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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그러나 아무리 가려 뽑은 고전이라 해도 책에만 갇혀 특정한 글말만 읽고 있으면, 그 글말 자체도 사투리이자 시골말일 뿐이어서, 우리는 모든 사물과 사건이 비유 없이 하는 말, 그것만이 풍성하고 표준이 되는 그 언어를 잊어버릴 위험에 놓인다. 펴내는 것은 많지만 찍어 내는 것은 적다. 덧창 틈으로 흘러드는 빛줄기는 덧창을 아예 떼어 내고 나면 더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법이나 규율도 언제나 깨어 살피고 있어야 할 필요를 대신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고른 역사나 철학이나 시의 강좌, 가장 좋은 사교, 가장 훌륭한 생활 습관이라 한들, 보아야 할 것을 늘 바라보는 수련에 견주면 무엇이겠는가? 여러분은 그저 읽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아니면 보는 사람이 되겠는가? 여러분의 운명을 읽고,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미래로 걸어 들어가라.

첫여름에 나는 책을 읽지 않았다. 콩밭을 맸다. 아니, 그보다 더 나은 일을 할 때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의 꽃을 머리로 하는 일이든 손으로 하는 일이든 어떤 일에도 바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나는 내 삶에 넓은 여백이 있는 것이 좋다. 이따금 여름 아침이면 늘 하던 대로 몸을 씻고 나서, 해 뜰 때부터 한낮까지 해가 드는 문간에 앉아 소나무와 히코리와 옻나무 사이에서, 아무도 흐트러뜨리지 않는 고독과 고요 속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사이 새들은 둘레에서 노래하거나 소리 없이 집 안을 스쳐 날았고, 서쪽 창으로 해가 들거나 먼 큰길에서 어느 나그네의 마차 소리가 들려오고서야 나는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런 철에 나는 밤사이의 옥수수처럼 자랐고, 그 시간은 손으로 하는 어떤 일보다도 훨씬 나았다. 그것은 내 삶에서 덜어 낸 시간이 아니라 여느 때 내 몫에 덤으로 얹힌 시간이었다. 동양 사람들이 관조와 행위의 버림이라는 말로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깨달았다. 대개 나는 시간이 어떻게 가든 마음 쓰지 않았다. 하루는 내 어떤 일을 비추어 주려는 듯이 나아갔다. 아침이었는데, 보라, 이제 저녁이고 기억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새처럼 노래하는 대신 끊이지 않는 내 행운에 말없이 미소 지었다. 참새가 내 문 앞 히코리에 앉아 지저귀듯이 나도 내 둥지에서 참새가 들을 만한 낄낄 웃음이나 삼킨 지저귐을 냈다. 내 하루하루는 어느 이교 신의 도장이 찍힌 요일이 아니었고, 시간 단위로 잘게 썰려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나는 푸리족 원주민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에 관해서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가리키는 낱말이 하나뿐이어서, 뜻의 차이는 손짓으로 나타내는데, 어제는 뒤를, 내일은 앞을, 지나가는 오늘은 머리 위를 가리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같은 읍 사람들에게는 틀림없이 순전한 게으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새와 꽃이 저희 잣대로 나를 쟀다면 나는 모자라다는 판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제 할 일의 계기를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자연의 하루는 아주 고요해서 그의 게으름을 나무라는 일이 거의 없다.

밖에서 즐거움을 찾아 사교계와 극장을 기웃거려야 하는 사람들에 견주어, 내 생활 방법에는 적어도 이런 이점이 있었다. 내 삶 자체가 내 즐거움이 되었고 그 즐거움은 결코 새로움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장면이 많고 끝이 없는 연극이었다. 우리가 언제나 정말로 생계를 꾸리면서 우리가 배운 가장 새롭고 가장 좋은 방법에 따라 삶을 다스린다면 결코 권태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자기의 정령을 바싹 따르라. 그러면 정령은 반드시 시간마다 새로운 전망을 보여 줄 것이다. 집안일은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방바닥이 더러워지면 나는 일찍 일어나 살림살이를 모두 문밖 풀밭에 내놓았다. 침구와 침대를 한 꾸러미로 묶어 내놓고 바닥에 물을 끼얹은 다음 호수에서 가져온 흰 모래를 뿌리고 비로 박박 문질러 깨끗하고 하얗게 닦았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아침을 먹을 즈음에는 아침 해가 집을 넉넉히 말려 주어 다시 들어가 살 수 있었고, 내 명상은 거의 끊기지 않았다. 살림살이가 모두 풀밭에 나와 집시의 보따리처럼 작은 더미를 이루고, 책과 펜과 잉크를 치우지 않은 세 발 탁자가 소나무와 히코리 사이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웠다. 살림살이들도 밖에 나와서 기쁜 듯했고 다시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따금 그 위에 차양을 치고 거기 자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 물건들 위에 해가 비치는 것을 보고 그 위로 자유로운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아주 낯익은 물건도 집 안보다 밖에서 훨씬 더 흥미로워 보이는 법이다. 새 한 마리가 바로 옆 가지에 앉고, 탁자 밑에는 떡쑥이 자라고, 블랙베리 덩굴이 탁자 다리를 휘감아 오른다. 솔방울과 밤송이와 딸기 잎이 둘레에 흩어져 있다. 이런 모양들이 우리 가구에, 탁자와 의자와 침대에 옮겨 새겨지게 된 것은 그 가구들이 한때 이런 것들 한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내 집은 언덕 비탈, 더 큰 숲의 바로 가장자리에 있었고, 리기다소나무와 히코리가 자라는 어린 숲 한가운데 호수에서 6로드쯤 떨어져 있었으며, 좁은 오솔길이 언덕을 따라 호수로 내려갔다. 앞마당에는 딸기, 블랙베리, 떡쑥, 고추나물과 미역취, 관목참나무와 모래벚나무, 블루베리와 땅콩이 자랐다. 5월 끝 무렵이면 모래벚나무(Cerasus pumila)가 짧은 줄기를 빙 둘러 원통꼴로 우산처럼 핀 섬세한 꽃으로 길가를 꾸몄다. 그 줄기는 가을이 되면 큼직하고 보기 좋은 버찌의 무게에 휘어서 사방으로 햇살처럼 화환을 이루며 늘어졌다. 나는 자연에 대한 예의로 그 버찌를 맛보았지만 먹을 만하지는 않았다. 옻나무(Rhus glabra)는 집 둘레에 무성하게 자라서 내가 쌓은 흙둑을 뚫고 올라왔고 첫해에 5, 6피트나 자랐다. 넓은 깃꼴의 열대풍 잎은 낯설었지만 보기에 좋았다. 죽은 것처럼 보이던 마른 가지에서 늦봄에 갑자기 큰 눈이 터져 나와, 마술처럼 지름 1인치의 우아하고 연한 초록 가지로 자라났다. 이따금 창가에 앉아 있으면, 가지들이 어찌나 대중없이 자라 약한 마디를 혹사했는지,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싱싱하고 연한 가지 하나가 제 무게를 못 이겨 부채처럼 갑자기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8월이 되면 꽃 필 때 야생벌을 숱하게 불러 모았던 커다란 열매 송이들이 차츰 밝은 우단 같은 진홍빛을 띠었고, 다시 그 무게로 연한 가지를 휘어 부러뜨렸다.


이 여름 오후 창가에 앉아 있으니, 매들이 내가 일군 빈터 위를 맴돈다. 두셋씩 내 눈앞을 가로질러 날거나 집 뒤 스트로브잣나무 가지에 앉아 들썩이는 나그네비둘기들의 날갯소리가 허공에 목소리를 준다. 물수리 한 마리가 유리 같은 호수 수면에 보조개를 내고 물고기를 낚아 올린다. 밍크 한 마리가 문 앞 늪에서 살그머니 나와 물가의 개구리를 덮친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쌀먹이새들의 무게로 사초가 휘어진다. 그리고 지난 반 시간 동안 나는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자고새의 날갯짓 소리처럼 잦아들었다 되살아났다 하며 보스턴에서 시골로 나그네들을 실어 간다. 나는 내가 들은 이야기 속의 그 소년처럼 세상에서 동떨어져 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소년은 읍 동쪽 어느 농부의 집에 맡겨졌는데, 얼마 안 가 달아나 아주 초라한 꼴로 향수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소년의 말로는 그렇게 따분하고 외진 곳은 처음 보았단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 버리고, 글쎄, 기적 소리조차 들리지 않더란다! 지금 매사추세츠에 그런 곳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참으로 우리 마을은 저 날랜 철도의 화살
하나가 노리는 과녁이 되었고, 우리의
평화로운 들판 위로 울리는 그 달래는 소리는, 콩코드."1

피치버그 철도는 내가 사는 곳에서 남쪽으로 100로드쯤 되는 곳에서 호수에 닿는다. 나는 대개 그 둑길을 따라 마을에 가고, 말하자면 이 고리로 사회와 이어져 있다. 철도 노선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가는 화물 열차의 사람들은 나를 하도 자주 지나치니까 옛 친구에게 하듯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데, 아무래도 나를 철도 일꾼으로 아는 모양이다. 사실 나는 철도 일꾼이다. 나도 지구 궤도 어딘가에서 선로를 고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관차의 기적 소리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내 숲을 꿰뚫는다. 어느 농가 마당 위를 떠도는 매의 날카로운 울음 같은 그 소리는, 들뜬 도시 상인들이 숱하게 읍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아니면 반대편에서 모험심 많은 시골 장사꾼들이 들어오고 있다고 내게 알려 준다. 그들은 한쪽 지평선 아래로 들어서면서 다른 쪽 지평선을 향해 선로에서 비키라고 경고를 외치고, 그 소리는 때로 두 읍을 넘어서까지 들린다. 시골이여, 여기 너의 식료품이 온다. 시골 사람들이여, 여기 너희의 배급이 온다! 어떤 사람도 제 농장에서 그만큼 독립해 있지 않아서 이것을 마다할 수 없다. 그러면 여기 그 값이 있다! 하고 시골 사람의 기적이 소리친다. 길쭉한 공성 망치 같은 목재가 시속 20마일로 도시의 성벽을 향해 달려가고, 성벽 안에 사는 고단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모두 앉히고도 남을 만큼 의자가 실려 간다. 이처럼 거대하고 굼뜬 예의를 차리며 시골은 도시에 의자를 내민다. 원주민들이 허클베리를 따던 언덕은 모두 벗겨지고, 크랜베리 풀밭은 모두 갈퀴로 긁혀 도시로 실려 간다. 목화가 올라가고 짠 천이 내려온다. 비단이 올라가고 모직이 내려온다. 책이 올라가는데, 그 책을 쓰는 지혜는 내려간다.

기관차가 줄줄이 객차를 달고 행성처럼 움직여 가는 것을 볼 때면, 아니 혜성처럼이라고 해야겠다. 그 궤도가 되돌아오는 곡선처럼 보이지 않으니, 보는 사람은 그것이 그런 빠르기와 그런 방향으로 다시 이 태양계를 찾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증기 구름이 금빛과 은빛 화환을 이루며 깃발처럼 뒤로 나부끼는 것이, 내가 하늘 높이에서 본 숱한 솜털 구름이 빛을 향해 그 덩어리를 펼치는 모습과 같아서, 마치 이 떠도는 반신(半神), 이 구름을 모는 자가 머지않아 해 질 녘 하늘을 제 열차의 제복으로 삼을 것만 같다. 그리고 철마가 우레 같은 콧김으로 언덕을 울리고 발굽으로 땅을 흔들고 콧구멍으로 불과 연기를 내뿜는 소리를 들을 때면(새 신화에 그들이 어떤 날개 달린 말이나 불 뿜는 용을 넣을지 나는 모르겠다), 대지가 이제야 거기 살 만한 족속을 얻은 것 같다. 모든 것이 보이는 대로이고, 사람들이 고귀한 목적을 위해 자연의 힘을 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기관차 위에 걸린 구름이 영웅적인 행위가 흘린 땀이라면, 아니면 농부의 밭 위에 떠도는 구름만큼 이로운 것이라면, 자연의 힘과 자연 자체가 기꺼이 사람의 심부름길을 함께하며 호위해 줄 것이다.

나는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볼 때와 같은 마음으로 아침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해가 뜨는 것도 기차보다 그리 더 규칙적이지는 않다. 기차가 보스턴으로 가는 동안 그 뒤로 멀리 늘어서서 점점 더 높이 올라 하늘로 가는 구름의 행렬은 잠깐 해를 가리고 멀리 있는 내 밭에 그늘을 드리운다. 그 천상의 행렬에 견주면 땅바닥에 달라붙은 객차의 하찮은 행렬은 창끝의 미늘일 뿐이다. 철마의 마부는 이 겨울 아침 산속에서 별빛을 받으며 일찍 일어나 제 말에게 꼴을 먹이고 마구를 채웠다. 불도 이렇게 일찍 깨어나 말에게 생명의 열을 불어넣고 길을 떠나게 했다. 그 사업이 이른 만큼 순수하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이 깊이 쌓이면 사람들은 말에게 설피를 매어 주고, 거대한 쟁기로 산에서 바닷가까지 고랑을 낸다. 그러면 객차들이 뒤따르는 파종기처럼 그 고랑에 나라 안의 들뜬 사람들과 떠도는 상품을 씨앗으로 뿌린다. 불의 말은 하루 내내 나라를 날아다니며 주인이 쉬어야 할 때만 멈춘다. 나는 한밤중에 그 말발굽 소리와 도전하는 콧김 소리에 잠이 깬다. 그때 말은 숲속 외진 골짜기에서 얼음과 눈에 갇혀 자연의 힘과 맞서고 있다. 그리고 샛별이 뜰 때에야 마구간에 닿았다가 쉬지도 자지도 않고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아니면 저녁에 마구간에서 그 말이 하루 동안 남은 기운을 뿜어내는 소리가 들린다. 몇 시간의 쇠 같은 잠을 자려고 신경을 가라앉히고 간과 머리를 식히는 것이다. 그 사업이 오래 끌고 지칠 줄 모르는 만큼 영웅적이고 위엄 있기도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때는 사냥꾼만이 낮에 드나들던, 읍 경계의 사람 발길 드문 숲을 멀리 꿰뚫고, 가장 캄캄한 밤에 이 환한 객실들이 그 숲에 사는 것들도 모르게 쏜살같이 달린다. 이 순간에는 사람들이 모여 북적이는 어느 읍이나 도시의 환한 정거장에 멎었다가, 다음 순간에는 디스멀 습지에서 올빼미와 여우를 놀래 준다. 이제 기차가 떠나고 닿는 시각이 마을의 하루를 가르는 마디가 되었다. 기차가 어찌나 규칙적이고 정확하게 오가며 그 기적 소리가 어찌나 멀리까지 들리는지, 농부들은 기차에 맞추어 시계를 맞춘다. 그렇게 잘 운영되는 제도 하나가 온 나라를 다스린다. 철도가 생긴 뒤로 사람들은 시간을 지키는 일에서 얼마쯤 나아지지 않았는가? 역마차 사무소에서보다 기차 정거장에서 더 빨리 말하고 생각하지 않는가? 정거장의 공기에는 무언가 전기 같은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일으킨 기적에 놀라 왔다. 저렇게 서두르는 탈것으로는 결코 보스턴에 가지 못하리라고 내가 단언했을 이웃 몇 사람이 종이 울릴 때면 어김없이 거기 나와 있다. 무슨 일이든 "철도식으로" 한다는 것이 이제는 입버릇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힘이 그토록 자주, 그토록 진심으로 제 길에서 비키라고 경고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이 경우에는 해산 명령을 읽어 주려고 멈추는 일도, 군중의 머리 위로 위협 사격을 하는 일도 없다. 우리는 결코 비켜 가지 않는 운명, 아트로포스를 만들어 냈다. (여러분의 기관차 이름을 그렇게 짓자.) 사람들은 몇 시 몇 분에 이 화살들이 나침반의 어느 방위를 향해 쏘아질 것인지 미리 알림을 받는다. 그래도 그것은 누구의 일도 방해하지 않고, 아이들은 다른 선로를 따라 학교에 간다. 우리는 그 덕분에 더 꾸준하게 산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텔의 아들이 되도록 교육받는다. 허공에는 보이지 않는 화살이 가득하다. 자기 길이 아닌 모든 길은 운명의 길이다. 그러니 자기 선로를 지키라.

내가 상업을 높이 치는 것은 그 진취성과 용기 때문이다. 상업은 두 손을 모으고 유피테르에게 기도하지 않는다. 나는 이 사람들이 날마다 얼마쯤의 용기와 만족을 품고 제 일을 하러 다니는 것을 본다. 그들은 스스로 짐작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어쩌면 의식적으로 궁리해 낼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잘 쓰이고 있다. 부에나비스타 싸움에서 반 시간 동안 맨 앞줄에 버티고 선 사람들의 영웅심보다, 제설기를 겨울 막사로 삼아 사는 사람들의 꾸준하고 쾌활한 용기가 내게는 더 깊이 와닿는다. 그들은 나폴레옹이 가장 드물다고 여긴 새벽 세 시의 용기를 지녔을 뿐 아니라, 그 용기가 그렇게 일찍 잠자리에 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폭풍이 잠들거나 쇠말의 힘줄이 얼어붙을 때에야 잠자리에 든다. 어쩌면 큰 눈2이 내리는 이 아침, 아직도 눈보라가 몰아쳐 사람의 피를 얼리는데, 나는 그들이 내쉰 숨이 얼어 생긴 안개 둑 저편에서 그들의 기관차 종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오는 것을 듣는다. 뉴잉글랜드의 북동풍 눈보라가 거부권을 행사하는데도 기차가 크게 늦지 않고 오고 있다고 알리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눈과 서리를 뒤집어쓴 쟁기꾼들을 본다. 그들은 데이지나 들쥐 둥지 말고 다른 것을 뒤엎는 볏 위로 머리를 내밀고 있어서, 우주의 바깥 자리를 차지한 시에라네바다의 둥근 바위들처럼 보인다.

상업은 뜻밖에도 자신 있고 차분하며, 기민하고 모험심 많으며 지칠 줄을 모른다. 게다가 그 방법은 아주 자연스러워서 숱한 공상적인 사업이나 감상적인 실험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그래서 남다른 성공을 거둔다. 화물 열차가 덜컹거리며 내 곁을 지나가면 나는 기운이 나고 마음이 넓어진다. 보스턴의 롱 워프에서 섐플레인 호수까지 가는 내내 냄새를 풍기는 물건들의 냄새를 맡으면, 먼 이국 땅과 산호초와 인도양과 열대의 풍토와 지구의 넓이가 떠오른다. 다음 여름에 뉴잉글랜드의 숱한 아마빛 머리를 덮을 종려 잎, 마닐라삼과 야자 껍질, 낡은 밧줄 부스러기, 마대, 고철, 녹슨 못을 보면 나는 더욱 세계 시민이 된 듯하다. 찢어진 돛을 가득 실은 이 화차 한 칸은 그 돛을 종이로 만들어 책을 찍어 낸 것보다 지금 더 잘 읽히고 더 흥미롭다. 이 찢긴 자리들만큼 돛이 헤쳐 온 폭풍의 역사를 생생하게 써낼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은 교정이 필요 없는 교정쇄다. 여기 메인 숲에서 온 목재가 간다. 지난 홍수 때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은 목재로, 떠내려가거나 쪼개진 것 때문에 천 단위당 4달러가 올랐다. 소나무, 가문비나무, 삼나무가 1등품, 2등품, 3등품, 4등품으로 나뉘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 한 등급으로 곰과 무스와 순록 위에서 흔들리던 나무들이다. 다음으로 토머스턴 석회가 굴러간다. 최상품 한 무더기인데, 물을 먹어 삭기 전에 언덕 깊숙이까지 들어갈 것이다. 이 꾸러미의 넝마들은 온갖 빛깔과 온갖 품질의 것으로, 무명과 리넨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낮은 처지, 옷이 마지막에 이르는 모습이다. 이제는 밀워키가 아니라면 아무도 추어올리지 않는 무늬들이다. 한때는 영국이나 프랑스나 미국의 날염 천, 깅엄, 모슬린 따위의 화려한 물건이었는데, 유행과 가난의 온갖 구석에서 모여 이제 한 빛깔이나 몇 가지 빛깔뿐인 종이가 되러 가는 길이다. 그 종이에는 정말이지 높고 낮은 실제 삶의 이야기, 사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들이 쓰일 것이다! 이 닫힌 화차에서는 소금에 절인 생선 냄새, 강한 뉴잉글랜드의 냄새이자 장사의 냄새가 나서 그랜드뱅크스와 어장이 떠오른다. 이 세상살이에 맞게 속속들이 절여져 무엇도 그것을 상하게 할 수 없고, 성자들의 인내조차 부끄럽게 만드는 절인 생선을 본 적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으로 거리를 쓸거나 포장할 수도 있고, 불쏘시개를 쪼갤 수도 있으며, 짐마차꾼은 그 뒤에 자기와 짐을 숨겨 해와 바람과 비를 피할 수도 있다. 장사꾼은 언젠가 콩코드의 한 장사꾼이 그랬듯이 가게를 열 때 그것을 문 옆에 간판으로 걸어 둘 수도 있는데, 마침내 가장 오래된 단골조차 그것이 동물인지 식물인지 광물인지 똑똑히 말하지 못하게 될 때까지 걸어 두어도, 그것은 여전히 눈송이처럼 깨끗할 것이고, 솥에 넣어 삶으면 토요일 저녁상에 올릴 훌륭한 절인 대구가 되어 나올 것이다. 다음은 스페인산 쇠가죽인데, 그 가죽을 입었던 소들이 스패니시 메인의 팜파스를 내달릴 때의 꼬임과 치켜든 각도를 꼬리가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온갖 고집의 표본이며, 타고난 악덕이란 모두 거의 가망 없고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고백하자면, 실제로 어떤 사람의 참된 기질을 알고 나면 나는 이승에서 그것을 더 낫게도 더 나쁘게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는다. 동양 사람들이 말하듯 "똥개의 꼬리는 데우고 누르고 끈으로 칭칭 감아 열두 해 동안 공을 들여도 여전히 본디 모양을 지킨다." 이 꼬리들이 보여 주는 그런 고질에 듣는 유일한 처방은 그것으로 아교를 만드는 것이다. 대개 그렇게들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꼬리는 제자리에 머물러 착 달라붙는다. 여기 당밀이나 브랜디 한 통이 있다. 버몬트주 커팅스빌의 존 스미스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는 그린산맥 기슭의 장사꾼으로, 자기 개간지 근처 농부들을 위해 물건을 들여오는데, 지금쯤 아마 지하 저장고 문 앞에 서서 바닷가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물건들을 생각하며 그것이 자기에게 값을 어떻게 움직일지 따져 보고, 오늘 아침에만 벌써 스무 번은 했듯이 지금도 손님들에게 다음 기차로 최상품이 들어올 거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 소식은 『커팅스빌 타임스』에 광고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올라가는 사이에 다른 것들이 내려온다. 휙 하는 소리에 책에서 눈을 들면, 저 먼 북쪽 언덕에서 베어 낸 키 큰 소나무 하나가 그린산맥과 코네티컷강을 날개 단 듯 넘어와 10분도 안 되어 화살처럼 읍을 꿰뚫고 지나가는데, 그것을 보는 다른 눈은 거의 없다. 그 나무가 가는 곳은

"어느 큰 기함의
돛대가 되는 자리."3

그리고 들어 보라! 이번에는 가축 열차가 온다. 천 개 언덕의 소 떼와 양 우리와 마구간과 외양간을 허공에 싣고, 막대기를 든 가축 상인들과 양 떼 한가운데의 목동 소년들까지, 산속 목초지만 빼고 모든 것을 싣고 9월의 강풍이 산에서 날려 보낸 나뭇잎처럼 휩쓸려 간다. 송아지와 양이 우는 소리와 소들이 밀치락달치락하는 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워, 마치 목가적인 골짜기 하나가 지나가는 듯하다. 맨 앞의 늙은 방울 숫양이 방울을 흔들면 정말로 산들이 숫양처럼, 작은 언덕들이 어린양처럼 뛰논다. 한가운데에는 가축 상인들을 실은 화차도 한 칸 있다. 이제 그들은 자기 가축과 같은 높이에 있고 할 일도 없어졌지만, 아직도 직책의 표지로 쓸모없는 막대기를 붙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개는 어디 있는가? 개들에게는 이것이 큰 소동이다. 개들은 아주 따돌림을 당하고 냄새를 놓쳤다. 피터버러 언덕 뒤에서 짖거나 그린산맥의 서쪽 비탈을 헐떡이며 오르는 개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개들은 사냥감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지 못할 것이다. 개들의 일도 사라졌다. 그 충성과 영리함도 이제 값이 떨어졌다. 개들은 망신을 당하고 슬그머니 개집으로 돌아가거나, 어쩌면 야생으로 달아나 늑대와 여우와 동맹을 맺을 것이다. 이렇게 여러분의 목가적인 삶은 휩쓸려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종이 울리니 나는 선로에서 비켜 기차를 보내야 한다.

철도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그 끝이 어디인지
나는 보러 가지 않는다.
철도는 움푹한 데를 몇 군데 메우고,
제비들에게 둑을 쌓아 주고,
모래를 날리게 하고,
블랙베리를 자라게 한다,

그러나 나는 숲속 수레길을 건너듯 철도를 건너다닌다. 나는 그 연기와 증기와 쉭쉭 소리에 눈이 멀고 귀가 망가지고 싶지 않다.


이제 기차가 지나가고 들뜬 세상도 모두 함께 지나가 버려서 호수의 물고기들도 더는 그 울림을 느끼지 않으니, 나는 어느 때보다 홀로다. 아마 남은 긴 오후 내내 내 명상을 끊는 것은 먼 큰길을 따라가는 마차나 짐수레의 희미한 덜컹거림뿐일 것이다.

이따금 일요일이면 바람이 알맞게 불 때 종소리가 들렸다. 링컨이나 액턴이나 베드퍼드나 콩코드의 종소리로, 희미하고 달콤하며 말하자면 자연의 가락이어서 황야로 들여올 만했다. 숲 위로 충분히 멀리 떨어지면 이 소리는 어떤 떨리는 웅웅거림을 얻는다. 마치 지평선의 솔잎들이 하프 줄이고 그 소리가 그 줄을 쓸어 내리는 것 같다. 아주 먼 데서 들리는 소리는 모두 하나의 같은 효과를 낸다. 우주의 수금이 떨리는 것이다. 사이에 낀 대기가 먼 산등성이에 푸른빛을 입혀 우리 눈에 흥미롭게 만드는 것과 꼭 같다. 이때 내게 다다른 것은 공기가 걸러 낸 가락, 숲의 잎 하나 솔잎 하나와 모두 이야기를 나눈 가락, 자연의 힘이 받아 들고 조율하여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로 메아리치게 한 소리의 한 부분이었다. 메아리는 어느 정도 그 자체로 본디의 소리이며, 바로 거기에 메아리의 마력과 매력이 있다. 그것은 종소리에서 되풀이할 만한 것을 그저 되풀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얼마쯤은 숲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숲의 요정이 부르는, 같은 하찮은 낱말과 가락이다.

저녁이면 숲 너머 지평선에서 어느 소가 멀리 우는 소리가 달콤하고 가락 있게 들렸다. 처음에 나는 그것을 이따금 내게 세레나데를 불러 주던 어떤 떠돌이 악사들이 언덕과 골짜기를 헤매며 내는 목소리로 잘못 알곤 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소의 값싸고 자연스러운 음악으로 길게 늘어지자 나는 그다지 언짢지 않게 실망했다. 그 젊은이들의 노래가 소의 음악과 한 핏줄이며, 그 둘이 마침내 자연의 한 발음이라는 것을 내가 똑똑히 알아차렸다고 말하는 것은 비꼬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래를 높이 쳐서 하는 말이다.

여름 한때에는 저녁 기차가 지나간 뒤 일곱 시 반이면 어김없이 쏙독새들이 문 옆 그루터기나 집 용마루에 앉아 반 시간 동안 저녁 기도를 읊었다. 쏙독새들은 저녁마다 해 지는 때를 기준으로 어느 시각에서 5분 안팎으로, 거의 시계만큼 정확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나는 그 습성을 익힐 드문 기회를 얻었다. 이따금 숲 여기저기에서 네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우연히 한 마리가 다른 한 마리보다 한 마디씩 늦게 울었고, 어찌나 가까웠는지 음마다 뒤에 붙는 꼬꼭 소리뿐 아니라 거미줄에 걸린 파리 같은, 다만 그만큼 더 큰 묘한 윙윙 소리까지 가려 들을 수 있었다. 이따금 한 마리가 숲속에서 몇 피트 떨어진 곳을 끈에 매인 듯 빙빙 돌기도 했는데, 아마 내가 그 알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쏙독새들은 밤새 사이사이 노래했고, 새벽 직전과 새벽 무렵에 다시 어느 때 못지않게 가락을 뽑았다.

다른 새들이 잠잠해지면 소쩍새들이 곡조를 이어받는다. 상복 입은 여인들이 예부터 내는 울룰루 곡소리 같다. 그 음산한 비명은 참으로 벤 존슨풍이다. 슬기로운 한밤의 마녀들! 그것은 시인들이 노래하는 정직하고 투박한 투윗 투후가 아니라, 농담이 아니라 아주 엄숙한 무덤가의 노래이며, 지옥의 숲에서 천상의 사랑의 고통과 기쁨을 떠올리는 동반 자살한 연인들의 서로 위로하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숲 가장자리를 따라 떨며 이어지는 그들의 울음과 구슬픈 화답을 듣는 것이 좋다. 그 소리는 이따금 음악과 노래하는 새들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음악의 어둡고 눈물 젖은 면, 노래가 되고 싶어 하는 후회와 한숨인 것처럼. 그들은 영들이다. 한때 사람의 모습으로 밤마다 땅 위를 헤매며 어둠의 짓을 저지르다가, 이제는 죄를 지은 그 풍경 속에서 울부짖는 찬가와 만가로 죄를 씻고 있는 타락한 영혼들의 침울한 넋이자 우울한 예감이다. 그들은 우리 모두의 거처인 자연이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품을 수 있는지 새로이 느끼게 해 준다. 오오오오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호수 이쪽에서 한 마리가 한숨을 쉬고는 절망의 안절부절못함으로 맴돌다가 잿빛 떡갈나무의 새 횃대로 옮겨 앉는다. 그러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고 저편 기슭에서 다른 한 마리가 떨리는 진심으로 메아리치고, 말았더라면! 하는 소리가 멀리 링컨 숲에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부엉이도 내게 세레나데를 불러 주었다. 가까이서 들으면 자연에서 가장 구슬픈 소리라고 여길 만하다. 마치 자연이 이 소리로 사람이 죽어 가며 내는 신음을 판에 박아 제 합창단에 길이 남기려는 것 같다. 희망을 뒤로하고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서면서 짐승처럼, 그러나 사람의 흐느낌으로 울부짖는, 가련하고 약한 필멸의 잔해가 내는 신음이다. 거기 어떤 꾸르륵거리는 가락이 섞여 있어 더욱 무시무시하다. 흉내 내 보려 하면 나도 모르게 ㄱ르 하는 소리로 시작하게 된다. 그 소리는 건강하고 용감한 생각이 모두 썩어 들어가 아교처럼 끈적하고 곰팡이 핀 단계에 이른 마음을 드러낸다. 그 소리는 송장 먹는 귀신과 백치와 미친 사람의 울부짖음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제 먼 숲에서 거리 덕분에 참으로 가락이 된 소리로 한 마리가 화답한다. 후 후 후, 후러 후. 그리고 사실 그 소리는 낮이든 밤이든, 여름이든 겨울이든 대개는 즐거운 연상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부엉이가 있어서 기쁘다. 사람을 대신해 백치 같고 미친 듯한 울음은 부엉이들에게 맡기자. 그것은 어떤 낮도 비추지 못하는 늪과 어스름 숲에 아주 잘 어울리는 소리로, 사람이 아직 알아보지 못한 거대하고 미개발된 자연을 넌지시 보여 준다. 부엉이는 누구에게나 있는 삭막한 어스름과 채워지지 않은 생각을 나타낸다. 하루 내내 해는 어느 거친 늪의 수면을 비추었다. 거기에는 소나무겨우살이 이끼를 늘어뜨린 가문비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고, 작은 매들이 그 위를 맴돌고, 박새가 상록수 사이에서 혀 짧은 소리로 지저귀고, 자고새와 토끼가 그 밑에 숨어 다녔다. 그러나 이제 더 음산하고 더 걸맞은 낮이 밝아 오고, 다른 족속의 생물들이 깨어나 그곳에서 자연이 뜻하는 바를 드러낸다.

밤늦게 나는 마차가 멀리 다리를 건너며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밤에는 그 소리만큼 멀리 들리는 소리가 거의 없다. 개 짖는 소리도, 이따금 먼 농가 마당에서 어느 쓸쓸한 소가 우는 소리도 다시 들렸다. 그사이 온 기슭에 황소개구리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옛 술꾼과 잔치꾼의 억센 넋으로, 아직도 뉘우치지 않고 스틱스의 호수에서 돌림노래를 부르려 애쓴다. 월든의 요정들이여, 이런 비유를 용서하라. 거기에는 물풀이 거의 없지만 개구리는 있으니까. 그들은 옛 잔칫상의 흥겨운 규칙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목소리는 쉬고 엄숙하게 무거워져 즐거움을 비웃는 소리가 되었으며, 술은 맛을 잃고 그저 배를 불리는 액체가 되었고, 달콤한 취기는 결코 찾아와 지난날의 기억을 잠재우지 못하고, 그저 물에 흠뻑 젖고 퉁퉁 불고 배만 부풀 뿐이다. 가장 시의원다운 놈이 침 흘리는 턱에 냅킨 삼아 수련 잎에 턱을 괴고, 이 북쪽 기슭 밑에서 한때 업신여기던 물을 한 모금 깊이 들이켜고는 트르르릉크, 트르르릉크, 트르르릉크! 하고 외치며 잔을 돌린다. 그러자 곧바로 먼 물굽이에서 같은 암호가 물을 건너 되풀이되어 온다. 나이로나 배 둘레로나 그다음가는 놈이 제 눈금까지 술을 들이켠 것이다. 그리고 이 의례가 기슭을 한 바퀴 돌면 사회자가 흡족하게 트르르릉크! 하고 외치고, 차례대로 저마다 같은 소리를 되풀이해서, 가장 덜 부풀고 가장 잘 새고 가장 배가 물렁한 놈까지 이어진다. 빠진 놈이 없도록. 그러고는 해가 아침 안개를 걷을 때까지 그 고함이 몇 번이고 한 바퀴씩 돌고, 마침내 족장 하나만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이따금 트룽크 하고 헛되이 울부짖고는 답을 기다린다.

내 빈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수평아리 한 마리를 그저 그 음악을 위해, 노래하는 새로 길러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한때 야생이던 이 인도 꿩의 울음은 틀림없이 어느 새의 울음보다도 놀라운 것이어서, 길들이지 않고 이 땅에 자리 잡게 할 수만 있다면 곧 거위의 꽥꽥 소리와 부엉이의 울음을 넘어 우리 숲에서 가장 이름난 소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리들의 나팔 소리가 쉴 때 그 틈을 채우는 암탉들의 꼬꼬댁 소리를 상상해 보라! 사람이 이 새를 제 가축에 보탠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알과 닭다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새들이 넘쳐나는 숲, 그들의 고향 숲을 겨울 아침에 거닐며 야생 수평아리들이 나무 위에서 우는 소리, 울려 퍼지는 땅 위로 몇 마일이나 맑고 날카롭게 뻗어 다른 새들의 더 약한 소리를 덮어 버리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소리는 온 나라를 깨어 있게 할 것이다. 누군들 일찍 일어나지 않겠는가. 평생 날마다 조금씩 더 일찍 일어나서 마침내 이루 말할 수 없이 건강하고 부유하고 지혜로워지지 않겠는가? 이 외래종 새의 울음은 어느 나라에서나 시인들이 제 고장 가수들의 노래와 함께 기린다. 어떤 풍토든 씩씩한 챈티클리어와 잘 맞는다. 그는 토박이보다도 더 토박이다. 그의 건강은 언제나 좋고, 폐는 튼튼하며, 기운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 대서양과 태평양의 뱃사람마저 그 목소리에 잠을 깬다. 그러나 그 날카로운 소리가 나를 잠에서 깨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개도 고양이도 소도 돼지도 암탉도 기르지 않았으니, 여러분은 집안의 소리가 모자랐다고 말할 것이다. 버터 젓는 통 소리도, 물레 소리도, 주전자가 노래하는 소리나 찻물 통이 쉭쉭거리는 소리도, 마음을 달래 줄 아이 우는 소리도 없었다. 옛날식 사람이라면 벌써 정신을 잃었거나 권태로 죽었을 것이다. 벽 속의 쥐도 없었다. 쥐들은 굶주려 나가 버렸다. 아니, 애초에 미끼로 꾀어 들인 적이 없었다. 지붕 위와 마루 밑의 다람쥐, 용마루의 쏙독새, 창 밑에서 꽥꽥거리는 어치, 집 밑의 산토끼나 우드척, 집 뒤의 소쩍새나 수리부엉이, 호수 위의 야생 거위 떼나 웃는 듯이 우는 아비, 밤에 짖는 여우뿐이었다. 순한 농장 새인 종다리나 꾀꼬리조차 내 빈터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마당에서 우는 수평아리도 꼬꼬댁거리는 암탉도 없었다. 마당이 없었다! 울타리 없는 자연이 바로 문지방까지 다가와 있었다. 풀밭 밑에서는 어린 숲이 자라 올라오고, 야생 옻나무와 블랙베리 덩굴이 지하실로 뚫고 들어오고, 억센 리기다소나무가 자리가 모자라 지붕널에 몸을 비비며 삐걱거렸고, 그 뿌리는 집 밑까지 뻗어 있었다. 강풍에 날아간 지붕 창 뚜껑이나 덧문 대신, 땔감으로 쓸, 집 뒤에서 부러지거나 뿌리째 뽑힌 소나무가 있었다. 큰 눈이 내렸을 때 앞마당 대문까지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문도 없고 앞마당도 없고 문명 세계로 가는 길도 없었다.

주

  1. 1. 소로의 벗 엘러리 채닝(1817~1901)의 시. 끝말 Concord(콩코드)에는 「화합」이라는 뜻도 있다.

  2. 2. 큰 눈: 1717년 2월 뉴잉글랜드를 덮은 큰 눈.

  3. 3. 밀턴, 『실낙원』 제1권. 사탄의 창을 큰 기함의 돛대에 견준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