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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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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중상주의 체계의 결론

수출을 북돋우는 것과 들여오는 것을 억누르는 것이 중상주의 체계가 나라마다 부유하게 만들겠다며 내세우는 두 가지 큰 장치이기는 하나, 몇몇 특정한 상품에 관해서는 그와 반대되는 계획을 따르는 듯하다. 곧 수출을 억누르고 수입을 북돋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목적만은 언제나 같다고 그 체계는 내세우는데, 무역 차액을 유리하게 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제조업의 재료와 거래의 도구를 내보내는 것을 억누르는 까닭은 우리 일꾼들에게 이점을 주어 모든 외국 시장에서 다른 나라의 일꾼들보다 값을 깎아 팔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으며, 값이 그리 크지 않은 몇몇 상품의 수출을 이렇게 제한하여 다른 상품을 훨씬 더 많이, 훨씬 더 값지게 내보내게 하겠다고 내세운다. 제조업의 재료를 들여오는 것을 북돋우는 까닭은 우리 사람들이 그것을 더 헐하게 가공할 수 있게 하여 만들어진 상품이 더 많이, 더 값지게 들어오는 일을 막으려는 데 있다. 적어도 우리 법령집에서는 거래의 도구를 들여오는 데에 무슨 장려가 주어진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제조업이 어느 정도 큰 자리에까지 나아가면 거래의 도구를 만드는 일 자체가 아주 중요한 수많은 제조업의 목적이 된다. 그러한 도구를 들여오는 데에 특별한 장려를 주는 것은 그 제조업들의 이익을 너무 크게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수입은 북돋워지기는커녕 흔히 금지되어 왔다. 이리하여 아일랜드에서 오는 것이나 난파물 또는 나포물로 들어오는 것을 빼고는 양모를 빗는 빗을 들여오는 것이 「에드워드 4세 치세 3년의 법」1으로 금지되었고, 이 금지는 「엘리자베스 치세 39년의 법」으로 되살아나 뒤이은 여러 법으로 이어지며 아주 굳어졌다.

제조업의 재료를 들여오는 것은 더러 다른 물건이 무는 관세를 면제해 주는 것으로 북돋워졌고, 더러는 장려금으로 북돋워졌다.

여러 다른 나라에서 오는 양모, 모든 나라에서 오는 목화솜, 다듬지 않은 아마, 물들이는 약재의 대부분, 아일랜드나 영국 식민지에서 오는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의 대부분, 영국 그린란드 고기잡이에서 나오는 물범 가죽, 영국 식민지에서 오는 선철과 봉철, 그 밖의 여러 제조업 재료를 들여오는 일은 세관에 제대로 신고하기만 하면 모든 관세를 면제해 주는 것으로 북돋워졌다. 우리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사사로운 이익이 어쩌면 우리의 다른 상업 규제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이 면제도 입법부에서 억지로 뜯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면제들은 더할 나위 없이 옳고 사리에 맞으며, 나라의 필요와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다른 모든 제조업 재료에까지 넓힐 수 있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이득을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 큰 제조업자들의 탐욕은 더러 이 면제를 제 일의 원재료라고 옳게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넓혀 놓았다. 「조지 2세 치세 24년의 법 제46장」으로 외국의 바래지 않은 아마실을 들여올 때 1파운드(무게)에 1펜스2라는 작은 관세만 매겨졌는데, 그 전에는 훨씬 더 높은 관세를 물어 돛실에는 1파운드(무게)에 6펜스,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모든 실에는 1파운드(무게)에 1실링, 프로이센산이나 러시아산 실에는 1헌드레드웨이트3에 2파운드 13실링 4펜스였다. 그러나 우리 제조업자들은 이 감면에 오래 만족하지 않았다. 「같은 국왕 치세 29년의 법 제15장」, 곧 1야드에 18펜스를 넘지 않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아마포를 내보낼 때 장려금을 준 바로 그 법으로, 바래지 않은 아마실을 들여올 때 무는 이 작은 관세마저 없어졌다. 그러나 아마실을 마련하는 데에 필요한 여러 공정에는 그 뒤에 아마실로 아마포를 짜는 공정보다 훨씬 더 많은 근면이 들어간다. 아마를 기르는 사람과 아마를 다듬는 사람의 근면은 말할 것도 없고, 베 짜는 사람 하나를 끊임없이 일하게 하려면 적어도 실 잣는 사람 서넛이 있어야 하며, 아마포를 마련하는 데에 드는 노동 전체의 5분의 4가 넘는 몫이 아마실을 마련하는 데에 들어간다. 그런데 우리 실 잣는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이며, 대개 나라의 온갖 곳에 흩어져 있는 여자들로 받쳐 주는 이도 지켜 주는 이도 없다. 우리 큰 제조업 고용주들이 이윤을 얻는 것은 그들의 일감을 팔아서가 아니라 베 짜는 사람들의 완성된 일감을 팔아서다. 완성된 제조품을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파는 것이 그들의 이익인 것과 마찬가지로, 재료를 될 수 있는 대로 헐하게 사들이는 것도 그들의 이익이다. 제 아마포를 내보낼 때 주는 장려금과, 모든 외국 아마포를 들여올 때 무는 높은 관세와, 몇몇 프랑스 아마포를 나라 안에서 쓰는 일을 아예 금지하는 조치를 입법부에서 뜯어냄으로써 그들은 제 물건을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려고 애쓴다. 외국 아마실을 들여오는 것을 북돋우고 그리하여 그것을 우리 사람들이 만든 실과 맞겨루게 함으로써, 그들은 가난한 실 잣는 사람들의 일감을 될 수 있는 대로 헐하게 사들이려고 애쓴다. 그들은 가난한 실 잣는 사람들의 벌이를 눌러 두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제 베 짜는 사람들의 임금도 눌러 두려고 애쓰며, 완성된 일감의 값을 올리려 하든 원재료의 값을 내리려 하든 그것은 결코 일꾼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중상주의 체계가 주로 북돋우는 것은 넉넉한 이들과 힘 있는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꾸려지는 산업이다. 가난한 이들과 궁한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꾸려지는 산업은 너무나 자주 팽개쳐지거나 짓눌린다.

아마포를 내보낼 때 주는 장려금과 외국 실을 들여올 때 무는 관세의 면제는 둘 다 15년 동안만 주어졌으나 두 차례의 서로 다른 연장으로 이어져 왔으며, 1786년 6월 24일 바로 다음에 오는 의회 회기가 끝날 때 함께 만료된다.

장려금으로 제조업의 재료를 들여오는 것을 북돋운 일은 주로 우리 아메리카 개척지에서 들여오는 것에 한정되어 왔다.

이런 종류의 첫 장려금은 이 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아메리카에서 배 만드는 물자를 들여오는 데에 주어진 것이다. 이 이름 아래에는 돛대와 활대와 이물대에 알맞은 재목과 삼, 타르, 피치, 테레빈이 들어갔다. 그러나 돛대감 재목에 1톤에 1파운드를 주는 장려금과 삼에 1톤에 6파운드를 주는 장려금은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로 들여오는 것에까지 넓혀졌다. 이 두 장려금은 아무런 바뀜 없이 같은 율로 이어지다가 저마다 만료되도록 놓아두었으니, 삼에 주는 것은 1741년 1월 1일에, 돛대감 재목에 주는 것은 1781년 6월 24일 바로 다음에 오는 의회 회기가 끝날 때 만료되었다.

타르와 피치와 테레빈을 들여오는 데에 주는 장려금은 이어지는 동안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 타르에 주는 것은 1톤에 4파운드였고 피치에 주는 것도 같았으며 테레빈에 주는 것은 1톤에 3파운드였다. 타르에 1톤에 4파운드를 주는 장려금은 뒤에 정해진 대로 마련한 것에만 한정되었고, 그 밖에 좋고 깨끗하고 팔 만한 타르에 주는 것은 1톤에 2파운드 4실링으로 줄었다. 피치에 주는 장려금도 마찬가지로 1파운드로 줄었고 테레빈에 주는 것은 1톤에 1파운드 10실링으로 줄었다.

때의 차례로 보아 제조업 재료를 들여오는 데에 주어진 두 번째 장려금은 「조지 2세 치세 21년의 법 제30장」으로 영국 개척지에서 인디고를 들여오는 데에 준 것이다. 개척지 인디고가 가장 좋은 프랑스 인디고 값의 4분의 3에 값할 때에는 이 법에 따라 1파운드(무게)에 6펜스의 장려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장려금과 마찬가지로 한정된 기간에만 주어진 이 장려금은 여러 차례 연장으로 이어졌으나 1파운드(무게)에 4펜스로 줄었다. 그것은 1781년 3월 25일 다음에 오는 의회 회기가 끝날 때 만료되도록 놓아두었다.

이런 종류의 세 번째 장려금은 (우리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더러 달래고 더러 다투기 시작하던 바로 그 무렵에) 「조지 3세 치세 4년의 법 제26장」으로 영국 개척지에서 삼이나 다듬지 않은 아마를 들여오는 데에 준 것이다. 이 장려금은 1764년 6월 24일부터 1785년 6월 24일까지 21년 동안 주어졌다. 첫 7년 동안은 1톤에 8파운드의 율로, 다음 7년 동안은 6파운드로, 마지막 7년 동안은 4파운드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에까지 넓혀지지 않았는데, 그곳 기후는 (삼이 더러 적은 양으로, 그것도 질이 떨어지는 것으로 길러지기는 하나) 그 산물에 그리 알맞지 않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아마를 잉글랜드로 들여오는 데에 그런 장려금을 주었다면 연합 왕국 남쪽 지방의 토착 산물을 너무 크게 가로막았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네 번째 장려금은 「조지 3세 치세 5년의 법 제45장」으로 아메리카에서 목재를 들여오는 데에 준 것이다. 그것은 1766년 1월 1일부터 1775년 1월 1일까지 9년 동안 주어졌다. 첫 3년 동안은 좋은 널 120장마다 1파운드의 율로, 그 밖의 각재로 50세제곱피트가 드는 한 짐마다 12실링의 율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다음 3년 동안은 널에 15실링, 그 밖의 각재에 8실링의 율이었고, 마지막 3년 동안은 널에 10실링, 그 밖의 각재마다 5실링의 율이었다.

이런 종류의 다섯 번째 장려금은 「조지 3세 치세 9년의 법 제38장」으로 영국 개척지에서 생사를 들여오는 데에 준 것이다. 그것은 1770년 1월 1일부터 1791년 1월 1일까지 21년 동안 주어졌다. 첫 7년 동안은 값 100파운드마다 25파운드의 율로, 다음 7년 동안은 20파운드로, 마지막 7년 동안은 15파운드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에를 치고 명주를 마련하는 데에는 손일이 하도 많이 들고 아메리카에서는 노동이 하도 비싸서, 내가 들은 바로는 이토록 큰 장려금으로도 이렇다 할 효과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여섯 번째 장려금은 「조지 3세 치세 11년의 법 제50장」으로 영국 개척지에서 파이프통과 호그즈헤드통과 배럴통의 통널과 마구리널4을 들여오는 데에 준 것이다. 그것은 1772년 1월 1일부터 1781년 1월 1일까지 9년 동안 주어졌다. 첫 3년 동안은 저마다 일정한 양에 대하여 6파운드의 율로, 다음 3년 동안은 4파운드로, 마지막 3년 동안은 2파운드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런 종류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장려금은 「조지 3세 치세 19년의 법 제37장」으로 아일랜드에서 삼을 들여오는 데에 준 것이다. 그것은 아메리카에서 삼과 다듬지 않은 아마를 들여오는 데에 준 것과 똑같은 꼴로 1779년 6월 24일부터 1800년 6월 24일까지 21년 동안 주어졌다. 기간은 마찬가지로 7년씩 세 도막으로 나뉘며, 그 도막마다 아일랜드 장려금의 율은 아메리카 것과 같다. 그러나 아메리카 장려금과 달리 다듬지 않은 아마를 들여오는 데에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그랬다면 영국에서 그 풀을 가꾸는 일을 너무 크게 가로막았을 것이다. 이 마지막 장려금이 주어질 무렵 영국과 아일랜드의 입법부는 그 전에 영국과 아메리카의 입법부가 서로 그러했던 것보다 그리 나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준 이 은혜가 아메리카에 준 모든 은혜보다 더 복된 조짐 아래 주어진 것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장려금을 준 바로 그 상품들은 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어느 나라에서 들여올 때에는 적지 않은 관세를 물었다. 우리 아메리카 식민지의 이익은 어머니 나라의 이익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부는 우리의 부로 여겨졌다. 그들에게 보낸 돈이 얼마이든 무역 차액으로 죄다 우리에게 되돌아오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들인 어떤 비용으로도 우리가 1파딩만큼도 더 가난해질 수 없다고들 했다. 그들은 모든 점에서 우리 것이었고, 그 비용은 우리 재산을 개량하는 데에, 그리고 우리 사람들을 이문이 남게 부리는 데에 들인 비용이었다. 참혹한 경험이 이제 넉넉히 드러내 보인 체계의 어리석음을 들추어내려고 지금 더 무슨 말을 보태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아메리카 식민지가 참으로 영국의 한 부분이었다면 그 장려금들은 생산에 주는 장려금으로 볼 수 있었을 터이고, 그런 장려금이 받는 모든 반론을 여전히 받았을 터이나 그 밖의 반론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제조업의 재료를 내보내는 것은 더러 아예 금지하여 억누르고 더러는 높은 관세로 억누른다.

우리 모직 제조업자들은 나라의 번영이 제 특정한 일의 성공과 확장에 달려 있다고 입법부를 설득하는 데에 다른 어느 부류의 일꾼들보다 크게 성공했다. 그들은 어느 외국에서든 모직물을 들여오는 것을 아예 금지하여 소비자를 상대로 독점을 얻어 냈을 뿐 아니라, 살아 있는 양과 양모를 내보내는 것을 똑같이 금지하여 양을 치는 농부와 양모를 기르는 사람을 상대로 또 하나의 독점을 얻어 냈다. 세입을 지키려고 만들어진 많은 법이 가혹하다는 원망은 아주 마땅한데, 그것을 죄라고 선언한 법령이 나오기 전에는 언제나 허물없는 일로 여겨지던 행위에 무거운 벌을 매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세입법 가운데 가장 모진 것도, 우리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아우성이 제 터무니없고 짓누르는 독점을 받치려고 입법부에서 뜯어낸 법 가운데 몇몇에 견주면 순하고 부드럽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드라콘의 법5처럼 이 법들은 죄다 피로 쓰인 것이라 말할 만하다.

「엘리자베스 치세 8년의 법 제3장」으로 양이나 새끼양이나 숫양을 내보낸 자는 처음 저질렀을 때 제 물건을 모조리 영영 빼앗기고 한 해 동안 갇혀 있다가 장이 서는 고을에서 장날에 왼손을 잘려 그 자리에 못 박히게 되어 있었고, 두 번째로 저질렀을 때에는 중죄인으로 판결되어 그에 따라 죽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우리 양의 씨가 외국에 퍼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이 법의 목적이었던 듯하다. 「찰스 2세 치세 13년과 14년의 법 제18장」으로 양모를 내보내는 것은 중죄가 되었고, 내보낸 자는 중죄인과 똑같은 벌과 몰수를 받게 되었다.

이 나라 사람됨의 명예를 생각하면 이 두 법령 가운데 어느 것도 한 번도 집행된 적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앞엣것은 내가 아는 한 곧바로 폐지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서전트 호킨스6는 그것이 아직도 힘을 지닌 것으로 보는 듯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찰스 2세 치세 12년의 법 제32장 제3절」로 사실상 폐지된 것으로 볼 수 있을 터인데, 그 법은 앞선 법령들이 매긴 벌을 대놓고 거두어들이지는 않으면서 새로운 벌을 매겼으니, 곧 내보냈거나 내보내려 한 양 한 마리마다 20실링을 물리고 아울러 그 양과 배에 대한 임자의 몫7을 빼앗는 것이다. 그 가운데 뒤엣것은 「윌리엄 3세 치세 7년과 8년의 법 제28장 제4절」로 대놓고 폐지되었는데, 그 법은 이렇게 선언한다. 「양모를 내보내는 것을 막으려고 만들어진 찰스 2세 국왕 치세 13년과 14년의 법령은 그 법에 적힌 다른 여러 가지와 더불어 그것을 중죄로 여기도록 정하였으나, 그 벌이 하도 모진 탓에 죄지은 자들을 기소하는 일이 그리 효험 있게 시행되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앞서 말한 권위로써 그 법 가운데 그 죄를 중죄로 만드는 것에 관한 부분을 폐지하고 무효로 한다.」

그러나 이 더 순한 법령이 매긴 벌이든, 앞선 법령들이 매겼으되 이 법으로 폐지되지 않은 벌이든, 아직도 넉넉히 모질다. 물건을 빼앗기는 것 말고도 내보낸 자는 내보냈거나 내보내려 한 양모 1파운드(무게)마다 3실링의 벌금을 무는데, 이는 그 값의 네댓 곱쯤 된다. 이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상인이나 그 밖의 사람은 제게 딸린 빚이나 셈을 대리인이나 다른 누구에게서도 받아 낼 수 없게 된다. 그의 재산이 얼마이든, 그 무거운 벌금을 치를 수 있든 없든, 법은 그를 아주 결딴내려 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큰 몸뚱이의 도덕은 이 법령을 꾸며 낸 자들의 도덕만큼 아직 썩지 않았으므로, 이 조항을 실제로 써먹었다는 말을 나는 들어 보지 못했다. 이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판결 뒤 석 달 안에 벌금을 치르지 못하면 7년 동안 유형에 처해지며, 그 기한이 차기 전에 돌아오면 성직자 특전 없이 중죄의 형벌을 받는다.8 이 죄를 알고 있은 배 임자는 배와 그 딸린 물건에 대한 제 몫을 죄다 빼앗긴다. 이 죄를 알고 있은 선장과 선원들은 제 물건과 동산을 죄다 빼앗기고 석 달 동안 갇힌다. 뒤에 나온 법령으로 선장은 여섯 달 동안 갇힌다.

수출을 막으려고 양모의 나라 안 거래 전체가 몹시 무겁고 짓누르는 제한 아래 놓여 있다. 양모는 상자나 통이나 나무통이나 궤나 함이나 그 밖의 어떤 꾸러미에도 담을 수 없고 오직 가죽이나 포장천으로 된 짐짝에만 담을 수 있으며, 그 겉에는 「양모」나 「실」이라는 글자를 3인치 이상 되는 큰 글씨로 찍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 양모와 꾸러미를 빼앗기고 임자나 짐 꾸린 사람이 1파운드(무게)마다 8실링을 물어야 한다. 해안에서 5마일 안에서는 해 뜰 때와 해 질 때 사이가 아니면 양모를 말이나 수레에 실을 수도 없고 뭍으로 나를 수도 없으며, 어기면 그 양모와 말과 수레를 빼앗긴다. 양모가 실려 나가거나 내보내어진 곳, 또는 그것이 지나간 곳으로서 바닷가에 맞닿은 백인구9는 그 양모가 10파운드어치에 못 미치면 20파운드를 물어야 하고, 그보다 값이 크면 그 값의 세 곱과 소송 비용의 세 곱을 물어야 하며, 소송은 그해 안에 내야 한다. 집행은 그곳 주민 가운데 아무나 둘에게 하며, 강도 사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사계 법원은 다른 주민들에게 분담금을 매겨 그 둘에게 갚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든 이 벌금보다 적은 액수로 백인구와 화해하면 5년 동안 갇히며, 다른 누구라도 그를 기소할 수 있다. 이 규제들은 온 왕국에 걸쳐 시행된다.

그러나 켄트와 서식스라는 특정한 주에서는 제한이 더욱 성가시다. 바닷가에서 10마일 안에 있는 양모 임자는 누구나 양털을 깎은 지 사흘 안에 가장 가까운 세관 관리에게 제 양털 뭉치가 몇 덩이인지와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글로 알려야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느 몫이든 옮기기 전에 양털 뭉치의 수와 무게, 그것을 사들인 사람의 이름과 사는 곳, 그리고 그것을 나르려는 곳을 마찬가지로 알려야 한다. 그 주에서 바다로부터 15마일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그렇게 사들인 양모의 어느 몫도 바다에서 15마일 안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겠다고 국왕에게 서약서를 내기 전에는 양모를 살 수 없다. 그 주에서 앞서 말한 대로 신고되고 담보가 주어지지 않은 채 바닷가 쪽으로 실려 가는 양모가 발견되면 그것을 빼앗기고, 죄지은 자는 1파운드(무게)마다 3실링을 아울러 물어야 한다. 누구든 앞서 말한 대로 신고하지 않은 양모를 바다에서 15마일 안에 두면 그것은 압수되어 몰수되며, 그렇게 압수된 뒤에 누구든 그것이 제 것이라 주장하려면 재판에서 지는 경우 다른 모든 벌 말고도 소송 비용의 세 곱을 치르겠다는 담보를 재무부에 내야 한다.

나라 안 거래에 이런 제한이 매겨져 있으니 연안 거래도 그리 자유롭게 놓아두었을 리 없다고 우리는 믿어도 될 것이다. 양모를 해안의 어느 항구나 자리로 날라다가 거기서 바닷길로 해안의 다른 자리나 항구로 옮기려는 임자는 누구나, 그 양모를 그 항구에서 5마일 안으로 들여오기 전에 먼저 내보낼 항구에서 꾸러미의 무게와 표지와 수를 적은 신고서를 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양모와 아울러 말과 수레와 그 밖의 나르는 것을 빼앗기고, 양모 수출을 막는 다른 법들이 정한 벌과 몰수까지 받는다. 그러나 이 법(「윌리엄 3세 치세 1년의 법 제32장」)은 아주 너그러워서, 양털을 깎은 곳이 바다에서 5마일 안이더라도 누구든 제 양모를 집으로 나르는 것을 막지 않는다고 선언하는데, 다만 양털을 깎은 지 열흘 안에 그리고 그 양모를 옮기기 전에 가장 가까운 세관 관리에게 양털 뭉치의 참된 수와 그것을 어디에 넣어 두었는지를 제 손으로 적어 알리고, 옮기려는 뜻을 사흘 전에 제 손으로 적어 그 관리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옮기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는다. 연안으로 나르는 양모는 내보내는 것으로 신고한 그 항구에서 내리겠다는 서약서를 내야 하며, 그 가운데 어느 몫이든10 관리가 있지 않은 자리에서 내리면 다른 물건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모를 몰수당할 뿐 아니라 1파운드(무게)마다 3실링이라는 예의 덧붙은 벌금까지 물게 된다.

우리 모직 제조업자들은 그토록 유별난 제한과 규제를 달라는 제 요구를 옳게 보이려고, 잉글랜드 양모는 남다른 품질을 지녀 어느 나라 양모보다 낫고, 다른 나라의 양모는 그것을 얼마쯤 섞지 않고는 쓸 만한 제조품으로 짜낼 수 없으며, 고운 모직은 그것 없이는 만들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을 내보내는 것을 아주 막을 수만 있다면 잉글랜드가 세상의 모직 거래를 거의 통째로 혼자 독점할 수 있을 터이며, 그리하여 맞수가 없으니 제 마음대로 값을 매겨 팔아 머지않아 가장 유리한 무역 차액으로 도무지 믿기지 않을 만큼 큰 부를 얻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자신 있게 주장하는 다른 대부분의 학설과 마찬가지로 이 학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아무 의심 없이 믿어졌고 지금도 그러한데, 모직 거래를 모르거나 따로 알아본 적이 없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그러나 잉글랜드 양모가 고운 모직을 만드는 데에 무슨 점에서든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은 너무나 온전히 거짓이어서, 그것은 그 일에 아예 맞지 않는다. 고운 모직은 온통 스페인 양모로만 만든다. 잉글랜드 양모는 스페인 양모에 섞어 넣어도 그 모직의 바탕을 얼마쯤 망가뜨리고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끼어들 수조차 없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보였듯이 이 규제들의 효과는 잉글랜드 양모의 값을 지금 저절로 그러했을 값보다 낮게 누른 것만이 아니라 에드워드 3세 때에 실제로 그러했던 값보다 훨씬 낮게 누른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양모의 값은 연합의 결과로 같은 규제를 받게 되었을 때 절반쯤 떨어졌다고 한다. 아주 정확하고 사리 밝은 『양모 회고록』의 지은이 존 스미스 목사11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좋은 잉글랜드 양모의 값이 질이 훨씬 떨어지는 양모가 암스테르담 시장에서 흔히 팔리는 값보다 대개 낮다고 적어 두었다. 이 상품의 값을 그 자연스럽고 마땅한 값이라 할 만한 것보다 낮게 누르는 것이 그 규제들이 드러내 놓고 내세운 목적이었으며, 그것들이 바라던 효과를 낳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렇게 값이 내려간 것이 양모 기르는 일을 가로막아 그 상품의 연간 생산물을 크게 줄였을 것이라고, 곧 예전보다 아래로는 아닐지라도 지금 형편에서 열리고 자유로운 시장 덕분에 자연스럽고 마땅한 값까지 오르도록 놓아두었다면 그랬을 만한 양보다는 아래로 줄였을 것이라고 어쩌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연간 생산물의 양이 이 규제들로 얼마쯤 영향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크게 영향을 받았을 수는 없다고 믿는 쪽이다. 양모를 기르는 일은 양 치는 농부가 제 근면과 자산을 쓰는 주된 목적이 아니다. 그는 제 이윤을 양털 값보다 고깃덩이 값에서 바라며, 뒤엣것의 평균 값 또는 예사로운 값은 많은 경우에 앞엣것의 평균 값 또는 예사로운 값에 모자람이 있으면 그것을 그에게 메워 주기까지 한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양모값이든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값이든 저절로 그러했을 값보다 낮게 가라앉히는 쪽으로 기우는 규제는 무엇이든, 개량되고 경작된 나라에서는 푸줏간 고기의 값을 올리는 쪽으로 얼마쯤 기울 수밖에 없다. 개량되고 경작된 땅에서 먹이는 큰 짐승이든 작은 짐승이든 그 값은 지주가 개량되고 경작된 땅에서 바랄 만한 지대와 농부가 바랄 만한 이윤을 치르기에 넉넉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들은 머지않아 짐승 먹이기를 그만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값 가운데 양모와 가죽이 치르지 않는 몫은 고깃덩이가 치러야 한다. 한쪽에 치르는 것이 적을수록 다른 쪽에 치르는 것이 많아야 한다. 이 값이 짐승의 여러 부분에 어떻게 나뉘는지는 죄다 그들에게 치러지기만 한다면 지주와 농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개량되고 경작된 나라에서 지주와 농부로서의 그들의 이익은 그런 규제로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없으나, 소비자로서의 그들의 이익은 식료품 값이 오름으로써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법에 따르면 개량되고 경작된 나라에서 양모값이 이렇게 떨어진다고 하여 그 상품의 연간 생산물이 줄어들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양고기 값을 올림으로써 푸줏간 고기 가운데 그 한 갈래에 대한 수요를, 따라서 그 생산을 얼마쯤 줄일 수는 있으니 그만큼은 예외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나는 효과조차 아마 그리 대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간 생산물의 양에 미친 효과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질에 미친 효과는 반드시 아주 컸으리라고 어쩌면 생각할 수도 있다. 잉글랜드 양모의 질이 떨어진 것은, 지난날보다 아래로는 아닐지라도 지금의 개량되고 경작된 형편에서 저절로 그러했을 것보다는 아래로 떨어졌을 터인데, 그 떨어짐이 값이 떨어진 것과 거의 비례했으리라고 어쩌면 짐작할 수도 있다. 질이 씨와 목초에, 그리고 양털이 자라는 내내 양을 어떻게 건사하고 얼마나 깨끗이 기르는가에 달려 있으므로, 이런 것들에 기울이는 정성이 그 정성이 요구하는 노동과 비용을 양털 값이 갚아 줄 만한 만큼을 넘어설 수는 결코 없으리라고 자연스레 떠올릴 만도 하다. 그러나 양털이 좋은지 어떤지는 크게 보아 짐승의 건강과 자람과 덩치에 달려 있으니, 고깃덩이를 낫게 하는 데에 필요한 바로 그 정성이 어느 점에서는 양털을 낫게 하는 데에도 넉넉하다. 값이 떨어졌는데도 잉글랜드 양모는 이 세기가 지나오는 동안에조차 적지 않게 나아졌다고 한다. 값이 더 좋았더라면 그 나아짐이 어쩌면 더 컸을 것이나, 값이 낮은 것이 그 나아짐을 가로막았을지언정 아주 막아 버리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이 규제들의 사나움은 양모의 연간 생산물의 양에도 질에도 사람들이 그러리라 여겼을 만큼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듯하며(다만 앞엣것보다 뒤엣것에 훨씬 더 크게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양모를 기르는 사람들의 이익도 얼마쯤 다쳤을 것은 틀림없으나 모두 따져 보면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보다 훨씬 덜 다친 듯하다.

그러나 이런 점들이 양모 수출을 아예 금지하는 것을 옳다고 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수출에 적지 않은 세금을 매기는 일은 넉넉히 옳다고 해 준다.

어느 한 계층의 시민의 이익을 다른 계층의 이익을 북돋운다는 것 말고는 아무 목적도 없이 조금이라도 해치는 것은, 주권자가 제 신민의 서로 다른 모든 계층에게 지고 있는 정의와 고른 대우에 뻔히 어긋난다. 그런데 이 금지는 제조업자들의 이익을 북돋운다는 것 말고는 아무 목적도 없이 양모를 기르는 사람들의 이익을 얼마쯤 틀림없이 해친다.

시민의 서로 다른 모든 계층은 주권자나 공동체를 떠받치는 데에 이바지할 의무가 있다. 양모 1토드12를 내보낼 때마다 5실링, 아니 10실링의 세금을 매긴다면 주권자에게 아주 적지 않은 세입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것은 양모값을 아마 그만큼 많이 낮추지는 않을 터이므로 금지보다 기르는 사람들의 이익을 덜 해친다. 그것은 제조업자에게도 넉넉한 이점을 줄 터인데, 그가 금지 아래에서만큼 양모를 아주 헐하게 사지는 못할지라도, 다른 나라 제조업자가 내야 할 뱃삯과 보험료를 아끼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적어도 그 제조업자가 살 수 있는 값보다 5실링이나 10실링 헐하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주권자에게 적지 않은 세입을 가져다주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도 이토록 적은 불편만 끼치는 세금을 생각해 내기란 좀처럼 될 수 없는 일이다.

이 금지는 그것을 지키는 온갖 벌에도 양모가 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 양모가 많은 양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국내 시장의 값과 외국 시장의 값 사이의 큰 차이가 밀무역에 그런 유혹을 내미니 법의 온갖 엄함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법에 어긋나는 이 수출은 밀무역꾼 말고는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세금을 무는 법에 맞는 수출이라면 주권자에게 세입을 가져다주고 그리하여 어쩌면 더 무겁고 더 거추장스러울 다른 세금을 매기는 일을 덜어 줌으로써 이 나라의 서로 다른 모든 신민에게 이로울 수 있을 것이다.

모직 제조품을 마련하고 씻어 내는 데에 꼭 있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축융토 곧 마전흙을 내보내는 것도 양모를 내보내는 것과 거의 같은 벌을 받게 되었다. 담뱃대 흙조차 마전흙과 다르다고 인정되는데도 서로 닮았다는 까닭으로, 또 마전흙이 더러 담뱃대 흙이라는 이름으로 나갈 수 있다는 까닭으로 같은 금지와 벌 아래 놓였다.

「찰스 2세 치세 13년과 14년의 법 제7장」으로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뿐 아니라 무두질한 가죽까지도 장화나 신이나 슬리퍼의 꼴이 아니고서는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이 법은 우리 장화 만드는 사람과 신 만드는 사람에게 목축업자를 상대로만이 아니라 무두장이를 상대로도 독점을 주었다. 뒤에 나온 법령들로 우리 무두장이들은 무두질한 가죽 1헌드레드웨이트, 곧 112파운드(무게)마다 1실링이라는 작은 세금을 무는 것으로 이 독점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또한 제 상품에 매겨진 소비세의 3분의 2를, 더 가공하지 않고 내보낼 때조차 환급받게 되었다. 가죽으로 만든 온갖 제조품은 관세 없이 내보낼 수 있고, 게다가 내보내는 자는 소비세 전부를 환급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 목축업자들은 여전히 옛 독점 아래 놓여 있다. 목축업자들은 서로 떨어져 나라의 온갖 구석에 흩어져 있으므로, 제 동료 시민에게 독점을 매기려는 목적으로든 남이 제게 매겨 놓은 독점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목적으로든 큰 어려움 없이는 단합할 수 없다. 온갖 종류의 제조업자들은 모든 큰 도시에 많은 무리로 모여 있으니 쉽게 그럴 수 있다. 소의 뿔조차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며, 뿔 다루는 사람과 빗 만드는 사람이라는 보잘것없는 두 거래가 이 점에서 목축업자를 상대로 독점을 누린다.

얼마쯤 가공되었으나 아주 완성되지는 않은 물건을 내보내는 데에 금지로든 세금으로든 제한을 두는 일은 가죽 제조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상품이든 당장 쓰고 소비할 수 있게 만드는 데에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한, 우리 제조업자들은 그 일을 저희가 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양모실과 소모사는 양모와 같은 벌 아래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바래지 않은 흰 모직물조차 우리는 내보낼 때 관세를 물리니, 우리 염색업자들은 그만큼 모직물업자를 상대로 독점을 얻어 낸 셈이다. 우리 모직물업자들은 아마 그에 맞서 제 몸을 지킬 수 있었을 터이나, 공교롭게도 우리 주요한 모직물업자 가운데 대부분이 스스로 염색업자이기도 하다. 회중시계 집과 괘종시계 집, 그리고 괘종시계와 회중시계의 문자판도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어 왔다. 우리 괘종시계 만드는 사람과 회중시계 만드는 사람은 이런 종류의 세공 값이 외국 사람들의 경쟁으로 저희에게 올라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다.

에드워드 3세와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때의 몇몇 옛 법령으로 모든 쇠붙이를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납과 주석만이 홀로 예외였는데, 아마 그 쇠붙이들이 아주 넉넉했던 까닭이고 그 시절에는 왕국의 거래 가운데 적지 않은 몫이 그것을 내보내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광산 거래를 북돋우려고 「윌리엄과 메리 치세 5년의 법 제17장」은 영국 광석으로 만든 쇠와 구리와 먼딕 쇠붙이를 이 금지에서 빼 주었다. 영국 것이든 외국 것이든 온갖 종류의 구리 막대를 내보내는 것은 뒤에 「윌리엄 3세 치세 9년과 10년의 법 제26장」으로 허락되었다. 가공하지 않은 놋쇠, 곧 이른바 포금과 종쇠와 슈로프 쇠를 내보내는 것은 아직도 금지되어 있다. 온갖 종류의 놋쇠 제조품은 관세 없이 내보낼 수 있다.

제조업의 재료를 내보내는 일은 아주 금지되어 있지 않은 자리에서는 많은 경우에 적지 않은 관세를 문다.

「조지 1세 치세 8년의 법 제15장」으로 영국의 산물이거나 제조품으로서 앞선 법령들이 무슨 관세든 매겨 놓았던 모든 물건을 내보내는 일이 관세 없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물건들은 예외였다. 명반, 납, 납 광석, 주석, 무두질한 가죽, 녹반, 석탄, 양모 빗13, 흰 모직물, 칼라민석, 온갖 종류의 짐승 가죽, 아교, 집토끼 털이나 솜털, 산토끼 털, 온갖 종류의 털, 말, 그리고 일산화납이다. 말을 빼면 이것들은 모두 제조업의 재료이거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조품(더 가공할 재료로 볼 수 있다)이거나, 거래의 도구다. 이 법령은 그것들을 그때까지 매겨진 적이 있는 모든 옛 관세와 구보조세와 내보낼 때 무는 1퍼센트 아래에 그대로 둔다.

같은 법령으로 염색업자가 쓰는 수많은 외국 약재가 들여올 때 무는 모든 관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그 약재들은 저마다 뒤에 내보낼 때 일정한 관세를, 참으로 그리 무겁지는 않은 관세를 물게 되었다. 우리 염색업자들은 모든 관세를 면제하여 그 약재를 들여오는 것을 북돋우는 것이 제 이익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내보내는 데에 얼마쯤 작은 방해를 놓는 것도 마찬가지로 제 이익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그러나 중상주의의 이 볼만한 재간을 떠올리게 한 탐욕은 십중팔구 제 목적을 스스로 그르쳤다. 그것은 들여오는 사람들에게 저희가 들여오는 양이 국내 시장을 대는 데에 필요한 만큼을 넘지 않도록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더 조심하라고 반드시 가르쳤다. 국내 시장은 언제나 더 옹색하게 공급되기 쉬웠고, 그 상품들은 수출이 수입만큼 자유로웠을 때보다 그곳에서 언제나 얼마쯤 더 비싸기 쉬웠다.

앞서 말한 법령으로 세네갈 고무 곧 아라비아 고무는 열거된 물들이는 약재에 들어 있었으므로 관세 없이 들여올 수 있었다. 다만 다시 내보낼 때에는 1헌드레드웨이트에 3펜스밖에 되지 않는 작은 파운드세를 물어야 했다. 그때 프랑스는 그 약재가 가장 많이 나는 나라, 곧 세네갈강 언저리에 있는 나라와 독점 거래를 누리고 있었고, 영국 시장은 그것이 자라는 곳에서 곧바로 들여와 넉넉히 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지 2세 치세 25년의 법」으로 세네갈 고무는 (항해법14의 두루 미치는 규정과 어긋나게도) 유럽의 어느 곳에서든 들여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법은 잉글랜드 중상주의 행정의 두루 미치는 원리와 그토록 어긋나는 이런 갈래의 거래를 북돋울 뜻이 없었으므로, 그런 수입에 1헌드레드웨이트에 10실링의 관세를 매기고 그 관세의 어느 몫도 뒤에 내보낼 때 환급해 주지 않기로 했다. 1755년에 시작된 성공한 전쟁으로 영국은 프랑스가 전에 누리던 바로 그 독점 거래를 그 나라들에 대하여 얻게 되었다. 우리 제조업자들은 평화가 맺어지자마자 이 이점을 제 것으로 삼아, 이 상품을 기르는 사람들을 상대로도 들여오는 사람들을 상대로도 제게 이로운 독점을 세우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조지 3세 치세 5년의 법 제37장」으로 아프리카에 있는 폐하의 영지에서 세네갈 고무를 내보내는 것은 영국으로만 한정되었고, 아메리카와 서인도의 영국 식민지에서 나는 열거된 상품과 똑같은 제약과 규제와 몰수와 벌 아래 놓였다. 그것을 들여오는 데에는 참으로 1헌드레드웨이트에 6펜스라는 작은 관세만 매겨졌으나, 다시 내보내는 데에는 1헌드레드웨이트에 1파운드 10실링이라는 엄청난 관세가 매겨졌다. 그 나라들의 생산물 전부를 영국으로 들여오게 하고, 저희가 제 값에 그것을 살 수 있도록 그 어느 몫도 다시 내보내지 못하게 하되 내보내더라도 그 수출을 넉넉히 가로막을 만한 비용을 들이게 하자는 것이 우리 제조업자들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탐욕은 이번에도 다른 여러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 목적을 스스로 그르쳤다. 이 엄청난 관세가 밀무역에 그런 유혹을 내밀었으므로 이 상품이 많은 양으로 몰래 나갔으니, 아마 유럽의 모든 제조업 나라로,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네덜란드로 나갔으며, 영국에서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도 나갔다. 이런 까닭에 「조지 3세 치세 14년의 법 제10장」으로 수출에 무는 이 관세는 1헌드레드웨이트에 5실링으로 줄었다.

구보조세를 걷을 때 따르던 관세 평가표에서 비버 가죽은 한 장에 6실링 8펜스로 매겨졌고, 1722년 이전에 그것을 들여오는 데에 매겨졌던 여러 보조세와 부과금은 평가액의 5분의 1, 곧 가죽 한 장에 16펜스에 이르렀는데, 2펜스밖에 되지 않는 구보조세의 절반을 빼고는 그 전부를 내보낼 때 환급받았다. 제조업의 그토록 중요한 재료를 들여오는 데에 무는 이 관세는 너무 높다고 여겨졌으며, 그리하여 1722년에 평가액이 2실링 6펜스로 낮추어져 수입 관세가 6펜스로 줄었고 그 가운데 절반만을 내보낼 때 환급받게 되었다. 같은 성공한 전쟁으로 비버가 가장 많이 나는 나라가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왔고, 비버 가죽이 열거된 상품에 들어 있었으므로 아메리카에서 그것을 내보내는 것은 따라서 영국 시장으로만 한정되었다. 우리 제조업자들은 머지않아 이 사정으로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생각해 냈고, 1764년에 비버 가죽을 들여오는 데에 무는 관세는 1펜스로 줄었으나 내보내는 데에 무는 관세는 가죽 한 장에 7펜스로 올랐으며 수입 관세를 환급해 주지도 않게 되었다. 같은 법으로 비버의 솜털이나 뱃가죽 털을 내보내는 데에 1파운드(무게)에 18펜스의 관세가 매겨졌으나 그 상품을 들여오는 데에 무는 관세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니, 그것은 영국 사람이 영국 배로 들여올 때 그 무렵 한 장에 4펜스와 5펜스 사이였다.

석탄은 제조업의 재료로도 거래의 도구로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무거운 관세가 그것을 내보내는 데에 매겨졌으니, 지금(1783년)은 1톤에 5실링이 넘고 뉴캐슬 되로 1챌드런15에 15실링이 넘는데, 이는 대부분의 경우에 탄갱에서, 아니 내보내려고 싣는 항구에서조차 그 상품이 본디 지닌 값보다 크다.

그러나 본디 뜻으로 거래의 도구라 불리는 것을 내보내는 일은 흔히 높은 관세가 아니라 아예 금지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이리하여 「윌리엄 3세 치세 7년과 8년의 법 제20장 제8절」로 장갑이나 양말을 뜨는 틀이나 기계를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내보냈거나 내보내려 한 그 틀이나 기계를 빼앗길 뿐 아니라 40파운드를 물게 되며 그 절반은 국왕에게, 나머지 절반은 그 일을 고발하거나 그것을 걸어 소송한 사람에게 간다. 마찬가지로 「조지 3세 치세 14년의 법 제71장」으로 목화와 아마와 모직과 명주 제조업에 쓰는 어떤 연장이든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그 연장을 빼앗길 뿐 아니라 그렇게 죄지은 사람이 200파운드를 물어야 하고, 그런 연장이 제 배에 실리는 것을 알면서 내버려 둔 선장도 마찬가지로 200파운드를 물어야 한다.

죽은 거래의 도구를 내보내는 데에 이런 무거운 벌이 매겨졌으니, 살아 있는 도구인 수공업자를 자유롭게 놓아두리라고는 좀처럼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조지 1세 치세 5년의 법 제27장」으로, 영국의 어느 제조업에 딸린 수공업자든 제 기술을 부리거나 가르치러 외국으로 가라고 꾀었다는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처음 저질렀을 때 100파운드를 넘지 않는 액수의 벌금과 석 달의 가둠에 처해지고 벌금을 치를 때까지 갇혀 있으며, 두 번째로 저질렀을 때에는 법원이 정하는 액수의 벌금과 열두 달의 가둠에 처해지고 벌금을 치를 때까지 갇혀 있게 되었다. 「조지 2세 치세 23년의 법 제13장」으로 이 벌은 무거워져, 처음 저질렀을 때에는 그렇게 꾄 수공업자 하나마다 500파운드와 열두 달의 가둠에 처해지고 벌금을 치를 때까지 갇혀 있으며, 두 번째로 저질렀을 때에는 1000파운드와 두 해의 가둠에 처해지고 벌금을 치를 때까지 갇혀 있게 되었다.

이 두 법령 가운데 앞엣것으로, 누군가가 수공업자를 꾀고 있었다는 것이나 어떤 수공업자가 앞서 말한 목적으로 외국에 가겠다고 약속하거나 계약했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 수공업자는 법원이 정하는 바에 따라 바다 건너로 가지 않겠다는 담보를 내야 하며 그런 담보를 낼 때까지 감옥에 갇힐 수 있다.

어떤 수공업자든 바다 건너로 가서 외국에서 제 기술을 부리거나 가르치고 있을 때, 외국에 나가 있는 폐하의 공사나 영사 가운데 누구에게서든, 또는 그때의 폐하의 국무대신 가운데 하나에게서 경고를 받고도 그 경고 뒤 여섯 달 안에 이 나라로 돌아와 그때부터 이 나라 안에 줄곧 머물러 살지 않으면, 그는 그때부터 이 왕국 안에서 제게 남겨진 어떤 유산도 받을 수 없고, 누구의 유언 집행인도 재산 관리인도 될 수 없으며, 이 왕국 안의 어떤 땅도 상속으로든 유증으로든 매입으로든 가질 수 없다고 선언된다. 그는 또한 제 땅과 물건과 동산을 죄다 국왕에게 빼앗기고, 모든 점에서 외국인으로 선언되며, 국왕의 보호 밖으로 밀려난다.

그런 규제가,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체하는 저 자랑스러운 신민의 자유에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경우에 그 자유는 우리 상인과 제조업자들의 하찮은 이익에 너무나 뻔히 제물로 바쳐졌다.

이 모든 규제의 갸륵한 동기는 우리 제조업을 그 자체의 개량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 나라 제조업을 모조리 짓눌러서, 그리고 그런 밉살스럽고 아니꼬운 맞수들의 성가신 경쟁을 될 수 있는 대로 끝장내서 늘리려는 것이다. 우리 제조업 고용주들은 제 나라 사람들의 재간을 저희가 독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몇몇 거래에서는 한 번에 부릴 수 있는 도제의 수를 제한하고 모든 거래에서는 긴 도제살이를 반드시 거치게 함으로써 저마다 제 일의 지식을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수의 사람에게 가두어 두려고 애쓰면서도, 그 적은 수 가운데 어느 몫이든 외국으로 나가 외국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이다.

소비야말로 모든 생산의 오직 하나뿐인 끝이요 목적이며, 생산하는 이의 이익은 소비하는 이의 이익을 북돋우는 데에 필요한 만큼만 돌보아야 한다.

이 격률은 너무나 뻔히 스스로 밝혀지는 것이어서 그것을 증명하려 드는 일 자체가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상주의 체계에서는 소비하는 이의 이익이 거의 언제나 생산하는 이의 이익에 제물로 바쳐지며, 그 체계는 소비가 아니라 생산을 모든 산업과 상업의 마지막 끝이요 목적으로 여기는 듯하다.

우리가 기르거나 만든 것과 맞겨룰 수 있는 모든 외국 상품을 들여오는 데에 두는 제한에서는 국내 소비자의 이익이 뻔히 생산자의 이익에 제물로 바쳐진다. 앞엣사람이 이 독점이 거의 언제나 불러오는 그 값의 오름을 치러야 하는 것은 온통 뒤엣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다.

생산자가 만든 것 가운데 몇몇을 내보내는 데에 장려금이 주어지는 것도 온통 그의 이익을 위해서다. 국내 소비자는 첫째로 그 장려금을 치르는 데에 필요한 세금을 물어야 하고, 둘째로 국내 시장에서 그 상품의 값이 오르는 데에서 반드시 생겨나는 더 큰 세금을 물어야 한다.

포르투갈과 맺은 저 이름난 통상 조약으로 소비자는 우리 기후가 내놓지 못하는 상품을 이웃 나라에서 사들이는 것이 관세로 가로막히고, 먼 나라의 상품이 가까운 나라의 것보다 질이 나쁘다고 인정되는데도 먼 나라에서 사들일 수밖에 없다. 국내 소비자가 이 불편을 견뎌야 하는 것은 생산자가 제가 만든 것의 얼마쯤을 그러지 않았더라면 허락받았을 것보다 더 유리한 조건으로 그 먼 나라에 들여보낼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소비자는 이렇게 억지로 내보내는 일이 국내 시장에서 바로 그 생산물의 값에 일으키는 오름까지 죄다 치러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아메리카와 서인도 식민지를 다스리려고 세워 놓은 법의 체계에서는 국내 소비자의 이익이 우리의 다른 모든 상업 규제에서보다 더 터무니없이 헤프게 생산자의 이익에 제물로 바쳐졌다. 우리의 여러 생산자가 가게에 내놓을 수 있는 온갖 물건을 어쩔 수 없이 사야 하는 손님들의 나라 하나를 길러 내겠다는 오직 그 목적 하나로 거대한 제국 하나가 세워진 것이다. 이 독점이 우리 생산자들에게 가져다줄 그 자잘한 값의 오름을 위하여 국내 소비자들은 그 제국을 건사하고 지키는 비용 전부를 짊어져 왔다. 이 목적을 위하여,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하여 지난 두 차례의 전쟁에서 2억 파운드가 넘는 돈이 쓰였고, 같은 목적으로 앞선 전쟁들에서 들인 것 말고도 1억 7천만 파운드가 넘는 새 빚이 지어졌다. 이 빚의 이자만 해도 식민지 거래의 독점으로 얻었다고 결코 내세울 수조차 없었던 그 유별난 이윤 전부보다 클 뿐 아니라, 그 거래 전체의 가치보다도, 또 해마다 평균하여 식민지로 내보낸 물건 전체의 가치보다도 크다.

이 중상주의 체계 전체를 꾸며 낸 자들이 누구인지 가려내기는 그리 어려울 수 없다. 이익이 온통 팽개쳐진 소비하는 이들은 아니라고 믿어도 될 터이고, 이익이 그토록 정성스레 돌보아진 생산하는 이들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 상인과 제조업자들이 단연 으뜸가는 설계자였다. 이 장에서 눈여겨본 중상주의 규제에서는 우리 제조업자들의 이익이 무엇보다 각별히 돌보아졌고, 그것을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것은 소비하는 이들의 이익이라기보다 다른 몇몇 생산자 무리의 이익이었다.

주

  1. 1. 옮긴이 — 영국의 법령은 국왕이 왕위에 오른 뒤 몇 해째 회기에 만들어졌는지와 그 회기의 몇째 장인지로 가리킨다. 이 장에 나오는 국왕이 왕위에 오른 해는 에드워드 3세 1327년, 에드워드 4세 1461년, 헨리 8세 1509년, 에드워드 6세 1547년, 엘리자베스 1세 1558년, 조지 1세 1714년, 조지 2세 1727년, 조지 3세 1760년이다. 찰스 2세의 치세 연차는 아버지가 죽은 1649년부터 세므로 치세 12년은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1660년에 걸치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1689년에 올랐다. 이를테면 「조지 3세 치세 5년의 법 제45장」은 1765년 회기의 45번째 법이다.

  2. 2. 옮긴이 — 이 책의 화폐는 파운드·실링·펜스다. 1파운드는 20실링이고 1실링은 12펜스이므로 1파운드는 240펜스다. 1파딩은 4분의 1펜스다. 저본이 £2:13:4 꼴로 적은 것은 2파운드 13실링 4펜스다. 오늘날 값으로는 환산하지 않는다. 스미스의 논증은 절대액이 아니라 비율에 걸려 있다. 무게 단위 파운드와 헷갈릴 수 있는 자리는 「파운드(무게)」로 갈라 적었다.

  3. 3. 옮긴이 — 헌드레드웨이트는 무게 단위로 112파운드(무게), 약 50.8킬로그램이다. 스미스 자신이 뒤에서 이 값을 밝혀 둔다. 저본이 「스프루스」와 「모스코비아」라 적은 실은 프로이센 곧 발트해 연안과 러시아에서 들여오던 아마실을 가리키는 그때의 거래 용어다.

  4. 4. 옮긴이 — 통널은 통의 옆을 두르는 널이고 마구리널은 통의 양 끝을 막는 널이다. 저본은 이 자리를 leading 으로 적었으나 통 만드는 일에서 통널과 짝을 이루는 것은 heading 이므로 그렇게 옮겼다. 파이프와 호그즈헤드와 배럴은 저마다 크기가 다른 술통이다.

  5. 5. 옮긴이 — 드라콘은 기원전 7세기 아테네의 입법자로, 사소한 죄에도 죽음을 매긴 법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피로 쓴 법」이라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다.

  6. 6. 옮긴이 — 윌리엄 호킨스(1673~1746)는 잉글랜드 법률가로 형사법을 다룬 『왕관 소송 개요』를 썼다. 서전트는 법정 변호사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직함이다.

  7. 7.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양에 대한 임자의 몫」으로 적었으나, 바로 앞에 이미 양을 빼앗는다는 말이 있고 법령의 문면은 배에 대한 임자의 몫을 빼앗는 것이므로 그렇게 옮겼다.

  8. 8. 옮긴이 — 유형은 죄인을 식민지로 보내 정해진 햇수 동안 노역하게 한 형벌로, 18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아메리카로, 뒤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냈다. 성직자 특전은 본디 성직자를 교회 법정에서 재판받게 하던 관행에서 나와 글을 읽을 수 있는 초범에게 사형을 면해 주던 제도로 굳어졌다. 「성직자 특전 없이」는 그 감형의 길을 막는다는 뜻이다.

  9. 9. 옮긴이 — 백인구는 주를 나눈 잉글랜드의 옛 행정 구역으로, 그 안에서 일어난 일에 구역 전체가 함께 책임을 졌다. 강도 사건에서도 같은 법리가 쓰였다.

  10. 10.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my part 로 적었으나 앞뒤로 보아 any part 이므로 「어느 몫이든」으로 옮겼다.

  11. 11. 옮긴이 — 존 스미스는 잉글랜드 성직자로 1747년에 『양모에 관한 연대기적 회고록』을 냈다. 애덤 스미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12. 12. 옮긴이 — 토드는 양모를 다는 무게 단위로 28파운드(무게), 곧 4분의 1헌드레드웨이트다.

  13. 13.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양모, 빗」으로 갈라 적었으나 이 장 첫머리에 나오는 양모를 빗는 빗과 같은 물건이다. 바로 다음 문장이 이 목록을 두고 말을 뺀 나머지는 모두 제조업의 재료이거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제조품이거나 거래의 도구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14. 14. 옮긴이 — 항해법은 1651년과 1660년에 자리 잡은 법으로, 영국과 그 식민지로 물건을 들여오는 일을 영국 배나 그 물건이 난 나라의 배로만 할 수 있게 하고 식민지의 주요 산물은 영국으로만 보내게 했다.

  15. 15. 옮긴이 — 챌드런은 석탄을 되는 단위로, 뉴캐슬 되의 1챌드런은 런던 되의 그것보다 커서 약 2.6톤에 해당했다. 되는 곳마다 달랐으므로 스미스가 「뉴캐슬 되로」라고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