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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황홀한 저녁이다. 온몸이 하나의 감각이 되어 털구멍마다 기쁨을 빨아들인다. 나는 자연 속을 묘한 자유로움으로 오가며 자연의 한 부분이 된다. 서늘하고 구름 끼고 바람까지 부는데도 셔츠 바람으로 호수의 돌 많은 기슭을 따라 걸으면, 딱히 눈길을 끄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도 자연의 모든 힘이 여느 때와 달리 내게 살갑다. 황소개구리들이 나팔을 불어 밤을 맞아들이고, 쏙독새의 울음이 잔물결 이는 바람에 실려 물 건너에서 온다. 파르르 떠는 오리나무와 포플러 잎에 마음이 하나가 되어 숨이 멎을 것만 같다. 그래도 내 고요함은 호수처럼 잔물결이 일 뿐 뒤흔들리지는 않는다. 저녁 바람이 일으킨 이 잔물결은 매끄럽게 비치는 수면만큼이나 폭풍과 거리가 멀다. 이제 어두워졌는데도 바람은 여전히 숲에서 불며 울부짖고, 물결은 여전히 부딪치며, 어떤 생물들은 제 소리로 나머지를 잠재운다. 휴식은 결코 완전하지 않다. 가장 야생의 짐승들은 쉬지 않고 이제 먹이를 찾아 나선다. 여우와 스컹크와 토끼가 이제 두려움 없이 들과 숲을 돌아다닌다. 그들은 자연의 야경꾼이며, 살아 움직이는 삶의 낮과 낮을 잇는 고리다.

집에 돌아와 보면 손님들이 다녀가면서 명함을 남겨 두었다. 꽃 한 다발이거나 상록수 가지로 엮은 화환이거나, 노랗게 물든 호두나무 잎이나 나무 조각에 연필로 쓴 이름이다. 숲에 좀처럼 오지 않는 사람들은 오는 길에 숲의 작은 조각 하나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다가 일부러든 무심코든 두고 간다. 어떤 사람은 버드나무 가지 껍질을 벗겨 고리로 엮어서 내 탁자 위에 떨구어 놓았다. 내가 없는 사이에 손님이 다녀갔는지는 휘어진 잔가지나 풀, 신발 자국을 보고 언제나 알 수 있었다. 대개는 그들이 남긴 작은 흔적, 이를테면 떨어뜨린 꽃 한 송이나, 뜯었다 내던진 풀 한 줌을 보고 성별과 나이와 신분까지 알아맞혔다. 그 흔적이 반 마일 떨어진 철도까지 가 있을 때도 있었고, 남아 있는 시가나 파이프 냄새로 알아챌 때도 있었다. 아니, 60로드 떨어진 큰길로 나그네가 지나가는 것을 그의 파이프 냄새로 알아챌 때도 잦았다.

우리 둘레에는 대개 넉넉한 공간이 있다. 우리의 지평선이 바로 팔꿈치에 닿아 있는 일은 결코 없다. 울창한 숲이 바로 문 앞에 있지도 않고 호수도 그렇다. 언제나 얼마쯤은 빈터가 있어서, 우리에게 낯익고 우리 발길에 닳았으며, 어떻게든 우리 것이 되어 울타리가 쳐지고 자연에게서 되찾아 온 땅이 된다. 사람들이 버려두어 나 혼자 차지하게 된 이 넓은 범위와 둘레, 사람 발길 드문 몇 제곱마일의 숲이 무슨 까닭으로 나만의 것이 되었을까? 가장 가까운 이웃은 1마일 떨어져 있고, 내 집에서 반 마일 안에 있는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지 않으면 어디서도 집 한 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숲으로 둘러싸인 지평선을 혼자 다 차지하고 있다. 한쪽으로는 철도가 호수에 닿는 곳이 멀리 보이고, 다른 쪽으로는 숲길을 따라 늘어선 울타리가 보인다. 그러나 대체로 내가 사는 곳은 대초원만큼이나 외롭다. 그곳은 뉴잉글랜드인 만큼 아시아이기도 하고 아프리카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나에게는 나만의 해와 달과 별, 나 혼자만의 작은 세계가 있다. 밤이면 내가 최초의 사람이거나 마지막 사람인 것처럼 내 집 앞을 지나가거나 문을 두드리는 나그네가 하나도 없었다. 봄이면 예외여서, 아주 이따금 마을에서 메기를 낚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월든 호수보다 제 본성의 월든 호수에서 훨씬 더 많이 낚시를 했고, 낚싯바늘에 어둠을 미끼로 끼웠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가벼운 바구니를 들고 곧 물러가서 "세상을 어둠과 나에게" 맡겨 두었고, 밤의 검은 알맹이는 사람이 가까이 오는 일로 더럽혀진 적이 없었다. 마녀들은 모두 목매달렸고 그리스도교와 촛불이 들어온 지 오래인데도, 사람들은 대개 아직도 어둠을 조금은 두려워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 겪어 알았다. 가장 달콤하고 다정하며 가장 순진하고 힘이 되는 벗은 어떤 자연물에서든 찾을 수 있고, 가련한 사람 싫어하는 이나 가장 우울한 사람에게도 그렇다. 자연 한가운데 살며 감각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아주 깊은 우울이 있을 수 없다. 건강하고 순진한 귀에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음악이 되지 않은 폭풍은 아직 없었다. 단순하고 씩씩한 사람을 천박한 슬픔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절과 우정을 나누는 동안에는 어떤 것도 내 삶을 짐으로 만들 수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오늘 내 콩밭에 물을 주고 나를 집 안에 붙잡아 두는 부드러운 비는 쓸쓸하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내게도 좋은 것이다. 비 때문에 콩밭을 매지 못하지만 비는 내 김매기보다 훨씬 더 값지다. 비가 너무 오래 와서 씨앗이 땅속에서 썩고 낮은 땅의 감자가 망가진다 해도, 높은 땅의 풀에는 여전히 좋을 것이고, 풀에 좋으니 내게도 좋을 것이다. 이따금 나를 다른 사람들과 견주어 보면, 내가 의식하는 어떤 공덕보다도 넘치게 신들이 나를 그들보다 더 아끼는 것 같다. 동료들은 받지 못한 보증과 담보를 내가 신들의 손에서 받아 특별히 이끌림과 보살핌을 받는 것만 같다. 나는 스스로 우쭐대지 않는다. 우쭐하게 해 주는 쪽이 있다면 그것은 신들이다. 나는 외롭다고, 아니 고독감에 조금이라도 짓눌린다고 느낀 적이 한 번밖에 없다. 숲에 오고 나서 몇 주 지났을 때였는데, 한 시간 동안 나는 고요하고 건강한 삶에 사람이 가까이 사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홀로 있다는 것이 어딘지 언짢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 기분에 가벼운 광기가 섞여 있음을 알아차렸고, 곧 회복되리라는 것을 내다보는 듯했다. 이런 생각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부드러운 빗속에서, 나는 문득 자연 속에, 바로 빗방울 듣는 소리에, 내 집 둘레의 모든 소리와 모든 광경에 참으로 달콤하고 은혜로운 벗이 있음을 느꼈다. 끝없고 까닭 모를 다정함이 한꺼번에 공기처럼 나를 떠받쳐서, 사람이 가까이 산다는 것이 주리라고 상상하던 이점이 하찮아졌고, 그 뒤로 나는 그것을 다시 생각한 적이 없다. 작은 솔잎 하나하나가 공감으로 펴지고 부풀어 나와 벗이 되었다. 우리가 흔히 거칠고 쓸쓸하다고 부르는 풍경 속에서도 나와 한 핏줄인 무언가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가장 가까운 핏줄, 가장 사람다운 것은 어떤 사람도 마을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어찌나 또렷이 깨달았는지, 이제 어떤 곳도 다시는 내게 낯설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때아닌 슬픔은 슬픈 이를 사위게 하니,
산 이들의 땅에서 그들이 누리는 날은 짧다,
토스카르의 아름다운 딸이여."1

내가 가장 즐거웠던 시간 가운데 어떤 것은 봄이나 가을의 긴 비바람 속에서였다. 비바람은 오전뿐 아니라 오후까지 나를 집 안에 가두었고, 그칠 줄 모르는 울림과 두드림으로 나를 달래 주었다. 일찍 찾아온 어스름이 긴 저녁을 불러들이면 그 저녁에는 많은 생각이 뿌리를 내리고 피어날 시간이 있었다. 마을 집들을 그토록 시달리게 하는 북동풍 장대비가 몰아쳐서 하녀들이 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현관에 서서 물난리를 막을 채비를 하는 동안, 나는 온통 현관뿐인 내 작은 집의 문 뒤에 앉아 그 보호를 마음껏 누렸다. 한번은 세찬 뇌우 속에서 번개가 호수 건너편의 큰 리기다소나무를 쳐서, 지팡이에 홈을 파듯이 꼭대기에서 밑동까지 깊이 1인치가 넘고 너비 4, 5인치나 되는, 아주 눈에 띄고 완벽하게 고른 나선 홈을 냈다. 며칠 전 그 곁을 다시 지나다가 고개를 들어 그 자국을 보고 나는 외경에 사로잡혔다. 여덟 해 전 아무 해 없는 하늘에서 무시무시하고 거스를 수 없는 벼락이 내리꽂힌 그 자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사람들은 자주 내게 말한다. "거기 있으면 외롭겠어요. 사람들 가까이 있고 싶겠지요. 특히 비 오고 눈 오는 날이나 밤에는요." 나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어진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전체가 우주 속의 한 점일 뿐이다. 우리의 기구로는 그 원반의 너비조차 잴 수 없는 저 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사는 두 주민은 얼마나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왜 외로워해야 하는가? 우리 행성도 은하수 안에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던지는 그 물음은 내게는 가장 중요한 물음이 아닌 것 같다. 한 사람을 그 동료들에게서 떼어 놓아 고독하게 만드는 공간이란 어떤 것인가? 다리를 아무리 부지런히 놀려도 두 마음이 서로 훨씬 가까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 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분명 많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정거장이나 우체국이나 술집이나 예배당이나 학교나 식료품점이나 비컨힐이나 파이브 포인츠도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경험에서 삶이 솟아 나오는 것을 보아 온 영원한 삶의 샘이다. 버드나무가 물가에 서서 그쪽으로 뿌리를 뻗듯이. 이것은 본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지하실을 팔 곳은 바로 거기다. …… 어느 저녁 나는 월든 길에서 같은 읍 사람 하나를 따라잡았다. 그는 이른바 "번듯한 재산"을 모은 사람이지만 나는 그것을 번듯하게 구경한 적이 없다. 그는 소 두 마리를 몰고 장에 가는 길이었는데, 내게 어떻게 삶의 안락을 그렇게 많이 포기할 마음이 들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생활이 꽤 마음에 든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고, 그는 어둠과 진창 속을 더듬으며 브라이턴, 아니 '밝은 읍'으로 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는 아침 언젠가 거기 닿을 것이다.

죽은 사람에게 깨어나거나 되살아날 가망이 있다면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아무래도 좋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같고, 우리의 모든 감각에 말할 수 없이 즐겁다. 우리는 대개 동떨어지고 덧없는 사정들만이 우리의 계기가 되게 내버려 둔다. 사실 그것들이 우리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원인이다. 만물에 가장 가까운 것은 만물의 존재를 빚어내는 힘이다. 우리 바로 곁에서 가장 장엄한 법칙들이 끊임없이 집행되고 있다. 우리 바로 곁에 있는 것은 우리가 품삯을 주고 부리며 이야기 나누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일꾼이 아니라, 우리를 작품으로 빚고 있는 일꾼이다.

"하늘과 땅의 미묘한 힘이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넓고 깊은가!"

"그것을 알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 사물의 실체와 하나가 되어 있어서 사물에서 떼어 낼 수 없다."

"그 힘은 온 우주에서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거룩하게 하며, 명절 옷을 차려입고 조상에게 제물과 공물을 바치게 한다. 그것은 미묘한 지성의 바다다. 그 힘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위에, 우리 왼쪽에, 우리 오른쪽에 있으며, 사방에서 우리를 에워싼다."

우리는 내게 적잖이 흥미로운 실험의 대상이다. 이런 처지에서 수다 떠는 벗들과 어울리지 않고 잠시 지내며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기운을 낼 수는 없을까? 공자는 참으로 옳게 말했다. "덕은 버려진 고아처럼 홀로 남지 않는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2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온전한 정신으로 제정신을 벗어날 수 있다. 마음을 의식적으로 애씀으로써 우리는 행위와 그 결과에서 떨어져 설 수 있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이 급류처럼 우리 곁을 지나간다. 우리는 자연 속에 온통 휘말려 있지 않다. 나는 개울에 떠내려가는 나뭇조각일 수도 있고, 하늘에서 그것을 내려다보는 인드라일 수도 있다. 나는 연극 공연에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다. 반면에 나와 훨씬 더 깊이 관련된 듯한 실제 사건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람이라는 하나의 존재로만, 말하자면 생각과 감정이 펼쳐지는 무대로만 알며, 어떤 이중성을 느낀다. 그 이중성 덕분에 나는 남에게서 떨어져 서듯 나 자신에게서도 멀리 떨어져 설 수 있다. 내 경험이 아무리 강렬해도, 나는 내 안의 한 부분이 거기 있으면서 나를 비평하는 것을 의식한다. 그 부분은 말하자면 나의 한 부분이 아니라 구경꾼으로, 경험을 나누지 않고 그저 기록해 둔다. 그것은 여러분이 아닌 만큼 나도 아니다. 삶이라는 연극, 어쩌면 비극이 끝나면 구경꾼은 제 갈 길을 간다. 그에게 그것은 일종의 허구, 상상만으로 지어낸 작품이었다. 이 이중성 때문에 우리는 이따금 시원찮은 이웃이나 벗이 되기 쉽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지내는 것이 몸과 마음에 좋다고 느낀다. 남과 함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 해도 곧 지치고 마음이 흩어진다.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좋다. 나는 고독만큼 함께 지내기 좋은 벗을 만난 적이 없다. 우리는 대개 제 방에 머물 때보다 밖에 나가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더 외롭다. 생각하거나 일하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언제나 홀로다. 고독은 한 사람과 그 동료들 사이에 놓인 공간의 마일 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북적이는 벌집 같은 기숙사에서 정말로 부지런히 공부하는 학생은 사막의 수도승만큼이나 고독하다. 농부는 하루 내내 들이나 숲에서 김을 매거나 나무를 찍으며 홀로 일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밤에 집에 돌아오면 생각에 휘둘리며 방 안에 홀로 앉아 있지 못하고, "사람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에 가서 기분을 풀고, 그가 생각하기로는 하루의 고독을 보상받아야 한다. 그래서 그는 학생이 어떻게 밤새도록, 또 낮의 대부분을 권태도 "울적함"도 없이 집에 홀로 앉아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학생이 집 안에 있어도 농부가 제 밭에서 그러듯 제 밭에서 여전히 일하고 제 숲에서 나무를 찍고 있으며, 차례가 오면 농부가 찾는 것과 같은 기분 전환과 사교를 찾는다는 것을, 다만 그것이 더 압축된 꼴일 수 있다는 것을 농부는 깨닫지 못한다.

사교는 대개 너무 값싸다. 우리는 아주 짧은 간격으로 만나서, 서로에게 새로운 가치를 얻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하루 세 번 식사 때 만나서, 우리 자신이라는 그 곰팡내 나는 묵은 치즈를 서로에게 새로 맛보인다. 이렇게 잦은 만남을 견딜 만하게 하고 드러내 놓고 싸움을 벌이지 않으려고, 우리는 예절이니 예의니 하는 일정한 규칙에 합의해야 했다. 우리는 우체국에서 만나고, 친목회에서 만나고, 밤마다 난롯가에서 만난다. 우리는 빽빽하게 모여 살며 서로 방해가 되고 서로에게 걸려 넘어진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존경을 얼마쯤 잃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요하고 진심 어린 소통이라면 이보다 덜 자주 만나도 틀림없이 넉넉할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처녀들을 생각해 보라. 결코 홀로 있지 못하고 꿈속에서조차 거의 홀로 있지 못한다. 내가 사는 곳처럼 1제곱마일에 주민이 하나뿐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살갗에 있지 않으니, 그를 만져 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

숲에서 길을 잃고 굶주림과 탈진으로 나무 밑에서 죽어 가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몸이 약해지자 병든 상상력이 기괴한 환영들로 그를 에워쌌는데, 그 환영들이 그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고 그는 그것을 진짜라고 믿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튼튼하면 그와 비슷하지만 더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벗들에게서 끊임없이 기운을 얻어, 우리가 결코 홀로가 아님을 알게 될 수 있다.

내 집에는 벗이 아주 많다. 특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아침에 그렇다. 내 처지를 짐작할 수 있도록 몇 가지를 견주어 보겠다. 나는 그토록 크게 웃는 호수의 아비보다, 아니 월든 호수 자체보다 더 외롭지 않다. 묻건대, 그 외로운 호수에게 무슨 벗이 있는가? 그런데도 호수에는 푸른 우울의 악마가 아니라 푸른 천사들이 깃들어 있다. 그 물의 하늘빛 속에. 해는 홀로다. 날이 흐릴 때는 이따금 해가 둘로 보이기도 하지만 하나는 가짜 해다. 신은 홀로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홀로가 아니다. 악마는 벗이 아주 많다. 그의 이름은 군대다. 나는 목초지의 우단담배풀 한 포기나 민들레 한 포기보다, 콩잎 하나나 수영 한 포기나 등에 한 마리나 뒤영벌 한 마리보다 더 외롭지 않다. 나는 밀 개울이나 바람개비나 북극성이나 남풍이나 4월의 소나기나 1월의 해동이나 새집의 첫 거미보다 더 외롭지 않다.

긴 겨울밤, 눈이 펑펑 내리고 바람이 숲에서 울부짖을 때면 이따금 나를 찾아오는 이가 있다. 오래전에 자리 잡은 정착민이자 본디 이 땅의 주인으로, 월든 호수를 파고 둘레에 돌을 깔고 소나무 숲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고 전하는 이다. 그는 옛 시절과 새로운 영원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 둘은 사과나 사과술이 없어도 어울려 웃고 세상일을 즐겁게 바라보며 유쾌한 저녁을 그럭저럭 보낸다. 아주 지혜롭고 익살스러운 벗이고, 나는 그를 무척 좋아한다. 그는 고프나 훨리보다도 더 꼭꼭 숨어 지낸다. 그가 죽었다고들 하지만 그가 어디 묻혔는지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이웃에는 나이 지긋한 부인도 한 분 사는데, 대부분의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따금 그 향기로운 약초밭을 거닐며 약초를 캐고 그 부인의 옛이야기를 듣기를 좋아한다. 부인은 비길 데 없이 풍요로운 재능을 지녔고, 그 기억은 신화보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모든 옛이야기의 본디 모습과 그 하나하나가 어떤 사실에 바탕을 두었는지를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그 일들이 일어난 것이 부인이 젊었을 때니까. 볼이 붉고 기운찬 노부인으로, 어떤 날씨 어떤 계절이든 즐기며, 아직도 자식들보다 오래 살 것 같다.

자연의, 해와 바람과 비의, 여름과 겨울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순진함과 은혜로움이여. 그것들은 영원히 그런 건강과 그런 기운을 베풀어 준다!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 인류와 깊이 공감해서, 누군가 정당한 까닭으로 슬퍼한다면 온 자연이 마음 아파하여 햇빛이 바래고, 바람이 사람처럼 한숨짓고, 구름이 눈물의 비를 뿌리고, 숲이 한여름에 잎을 떨구고 상복을 입을 것이다. 내가 대지와 뜻을 나누지 않겠는가? 나 자신도 얼마쯤은 나뭇잎이고 부엽토가 아닌가?

우리를 건강하고 고요하고 만족하게 지켜 줄 알약은 무엇인가? 나나 여러분의 증조할아버지의 약이 아니라, 우리의 증조할머니인 자연의 두루 듣는 풀과 식물의 약이다. 자연은 그 약으로 늘 젊음을 지켜 왔고, 제 시대에 올드 파 같은 장수 노인들을 숱하게 앞질러 살아남았으며, 그들의 썩어 가는 기름기로 제 건강을 살찌웠다. 내 만병통치약으로는, 이따금 보는, 병을 실어 나르게 만든 길고 얕고 검은 스쿠너선 같은 짐마차에서 나오는, 아케론강과 사해에서 떠 온 물을 섞은 엉터리 약병 대신, 물 타지 않은 아침 공기 한 모금을 마시게 하라. 아침 공기! 사람들이 하루의 샘머리에서 이것을 마시지 않으려 한다면, 글쎄,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아침 시간 정기권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얼마쯤 병에 담아 가게에서 팔기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라. 아침 공기는 가장 서늘한 지하실에서도 한낮까지 버티지 못하고, 그보다 훨씬 전에 병마개를 밀어내고 아우로라의 발자취를 따라 서쪽으로 가 버린다. 나는 늙은 약초 의사 아스클레피오스의 딸로, 비석에 한 손에는 뱀을, 다른 한 손에는 뱀이 이따금 그 물을 마시는 잔을 든 모습으로 새겨진 히기에이아를 섬기지 않는다. 차라리 유피테르의 잔을 받드는 헤베를 섬긴다. 헤베는 유노와 야생 상추의 딸로, 신과 사람을 젊음의 활력으로 되돌리는 힘이 있었다. 헤베는 아마 지구를 걸어 다닌 젊은 여자 가운데 몸이 온전히 튼튼하고 건강하고 억센 단 한 사람이었을 것이며, 헤베가 가는 곳마다 봄이었다.

주

  1. 1. 오시안의 시. 18세기 제임스 맥퍼슨이 옛 게일어 서사시를 옮겼다며 펴냈다.

  2. 2. 『논어』 「이인」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