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병든 사람에게 의사들은 공기와 풍경을 바꾸어 보라고 현명하게 권한다. 고맙게도 여기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칠엽수는 뉴잉글랜드에서 자라지 않고, 흉내지빠귀 소리도 여기서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기러기는 우리보다 더 세계인이어서, 캐나다에서 아침을 먹고 오하이오에서 점심을 들고 남쪽 어느 늪 물길에서 밤을 나려고 깃을 고른다. 들소조차 어느 정도는 계절과 발을 맞추어, 옐로스톤 가에서 더 푸르고 더 달콤한 풀이 기다릴 때까지만 콜로라도의 풀밭을 뜯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농장의 나무 울타리를 허물고 돌담을 쌓으면 그때부터 우리 삶에 경계가 그어지고 운명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읍 서기로 뽑히기라도 하면, 참 딱하게도 이번 여름에는 티에라델푸에고, 곧 '불의 땅'에 갈 수 없겠지만, 그래도 지옥 불의 땅에는 얼마든지 갈 수 있다. 우주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넓다.
그러니 우리는 진기한 것을 찾는 승객처럼 우리 배의 고물 난간 너머를 더 자주 내다보아야 하고, 뱃밥이나 뜯는 멍청한 선원처럼 항해하지 말아야 한다. 지구 반대편은 우리와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의 집일 뿐이다. 우리의 항해는 대권 항해에 지나지 않고, 의사들은 살갗의 병만 처방한다. 어떤 사람은 기린을 쫓으러 남아프리카로 서둘러 가지만, 그가 정말로 쫓고 싶은 사냥감이 그것은 아닐 것이다. 묻건대,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이 얼마나 오래 기린을 사냥하겠는가? 도요새나 멧도요도 드문 재미를 줄지 모르지만, 나는 자기 자신을 쏘아 맞히는 쪽이 더 고귀한 사냥이라고 믿는다.
"눈을 곧장 안으로 돌리라, 그러면
네 마음속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 개의 땅을 찾으리라. 그곳을 여행하여
집 안 지리학의 대가가 되라."1
아프리카는, 서부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자신의 내륙이야말로 지도 위의 흰 공백이 아닌가? 막상 발견되고 나면 그 해안처럼 검은 것으로 드러날지라도. 우리가 찾으려는 것이 나일강이나 니제르강이나 미시시피강의 발원지인가, 이 대륙을 돌아 나가는 북서 항로인가? 이런 것들이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인가? 길을 잃은 사람이 프랭클린 하나뿐이어서 그 아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그를 찾는가? 그리넬 씨는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2 차라리 여러분 자신의 강과 바다를 탐험하는 멍고 파크가 되고, 루이스와 클라크가 되고, 프로비셔가 되라. 여러분 자신의 더 높은 위도를 탐험하라. 필요하다면 통조림 고기를 배마다 가득 싣고 가서 버티고, 빈 깡통은 하늘 높이 쌓아 표지로 삼으라. 통조림 고기는 그저 고기를 보존하려고 생겨났는가? 아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새 대륙과 새 세계 전체를 찾아가는 콜럼버스가 되어 장사의 뱃길이 아니라 생각의 뱃길을 열라. 사람은 저마다 한 왕국의 주인이며, 그 곁에 서면 차르의 지상 제국은 얼음이 남기고 간 둔덕 같은 하찮은 나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자기를 존중할 줄 모르면서 애국자가 되어 더 큰 것을 더 작은 것에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제 무덤이 될 흙은 사랑하면서, 그 흙을 아직도 살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정신에는 아무 공감도 없다. 애국심은 그들 머릿속에 든 구더기다. 온갖 허세를 부리고 큰돈을 들인 그 남태평양 탐험대는 무엇을 뜻했는가? 도덕의 세계에도 대륙과 바다가 있고 사람은 저마다 그 바다의 지협이거나 후미인데도 아직 스스로 탐험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홀로 자기 존재의 사사로운 바다, 그 대서양과 태평양을 탐험하기보다는 오백 명의 어른과 소년의 도움을 받으며 정부의 배를 타고 추위와 폭풍과 식인종을 헤치며 수천 마일을 항해하는 편이 더 쉽다는 것을 에둘러 인정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rret, et extremos alter scrutetur Iberos.
Plus habet hic vitae, plus habet ille viae."
그들은 떠돌며 낯선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나 살피라 하라.
나에게는 신이 더 많고, 그들에게는 길이 더 많다.3
잔지바르의 고양이 수를 세려고 세상을 한 바퀴 도는 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 그래도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렇게라도 하라. 그러다 보면 마침내 안으로 들어가는 어떤 "시머스 구멍"을 찾을지도 모른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과 포르투갈, 황금 해안과 노예 해안이 모두 이 사사로운 바다를 마주하고 있지만, 그 어느 나라의 배도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아가 본 적이 없다. 그 바다가 인도로 곧장 가는 길인데도 말이다. 모든 나라 말을 할 줄 알고 모든 민족의 풍습을 따르고 싶다면, 어떤 나그네보다 멀리 여행하고 모든 풍토에 귀화하고 스핑크스가 바위에 머리를 찧게 만들고 싶다면, 옛 철학자의 가르침을 따라 너 자신을 탐험하라. 여기에는 눈과 담력이 있어야 한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패배자와 탈영병, 달아나서 입대하는 겁쟁이들뿐이다. 이제 저 가장 먼 서쪽 길로 떠나라. 그 길은 미시시피나 태평양에서 멈추지 않고, 낡아 버린 중국이나 일본으로 이끌지도 않으며, 이 구에 닿는 접선처럼 곧장, 여름에도 겨울에도, 낮에도 밤에도 이어져 해가 지고 달이 지고 마침내 지구마저 지는 곳까지 나아간다.
미라보는 "사회의 가장 신성한 법에 정면으로 맞서는 데 어느 만큼의 결단이 필요한지 알아보려고" 노상강도 짓을 했다고 한다. 그는 "대열 속에서 싸우는 병사에게는 노상강도에게 필요한 용기의 절반도 필요하지 않다"고, "명예와 종교는 잘 생각하고 굳게 내린 결심을 가로막은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세상 기준으로는 사내다운 말이었지만, 절망적인 짓까지는 아니었다 해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더 온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보다 더 신성한 법에 복종하다가 "사회의 가장 신성한 법"이라 여겨지는 것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리에 꽤 자주 서게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서 일부러 길을 벗어나지 않고도 자기의 결단을 시험했을 것이다. 사람이 할 일은 일부러 사회에 맞서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법에 복종하다가 어떤 자세에 놓이게 되든 그 자세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 자세는 의로운 정부를 만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그 정부에 맞서는 자세는 결코 아닐 것이다.
나는 숲에 갈 때만큼 좋은 이유로 숲을 떠났다. 아마 나에게는 살아야 할 삶이 몇 개 더 남아 있어서 그 한 가지 삶에 더는 시간을 내줄 수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얼마나 저도 모르게 어떤 길에 들어서서 제 발로 다져진 길을 내는지 보면 놀랍다. 거기서 산 지 일주일도 안 되어 내 발은 문에서 호숫가까지 오솔길 하나를 냈고, 그 길을 밟지 않은 지 대여섯 해가 지났는데도 길은 아직 꽤 또렷하다. 유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길에 들어서서 길이 막히지 않게 도와주었을지도 모른다. 땅의 겉은 부드러워서 사람의 발자국이 잘 찍힌다. 마음이 다니는 길도 그렇다. 그렇다면 세상의 큰길은 얼마나 닳고 먼지투성이일 것이며, 전통과 순응의 바퀴 자국은 얼마나 깊겠는가! 나는 선실 손님으로 배를 타기보다는 차라리 돛대 앞으로 나가 세상의 갑판에 서고 싶었는데, 거기서야 산들 사이에 비치는 달빛을 가장 잘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갑판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나는 내 실험으로 적어도 이것을 배웠다.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려 온 삶을 살려고 애쓰면, 여느 때에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어떤 것들을 뒤에 남기고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을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더 너그러운 법칙들이 그의 둘레와 그의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거나, 옛 법칙들이 넓어져 더 너그러운 뜻으로 그에게 이롭게 풀이될 것이며, 그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누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 삶을 단순하게 하는 만큼 우주의 법칙은 덜 복잡하게 보일 것이고,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은 가난이 아니며, 나약함은 나약함이 아니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공중에 누각을 지었더라도 그 일이 헛수고가 될 까닭은 없다. 누각은 본디 거기 있어야 한다. 이제 그 밑에 주춧돌을 놓으라.
영국과 미국이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사람도 독버섯도 그렇게 자라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중요하다는 듯이, 그들 말고는 여러분을 알아들을 사람이 넉넉하지 않다는 듯이. 마치 자연이 한 가지 이해만을 거느릴 수 있어서 네발짐승과 함께 새를, 기는 것과 함께 나는 것을 먹여 살리지 못한다는 듯이, 그리고 소 브라이트도 알아듣는 '쉬'와 '워'가 가장 좋은 영어라는 듯이. 마치 어리석음 속에만 안전이 있다는 듯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 표현이 충분히 도를 넘지(extra-vagant) 못해서, 내 날마다의 경험이 지닌 좁은 테두리 밖으로 멀리 헤매어 나가지 못해서, 내가 확신하게 된 진리에 걸맞지 못할까 하는 것이다. 도를 넘는다니! 그것은 어떤 울타리에 갇혀 있느냐에 달렸다. 다른 위도에서 새 풀밭을 찾아 옮겨 가는 들소는, 젖 짤 때 들통을 걷어차고 외양간 울타리를 뛰어넘어 송아지를 쫓아가는 암소처럼 도를 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테두리 없이 말하고 싶다. 깨어 있는 순간의 사람이 깨어 있는 순간의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참된 표현의 주춧돌을 놓는 데조차 나는 아무리 부풀려 말해도 모자란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한 가락의 음악을 들은 사람치고 그때부터 영영 자기가 지나치게 말할까 봐 두려워한 사람이 있던가? 미래나 가능한 것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그쪽 앞면을 아주 느슨하고 흐릿하게 두어 윤곽이 희미하고 안개에 싸인 채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그림자가 해를 향해 저도 모르게 땀을 내뿜는 것을 드러내듯이. 우리 말이 지닌 날아가기 쉬운 진리는, 뒤에 남은 진술이 모자란다는 것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한다. 그 진리는 곧바로 옮겨져 가고, 글자로 된 기념비만 남는다. 우리의 믿음과 경건을 나타내는 말은 또렷하지 않다. 그래도 그 말은 더 높은 본성에게는 유향처럼 뜻 깊고 향기롭다.
어째서 늘 우리의 가장 무딘 지각에 맞추어 깎아 내리고, 그것을 상식이라 부르며 칭찬하는가? 가장 흔한 상식은 잠든 사람의 감각이고, 그들은 그것을 코 고는 소리로 나타낸다. 때로 우리는 한 배 반의 재치를 지닌 사람을 반편이와 한 부류로 넣고 싶어 하는데, 그들 재치의 3분의 1밖에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일찍 일어나기만 한다면 아침놀에도 흠을 잡을 것이다. 내가 듣기로 "그들은 카비르의 시에 네 가지 다른 뜻, 곧 환영, 정신, 지성, 그리고 『베다』의 겉으로 드러난 가르침이 있다고 주장한다".4 그러나 이 세상 이쪽에서는 어떤 사람의 글이 한 가지보다 많은 풀이를 허락하면 불평할 거리가 된다. 영국은 감자 썩음병을 고치려고 애쓰는데, 그보다 훨씬 널리, 훨씬 치명적으로 퍼져 있는 뇌 썩음병을 고치려고 애쓰는 사람은 없단 말인가?
내가 모호함의 경지에 이르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점에서 내 글에 월든 얼음이 받은 것보다 더 치명적인 흠이 잡히지 않는다면 나는 자랑스러울 것이다. 남부의 손님들은 얼음이 맑다는 증거인 그 푸른빛을 마치 흙탕물 빛이라도 되는 듯이 마다하고, 희기는 하지만 잡초 맛이 나는 케임브리지 얼음을 더 좋아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맑음은 땅을 감싸는 안개 같은 것이지, 그 너머의 푸른 하늘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미국 사람들과 대체로 근대인들이 옛사람들, 아니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에 견주어도 지적인 난쟁이라고 귀가 따갑게 떠들어 댄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피그미 종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피그미가 되려 하지 않고 가서 목을 매야 하겠는가? 저마다 자기 일에 마음을 쓰고, 자기가 생겨난 그대로의 존재가 되려고 애쓰라.
우리는 왜 그토록 절박하게 성공을 서두르고, 그토록 절박한 일에 뛰어드는가? 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발을 맞추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듣는 음악이 아무리 느리고 아무리 멀리서 들려오더라도, 그 음악에 맞추어 걷게 하라. 그가 사과나무나 떡갈나무만큼 빨리 여물어야 할 까닭은 없다. 그가 자기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하겠는가? 우리가 그것을 위해 지어진 사물의 상태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 대신 내세울 수 있는 현실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헛된 현실에 부딪혀 난파하지 않으리라. 애써 머리 위에 푸른 유리로 하늘을 세워야 하겠는가? 다 세우고 나면 우리는 그런 것은 없다는 듯이 틀림없이 여전히 저 높은 곳의 참된 하늘을 우러러볼 텐데.
쿠루라는 도시에 완전함을 좇으려는 한 장인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완전한 작품에는 시간이 재료로 들어가지만 완전한 작품에는 시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헤아리고, 그는 속으로 말했다. 평생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하더라도 이 지팡이는 모든 면에서 완전해야 한다. 그는 곧바로 나무를 구하러 숲으로 갔다. 걸맞지 않은 재료로는 만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가 막대를 하나하나 찾아보고는 내버리는 동안 벗들은 하나둘 그를 떠났으니, 그들은 일하다 늙어 죽었지만 그는 한순간도 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의 한결같음과 결단, 그리고 드높은 경건함이 그도 모르게 그에게 늙지 않는 젊음을 주었다. 그가 시간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시간은 그의 길을 비켜섰고, 그를 이길 수 없어서 멀찍이 떨어져 한숨만 쉬었다. 모든 면에서 걸맞은 나무를 찾아냈을 때 쿠루는 이미 백발 같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그는 그 폐허의 흙무더기 하나에 앉아 막대의 껍질을 벗겼다. 그가 막대에 알맞은 꼴을 주기도 전에 칸다하르 왕조가 끝났고, 그는 막대 끝으로 그 왕가의 마지막 임금 이름을 모래에 쓰고는 다시 일을 이어 갔다. 지팡이를 매끄럽게 다듬고 윤을 냈을 때 칼파는 더 이상 북극성이 아니었고, 물미를 끼우고 보석으로 꾸민 손잡이를 달기도 전에 브라흐마는 여러 번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러나 내가 왜 이런 것들을 늘어놓고 있는가? 마지막 손질을 끝내자, 그 작품은 놀란 장인의 눈앞에서 갑자기 브라흐마가 지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펼쳐졌다. 그는 지팡이 하나를 만들다가 새로운 체계를, 넉넉하고 아름다운 균형을 갖춘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 세계에서는 옛 도시와 왕조들이 사라졌지만 더 아름답고 더 영광스러운 것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는 발치에 아직 싱싱한 대팻밥 더미를 보고, 자기와 자기 작품에게는 그동안 흘렀다는 시간이 환영이었으며, 브라흐마의 머리에서 튄 불꽃 하나가 죽을 운명인 사람의 머리라는 부싯깃에 떨어져 불을 붙이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재료가 순수했고 그의 솜씨가 순수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찌 놀랍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어떤 일에 어떤 겉모습을 씌우든, 결국 진실만큼 우리에게 쓸모 있는 것은 없다. 진실만이 오래 닳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있는 곳에 있지 않고 거짓된 자리에 있다. 우리 본성이 한없이 연약한 탓에 어떤 경우를 가정하고는 거기에 우리 자신을 밀어 넣는다. 그래서 한꺼번에 두 경우에 빠져 있고, 빠져나오기는 갑절로 어렵다. 온전한 정신이 드는 순간에 우리는 사실만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경우만을 본다. 해야 마땅한 말이 아니라 해야 할 말을 하라. 어떤 진실이든 꾸며 낸 것보다 낫다. 땜장이 톰 하이드가 교수대에 섰을 때 무슨 할 말이 있느냐는 물음을 받았다. "재봉사들한테 전해 주시오." 그가 말했다. "첫 땀을 뜨기 전에 실 끝에 매듭을 짓는 걸 잊지 말라고." 그의 동료가 올린 기도는 잊혔다.
삶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맞이하고 살아 내라. 피하지 말고, 험한 이름으로 부르지도 말라. 삶은 여러분만큼 나쁘지 않다. 삶은 여러분이 가장 부유할 때 가장 초라해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낙원에서도 흠을 잡는다. 가난하더라도 여러분의 삶을 사랑하라. 구빈원에서도 즐겁고 가슴 설레는 영광스러운 시간을 얼마쯤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는 해는 부자의 저택 창에서처럼 구빈원 창에서도 환하게 되비치고, 그 문 앞의 눈도 봄이면 똑같이 일찍 녹는다. 고요한 마음이라면 궁전에서처럼 거기서도 흡족하게 살며 기운 나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읍의 가난한 사람들이 내게는 흔히 누구보다 독립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들은 그저 거리낌 없이 받을 수 있을 만큼 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대부분은 자기가 읍의 부조를 받는 처지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수단으로 제 몸을 건사하는 처지보다 낫지 못한 경우가 더 흔하고, 그쪽이 더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가난을 뜰의 약초처럼, 세이지처럼 가꾸라. 옷이든 벗이든 새것을 얻으려고 크게 애쓰지 말라. 헌 것을 뒤집어 고쳐 쓰라. 그것들에게로 돌아가라. 사물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변한다. 옷을 팔고 생각은 간직하라. 신께서 여러분에게 벗이 모자라지 않게 돌보실 것이다. 내가 거미처럼 평생 다락방 한구석에 갇혀 지낸다 해도, 생각을 곁에 지니고 있는 한 세상은 내게 똑같이 넓을 것이다. 옛 철학자는 말했다. "세 갈래로 나뉜 군대에서는 장수를 빼앗아 어지럽힐 수 있지만, 가장 비천하고 속된 사람에게서도 그 생각은 빼앗을 수 없다." 발전하려고, 이리저리 휘둘리도록 여러 영향에 자신을 내맡기려고 그토록 안달하며 애쓰지 말라. 그것은 모두 흩어짐이다. 겸손은 어둠처럼 하늘의 빛들을 드러낸다. 가난과 비천함의 그림자가 우리 둘레에 모여들면 "보라! 창조의 세계가 우리 눈앞에 넓어진다". 크로이소스의 재물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해도 우리의 목적은 여전히 같아야 하고 우리의 수단도 본질에서 같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자주 일깨움 받는다. 게다가 가난 때문에 활동 범위가 좁아진다면, 이를테면 책과 신문을 살 수 없다면, 여러분은 가장 뜻 깊고 가장 생생한 경험에 갇힐 뿐이다. 가장 많은 당분과 가장 많은 녹말을 내주는 재료를 다룰 수밖에 없다. 가장 단 것은 뼈에 가까운 삶이다. 여러분은 하찮은 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지켜진다. 더 높은 곳에서 너그러웠다고 해서 더 낮은 곳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없다. 넘치는 재물로는 넘치는 것만 살 수 있다. 영혼의 필수품은 하나도 돈으로 살 필요가 없다.
나는 납으로 된 벽 모퉁이에 산다. 그 벽을 부어 만들 때 종 쇠붙이가 조금 섞여 들어갔다. 한낮에 쉬고 있으면 바깥에서 땡그랑거리는 어지러운 소리가 내 귀에 자주 닿는다. 내 동시대 사람들이 내는 소리다. 이웃들은 이름난 신사 숙녀들과 겪은 일이며 저녁 식탁에서 어떤 명사들을 만났는지를 내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데일리 타임스』에 실린 기사만큼도 그런 일에 흥미가 없다. 흥미와 이야깃거리는 주로 옷차림과 예절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거위는 어떻게 차려 내도 거위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영국과 인도 제도, 조지아나 매사추세츠의 아무개 의원 나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두 덧없이 스쳐 가는 현상이어서, 나는 마침내 그 맘루크의 베이처럼 그들의 안뜰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나는 내 방위를 찾는 것이 즐겁다. 사람들 눈에 띄는 자리에서 허세와 행렬을 부리며 행진하는 것이 아니라, 될 수만 있다면 우주를 지은 이와 나란히 걷는 것이 즐겁다. 이 들뜨고 신경이 곤두서고 부산하고 하찮은 19세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세기가 지나가는 동안 생각에 잠겨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즐겁다. 사람들은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가? 그들은 모두 준비 위원회에 들어 있고, 누군가의 연설을 시시각각 기다린다. 신은 그날의 의장일 뿐이고 웹스터가 그의 연사다. 나는 저울질하고, 가라앉아 자리 잡고, 나를 가장 세게 그리고 가장 정당하게 끌어당기는 것 쪽으로 기우는 것을 사랑한다. 저울대에 매달려 덜 나가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경우를 받아들이는 것을 사랑한다. 내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길, 어떤 힘도 나를 막아서지 못하는 그 길을 가는 것을 사랑한다. 단단한 터를 잡기도 전에 아치를 틀기 시작하는 일은 내게 아무 만족도 주지 않는다. 살얼음 밟고 건너기 놀이는 그만하자. 어디에나 단단한 바닥은 있다. 어느 나그네가 한 소년에게 앞에 있는 늪이 바닥이 단단하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년은 단단하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곧 나그네의 말이 뱃대끈까지 빠져 버렸고, 나그네는 소년에게 말했다. "이 수렁은 바닥이 단단하다고 하지 않았니." 소년이 대답했다. "단단해요. 그런데 아직 반도 안 내려가셨잖아요." 사회의 수렁과 모래 늪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닳고 닳은 사람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것이 어떤 드문 일치에 이를 때에만 좋다. 나는 그저 욋가지와 회반죽에 어리석게 못을 박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망치를 달라. 그리고 그 밑의 받침목을 더듬어 찾게 하라. 퍼티에 기대지 말라. 못을 끝까지 박고 끝을 꼬부려 단단히 고정해서, 한밤중에 깨어나서도 자기 일을 떠올리며 흡족할 수 있게 하라. 무사 여신을 불러도 부끄럽지 않을 일이 되게 하라. 그래야 신이 여러분을 도우신다. 그래야만 도우신다. 박은 못 하나하나가 우주라는 기계에 박힌 또 하나의 리벳이 되어야 하고, 그 일을 이어 가는 것은 여러분이다.
사랑보다, 돈보다, 명성보다 나에게 진실을 달라. 나는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가 넘치고 굽실거리는 시중꾼이 있는 식탁에 앉았지만, 거기에는 성실함과 진실이 없었기에 그 인정 없는 식탁을 배고픈 채로 떠났다. 그 환대는 얼음과자만큼 차가웠다. 그것들을 얼리는 데 얼음은 필요 없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들은 내게 포도주의 나이와 그 포도를 거둔 해의 명성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갖지 못했고 살 수도 없는, 더 오래되고 더 새롭고 더 순수한 포도주, 더 영광스러운 해에 거둔 포도주를 생각했다. 품위니 집과 정원이니 "접대"니 하는 것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임금을 찾아갔지만, 그는 나를 자기 대청에서 기다리게 했고 환대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내 이웃에는 속이 빈 나무에서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몸가짐은 참으로 임금다웠다. 그를 찾아갔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주랑 현관에 앉아, 어떤 일이든 하기만 하면 주제넘은 것이 되어 버릴 게으르고 곰팡내 나는 덕을 닦고 있으려는가? 마치 하루를 오래 참음으로 시작하고는 사람을 사서 제 감자밭을 매게 하고, 오후에는 계획적인 선의를 품고 나가서 그리스도교인다운 온유와 자선을 베풀겠다는 것과 같다! 인류의 중국식 자만과 고여 썩은 자기만족을 생각해 보라. 이 세대는 자기가 빛나는 혈통의 마지막 자손이라고 조금 우쭐해하는 편이다. 그리고 보스턴과 런던과 파리와 로마에서, 자기의 오랜 내력을 생각하며 예술과 과학과 문학에서 이룬 진보를 흐뭇하게 이야기한다. 『철학회 기록』이 있고, 『위인 공개 추도사』가 있다! 착한 아담이 제 덕을 바라보며 흐뭇해하는 꼴이다. "그렇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했고, 결코 죽지 않을 거룩한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는 동안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아시리아의 학회들과 위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우리는 얼마나 풋내기 철학자이고 실험가인가! 내 독자 가운데 사람의 삶을 온전히 살아 본 이는 아직 하나도 없다. 지금은 인류의 삶에서 겨우 봄의 몇 달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곱 해 가려움증은 앓아 보았을지 몰라도, 콩코드에서 열일곱 해 매미는 아직 보지 못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의 얇은 껍질 한 꺼풀뿐이다. 대부분은 땅 밑으로 6피트를 파 들어가 본 적도, 땅 위로 그만큼 뛰어올라 본 적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시간의 거의 절반을 곤히 잠들어 지낸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땅의 겉에 확고한 질서를 세워 두었다. 참으로 우리는 깊은 사색가이고, 야심 찬 정신이다! 숲 바닥의 솔잎 사이를 기어가며 내 눈을 피해 숨으려는 벌레 한 마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저 벌레가 어째서 그런 비천한 생각을 품고 자기에게 은인이 되어 그 족속에게 기운 나는 소식을 전해 줄지도 모르는 나에게서 제 머리를 감추려 하는지 스스로 묻는다. 그럴 때면 나는 사람이라는 벌레인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더 큰 은인, 더 큰 지성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흘러드는데도, 우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따분한 것을 참고 지낸다. 가장 개화했다는 나라들에서 아직도 어떤 설교를 듣고 있는지만 넌지시 말해도 충분하다. 기쁨과 슬픔 같은 말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평범하고 비천한 것을 믿는 동안 콧소리로 부르는 찬송가의 후렴일 뿐이다. 우리는 옷만 갈아입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영 제국은 매우 크고 훌륭하며 미합중국은 일류 강국이라고들 한다. 우리는 사람마다 그 뒤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르내리고 있어서, 그가 마음속에 품기만 한다면 대영 제국쯤은 나뭇조각처럼 띄워 보낼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다음에는 어떤 열일곱 해 매미가 땅에서 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사는 세계의 정부는 영국 정부처럼 저녁 식사 뒤 포도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로 짜인 것이 아니다.
우리 안의 생명은 강물과 같다. 올해 그 물은 사람이 일찍이 알던 어느 때보다 높이 불어 메마른 고지대를 덮을지도 모른다. 올해가 바로 우리의 사향쥐를 모조리 물에 빠뜨려 죽일 큰일 나는 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곳이 늘 마른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과학이 강물의 범람을 기록하기 시작하기 전, 옛날에 강물이 씻어 내리던 둑을 저 멀리 내륙에서 본다. 뉴잉글랜드를 한 바퀴 돈 이야기를 누구나 들었을 것이다. 어느 농부의 부엌에 처음에는 코네티컷에서, 나중에는 매사추세츠에서 예순 해 동안 놓여 있던 사과나무 탁자의 마른 널빤지에서 힘세고 아름다운 벌레 한 마리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 벌레는 그보다도 여러 해 전에 살아 있던 나무에 낳은 알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알 바깥쪽의 나이테를 세어 보고 알았다. 벌레가 갉아 나오는 소리가 몇 주 동안 들렸고, 아마 찻물 단지의 열기에 알이 깨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부활과 불멸에 대한 믿음이 굳어지지 않는 사람이 누구겠는가? 처음에는 푸르게 살아 있던 나무의 겉 목질에 낳은 알이, 그 나무가 차츰 잘 마른 무덤 같은 꼴로 바뀌어 가는 동안 사회의 죽고 메마른 삶 속에서 나뭇결의 동심원 여러 겹 아래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어쩌면 잔칫상에 둘러앉은 놀란 인간 가족에게 벌써 여러 해째 갉아 나오는 소리를 들려주다가, 사회의 가장 하찮고 손때 묻은 세간 한가운데에서 뜻밖에 나와 마침내 완전한 여름의 삶을 누리게 될 아름답고 날개 달린 생명이 무엇일지 누가 알겠는가!
존이나 조너선이 이 모든 것을 깨달으리라고 말하지는 않겠다.5 그러나 그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결코 밝아 오지 않는 내일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빛은 우리에게 어둠이다. 우리가 깨어 있는 날만이 밝아 온다. 밝아 올 날은 아직 더 있다. 태양은 샛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