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세네카 대화편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
차례
로그인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

1 마르키아 부인, 부인께서 여느 악덕과 마찬가지로 여자 마음의 나약함에서도 멀찍이 벗어나 계시고 사람들이 부인의 행실을 무슨 옛 본보기처럼 우러러본다는 것을 제가 알지 못했다면, 저는 감히 부인의 슬픔에 맞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내들조차 기꺼이 매달려 끌어안고 들어앉는 것이 슬픔이니까요. 또 이토록 불리한 때에, 이토록 적대적인 재판관 앞에서, 이토록 미움 사는 죄목을 두고, 부인이 운(fortuna)에게 무죄를 선고하시도록 만들 수 있으리라는 희망도 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게 믿음을 준 것은 이미 시험을 거친 부인의 굳센 마음과 큰 시련으로 증명된 부인의 덕(virtus)입니다.

부인께서 아버님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인은 아버님을 자식들 못지않게 사랑하셨습니다. 다른 점이라고는 아버님이 부인보다 오래 사시기를 바라지 않으셨다는 것 하나뿐이었지요. 아니, 그것마저 바라셨는지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큰 효심은 좋은 관습을 거스르는 일도 더러 스스로에게 허락하니까요. 부인은 아버님 아울루스 크레무티우스 코르두스1의 죽음을 힘닿는 데까지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야누스의 앞잡이들에게 둘러싸인 처지에서 예속을 벗어날 길은 그것 하나뿐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아버님의 결심을 거들지는 않으셨지만 지고 나서 손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 눈물을 쏟으셨고, 신음은 삼키셨을지언정 밝은 얼굴로 덮어 감추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도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효심으로 꼽히던 그 시대에 말입니다. 세상이 바뀌어 조금이나마 틈이 생기자, 부인은 형벌을 받았던 아버님의 재능을 사람들이 다시 쓸 수 있도록 돌려놓으셨습니다. 아버님을 참된 죽음에서 건져 내셨고, 그 더없이 용감한 분이 제 피로 쓴 책들을 다시 공공의 기록 속에 자리 잡게 하셨습니다. 부인은 로마의 학문에 더없는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 큰 부분이 이미 불타 버렸기 때문입니다. 후손에게도 더없는 공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에게는 굽히지 않은 사실의 기록이 전해질 것이고, 그 값은 저자가 비싸게 치렀습니다. 아버님 자신에게도 더없는 공을 세우셨습니다. 로마의 일을 아는 것이 값진 일로 여겨지는 동안, 조상들의 행적으로 돌아가 보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동안, 로마의 사내란 어떤 사람인지, 모든 사람이 이미 목을 꺾고 세야누스의 멍에 아래로 끌려들 때 꺾이지 않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재주와 마음과 손이 자유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 동안, 아버님의 기억은 살아 있고 앞으로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가장 아름다운 두 가지인 웅변과 자유 때문에 망각 속에 내던져졌던 아버님을 부인께서 끌어내지 않으셨다면 나라는 큰 손실을 입었을 것입니다. 아버님의 글은 지금 읽히고, 꽃피고, 사람들의 손에, 가슴에 받아들여져 어떤 세월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형 집행자들은 기억될 거리라고는 죄악 하나뿐인데, 그 죄악마저 머지않아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인의 이 큰 도량(magnitudo animi)을 보았기에 저는 부인이 여자라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고, 부인의 얼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이어진 슬픔이 한번 덮어씌운 뒤로 놓아주지 않는 그 얼굴 말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저는 몰래 다가가지도 않고, 부인의 마음을 슬쩍 속여 넘길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일부러 지난 불행을 되살려 냈고, 이 상처 또한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아시도록 그만큼 큰 상처가 아문 흉터를 보여 드렸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부드럽게 다루며 달래라고 하십시오. 저는 부인의 비탄과 맞붙어 싸우기로 했습니다. 지칠 대로 지쳐 말라 버린 그 눈, 바른대로 말하자면 이제는 그리움보다 버릇으로 흐르는 그 눈물을 저는 멈추게 하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부인이 이 치료를 반기시는 가운데 그리하겠고, 그게 안 되면 부인이 싫다 하셔도 그리하겠습니다. 아드님 대신 살아남은 자리에 앉혀 두신 그 슬픔을 부인께서 아무리 붙잡고 끌어안으셔도 말입니다. 대체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해 볼 것은 다 해 보았지만 모두 헛일이었습니다. 지친 벗들의 위로도, 부인과 인척 간인 위대한 분들의 권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버님께 물려받은 보배인 학문마저 귀먹은 귀를 그냥 스쳐 지나가니, 그 위안은 헛되어 잠깐 마음을 붙들어 두는 데도 미치지 못합니다. 가장 큰 고난도 가라앉히는 시간이라는 저 자연의 약조차 오직 부인에게만은 힘을 잃었습니다. 벌써 세 번째 해가 지나가는데도 그 처음의 격렬함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애도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굳세어져, 이제는 오래 머문 덕에 제 권리를 얻었고, 마침내 그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악덕이 돋아날 때 눌러 두지 않으면 깊이 뿌리를 내리듯, 이 슬프고 비참하고 제 몸을 향해 날뛰는 마음도 끝내는 제 쓰라림을 먹고 자라며, 고통은 불행한 마음의 비뚤어진 쾌락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부터 이 치료에 나서고 싶었습니다. 아직 막 일어나는 기세였다면 순한 약으로도 다잡을 수 있었겠지요. 오래 묵은 것과는 더 세게 싸워야 합니다. 상처도 피가 아직 생생할 때는 쉽게 낫습니다. 썩어서 고약한 종기가 되고 나면, 그때는 지지고, 깊이 헤집고, 손가락을 넣어 더듬어야 합니다. 이토록 굳어 버린 슬픔을 이제 와서 비위를 맞추며 부드럽게 다룰 수는 없습니다. 부숴야 합니다.

2 누군가를 타이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가르침으로 시작해 본보기로 끝맺는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관례를 바꾸는 편이 낫겠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다루어야 하니까요. 이치에 이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빛나는 이름과 권위를 들이대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려한 것에 넋을 잃는 사람의 마음은 권위가 붙들어 제멋대로 놓아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인 앞에 부인과 같은 여성이자 같은 시대를 산 두 사람의 가장 큰 본보기를 세워 보이겠습니다. 한 사람은 슬픔에 자기를 내맡겨 끌려다닌 여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은 불행을 당하고 더 큰 것을 잃었으면서도 제 불행이 저를 오래 다스리게 내버려 두지 않고 곧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여인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아내 리비아는 둘 다 젊은 아들을 잃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 아들이 장차 군주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옥타비아는 마르켈루스2를 잃었습니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아우구스투스가 기대기 시작한 젊은이, 제국의 짐을 그 어깨에 기대어 놓으려 한 젊은이였습니다. 마음이 날래고 재주가 힘찼으며, 그 나이와 그 재산을 생각하면 놀랄 만큼 검소하고 절제했고, 고생을 잘 견디고 쾌락을 멀리했습니다. 외삼촌이 그에게 무엇을 얹든, 말하자면 그 위에 무엇을 지어 올리든 넉넉히 받쳐 낼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무게에도 내려앉지 않을 주춧돌을 잘 고른 셈이었지요. 옥타비아는 평생토록 울고 탄식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 도움이 될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하나도 들이지 않았고, 남이 마음을 딴 데로 돌려 주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에 매달려 온 마음을 거기에 못 박은 채, 장례 때의 모습 그대로 평생을 지냈습니다. 일어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일으켜 주는 것을 마다했다는 말입니다. 눈물을 그치는 일을 자식을 두 번 잃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토록 사랑한 아들의 초상은 하나도 곁에 두려 하지 않았고, 누가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옥타비아는 세상의 모든 어머니를 미워했고, 그중에서도 리비아에게 가장 사납게 굴었습니다. 자기에게 약속되었던 행운이 리비아의 아들에게로 넘어간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둠과 외로움을 벗 삼아 지내며 오라비조차 돌아보지 않았고, 마르켈루스를 기리려고 지은 시들과 그 밖에 학문이 바치는 영예를 물리쳤으며, 어떤 위로에도 귀를 닫았습니다. 엄숙한 의례에서 물러나, 오라비의 위대함이 너무 눈부시게 둘레를 비추는 그 처지마저 미워하며, 땅에 묻히듯 숨어 지냈습니다. 자녀와 손주들이 곁에 앉아 있는데도 상복을 벗지 않았으니, 식구 모두를 모욕한 셈입니다. 그들이 다 살아 있는데도 자식을 잃은 사람처럼 지냈기 때문입니다.

3 리비아는 아들 드루수스3를 잃었습니다. 장차 위대한 군주가 될 사람이었고, 이미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 깊숙이 쳐들어가, 로마인이 있다는 것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곳에 로마의 군기를 꽂았습니다. 그는 원정 중에 죽었는데, 그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는 적들마저 존경을 바치며 서로 싸움을 멈추었고, 자기들에게 이로운 일을 감히 바라지도 못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맞은 이 죽음에 시민들과 속주들과 온 이탈리아의 크나큰 그리움이 더해졌습니다. 자치 도시와 식민 도시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장례의 예를 다하는 사이로 운구 행렬은 로마까지 이어졌고, 그 모습은 개선식을 꼭 닮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지막 입맞춤도, 숨을 거두는 입에서 나오는 반가운 마지막 말도 받지 못했습니다. 리비아는 먼 길을 따라 사랑하는 드루수스의 유해를 모시고 왔고, 온 이탈리아에 걸쳐 그토록 많은 화장 장작더미가 타오를 때마다 그만큼 여러 번 아들을 잃는 듯 슬픔이 덧났습니다. 그래도 아들을 무덤에 안치하자마자 아들과 함께 제 슬픔도 내려놓았고, 황제가 무사히 살아 있는 터에 체면에 맞고 도리에 맞는 만큼만 슬퍼했습니다. 그 뒤로도 리비아는 사랑하는 드루수스의 이름을 기리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사로운 자리에서나 공적인 자리에서나 어디서든 아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았고, 아들 이야기를 하고 듣기를 무엇보다 좋아했습니다. 리비아는 아들의 기억과 함께 살았습니다. 기억을 슬픈 것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은 그 기억을 붙들어 두지도, 자주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어느 본보기가 더 낫다고 보시는지 고르십시오. 앞의 본보기를 따르시겠다면 부인은 산 사람들 축에서 스스로를 빼내시게 됩니다. 남의 자식도, 부인의 자식도, 그토록 그리워하시는 그 아들까지도 외면하실 것입니다. 어머니들에게는 불길한 징조처럼 마주치실 것입니다. 점잖고 허락된 즐거움마저 부인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물리치실 것입니다. 햇빛 아래 미움을 받으며 들러붙어 계실 것이고, 어서 빨리 부인을 내던져 끝내 주지 않는다고 제 나이를 원수처럼 여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은 쪽으로 이름난 부인의 마음에 가장 부끄럽고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내보이시게 될 것입니다. 살기는 싫고 죽지는 못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나 더없이 훌륭한 이 여인의 본보기를 따라 좀 더 절도 있고 온화하게 처신하신다면, 부인은 고난 속에 머물지 않으실 것이고 고통으로 제 몸을 말려 죽이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불행하다고 해서 스스로에게 벌을 물리고 제 불행을 더 키우다니, 도대체 이 무슨 미친 짓입니까! 평생 지켜 오신 바른 행실과 삼가는 마음을 이 일에서도 보여 주십시오. 슬퍼하는 데도 절제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그 젊은이는 이름을 부르거나 떠올릴 때마다 늘 부인을 기쁘게 해 드릴 자격이 넉넉한 사람입니다. 살아 계실 때 늘 그러셨듯 밝고 기쁜 얼굴로 어머니를 맞으러 나오시게 한다면, 부인은 그 아드님을 더 나은 자리에 모시는 셈이 됩니다.

4 그렇다고 부인을 더 독한 가르침으로 끌고 가지는 않겠습니다. 사람의 일을 사람답지 않게 견디라고 명하거나, 장례를 치르는 바로 그날 어머니의 눈물을 말려 버리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부인과 함께 중재인 앞에 서겠습니다. 우리 사이에서 따질 것은 슬픔이 커야 하느냐, 끝이 없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인께서 가까이 모셨던 율리아 아우구스타4의 본보기가 더 마음에 드시리라는 것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리비아가 자기가 택한 길로 부인을 부르고 있습니다. 리비아는 불행이 가장 참을성 없고 사나운 첫 열기 속에서, 남편이 곁에 둔 철학자 아레이오스에게 자기를 위로하도록 맡겼고, 그 일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자기 슬픔으로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로마 인민보다, 버팀목 하나를 잃고 휘청이면서도 식구들의 애도에 꺾여서는 안 되던 아우구스투스보다, 아들 티베리우스보다도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효심이 지극해서, 온 민족이 울어 준 그 쓰라린 장례에서도 리비아가 잃은 것은 자식의 수 하나뿐이라고 느끼게 해 주었지요. 제 생각에 아레이오스는 제 평판을 누구보다 조심스럽게 지키는 이 여인에게 이렇게 다가가 이렇게 말문을 열었을 것입니다. "율리아 부인, 저는 부군 곁을 늘 지켜 온 사람이라 두 분께서 세상에 내놓으시는 일뿐 아니라 마음속 깊이 감추어 두신 움직임까지 다 압니다만, 제가 아는 한 부인께서는 오늘까지 누구도 부인을 탓할 거리를 찾지 못하도록 애쓰셨습니다. 그것도 큰일에서만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에서까지 지키셨습니다. 군주를 누구보다 거리낌 없이 심판하는 것이 평판인데, 그 평판에게 용서를 바라야 할 일은 하나도 하지 않으려 하셨지요. 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많은 일을 용서해 주되 어떤 일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것보다 아름다운 일은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 일에서도 늘 하시던 대로 하셔야 합니다. 덜 했더라면, 아니면 달리 했더라면 하고 나중에 바라게 될 일은 하나도 저지르지 마십시오."

5 "그다음으로 간곡히 청하오니, 벗들에게 까다롭고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 되지 마십시오. 그 사람들이 다 부인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드루수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쩔쩔맨다는 것을 부인께서도 모르지는 않으시겠지요. 그토록 빛나던 젊은이를 잊으면 그분께 누가 되고, 입에 올리면 부인께 상처가 될까 봐서입니다. 우리는 물러나 한자리에 모이면 그분이 하신 일과 하신 말씀을 그분이 받으실 만한 존경을 다해 기립니다. 그러나 부인 앞에서는 그분 이야기에 깊이 입을 다뭅니다. 그래서 부인은 가장 큰 즐거움을 잃고 계십니다. 아드님을 기리는 칭송 말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부인께서 그 칭송을 영원토록 늘이려 하시리라는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니 아드님 이야기가 오가는 말을 견디십시오. 아니, 오히려 불러들이십시오. 아드님의 이름과 기억에 귀를 활짝 여십시오. 이런 일을 당하면 위로의 말을 듣는 것까지 불행의 일부로 여기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것을 짐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지금 부인께서는 온몸을 한쪽으로만 기울이시고, 더 나은 것은 잊으신 채 부인의 처지를 나쁜 쪽에서만 바라보십니다. 아드님과 함께 지내던 날들과 반갑게 마주치던 순간들로 눈을 돌리지 않으시고, 어린 시절의 귀여운 응석으로도, 학업이 자라 가던 모습으로도 눈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일의 마지막 모습만 붙들고 계십니다. 그것만으로는 끔찍함이 모자라기라도 한 듯 그 위에 할 수 있는 것은 다 쌓아 올리십니다. 부디 간청하오니,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그 더없이 비뚤어진 영예를 탐하지 마십시오. 또 이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일이 잘 풀리고 삶이 순풍을 타고 나아갈 때 굳세게 처신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잔잔한 바다와 순한 바람은 키잡이의 솜씨조차 드러내 주지 못합니다. 마음을 시험할 거센 무언가가 부딪쳐 와야 합니다. 그러니 무릎 꿇지 마십시오. 아니, 오히려 발을 굳게 디디고 서서, 위에서 떨어진 짐이 무엇이든 떠받치십시오. 놀라시더라도 처음 들이닥치는 소리에만 놀라시면 됩니다. 담담한 마음만큼 운을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다음 아레이오스는 리비아에게 살아 있는 아들을 보여 주었고, 잃은 아들이 남긴 손주들을 보여 주었습니다.

6 마르키아 부인, 거기서 다룬 것은 부인의 사건이었고, 아레이오스가 곁에 앉아 준 사람도 부인이었습니다. 배역만 바꾸어 보십시오. 그가 위로한 사람은 부인입니다. 그러나 마르키아 부인, 이제껏 어떤 어머니가 잃은 것보다 더 큰 것을 빼앗기셨다고 해 봅시다. 저는 부인을 어루만져 달래지도, 부인의 불행을 작게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울어서 운명(fatum)을 이길 수 있다면, 우리 함께 웁시다. 하루하루를 모두 애도 속에 보내고, 밤마다 잠 못 이룬 채 슬픔으로 지새웁시다. 찢긴 가슴을 손으로 치고, 얼굴까지 할퀴며, 비탄이 도움이 된다면 온갖 잔인한 짓을 다 해 보게 둡시다. 그러나 아무리 가슴을 쳐도 죽은 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고 영원히 박혀 버린 몫이 어떤 비참함으로도 바뀌지 않는다면, 죽음이 앗아 간 것을 한번 붙들면 놓지 않는다면, 헛되이 버려지는 고통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키를 잡읍시다. 그 힘에 휩쓸려 엉뚱한 데로 떠내려가지 맙시다. 파도에 키를 빼앗기고, 펄럭이는 돛을 내버리고, 배를 폭풍에 내맡긴 키잡이는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다에 삼켜지는 순간에도 키 손잡이를 붙든 채 버틴 사람은 난파 속에서도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7 "하지만 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나치지 않은 동안이라면 누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잃을 때만이 아니라 떠나보낼 때에도 마음을 물어뜯는 아픔은 피할 수 없고, 가장 굳센 마음도 움츠러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연이 명한 것보다 생각(opinio)이 덧붙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말 못 하는 짐승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그리움은 얼마나 격렬하면서도 얼마나 짧습니까. 암소의 울음소리는 하루 이틀 들리다 말고, 암말이 넋을 잃고 이리저리 내닫는 것도 그보다 오래가지 않습니다. 들짐승은 새끼의 발자취를 쫓아 숲을 헤매고 털린 굴로 몇 번이고 돌아오지만, 그 사나운 몸부림도 잠깐 사이에 꺼집니다. 새들도 빈 둥지 둘레를 요란하게 울어 대며 맴돌지만 금세 잠잠해져 다시 제 날갯길로 돌아갑니다. 제 새끼를 오래 그리워하는 짐승은 사람 말고는 없습니다. 사람은 제 슬픔 곁에 붙어 서서 그것을 거들고, 느끼는 만큼이 아니라 작정한 만큼 아파합니다.

애도에 꺾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아시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자식을 잃는 똑같은 일이라도 남자보다 여자를, 온화하고 교양 있는 민족보다 야만인을, 배운 사람보다 못 배운 사람을 더 깊이 할퀴어 놓습니다. 그런데 자연에서 힘을 받은 것들은 누구에게나 같은 힘을 냅니다. 사람마다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불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어느 도시의 시민이든, 남자든 여자든 똑같이 태웁니다. 쇠는 어떤 몸에서든 베는 힘을 드러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힘을 자연이 주었고, 자연은 사람을 가려 정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애도와 야망은 저마다 버릇에 물든 대로 다르게 느낍니다. 그리고 두려워할 것 없는 것을 두고 미리 품은 무시무시한 생각이 사람을 나약하고 참을성 없게 만듭니다.

8 다음으로, 자연스러운 것은 시간이 흘러도 줄지 않는데, 고통은 긴 세월에 닳아 없어집니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날마다 들고일어나고, 약을 쓰면 오히려 끓어오르는 고통이라도, 사나운 기세를 누그러뜨리는 데 무엇보다 효험 있는 시간이 결국 그 힘줄을 끊어 놓습니다. 마르키아 부인, 부인께는 지금도 크나큰 슬픔이 남아 있고, 이제는 굳은살까지 박인 듯합니다. 처음처럼 들끓는 슬픔이 아니라 끈질기고 완고한 슬픔입니다. 그래도 세월이 이것마저 조금씩 덜어 낼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하실 때마다 마음이 풀릴 것입니다. 지금 부인은 스스로를 감시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슬퍼하도록 자신에게 허락하는 것과 슬퍼하라고 자신에게 명령하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애도의 끝을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끝내는 편이, 부인이 원치 않는데도 고통이 그치는 날을 넋 놓고 기다리기보다 그편이, 부인의 단아한 품성에 얼마나 더 어울리겠습니까! 부인께서 먼저 고통에게 절교를 선언하십시오.

9 "자연이 명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끈질기게 제 처지를 슬퍼하는가?" 나쁜 일이 닥치기 전에는 그런 일을 하나도 미리 떠올려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만은 면제받은 듯, 남들보다 평탄한 길에 들어선 듯 여기며, 남들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도 그것이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집 앞으로 그토록 많은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많은 때 이른 장례를 보면서도 우리는 어린 자식이 어른의 토가를 입을 날을, 군에 나갈 날을,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을 날을 마음속에 그립니다. 그토록 많은 부자가 하루아침에 가난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와도, 우리 재산 또한 똑같이 미끄러운 자리에 놓여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크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뜻밖의 일처럼 얻어맞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내다본 일은 부딪쳐 와도 힘이 덜합니다. 우리가 온갖 공격에 드러난 채 서 있고, 남들을 꿰뚫은 그 창들이 우리 둘레에서 떨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싶으십니까? 성벽이나, 적이 빽빽이 진을 치고 오르기도 가파른 곳으로 반쯤만 무장하고 다가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상처를 각오하고, 화살과 투창과 함께 위에서 날아오는 저 돌들이 모두 자기 몸을 겨누고 던져진다고 여기십시오. 옆에서든 등 뒤에서든 누가 쓰러질 때마다 이렇게 외치십시오. "운아, 너는 나를 속이지 못한다. 마음을 놓거나 한눈판 틈에 나를 덮치지도 못한다. 네가 무엇을 꾸미는지 나는 안다. 네가 친 것은 다른 사람이지만 노린 것은 나였다." 언제 누가 자기 재산을 곧 잃을 것처럼 바라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추방을, 궁핍을, 애도를 감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라고 일깨우면 누구든 불길한 징조처럼 뱉어 내고, 그런 일은 원수들의 머리 위로나 때를 못 가리고 일깨운 그 사람의 머리 위로나 떨어지라고 빌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많은 사람에게 일어난 것을 보면서도,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무대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아까운 빼어난 시구가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5

저 사람은 자식을 잃었습니다. 우리도 잃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결백도 칼끝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한 번도 겪으리라 내다보지 못한 일을 겪을 때, 바로 이 착각이 우리를 속이고 나약하게 만듭니다. 앞일을 내다본 사람은 닥친 불행에서 힘을 빼앗습니다.

10 마르키아 부인, 우리 둘레에서 바깥에서 빌려 온 빛으로 반짝이는 것은 무엇이든, 자식이든 관직이든 재산이든, 넓은 안채든, 들어가지 못한 피호민들로 북적이는 현관이든, 빛나는 이름이든, 지체 높거나 아름다운 아내든, 그 밖에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운 운수에 매달린 모든 것은 남에게서 빌려 온 장식일 뿐입니다. 이 가운데 선물로 받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무대는 여기저기서 그러모아 주인에게 돌려줄 소품들로 꾸며집니다. 그중 어떤 것은 첫날에, 어떤 것은 이튿날에 되돌려지고, 끝까지 남는 것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제 것들 사이에 놓인 듯 우쭐해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빌려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몫은 쓰고 누리는 것뿐이고, 그 기한은 선물을 준 이가 마음대로 정합니다. 기한을 정하지 않고 받은 것은 언제든 내줄 수 있게 챙겨 두었다가, 돌려 달라고 하면 불평 없이 돌려주어야 합니다. 빌려준 사람에게 욕을 퍼붓는 것은 가장 못된 빚쟁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식구를 모두, 태어난 순서대로 우리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이들이든 우리보다 먼저 가기를 스스로 바라는 것이 지극히 옳은 이들이든, 영원히 곁에 있으리라는 약속은커녕 오래 곁에 있으리라는 약속조차 받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에게 자주 일러 주어야 합니다. 떠나갈 것처럼, 아니 지금 떠나가고 있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운이 준 것은 무엇이든 보증인 없이 손에 넣은 물건처럼 지니십시오. 여러분, 자식에게서 즐거움을 낚아채십시오. 자식들도 여러분을 누리도록 내어 주십시오. 미루지 말고 모든 기쁨을 들이켜십시오. 오늘 밤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아니, 말미를 너무 넉넉히 드렸군요. 지금 이 시각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적이 뒤에서 바짝 쫓아옵니다. 곧 이 일행은 흩어지고, 곧 함께 지내던 이 막사는 함성 한 번에 무너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약탈당하는 판입니다. 가엾게도 여러분은 피란길 위에서 사는 법을 모르십니다.

아드님이 돌아가신 것이 슬프시다면, 그 탓은 아드님이 태어난 그때에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아드님께는 죽음이 선고되었으니까요. 아드님은 이 법 아래 태어나셨고, 이 운명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줄곧 아드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우리는 운의 왕국에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가혹하고 꺾을 수 없는 왕국에 들어와, 마땅한 일이든 마땅치 않은 일이든 운의 뜻대로 겪어야 합니다. 운은 우리 몸을 제멋대로, 모욕적으로, 잔인하게 다룰 것입니다. 누구는 불로 태울 것입니다. 벌로 갖다 대는 불일 때도 있고 치료로 갖다 대는 불일 때도 있습니다. 누구는 사슬로 묶을 것입니다. 그 일을 어떤 때는 적에게, 어떤 때는 같은 시민에게 맡길 것입니다. 누구는 벌거벗겨 정처 없는 바다에 내던지고, 파도와 싸우다 지친 그를 모래밭이나 해안에 뱉어 내지도 않고 어느 거대한 바다 짐승의 뱃속에 묻어 버릴 것입니다. 누구는 갖가지 병으로 바싹 말려 삶과 죽음 사이에 오래 붙잡아 둘 것입니다. 운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이며 제 노예들을 돌보지 않는 여주인처럼, 벌을 줄 때도 상을 줄 때도 갈피를 잡지 못할 것입니다.

11 삶의 한 부분을 두고 울 까닭이 무엇입니까? 삶 전체가 울 일입니다. 묵은 불행을 미처 다 치르기도 전에 새 불행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일을 절도 없이 견디는 여러분 여인들이야말로 절도를 지켜야 하고, 사람 가슴의 힘을 여러 슬픔에 고루 나누어 써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처지와 모두의 처지를 이렇게 잊어버리다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부인은 죽을 몸으로 태어나셨고 죽을 자식들을 낳으셨습니다. 부인 자신이 썩고 흘러내리는 몸으로 병에 거듭 시달리면서, 그토록 무른 재료로 단단하고 영원한 것을 품었으리라고 바라셨습니까? 아드님이 떠나셨다는 것은, 부인께서 아드님보다 운이 좋다고 여기시는 것들도 서둘러 달려가는 그 결승점까지 아드님이 먼저 달려가셨다는 말입니다. 포룸에서 소송을 벌이고, 극장에서 손뼉을 치고, 신전에서 기도하는 저 모든 무리가 걸음만 다를 뿐 그리로 갑니다. 부인이 사랑하시는 것도, 우러르시는 것도, 업신여기시는 것도 똑같은 한 줌의 재가 평평하게 고를 것입니다. 분명 이것을 〈…〉6 델포이 신탁의 말로 전하는 저 한마디,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조금만 흔들려도, 조금만 내던져져도 깨지는 그릇입니다. 산산조각 나는 데 큰 폭풍은 필요 없습니다. 어디에 부딪치든 부서집니다.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몸, 벌거벗고, 타고나기를 무기 하나 없고, 남의 도움이 아쉬우며, 운이 퍼붓는 온갖 모욕 앞에 내던져진 몸입니다. 팔뚝을 아무리 잘 단련해도 어느 짐승에게든 먹이가 되고 어느 짐승에게든 제물이 됩니다. 무르고 흘러내리는 것들로 엮여 있으면서 겉모양만 번듯하고, 추위도 더위도 수고도 견디지 못하며, 그렇다고 가만히 쉬기만 해도 썩어 들어갑니다. 제 먹을 것을 두려워하니, 모자라면 기운이 빠지고 넘치면 터져 버립니다. 늘 불안하고 조마조마하게 지켜야 하고, 숨은 빌려 쉬는 듯 위태롭게 붙어 있어서, 갑작스러운 두려움이나 느닷없이 귀를 때리는 큰 소리에도 떨어져 나갑니다. 늘 제 근심을 제가 먹여 키우는, 흠 많고 쓸모없는 몸입니다. 숨 한 번 꺽 막히면 그만인 죽음을 이런 몸에서 보고 우리가 놀란단 말입니까? 이것을 쓰러뜨리는 데 무슨 큰 공이 든단 말입니까? 냄새도, 맛도, 피로도, 잠 못 드는 밤도, 물도, 먹을 것도,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들까지 이 몸에는 죽음을 부릅니다. 어디로 옮겨 가든 곧 제 연약함을 깨닫습니다. 아무 하늘이나 견디지 못하고, 낯선 물과 익숙지 않은 바람에, 아주 사소한 까닭과 탈에도 병이 납니다. 썩어 가는 병자이며, 울음으로 삶을 시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하찮은 동물이 얼마나 큰 소동을 일으키며, 제 처지를 잊고 얼마나 큰 생각에 빠져듭니까! 사람은 죽지 않을 것, 영원한 것을 마음에 굴리며 손주와 증손주 대까지 일을 짜 둡니다. 그러나 그사이 먼 일을 꾀하는 그를 죽음이 덮치고, 노년이라 부르는 것도 고작 몇 해가 한 바퀴 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2 부인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이치(ratio)가 있다면, 그 고통은 부인 자신이 입은 손해를 보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떠난 이가 입은 손해를 보는 것입니까? 아드님을 잃고 마음이 흔들리시는 것은 아드님에게서 아무 즐거움도 얻지 못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드님이 더 오래 사셨다면 더 큰 즐거움을 얻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무 즐거움도 얻지 못하셨다고 하신다면 부인의 손실은 그만큼 견딜 만해집니다. 사람은 아무 기쁨도 즐거움도 얻어 본 적 없는 것은 덜 그리워하니까요. 큰 즐거움을 얻으셨다고 인정하신다면, 빼앗긴 것을 두고 불평하실 것이 아니라 누린 것을 두고 감사하셔야 합니다. 아드님을 기르는 일 자체에서 이미 부인의 수고는 넉넉한 열매를 거두었으니까요. 강아지나 새나 마음을 달래 주는 하찮은 것들을 정성껏 기르는 사람도 말 못 하는 짐승들을 보고 만지고 그것들이 살갑게 굴 때 얼마간 즐거움을 누리는데, 자식을 기르는 사람에게 기르는 일 자체가 기른 보람이 아닐 리 없습니다. 그러니 아드님의 부지런함이 부인께 보탠 것이 하나도 없고, 아드님의 꼼꼼함이 부인을 위해 지켜 준 것이 하나도 없고, 아드님의 분별이 부인께 일러 준 것이 하나도 없다 해도, 아드님을 곁에 두셨다는 것, 아드님을 사랑하셨다는 것, 그것이 바로 열매입니다. "하지만 더 오래, 더 크게 누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아예 누리지 못한 것보다는 부인께 나은 일이었습니다. 잠시 운이 좋은 편과 한 번도 운이 좋지 못한 편 가운데 무엇이 나은지 고르라고 한다면, 떠나갈 좋은 것이라도 누리는 편이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편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부인께서는 어느 쪽을 바라셨겠습니까? 아들 하나의 머릿수와 이름만 채울 못난 자식을 두는 쪽입니까, 아니면 부인의 아드님처럼 그토록 바탕이 훌륭한 아들을 두는 쪽입니까? 일찍 분별이 들고, 일찍 효성스러웠고, 일찍 남편이 되고, 일찍 아버지가 되고, 일찍 온갖 의무(officium)를 살피고, 일찍 사제가 된 젊은이, 모든 일을 서두르듯 해치운 젊은이 말입니다. 크고도 오래가는 좋은 것을 함께 받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디게 오는 행운이 아니면 오래가지도, 끝까지 가지도 못합니다. 불멸의 신들은 아드님을 부인께 오래 주지 않을 작정이었기에, 오래 공들여도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을 그런 아들을 곧바로 주었습니다.

신들이 부인을 골라 아들을 누리지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실 수도 없습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 숱한 무리를 두루 둘러보십시오. 어디서나 더 큰 일을 겪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위대한 장군들도 이런 일을 겪었고, 군주들도 겪었습니다. 신화는 신들조차 이런 일에서 비켜 두지 않았는데, 제 생각에는 신들도 쓰러진다는 것이 우리 장례에 위안이 되라고 그리한 듯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모두를 둘러보십시오. 아무리 비참한 집을 꼽으셔도, 그보다 더 비참한 집에서 위안을 얻지 못할 만큼 비참한 집은 없을 것입니다. 맹세코 저는 부인의 품성을 그리 낮게 보지 않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엄청나게 많이 늘어놓아 보여 드리면 부인이 불행을 더 가볍게 견디시리라고 생각할 만큼 말입니다. 비참한 사람들의 무리는 심술궂은 위안입니다. 그래도 몇 사람은 들어 보겠습니다. 이런 일이 사람에게 흔히 일어난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본보기를 모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니까요. 거친 일을 담담하게 견뎌 누그러뜨린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 드리려는 것입니다.

가장 운 좋은 사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루키우스 술라7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그의 악랄함도, 적에게도 시민에게도 사납게 휘두른 그 용기도 꺾이지 않았고, 그가 아들을 잃은 뒤에 붙인 '운 좋은 자(felix)'라는 별명이 거짓으로 보이게 되지도 않았습니다. 술라는 그 별명을 붙이면서 사람들의 미움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잘 풀린 그의 일은 바로 그 사람들의 불행 위에 서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신들의 시기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술라가 그토록 운이 좋다는 것은 신들의 허물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술라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는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사건으로 넘겨 둡시다. 그가 무기를 잘 들었고 잘 내려놓았다는 것만은 그의 적들도 인정할 것입니다. 지금 다루는 문제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가장 운 좋은 사람에게까지 닥치는 일은 가장 큰 악이 아니라는 것 말입니다.

13 제물을 바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피리 부는 사람에게 연주만 멈추게 하고 머리에서 화관을 벗었을 뿐 나머지 의식은 예법대로 마친 그 아버지를 그리스가 너무 우러르지 못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신관 풀빌루스8입니다. 풀빌루스는 문설주를 붙잡고 카피톨리움 신전을 봉헌하던 중에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못 들은 척하고 신관의 엄숙한 기도문을 끝까지 읊었습니다. 신음 한 번 기도를 끊지 않았고, 아들의 이름이 귀에 들어온 그 순간에도 유피테르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를 마쳤습니다. 첫날의 첫 충격조차 나라의 제단과 상서로운 봉헌 선언에서 그 아버지를 끌어내지 못했다면, 그런 사람의 애도에 따로 끝을 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맹세코, 신들이 노했을 때조차 섬기기를 그치지 않은 그 사람은 그 기념할 만한 봉헌에도, 가장 높은 사제직에도 걸맞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집에 돌아가자 눈에 눈물을 가득 채웠고, 울먹이는 소리도 얼마간 냈습니다. 그러나 죽은 이에게 해 주는 것이 관습인 일을 다 마치고 나서는 카피톨리움에서 보였던 그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파울루스9는 페르세우스를 사슬로 묶어 전차 앞에 세우고 끌고 간 그 더없이 이름난 개선식 무렵에, 두 아들은 남의 집에 양자로 내주었고 자기 곁에 남겨 둔 두 아들은 장사 지냈습니다. 남에게 빌려준 아들 가운데 스키피오가 있었으니, 곁에 남겨 둔 아들들은 어떠했겠습니까? 로마 인민은 비어 있는 파울루스의 전차를 보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도 파울루스는 인민 앞에서 연설하며,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고 신들에게 감사했습니다. 이 엄청난 승리 때문에 시기의 값을 치러야 한다면 나라가 아니라 자기가 손해를 보아 치르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담대하게 견뎠는지 보이십니까? 그는 자식을 잃은 것을 두고 스스로를 축하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큰 변화에 누가 그보다 더 흔들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위안과 버팀목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래도 페르세우스는 슬퍼하는 파울루스를 보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14 이제 와서 위대한 사람들의 셀 수 없는 본보기를 하나하나 짚으며 부인을 데리고 다니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다녀야 하겠습니까? 운 좋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지 않다는 듯이 말입니다. 끝까지 집안의 모든 부분이 온전히 버티고 무엇 하나 어지러워지지 않은 집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아무 해나 하나 골라 그해의 정무관들을 불러 보십시오. 원하신다면 루키우스 비불루스와 카이사르10를 불러 보십시오. 서로 그토록 미워한 두 동료 사이에서 운만은 사이좋게 같은 길을 걸었음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용감하기보다 착한 사람이었던 루키우스 비불루스는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것도 이집트 병사들에게 놀림감이 된 끝에 죽었으니, 자식을 잃은 일 자체 못지않게 그 일을 저지른 자들이 누구인지도 눈물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집정관 임기 한 해 내내 동료에게 미움이 쏠리도록 집에 틀어박혀 있던 비불루스가, 두 아들의 장례 소식을 들은 이튿날 사령관으로서 늘 하던 소임을 보러 나섰습니다. 두 아들에게 하루보다 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집정관 자리를 두고는 한 해 내내 애도한 사람이 자식들의 애도는 그토록 빨리 끝냈습니다.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를 누비며 제 행운을 대양으로도 가둬 둘 수 없던 때, 나라의 운명까지 함께 끌고 간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미 그의 눈앞에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있었습니다. 나라에 자기 말고 다른 위대한 사람이 있는 것을 담담히 견디지 못하고 카이사르가 커 가는 것을 막으려 들 폼페이우스였고, 그에게는 카이사르가 커 가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울 때조차 짐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사흘이 채 안 되어 사령관의 소임을 다시 보았고, 늘 모든 것을 이기던 그 속도로 슬픔도 빨리 이겼습니다.

15 다른 카이사르 집안 사람들의 장례를 무엇하러 늘어놓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운은 이따금 그들을 짓밟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이 인류에게 쓸모가 있게 하려는 듯합니다. 신들에게서 태어났고 신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들조차 남의 운을 마음대로 하듯 제 운을 마음대로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니까요. 신격 아우구스투스는 자식들과 손주들을 잃고 카이사르 집안의 그 많은 사람이 다 스러지자 입양으로 텅 빈 집안을 떠받쳤습니다. 그래도 그는 굳세게 견뎠습니다. 이미 자기 일이 걸려 있는 사람답게, 누구도 신들을 원망하지 않는 것이 누구보다 자기에게 중요한 사람답게 견뎠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낳은 아들도, 입양한 아들도 잃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몸소 연단에 서서 아들을 기리는 추도사를 했습니다. 시신을 눈앞에 두고, 신관의 눈이 시신을 보지 않도록 휘장 하나만 사이에 친 채 서 있었습니다. 로마 인민이 우는데도 그는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곁에 서 있던 세야누스에게, 자기가 얼마나 꿋꿋하게 식구를 잃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고 내보인 셈입니다.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이 불행이 비켜 가지 않은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보이십니까? 그들에게는 마음의 미덕도 그토록 많았고, 나라와 집안이 쌓아 준 영예도 그토록 많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 이 폭풍은 돌고 돌며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휩쓸고, 모든 것을 제 것처럼 몰아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장부를 내놓게 해 보십시오. 값을 치르지 않고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6 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압니다. "당신은 여자를 위로한다는 것을 잊고 남자들의 본보기만 늘어놓는다." 그러나 자연이 여자들의 타고난 바탕에 인색하게 굴어 그 덕을 좁게 줄여 놓았다고 누가 말했습니까? 제 말을 믿으십시오. 여자들도 기운은 똑같고, 마음만 먹는다면 훌륭한 일을 해낼 힘도 똑같습니다. 길들기만 하면 고통과 수고도 똑같이 견딥니다. 신들이시여, 우리가 지금 어느 도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까? 루크레티아와 브루투스가 로마인의 머리 위에서 왕을 끌어내린 도시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브루투스에게 빚졌고, 브루투스는 루크레티아에게 빚졌습니다. 적도 강물도 우습게 여긴 클로일리아의 빼어난 담력을 기려 하마터면 남자들 축에 올려 적을 뻔한 도시입니다. 클로일리아는 가장 사람이 붐비는 성스러운 길에서 말 탄 동상으로 앉아, 가마에 올라타는 우리 젊은이들을 꾸짖습니다. 여자에게까지 말을 선사한 이 도시에서 그런 꼴로 다니느냐고 말입니다. 식구를 꿋꿋하게 그리워한 여인들의 본보기를 들어 드리기를 바라신다면, 집집이 문을 두드리며 찾지 않겠습니다. 한 집안에서 코르넬리아 둘을 들어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스키피오의 딸이자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입니다. 이 어머니는 열두 번 아이를 낳았고, 그 열두 아이의 장례를 하나하나 치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야 태어난 줄도 죽은 줄도 나라가 몰랐으니 넘어가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11는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위대한 사람이라고는 인정할 텐데, 어머니는 그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도, 묻히지도 못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도 위로하며 가엾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코르넬리아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라쿠스 형제를 낳은 사람이오. 내가 운 나쁜 여자라고 말하는 날은 결코 없을 것이오." 둘째 코르넬리아는 리비우스 드루수스를 잃었습니다. 빼어난 재능을 지닌 이름난 젊은이로 그라쿠스 형제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숱한 법안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채 자기 집 안에서 살해되었고, 누가 죽였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코르넬리아는 쓰라리고 원수도 갚지 못한 아들의 죽음을, 아들이 법안을 내놓던 그 담대함 그대로 담대하게 견뎠습니다. 마르키아 부인, 운이 스키피오 집안 사람들과 그 어머니들과 딸들에게 던지고 카이사르 집안을 겨누던 그 창을 부인에게만 거두지 않았다면, 이제는 운과 화해하시겠습니까?

삶은 갖가지 불행으로 가득하고 사납습니다. 그 불행과는 누구도 오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휴전조차 얻기 어렵습니다. 마르키아 부인, 부인은 자식 넷을 낳아 기르셨습니다. 빽빽한 대열에 던진 창은 하나도 헛되이 떨어지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토록 많은 식구가 시기도 손실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 놀랄 일입니까? "그러나 운은 이 점에서 더 불공평했다. 아들들을 빼앗아 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골라서 빼앗아 갔다." 그러나 더 힘센 상대와 똑같이 나누었다면 결코 그것을 불의(iniuria)라고 하지 마십시오. 운은 부인께 딸 둘과 그 딸들이 낳은 손주들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잃은 아들은 잊으신 채 부인께서 가장 슬퍼하시는 그 아들조차, 운은 송두리째 빼앗아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 아드님이 남긴 딸 둘이 부인 곁에 있습니다. 잘못 견디시면 큰 짐이 되고, 잘 견디시면 큰 위안이 될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을 보실 때 고통이 아니라 아드님을 떠올리시도록 마음을 이끄십시오. 농부는 바람에 뿌리째 뽑히거나 갑자기 휘몰아친 회오리에 꺾여 쓰러진 나무들을 보면, 그 나무들에서 남은 어린 가지를 돌보고 잃은 나무 자리에 곧바로 씨앗과 묘목을 심습니다. 그러면 잠깐 사이에 잃은 것보다 더 싱싱하게 자라납니다. 시간은 잃게 할 때만큼 자라게 할 때도 날래고 빠르니까요. 이제 부인의 메틸리우스가 남긴 이 딸들을 아드님 대신 세우시고, 빈자리를 채우시고, 한 가지 슬픔을 두 겹의 위안으로 덜어 내십시오. 하기야 잃은 것보다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없다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기는 합니다. 우리는 빼앗긴 것을 그리워하느라 남은 것에 박하게 굽니다. 그러나 운이 사나울 때조차 부인을 얼마나 아껴 주었는지 헤아려 보신다면, 부인께 위안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 많은 손주와 두 딸을 돌아보십시오. 마르키아 부인, 이런 말도 해 보십시오. "운이 저마다 행실대로 주어지고 착한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결코 따르지 않는다면 나도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 보니 아무런 가림 없이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이리저리 내던져진다."

17 "그래도 손수 길러 이제 막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버팀목이자 자랑이 된 젊은이를 잃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괴롭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사람은 이러려고 태어났습니다. 잃고 죽고, 바라고 두려워하고, 남과 자기를 들볶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바라고, 무엇보다 나쁘게도 자기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끝내 알지 못하려고 태어났습니다.

누가 시라쿠사로 가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해 봅시다. "앞으로 할 여행의 불편한 점과 즐거운 점을 모두 미리 알아 두고, 그다음에 배를 타시오. 그대가 감탄할 만한 것은 이렇소. 그대는 먼저 좁은 해협 하나로 이탈리아에서 잘려 나간 그 섬을 보게 될 것이오. 본디 뭍에 붙어 있었다고 알려진 섬이오. 바다가 갑자기 그리로 밀려들어"

"헤스페리아의 옆구리를 시칠리아에서 잘라 냈다."12

"그다음에는 바다에서 가장 게걸스러운 소용돌이 곁을 스치듯 지나가게 될 테니, 저 이야기 속의 카립디스를 보게 될 것이오. 남풍이 불지 않는 동안에는 잔잔히 누워 있지만, 그쪽에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크고 깊은 아가리를 벌려 배들을 빨아들이는 소용돌이요. 노래에 그토록 자주 오르내린 아레투사 샘도 보게 될 것이오. 바닥까지 반짝이며 맑게 비치는 못에서 더없이 차가운 물을 쏟아 내는 샘이오. 그 물이 거기서 처음 솟아난 것인지, 아니면 땅속으로 스며든 강이 그 많은 바다 밑을 지나며 더 탁한 물과 섞이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져 거기서 다시 솟아난 것인지는 모르오. 자연이 함대를 지키려고 마련했거나 사람 손이 거들어 만든 항구 가운데 가장 잔잔한 항구도 보게 될 것이오. 아무리 큰 폭풍이 미쳐 날뛰어도 들어올 틈이 없을 만큼 안전한 항구요. 아테네의 힘이 꺾인 곳, 바위를 끝없이 깊이 깎아 낸 그 천연의 감옥이 수천 명의 포로를 가두었던 곳도 보게 될 것이오. 거대한 도시 자체와, 여느 도시 여럿의 경계를 합친 것보다 넓은 땅과, 더없이 따뜻한 겨울과, 해가 얼굴을 내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는 날씨도 보게 될 것이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알고 나면, 무덥고 몸에 해로운 여름이 겨울 하늘이 베푼 은혜를 망쳐 놓을 것이오. 거기에는 참주 디오니시오스13가 있을 것이오. 자유와 정의와 법을 멸망시킨 자요, 플라톤을 만난 뒤에도 권력을 탐하고 추방된 뒤에도 목숨을 탐한 자요. 그는 누구는 불태우고, 누구는 매질하고, 누구는 사소한 허물을 잡아 목을 베라 할 것이오. 욕정을 채우려고 사내든 여자든 불러들일 것이고, 왕의 방탕을 채우는 더러운 무리 속에서 한꺼번에 둘과 몸을 섞는 것으로도 모자랄 것이오. 그대를 끌어당길 만한 것과 겁을 주어 물리칠 만한 것을 모두 들었소. 그러니 배를 타든지 그만두든지 하시오." 이렇게 미리 일러 주었는데도 누가 시라쿠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면, 그는 자기 말고 누구를 탓하며 정당하게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모르고 그 일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 다 알고서 일부러 찾아간 사람인데요.

자연은 우리 모두에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도 속이지 않는다. 네가 자식을 낳아 기른다면 잘생긴 자식을 둘 수도 있고 못생긴 자식을 둘 수도 있다. 어쩌면 여럿이 태어날 것이다. 그 가운데 누구는 조국을 구할 수도 있고 조국을 팔아넘길 수도 있다. 자식들이 큰 존경을 받아 그들 덕분에 아무도 감히 너를 욕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릴 까닭은 없다. 그러나 자식들이 큰 추문을 일으켜 그들 자체가 욕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미리 생각해 두어라. 자식들이 너의 마지막 장례를 치러 주고 너를 기리는 추도사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아이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자식을 화장 장작더미에 올려놓게 될 사람처럼 마음의 채비를 해 두어라.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 부모가 뒤따라가는 장례치고 쓰라리지 않은 장례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을 내걸었는데도 자식을 낳아 기른다면, 신들을 모든 원망에서 풀어 주는 셈입니다. 신들은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약속한 적이 없으니까요.

18 자, 이 그림을 삶 전체에 들어서는 일에 견주어 보십시오. 시라쿠사에 가 볼지 망설이는 사람에게 저는 즐겁게 할 만한 것과 언짢게 할 만한 것을 모두 펼쳐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태어날 때 제가 의논 상대로 찾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는 신들과 사람들이 함께 사는 도시로 들어서려 하오. 모든 것을 끌어안고, 정해진 영원한 법으로 묶여 있으며, 지칠 줄 모르는 하늘의 소임을 돌리고 있는 도시요. 그대는 거기서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별 하나가 모든 것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날마다 도는 길로 낮과 밤의 길이를 매기고, 해마다 도는 길로 여름과 겨울을 고르게 나누는 해 말이오. 밤이면 달이 해의 뒤를 잇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오라비 해와 마주칠 때마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을 빌려 오고, 어떤 때는 숨어 버리고 어떤 때는 얼굴을 다 드러낸 채 땅 위에 걸려, 차고 기울며 모습을 바꾸어 언제나 바로 전날과 다른 달이오. 다섯 별이 저마다 다른 길을 가며 곤두박질치듯 도는 우주를 거슬러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이 별들이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거기에 민족들의 운이 걸려 있고, 길한 별이 오느냐 흉한 별이 오느냐에 따라 가장 큰 일도 가장 작은 일도 꼴을 갖추오. 그대는 모여드는 구름과 쏟아지는 비와 비껴 내리꽂히는 번개와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에 놀랄 것이오. 위의 구경거리에 물려서 땅으로 눈을 떨구면, 생김새가 다르고 놀라움도 다른 세상이 그대를 맞을 것이오. 이쪽에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저쪽에는 눈 덮인 커다란 산줄기를 따라 솟아오른 봉우리들이 하늘 높이 서 있소. 강물은 떨어져 내리고, 한 샘에서 나온 물줄기가 서쪽으로 동쪽으로 갈라져 흐르고, 높은 꼭대기에서는 숲이 흔들리며, 그 많은 숲에는 짐승들이 살고 새들이 서로 어긋나는 노래를 부르오. 도시들은 저마다 다른 자리에 앉아 있고, 땅이 험해 바깥과 떨어져 사는 민족들도 있소. 어떤 민족은 깎아지른 산속으로 숨어들고, 어떤 민족은 강기슭과 호숫가와 골짜기에 겁에 질려 흩어져 사오. 사람이 가꾸어 거둔 곡식이 있고, 가꾸는 이 없이 제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있소. 냇물은 풀밭 사이로 순하게 굽이쳐 흐르고, 아름다운 만과 안으로 휘어 들어가 항구를 이루는 해안이 있으며, 드넓은 바다 곳곳에 흩어진 그 많은 섬이 사이사이 끼어들어 바다를 나누오. 돌과 보석의 반짝임은 또 어떻소? 세찬 급류의 모래 사이로 흘러내리는 금은 어떻고, 땅 한가운데서, 또 바다 한가운데서 솟구치는 불기둥은 어떻소? 땅과 땅을 묶는 대양은 또 어떻소? 세 갈래 만으로 민족들이 이어 사는 땅을 가르고, 거침없이 마구 끓어오르는 대양 말이오. 그대는 바람 없이도 쉬지 않고 출렁이는 바닷물 위로 뭍의 것보다 훨씬 큰 짐승들이 헤엄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어떤 것은 둔해서 남의 길잡이를 받아 움직이고, 어떤 것은 날래서 힘껏 젓는 노보다 빠르며, 어떤 것은 물을 들이켰다가 뿜어내어 그 앞을 지나는 배들을 크게 위태롭게 하오. 그대는 여기서 알지 못하는 땅을 찾아 나서는 배들을 보게 될 것이오. 사람의 대담함이 손대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대 자신도 구경꾼이면서 큰일을 꾀하는 사람들의 큰 몫이 될 것이오. 그대는 기술을 배우고 또 가르칠 것이오. 삶을 갖추어 주는 기술, 삶을 꾸며 주는 기술, 삶을 다스리는 기술 말이오. 그러나 거기에는 몸과 마음을 해치는 역병이 천 가지나 있을 것이오. 전쟁과 강도질과 독약과 난파가 있고, 날씨의 탈과 몸의 탈이 있고, 가장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쓰라린 그리움이 있고, 죽음이 있소. 그 죽음이 편안할지, 형벌과 고문을 거쳐 올지는 알 수 없소. 스스로 따져 보고 무엇을 바라는지 저울질해 보시오. 저 좋은 것들에 이르려면 이 나쁜 것들을 지나가야 하오." 살고 싶다고 대답하시겠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아니, 무엇 하나 떨어져 나가도 아파하실 그런 삶에 들어서지 않으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약속한 대로 사십시오. "아무도 우리에게 묻지 않았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를 두고는 우리 부모님께 물었습니다. 부모님은 삶의 조건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이 삶 속으로 들이셨습니다.

19 이제 위안으로 넘어가기 위해, 먼저 무엇을 치료해야 하는지, 그다음에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살펴봅시다. 슬퍼하는 사람을 흔드는 것은 사랑한 이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그 자체로는 견딜 만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떠나 있는 사람이나 앞으로 떠나 있을 사람을 두고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그들을 볼 수 없게 되면서 그들과 누리던 모든 것도 빼앗기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생각이고, 나쁜 일은 무엇이든 우리가 매긴 값만큼만 큽니다. 약은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그들이 그저 떠나 있다고 여기고 우리 스스로를 속입시다. 우리는 그들을 떠나보냈습니다. 아니, 곧 뒤따라갈 우리가 그들을 앞서 보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을 흔드는 것이 또 있습니다. "나를 지켜 줄 사람도, 업신여김을 당할 때 편들어 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 떳떳하지는 않지만 참된 위안을 하나 들자면, 우리 나라에서는 자식이 없는 것이 사람의 환심을 빼앗기보다 오히려 더 많이 가져다줍니다. 예전에는 노년을 무너뜨리던 외로움이 이제는 노년을 권세로 이끌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미워하는 척하고 자식과 의절하며 제 손으로 자식 없는 처지를 만들어 내기까지 합니다.

부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압니다. "내가 흔들리는 것은 내가 입은 손실 때문이 아니다. 아들이 죽은 것을 노예 하나 잃은 것처럼 언짢아하는 사람, 아들에게서 아들 자신 말고 다른 무엇을 돌아볼 겨를이 있는 사람은 위로받을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마르키아 부인, 무엇이 부인을 흔듭니까? 아드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래 사시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이라면 부인은 늘 슬퍼하셨어야 합니다. 아드님이 언젠가 죽으리라는 것을 늘 알고 계셨으니까요. 죽은 이는 어떤 나쁜 일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승을 무섭게 만드는 것들은 지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죽은 이들을 기다리는 어둠도, 감옥도, 불타오르는 강물도, 망각의 강14도, 재판정과 피고들도, 그토록 활짝 풀려난 자유 속에 다시 나타나는 참주들도 없습니다. 이런 것은 시인들이 장난삼아 지어내어 헛된 공포로 우리를 들쑤셔 놓은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우리의 불행이 넘어오지 못하는 경계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누워 있던 그 평정(tranquillitas) 속에 우리를 다시 눕혀 줍니다. 죽은 이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태어나지 않은 이도 가엾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선도 악도 아닙니다. 선이나 악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로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무로 돌려보내는 것은 우리를 어떤 운에도 넘겨주지 않습니다. 악도 선도 무언가 재료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법입니다. 자연이 놓아 보낸 것을 운이 붙들 수는 없고, 없는 사람이 비참할 수는 없습니다. 부인의 아드님은 종살이하는 경계 밖으로 나가셨고, 크고 영원한 평화가 아드님을 맞아들였습니다. 아드님은 가난을 두려워하지도, 재산을 걱정하지도 않으시고, 쾌락을 미끼로 마음을 갉아먹는 욕정의 가시에 찔리지도 않으십니다. 남의 행운을 시기하는 마음이 닿지도 않고, 자기 행운에 짓눌리지도 않으시며, 삼가는 그 귀가 어떤 욕설에 맞을 일도 없습니다. 나라의 재앙도, 집안의 재앙도 내다보실 일이 없습니다. 앞날을 걱정하며, 늘 더 불확실한 것에 매달린 결과에 목을 매지도 않으십니다. 아드님은 마침내 아무것도 몰아낼 수 없고 아무것도 겁줄 수 없는 곳에 자리를 잡으셨습니다.

20 아, 제 불행을 모르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죽음을 자연의 가장 좋은 발명으로 기리지도 기다리지도 않습니다. 죽음은 행운을 가두어 지켜 주기도 하고, 재앙을 물리치기도 하고, 노인의 물림과 지침을 끝내 주기도 하고, 더 좋은 날을 바라던 젊은 시절을 꽃필 때 데려가기도 하고, 더 험한 고비에 이르기 전에 어린 시절을 불러들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끝이요, 많은 이에게 약이요, 어떤 이에게는 소원이며, 부르기도 전에 찾아온 이들에게 누구보다 큰 은혜를 베풉니다. 죽음은 주인이 원치 않아도 노예를 종살이에서 놓아줍니다. 죽음은 포로들의 사슬을 풀어 줍니다. 죽음은 횡포한 권력이 나가지 못하게 막은 이들을 감옥에서 데리고 나옵니다. 죽음은 늘 조국 쪽으로 마음과 눈을 두는 추방된 사람들에게, 누구 발밑에 묻히든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운이 모두의 것을 고약하게 나누어 같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넘겨주었을 때, 죽음은 모든 것을 평평하게 고릅니다. 죽음 뒤에는 누구도 남의 뜻대로 무엇을 하지 않습니다. 죽음 속에서는 누구도 제 미천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습니다. 마르키아 부인, 부인의 아버님이 간절히 바라신 것도 죽음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태어나는 것이 형벌이 되지 않게 하는 것도 죽음이고, 불행이 아무리 을러대도 제가 무너지지 않게, 제 마음을 온전하고 제 주인으로 지킬 수 있게 하는 것도 죽음입니다. 제게는 상소할 곳이 있습니다. 저기 십자가들이 보입니다. 한 가지 꼴이 아니라 저마다 다르게 만든 십자가들입니다. 어떤 자들은 사람을 머리가 땅으로 가게 거꾸로 매달고, 어떤 자들은 음부로 말뚝을 박아 넣고, 어떤 자들은 두 팔을 가로대에 펼쳐 묶습니다. 고문용 밧줄이 보이고, 채찍이 보이고, 팔다리 마디마디마다 따로 고안해 낸 고문 기구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죽음도 보입니다. 저기에는 피에 굶주린 적들도 있고 오만한 시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기에 죽음도 보입니다. 주인의 지배에 넌더리가 나면 한 걸음만 내디뎌 자유로 건너갈 수 있는 곳이라면 종살이도 괴롭지 않습니다. 삶이여, 내가 너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죽음 덕분이다.

제때 오는 죽음에 좋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더 오래 산 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해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제국의 자랑이요 버팀목이던 그 사람을 나폴리에서 병이 데려갔다면, 그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로마 인민의 제일인자로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이 덧붙는 바람에 제 높은 자리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그는 자기 군단들이 눈앞에서 도륙되는 것을 보았고, 원로원이 맨 앞줄에 섰던 그 싸움에서 사령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을 보았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는 이집트인 사형 집행자를 보았고, 승자들에게도 신성하던 그 몸을 한낱 호위병의 칼에 내맡겼습니다. 설령 무사했다 해도 그는 목숨을 건진 것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폼페이우스가 왕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마르쿠스 키케로가 자기를 조국과 함께 겨누던 카틸리나의 비수를 피하던 그때 쓰러졌다면, 그는 나라를 해방하고 나라를 구한 사람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다못해 딸의 장례를 뒤따라 죽었더라도, 그때까지는 운 좋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시민들의 목을 겨누고 뽑아 든 칼날도, 살해당한 이들의 재산이 살인자들에게 나뉘어 피해자들이 제 돈으로 죽임을 당하는 꼴도, 집정관을 지낸 이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경매대에서 팔려 나가는 꼴도, 나라가 공공연히 살인을 청부하는 꼴도, 강도질과 전쟁과 약탈도, 그 많은 카틸리나들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쿠스 카토가 키프로스에서 왕의 유산을 처리하고 돌아올 때, 내전의 군자금으로 쓰일 바로 그 돈과 함께 바다가 그를 삼켜 버렸다면 그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적어도 아무도 카토 앞에서 감히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리라는 명예만은 지니고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몇 해 안 되는 세월이 덧붙는 바람에, 자기 자유만이 아니라 나라의 자유를 위해 태어난 그 사람이 카이사르를 피해 달아나고 폼페이우스를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때 이른 죽음은 아드님께 어떤 나쁜 일도 가져다주지 않았고, 오히려 온갖 나쁜 일을 견뎌야 하는 수고마저 덜어 드렸습니다.

21 "그래도 너무 일찍, 때 이르게 죽었다." 먼저, 아드님이 오래 살아남았다고 해 봅시다. 사람에게 허락된 가장 먼 데까지 나아갔다고 셈해 보십시오. 그래 봐야 얼마나 됩니까?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을 살려고 태어나, 곧 뒤에 오는 이에게 자리를 내줄 몸으로, 우리에게 떠맡겨진 이 삶을 잠시 묵어 가는 여관처럼 바라봅니다. 제가 지금 믿을 수 없이 빠르게 굴러가 버리는 우리 사람의 나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도시들이 지나온 세월을 셈해 보십시오. 오래되었다고 뽐내는 도시들조차 얼마나 짧게 서 있었는지 보실 것입니다. 사람의 일은 모두 짧고 덧없으며, 끝없는 시간에서 한 조각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주 전체에 견주어 볼 때 도시와 민족과 강과 바다 둘레를 다 품은 이 땅을 한 점으로 칩니다. 그런데 우리 수명은 온 시간에 견주면 한 점보다도 작은 몫입니다. 시간의 크기는 우주의 크기보다 큽니다. 우주는 시간의 길이 안에서 몇 번이고 거듭 제 길이를 재어 돌아오니까요. 그렇다면 아무리 늘려도 아무것도 아닌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늘려서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 삶이 긴 경우는 하나뿐입니다. 넉넉할 때입니다. 오래 산 사람들, 그 노년이 기억에 전해지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며 백십 년씩 헤아려 보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온 시간으로 놓아 보내고 나서, 누가 산 기간을 들여다보고 그가 살지 않은 기간과 견주어 보면, 가장 짧은 생애와 가장 긴 생애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드님은 아드님 자신에게는 때가 차서 떠나셨습니다. 살아야 할 만큼 사셨고, 그 뒤로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의 노년은 하나가 아니고, 짐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짐승은 열네 해 만에 지쳐 버리고, 사람에게는 첫 시기인 나이가 그 짐승에게는 가장 긴 수명입니다. 살 수 있는 몫은 저마다 다르게 주어졌습니다. 너무 일찍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산 것보다 더 오래 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경계가 박혀 있습니다. 그 경계는 언제나 놓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고, 애써도 환심을 사도 더 밀어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여기십시오. 부인은 정해진 뜻에 따라 아드님을 잃으셨습니다. 아드님은 제 몫을 다 받아 가셨고

"주어진 생애의 결승점에 다다랐다."15

그러니 "더 오래 살 수도 있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짓누르실 까닭이 없습니다. 아드님의 삶은 도중에 끊기지 않았습니다. 우연은 결코 사람의 햇수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저마다 약속받은 것은 다 치러집니다. 운명은 제 길을 가며 무엇 하나 보태지도, 한번 약속한 것에서 덜어 내지도 않습니다. 기도도 애씀도 헛됩니다. 누구든 첫날이 장부에 적어 준 만큼 받을 것입니다. 아드님은 처음 빛을 보신 그날부터 죽음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셨고, 운명에 점점 다가가셨으며, 젊음에 더해지던 바로 그 햇수가 삶에서 빠져나가던 햇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착각 속을 헤맵니다. 늙어 이미 허리가 굽은 사람만 죽음 쪽으로 기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갓난아기 때부터, 젊은 시절에도, 어느 나이든 우리를 그리로 데려갑니다. 운명은 제 일을 합니다. 운명은 우리가 죽어 간다는 느낌을 우리에게서 빼앗고, 죽음은 더 쉽게 숨어들려고 삶이라는 이름 아래 몸을 숨깁니다. 유년은 아기 시절을 제 안으로 바꾸어 넣고, 청소년기는 유년을, 노년은 젊은이를 앗아 갔습니다. 잘 셈해 보면 자라는 것이 곧 잃는 것입니다.

22 마르키아 부인, 아드님이 살 수 있었던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고 불평하십니까? 아드님께 더 오래 사는 것이 이로웠는지, 아니면 이 죽음이 아드님을 위한 배려였는지 부인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세월이 흘러도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형편이 탄탄히 자리 잡고 뿌리내린 사람을 오늘날 누구 하나라도 찾으실 수 있습니까? 사람의 일은 흔들리고 흘러가 버립니다. 우리 삶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만큼 쉽게 다치고 여린 부분도 없습니다. 그러니 가장 운 좋은 사람들이야말로 죽음을 바라야 합니다. 이토록 갈피없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지나간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치스러운 도시의 눈길 속에서 더없이 정숙하게 지켜 온 아드님의 그 아름다운 몸이 그 많은 병을 다 피해 노년까지 고운 모습을 다치지 않고 지켜 갈 수 있었으리라고 누가 부인께 보증하겠습니까? 마음에 생길 수 있는 천 가지 얼룩을 생각해 보십시오. 곧은 재능도 젊은 날 품게 했던 기대를 노년까지 지켜 가지 못하고 대개는 엇나가 버립니다. 늦바람이라 더 추한 사치가 덮쳐 빛나던 시작을 더럽히기도 하고, 아니면 통째로 술집과 배에 엎어져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실지가 걱정의 전부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불과 무너짐과 난파를 보태십시오. 산 사람의 뼈를 골라내고 내장 속까지 손을 통째로 집어넣고 부끄러운 곳을 고치느라 한 가지로 그치지 않는 아픔을 주는 의사들의 칼질도 보태십시오. 그다음에는 추방이 있습니다. 아드님이 루틸리우스보다 더 결백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감옥이 있습니다. 아드님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우시지는 않았습니다. 제 손으로 낸 상처로 꿰뚫린 가슴이 있습니다. 아드님이 카토보다 더 거룩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을 두루 살펴보시면, 이런 삶의 품삯이 기다리고 있기에 자연이 일찍 안전한 곳으로 거두어들인 이들이 가장 좋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람의 삶만큼 속임수가 많은 것도, 음험한 것도 없습니다. 맹세코, 모르는 채로 주어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삶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운 좋은 일이라면, 그다음으로 좋은 일은 짧게 살다 떠나 서둘러 본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인께 가장 쓰라렸던 그때를 눈앞에 그려 보십시오. 세야누스가 부인의 아버님을 자기 피호민 사트리우스 세쿤두스에게 하사품처럼 내준 때 말입니다. 세야누스는 아버님이 한두 번 지나치게 거침없이 하신 말씀 때문에 아버님께 화가 나 있었습니다. 세야누스가 우리 목 위에 올려 앉혀지는 것도 아니고 제 발로 기어오르는 것을 아버님은 잠자코 견디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로원은 황제16가 불탄 뒤 다시 짓고 있던 폼페이우스 극장에 세야누스의 동상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코르두스는 이제야말로 극장이 정말 무너진다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잿더미 위에 세야누스가 세워지고, 가장 위대한 사령관의 기념물 안에 배신한 병사가 신처럼 모셔지는데 속이 터지지 않겠습니까? 고발장에 서명이 끝나자17, 세야누스가 저 하나에게만 순하고 다른 모든 이에게는 사납게 굴도록 사람의 피로 길러 온 날카로운 사냥개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짖어 대며 벌써 덤벼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어찌하셔야 했겠습니까? 살고자 하시면 세야누스에게 빌어야 했고, 죽고자 하시면 딸에게 빌어야 했는데, 둘 다 들어줄 리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딸을 속이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운을 더 빼려고 목욕을 하시고는 무엇을 좀 드시겠다며 침실로 들어가셨고, 시중드는 아이들을 내보낸 뒤 드신 것처럼 보이려고 음식 얼마를 창밖으로 던지셨습니다. 그러고는 침실에서 이미 넉넉히 드셨다는 듯 저녁을 거르셨습니다. 이튿날도, 사흘째도 그리하셨습니다. 나흘째에는 몸이 쇠약해진 것만으로 사정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부인을 끌어안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평생 이것 하나만은 너에게 숨겨 왔다만, 나는 죽음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고 이제 거의 절반쯤 왔다. 너는 나를 불러 돌려세워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고는 빛을 모두 막으라 이르시고 어둠 속에 몸을 묻으셨습니다. 아버님의 결심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더없이 굶주린 늑대들의 아가리에서 먹잇감이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요. 고발자들은 세야누스의 사주를 받아 집정관들의 재판석으로 몰려가 코르두스가 죽어 간다고 불평했습니다. 자기들이 몰아넣은 그 일을 가로막으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들 눈에는 코르두스가 빠져나가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피고가 죽을 권리마저 빼앗을 것인가 하는 큰 문제가 심리에 올랐습니다. 그 문제를 논의하는 사이, 고발자들이 다시 찾아가는 사이, 아버님은 이미 스스로를 방면하셨습니다. 마르키아 부인, 고약한 시대의 뒤바뀜이 얼마나 뜻밖에 들이닥치는지 보이십니까? 부인의 식구 가운데 누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우십니까? 하마터면 죽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뻔했는데요!

23 앞날은 모두 불확실하고, 확실한 것이 있다면 더 나쁜 쪽으로 기운다는 것뿐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일찍 놓여난 영혼에게는 하늘의 신들에게로 가는 길이 가장 쉽습니다. 찌꺼기도 무게도 가장 적게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굳어지기 전에, 땅의 것을 깊이 빨아들이기 전에 풀려난 영혼은 더 가볍게 제 근원으로 날아 돌아가고, 묻어 있던 때와 얼룩을 무엇이든 더 쉽게 씻어 냅니다. 큰 재능일수록 몸속에 머무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런 영혼은 빠져나가고 뚫고 나가기를 갈망하며, 이 비좁은 데를 견디기 힘들어합니다. 온 누리를 떠돌며 높은 곳에 있고, 높은 데서 사람의 일을 내려다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외칩니다. 현자의 영혼은 온통 죽음 쪽으로 몸을 내밀고,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깊이 생각하며, 늘 그 갈망에 실려 바깥으로 뻗어 나간다고 말입니다18.

그러면 어떻습니까? 마르키아 부인, 젊은이에게서 노인의 분별(prudentia)을 보시고, 모든 쾌락을 이긴 마음, 흠 없이 다듬어지고 악덕을 모르는 마음을 보시고, 탐욕 없이 재산을, 야심 없이 관직을, 방탕 없이 즐거움을 구하는 모습을 보셨을 때, 부인은 그 아들을 오래도록 무사히 곁에 두실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습니까? 정점에 이른 것은 무엇이든 끝에 가깝습니다. 완전한 덕은 스스로를 낚아채 눈앞에서 사라지고, 처음에 무르익은 것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불은 밝게 타오를수록 빨리 꺼집니다. 더디고 잘 타지 않는 땔감에 붙어 연기에 묻힌 채 지저분하게 빛나는 불이 더 오래갑니다. 불을 인색하게 먹이는 그 까닭이 불을 붙들어 두기 때문입니다. 재능도 이처럼 빛날수록 짧습니다. 더 자랄 자리가 없으면 저물 때가 가까우니까요. 파비아누스는 우리 부모님 세대도 본 일이라며, 로마에 거구의 사내만 한 키를 지닌 소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일찍 죽었고, 분별 있는 사람치고 그 아이가 곧 죽으리라고 미리 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앞당겨 차지해 버린 그 나이에 실제로 이를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지나친 조숙은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표시입니다. 자랄 것이 다 소진되면 끝이 다가옵니다.

24 아드님을 햇수가 아니라 덕으로 재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아드님은 충분히 오래 사셨습니다. 아버지를 여의고 열네 살까지 후견인들의 보살핌을 받으셨지만, 어머니의 보살핌은 늘 받으셨습니다. 자기 집이 생긴 뒤에도 부인의 집을 떠나려 하지 않으셨고, 자식들이 아버지와 한집에 사는 것조차 견디기 힘들어하는 법인데 어머니와 한집에 사는 것을 끝까지 이어 가셨습니다. 키와 생김새와 단단한 체격을 보면 군영에서 나고 자란 사람 같았지만, 부인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군 복무를 마다하셨습니다. 마르키아 부인, 다른 집에 사는 어머니들이 자식을 얼마나 드물게 보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아들을 군대에 둔 어머니들에게는 그 숱한 해가 그저 사라지고 근심 속에 흘러가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부인께서 하나도 잃지 않으신 이 시간이 얼마나 넓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아드님은 한 번도 부인의 눈앞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부인의 눈길 아래서 빼어난 재능을 갈고닦으셨고, 많은 이의 발전을 침묵으로 눌러 버리는 수줍음만 가로막지 않았다면 할아버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셨을 것입니다. 보기 드물게 잘생긴 젊은이였지만, 사내들을 타락시키는 여자가 그토록 많은 데서도 누구에게 한 줄기 기대도 내주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여자들은 뻔뻔하게도 유혹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그때 아드님은 누구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 얼굴을 붉히셨습니다. 이토록 깨끗한 품행 덕분에 아드님은 아직 아이티를 다 벗지 못한 나이에 사제직에 걸맞은 사람으로 여겨지셨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밀어주셨겠지만, 어머니라도 좋은 후보가 아니었다면 힘을 쓰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이런 덕을 바라보며 아드님을 품에 안듯 지니십시오! 이제 아드님은 오롯이 부인의 것이고, 이제는 아드님을 다른 데로 불러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제 아드님은 결코 부인께 걱정거리도, 슬픔거리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토록 좋은 아들에게서 부인이 슬퍼하실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부인은 이미 슬퍼하셨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우연의 손길에서 벗어나 즐거움으로 가득합니다. 부인께서 아드님을 누릴 줄만 아신다면, 아드님에게서 무엇이 가장 값졌는지 깨닫기만 하신다면 말입니다. 사라진 것은 아드님의 겉모습뿐이고, 그나마 아주 닮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아드님 자신은 영원하며 지금은 더 나은 처지에 계십니다. 자기 것이 아닌 짐을 벗어 버리고 자기 자신으로 남으셨습니다. 보시다시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것들, 뼈와 힘줄과 그 위를 덮은 살갗과 얼굴과 시중드는 손과 그 밖에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들은 영혼을 묶는 사슬이요 영혼을 가리는 어둠입니다. 영혼은 이것들에 깔리고, 숨이 막히고, 더럽혀지고, 참되고 제 것인 것에서 떨어져 거짓된 것 속에 내던져집니다. 영혼은 이 무거운 육신과 끝없이 싸웁니다. 끌려 내려가 가라앉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영혼은 자기가 내려온 그곳을 향해 애써 올라갑니다. 거기서는 영원한 안식이 영혼을 기다리고, 영혼은 뒤섞이고 탁한 것에서 벗어나 맑고 투명한 것을 바라봅니다.

25 그러니 아드님의 무덤으로 달려가실 까닭이 없습니다. 거기 누워 있는 것은 아드님의 가장 못한 부분, 아드님 자신에게도 가장 성가셨던 부분인 뼈와 재일 뿐입니다. 그것은 옷이나 그 밖에 몸을 덮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드님의 일부가 아닙니다. 아드님은 온전한 채로, 땅 위에 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가 통째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위에서 잠시 머무르며 몸에 밴 악덕과 죽을 목숨으로 살며 묻은 녹을 모두 털어 내 깨끗해지신 뒤,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져 행복한 영혼들 사이를 달리고 계십니다. 거룩한 모임이 아드님을 맞이했습니다. 스키피오 집안과 카토 집안 사람들이 맞이했고, 마르키아 부인, 삶을 업신여기고 죽음의 은혜로 자유로워진 이들 사이에서 부인의 아버님이 맞이하셨습니다. 거기서는 모두가 모두와 피붙이이기는 하지만, 아버님은 새로운 빛에 기뻐하는 손자를 곁으로 끌어당겨 가까운 별들이 다니는 길을 가르쳐 주시고, 짐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참되게 아는 이답게 기꺼이 자연의 비밀 속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낯선 도시를 안내하는 사람이 손님에게 고마운 존재이듯, 하늘의 원인을 묻는 손자에게는 집안 어른인 해설자가 그렇습니다. 아버님은 손자에게 땅의 깊은 곳까지 눈길을 보내 보라고 하십니다. 높은 데서 두고 온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르키아 부인, 아버님과 아드님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처신하십시오. 부인이 알던 그분들이 아니라 훨씬 드높아져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그분들의 눈앞에 말입니다. 무엇이든 비천하고 속된 생각을 하는 것을, 더 나은 쪽으로 바뀐 식구들을 위해 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십시오! 그분들은 영원한 것들의 자유롭고 드넓은 공간으로 풀려나셨습니다. 그분들을 가로막는 바다도, 높은 산도, 길 없는 골짜기도, 바닥을 알 수 없는 시르티스의 여울도 없습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평평하고, 그분들은 쉽게 움직이고 거침이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꿰뚫어 지나고, 별들과 뒤섞여 지내십니다.

26 그러니 마르키아 부인, 저 하늘의 성채에서 부인의 아버님이 말씀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인이 아드님께 지니셨던 만큼의 권위를 부인께 지니셨던 그분이, 내전을 슬퍼하며 써 내려가던 그 재능, 살생부를 만든 자들을 몸소 영원히 살생부에 올려 버린 그 재능이 아니라, 지금 몸이 높이 오르신 만큼 더 드높아진 재능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입니다. "딸아, 어찌하여 이토록 긴 슬픔이 너를 붙들고 있느냐? 어찌하여 참된 것을 이토록 모른 채 헤매느냐? 네 아들이 집안이 온전할 때 저도 온전한 몸으로 조상들 곁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네 아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여기다니. 운이 얼마나 거센 폭풍으로 모든 것을 뒤흔드는지 너는 모르느냐? 운과 거래를 가장 적게 한 사람 말고는 누구에게도 너그럽고 순하게 굴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느냐? 죽음이 조금만 더 일찍 닥쳐오는 불행에서 빼내 주었다면 더없이 운 좋은 사람이 되었을 왕들의 이름을 너에게 대 주랴? 생애에서 조금만 덜어 냈다면 그 위대함에 아무것도 모자라지 않았을 로마의 장군들을 대 주랴? 아니면 더없이 고귀하고 빛나는 사람들이 병사의 칼을 받으려고 목을 가지런히 내밀고 몸을 굽혔던 일을 들려주랴? 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돌아보아라. 할아버지는 낯선 자객의 손에 목숨을 내맡기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나를 내맡기지 않았고, 먹기를 끊어 내가 글에서 보였던 것만큼 담대한 사람임을 보여 주었다. 어찌하여 우리 집안에서 가장 운 좋게 죽은 아이가 가장 오래 애도를 받느냐? 우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 깊은 밤에 둘러싸이지 않은 눈으로 본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너희 곁에는 바랄 만한 것도, 드높은 것도, 찬란한 것도 없고, 모든 것이 비천하고 무겁고 불안하며 우리 빛의 한 조각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을. 여기서는 무기가 서로 맞부딪쳐 미쳐 날뛰지도 않고, 함대가 함대에 부서지지도 않으며, 부모를 죽이는 일을 꾸미지도 마음먹지도 않고, 포룸이 날마다 소송으로 시끄럽지도 않다는 것을 굳이 말해야 하겠느냐? 여기서는 어두운 데 숨은 것이 하나도 없고, 마음은 드러나고 가슴속은 열려 있으며, 삶은 모두 앞에 공공연히 펼쳐지고, 모든 세월과 다가올 일을 다 내다본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한때 세상의 맨 끝 한구석에서 아주 적은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한 시대의 일을 엮어 쓰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많은 세기를, 그 많은 시대가 얽히고 이어진 흐름을, 세월이란 세월을 다 둘러볼 수 있다. 일어설 왕국과 무너질 왕국을, 큰 도시들이 쓰러지는 것을, 바다가 새 물길을 내는 것을 내다볼 수 있다. 네 그리움에 모두가 같은 운명을 진다는 것이 위안이 될 수 있다면 들어 보아라. 지금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은 하나도 없다. 세월이 모든 것을 쓰러뜨리고 함께 끌고 갈 것이다. 세월은 사람만 가지고 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우연이 휘두르는 힘에서 얼마나 작은 몫이냐? 세월은 땅을, 지역을, 우주의 여러 부분을 가지고 놀 것이다. 산을 통째로 주저앉히고, 다른 곳에서는 새 바위를 높이 밀어 올릴 것이다. 바다를 들이켜고, 강줄기를 돌리고, 민족들 사이의 왕래를 끊어 인류의 사귐과 모임을 흩어 버릴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거대한 땅의 아가리로 도시들을 삼키고, 지진으로 뒤흔들고, 땅 밑 깊은 데서 역병의 독기를 뿜어 올리고, 홍수로 사람 사는 곳을 모조리 덮고, 땅덩이를 물에 잠가 모든 생명을 죽이고, 거대한 불길로 죽을 것들을 그을리고 태울 것이다. 그리고 우주가 새로 태어나려고 스스로를 끌 때가 오면, 이것들은 제 힘으로 서로를 쳐부수고, 별은 별과 부딪치며, 온 물질이 불타올라 지금 질서 있게 빛나는 모든 것이 하나의 불길 속에 타오를 것이다. 영원을 몫으로 받은 행복한 영혼인 우리도, 신이 이 모든 것을 다시 지어 올리기로 마음먹을 때, 모든 것이 무너지는 가운데 그 거대한 붕괴에 보태지는 작은 조각이 되어 옛 원소들로 돌아갈 것이다."

주

  1. 1. 마르키아의 아버지인 역사가. 기원후 25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기린 역사서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피호민들에게 고발당하자 스스로 굶어 죽었고, 그 책은 원로원의 결의로 불태워졌다.

  2. 2.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42~기원전 23). 옥타비아의 아들로,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혼인해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열아홉 살에 병으로 죽었다.

  3. 3.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기원전 38~기원전 9). 리비아가 첫 남편에게서 낳은 아들로 티베리우스의 아우다. 게르마니아 원정 중 말에서 떨어져 다친 끝에 죽었다. 이 대목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다.

  4. 4. 리비아.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으로 율리아 가문에 입양되어 율리아 아우구스타라고 불렸다. 아레이오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곁에 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철학자다.

  5. 5.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격언집』. 푸블릴리우스는 시리아 출신 해방 노예로, 카이사르 시대에 소극(마임) 작가로 이름을 떨쳤다.

  6. 6. 원문 결락. 「너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던 격언이다.

  7. 7.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기원전 138~기원전 78). 내전에서 이겨 독재관이 되었고 정적들을 살생부에 올려 죽였다. 「펠릭스(운 좋은 자)」를 별명으로 삼았다.

  8. 8. 앞의 아버지는 크세노폰이다. 제물을 바치던 중에 아들 그릴로스가 만티네이아 전투(기원전 362년)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한다. 마르쿠스 호라티우스 풀빌루스는 기원전 509년 카피톨리움의 유피테르 신전을 봉헌했다.

  9. 9.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기원전 168년 피드나에서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를 꺾고 개선식을 올렸다. 남의 집에 입양 보낸 아들 가운데 하나가 훗날 카르타고를 무너뜨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다.

  10. 10. 기원전 59년에 함께 집정관을 지낸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세네카는 루키우스라고 썼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비불루스의 두 아들은 기원전 50년 이집트에 주둔하던 로마 병사들에게 죽었고,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는 폼페이우스의 아내로 있다가 기원전 54년 아이를 낳다 죽었다.

  11. 11. 그라쿠스 형제. 호민관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다 형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33년, 아우 가이우스는 기원전 121년에 죽임을 당했고, 시신은 테베레강에 던져졌다.

  12. 12.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3.418. 헤스페리아(「서쪽 땅」)는 이탈리아를 가리킨다.

  13. 13. 시라쿠사의 참주. 디오니시오스 1세와 그 아들 2세 모두 플라톤을 궁정에 불렀으며, 아들은 쫓겨난 뒤 코린트에서 여생을 보냈다.

  14. 14.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에 흐르는 망각의 강 레테. 세네카는 라틴어 이름으로 부른다.

  15. 15.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10.472. 투르누스의 죽을 날이 다가왔다고 유피테르가 하는 말이다.

  16. 16. 티베리우스. 폼페이우스 극장이 기원후 22년에 불탔을 때 원로원은 불길을 잡은 공을 기려 세야누스의 동상을 그 극장에 세우기로 결의했다.

  17. 17. 원문 손상. 고발장에 서명이 끝났다는 뜻으로, 뒤 구절은 사냥개들이 벌써 그를 덮치려 했다는 뜻으로 읽었다.

  18. 18. 플라톤 『파이돈』 64a, 67e. 철학자는 평생 죽음을 연습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세네카가 풀어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