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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4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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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1장

「아직도 꿈인가?」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는 뜻밖의 손님을 조심스럽게, 의심하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스비드리가일로프라니! 무슨 헛소리야!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마침내 어리둥절한 채 소리 내어 말했다.

손님은 이 외침에 조금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두 가지 이유로 찾아왔습니다. 첫째로는, 흥미롭고 듣기 좋은 이야기를 당신에 대해 이미 많이 들은 터라 당신과 직접 인사를 나누고 싶었고, 둘째로는 당신의 누이 되시는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의 안녕에 곧바로 관계되는 일에서 당신이 나를 돕기를 마다하지 않으시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당신의 후원이 없으면 그분은 지금 나를 곁에 오지도 못하게 하실 터이니, 나에 대해 편견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거들어 주신다면 나는 기대하기를……」

「기대가 틀렸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을 잘랐다.

「그분들은 어제야 도착하셨지요,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였지요, 나도 압니다. 나 자신은 그저께 도착했고요. 자, 이 말씀은 드리지요, 로지온 로마노비치, 나는 나 자신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편견 없이 상식으로 말해서 이 모든 일에서 내 쪽에 특별히 죄가 될 만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부디 일러 주십시오.」

라스콜니코프는 말없이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내 집에서 힘없는 처녀를 괴롭혔고 『파렴치한 제안으로 그 처녀를 모욕했다』 ― 그것입니까? (당신 말을 앞질러 두는 겁니다.) 그러나 나 역시 한 사람의 인간이며 et nihil humanum1…… 한마디로 나도 마음이 끌리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자라고(그것은 우리 뜻에 달린 일이 아니지요) 가정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문제는 이것이지요. 내가 괴물인가, 아니면 나 자신이 희생자인가? 그리고 내가 희생자라면 어떻습니까? 내 정열의 대상에게 나와 함께 아메리카로든 스위스로든 달아나자고 청했을 때, 나는 그분에게 더없이 깊은 존경을 품고 있었을 수도 있고 우리 두 사람의 행복을 밀어 올리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성은 정열의 종입니다, 아시다시피, 아니 아마도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더 큰 해를 끼치고 있었을 겁니다!」

「그건 요점이 아닙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역겨워하며 말을 잘랐다. 「그저 당신이 옳든 그르든 우리는 당신이 싫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당신과 아무 상관도 맺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나가십시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한테는 에둘러 갈 수가 없군요.」 그가 더없이 솔직한 투로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에둘러 구슬려 볼까 했는데, 당신은 대번에 옳은 자리를 잡아 버리는군요!」

「지금도 나를 에둘러 구슬리려 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드러내 놓고 웃으며 외쳤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프랑스 사람들이 bonne guerre2라고 부르는 것이고, 속임수 가운데 가장 죄 없는 것이지요!…… 그래도 당신은 내 말을 잘랐습니다. 이러나저러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정원에서 있었던 일만 아니었다면 불쾌한 일은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마르파 페트로브나도 치워 버리셨다더군요?」 라스콜니코프가 무례하게 말을 잘랐다.

「아, 그것도 들으셨군요? 하기야 들으셨겠지요……. 그러나 당신 물음에 대해서는 정말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라면 내 양심은 아주 편안하기는 합니다만. 내가 그 일로 무언가 켕기는 데가 있다고는 여기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규정대로, 순서대로였고, 의사의 검사는 푸짐한 식사와 포도주 한 병 뒤에 곧바로 물에 들어간 탓에 온 졸중이라고 진단했으며, 실상 그 밖의 것은 밝혀질 수도 없었지요. 그러나 요즘, 특히 여기로 오는 기차 안에서 내가 혼자 곱씹어 온 것을 말씀드리지요. 내가 그 모든…… 재앙에 어떤 뜻에서 도덕적으로, 이를테면 짜증을 돋운다든가 하는 식으로 한몫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웃었다.

「그런 일로 애를 쓰시다니 놀랍군요!」

「그런데 무엇이 우스우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그 사람을 회초리로 딱 두 번 때렸을 뿐이고 ― 자국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부디 나를 냉소가로 여기지는 마십시오, 그것이 나로서 얼마나 몹쓸 짓이었는지 따위는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나의, 말하자면, 그 열의를 아마 반겼으리라는 것도 나는 확실히 압니다. 당신 누이 이야기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진 뒤였고, 사흘 동안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집에 들어앉아 있어야 했으니, 읍내에 들고 나가 내보일 것이 없었던 겁니다. 게다가 그 편지로 사람들을 어지간히도 지루하게 만들어 놓은 터였습니다(그 사람이 편지를 읽고 다닌 이야기는 들으셨겠지요). 그런데 별안간 그 회초리 두 대가 하늘에서 떨어진 겁니다! 그 사람이 맨 먼저 한 일은 마차를 내오라고 이른 것이었지요……. 여자들이 아무리 분개한 티를 내 보여도 실은 모욕당하는 것을 몹시, 몹시 반가워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 예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실상 인간이라는 것들은 대체로 모욕당하기를 아주 좋아하지요, 눈여겨보신 적 있습니까? 그런데 여자들은 특히 그렇습니다. 그것이 여자들의 유일한 낙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지요.」

한때 라스콜니코프는 일어나 나가 버림으로써 이 대담을 끝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어떤 호기심이, 나아가 일종의 조심성이 그를 잠시 머무르게 했다.

「싸움을 좋아하시는 모양입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아니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르파 페트로브나와 나는 싸우는 일이 거의 없었고, 우리는 아주 화목하게 살았으며 그 사람은 늘 나를 흡족해했지요. 나는 칠 년을 함께 사는 동안 채찍을 딱 두 번 썼을 뿐입니다(성격이 아주 애매한 세 번째 경우는 세지 않고요). 처음은 혼인하고 두 달 뒤, 시골로 내려간 직후였고, 마지막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그 일입니다. 내가 그런 괴물, 그런 반동, 그런 농노 부리는 주인인 줄 아셨습니까? 하하! 그런데 말이지요, 로지온 로마노비치, 몇 해 전 저 이로운 공개3의 시절에, 이름은 잊었습니다만 어떤 귀족 하나가 기차 안에서 독일 여자를 두들겨 팼다 해서 온 신문에서, 어디서나 망신을 당한 일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시지요? 바로 그 무렵, 내 생각으로는 바로 그해에 『시대』의 파렴치한 행동이 있었지요(아시지 않습니까, 『이집트의 밤』, 그 공개 낭독 말입니다, 기억하시지요? 그 검은 눈동자 말입니다!4 아, 우리 젊은 날의 황금 같은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요?). 자, 그 독일 여자를 팬 신사로 말하자면 나는 그에게 아무 동정도 느끼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동정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이 말은 해야겠습니다, 때로는 어찌나 사람 속을 긁는 『독일 여자들』이 있는지, 제 자신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진보적인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싶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 문제를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았습니다만, 바로 그것이 참으로 인도적인 관점이지요, 장담합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또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라스콜니코프는 이자가 마음속에 굳은 목적을 품고 있으며 그것을 제 안에 감추어 둘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보았다.

「며칠 동안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그가 물었다.

「거의 아무하고도요. 내가 이렇게 붙임성 좋은 사람이라는 게 놀라우신 모양이지요?」

「아니요, 나는 당신이 지나치게 붙임성 좋은 사람이라는 게 놀라울 뿐입니다.」

「당신의 무례한 물음에 내가 기분 상해하지 않아서 말입니까? 그것입니까? 그런데 무엇 하러 기분을 상합니까? 물으신 대로 답했을 뿐인데요.」 그는 놀랄 만큼 순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꿈꾸는 듯한 투로 말을 이었다. 「특히 지금은 할 일도 없고요……. 하기야 내가 무슨 속셈이 있어 당신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더구나 당신 누이를 어떤 일로 만나고 싶다고 내가 말씀드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몹시 지루합니다. 특히 지난 사흘이 그랬지요, 그래서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로지온 로마노비치, 그러나 당신 자신도 어쩐지 몹시 이상해 보입니다. 무어라 하시든, 당신에게는 무언가 잘못된 데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요…… 바로 이 순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요즈음 들어 전반적으로 말입니다……. 자, 자, 그만두지요, 그만두겠습니다, 인상 쓰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곰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침울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당신은 곰 같은 데가 아예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가 말했다. 「실상 나는 당신이 아주 교양 있게 자란 사람이거나, 적어도 경우에 따라 그런 사람처럼 처신할 줄은 아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나는 누구의 의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건조하게, 심지어 얼마쯤 거만한 기색까지 띠고 대답했다. 「그러니 상스러움이 우리 풍토에 그토록 편리한 외투가 되어 주는 마당에, 이따금 상스럽게 굴지 못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더구나 타고나기를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말이지요.」 그가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당신은 여기 아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른바 『연줄이 없지 않은』 분이시지요. 그러면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나한테서 무엇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여기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정작 요점에는 답하지 않은 채 시인했다. 「벌써 몇몇은 만났지요. 사흘 동안 빈둥거리며 돌아다녔으니, 내가 그들을 보았거나 그들이 나를 보았거나 했습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나는 옷차림이 번듯하고 가난하지 않은 사람으로 쳐지며, 농노 해방도 나한테는 아무 타격을 주지 않았는데, 내 재산이라는 것이 주로 숲과 물가 풀밭이기 때문입니다. 수입은 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만나러 가지 않을 생각입니다, 진작부터 그들이 진저리 나던 참이거든요. 여기 온 지 사흘인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대체 어떤 도시입니까, 이곳은! 어쩌다 우리 사이에 이런 것이 생겨났는지 좀 말씀해 주십시오! 온갖 부류의 관리와 학생의 도시라니. 그래요, 팔 년 전에 여기서 빈둥거리며 놀아 댈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아주 많습니다……. 이제 내 유일한 희망은 해부학입니다, 원 참, 정말 그렇습니다!」

「해부학이라고요?」

「그런데 클럽이니 뒤소5니 열병식이니, 하기야 진보라는 것까지도 ― 뭐, 그런 것은 죄다 나 없이도 굴러갈 수 있겠지요.」 그는 이번에도 물음을 알아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게다가 사기 노름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사기 노름꾼이셨던 겁니까?」

「안 될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팔 년 전에 우리는 어엿한 한 패였고,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사교계의 사내들이었으며, 한때를 아주 잘 보냈습니다. 죄다 교양 있게 자란 사람들이었지요, 시인이며 재산가며. 그리고 실상 우리 러시아 사회에서는 대체로 한 번 두들겨 맞아 본 자들에게서 가장 훌륭한 몸가짐이 나오는 법인데, 그 점을 눈여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시골에서 망가졌습니다. 그래도 네진에서 온 비루한 그리스인 하나 때문에 빚으로 감옥에 들어가기는 했지요. 그때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나타나 그자와 흥정을 해서 은화 삼만6에 나를 사냈습니다(내가 진 빚은 칠만이었고요). 우리는 합법적인 혼인으로 맺어졌고 그 사람은 나를 보물처럼 시골로 실어 갔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나보다 다섯 살 위였습니다. 나를 몹시 아꼈지요. 칠 년 동안 나는 시골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념해 두십시오, 그 사람은 평생 내 머리 위에 서류 한 장을, 삼만 루블짜리 차용증을 들고 있었으니, 내가 무슨 일로든 뻗대기로 마음먹었다가는 대번에 덫에 걸렸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정말로 그렇게 했을 겁니다! 여자들은 그런 일에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하지요.」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 여자한테서 내빼셨겠군요?」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나를 붙들어 둔 것이 그 서류였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딱히 다른 데로 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내가 지루해하는 것을 보고 손수 외국에 다녀오라고 권하기까지 했지만, 나는 전에도 외국에 나가 보았고 거기서는 늘 속이 메스꺼웠습니다. 아무 까닭도 없이 그렇습니다만, 해돋이며 나폴리만이며 바다며 ― 그런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서글퍼집니다. 가장 역겨운 것은 정말로 서글퍼진다는 점이지요! 아니요, 집이 낫습니다. 여기서는 적어도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고 제 자신은 봐줄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북극 탐험이라도 따라나섰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j’ai le vin mauvais7인 데다 술이 싫은데 남은 것이라고는 술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해 볼 만큼은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다음 일요일에 베르크가 유수포프 공원에서 커다란 기구를 타고 올라가는데 삯을 받고 사람을 태워 준다더군요8. 정말입니까?」

「아니, 올라가실 겁니까?」

「나는…… 아니요, 아, 아닙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정말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가? 진심인가?」 라스콜니코프는 의아했다.

「아니요, 나를 붙들어 둔 것은 그 서류가 아니었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생각에 잠겨 말을 이었다. 「시골을 떠나지 않은 것은 내가 그러기로 한 것이었고, 거의 일 년 전에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내 영명축일9에 그 서류를 돌려주었으며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재산이 있었으니까요. 『보세요, 내가 당신을 이만큼 믿잖아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 그것이 실제로 그 사람이 쓴 말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다는 게 믿기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말이지요, 나는 영지를 제법 반듯하게 건사했고 이웃에서는 나를 알아줍니다. 책도 주문해 들였지요. 마르파 페트로브나는 처음에는 좋아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공부에 너무 빠질까 봐 걱정했습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몹시 그리우신 모양이군요?」

「그립냐고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정말로, 어쩌면 그런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은 유령을 믿습니까?」

「무슨 유령 말입니까?」

「그야 보통 유령이지요.」

「당신은 믿습니까?」

「안 믿는다고 해 두지요, pour vous plaire10……. 딱 잘라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보이기는 합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를 얼마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께서 찾아와 주시지요.」 그가 입을 비틀어 이상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찾아와 주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세 번 왔습니다. 처음 본 것은 바로 장례를 치른 날, 땅에 묻고 한 시간 뒤였습니다. 내가 여기로 떠나오기 전날이었지요. 두 번째는 그저께 동틀 녘, 오는 길에 말라야 비셰라 역에서였고, 세 번째는 두 시간 전에 내가 묵고 있는 방에서였습니다. 나는 혼자였습니다.」

「깨어 계셨습니까?」

「말짱히 깨어 있었습니다. 매번 눈이 또렷이 떠져 있었지요. 그 사람은 와서 잠깐 나에게 말을 하고는 문으로 나갑니다 ― 늘 문으로요. 소리가 들리다시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을까요?」 라스콜니코프가 별안간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자기가 그 말을 한 데 놀랐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었다.

「뭐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놀라 물었다. 「정말입니까? 우리 사이에 무언가 통하는 데가 있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날카롭게, 격하게 외쳤다.

「안 했던가요?」

「안 했습니다!」

「한 줄 알았는데요. 들어와서 당신이 눈을 감고 누운 채 자는 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대뜸 말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다』 하고요.」

「『이 사람』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까?」 라스콜니코프가 외쳤다.

「무슨 뜻이냐고요? 나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기도 어리둥절하다는 듯 천연스럽게 중얼거렸다.

잠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건 죄다 헛소리입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그 여자가 당신에게 오면 무슨 말을 합니까?」

「그 사람 말입니까! 믿어지십니까, 더없이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 사람이란 이상한 것이어서 ― 그것이 나를 화나게 합니다. 처음 들어왔을 때는(나는 지쳐 있었지요, 아시겠지만 장례 예배며 장례 의식이며 그 뒤의 추도연이며 말입니다. 마침내 서재에 혼자 남게 되었지요. 나는 궐련에 불을 붙이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늘 그렇게 바쁘시더니,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식당 시계 태엽 감는 걸 잊으셨어요.』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칠 년 내내 나는 주마다 그 시계 태엽을 감았고, 잊어버리면 그 사람이 늘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튿날 나는 이리로 길을 떠났습니다. 동틀 녘에 역에서 내렸는데, 지쳐서 자다 깬 참이라 눈이 반쯤 감긴 채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요. 고개를 들어 보니 별안간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카드 한 벌을 손에 들고 내 옆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길 떠나는 점을 쳐 드릴까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그 사람은 점치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쳐 달라고 하지 않은 일로 나는 두고두고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나는 겁에 질려 달아났고, 게다가 마침 종이 울렸지요. 오늘은 싸구려 밥집에서 형편없는 식사를 하고 나서 속이 몹시 더부룩한 채로 앉아 있었는데,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니 별안간 또 마르파 페트로브나였습니다. 자락이 긴 새 초록 비단 드레스를 입고 아주 맵시 있게 차려입고 들어왔지요. 『안녕하세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내 드레스가 마음에 드세요? 아니스카는 이렇게 못 만들어요.』(아니스카는 시골에서 바느질하던 계집으로, 모스크바에서 배워 온 우리 집의 옛 농노 처녀였고 제법 반반했습니다.) 그 사람은 내 앞에 서서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나는 드레스를 보고,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았지요. 『그런 하찮은 일로 나를 찾아오는 수고를 하시다니 놀랍군요, 마르파 페트로브나.』 『어머나, 당신은 무슨 일로든 당신을 성가시게 하는 것을 가만두지 않으시는군요!』 나는 약을 올리려고 말했습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싶어요, 마르파 페트로브나.』 『꼭 당신다우시네요, 아르카디 이바노비치. 아내를 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신붓감을 찾아 나서다니 당신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요. 그나마 고르기라도 잘하면 모르겠는데, 그것이 당신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행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알아요, 당신은 점잖은 사람들 모두에게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는 나가 버렸는데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헛소리 아니겠습니까, 예?」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라스콜니코프가 끼어들었다.

「나는 거짓말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 물음의 무례함을 알아채지 못한 듯 생각에 잠겨 대답했다.

「그러면 지난날에도 유령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그렇습니다, 본 적이 있지요, 그러나 평생에 딱 한 번, 육 년 전입니다. 필카라는 농노가 있었는데, 그를 묻고 난 직후에 내가 깜빡하고 『필카, 내 담뱃대!』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가 들어와서 내 담뱃대들이 있는 찬장으로 가더군요. 나는 가만히 앉아서 『저놈이 앙갚음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죽기 바로 전에 우리가 심하게 다툰 일이 있었거든요. 『어떻게 감히 팔꿈치가 뚫린 옷으로 들어오느냐?』 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나가라, 이 고얀 놈아!』 그는 돌아서서 나갔고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르파 페트로브나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추도 기도11를 올려 주고 싶었지만 부끄러웠지요.」

「의사에게 가 보셔야겠습니다.」

「당신이 말해 주지 않아도 내가 성치 않다는 것은 압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당신보다 다섯 배는 튼튼하다고 봅니다. 나는 유령이 보인다고 믿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유령이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요, 나는 믿지 않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대놓고 화를 내며 외쳤다.

「사람들은 대체로 무어라고 합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옆을 보며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당신은 병들었으니 당신에게 나타나는 것은 실체 없는 환영일 뿐이다』라고 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유령이 병든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것은 나도 인정합니다만, 그것은 유령이 병든 사람에게가 아니고서는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유령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것은 전혀 아닙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스럽게 우겼다.

「아니라고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그를 찬찬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런 논거는 어떻습니까(좀 거들어 주십시오). 유령이란 이를테면 다른 세계들의 조각이고 부스러기이며, 그 세계들의 시작입니다. 건강한 사람이야 물론 그것을 볼 까닭이 없지요, 그는 무엇보다 이 땅의 사람이고 온전함과 질서를 위해 오직 이 삶만을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병들자마자, 몸의 정상적인 지상의 질서가 깨지자마자 그는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깨닫기 시작하고, 병이 깊어질수록 그 다른 세계와 닿는 자리가 가까워져서, 사람이 죽는 순간 곧바로 그 세계로 걸어 들어가게 됩니다. 나는 오래전에 그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내세를 믿는다면 그것도 믿을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내세를 믿지 않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거미밖에 없다면, 아니면 그런 종류의 무엇밖에 없다면 어떻습니까.」 그가 별안간 말했다.

「미친 사람이군.」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우리는 영원이라는 것을 늘 우리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무엇, 광대하고 광대한 무엇으로 그려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째서 반드시 광대해야 합니까? 그 모든 것 대신에, 그것이 시골 목욕간 같은 작은 방 하나이고, 시커멓고 그을음투성이이고 구석마다 거미가 있고, 영원이란 그게 다라면 어떻습니까? 나는 이따금 그런 식으로 그려 봅니다.」

「그보다 더 옳고 더 위로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그려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라스콜니코프가 괴로움에 차서 외쳤다.

「더 옳다고요?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어쩌면 그것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말입니다, 내가 만들었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만들었을 겁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아리송한 웃음을 띠고 대답했다.

이 끔찍한 대답에 라스콜니코프는 온몸이 싸늘해졌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더니 별안간 웃기 시작했다.

「생각 좀 해 보십시오.」 그가 외쳤다. 「반 시간 전만 해도 우리는 서로 본 적도 없었고 서로를 적으로 여겼으며, 우리 사이에는 아직 매듭짓지 못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한옆으로 밀쳐 두고 우리는 추상 속으로 내달아 버렸군요! 우리가 같은 부류라고 한 내 말이 틀렸습니까?」

「실례지만,」 라스콜니코프가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오는 영광을 베푸셨는지 설명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바쁩니다,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나가 봐야 합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신 누이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가 루쥔 씨, 표트르 페트로비치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지요?」

「내 누이에 대한 물음은 일절 삼가고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아 주실 수는 없습니까? 당신이 정말 스비드리가일로프라면 어떻게 감히 내 앞에서 그 이름을 입 밖에 낼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나는 바로 그분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인데 어떻게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좋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다만 서둘러 주십시오.」

「이 루쥔 씨는 내 아내 쪽으로 나와 인척이 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그를 반 시간만 보았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당신 나름의 판단이 섰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는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게 어울리는 짝이 아닙니다. 내가 보기에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는 너그럽게, 그리고 분별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냐 하면…… 자기 가족을 위해서지요. 나는 당신에 대해 들은 모든 것으로 미루어, 세속의 이익을 희생하지 않고 이 혼담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당신이 몹시 기뻐하시리라고 짐작했습니다. 이제 당신을 직접 알고 보니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죄다 아주 순진한 소리군요…… 실례지만, 당신으로서는 뻔뻔한 소리라고 했어야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내가 내 잇속을 챙기고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마음 놓으십시오, 로지온 로마노비치, 내가 내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면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는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 심리적으로 기이한 것을 하나 털어놓지요. 조금 전에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 대한 내 사랑을 변호하면서 나는 나 자신이 희생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리자면 나는 지금 사랑의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실상 놀라고 있지요, 정말로 무언가를 느끼기는 했었으니까요……」

「한가함과 방탕 덕분이었겠지요.」 라스콜니코프가 끼어들었다.

「나는 분명 한가하고 방탕합니다, 그러나 당신 누이에게는 나 같은 자조차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자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죄다 헛소리라는 것을 이제 나 자신이 압니다.」

「그것을 안 지 오래됐습니까?」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만, 아주 확실해진 것은 그저께, 페테르부르크에 닿은 바로 그 순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도 모스크바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의 손을 얻으려고, 루쥔 씨를 밀어내려고 가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었지요.」

「말을 끊어 죄송합니다만, 부디 짧게 줄이고 찾아오신 용건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나는 바쁩니다, 나가 봐야 합니다……」

「더없이 기꺼이 그러지요. 여기 닿아서 어떤……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니, 미리 처리해 두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아이들은 친척 아주머니에게 맡겨 두었고, 살림은 넉넉히 마련되어 있으며, 그 아이들에게 내가 몸소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나야 어지간히도 훌륭한 아비가 되겠지요! 나는 일 년 전에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준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실례합니다, 이제 곧 본론으로 갑니다. 하게 될지도 모를 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루쥔 씨 문제도 매듭짓고 싶습니다. 그를 그토록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마르파 페트로브나와 다투었기 때문이지요, 그 혼담을 그 사람이 요리해 차려 냈다는 것을 알고서 말입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주선으로, 원하신다면 당신이 보는 앞에서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를 만나, 우선 그분이 루쥔 씨에게서 얻을 것이라고는 해악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설명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다음 지난날의 모든 불쾌한 일에 대해 용서를 빌고, 만 루블을 선물로 드려서 루쥔 씨와의 파혼을 거들고 싶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분 자신도 길만 보인다면 그 파혼을 싫어하지는 않을 듯하니까요.」

「당신은 확실히 미쳤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화가 났다기보다 놀라서 외쳤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합니까!」

「당신이 나에게 소리를 지르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째로, 나는 부자가 아닙니다만 이 만 루블은 완전히 쓸 데가 없는 돈이고, 나에게는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가 받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더 어리석은 방식으로 흩어 버리겠지요. 그것이 첫째입니다. 둘째로, 내 양심은 아주 편안합니다, 나는 아무 속셈 없이 이 제안을 합니다. 당신은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끝내는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도 당신도 알게 될 겁니다. 요점은 이것이지요, 내가 몹시 존경하는 당신 누이에게 내가 실제로 얼마간의 괴로움과 불쾌함을 끼쳤고, 그래서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나는 원한다는 것입니다 ― 보상하기를 원하는 것도, 그 불쾌함을 갚아 드리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분에게 이로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내가 결국 해악밖에는 끼치지 못할 특권을 타고난 자는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내 제안에 백만분의 일이라도 사욕이 섞여 있었다면 나는 그것을 이렇게 드러내 놓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섯 주 전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내놓았으면서 이제 와 겨우 만 루블만 내놓지도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나는 어쩌면 머지않아 어떤 젊은 아가씨와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그것만으로도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게 무슨 흑심이 있다는 의심은 막아 줄 것입니다. 끝으로 이 말씀은 드리지요. 루쥔 씨와 결혼한다 해도 그분은 어차피 돈을 받는 것이며, 다만 다른 남자에게서 받는 것일 뿐입니다. 화내지 마십시오, 로지온 로마노비치, 차분하고 조용하게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스비드리가일로프 자신은 이 말을 하는 동안 더없이 차분하고 조용했다.

「그만 말씀하시기를 청합니다.」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용서할 수 없는 무례입니다.」

「조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람은 제 이웃에게 해악밖에 끼칠 수 없고, 하찮은 관습의 형식 때문에 손톱만 한 선을 행하는 것조차 막힌다는 말이 되지요. 그건 터무니없습니다. 이를테면 내가 죽어서 유언으로 그 돈을 당신 누이에게 남긴다면, 설마 그분이 그것을 마다하겠습니까?」

「아마 마다할 겁니다.」

「아, 아닐걸요, 정말로. 하기야 당신이 마다하신다면 그러시지요, 만 루블이 경우에 따라 아주 요긴한 물건이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내가 한 말을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에게 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아니요, 전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로지온 로마노비치, 나는 몸소 그분을 만나려고 애써야 할 것이고, 그러느라 그분을 성가시게 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전하면 그분을 만나려 들지 않겠습니까?」

「정말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분을 한 번 더 몹시 보고 싶기는 합니다.」

「기대하지 마십시오.」

「유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될지도 모르지요.」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일어나 모자를 집었다. 「딱히 당신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아니었고 그럴 셈을 하고 온 것도 아닙니다…… 하기야 오늘 아침에 당신 얼굴이 몹시 인상에 남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아침에 어디서 나를 보았습니까?」 라스콜니코프가 불안하게 물었다.

「우연히 보았습니다……. 당신에게 나와 닮은 데가 있다는 느낌이 자꾸 들더군요……. 그러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주제넘게 파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사기 노름꾼들과도 무던히 잘 지냈고, 내 먼 친척이 되는 대단한 어른 스비르베이 공작을 한 번도 지루하게 한 적이 없으며, 프릴루코바 부인의 기념첩에 라파엘로의 성모에 대해 적어 넣을 줄도 알았고, 칠 년 동안 마르파 페트로브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옛날에는 건초 시장의 뱌젬스키의 집12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으며, 어쩌면 베르크와 함께 기구를 타고 올라갈지도 모릅니다.」

「아, 알겠습니다. 여행은 곧 떠나십니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슨 여행 말입니까?」

「그야 그 『여행』 말입니다, 당신이 손수 말씀하셨잖습니까.」

「여행이요? 아, 그렇지요. 내가 여행 이야기를 했지요. 자, 그건 넓은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기만 한다면 말이지요.」 그가 덧붙이고는 별안간 크고 짧은 웃음을 한 번 터뜨렸다. 「어쩌면 여행 대신에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에게 혼처를 맞춰 주고 있거든요.」

「여기서요?」

「그렇습니다.」

「어느 틈에 그럴 짬이 있었습니까?」

「그건 그렇고 나는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를 한 번 보고 싶어 몹시 애가 탑니다. 간곡히 청합니다. 자, 그럼 우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그렇지. 잊은 것이 있군요. 당신 누이에게 전해 주십시오, 로지온 로마노비치,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유언에서 그분을 잊지 않고 삼천 루블을 남겼다고요. 그것은 아주 확실합니다. 마르파 페트로브나가 죽기 일주일 전에 그렇게 정해 두었고, 그 일은 내가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도티야 로마노브나는 두세 주 안에 그 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해 주십시오. 자, 삼가 물러갑니다. 나는 당신 아주 가까이에 묵고 있습니다.」

나가던 길에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문간에서 라주미힌과 맞부딪쳤다.

주

  1. 1. et nihil humanum ― 라틴어. 테렌티우스의 희극에 나오는 「나는 인간이니 인간의 일로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고 여긴다」에서 온 구절로, 저본은 「그리고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까지만 적고 말을 끊는다.

  2. 2. bonne guerre ― 프랑스어로 「정정당당한 싸움」. 술수를 쓰되 규칙은 어기지 않았다는 뜻의 관용구다.

  3. 3. 이로운 공개 ― 크림 전쟁 패전 뒤인 185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에서 검열이 느슨해지고 신문이 관리와 지주의 비행을 들추기 시작한 시기를 가리킨다. 당시 이 풍조를 부르던 말(글라스노스트)을 저본은 publicity로 옮겼다.

  4. 4. 『시대』 ― 1861년 페테르부르크에서 나오던 주간지. 그해 어느 문학의 밤에서 한 부인이 푸시킨의 미완성 작품 『이집트의 밤』을 낭독하자 이 잡지가 그 부인을 조롱하는 글을 실었고, 온 언론이 들고일어나 한동안 논쟁이 이어졌다. 도스토옙스키도 자기 잡지에서 그 부인을 편들었다. 「검은 눈동자」는 그 조롱하는 글이 부인을 묘사한 말이다.

  5. 5. 뒤소 ― 당시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프랑스식 고급 음식점.

  6. 6. 은화 ― 당시 러시아에서는 은화로 셈한 루블과 지폐로 셈한 루블의 값이 달라, 액수를 말할 때 어느 쪽인지를 밝혔다. 은화 쪽이 값이 나갔다.

  7. 7. j’ai le vin mauvais ― 프랑스어로 「나는 술버릇이 사납다」.

  8. 8. 베르크 ― 당시 페테르부르크에서 삯을 받고 기구 비행을 보여 주던 흥행사. 유수포프 공원은 폰탄카 강가에 있던 공원으로 기구 띄우기가 자주 열렸다.

  9. 9. 영명축일 ― 정교회에서 자기 세례명과 같은 이름을 가진 성인을 기리는 날. 러시아에서는 생일보다 이날을 더 크게 쇠어 선물을 주고받았다.

  10. 10. pour vous plaire ― 프랑스어로 「당신 좋으시라고」.

  11. 11. 추도 기도 ― 정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해 따로 올리는 기도 예배(파니히다). 유족이 성당이나 집에서 사제를 청해 올렸다.

  12. 12. 뱌젬스키의 집 ― 건초 시장 부근에 있던 뱌젬스키 공작 소유의 큰 셋집 무리.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굴로, 날품팔이와 부랑자와 도둑이 뒤섞여 묵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