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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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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토지의 지대에 대하여 (이어서)

생산물의 가치나 지대의 가치나, 곧 그 둘이 공공에게도 소유주에게도 안겨 주는 실질 수입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귀금속이든 보석이든, 가장 넉넉한 광산이라 해도 세상의 부에 보탤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값어치가 주로 그 드묾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넉넉해지면 반드시 값이 떨어진다. 은그릇 한 벌이며 옷과 가구를 꾸미는 그 밖의 시시한 장식들을 더 적은 양의 상품으로 살 수 있게 될 터인데, 세상이 그 넉넉함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란 이것뿐이다.

땅 위의 재산은 사정이 다르다. 그 생산물의 가치도 그 지대의 가치도 서로 견준 기름짐이 아니라 그 자체의 기름짐에 비례한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살 곳을 얼마만큼 내는 땅은 언제나 얼마만큼의 사람을 먹이고 입히고 살게 할 수 있으며, 지주가 가져가는 몫이 얼마이든 그 몫만큼 그에게 그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그리고 그 노동이 그에게 내줄 수 있는 상품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가장 메마른 땅의 가치는 가장 기름진 땅이 곁에 있다고 해서 줄지 않는다. 오히려 흔히 그 때문에 늘어난다. 기름진 땅이 먹여 살리는 그 많은 사람이 메마른 땅에서 나는 생산물의 여러 부분에 시장을 열어 주는데, 그 시장은 메마른 땅이 제 생산물로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먹을 것을 내는 땅의 기름짐을 키우는 것은 무엇이든, 그 개량이 베풀어진 땅의 가치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땅의 생산물에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내어 그 땅들의 가치까지 키우는 데 이바지한다. 땅을 개량한 덕분에 많은 사람이 제 손으로 다 먹어 치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먹을 것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는데, 이 먹을 것의 넉넉함이야말로 귀금속과 보석은 물론이고 옷·집·살림살이·수레와 말을 꾸미는 온갖 편의와 장식에 대한 수요를 낳는 큰 원인이다. 먹을 것은 세상의 부에서 으뜸되는 부분을 이룰 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부에 그 가치의 으뜸되는 부분을 주는 것 또한 먹을 것의 넉넉함이다. 스페인인이 쿠바와 산토도밍고를 처음 찾아냈을 때, 그곳의 가난한 주민들은 머리며 옷의 여기저기에 자그마한 금 조각을 달아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우리가 여느 것보다 조금 더 예쁜 조약돌을 여기듯 여겨서, 주워 둘 만은 하지만 달라는 사람에게 굳이 마다할 것은 아니라고 보는 듯했다. 그들은 처음 달라는 말 한마디에 그것을 새 손님들에게 내주었고, 자기들이 무슨 값진 선물을 했다고는 여기지 않는 듯했다. 그것을 얻으려는 스페인인의 혈안을 보고 그들은 놀랐다. 먹을 것이 그토록 남아돌아 많은 사람이 그것을 마음대로 쓰는 나라가, 곧 자기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그토록 빠듯한 먹을 것을 그 반짝이는 장난감 조금과 바꾸어 온 집안을 여러 해 먹여 살릴 만큼이나 선선히 내놓는 나라가 어딘가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없었다. 이 점을 알아듣게 해 줄 수 있었다면 스페인인의 열정이 그들에게 놀랍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3절. 언제나 지대를 내는 종류의 생산물과 어떤 때는 지대를 내고 어떤 때는 내지 않는 종류의 생산물, 이 둘의 값이 서로 맺는 비율에 일어나는 변동에 대하여

개량과 경작이 늘어난 결과로 먹을 것이 넉넉해지면, 먹을 것이 아니면서 쓰임새로든 장식으로든 쓰일 수 있는 땅의 생산물 하나하나에 대한 수요가 반드시 늘어난다. 그러므로 개량이 나아가는 내내 이 두 가지 생산물의 견줌 가치에는 한 방향의 변동만 있으리라고 기대할 만하다. 곧 어떤 때는 지대를 내고 어떤 때는 내지 않는 종류의 가치가, 언제나 얼마쯤의 지대를 내는 종류에 견주어 끊임없이 올라가야 한다. 기예와 근면이 나아감에 따라 옷과 집의 재료, 땅에서 캐내는 요긴한 광물과 재료, 귀금속과 보석은 차츰 더욱더 수요를 얻고, 차츰 더 많은 양의 먹을 것과 바뀌게 되며, 달리 말하면 차츰 더 값비싸져야 한다. 실제로도 이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렇게 되어 왔고, 어떤 경우에 특별한 우연이 그 가운데 몇 가지의 공급을 수요보다 더 큰 비율로 늘려 놓지 않았다면 모두가 모든 경우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쪽으로나 켤 수 있는 돌을 캐는 채석장의 가치는 그 주위 고을의 개량과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반드시 올라가는데, 근처에 그런 채석장이 그것뿐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은광의 가치는 천 마일 안에 다른 은광이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놓인 나라가 개량된다고 해서 반드시 올라가지는 않는다. 채석장에서 나는 것의 시장은 그 주위 몇 마일을 넘어 뻗는 일이 드물어 그 수요는 대개 그 작은 고을의 개량과 인구에 비례할 수밖에 없으나, 은광에서 나는 것의 시장은 알려진 온 세계에 걸쳐 뻗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가 두루 개량과 인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그 광산 근처의 큰 나라 하나가 개량되더라도 은에 대한 수요는 조금도 늘지 않을지 모른다. 세계가 두루 개량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개량이 나아가는 동안에 이제까지 알려진 어느 것보다도 훨씬 기름진 새 광산이 발견된다면, 은에 대한 수요는 반드시 늘어날 터이나 공급이 그보다 훨씬 더 큰 비율로 늘어나 그 금속의 실질 가격이 차츰 내려갈 수도 있다. 곧 정해진 어떤 양, 이를테면 1파운드(무게)의 은이 차츰 더 적은 양의 노동을 사거나 부리게 되고, 노동자의 생계에서 으뜸되는 부분인 곡물과 차츰 더 적은 양으로 바뀌게 될 수도 있다.

은의 큰 시장은 세계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깃든 부분이다.

개량이 두루 나아감으로써 그 시장의 수요가 늘어나는데 그와 함께 공급은 같은 비율로 늘어나지 않는다면, 은의 가치는 곡물의 가치에 견주어 차츰 올라갈 것이다. 정해진 어떤 양의 은이 차츰 더 많은 양의 곡물과 바뀔 터이니, 달리 말하면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이 차츰 더 헐해질 것이다.

거꾸로 어떤 우연으로 공급이 여러 해에 걸쳐 잇달아 수요보다 큰 비율로 늘어난다면 그 금속은 차츰 더 헐해질 터이니, 달리 말하면 온갖 개량이 있더라도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이 차츰 더 값비싸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금속의 공급이 수요와 거의 같은 비율로 늘어난다면, 그것은 거의 같은 양의 곡물을 계속 사거나 그와 바뀔 것이고,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도 온갖 개량이 있더라도 거의 그대로 이어질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개량이 나아가는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짜임을 모두 다한 듯하다. 그리고 지금 세기에 앞선 네 세기 동안, 프랑스와 영국에서 벌어진 일로 미루어 판단해도 된다면, 이 서로 다른 세 가지 짜임이 저마다 유럽 시장에서 일어났던 듯하며 그 순서도 내가 여기 적어 놓은 것과 거의 같았던 듯하다.

지난 네 세기 동안 은의 가치에 일어난 변동에 관한 여담

첫째 시기. 1350년과 그 얼마 앞선 때에 잉글랜드에서 밀 1쿼터1의 평균 가격은 런던탑 무게2로 은 4온스보다 낮게 어림된 적이 없는 듯한데, 이는 오늘 우리 화폐로 20실링3쯤에 해당한다. 이 값에서 차츰 내려가 은 2온스, 곧 오늘 우리 화폐로 10실링쯤이 되었던 듯하다. 16세기 초에 어림된 값이 바로 이것이며, 1570년 무렵까지 계속 그렇게 어림되었던 듯하다.

1350년, 곧 에드워드 3세 치세 25년에 이른바 노동자법4이 만들어졌다. 그 머리글은 고용주에게 삯을 올려 받으려고 애쓰는 하인들의 무람없음을 몹시 탓한다. 그래서 이 법은 모든 하인과 노동자가 앞으로는 국왕 치세 20년과 그 앞의 네 해에 받아 오던 것과 똑같은 임금과 리버리로 만족해야 한다고 정하고(그때 리버리는 옷만이 아니라 식료품까지 뜻했다), 그런 까닭으로 리버리로 주는 밀은 어디서나 1부셸에 10펜스보다 높게 어림해서는 안 되며, 밀로 줄지 돈으로 줄지는 언제나 고용주가 고를 수 있다고 정한다. 그러므로 1부셸에 10펜스는 에드워드 3세 치세 25년에 밀의 아주 알맞은 값으로 셈되고 있었다. 하인들이 늘 받던 식료품 리버리를 그 값으로 바꾸어 받도록 강제하는 데 따로 법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열 해 앞선 국왕 치세 16년, 곧 이 법령이 가리키는 그 시기에도 그것은 알맞은 값으로 셈되고 있었다. 그런데 에드워드 3세 치세 16년에 10펜스에는 런던탑 무게로 은 반 온스쯤이 들어 있었고, 이는 오늘 우리 화폐의 반 크라운에 거의 맞먹었다. 그러므로 런던탑 무게로 은 4온스, 곧 그때 화폐로 6실링 8펜스이고 오늘 화폐로는 20실링에 가까운 값이 8부셸 1쿼터의 알맞은 값으로 셈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법령은 그때 곡물의 알맞은 값으로 무엇이 셈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로 몇몇 해의 값보다 틀림없이 낫다. 그런 해의 값은 유별나게 값비싸거나 헐했던 까닭으로 역사가와 그 밖의 글쓴이들이 적어 둔 것이 대부분이어서, 거기서 예사로운 값이 얼마였을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뿐 아니라 14세기 초와 그 얼마 앞선 때에 밀의 흔한 값이 1쿼터에 은 4온스보다 적지 않았고 다른 곡물도 그에 비례했다고 믿을 만한 다른 이유들이 있다.

1309년에 캔터베리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원장 랠프 드 본은 취임하는 날에 잔치를 열었는데, 윌리엄 손이 그 잔치의 차림표만이 아니라 여러 품목의 값까지 남겨 놓았다. 그 잔치에서 쓰인 것은 첫째로 밀 53쿼터인데 값이 19파운드, 곧 1쿼터에 7실링 2펜스였으니 오늘 우리 화폐로 21실링 6펜스쯤에 해당한다. 둘째로 엿기름 58쿼터인데 값이 17파운드 10실링, 곧 1쿼터에 6실링이었으니 오늘 우리 화폐로 18실링쯤에 해당한다. 셋째로 귀리 20쿼터인데 값이 4파운드, 곧 1쿼터에 4실링이었으니 오늘 우리 화폐로 12실링쯤에 해당한다. 여기서 엿기름과 귀리의 값은 밀값에 대한 예사로운 비율보다 높아 보인다.

이 값들은 유별나게 값비싸거나 헐해서 적힌 것이 아니라, 그 호사스러움으로 이름난 잔치에서 쓰인 많은 양의 곡물에 실제로 치른 값으로서 우연히 언급된 것이다.

1262년, 곧 헨리 3세 치세 51년에 빵과 맥주의 정찰법5이라 불리는 옛 법령이 되살려졌다. 국왕은 그 머리글에서 이 법이 한때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자기 조상들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법은 아무리 늦어도 그의 할아버지 헨리 2세의 시절만큼은 오래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정복 때만큼 오래되었을 수도 있다. 이 법은 그때 화폐로 1쿼터에 1실링에서 20실링에 이르기까지 밀값이 얼마가 되든 그에 따라 빵값을 정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법령은 대개 가운뎃값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우를, 곧 그 아래쪽이든 위쪽이든 똑같이 꼼꼼하게 헤아려 두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런던탑 무게로 은 6온스가 들어 있고 오늘 우리 화폐로 30실링쯤에 해당하는 10실링이, 이 가정에 따르면 이 법령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밀 1쿼터의 가운뎃값으로 셈되었을 것이고 헨리 3세 치세 51년에도 계속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가운뎃값이 이 법령이 빵값을 정해 둔 가장 높은 값의 3분의 1보다, 곧 런던탑 무게로 은 4온스가 들어 있는 그때 화폐의 6실링 8펜스보다 적지 않았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여러 사실로부터 우리는 14세기 중엽과 그보다 꽤 오랜 앞선 때에 밀 1쿼터의 평균값 또는 예사로운 값이 런던탑 무게로 은 4온스보다 적다고 여겨지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얼마쯤의 근거를 얻은 듯하다.

14세기 중엽 무렵부터 16세기 초까지, 알맞고 온당하다고 셈되던 값, 곧 밀의 예사로운 값 또는 평균값은 차츰 이 값의 절반쯤으로 가라앉아 마침내 런던탑 무게로 은 2온스, 곧 오늘 우리 화폐로 10실링쯤까지 내려간 듯하다. 1570년 무렵까지 이 값으로 계속 어림되었다.

1512년에 엮인 노섬벌랜드의 다섯째 백작 헨리의 살림 책에는 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어림이 나온다. 하나는 1쿼터에 6실링 8펜스로 셈해 놓았고, 다른 하나는 겨우 5실링 8펜스로 셈해 놓았다. 1512년에 6실링 8펜스에는 런던탑 무게로 은이 2온스밖에 들어 있지 않았고, 이는 오늘 우리 화폐로 10실링쯤에 해당했다.

에드워드 3세 치세 25년부터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를 무렵까지 200년이 넘는 동안, 여러 법령에서 드러나듯이 6실링 8펜스가 이른바 온당하고 알맞은 값, 곧 밀의 예사로운 값 또는 평균값으로 계속 여겨졌다. 그러나 그 명목상의 액수에 들어 있는 은의 양은 이 기간 동안 주화에 몇 차례 손질이 가해진 결과로 끊임없이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은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 같은 명목 액수에 들어 있는 은의 양이 줄어든 것을 어느 만큼 메워 주었으므로, 입법부는 이 사정을 굳이 헤아릴 만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1436년에는 값이 6실링 8펜스만큼 낮을 때에는 허가 없이 밀을 내보낼 수 있다고 정해졌고, 1463년에는 값이 1쿼터에 6실링 8펜스를 넘지 않으면 밀을 들여오지 못한다고 정해졌다. 입법부는 값이 그만큼 낮을 때에는 내보내는 데 아무 불편이 없으나, 값이 그보다 오르면 들여오기를 허락하는 것이 슬기롭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화폐의 13실링 4펜스와 거의 같은 양의 은이 들어 있던 6실링 8펜스가, 다시 말해 에드워드 3세 시절에 같은 명목 액수에 들어 있던 것보다 3분의 1 적은 은이 들어 있던 액수가 그때에는 이른바 밀의 온당하고 알맞은 값으로 여겨졌다.

1554년에 펠리페와 메리 치세 1년 및 2년의 법으로, 그리고 1558년에 엘리자베스 치세 1년의 법으로, 1쿼터 값이 6실링 8펜스를 넘을 때마다 밀을 내보내는 것이 마찬가지로 금지되었는데, 그때 그 액수에 들어 있던 은은 지금 같은 명목 액수에 들어 있는 것보다 2펜스어치도 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값이 그토록 낮아질 때까지 밀을 내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상 내보내기를 아주 막는 것이라는 사실이 이내 드러났다. 그리하여 1562년에 엘리자베스 치세 5년의 법으로, 1쿼터 값이 10실링을 넘지 않을 때마다 몇몇 항구에서 밀을 내보내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그 10실링에 들어 있던 은의 양은 오늘 같은 명목 액수에 들어 있는 것과 거의 같았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는 이 값이 이른바 밀의 온당하고 알맞은 값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는 1512년 노섬벌랜드 책의 어림과 거의 들어맞는다.

프랑스에서도 곡물의 평균값이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그 앞선 두 세기보다 훨씬 낮았다는 것은 뒤프레 드 생모르와 『곡물 행정론』의 우아한 지은이가 함께 살펴본 바다. 같은 기간에 유럽의 대부분에서도 그 값이 아마 같은 길을 밟아 가라앉았을 것이다.

곡물의 가치에 견주어 은의 가치가 이렇게 올라간 것은, 개량과 경작이 늘어난 결과로 그 금속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데에 온전히 말미암았고 그동안 공급은 예전과 같이 이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수요는 예전과 같이 이어졌는데 공급이 차츰 줄어든 데에 온전히 말미암았을 수도 있다. 그때 세상에 알려져 있던 광산의 대부분이 많이 바닥나서 그것을 파는 비용이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또는 이 두 사정에 얼마씩 나뉘어 말미암았을 수도 있다. 15세기 말과 16세기 초에 유럽의 대부분은 그 앞의 여러 시대에 누린 것보다 더 자리 잡힌 통치의 꼴로 다가가고 있었다. 안전이 늘어나면 자연히 근면과 개량이 늘어나고, 귀금속에 대한 수요도 그 밖의 온갖 사치와 장식에 대한 수요와 더불어 부가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늘어난다. 한 해에 나는 생산물이 더 많아지면 그것을 돌리는 데 더 많은 양의 주화가 필요하고, 넉넉한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면 은그릇과 그 밖의 은 장식도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 또 그때 유럽 시장에 은을 대던 광산의 대부분이 꽤 바닥나서 파는 데 돈이 더 들게 되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 가운데 많은 광산은 로마인의 시절부터 파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옛 시절의 상품 값에 대하여 글을 쓴 사람들 대부분은 정복 때부터, 어쩌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쳐들어온 때부터 아메리카의 광산이 발견될 때까지 은의 가치가 끊임없이 줄어들었다는 의견을 품어 왔다. 그들이 이런 의견으로 끌려간 것은 한편으로는 곡물과 땅이 내는 원생산물의 몇몇 부분에 대하여 그들이 살펴볼 기회가 있었던 값에서 비롯되었고, 한편으로는 어느 나라에서나 부가 늘어남에 따라 은의 양이 자연히 늘어나므로 그 양이 늘어나는 만큼 그 가치는 줄어든다는 세간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곡물 값을 살피는 데서 세 가지 서로 다른 사정이 그들을 자주 잘못 이끈 듯하다.

첫째로 옛 시절에는 지대를 거의 모두 물건으로 치렀다. 곧 얼마만큼의 곡물, 소, 닭 따위로 치렀다. 그런데 지주가 차지인에게 해마다 물건으로 치르게 할지 그 대신 얼마만큼의 돈으로 치르게 할지를 마음대로 요구할 수 있다고 약정을 두는 일이 더러 있었다. 물건으로 치를 것을 이렇게 얼마만큼의 돈으로 바꿀 때 쓰는 값을 스코틀랜드에서는 환산가라 부른다. 물건을 받을지 값을 받을지 고르는 권리가 언제나 지주에게 있으므로, 차지인이 안전하려면 환산가가 평균 시장 가격보다 높기보다는 낮아야 한다. 그래서 여러 곳에서 그것은 이 값의 절반을 크게 넘지 않는다. 스코틀랜드의 대부분에서는 닭에 대하여 이 관습이 아직 이어지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소에 대해서도 이어지고 있다. 공정가격6이라는 제도가 그것을 끝내지 않았다면 곡물에 대해서도 아마 계속 그러했을 것이다. 공정가격이란 주마다의 실제 시장 가격에 따라 온갖 종류의 곡물과 그 하나하나의 온갖 품질에 대하여 평균값을 해마다 심리원의 판정으로 매기는 것이다. 이 제도 덕분에 곡물 지대를 이른바 환산할 때 정해 둔 어떤 고정된 값이 아니라 그해의 공정가격에 따라 환산하는 것이 차지인에게는 넉넉히 안전해지고 지주에게는 훨씬 편해졌다. 그런데 옛 시절의 곡물 값을 모은 글쓴이들은 스코틀랜드에서 환산가라 부르는 것을 실제 시장 가격으로 잘못 알아본 일이 잦았던 듯하다. 플리트우드7는 한 자리에서 자기가 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시인한다. 그러나 그는 어떤 목적을 두고 책을 쓴 터라 이 환산가를 열다섯 번이나 옮겨 적은 뒤에야 그 시인을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그 값은 밀 1쿼터에 8실링이다. 그가 이 값을 처음 쓴 해인 1423년에 이 액수에는 오늘 우리 화폐의 16실링과 같은 양의 은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값을 마지막으로 쓴 해인 1562년에는 같은 명목 액수에 지금 들어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들어 있지 않았다.

둘째로 그들은 옛 정찰법 몇 가지가 게으른 필사자들의 손에 엉성하게 옮겨 적힌 탓에, 그리고 때로는 어쩌면 입법부가 실제로 엉성하게 지어낸 탓에 잘못 이끌렸다.

옛 정찰법들은 언제나 밀과 보리의 값이 가장 낮을 때 빵과 맥주의 값이 얼마여야 하는지를 정하는 데서 시작하여, 그 두 곡물의 값이 이 가장 낮은 값 위로 차츰 오름에 따라 그 값이 얼마여야 하는지를 차례로 정해 나갔던 듯하다. 그런데 그 법령을 옮겨 적은 사람들은 앞머리의 가장 낮은 값 서너 개까지만 규정을 베껴 두면 넉넉하다고 여긴 일이 잦았던 듯하다. 그렇게 해서 제 수고를 덜면서, 더 높은 모든 값에서 어떤 비율을 지켜야 하는지를 보이기에는 이것으로 넉넉하다고 판단했으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그리하여 헨리 3세 치세 51년의 빵과 맥주의 정찰법에서 빵값은 그때 화폐로 1쿼터에 1실링에서 20실링에 이르는 밀의 여러 값에 따라 정해졌다. 그런데 러프헤드의 판본에 앞선 여러 법령집이 모두 바탕으로 삼은 필사본에서는, 베낀 사람들이 이 규정을 12실링의 값을 넘어서까지 옮겨 적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글쓴이가 이 흠 있는 필사에 잘못 이끌려, 가운뎃값인 1쿼터에 6실링, 곧 오늘 우리 화폐로 18실링쯤이 그때 밀의 예사로운 값 또는 평균값이었다고 아주 자연스럽게 결론지었다.

거의 같은 때에 만들어진 자벨대와 차꼬의 법8에서 맥주 값은 보리 값이 1쿼터에 2실링에서 4실링에 이르는 동안 6펜스 오를 때마다 그에 따라 정해진다. 그런데 그 4실링이 그때 보리 값이 자주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값으로 여겨진 것은 아니며, 이 값들은 더 높든 더 낮든 다른 모든 값에서 지켜야 할 비율을 보이는 보기로만 제시된 것임을 우리는 그 법령의 마지막 말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Et sic deinceps crescetur vel diminuetur per sex denarios.) 표현은 몹시 엉성하지만 뜻은 넉넉히 분명하다. 보리 값이 6펜스 오르내릴 때마다 그에 따라 맥주 값을 이렇게 올리거나 내린다는 말이다. 이 법령을 지어낸 데서 입법부 자신도 다른 법령을 옮겨 적은 필사자들만큼이나 소홀했던 듯하다.

스코틀랜드의 옛 법서인 『레기암 마예스타템』의 오랜 필사본에는 정찰법 하나가 실려 있는데, 거기서 빵값은 스코틀랜드 볼9로 10펜스에서 3실링에 이르는 밀의 온갖 값에 따라 정해진다. 스코틀랜드 볼은 잉글랜드 1쿼터의 절반쯤에 해당한다. 이 정찰법이 만들어졌다고 보이는 때에 스코틀랜드 화폐 3실링은 오늘 우리 화폐로 스털링 9실링쯤에 해당했다. 루디먼은 이로부터 3실링이 그때 밀값이 오른 가장 높은 값이고 10펜스나 1실링, 많아야 2실링이 예사로운 값이었다고 결론짓는 듯하다. (앤더슨의 『스코틀랜드 문서집』에 그가 붙인 머리글을 보라.) 그러나 그 필사본을 살펴보면 이 값들이 모두 밀값과 빵값이 서로 지켜야 할 비율의 보기로만 적혀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법령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reliqua judicabis secundum praescripta, habendo respectum ad pretium bladi.) 곧 「나머지 경우는 곡물 값을 헤아려 위에 적힌 바에 따라 판단하라」는 말이다.

셋째로 그들은 아주 옛 시절에 밀이 더러 팔린 몹시 낮은 값에도 잘못 이끌려, 그때의 가장 낮은 값이 뒷날보다 훨씬 낮았으니 예사로운 값도 마찬가지로 훨씬 낮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그 옛 시절에 밀의 가장 높은 값이 뒷날 알려진 어떤 값보다도 위로 올라간 폭이, 가장 낮은 값이 아래로 내려간 폭과 넉넉히 맞먹었다는 것을 그들은 찾아낼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플리트우드는 1270년에 밀 1쿼터의 값을 두 가지 들어 보인다. 하나는 그때 화폐로 4파운드 16실링인데 이는 오늘 화폐로 14파운드 8실링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6파운드 8실링인데 이는 오늘 우리 화폐로 19파운드 4실링에 해당한다. 15세기 말이나 16세기 초에는 이만한 터무니없음에 다가가는 값을 하나도 찾을 수 없다. 곡물 값은 어느 때나 변동하기 쉬우나, 온갖 거래와 왕래가 끊겨 나라의 한쪽에 있는 넉넉함으로 다른 쪽의 모자람을 덜어 줄 수 없는 어수선하고 무질서한 사회에서 가장 크게 변동한다. 12세기 중엽 무렵부터 1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를 다스린 플랜태저넷 왕가 아래의 무질서한 형편에서는, 한 고을이 넉넉한 동안에 멀지 않은 다른 고을이 철에 닥친 어떤 우연으로든 근처 영주의 침범으로든 농사를 망쳐 굶주림의 온갖 끔찍함을 겪고 있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고을 사이에 사이가 나쁜 어느 영주의 땅이 끼어 있으면 한쪽이 다른 쪽에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없었다. 15세기 후반과 16세기 내내 잉글랜드를 다스린 튜더 왕가의 힘찬 통치 아래에서는 어느 영주도 감히 공공의 안전을 흔들 만큼 힘이 세지 못했다.

이 장의 끝에서 독자는 플리트우드가 모은 1202년부터 1597년까지의 밀값 전부를 보게 될 것이다. 그 값들은 오늘 화폐로 고쳐져 있고, 열두 해씩 일곱 묶음으로 시간 순서에 따라 정리되어 있다. 묶음마다 그 끝에는 그 열두 해의 평균값도 실려 있다. 그 긴 기간에서 플리트우드가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여든 해의 값뿐이어서, 마지막 열두 해를 채우려면 네 해가 모자란다. 그래서 나는 이튼 칼리지의 회계에서 1598년, 1599년, 1600년, 1601년의 값을 가져다 보탰다. 내가 보탠 것은 이것뿐이다. 독자는 13세기 초부터 16세기 중엽을 지날 때까지 열두 해씩의 평균값이 차츰 낮아지고, 16세기 말로 갈수록 다시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플리트우드가 모을 수 있었던 값은 실로 유별나게 값비싸거나 헐해서 눈에 띄던 것이 주로였던 듯하며, 나는 거기서 아주 확실한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고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밝혀 주는 한, 그것은 내가 들려주려고 애써 온 이야기를 뒷받침한다. 그런데도 플리트우드 자신은 다른 대부분의 글쓴이와 함께, 이 기간 내내 은이 넉넉해진 결과로 그 가치가 끊임없이 줄어들었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가 스스로 모은 곡물 값은 이 의견과 분명히 들어맞지 않는다. 그것은 뒤프레 드 생모르의 의견과, 그리고 내가 풀어 보이려고 애써 온 의견과 온전히 들어맞는다. 플리트우드 주교와 뒤프레 드 생모르는 옛 시절 물건의 값을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미덥게 모은 두 지은이로 보인다. 그 두 사람의 의견이 그토록 다른데도 사실만은, 적어도 곡물 값에 걸린 사실만은 그토록 꼭 들어맞는다는 것이 얼마쯤 신기하다.

그런데 가장 슬기로운 글쓴이들이 그 아주 옛 시절에 은의 가치가 컸다고 미루어 안 것은 곡물의 낮은 값보다는 땅이 내는 원생산물의 다른 몇몇 부분의 낮은 값에서였다. 곡물은 일종의 제조품이므로 그 거친 시대에는 다른 상품 대부분보다 비율로 따져 훨씬 값비쌌다고들 한다. 내 짐작으로는 소·닭·온갖 사냥감 따위와 같이 제조를 거치지 않은 상품 대부분보다 값비쌌다는 말이다. 가난하고 미개했던 그 시절에 이런 것들이 곡물보다 비율로 따져 훨씬 헐했다는 것은 의심할 것 없다. 그러나 이 헐함은 은의 가치가 높았던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상품들의 가치가 낮았던 데서 온 것이다. 그때 은이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사거나 나타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상품이 더 넉넉하고 더 개량된 시절보다 훨씬 적은 양을 사거나 나타냈기 때문이다. 은은 유럽보다 스페인령 아메리카에서 틀림없이 더 헐하다. 은이 나는 나라에서가, 땅과 바다로 멀리 실어 오는 비용과 뱃삯과 보험료를 들여 그것을 가져가는 나라에서보다 더 헐할 것이다. 그런데 우요아의 말로는 얼마 전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너 백 마리 떼에서 골라낸 황소 한 마리의 값이 스털링 21펜스 반이었다. 바이런의 말로는 칠레의 도읍에서 좋은 말 한 마리의 값이 스털링 16실링이었다. 본디 기름지나 그 태반이 아주 갈리지 않은 채로 있는 나라에서는 소·닭·온갖 사냥감 따위를 아주 적은 양의 노동으로 얻을 수 있으니, 그것이 사거나 부릴 수 있는 것도 아주 적은 양뿐이다. 그것이 팔릴 수 있는 낮은 화폐 가격은 거기서 은의 실질 가치가 아주 높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상품들의 실질 가치가 아주 낮다는 증거다.

은의 가치든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든 그 참된 자가 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상품이나 상품 꾸러미가 아니라 노동이라는 점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거의 버려져 있거나 사람이 드물게 사는 나라에서는 소·닭·온갖 사냥감 따위가 자연이 저절로 내는 것이어서, 자연은 그것을 주민들이 먹어 치우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으로 내놓는 일이 잦다. 그런 형편에서는 공급이 대개 수요를 넘어선다. 그러므로 사회의 형편이 다르고 개량의 형편이 다르면, 그런 상품은 서로 아주 다른 양의 노동을 나타내거나 그것과 맞먹게 된다.

사회가 어떤 형편에 있든 개량이 어느 단계에 있든 곡물은 사람의 근면이 낸 생산물이다. 그런데 어떤 근면이든 그것이 내는 평균 생산물은 언제나 평균 소비에, 곧 평균 공급은 평균 수요에 얼마쯤 정확하게 맞추어진다. 그뿐 아니라 개량의 단계가 서로 달라도 같은 흙과 같은 기후에서 같은 양의 곡물을 기르는 데에는 평균적으로 거의 같은 양의 노동이,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거의 같은 양의 값이 든다. 경작이 개량된 형편에서 노동의 생산력이 끊임없이 커지는 것은 농업의 으뜸된 도구인 소의 값이 끊임없이 오르는 것으로 얼마쯤 맞비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까닭으로 우리는 같은 양의 곡물이, 사회가 어떤 형편에 있든 개량이 어느 단계에 있든, 땅이 내는 원생산물의 다른 어떤 부분의 같은 양보다도 같은 양의 노동을 더 가깝게 나타내거나 그것과 더 가깝게 맞먹는다고 마음 놓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이미 살펴본 대로 곡물은 부와 개량의 온갖 다른 단계에서 다른 어떤 상품이나 상품 꾸러미보다도 가치를 더 정확하게 재는 자다. 그러므로 그 온갖 다른 단계에서 우리는 은을 다른 어떤 상품이나 상품 꾸러미와 견주기보다 곡물과 견주어서 그 실질 가치를 더 잘 판단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곡물이든 그 밖에 백성이 흔히 즐겨 먹는 식물성 먹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문명이 깃든 어느 나라에서나 노동자의 생계에서 으뜸되는 부분을 이룬다. 농업이 넓어진 결과로 어느 나라의 땅이든 동물성 먹을 것보다 식물성 먹을 것을 훨씬 많은 양으로 내며, 노동자는 어디서나 가장 헐하고 가장 넉넉한 몸에 좋은 먹을 것으로 주로 살아간다. 푸주간 고기는 가장 번성한 나라나 노동이 가장 후하게 갚아지는 곳이 아니라면 그의 생계에서 대단찮은 몫밖에 차지하지 않고, 닭고기는 그보다 더 작은 몫을 차지하며, 사냥감은 아무 몫도 차지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그리고 노동이 프랑스보다 얼마쯤 후하게 갚아지는 스코틀랜드에서도 노동하는 빈민은 축일이나 그 밖의 유별난 자리가 아니면 푸주간 고기를 좀처럼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의 화폐 가격은 푸주간 고기나 땅이 내는 원생산물의 다른 어떤 부분의 평균 화폐 가격보다 노동자의 생계인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에 훨씬 더 달려 있다. 따라서 금과 은의 실질 가치, 곧 그것이 사거나 부릴 수 있는 노동의 실질 양은 그것이 사거나 부릴 수 있는 푸주간 고기나 땅이 내는 원생산물의 다른 어떤 부분의 양보다 곡물의 양에 훨씬 더 달려 있다.

그러나 곡물이든 다른 상품이든 그 값에 대한 이런 어설픈 살핌만으로는 그렇게 많은 총명한 지은이를 잘못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동시에, 어느 나라에서나 부가 늘어남에 따라 은의 양이 자연히 늘어나므로 그 양이 늘어나는 만큼 그 가치는 줄어든다는 세간의 생각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생각은 아무 근거도 없는 듯하다.

어느 나라에서든 귀금속의 양은 서로 다른 두 원인으로 늘어날 수 있다. 첫째는 그 나라에 귀금속을 대는 광산이 더 넉넉해지는 것이고, 둘째는 백성의 부가 늘어나는 것, 곧 그들이 한 해에 하는 노동의 생산물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첫째 원인은 의심할 것 없이 귀금속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과 반드시 이어져 있으나, 둘째 원인은 그렇지 않다.

더 넉넉한 광산이 발견되면 더 많은 양의 귀금속이 시장에 나오고, 그것과 바꾸어야 할 살림에 꼭 필요한 것과 편리한 것의 양은 예전과 같으므로, 같은 양의 금속이 더 적은 양의 상품과 바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든 귀금속의 양이 늘어난 것이 광산이 더 넉넉해진 데서 비롯된 한, 그것은 그 가치가 얼마쯤 줄어드는 것과 반드시 이어져 있다.

거꾸로 어느 나라의 부가 늘어나 그 노동이 한 해에 내는 생산물이 차츰 많아지면, 더 많은 양의 상품을 돌리는 데 더 많은 양의 주화가 필요해진다. 또 백성은 그럴 힘이 있으므로, 곧 그 대가로 내줄 상품이 더 많아졌으므로 자연히 은그릇을 차츰 더 많은 양으로 사들일 것이다. 그들의 주화는 필요 때문에 양이 늘어나고, 은그릇은 허영과 자랑 때문에, 또는 훌륭한 조각과 그림과 그 밖의 온갖 사치품과 진귀한 물건이 그들 사이에서 양이 늘어날 법한 것과 같은 까닭으로 양이 늘어난다. 그런데 조각가와 화가가 부유하고 번성한 시절에 가난하고 가라앉은 시절보다 더 못한 보수를 받을 법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금과 은도 더 못한 값을 받을 법하지 않다.

더 넉넉한 광산이 우연히 발견되어 값을 눌러 두지 않는다면, 금과 은의 값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 부와 더불어 자연히 오르고, 따라서 광산의 형편이 어떠하든 언제나 가난한 나라보다 넉넉한 나라에서 자연히 더 높다. 금과 은도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가장 좋은 값을 주는 시장을 자연히 찾아가는데, 무엇에든 가장 좋은 값을 주는 것은 대개 그럴 힘이 가장 넉넉한 나라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에든 치러지는 마지막 값이 노동이라는 점이다. 노동이 똑같이 후하게 갚아지는 나라들에서는 노동의 화폐 가격이 노동자의 생계의 화폐 가격에 비례한다. 그런데 금과 은은 가난한 나라보다 넉넉한 나라에서, 생계가 어설프게 대어지는 나라보다 생계가 넘치는 나라에서 자연히 더 많은 양의 생계와 바뀐다. 두 나라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 차이가 아주 클 수 있다. 금속이 못한 시장에서 나은 시장으로 자연히 날아가기는 하지만, 두 곳의 값이 거의 고르게 될 만한 양으로 실어 보내기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나라가 가까우면 그 차이는 더 작고 더러는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작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실어 보내기가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훨씬 넉넉한 나라이고, 중국과 유럽에서 생계의 값 차이는 아주 크다. 중국의 쌀은 유럽 어디의 밀보다도 훨씬 헐하다.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보다 훨씬 넉넉한 나라이지만, 두 나라에서 곡물의 화폐 가격 차이는 훨씬 작아서 겨우 알아챌 만하다. 양이나 되로 따지면 스코틀랜드 곡물은 대개 잉글랜드 곡물보다 꽤 헐해 보이나, 품질로 따지면 틀림없이 얼마쯤 더 값비싸다. 스코틀랜드는 거의 해마다 잉글랜드에서 아주 많은 양을 받아들이는데, 어떤 상품이든 대개 그것이 나온 나라보다 그것이 들어간 나라에서 얼마쯤 더 값비싸다. 그러므로 잉글랜드 곡물은 잉글랜드보다 스코틀랜드에서 더 값비쌀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품질로, 곧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밀가루나 거친 가루의 양과 좋음으로 따지면, 그것과 겨루며 시장에 나오는 스코틀랜드 곡물보다 거기서 더 높은 값에 팔릴 수는 대개 없다.

중국과 유럽에서 노동의 화폐 가격 차이는 생계의 화폐 가격 차이보다 더 크다. 유럽의 대부분이 개량되어 가는 형편에 있는 데 반해 중국은 제자리에 멈춰 선 듯하므로, 노동의 실질 보수가 중국보다 유럽에서 더 높기 때문이다. 노동의 화폐 가격은 잉글랜드보다 스코틀랜드에서 더 낮은데, 이는 노동의 실질 보수가 훨씬 더 낮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는 더 큰 부로 나아가고 있으나 잉글랜드보다 훨씬 느리게 나아간다. 스코틀랜드에서 사람이 자주 떠나가고 잉글랜드에서는 좀처럼 떠나가지 않는 것이 두 나라에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넉넉히 밝혀 준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마다 노동의 실질 보수가 서로 맺는 비율이 그 나라의 실제 부나 가난이 아니라, 그 나라가 나아가는 형편인지 멈춘 형편인지 기울어 가는 형편인지에 따라 자연히 정해진다는 점이다.

금과 은은 가장 넉넉한 나라들 사이에서 자연히 가장 큰 가치를 지니고, 가장 가난한 나라들 사이에서는 자연히 가장 작은 가치를 지닌다. 모든 나라 가운데 가장 가난한 미개한 종족들 사이에서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

큰 도시에서는 곡물이 시골 외진 곳보다 언제나 더 값비싸다. 그러나 이는 은이 실제로 헐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곡물이 실제로 값비싼 데서 오는 것이다. 은을 큰 도시로 가져가는 데 드는 노동이 시골 외진 곳으로 가져가는 데 드는 것보다 적지는 않지만, 곡물을 가져가는 데에는 훨씬 많은 노동이 든다.

네덜란드와 제노바의 영역처럼 아주 넉넉하고 거래가 활발한 몇몇 나라에서는 큰 도시에서 곡물이 값비싼 것과 같은 까닭으로 곡물이 값비싸다. 그 나라들은 제 주민을 먹여 살릴 만큼을 내지 못한다. 그들은 제 수공업자와 제조업자의 근면과 솜씨에서, 노동을 손쉽게 하고 줄여 주는 온갖 기계에서, 배와 실어 보내고 거래하는 데 쓰는 그 밖의 온갖 도구와 수단에서 넉넉하다. 그러나 곡물에서는 가난하니, 곡물은 먼 나라에서 가져와야 하므로 값을 더 붙여 그 나라들에서 실어 오는 비용을 갚아야 한다. 은을 단치히로 가져가는 데 드는 노동이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가는 데 드는 것보다 적지는 않으나, 곡물을 가져가는 데에는 훨씬 많은 노동이 든다. 은의 실질 비용은 두 곳에서 거의 같을 것이나 곡물의 실질 비용은 아주 다를 것이다. 네덜란드든 제노바의 영역이든 주민의 수는 그대로 둔 채 그 실질적인 넉넉함을 줄여 보라. 먼 나라에서 스스로 조달할 힘을 줄여 보라. 그러면 곡물 값은 이 기울어짐에 원인으로든 결과로든 반드시 따라붙는 은의 양이 줄어드는 것과 함께 가라앉기는커녕 굶주림의 값까지 오를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 모자랄 때 우리는 남는 것을 모두 내놓아야 하는데, 남는 것의 가치는 넉넉하고 번성한 시절에 오르고 가난하고 괴로운 시절에 가라앉는다. 꼭 필요한 것은 그렇지 않다. 그 실질 가격, 곧 그것이 사거나 부릴 수 있는 노동의 양은 가난하고 괴로운 시절에 오르고, 넉넉하고 번성한 시절에 가라앉는다. 넉넉하고 번성한 시절은 언제나 크게 풍족한 시절이며, 그렇지 않다면 넉넉하고 번성한 시절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곡물은 꼭 필요한 것이고 은은 남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14세기 중엽과 16세기 중엽 사이의 기간에 부와 개량이 늘어난 데서 비롯된 귀금속 양의 증가가 얼마였든, 그것이 영국에서든 유럽의 다른 어느 곳에서든 귀금속의 가치를 줄이는 쪽으로 기울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옛 시절 물건의 값을 모은 사람들이 이 기간에 곡물이든 다른 상품이든 그 값을 살핀 바에서 은의 가치가 줄어들었다고 미루어 알 근거가 없었다면, 부와 개량이 늘었으리라는 짐작에서 그것을 미루어 알 근거는 더욱 없었다.

둘째 시기. 첫째 시기에 은의 가치가 어떻게 나아갔는지를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아무리 여러 갈래였다 하더라도, 둘째 시기에 대해서는 그들의 의견이 한결같다.

1570년 무렵부터 1640년 무렵까지 70년쯤 되는 기간에 은의 가치와 곡물의 가치가 맺는 비율의 변동은 사뭇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은은 실질 가치가 가라앉아 예전보다 더 적은 양의 노동과 바뀌게 되었고, 곡물은 명목 가격이 올라 1쿼터에 은 2온스쯤, 곧 오늘 우리 화폐로 10실링쯤에 흔히 팔리던 것이 1쿼터에 은 6온스와 8온스, 곧 오늘 우리 화폐로 30실링과 40실링쯤에 팔리게 되었다.

곡물의 가치에 견주어 은의 가치가 이렇게 줄어든 데에는 아메리카의 넉넉한 광산이 발견된 것이 유일한 원인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누구나 이를 똑같이 설명하며, 그 사실을 두고서든 그 원인을 두고서든 다툼이 있었던 적이 없다. 이 기간에 유럽의 대부분은 근면과 개량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므로 은에 대한 수요도 늘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급이 늘어난 것이 수요가 늘어난 것을 어찌나 넘어섰던지 그 금속의 가치가 크게 가라앉았다. 눈여겨볼 것은 아메리카의 광산이 발견된 일이 1570년 뒤에 이르기까지는 잉글랜드의 물건 값에 이렇다 할 영향을 끼치지 않은 듯하다는 점이다. 포토시의 광산만 해도 그보다 20년이 더 앞서 발견되어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1595년부터 1620년까지 두 해를 다 넣어, 윈저 시장에서 가장 좋은 밀 9부셸 1쿼터의 평균 가격은 이튼 칼리지의 회계로 보아 2파운드 1실링 6 9/13펜스였던 듯하다. 이 액수에서 끝의 분수를 버리고 그 9분의 1, 곧 4실링 7 1/3펜스를 덜어 내면 8부셸 1쿼터의 값은 1파운드 16실링 10 2/3펜스가 된다. 그리고 이 액수에서도 분수를 버리고, 가장 좋은 밀의 값과 중간 밀의 값 차이로 그 9분의 1, 곧 4실링 1 1/9펜스를 덜어 내면 중간 밀의 값은 1파운드 12실링 8 8/9펜스쯤, 곧 은 6온스와 3분의 1온스쯤이 된다.

1621년부터 1636년까지 두 해를 다 넣어, 같은 시장에서 같은 되로 되는 가장 좋은 밀의 평균 가격은 같은 회계로 보아 2파운드 10실링이었던 듯하다. 여기서 앞의 경우와 같이 덜어 내면 중간 밀 8부셸 1쿼터의 평균 가격은 1파운드 19실링 6펜스, 곧 은 7온스와 3분의 2온스쯤이 된다.

셋째 시기. 1630년과 1640년 사이, 곧 1636년 무렵에 아메리카의 광산 발견이 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작용은 다 끝난 듯하고, 그 금속의 가치가 곡물의 가치에 견주어 그때보다 더 낮게 가라앉은 적은 없는 듯하다. 그것은 지금 세기에 들어 얼마쯤 올라간 듯하며, 아마 지난 세기가 끝나기 얼마 앞서 이미 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1637년부터 1700년까지 두 해를 다 넣어, 곧 지난 세기의 마지막 64년 동안 윈저 시장에서 가장 좋은 밀 9부셸 1쿼터의 평균 가격은 같은 회계로 보아 2파운드 11실링 0 1/3펜스였던 듯한데, 이는 그 앞 16년 동안보다 1실링 0 1/3펜스밖에 더 값비싸지 않다. 그러나 이 64년 동안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철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었을 때보다 곡물을 훨씬 더 모자라게 만들었을 것이므로, 은의 가치가 더 떨어졌다고 가정하지 않고도 이 아주 작은 값의 오름을 넉넉히 설명해 준다.

이 가운데 첫째 사건은 내전이었다. 내전은 밭갈이를 가라앉히고 거래를 끊음으로써 곡물 값을 철이 흘러가는 대로 맡겨 두었을 때보다 훨씬 높이 올려놓았을 것이다. 이 작용은 왕국의 온갖 시장에서 얼마쯤씩 나타났겠지만, 가장 먼 곳에서 조달해 와야 하는 런던 근처의 시장에서 특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1648년에 윈저 시장에서 가장 좋은 밀의 값은 같은 회계로 보아 4파운드 5실링이었고, 1649년에는 9부셸 1쿼터에 4파운드였던 듯하다. 이 두 해의 값이 1637년 앞 16년의 평균값인 2파운드 10실링을 넘어선 만큼은 3파운드 5실링인데, 이것만 지난 세기의 마지막 64년에 나누어 붙여도 그 64년에 일어난 듯한 그 작은 값의 오름을 거의 다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높은 값일 뿐이며, 내전이 일으킨 듯한 높은 값이 이것뿐인 것은 결코 아니다.

둘째 사건은 1688년에 주어진 곡물 수출 장려금10이었다. 많은 사람은 이 장려금이 밭갈이를 북돋워 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에 나라 안 시장에서 곡물을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더 넉넉하게, 따라서 더 헐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장려금이 어느 때고 이런 작용을 얼마나 낼 수 있는지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지금은 1688년과 1700년 사이에 그런 작용을 낼 만한 틈이 없었다는 것만 말해 두겠다. 이 짧은 기간에 그것이 낸 작용이란 해마다 남는 생산물을 내보내도록 북돋우고 그리하여 한 해의 넉넉함으로 다른 해의 모자람을 메우는 것을 막아, 나라 안 시장의 값을 올린 것뿐이었을 것이다. 1693년부터 1699년까지 두 해를 다 넣어 잉글랜드에 널리 퍼진 모자람은 의심할 것 없이 주로 철이 나빴던 데서 온 것이고 그래서 유럽의 꽤 넓은 곳까지 뻗어 있었지만, 장려금이 그것을 얼마쯤 더 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1699년에는 곡물을 더 내보내는 것이 아홉 달 동안 금지되었다.

같은 기간에 셋째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곡물을 모자라게 만들 수도 없었고 곡물에 흔히 치러진 은의 실질 양을 늘릴 수도 아마 없었으나, 그 명목 액수는 반드시 얼마쯤 늘려 놓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깎아 내기와 닳음으로 은화의 품질이 크게 떨어진 일11이었다. 이 폐단은 찰스 2세의 치세에 시작되어 1695년까지 끊임없이 커져 갔고, 그때에는 론즈에게서 알 수 있듯이 통용되던 은화가 평균으로 그 법정 가치보다 25퍼센트 가까이 낮았다. 그런데 어떤 상품이든 그 시장 가격을 이루는 명목 액수는 법정 기준에 따라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은의 양보다, 실제로 그 안에 들어 있다고 경험으로 드러난 은의 양에 따라 반드시 정해진다. 그러므로 이 명목 액수는 주화가 깎아 내기와 닳음으로 품질이 많이 떨어졌을 때 그것이 법정 가치에 가까울 때보다 반드시 더 높다.

지금 세기에 들어 은화가 그 법정 무게보다 아래로 내려간 정도는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몹시 닳아 지워졌어도 그 가치는 그것과 바꾸어 쓰이는 금화의 가치에 떠받쳐져 왔다. 지난번 개주 앞에는 금화도 꽤 닳아 지워져 있었으나 은화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1695년에는 은화의 가치가 금화에 떠받쳐지지 않아, 그때 기니 한 닢이 닳고 깎인 은화 30실링과 흔히 바뀌었다. 지난번 금화 개주 앞에 은괴의 값은 1온스에 5실링 7펜스보다 높은 적이 드물었는데, 이는 조폐국 값보다 5펜스밖에 높지 않다. 그러나 1695년에 은괴의 흔한 값은 1온스에 6실링 5펜스였고(론즈의 『은화론』 68쪽), 이는 조폐국 값보다 15펜스 높다. 그러므로 지난번 금화 개주 앞에도 금화와 은화를 합친 주화는 은괴와 견주었을 때 그 법정 가치보다 8퍼센트 넘게 낮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거꾸로 1695년에는 그 가치보다 25퍼센트 가까이 낮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 세기의 초, 곧 윌리엄 왕 시절의 대개주가 있은 바로 뒤에는 통용되던 은화의 대부분이 지금보다 그 법정 무게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또 지금 세기에는 밭갈이를 가라앉히거나 나라 안의 거래를 끊을 만한 내전 같은 큰 공공의 재앙이 없었다. 그리고 이 세기의 대부분에 걸쳐 시행된 장려금이 지금의 밭갈이 형편에서 곡물 값을 언제나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얼마쯤 높이 올려놓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이 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장려금은 흔히 그 공으로 돌려지는 온갖 좋은 작용, 곧 밭갈이를 북돋우고 그리하여 나라 안 시장의 곡물 양을 늘리는 작용을 다 낼 만한 틈을 넉넉히 가졌다. 그러므로 내가 뒤에서 풀어 보이고 따져 볼 어떤 체계의 원리에 따르면, 장려금이 한쪽으로 그 상품의 값을 올린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쪽으로 그 값을 내리는 데도 얼마쯤 몫을 했다고 볼 만하다. 많은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은 몫을 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 세기의 64년 동안 윈저 시장에서 가장 좋은 밀 9부셸 1쿼터의 평균 가격은 이튼 칼리지의 회계로 보아 2파운드 0실링 6 10/32펜스였던 듯한데, 이는 지난 세기의 마지막 64년 동안보다 10실링 6펜스쯤, 곧 25퍼센트 넘게 헐하고, 아메리카의 넉넉한 광산 발견이 그 작용을 다 냈다고 볼 만한 1636년 앞 16년 동안보다 9실링 6펜스쯤 헐하며, 그 발견이 그 작용을 다 냈다고 보기 어려운 1620년 앞 26년 동안보다 1실링쯤 헐하다. 이 회계에 따르면 지금 세기의 첫 64년 동안 중간 밀의 평균 가격은 8부셸 1쿼터에 32실링쯤이 된다.

그러므로 은의 가치는 지금 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곡물의 가치에 견주어 얼마쯤 올라간 듯하며, 아마 지난 세기가 끝나기 얼마 앞서 이미 오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1687년에 윈저 시장에서 가장 좋은 밀 9부셸 1쿼터의 값은 1파운드 5실링 2펜스였는데, 이는 1595년 이래 그 값이 내려간 가장 낮은 값이었다.

1688년에 이런 일에 밝은 것으로 이름난 그레고리 킹12은 웬만큼 넉넉한 해에 밀의 평균 가격을 기른 사람에게는 1부셸에 3실링 6펜스, 곧 1쿼터에 28실링으로 어림했다. 기른 사람의 값이란 더러 계약 가격이라 불리는 것과 같다고 나는 이해하는데, 이는 농부가 몇 해 동안 얼마만큼의 곡물을 상인에게 대주기로 계약하는 값이다. 이런 계약은 농부에게 시장에 내는 비용과 수고를 덜어 주므로 계약 가격은 대개 평균 시장 가격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낮다. 킹은 1쿼터에 28실링이 그때 웬만큼 넉넉한 해의 예사로운 계약 가격이라고 판단했다. 요사이 철이 유별나게 나쁘게 이어져 생긴 모자람 앞에는 그것이 모든 예사로운 해의 예사로운 계약 가격이었다고 나는 확실히 들었다.

1688년에 의회가 정한 곡물 수출 장려금이 주어졌다. 그때 입법부에서 지금보다 더 큰 몫을 차지하고 있던 시골 지주들은 곡물의 화폐 가격이 내려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장려금은 그것을 찰스 1세와 찰스 2세 시절에 자주 팔리던 높은 값으로 억지로 끌어올리려는 방편이었다. 그래서 장려금은 밀값이 1쿼터에 48실링만큼 높아질 때까지 시행되게 되어 있었다. 이는 바로 그해에 킹이 웬만큼 넉넉한 시절의 기른 사람의 값으로 어림한 것보다 20실링, 곧 7분의 5 더 값비싼 값이다. 그의 셈이 두루 얻은 명성 가운데 얼마라도 값한다면, 1쿼터에 48실링은 장려금 같은 방편이 없이는 그때 유별나게 모자란 해가 아니고서는 바랄 수 없는 값이었다. 그러나 윌리엄 왕의 정부는 그때 아직 온전히 자리를 잡지 못한 터였다. 그 정부는 바로 그때 해마다 걷는 토지세를 처음 세우는 일을 시골 지주들에게 청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무엇도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곡물의 가치에 견준 은의 가치는 지난 세기가 끝나기 앞에 아마 얼마쯤 올라 있었고, 지금 세기의 대부분에 걸쳐 계속 올랐던 듯하다. 다만 장려금이 반드시 낸 작용 때문에, 지금의 밭갈이 형편에서 그렇지 않았을 때만큼 그 오름이 뚜렷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넉넉한 해에 장려금은 유별나게 많이 내보내게 함으로써 곡물 값을 반드시 그해에 그렇지 않았을 값보다 높이 올린다. 가장 넉넉한 해에조차 곡물 값을 떠받쳐 밭갈이를 북돋우는 것이 이 제도가 내놓고 밝힌 목적이었다.

크게 모자란 해에는 실로 장려금이 대개 멈춰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해의 여러 값에 얼마쯤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넉넉한 해에 유별나게 많이 내보내게 함으로써, 그것은 한 해의 넉넉함으로 다른 해의 모자람을 메우는 것을 자주 막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넉넉한 해에나 모자란 해에나 장려금은 곡물 값을 지금의 밭갈이 형편에서 자연히 되었을 값보다 높이 올린다. 따라서 지금 세기의 첫 64년 동안의 평균값이 지난 세기의 마지막 64년 동안보다 낮았다면, 밭갈이 형편이 같은 채로 장려금의 이 작용이 없었을 경우에는 훨씬 더 낮았을 것이다.

그러나 장려금이 없었다면 밭갈이 형편이 같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제도가 나라의 농업에 어떤 작용을 끼쳤는지는 뒤에서 장려금을 따로 다룰 때에 풀어 보이려 애쓰겠다. 지금은 곡물의 가치에 견주어 은의 가치가 이렇게 오른 일이 잉글랜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만 말해 두겠다. 곡물 값을 아주 미덥고 부지런하게 애써 모은 세 사람, 곧 뒤프레 드 생모르와 메상스와 『곡물 행정론』의 지은이가 같은 기간에 프랑스에서도 그 일이 일어났으며 그 비율도 거의 같았음을 살펴 놓았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1764년까지 곡물을 내보내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한 나라에서 이런 금지에도 일어난 값의 내림과 거의 같은 내림이 다른 나라에서는 내보내기에 준 유별난 북돋움에 말미암았다고 보기는 얼마쯤 어렵다.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에 일어난 이 변동은 곡물의 실질 평균 가치가 내려간 데서 온 것이라기보다 유럽 시장에서 은의 실질 가치가 차츰 올라간 데서 온 것으로 보는 편이 아마 더 옳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곡물은 멀리 떨어진 시대들 사이에서 은보다, 그리고 아마 다른 어떤 상품보다도 가치를 더 정확하게 재는 자다. 아메리카의 넉넉한 광산이 발견된 뒤에 곡물이 예전 화폐 가격의 서너 배로 올랐을 때, 사람들은 이 변화를 곡물의 실질 가치가 오른 데가 아니라 은의 실질 가치가 내린 데로 두루 돌렸다. 그러므로 지금 세기의 첫 64년 동안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이 지난 세기의 대부분보다 얼마쯤 아래로 내려갔다면, 우리는 마찬가지로 이 변화를 곡물의 실질 가치가 내린 데가 아니라 유럽 시장에서 은의 실질 가치가 얼마쯤 오른 데로 돌려야 한다.

지난 열 해나 열두 해 동안 곡물 값이 높았던 것이 실로 유럽 시장에서 은의 실질 가치가 아직도 계속 내려가고 있다는 의심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높은 곡물 값은 철이 유별나게 사나웠던 데서 온 것임이 분명해 보이므로, 늘 머무는 일이 아니라 지나가는 일, 어쩌다 생긴 일로 보아야 한다. 지난 열 해나 열두 해 동안 철은 유럽의 대부분에서 사나웠고, 폴란드의 어지러움이 값비싼 해에 그 시장에서 곡물을 대어 오던 모든 나라의 모자람을 크게 키웠다. 나쁜 철이 이렇게 오래 이어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은 아니어도 결코 유례없는 일은 아니다. 옛 시절의 곡물 값의 역사를 많이 살펴본 사람이라면 같은 종류의 다른 보기 여러 개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유별나게 모자란 열 해는 유별나게 넉넉한 열 해보다 더 놀라울 것이 없다. 1741년부터 1750년까지 두 해를 다 넣어 곡물 값이 낮았던 것을 지난 여덟 해나 열 해 동안 곡물 값이 높았던 것과 맞세워 볼 만하다. 1741년부터 1750년까지 윈저 시장에서 가장 좋은 밀 9부셸 1쿼터의 평균 가격은 이튼 칼리지의 회계로 보아 1파운드 13실링 9 4/5펜스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지금 세기의 첫 64년 동안의 평균값보다 6실링 3펜스쯤 낮다. 이 회계에 따르면 이 열 해 동안 중간 밀 8부셸 1쿼터의 평균 가격은 1파운드 6실링 8펜스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1741년과 1750년 사이에 장려금은 나라 안 시장에서 곡물 값이 자연히 내려갔을 만큼 낮게 내려가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이 열 해 동안 내보낸 온갖 곡물의 양은 세관 장부로 보아 8,029,156쿼터 1부셸에 이르렀다. 이에 치른 장려금은 1,514,962파운드 17실링 4 1/2펜스에 이르렀다. 그래서 1749년에 그때 총리였던 펠럼13은 하원에서, 지난 세 해 동안 곡물 수출 장려금으로 아주 유별난 액수가 치러졌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데에는 충분한 까닭이 있었고, 그 이듬해에는 더 충분한 까닭이 있을 수 있었다. 그 한 해에 치른 장려금이 324,176파운드 10실링 6펜스에 이르렀던 것이다.(『곡물 거래 논고』 제3편을 보라.) 이렇게 억지로 내보낸 것이 나라 안 시장에서 곡물 값을 그렇지 않았을 값보다 얼마나 높이 올려놓았을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이 장에 붙인 회계의 끝에서 독자는 그 열 해의 낱낱 회계가 나머지와 따로 떨어져 실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 그 앞 열 해의 낱낱 회계도 보게 될 터인데, 그 평균도 이 세기의 첫 64년 동안의 전체 평균보다 낮기는 하지만 그만큼 낮지는 않다. 다만 1740년은 유별나게 모자란 해였다. 1750년 앞의 이 스무 해를 1770년 앞의 스무 해와 맞세워 볼 만하다. 앞의 스무 해가 값비싼 해 한두 해가 끼어 있었는데도 이 세기의 전체 평균보다 꽤 낮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뒤의 스무 해는 이를테면 1759년처럼 헐한 해 한두 해가 끼어 있었는데도 그 평균보다 꽤 높았다. 앞의 스무 해가 전체 평균보다 낮았던 만큼 뒤의 스무 해가 그보다 높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아마 장려금에 돌려야 한다. 이 변화는 은의 가치에 일어난 어떤 변화에 돌릴 수 있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러웠음이 분명한데, 은의 가치는 언제나 느리고 차츰차츰 변하기 때문이다. 그 작용이 갑작스러웠던 것은 갑작스럽게 작용할 수 있는 원인, 곧 철의 우연한 변동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영국에서 노동의 화폐 가격은 실로 지금 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올랐다. 그러나 이는 유럽 시장에서 은의 가치가 줄어든 데서 온 것이라기보다, 나라가 크게 그리고 거의 두루 번성한 데서 비롯된 영국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데서 온 듯하다. 그만큼 번성하지는 못한 프랑스에서는 지난 세기 중엽 이래 노동의 화폐 가격이 곡물의 평균 화폐 가격과 함께 차츰 가라앉았다는 것이 살펴진 바다. 지난 세기에나 지금 세기에나 거기서 여느 노동의 하루 임금은 밀 1셉티에 평균값의 20분의 1쯤으로 꽤 한결같았다고 한다. 셉티에는 윈체스터 부셸 4개가 조금 넘게 들어가는 되다. 영국에서 노동의 실질 보수, 곧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살림에 꼭 필요한 것과 편리한 것의 실질 양은 이미 보인 대로 지금 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크게 늘어났다. 그 화폐 가격이 오른 것은 유럽의 전체 시장에서 은의 가치가 줄어든 데서 온 것이 아니라, 나라의 유별나게 복된 사정 덕분에 영국이라는 그 특정한 시장에서 노동의 실질 가격이 오른 데서 온 듯하다.

아메리카가 처음 발견된 뒤 한동안 은은 예전 값에, 또는 예전 값보다 크게 낮지 않은 값에 계속 팔렸을 것이다. 광산 일의 이윤은 한동안 아주 커서 그 자연율을 훨씬 넘어섰을 법하다. 그러나 그 금속을 유럽으로 들여온 사람들은 한 해에 들여온 전부를 이 높은 값에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은은 차츰 더 적은 양의 물건과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그 값은 차츰 더 낮게 가라앉아 마침내 자연 가격까지, 곧 그것을 광산에서 시장까지 가져오는 데 치러야 하는 노동의 임금과 자산의 이윤과 토지의 지대를 저마다의 자연율에 따라 치르기에 겨우 넉넉한 값까지 내려갔을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페루의 은광 대부분에서는 총생산물의 10분의 1에 이르는 스페인 왕의 세금이 토지의 지대를 온통 먹어 치운다. 이 세금은 본디 2분의 1이었고 그 뒤 이내 3분의 1로 떨어졌다가 5분의 1이 되었고 마침내 10분의 1이 되어 아직 그 비율로 이어지고 있다. 페루의 은광 대부분에서 그 일을 벌인 사업가의 자산을 그 예사로운 이윤과 함께 메운 뒤에 남는 것은 이것뿐인 듯하다. 그리고 한때 아주 높았던 이 이윤이 이제는 그 일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한에서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낮아졌다는 것은 두루 인정되는 듯하다.

스페인 왕의 세금은 1504년에 등록된 은의 5분의 1로 줄어들었는데(솔로르사노, 제2권), 이는 포토시 광산이 발견된 해인 1545년보다 41년 앞선다. 90년이 흐르는 동안, 곧 1636년 앞에 아메리카에서 가장 기름진 이 광산들은 그 작용을 온전히 낼 만한, 다시 말해 스페인 왕에게 이 세금을 계속 치르는 채로 유럽 시장에서 은의 가치를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낮게 끌어내릴 만한 틈을 넉넉히 가졌다. 90년은 독점이 없는 어떤 상품이든 그 자연 가격까지, 곧 어떤 세금을 치르면서도 꽤 오랜 동안 잇달아 계속 팔릴 수 있는 가장 낮은 값까지 끌어내리기에 넉넉한 틈이다.

유럽 시장에서 은의 값은 어쩌면 더 낮게까지 떨어졌을 수도 있고, 그러면 1736년처럼 그 세금을 10분의 1로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금에 매긴 세금과 마찬가지로 20분의 1까지 줄이거나, 지금 파고 있는 아메리카 광산의 대부분을 파는 일을 그만두어야 했을 수도 있다. 은에 대한 수요가 차츰 늘어난 것, 곧 아메리카 은광에서 나는 것의 시장이 차츰 넓어진 것이 아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막은 원인이며, 그것이 유럽 시장에서 은의 가치를 떠받쳐 온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지난 세기 중엽 무렵보다 얼마쯤 더 높이 올려놓기까지 했을 것이다.

아메리카가 처음 발견된 뒤로 그 은광에서 나는 것의 시장은 차츰 더욱더 넓어져 왔다.

첫째로 유럽의 시장이 차츰 더욱더 넓어졌다. 아메리카가 발견된 뒤로 유럽의 대부분은 크게 개량되었다. 잉글랜드·네덜란드·프랑스·독일은 물론이고 스웨덴·덴마크·러시아까지 모두 농업에서나 제조업에서나 크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탈리아는 뒤로 물러서지 않은 듯하다. 이탈리아가 기울어진 것은 페루가 정복되기 앞의 일이다. 그때 뒤로는 오히려 얼마쯤 되살아난 듯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실로 뒤로 물러섰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유럽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며, 스페인이 기울어진 정도도 어쩌면 사람들이 흔히 짐작하는 만큼 크지 않다. 16세기 초에 스페인은 아주 가난한 나라였으니, 그때 뒤로 그토록 크게 개량된 프랑스에 견주어 보아도 그러했다. 두 나라를 그토록 자주 오가며 여행한 황제 카를 5세가 프랑스에는 모든 것이 넘치는데 스페인에는 모든 것이 모자란다고 한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유럽의 농업과 제조업의 생산물이 늘어나면서 그것을 돌리는 데 쓰이는 은화의 양도 반드시 차츰 늘어나야 했을 것이고, 넉넉한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의 은그릇과 그 밖의 은 장식도 그만큼 양이 늘어나야 했을 것이다.

둘째로 아메리카 자체가 그곳 은광에서 나는 것의 새 시장이다. 그리고 아메리카가 농업과 근면과 인구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이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들보다 훨씬 빠르므로 그 수요도 훨씬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영국 식민지는 온전히 새 시장이어서, 예전에는 아무 수요도 없었던 큰 대륙에 걸쳐 한편으로는 주화로 한편으로는 은그릇으로 은을 끊임없이 늘려 가며 대야 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의 대부분도 온전히 새 시장이다. 누에바그라나다·유카탄·파라과이·브라질은 유럽인이 발견하기 앞에는 기예도 농업도 없는 미개한 종족들이 살던 곳이었다. 이제는 그 모든 곳에 기예와 농업이 꽤 들어와 있다. 멕시코와 페루조차, 온전히 새 시장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예전보다 훨씬 넓은 시장임은 틀림없다. 그 나라들이 옛 시절에 얼마나 화려했는지에 대하여 나온 온갖 놀라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그 나라들이 처음 발견되고 정복된 역사를 얼마쯤 차분한 판단을 가지고 읽는 사람이라면, 기예와 농업과 거래에서 그곳 주민들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타타르인보다 훨씬 무지했음을 분명히 알아볼 것이다. 둘 가운데 더 문명이 깃들었던 페루인조차 금과 은을 장식에 쓰기는 했으나 어떤 종류의 주화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거래는 모두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노동의 분업이 거의 없었다. 땅을 갈던 사람들은 제 집을 제 손으로 짓고 제 살림살이와 제 옷과 신과 농기구를 제 손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 사이에 있던 몇몇 수공업자는 모두 주권자와 귀족과 사제가 먹여 살렸다고 하며, 아마 그들의 하인이거나 노예였을 것이다. 멕시코와 페루의 옛 기예는 유럽에 제조품 하나도 내놓은 적이 없다. 스페인 군대는 500명을 넘은 적이 거의 없고 그 절반에도 이르지 못한 일이 잦았는데도, 거의 어디서나 먹을 것을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거의 굶주림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그것도 같은 자리에서 사람이 아주 많고 잘 갈린 나라로 그려지는 곳에서 그러했다는 것은, 그 많은 인구와 높은 경작의 이야기가 태반 꾸며진 것임을 넉넉히 보여 준다. 스페인 식민지는 여러 면에서 영국 식민지의 정부보다 농업과 개량과 인구에 덜 이로운 정부 아래에 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에서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훨씬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기름진 흙과 복된 기후에서 땅이 크게 넉넉하고 헐한 것은 모든 새 식민지에 두루 있는 사정인데, 그것이 통치에 있는 여러 결함을 메울 만큼 큰 이로움인 듯하다. 1713년에 페루를 찾아간 프레지에는 리마의 주민이 2만 5000명에서 2만 8000명 사이라고 적었다. 1740년부터 1746년까지 같은 나라에 머문 우요아는 그것이 5만 명이 넘는다고 적었다. 칠레와 페루의 다른 주요한 도시 여러 곳의 인구에 대한 두 사람의 기록 차이도 거의 같다. 그리고 두 사람 가운데 누구의 정보도 의심할 까닭이 없어 보이므로, 이는 영국 식민지의 증가에 거의 못지않은 증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아메리카는 그곳 은광에서 나는 것의 새 시장이며, 그 수요는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셋째로 동인도는 아메리카 은광에서 나는 것의 또 다른 시장이며, 그 광산이 처음 발견된 때부터 은을 끊임없이 더욱더 많은 양으로 빨아들여 온 시장이다. 그때 뒤로 아카풀코 배14로 이루어지는 아메리카와 동인도 사이의 직접 거래가 끊임없이 늘어났고, 유럽을 거치는 간접적인 왕래는 그보다 더 큰 비율로 늘어났다. 16세기 동안 동인도로 규칙적인 거래를 해 나간 유럽 나라는 포르투갈뿐이었다. 그 세기의 마지막 몇 해에 네덜란드인이 이 독점을 잠식하기 시작하여 몇 해 안에 그들을 인도의 주요한 거점에서 몰아냈다. 지난 세기의 대부분에 이 두 나라가 동인도 거래의 가장 큰 부분을 서로 나누어 가졌는데, 네덜란드인의 거래가 늘어난 비율이 포르투갈인의 거래가 기울어진 비율보다 끊임없이 더 컸다.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은 지난 세기에 인도와 얼마쯤 거래를 했고, 그것이 지금 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크게 늘어났다. 스웨덴인과 덴마크인의 동인도 거래는 지금 세기에 들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인조차 이제는 시베리아와 타타르 지방을 가로질러 육로로 베이징까지 가는 일종의 대상을 통하여 중국과 규칙적으로 거래한다. 지난 전쟁이 거의 무너뜨린 프랑스인의 거래를 빼면, 이 모든 나라의 동인도 거래는 거의 끊임없이 늘어나 왔다. 유럽에서 동인도 물건을 써 없애는 양이 늘어난 것이 어찌나 커서 그 모든 나라에 일감을 차츰 더 늘려 주는 듯하다. 이를테면 차는 지난 세기 중엽 앞에는 유럽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약재였다. 지금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제 나라 사람들이 쓸 것으로 한 해에 들여오는 차의 가치가 한 해 150만 파운드를 넘는다.15 그런데도 이것으로 넉넉하지 않아, 네덜란드의 항구에서,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그리고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번성하는 동안에는 프랑스의 해안에서도 훨씬 많은 양이 끊임없이 몰래 들어온다. 중국의 자기, 말루쿠제도의 향료, 벵골의 직물, 그 밖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품을 써 없애는 양도 거의 같은 비율로 늘어났다. 그래서 지난 세기의 어느 한때에 동인도 거래에 쓰인 유럽의 모든 배의 톤수는, 어쩌면 영국 동인도회사가 요사이 제 배를 줄이기 앞에 가지고 있던 톤수보다 크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주

  1. 1. 옮긴이 — 쿼터는 곡물을 되는 단위로 8부셸, 약 291리터다. 「4분의 1」이라는 뜻이 아니다. 1부셸은 약 36리터다. 스미스는 이 장에서 9부셸 1쿼터와 8부셸 1쿼터를 갈라 쓴다.

  2. 2. 옮긴이 — 런던탑 무게는 잉글랜드 조폐국이 오래 쓴 무게 기준으로, 1파운드가 5400그레인이다. 1527년에 폐지되고 1파운드가 5760그레인인 트로이 무게로 바뀌었다.

  3. 3. 옮긴이 — 이 책의 화폐는 파운드·실링·펜스다. 1파운드는 20실링이고 1실링은 12펜스이므로 1파운드는 240펜스다. 반 크라운은 2실링 6펜스이고, 기니는 21실링에 해당하는 금화다. 오늘날 값으로는 환산하지 않는다. 스미스의 논증은 절대액이 아니라 비율에 걸려 있다. 스미스가 「오늘 우리 화폐」라고 할 때는 이 책이 나온 1776년 무렵의 영국 화폐를 말한다.

  4. 4. 옮긴이 — 영국의 법령은 국왕이 왕위에 오른 뒤 몇 해째에 만들어졌는지로 가리킨다. 에드워드 3세는 1327년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 치세 25년은 1351년에 걸치고, 헨리 3세는 1216년에 올랐으므로 그 치세 51년은 1266년에 걸친다. 메리 1세는 1553년에, 엘리자베스 1세는 1558년에 왕위에 올랐다. 노동자법은 흑사병으로 일손이 줄어 삯이 오르는 것을 막으려고 만들어진 법으로, 임금과 리버리를 흑사병 앞의 수준에 묶어 두었다.

  5. 5. 옮긴이 — 빵과 맥주의 정찰법은 밀과 보리 값에 따라 빵과 맥주의 값과 무게를 정해 둔 법이다. 잉글랜드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6. 6. 옮긴이 — 공정가격은 스코틀랜드에서 주마다 해마다 곡물 값을 판정해 공시한 것으로, 곡물로 매긴 지대를 돈으로 바꿀 때의 기준이 되었다.

  7. 7. 옮긴이 — 윌리엄 플리트우드(1656~1723)는 잉글랜드의 주교로, 옛 물가를 모아 『크로니콘 프레치오숨』(1707)을 남겼다.

  8. 8. 옮긴이 — 자벨대는 죄인을 태워 끌고 다닌 수레이고, 차꼬는 목과 두 손을 널에 끼워 사람들 앞에 세워 둔 형구다. 이 법은 되와 값을 속인 빵장수와 술장수를 그런 형벌로 다스리도록 정했다.

  9. 9. 옮긴이 — 볼은 스코틀랜드에서 곡물을 되던 단위로, 스미스의 말대로 잉글랜드 1쿼터의 절반쯤이다.

  10. 10. 옮긴이 — 곡물 수출 장려금은 밀값이 1쿼터에 48실링 아래일 때 밀을 내보내는 사람에게 나라가 돈을 주던 제도다. 스미스는 1688년의 일로 적었고, 오늘날은 이듬해에 만들어진 법으로 센다. 스미스는 4편 5장에서 이 제도를 길게 따진다.

  11. 11. 옮긴이 — 깎아 내기는 은화의 테두리를 잘라 내어 은을 빼돌리던 짓이다. 윌리엄 3세 때인 1696년에 나라가 은화를 모두 거두어 다시 찍는 대개주를 했다. 윌리엄 론즈(1652~1724)는 그때 재무부의 서기관으로 『은화론』을 썼다.

  12. 12. 옮긴이 — 그레고리 킹(1648~1712)은 잉글랜드의 통계가로, 잉글랜드의 인구와 소득을 셈한 글을 남겼다.

  13. 13. 옮긴이 — 헨리 펠럼(1694~1754)은 1743년부터 죽을 때까지 영국의 총리를 맡았다.

  14. 14. 옮긴이 — 아카풀코 배는 스페인이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필리핀의 마닐라 사이에 해마다 띄운 갈레온선으로, 아메리카의 은을 아시아로 실어 가고 아시아의 물품을 실어 왔다.

  15. 15. 옮긴이 — 저본에는 단위 없이 「한 해 150만이 넘는다」고만 적혀 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들여오는 차의 값을 말하는 자리이므로 파운드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