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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높은 법칙

물고기 한 꿰미를 들고 낚싯대를 끌며 숲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데, 날이 이미 아주 어두웠다. 그때 우드척 한 마리가 내 앞길을 살금살금 가로지르는 것이 언뜻 보였고, 나는 야만스러운 기쁨에 이상하게 몸이 떨리며 그놈을 붙잡아 날로 먹어 치우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 그때 배가 고팠던 것은 아니다. 그놈이 나타내는 야생에 굶주렸을 뿐이다. 그러나 호숫가에 사는 동안 한두 번은, 반쯤 굶은 사냥개처럼 이상하게 넋을 놓고 숲을 헤매며 먹어 치울 만한 사냥감 고기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는데, 그때는 어떤 고기도 나에게 지나치게 야만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야생의 광경이 까닭 모르게 낯익어져 있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내 안에서 더 높은, 이른바 영적인 삶을 향한 본능과, 원시적이고 거칠고 야만스러운 삶을 향한 또 다른 본능을 발견했고, 지금도 발견한다. 그리고 나는 둘 다 공경한다. 나는 선한 것 못지않게 야생을 사랑한다. 낚시에 깃든 야생과 모험 때문에 나는 지금도 낚시가 마음에 든다. 나는 이따금 삶을 거칠게 움켜쥐고 짐승처럼 하루를 보내고 싶다. 아주 어렸을 때 자연과 가장 가까이 사귀게 된 것은 아마 이 일과 사냥 덕분일 것이다. 낚시와 사냥은 그 나이에는 달리 사귈 일이 거의 없을 풍경 속으로 우리를 일찍부터 데려가서 붙잡아 둔다. 어부와 사냥꾼과 나무꾼처럼 들과 숲에서 평생을 보내며 남다른 뜻에서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된 사람들은, 하던 일을 잠시 쉬는 틈에 자연을 관찰하기에 더 좋은 마음 상태에 있을 때가 많다. 기대를 품고 자연에 다가가는 철학자나 시인보다도 그렇다. 자연은 그들에게 제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초원에 간 나그네는 저절로 사냥꾼이 되고, 미주리강과 컬럼비아강의 상류에서는 덫 사냥꾼이, 세인트메리 폭포에서는 어부가 되지만, 그저 나그네이기만 한 사람은 남에게서 반쯤만 배우니 믿을 만한 전거가 되지 못한다. 과학이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든 본능으로든 이미 아는 것을 보고할 때 우리는 가장 흥미를 느낀다. 그것만이 참된 인문(humanity), 곧 사람의 경험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양키에게는 놀이가 적다고 단언하는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은 양키에게 공휴일이 그리 많지 않고, 영국에서처럼 어른과 아이가 갖가지 경기를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냥과 낚시 같은, 더 원시적이지만 홀로 즐기는 놀이가 아직 그런 경기에 자리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또래의 뉴잉글랜드 소년은 거의 모두 열 살에서 열네 살 사이에 새총을 어깨에 메었다. 그리고 그의 사냥터와 낚시터는 영국 귀족의 사냥 금렵지처럼 한정되지 않았고, 야만인의 사냥터보다도 더 끝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공유지에 남아 노는 일이 더 잦지 않았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인정이 늘어서가 아니라 사냥감이 줄어서다. 왜냐하면 사냥꾼이야말로 아마 사냥당하는 짐승의 가장 큰 벗일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주의 협회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호숫가에 있을 때 나는 이따금 끼니를 바꾸어 보려고 물고기를 보태고 싶었다. 나는 실제로 최초의 어부들과 같은 필요에서 낚시를 했다. 내가 그에 맞서 불러낼 수 있었던 인정은 모두 꾸며 낸 것이었고, 내 감정보다는 내 철학에 관련된 것이었다. 지금은 낚시만 말한다. 새 사냥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다르게 느꼈고, 숲으로 가기 전에 총을 팔았다. 내가 남보다 인정이 덜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다. 나는 물고기도 지렁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이것은 버릇이었다. 새 사냥으로 말하자면, 총을 들고 다닌 마지막 몇 해 동안 내 핑계는 조류학을 공부한다는 것이었고, 나는 새롭거나 드문 새만 찾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보다 더 섬세하게 조류학을 공부하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 길은 새의 습성에 훨씬 더 세심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므로, 그 까닭 하나만으로도 나는 기꺼이 총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인정의 이유로 드는 반론에도 불구하고, 이런 놀이를 대신할 만큼 값진 놀이가 있는지 나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벗들 가운데 몇이 자기 아들에게 사냥을 하게 해야 하느냐고 걱정스레 물었을 때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것이 내 교육의 가장 좋은 부분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을 떠올리며, 아이들을 사냥꾼으로 만들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사냥을 즐기는 사람이더라도, 될 수 있다면 마침내 위대한 사냥꾼이 되어 이 황야에서든 어느 초목의 황야에서든 자기에게 맞을 만큼 큰 사냥감을 찾지 못하게 하라고, 사람을 낚는 어부이자 사냥꾼이 되게 하라고 했다. 여기까지는 나도 초서의 수녀와 같은 의견이다. 그 수녀는

"사냥꾼은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글귀에
털 뽑힌 암탉 한 마리 값도 쳐주지 않았네."1

개인의 역사에도 종족의 역사에서처럼, 알곤킨족이 부른 대로 사냥꾼이 "가장 뛰어난 사람"인 시기가 있다. 총을 한 번도 쏘아 보지 못한 소년을 우리는 딱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 소년은 조금도 더 인정이 많지 않으며, 그의 교육은 안타깝게도 소홀히 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이 일에 열중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내 대답이었고, 나는 그들이 머지않아 그 일에서 자라 나오리라 믿었다. 소년 시절의 생각 없는 나이를 지난 인정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와 같은 조건으로 목숨을 지닌 생물을 함부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막다른 곳에 몰린 산토끼는 아이처럼 운다. 어머니들이여, 경고하건대 내 동정심은 흔히 하는 인간애적인 구별을 언제나 따르지는 않는다.

젊은이가 숲에, 그리고 자기 안의 가장 원초적인 부분에 처음 발을 들이는 길은 대개 이렇다. 그는 처음에는 사냥꾼과 어부로서 그리로 가지만, 마침내 그 안에 더 나은 삶의 씨앗이 있다면 시인으로든 박물학자로든 자기에게 맞는 대상을 알아보고 총과 낚싯대를 뒤에 두고 떠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점에서 아직도, 그리고 언제까지나 젊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냥하는 목사가 드물지 않은 광경이다. 그런 사람은 좋은 양치기 개는 될지 몰라도 선한 목자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아는 한 나무 베기나 얼음 자르기 같은 일을 빼면, 읍의 아버지든 아이든 내 동료 시민 누구라도 월든 호수에 반나절을 꼬박 붙들어 둔 뚜렷한 일은, 딱 한 번의 예외를 빼면 낚시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고 나는 놀랐다. 그들은 그동안 내내 호수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도 물고기를 길게 한 꿰미 잡지 못하면 대개 운이 좋았다거나 시간을 들인 만큼 보상을 받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낚시라는 앙금이 바닥에 가라앉아 그들의 목적이 맑아지기까지 천 번을 그곳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정화 과정은 틀림없이 그동안 내내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주지사와 그의 참사회는 어렸을 때 그곳에 낚시하러 갔으므로 호수를 희미하게 기억하지만, 이제는 너무 늙고 위엄이 있어 낚시를 가지 않으니 영영 그 호수를 다시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그들조차 마침내 천국에 가기를 기대한다. 주 의회가 호수를 돌아본다면 그것은 주로 거기서 쓸 낚싯바늘의 수를 정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들은 주 의회를 미끼로 꿰어 호수 자체를 낚을, 바늘 중의 바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처럼 문명 사회에서도 태아 같은 사람은 사냥꾼 단계를 거쳐 자란다.

요 몇 해 나는 낚시를 하면 자존심이 조금 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거듭 깨달았다. 몇 번이고 다시 해 보았다. 나는 낚시에 솜씨가 있고, 내 동료 여럿처럼 낚시를 향한 어떤 본능도 있어서 그것이 이따금 되살아나지만, 낚시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으리라고 느낀다.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것은 희미한 암시이지만 아침의 첫 빛줄기도 그렇다. 내 안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창조물의 낮은 계층에 속하는 이 본능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인정이나 지혜가 더 늘지 않았는데도 해마다 어부의 모습을 덜 띠게 되었고, 지금은 전혀 어부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황야에서 산다면 다시 진지하게 어부와 사냥꾼이 되고 싶은 유혹을 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이 먹을거리와 모든 고기에는 본디 어딘가 불결한 데가 있다. 나는 집안일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날마다 단정하고 점잖은 모습을 하고 집을 향기롭게 하며 온갖 고약한 냄새와 꼴을 없애려는, 그토록 품이 많이 드는 애씀이 어디서 오는지 알기 시작했다. 나는 내 손으로 백정과 설거지꾼과 요리사 노릇을 했고, 요리를 받는 신사 노릇까지 했으므로, 남달리 빠짐없는 경험에서 말할 수 있다. 내 경우에 동물성 먹을거리에 대한 실제의 반대 이유는 그 불결함이었다. 게다가 물고기를 잡아 손질하고 요리해 먹고 나면 그것이 나를 본질적으로 먹여 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은 하찮고 쓸데없었으며 얻는 것보다 드는 것이 더 많았으니, 빵 조금이나 감자 몇 알이면 수고와 더러움을 덜 들이고도 그만큼 해냈을 것이다. 내 동시대인 여럿처럼 나는 여러 해 동안 동물성 먹을거리나 차나 커피 따위를 거의 먹지 않았다. 그것들에서 무슨 나쁜 결과를 찾아냈다기보다는 그것들이 내 상상력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물성 먹을거리에 대한 거부감은 경험의 결과가 아니라 본능이다. 여러모로 낮게 살고 거칠게 먹는 것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렇게 산 적은 없지만 내 상상력을 흡족하게 할 만큼은 그 길로 나아갔다. 자신의 더 높은 능력, 시적인 능력을 가장 좋은 상태로 지키려고 애쓴 사람은 누구나 동물성 먹을거리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많이 먹는 일을 삼가는 쪽으로 각별히 기울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곤충학자들이 밝힌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커비와 스펜스의 책에서 찾았다. "어떤 곤충은 완전한 상태가 되면 먹는 기관을 갖추고도 그것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일반 법칙"으로 내세운다. "이 상태의 곤충은 거의 모두 애벌레 때보다 훨씬 적게 먹는다. 게걸스러운 애벌레가 나비로 바뀌면…… 그리고 먹보 구더기가 파리가 되면" 꿀이나 다른 단 즙 한두 방울로 만족한다. 나비의 날개 밑에 있는 배는 아직도 애벌레를 나타낸다. 이것이 벌레를 먹는 그의 운명을 꾀는 맛있는 한 점이다.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애벌레 상태의 사람이다. 그리고 온 국민이 그 상태에 있는 나라들, 공상도 상상력도 없이 거대한 배가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는 나라들이 있다.

상상력을 거스르지 않을 만큼 단순하고 깨끗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요리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나는 몸을 먹일 때 상상력도 먹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은 같은 식탁에 앉아야 한다. 그래도 아마 그렇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열매를 절제하며 먹는다면 식욕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고 가장 값진 일을 방해받을 일도 없지만, 접시에 양념을 하나 더 넣어 보라. 그것이 여러분을 중독시킬 것이다. 기름진 요리로 살 만한 가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날마다 남이 차려 주는 것과 똑같은 저녁을, 그것이 고기든 채소든, 제 손으로 차리다가 들키면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달라지기 전까지 우리는 문명화되지 않았고, 신사 숙녀라 해도 참된 남자와 여자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를 일러 준다. 왜 상상력이 고기와 기름과 화해하려 들지 않는지 묻는 것은 헛된 일일지 모른다. 상상력이 화해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나는 확신한다. 사람이 육식 동물이라는 것은 하나의 치욕이 아닌가? 사실 사람은 상당 부분 다른 동물을 잡아먹으며 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산다. 그러나 그것은 비참한 길이다. 토끼를 덫으로 잡거나 새끼 양을 잡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이 더 순진하고 건전한 먹을거리에만 머물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인류의 은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 실천이 어떻든, 야만 부족들이 더 문명화된 이들과 만나자 서로를 잡아먹기를 그만두었듯이, 차츰 나아가는 인류가 동물을 먹기를 그만두는 것은 틀림없이 인류의 운명의 한 부분이라고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 정령이 들려주는 가장 희미하지만 끊임없는 암시, 틀림없이 참된 그 암시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를 어떤 극단으로, 아니면 광기로까지 이끌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더 굳세고 성실해질수록 그의 길은 그쪽으로 나 있다. 건강한 사람 하나가 느끼는, 아무리 희미해도 확고한 반대가 마침내는 인류의 논증과 관습을 이긴다. 자기 정령을 따르다가 길을 잘못 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결과가 몸이 약해지는 것이라 해도, 그것은 더 높은 원리에 맞는 삶이었으니 아마 누구도 그 결과를 후회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낮과 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삶이 꽃과 향긋한 풀처럼 향기를 내뿜으며, 더 탄력 있고 더 별빛 같고 더 불멸에 가까워진다면, 그것이 여러분의 성공이다. 온 자연이 여러분을 축하하며, 여러분은 매 순간 스스로를 축복할 까닭이 있다. 가장 큰 이득과 가치는 제대로 평가받는 데서 가장 멀리 있다. 우리는 그것이 있기나 한지 쉽게 의심하게 되고, 곧 그것을 잊는다. 그것이 가장 높은 실재다. 아마 가장 놀랍고 가장 실재하는 사실은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결코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내 나날의 삶이 거두는 참된 수확은 아침이나 저녁의 빛깔처럼 어딘지 손에 잡히지 않고 말로 그릴 수 없다. 그것은 붙잡은 별 먼지 한 줌, 내가 움켜쥔 무지개 한 조각이다.

그렇지만 나로 말하면 남달리 까다로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필요하다면 쥐 튀김도 이따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아편 먹는 사람의 천국보다 자연의 하늘을 더 좋아하는 것과 같은 까닭으로, 나는 그토록 오래 물을 마셔 온 것이 기쁘다. 나는 언제나 맑은 정신으로 있고 싶은데, 취함에는 끝없는 등급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물이 지혜로운 사람에게 오직 하나의 마실 것이라고 믿으며, 포도주는 그리 고귀한 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침의 희망을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저녁의 희망을 차 한 잔으로 깨뜨려 버리는 일을 생각해 보라! 아, 그런 것들에 끌릴 때 나는 얼마나 낮게 떨어지는가! 음악조차 사람을 취하게 할 수 있다. 겉보기에 이렇게 사소한 원인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무너뜨렸고, 영국과 아메리카도 무너뜨릴 것이다. 온갖 취함 가운데 자기가 들이쉬는 공기에 취하기를 마다할 사람이 누구인가? 거친 노동을 오래 계속하는 일에 대해 내가 찾은 가장 심각한 반대 이유는, 그 노동이 나까지 거칠게 먹고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 나는 이런 점에서 다소 덜 까다롭다. 나는 식탁에 신앙을 덜 가지고 가고, 식사 기도도 드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전보다 지혜로워져서가 아니라, 고백할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안타까워도 해가 갈수록 더 거칠고 무심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시에 대해 그렇게 믿듯이, 이런 물음은 아마 젊을 때만 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실천은 "어디에도 없고", 내 의견은 여기 있다. 그렇지만 나는 『베다』가 "무소부재한 지고의 존재를 참되게 믿는 이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도 된다"고 할 때, 곧 자기 먹을거리가 무엇인지, 누가 그것을 장만하는지 따져 물을 의무가 없다고 할 때 가리키는 그 특권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나 자신을 여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어느 힌두 주석가가 말했듯이, 그들의 경우에도 베단타가 이 특권을 "곤궁할 때"로 한정한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2

식욕이 아무 몫도 하지 않은 먹을거리에서 말할 수 없는 만족을 얻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구인가? 대개 거친 감각인 미각 덕분에 정신의 지각을 얻었다는 것, 입맛을 통해 영감을 받았다는 것, 어느 언덕에서 먹은 장과 몇 알이 내 정령을 먹여 주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슴이 떨렸다. 증자는 말한다. "마음이 제 주인이 되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3 자기 먹을거리의 참맛을 가리는 사람은 결코 대식가가 될 수 없고, 가리지 못하는 사람은 대식가일 수밖에 없다. 청교도도 시 참사회원이 자라 요리에 덤비는 것만큼이나 게걸스러운 식욕으로 흑빵 껍질에 덤빌 수 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가 아니라 그것을 먹는 식욕이다. 문제는 질도 양도 아니고 관능의 맛에 빠지는 데 있다. 먹는 것이 우리 안의 짐승을 지탱하거나 우리 영의 삶에 영감을 주는 음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는 벌레들의 먹이가 될 때가 그렇다. 사냥꾼이 늪거북과 사향쥐와 그 밖의 그런 야만스러운 별미를 즐긴다면, 귀부인은 송아지 발로 만든 젤리나 바다 건너온 정어리를 즐기니 둘은 피장파장이다. 그는 물방앗간 저수지로 가고, 그 여자는 저장 단지로 간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그리고 여러분과 내가 어떻게 먹고 마시며 이 끈적끈적하고 짐승 같은 삶을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는 놀랄 만큼 도덕적이다. 덕과 악덕 사이에는 한순간의 휴전도 없다. 선은 결코 망하지 않는 유일한 투자다. 세상을 둘러싸고 떨리는 하프의 음악 속에서 우리를 전율케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고집하는 가락이다. 하프는 우주 보험 회사의 떠돌이 외판원이어서 그 회사의 약관을 권하고, 우리의 작은 선은 우리가 내는 보험료의 전부다. 젊은이는 마침내 무심해지지만 우주의 법칙은 무심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가장 예민한 사람의 편에 선다. 모든 산들바람에 귀를 기울여 꾸짖음을 들으라. 꾸짖음은 틀림없이 거기 있으며, 그것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우리가 현 하나를 건드리거나 음전 하나를 움직이기만 해도 그 매혹적인 교훈이 우리를 꿰뚫는다. 성가신 소음도 멀리 떨어져서 들으면 우리 삶의 비천함을 꼬집는 당당하고 달콤한 풍자처럼, 음악으로 들리는 일이 많다.

우리는 우리 안에 짐승이 있음을 의식한다. 그 짐승은 우리의 더 높은 본성이 잠드는 만큼 깨어난다. 그것은 파충류 같고 관능적이며, 살아 있고 건강할 때에도 우리 몸에 깃들어 사는 벌레들처럼 아마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에게서 물러날 수는 있어도 그 본성을 바꿀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그 나름의 건강을 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우리가 건강하면서도 순수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렵다. 요전 날 나는 하얗고 튼튼한 이와 엄니가 그대로 박힌 돼지 아래턱뼈 하나를 주웠는데, 그것을 보니 영의 건강과는 다른 동물의 건강과 활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짐승은 절제와 순수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성공했다. 맹자는 말한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아주 작다. 뭇사람은 그것을 금세 잃고, 군자는 그것을 조심스레 간직한다."4 우리가 순수에 이른다면 어떤 삶이 생겨날지 누가 알겠는가? 내게 순수를 가르쳐 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을 안다면 나는 당장 그를 찾아 나설 것이다. "정념과 몸의 바깥 감각을 다스리는 것과 선한 행위는, 마음이 신에게 다가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고 『베다』는 밝힌다." 그러나 영은 한동안 몸의 모든 지체와 기능에 스며들어 그것을 다스릴 수 있고, 꼴로는 가장 거친 관능인 것을 순수와 헌신으로 바꿀 수 있다. 생식의 힘은 우리가 방종할 때는 흩어져 우리를 불결하게 하지만, 우리가 삼갈 때는 우리에게 활력과 영감을 준다. 정결은 사람의 꽃핌이고, 천재나 영웅다움이나 거룩함 같은 것들은 그 뒤에 맺히는 갖가지 열매일 뿐이다. 순수의 물길이 열리면 사람은 곧장 신에게로 흘러간다. 우리의 순수는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의 불순은 우리를 떨어뜨리기를 번갈아 한다. 자기 안의 짐승이 나날이 죽어 가고 신성한 존재가 자리 잡아 가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복되다. 자기와 맺어진 열등하고 짐승 같은 본성 때문에 부끄러워할 까닭이 없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가 파우누스나 사티로스 같은 신이나 반신일 뿐이 아닌가 두렵다. 짐승과 맺어진 신성, 식욕의 피조물 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의 치욕이 아닌가 두렵다.

"자기 짐승들에게 마땅한 자리를 정해 주고
제 마음의 숲을 개간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
이 말과 염소와 늑대와 온갖 짐승을 부릴 줄 알고,
그 나머지 모두에게 스스로 나귀가 되지 않는 사람은!
그러지 않으면 사람은 돼지 떼일 뿐 아니라,
돼지 떼를 홀려 미친 듯 곤두박질치게 하고
더 나쁘게 만든 그 마귀들이기도 하다."5

모든 관능은 여러 꼴을 띠지만 하나이고, 모든 순수도 하나다. 사람이 관능적으로 먹든, 마시든, 동침하든, 잠을 자든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한 가지 식욕일 뿐이어서, 어떤 사람이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관능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불순한 사람은 순수와 함께 서 있을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다. 굴의 한 어귀에서 공격을 받은 파충류는 다른 어귀로 고개를 내민다. 정결하려면 절제해야 한다. 정결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자기가 정결한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덕에 대해 들어 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들은 소문에 맞추어 말할 뿐이다. 애써 노력하는 데서 지혜와 순수가 오고, 게으름에서 무지와 관능이 온다. 학생에게 관능은 굼뜬 마음의 버릇이다. 불결한 사람은 어디서나 게으른 사람, 난롯가에 앉아 있는 사람, 해가 엎드려 누운 그를 비추는 사람, 지치지도 않았으면서 쉬는 사람이다. 불결함과 모든 죄를 피하려면 열심히 일하라. 그것이 마구간 치우는 일이라 해도. 본성은 이겨 내기 어렵지만 이겨 내야 한다. 이교도보다 더 순수하지 않고, 더 자기를 버리지 않고, 더 경건하지 않다면, 그리스도교도라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이교라 여겨지는 종교 체계를 많이 아는데, 그 가르침은 읽는 사람을 부끄러움으로 가득 채우고 새로운 노력을 하도록 다그친다. 그 노력이 그저 의식을 치르는 일이라 해도 그렇다.

나는 이런 것들을 말하기를 망설인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 때문이 아니다. 내 말이 얼마나 외설스럽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불순을 드러내지 않고는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능의 한 가지 꼴에 대해서는 부끄러움 없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면서 다른 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우리는 하도 타락해서 사람 본성의 필요한 기능에 대해 단순하게 말하지 못한다. 더 이른 시대 어떤 나라에서는 모든 기능을 공경스럽게 이야기했고 법으로 다스렸다. 힌두의 입법자에게는 아무리 근대의 취향에 거슬리더라도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없었다.6 그는 먹는 법, 마시는 법, 동침하는 법, 똥과 오줌을 누는 법 따위를 가르치며 비천한 것을 높이고, 이런 것들을 사소한 일이라 부르며 거짓으로 핑계를 대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섬기는 신을 위해, 순전히 자기만의 양식으로, 몸이라 불리는 신전을 짓는 건축가다. 그 대신 대리석을 망치로 두드린다고 해서 그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조각가이자 화가이며, 우리의 재료는 우리 자신의 살과 피와 뼈다. 어떤 고귀함이든 당장 사람의 이목구비를 다듬기 시작하고, 어떤 비천함이나 관능이든 그것을 짐승처럼 만들기 시작한다.

농부 존이 9월 어느 저녁, 힘든 하루 일을 마치고 문간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얼마간 일에 쏠려 있었다. 몸을 씻고 나서 그는 지성을 지닌 자기를 되살리려고 앉았다. 꽤 서늘한 저녁이어서 이웃 몇은 서리가 내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의 흐름을 따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 피리를 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그의 기분과 어우러졌다. 그는 여전히 일을 생각했지만, 그 생각의 골자는, 일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고 자기가 마음에 없이 일을 계획하고 궁리하고 있지만, 그것이 자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떨어져 나가는 살갗의 비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피리 소리는 그가 일하는 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그의 귀에 와닿았고, 그의 안에서 잠자던 어떤 능력들에게 할 일을 일러 주었다. 피리 소리가 그가 사는 거리와 마을과 나라를 부드럽게 지워 버리자 어떤 목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영광스러운 삶이 너에게 가능한데 왜 여기 머물며 이 비천하고 고된 삶을 사는가? 저 별들은 이곳 말고 다른 들판 위에서도 반짝인다. 그러나 어떻게 이 처지에서 벗어나 정말로 그리로 옮겨 갈 수 있는가?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은 어떤 새로운 금욕을 실천하는 것, 마음을 몸 안으로 내려보내 몸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점점 더 공경하며 대하는 것뿐이었다.

주

  1. 1. 초서, 『캔터베리 이야기』 총서시의 수도사 대목. 소로는 수도사를 「수녀」로 적었다.

  2. 2. 베단타: 『베다』 끝에 붙은 『우파니샤드』에 바탕을 둔 인도 철학.

  3. 3. 『대학』 전 7장.

  4. 4. 『맹자』 「이루 하」 편.

  5. 5. 존 던(1572~1631)의 시 「에드워드 허버트 경에게」.

  6. 6. 마누: 『마누 법전』을 지었다는 인도 신화의 입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