질 것만 같아요."
'관능적'이라는 말에 톰은 한층 더 불안해졌지만, 무슨 반대할 말을 지어내기도 전에 쿠페가 멈춰 섰고, 데이지가 옆에 나란히 차를 대라고 우리에게 손짓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데이지가 소리쳤다.
"영화 보러 가는 건 어때?"
"너무 더워." 데이지가 투덜거렸다. "먼저들 가. 우린 좀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만나." 데이지는 애써 희미하게나마 재치를 끌어올렸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만나자. 담배 두 개비를 한꺼번에 피우는 남자가 나야."
"여기서 이러고 입씨름할 수는 없어." 뒤에서 트럭 한 대가 욕을 퍼붓듯 경적을 울려 대자 톰이 조바심을 내며 말했다. "센트럴 파크 남쪽, 플라자 호텔 앞까지 날 따라와."
톰은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뒤에 오는 두 사람의 차를 찾았고, 길이 막혀 그 차가 뒤처지기라도 하면 다시 눈에 들어올 때까지 속도를 늦추었다. 두 사람이 옆길로 휙 빠져서 제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 같이 그보다 더 영문 모를 걸음을 내디뎌, 플라자 호텔에 스위트룸을 잡고 그 응접실에 들어앉았다.
우리를 그 방으로 몰아넣는 것으로 끝난 그 길고 떠들썩한 입씨름은 이제 기억에서 빠져나가고 없다. 다만 그러는 내내 속옷이 축축한 뱀처럼 자꾸만 다리를 휘감으며 기어올랐고 이따금 땀방울이 등줄기를 가로질러 서늘하게 내달렸다는 것만큼은, 지금도 몸이 또렷하게 기억한다. 발단은 욕실 다섯 개를 빌려서 찬물로 목욕을 하자는 데이지의 제안이었는데, 그 생각이 차츰 '민트 줄렙2 한잔할 곳'이라는, 좀 더 손에 잡히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우리는 저마다 이건 '미친 짓'이라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어리둥절해하는 호텔 직원에게 한꺼번에 떠들어 댔고, 우리가 아주 재미있게 굴고 있다고 생각했거나,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척했다……
방은 널찍했지만 숨이 턱턱 막혔고, 벌써 오후 네 시였는데도 창문을 열어 봐야 센트럴 파크의 달아오른 덤불 냄새를 실은 바람만 한 줄기 훅 끼쳐 들어올 뿐이었다. 데이지는 거울 앞으로 가서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머리를 매만졌다.
"스위트룸 한번 근사하네요." 조던이 공손하게 속삭였고,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창문 하나 더 열어." 데이지가 돌아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더 열 창문이 없어."
"그럼 전화해서 도끼라도 갖다 달라고 해야겠네……"
"더위 따위는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야." 톰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자꾸 투덜대니까 열 배는 더 덥잖아."
톰은 수건에 둘둘 말아 온 위스키 병을 풀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데이지를 좀 가만 놔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올드 스포트?" 개츠비가 한마디 했다. "시내에 오자고 한 건 뷰캐넌 씨 아니었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벽에 박힌 못에 걸려 있던 전화번호부가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철퍼덕 떨어졌고, 그러자 조던이 "어머, 실례"라고 속삭였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제가 주울게요." 내가 나섰다.
"주웠습니다." 개츠비는 끊어진 끈을 살펴보더니 흥미롭다는 듯 "흠!"이라고 중얼거리고는 전화번호부를 의자 위로 휙 던졌다.
"그쪽 입버릇 한번 대단하군, 안 그래?" 톰이 날카롭게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그 '올드 스포트' 타령 말이야. 대체 어디서 주워들은 거지?"
"이것 봐, 톰." 데이지가 거울 앞에서 돌아서며 말했다. "그렇게 남의 말꼬투리나 잡을 거면 난 여기 한시도 안 있을 거야. 전화해서 민트 줄렙에 넣을 얼음이나 시켜."
톰이 수화기를 드는 순간 짓눌려 있던 더위가 소리가 되어 터져 나왔고, 우리는 어느새 아래층 연회장에서 울려 퍼지는 멘델스존의 '결혼 행진곡', 그 장엄하고도 불길한 화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런 더위에 결혼이라니, 상상이나 돼요?" 조던이 울적하게 외쳤다.
"그래도…… 난 6월 한가운데에 결혼했는걸." 데이지가 기억을 더듬었다. "6월의 루이빌! 누가 기절했었는데, 기절한 사람이 누구였지, 톰?"
"빌럭시." 톰이 짧게 대답했다.
"빌럭시라는 남자였는데, 다들 '블록스' 빌럭시라고 불렀고, 상자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이건 정말이야, 게다가 테네시주 빌럭시 출신이었어.3"
"그 사람을 우리 집으로 옮겼어요." 조던이 거들었다. "우리 집이 교회에서 딱 두 집 건너였거든요. 그러고는 아빠가 이제 그만 나가 달라고 할 때까지 3주나 눌러 지냈어요. 그 사람이 떠난 바로 다음 날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잠시 뒤, 자기 말이 불경스럽게 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조던이 덧붙였다. "둘이 무슨 상관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난 멤피스 출신 빌 빌럭시라는 사람을 알았는데." 내가 한마디 했다.
"그 사람 사촌이야. 그 사람이 떠나기 전까지 그 집안 내력을 내가 속속들이 알게 됐거든. 나한테 알루미늄 퍼터도 하나 줬는데, 지금도 그걸 써."
식이 시작되면서 잦아들었던 음악 대신 이제 길게 이어지는 환호성이 창문으로 흘러 들어왔고, 뒤이어 "와아아아!"라는 외침이 띄엄띄엄 들려오다가, 마침내 춤이 시작되자 재즈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리도 늙어 가나 봐." 데이지가 말했다. "젊었으면 벌떡 일어나서 춤을 췄을 텐데."
"빌럭시 생각 좀 해." 조던이 데이지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 사람은 어디서 알았어요, 톰?"
"빌럭시?" 톰은 애써 기억을 짜냈다. "난 모르는 사람이었어. 데이지 친구였지."
"아니거든." 데이지가 부인했다. "난 그 전엔 본 적도 없는 사람이야. 그 사람, 전용 객차를 타고 내려왔잖아."
"글쎄, 그 친구는 루이빌에서 자랐다면서 당신을 안다고 하던데, 막판에 에이사 버드가 그 친구를 데려와서는 한 사람 더 태울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다고."
조던이 빙긋 웃었다.
"아마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빌붙어 가며 집에 돌아가던 길이었을 거예요. 나한테는 예일에서 톰네 학년 대표였다고 하던데요."
톰과 나는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빌럭시가?"
"우선, 우리 학년엔 대표라는 게 아예 없었……"
개츠비의 발이 짧고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려 댔고, 톰이 문득 그를 뜯어보았다.
"그건 그렇고, 개츠비 씨,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 그래, 옥스퍼드에 다녔다고 들었어."
"네…… 다녔습니다."
잠시 말이 끊겼다. 그러고는 톰이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 사람을 깔보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빌럭시가 뉴헤이븐에 다닐 무렵에 다녔겠군."
다시 말이 끊겼다. 웨이터가 노크를 하고 으깬 민트와 얼음을 들고 들어왔지만, 그가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 소리에도, 문이 살며시 닫히는 소리에도 침묵은 깨지지 않았다. 이 어마어마한 세부 사항이 마침내 밝혀질 참이었다.
"거기 다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개츠비가 말했다.
"들었어. 그런데 그게 언제였는지 알고 싶군."
"1919년이었는데, 다섯 달밖에 안 있었지요. 그러니 옥스퍼드 출신이라고 내세우기는 좀 뭣합니다."
톰은 우리 얼굴에도 자기처럼 못 믿겠다는 기색이 떠올랐는지 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개츠비를 보고 있었다.
"휴전 뒤에 장교들 일부한테 주어진 기회였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라면 어느 대학이든 갈 수 있었지요."
나는 벌떡 일어나 그의 등을 탁 두드려 주고 싶었고, 전에도 몇 번 겪은 적이 있는 일이지만 그에 대한 믿음이 다시 한번 온전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데이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일어나 탁자로 갔다.
"위스키 따, 톰." 데이지가 시켰다. "내가 민트 줄렙 만들어 줄게. 그러면 당신도 자기가 그렇게 바보 같다는 생각은 안 들 거야…… 이 민트 좀 봐!"
"잠깐." 톰이 쏘아붙였다. "개츠비 씨한테 하나만 더 물어볼 게 있어."
"말씀하시지요." 개츠비가 정중하게 말했다.
"대체 우리 집안에 무슨 분란을 일으키려는 거야?"
마침내 속내가 다 드러났고, 개츠비는 흡족했다.
"이 사람이 분란을 일으키는 게 아니잖아." 데이지는 절박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분란을 일으키는 건 당신이야. 제발 좀 자제해."
"자제라니!" 톰이 기가 막힌다는 듯 되뇌었다. "하긴 요즘은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아무개 씨가 제 아내한테 수작을 거는데 뒤로 물러나 느긋하게 앉아서 구경이나 하는 게 최신 유행인가 보지. 흥, 그런 거라면 난 빼 줘…… 요즘 사람들은 가정생활이니 가족 제도니 하는 걸 비웃는 데서 시작해서, 그다음엔 뭐든 죄다 내팽개치고 흑인하고 백인이 뒤섞여 결혼하는 세상을 만들 거라고."
제가 늘어놓은 열띤 횡설수설에 스스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톰은, 문명의 마지막 방벽 위에 홀로 버티고 선 자기 모습을 눈앞에 그리고 있었다.
"여긴 다 백인인데요." 조던이 중얼거렸다.
"나 인기 없는 거 알아. 큰 파티도 안 열고. 친구 하나 사귀려 해도 제 집을 돼지우리로 만들어야 하나 보지. 요즘 세상에선."
나도 화가 났고 우리 모두 화가 나 있었지만, 난봉꾼이 도덕군자로 둔갑한 품이 어찌나 완벽하던지 톰이 입을 열 때마다 나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올드 스포트……" 개츠비가 말을 꺼냈다. 그러나 데이지가 그의 속셈을 알아챘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데이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가로막았다. "제발 우리 다 집에 가요. 다 같이 집에 가면 안 돼요?"
"그게 좋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자, 톰. 술 마시고 싶은 사람도 없잖아."
"개츠비 씨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들어 봐야겠어."
"부인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개츠비가 말했다. "한 번도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데이지가 사랑하는 건 저예요."
"미쳤군!" 톰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개츠비가 흥분으로 얼굴이 환하게 달아오른 채 벌떡 일어섰다.
"데이지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알아듣겠어요?" 그가 외쳤다. "데이지가 당신하고 결혼한 건 내가 가난했고 나를 기다리다 지쳤기 때문일 뿐이에요. 끔찍한 실수였지만, 데이지는 마음속으로 나 말고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이쯤에서 조던과 나는 자리를 뜨려 했지만 톰과 개츠비는 서로 질세라 완강하게 우리더러 남아 있으라고 고집했는데, 둘 다 감출 것이라곤 하나도 없고 자기들 감정을 우리가 곁에서 대신 맛보는 게 무슨 특권이나 되는 듯한 태도였다.
"앉아, 데이지." 톰의 목소리는 아버지 같은 어조를 더듬어 찾았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다 들어야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가 말했잖아요." 개츠비가 말했다. "5년째 이어져 온 일인데, 당신은 몰랐지요."
톰이 홱 데이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작자를 5년 동안이나 만나 왔다고?"
"만난 건 아니에요." 개츠비가 말했다. "아뇨, 우린 만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동안 내내 우리 둘은 서로 사랑했는데, 당신은 몰랐지요, 올드 스포트. 가끔 웃음이 나곤 했어요." 그러나 그의 눈에는 웃음기라곤 없었다. "당신이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면요."
"아, 그게 다로군." 톰은 두툼한 손가락 끝을 성직자처럼 맞대어 톡톡 두드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미쳤군!" 톰이 폭발했다. "5년 전 일이야 그땐 내가 데이지를 몰랐으니 뭐라고 할 수 없지. 하지만 그쪽이 식료품 꾸러미를 들고 뒷문으로 배달이라도 왔다면 모를까, 무슨 수로 데이지 근처에 얼씬이라도 했는지 제기랄, 난 도무지 모르겠군. 나머지는 죄다 빌어먹을 거짓말이야. 데이지는 나랑 결혼할 때 나를 사랑했고, 지금도 나를 사랑해."
"아니요." 개츠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사랑해. 문제는 데이지가 가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거지." 톰은 뭘 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나도 데이지를 사랑해. 가끔 한눈을 팔고 바보짓을 할 때도 있지만 난 언제나 돌아오고, 마음속으로는 늘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다고."
"당신 정말 역겨워." 데이지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보았는데, 한 옥타브 아래로 떨어진 그 목소리가 짜릿한 경멸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우리가 왜 시카고를 떠났는지 알아? 그 조그만 한눈팔기 얘기를 아직 아무도 너한테 안 들려줬다니 놀랍네."
개츠비가 걸어와 데이지 곁에 섰다.
"데이지, 그건 이제 다 끝난 일이에요." 그가 간절하게 말했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저 사람한테 사실대로,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라고 말하기만 하면 모든 게 영원히 지워지는 거예요."
데이지는 앞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겠어요?"
"당신은 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데이지는 머뭇거렸다. 그 눈길이 무언가를 호소하듯 조던과 나에게 와 닿았는데,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이제야 깨달은 듯한, 그리고 처음부터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은 전혀 없었던 듯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너무 늦었다.
"난 저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데이지가 눈에 띄게 마지못해 말했다.
"카피올라니4에서도 아니었다고?" 톰이 불쑥 다그쳤다.
"아니었어."
아래층 연회장에서 먹먹하고 숨 막히는 화음이 뜨거운 공기의 물결을 타고 떠올라 왔다.
"당신 신발 젖지 말라고 내가 펀치볼에서 안고 내려왔던 그날도?" 톰의 목소리에 쉰 듯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데이지?"
"그러지 마."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원망은 가시고 없었다. 데이지는 개츠비를 보았다. "됐죠, 제이." 그렇게 말했지만 담배에 불을 붙이려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담배와 불붙은 성냥을 양탄자 위로 내던졌다.
"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바라!" 데이지가 개츠비에게 소리쳤다. "난 지금 당신을 사랑해, 그걸로는 모자라? 지나간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어." 데이지는 속절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때는 저 사람을 사랑했던 게 맞아…… 하지만 당신도 사랑했어."
개츠비의 눈이 뜨였다가 감겼다.
"나도 사랑했다고요?" 그가 되뇌었다.
"그것도 거짓말이야." 톰이 사납게 말했다. "데이지는 그쪽이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어. 이봐, 데이지하고 나 사이에는 그쪽이 영영 모를 일들이, 우리 둘 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고."
그 말이 정말로 개츠비의 살을 물어뜯는 것 같았다.
"데이지하고 단둘이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가 고집했다. "지금은 너무 흥분해 있어서……"
"단둘이 있어도 톰을 사랑한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해." 데이지가 가엾은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그건 사실이 아닐 테니까."
"당연히 사실이 아니지." 톰이 맞장구를 쳤다.
데이지가 남편을 돌아보았다.
"당신한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데이지가 말했다.
"당연히 상관있지. 이제부터는 당신을 더 잘 돌봐 줄 거야."
"당신은 모르는군요." 개츠비가 조금 허둥대며 말했다. "이제 당신이 데이지를 돌볼 일은 없어요."
"내가 안 돌본다고?" 톰은 눈을 크게 뜨고 웃었는데, 이제는 얼마든지 감정을 누를 여유가 있었다. "그건 또 왜지?"
"데이지는 당신을 떠날 겁니다."
"헛소리."
"아니, 떠날 거야." 데이지가 눈에 띄게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데이지는 날 안 떠나!" 톰의 말이 느닷없이 개츠비를 위에서 내리눌렀다. "제 손으로 끼워 줄 반지마저 훔쳐 와야 할 한낱 사기꾼 때문이라면 더더욱 안 떠나지."
"이건 못 참아!" 데이지가 외쳤다. "아, 제발 우리 여기서 나가."
"도대체 그쪽 정체가 뭐야?" 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쪽은 마이어 울프심하고 몰려다니는 패거리 가운데 하나야, 그 정도는 나도 마침 알고 있지. 그쪽 일을 좀 조사해 봤는데, 내일은 더 깊이 파고들 거야."
"그거야 좋으실 대로 하시지요, 올드 스포트." 개츠비가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쪽 '약국'이 뭔지 알아냈지." 톰은 우리 쪽으로 돌아서서 빠르게 말했다. "이 작자하고 그 울프심이라는 자가 여기 뉴욕하고 시카고에서 뒷골목 약국을 잔뜩 사들여서는, 곡물로 만든 알코올을 계산대 너머로 버젓이 팔았어. 이 작자가 부리는 잔재주 가운데 하나지. 처음 봤을 때부터 밀주업자라고 점찍었는데, 크게 틀리지 않았군."
"그래서요?" 개츠비가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 친구 월터 체이스도 자존심 따위는 내세우지 않고 거기 한몫 끼었던 것 같은데요."
"그러고는 그 친구를 궁지에 내버려 뒀지, 안 그래? 뉴저지에서 한 달이나 감옥살이를 하게 내버려 뒀잖아. 맙소사! 월터가 그쪽 얘기 하는 걸 한번 들어 봐야 하는데."
"그 사람은 땡전 한 푼 없이 우리를 찾아왔어요. 돈을 좀 만질 수 있게 돼서 아주 좋아했지요, 올드 스포트."
"나한테 '올드 스포트'라고 하지 마!" 톰이 소리쳤다. 개츠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월터는 도박법 위반으로도 그쪽을 걸고넘어질 수 있었는데, 울프심이 겁을 줘서 입을 틀어막았지."
처음 보는 듯하면서도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 표정이 다시 개츠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 약국 일은 푼돈 벌이에 지나지 않았어." 톰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쪽이 벌이고 있는 일은 월터조차 나한테 털어놓기를 겁내더군."
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개츠비와 남편 사이를 번갈아 보고 있는 데이지를 흘끗 보았고, 이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온 신경을 쏟아야 하는 무언가를 턱 끝에 얹고 균형을 잡기 시작한 조던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개츠비 쪽으로 돌아선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흠칫 놀랐는데, 그의 정원에서 사람들이 지껄여 대던 험담 따위는 더없이 경멸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그는 꼭 '사람을 죽인' 사람처럼 보였다. 한순간, 그 얼굴에 굳어 있던 표정은 바로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로밖에는 달리 묘사할 길이 없었다.
그 표정은 이내 지나갔고, 개츠비는 흥분해서 데이지에게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는데, 모든 것을 부인하며 아무도 꺼내지 않은 비난에 맞서 제 이름을 변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데이지는 점점 더 깊이 제 안으로 움츠러들었고, 그래서 그는 그것마저 그만두었으며, 오후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동안 죽은 꿈만이 홀로 싸움을 이어 갔다. 이제는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만져 보려 애쓰며, 방 건너편에 있는 저 잃어버린 목소리를 향해, 불행하게,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몸부림치며.
그 목소리가 다시 가자고 애원했다.
"제발, 톰! 더는 못 견디겠어."
겁에 질린 그 눈은, 데이지가 품었던 뜻이 무엇이었든 그동안 냈던 용기가 무엇이었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둘이 먼저 집으로 출발해, 데이지." 톰이 말했다. "개츠비 씨 차로."
데이지는 이제 겁먹은 얼굴로 톰을 보았지만, 톰은 너그러운 척하는 경멸을 담아 고집했다.
"어서 가. 이제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제 분수도 모르고 벌인 그 시시한 연애 놀음이 끝났다는 걸 이 친구도 알았을 테니까."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불이 꺼지듯 뚝 끊겨, 한낱 우연 같은 존재가 되어, 유령처럼 외따로, 우리의 연민에서조차 떨어져 나간 채 사라져 버렸다.
잠시 뒤 톰이 일어나 따지도 않은 위스키 병을 수건에 싸기 시작했다.
"이거 마실 사람? 조던?…… 닉?"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닉?" 톰이 다시 물었다.
"뭐?"
"좀 마실래?"
"아니…… 방금 생각났는데, 오늘이 내 생일이야."
나는 서른이었다. 내 앞에는 새로운 10년으로 이어지는, 불길하고 위협적인 길이 뻗어 있었다.
우리가 톰과 함께 쿠페에 올라 롱아일랜드로 출발한 것은 일곱 시였다. 톰은 의기양양하게 웃어 가며 쉴 새 없이 떠들었지만, 그 목소리는 보도의 낯선 소란이나 머리 위를 지나는 고가 철도의 굉음만큼이나 조던과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사람의 공감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어서, 우리는 그들의 비극적인 언쟁이 모두 뒤로 멀어지는 도시의 불빛과 함께 스러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으로 만족했다. 서른. 그것은 고독한 10년이 오리라는 약속이었고, 점점 줄어드는 독신 친구들의 명단, 점점 홀쭉해지는 열정의 서류 가방, 점점 성겨지는 머리숱이었다. 하지만 내 곁에는, 데이지와는 달리 진작 잊어버렸어야 할 꿈을 이 나이에서 저 나이로 언제까지고 끌고 다니기에는 너무나도 현명한 조던이 있었다. 어두운 다리를 건널 때 조던의 창백한 얼굴이 나른하게 내 윗옷 어깨에 기대 왔고, 서른을 알리는 그 무시무시한 종소리는 안심하라는 듯 지그시 눌러 오는 조던의 손길 속에 잦아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늘하게 식어 가는 황혼 속을,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잿더미 옆에서 싸구려 커피집을 하던 젊은 그리스인 미케일리스가 검시 심리의 주요 증인이었다. 그날 미케일리스는 한낮의 더위를 잠으로 흘려보내고 다섯 시가 넘어서야 어슬렁어슬렁 정비소로 건너갔는데, 가 보니 조지 윌슨이 사무실에서 앓고 있었다. 정말로 몹시 아파서, 얼굴은 제 옅은 머리칼만큼이나 허옜고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미케일리스는 들어가서 누우라고 권했지만, 윌슨은 그러면 장사를 적잖이 놓칠 거라며 마다했다. 이웃이 그렇게 윌슨을 구슬리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위층에 집사람을 가둬 놨어요." 윌슨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모레까지 거기 있게 할 거예요. 그러고 나서 우린 이사 갈 거고요."
4년 동안 이웃으로 지내면서 윌슨이 그런 말을 입에 올릴 만한 사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미케일리스로서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윌슨은 대체로 진이 다 빠져 버린 그런 사내였다. 일하지 않을 때면 문간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길을 오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누가 말을 걸면 어김없이 싹싹하지만 아무 빛깔도 없는 웃음을 웃었다. 그는 아내에게 속한 사람이었지,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미케일리스는 당연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윌슨은 한마디도 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찾아온 이웃에게 야릇하고 의심 어린 눈길을 던지면서 어느 날 몇 시쯤에는 뭘 하고 있었느냐고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미케일리스가 슬슬 불안해질 무렵 마침 일꾼 몇이 그의 식당으로 가느라 문 앞을 지나갔고, 미케일리스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마음먹고 그 틈을 타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가지 않았다. 그냥 깜박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그뿐이라고 미케일리스는 말했다. 일곱 시가 조금 지나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아래층 정비소에서 윌슨 부인이 목청을 높여 악다구니를 퍼붓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아까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때려 봐!" 머틀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날 바닥에 패대기치고 때려 보라고, 이 더러운 겁쟁이 새끼야!"
잠시 뒤 머틀이 두 팔을 내젓고 고함을 지르며 땅거미 속으로 뛰쳐나왔다. 미케일리스가 제 가게 문간에서 한 발짝 떼기도 전에 일은 끝나 있었다.
신문들이 '죽음의 차'라고 부른 그 차는 짙어 가는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 한순간 비극적으로 휘청거리더니, 서지도 않고 그대로 다음 굽잇길을 돌아 사라져 버렸다. 마브로 미케일리스는 그 차의 색깔조차 확실히 알지 못해서, 맨 처음 달려온 경찰에게는 연한 초록색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차, 그러니까 뉴욕 쪽으로 가던 차는 100야드쯤 더 가서 멈춰 섰고, 운전자가 서둘러 되짚어 달려온 그곳에는 목숨이 난폭하게 꺼져 버린 머틀 윌슨이 길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진하고 검붉은 피를 흙먼지에 섞고 있었다.
미케일리스와 그 운전자가 가장 먼저 머틀에게 다다랐다. 그러나 아직 땀에 젖어 축축한 블라우스를 잡아 뜯어 헤쳤을 때, 두 사람은 왼쪽 젖가슴이 떨어지다 만 조각처럼 덜렁거리는 것을 보았고, 그 아래에서 심장이 뛰는지 귀를 기울여 볼 필요도 없었다. 입은 크게 벌어진 채 양쪽 입가가 조금 찢어져 있었다. 그토록 오래 쌓아 두었던 엄청난 생기를 내놓다가 목이 조금 막혔던 것 같았다.
우리는 아직 꽤 떨어져 있을 때부터 자동차 서너 대와 모여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사고로군!" 톰이 말했다. "잘됐어. 윌슨도 드디어 일거리가 좀 생기겠네."
톰은 속도를 늦추었지만 그래도 멈춰 설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비소 문간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숨을 죽인 채 무언가에 온 정신을 빼앗긴 그 얼굴들을 보고 톰은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좀 보고 가지." 톰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보기만 하고."
그제야 정비소 안에서 공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쉬지 않고 새어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쿠페에서 내려 문 쪽으로 걸어가는 사이 그 소리는 차츰 또렷해지더니, 헐떡이는 신음 속에서 거듭거듭 되풀이되는 "오, 하느님!"이라는 말이 되었다.
"여기 뭔가 큰일이 났군." 톰이 흥분해서 말했다.
톰은 발끝으로 서서 둥글게 둘러선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정비소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안을 밝히는 것이라고는 머리 위에서 흔들리는 철망 갓 속의 노란 전등 하나뿐이었다. 그러더니 톰은 목구멍에서 거친 소리를 한 번 내고는, 억센 두 팔을 우악스럽게 내질러 사람들을 밀어젖히며 안으로 헤치고 들어갔다.
톰이 헤집고 들어간 자리는 불평하는 웅성거림이 번지는 가운데 다시 메워졌고,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다 새로 몰려든 사람들이 줄을 흐트러뜨리는 바람에 조던과 나는 느닷없이 안쪽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머틀 윌슨의 시신은 담요 한 장에 싸이고 그 위에 또 한 장이 덧씌워진 채 벽 옆 작업대 위에 뉘어 있었다. 무더운 밤인데도 오한에 떠는 사람 같았다. 톰은 우리에게 등을 돌린 채 그 위로 몸을 숙이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곁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온 경찰 하나가 서서, 땀을 뻘뻘 흘리며 쓰고 고치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 가면서 조그만 수첩에 이름들을 받아 적고 있었다. 휑한 정비소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그 높고 신음 섞인 말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는데, 이윽고 사무실의 한 단 높은 문턱 위에서 두 손으로 문설주를 붙든 채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는 윌슨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며 이따금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윌슨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윌슨의 눈은 흔들리는 전등에서 벽 옆 작업대 위에 얹힌 것으로 천천히 내려갔다가 다시 전등으로 홱 되돌아가곤 했고, 그러는 내내 그 높고 끔찍한 부르짖음을 쉴 새 없이 토해 냈다.
"오, 하느니임! 오, 하느니임! 하느니임! 오, 하느니임!"
이윽고 톰이 고개를 홱 쳐들더니, 초점 잃은 눈으로 정비소 안을 휘 둘러보고 나서 경찰에게 무어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웅얼웅얼 건넸다.
"엠, 에이, 브이……" 경찰은 한 자씩 불러 가며 적고 있었다. "……오……"
"아니, 알……" 사내가 바로잡았다. "엠, 에이, 브이, 알, 오……"
"내 말 좀 들어!" 톰이 낮은 목소리로 사납게 내뱉었다.
"알……" 경찰이 말했다. "……오……"
"지……"
"지……" 톰의 넓적한 손이 어깨 위로 탁 떨어지자 경찰이 고개를 들었다. "뭐요, 형씨?"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거라고."
"차에 치였어요. 그 자리서 즉사."
"그 자리에서 즉사." 톰이 멍한 눈으로 되뇌었다.
"여자가 찻길루 뛰어들었어요. 개자식이 차를 세우지도 않았고."
"차가 두 대였어요." 미케일리스가 말했다. "하나는 오구, 하나는 가구. 알겠어요?"
"가다니, 어디로요?" 경찰이 날카롭게 물었다.
"하나는 이쪽으로, 하나는 저쪽으로 가구 있었다니까요. 그러니까 저 여자가……" 미케일리스의 손이 담요 쪽으로 올라가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옆구리로 툭 떨어졌다. "……저기로 뛰어나갔는데, 뉴욕서 오던 차가 그대로 들이받았어요. 시속 30마일인가 40마일로 달리던 차가요."
"여기 지명이 뭐요?" 경찰관이 다그쳐 물었다.
"이름 같은 거 없어요."
안색이 창백하고 옷을 잘 차려입은 흑인 사내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노란 차였어요." 그가 말했다. "커다란 노란 차요. 새 차였고요."
"사고 나는 거 봤어요?" 경찰이 물었다.
"아뇨. 하지만 저 아래서 그 차가 내 옆을 지나갔는데, 40마일도 넘게 밟고 있었어요. 50마일, 60마일은 됐을 거예요."
"이리 와서 이름 좀 댑시다. 자, 좀 비켜요. 이 사람 이름을 받아 적어야 하니까."
이 대화 가운데 몇 마디가 사무실 문간에서 몸을 흔들던 윌슨의 귀에까지 가 닿았던 모양인지, 헐떡이며 내지르는 그 부르짖음 사이로 갑자기 새로운 말이 터져 나왔다.
"무슨 차였는지 말 안 해 줘도 돼요! 무슨 차였는지 난 안다고요!"
톰을 지켜보고 있자니 윗옷 밑에서 어깨 뒤쪽의 근육 덩어리가 팽팽하게 조여드는 게 보였고, 이어 톰은 재빨리 윌슨에게 걸어가 그 앞에 버티고 서더니 두 팔 윗부분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톰이 퉁명스러우면서도 달래는 투로 말했다.
윌슨은 톰에게 눈길이 가 닿자 흠칫 발끝으로 솟구치듯 몸을 세웠는데, 톰이 붙잡아 세워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릎이 꺾여 주저앉았을 것이다.
"잘 들어." 톰이 윌슨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난 뉴욕에서 방금 막 도착했어. 우리가 얘기하던 그 쿠페를 갖다주러 오는 길이었다고. 오늘 오후에 내가 몰던 그 노란 차는 내 차가 아니었어. 알아듣겠어? 오후 내내 그 차는 구경도 못 했어."
톰이 하는 말이 들릴 만큼 가까이 있던 사람은 그 흑인과 나뿐이었지만, 경찰은 그 어조에서 뭔가를 알아챘는지 사나운 눈초리로 이쪽을 건너다보았다.
"그게 다 무슨 소리요?" 경찰이 따져 물었다.
"이 사람 친구야." 톰은 고개만 돌렸을 뿐 윌슨의 몸을 붙든 두 손은 늦추지 않았다. "사고 낸 차를 안다는군…… 노란 차였대."
어떤 막연한 충동에 이끌렸는지, 경찰은 미심쩍은 눈으로 톰을 쳐다보았다.
"그럼 댁의 차는 무슨 색이에요?"
"파란 차야. 쿠페."
"우린 뉴욕에서 곧장 오는 길입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조금 뒤에서 차를 몰고 오던 누군가가 그 말이 맞다고 거들자, 경찰은 돌아섰다.
"자, 이제 그 이름을 다시 제대로 불러 주면……"
톰은 윌슨을 인형처럼 번쩍 안아 들고 사무실로 들어가더니, 의자에 앉혀 놓고 다시 나왔다.
"누가 이리 와서 이 사람 곁에 좀 앉아 있지." 톰이 명령조로 딱 잘라 말했다.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두 사내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마지못해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나서, 톰은 두 사람을 안에 둔 채 문을 닫고 한 단짜리 계단을 내려왔는데 눈길은 작업대를 피하고 있었다. 내 곁을 지나치면서 톰이 속삭였다. "나가자."
우리는 쭈뼛쭈뼛 남의 눈을 의식하며, 톰의 위압적인 두 팔이 길을 트는 대로 아직도 불어나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왕진 가방을 든 의사 하나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엇갈렸는데, 30분 전에 혹시나 하는 헛된 희망을 걸고 불러 둔 바로 그 의사였다.
톰은 굽잇길을 벗어날 때까지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러다 가속 페달을 힘껏 밟자 쿠페는 밤길을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낮고 쉰 흐느낌이 들려서 보니 톰의 얼굴 위로 눈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겁쟁이 자식!" 톰이 훌쩍거렸다. "차를 세우지도 않았어."
바스락거리는 어두운 나무들 사이로 뷰캐넌네 집이 불쑥 우리 쪽으로 떠올라 왔다. 톰은 현관 옆에 차를 세우고 2층을 올려다보았는데, 덩굴 사이로 창문 두 개가 불빛으로 피어 있었다.
"데이지가 와 있군." 톰이 말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톰은 나를 흘끗 보더니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웨스트에그에 내려 주고 올 걸 그랬어, 닉. 오늘 밤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어느새 톰은 사람이 달라져 있었고, 목소리는 진지하고 단호했다. 달빛이 내린 자갈을 밟으며 현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톰은 짤막하고 시원시원한 말 몇 마디로 그 상황을 척척 정리해 버렸다.
"택시를 불러 줄 테니까 그걸 타고 집에 가. 기다리는 동안 조던하고 부엌에 들어가서 저녁이라도 좀 차려 달라고 해. 먹을 생각이 있으면 말이야." 톰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
"아니, 됐어. 그래도 택시는 불러 주면 고맙겠어. 밖에서 기다릴게."
조던이 내 팔에 손을 얹었다.
"들어오지 않을래, 닉?"
"아니, 됐어."
나는 속이 좀 메슥거렸고 혼자 있고 싶었다. 그래도 조던은 잠시 더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 아홉 시 반밖에 안 됐어." 조던이 말했다.
죽어도 들어가기 싫었다. 오늘 하루로 그 사람들 모두에게 질릴 대로 질려 있었는데, 문득 보니 그 모두 속에 조던도 들어 있었다. 내 표정에서 그런 기색을 얼마쯤 읽었던 모양인지, 조던은 홱 돌아서서 현관 계단을 뛰어 올라가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몇 분을 보냈고, 이윽고 안에서 누가 수화기를 드는 소리와 집사가 택시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대문 곁에서 기다릴 생각으로, 집을 등지고 진입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20야드도 채 못 갔을 때 누가 내 이름을 불렀고, 두 덤불 사이에서 개츠비가 길로 걸어 나왔다.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그의 분홍색 양복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던 걸 보면, 그 무렵 나는 기분이 어지간히 이상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서 뭐 하세요?" 내가 물었다.
"그냥 서 있습니다, 올드 스포트."
왠지 그건 비열한 짓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는 곧 저 집을 털러 들어갈 참인지도 몰랐고, 그의 등 뒤 어두운 덤불 속에서 음험한 얼굴들이, 이른바 '울프심 쪽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오는 길에 무슨 소동이라도 보셨습니까?" 잠시 뒤 그가 물었다.
"네."
개츠비가 머뭇거렸다.
"그 여자는 죽었습니까?"
"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데이지한테도 그럴 것 같다고 했어요. 충격은 한꺼번에 오는 편이 낫지요. 데이지는 꽤 잘 견뎠습니다."
그는 데이지가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만이 중요하다는 듯이 말했다.
"샛길로 해서 웨스트에그로 왔고, 차는 제 차고에 넣어 뒀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도 우리를 못 봤을 겁니다. 물론 장담은 못 하지만요."
그 무렵 나는 그가 너무나 싫어져서, 그 생각이 틀렸다고 굳이 일러 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 여자는 누구였습니까?" 그가 물었다.
"윌슨 부인이에요. 남편이 그 정비소 주인이고요.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게, 제가 핸들을 꺾어 보려고 했는데……" 그가 말을 끊었고, 순간 나는 진실을 짐작했다.
"데이지가 운전했어요?"
"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하지만 물론 제가 운전했다고 할 겁니다. 그러니까, 뉴욕을 떠날 때 데이지가 몹시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운전을 하면 좀 진정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차와 막 엇갈리는 순간 이 여자가 우리 쪽으로 뛰어나왔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제 눈에는 그 여자가 우리를 누군가 아는 사람으로 여기고 무슨 말을 하려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데이지가 처음에는 그 여자를 피해 맞은편 차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가, 그만 겁을 먹고 도로 틀었어요. 제 손이 핸들에 닿는 바로 그 순간 충격이 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거예요."
"몸이 다 찢겨서……"
"그 얘기는 하지 마세요, 올드 스포트." 그가 움찔했다. "어쨌든, 데이지가 가속 페달을 밟아 버렸어요. 세우게 하려고 했지만 데이지가 세우질 못해서, 제가 손 브레이크를 당겼지요. 그러자 데이지가 제 무릎 위로 쓰러졌고, 그다음엔 제가 몰고 왔습니다.
"내일이면 괜찮아질 겁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저는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서, 저 사람이 오늘 오후의 그 불미스러운 일로 데이지를 들볶으려 드는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데이지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는데, 저 사람이 조금이라도 험하게 굴면 불을 껐다가 다시 켜기로 했습니다."
"톰은 데이지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지금은 데이지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아요."
"저는 그 사람을 못 믿습니다, 올드 스포트."
"얼마나 기다리실 거예요?"
"필요하다면 밤새도록요. 어쨌든 다들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요."
그때 문득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데이지가 운전했다는 걸 톰이 알게 된다면 어떨까. 톰은 거기서 어떤 연결 고리를 보았다고 여길지도 몰랐다. 아니, 무슨 생각이든 할 수 있었다. 나는 집을 바라보았다. 아래층에는 불 켜진 창이 두세 개 있었고, 2층 데이지의 방에서는 분홍빛이 은은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내가 말했다. "무슨 소란이 벌어질 기미가 있는지 제가 가서 볼게요."
나는 잔디밭 가장자리를 따라 되돌아가, 자갈길을 소리 죽여 가로지른 다음 발끝으로 베란다 계단을 올라갔다. 응접실 커튼이 열려 있어서 방이 비었다는 게 보였다. 석 달 전 그 6월 밤에 우리가 저녁을 먹었던 현관을 가로질러 가자 작은 네모꼴 불빛 하나가 나타났는데, 아마 식료품실 창문인 듯했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지만 창턱께에 틈 하나가 벌어져 있었다.
데이지와 톰은 부엌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고, 둘 사이에는 식은 프라이드치킨 한 접시와 에일 두 병이 놓여 있었다. 톰은 식탁 너머로 데이지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골똘했던지 그 손이 어느새 데이지의 손 위에 내려앉아 그 손을 덮고 있었다. 이따금 데이지는 톰을 올려다보며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행복하지 않았다. 둘 다 치킨에도 에일에도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그렇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그 광경에는 영락없이 자연스러운 친밀함이 감돌고 있어서, 누가 보았더라도 두 사람이 한통속이 되어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발끝으로 현관을 빠져나오는데, 내 택시가 어두운 길을 더듬으며 집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개츠비는 내가 두고 온 진입로의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은 다 조용합니까?" 그가 불안한 듯 물었다.
"네, 다 조용해요." 나는 머뭇거렸다. "이제 집에 가서 좀 주무시는 게 좋겠어요."
개츠비는 고개를 저었다.
"데이지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싶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올드 스포트."
그는 윗옷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더니, 내가 곁에 있으면 그 불침번의 신성함에 흠이라도 간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려 간절한 눈길로 집을 살폈다. 그래서 나는 걸어 나왔고, 그는 달빛 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며.
주
1. 트리말키오(Trimalchio)는 1세기 로마 작가 페트로니우스의 소설 《사티리콘》에 나오는 인물. 노예 출신으로 벼락부자가 되어, 손님들을 불러 모아 터무니없이 사치스러운 잔치를 벌인다.
2. 민트 줄렙(mint julep)은 버번위스키에 설탕과 민트 잎, 잘게 부순 얼음을 넣은 칵테일. 미국 남부, 특히 켄터키주에서 즐겨 마신다.
3. 빌럭시(Biloxi)는 미시시피주 멕시코만 연안의 도시로, 테네시주에는 빌럭시가 없다. '블록스(Blocks)'라는 별명과 상자(boxes)를 만들었다는 말이 빌럭시라는 이름과 소리로 맞물리는 말장난이다.
4. 카피올라니(Kapiolani)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공원이고, 뒤에 나오는 펀치볼(Punch Bowl)은 호놀룰루 시내의 사화산 분화구다. 톰과 데이지는 결혼식 뒤 남태평양으로 석 달 동안 여행을 떠났다(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