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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2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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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장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다. 이따금 잠에서 깨는 듯했고 그럴 때면 밤이 한참 깊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며, 마침내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도 그는 방금 전까지의 망각에서 아직 멍한 채로 반듯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거리에서 무섭고 절망에 찬 비명이 날카롭게 솟아올랐는데, 실은 밤마다 두 시가 지나면 그의 창 밑에서 들려오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지금 그를 깨웠다.

「아, 술꾼들이 술집에서 나오는구나.」 그는 생각했다. 「두 시가 지났군.」 그러고는 누가 소파에서 잡아끌기라도 한 듯 대번에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두 시가 지났다고!」

그는 소파에 앉았다 ―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떠올랐다! 한꺼번에, 한 번의 섬광으로, 모든 것이 떠올랐다.

첫 순간 그는 자기가 미쳐 가고 있는 줄 알았다. 무시무시한 한기가 그를 덮쳤으나 그 한기는 잠든 사이 훨씬 전부터 시작된 열에서 온 것이었고, 이제 그는 별안간 격렬한 오한에 사로잡혀 이가 딱딱 부딪치고 사지가 온통 떨렸다. 그는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 집 안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제 자신과 방 안의 모든 것을 둘러보며, 어떻게 어젯밤에 문도 걸지 않고 들어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옷도 벗지 않고 모자조차 벗지 않은 채 소파에 몸을 내던질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모자는 벗겨져 베개 옆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누가 들어왔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가 취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그는 창가로 달려갔다. 빛은 충분했고, 그는 서둘러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입고 있는 옷을 죄다 살피기 시작했다. 흔적은 없는가? 그러나 그런 식으로 될 일이 아니어서, 그는 추위에 떨면서 옷을 전부 벗고 다시 살피기 시작했고, 마지막 실오라기와 누더기 한 조각까지 모조리 뒤집어 보았으며, 제 자신을 믿지 못해 같은 수색을 세 번이나 되풀이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듯했고, 흔적이라고는 단 한 군데, 바지의 해진 가장자리에 엉겨 붙은 굳은 핏방울 몇 개뿐이었다. 그는 큼직한 접칼을 집어 들어 해진 실밥을 잘라 냈다. 그 밖에는 더 없는 듯했다.

문득 그는 노파의 궤에서 꺼내 온 지갑과 물건들이 아직 주머니에 그대로 들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까지 그것들을 꺼내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옷을 살피는 동안에도 그것들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이게 무슨 꼴인가? 그는 당장 달려들어 그것들을 끄집어내 탁자 위에 내던졌다. 죄다 꺼내고 나서 남은 것이 없는지 확인하려고 주머니를 뒤집어 보기까지 한 다음, 그는 그 무더기를 통째로 구석으로 날랐는데, 그 벽 아래쪽에서는 벽지가 떨어져 너덜너덜 늘어져 있었다. 그는 벽지 밑 구멍에 물건을 죄다 쑤셔 넣기 시작했다. 「들어갔다! 전부 눈에 안 띄게, 지갑까지!」 그는 기쁘게 생각하며 일어나, 어느 때보다 불룩해진 구멍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별안간 그는 공포로 온몸을 떨었다. 「맙소사!」 그는 절망에 빠져 속삭였다. 「내가 왜 이러지? 저게 숨긴 건가? 저게 물건을 숨기는 방법인가?」

그는 장신구 따위를 숨겨야 하리라고는 계산에 넣지 않았었다. 돈만 생각했기 때문에 숨길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지금 내가 뭐가 기쁘다는 거지?」 그는 생각했다. 「저게 물건을 숨긴 건가? 이성이 나를 버리고 있다 ― 그냥!」

그는 기진해서 소파에 주저앉았고, 곧바로 또 한 차례 견딜 수 없는 오한에 흔들렸다. 그는 기계적으로 곁의 의자에서, 거의 누더기가 다 되었으나 아직 온기는 남아 있는 낡은 학생 겨울 외투를 끌어당겨 뒤집어썼고, 그러자 다시 졸음과 착란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번째로 벌떡 일어났고, 곧바로 미친 듯이 제 옷에 달려들었다.

「아무것도 해 놓지 않고 어떻게 또 잠이 들 수 있었지? 그래, 그래. 겨드랑이 밑의 올가미를 떼지 않았어! 잊고 있었다, 그런 것을 잊고 있었다니! 그런 증거를!」

그는 올가미를 뜯어내 서둘러 조각조각 자르고는 그 조각들을 베개 밑 속옷 사이에 던져 넣었다.

「찢어진 속옷 조각쯤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심을 살 리 없지.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아무렴!」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그렇게 되뇌었고, 고통스러운 집중력으로 다시 사방을, 바닥을, 어디든 둘러보며 잊어버린 것이 하나도 없는지 확인하려 애썼다. 모든 능력이, 기억조차, 가장 단순한 사고의 힘조차 저를 저버리고 있다는 확신이 견딜 수 없는 고문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벌써 시작된 건 아니겠지! 설마 벌써 내 벌이 나에게 내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

바지에서 잘라 낸 해진 헝겊들이 정말로 방 한가운데 바닥에, 누가 들어오면 바로 보일 자리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야!」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다시 외쳤다.

그때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들어왔다. 어쩌면 옷이 온통 피투성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얼룩이 아주 많은데 자기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감각이 무너져 가고 산산이 부서지고 있어서…… 이성이 흐려져서……. 문득 그는 지갑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그렇다면 주머니에도 피가 묻었겠구나, 젖은 지갑을 주머니에 넣었으니까!」

순식간에 그는 주머니를 뒤집었고, 그렇다! ― 흔적이, 주머니 안감에 얼룩이 있었다!

「그러니 이성이 아주 나를 버린 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알아챘으니 아직 분별도 기억도 남아 있는 거다.」 그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기양양하게 생각했다. 「그저 열 때문에 약해진 것뿐이야, 한순간의 착란이야.」 그러고는 바지 왼쪽 주머니의 안감을 통째로 뜯어냈다. 바로 그 순간 햇빛이 그의 왼쪽 장화 위에 떨어졌다. 장화 밖으로 비어져 나온 양말에 흔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장화를 벗어 던졌다. 「흔적이 맞다! 양말 끝이 피에 흠뻑 젖었어.」 그 웅덩이를 조심성 없이 밟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걸 이제 어쩐다? 양말과 헝겊과 주머니는 어디다 둔다?」

그는 그것들을 죄다 두 손에 그러모아 쥐고 방 한가운데 섰다.

「난로에? 하지만 저들은 무엇보다 먼저 난로를 뒤질 것이다. 태워? 하지만 무엇으로 태운단 말인가? 성냥조차 없는데. 아니야, 나가서 어디든 내다 버리는 게 낫다. 그래, 내다 버리는 게 낫다.」 그는 다시 소파에 앉으며 되뇌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이 순간에, 꾸물거리지 말고……」

그러나 머리는 그 대신 베개 위로 떨어졌다. 다시 견딜 수 없는 얼음 같은 오한이 그를 덮쳤다. 다시 그는 외투를 끌어당겨 덮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몇 시간이나, 그는 「지금 당장, 이 순간에 어디로든 나가서 그것을 죄다 던져 버리자, 눈에 안 띄게 없애 버리자, 당장, 당장!」 하는 충동에 시달렸다. 여러 번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일어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를 온전히 깨운 것은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열어, 어서, 죽었어 살았어? 이 사람은 여기서 잠만 잔다니까!」 나스타시야가 주먹으로 문을 쿵쿵 치며 소리쳤다. 「며칠씩 내리 개처럼 코를 골아 대지. 개가 따로 없어. 열라니까. 열 시가 넘었어.」

「집에 없는지도 모르지요.」 사내 목소리가 말했다.

「아! 수위 목소리다……. 저자가 뭘 원하는 거지?」

그는 벌떡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심장이 뛰는 것이 그대로 통증이었다.

「그럼 누가 문을 걸었겠어?」 나스타시야가 받아쳤다. 「제 몸을 가두고 자는 버릇까지 들었구먼! 누가 훔쳐 갈 게 있다고! 열어, 멍청아, 일어나!」

「저들이 뭘 원하는 거지? 수위는 왜? 죄다 들통났다. 버틸까 열까? 될 대로 되라지!……」

그는 반쯤 몸을 일으켜 앞으로 수그리고 문고리를 벗겼다.

방이 어찌나 작은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고도 걸쇠를 풀 수 있었다. 그렇다, 수위와 나스타시야가 거기 서 있었다.

나스타시야가 이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반항적이고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로 수위를 흘끗 보았고, 수위는 아무 말 없이 병 봉랍으로 봉한 잿빛 종이 한 장을 접은 채로 그에게 내밀었다.

「사무소에서 온 통지서요.」 그는 종이를 건네며 알렸다.

「무슨 사무소요?」

「경찰서로 나오라는 소환장이지요, 뻔하지 않습니까. 어느 사무소인지야 아실 텐데.」

「경찰서요?…… 무슨 일로요?……」

「내가 어떻게 압니까? 오라니까 가시면 되지요.」

사내는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더니 방 안을 둘러보고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이 사람 영락없이 병이 났네!」 나스타시야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수위가 잠깐 고개를 돌렸다. 「어제부터 열이 났다니까.」 그녀가 덧붙였다.

라스콜니코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종이를 뜯지도 않은 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니 일어나지 마.」 나스타시야는 그가 소파에서 발을 내리는 것을 보고 딱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프면 가지 마. 그렇게 급할 것도 없어. 손에 든 건 뭐야?」

그는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에는 바지에서 잘라 낸 조각들과 양말과 주머니 안감 나부랭이가 쥐여 있었으니, 그러니까 그는 그것들을 손에 그러쥔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일을 곰곰이 돌이켜 보다가 그는, 열에 들떠 반쯤 깨었을 때 이것들을 손에 꽉 그러쥐고는 그대로 다시 잠들어 버렸다는 것을 떠올렸다.

「저 넝마 좀 봐, 저런 걸 주워 모아서는 보물이라도 쥔 것처럼 끌어안고 자다니……」

그러고는 나스타시야가 그 발작 같은 낄낄거림으로 넘어갔다.

그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외투 밑으로 밀어 넣고 그녀에게 눈을 박았다. 그 순간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곧 붙들려 갈 사람을 저런 식으로 대하지는 않으리라는 것만은 느꼈다. 「하지만…… 경찰은?」

「차나 좀 마시지! 응? 내가 가져다줄게, 좀 남았어.」

「아니요…… 갑니다. 지금 곧 가겠어요.」 그는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니, 계단도 못 내려갈 텐데!」

「갈 거예요.」

「맘대로 해.」

그녀는 수위를 따라 나갔다.

그는 곧바로 밝은 데로 달려가 양말과 헝겊을 살폈다.

「얼룩이 있긴 한데 그리 눈에 띄지는 않는다. 죄다 흙이 묻고 문질러져서 이미 빛깔이 바랬다. 미리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스타시야도 멀리서는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다행히도!」 그러고 나서 그는 떨면서 통지서의 봉인을 뜯고 읽기 시작했다. 한참을 읽고 나서야 겨우 뜻이 들어왔다. 그날 아홉 시 반까지 구역 서장실로 출두하라는, 관할 경찰서의 평범한 소환장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언제 있었지? 나는 경찰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리고 왜 하필 오늘인가?」 그는 괴로운 당혹 속에서 생각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저 빨리 끝나기만 한다면!」

그는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으려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 기도라는 생각이 우스워서가 아니라 제 자신이 우스워서였다.

그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망했으면 망한 거지, 상관없다! 양말을 신을까?」 그는 문득 생각했다. 「신으면 먼지가 더 묻어서 흔적이 없어지겠지.」

그러나 신자마자 그는 혐오와 공포에 사로잡혀 다시 벗어 버렸다. 벗어 던지고 나서 다른 양말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쳐 그는 그것을 다시 집어 들어 신었다 ―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전부 관습이다, 전부 상대적인 거다, 그저 보기 나름이다.」 그는 번개처럼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것은 마음의 맨 위 표면을 스쳐 갔을 뿐이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자, 신었다! 결국 신고야 말았구나!」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곧 절망이 따라왔다.

「아니야, 이건 내게 너무 벅차다……」 그는 생각했다. 다리가 떨렸다. 「무서워서다.」 그는 중얼거렸다. 머리가 핑 돌고 열로 지끈거렸다. 「함정이다! 나를 저기로 꾀어내서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는 거다.」 그는 계단으로 나서며 그렇게 곱씹었다 ― 「무엇보다 나쁜 건 내 머리가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야……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불쑥 내뱉을지도 몰라……」

계단에서 그는 물건들을 벽 구멍에 그대로 둔 채 나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내가 나간 사이에 뒤지려고 일부러 그러는 건지도 모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그를 사로잡은 절망은, 굳이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비참의 냉소랄 것은 어찌나 깊었던지, 그는 손을 한 번 내젓고는 그대로 갔다. 「그저 끝나기만 한다면!」

거리는 또다시 견딜 수 없이 더웠다. 그 며칠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또다시 먼지와 벽돌과 회반죽, 또다시 가게와 선술집에서 풍기는 악취, 또다시 취한 사내들과 핀란드 행상들과 반쯤 부서진 삯마차들. 햇빛이 눈으로 곧장 쏟아져 들어 눈을 뜨고 내다보기가 아플 지경이었고, 그는 머리가 도는 것을 느꼈다 ― 열이 있는 사람이 화창한 날 거리로 나섰을 때 으레 느끼는 그것이었다.

그 거리로 꺾어져 들어가는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떨리는 괴로움 속에서 거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고…… 그 집을 보았고…… 곧바로 눈을 돌려 버렸다.

「심문을 받으면 어쩌면 그냥 말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경찰서에 가까워지면서 그는 생각했다.

경찰서는 4분의 1마일쯤1 떨어져 있었고, 최근에 새 건물 4층의 새 사무실로 옮겨 온 참이었다. 그는 예전 사무소에 한 번 잠깐 들른 적이 있었으나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대문으로 들어서다가 그는 오른쪽에서 계단 하나를 보았는데, 농사꾼 하나가 손에 장부를 들고2 마침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참이었다. 「수위겠지. 그러니 사무소는 여기다.」 그러고는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묻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죄다 털어놓자……」 그는 4층에 이르며 생각했다.

계단은 가파르고 좁았으며 더러운 물로 온통 질척거렸고, 각 층 셋집의 부엌이 계단 쪽으로 문을 내고 있는 데다 그 문들이 거의 하루 종일 열려 있어서 지독한 냄새와 열기가 들어차 있었다. 계단에는 장부를 옆구리에 낀 수위들이 오르내리고 순경들과 온갖 부류의 남녀가 붐비고 있었다. 사무실 문 또한 활짝 열려 있었고 안에는 농사꾼들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 역시 숨이 막히도록 더웠고, 새로 단장한 방에서 나는 갓 칠한 페인트와 삭은 기름의 메스꺼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잠시 기다리다가 그는 다음 방으로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방은 하나같이 작고 천장이 낮았다. 무서운 조급함이 그를 자꾸만 앞으로 끌었으나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고, 두 번째 방에서는 서기 몇이 앉아 글을 쓰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그보다 나을 것도 없고 생김새도 어지간히 별난 자들이었다. 그는 그중 하나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오?」

그는 받은 통지서를 내보였다.

「학생이오?」 사내가 통지서를 흘끗 보며 물었다.

「예, 전에 학생이었습니다.」

서기는 그를 쳐다보았으나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유난히 부스스한 자였고, 눈에는 한 가지 생각에 붙들린 사람의 빛이 있었다.

「이자한테서는 아무것도 나올 게 없겠군,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으니까.」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저기 수석 서기한테 가 보시오.」 서기가 가장 안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그 방으로 들어갔다 ― 순서로 치면 네 번째 방이었다. 작은 방이었고 사람으로 꽉 차 있었는데, 바깥 방들보다는 옷차림이 나았다. 그중에 여자가 둘 있었다. 하나는 상복 차림의 초라한 여자로, 수석 서기 맞은편 탁자에 앉아 그가 부르는 대로 무언가를 받아 적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몹시 뚱뚱하고 살집 좋은 여자로, 자줏빛이 도는 붉은 얼굴에 얼룩이 져 있었고, 지나칠 만큼 화려하게 차려입고 가슴에는 받침 접시만 한 브로치를 달고서 한쪽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수석 서기에게 통지서를 들이밀었다. 서기는 그것을 흘끗 보고 「잠깐 기다리시오」 하고는 상복 입은 여자를 마저 상대했다.

그는 한결 편하게 숨을 쉬었다. 「그 일일 리가 없다!」

조금씩 그는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고, 용기를 내라고 침착하라고 스스로를 거듭 다그쳤다.

「어리석은 짓 하나, 사소한 부주의 하나로도 나는 나를 드러내고 만다! 흠…… 여기 공기가 없는 게 아쉽군.」 그는 덧붙였다. 「숨이 막혀……. 가뜩이나 도는 머리가 더 도는군…… 정신도……」

그는 무서운 내적 혼란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제력을 잃을까 봐 두려웠고, 무엇이든 붙들어 거기에 정신을 붙들어 매려고, 그것도 아주 상관없는 무언가에 붙들어 매려고 애썼지만 도무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수석 서기만은 그의 관심을 크게 끌어서, 그는 그를 꿰뚫어 보고 그 얼굴에서 무언가를 알아내기를 자꾸만 바랐다.

그는 아주 젊은 사내로 스물둘쯤 되어 보였고, 가무잡잡하고 잘 움직이는 얼굴은 나이보다 늙어 보였으며, 유행을 좇아 멋을 부린 차림에 가르마를 한가운데 타서 잘 빗어 기름을 바르고, 깨끗이 씻은 손가락에는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조끼에는 금줄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방에 있던 어느 외국인에게 프랑스어로 두어 마디 했는데, 꽤 정확하게 말했다.

「루이자 이바노브나, 앉으셔도 됩니다.」 그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자줏빛 얼굴의 여자에게 무심하게 말했다. 여자는 옆에 의자가 있는데도 감히 앉지 못하겠다는 듯 여태 서 있었던 것이다.

「Ich danke.」3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비단 스치는 소리와 함께 사뿐히 의자에 내려앉았다. 흰 레이스로 단을 두른 하늘빛 드레스가 기구처럼 탁자 둘레에 부풀어 올라 방의 거의 절반을 채웠다. 여자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러나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그토록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여자는 분명 민망한 모양이어서, 그 미소는 뻔뻔하면서도 비굴했으나 거기에는 감출 수 없는 불안이 배어 있었다.

상복 입은 여자가 마침내 일을 마치고 일어섰다. 그때 별안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장교 하나가 걸음마다 어깨를 제 나름의 방식으로 흔들면서 아주 거들먹거리며 걸어 들어와서는, 모표가 달린 제모를 탁자에 던지고 안락의자에 앉았다. 자그마한 여자는 그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펄쩍 뛰다시피 일어나 넋이 나간 듯 무릎을 굽혀 절하기 시작했으나, 장교는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그녀는 그가 있는 앞에서 감히 다시 앉지 못했다. 그가 부서장였다. 그는 얼굴 양옆으로 수평으로 뻗친 불그스름한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이목구비가 유난히 작아서 어느 정도의 오만함 말고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했다.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곁눈질로, 꽤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는데, 그자는 옷차림이 너무나 형편없는데도 그 굴욕스러운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몸가짐이 옷차림과는 전혀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조심성 없이 그에게 아주 길고 곧은 눈길을 박아 놓는 바람에 그는 대놓고 모욕을 당한 기분이 되었다.

「무슨 일인가?」 그는 저런 누더기 같은 자가 제 눈길의 위엄에 소멸당하지 않은 것이 놀랍다는 듯 고함쳤다.

「소환을 받아서…… 통지서를 받고……」 라스콜니코프가 더듬거렸다.

「받을 돈을 받아 내는 건입니다, 저 학생한테서요.」 수석 서기가 서류에서 몸을 떼며 황급히 끼어들었다. 「여기!」 그러고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서류 한 장을 던지며 자리를 짚어 주었다. 「그걸 읽어 보시오!」

「돈? 무슨 돈?」 라스콜니코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확실히 그 일이 아니구나.」

그리고 그는 기쁨에 떨었다. 갑자기 강렬하고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가 밀려왔다. 등에서 짐이 벗겨졌다.

「그런데 몇 시에 출두하라고 명받으셨나?」 부서장가 무슨 까닭인지 점점 더 분해하는 기색으로 고함쳤다. 「아홉 시에 오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이 열두 시야!」

「통지서는 십오 분 전에야 저한테 왔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어깨 너머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제 자신도 놀랍게 그 역시 갑자기 화가 났고 거기서 어떤 쾌감마저 느꼈다. 「열병에 걸린 몸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고함치지 말게!」

「고함치지 않습니다. 아주 조용히 말하고 있고, 나한테 고함을 지르는 건 그쪽입니다. 나는 학생이고, 누구에게도 고함을 듣지 않습니다.」

부서장는 어찌나 화가 났던지 처음 한동안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그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일어났다.

「입 다물게! 여기는 관청이야. 건방 떨지 말게!」

「당신도 관청에 있습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외쳤다. 「그런데 고함을 치는 데다 담배까지 피우고 있으니, 여기 있는 우리 모두를 업신여기는 겁니다.」

그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말할 수 없는 만족을 느꼈다.

수석 서기가 웃음을 띠고 그를 보았다. 화가 난 부서장는 분명 말문이 막혔다.

「그건 자네가 상관할 바 아니야!」 그가 마침내 부자연스럽게 큰 소리로 외쳤다. 「요구받은 진술서나 쓰게. 저자한테 보여 주게,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자네를 걸어 고소가 들어와 있어! 빚을 갚지 않는다는군! 대단한 물건이야!」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듣고 있지 않았고, 설명을 찾으려는 조급함으로 서류를 냉큼 붙들어 한 번 읽고 두 번 읽었으나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그가 수석 서기에게 물었다.

「차용증에 따른 채권 추심, 곧 지급 청구입니다. 귀하는 비용과 소송비 일체를 포함해 갚든지, 아니면 언제 갚을 수 있는지 서면으로 진술하고 동시에 갚기 전에는 수도를 떠나지 않으며 재산을 팔거나 감추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합니다. 채권자는 귀하의 재산을 팔 수 있고 법에 따라 귀하를 상대로 절차를 밟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닙니다. 여기, 법적으로 공증되고 지급기가 된 백십오 루블짜리 차용증이 추심을 위해 우리에게 들어와 있습니다. 귀하가 아홉 달 전에 8등관4 자르니친의 미망인에게 써 준 것을, 그 자르니치나 미망인이 체바로프 씨에게 넘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로 귀하를 소환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제 하숙집 주인입니다!」

「하숙집 주인이면 어떻다는 겁니까?」

수석 서기는 너그럽게 딱하다는 듯한 미소를 띠고, 동시에 어떤 승리감을 담아, 처음으로 포화를 겪는 신병을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 「자, 이제 기분이 어떤가?」 하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차용증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고 지급 청구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지금 그런 것이 걱정할 값어치가 있는가, 눈길 한 번 줄 값어치라도 있는가! 그는 서 있었고, 읽었고, 들었고, 대답했고, 스스로 묻기까지 했지만 전부 기계적이었다. 압도적인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구원의, 안전의 의기양양한 감각, 그것이 그 순간 그의 영혼 전체를 채우고 있었고 거기에는 앞일에 대한 생각도, 분석도, 억측도 추측도, 의심도 물음도 없었다. 그것은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순전히 본능적인 기쁨의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사무실 안에서 천둥소리 같은 일이 벌어졌다. 라스콜니코프의 무례에 아직도 흔들린 채 씩씩거리며 상한 위신을 어떻게든 세우고 싶어 하던 부서장가, 들어올 때부터 줄곧 더없이 멍청한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 딱한 화려한 차림의 여자에게 달려든 것이었다.

「이 뻔뻔한 계집!」 그가 별안간 목청껏 고함쳤다. (상복 입은 여자는 사무실을 떠난 뒤였다.) 「어젯밤 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응! 또 추태를 부렸어, 네가 온 거리의 망신거리야. 또 싸움질에 술판이지. 교화소에 가고 싶은가? 내가 열 번은 일렀지, 열한 번째는 봐주지 않겠다고! 그런데 또, 또, 이…… 이……!」

서류가 라스콜니코프의 손에서 떨어졌고, 그는 그토록 함부로 다루어지는 화려한 차림의 여자를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는 영문을 알아차렸고 곧바로 이 소동에서 분명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해서, 즐겁게 귀를 기울였고 어찌나 즐거운지 웃고 또 웃고 싶었다…… 신경이란 신경이 죄다 곤두서 있었다.

「일리야 페트로비치!」 수석 서기가 걱정스레 입을 떼다가 말을 삼켰으니, 격분한 보좌는 힘으로 누르지 않는 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려한 차림의 여자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그 폭풍 앞에서 정말로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쏟아지는 욕설이 많아지고 거세질수록 그 얼굴은 더 상냥해졌고, 그 무서운 보좌에게 아낌없이 쏟아붓는 미소는 더 교태스러워졌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움직였고 쉴 새 없이 무릎을 굽혀 절했으며, 한마디 끼워 넣을 틈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틈을 찾아냈다.

「우리 집에서는 소란도 싸움도 전혀 없었습니다, 대위님.」 그녀는 콩알 쏟아지듯 단숨에 조잘대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는 독일 억양이 짙게 묻어날 뿐 거침이 없었다. 「추태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요, 그 나리께서 취해서 오신 거고요, 저는 있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대위님, 제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 집은 점잖은 집이고요, 대위님, 몸가짐도 점잖고요, 대위님, 저는 언제나, 언제나 추태라면 제가 먼저 질색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아주 얼근해서 오시더니 또 세 병을 달라고 하시고는,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발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셨는데, 그건 점잖은 집에서 할 일이 전혀 아니고요, 게다가 ganz5 피아노를 부수셨고, 그건 정말이지 너무나 못된 버릇이라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병을 집어 들고 그것으로 모두를 때리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위를 불렀고 카를이 왔는데, 그분이 카를을 붙잡아 눈을 때리셨고요, 헨리에테의 눈도 때리셨고, 제 뺨은 다섯 대를 때리셨습니다. 점잖은 집에서 그건 너무나 상스러운 짓이라 대위님, 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운하 쪽 창문을 열고 창에 올라서서 새끼 돼지처럼 꽥꽥거리셨습니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지요. 거리로 난 창에서 새끼 돼지처럼 꽥꽥거리다니! 망측하기도 하지! 그래서 카를이 외투를 잡고 그분을 창에서 끌어냈는데, 그때 정말로, 대위님, sein rock6이 찢어졌습니다. 그러고는 손해배상으로 십오 루블을 man muss7 물어야 한다고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드렸습니다, 대위님, sein rock 값으로 오 루블을요. 그분은 상스러운 손님이고 그 소동을 죄다 일으킨 분입니다. 『당신을 폭로하겠다』고 하시더군요, 『당신에 대해 모든 신문에 써 보낼 수 있으니까』 하고요.」

「그럼 그자가 저술가였다는 건가?」

「예, 대위님, 그런데 점잖은 집에 그런 상스러운 손님이라니…….」

「됐어! 그만! 내가 이미 말했잖나……」

「일리야 페트로비치!」 수석 서기가 뜻을 담아 되풀이했다.

보좌가 재빨리 그를 흘끗 보았다. 수석 서기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 그러니 자네한테 이 말을 해 두겠네, 더없이 존경스러운 루이자 이바노브나,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일세.」 보좌가 말을 이었다. 「그 점잖은 집에서 또 한 번 추태가 벌어지면 자네를, 점잖은 자리에서 부르는 말로 하자면 유치장에 처넣겠네. 알아들었나? 그래, 문인이라는 자가, 저술가라는 자가 『점잖은 집』에서 제 웃옷 자락 값으로 오 루블을 받아 갔다고? 훌륭한 족속이야, 이 저술가라는 것들은!」

그러고는 그는 경멸 어린 눈길을 라스콜니코프에게 던졌다. 「요전 날에는 음식점에서도 추태가 있었지. 저술가라는 자가 밥을 먹고 값을 치르지 않으려 들면서 『너희를 풍자로 써 주겠다』고 했다는군. 지난주에는 또 그런 자가 기선에서 어느 5등관의 점잖은 가족한테, 부인과 따님한테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퍼부었고. 요전 날에는 또 그런 자가 과자점에서 쫓겨났지. 다들 그런 족속이야, 저술가니 문인이니 학생이니 나발쟁이니……. 쳇! 자넨 가 보게! 내가 언제 한번 자네 집을 직접 들여다보겠네. 그때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알아들었나?」

루이자 이바노브나는 허둥지둥 굽신거리며 사방으로 무릎을 굽혀 절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절을 하며 문까지 물러갔다. 그러나 문간에서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가, 싱싱하고 트인 얼굴에 숱 많은 금빛 구레나룻이 훌륭한 잘생긴 장교와 부딪쳤다. 바로 그 구역의 서장인 니코딤 포미치였다. 루이자 이바노브나는 서둘러 거의 땅에 닿도록 무릎을 굽혀 절하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또 천둥에 번개로군 ― 태풍이야!」 니코딤 포미치가 일리야 페트로비치에게 정중하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또 달아올랐군, 또 씩씩거리고 있어! 계단에서부터 들리던데!」

「그래서 어떻단 말입니까!」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신사다운 무심함으로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서류 몇 장을 들고 걸음마다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흔들면서 다른 탁자로 걸어갔다. 「자, 좀 보십시오. 저술가라는 자가, 아니면 적어도 학생이었다는 자가, 빚을 갚지 않고, 차용증을 써 주고도, 방을 비우지 않고, 끊임없이 고소를 당하면서, 여기서는 제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항의를 하셨답니다! 제 행실은 상놈 같으면서 말입니다. 어디 한번 보십시오. 여기 이 신사분, 아주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가난은 죄가 아니지요, 이보시오. 그런데 화약처럼 확 터지는 성미인 것은 우리도 압니다. 업신여김을 못 견디는 게지요. 짐작건대 무언가에 성이 나서 그쪽이 먼저 지나쳤던 모양입니다.」 니코딤 포미치가 라스콜니코프를 향해 다정하게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점에서는 틀렸습니다.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정말입니다, 다만 화약이지요, 화약! 달아오르고, 불붙고, 끓어 넘치면 아무도 못 말립니다! 그러고 나면 그걸로 끝이고요! 그리고 속은 황금 같은 사람입니다! 연대에서 저 사람 별명이 『화약 중위』였다니까요…….」

「그 연대가 또 얼마나 대단했는지 아십니까.」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이 유쾌한 농담에 크게 흡족해하면서도 여전히 뚱한 채로 외쳤다.

라스콜니코프는 문득 그들 모두에게 유난히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대위님.」 그가 별안간 니코딤 포미치를 향해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제 처지를 좀 헤아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무례했다면 용서를 빌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난한 학생이고, 병들고 가난에 짓부서졌습니다(짓부서졌다는 것이 그가 쓴 말이었다). 지금은 제 몸 하나 건사할 수 없어 공부도 못 하고 있습니다만 돈은 생길 겁니다……. 제게는 X 현에 어머니와 누이가 있습니다. 그쪽에서 보내 줄 것이고 그러면 갚겠습니다. 하숙집 주인은 마음씨 좋은 사람입니다만, 제가 가정교사 자리를 잃고 넉 달째 돈을 내지 못하니 어찌나 화가 났던지 저녁조차 올려보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차용증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이 차용증으로 갚으라고 하는데, 제가 무엇으로 갚습니까?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알 바 아니지요.」 수석 서기가 한마디 하려 했다.

「예, 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설명을 좀 하게 해 주십시오……」 라스콜니코프가 다시 끼어들었다. 여전히 니코딤 포미치를 향하고 있었지만 일리야 페트로비치에게도 힘껏 말을 걸어 보려 했는데, 그자는 서류를 뒤적이며 그를 경멸하듯 안중에도 없다는 시늉을 끈질기게 하고 있었다. 「제가 그 집에 산 지 거의 삼 년인데 처음에는…… 처음에는…… 아니, 고백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맨 처음에 저는 그 집 딸과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말로 한 약속이고, 제 발로 한 약속이었습니다…… 처녀였고…… 사실 저는 그 아가씨가 좋았습니다,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지만…… 요컨대 젊은 날의 일이었지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 시절에 주인이 제게 외상을 후하게 주었고 저는 그런 식으로…… 아주 헤프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사로운 이야기는 아무도 묻지 않았네, 우리는 한가하지 않아.」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거칠게, 승리감이 배인 투로 끼어들었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열을 내어 그를 가로막았다. 말하기가 별안간 지독히 힘들어졌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는 것은 제 몫입니다…… 제 차례에서요…… 저도 동의합니다만…… 그건 불필요하지요. 그런데 일 년 전에 그 처녀가 티푸스로 죽었습니다. 저는 전처럼 그 집에 계속 세 들어 있었고, 주인이 지금 사는 곳으로 옮길 때 저한테 말하더군요…… 그것도 다정하게…… 저를 아주 믿지만 그래도 제가 진 빚 전부인 백십오 루블짜리 차용증을 하나 써 주지 않겠느냐고요. 그것만 써 주면 얼마든지 다시 믿어 주겠다고, 그리고 결코, 결코 ― 그건 그 사람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 제가 스스로 갚을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차용증을 쓰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가정교사 자리를 잃고 먹을 것도 없게 되자 저를 걸어 소송을 낸 겁니다. 여기에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이 감동적인 사연들은 우리가 알 바 아니야.」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무례하게 잘랐다. 「자네는 서면으로 서약을 해야 하네. 연애 사건이니 이 비극적인 일들이니 하는 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어.」

「이보게…… 자네 너무 심하군.」 니코딤 포미치가 탁자에 앉아 자기도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쓰시오!」 수석 서기가 라스콜니코프에게 말했다.

「무엇을 씁니까?」 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시오.」

라스콜니코프는 제 연설이 끝난 뒤로 수석 서기가 자기를 더 함부로, 더 경멸하듯 대한다고 느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별안간 누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완전히 아무래도 좋아졌고, 이 돌변은 섬광처럼, 한순간에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생각해 볼 마음이 있었다면 그는 자기가 불과 일 분 전에 저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제 감정을 억지로 떠맡기듯 말했다는 데 정말로 경악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감정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이제는 이 방이 경찰관들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한들 그는 그들에게 건넬 인간의 말 한마디를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텅 비어 있었다. 괴롭고 영원한 고독과 격절의 음울한 감각이 그의 영혼 안에서 또렷한 형태를 갖추었다. 일리야 페트로비치 앞에서 감상을 쏟아 놓은 제 자신의 비루함도, 그 앞에서 저자가 거둔 승리의 비루함도 마음속의 이 갑작스러운 돌변을 일으킨 원인은 아니었다. 아, 이제 그에게 제 비열함이, 이 모든 하찮은 허영이, 장교들이, 독일 여자들이, 빚이, 경찰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순간 화형에 처하라는 선고를 받았다 해도 그는 꿈쩍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선고를 끝까지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무언가 전적으로 새롭고 갑작스럽고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는 감각의 온 강렬함으로 또렷이 느꼈다. 이 경찰서의 이 사람들에게 방금 전의 그 발작 같은 감상으로든 그 무엇으로든 다시는 호소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저들이 경찰관이 아니라 제 친형제자매였다 하더라도 인생의 어떤 경우에도 저들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그토록 기이하고 그토록 무서운 감각을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 그것이 관념이나 생각이라기보다 감각이었다는 것, 직접적인 감각이었다는 것, 그가 평생 알아 온 모든 감각 가운데 가장 괴로운 감각이었다는 것이다.

수석 서기는 지불할 수 없다는 것, 뒷날 지불하겠다는 것, 도시를 떠나지 않겠다는 것, 재산을 팔지 않겠다는 것 따위의 통상적인 진술서 서식을 그에게 받아쓰게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글씨를 못 쓰겠군, 펜도 제대로 못 쥐지 않소.」 수석 서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보며 말했다. 「어디 아프시오?」

「예, 어지럽습니다. 계속하시지요!」

「그게 다요. 서명하시오.」

수석 서기는 종이를 받아 들고 다른 사람들을 상대하러 돌아섰다.

라스콜니코프는 펜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일어나 나가는 대신 그는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머리뼈에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그에게 떠올랐다. 지금 당장 일어나 니코딤 포미치에게 가서 어제 있었던 일을 죄다 말해 버리고, 그러고 나서 그와 함께 제 하숙으로 가서 구석의 구멍 속 물건들을 보여 주자는 것이었다. 그 충동이 어찌나 강했던지 그는 그것을 실행하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생각해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야, 생각하지 말고 짐을 벗어 버리는 게 낫다.」 그러나 그는 별안간 그 자리에 뿌리박힌 듯 멈춰 섰다. 니코딤 포미치가 일리야 페트로비치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말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둘 다 풀려날 걸세. 우선 그 이야기가 통째로 앞뒤가 맞지 않아. 저들이 한 짓이라면 무엇 하러 수위를 불렀겠나? 제 발로 고발하려고? 아니면 눈속임으로? 아니, 그건 너무 교활하지! 게다가 학생 페스트랴코프는 들어갈 때 수위 둘과 여자 하나한테 대문에서 목격됐어. 친구 셋과 함께 걸어왔고 그 친구들은 대문에서 헤어졌는데, 그자는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위들에게 길을 물었네. 그런 목적으로 가는 자가 길을 묻겠나? 코흐로 말하자면 노파에게 올라가기 전에 아래층 은세공점에서 삼십 분을 보냈고, 정확히 여덟 시 십오 분 전에 거기서 나왔어. 자, 생각해 보게……」

「하지만 실례합니다, 그 모순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저들은 문을 두드렸는데 잠겨 있었다고 스스로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삼 분 뒤 수위와 함께 올라가 보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지 않습니까.」

「바로 그걸세. 살인자가 거기 있다가 안에서 빗장을 걸었던 게 틀림없어. 코흐가 얼간이처럼 저까지 수위를 찾으러 내려가지만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붙잡았을 걸세. 그자는 그 틈을 타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어떻게든 그들 옆을 빠져나간 거야. 코흐는 연신 성호를 그으면서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그자가 뛰쳐나와 도끼로 나를 죽였을 거요』 하고 말한다더군. 감사 기도8를 올릴 참이라지 ― 하, 하!」

「그런데 살인자를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겁니까?」

「못 봤을 만도 하지요. 그 집은 영락없는 노아의 방주니까요.」 듣고 있던 수석 서기가 말했다.

「분명하네, 아주 분명해.」 니코딤 포미치가 열을 내어 되풀이했다.

「아닙니다, 전혀 분명하지 않습니다.」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굽히지 않았다.

라스콜니코프는 모자를 집어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으나 거기 닿지 못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 오른쪽에서 그를 부축하고 있었으며, 다른 누군가는 왼쪽에 서서 누런 물이 담긴 누르스름한 유리잔을 들고 있었고, 니코딤 포미치가 앞에 서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디가 아픈 겁니까?」 니코딤 포미치가 꽤 날카롭게 물었다.

「서명할 때도 펜을 제대로 못 쥐었습니다.」 수석 서기가 제자리로 물러앉아 다시 일을 붙들며 말했다.

「앓은 지 오래됐나?」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제자리에서 외쳤다. 그 역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물론 이 병자가 쓰러졌을 때 보러 오기는 했지만, 그가 정신을 차리자 곧바로 제자리로 물러났던 것이다.

「어제부텁니다.」 라스콜니코프가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어제 밖에 나갔나?」

「예.」

「아픈 몸으로?」

「예.」

「몇 시에?」

「일곱 시쯤에요.」

「그래, 어디를 갔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거리를 따라서요.」

「짧고 분명하군.」

라스콜니코프는 손수건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날카롭게, 뚝뚝 끊어 대답했고, 검고 열에 들뜬 눈을 일리야 페트로비치의 응시 앞에서 조금도 내리지 않았다.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데. 그런데 자네는……」 니코딤 포미치가 입을 떼려 했다.

「상관없습니다.」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어딘가 묘한 투로 말했다.

니코딤 포미치는 무어라 더 따지려 했으나, 자기를 아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수석 서기를 흘끗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좋네, 그럼.」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말을 맺었다. 「더 붙들지 않겠네.」

라스콜니코프는 나왔다. 그가 나가자 열띤 대화 소리가 들려왔고 그중에서도 니코딤 포미치의 캐묻는 목소리가 솟아올랐다. 거리로 나오자 어지러움은 씻은 듯이 가셨다.

「수색이다 ― 당장 수색이 있을 것이다.」 그는 집으로 서둘러 가며 되뇌었다. 「짐승 같은 것들! 저들이 의심하고 있다.」

예전의 공포가 다시 그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주

  1. 1. 저본은 러시아의 거리 단위 대신 영국 단위를 썼다. 4분의 1마일은 약 400미터다. 가넷이 러시아 도량형과 화폐를 영국 것으로 바꾸어 옮긴 자리 가운데 하나로, 같은 책 안에서 베르스타와 뒤섞인다.

  2. 2. 제정 러시아의 집집마다 수위가 관리하던 거주 등록 장부. 세입자의 신원과 출입을 적어 경찰서에 신고해야 했으므로 수위들은 이 장부를 끼고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3. 3. Ich danke ― 독일어로 「고맙습니다」.

  4. 4. 8등관(assessor, 콜레즈스키 아세소르) ― 제정 러시아 관등표 14등급 가운데 8등. 마르멜라도프의 9등관보다 한 등급 위다.

  5. 5. ganz ― 독일어로 「완전히」.

  6. 6. sein rock ― 독일어로 「그의 웃옷」. 저본이 소문자로 적은 철자를 그대로 둔다.

  7. 7. man muss ― 독일어로 「~해야 한다」.

  8. 8. 정교회의 몰레벤(молебен). 특정한 청원이나 감사를 위해 따로 올리는 짧은 기도 예배로, 화를 면한 사람이 흔히 청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