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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라는 사람 자체에 관해 몇 마디 적어 두면 영국 독자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의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는 대단히 부지런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들이었으나, 다섯 아이를 데리고 방 두 칸에서 살아야 할 만큼 가난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녁이면 아이들에게 책을 소리 내어 읽어 주며 시간을 보냈는데, 대개는 진지한 성격의 책이었다.

늘 병약하고 허약했음에도 도스토옙스키는 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의 졸업시험에서 3등으로 나왔다. 그는 그곳에서 이미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쓰기 시작한 터였다.

이 소설은 시인 네크라소프가 자기 평론지에 실어 주었고 갈채 속에 받아들여졌다. 수줍고 이름 없던 청년은 하루아침에 제법 유명한 인사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 찬란하고 성공적인 앞길이 그의 앞에 열리는 듯했으나 그 희망은 이내 꺾였다. 1849년에 그는 체포되었다.

기질로 보나 신념으로 보나 혁명가가 아니었음에도, 도스토옙스키는 푸리에와 프루동을 함께 읽으려고 모이던 젊은이들의 작은 무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검열에 반대하는 대화에 가담하고, 벨린스키가 고골에게 보낸 편지를 낭독하고, 인쇄기를 들여놓으려는 의도를 알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니콜라이 1세(모리스 베어링이 부르는 대로 하자면 그 「엄격하고 공정한 사람」) 치하에서는 이것으로 충분했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여덟 달의 옥살이 끝에 그는 다른 스물한 사람과 함께 총살을 당하러 세묘노프스키 광장으로 끌려 나갔다.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우리 머리 위에서 딱딱 끊어지는 말을 내뱉었고,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입는 흰 셔츠를 우리에게 입혔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처형을 당하도록 셋씩 묶여 말뚝에 매였습니다. 줄의 세 번째였던 나는 내게 남은 삶이 몇 분뿐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형님과 형님의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했고, 옆에 있던 플레셰예프와 두로프에게 간신히 입을 맞추어 작별을 고했습니다. 별안간 군대가 북을 두드렸고, 우리는 결박이 풀려 처형대 위로 도로 이끌려 올라갔으며, 황제 폐하께서 우리 목숨을 살려 주셨다는 통고를 받았습니다.」 형은 강제 노역형으로 감형되었다.

수인 가운데 한 사람인 그리고리예프는 결박이 풀리자마자 미쳐 버렸고, 끝내 제정신을 되찾지 못했다.

이 경험이 안긴 극심한 고통은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남겼다. 그의 종교적 기질은 마침내 그를 모든 고통을 체념으로 받아들이고 제 경우에 한해서는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는 데까지 이끌었지만, 그는 자기 글에서 이 주제로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그는 사형수가 겪는 그 끔찍한 고뇌를 묘사하고, 그런 고문을 가하는 일의 잔혹함을 역설한다. 뒤이어 시베리아에서 잡범들과 어울려 지낸 4년의 징역살이가 있었고, 그는 그곳에서 『죽음의 집』을 쓰기 시작했으며, 다시 몇 해 동안 징계 대대에서 복무했다.

체포되기 전부터 그에게는 정체 모를 신경 질환의 징후가 나타나 있었는데, 그것이 이제 격렬한 간질 발작으로 발전하여 그는 남은 평생 그 병에 시달렸다. 발작은 한 해에 서너 번 일어났고 큰 긴장이 이어지는 시기에는 더 잦았다. 1859년에 그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는 잡지를 하나 창간했다 ― 『브레먀』1였는데, 검열 당국이 오해 때문에 금지해 버렸다. 1864년에 그는 첫 아내와 형 미하일을 잃었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 있었으나 형의 빚을 갚는 일을 제 몫으로 떠맡았다. 그는 또 하나의 잡지를 창간했다 ― 『에포크』였는데, 이것도 몇 달이 못 되어 금지되었다. 그는 빚에 짓눌렸고, 형의 가족이 그에게 얹혀 있었으며, 가슴이 미어지는 속도로 글을 써야만 했고, 자기 글을 고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들 한다. 그의 만년은 두 번째 아내의 다정함과 헌신으로 크게 누그러졌다.

1880년 6월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푸시킨 기념비 제막식에서 그 유명한 연설을 했고, 사랑과 경의의 이례적인 표시 속에 맞아들여졌다.

몇 달 뒤 도스토옙스키는 죽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조문객의 무리가 그를 무덤까지 따라갔고, 그들은 「그 가엾은 사람에게 임금의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는 지금도 아마 러시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작가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설명해 보려 한 어느 러시아 비평가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그는 우리 가운데 하나였고, 우리와 같은 피와 같은 뼈를 지닌 사람이었으나, 그토록 고통받고 우리보다 그토록 훨씬 더 깊이 본 사람이어서 그의 통찰은 우리에게 지혜로 다가온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거기서 배우려고 우리가 찾아 헤매는 그 마음의 지혜로. 그의 다른 재능은 모두 자연이 그에게 준 것이지만, 이것만은 그가 스스로 얻어 낸 것이며 그것을 통해 그는 위대해졌다.」

주

  1. 1. 가넷은 도스토옙스키 형제가 낸 두 잡지의 이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옮겼다. 앞의 것은 러시아어 발음을 그대로 적었고(Vremya), 뒤의 것은 영어로 옮겼다(The Epoch). 두 이름은 모두 「시대」를 뜻한다. 한국어판은 이 비대칭을 고르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