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데우기
10월에 나는 강가 풀밭으로 포도를 따러 가서, 먹을거리로서보다 아름다움과 향기로 더 값진 송이들을 한 짐 지고 왔다. 거기서 나는 크랜베리도 따지는 않고 감탄만 했다. 풀밭 풀에 매달린 작은 밀랍 보석, 진주처럼 윤나는 붉은 그 열매를 농부는 흉한 갈퀴로 긁어 따서 매끄럽던 풀밭을 엉클어 놓고, 오직 부셸과 달러로만 생각 없이 재어, 그 풀밭의 전리품을 보스턴과 뉴욕에 판다. 그곳의 자연 애호가들 입맛을 채우려고 짓이겨져 잼이 될 운명이다. 도살꾼들이 찢기고 축 늘어진 풀은 아랑곳없이 대초원의 풀숲에서 들소 혀를 긁어모으는 것도 이와 같다. 매자나무의 눈부신 열매도 내 눈의 양식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땅 임자와 길손들이 보고 지나친 야생 사과를 약한 불에 익혀 먹으려고 조금 모아 두었다. 밤이 익자 나는 겨울에 먹으려고 반 부셸을 쟁여 두었다. 그 무렵 어깨에 자루를 메고 손에는 밤송이를 깔 막대기를 들고(나는 늘 서리가 내리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붉은다람쥐와 어치 들의 요란한 꾸지람 속에서 그때는 끝없이 펼쳐져 있던 링컨의 밤나무 숲을 누비는 일은 무척 신났다. 그 숲은 지금 철도 밑에서 긴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이따금 다람쥐와 어치가 반쯤 먹다 둔 밤을 훔치기도 했는데, 그것들이 골라 둔 밤송이에는 틀림없이 실한 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나무에 올라가 흔들기도 했다. 밤나무는 내 집 뒤에도 자랐는데, 집을 거의 다 덮을 만큼 큰 나무 하나는 꽃이 피면 온 이웃에 향기를 풍기는 꽃다발이었지만, 열매는 대부분 다람쥐와 어치가 차지했다. 어치는 이른 아침 떼 지어 와서 밤이 떨어지기도 전에 송이에서 알을 빼 갔으므로, 나는 이 나무들을 그것들에게 내주고 온통 밤나무로만 이루어진 더 먼 숲을 찾아갔다. 이 밤은 있는 만큼은 빵을 대신하기에 넉넉했다. 아마 다른 대용품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미끼로 쓸 지렁이를 파다가 나는 줄기에 줄줄이 달린 땅콩(Apios tuberosa)을 찾아냈다. 원주민의 감자, 일종의 전설 속 열매인 이것을, 나는 어린 시절에 정말로 캐어 먹었다고 말하고 다녔으면서도 꿈을 꾼 게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그 뒤로 다른 풀 줄기에 기대어 핀 쭈글쭈글한 붉은 벨벳 같은 꽃을 자주 보았지만 그것이 같은 식물인 줄은 몰랐다. 경작이 이 식물을 거의 씨를 말려 버렸다. 맛은 들큼해서 서리 맞은 감자 맛과 무척 비슷한데, 내가 먹어 보니 구운 것보다 삶은 것이 나았다. 이 덩이뿌리는 자연이 언젠가 여기서 제 자식들을 길러 소박하게 먹이겠다는 희미한 약속처럼 보였다. 살진 소와 물결치는 곡식밭의 시대인 요즘, 한때 어느 원주민 부족의 토템이었던 이 보잘것없는 뿌리는 아주 잊혔거나 꽃 피우는 덩굴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야생의 자연이 다시 한번 이곳을 다스리게 해 보라. 그러면 연하고 호사스러운 영국 곡물들은 아마 수많은 적 앞에서 사라질 것이고,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까마귀가 마지막 옥수수 씨앗까지 남서쪽에 있다는 원주민의 신의 큰 옥수수밭으로 도로 물어 갈지 모른다. 까마귀가 옥수수를 바로 거기서 물어 왔다고들 하니까. 그러나 지금은 거의 씨가 마른 이 땅콩은 서리와 야생에도 아랑곳없이 되살아나 번성하고, 제가 토박이임을 입증하며, 사냥하는 부족의 먹을거리로서 지녔던 옛 중요성과 위엄을 되찾을지 모른다. 원주민의 어느 케레스나 미네르바가 그것을 처음 찾아내 사람에게 내려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시의 시대가 열리면 그 잎과 줄줄이 달린 알이 우리의 예술 작품에 새겨질지도 모른다.
9월 1일에 이미 나는 호수 건너편, 물가에 내민 곶 끝에서 사시나무 세 그루의 흰 줄기가 갈라져 나가는 바로 밑에, 작은 단풍나무 두세 그루가 진홍빛으로 물든 것을 보았다. 아, 그 빛깔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가! 그리고 한 주 한 주 지나며 나무마다 제 성품이 차츰 드러났고, 나무는 호수의 매끄러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감탄했다. 날마다 아침이면 이 화랑의 관리인이 벽에 걸린 옛 그림을 떼어 내고, 더 눈부시거나 더 어울리는 빛깔로 돋보이는 새 그림을 걸었다.
10월이면 말벌들이 겨울 숙영지라도 찾아오듯 수천 마리씩 내 거처로 몰려와 안쪽 창과 머리 위 벽에 자리를 잡았고, 이따금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날마다 아침, 말벌들이 추위에 굳어 있을 때 나는 그 가운데 몇 마리를 쓸어 냈지만 굳이 애써 몰아내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이 내 집을 머물 만한 피난처로 여겨 준 것이 칭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것들은 나와 한 이부자리에서 잤지만 나를 크게 괴롭힌 적은 없었고, 겨울과 말할 수 없는 추위를 피해 내가 모르는 어느 틈새로인가 차츰 사라졌다.
11월에 마침내 겨울 숙영지로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말벌처럼 월든의 북동쪽 기슭을 찾아가곤 했다. 리기다소나무 숲과 돌 많은 기슭에서 되비치는 햇볕이 그곳을 호수의 난롯가로 만들어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이 지핀 불보다 햇볕에 몸을 데우는 편이 훨씬 즐겁고 몸에도 좋다. 나는 그렇게, 떠나간 사냥꾼처럼 여름이 남겨 둔 아직 빨갛게 타는 잉걸불에 몸을 데웠다.
굴뚝을 쌓을 때가 되자 나는 벽돌 쌓기를 공부했다. 내 벽돌은 헌 벽돌이라 흙손으로 긁어 닦아야 했으므로, 나는 벽돌과 흙손의 성질에 관해 여느 사람보다 많이 배웠다. 벽돌에 붙은 회반죽은 쉰 해 묵은 것인데도 여전히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참이든 아니든 사람들이 즐겨 되풀이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그런 말 자체가 해가 갈수록 더 굳고 더 단단히 들러붙어서, 아는 체하는 늙은이에게서 그것을 긁어 떼어 내려면 흙손으로 여러 번 내리쳐야 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마을이 바빌론의 폐허에서 가져온 아주 질 좋은 헌 벽돌로 지어졌는데, 거기 붙은 접착제는 더 오래되었고 아마 더 단단할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그토록 거센 타격을 그렇게 많이 받고도 닳지 않는 강철의 남다른 질김에 놀랐다. 내 벽돌은 전에도 굴뚝에 들어가 있던 것이라 거기서 느부갓네살의 이름을 읽지는 못했지만, 나는 품과 낭비를 덜려고 화덕에 쓰였던 벽돌을 찾을 수 있는 만큼 골라냈고, 화덕 둘레의 벽돌 사이 틈은 호숫가에서 주운 돌로 메웠으며, 회반죽도 같은 곳의 흰 모래로 개었다. 나는 화덕 둘레에서 가장 오래 꾸물거렸다. 그곳이 집에서 가장 생명에 닿은 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나는 어찌나 찬찬히 일했는지, 아침에 땅바닥에서 시작했는데도 밤이 되면 바닥에서 몇 인치 올라온 벽돌 한 켜가 내 베개 노릇을 했다. 그래도 그 때문에 목이 뻣뻣해진 기억은 없다. 내 목이 뻣뻣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일이다. 그 무렵 나는 시인 하나를 두 주 동안 먹이고 재웠는데, 그 때문에 자리가 비좁아 애를 먹었다. 내게 칼이 두 자루 있었는데도 그는 제 칼을 가져왔고, 우리는 칼을 흙에 푹 찔러 넣어 닦곤 했다. 그는 밥 짓는 수고도 나와 나누었다. 나는 내 일이 조금씩 반듯하고 단단하게 올라가는 것을 보며 기뻤고, 일이 더디게 나아간다면 그만큼 오래 견디도록 짜여 있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굴뚝은 얼마쯤 독립된 구조물이다. 땅을 딛고 서서 집을 뚫고 하늘로 솟는다. 집이 타 버린 뒤에도 때로는 여전히 서 있어서 그 중요함과 독립성을 드러낸다. 이것이 여름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이제는 11월이었다.
북풍이 벌써 호수를 식히기 시작했지만, 호수가 워낙 깊어서 몇 주 동안 꾸준히 불어야 했다. 저녁에 불을 피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아직 집에 회반죽을 바르기 전이라 판자 사이에 틈이 많아서 굴뚝이 연기를 유난히 잘 빨아올렸다. 그래도 나는 옹이투성이 거친 갈색 판자에 둘러싸이고 머리 위 높이 껍질이 붙은 서까래가 걸린 그 서늘하고 바람 잘 통하는 방에서 즐거운 저녁을 몇 번 보냈다. 회반죽을 바른 뒤로 내 집은 결코 그때만큼 눈을 즐겁게 하지 못했다. 더 아늑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람이 사는 방은 어느 것이나 머리 위에 얼마쯤 어둑한 곳이 생길 만큼 높아서, 저녁이면 서까래 둘레에서 너울대는 그림자들이 놀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형상은 벽화나 그 밖의 가장 값비싼 세간보다 공상과 상상을 더 즐겁게 한다. 내 집을 거처로만이 아니라 몸을 데우는 데도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그 집에 살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장작이 화덕 바닥에 닿지 않도록 떠받칠 낡은 장작 받침쇠 한 쌍을 구해 두었는데, 내가 쌓은 굴뚝 뒷벽에 그을음이 앉는 것을 보니 흐뭇했고, 나는 여느 때보다 더 떳떳하고 더 흐뭇하게 불을 쑤셨다. 내 거처는 작아서 그 안에 메아리 하나 들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방이 하나뿐이고 이웃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넓어 보였다. 집의 매력이 모두 한 방에 모여 있었다. 그 방이 부엌이고 침실이고 응접실이고 거실이었다. 부모나 자식, 주인이나 하인이 집에 살면서 누리는 만족이 무엇이든 나는 그것을 모두 누렸다. 카토는 가장(patremfamilias)이라면 시골 별장에 이런 것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cellam oleariam, vinariam, dolia multa, uti lubeat caritatem expectare, et rei, et virtuti, et gloriae erit). 곧 "기름 광과 포도주 광, 많은 술독이 있어서 궂은 때가 오기를 즐겁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하니, 그것이 그의 이익과 덕과 영광이 될 것이다." 내 지하 저장고에는 감자 한 통, 바구미가 든 완두콩 2쿼트쯤이 있었고, 선반에는 쌀 조금, 당밀 한 단지, 그리고 호밀 가루와 옥수수 가루가 1펙씩 있었다.
나는 이따금 황금시대에 서 있을 더 크고 사람 많은 집을 꿈꾼다. 오래가는 재료로 짓고 겉치레 장식은 하나도 없으면서 여전히 방 하나로만 된 집, 천장도 회반죽도 없이 드러난 서까래와 중도리가 머리 위에 일종의 낮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넓고 투박하고 튼실한 원시의 큰 방이다. 비와 눈을 막기에 쓸모 있고, 문지방을 넘으며 옛 왕조의 쓰러진 사투르누스에게 예를 올리고 나면 대공과 사공이 우뚝 서서 경의를 받는 곳. 지붕을 보려면 장대 끝에 횃불을 매달아 쳐들어야 하는 동굴 같은 집. 어떤 이는 화덕 안에, 어떤 이는 창문 오목한 데에, 어떤 이는 긴 의자에, 어떤 이는 큰 방 이쪽 끝에, 어떤 이는 저쪽 끝에 살고, 원한다면 어떤 이는 거미들과 함께 서까래 위 높은 데에 살아도 되는 곳. 바깥문을 열면 벌써 들어와 있고 그것으로 격식은 끝나는 집. 지친 길손이 더 길을 갈 필요 없이 씻고 먹고 이야기하고 잘 수 있는 곳. 폭풍 치는 밤이면 닿기만 해도 반가울 피난처, 집의 본질은 모두 갖추었으되 살림을 위한 것은 하나도 없는 곳. 그 집의 보물을 한눈에 다 볼 수 있고 사람이 써야 할 물건은 모두 제 못에 걸려 있는 곳. 부엌이자 식료품 광이자 응접실이자 침실이자 곳간이자 다락인 곳. 통이나 사다리처럼 꼭 있어야 할 물건, 찬장처럼 편리한 물건이 눈에 보이고, 냄비 끓는 소리가 들리고, 저녁을 익히는 불과 빵을 굽는 화덕에 인사를 드릴 수 있으며, 꼭 필요한 세간과 연장이 가장 큰 장식인 곳. 빨래를 밖에 내지 않고 불도 끄지 않으며 안주인도 내몰지 않는 곳, 요리하는 이가 지하 저장고로 내려가려 할 때 들창 위에서 비켜 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해서, 굳이 발을 굴러 보지 않고도 발밑 땅이 단단한지 비었는지 알게 되는 곳. 안이 새 둥지처럼 훤히 열려 드러나 있어서, 앞문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가는 동안 그 집 식구 누군가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집. 손님이 된다는 것이 그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 자유를 받는 일이지, 그 집의 8분의 7에서 조심스레 따돌려져 어느 방 하나에 갇힌 채 거기서 편히 지내라는 말을 듣는 일, 곧 독방에 갇히는 일이 아닌 곳. 요즘 주인은 손님을 자기 화롯가에 들이지 않고, 석공을 시켜 제 집 복도 어딘가에 손님용 화롯가를 따로 쌓게 한다. 그러니 손님 대접이란 손님을 될 수 있는 한 멀리 붙들어 두는 기술이다. 요리를 두고는 마치 주인이 손님을 독살할 속셈이라도 있는 듯 비밀이 많다. 나는 여러 사람의 땅에 들어가 본 적이 있고 법에 따라 쫓겨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집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그린 것과 같은 집에서 소박하게 사는 왕과 왕비라면, 가는 길이 맞을 때 헌 옷차림으로 찾아갈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혹시라도 요즘 궁전에 붙들리게 된다면,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뒷걸음질로 물러나오는 법뿐일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응접실 말의 상징들에서 그토록 멀리 떨어져 흘러가고, 그 은유와 비유는 말하자면 미끄럼 통로와 음식 승강기를 거쳐 그토록 멀리서 끌어와야 하니, 응접실 말 자체가 기운을 다 잃고 완전히 입방아로 타락해 버릴 것만 같다. 바꾸어 말하면 응접실이 부엌과 작업장에서 너무 멀다. 저녁 식사조차 대개는 저녁 식사의 비유일 뿐이다. 마치 야만인만이 자연과 진리 가까이 살아서 거기서 비유를 빌려 올 수 있다는 듯이. 멀리 북서부 준주나 맨섬에 사는 학자가 부엌에서는 무엇이 점잖은 말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내 손님 가운데 남아서 나와 함께 급히 쑨 옥수수 죽(hasty-pudding)을 먹을 만큼 대담한 사람은 한둘뿐이었다. 그 고비가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들은 마치 그 일이 집을 뿌리째 흔들기라도 할 듯 오히려 급히 물러났다. 그래도 집은 급히 쑨 죽을 수없이 견디고 서 있었다.
나는 날이 얼어붙을 때까지 회반죽을 바르지 않았다. 그 일을 하려고 호수 맞은편 기슭에서 더 희고 깨끗한 모래를 배로 실어 왔는데, 그런 탈것이라면 필요할 때 훨씬 멀리까지라도 가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사이 내 집은 사방이 땅에 닿도록 지붕널로 덮여 있었다. 욋가지를 박을 때 나는 못 하나하나를 망치질 한 번에 쑥 박아 넣을 수 있어서 기뻤고, 반죽판의 회반죽을 깔끔하고 재빠르게 벽으로 옮겨 바르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나는 어느 잘난 체하는 사내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한때 좋은 옷을 차려입고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일꾼들에게 훈수를 두곤 했다. 어느 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고 나선 그는 소맷부리를 걷어 올리고 미장이의 반죽판을 움켜쥐고는 흙손에 무사히 반죽을 떠 얹은 다음, 머리 위 욋가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쪽으로 대담하게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즉시, 완전히 체면을 구기며, 반죽을 고스란히 주름 장식 달린 제 가슴팍에 받았다. 나는 추위를 그토록 확실히 막아 주고 보기 좋게 마무리되는 회반죽 바르기가 얼마나 알뜰하고 편리한지 새삼 감탄했고, 미장이가 당하기 쉬운 갖가지 사고도 알게 되었다. 내가 반죽을 미처 고르기도 전에 그 물기를 다 빨아들이는 벽돌이 얼마나 목말라하는지, 새 화덕에 세례를 주는 데 물이 몇 통이나 드는지 보고 나는 놀랐다. 나는 그 전 겨울에 실험 삼아 우리 강에서 나는 민물조개(Unio fluviatilis) 껍데기를 구워 석회를 조금 만들어 보았기 때문에, 내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마음만 있었다면 1, 2마일 안에서 좋은 석회암을 구해 손수 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사이 호수는 가장 그늘지고 얕은 작은 만에서부터 살얼음이 덮였다. 호수 전체가 얼기 며칠, 아니 몇 주 전이었다. 첫 얼음은 단단하고 검고 투명해서 유난히 흥미롭고 완벽하며, 얕은 곳의 바닥을 살펴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준다. 두께가 겨우 1인치인 얼음 위에 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길게 엎드려, 겨우 2, 3인치 떨어진 바닥을 유리 뒤의 그림처럼 느긋하게 살펴볼 수 있고, 그때는 물도 늘 잔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래에는 어떤 생물이 돌아다니다가 제 발자국을 되짚어 간 고랑이 많고, 난파선 잔해 대신 흰 석영 알갱이로 지은 날도래 애벌레 집이 흩어져 있다. 고랑 속에서도 그 집이 몇 개 보이니 아마 그것들이 고랑을 냈을 것이다. 그것들이 내기에는 고랑이 깊고 넓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대상은 얼음 그 자체다. 다만 그것을 살펴보려면 가장 이른 기회를 살려야 한다. 얼음이 언 다음 날 아침에 가까이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얼음 속에 있는 듯 보이던 거품이 대부분 얼음 아랫면에 붙어 있고, 바닥에서 거품이 쉴 새 없이 더 올라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동안 얼음은 아직 비교적 단단하고 검다. 다시 말해 얼음을 통해 물이 보인다. 이 거품들은 지름이 80분의 1인치에서 8분의 1인치로 무척 맑고 아름다워서, 얼음 너머로 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볼 수 있다. 1제곱인치에 서른 개에서 마흔 개쯤 있을 것이다. 얼음 속에도 벌써 길이가 반 인치쯤 되는, 좁고 길쭉하게 곧추선 거품이 꼭짓점을 위로 한 뾰족한 원뿔 꼴로 들어 있다. 얼음이 아주 갓 얼었다면 그보다는 아주 작은 공 모양 거품들이 염주알처럼 하나 위에 하나씩 곧게 늘어선 것이 더 흔하다. 그러나 얼음 속의 이 거품들은 얼음 밑의 거품만큼 많지도 뚜렷하지도 않다. 나는 이따금 얼음의 세기를 시험해 보려고 돌을 던지곤 했는데, 얼음을 뚫고 들어간 돌은 공기를 끌고 들어가서 얼음 밑에 아주 크고 뚜렷한 흰 거품을 만들었다. 어느 날 마흔여덟 시간 뒤에 같은 자리에 가 보니, 그 큰 거품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얼음 덩이 가장자리의 이음매로 똑똑히 볼 수 있었듯이 얼음이 1인치 더 얼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지난 이틀이 늦가을의 때아닌 봄날처럼 무척 따뜻했던 탓에, 얼음은 이제 물의 짙은 초록빛과 바닥을 보여 주는 투명한 얼음이 아니라 불투명하고 희끄무레하거나 잿빛이었으며, 두께는 두 배인데도 전보다 별로 단단하지 않았다. 공기 거품들이 이 열기에 크게 부풀어 서로 엉겨 붙으면서 고른 꼴을 잃었기 때문이다. 거품들은 더는 하나 위에 하나씩 곧게 늘어서 있지 않고, 흔히 자루에서 쏟아 낸 은화처럼 서로 겹쳐 있거나, 얇게 갈라진 틈을 차지한 듯 얇은 조각 모양이었다. 얼음의 아름다움은 사라졌고, 바닥을 살펴보기에도 너무 늦었다. 내 큰 거품들이 새 얼음에 대해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나는 중간 크기 거품 하나가 든 얼음 덩이를 깨어 내어 뒤집어 보았다. 새 얼음은 거품 둘레와 밑에 얼어서, 거품은 두 얼음 사이에 끼어 있었다. 거품은 온전히 아래 얼음 속에 있되 위 얼음에 바짝 붙어 있었고, 납작하거나 어쩌면 살짝 렌즈 꼴이었으며, 가장자리가 둥글고 깊이 4분의 1인치에 지름 4인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거품 바로 밑의 얼음이 엎어 놓은 접시 꼴로 아주 고르게 녹아, 가운데가 8분의 5인치 높이까지 파여 있었고, 물과 거품 사이에는 두께가 8분의 1인치도 안 되는 얇은 칸막이만 남아 있었다. 여러 곳에서는 이 칸막이 속의 작은 거품들이 아래로 터져 나가 있었으니, 지름이 1피트나 되는 가장 큰 거품들 밑에는 아마 얼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 얼음 아랫면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던 수없이 많은 작은 거품들도 이제 마찬가지로 얼음 속에 얼어 들어갔고, 저마다 제 크기만큼 아래 얼음에 대고 볼록렌즈처럼 작용해 얼음을 녹이고 삭게 했으리라고 추론했다. 이것들이 얼음이 쩡쩡 갈라지고 우우 울게 하는 데 한몫하는 작은 공기총이다.
내가 회반죽 바르기를 막 끝냈을 때 마침내 겨울이 제대로 들어섰고, 바람은 그때까지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듯 집 둘레에서 울부짖기 시작했다. 땅이 눈으로 덮인 뒤에도 밤마다 기러기들이 어둠 속에서 끼룩끼룩 울고 날개 소리를 휘휘 내며 무겁게 날아와서, 어떤 무리는 월든에 내려앉고 어떤 무리는 숲 위로 낮게 페어헤이븐 쪽으로 날아가 멕시코로 향했다. 몇 번은 밤 열 시나 열한 시에 마을에서 돌아오다가, 내 거처 뒤 작은 웅덩이 곁 숲의 마른 잎 위로 먹이를 찾아 올라온 기러기 떼, 아니면 오리 떼가 걷는 소리를 들었고, 그것들이 서둘러 떠날 때 우두머리가 희미하게 끼룩거리거나 꽥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1845년에 월든은 12월 22일 밤에 처음으로 온통 얼어붙었다. 플린트 호수와 다른 더 얕은 호수들과 강은 열흘이나 그 이상 앞서 얼어 있었다. 1846년에는 16일, 1849년에는 31일쯤, 1850년에는 12월 27일쯤, 1852년에는 1월 5일, 1853년에는 12월 31일이었다. 눈은 이미 11월 25일부터 땅을 덮고 있었고, 갑자기 겨울 풍경으로 나를 에워쌌다. 나는 껍데기 속으로 더 깊이 움츠러들어, 집 안에서도 가슴속에서도 불을 환하게 지피려고 애썼다. 이제 내 바깥일은 숲에서 죽은 나무를 모아 손에 들거나 어깨에 메고, 때로는 죽은 소나무를 양 겨드랑이에 하나씩 끼고 헛간까지 끌고 오는 일이었다. 한창때를 다 지낸 낡은 숲 울타리 하나는 내게 큰 횡재였다. 나는 그것을 불카누스에게 바쳤다. 경계의 신 테르미누스를 섬기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다. 방금 눈 속에 나가 그 저녁을 익힐 땔감을 사냥해 온, 아니, 훔쳐 왔다고 해도 좋을 사람의 저녁 식사는 얼마나 더 흥미로운 일인가! 그의 빵과 고기는 달다. 우리 읍들 대부분의 숲에는 온갖 섶나무와 버려진 나무가 많은 불을 지피고도 남을 만큼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데우지 못하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그것이 어린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호수에 떠다니는 나무도 있었다. 그 여름에 나는 철도를 놓을 때 아일랜드 사람들이 껍질째 서로 핀을 박아 묶어 둔 리기다소나무 통나무 뗏목 하나를 찾아냈다. 나는 이것을 얼마쯤 기슭으로 끌어 올려 두었다. 두 해 동안 물에 잠겼다가 여섯 달 동안 높은 데 올라와 있었는데도 썩은 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다만 물을 너무 먹어 말릴 수가 없었다. 어느 겨울날 나는 이것을 한 토막씩 호수 건너로 거의 반 마일이나 미끄러뜨리며 놀았다. 길이 15피트 통나무 한쪽 끝을 어깨에 메고 다른 쪽 끝은 얼음에 댄 채 스케이트를 지치며 뒤따라가기도 했고, 통나무 몇 개를 자작나무 가지로 한데 묶은 다음 끝에 갈고리가 달린 더 긴 자작나무나 오리나무로 끌고 건너기도 했다. 그것들은 물을 흠뻑 먹어 거의 납처럼 무거웠지만 오래 탈 뿐 아니라 무척 뜨거운 불을 냈다. 아니, 마치 송진이 물에 갇혀 등잔에서처럼 더 오래 타기라도 하는 듯, 물에 불었기 때문에 더 잘 탄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길핀1은 잉글랜드 숲 언저리 주민들에 관한 글에서 "무단 침입자들의 잠식과 그렇게 숲 언저리에 세운 집과 울타리"는 "옛 삼림법에서 큰 폐해로 여겨져, 짐승을 겁주고 숲을 해친다(ad terrorem ferarum, ad nocumentum forestae) 하여 불법 점유(purprestures)라는 이름 아래 엄하게 처벌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사냥꾼이나 나무꾼보다, 아니 내가 숲의 수석 감독관이라도 되는 듯이, 사냥감과 푸른 숲을 지키는 데 마음을 썼다. 숲 한 자락이라도 타 버리면, 내가 실수로 태운 것이라 해도, 나는 땅 임자들보다 더 오래가고 더 달랠 길 없는 슬픔으로 슬퍼했다. 아니, 땅 임자들이 손수 숲을 베어 낼 때도 슬퍼했다. 우리 농부들이 숲을 벨 때, 옛 로마 사람들이 신성한 숲을 솎아 내거나 그 안에 빛을 들일 때(lucum conlucare) 느꼈던 그 외경을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다시 말해 숲이 어느 신에게 바쳐진 것이라고 믿는다면 좋겠다. 로마 사람은 속죄의 제물을 바치고 이렇게 빌었다. 이 숲이 바쳐진 신이시여, 남신이시든 여신이시든, 저와 제 집안과 자식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운운.
이 시대에, 이 새로운 나라에서도 나무를 아직 이토록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값어치는 금보다 더 오래가고 더 두루 통한다. 우리가 그 숱한 발견과 발명을 해냈는데도 장작더미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없다. 나무는 우리의 색슨과 노르만 조상에게 그랬듯이 지금 우리에게도 귀하다. 그들이 나무로 활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나무로 총 개머리판을 만든다. 서른 해도 더 전에 미쇼는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땔나무 값이 "파리의 가장 좋은 나무 값과 거의 맞먹고 때로는 넘어선다. 이 거대한 수도는 해마다 30만 코드가 넘는 나무를 쓰고, 300마일 둘레가 경작된 들판으로 에워싸여 있는데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읍에서 나무 값은 거의 꾸준히 오르고 있어서, 문제는 올해 값이 지난해보다 얼마나 더 오르느냐뿐이다. 다른 볼일 없이 몸소 숲에 오는 기술공과 장사꾼들은 어김없이 나무 경매에 나타나고, 나무꾼 뒤에서 이삭줍기를 하는 특권에 비싼 값을 치르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땔감과 온갖 기술의 재료를 찾아 숲으로 간 지는 벌써 오래다. 뉴잉글랜드 사람과 뉴네덜란드 사람, 파리 사람과 켈트 사람, 농부와 로빈 후드, 구디 블레이크와 해리 길이 다 그랬다. 세상 대부분의 곳에서 왕자와 농민, 학자와 야만인이 모두 똑같이, 몸을 데우고 먹을 것을 익히려면 아직도 숲에서 나무 몇 개비가 있어야 한다. 나도 그것 없이는 지낼 수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제 장작더미를 일종의 애정을 품고 바라본다. 나는 내 장작더미를 창 앞에 두기를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떠올리게 해 주는 나뭇조각은 많을수록 좋다. 내게는 아무도 제 것이라 하지 않는 낡은 도끼가 한 자루 있었는데, 나는 겨울날 틈틈이 집의 볕 드는 쪽에서 그것으로 콩밭에서 캐낸 그루터기들을 가지고 놀았다. 내가 밭을 갈 때 쟁기 소를 몰던 사람이 예언한 대로, 그루터기는 나를 두 번 데워 주었다. 한 번은 쪼갤 때, 또 한 번은 불 속에 있을 때. 그러니 어떤 땔감도 이보다 더 많은 열을 낼 수는 없었다. 도끼는 마을 대장장이에게 가져가 "벼리라"는 충고를 들었지만, 나는 대장장이를 건너뛰고 숲에서 구한 히코리 자루를 끼워 그럭저럭 쓰게 만들었다. 날은 무뎠을지 몰라도 자루만은 곧게 박혔다.
송진 밴 소나무 몇 토막은 큰 보물이었다. 이런 불의 양식이 아직도 땅속 깊이 얼마나 많이 감추어져 있는지 떠올려 보면 흥미롭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전에 리기다소나무 숲이 서 있던 어느 헐벗은 산비탈을 자주 탐사하러 가서 송진 밴 소나무 뿌리를 캐내곤 했다. 그것은 거의 썩지 않는다. 적어도 서른 해, 마흔 해 묵은 그루터기도 속은 여전히 멀쩡하다. 겉재목은 모두 부엽토가 되어 버렸지만. 두꺼운 껍질 비늘이 심에서 4, 5인치 떨어진 곳에 땅과 높이를 맞춘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도끼와 삽으로 이 광맥을 파 들어가, 쇠기름처럼, 아니 금맥이라도 만난 듯 누런 골수 같은 저장물을 땅속 깊이까지 따라간다. 그러나 대개 나는 눈이 오기 전에 헛간에 쟁여 둔 숲의 마른 잎으로 불을 붙였다. 생 히코리를 잘게 쪼개면 나무꾼이 숲에 야영할 때 쓰는 불쏘시개가 된다. 나도 가끔 그것을 조금 얻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마을 사람들이 불을 지필 때면 나도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깃발로 월든 골짜기의 여러 야생 주민에게 내가 깨어 있음을 알렸다.
가벼운 날개의 연기, 이카로스의 새여,
솟아오르다 제 깃을 녹이는 그대,
노래 없는 종다리, 새벽의 전령이여,
마을들 위를 둥지 삼아 맴도는 그대.
아니면 떠나가는 꿈이여, 한밤 환영의
어렴풋한 형체여, 옷자락을 걷어 모으는 그대.
밤이면 별을 가리고, 낮이면
빛을 흐리고 해를 지워 버리는 그대.
가거라, 나의 향이여, 이 화덕에서 위로 올라
신들에게 이 맑은 불꽃을 용서해 달라 빌어 다오.
갓 벤 단단한 생나무는 조금밖에 쓰지 않았지만 어느 나무보다 쓸모가 좋았다. 나는 겨울날 오후 산책을 나갈 때면 이따금 불을 잘 지펴 두고 나갔는데, 서너 시간 뒤에 돌아와 보면 불은 여전히 살아서 빨갛게 타고 있었다. 내가 나가 있어도 내 집은 비어 있지 않았다. 마치 쾌활한 살림꾼을 남겨 두고 나간 것 같았다. 거기에는 나와 불이 함께 살았다. 그리고 대개 내 살림꾼은 믿음직했다. 그러나 어느 날 장작을 패다가, 혹시 집에 불이 나지 않았는지 창으로 한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로 특별히 마음을 졸였던 기억은 그때뿐이다. 그래서 들여다보았더니 불똥 하나가 침대에 옮아붙어 있었고, 나는 들어가서 손바닥만 한 자리가 탔을 때 불을 껐다. 그러나 내 집은 아주 볕 바르고 바람 막힌 곳에 있었고 지붕도 무척 낮아서, 거의 어느 겨울날이든 한낮에 불을 꺼뜨려도 괜찮았다.
두더지들이 내 지하 저장고에 둥지를 틀고 감자를 세 알에 하나꼴로 갉아 먹었으며, 회반죽을 바르고 남은 털과 갈색 종이로 거기다 아늑한 잠자리까지 만들었다. 가장 야생인 짐승도 사람 못지않게 안락과 따뜻함을 사랑하며, 그것들이 겨울을 나는 것은 오로지 그 둘을 마련하는 데 그토록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내 벗들 가운데 몇은 마치 내가 일부러 얼어 죽으려고 숲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듯 말했다. 짐승은 바람 막힌 곳에 잠자리 하나를 마련해 제 몸으로 데울 뿐이다. 그러나 불을 찾아낸 사람은 널찍한 방에 공기를 얼마쯤 가두어 제 몸의 열을 빼앗기는 대신 그 공기를 데우고, 그것을 잠자리로 삼아 그 안에서 더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고 돌아다니며, 겨울 한복판에서 일종의 여름을 지키고, 창으로 빛까지 들이고 등잔으로 낮을 늘인다. 이렇게 사람은 본능보다 한두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을 위한 시간을 조금 남긴다. 몹시 거센 바람을 오래 맞고 나면 온몸이 굳어 가기 시작했지만, 내 집의 포근한 공기 속에 닿으면 나는 곧 기운을 되찾고 목숨을 늘였다. 그러나 가장 호사스러운 집에 사는 사람이라도 이 점에서는 내세울 것이 별로 없으며, 인류가 결국 어떻게 멸망할지 우리가 굳이 애써 따져 볼 것도 없다. 북쪽에서 조금 더 매서운 바람만 불어도 언제든 그들의 목숨 줄을 쉽사리 끊을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계속 추운 금요일이니 큰 눈이니 하는 날을 기점으로 날짜를 헤아린다. 그러나 조금만 더 추운 금요일, 조금만 더 큰 눈이 오면 지구 위의 사람살이에 마침표가 찍힐 것이다.
이듬해 겨울에는 숲이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절약하려고 작은 요리용 난로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터놓은 화덕만큼 불을 잘 간직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요리는 대개 시적인 과정이 아니라 한낱 화학적인 과정이 되었다. 난로의 시대인 요즘, 우리가 원주민들이 하듯 잿속에 감자를 묻어 구워 먹곤 했다는 사실은 곧 잊힐 것이다. 난로는 자리를 차지하고 집 안에 냄새를 풍길 뿐 아니라 불을 감추어서, 나는 동무 하나를 잃은 듯한 기분이었다. 불 속에서는 언제나 얼굴 하나를 볼 수 있다. 일하는 사람은 저녁에 불을 들여다보며 낮 동안 생각에 쌓인 찌꺼기와 흙먼지를 걸러 낸다. 그러나 나는 더는 앉아서 불을 들여다볼 수 없었고, 어느 시인의 꼭 들어맞는 말이 새로운 힘으로 되살아났다.
"밝은 불꽃이여, 결코 내게서 거두지 말아 다오,
삶을 비추어 보이는 그대의 다정하고 살가운 공감을.
내 희망 말고 무엇이 그토록 밝게 솟구쳤던가?
내 운수 말고 무엇이 그토록 깊이 밤 속으로 가라앉았던가?
그대는 왜 우리의 화덕과 방에서 쫓겨났는가,
모두가 반기고 모두가 사랑하는 그대가?
그토록 둔한 우리네 삶의 평범한 빛에 견주면
그대의 존재는 너무 꿈같았던가?
그대의 밝은 빛은 우리와 마음 맞는 영혼들과
신비로운 이야기를 나누었던가? 너무 대담한 비밀을?2
그래, 우리는 안전하고 튼튼하다, 이제 우리는
어렴풋한 그림자 하나 너울대지 않는 화덕 곁에 앉았으니.
거기서는 무엇 하나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지 않고, 불은
손과 발을 데울 뿐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이 없다.
빈틈없이 쌓아 올린 그 실용의 더미 곁에서
지금 이때는 앉아 잠들 수 있고,
어렴풋한 옛날에서 걸어 나와 고르지 않은
옛 장작불 빛 곁에서 우리와 이야기하던 유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