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에 관하여 제1권
1 노바투스1 형님, 형님께서는 분노를 어떻게 누그러뜨릴 수 있는지 글로 써 달라고 제게 청하셨습니다. 형님께서 여러 격정(affectus) 가운데서도 유독 이 격정을 두려워하시는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어 보입니다. 모든 격정 가운데 가장 흉하고 사납기 때문입니다. 다른 격정에는 그래도 어딘가 고요하고 잔잔한 구석이 있지만, 이것은 온통 들끓으며 내닫기만 합니다. 고통과 무기, 피와 처형을 바라는, 조금도 사람답지 않은 욕망으로 미쳐 날뛰고, 남을 해칠 수만 있다면 제 몸은 돌보지 않으며, 겨눈 칼끝으로 곧장 뛰어들고, 복수하는 사람마저 함께 끌고 쓰러질 복수를 탐합니다.
그래서 어떤 현자들은 분노를 짧은 광기(insania)라고 불렀습니다. 분노도 광기처럼 자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체면을 잊고, 맺어진 정을 돌아보지 않으며, 한번 시작한 일에는 고집스레 매달리고, 이성(ratio)과 조언에는 귀를 닫고, 하찮은 까닭에도 들끓으며, 무엇이 공정하고 참된지 가려볼 줄 모르니, 깔아뭉갠 것 위에서 함께 부서져 내리는 무너진 건물과 꼭 닮았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려면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미친 사람에게는 틀림없는 표가 있습니다. 대담하고 위협하는 얼굴, 찌푸린 이마, 험상궂은 낯빛, 다급한 걸음, 가만있지 못하는 손, 달라진 안색, 잦고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그렇습니다. 화내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표가 나타납니다. 눈은 이글거리며 번득이고, 가슴 깊은 데서 피가 끓어올라 온 얼굴이 시뻘겋고, 입술은 떨리고, 이는 악물리고, 머리털은 곤두서고, 숨은 짓눌린 듯 쇳소리를 내고, 제풀에 비틀리는 마디마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나고,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말이 툭툭 끊기고, 손뼉을 연거푸 치고, 발로 땅을 구르고, 온몸이 들썩이며 분노의 거센 위협을 쏟아 냅니다. 스스로를 일그러뜨리며 부풀어 오른 그 얼굴은 보기에 흉하고 끔찍해서, 이 악덕이 더 가증스러운지 더 추한지 모를 지경입니다.
다른 악덕은 숨겨 두고 남몰래 키울 수 있습니다. 분노는 제 모습을 드러내며 얼굴로 터져 나오고, 클수록 더 뚜렷하게 끓어오릅니다. 어떤 짐승이든 해치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징조가 먼저 나타나고, 온몸이 평소의 차분한 모습을 벗어던지며 제 사나움을 한층 돋우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멧돼지는 입에 거품을 물고 엄니를 비벼 갈며, 황소는 허공에 뿔을 휘두르고 발굽으로 모래를 차 올리며, 사자는 으르렁거리고, 성난 뱀은 목을 부풀리며, 미친개는 눈빛이 음산해집니다. 본래 아무리 무섭고 해로운 짐승이라도, 분노가 덮치는 순간 새로운 사나움이 더해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 짐승은 없습니다. 물론 다른 격정들도 감추기 어렵다는 것을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정욕도 두려움도 대담함도 제 표를 드러내니 미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어떤 격렬한 흔들림이든 마음에 들어오면서 얼굴에 아무 움직임도 일으키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릅니까? 다른 격정은 드러나지만, 분노는 불거져 나옵니다.
2 이제 분노가 낳은 결과와 해악을 살펴보고자 하신다면, 인류에게 이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재앙은 없습니다. 살육과 독살, 서로를 고발하며 나란히 상복 차림이 된 피고들, 도시의 몰락과 온 민족의 멸망, 나라의 경매 창2 아래 매물로 나온 지도자들의 목숨, 지붕 밑에 들이댄 횃불, 성벽 안에 갇히지 않고 적의 불길로 드넓은 땅을 환히 밝히는 불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이름 높던 도시들의 주춧돌이 이제는 알아보기도 어렵게 된 것을 보십시오. 그 도시들을 허문 것이 분노입니다. 수백 리에 걸쳐 사람 하나 없이 버려진 황무지를 보십시오. 그 땅을 비운 것이 분노입니다. 불행한 운명의 본보기로 기억에 전해지는 그 많은 지도자를 보십시오. 분노는 누구는 제 침상에서 찔러 죽였고, 누구는 식탁의 신성한 법도 안에서 쳐 죽였고, 누구는 법의 보호 아래 사람들로 붐비는 포룸 한복판에서 갈가리 찢었습니다. 누구에게는 아들의 손에 피를 흘리게 했고, 누구에게는 노예의 손에 왕의 목을 베이게 했고, 누구에게는 십자가 위에서 사지가 찢어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한 사람 한 사람이 받은 벌만 늘어놓았습니다. 분노가 하나하나 겨누어 타오른 사람들은 제쳐 두고, 칼에 베여 쓰러진 민회와, 군대를 풀어 도륙한 평민과, 뒤섞인 파멸 속에 통째로 사형을 선고받은 온 민족을 보고 싶으시다면 어떻겠습니까 〈…〉
〔단편: 브라가의 마르티누스, 『분노에 관하여』 2〕3
분노는 가장 좋고 가장 올바른 것을 모조리 그 반대로 바꿔 놓습니다. 분노는 누구를 사로잡든 그가 어떤 의무도 기억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버지에게 분노를 주면 원수가 되고, 아들에게 주면 부모를 죽이는 자가 되고, 어머니에게 주면 계모가 되고, 시민에게 주면 적이 되고, 왕에게 주면 참주가 됩니다.
〔단편: 락탄티우스, 『신의 분노에 관하여』 17.13〕
분노란 불의(iniuria)를 앙갚음하려는 욕망입니다. 포세이도니오스4의 말로는, 자기를 부당하게 해쳤다고 여기는 사람을 벌하려는 욕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분노란 자기를 해쳤거나 해치려 한 사람을 해치려고 마음이 들끓는 것이다."
〈…〉 마치 그들이 우리의 보살핌을 저버리거나 우리의 권위를 업신여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어떻습니까? 군중은 왜 검투사들에게 화를 내며, 그것도 검투사들이 기꺼이 죽어 주지 않는 것을 불의로 여길 만큼 터무니없이 화를 냅니까? 군중은 자기가 업신여김을 당했다고 판단하고, 얼굴과 몸짓과 열기로 구경꾼에서 적수로 돌변합니다. 이런 것은 무엇이든 분노가 아니라 분노 비슷한 것이어서, 넘어지면 땅을 때려 주기를 바라고 왜 화가 났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화를 낼 때가 많은 아이들의 분노와 같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까닭도 없고 불의를 당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불의를 당했다는 인상(species)과 벌하고 싶은 욕망이 얼마쯤은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때리는 시늉에 속아 넘어가고, 용서를 비는 척 흘리는 눈물에 달래지며, 거짓 복수로 거짓 고통이 사라집니다.
3 "우리는 이미 해친 사람보다 앞으로 해칠 사람에게 화를 낼 때가 많다. 그러니 분노가 불의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칠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 이미 우리를 해치고 있고, 불의를 저지르려는 사람은 이미 불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힘센 사람들에게 화를 내면서도, 바랄 수도 없는 벌을 탐하지는 않는 일이 흔하다. 그러니 분노가 벌하려는 욕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분노가 벌을 내리려는 욕망이라고 했지 벌을 내릴 능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도 욕망합니다. 다음으로, 가장 높은 사람에게라도 벌이 내리기를 바라지 못할 만큼 비천한 사람은 없습니다. 해치는 일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힘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도 우리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분노가 고통을 되갚으려는 욕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정의와 이 정의가 어떻게 다른지 낱낱이 따지자면 길어집니다. 두 정의를 반박하는 말이 있습니다. 들짐승도 화를 내지만, 불의를 당해 성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벌을 주거나 고통을 주려는 것도 아니며, 그런 결과를 낳기는 해도 그것을 노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들짐승에게는, 아니 사람 말고는 무엇에게도 분노가 없습니다. 분노는 이성의 적이지만, 이성이 깃들 자리가 있는 곳이 아니면 어디에서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들짐승에게는 충동(impetus)이 있고, 광포함과 사나움과 덤벼드는 기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치가 없듯 분노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쾌락에는 사람보다 더 절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노래한 시인을 믿으실 까닭은 없습니다.
"멧돼지는 성낼 줄을 잊고, 암사슴은 날랜 걸음을 믿을 줄을,
곰은 힘센 소 떼에 덤벼들 줄을 잊었다."5
시인이 성낸다고 한 것은 들썩여 덤벼든다는 뜻입니다. 짐승들은 용서할 줄 모르듯 화낼 줄도 모릅니다. 말 못 하는 짐승에게는 사람의 격정이 없고, 다만 그와 비슷한 어떤 충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 짐승에게 사랑과 미움이 있다면 우정과 반목, 불화와 화합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의 흔적이 짐승에게도 얼마쯤 남아 있기는 하지만, 선과 악은 사람의 가슴에만 깃듭니다. 분별, 앞을 내다보는 힘, 부지런함, 생각은 사람 말고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고, 짐승은 사람의 덕(virtus)뿐 아니라 사람의 악덕과도 거리가 멉니다. 짐승은 겉모습만큼이나 속 생김새도 통째로 사람과 다르며, 왕 노릇을 하는 그 으뜸 부분, 곧 지도 이성(principale)부터 달리 빚어졌습니다. 짐승에게도 목소리가 있지만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없고 어지러우며 말을 이루지 못하고, 혀가 있지만 묶여 있어 이리저리 놀리지 못하듯이, 지도 이성도 섬세하지 못하고 정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짐승도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의 모습과 인상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인상이 흐리고 뒤죽박죽입니다. 그 때문에 짐승은 사납게 내달리고 거칠게 날뛰지만, 두려움과 근심, 슬픔과 분노는 없고 그와 비슷한 무엇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은 금세 가라앉고 정반대로 바뀝니다. 짐승은 더없이 사납게 날뛰고 겁에 질렸다가도 곧 풀을 뜯고, 으르렁대며 미친 듯 내닫던 끝에 곧바로 고요와 잠이 찾아옵니다.
4 분노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풀어 말했습니다. 분노가 성마름(iracundia)과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합니다. 취한 사람이 술꾼과 다르고, 겁먹은 사람이 겁쟁이와 다른 것과 같습니다. 화난 사람이 성마른 사람이 아닐 수 있고, 성마른 사람이 때로는 화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분노를 여러 이름으로 갈래지어 나누지만, 그 밖의 갈래는 우리 말에 제 낱말이 없으니 넘어가겠습니다. 물론 우리도 사람을 두고 가시 돋쳤다, 모질다 하고, 그에 못지않게 발끈한다, 사납다, 고함친다, 까다롭다, 거칠다고 합니다. 이것은 모두 분노의 여러 차이입니다. 여기에 까탈스럽다는 말을 넣어도 좋습니다. 성마름 가운데 유난히 까다로운 한 갈래입니다. 어떤 분노는 고함 안에서 가라앉고, 어떤 분노는 잦은 만큼 끈질기며, 어떤 분노는 손은 사나워도 말은 아끼고, 어떤 분노는 쓰라린 말과 욕설로 쏟아져 나옵니다. 어떤 분노는 불평하고 외면하는 데서 더 나아가지 않고, 어떤 분노는 깊고 무거워 안으로 파고듭니다. 여러 얼굴을 한 이 악에는 그 밖에도 천 가지 갈래가 있습니다.
5 분노가 무엇인지, 사람 말고 다른 짐승에게도 일어나는지, 성마름과 어떻게 다른지, 그 갈래가 몇이나 되는지는 따져 보았습니다. 이제는 분노가 본성에 맞는지, 쓸모가 있는지, 그래서 어느 만큼은 붙들어 둘 만한지를 따져 봅시다.
분노가 본성에 맞는지는 사람을 들여다보면 분명해집니다. 마음이 바른 상태에 있는 동안 사람보다 온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분노보다 잔인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보다 남을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분노보다 남에게 사나운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서로 돕도록 태어났고, 분노는 서로 망하게 하려고 생겨났습니다. 사람은 모이려 하고 분노는 갈라서려 하며, 사람은 이롭게 하려 하고 분노는 해치려 하며, 사람은 모르는 이까지 도우려 하고 분노는 가장 아끼는 이까지 덮칩니다. 사람은 남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제 몸까지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고, 분노는 남을 끌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제 몸도 위험 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러니 자연이 빚은 가장 훌륭하고 가장 흠 없는 작품에 이 사납고 해로운 악덕을 덧씌우는 사람보다 자연을 더 모르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앞서 말했듯이 분노는 벌을 탐합니다. 그런 욕망이 사람의 더없이 평온한 가슴에 깃든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조금도 맞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은 은혜와 화합으로 이루어지며, 두려움이 아니라 서로 아끼는 마음으로 묶여 동맹을 맺고 서로 돕습니다.
6 "그러면 어떤가? 때로는 꾸짖어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지 않은가?" 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분노 없이, 이성으로 해야 합니다. 꾸짖음은 해치는 듯 보여도 해치지 않고 고칩니다. 휘어진 창 자루를 바로잡으려고 불에 쬐고, 부러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펴려고 쐐기를 박아 조이듯이, 우리도 악덕으로 비뚤어진 성품을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 바로잡습니다. 의사를 보십시오. 의사는 가벼운 병에는 먼저 일상의 습관을 크게 건드리지 않고, 먹고 마시고 운동하는 데 질서를 세워, 생활의 짜임새를 바꾸는 것만으로 건강을 굳히려 합니다. 그다음은 양을 조절해 효과를 보는 것입니다. 양을 조절하고 질서를 세워도 효과가 없으면 무언가를 덜어 내고 잘라 냅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음식을 끊게 하고 굶겨서 몸의 짐을 덜어 줍니다. 부드러운 처방이 헛되이 끝나면 핏줄을 째고, 팔다리가 몸에 붙은 채 해를 끼치며 병을 퍼뜨리면 거기에 칼을 댑니다. 결과가 몸을 살린다면 어떤 치료도 가혹해 보이지 않습니다. 법을 지키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동안에는 말로, 그것도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의 성품을 고쳐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설득하고, 훌륭하고 공정한 것을 바라는 마음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며, 악덕은 미워하고 덕은 귀히 여기게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더 엄한 말로 넘어가 여전히 타이르면서 나무라야 합니다. 마지막에야 형벌로 내려가되, 그것도 아직은 가볍고 되돌릴 수 있는 형벌이어야 합니다. 가장 무거운 형벌은 가장 무거운 죄에만 내려서, 죽는 것이 죽는 사람 자신에게도 이로운 경우가 아니면 아무도 죽지 않게 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점에서 그는 의사와 다를 것입니다. 의사는 목숨을 베풀어 줄 수 없는 환자에게는 편안한 죽음을 마련해 주지만,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을 치욕 속에 사람들 앞에 내세워 그 목숨을 거둡니다. 누구든 벌받는 것을 즐겨서가 아닙니다. 그토록 사람답지 않은 사나움은 현자와 거리가 멉니다. 그들을 모두에게 본보기로 삼고, 살아서는 쓸모 있기를 마다했으니 죽어서라도 나라에 쓸모가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본성은 벌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도 사람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분노는 벌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논증도 하나 끌어오겠습니다. 다른 학파의 말이라도 우리와 같은 대목이라면 빌려 쓴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플라톤은 말합니다. "선한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6 벌은 해칩니다. 그러니 벌은 선한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고, 그래서 분노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벌이야말로 분노에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이 벌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벌을 쾌락으로 삼는 격정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7 분노가 본성에 맞지 않는다 해도, 자주 쓸모가 있었으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노는 마음을 북돋우고 부추깁니다. 분노가 밑에서 불을 지피고 그 박차가 몰아대어 대담한 사람들을 위험 속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용기도 전쟁에서 장한 일을 하나도 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분노를 없애지 말고 누그러뜨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넘쳐흐르는 것은 덜어 내어 이로운 한도 안에 묶어 두되, 그것이 없으면 행동이 무기력해지고 마음의 힘과 기운이 풀려 버릴 부분만은 붙들어 두자는 것입니다. 첫째, 해로운 것은 다스리기보다 막아 내기가 쉽고, 들인 뒤에 절제시키기보다 아예 들이지 않기가 쉽습니다. 해로운 것이 한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으면 다스리는 자보다 힘이 세져서, 잘리거나 줄어들기를 참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고삐를 넘겨받은 이성 자체도 격정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만 힘이 있습니다. 이성이 격정과 뒤섞여 더럽혀지면, 쫓아낼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붙잡아 둘 수 없습니다. 한번 흔들려 제자리에서 내던져진 정신은 저를 떠미는 것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은 시작만 우리 손에 있고, 그다음은 제 힘으로 우리를 휩쓸어 가 되돌아갈 길을 남겨 두지 않습니다. 낭떠러지로 내던져진 몸은 제 뜻대로 할 수 없고, 떨어지기 시작하면 버티지도 멈추지도 못합니다. 되돌릴 수 없는 추락이 모든 생각과 뉘우침을 끊어 버려서, 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곳에 이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도 이와 같아서, 분노와 사랑과 그 밖의 격정에 몸을 던지고 나면 그 기세를 억누를 수가 없게 됩니다. 제 무게와, 아래로 기울기 마련인 악덕의 본성이 마음을 휩쓸어 밑바닥까지 몰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8 가장 좋은 것은 분노를 처음 부추기는 것을 곧바로 물리치고, 그 씨앗부터 맞서 싸우며, 분노에 빠지지 않도록 애쓰는 것입니다. 분노가 한번 우리를 엇길로 끌고 가기 시작하면, 격정이 일단 들어오고 우리가 제 뜻으로 그에게 무슨 권리라도 내준 뒤에는 이성이 아무 힘도 쓰지 못하므로, 성한 데로 되돌아오기가 어렵습니다. 그 뒤로 격정은 우리가 허락하는 만큼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은 만큼 할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적은 국경에서부터 막아야 합니다. 적이 일단 들어와 성문 안으로 밀고 들어서면 포로가 정해 주는 한도 따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은 따로 떨어져 바깥에서 격정을 지켜보며 마땅한 정도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격정으로 바뀌므로, 이미 넘겨주어 약해진 그 쓸모 있고 이로운 힘을 다시 불러올 수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둘은 서로 떨어진 처소를 따로 두고 있지 않습니다. 격정과 이성은 마음이 더 낫게 또는 더 나쁘게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에 자리를 내주고 악덕에 사로잡혀 짓눌린 이성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겠습니까? 더 나쁜 것이 섞여 우세해진 그 뒤죽박죽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겠습니까? "그러나 분노하면서도 자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렇다면 분노가 시키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을 만큼 자제합니까, 아니면 무언가는 합니까? 하나도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이성보다 더 굳센 무언가라도 지닌 것처럼 여겨 불러들이던 분노가 일을 해내는 데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끝으로 묻겠습니다. 분노는 이성보다 강합니까, 약합니까? 더 강하다면 이성이 어떻게 분노에 한도를 정해 주겠습니까? 따르는 것은 대개 더 약한 쪽뿐인데 말입니다. 더 약하다면 이성은 분노 없이 혼자서도 일을 해내기에 넉넉하고, 더 약한 것의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가 나도 흔들리지 않고 자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 말입니까? 분노가 이미 스러져 저절로 물러갈 때이지, 한창 끓어오를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분노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가? 분노하는 중에도 미워하는 사람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놓아주며 해치기를 삼가는 때가 있지 않은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격정이 격정을 되받아치고, 두려움이나 욕망이 무언가를 얻어 냈을 때입니다. 그때 분노가 가라앉은 것은 이성의 은혜가 아니라 격정들끼리 맺은 믿을 수 없는 나쁜 평화 덕분입니다.
9 다음으로, 분노에는 쓸모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분노가 싸움에 나설 마음을 벼려 주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넉넉한 덕은 결코 악덕의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덕은 기세가 필요할 때마다 화를 내지 않고 떨쳐 일어서며, 필요하다고 판단한 만큼 달아올랐다가 늦춥니다. 투석기로 쏘는 무기도 얼마나 세게 감아 날릴지가 쏘는 사람 손에 달려 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분노는 필요하다. 분노가 마음을 채우고 기세에 불을 붙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쳐부술 수 없다. 다만 분노를 장수로 쓰지 말고 병사로 써야 한다."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분노가 이성의 말을 듣고 이끄는 대로 따른다면 그것은 이미 분노가 아닙니다. 고집스레 거스르는 것이 분노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분노가 맞서 버티고,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지 않고 제멋대로 사납게 내달린다면, 퇴각 신호를 무시하는 병사만큼이나 마음에 쓸모없는 부하입니다. 그러므로 분노가 한도를 받아들인다면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하고, 더는 분노가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는 분노는 고삐 풀리고 길들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해로우니 도움으로 꼽을 수 없습니다. 결국 분노가 아니든지, 쓸모가 없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벌 자체를 탐해서가 아니라 마땅히 그래야 하기에 벌을 내리는 사람은 화난 사람으로 꼽아서는 안 됩니다. 계획에 따를 줄 아는 병사라야 쓸모 있는 병사입니다. 격정은 장수로서나 부하로서나 똑같이 나쁩니다.
10 그러므로 이성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 거친 충동을 결코 도우미로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성은 그런 충동 앞에서 아무런 권위도 없고, 그와 맞먹고 닮은 충동을 맞세우지 않고는 결코 누를 수 없습니다. 분노는 두려움으로, 게으름은 분노로, 겁은 욕망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성이 언젠가 악덕에게로 피신하다니, 그런 불행은 덕과 멀리 있기를 바랍니다! 제 악에 기대어야만 안전한 마음, 화내지 않고는 용감할 수 없고, 탐하지 않고는 부지런할 수 없고, 두려워하지 않고는 고요할 수 없는 마음은 믿을 만한 쉼을 얻지 못하고 흔들리며 출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마음은 어느 격정의 종살이로 들어가 참주 밑에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 덕을 악덕의 피호민 신세로 끌어내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이성이 격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이성은 아무 힘도 없게 되고, 격정과 대등하고 닮은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성 없는 격정이 무분별한 것이나 격정 없는 이성이 무력한 것이나 매한가지라면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 있을 수 없다면 둘은 대등합니다. 그런데 격정을 이성과 같은 자리에 놓는 것을 누가 참겠습니까? "격정은 알맞은 정도라면 쓸모가 있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아니, 본래 쓸모 있는 것이라야 그렇습니다. 그러나 격정이 명령과 이성을 참지 못한다면, 절도를 지켜 얻는 것은 기껏해야 작을수록 해를 덜 끼친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알맞은 격정이란 알맞은 악일 뿐입니다.
11 "그러나 적과 맞설 때는 분노가 필요하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때만큼 필요 없을 때도 없습니다. 그때는 충동이 마구 쏟아져서는 안 되고, 절제되고 명령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우리보다 훨씬 억세고 고생도 훨씬 잘 견디는 야만족을 꺾어 놓는 것이 제 몸에 가장 해로운 분노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검투사도 기술이 지켜 주고, 분노가 무방비로 내놓습니다. 다음으로, 이성이 같은 일을 해낸다면 분노가 무슨 소용입니까? 사냥꾼이 짐승에게 화를 낸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사냥꾼은 덤벼드는 짐승을 받아 내고 달아나는 짐승을 뒤쫓습니다. 이 모든 일을 이성이 분노 없이 해냅니다. 알프스를 넘어 쏟아져 들어온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7의 그 숱한 무리를 쓸어 없애, 그 큰 참패의 소식을 제 겨레에게 전한 것이 전령이 아니라 소문뿐이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용기 대신 분노가 있었다는 것 말고 무엇이겠습니까? 분노는 이따금 앞을 막는 것을 밀어붙여 쓰러뜨리기도 하지만, 그보다 자주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게르만족보다 기개 높은 이가 누구입니까? 돌격할 때 그들보다 매서운 이가 누구입니까? 그들보다 무기를 좋아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무기 속에서 태어나 무기 속에서 자라며, 다른 일은 다 팽개치고 오직 무기만 돌봅니다. 어떤 고난이든 그들보다 단단히 견디는 이가 누구입니까? 그들은 대부분 몸을 가릴 옷도 마련하지 않았고, 끝없이 이어지는 혹독한 추위를 피할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히스파니아인과 갈리아인, 전쟁에는 무른 아시아와 시리아 사람들이 군단이 눈에 띄기도 전에 그들을 베어 넘기니, 그들이 쉽게 당하는 까닭은 오직 성마름 하나입니다. 자, 쾌락도 사치도 재물도 모르는 그 몸과 그 마음에 이성을 주고 규율을 주어 보십시오. 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는 틀림없이 옛 로마의 기풍을 되찾아야 할 처지가 될 것입니다. 파비우스8는 흔들리던 제국의 힘을 무엇으로 되살렸습니까? 머뭇거리고, 끌고, 늦출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화난 사람들은 그 어느 것도 할 줄 모릅니다. 그때 벼랑 끝에 서 있던 제국은, 파비우스가 분노가 부추기는 만큼 감행했더라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나라의 운을 깊이 헤아리고, 이제는 무엇 하나를 잃으면 전부를 잃을 판인 남은 힘을 따져 본 뒤, 울분도 복수도 제쳐 두고 오직 이로움과 기회만 노렸습니다. 그는 한니발보다 분노를 먼저 이겼습니다. 스키피오9는 어떻습니까? 그는 한니발과 카르타고 군대, 마땅히 분노해야 할 모든 것을 내버려 둔 채, 악의를 품은 자들에게 사치스럽고 게으르다는 말을 들을 만큼 느긋하게 전쟁을 아프리카로 옮겨 가지 않았습니까? 다른 스키피오10는 또 어떻습니까? 그는 누만티아 둘레에 오래도록 진을 치고 앉아, 누만티아가 카르타고보다 더디게 정복된다는 자신과 나라의 울분을 담담하게 견디지 않았습니까? 그는 적을 둘러막고 가두어, 마침내 적이 제 칼에 쓰러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는 전투에서도 전쟁에서도 쓸모가 없습니다. 분노는 무모함으로 기울고, 남을 위험에 빠뜨리려다 자기 위험은 살피지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용기는 오래도록 두루 살피고 자기를 다스리며 천천히, 작정한 대로 나아가는 용기입니다.
12 "그러면 어떤가? 선한 사람은 제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제 어머니가 끌려가는 것을 보아도 화를 내지 않는가?"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화를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갚고, 지켜 낼 것입니다. 그런데 분노가 없으면 효심(pietas)이 너무 약한 박차가 될까 걱정하십니까? 아니면 같은 투로 이렇게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떤가? 선한 사람은 제 아버지나 아들이 칼에 베이는 것을 보면서도 울지 않고 정신을 잃지도 않는가?" 하찮은 위험의 낌새만 스쳐도 여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선한 사람은 흔들림 없이, 두려움 없이 제 의무를 다할 것이고, 선한 사람에게 걸맞은 일을 하면서도 사내답지 못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살해당하려 한다면 저는 지킬 것입니다. 살해당했다면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이지, 마음이 아파서가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도 제 사람들이 불의를 당하면 화를 낸다." 테오프라스토스11여, 이렇게 말하는 것은 더 굳센 가르침에 미움을 씌우려는 것이고, 재판관을 제쳐 두고 둘러선 구경꾼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당하면 화를 내니, 사람들이 저마다 하는 일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판정해 주리라는 계산입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도 겪어 아는 격정을 정당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더운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도, 유리그릇이 깨져도, 신발에 진흙이 튀어도 똑같이 화를 냅니다. 그런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효심이 아니라 나약함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을 때나 갖고 놀던 호두를 잃었을 때나 똑같이 우는 것과 같습니다. 제 사람들을 위해 화를 내는 것은 효심 깊은 마음이 아니라 나약한 마음입니다. 아름답고 떳떳한 것은 떠밀리거나 미쳐 날뛰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하고 판단하고 내다보면서, 의무 그 자체에 이끌려 부모와 자식, 벗과 동료 시민을 위해 수호자로 나서는 일입니다. 분노만큼 복수를 탐하는 격정은 없고, 바로 그 때문에 분노만큼 복수에 서툰 격정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욕망이 그렇듯이 너무 서두르고 제정신이 아니어서, 서둘러 가려는 바로 그곳을 스스로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분노는 평화에서든 전쟁에서든 좋은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평화를 전쟁처럼 만들고, 싸움터에서는 마르스가 어느 편에나 공평하다는 것을 잊으며, 제 힘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이에 남의 손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악덕이 이따금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해서 쓸모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열병도 어떤 병은 덜어 주지만, 그렇다고 열병을 아예 앓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병 덕분에 건강해진다는 것은 끔찍한 치료법입니다. 분노도 마찬가지여서, 독약이나 추락이나 난파가 뜻밖에 도움이 될 때가 있듯 이따금 도움이 되었다 해도, 그렇다고 몸에 이롭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해로운 것이 목숨을 살린 적은 많습니다.
13 다음으로, 지닐 만한 것은 클수록 더 좋고 더 바랄 만합니다. 정의가 선이라면 거기서 무언가를 덜어 내면 더 나아지리라고 말할 사람은 없고, 용기가 선이라면 어느 한 부분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노도 클수록 더 좋아야 합니다. 어떤 선이든 늘어나는 것을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러나 분노가 커지는 것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니 분노가 있는 것도 쓸모가 없습니다. 자라면서 악이 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분노는 쓸모가 있다. 사람을 더 잘 싸우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고 누군가 말합니다. 그런 논리라면 술 취함도 쓸모가 있습니다. 술은 사람을 뻔뻔하고 대담하게 만들고, 맨정신이 아닐 때 칼을 더 잘 쓴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정신착란과 광기도 힘을 내는 데 꼭 필요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광란에 빠지면 더 힘이 세지는 일이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거꾸로 두려움이 사람을 대담하게 만든 적도 있지 않습니까? 죽음이 두려워 가장 게으른 자들까지 싸움터로 뛰어든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노, 술 취함, 두려움 같은 것들은 추하고 덧없는 자극일 뿐이어서, 악덕이 조금도 필요 없는 덕을 무장시켜 주지는 못하고 다만 본래 굼뜨고 비겁한 마음을 잠깐 들어 올릴 뿐입니다. 분노 없이는 용감하지 못했을 사람이 아니고서는, 화를 낸다고 더 용감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분노는 덕을 도우러 오는 것이 아니라 덕을 대신하러 옵니다. 게다가 분노가 선이라면 가장 완전한 사람마다 분노가 따라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성마른 것은 갓난아이와 노인과 병자입니다. 약한 것은 무엇이든 본래 투덜대기 마련입니다.
14 테오프라스토스는 말합니다. "선한 사람이 악한 자들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사람은 선할수록 더 성마를 것입니다. 오히려 선할수록 더 온화하고, 격정에서 풀려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보십시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선한 사람이 미워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을 그런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은 길을 잃은 탓인데 말입니다. 길 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분별 있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일을 바른 도리에 어긋나게 하는지, 자기가 한 일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일이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면, 그는 이제 자기에게도 화를 낼 것입니다. 공정한 재판관은 자기 사건과 남의 사건에 서로 다른 판결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자기를 무죄로 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죄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양심이 아니라 증인을 돌아보며 하는 말입니다. 잘못하는 사람들에게 온화한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고, 그들을 뒤쫓기보다 불러 돌려세우는 것이 얼마나 더 사람다운 일입니까! 길을 몰라 들판을 헤매는 사람은 내쫓기보다 바른길로 데려다주는 편이 낫습니다.
15 그러므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타이르기도 하고 힘을 쓰기도 하며, 부드럽게도 엄하게도 바로잡아, 꾸짖음 없이가 아니라 분노 없이 자기에게도 남에게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기가 고쳐 주는 사람에게 누가 화를 내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바로잡을 수 없고, 그들에게는 부드러운 구석도, 좋은 희망을 걸 만한 데도 없다." 그렇다면 손대는 것마다 더 나쁘게 만들 그들을 인간 무리에서 없애야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로 악하기를 그치게 해야 합니다. 다만 미움 없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를 그 자신에게서 빼내 줄 때야말로 그에게 가장 크게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인데, 제가 무슨 까닭으로 그를 미워하겠습니까? 제 팔다리를 잘라 낼 때 그 팔다리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분노가 아니라 가엾은 치료입니다. 우리는 미친개를 때려죽이고, 사납고 길들지 않는 황소를 잡고, 병든 가축은 무리에 병을 옮기지 않도록 칼을 대며, 기형으로 태어난 새끼는 없애고, 자식이라도 허약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나면 물에 빠뜨립니다. 성한 것에서 쓸모없는 것을 가려내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입니다. 벌을 내리는 사람에게 화내는 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벌은 판단에 따라 내릴 때 사람을 더 잘 고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노예에게 말했습니다. "화가 나 있지 않다면 너를 때렸을 것이다." 그는 노예를 꾸짖는 일을 마음이 더 성할 때로 미루고, 그때는 자기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소크라테스조차 감히 분노에 자기를 맡기지 못했는데, 도대체 누구의 격정이 절제되어 있겠습니까?
16 그러므로 길을 잘못 든 자와 죄지은 자를 다스리는 데 화난 징벌자는 필요 없습니다. 분노는 마음이 저지르는 잘못이니, 잘못하는 사람이 잘못을 바로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떤가? 강도에게도 화내지 말란 말인가? 그러면 어떤가? 독살범에게도 화내지 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는 제 피를 뽑을 때 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벌이든 약으로 씁니다. "너는 아직 잘못의 첫걸음에 머물러 있어 크게 넘어지지는 않으나 자주 넘어진다. 먼저 남몰래, 다음에는 드러내 놓고 꾸짖어 고쳐 보겠다. 너는 말로 고칠 수 있는 데를 이미 너무 멀리 지나왔으니 불명예로 붙들어 두겠다. 너에게는 더 센 것, 뼈저리게 느낄 만한 것을 지져 새겨야 하니, 추방해 낯선 땅으로 보내겠다. 너는 악이 이미 굳어 더 독한 처방을 부르니, 나라의 사슬과 감옥을 쓰겠다. 너는 마음을 고칠 길이 없고 죄에 죄를 엮어 가며, 이제 악인에게 결코 모자라지 않을 핑계에 떠밀리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 자체가 죄를 지을 넉넉한 까닭이 되었다. 악을 들이마셔 창자에 섞어 버려서, 창자와 함께가 아니면 악이 빠져나올 수 없다. 가엾게도 오래전부터 죽기를 구해 왔다. 우리가 은혜를 베풀어, 남을 괴롭히고 너 자신도 괴롭히는 그 광기를 거두어 주고, 네 형벌과 남의 형벌 속을 뒹굴어 온 너에게 남은 단 하나의 좋은 것을 당장 치러 주겠다. 바로 죽음이다." 제가 가장 크게 이롭게 해 주는 바로 그 사람에게 무엇 하러 화를 내겠습니까? 때로는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연민입니다. 제가 군대의 병원이나 부잣집 병실에 들어갔다면, 저마다 다른 병을 앓는 모든 이에게 같은 처방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그 많은 마음속에서 온갖 악덕을 보며 나라를 돌보라고 불려 온 사람이니, 저마다의 병에 맞는 약을 찾아, 누구는 부끄러움이, 누구는 타향살이가, 누구는 고통이, 누구는 궁핍이, 누구는 칼이 고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 정무관이 옷을 뒤집어 입고12 나팔을 불어 민회를 불러 모아야 할 때가 오더라도, 저는 미쳐 날뛰지도 적의를 품지도 않고 법의 얼굴로 법정 단상에 오를 것입니다. 그 엄숙한 선고문은 사나운 목소리가 아니라 부드럽고 무게 있는 목소리로 읊고, 화가 나서가 아니라 엄격하게 법대로 집행하라고 명할 것입니다. 죄인의 목을 베라고 명할 때도, 존속 살해범을 가죽 자루에 꿰매 넣을 때도13, 군법에 따른 처형으로 보낼 때도, 반역자나 나라의 적을 타르페이아 바위14에 올려 세울 때도, 저는 뱀과 독 있는 짐승을 칠 때와 같은 얼굴, 같은 마음으로 분노 없이 그 일을 할 것입니다. "벌하려면 성마름이 필요하다." 어떻습니까? 법이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없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고 보십니까? 그러니 우리는 법의 마음가짐을 본받아야 합니다. 법은 화를 내지 않고 정할 뿐입니다. 선한 사람이 악한 짓을 보고 화내는 것이 마땅하다면, 악한 자들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는 것도 마땅할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운을 찾아 주어도 모자랄 자들이 번성하며 운의 너그러움을 함부로 누리는 것보다 더 분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들이 누리는 복을 시기 없이 바라보듯 그들의 죄도 분노 없이 바라볼 것입니다. 좋은 재판관은 비난받을 일을 단죄하되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가? 현자도 그런 일을 손에 쥐면 마음이 건드려져 여느 때보다 흔들리지 않겠는가?" 인정합니다. 현자도 가볍고 엷은 움직임은 느낄 것입니다. 제논15이 말하듯이, 현자의 마음에도 상처가 아문 뒤에 흉터는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자는 격정의 낌새나 그림자 같은 것은 느끼겠지만, 격정 자체는 없을 것입니다.
17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격정은 잘 쓰기만 하면 무기 노릇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 격정을 전쟁 도구처럼 손에 드는 사람 마음대로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다면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에게 쥐여 주는 이 무기는 제 힘으로 싸우고, 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기를 쥐는 것이 아니라 무기가 사람을 쥡니다. 다른 도구는 필요 없습니다. 자연은 이성으로 우리를 넉넉히 무장시켰습니다. 자연이 준 이 무기는 단단하고 영원하며 말을 잘 듣고, 양날이 아니어서 주인에게 되돌아와 꽂힐 일도 없습니다. 이성은 혼자 힘으로 앞일을 내다보는 데뿐 아니라 일을 해내는 데도 넉넉합니다. 그런데 이성이 성마름에게 보호를 구하다니, 굳건한 것이 불확실한 것에게, 믿음직한 것이 믿지 못할 것에게, 성한 것이 병든 것에게 보호를 구하다니,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성마름의 손길이 꼭 필요해 보이는 유일한 영역인 행동에서도, 이성은 혼자서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이성은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판단하면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자기를 바꿀 만큼 자기보다 나은 것을 찾아낼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은 한번 정한 것을 지킵니다. 분노는 연민에 밀려 물러선 적이 많습니다. 분노에는 단단한 힘이 아니라 헛된 부풀음만 있고, 시작만 거셀 뿐이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일어나 강과 늪에서 생겨난 바람이 거세지만 오래가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분노는 큰 기세로 시작하지만 때가 되기도 전에 지쳐 주저앉고, 오로지 잔인한 짓과 새로운 형벌만 궁리하다가도 막상 벌을 내릴 때가 되면 이미 꺾이고 누그러져 있습니다. 격정은 금세 무너지지만, 이성은 한결같습니다. 게다가 분노가 끝까지 버틴 때에도, 죽어 마땅한 자가 여럿이면 둘이나 셋의 피를 보고 나서 죽이기를 그칠 때가 있습니다. 분노는 첫 일격만 매섭습니다. 뱀의 독도 굴에서 막 기어 나올 때나 해롭지, 여러 번 물어 독이 다 빠지면 이빨이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똑같은 죄를 지은 자들이 똑같은 벌을 받지 않고, 덜 지은 자가 더 받는 일이 흔합니다. 분노가 더 생생할 때 걸려들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모든 면에서 고르지 않습니다. 마땅한 정도를 넘어 내달리는가 하면, 마땅히 가야 할 곳에 못 미쳐 멈춥니다. 제멋대로 굴고, 기분대로 판단하고, 들으려 하지 않고, 변론할 틈을 주지 않고, 한번 움켜쥔 것은 놓지 않으며, 제 판단이 아무리 그릇되어도 빼앗기려 하지 않습니다.
18 이성은 양쪽 모두에게 시간을 주고, 자기도 말미를 청해 진실을 가려낼 여유를 얻습니다. 분노는 서두릅니다. 이성은 공정한 것을 판결하려 하고, 분노는 자기가 판결한 것이 공정해 보이기를 바랍니다. 이성은 다루는 사안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분노는 사안 밖에서 얼씬거리는 하찮은 것들에 흔들립니다. 피고의 너무 태연한 얼굴, 너무 또랑또랑한 목소리, 너무 거침없는 말, 너무 멋 부린 옷차림, 너무 요란한 변호인단, 대중의 호의가 분노를 들쑤십니다. 분노는 변호인이 미워서 피고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일이 많습니다. 진실이 눈앞에 들이밀어져도 오류를 아끼고 감쌉니다. 반박당하기를 싫어하고, 잘못 시작한 일에서는 뉘우치기보다 고집을 부리는 편이 더 떳떳해 보입니다.
우리 시대에 그나이우스 피소16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러 악덕에 물들지 않았지만 비뚤어진 사람이어서, 의연함 대신 완고함을 좋아했습니다. 피소는 어느 병사가 휴가에서 동료 없이 혼자 돌아오자, 데려오지 못한 그 동료를 죽이기라도 한 것처럼 화를 내며 끌어내 처형하라고 명했고, 동료를 찾아볼 시간을 조금만 달라는 병사의 청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병사는 진지 밖으로 끌려 나가 이미 목을 내밀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죽은 줄 알았던 그 동료가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처형을 맡은 백인대장은 집행병에게 칼을 거두라고 명하고, 운이 이미 병사에게 결백을 돌려주었으니 피소에게서도 결백을 돌려받게 할 셈으로 사형수를 피소에게 도로 데려갔습니다. 두 동료 병사는 서로 얼싸안은 채, 온 진영이 크게 기뻐하는 가운데 구름같이 몰려든 병사들과 함께 피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피소는 미쳐 날뛰며 단상에 올라 둘 다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죽이지 않은 병사도, 죽지 않은 병사도. 이보다 분통 터지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사람의 결백이 드러났기 때문에 두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피소는 셋째 사람까지 보탰습니다. 사형수를 도로 데려온 백인대장마저 끌어내라고 명했습니다. 한 사람이 결백하다는 이유로 세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 세워져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아, 성마름은 광란의 핑계를 지어내는 데 얼마나 재주가 좋습니까! 피소는 말했습니다. "너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처형한다. 너는 동료가 사형을 선고받은 원인이 되었으니 처형한다. 너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도 사령관에게 따르지 않았으니 처형한다." 그는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자 죄 셋을 지어낼 궁리를 해냈습니다.
19 거듭 말하지만 성마름에는 이런 나쁜 점이 있습니다. 다스림받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성마름은 진실이 제 뜻에 어긋나게 드러나면 진실에게까지 화를 냅니다. 고함치고 소란을 피우며 온몸을 들썩이고,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점찍어 둔 사람들을 뒤쫓습니다. 이성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성도 필요하다면 말없이 조용히 집안 전체를 뿌리째 들어내고, 나라에 해로운 가문을 아내와 자식까지 함께 멸하고, 집을 허물어 땅바닥과 평평하게 만들고, 자유에 적대하는 이름을 뿌리 뽑습니다. 이를 갈지도 않고 고개를 흔들지도 않으며, 재판관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렇게 합니다. 재판관의 얼굴은 무거운 선고를 내릴 때일수록 더 평온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히에로니모스17는 말합니다. "누군가를 때리고 싶을 때 먼저 제 입술부터 깨물 까닭이 무엇인가?" 그가 만일 총독이 단상에서 뛰어내려 권표 든 시종에게서 권표를 빼앗고, 남의 옷이 너무 더디게 찢긴다며 제 옷을 찢어 대는 꼴을 보았다면 어땠겠습니까? 식탁을 뒤엎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잔을 내동댕이칠 까닭이 무엇입니까? 기둥에 몸을 들이받을 까닭이 무엇입니까? 머리털을 쥐어뜯고 넓적다리와 가슴을 칠 까닭이 무엇입니까? 남에게 바라는 만큼 빨리 터져 나오지 못하자 제게로 되돌아오는 분노가 얼마나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곁에 있는 이들이 붙잡고서, 제발 자기 자신과 화해하라고 달래야 합니다.
분노 없이 저마다에게 마땅한 벌을 내리는 사람은 그런 짓을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을 찾아낸 사람을 놓아줄 때가 많습니다. 저지른 일을 뉘우치는 모습이 좋은 희망을 약속하거나, 악이 마음 깊은 데서 나오지 않고 흔히 하는 말로 마음 거죽에 붙어 있을 뿐이라고 알아보면, 받는 쪽에도 주는 쪽에도 해가 되지 않을 사면을 베풀 것입니다. 때로는 큰 죄를 작은 죄보다 가볍게 다스릴 것입니다. 큰 죄는 잔인함이 아니라 실수로 저질렀고, 작은 죄에는 숨겨지고 덮이고 오래 묵은 교활함이 깃들어 있다면 말입니다. 같은 잘못이라도 한 사람은 부주의로 저질렀고 다른 사람은 일부러 해를 끼치려 했다면, 두 사람에게 같은 벌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어떤 처벌에서든 늘 이것을 지킬 것입니다. 어떤 벌은 악한 자를 고치려고, 어떤 벌은 없애려고 내린다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지나간 일이 아니라 앞으로 올 일을 볼 것입니다. 플라톤의 말처럼 "분별 있는 사람은 잘못이 저질러졌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이 저질러지지 않도록 벌한다."18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지만 앞으로 올 일은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굽히지 않는 악의 본보기로 삼고 싶은 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할 것입니다. 그들 자신이 죽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죽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겁주어 막으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따지고 헤아려야 하는 사람이, 더없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일, 곧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에 다가갈 때 얼마나 모든 동요(perturbatio)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화난 사람에게 칼을 맡기면 안 됩니다.
20 분노가 도량(magnitudo animi)에 무언가 보탠다고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큰 것이 아니라 부은 것입니다. 나쁜 체액이 가득 차 팽팽해진 몸에서 병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해로운 과잉일 뿐입니다. 정신 나간 마음에 들려 사람의 생각을 넘어선 곳까지 솟아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무언가 높고 숭고한 것을 숨 쉰다고 믿지만, 그 밑에는 단단한 것이 하나도 없고, 토대 없이 자라난 것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분노에는 디디고 설 곳이 없습니다. 분노는 굳건하고 오래갈 것에서 생겨나지 않으며 바람만 차 있고 속이 비어서, 무모함이 용기와, 오만이 자신감과, 침울함이 근엄함과, 잔인함이 엄격함과 떨어진 만큼이나 도량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숭고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은 크게 다릅니다. 성마름은 크고 품위 있는 일을 하나도 꾀하지 못하며, 오히려 짓무르고 병든 몸이 아주 살짝 닿기만 해도 신음하듯 자주 쓰라려하는 것은 제 나약함을 아는 무기력하고 불행한 마음의 짓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분노는 무엇보다 여자와 아이의 악덕입니다. "그러나 분노는 사내들에게도 찾아온다." 사내들 가운데에도 아이 같고 여자 같은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가? 화난 사람들 입에서 큰마음에서 나온 듯한 말이 나오기도 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참된 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저 끔찍하고 가증스러운 말, "미워해도 좋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면"19이 그런 말입니다. 술라의 시대에 쓰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움을 받기를 바란 것과 두려움을 사기를 바란 것 가운데 어느 쪽이 자기에게 더 나쁜 소원이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미워해도 좋다." 사람들이 자기를 저주하고, 음모를 꾸미고, 짓밟으려 하리라는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덧붙였습니까? 신들이여, 그에게 벌을 내리소서! 미움받아 마땅한 처방을 찾아낸 셈입니다. "미워해도 좋다." 무엇을 조건으로? "복종하기만 한다면"? 아닙니다. "인정하기만 한다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그런 조건이라면 저는 사랑받는 것조차 바라지 않겠습니다. 이 말이 큰 기개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잘못 아신 것입니다. 그것은 큰 것이 아니라 흉포한 것입니다. 화난 사람들의 말을 믿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들의 소리는 크고 위협적이지만, 속마음은 더없이 겁에 질려 있습니다. 더없이 말 잘하는 티투스 리비우스20의 책에 나오는 말도 참이라고 여길 까닭이 없습니다. "선하기보다 위대한 재능을 지닌 사람." 이 둘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위대하다면 선하기도 할 것이고 선하지 않다면 위대하지도 않을 것이니, 제가 이해하는 도량은 흔들리지 않고 속까지 단단하며 밑바닥부터 고르고 굳건한 것이어서 악한 성품에는 깃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성품은 무섭고 소란스럽고 파괴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선함을 받침과 힘으로 삼는 위대함은 결코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말과 몸짓과 온갖 겉치레로 자기가 위대하다고 믿게 할 것이고, 큰마음에서 나왔다고 여길 만한 말을 내뱉기도 할 것입니다. 칼리굴라21가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경하기보다 흉내 내기를 더 좋아하던 무언극 배우들의 공연을 하늘이 천둥으로 방해한다고 화를 냈고, 제 술잔치가 벼락에 놀라 흩어진다고 화를 냈습니다. 벼락이 영 빗나가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그는 유피테르에게 결투를, 그것도 패자를 살려 보내지 않는 끝장 결투를 청하며 호메로스의 저 시구를 외쳤습니다.
"나를 들어 올려라. 아니면 내가 너를 들어 올리겠다."22
얼마나 미친 짓이었습니까! 그는 유피테르조차 자기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자기가 유피테르까지 해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 말이 음모자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데 적잖이 한몫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피테르조차 참아 넘기지 못하는 자를 참는 것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는 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21 그러니 분노에는, 거세게 보이고 신과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 보일 때조차, 큰 것도 고귀한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분노가 큰마음을 낳는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사치도 큰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치는 상아 위에 몸을 얹고, 자줏빛 옷을 걸치고, 황금 지붕 아래 살고 싶어 하며, 땅을 옮기고, 바다를 가두고, 강물을 폭포로 떨어뜨리고, 숲을 공중에 매달려 합니다. 탐욕도 큰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탐욕은 금과 은 더미 위에 엎드려 지키고, 속주라고 불러도 될 만한 땅을 갈며, 관리인 하나하나에게 맡긴 땅이 옛 집정관들이 제비 뽑아 다스리던 영토보다 넓습니다. 정욕도 큰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욕은 해협을 헤엄쳐 건너고, 소년들을 떼로 거세하며,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의 칼 아래로 뛰어듭니다. 야심도 큰마음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심은 한 해짜리 관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할 수만 있다면 집정관 연표를 제 이름 하나로 채우고, 온 세상에 제 칭호를 새긴 비문을 늘어세우려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아무리 멀리 나아가고 아무리 넓게 뻗어도 비좁고 비참하고 낮습니다. 숭고하고 높은 것은 덕뿐입니다. 평온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크지 않습니다.
주
1. 세네카의 형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노바투스. 뒷날 웅변가 유니우스 갈리오의 양자가 되어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라는 이름을 얻었다.
2. 나라가 몰수한 재산을 경매에 부칠 때는 창을 꽂아 표지로 삼았다. 내전 때 정적들을 살생부에 올려 재산을 팔아넘긴 일을 가리킨다.
3. 2장 3절 뒤로 원문이 얼마간 전하지 않는다. 비판본은 후대 저자 둘이 이 책을 인용한 대목으로 그 자리를 메웠다. 6세기 브라가의 주교 마르티누스가 쓴 『분노에 관하여』와 4세기 초 락탄티우스가 쓴 『신의 분노에 관하여』다. 원문은 그 뒤 문장 중간에서 다시 이어진다.
4. 포세이도니오스(기원전 135 무렵~기원전 51 무렵). 시리아의 아파메이아 출신으로 로도스에서 가르친 스토아 철학자.
5.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7.545~546. 아이기나섬에 역병이 덮쳐 짐승들마저 기운을 잃은 모습을 그린 대목이다.
6. 플라톤 『국가』 1권 335d. 정의로운 사람은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는 소크라테스의 논증이다.
7. 이탈리아로 쳐들어온 게르만계 부족. 기원전 102년과 101년에 마리우스에게 잇달아 섬멸되었다.
8.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독재관으로서 한니발과 정면으로 맞붙기를 피하고 시간을 끌어 「지연자(쿵크타토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9. 대(大)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기원전 204년 한니발이 아직 이탈리아에 있을 때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를 쳤고, 202년 자마에서 한니발을 이겼다.
10. 소(小)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를 무너뜨렸고, 133년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를 오랜 포위 끝에 함락했다.
11. 테오프라스토스(기원전 371 무렵~기원전 287 무렵). 아리스토텔레스의 뒤를 이어 소요학파를 이끈 철학자.
12. 사형을 선고할 때 정무관은 고관의 토가를 벗고 상복 차림을 했다고 한다. 「뒤집어 입은 옷」이 정확히 어떤 차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 존속 살해범에게 내리던 벌. 죄인을 개·수탉·뱀·원숭이와 함께 가죽 자루에 꿰매 넣어 물에 던졌다.
14. 카피톨리움 언덕의 낭떠러지. 반역자를 여기서 떨어뜨려 죽였다.
15. 키티온의 제논(기원전 334 무렵~기원전 262 무렵). 스토아학파를 세웠다.
16.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티베리우스 때 시리아 총독을 지냈다. 기원후 19년 게르마니쿠스가 죽자 독살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이듬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7. 로도스의 히에로니모스. 기원전 3세기의 소요학파 철학자.
18. 플라톤 『법률』 11권 934a. 『프로타고라스』 324b에도 같은 생각이 나온다.
19. 로마의 비극 작가 아키우스(기원전 170~기원전 86 무렵)의 『아트레우스』에 나오는 대사. 술라는 기원전 82년 독재관이 되어 살생부로 정적들을 숙청했다.
20. 로마의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기원전 59~기원후 17). 이 구절은 남아 있는 그의 『로마사』에서는 찾을 수 없다.
21. 황제 칼리굴라(재위 37~41). 원문은 「가이우스 카이사르」. 41년 근위대 장교들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22. 호메로스 『일리아스』 23.724. 레슬링 시합에서 아이아스가 오디세우스에게 한 말이다. 저본은 그리스어 시구를 라틴 문자로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