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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부론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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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주권자 곧 국가의 비용에 대하여 (이어서)

저마다의 법정에서 벌어지는 소송 절차에 인지세를 매겨 그 법정이 스스로 거두고 거기에 딸린 재판관과 그 밖의 관원을 먹여 살리는 데에 쓴다면, 그것 또한 사회의 일반 세입에 아무런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사법 행정의 비용을 대기에 넉넉한 수입을 내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이 경우에 재판관들은 그러한 인지세에서 나오는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늘리려고 사건마다 절차를 쓸데없이 불리려는 유혹에 놓일지도 모른다. 요사이 유럽에서는 대개의 경우에 변호사와 법정 서기가 받을 삯을 그들이 써야 했던 쪽수에 따라 정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다만 법정은 한 쪽에 몇 줄이 들어가고 한 줄에 몇 낱말이 들어가야 하는지를 정해 두었다. 제가 받을 삯을 늘리려고 변호사와 서기는 조금도 필요하지 않은 데까지 낱말을 불리는 재주를 부려 왔고, 그리하여 내가 믿기로는 유럽의 모든 법정에서 법률 용어가 썩어 버렸다. 이와 비슷한 유혹이 어쩌면 소송 절차의 꼴에서도 이와 비슷한 썩음을 불러올지 모른다.

그러나 사법 행정이 제 비용을 스스로 대도록 짜이든, 아니면 재판관이 어떤 다른 기금에서 나오는 정해진 봉급으로 먹고살든, 집행권을 맡은 사람 또는 사람들이 그 기금을 꾸리는 일이나 그 봉급을 치르는 일까지 떠맡아야 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1 그 기금은 토지 재산의 지대에서 나올 수도 있을 터인데, 그 경우 재산 하나하나를 꾸리는 일은 그것으로 먹고살 바로 그 법정에 맡기면 된다. 그 기금은 어떤 목돈의 이자에서 나올 수도 있을 터인데, 그 돈을 빌려주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것으로 먹고살 법정에 맡기면 된다. 스코틀랜드 민사 대법정 재판관들의 봉급 가운데 얼마가, 참으로 아주 적은 몫이기는 하나, 어떤 목돈의 이자에서 나온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기금이 반드시 지니게 마련인 흔들림은, 영원히 이어져야 할 기관을 떠받치기에 그것을 마땅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듯하다.

사법권이 집행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본디 사회가 나아짐에 따라 그 일거리가 늘어난 데에서 비롯한 듯하다. 사법 행정은 어찌나 힘들고 얽힌 직무가 되었던지 그것을 맡은 사람이 온 마음을 거기에만 쏟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집행권을 맡은 사람은 사사로운 사건을 판결하는 데에 제 손으로 마음을 쓸 겨를이 없었으므로, 그를 대신해 그것을 판결하도록 대리인을 세웠다. 로마가 커 가는 동안 집정관은 나라의 정치 일로 너무 바빠 사법 행정에 마음을 쓸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를 대신해 그것을 맡아볼 법무관을 세웠다. 로마 제국의 잔해 위에 세워진 유럽 여러 군주국이 나아가는 동안, 주권자와 큰 영주들은 어디서나 사법 행정을 제 손으로 하기에는 너무 힘들고 너무 천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디서나 대리인이나 집행리나 재판관을 세워 그 일에서 제 몸을 벗어 놓았다.

사법권이 집행권과 하나로 묶이면, 흔히 정치라 부르는 것에 정의가 자주 제물로 바쳐지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라의 큰 이해를 맡은 사람들은 썩은 속셈이 조금도 없더라도 어떤 때에는 그 이해를 위하여 사사로운 사람의 권리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사람 하나하나의 자유는, 곧 제 몸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그 느낌은 치우치지 않은 사법 행정에 달려 있다. 사람마다 저에게 딸린 온갖 권리를 지니고 있음에 대하여 제 몸이 아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려면, 사법권이 집행권에서 갈라져 나오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그것이 될 수 있는 대로 그 권력에서 벗어나 홀로 서게 하여야 한다. 재판관은 그 권력의 변덕에 따라 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의 봉급이 제때 나오는 것이 그 권력의 호의에, 아니 그 권력의 살림 솜씨에조차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3절 — 공공 사업과 공공 기관의 비용에 대하여

주권자 곧 국가의 셋째이자 마지막 직무는, 큰 사회에는 더없이 이로울지 몰라도 그 성질로 보아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에게는 그 이윤이 그 비용을 결코 갚아 줄 수 없고 따라서 어느 한 사람이나 몇몇 사람이 그것을 세우거나 떠받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그러한 공공 기관과 공공 사업을 세우고 떠받치는 일이다. 게다가 이 직무를 해내는 데에도 사회의 시기마다 아주 다른 크기의 비용이 든다.

사회를 지키는 데에 필요한 공공 기관과 공공 사업, 그리고 사법 행정에 필요한 그것은 앞에서 이미 말하였으니, 이 갈래에 드는 나머지 사업과 기관은 주로 사회의 상업을 돕기 위한 것과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다. 가르치기 위한 기관에는 두 갈래가 있으니, 젊은이를 교육하기 위한 것과 온갖 나이의 사람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갈래의 공공 사업과 기관에 드는 비용을 어떻게 대는 것이 가장 마땅한가를 따지는 일이 이 장의 셋째 절을 세 항으로 가를 것이다.

1항 — 사회의 상업을 돕는 공공 사업과 기관에 대하여

그리고 먼저, 상업 일반을 돕는 데에 필요한 것에 대하여

좋은 길이나 다리나 배가 다니는 운하나 항구 따위처럼 어느 나라의 상업을 돕는 공공 사업을 세우고 떠받치는 데에 사회의 시기마다 아주 다른 크기의 비용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뚜렷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공공 도로를 내고 떠받치는 비용은 그 나라 토지와 노동의 한 해 생산물과 더불어, 곧 그 길 위로 실어 가고 실어 와야 하게 되는 물건의 양과 무게와 더불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다리의 튼튼함은 그 위를 지나기 쉬운 수레의 수와 무게에 알맞아야 한다. 배가 다니는 운하의 깊이와 물을 대는 양은 그 위로 물건을 나르기 쉬운 거룻배의 수와 톤수에 어울려야 하고, 항구의 넓이는 그 안에 몸을 피하기 쉬운 배의 수에 어울려야 한다.

그러한 공공 사업의 비용을 흔히 공공 세입이라 부르는 것, 곧 대부분의 나라에서 거두고 쓰는 일이 집행권에 맡겨져 있는 그것에서 대어야 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 그러한 공공 사업은 그 대부분이 사회의 일반 세입에 아무런 짐도 지우지 않으면서 제 비용을 대기에 넉넉한 별도의 수입을 내어 주도록 손쉽게 꾸려질 수 있다.

이를테면 큰길과 다리와 배가 다니는 운하는 대개의 경우 그것을 쓰는 수레에 매기는 적은 통행료로 내기도 하고 떠받치기도 할 수 있으며, 항구는 그 안에서 짐을 싣고 부리는 배의 톤수에 매기는 알맞은 항구세로 그럴 수 있다. 상업을 돕는 또 하나의 기관인 화폐 주조는 많은 나라에서 제 비용을 댈 뿐만 아니라 주권자에게 적은 세입, 곧 주조 수수료까지 내어 준다. 같은 목적을 지닌 또 하나의 기관인 우편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제 비용을 대고도 남아 주권자에게 아주 제법 큰 세입을 내어 준다.

큰길이나 다리 위를 지나는 수레와 배가 다니는 운하 위를 떠가는 거룻배가 제 무게나 톤수에 따라 통행료를 치를 때, 그들은 저희가 그 공공 사업에 입히는 닳고 해어짐에 꼭 맞추어 그것을 떠받치는 값을 치르는 셈이다. 그러한 사업을 떠받치는 데에 이보다 더 공평한 길을 생각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게다가 이 세 또는 통행료는 짐 나르는 이가 먼저 내놓기는 하여도 마침내는 물건 쓰는 이가 치르는데, 그것이 언제나 물건 값에 얹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공공 사업 덕분에 나르는 비용이 아주 많이 줄어들므로, 통행료를 물더라도 물건은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물건 쓰는 이에게 헐하게 이르니, 통행료 때문에 값이 오르는 것보다 나르는 값이 싸져서 값이 내리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침내 이 세를 치르는 사람은 그것을 치름으로써 잃는 것보다 그 쓰임에서 얻는 것이 더 많다. 그가 치르는 것은 그가 얻는 것에 꼭 맞추어져 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나머지를 얻으려고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 얻음의 한 조각일 뿐이다. 세를 걷는 길 가운데 이보다 더 공평한 것은 떠올릴 수 없을 듯하다. 마차나 역마차 따위처럼 사치를 위한 수레에 매기는 통행료를 짐수레나 큰 짐수레 따위처럼 꼭 있어야 할 수레에 매기는 것보다 그 무게에 견주어 얼마쯤 높게 매기면, 무거운 물건을 나라 곳곳으로 나르는 값을 싸게 함으로써 부자의 게으름과 허영이 아주 손쉽게 가난한 이를 돕는 데에 한몫을 하게 된다.

큰길과 다리와 운하 따위가 이처럼 그것을 빌려 이루어지는 상업으로 만들어지고 떠받쳐지면, 그것은 그 상업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에만, 따라서 그것을 만드는 것이 마땅한 곳에만 만들어질 수 있다. 게다가 그 비용도, 그 크고 으리으리함도 그 상업이 치를 수 있는 만큼에 알맞아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만드는 것이 마땅한 대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상업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쓸쓸한 고장에, 또는 그저 그 길이 마침 지방 감독관의 시골 별장이나 그 감독관이 비위를 맞추기에 좋다고 여기는 어떤 큰 영주의 별장으로 이어진다는 까닭으로 으리으리한 큰길을 낼 수는 없다. 아무도 건너지 않는 자리에, 또는 그저 이웃한 궁전의 창에서 내다보는 경치를 꾸미려고 강 위에 큰 다리를 놓을 수는 없다. 이러한 일은 이 갈래의 사업이 그것 스스로 내어 줄 수 있는 수입이 아닌 다른 세입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에서 이따금 벌어진다.

유럽의 여러 곳에서 운하에 매기는 통행료 또는 갑문세는 사사로운 사람들의 재산이며, 그들의 사사로운 이해가 그들로 하여금 그 운하를 건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 웬만한 꼴로 건사되지 않으면 배가 다니는 일이 아주 그치고, 그와 더불어 그들이 통행료로 얻을 수 있는 이윤도 몽땅 그친다. 그 통행료를 그것에 아무 이해도 걸려 있지 않은 관리 위원들의 손에 맡긴다면, 그들은 그 통행료를 낳는 사업을 건사하는 데에 마음을 덜 쓸지도 모른다. 랑그도크운하는 프랑스 국왕과 그 지방에 1,300만 리브르 넘게 들었는데, 이는 (은 1마르크에 28리브르로 쳐서, 곧 지난 세기 끝 무렵 프랑스 화폐의 값으로 쳐서) 90만 파운드 스털링이 넘는 액수였다.2 그 큰 사업이 끝났을 때, 그것을 늘 손보아 두는 가장 있음 직한 길은 그 사업을 꾸미고 이끈 기사 리케에게 그 통행료를 선물로 주는 것임이 드러났다. 그 통행료는 지금 그 사람의 집안 여러 갈래에 아주 큰 재산을 이루고 있으니, 따라서 그들에게는 그 사업을 늘 손보아 둘 큰 이해가 걸려 있다. 그러나 그 통행료가 그러한 이해가 걸려 있지 않은 관리 위원들의 손에 맡겨졌더라면, 어쩌면 그것은 겉치레에 쓰이는 쓸데없는 비용으로 흩어져 버리고 그 사업에서 가장 요긴한 곳은 무너지도록 내버려졌을지도 모른다.

큰길을 떠받치기 위한 통행료는 사사로운 사람들의 재산으로 삼아서는 결코 안전하지 않다. 큰길은 아주 내버려 두어도 아예 지날 수 없게 되지는 않으나 운하는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큰길의 통행료를 지닌 임자들은 그 길을 손보는 일을 아주 내버려 두고도 거의 같은 통행료를 계속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업을 떠받치기 위한 통행료는 관리 위원이나 수탁 관리인의 손에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영국에서는 그러한 통행료를 꾸리면서 수탁 관리인들이 저지른 남용을 두고 많은 경우에 아주 마땅한 불평이 나왔다. 여러 유료 도로 관문에서 거두는 돈이 해야 할 일을 더없이 온전하게 해내는 데에 필요한 것의 곱절이 넘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일은 흔히 아주 엉성하게 이루어지고 어떤 때에는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갈래의 통행료로 큰길을 손보는 얼개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님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아직 이를 수 있어 보이는 만큼의 온전함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여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변변치 못하고 마땅치 않은 사람들이 수탁 관리인으로 자주 세워진다면, 또 그들이 하는 일을 다잡고 통행료를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해내기에 겨우 넉넉할 만큼으로 줄이기 위한 알맞은 감사 법정과 회계 법정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다면, 그 제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러한 흠을 설명해 주기도 하고 변명해 주기도 하며, 그 흠의 대부분은 의회의 슬기로 때가 되면 차츰 고쳐질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여러 유료 도로 관문에서 거두는 돈은 길을 손보는 데에 필요한 것을 어찌나 넘어서는지, 살림을 알맞게 꾸리면 거기서 아낄 수 있을 것이 언젠가는 나라의 급한 일에 쓰일 수 있는 아주 큰 밑천이라고 몇몇 대신들조차 여겨 왔다. 정부가 유료 도로를 꾸리는 일을 제 손에 넣고 제 삯에 아주 조금만 얹어 주면 일할 병사들을 부린다면, 삯에서 제 생계를 몽땅 얻는 일꾼 말고는 달리 부릴 사람이 없는 수탁 관리인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길을 좋은 꼴로 건사할 수 있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백성에게 새 짐을 조금도 지우지 않고 큰 세입을, 어쩌면 50만 파운드를(이 책의 첫 두 판을 낸 뒤로 나는 영국에서 거두는 유료 도로 통행료를 다 합하여도 50만 파운드에 이르는 순수입은 나오지 않는다고 믿을 만한 까닭을 얻었다. 그 액수는 정부가 꾸린다면 이 왕국의 주요한 길 다섯을 손보아 두기에도 넉넉하지 않을 것이다) 얻을 수 있다고들 내세웠고, 유료 도로는 지금 우편국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일반 비용에 한몫을 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3

이렇게 하여 제법 큰 세입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나도 의심하지 않으나, 아마 이 계획을 꾸민 이들이 헤아린 것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계획 자체에는 아주 중요한 반론이 여럿 걸릴 듯하다.

첫째, 유료 도로 관문에서 거두는 통행료가 언젠가 나라의 급한 일을 채우는 밑천의 하나로 여겨지게 된다면, 그 급한 일이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대로 그것은 틀림없이 늘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의 정책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아주 빠르게 늘어나리라고 보아야 한다. 거기서 큰 세입을 손쉽게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아마 행정부로 하여금 이 밑천에 아주 자주 손을 뻗게 만들 것이다. 지금의 통행료에서 어떤 살림 솜씨로든 50만 파운드를 아낄 수 있을지는 어쩌면 자못 의심스러울지 몰라도, 그것을 곱절로 올리면 거기서 100만 파운드를 아낄 수 있고 어쩌면 세 곱절로 올리면 200만 파운드를 아낄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나는 이제 이렇게 어림한 액수가 모두 훨씬 지나치게 크다고 믿을 만한 까닭을 얻었다).4 게다가 이 큰 세입은 그것을 거두고 받을 관원을 하나도 새로 세우지 않고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유료 도로 통행료가 이렇게 끊임없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지금처럼 그 나라의 내륙 상업을 돕기는커녕 이내 그 위에 아주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온갖 무거운 물건을 나라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나르는 비용이 이내 아주 많이 늘어나고 따라서 그러한 모든 물건의 시장이 이내 아주 많이 좁아져, 그 생산이 크게 움츠러들고 그 나라 국내 산업의 가장 중요한 갈래들이 아주 결딴나 버릴 것이다.

둘째, 수레에 그 무게에 따라 매기는 세는 길을 손보는 오직 그 목적에만 쓰일 때에는 아주 고른 세이지만, 다른 어떤 목적에 쓰이거나 나라의 예사로운 급한 일을 채우는 데에 쓰일 때에는 아주 고르지 못한 세가 된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오직 그 목적에만 쓰일 때에는 수레마다 저희가 길에 입히는 닳고 해어짐에 꼭 맞추어 치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이 다른 어떤 목적에 쓰일 때에는 수레마다 그 닳고 해어짐보다 더 많이 치르는 것으로 여겨지며, 나라의 다른 급한 일을 채우는 데에 한몫을 하게 된다. 그런데 유료 도로 통행료는 물건 값을 그 가치가 아니라 그 무게에 따라 올리므로, 그것은 주로 귀하고 가벼운 상품을 쓰는 이가 아니라 거칠고 부피 큰 상품을 쓰는 이가 치른다. 그러므로 이 세가 나라의 어떤 급한 일을 채우려는 것이든, 그 급한 일은 주로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이의 부담으로, 곧 그것을 채울 힘이 가장 많은 이가 아니라 가장 적은 이의 부담으로 채워질 것이다.

셋째, 정부가 언젠가 큰길을 손보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유료 도로 통행료의 어느 몫이든 마땅한 데에 쓰이도록 억지로 시키기가 지금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백성에게서 큰 세입을 거두면서도 그 가운데 어느 몫도 이렇게 거둔 세입이 언제나 쓰여야 할 오직 그 목적에 쓰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유료 도로의 수탁 관리인들이 변변치 못하고 가난하다는 것이 지금은 이따금 그들에게 제 잘못을 바로잡게 하기를 어렵게 만든다면, 여기서 헤아리는 경우에는 그들의 부와 위세가 그것을 열 배나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프랑스에서 큰길을 손보는 데에 쓰이도록 정해진 기금은 집행권이 바로 거느린다. 그 기금은 한편으로는 유럽 대부분의 곳에서 시골 사람들이 큰길을 손보는 데에 내놓아야 하는 며칠의 노동으로 이루어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왕이 다른 비용에서 덜어 내기로 고른 만큼의 나라 일반 세입으로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옛 법으로 보나 유럽 대부분의 다른 곳의 법으로 보나, 시골 사람들의 노동은 국왕의 자문 회의에 바로 매여 있지 않은 고을 또는 지방의 행정관이 거느렸다. 그러나 지금의 관행으로는 시골 사람들의 노동도, 또 국왕이 어느 지방이나 관할구에서 큰길을 손보는 데에 떼어 주기로 고르는 다른 어떤 기금도 모두 감독관이 온통 꾸린다. 그는 국왕의 자문 회의가 세우고 물러나게 하며 그 회의에서 명령을 받고 그 회의와 끊임없이 편지를 주고받는 관원이다. 전제 정치가 나아가는 동안 집행권의 권위는 나라 안의 다른 모든 권력의 권위를 차츰 빨아들이고, 어떤 공공의 목적에 쓰이도록 정해진 온갖 갈래의 세입을 꾸리는 일을 제 것으로 삼는다. 그렇더라도 프랑스에서 큰 역로, 곧 왕국의 주요 도시들 사이를 잇는 길은 대체로 좋은 꼴로 건사되며, 몇몇 지방에서는 잉글랜드의 유료 도로 대부분보다 훨씬 낫기까지 하다. 그러나 우리가 샛길이라 부르는 것, 곧 그 나라 길의 훨씬 큰 몫은 아주 내버려져 있고 많은 곳에서는 무거운 수레가 도무지 지날 수 없다. 어떤 곳에서는 말을 타고 다니는 것조차 위험하여 노새만이 믿고 맡길 수 있는 탈것이다. 겉치레를 좋아하는 궁정의 뽐내는 대신은 흔히 큰 큰길처럼 눈부시고 으리으리한 사업을 벌이기를 즐길 터인데, 그러한 길은 으뜸가는 귀족들 눈에 자주 띄고 그들의 칭찬은 그의 허영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궁정에서 그의 이해를 떠받치는 데에도 한몫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잘해 놓아도 눈에 띄는 데가 없고 어떤 나그네에게도 조금의 감탄조차 자아내지 못하며 한마디로 더없이 쓸모 있다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는 자잘한 사업을 숱하게 벌이는 일은, 어느 모로 보나 그토록 높은 행정관이 마음 쓸 만한 것이 못 되는 하찮고 시시한 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정 아래에서는 그러한 사업이 거의 언제나 아주 내버려진다.

중국과 아시아의 다른 여러 정부에서는 집행권이 큰길을 손보는 일도 배가 다니는 운하를 떠받치는 일도 스스로 떠맡는다. 지방마다 그 총독에게 내리는 지침에서 그러한 일이 늘 그에게 당부되며, 궁정이 그가 한 일을 판단할 때에는 그가 그 지침의 이 대목에 얼마나 마음을 쓴 것으로 보이는가가 크게 좌우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갈래의 공공 행정은 그러한 나라 어디서나, 그 가운데서도 중국에서 아주 크게 마음 쓰는 바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큰길이, 더구나 배가 다니는 운하가 유럽에서 알려진 같은 갈래의 무엇보다도 훨씬 낫다고들 내세운다. 그렇더라도 유럽에 전해진 그러한 사업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물러 터지고 놀라기 잘하는 나그네들이, 흔히는 어리석고 거짓말하는 선교사들이 써낸 것이다. 그것이 더 밝은 눈으로 살펴진 것이었다면, 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더 미더운 목격자의 입으로 전해진 것이었다면, 그것은 어쩌면 그토록 놀라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르니에가 힌두스탄에 있는 이 갈래의 몇몇 사업을 두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보다 신기한 것을 더 좋아한 다른 나그네들이 전한 바에 훨씬 못 미친다.5 게다가 그러한 나라에서도 어쩌면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궁정과 서울에서 이야깃거리가 되기 쉬운 큰길과 큰 통로에만 마음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내버려 두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중국에서도 힌두스탄에서도 아시아의 다른 여러 정부에서도 주권자의 세입은 거의 온통 토지세 또는 토지 지대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토지의 한 해 생산물이 늘고 주는 데 따라 오르고 내린다. 그러므로 주권자의 큰 이해, 곧 그의 세입은 그러한 나라에서 반드시 그리고 곧바로 토지를 가꾸는 일과, 그 생산물의 큼과, 그 생산물의 가치에 이어져 있다. 그런데 그 생산물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고 값나가게 하려면 그것에 될 수 있는 대로 넓은 시장을 마련해 주어야 하고, 따라서 그 나라 곳곳 사이에 가장 자유롭고 가장 손쉽고 가장 돈이 덜 드는 통로를 열어야 하는데, 이는 가장 좋은 길과 가장 좋은 운하를 빌려서만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주권자의 세입은 주로 토지세나 토지 지대에서 나오지 않는다. 유럽의 모든 큰 왕국에서 어쩌면 그 세입의 큰 몫이 마침내는 토지의 생산물에 매여 있을지 모르나, 그 매임은 그토록 곧바르지도 그토록 뚜렷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주권자는 토지 생산물의 양과 가치를 함께 늘리도록 북돋우거나 좋은 길과 운하를 건사하여 그 생산물에 가장 넓은 시장을 마련해 주도록 자신이 그토록 곧바로 부름받았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시아의 몇몇 곳에서 공공 행정의 이 부문이 집행권에 의하여 아주 마땅하게 꾸려지고 있다는 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이는 내가 보기에 자못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지금의 형편에서 유럽의 어느 곳에서도 그 권력이 그것을 웬만하게 꾸릴 성싶은 낌새는 조금도 없다.

제 성질로 보아 저를 떠받칠 어떤 수입도 내어 줄 수 없으면서 그 편리함이 어떤 특정한 고장이나 구역에 거의 갇혀 있는 공공 사업조차, 집행권이 언제나 꾸릴 수밖에 없는 나라의 일반 세입으로보다는 고을 또는 지방의 행정이 꾸리는 고을 또는 지방의 세입으로 더 잘 떠받쳐진다. 런던의 거리에 등을 달고 포장을 하는 일을 국고의 비용으로 한다면, 그것이 지금처럼 잘 되거나 또 지금처럼 적은 비용으로 될 낌새가 조금이라도 있겠는가? 게다가 그 비용은 런던의 거리나 교구나 구역마다 그 주민에게 매기는 고을 세로 걷히는 대신에 이 경우에는 나라의 일반 세입에서 대어질 터이고, 따라서 왕국의 모든 주민에게 매기는 세로 걷힐 터인데, 그들의 큰 몫은 런던 거리에 등을 달고 포장을 하는 데에서 아무런 이득도 얻지 않는다.

고을과 지방의 세입을 고을과 지방이 꾸리는 데에 이따금 스며드는 남용은 아무리 엄청나 보이더라도, 따지고 보면 큰 제국의 세입을 꾸리고 쓰는 데에서 흔히 벌어지는 남용에 견주면 거의 언제나 아주 하찮다. 게다가 그것은 바로잡기도 훨씬 쉽다. 영국에서 치안 판사가 꾸리는 고을 또는 지방의 행정 아래에서, 시골 사람들이 큰길을 손보는 데에 내놓아야 하는 엿새의 노동은 어쩌면 언제나 아주 슬기롭게 쓰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모질거나 억누르는 낌새를 띠고 물리는 일은 거의 없다.6 프랑스에서는 감독관이 꾸리는 행정 아래에서 그 쓰임이 언제나 더 슬기롭지도 않고 물리는 일은 흔히 더없이 모질고 억누른다. 이른바 코르베라 하는 그러한 부역은 그 관원들이 제 미움을 사는 불운을 겪은 교구나 공동체를 벌하는 데에 쓰는 으뜸가는 폭정의 연장 가운데 하나다.

상업의 특정한 갈래를 돕는 데에 필요한 공공 사업과 기관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공공 사업과 기관이 노리는 것은 상업 일반을 돕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어떤 특정한 갈래를 도우려면 특정한 기관이 필요하고, 그것은 또 특정하고 남다른 비용을 요구한다.

야만스럽고 문명이 없는 나라들과 이루어지는 상업의 어떤 특정한 갈래는 남다른 보호를 요구한다. 예사로운 창고나 회계소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과 무역하는 상인들의 물건에 안전을 거의 내어 주지 못할 것이다. 야만스러운 원주민에게서 그 물건을 지키려면 그것을 쌓아 두는 자리를 얼마쯤 요새로 만들어야 한다. 힌두스탄의 통치가 어지러운 탓에 그 온순하고 부드러운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와 비슷한 채비가 있어야 한다고 여겨졌고, 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회사가 그 나라에 처음으로 가진 요새를 세우도록 허락받은 것도 제 사람과 재산을 우격다짐에서 지킨다는 구실 아래에서였다. 제 땅 안에 낯선 이가 요새 진 자리를 가지는 것을 그 기운찬 통치가 결코 견디지 못하는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는 대사나 공사나 영사를 두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는 제 나라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다툼을 그들 제 관습에 따라 판결할 수도 있고, 그들이 원주민과 다툴 때에는 제 공적인 자격을 빌려 더 큰 권위로 끼어들어 사사로운 사람에게서 바랄 수 있는 것보다 더 힘 있는 보호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도 있다. 상업의 이해 때문에, 전쟁이나 동맹의 목적으로는 아무런 필요도 없었을 나라에 공사를 두어야 했던 일이 흔하다. 튀르크 회사의 상업이 콘스탄티노플에 상주 대사를 두게 된 첫 계기였다. 러시아로 보낸 첫 잉글랜드 사절은 온통 상업의 이해에서 비롯하였다. 유럽 여러 나라의 신민 사이에 그러한 이해가 반드시 끊임없이 얽히게 된 것이 아마 이웃한 모든 나라에 평시에도 대사나 공사를 늘 머물게 두는 관례를 들여왔을 것이다. 옛 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이 관례는 15세기 끝 무렵 또는 16세기 첫머리보다, 곧 상업이 유럽 나라 대부분으로 처음 뻗기 시작하고 그들이 그 이해에 처음 마음을 쓰기 시작한 때보다 더 오래되지는 않은 듯하다.

상업의 어떤 특정한 갈래를 보호하는 데에서 생길 수 있는 남다른 비용을 바로 그 갈래에 매기는 알맞은 세로, 이를테면 거래인이 그 갈래에 처음 들어올 때 내놓는 알맞은 가입금으로, 또는 더 고르게 하자면 그들이 그 갈래의 무역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나라로 실어 내거나 거기서 실어 들이는 물건에 몇 퍼센트씩 매기는 특정한 관세로 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무역 일반을 해적과 노략꾼에게서 보호하는 일이 관세라는 제도가 처음 생긴 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무역 일반을 보호하는 비용을 대려고 무역에 일반 세를 매기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고 여겨졌다면, 어떤 특정한 갈래를 보호하는 남다른 비용을 대려고 그 특정한 갈래에 특정한 세를 매기는 것도 꼭 그만큼 이치에 닿아 보여야 한다.

무역 일반을 보호하는 일은 언제나 국가의 방위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그러한 까닭에 집행권이 맡은 직무의 한 부분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므로 일반 관세를 거두고 쓰는 일은 언제나 그 권력에 맡겨져 왔다. 그러나 무역의 어떤 특정한 갈래를 보호하는 일도 무역 일반을 보호하는 일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그 권력이 맡은 직무의 한 부분이다. 그러니 여러 나라가 언제나 앞뒤가 맞게 움직였다면, 그러한 특정한 보호를 위하여 거두는 특정한 관세도 언제나 꼭 그만큼 그 권력의 처분에 맡겨졌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다른 많은 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가 언제나 앞뒤가 맞게 움직이지는 않았고, 유럽의 상업하는 나라 대부분에서 상인들의 특정한 회사들이 입법부를 꾀어, 주권자가 맡은 직무의 이 부분을 그것에 반드시 딸린 온갖 권한과 함께 저희에게 맡기게 하는 재주를 부렸다.

이러한 회사들은 나라가 하기에는 슬기롭지 않다고 여길 법한 실험을 제 비용으로 해냄으로써 어쩌면 상업의 몇몇 갈래를 처음 들여오는 데에는 쓸모가 있었을지 모르나, 오래 두고 보면 어디서나 짐스럽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그 무역을 잘못 꾸리거나 좁혀 놓았다.

그러한 회사가 합자한 자산으로 무역하지 않고, 자격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일정한 가입금을 내고 그 회사의 규제에 따르기로 하면 받아들여야 하며 구성원마다 제 자산으로 제 위험을 지고 무역할 때, 그것을 규제 회사라 부른다. 그들이 합자한 자산으로 무역하고 구성원마다 그 자산에 대한 제 몫에 따라 공동의 이윤이나 손실을 나누어 가질 때, 그것을 합본 회사라 부른다. 그러한 회사는 규제 회사든 합본 회사든 배타적 특권을 지닐 때도 있고 지니지 않을 때도 있다.

규제 회사는 어느 모로 보나 유럽 여러 나라의 도시와 읍에서 그토록 흔한 동업조합과 닮았으며, 같은 갈래의 독점을 넓혀 놓은 것이라 할 만하다. 읍에 사는 사람이 동업조합에 든 업을 하려면 먼저 그 조합에서 자유민 자격을 얻어야 하듯이, 대개의 경우 나라의 신민은 규제 회사가 세워져 있는 외국 무역의 어떤 갈래도 먼저 그 회사의 구성원이 되지 않고서는 법대로 해 나갈 수 없다.7 그 독점은 받아들이는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가에 따라, 또 그 회사의 이사들이 얼마나 큰 권위를 지니는가와 그 무역의 큰 몫을 저희와 제 가까운 벗들에게 가두어 두도록 일을 꾸밀 힘을 얼마나 지니는가에 따라 더 빡빡하기도 하고 덜 빡빡하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규제 회사에서는 도제살이의 특권이 다른 동업조합에서와 같아서, 그 회사의 구성원 밑에서 제 햇수를 채운 사람은 가입금을 내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물리는 것보다 훨씬 적은 가입금만 내고 스스로 구성원이 될 자격을 얻었다. 법이 막지 않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여느 동업조합의 기질이 모든 규제 회사를 사로잡는다. 그들이 제 타고난 기질대로 움직이도록 허락받았을 때, 그들은 맞겨룸을 될 수 있는 대로 적은 수의 사람에게 가두려고 언제나 그 무역을 짐스러운 규제에 숱하게 옭아매려 애썼다. 법이 그들을 막아 그리하지 못하게 하였을 때, 그들은 아주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다.

지금 영국에 있는 외국 상업을 위한 규제 회사로는 옛 모험 상인 회사, 곧 이제 흔히 함부르크 회사라 부르는 것과 러시아 회사, 이스틀랜드 회사, 튀르크 회사, 아프리카 회사가 있다.

함부르크 회사에 들어가는 조건은 이제 아주 쉽다고들 한다. 또 그 이사들은 그 무역을 성가신 제약이나 규제에 옭아맬 힘을 지니지 않았거나, 적어도 요사이에는 그 힘을 쓰지 않았다. 늘 그러하였던 것은 아니다. 지난 세기 한중간 무렵에 가입금은 50파운드였고 한때는 100파운드였으며, 그 회사가 한 일은 더없이 억누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1643년과 1645년과 1661년에 잉글랜드 서부의 모직물 제조업자와 자유 거래인들은 그들이 무역을 가두고 그 나라의 제조업을 억누르는 독점자라고 의회에 불평하였다. 그 불평이 의회의 법을 낳지는 않았으나, 아마 그 회사를 겁먹게 하여 하는 일을 고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부터는 그들을 겨눈 불평이 없었다. 「윌리엄 3세 치세 10년과 11년의 법 제6장」으로 러시아 회사에 들어가는 가입금은 5파운드로 줄었고,8 「찰스 2세 치세 25년의 법 제7장」으로 이스틀랜드 회사에 들어가는 그것은 40실링으로 줄었으며, 그와 함께 스웨덴과 덴마크와 노르웨이, 곧 발트해 북쪽의 모든 나라가 그들의 배타적 특허에서 풀려났다. 아마 그 회사들이 한 일이 이 두 의회 법을 낳은 계기였을 것이다. 그 전에 조사이아 차일드 경은 이 두 회사도 함부르크 회사도 더없이 억누르는 것으로 그려 보였고, 그때 우리가 그들 저마다의 특허에 든 나라들과 하던 무역이 낮은 꼴에 머문 것을 그들이 잘못 꾸린 탓으로 돌렸다.9 그러나 그러한 회사가 요즈음에는 그리 억누르지 않을지 몰라도, 그들은 틀림없이 아주 쓸모없다. 참으로 그저 쓸모없을 뿐이라는 것은 어쩌면 규제 회사에 마땅하게 바칠 수 있는 가장 높은 기림일 터이고, 앞에서 말한 세 회사는 모두 지금의 꼴로 보아 이 기림을 받을 만한 듯하다.

튀르크 회사에 들어가는 가입금은 예전에 26살이 안 된 사람에게는 모두 25파운드였고 그 나이가 넘은 사람에게는 모두 50파운드였다. 오직 도매 상인만 받아들여졌으니, 이 제약이 온갖 가겟집과 소매상을 밀어냈다. 어느 내규로는 영국의 제조품을 그 회사의 공동 배로만 튀르크로 실어 낼 수 있었는데, 그 배들은 언제나 런던 항구에서 떠났으므로 이 제약은 그 무역을 그 돈 많이 드는 항구에, 그리고 그 거래인을 런던과 그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두었다. 또 다른 내규로는 런던에서 20마일 안에 살면서 그 도시의 자유민이 아닌 사람은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으니, 이 또 하나의 제약이 앞의 것과 어우러져 런던 자유민 말고는 모두 반드시 밀어냈다. 그 공동 배가 짐을 싣고 떠나는 때가 온통 이사들에게 매여 있었으므로, 그들은 제 물건과 제 가까운 벗의 물건으로 그 배를 손쉽게 채우면서 제안을 너무 늦게 내놓았다고 둘러댈 만한 다른 이들을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편에서 이 회사는 어느 모로 보나 빡빡하고 억누르는 독점이었다. 그러한 남용이 「조지 2세 치세 26년의 법 제18장」을 낳은 계기가 되었으니, 그 법은 가입금을 나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20파운드로 줄이고 오직 도매 상인이어야 한다거나 런던 자유민이어야 한다는 제약을 없앴으며, 그러한 모든 사람에게 영국의 모든 항구에서 튀르크의 어느 항구로든 실어 내는 것이 금지되지 않은 온갖 영국 물건을 실어 낼 자유를 주되, 일반 관세와 그 회사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하여 매긴 특정한 관세를 아울러 치르고 튀르크에 머무는 영국 대사와 영사의 정당한 권위와 그 회사가 제대로 만든 내규에 따르게 하였다. 그러한 내규로 억누르는 일이 없게 하려고 같은 법으로 이렇게 정하였다. 그 회사의 구성원 일곱이 이 법이 지나간 뒤에 만들어진 어떤 내규로 저희가 억울함을 겪었다고 여기면, 그 내규가 만들어진 뒤 열두 달 안에 제기하는 것을 조건으로 무역 식민 위원회에 호소할 수 있으며(그 권한은 이제 추밀원의 한 위원회가 물려받았다), 구성원 일곱이 이 법이 지나가기 전에 만들어진 어떤 내규로 저희가 억울함을 겪었다고 여기면, 이 법이 시행되기로 한 날부터 열두 달 안이라는 것을 조건으로 그와 같이 호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 해를 겪어 보는 것만으로는 어떤 내규가 해로운 쪽으로 기울어 있음을 큰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알아차리기에 언제나 넉넉하지는 않을 터이고, 그들 가운데 여럿이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다 하여도 무역 위원회도 추밀원 위원회도 그들에게 아무런 구제를 내어 줄 수 없다. 게다가 모든 규제 회사의 내규는, 다른 모든 동업조합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 큰 몫이 이미 구성원이 된 사람들을 억누르기보다는 다른 이들이 구성원이 되려는 마음을 꺾는 것을 노리는데, 이는 높은 가입금으로만이 아니라 다른 숱한 재주로도 이룰 수 있다. 그러한 회사가 늘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제 이윤율을 될 수 있는 대로 높이 올리고, 저희가 실어 내는 물건에서나 실어 들이는 물건에서나 시장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산이 모자란 채로 두는 것인데, 이는 맞겨룸을 억누르거나 새 모험가가 그 무역에 들어오려는 마음을 꺾음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 게다가 20파운드의 가입금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사람이 튀르크 무역에 들어와 거기 머물 뜻을 품는 것을 꺾기에는 어쩌면 넉넉하지 않을지 몰라도, 투기 상인이 거기서 한 번의 모험을 걸어 보는 것을 꺾기에는 넉넉할지 모른다. 어느 무역에서나 자리 잡은 붙박이 거래인들은 동업조합을 이루지 않았더라도 이윤을 올리려고 저절로 단합하는데, 그 이윤을 언제나 제 마땅한 높이로 눌러 두는 데에는 투기하는 모험가들이 이따금 끼어들어 맞겨루는 것만 한 것이 없다. 튀르크 무역은 이 의회 법으로 얼마쯤 열리기는 하였어도, 아직도 많은 사람이 온전히 자유롭기에는 한참 멀었다고 여긴다. 튀르크 회사는 대사 한 사람과 영사 두엇을 먹여 살리는 데에 한몫을 하는데, 그들은 다른 공사들과 마찬가지로 온통 나라가 먹여 살려야 하고 그 무역은 국왕 폐하의 모든 신민에게 열려야 한다. 그 회사가 이 일과 그 밖의 동업조합 일을 위하여 거두는 여러 세는 나라가 그러한 공사를 먹여 살리기에 넉넉하고도 남을 세입을 내어 줄 것이다.

조사이아 차일드 경이 눈여겨본 대로, 규제 회사는 공사를 자주 떠받치기는 하였어도 저희가 무역하는 나라에 요새나 수비대를 둔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반면에 합본 회사는 자주 그리하였다. 또 따지고 보면 앞의 것은 이 갈래의 일에 뒤의 것보다 훨씬 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첫째, 규제 회사의 이사들은 그러한 요새와 수비대가 그것을 위하여 놓여 있는 그 회사의 일반 무역이 번창하는 데에 이렇다 할 이해가 걸려 있지 않다. 그 일반 무역이 쇠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 사사로운 무역에 이롭게 되는 일조차 흔하니, 맞겨루는 이의 수를 줄임으로써 그들이 더 헐하게 사고 더 비싸게 팔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합본 회사의 이사들은 제 손에 맡겨진 공동 자산에서 나오는 이윤에 대한 제 몫밖에 가지지 않으므로, 그 이해를 그 회사의 일반 무역의 그것과 갈라놓을 수 있는 제 사사로운 무역을 지니지 않는다. 그들의 사사로운 이해는 그 회사의 일반 무역이 번창하는 것과, 그것을 지키는 데에 필요한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것에 이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떠받침이 반드시 요구하는 끊임없고 꼼꼼한 마음 씀을 지니기 쉽다. 둘째, 합본 회사의 이사들은 언제나 큰 자본, 곧 그 회사가 합자한 자산을 꾸리며, 그 얼마를 그러한 꼭 있어야 할 요새와 수비대를 짓고 손보고 떠받치는 데에 마땅하게 쓸 수 있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규제 회사의 이사들은 공동의 자본을 꾸리지 않으므로, 가입금과 그 회사의 무역에 매긴 동업조합 관세에서 우연히 들어오는 수입 말고는 이 일에 쓸 다른 기금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러한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데에 마음 쓸 같은 이해를 지녔다 하더라도, 그 마음 씀이 열매를 맺게 할 같은 힘을 지니는 일은 좀처럼 없다. 공사를 먹여 살리는 일은 마음을 거의 쓸 것도 없고 알맞고 한정된 비용밖에 들지 않으므로, 규제 회사의 기질에도 그 힘에도 훨씬 어울리는 일이다.

그렇더라도 조사이아 차일드 경의 때보다 한참 뒤인 1750년에 규제 회사 하나가, 곧 지금의 아프리카 무역 상인 회사가 세워졌는데, 이 회사는 처음에는 블랑곶과 희망봉 사이에 있는 영국의 모든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일을, 뒤에는 루주곶과 희망봉 사이에 있는 것만을 떠받치는 일을 똑똑히 맡았다. 이 회사를 세우는 법(「조지 2세 치세 23년의 법 제51장」)은 두 가지 뚜렷한 목적을 바라본 듯하다. 첫째는 규제 회사의 이사들에게 타고난 억누르고 독점하려는 기질을 실제로 누르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에게 타고나지 않은 마음 씀을, 곧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쪽으로 마음을 쓰는 일을 될 수 있는 대로 억지로 시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첫째 목적을 위하여 가입금은 40실링으로 한정되었다. 그 회사는 동업조합의 자격으로 또는 합자한 자산으로 무역하는 것과, 공동의 인장으로 돈을 빌리는 것과, 그 무역에 어떤 제약을 놓는 것이 금지되었으니, 그 무역은 영국 신민이고 가입금을 낸 사람이면 누구나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해 나갈 수 있다. 그 통치는 런던에서 모이는 아홉 사람의 위원회가 맡는데, 그들은 런던과 브리스틀과 리버풀에서 그 회사의 자유민들이 해마다 세 사람씩 뽑는다. 어느 위원도 내리 세 해를 넘겨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 어느 위원이든 무역 식민 위원회가, 이제는 추밀원의 한 위원회가 제 변명을 들은 뒤에 물러나게 할 수 있다. 그 위원회는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실어 내거나 아프리카 물건을 영국으로 실어 들이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일을 맡았으므로 그 목적을 위하여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여러 갈래의 물건과 물자를 실어 낼 수 있다. 그들이 그 회사에서 받는 돈 가운데 런던과 브리스틀과 리버풀에 있는 서기와 대리인의 봉급, 런던에 있는 사무소의 집세,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꾸리고 맡고 대리하는 데에 드는 그 밖의 온갖 비용으로 800파운드를 넘지 않는 액수가 허락된다. 이 액수에서 그러한 여러 비용을 대고 남는 것은 제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저희끼리 알맞다고 여기는 대로 나누어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꾸림새로 보아 독점의 기질이 실제로 눌리고 이 목적 가운데 첫째가 넉넉히 이루어지리라고 바랄 만하였다. 그러나 그리되지 않은 듯하다. 「조지 3세 치세 4년의 법 제20장」으로 세네갈 요새와 거기에 딸린 온갖 것이 아프리카 무역 상인 회사에 맡겨졌으나, 그 이듬해에(「조지 3세 치세 5년의 법 제44장」으로) 세네갈과 거기에 딸린 것만이 아니라 남바르바리의 살레 항구에서 루주곶에 이르는 해안 전체가 그 회사의 관할에서 풀려나 국왕에게 맡겨졌고 그곳과의 무역은 국왕 폐하의 모든 신민에게 자유롭다고 선언되었다. 그 회사는 무역을 옥죄고 마땅치 않은 어떤 갈래의 독점을 세웠다는 의심을 받아 왔다. 그렇더라도 「조지 2세 치세 23년의 법」의 규제 아래에서 그들이 어떻게 그리할 수 있었는지는 그려 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러나 늘 진실을 가장 미덥게 적어 놓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하원의 인쇄된 논쟁록에서 나는 그들이 이러한 일로 고발당하였음을 본다. 아홉 사람 위원회의 구성원이 모두 상인이고 그들의 여러 요새와 거류지에 있는 총독과 주재 상인이 모두 그들에게 매여 있으므로, 뒤의 사람들이 앞의 사람들의 위탁과 주문에 남다른 마음을 썼을 법하고 이것이 참된 독점을 이루었을 법하다.

이 가운데 둘째 목적, 곧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일을 위하여 의회는 그들에게 해마다 얼마씩을, 대체로 1만 3,000파운드쯤을 떼어 주었다. 이 돈을 마땅하게 썼는지에 대하여 그 위원회는 해마다 재무 법정의 쿠르시터 배런에게 셈을 내놓아야 하고, 그 셈은 뒤에 의회 앞에 놓여야 한다.10 그러나 수백만 파운드가 어디에 쓰였는지에 그토록 적게 마음 쓰는 의회가 해마다 1만 3,000파운드가 어디에 쓰였는지에 크게 마음 쓸 성싶지 않고, 재무 법정의 쿠르시터 배런도 그 직업과 배움으로 보아 요새와 수비대에 드는 마땅한 비용에 깊이 밝을 성싶지 않다. 참으로 국왕 폐하의 해군 함장이나 해군 본부가 세운 다른 어떤 임명받은 장교는 그 요새와 수비대의 꼴을 살펴 제 본 바를 그 본부에 알릴 수 있다. 그러나 그 본부는 그 위원회에 대하여 아무런 곧은 관할권도 지니지 않고, 그렇게 살펴본 사람들이 한 일을 바로잡을 아무런 권위도 지니지 않는 듯하다. 게다가 국왕 폐하의 해군 함장이 언제나 축성술에 깊이 밝으리라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겨우 세 해 동안만 누릴 수 있고 그동안에도 그 법대로 받는 벌이가 그토록 아주 적은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공공의 돈이든 그 회사의 돈이든 그것을 대놓고 빼돌리거나 가로채는 것 말고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느 위원이든 받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벌인 듯한데, 그 벌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달리 마음 쓸 이해를 지니지 않은 일에 끊임없고 꼼꼼한 마음을 억지로 쏟게 할 만큼 무거운 동기가 결코 될 수 없다. 그 위원회는 기니 해안에 있는 케이프코스트 성을 손보려고 잉글랜드에서 벽돌과 돌을 보냈다는 고발을 받고 있는데, 이는 의회가 여러 차례 남다른 돈을 내어 준 일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먼 뱃길로 보낸 이 벽돌과 돌은 품질이 어찌나 나빴던지 그것으로 손본 벽을 바닥부터 다시 쌓아야 하였다고 한다. 루주곶 북쪽에 있는 요새와 수비대는 나라의 비용으로 떠받쳐질 뿐만 아니라 집행권의 곧은 통치 아래에 있는데, 그 곶 남쪽에 있고 적어도 얼마쯤은 나라의 비용으로 떠받쳐지기도 하는 것이 왜 다른 통치 아래에 있어야 하는지는 그럴듯한 까닭을 그려 보기조차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지중해 무역을 보호한다는 것이 지브롤터와 미노르카 수비대의 본디 목적 또는 구실이었으며, 그 수비대를 떠받치고 다스리는 일은 언제나 아주 마땅하게도 튀르크 회사가 아니라 집행권에 맡겨져 왔다. 그 권력의 자랑과 위엄은 크게 보아 그 지배가 미치는 넓이에 있으니, 그 지배를 지키는 데에 필요한 것에 마음 쓰기를 게을리할 성싶지 않다. 그리하여 지브롤터와 미노르카의 수비대는 한 번도 내버려진 적이 없다. 미노르카는 두 번 빼앗겼고 이제 아마 아주 잃었겠으나, 그 불행이 집행권의 어떤 게으름 탓으로 돌려진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더라도 나는 그 돈 많이 드는 수비대 가운데 어느 것이든 그것을 스페인 왕국에서 떼어 낸 본디 목적에 조금이라도 필요하였다고 넌지시 말하려는 것으로 읽히고 싶지는 않다. 그 떼어 냄은 어쩌면 잉글랜드에서 그 타고난 동맹인 스페인 국왕의 마음을 돌려놓고, 부르봉 집안의 두 으뜸 갈래를 핏줄의 끈이 결코 묶을 수 없었을 만큼 더 빡빡하고 더 오래가는 동맹으로 묶어 놓은 것 말고는 다른 어떤 참된 목적에도 이바지한 적이 없다.

국왕의 특허로 세워졌든 의회 법으로 세워졌든 합본 회사는 규제 회사와도, 또 사사로운 조합과도 여러 점에서 다르다.

첫째, 사사로운 조합에서는 어느 동무도 그 회사의 동의 없이 제 몫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거나 새 구성원을 그 회사에 들일 수 없다. 그렇더라도 구성원마다 제때 알리면 그 조합에서 빠져나와 공동 자산에 대한 제 몫을 치러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거꾸로 합본 회사에서는 어느 구성원도 그 회사에 제 몫을 치러 달라고 요구할 수 없으나, 구성원마다 그들의 동의 없이 제 몫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 그로써 새 구성원을 들일 수 있다. 합자한 자산에 대한 한 몫의 가치는 언제나 그것이 장에서 받아 낼 값이며, 이는 그 임자가 그 회사의 자산에서 제 앞으로 올라 있는 액수보다 어떤 비율로든 더 클 수도 있고 더 작을 수도 있다.

둘째, 사사로운 조합에서는 동무마다 그 회사가 진 빚에 대하여 제 재산 전부를 걸고 매인다. 거꾸로 합본 회사에서는 동무마다 제 몫만큼만 매인다.

합본 회사의 무역은 언제나 이사회가 꾸린다. 참으로 이 이사회는 여러 점에서 임자 총회의 다잡음을 받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그 임자들의 큰 몫은 그 회사의 일을 조금이라도 안다고 내세우는 일이 좀처럼 없으며, 그들 사이에 파당을 짓는 기질이 마침 휩쓸고 있지 않을 때에는 그 일로 제 몸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이사들이 알맞다고 여겨 저희에게 내어 주는 반년치나 한 해치 배당을 흐뭇하게 받아 갈 뿐이다. 수고에서도 또 한정된 액수를 넘는 위험에서도 이렇게 아주 벗어나 있다는 점이 숱한 사람을 부추겨 합본 회사에서 모험가가 되게 하니, 그들은 사사로운 조합에서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재산을 걸지 않았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회사는 흔히 어떤 사사로운 조합도 뽐낼 수 없을 만큼 훨씬 큰 자산을 저희에게 끌어들인다. 남해 회사의 무역 자산은 한때 3,380만 파운드가 넘었다. 잉글랜드 은행의 나누어진 자본은 지금 1,078만 파운드에 이른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회사의 이사들은 제 돈보다는 남의 돈을 꾸리는 사람이므로, 사사로운 조합의 동무들이 흔히 제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애타는 눈초리로 그것을 지켜보리라고 바라기는 어렵다. 부자의 집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잘한 일에 마음 쓰는 것을 제 주인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고, 그리하여 아주 손쉽게 제 몸에 그리하지 않아도 좋다는 면제를 내어 준다. 그러므로 그러한 회사의 일을 꾸리는 데에는 게으름과 헤픔이 언제나 얼마간 휩쓸 수밖에 없다. 외국 무역을 위한 합본 회사가 사사로운 모험가들과의 맞겨룸을 견뎌 낼 수 있었던 일이 좀처럼 없는 것은 이러한 까닭에서다. 그리하여 그들은 배타적 특권이 없이 잘된 적이 아주 드물고, 그것을 지니고도 잘되지 못한 일이 흔하다. 배타적 특권이 없으면 그들은 흔히 그 무역을 잘못 꾸렸다. 배타적 특권이 있으면 그들은 그것을 잘못 꾸리고 또 좁혀 놓았다.

지금 아프리카 회사의 앞선 회사인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특허로 배타적 특권을 지녔으나, 그 특허가 의회 법으로 굳어지지 않았으므로 권리선언에 따라 그 무역은 명예혁명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 폐하의 모든 신민에게 열렸다.11 허드슨만 회사는 그 법적 권리로 보면 왕립 아프리카 회사와 같은 자리에 있다. 그들의 배타적 특허도 의회 법으로 굳어지지 않았다. 남해 회사는 무역하는 회사로 있는 동안 의회 법으로 굳어진 배타적 특권을 지녔고, 지금의 동인도 무역 상인 연합 회사도 마찬가지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는 이내 사사로운 모험가들과의 맞겨룸을 견뎌 낼 수 없음을 알게 되었는데, 권리선언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얼마 동안 그 모험가들을 밀무역꾼이라 부르며 그러한 자로 몰아붙이기를 이어 갔다. 그렇더라도 1698년에 사사로운 모험가들은 그들 무역의 거의 모든 갈래에 10퍼센트의 관세를 물게 되었고, 그것은 그 회사가 제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는 데에 쓰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무거운 세에도 아랑곳없이 그 회사는 여전히 그 맞겨룸을 견뎌 낼 수 없었다. 그들의 자산과 신용은 차츰 기울었다. 1712년에 그들의 빚은 어찌나 커졌던지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그 빚쟁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따로 의회 법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 빚쟁이들 가운데 수로 보나 액수로 보나 3분의 2가 내리는 결정이 나머지를 묶도록, 곧 그 회사가 제 빚을 갚는 데에 주어질 기한에 대해서도 또 그 빚을 두고 그들과 맺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질 어떤 다른 합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도록 정해졌다. 1730년에 그들의 살림은 어찌나 어지러웠던지 그들이 세워진 유일한 목적이자 구실이었던 제 요새와 수비대를 떠받치기가 아주 불가능하였다. 그해부터 그들이 마침내 풀릴 때까지 의회는 그 목적을 위하여 해마다 1만 파운드를 내어 주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1732년에 그들은 여러 해 동안 흑인을 서인도로 실어 나르는 무역에서 손해를 본 끝에 마침내 그것을 아주 그만두기로, 곧 그 해안에서 사들인 흑인을 아메리카의 사사로운 거래인들에게 팔고 제 고용인들을 아프리카 안쪽 지방과 사금과 상아와 물감 약재 따위를 두고 무역하는 일에 부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 더 좁은 무역에서 거둔 성공도 앞서의 그 넓은 무역에서보다 낫지 않았다. 그들의 살림은 차츰 기울어 가기를 이어 가다가 마침내 어느 모로 보나 거덜 난 회사가 되어 의회 법으로 풀렸고, 그 요새와 수비대는 지금의 아프리카 무역 상인 규제 회사에 맡겨졌다. 왕립 아프리카 회사가 세워지기 전에도 아프리카 무역을 위하여 다른 합본 회사 셋이 잇달아 하나씩 세워졌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잘되지 못하였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모두 배타적 특허를 지녔고, 그것은 의회 법으로 굳어지지 않았어도 그때에는 참된 배타적 특권을 내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허드슨만 회사는 지난번 전쟁에서 불운을 겪기 전까지 왕립 아프리카 회사보다 훨씬 운이 좋았다.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할 비용은 훨씬 적다. 그들이 여러 거류지와 살림터에, 곧 요새라는 이름을 붙여 높여 준 곳에 먹여 살리는 사람의 수를 다 합하여도 12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이 수는 제 배에 실을 모피와 그 밖의 물건을 미리 마련해 두기에는 넉넉한데, 그 배는 얼음 탓에 그 바다에 여섯 주나 여덟 주를 넘겨 머물 수 있는 일이 좀처럼 없다. 실을 짐을 미리 마련해 둔다는 이 이로움은 여러 해 동안 사사로운 모험가들이 얻을 수 없었고, 그것이 없이는 허드슨만과 무역할 길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11만 파운드를 넘지 않는다고 하는 그 회사의 그리 크지 않은 자본은, 그들의 특허에 든 넓지만 가엾은 그 고장의 무역과 남아도는 생산물을 온통 또는 거의 온통 저희가 틀어쥐기에 넉넉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사사로운 모험가로서 그들과 맞겨루며 그 고장과 무역하려고 해 본 사람이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이 회사는 법으로는 그럴 권리를 지니지 않았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언제나 배타적 무역을 누려 왔다. 그뿐만 아니라 이 회사의 그리 크지 않은 자본은 아주 적은 수의 임자들 사이에 나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적은 수의 임자로 이루어지고 그리 크지 않은 자본을 지닌 합본 회사는 사사로운 조합의 성질에 아주 가까워지며, 거의 같은 만큼의 지켜봄과 마음 씀을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여러 이로움 덕분에 허드슨만 회사가 지난번 전쟁 전에 제 무역을 제법 크게 성공을 거두며 해 나갈 수 있었다 하여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이윤이 고인이 된 도브스 씨가 그려 본 것에 다가간 적이 있을 성싶지는 않다. 『상업의 역사 연대기적 고찰』을 쓴 앤더슨 씨는 훨씬 차분하고 슬기로운 글쓴이인데, 그는 도브스 씨 자신이 여러 해에 걸쳐 내놓은 그들의 수출입 셈을 살펴보고 그들이 지는 남다른 위험과 비용을 마땅하게 셈에 넣어 보면 그들의 이윤이 남의 시샘을 받을 만하다거나 그것이 여느 무역의 이윤을 크게, 아니 조금이라도 넘어설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아주 마땅하게 눈여겨본다.12

남해 회사는 떠받쳐야 할 요새나 수비대를 한 번도 지니지 않았고 따라서 외국 무역을 위한 다른 합본 회사가 지는 큰 비용 하나에서 아주 벗어나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임자들 사이에 나뉜 엄청난 자본이 있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과 게으름과 헤픔이 그들의 일을 꾸리는 온 자리를 휩쓸리라고 내다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자산을 가지고 벌인 투기 사업의 속임수와 방탕함은 넉넉히 알려져 있고, 그것을 풀어 밝히는 일은 지금 다루는 일에서 벗어난다. 그들의 상업 사업도 그다지 낫게 꾸려지지 않았다. 그들이 손댄 첫 무역은 스페인령 서인도에 흑인을 대는 일이었고, 그것에 대하여 그들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이른바 아시엔토 계약에 따라) 배타적 특권을 지녔다.13 그러나 이 무역에서 큰 이윤이 나오리라고 바랄 수 없었으니, 그 전에 같은 조건으로 그것을 누린 포르투갈 회사도 프랑스 회사도 그 때문에 거덜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보상으로 일정한 짐을 싣는 배 한 척을 해마다 보내어 스페인령 서인도와 곧바로 무역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 해마다 보내는 배가 할 수 있었던 열 번의 뱃길 가운데 1731년 로열 캐롤라인호의 뱃길 하나에서는 제법 벌었고 나머지 거의 모두에서는 얼마간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들이 잘되지 못한 것을 그들의 주재 상인과 대리인은 스페인 정부의 갈취와 억누름 탓으로 돌렸으나, 어쩌면 주로 바로 그 주재 상인과 대리인의 헤픔과 노략질 때문이었을 터인데, 그들 가운데 몇몇은 한 해 만에도 큰 재산을 얻었다고 한다. 1734년에 그 회사는 국왕에게, 해마다 보내는 배로 얻는 이윤이 적으니 그 배의 무역과 톤수를 처분하고 스페인 국왕에게서 얻을 수 있는 만큼의 보상을 받게 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1724년에 이 회사는 고래잡이에 손을 대었다. 참으로 이것에 대하여 그들은 독점을 지니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 일을 해 나가는 동안 다른 어떤 영국 신민도 거기에 손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배가 그린란드로 간 여덟 번의 뱃길 가운데 한 번에서는 벌었고 나머지 모두에서는 손해를 보았다. 여덟째이자 마지막 뱃길 뒤에 배와 물자와 연장을 팔았을 때, 그들은 이 갈래에서 입은 손해가 자본과 이자를 합하여 23만 7,000파운드가 넘음을 알게 되었다.

1722년에 이 회사는 의회에 청원하여, 3,380만 파운드가 넘는 제 엄청난 자본을, 그 전부가 정부에 빌려준 것이었는데, 똑같은 두 몫으로 가르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 절반, 곧 1,690만 파운드 남짓은 다른 정부 연금과 같은 자리에 놓여 그 회사의 이사들이 상업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진 빚이나 입은 손해에 매이지 않게 하고, 나머지 절반은 전처럼 무역 자산으로 남겨 그 빚과 손해에 매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 청원은 너무나 이치에 닿아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없었다. 1733년에 그들은 다시 의회에 청원하여, 제 무역 자산의 4분의 3을 연금 자산으로 바꾸고 4분의 1만 무역 자산으로 남겨 이사들이 잘못 꾸려서 생기는 위험에 드러나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때쯤에는 그들의 연금 자산도 무역 자산도 정부에서 여러 차례 돈이 들어온 덕분에 저마다 200만 파운드 넘게 줄어 있었으므로, 이 4분의 1은 366만 2,784파운드 8실링 6펜스밖에 되지 않았다. 1748년에 아시엔토 계약에 따라 그 회사가 스페인 국왕에게 내놓은 온갖 요구는 아헨 조약으로 보상이라 여겨진 것과 맞바꾸어 포기되었다.14 스페인령 서인도와의 그들 무역은 끝이 났고, 남은 무역 자산은 연금 자산으로 바뀌었으며, 그 회사는 어느 모로 보나 무역하는 회사이기를 그쳤다.

남해 회사가 해마다 보내는 배로 해 나간 무역, 곧 그들이 제법 큰 이윤을 얻으리라고 바랄 수 있었던 유일한 무역에서도 그들에게 외국 시장에서나 제 나라 시장에서나 맞겨루는 이가 없지 않았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카르타헤나와 포르토벨로와 라베라크루스에서 그들은 카디스에서 그 시장으로 제 배의 나가는 짐과 같은 갈래의 유럽 물건을 실어 오는 스페인 상인들과 맞겨루어야 하였고, 잉글랜드에서는 카디스에서 제 배의 들어오는 짐과 같은 갈래의 스페인령 서인도 물건을 실어 들이는 잉글랜드 상인들과 맞겨루어야 하였다. 참으로 스페인 상인의 물건도 잉글랜드 상인의 물건도 어쩌면 더 높은 관세에 매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회사 고용인들의 게으름과 헤픔과 빼돌림이 불러온 손해는 아마 그 모든 관세보다 훨씬 무거운 세였을 것이다. 사사로운 모험가들이 합본 회사와 어떤 꼴로든 열리고 공정한 맞겨룸에 들어올 수 있을 때 그 회사가 외국 무역의 어떤 갈래를 성공을 거두며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온갖 겪은 바에 어긋나 보인다.

옛 영국 동인도회사는 1600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허로 세워졌다. 그들이 인도로 꾸려 보낸 첫 열두 번의 뱃길에서 그들은 규제 회사로서, 곧 저마다 따로 자산을 지니고 다만 그 회사의 공동 배로만 무역한 것으로 보인다. 1612년에 그들은 합자한 자산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특허는 배타적인 것이었고, 의회 법으로 굳어지지 않았어도 그때에는 참된 배타적 특권을 내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여러 해 동안 그들은 밀무역꾼 때문에 그리 시달리지 않았다. 74만 4,000파운드를 결코 넘지 않았고 한 몫이 50파운드였던 그들의 자본은 엄청나게 크지도 않았고 그들이 벌이는 거래도 아주 넓지 않아서, 큰 게으름과 헤픔을 둘러댈 구실이 되지도 않았고 큰 빼돌림을 가릴 덮개가 되지도 않았다. 한편으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심술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다른 우연 때문에 생긴 몇몇 남다른 손해에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잘되는 무역을 해 나갔다. 그러나 때가 흐르면서 자유의 원리가 더 잘 이해되자, 의회 법으로 굳어지지 않은 국왕의 특허가 배타적 특권을 어디까지 내어 줄 수 있는지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의심스러워졌다. 이 물음을 두고 법정의 판결은 한결같지 않았고 정부의 권위와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밀무역꾼이 그들 위로 불어났고, 찰스 2세 치세의 끝 무렵과 제임스 2세 치세 내내와 윌리엄 3세 치세의 한동안에 걸쳐 그들을 큰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698년에 의회에 제안이 하나 들어왔으니, 정부에 200만 파운드를 8퍼센트로 빌려주되 그 응모자들을 배타적 특권을 지닌 새 동인도회사로 세워 준다는 조건이었다. 옛 동인도회사는 제 자본과 거의 맞먹는 70만 파운드를 같은 조건으로 4퍼센트에 내놓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 공공 신용의 형편이 그러하였으므로, 정부로서는 70만 파운드를 4퍼센트로 빌리는 것보다 200만 파운드를 8퍼센트로 빌리는 편이 더 편하였다. 새 응모자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그에 따라 새 동인도회사가 세워졌다. 그렇더라도 옛 동인도회사는 1701년까지 제 무역을 이어 갈 권리를 지녔다. 그들은 그와 함께 제 회계 책임자의 이름으로 아주 교묘하게 31만 5,000파운드를 새 회사의 자산에 응모해 두었다. 이 200만 파운드의 대부에 응모한 이들에게 동인도 무역을 맡긴 그 의회 법의 문면이 엉성하였던 탓에, 그들이 모두 합자한 자산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응모액이 7,200파운드밖에 되지 않던 사사로운 거래인 몇몇은 제 자산으로 제 위험을 지고 따로 무역할 특권을 내세웠다. 옛 동인도회사는 1701년까지 제 자산으로 따로 무역할 권리를 지녔고, 또 그때 앞뒤로 새 회사의 자산에 응모해 둔 31만 5,000파운드로 다른 사사로운 거래인과 마찬가지로 따로 무역할 권리도 지녔다. 그 두 회사가 사사로운 거래인들과, 또 저희끼리 맞겨룬 일이 그 둘을 거의 거덜 낼 뻔하였다고 한다. 그 뒤인 1750년에 그 무역을 규제 회사의 손에 맡겨 그로써 얼마쯤 열어 놓자는 제안이 의회에 들어왔을 때, 동인도회사는 이 제안에 맞서 그때 이 맞겨룸이 낳은, 저희가 보기에 딱한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아주 힘주어 그려 보였다. 그들의 말로는 인도에서는 그것이 물건 값을 어찌나 높이 올려놓았던지 살 만한 값어치가 없어졌고, 잉글랜드에서는 시장에 물건이 넘치게 하여 그 값을 어찌나 낮게 떨어뜨렸던지 거기서 아무런 이윤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 넉넉하게 대어진 덕분에 잉글랜드 시장에서 인도 물건의 값이 아주 많이 내렸고 그것이 세상에 크나큰 이로움과 편리함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 시장에서 그 값을 아주 많이 올렸으리라는 것은 그리 있음 직해 보이지 않으니, 그 맞겨룸이 불러올 수 있었을 남다른 수요를 다 합하여도 인도 상업이라는 드넓은 바다에 떨어진 물 한 방울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처음에는 이따금 물건 값을 올릴지 몰라도 오래 두고 보면 반드시 그것을 내린다. 그것은 생산을 북돋우고 그로써 생산하는 이들 사이의 맞겨룸을 늘리는데, 그들은 서로 더 싸게 팔려고 그러지 않았더라면 아예 떠올리지도 못하였을 새로운 노동의 나눔과 새로운 기술의 나아짐에 손을 뻗는다. 그 회사가 불평한 딱한 결과란 쓰는 일이 헐해진 것과 생산이 북돋워진 것이었으니, 이는 바로 정치경제학이 북돋우기를 제 큰 일로 삼는 그 두 가지 결과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이렇게 서글프게 늘어놓은 그 맞겨룸은 오래 이어지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1702년에 두 회사는 여왕을 셋째 당사자로 하는 삼자 계약으로 얼마쯤 하나가 되었고, 1708년에는 의회 법으로 온전히 한 회사로 합쳐져 지금의 이름인 동인도 무역 상인 연합 회사가 되었다. 이 법에는 따로 무역하는 거래인들이 1711년 미카엘 축일까지 제 무역을 이어 가게 하되, 그와 함께 이사들이 세 해 전에 알리고 그들의 자잘한 자본 7,200파운드를 되사들여 그로써 그 회사의 자산 전부를 합자한 자산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조항을 넣어 둘 만하다고 여겨졌다.15 같은 법으로 그 회사의 자본은 정부에 새로 빌려준 것에 따라 200만 파운드에서 320만 파운드로 늘었다. 1743년에 그 회사는 정부에 또 100만 파운드를 빌려주었다. 그러나 이 100만 파운드는 임자들에게 걷어서가 아니라 연금을 팔고 채무 증서를 발행하여 마련한 것이었으므로, 임자들이 배당을 요구할 수 있는 자산을 늘리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무역 자산을 늘렸으니, 그 회사가 상업 사업을 밀어붙이면서 입은 손해와 진 빚에 대하여 다른 320만 파운드와 꼭 같이 매였기 때문이다. 1708년부터, 또는 적어도 1711년부터 이 회사는 온갖 맞겨루는 이에게서 벗어나 잉글랜드가 동인도와 하는 상업의 독점 위에 온전히 자리 잡고서 잘되는 무역을 해 나갔고, 그 이윤에서 해마다 임자들에게 알맞은 배당을 내어 주었다. 1741년에 시작된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퐁디셰리의 프랑스 총독 뒤플렉스 씨의 야심이 그들을 카르나티크의 전쟁과 인도 군주들의 정치에 끌어들였다. 여러 번의 뚜렷한 성공과 그에 못지않게 뚜렷한 손해 끝에 그들은 마침내 그때 인도에서 저희의 으뜸가는 거류지였던 마드라스를 잃었다. 그것은 아헨 조약으로 그들에게 되돌아왔고, 이 무렵에 전쟁과 정복의 기질이 인도에 있는 그들의 고용인들을 사로잡아 그 뒤로 한 번도 그들을 떠나지 않은 듯하다. 1755년에 시작된 프랑스와의 전쟁 동안, 그들의 무기는 영국의 무기를 두루 따라다닌 행운을 함께 누렸다. 그들은 마드라스를 지켜 냈고 퐁디셰리를 빼앗았으며 콜카타를 되찾았고, 그때 말로는 한 해에 300만 파운드가 넘는다는 넉넉하고 드넓은 땅의 세입을 손에 넣었다. 그들은 여러 해 동안 이 세입을 조용히 쥐고 있었으나, 1767년에 행정부는 그들이 얻은 땅과 거기서 나오는 세입이 마땅히 국왕에게 딸린 것이라고 요구하였고, 그 회사는 이 요구에 대한 보상으로 정부에 한 해 40만 파운드를 치르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이보다 앞서 제 배당을 6퍼센트쯤에서 10퍼센트로 차츰 올려 두었으니, 곧 320만 파운드의 제 자본에 대하여 그것을 12만 8,000파운드만큼 늘려 한 해 19만 2,000파운드에서 32만 파운드로 올렸던 것이다. 그들은 이 무렵에 그것을 12.5퍼센트까지 더 올리려고 하였는데, 그리되었다면 임자들에게 해마다 치르는 것이 정부에 해마다 치르기로 합의한 것과, 곧 한 해 40만 파운드와 맞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의 합의가 이루어지기로 한 두 해 동안 그들은 잇달아 나온 두 의회 법으로 배당을 더 올리지 못하게 묶였는데, 그 법이 노린 것은 그때 600만이나 700만 파운드 스털링이 넘는다고 어림된 그들의 빚을 갚아 나가는 일을 더 빨리 해내게 하려는 것이었다. 1769년에 그들은 정부와의 합의를 다섯 해 더 이어 가기로 하면서, 그동안에는 제 배당을 12.5퍼센트까지 차츰 올리되 한 해에 1퍼센트를 넘겨 올리지는 않기로 정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배당을 올리는 것은 그것이 더 오를 수 없는 데까지 올랐을 때에도, 그들이 땅을 얻기 전에 치르던 것에 견주어 임자들과 정부에 해마다 치르는 것을 다 합하여 68만 파운드만큼밖에 늘릴 수 없었다. 그렇게 얻은 땅에서 나오는 총세입이 얼마로 여겨졌는지는 이미 말하였거니와, 1769년에 동인도 상선 크러튼든호가 가져온 셈으로는 온갖 공제와 군사 비용을 뺀 순세입이 204만 8,747파운드로 적혀 있었다. 그와 함께 그들은 한편으로는 토지에서 또 주로는 여러 거류지에 세워 둔 관세에서 나오는 43만 9,000파운드의 다른 세입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하원에서 그들의 의장이 내놓은 증언에 따르면 그때 그들의 무역 이윤은 적어도 한 해 40만 파운드에 이르렀고, 그들의 회계 책임자가 내놓은 증언에 따르면 적어도 50만 파운드였으며, 가장 낮게 잡은 셈으로도 적어도 임자들에게 치르기로 한 가장 높은 배당과 맞먹었다. 그토록 큰 세입이라면 해마다 치르는 것을 68만 파운드만큼 늘리고도 그 빚을 빨리 줄이기에 넉넉한 큰 감채 기금을 남겨 둘 수 있었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1773년에 그들의 빚은 줄기는커녕 늘어났으니, 40만 파운드를 치르는 데에서 국고에 밀린 것이 하나요, 물지 않은 관세로 세관에 밀린 것이 또 하나요, 빌린 돈으로 은행에 진 큰 빚이 또 하나요, 인도에서 그들 앞으로 떼어져 함부로 받아들여진 120만 파운드가 넘는 어음이 넷째였다. 이렇게 쌓인 요구가 그들에게 불러온 궁지 때문에 그들은 배당을 한꺼번에 6퍼센트로 줄일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자비에 제 몸을 내던져, 첫째로 약정한 한 해 40만 파운드를 더 치르지 않게 해 달라고, 둘째로 당장의 파산을 면하게 140만 파운드를 빌려 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재산이 크게 늘어난 것은 보아하니 그 고용인들에게 그 재산이 늘어난 것에 견주어서도 더 큰 헤픔의 구실과 더 큰 빼돌림의 덮개를 마련해 주었을 뿐이다. 인도에 있는 그들 고용인이 한 일과 인도에서도 유럽에서도 그들의 살림이 놓인 두루한 형편이 의회 조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결과로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들의 통치를 이루는 얼개에 아주 중요한 고침이 여럿 가해졌다. 인도에서는 그때까지 서로 아주 따로 놓여 있던 마드라스와 봄베이와 콜카타의 으뜸가는 거류지들이 네 사람의 배석 위원이 돕는 총독 아래에 놓였고, 의회는 콜카타에 머물게 될 이 총독과 평의회를 처음으로 지명하는 일을 제 것으로 삼았으니, 그 도시는 이제 예전에 마드라스가 그러하였듯이 인도에서 잉글랜드의 거류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디 그 도시와 그 언저리에서 일어나는 상업 사건을 재판하려고 세워진 콜카타 시장의 법정은 그 제국이 넓어짐에 따라 제 관할을 차츰 넓혀 왔다. 이제 그것은 그 제도가 세워진 본디의 목적으로 줄어들고 갇혔다. 그 대신에 국왕이 세우는 수석 재판관 한 사람과 재판관 세 사람으로 이루어진 새 최고 사법 법정이 세워졌다. 유럽에서는 임자가 총회에서 표를 던질 자격이 본디 그 회사 자산에서 한 몫의 값이던 500파운드에서 1,000파운드로 올랐다. 게다가 이 자격으로 표를 던지려면 그것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제 손으로 사들인 경우에는 전에 요구되던 여섯 달 대신에 적어도 한 해 동안은 지니고 있었어야 한다고 똑똑히 정하였다. 스물네 사람의 이사회는 전에는 해마다 뽑았으나, 이제는 앞으로 이사마다 네 해 임기로 뽑되 그 가운데 여섯 사람은 해마다 차례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이듬해의 새 이사 여섯을 뽑는 선거에서 다시 뽑힐 수 없도록 정하였다. 이러한 고침으로 임자 총회도 이사회도 전에 흔히 그러하던 것보다 더 무게 있고 더 흔들림 없이 움직이리라고 기대되었다. 그러나 어떤 고침으로도 그 총회와 이사회를 큰 제국을 다스리기에, 아니 그 통치에 한몫 끼기에조차 어느 모로도 알맞은 것으로 만들기란 불가능해 보이니, 그 구성원의 큰 몫은 그 제국이 번창하는 데에 걸린 이해가 언제나 너무 적어 그것을 북돋울 만한 일에 진지하게 마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큰 재산을 지닌 사람이, 어떤 때에는 적은 재산을 지닌 사람조차 인도 회사 자산에서 1,000파운드어치 한 몫을 기꺼이 사들이는 일이 흔한데, 이는 오로지 임자 총회에서 표를 하나 던짐으로써 얻으리라고 바라는 입김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인도를 노략질하는 데에 한몫을 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 노략질하는 자들을 세우는 데에 한몫을 준다. 이사회가 그 임명을 하기는 하나 그들은 반드시 얼마간 임자들의 입김 아래에 놓이는데, 임자들은 그 이사를 뽑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에는 인도에 있는 제 고용인을 세우는 일까지 뒤집어 놓기 때문이다. 이 입김을 몇 해 누리고 그로써 제 벗 몇몇의 앞길을 마련해 줄 수만 있다면, 그는 흔히 배당에도, 아니 제 표가 딛고 선 그 자산의 가치에조차 거의 마음 쓰지 않는다. 그 표가 그에게 통치의 한몫을 주는 그 큰 제국이 번창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는 아예 마음 쓰지 않는 일이 흔하다. 어떤 주권자도 제 신민이 행복한지 비참한지에, 제 영지가 나아지는지 거덜 나는지에, 제 통치가 빛나는지 부끄러운지에, 그러한 상업 회사의 임자 대부분이 거스를 수 없는 도덕적 까닭으로 그러하며 또 그러할 수밖에 없는 만큼 그토록 아주 무심하였던 적이 없고 일의 본바탕으로 보아 그러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무심함은 의회 조사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몇몇 규제 때문에 줄어들기보다는 늘어날 성싶었다. 이를테면 하원의 결의로 이렇게 선언되었으니, 정부가 그 회사에 빌려준 140만 파운드가 갚아지고 그들의 채무 증서가 150만 파운드로 줄어들면 그때에, 그리고 그때가 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이 제 자본에 대하여 8퍼센트를 나눌 수 있으며, 본국에 남는 그들의 세입과 순이윤은 무엇이든 네 몫으로 갈라 그 가운데 셋은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쓰이도록 국고에 들여보내고 넷째 몫은 채무 증서를 더 줄이거나 그 회사에 닥칠지 모를 다른 뜻밖의 급한 일을 갚는 기금으로 남겨 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회사가 제 순세입과 이윤 전부가 저희 것이고 저희 뜻대로 쓸 수 있었을 때에도 나쁜 집사이자 나쁜 주권자였다면, 그 4분의 3이 남의 것이 되고 나머지 4분의 1도 그 회사의 이로움을 위하여 쓰이기는 하되 남의 살핌을 받고 남의 승낙을 얻어야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더 나아질 성싶지는 참으로 않았다.

주

  1. 1. 옮긴이 — 저본에는 이 대목이 seen 으로 찍혀 있으나 seem 이다. 이 파일의 저본에는 이와 같이 한두 글자가 어긋난 자리가 몇 군데 더 있으며, 모두 뜻이 통하는 쪽으로 읽어 옮겼다. 곧 made add maintained 는 and, would probably he augmented 는 be, recur very frequently te this resource 는 to, exemption front trouble and front risk 는 from, should bind the rust 는 rest, new divisions or labour 는 of labour, their principal settlements or Madras 는 of Madras, govermnent 는 government, aquire 는 acquire 다.

  2. 2. 옮긴이 — 리브르는 그때 프랑스의 셈 화폐이고 마르크는 은의 무게 단위다. 은 1마르크를 28리브르로 친다는 것은 은값으로 두 나라 화폐를 견준다는 뜻이다. 피에르폴 리케(1609~1680)는 랑그도크운하를 설계하고 공사를 이끈 사람으로, 그 운하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다.

  3. 3. 옮긴이 — 괄호 안은 스미스가 본문에 중괄호로 끼워 넣은 자신의 주다. 옮긴이가 덧붙인 말이 아니다.

  4. 4. 옮긴이 — 괄호 안은 스미스가 본문에 중괄호로 끼워 넣은 자신의 주다.

  5. 5. 옮긴이 — 프랑수아 베르니에(1620~1688)는 프랑스 의사로 무굴 제국에 열두 해 남짓 머물며 여행기를 남겼다.

  6. 6. 옮긴이 — 잉글랜드에서는 교구민이 해마다 엿새 동안 길 닦는 일에 나가야 했고, 프랑스에서는 같은 부역을 코르베라 하였다. 코르베는 삯 없이 시키는 노역을 말한다.

  7. 7. 옮긴이 — 도시의 자유민 자격은 그 도시에서 장사하거나 동업조합에 들 권리를 말한다. 도제살이를 마치거나 돈을 내거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 얻었다.

  8. 8. 옮긴이 — 영국의 법령은 국왕이 왕위에 오른 뒤 몇 해째 회기에 만들어졌는지와 그 회기의 몇째 장인지로 가리킨다. 이 장에 나오는 국왕이 왕위에 오른 해는 찰스 2세 1660년(치세 연차는 아버지가 죽은 1649년부터 센다), 윌리엄 3세 1689년, 조지 2세 1727년, 조지 3세 1760년이다.

  9. 9. 옮긴이 — 조사이아 차일드(1630~1699)는 잉글랜드 상인으로 동인도회사 총재를 지냈고 『무역에 관한 새 담론』을 썼다.

  10. 10. 옮긴이 — 쿠르시터 배런은 재무 법정에 딸린 관원으로 재판보다 회계와 서류를 맡았다.

  11. 11. 옮긴이 — 권리선언은 1689년에 의회가 내놓아 뒤에 권리장전이 된 문서로, 국왕이 의회의 뜻을 거슬러 법을 멈추거나 거두지 못하게 하였다. 명예혁명은 1688년에서 1689년 사이에 제임스 2세가 물러나고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가 오른 일을 말한다.

  12. 12. 옮긴이 — 아서 도브스(1689~1765)는 허드슨만 회사의 독점을 공격한 글을 냈고, 애덤 앤더슨(1692?~1765)은 상업의 역사를 다룬 책을 냈다.

  13. 13. 옮긴이 — 아시엔토는 스페인 국왕이 제 아메리카 식민지에 노예를 대는 일을 남에게 맡기던 계약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1713년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조약으로, 이 계약이 그때 영국으로 넘어왔다.

  14. 14. 옮긴이 — 아헨 조약은 1748년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조약이다. 엑스라샤펠은 오늘날 독일의 아헨이다.

  15. 15. 옮긴이 — 미카엘 축일은 9월 29일로, 잉글랜드에서 네 분기일 가운데 하나여서 셈을 치르고 계약을 맺고 끝내는 날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