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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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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식민지에 대하여

1절 — 새 식민지를 세운 동기에 대하여

아메리카와 서인도에 있는 여러 유럽 식민지를 처음 자리 잡게 만든 이익은, 옛 그리스와 로마의 식민지를 세우도록 이끈 이익만큼 그렇게 뻔하고 또렷하지는 않았다.

옛 그리스의 여러 나라는 저마다 아주 작은 땅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한 나라의 사람이 그 땅이 손쉽게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을 넘어 불어나면 그 가운데 한 몫을 세상의 멀고 외진 곳으로 새 삶터를 찾아 내보냈으니, 사방을 둘러싼 이웃들이 싸움에 능하여 어느 나라든 제 집 가까이에서 땅을 크게 넓히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도리스인의 식민지는 주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로 갔는데, 로마가 세워지기 앞선 시절에 그곳에는 야만스럽고 문명이 없는 나라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인의 다른 두 큰 갈래인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스인의 식민지는 소아시아와 에게해의 섬들로 갔는데, 그곳 주민들도 그때에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의 주민들과 거의 같은 형편에 있었던 듯하다1. 모도시2는 식민지를 언제나 큰 호의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 갚음으로 많은 고마움과 존경을 바쳐야 하는 자식이라 여기기는 했으나, 그러면서도 그것을 제 손에서 풀려난 자식이라 보아 그 위에 곧바로 미치는 권위나 재판권을 주장하려 들지 않았다. 식민지는 제 통치 형태를 스스로 정하고 제 법을 스스로 만들고 제 행정관을 스스로 뽑았으며, 모도시의 승인이나 동의를 기다릴 까닭이 없는 독립한 나라로서 이웃과 화친을 맺기도 하고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한 세움을 하나하나 이끈 이익보다 더 뻔하고 더 또렷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로마는 다른 옛 공화국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본디 농지법 위에 세워졌는데, 그 법은 나라를 이룬 여러 시민에게 공유지를 일정한 비율로 나누어 주었다. 사람의 일이 흘러가는 결에 따라 혼인으로, 상속으로, 넘겨줌으로 이 본디의 나눔은 어쩔 수 없이 흐트러졌고, 여러 집안을 먹여 살리라고 떼어 준 땅이 흔히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이 어지러움을, 사람들이 그것을 어지러움이라 여겼으므로, 바로잡으려고 어느 시민이든 지닐 수 있는 땅의 양을 500유게라3, 곧 영국 에이커로 350에이커쯤으로 묶는 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법은 한두 번 실제로 시행되었다는 기록을 읽기는 하나 버려지거나 피해 갔고, 재산의 고르지 못함은 끊임없이 커져 갔다. 시민 가운데 대부분은 땅이 없었는데, 땅이 없으면 그 시절의 풍습과 관례로는 자유인이 제 홀로 섬을 지키기가 어려웠다. 오늘날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제 땅이 없더라도 자산이 조금 있으면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거나 자그마한 소매 거래를 꾸려 갈 수 있고, 자산이 없더라도 시골 품팔이꾼으로든 수공업자로든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옛 로마인 사이에서는 부자의 땅을 죄다 노예가 갈았고 그 노예들은 저 또한 노예인 감독 밑에서 일했으므로, 가난한 자유인이 농부로든 품팔이꾼으로든 일자리를 얻을 가망은 거의 없었다. 온갖 거래와 제조업도, 소매 거래까지도 부자의 노예들이 제 주인의 이익을 위하여 꾸려 갔는데, 주인의 부와 권위와 비호 때문에 가난한 자유인이 그들과 겨루어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땅이 없는 시민에게는 해마다 열리는 선거에서 후보들이 뿌리는 인심 말고는 생계를 꾸릴 다른 길이 거의 없었다. 호민관들은 사람들을 부자와 높은 이들에게 맞서도록 부추길 마음이 들면 옛날의 토지 나눔을 그들에게 일깨우고, 이런 종류의 사유 재산을 묶어 둔 그 법이야말로 공화국의 으뜸가는 법이라고 내세웠다. 사람들은 땅을 얻겠다고 떠들썩해졌고, 부자와 높은 이들은 제 땅의 어느 몫도 내주지 않겠다고 아주 단단히 마음먹었으리라고 우리는 믿어도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얼마쯤 달래려고 흔히 새 식민지를 내보내자고 내놓았다. 그러나 정복해 나가는 로마는 그런 때에도 제 시민을 내몰아,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어디에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채 넓은 세상을 헤매며 제 운을 찾게 할 까닭이 없었다. 로마는 대개 이탈리아의 정복한 속주에 그들에게 땅을 떼어 주었는데, 그곳은 공화국의 판도 안이었으므로 그들은 결코 독립한 나라를 이룰 수 없었고 기껏해야 일종의 자치 단체4에 지나지 않아, 제 다스림을 위하여 내규를 만들 힘은 지녔으나 언제나 모도시의 바로잡음과 재판권과 입법 권위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이런 종류의 식민지를 내보내는 일은 사람들을 얼마쯤 달래 주었을 뿐 아니라, 그러지 않았더라면 고분고분할지 의심스러웠을 갓 정복한 속주에 흔히 일종의 수비대를 두는 셈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로마의 식민지는 그 세움 자체의 성질을 보든 그것을 세운 동기를 보든 그리스의 식민지와 아주 달랐다. 그에 따라 본디 말에서 이 서로 다른 세움을 가리키는 낱말도 뜻이 아주 다르다. 라틴어 낱말(colonia)은 그저 개척지를 뜻한다. 그와 달리 그리스어 낱말(apoixia)은 사는 자리를 갈라 나오는 것, 고향을 떠나는 것,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지가 여러 면에서 그리스의 식민지와 달랐다 하더라도 그것을 세우도록 밀어붙인 이익은 똑같이 뻔하고 또렷했다. 두 제도는 모두 거스를 수 없는 필요에서든 뚜렷하고 분명한 쓸모에서든 그 비롯함을 얻었다.

아메리카와 서인도에 유럽 식민지를 세운 일은 어떤 필요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서 생겨난 쓸모가 아주 크기는 했으나 그렇게 뚜렷하고 분명하지는 않다. 그 쓸모는 처음 세울 때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 세움의 동기도 그것을 있게 한 발견의 동기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쓸모의 성질과 크기와 한계는 어쩌면 오늘날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베네치아인은 14세기와 15세기에 향신료와 그 밖의 동인도 물품으로 아주 이로운 장사를 하여 그것을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 나누어 팔았다. 그들은 그것을 주로 이집트에서 사들였는데, 그때 이집트는 맘루크의 다스림 아래에 있었고 맘루크는 튀르크인의 적이었으며 베네치아인 또한 튀르크인의 적이었다. 그리하여 이렇게 이익이 하나로 맞물린 데에 베네치아의 돈이 거들어, 베네치아인에게 그 거래의 독점이나 다름없는 것을 안겨 주는 맺음이 이루어졌다.

베네치아인의 큰 이윤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탐욕을 부추겼다. 그들은 15세기 내내 무어인이 사막을 건너 상아와 사금을 실어 오는 그 나라들로 가는 바닷길을 찾아내려고 애써 왔다. 그들은 마데이라제도와 카나리아제도와 아소르스제도와 카보베르데제도를, 기니 해안과 로앙고와 콩고와 앙골라와 벵겔라의 해안을, 그리고 마침내 희망봉을 찾아냈다. 그들은 베네치아인의 이로운 장사에 끼어들기를 오래 바라 왔는데, 이 마지막 발견이 그렇게 될 만한 앞길을 그들에게 열어 주었다. 1497년에 바스쿠 다 가마가 배 네 척의 선단을 이끌고 리스본 항구를 떠나 열한 달을 항해한 끝에 힌두스탄 해안에 이르렀으니, 백 년 가까이 아주 꾸준하게 거의 끊임없이 이어 온 발견의 길이 이로써 마무리되었다.

이보다 몇 해 앞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벌인 일의 성공이 아직 의심스러워 보여 유럽의 기대가 매달려 있을 때, 제노바 출신 항해사 하나가 서쪽으로 배를 몰아 동인도에 이른다는 한결 더 대담한 일을 꾀했다. 그 나라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그때 유럽에 아주 어설프게만 알려져 있었다. 그곳에 가 본 몇 안 되는 유럽 나그네들은 그 거리를 부풀려 말했는데, 어쩌면 단순함과 무지에서 그러했을 터이고 참으로 아주 먼 것이 그것을 잴 수 없는 이들에게는 거의 끝이 없어 보였기 때문일 터이며, 어쩌면 유럽에서 그토록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간 제 모험의 놀라움을 얼마쯤 더 키우려고 그러했을 터이다. 동쪽으로 가는 길이 멀면 멀수록 서쪽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짧으리라고 콜럼버스는 아주 옳게 매듭지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길이 가장 짧고 가장 틀림없기도 하니 그 길을 잡자고 내놓았고, 제 계획이 될 법하다는 것을 카스티야의 이사벨에게 믿게 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는 1492년 8월에 팔로스 항구를 떠났으니 바스쿠 다 가마의 원정대가 포르투갈을 떠나기 거의 다섯 해 앞선 일이었고, 두 달에서 석 달 사이를 항해한 끝에 먼저 바하마 곧 루카얀 제도의 작은 섬 몇을 찾아냈고 그다음에 산토도밍고라는 큰 섬을 찾아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이 항해에서든 그 뒤의 어느 항해에서든 찾아낸 나라들은 그가 찾아 나선 나라들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중국과 힌두스탄의 부와 경작과 많은 사람 대신에 그가 산토도밍고에서, 그리고 그가 가 본 신세계의 다른 모든 곳에서 본 것은 온통 숲으로 덮이고 갈지 않았으며 벌거벗고 비참한 미개인 몇 무리만이 사는 땅뿐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이 마르코 폴로가 그려 낸 나라들 가운데 어느 것과 같지 않다고는 그리 믿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 마르코 폴로는 중국이나 동인도를 찾아간 첫 유럽 사람이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남긴 첫 유럽 사람이었다. 그리고 산토도밍고에 있는 시바오라는 산의 이름과 마르코 폴로가 말한 치팡구의 이름 사이에서 그가 찾아낸 것 같은 아주 희미한 닮음만으로도, 더없이 뚜렷한 증거에 어긋나는데도 그가 이 아끼는 선입견으로 되돌아가기에 흔히 넉넉했다. 그는 페르난도와 이사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찾아낸 나라들을 인도라고 불렀다. 그는 그곳이 마르코 폴로가 그려 낸 나라들의 끝자락이며 갠지스강에서, 또는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한 나라들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곳이 다른 곳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그 넉넉한 나라들이 그리 멀리 있지 않으리라고 여전히 제 마음을 달랬고, 그리하여 뒤의 어느 항해에서는 티에라피르메 해안을 따라, 그리고 다리엔 지협 쪽으로 그 나라들을 찾아 나섰다.

콜럼버스의 이 잘못 때문에 인도라는 이름이 그때부터 줄곧 그 불행한 나라들에 들러붙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 인도가 옛 인도와 아주 다르다는 것이 뚜렷이 밝혀졌을 때, 앞의 것은 서인도라 불렸고 그와 맞세워 뒤의 것은 동인도라 불렸다.

그렇지만 콜럼버스에게는 자기가 찾아낸 나라가 무엇이든 그것이 아주 큰 값어치를 지닌 것으로 스페인 궁정에 알려지는 일이 중요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나 참된 넉넉함을 이루는 것, 곧 땅에서 나는 짐승과 푸성귀를 보면 그때 그 나라들을 그렇게 알릴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쥐와 토끼의 중간쯤 되는 코리는 뷔퐁 씨가 브라질의 아페레아와 같은 것이라고 본 짐승인데, 산토도밍고에서 새끼를 낳는 네발짐승 가운데 가장 컸다. 이 종류는 결코 아주 많지는 않았던 듯하고, 스페인인의 개와 고양이가 오래전에 그것을 거의 온통 없애 버렸으며 그보다 더 작은 다른 몇 갈래도 그리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이바나 또는 이구아나라 불리는 제법 큰 도마뱀과 더불어 그 땅이 내주는 짐승 먹거리의 주된 몫을 이루었다.

그곳 주민들의 푸성귀 먹거리는 그들에게 근면이 없었던 탓에 아주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그렇게까지 모자라지는 않았다. 그것은 강냉이5와 얌과 감자와 바나나 따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푸성귀들은 그때 유럽에 아주 알려지지 않았고 그 뒤로도 유럽에서 그리 대접받은 적이 없으며, 이쪽 세상에서 아득한 옛날부터 가꾸어 온 흔한 종류의 곡물과 콩류에서 얻는 것과 맞먹는 양식을 내준다고 여겨진 적도 없다.

목화는 참으로 아주 중요한 제조업의 감을 내주었고 그때 유럽인에게는 그 섬들에서 나는 온갖 푸성귀 생산물 가운데 틀림없이 가장 값진 것이었다. 그러나 15세기 끝 무렵에 동인도의 모슬린과 그 밖의 무명 물건이 유럽 어디에서나 크게 대접받기는 했어도, 무명을 짜는 제조업 자체는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가꾸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생산물마저도 그때 유럽인의 눈에는 아주 큰 값어치를 지닌 것으로 보일 수 없었다.

새로 찾아낸 나라들의 짐승에서도 푸성귀에서도 그 나라들을 아주 이롭게 알릴 만한 것을 찾지 못하자 콜럼버스는 눈길을 그곳의 광물로 돌렸고, 이 셋째 나라에서 나는 것이 넉넉하다면 앞의 두 가지가 보잘것없는 것을 넉넉히 메워 주리라고 제 마음을 달랬다. 그곳 주민들이 옷을 꾸미는 데에 쓰던 자잘한 금붙이, 그리고 그들이 산에서 흘러내리는 시내와 여울에서 흔히 찾아낸다고 그가 들은 그 금붙이만으로도 그 산들에 더없이 넉넉한 금광이 그득하다고 그가 흡족해하기에 넉넉했다. 그리하여 산토도밍고는 금이 그득한 나라로, 그런 까닭에 (오늘날의 편견만이 아니라 그 시절의 편견으로 보아도) 스페인의 왕실과 왕국에 참된 부를 끝없이 대어 주는 샘으로 알려졌다. 콜럼버스가 첫 항해에서 돌아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주권자 앞에 개선하는 자리와도 같은 영예를 받으며 나아갔을 때, 그가 찾아낸 나라들에서 난 주된 생산물이 그의 앞에 엄숙한 행렬을 이루어 옮겨졌다. 그 가운데 값진 것이라고는 자그마한 금테와 팔찌와 그 밖의 금붙이 몇, 그리고 목화 꾸러미 몇이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그저 뭇사람의 놀라움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물건, 곧 엄청나게 큰 갈대 몇 대와 깃털이 아주 고운 새 몇 마리와 커다란 악어와 매너티의 박제 가죽 몇 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앞에는 가엾은 원주민 예닐곱이 앞장섰는데, 그들의 남다른 살빛과 생김새가 그 구경거리의 새로움을 크게 더해 주었다.

콜럼버스가 그렇게 알린 결과로 카스티야 참사회는 그곳 주민들이 스스로를 지킬 힘이 뻔히 없는 그 나라들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바꾸어 놓는다는 경건한 목적이 그 계획의 옳지 못함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금 보물을 찾으리라는 바람이 그 일을 벌이도록 밀어붙인 유일한 동기였다. 그리고 이 동기에 무게를 더 실어 주려고 콜럼버스는 그곳에서 찾아낼 온갖 금과 은의 절반을 왕실이 갖도록 하자고 내놓았다. 이 제안은 참사회의 승인을 받았다.

첫 모험가들이 유럽으로 들여온 금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지킬 힘 없는 원주민을 털어 내는 아주 손쉬운 길로 얻는 동안에는 이 무거운 세를 무는 일마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원주민이 지닌 것을 죄다 빼앗기고 나자, 산토도밍고에서도 콜럼버스가 찾아낸 다른 모든 나라에서도 그 일은 여섯 해에서 여덟 해 사이에 남김없이 이루어졌는데, 그리고 더 찾으려면 광산을 파야 하게 되자 이 세를 무는 일은 더는 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이 세를 모질게 뜯어낸 것이 산토도밍고의 광산을 온통 버리게 만든 첫 까닭이었다고 하며, 그 광산은 그 뒤로 한 번도 캐어진 적이 없다. 그리하여 그것은 머지않아 금광 총생산물의 3분의 1로 줄었고, 그다음에는 5분의 1로, 그 뒤에는 10분의 1로, 마침내 20분의 1로 줄었다. 은에 매긴 세는 오랫동안 총생산물의 5분의 1에 머물렀다. 그것이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은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그러나 첫 모험가들은 은에 그리 마음을 쓰지 않았던 듯하다. 금보다 덜 귀한 것은 무엇이든 그들의 눈길을 받을 만하지 않아 보였다.

콜럼버스의 일 뒤에 스페인인이 신세계에서 벌인 다른 모든 사업도 같은 동기에서 밀려 나온 듯하다. 오헤다와 니쿠에사와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를 다리엔 지협으로 데려간 것, 코르테스를 멕시코로, 알마그로와 피사로를 칠레와 페루로 데려간 것은 금을 향한 그 거룩한 목마름이었다. 그 모험가들은 알려지지 않은 어느 해안에 이르든 언제나 그곳에서 금을 찾을 수 있는지를 먼저 물었고, 바로 이 점에 대하여 들은 바에 따라 그 나라를 떠날지 그곳에 자리 잡을지를 정했다.

그렇지만 손대는 사람 대부분을 파산으로 몰아가는 그 돈 많이 들고 미덥지 않은 온갖 계획 가운데, 어쩌면 새 은광과 금광을 찾아 나서는 일보다 더 남김없이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밑지는 제비뽑기이거나, 상을 뽑은 이들의 얻음이 꽝을 뽑은 이들의 잃음에 견주어 가장 작은 몫밖에 되지 않는 제비뽑기다. 상은 적고 꽝은 많은데 표 한 장의 흔한 값이 아주 큰 부자의 재산을 통째로 잡아먹기 때문이다. 광산을 파는 계획은 거기에 쓴 자본을 자산의 예사로운 이윤과 함께 메워 주기는커녕 흔히 자본과 이윤을 아울러 삼켜 버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제 나라의 자본을 늘리고자 하는 슬기로운 입법자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특별히 북돋워 주거나 저절로 그리 갈 몫보다 더 큰 몫의 자본을 그쪽으로 돌리기를 가장 꺼릴 계획이다.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이 제 행운을 터무니없이 믿기 때문에, 성공할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너무 큰 몫이 저절로 그리 가기 쉽다.

그러나 그런 계획에 대하여 맑은 정신과 경험이 내리는 판단은 언제나 더없이 나빴지만, 사람의 탐욕이 내리는 판단은 흔히 아주 딴판이었다.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현자의 돌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불어넣은 바로 그 열정이 다른 이들에게는 엄청나게 넉넉한 금광과 은광이라는 똑같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이 금속들의 가치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주로 그 드묾에서 나왔다는 것, 그리고 그 드묾이란 자연이 어디서든 한자리에 묻어 둔 양이 아주 적다는 데에서, 자연이 거의 어디서나 그 적은 양을 단단하고 다루기 힘든 바탕으로 둘러싸 두었다는 데에서, 따라서 그것을 뚫고 들어가 손에 넣으려면 어디서나 노동과 비용이 들어야 한다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들은 납이나 구리나 주석이나 쇠의 광맥으로 흔히 찾아내는 것만큼 크고 넉넉한 금은의 광맥을 여러 곳에서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제 마음을 달랬다. 엘도라도라는 황금의 도시와 나라에 대한 월터 롤리 경의 꿈은, 슬기로운 사람조차 그런 이상한 헛생각에서 언제나 벗어나 있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넉넉히 보여 준다. 그 위대한 사람이 죽고 백 해가 넘게 지난 뒤에도 예수회 수사 구밀라는 그 놀라운 나라가 참으로 있다고 여전히 굳게 믿었고, 제 선교사의 경건한 수고에 그토록 잘 보답할 수 있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을 가져가면 얼마나 기쁘겠느냐고 아주 뜨겁게,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아주 참되게 털어놓았다.

스페인인이 처음 찾아낸 나라들에는 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금광이나 은광이 오늘날 하나도 알려져 있지 않다. 첫 모험가들이 그곳에서 찾아냈다고 하는 금속의 양은, 처음 찾아낸 바로 뒤에 캐던 광산의 기름짐과 마찬가지로, 아마 아주 크게 부풀려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험가들이 찾아냈다고 알려진 것만으로도 제 나라 사람들 모두의 탐욕에 불을 지르기에 넉넉했다. 아메리카로 배를 타고 간 스페인인은 누구나 엘도라도를 찾아내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운명도 다른 자리에서는 좀처럼 하지 않던 일을 이때에는 해 주었다. 운명은 제게 매달리는 이들의 터무니없는 바람을 얼마쯤 이루어 주었으니, 멕시코와 페루를 찾아내고 정복하는 일에서 (하나는 콜럼버스의 첫 원정으로부터 서른 해쯤 뒤에, 다른 하나는 마흔 해쯤 뒤에 일어났다) 그들이 찾던 귀금속의 그 헤픔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을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러므로 동인도와 장사하려던 계획이 서인도를 처음 찾아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복하려는 계획이 스페인인이 그 새로 찾아낸 나라들에 세운 모든 터전을 있게 했다. 그들을 이 정복으로 부추긴 동기는 금광과 은광을 찾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사람의 슬기로는 아무도 내다볼 수 없었던 일들이 잇달아 일어나, 이 계획은 사업가들이 이치에 맞게 기대할 만한 근거를 지녔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들어맞았다.

아메리카에 터전을 잡으려 한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의 첫 모험가들도 그와 같은 허황한 생각에 들떠 있었으나 그만큼 들어맞지는 않았다. 브라질에 처음 자리 잡고 나서 백 해가 넘게 지나서야 그곳에서 은광이든 금광이든 금강석 광산이든 찾아냈다. 영국과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식민지에서는 아직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으니, 적어도 오늘날 캘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지만 북아메리카에 처음 자리 잡은 영국 사람들은 특허장을 내주는 대가로 그곳에서 찾아낼 온갖 금과 은의 5분의 1을 국왕에게 바치겠다고 했다. 월터 롤리 경에게 준 특허장에서도, 런던 회사와 플리머스 회사에 준 특허장에서도, 플리머스 참사회에 준 특허장 따위에서도 이 5분의 1은 그에 따라 왕실의 몫으로 남겨졌다. 금광과 은광을 찾아내리라는 기대에 더하여 그 첫 정착민들은 동인도로 가는 북서 항로를 찾아내리라는 기대도 품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두 가지 다에서 어긋났다.

2절 — 새 식민지가 번성한 까닭

문명한 나라의 식민지가 빈 땅을 차지하거나, 사람이 드물게 살아 원주민이 새 정착민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는 땅을 차지하면, 그 식민지는 사람이 이룬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빠르게 부와 큼으로 나아간다.

식민지 사람들은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나라들6 사이에서 여러 세기에 걸쳐 저절로 자라날 수 있는 것보다 나은 농사 지식과 그 밖의 쓸모 있는 재주를 가지고 나간다. 그들은 또한 윗사람을 따르는 버릇과, 제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반듯한 통치와 그것을 받쳐 주는 법의 체계와 반듯하게 베푸는 재판에 대한 얼마쯤의 생각도 가지고 나가며, 새 터전에서 그와 같은 것을 저절로 세운다. 그러나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나라들 사이에서는 법과 통치가 재주를 지켜 주는 데에 필요한 만큼 자리 잡고 난 뒤에도, 법과 통치가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이 재주가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보다 여전히 느리다. 식민지 사람은 저마다 제가 도저히 다 갈 수 없을 만큼 많은 땅을 얻는다. 그에게는 물어야 할 지대도 없고 물어야 할 세금도 거의 없다. 어떤 지주도 그 생산물을 그와 나누어 가지지 않고, 주권자의 몫도 흔히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이렇게 거의 온통 제 것이 될 생산물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만들 온갖 동기를 지닌다. 그러나 그의 땅은 흔히 너무 넓어서 제 온 근면을 다하고 부릴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온 근면을 다 보태어도 그 땅이 낼 수 있는 것의 10분의 1도 내게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는 사방에서 일꾼을 그러모아 더없이 후한 임금으로 갚아 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 후한 임금에 땅이 넉넉하고 헐하다는 사정이 더해져, 그 일꾼들은 머지않아 스스로 지주가 되려고 그를 떠나 버리고 저도 똑같이 후하게 다른 일꾼들에게 갚아 주는데, 그 일꾼들 또한 제가 첫 고용주를 떠난 것과 같은 까닭으로 머지않아 그들을 떠난다. 노동에 후하게 갚아 주는 것은 혼인을 북돋운다. 아이들은 여린 젖먹이 시절에 잘 먹고 알맞게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고 나면 그 노동의 가치가 그들을 먹여 살리는 값을 훌쩍 넘겨 갚는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노동의 값이 비싸고 땅값이 헐한 덕에 제 아비가 앞서 그러했듯이 스스로 터를 잡을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지대와 이윤이 임금을 먹어 치우고 위의 두 계층이 아래 계층을 짓누른다. 그러나 새 식민지에서는 위의 두 계층의 이익이 그들로 하여금 아래 계층을 더 너그럽고 더 사람답게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적어도 그 아래 계층이 노예 신세에 놓여 있지 않은 곳에서는 그렇다. 타고난 기름짐이 더없이 좋은 빈 땅을 하찮은 값에 얻을 수 있다. 언제나 사업가이기도 한 임자가 그 땅을 개량하여 얻으리라 기대하는 수입의 늘어남이 그의 이윤을 이루는데, 이런 형편에서는 그 이윤이 흔히 아주 크다. 그러나 이 큰 이윤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써서 땅을 일구고 갈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새 식민지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땅은 아주 넓고 사람은 적어 그 둘이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가 이 노동을 얻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그는 임금을 두고 다투지 않고 어떤 값에라도 노동을 기꺼이 쓴다. 노동의 높은 임금은 사람이 느는 것을 북돋운다. 좋은 땅이 헐하고 넉넉한 것은 개량을 북돋우고 임자가 그 높은 임금을 물 수 있게 해 준다. 땅값의 거의 전부가 그 임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임금은 노동의 임금으로 보면 높으나 그토록 값진 것의 값으로 보면 낮다. 사람이 늘고 개량이 나아가는 것을 북돋우는 것은 무엇이든 실질 부와 큼이 나아가는 것을 북돋운다.

그에 따라 옛 그리스 식민지 가운데 많은 것이 부와 큼으로 나아간 걸음은 아주 빨랐던 듯하다. 한두 세기 사이에 그 가운데 여럿이 제 모도시와 어깨를 겨루었고 그것을 넘어서기까지 한 듯하다.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아크라가스, 이탈리아의 타렌툼과 로크리,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와 밀레토스는 전하는 모든 이야기로 보아 옛 그리스의 어느 도시에도 적어도 뒤지지 않았던 듯하다. 세워진 것은 뒤였으나 다듬어진 온갖 재주와 철학과 시와 말솜씨가 본국의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가꾸어졌고 그만큼 높이 닦였던 듯하다. 가장 오래된 두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의 학파가 옛 그리스가 아니라 하나는 아시아의 식민지에,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의 식민지에 세워졌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그 식민지들은 모두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나라들이 사는 땅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은 새 정착민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들에게는 좋은 땅이 넉넉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도시에서 아주 독립해 있었으므로 제 이익에 가장 알맞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대로 제 일을 꾸려 갈 자유가 있었다.

로마 식민지의 역사는 결코 그만큼 빛나지 않는다. 참으로 그 가운데 피렌체 같은 몇몇은 여러 시대를 지나 모도시가 무너진 뒤에 제법 큰 나라로 자라났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나아간 걸음이 아주 빨랐던 적은 없는 듯하다. 그것들은 모두 정복한 속주에 세워졌는데, 그곳은 대개 앞서 사람이 꽉 들어차 살던 곳이었다. 식민지 사람 하나하나에게 떼어 준 땅의 양은 좀처럼 아주 많지 않았고, 식민지가 독립해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제 이익에 가장 알맞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대로 제 일을 꾸려 갈 자유를 언제나 누리지는 못했다.

좋은 땅이 넉넉하다는 점에서 아메리카와 서인도에 세워진 유럽 식민지는 옛 그리스의 식민지를 닮았고 그것을 크게 넘어서기까지 한다. 본국에 매여 있다는 점에서는 옛 로마의 식민지를 닮았다. 그러나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덕에 그 모두에서 이 매임의 효과가 얼마쯤 누그러졌다. 그 자리 때문에 그들은 본국의 눈길에도 본국의 힘에도 덜 닿았다. 제 이익을 제 뜻대로 좇는 데에서 그들이 한 일은 여러 자리에서 그냥 넘어가졌으니, 유럽에 알려지지 않았거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러는 멀리 떨어져 있어 막기가 어려웠으므로 그대로 참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사납고 제멋대로인 스페인의 통치조차 여러 자리에서 온 나라가 들고일어날까 두려워 제 식민지를 다스리려고 내린 명령을 거두거나 누그러뜨려야 했다. 그에 따라 모든 유럽 식민지가 부와 사람 수와 개량에서 나아간 걸음은 아주 컸다.

스페인 왕실은 금과 은에서 제 몫을 받아 식민지를 처음 세운 그 순간부터 거기서 얼마쯤 세입을 얻었다. 그것은 또한 사람의 탐욕 속에 더욱 큰 넉넉함에 대한 더없이 터무니없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만한 성질의 세입이었다. 그러므로 스페인 식민지는 처음 세워진 그 순간부터 본국의 눈길을 아주 많이 끌었으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는 오랫동안 크게 내버려져 있었다. 앞의 것이 이 눈길 덕에 더 잘된 것도 아니고 뒤의 것이 이 내버려 둠 탓에 더 못된 것도 어쩌면 아니다. 그들이 얼마쯤 차지하고 있는 땅의 넓이에 견주어 보면 스페인 식민지는 유럽의 거의 다른 어느 나라의 식민지보다도 사람이 적고 덜 번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스페인 식민지조차 사람 수와 개량에서 나아간 걸음은 틀림없이 아주 빠르고 아주 컸다. 정복한 뒤에 세워진 리마시에는 서른 해쯤 전에 주민이 5만 명 있었다고 우요아는 적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초라한 마을에 지나지 않던 키토도 같은 저자가 글을 쓰던 무렵에는 그만큼 사람이 많았다고 적혀 있다. 젬멜리 카레리는 참으로 나그네인 체한 사람이라고들 하나 어디서나 아주 좋은 소식에 기대어 쓴 듯한데, 그는 멕시코시에 주민이 10만 명 있다고 적었다. 이 수는 스페인 저술가들이 부풀린 온갖 것을 감안하더라도 몬테수마 시절에 그 도시에 있던 수보다 아마 다섯 배가 넘을 것이다. 이 수는 영국 식민지의 가장 큰 세 도시인 보스턴과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수를 크게 넘어선다. 스페인인이 정복하기 앞서 멕시코에도 페루에도 멍에를 메울 만한 짐승이 없었다. 라마가 그들의 유일한 짐 나르는 짐승이었는데 그 힘은 흔한 나귀의 힘보다 꽤 못했던 듯하다. 쟁기는 그들 사이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쇠를 쓸 줄 몰랐다. 그들에게는 찍어 낸 돈도 없었고 어떤 종류의 자리 잡은 장사 수단도 없었다. 그들의 장사는 물물 교환으로 이루어졌다. 일종의 나무 삽이 그들의 주된 농사 연장이었다. 날카로운 돌이 무엇을 베는 칼과 도끼 노릇을 했고, 물고기 뼈와 몇몇 짐승의 굳은 힘줄이 무엇을 꿰매는 바늘 노릇을 했으니, 이것들이 그들의 주된 일 연장이었던 듯하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그 두 제국 가운데 어느 쪽도 온갖 종류의 유럽 짐승을 넉넉히 갖추고 쇠와 쟁기와 유럽의 여러 재주가 그들 사이에 들어온 오늘날만큼 개량되었거나 잘 갈렸을 수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나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는 그 개량과 경작의 정도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정복 뒤에 뒤따른 원주민의 모진 죽어 없어짐에도 불구하고 이 두 큰 제국에는 아마 지난 어느 때보다 지금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다. 내가 보기에 우리는 스페인계 크리오요7가 여러 면에서 옛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낫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페인인이 자리 잡은 다음으로는 포르투갈 사람들이 브라질에 자리 잡은 것이 아메리카에서 유럽 어느 나라의 것보다도 오래되었다. 그러나 처음 찾아낸 뒤로 오랫동안 그곳에서 금광도 은광도 나오지 않았고 그런 까닭에 왕실에 세입을 거의 또는 아예 주지 못했으므로 오랫동안 크게 내버려져 있었는데, 이렇게 내버려져 있는 동안에 그것은 크고 힘 있는 식민지로 자라났다.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동안 브라질은 네덜란드인의 공격을 받았고, 그들은 브라질이 나뉘어 있는 열네 주 가운데 일곱을 차지했다. 그들이 머지않아 나머지 일곱도 정복하리라 기대하고 있을 때 포르투갈은 브라간사 집안이 왕위에 오르면서 독립을 되찾았다. 그러자 스페인인의 적이던 네덜란드인은 마찬가지로 스페인인의 적이던 포르투갈 사람들의 벗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정복하지 못한 브라질의 몫을 포르투갈 국왕에게 남겨 주기로 했고, 국왕은 그들이 정복한 몫을 그들에게 남겨 주기로 했으니, 그토록 좋은 동맹과 다툴 만한 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통치는 머지않아 포르투갈 식민지 사람들을 짓누르기 시작했고, 그들은 하소연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제 새 주인들에게 맞서 무기를 들었으며, 본국이 눈감아 주기는 했으나 드러내 놓고 도와주지는 않는 가운데 제 용기와 결단으로 그들을 브라질에서 몰아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인은 그 나라의 어느 몫도 제 것으로 붙들고 있을 수 없음을 알고 그것이 온통 포르투갈 왕실에 되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 식민지에는 포르투갈 사람이거나 포르투갈 사람의 자손인 이들, 곧 크리오요와 물라토와 포르투갈 사람과 브라질인 사이에서 난 혼혈이 60만 명 넘게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의 어느 식민지에도 유럽 혈통의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15세기 끝 무렵과 16세기의 대부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큰 바다 위의 두 큰 해군 세력이었다. 베네치아의 장사가 유럽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기는 했으나 그 함대가 지중해 밖으로 나간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은 처음 찾아냈다는 것을 내세워 아메리카 전부를 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포르투갈만큼 큰 해군 세력이 브라질에 자리 잡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나, 그때 그들의 이름이 주는 두려움이 어찌나 컸던지 유럽의 다른 나라들 대부분은 그 큰 대륙의 다른 어느 곳에도 터를 잡기를 두려워했다. 플로리다에 자리 잡으려 한 프랑스 사람들은 스페인인의 손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16세기 끝 무렵에 그들이 무적함대라 부르던 것이 패하거나 어그러진 결과로 이 뒤의 나라의 해군 세력이 기울자, 그들에게는 다른 유럽 나라들이 터를 잡는 것을 더는 가로막을 힘이 없어졌다. 그리하여 17세기 동안에 영국인과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과 덴마크인과 스웨덴인, 곧 큰 바다에 항구를 하나라도 가진 모든 큰 나라가 신세계에 얼마쯤 터를 잡으려고 애썼다.

스웨덴인은 뉴저지에 터를 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도 볼 수 있는 스웨덴 집안의 수는 본국이 이 식민지를 지켜 주었더라면 그것이 아주 번성할 만했음을 넉넉히 보여 준다. 그러나 스웨덴이 내버려 두었으므로 그것은 머지않아 네덜란드의 뉴욕 식민지에 삼켜졌고, 그 뉴욕은 다시 1674년에 영국의 다스림 아래에 들어갔다.

세인트토머스와 산타크루스라는 작은 섬들은 덴마크인이 신세계에서 차지한 적이 있는 유일한 땅이다. 이 자그마한 터전도 배타적 특권 회사의 다스림 아래에 있었는데, 그 회사는 식민지의 남는 생산물을 사들일 권리도 식민지가 바라는 다른 나라 물건을 대어 줄 권리도 홀로 지니고 있었으므로, 사들일 때에도 팔 때에도 그들을 짓누를 힘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없이 컸다. 상인들의 배타적 특권 회사가 다스리는 것은 어떤 나라에나 어쩌면 온갖 다스림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이 식민지들이 나아가는 것을 더 느리고 더 맥없게 만들기는 했어도 아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덴마크의 지난 국왕이 이 회사를 없앴고, 그때부터 이 식민지들은 아주 크게 번성했다.

서인도에 있는 네덜란드의 터전도 동인도에 있는 터전과 마찬가지로 본디 배타적 특권 회사의 다스림 아래에 놓였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몇몇이 나아간 걸음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자리 잡은 거의 어느 나라에 견주어도 제법 컸으나, 새 식민지 대부분에 견주면 맥없고 느렸다. 수리남 식민지는 아주 제법 크기는 하나 유럽 다른 나라들의 설탕 식민지 대부분보다 아직 못하다. 지금은 뉴욕과 뉴저지 두 주로 나뉘어 있는 노바 벨기아 식민지는 네덜란드인의 다스림 아래에 그대로 있었더라도 아마 머지않아 제법 커졌을 것이다. 좋은 땅이 넉넉하고 헐한 것은 번성의 원인으로 어찌나 힘이 센지, 더없이 나쁜 다스림도 그것이 내는 효험을 아주 막아 내기는 어렵다. 게다가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식민지 사람들은 회사가 자기들에게 휘두르는 독점을 밀무역으로 얼마쯤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 회사는 네덜란드 배라면 무엇이든 실은 짐의 가치에 100분의 2와 2분의 1을 면허 값으로 물기만 하면 수리남과 거래하도록 허락하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가는 직접 무역, 곧 거의 온통 노예 거래인 그것만을 제 것으로 남겨 둔다. 회사의 배타 특권이 이렇게 느슨해진 것이 그 식민지가 오늘날 누리는 그만한 번성의 주된 원인일 것이다. 네덜란드에 딸린 두 주요 섬인 퀴라소와 신트외스타티위스는 모든 나라의 배에 열려 있는 자유항이다. 그리고 항구가 한 나라의 배에만 열려 있는 더 나은 식민지들 한가운데에서 누리는 이 자유가 그 메마른 두 섬이 번성한 큰 원인이었다.

프랑스의 캐나다 식민지는 지난 세기의 대부분과 이번 세기의 얼마 동안 배타적 특권 회사의 다스림 아래에 있었다. 그토록 좋지 못한 다스림 아래에서 그것이 나아간 걸음은 다른 새 식민지에 견주어 어쩔 수 없이 아주 느렸다. 그러나 미시시피 계획8이라 불리는 것이 무너진 뒤에 이 회사가 없어지자 그 걸음은 훨씬 빨라졌다. 영국인이 이 땅을 차지했을 때 그들이 그곳에서 본 주민의 수는 샤를부아 신부가 스무 해에서 서른 해쯤 앞서 적어 둔 수의 곱절에 가까웠다. 그 예수회 수사는 그 땅을 두루 돌아다녔고 그곳을 실제보다 덜 보잘것없게 그릴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프랑스의 산토도밍고 식민지는 해적과 노략꾼들이 세운 것인데, 그들은 오랫동안 프랑스의 보호를 바라지도 않았고 그 권위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도적 떼가 이 권위를 받아들일 만큼은 시민이 되었을 때에도 오랫동안 그 권위를 아주 부드럽게 휘둘러야 했다. 이 동안에 이 식민지의 사람 수와 개량은 아주 빠르게 늘었다. 프랑스의 다른 모든 식민지와 더불어 얼마 동안 그 아래에 놓였던 배타적 특권 회사의 짓누름조차, 그것이 걸음을 늦추기는 했어도 아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 짓누름에서 벗어나자마자 번성의 걸음이 되돌아왔다. 그것은 이제 서인도의 설탕 식민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생산물이 영국의 설탕 식민지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고 한다. 프랑스의 다른 설탕 식민지도 대체로 모두 아주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보다 나아간 걸음이 더 빨랐던 식민지는 없다.

좋은 땅이 넉넉한 것과 제 일을 제 뜻대로 꾸려 갈 자유, 이 둘이 모든 새 식민지가 번성하는 두 큰 원인인 듯하다.

좋은 땅이 넉넉하다는 점에서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는 틀림없이 아주 넉넉하게 갖추고 있기는 하나 스페인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의 식민지보다는 못하고, 지난 전쟁9 앞서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몇몇 식민지보다 낫지도 않다. 그러나 영국 식민지의 정치 제도는 다른 세 나라의 제도보다 이 땅을 개량하고 가는 데에 더 이로웠다.

첫째, 갈지 않은 땅을 매점하는 일은 결코 아주 막히지는 않았으나 영국 식민지에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 죄어졌다. 임자마다 제 땅의 일정한 몫을 정해진 기한 안에 개량하고 갈아야 할 의무를 지우고, 그러지 못할 때에는 그 버려둔 땅을 다른 아무에게나 내줄 수 있다고 선언하는 식민지 법은, 어쩌면 아주 엄하게 시행되지는 않았어도 얼마쯤 효험이 있었다.

둘째, 펜실베이니아에는 장자 상속권이 없고 땅은 움직이는 재산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모든 자식에게 고르게 나뉜다. 뉴잉글랜드의 세 주에서는 모세 율법에서처럼 맏이가 곱절의 몫만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 주들에서 더러 어떤 한 사람이 너무 많은 땅을 매점하더라도 한두 세대 사이에 다시 넉넉히 나뉠 법하다. 참으로 다른 영국 식민지에서는 잉글랜드의 법에서처럼 장자 상속권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모든 영국 식민지에서 땅은 죄다 자유 소케지10로 지니므로 그 보유 형태가 남에게 넘기기를 쉽게 만든다. 그리고 넓은 땅을 받은 사람은 대개 그 대부분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남에게 넘기고 자기는 자그마한 면역 지대만 남겨 두는 것이 제 이익에 맞는다고 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는 어떤 명예 칭호가 딸린 큰 재산을 물려줄 때 마요라스고11라 불리는 권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재산은 죄다 한 사람에게 가고 사실상 한정 상속이 되어 남에게 넘길 수 없다. 프랑스 식민지는 참으로 파리 관습법 아래에 있는데, 그 법은 땅을 물려주는 데에서 잉글랜드의 법보다 아래 자식들에게 훨씬 더 이롭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지에서 기사 복무와 신종 선서라는 귀족식 보유로 지니는 재산의 어느 몫을 남에게 넘기면, 그것은 정해진 기한 동안 윗사람의 상속인이나 그 집안의 상속인이 도로 사들일 권리 아래에 놓인다. 그리고 그 나라의 가장 큰 재산은 모두 그러한 귀족식 보유로 지니므로 남에게 넘기는 일이 어쩔 수 없이 거추장스러워진다. 그런데 새 식민지에서 갈지 않은 큰 재산은 물려줌보다 남에게 넘김으로 훨씬 더 빨리 나뉠 법하다. 좋은 땅이 넉넉하고 헐한 것이 새 식민지가 빠르게 번성하는 주된 원인임은 이미 말한 바다. 땅을 매점하는 일은 사실상 이 넉넉함과 헐함을 없앤다. 게다가 갈지 않은 땅을 매점하는 일은 그 땅을 개량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런데 땅을 개량하고 가는 데에 쓰이는 노동은 사회에 가장 크고 가장 값진 생산물을 내준다. 이때 노동의 생산물은 제 임금과 그 노동을 부리는 자산의 이윤만이 아니라 그 노동이 쓰인 땅의 지대까지 치러 낸다. 그러므로 영국 식민지의 노동은 땅을 개량하고 가는 데에 더 많이 쓰이므로, 땅을 매점하는 탓에 얼마쯤 다른 쓰임으로 돌려지는 다른 세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의 노동보다도 더 크고 더 값진 생산물을 내줄 법하다.

셋째, 영국 식민지 사람들의 노동은 더 크고 더 값진 생산물을 내줄 법할 뿐 아니라, 그들의 세금이 가벼운 덕에 이 생산물의 더 큰 몫이 그들 자신의 것이 되고, 그들은 그것을 쌓아 두었다가 더욱 많은 양의 노동을 움직이는 데에 쓸 수 있다. 영국 식민지 사람들은 본국을 지키는 데에도 본국의 민간 통치를 떠받치는 데에도 아직 아무것도 내놓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 자신이 이제까지 거의 온통 본국의 비용으로 지켜져 왔다. 그런데 함대와 군대에 드는 비용은 민간 통치에 반드시 드는 비용보다 견줄 수 없을 만큼 크다. 제 민간 통치에 드는 비용은 언제나 아주 가벼웠다. 그것은 대개 총독과 판사와 그 밖의 몇몇 행정 관리에게 알맞은 봉급을 주고 가장 쓸모 있는 공공사업 몇 가지를 건사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에 머물렀다. 매사추세츠 베이의 민간 통치 기구에 드는 비용은 지금의 소란12이 일어나기 앞서 한 해에 1만 8000파운드13쯤에 지나지 않았다. 뉴햄프셔와 로드아일랜드는 저마다 3500파운드, 코네티컷은 4000파운드, 뉴욕과 펜실베이니아는 저마다 4500파운드, 뉴저지는 1200파운드, 버지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저마다 8000파운드였다. 노바스코샤와 조지아의 민간 통치 기구는 의회가 해마다 주는 돈으로 얼마쯤 떠받쳐진다. 그러나 노바스코샤는 그 밖에도 식민지의 공공 비용으로 한 해에 7000파운드쯤을 내고 조지아는 2500파운드쯤을 낸다. 한마디로 북아메리카의 온갖 민간 통치 기구는, 정확한 셈을 얻지 못한 메릴랜드와 노스캐롤라이나의 것을 빼면, 지금의 소란이 일어나기 앞서 주민들에게 한 해 6만 4700파운드 넘게 들지 않았다. 300만 명이 다스려질 뿐 아니라 잘 다스려지는 데에 얼마나 적은 비용이 드는지를 보여 주는, 길이 기억할 만한 보기다. 참으로 통치 비용에서 가장 중요한 몫인 방어와 보호의 비용은 줄곧 본국이 떠맡았다. 식민지에서 민간 통치의 의례, 곧 새 총독을 맞을 때나 새 의회를 열 때 따위의 의례도 넉넉히 점잖기는 하나 돈이 많이 드는 호사나 행렬이 따르지 않는다. 그들의 교회 다스림도 그만큼 검소한 틀로 꾸려진다. 십일조는 그들 사이에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결코 수가 많지 않은 그들의 성직자는 웬만한 봉급으로든 사람들이 스스로 내는 헌금으로든 살아간다. 그와 달리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힘은 제 식민지에 매긴 세금에서 얼마쯤 받침을 얻는다. 프랑스는 참으로 제 식민지에서 제법 큰 세입을 끌어낸 적이 없으니, 거기에 매기는 세금을 대개 그곳에서 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나라의 식민지 통치는 모두 훨씬 더 넓게 뻗은 틀로 꾸려지고 훨씬 더 돈이 많이 드는 의례가 따른다. 이를테면 페루의 새 부왕을 맞는 데에 쓴 돈은 흔히 엄청났다. 그러한 의례는 넉넉한 식민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리에서 무는 참된 세금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자리에서도 허영과 낭비의 버릇을 그들 사이에 들여놓는 노릇을 한다. 그것은 이따금 무는 아주 괴로운 세금일 뿐 아니라 같은 종류의 더욱 괴로운 세금, 곧 사사로운 사치와 헤픔이라는 망하게 하는 세금을 끊임없이 무는 것으로 자리 잡게 만든다. 그 세 나라의 식민지에서는 교회 다스림도 더없이 짓누른다. 그 모두에 십일조가 자리 잡고 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는 더없이 모질게 걷힌다. 게다가 그 모두가 수많은 탁발 수도사 무리에 짓눌려 있는데, 그들의 구걸은 종교가 허락했을 뿐 아니라 거룩하게 만들어 준 것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없이 괴로운 세금이 된다. 그 가난한 사람들은 주는 것이 의무이고 그들에게 자선을 거절하는 것이 아주 큰 죄라고 더없이 꼼꼼하게 배운다. 이 모든 것에 더하여 그 모두에서 성직자가 가장 큰 땅 매점꾼이다.

넷째, 남는 생산물, 곧 제 소비를 넘고 남는 것을 처분하는 데에서 영국 식민지는 유럽 다른 어느 나라의 식민지보다도 더 좋은 대접을 받았고 더 넓은 시장을 허락받았다. 유럽의 나라는 저마다 제 식민지의 장사를 제 것으로 독점하려고 얼마쯤 애써 왔고, 그런 까닭에 외국 배가 식민지와 거래하는 것을 막았으며 식민지가 어느 외국에서든 유럽 물건을 들여오는 것도 막았다. 그러나 이 독점을 휘두른 모양은 나라마다 아주 달랐다.

어떤 나라들은 제 식민지의 장사 전부를 배타적 특권 회사에 넘겨주었는데, 식민지 사람들은 저희가 바라는 유럽 물건을 죄다 그 회사에서 사야 했고 남는 생산물을 죄다 그 회사에 팔아야 했다. 그러므로 회사의 이익은 앞의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비싸게 팔고 뒤의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헐하게 사는 데에만 있지 않고, 이 헐한 값에라도 유럽에서 아주 비싼 값에 처분할 수 있는 만큼보다 더 많이 사들이지 않는 데에도 있었다. 어느 경우에나 식민지의 남는 생산물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었을 뿐 아니라, 여러 경우에 그 양이 저절로 느는 것을 막고 눌러 두는 것도 그들의 이익이었다. 새 식민지가 저절로 자라나는 것을 오그라뜨리려고 꾸며 낼 수 있는 온갖 수 가운데 배타적 특권 회사라는 수가 틀림없이 가장 잘 듣는다. 그런데 이것이 네덜란드의 정책이었으니, 다만 그들의 회사는 이번 세기에 들어와 여러 면에서 제 배타 특권을 휘두르기를 그만두었다. 이것은 또한 지난 국왕의 치세까지 덴마크의 정책이기도 했다. 그것은 이따금 프랑스의 정책이기도 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1755년부터, 다른 모든 나라가 터무니없다는 까닭으로 그것을 버린 뒤에, 그것이 포르투갈의 정책이 되었으니 적어도 브라질의 주요한 두 주인 페르남부쿠와 마라냥에 대하여 그러하다.

다른 나라들은 배타적 특권 회사를 세우지는 않았으나 제 식민지의 장사 전부를 본국의 어느 한 항구에 묶어 두었고, 그곳에서는 선단을 이루어 정해진 철에 떠나는 배가 아니면, 또는 홀로 떠나는 배라면 따로 받은 면허에 따르는 배가 아니면 떠날 수 없었는데 그 면허는 대개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참으로 본국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식민지 거래를 열어 주기는 했으니, 다만 마땅한 항구에서 마땅한 철에 마땅한 배로 거래해야 했다. 그러나 그 면허받은 배를 꾸리려고 제 자산을 한데 모은 여러 상인은 서로 짜고 움직이는 것이 제 이익에 맞는다고 보았을 터이므로, 이렇게 꾸려 간 거래는 어쩔 수 없이 배타적 특권 회사의 거래와 거의 같은 원리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 상인들의 이윤도 거의 똑같이 터무니없고 짓누르는 것이었을 터이다. 식민지는 물건을 제대로 대어 받지 못하고 아주 비싸게 사고 아주 헐하게 팔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몇 해 전까지 줄곧 스페인의 정책이었다. 그에 따라 스페인령 서인도에서는 온갖 유럽 물건의 값이 엄청났다고 한다. 키토에서는 쇠 1파운드(무게)가 4실링 6펜스쯤에, 강철 1파운드(무게)가 스털링으로 6실링 9펜스쯤에 팔렸다고 우요아가 우리에게 일러 준다. 그런데 식민지가 제 생산물을 내놓는 것은 주로 유럽 물건을 사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한쪽에 더 많이 치를수록 다른 쪽으로 실제로 받는 것은 더 적어지니, 한쪽이 비싼 것은 다른 쪽이 헐한 것과 같은 일이다. 이 점에서 포르투갈의 정책은 페르남부쿠와 마라냥을 뺀 제 모든 식민지에 대하여 스페인의 옛 정책과 같다. 그리고 그 둘에 대해서는 요즈음 더욱 나쁜 정책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나라들은 제 식민지의 거래를 제 백성 모두에게 자유롭게 열어 두어, 그들이 본국의 여러 항구 어디에서나 그 거래를 꾸려 갈 수 있게 하고 세관의 예사로운 서류 말고는 어떤 면허도 필요하지 않게 한다. 이럴 때에는 거래인의 수가 많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므로 그들이 두루 미치는 단합을 이루기가 될 수 없고, 그들 사이의 겨룸만으로도 그들이 아주 터무니없는 이윤을 남기지 못하게 막기에 넉넉하다. 그토록 너그러운 정책 아래에서 식민지는 제 생산물을 팔 수도 있고 유럽의 물건을 알맞은 값에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 식민지가 아직 갓난아이와 같던 시절에 플리머스 회사가 없어진 뒤로 이것이 줄곧 잉글랜드의 정책이었다. 그것은 대체로 프랑스의 정책이기도 했고, 잉글랜드에서 흔히 미시시피 회사라 부르는 것이 없어진 뒤로는 한결같이 그러했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제 식민지와 하는 거래의 이윤은, 다른 모든 나라에 겨룸이 열려 있을 때보다 틀림없이 얼마쯤 높기는 하나 결코 터무니없지는 않다. 그에 따라 유럽 물건의 값은 그 두 나라 어느 쪽의 식민지에서도 대부분의 곳에서 터무니없이 높지는 않다.

남는 생산물을 내보내는 데에서도 영국 식민지가 본국의 시장에 묶여 있는 것은 어떤 상품에 대해서만이다. 이 상품들은 항해법14과 그 뒤에 나온 몇몇 법에 이름이 하나하나 적혔으므로 그런 까닭에 열거 상품이라 불렸다. 나머지는 열거되지 않은 상품이라 불리며 다른 나라로 곧바로 내보낼 수 있는데, 다만 영국 배나 개척지 배로 실어 가야 하고 그 배는 임자와 뱃사람의 4분의 3이 영국 백성이어야 한다.

열거되지 않은 상품 가운데에는 아메리카와 서인도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생산물 몇 가지가 들어 있으니, 온갖 종류의 곡물과 재목과 소금에 절인 식료품과 물고기와 설탕과 럼이다.

곡물은 모든 새 식민지가 가꾸는 첫째가는 주된 것이 되기 마련이다. 법은 그것에 아주 넓은 시장을 열어 줌으로써 식민지 사람들이 이 가꿈을 사람이 드문 나라의 소비를 훨씬 넘어서까지 넓히도록, 그리하여 끊임없이 늘어나는 사람들을 위한 넉넉한 생계를 미리 마련해 두도록 북돋운다.

온통 숲으로 덮여 있어 나무가 값어치가 거의 또는 아예 없는 나라에서는 땅을 일구는 비용이 개량에 가장 큰 걸림돌이다. 법은 식민지의 재목에 아주 넓은 시장을 열어 줌으로써, 그러지 않았더라면 값어치가 거의 없었을 상품의 값을 올리고 그리하여 그러지 않았더라면 비용에 지나지 않았을 것에서 얼마쯤 이윤을 내게 해 주어 개량을 쉽게 만들려고 애쓴다.

사람도 절반쯤밖에 살지 않고 땅도 절반쯤밖에 갈리지 않은 나라에서는 짐승이 주민들의 소비를 넘어 저절로 불어나므로 흔히 그런 까닭에 값어치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나 땅의 대부분이 개량되려면 그에 앞서 짐승의 값이 곡물의 값에 일정한 비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이미 보인 바다. 법은 죽은 것이든 산 것이든 온갖 꼴의 아메리카 짐승에 아주 넓은 시장을 열어 줌으로써, 그 값이 비싼 것이 개량에 그토록 중요한 상품의 가치를 올리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이 자유가 내는 좋은 효과는 「조지 3세 치세 4년의 법 제15장」15 때문에 얼마쯤 줄어들 수밖에 없으니, 그 법은 짐승 가죽과 털가죽을 열거 상품에 넣어 그로써 아메리카 짐승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우리 식민지의 고기잡이를 넓혀 영국의 배와 해군의 힘을 키우는 일은 입법부가 거의 줄곧 눈여겨 온 목표인 듯하다. 그런 까닭에 그 고기잡이는 자유가 줄 수 있는 온갖 북돋움을 받았고 그에 따라 번성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뉴잉글랜드의 고기잡이는 요즈음의 소란이 일어나기 앞서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고기잡이 가운데 하나였다. 영국에서는 터무니없이 후한 장려금을 주는데도 고래잡이가 어찌나 보람 없이 꾸려지는지, 많은 사람의 의견으로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보증할 뜻이 없다) 그 온 생산물이 해마다 그것에 치르는 장려금의 가치를 그리 넘지 못한다. 그런데 그 고래잡이가 뉴잉글랜드에서는 장려금이 하나도 없이 아주 크게 꾸려진다. 물고기는 북아메리카인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지중해로 거래하는 주요한 물건 가운데 하나다.

설탕은 본디 열거 상품이어서 영국으로만 내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1751년에 설탕 개척지 임자들이 청원하자 세상 어디로든 내보내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렇지만 이 자유를 주면서 함께 건 제약에 영국에서 설탕값이 비싸다는 사정이 더해져 그 자유는 크게 힘을 잃었다. 영국과 그 식민지는 아직도 영국 개척지에서 나는 온갖 설탕의 거의 유일한 시장으로 남아 있다. 그들의 소비가 어찌나 빨리 느는지, 자메이카와 할양받은 섬들의 개량이 나아간 결과로 지난 스무 해 사이에 설탕을 들여오는 것이 아주 크게 늘었는데도 외국으로 내보내는 것은 앞서보다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럼은 아메리카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으로 꾸려 가는 거래에서 아주 중요한 물건인데, 그들은 그 갚음으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실어 온다.

아메리카에서 남는 온갖 종류의 곡물과 소금에 절인 식료품과 물고기를 죄다 열거에 넣어 그로써 영국 시장으로 억지로 몰아넣었더라면, 그것은 우리 백성의 산업이 낸 생산물과 너무 많이 부딪혔을 것이다. 그 중요한 상품들을 열거에서 빼놓았을 뿐 아니라 쌀을 뺀 온갖 곡물과 온갖 소금에 절인 식료품을 영국으로 들여오는 것을 예사로운 법의 상태에서 막아 둔 것은, 아마 아메리카의 이익을 헤아려서라기보다 이렇게 부딪히는 것을 시샘했기 때문이다.

열거되지 않은 상품은 본디 세상 어디로든 내보낼 수 있었다. 재목과 쌀은 한때 열거에 들어갔다가 뒤에 거기서 빠졌는데, 그때 유럽 시장에 대해서는 피니스테레곶 남쪽에 놓인 나라들로만 묶였다. 「조지 3세 치세 6년의 법 제52장」으로 열거되지 않은 온갖 상품이 그와 같은 제약 아래에 놓였다. 피니스테레곶 남쪽에 놓인 유럽의 여러 곳은 제조업을 하는 나라가 아니므로, 식민지 배가 그곳에서 우리 것과 부딪힐 만한 제조품을 싣고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덜 시샘한다.

열거 상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아메리카에서만 나는 생산물이거나 본국에서 날 수 없는 것, 또는 적어도 본국에서 나지 않는 것이다. 당밀과 커피와 코코야자 열매와 담배와 피멘토와 생강과 고래수염과 생사와 목화와 양모와 비버 가죽과 그 밖의 아메리카 털가죽과 인디고와 푸스틱과 그 밖의 물감 나무가 이런 종류다. 둘째는 아메리카에서만 나는 생산물은 아니어서 본국에서도 나고 날 수 있으나, 본국에서 찾는 것의 대부분을 대어 줄 만한 양으로는 나지 않아 그 대부분을 외국에서 들여오는 것이다. 온갖 선박 물자와 돛대와 활대와 이물기둥과 타르와 피치와 테레빈과 선철과 봉철과 구리 광석과 짐승 가죽과 털가죽과 잿물재와 정제한 잿물재가 이런 종류다. 첫째 종류의 상품은 아무리 많이 들여와도 본국 생산물의 어느 몫도 자라는 것을 막거나 팔리는 것과 부딪힐 수 없었다. 그것을 국내 시장에 묶어 두면 우리 상인들이 개척지에서 그것을 더 헐하게 사고 따라서 본국에서 더 나은 이윤을 남겨 팔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개척지와 외국 사이에 이로운 중계 무역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으니, 그 상품이 처음 들어가야 하는 유럽 나라로서 영국이 어쩔 수 없이 그 중심이나 집산지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 종류의 상품을 들여오는 것도, 본국에서 나는 같은 종류의 물건이 팔리는 것과 부딪히지 않고 외국에서 들여오는 물건이 팔리는 것과만 부딪히도록 다스릴 수 있으리라고 사람들은 여겼다. 알맞은 관세를 써서 그것을 언제나 앞의 것보다 얼마쯤 비싸면서도 뒤의 것보다는 꽤 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품을 국내 시장에 묶어 두어, 영국의 생산물이 아니라 무역 차액이 영국에 이롭지 않다고 믿어지던 몇몇 외국의 생산물을 막자는 것이었다.

돛대와 활대와 이물기둥과 타르와 피치와 테레빈을 식민지에서 영국 말고 다른 어느 나라로도 내보내지 못하게 막은 것은, 식민지에서 나무의 값을 내리고 따라서 그들의 땅을 일구는 비용, 곧 그들의 개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비용을 늘리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번 세기가 시작될 무렵인 1703년에 스웨덴의 피치·타르 회사가 제 배로, 제가 매긴 값으로, 제가 알맞다고 여기는 양만큼만 내보내고 그 밖에는 내보내지 못하게 막아 영국에 파는 제 상품의 값을 올리려고 했다. 이 눈에 띄는 상업 정책을 맞받고 스웨덴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북방 세력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홀로 설 수 있게 되려고, 영국은 아메리카에서 선박 물자를 들여오는 데에 장려금을 주었다. 그리고 이 장려금의 효과는 국내 시장에 묶어 둔 것이 내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게 아메리카에서 나무의 값을 올리는 것이었다. 두 규제가 같은 때에 만들어졌으므로 그 둘이 함께 낸 효과는 아메리카에서 땅을 일구는 것을 막기보다 오히려 북돋우는 것이었다.

선철과 봉철도 열거 상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아메리카에서 들여올 때에는 다른 어느 나라에서 들여올 때 물어야 하는 제법 무거운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므로, 이 규제의 한쪽이 아메리카에 용광로를 세우는 것을 북돋우는 힘이 다른 쪽이 그것을 막는 힘보다 크다. 용광로만큼 나무를 많이 쓰게 만드는 제조업도, 나무가 우거진 나라를 일구는 데에 그만큼 이바지할 수 있는 제조업도 없다.

이 규제 가운데 몇몇이 아메리카에서 나무의 가치를 올리고 그로써 땅을 일구기 쉽게 만드는 쪽으로 기운다는 것은 어쩌면 입법부가 뜻한 바도 알아차린 바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점에서 그 이로운 효과가 어쩌다 생긴 것이라 해도 그렇다고 해서 덜 참된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와 서인도에 있는 영국 식민지 사이에는 열거 상품에서나 열거되지 않은 상품에서나 더없이 온전한 거래의 자유가 허락되어 있다. 그 식민지들은 이제 사람이 많고 번성하게 되어 저마다 다른 몇몇 식민지에서 제 생산물의 온갖 몫을 위한 크고 넓은 시장을 찾아낸다. 그들을 모두 합쳐 보면 그들은 서로의 생산물을 위한 큰 내부 시장을 이룬다.

그렇지만 잉글랜드가 제 식민지의 거래에 보인 너그러움은 주로 원생산물 그대로의 생산물이나 제조의 맨 첫 단계라 할 만한 것에 있는 생산물의 시장에 관한 데에 머물렀다. 더 나아갔거나 더 다듬어진 제조품은 식민지에서 난 것을 감으로 삼은 것이라 해도 영국의 상인과 제조업자가 제 몫으로 남겨 두기를 골랐고, 그들은 입법부를 움직여 더러는 무거운 관세로 더러는 아주 금하여 그것이 식민지에 자리 잡지 못하게 막았다.

이를테면 영국 개척지에서 오는 조당은 들여올 때 1헌드레드웨이트마다 6실링 4펜스만 물면 되지만, 흰 설탕은 1파운드 1실링 1펜스를 물고, 덩이로 굳혀 두 번 거르든 한 번 거르든 정제한 설탕은 4파운드 2실링 5와 20분의 8펜스를 문다. 이 무거운 관세를 매길 때 영국은 영국 식민지의 설탕을 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시장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주된 시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처음에는 외국 시장에 내려고 설탕을 흙으로 거르거나 정제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지금은 온 생산물의 어쩌면 10분의 9가 넘게 나가는 그 시장에 내려고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에 따라 설탕을 흙으로 거르거나 정제하는 제조업은 프랑스의 모든 설탕 식민지에서 번성했으나 잉글랜드의 어느 식민지에서도 식민지 자체의 시장에 내려는 것 말고는 거의 가꾸어지지 않았다. 그레나다가 프랑스 사람들의 손에 있을 때에는 적어도 거의 모든 개척지마다 흙으로 거르는 설탕 정제소가 있었다. 그것이 잉글랜드 사람들의 손에 들어간 뒤로 이런 종류의 일터는 거의 모두 걷어치워졌고, 지금(1773년 10월)은 그 섬에 두셋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나는 확실히 들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세관이 눈감아 주어, 흙으로 거르거나 정제한 설탕도 덩이에서 가루로 바꾸어 놓으면 흔히 조당으로 들여온다.

영국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 들여올 때 같은 종류의 상품이 물어야 하는 관세를 아메리카의 선철과 봉철에는 물리지 않아 그것을 만드는 것을 북돋우면서도, 제 아메리카 개척지 어디에서든 강철 용광로와 쇠를 째는 공장을 세우는 것은 아주 금한다. 영국은 제 식민지가 그 더 다듬어진 제조품을 제 소비를 위해서라도 만드는 것을 참아 주지 않고, 그런 종류의 물건 가운데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죄다 영국의 상인과 제조업자에게서 사라고 다그친다.

영국은 아메리카에서 난 모자와 양모와 모직물을 한 주에서 다른 주로 물길로 내보내는 것을 막고, 말 등에 싣거나 수레에 실어 뭍길로 옮기는 것까지 막는다. 이 규제는 멀리 내다 팔려고 그러한 상품을 만드는 제조업이 자리 잡는 것을 톡톡히 막아 내며, 이런 길로 제 식민지 사람들의 산업을 한 집안이 흔히 제 쓰임에나 같은 주에 사는 몇몇 이웃의 쓰임에 맞추어 만드는, 거칠고 집에서 만드는 제조품에 묶어 둔다.

그렇지만 큰 백성에게 제 생산물의 어느 몫으로든 만들 수 있는 것을 죄다 만들지 못하게 막거나, 제 자산과 근면을 스스로 가장 이롭다고 판단하는 데에 쓰지 못하게 막는 것은 사람이 지닌 더없이 거룩한 권리를 뻔히 어기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금함이 옳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제까지 식민지를 크게 해치지는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땅이 아직 아주 헐하고 따라서 노동이 아주 비싸므로, 더 다듬어지거나 더 나아간 제조품은 거의 모두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보다 헐하게 본국에서 들여올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제조업을 세우는 것이 금지되지 않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개량의 상태에서는 제 이익을 헤아려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개량의 상태에서 그 금함은 어쩌면 그들의 산업을 옥죄지도 않고 저절로 갔을 어떤 쓰임에서 그것을 막지도 않으니, 본국 상인과 제조업자의 터무니없는 시샘이 넉넉한 까닭도 없이 그들에게 씌운 주제넘은 종살이의 표지일 뿐이다. 더 나아간 상태에서라면 그것이 참으로 짓누르고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영국은 또한 식민지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생산물 몇 가지를 제 시장에 묶어 두는 대신 그 값으로 그 가운데 몇몇에게 그 시장에서 이점을 주는데, 더러는 같은 종류의 생산물을 다른 나라에서 들여올 때 더 무거운 관세를 매김으로써 그렇게 하고, 더러는 식민지에서 들여오는 데에 장려금을 줌으로써 그렇게 한다. 앞의 길로는 제 식민지의 설탕과 담배와 쇠에 국내 시장에서 이점을 주고, 뒤의 길로는 그들의 생사와 삼과 아마와 인디고와 선박 물자와 집 지을 나무에 이점을 준다. 들여오는 데에 장려금을 주어 식민지 생산물을 북돋우는 이 뒤의 길은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한 영국에만 있는 것이나, 앞의 길은 그렇지 않다. 포르투갈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 담배를 들여오든 더 무거운 관세를 매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없이 엄한 벌로 그것을 금한다.

유럽에서 물건을 들여오는 데에서도 잉글랜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제 식민지를 너그럽게 다루었다.

영국은 외국 물건을 들여올 때 문 관세의 한 몫, 거의 언제나 절반이고 대개 그보다 큰 몫이며 더러는 전부를, 그것을 어느 외국으로든 내보낼 때 되돌려 받도록 허락한다. 거의 모든 외국 물건이 영국으로 들여올 때 지는 그 무거운 관세를 짊어진 채 온다면 독립한 어느 외국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내보낼 때 그 관세의 얼마쯤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중계 무역, 곧 중상주의 체계가 그토록 아끼는 그 무역은 끝장이었다.

그렇지만 우리 식민지는 결코 독립한 외국이 아니다. 그리고 영국은 유럽에서 오는 온갖 물건을 식민지에 대어 줄 배타 권리를 제 것으로 삼았으므로, (다른 나라들이 제 식민지에 한 것과 똑같이) 본국에서 물던 것과 똑같은 관세를 죄다 짊어진 채로 그 물건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달리 1763년까지는 외국 물건 대부분을 우리 식민지로 내보낼 때에도 독립한 어느 외국으로 내보낼 때와 똑같은 관세 환급이 치러졌다. 참으로 1763년에 「조지 3세 치세 4년의 법 제15장」으로 이 너그러움이 꽤 줄어들어, "유럽이나 동인도에서 자라거나 나거나 만들어진 물건으로서 이 왕국에서 아메리카에 있는 영국 식민지나 개척지로 내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구보조세라 불리는 관세의 어느 몫도 되돌려 주지 않는다. 다만 포도주와 흰 옥양목과 모슬린은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정해졌다. 이 법이 나오기 앞서는 여러 종류의 외국 물건을 본국에서보다 개척지에서 더 헐하게 살 수 있었고, 더러는 아직도 그럴 것이다.

식민지 거래에 관한 규제 대부분에서 그 거래를 꾸려 가는 상인들이 주된 조언자였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 큰 몫에서 식민지의 이익보다도 본국의 이익보다도 그들의 이익이 더 헤아려졌다 해도 우리는 놀랄 것이 없다. 식민지가 유럽에서 바라는 온갖 물건을 식민지에 대어 주고, 남는 생산물 가운데 자기들이 본국에서 꾸려 가는 어느 거래와도 부딪히지 않을 몫을 죄다 사들이는 그 배타 특권에서, 식민지의 이익이 그 상인들의 이익에 바쳐졌다. 유럽과 동인도의 물건 대부분을 식민지로 되내보낼 때 독립한 어느 나라로 되내보낼 때와 똑같은 관세 환급을 허락한 데에서는, 본국의 이익이 상업의 생각으로 본 그 이익의 잣대로 보더라도 거기에 바쳐졌다. 식민지로 보내는 외국 물건에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치르고 따라서 영국으로 들여올 때 먼저 낸 관세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되돌려 받는 것이 상인들의 이익이었다. 그로써 그들은 같은 양의 물건을 더 큰 이윤으로 팔거나 더 많은 양을 같은 이윤으로 식민지에서 팔 수 있었을 터이고, 따라서 이 길로든 저 길로든 얼마쯤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물건을 죄다 될 수 있는 대로 헐하게, 될 수 있는 대로 넉넉하게 얻는 것은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이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나 본국의 이익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국은 흔히 세입에서 손해를 보았을 터이니 그러한 물건을 들여올 때 문 관세의 큰 몫을 되돌려 주었기 때문이고, 또 제조업에서도 손해를 보았을 터이니 그 관세 환급 덕에 외국 제조품이 손쉬운 조건으로 그곳에 실려 가 식민지 시장에서 값이 깎여 밀렸기 때문이다. 영국 아마포 제조업이 나아가는 걸음이 독일 아마포를 아메리카 식민지로 되내보낼 때 주는 관세 환급 탓에 꽤 늦추어졌다고 흔히들 말한다.

그러나 제 식민지의 거래에 관한 영국의 정책이 다른 나라들의 정책과 똑같은 상업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기는 해도, 그것은 대체로 그 어느 나라의 정책보다 덜 옹색하고 덜 짓누르는 것이었다.

외국 거래를 뺀 모든 일에서 영국 식민지 사람들이 제 일을 제 뜻대로 꾸려 갈 자유는 온전하다. 그것은 모든 점에서 본국에 있는 제 동포 시민의 자유와 같고, 식민지 통치를 떠받칠 세금을 매길 권리를 홀로 지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표가 모인 의회로 똑같이 지켜진다. 이 의회의 권위는 집행권을 눌러 놓는다. 그리고 아무리 보잘것없는 식민지 사람도 아무리 미움받는 식민지 사람도 법을 지키는 한, 총독의 노여움도 그 주에 있는 다른 어느 문관이나 무관의 노여움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식민지 의회는 잉글랜드의 하원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사람들을 아주 고르게 대표하지는 않으나 그 성격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다. 그리고 집행권에는 그들을 물들일 수단이 없거나, 본국에서 받는 받침 덕에 그렇게 할 까닭이 없으므로, 그들은 어쩌면 대체로 저를 뽑아 준 이들의 뜻에 더 많이 움직인다. 식민지 입법부에서 영국의 상원에 맞먹는 참사회는 세습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뉴잉글랜드의 세 통치체에서 그러하듯 몇몇 식민지에서는 그 참사회를 국왕이 뽑지 않고 사람들의 대표가 뽑는다. 영국 식민지 어디에도 세습 귀족은 없다. 참으로 그 모두에서 다른 모든 자유로운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래된 식민지 집안의 자손이 같은 값어치와 재산을 지닌 벼락출세한 사람보다 더 우러름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그는 더 우러름을 받을 뿐이고 이웃을 성가시게 할 만한 특권은 지니지 않는다. 지금의 소란이 일어나기 앞서 식민지 의회는 입법권만이 아니라 집행권의 한 몫도 지니고 있었다. 코네티컷과 로드아일랜드에서는 그들이 총독을 뽑았다. 다른 식민지에서는 그들이 세금 걷는 관리를 임명했는데, 그 관리들은 저마다의 의회가 매긴 세금을 걷었고 그 의회에 곧바로 책임을 졌다. 그러므로 영국 식민지 사람들 사이에는 본국 주민들 사이에서보다 고름이 더 크다. 그들의 풍습은 더 공화국다우며, 그들의 통치도, 그 가운데에서도 뉴잉글랜드 세 주의 통치는 이제까지 더 공화국다웠다.

주

  1. 1. 옮긴이 — 저본은 이 자리를 "sewn"으로 찍었으나 앞뒤로 보아 "seem"이다. 이 장의 저본에는 그 밖에도 "Waiter Raleigh"(Walter), "the greater past of the colonies"(part), "imported front any other country"(from), "£18;000"(£18,000), "more re publican"(republican)처럼 뜻이 통하지 않는 자리가 있다. 모두 뜻이 통하는 쪽으로 옮겼다.

  2. 2. 옮긴이 — 모도시는 그리스 식민을 내보낸 본디 도시를 말한다. 스미스는 이것을 본국(mother country)과 갈라 쓴다. 그리스의 식민지는 모도시에서 정치로 독립해 있었고, 로마의 식민지는 모도시의 판도 안에 있었다.

  3. 3. 옮긴이 — 유게룸은 로마의 땅 단위로 한 쌍의 소가 하루에 갈 수 있는 넓이에서 나왔다. 500유게라는 스미스의 셈대로 영국 에이커로 350에이커쯤이다.

  4. 4. 옮긴이 — 이 자리의 corporation 은 길드를 뜻하는 동업조합이 아니라, 제 내규를 만들 수 있으나 상위의 법 아래에 놓인 자치 단체를 말한다. 이 책에서 그 낱말은 대개 동업조합으로 옮기나 여기서는 문맥이 다른 것을 가리킨다.

  5. 5. 옮긴이 — 스미스가 쓴 Indian corn 은 아메리카의 마이즈, 곧 강냉이다. 이 책에서 corn 은 거의 언제나 곡물 일반, 특히 밀을 가리키므로 이 자리만 갈라 적는다.

  6. 6. 옮긴이 — 18세기 유럽의 저술이 농경과 문자와 국가 조직을 갖추지 않았다고 본 사회를 가리켜 쓰던 말이다. 스미스는 이 책에서 사냥하는 사회, 짐승을 치는 사회, 농사짓는 사회, 상업하는 사회의 네 단계로 사회를 나누어 본다.

  7. 7. 옮긴이 — 크리오요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계 사람을 가리킨다. 본국에서 건너온 사람과도, 원주민이나 혼혈과도 갈라 부르던 말이다.

  8. 8. 옮긴이 — 미시시피 계획은 스코틀랜드 사람 존 로(1671~1729)가 프랑스에서 벌인 일로, 루이지애나 개발을 내건 회사의 주권과 지폐를 함께 부풀렸다가 1720년에 무너졌다. 잉글랜드에서는 흔히 미시시피 회사라 불렀다.

  9. 9. 옮긴이 — 지난 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의 7년 전쟁을 말한다.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캐나다와 미시시피 동쪽 땅을, 그리고 서인도의 몇몇 섬을 영국에 넘겼다.

  10. 10. 옮긴이 — 자유 소케지는 잉글랜드의 토지 보유 형태 가운데 하나로, 기사로서 복무할 의무 대신 일정한 지대나 정해진 봉사를 무는 보유다. 군역이 따르는 귀족식 보유보다 남에게 넘기기가 쉬웠다.

  11. 11. 옮긴이 — 마요라스고는 스페인의 한정 상속 제도로, 재산을 나누거나 팔지 못하게 묶어 한 사람에게 고스란히 물려주는 것이다.

  12. 12. 옮긴이 — 지금의 소란은 1775년에 무장 충돌로 번진 아메리카 식민지와 본국의 다툼을 가리킨다. 이 책은 1776년 3월에 나왔다.

  13. 13. 옮긴이 — 이 책의 화폐는 파운드·실링·펜스다. 1파운드는 20실링이고 1실링은 12펜스이므로 1파운드는 240펜스다. 저본이 4s:6d. 꼴로 적은 것은 4실링 6펜스다. 오늘날 값으로는 환산하지 않는다. 스미스의 논증은 절대액이 아니라 비율에 걸려 있다.

  14. 14. 옮긴이 — 항해법은 1651년과 1660년에 자리 잡은 잉글랜드의 법으로, 식민지의 물건을 영국 배로만 실어 나르게 하고 어떤 상품은 본국으로만 내보내게 묶었다. 이 책 4편 2장에서 스미스가 따로 다룬다.

  15. 15. 옮긴이 — 영국의 법령은 국왕이 왕위에 오른 뒤 몇 해째에 만들어졌는지와 그 회기의 몇째 장인지로 가리킨다. 조지 3세는 1760년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 치세 4년은 1763년에서 1764년에, 치세 6년은 1765년에서 1766년에 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