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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에필로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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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

그는 오래 앓았다. 그러나 그를 무너뜨린 것은 감옥살이의 끔찍함도, 고된 노역도, 나쁜 음식도, 빡빡 깎인 머리도, 기워 입은 옷도 아니었다. 그런 시련과 고생 따위가 그에게 무슨 대수였겠는가! 고된 일은 오히려 반가웠으니, 몸이 지쳐 버리면 적어도 몇 시간의 고요한 잠은 셈해 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음식이 그에게 무슨 대수였겠는가 ― 바퀴벌레가 떠다니는 멀건 양배춧국이? 지난날 학생이던 시절에는 그것조차 없는 때가 자주 있었다. 옷은 따뜻했고 그가 사는 방식에 맞았다. 그는 족쇄조차 느끼지 않았다. 빡빡 깎인 머리와 알록달록한 죄수 웃옷이 부끄러웠던가? 누구 앞에서? 소냐 앞에서? 소냐는 그를 두려워했는데, 어떻게 그녀 앞에서 부끄러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소냐 앞에서까지 부끄러웠고, 그 때문에 업신여기는 거친 태도로 그녀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가 부끄러워한 것은 빡빡 깎인 머리도 족쇄도 아니었다. 그의 자존심이 뼛속까지 찔린 것이었다. 그를 앓게 한 것은 상처 입은 자존심이었다. 아, 저 자신을 탓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행복했겠는가! 그랬다면 그는 무엇이든, 수치와 치욕까지도 견딜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기를 엄하게 심판했고, 그의 곤두선 양심은 제 과거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단순한 실수 말고는 특별히 끔찍한 잘못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부끄러웠던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이 라스콜니코프가, 눈먼 운명의 무슨 명령에 따라 그토록 속절없이, 그토록 어리석게 낭패를 보았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마음이 편해지려면 판결의 「멍청함」 앞에 저를 낮추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막연하고 대상 없는 불안, 앞으로는 아무 데도 이르지 못할 끝없는 희생 ― 그의 앞에 놓인 것은 그것뿐이었다. 팔 년이 지나면 겨우 서른둘이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에게 무슨 위안이 되겠는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무엇 때문에 애쓸 것인가? 그저 있기 위해 사는 것인가? 그는 전에 어떤 사상을 위해, 어떤 희망을 위해, 심지어 어떤 공상을 위해서까지 제 존재를 내놓을 각오가 천 번은 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저 있는 것만으로는 그에게 언제나 너무 적었고, 그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바랐다. 어쩌면 바로 그 욕망의 세기 때문에 그는 저를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이 허락된 사람이라고 여겼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운명이 그에게 뉘우침을, 심장을 찢어 놓고 잠을 앗아 가는 타오르는 뉘우침을, 그 끔찍한 괴로움이 목을 매거나 물에 몸을 던지는 환영을 불러오는 그런 뉘우침을 보내 주기라도 했더라면! 아, 그는 그것을 반겼으리라! 눈물과 고뇌는 적어도 삶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 범죄를 뉘우치지 않았다.

그를 감옥으로 데려온 그 터무니없는 실수들에 대고 화를 냈던 것처럼, 적어도 제 어리석음에 대고 화를 내는 데서 위안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감옥 안에서, 자유 속에서 그는 제 행동을 하나하나 다시 되짚어 보고 따져 보았고, 그것들이 그 운명의 시간에 보였던 만큼 그렇게 실수투성이이고 그렇게 터무니없지는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내 이론이 세상이 시작된 이래 들끓고 맞부딪쳐 온 다른 이론들보다 어디가 더 어리석다는 말인가?」 그는 저 자신에게 물었다. 「이 일을 아주 독립적으로, 널찍하게, 흔해 빠진 관념에 물들지 않고 보기만 하면 내 생각은 결코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 회의론자들이여, 반 페니짜리 철학자들이여1, 어찌하여 그대들은 중도에서 멈춰 서는가!」

「어째서 내 행동이 저들에게는 그토록 끔찍해 보일까?」 그는 저 자신에게 말했다. 「그것이 범죄였기 때문인가? 범죄란 무슨 뜻인가? 내 양심은 편안하다. 물론 그것은 법률상의 범죄였고, 물론 법조문이 깨어졌으며 피가 흘렀다. 좋다, 법조문을 어긴 값으로 나를 벌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그렇다면, 권력을 물려받는 대신 낚아챈 인류의 은인들 가운데 많은 이가 그 첫걸음에서 벌을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자들은 성공했고 그래서 옳았으며, 나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래서 나에게는 그 걸음을 내디딜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그 점에서만 그는 제 범죄성을 인정했으니, 오직 자기가 성공하지 못했고 그것을 자백했다는 사실에서만 그랬다.

그는 또 이런 물음으로도 괴로워했다. 어째서 나는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 어째서 나는 강물을 바라보고 서 있다가 자백하는 쪽을 골랐는가? 살려는 욕망이 그토록 강했던가, 그리고 그것을 이겨 내기가 그토록 어려웠던가?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이겨 내지 않았던가?

그는 괴로움 속에서 저에게 이 물음을 던졌고, 바로 그 강물을 들여다보며 서 있던 그때에 어쩌면 제 안의, 제 신념 속의 근본적인 거짓을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 의식이 앞으로 올 위기의, 삶을 보는 새로운 눈의, 그리고 제 훗날의 부활의 조짐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또다시 제 나약함과 비열함 탓에 그가 넘지는 못한 본능의 둔중한 무게로 돌리는 편을 택했다. 그는 동료 죄수들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모두 얼마나 삶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지를 보고 놀랐는데, 그가 보기에 그들은 자유로울 때보다 감옥에서 삶을 더 사랑하고 더 값지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를테면 떠돌이들은 얼마나 끔찍한 고통과 궁핍을 견뎌 냈던가! 그런 사람들이 한 줄기 햇살을, 태고의 숲을, 아무도 모르는 자리에 숨은 차가운 샘을 그토록 아낄 수 있단 말인가. 그 떠돌이는 삼 년 전에 그 샘을 눈여겨 두었다가, 연인을 다시 보고 싶어 하듯 그것을 다시 보고 싶어 하며, 그 둘레의 푸른 풀과 덤불에서 우는 새를 꿈꾸는 것이다. 더 들여다볼수록 그는 더욱 알 수 없는 본보기들을 보았다.

감옥에서 그는 물론 보지 못한 것이, 그리고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 많았다. 그는 말하자면 눈을 내리깐 채 살았으니, 바라보는 것이 그에게는 역겹고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끝내는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아졌고, 그는 저도 모르게, 전에는 짐작조차 못 했던 많은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저와 나머지 모든 사람 사이에 놓인 끔찍하고 건널 수 없는 심연이었다. 그들은 다른 종족 같았고, 그는 그들을, 그들은 그를 불신과 적의를 품고 바라보았다. 그는 제가 외따로 떨어진 까닭을 느끼고 알았으나, 그때까지는 그 까닭이 그토록 깊고 강하다고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에는 폴란드인 유형수 몇, 정치범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나머지를 모두 무지한 촌놈들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그들을 그렇게 볼 수 없었으니, 그는 이 무지한 사람들이 여러 면에서 폴란드인들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러시아 사람들 가운데에도 꼭 그처럼 남을 업신여기는 이들이 있었으니, 전에 장교였던 자와 신학생 출신 둘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들의 잘못도 그만큼 또렷하게 보았다. 그는 모두에게 미움을 받고 따돌림을 당했으며, 그들은 마침내 그를 증오하기까지 했는데 ― 어째서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보다 훨씬 죄가 무거운 자들이 그의 범죄를 업신여기고 비웃었다.

「넌 나리야.」 그들은 말하곤 했다. 「도끼를 들고 설칠 게 아니었지. 그건 나리가 할 일이 아니거든.」

사순절2 둘째 주에 제 조와 함께 성찬을 받을 차례가 그에게 돌아왔다. 그는 성당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어느 날 싸움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모두가 한꺼번에 노발대발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넌 무신론자야! 넌 하느님을 믿지 않아.」 그들이 외쳤다. 「넌 죽어 마땅해.」

그는 그들에게 하느님에 대해서도 제 믿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는데, 그들은 그를 무신론자라며 죽이려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죄수 하나가 완전히 미쳐 날뛰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침착하게, 말없이 그를 기다렸고, 그의 눈썹은 떨리지 않았으며 얼굴빛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간수가 가까스로 그와 그를 덮치려는 자 사이에 끼어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피를 보았을 것이다.

그가 풀 수 없는 물음이 또 하나 있었다. 어째서 그들은 모두 소냐를 그토록 좋아하는가? 그녀는 그들의 호의를 얻으려 애쓰지 않았고, 그들과 좀처럼 마주치지도 않았으며, 이따금 일터로 그를 보러 잠깐 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모두가 그녀를 알았고, 그녀가 그를 따라 여기까지 나왔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녀가 어떻게 어디서 사는지를 알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돈을 준 적도 없고 특별히 무슨 일을 해 준 적도 없었다. 단 한 번, 성탄절에 그녀가 그들 모두에게 파이와 빵을 선물로 보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츰 그들과 소냐 사이에 더 가까운 관계가 생겨났다. 그녀는 그들을 위해 친척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주고 부쳐 주었고, 그 도시를 찾아온 죄수들의 친척은 그들이 일러둔 대로 소냐에게 선물과 돈을 맡기고 갔다. 그들의 아내와 연인들도 그녀를 알고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그녀가 일터로 라스콜니코프를 만나러 오거나 길에서 죄수 한 무리와 마주치면, 그들은 모두 그녀에게 모자를 벗었다. 「소피야 세묘노브나 어머님, 당신은 우리의 다정하고 착한 어머님이십니다.」 낙인찍힌 거친 죄수들이 그 가냘프고 조그마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녀가 미소 지으면 모두가 기뻐했으며, 그들은 그녀의 걸음걸이까지 좋아해서 그녀가 걸어가는 것을 보려고 돌아서곤 했다. 그녀가 그토록 자그마하다는 것까지 좋아했고, 사실 무엇 때문에 그녀를 가장 좋아하는지 저희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앓을 때면 그녀에게 도와 달라고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는 사순절 중반부터 부활절이 지날 때까지 병원에 있었다. 몸이 나아지자 그는 열에 들떠 헛것을 보던 동안에 꾸었던 꿈들을 떠올렸다. 그는 온 세상이 아시아 깊은 곳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끔찍하고 새롭고 낯선 역병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아주 적은 수의 뽑힌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가 멸망할 참이었다. 새로운 종류의 미생물들이 사람의 몸을 덮쳤는데, 이 미생물들에게는 지성과 의지가 있었다. 그것들에게 덮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미쳐 날뛰게 되었다. 그러나 이 병든 자들만큼 제가 총명하다고, 제가 진리를 온전히 쥐고 있다고 여긴 사람들은 일찍이 없었고, 제 결정과 제 과학적 결론과 제 도덕적 신념이 그토록 틀림없다고 여긴 사람들도 일찍이 없었다. 마을 전체가, 도시 전체가, 민족 전체가 그 전염으로 미쳐 갔고, 모두가 들떠 있었으며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저마다 제게만 진리가 있다고 여기고는 남들을 바라보며 비참해했고, 제 가슴을 치고, 울고, 두 손을 쥐어짰다. 그들은 판단할 줄을 몰랐고 무엇을 악으로 무엇을 선으로 여겨야 할지 뜻을 모으지 못했으며,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옳다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까닭 없는 앙심으로 서로를 죽였다. 그들은 서로를 치려고 군대로 모여들었으나, 행군하는 중에도 그 군대는 저희끼리 치고받기 시작해서 대열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찌르고 베고 물어뜯고 잡아먹었다. 도시에서는 하루 내내 경종이 울렸고, 사람들이 달려 모였으나 무엇 때문에 불려 나왔는지도, 누가 부르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저마다 제 생각을, 제 개선안을 내놓으며 뜻을 모으지 못했으므로 더없이 흔한 생업들이 버려졌다. 땅도 버려졌다. 사람들은 무리 지어 만나 무언가에 뜻을 모으고 함께 뭉치기로 맹세했으나, 곧바로 저희가 내놓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고발하고 싸우고 죽였다. 큰불과 굶주림이 있었다.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이 파멸에 휩쓸렸다. 역병은 퍼지고 점점 더 멀리 나아갔다. 온 세상에서 오직 몇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순결하고 뽑힌 백성으로, 새로운 종족과 새로운 삶을 세우고 땅을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할 운명을 지녔으나, 아무도 이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고 아무도 그들의 말과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이 어처구니없는 꿈이 그토록 비참하게 기억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는 것이, 이 열병의 헛것이 남긴 인상이 그토록 오래 이어지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부활절이 지나고 둘째 주가 되어 따뜻하고 밝은 봄날이 이어졌고, 감옥 병동에서는 그 아래로 보초가 오가는 쇠창살 창문이 열렸다. 소냐는 그가 앓는 동안 두 번밖에 찾아올 수 없었으니, 올 때마다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그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주 병원 마당으로 오곤 했고, 특히 저녁이면 더러 잠깐 서서 병동 창문을 올려다보기만 하려고 오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 거의 다 나았을 무렵 라스콜니코프는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서 우연히 창가로 갔다가 멀리 병원 대문께에 서 있는 소냐를 곧바로 보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는 몸을 떨며 창가에서 물러났다. 이튿날 소냐는 오지 않았고 그다음 날도 오지 않았으며, 그는 제가 불안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침내 그는 퇴원했다. 감옥에 이르러 그는 죄수들에게서 소피야 세묘노브나가 집에 앓아누워 나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몹시 불안해져서 사람을 보내 그녀의 소식을 물었고, 오래지 않아 그녀의 병이 위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저를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소냐는 연필로 쓴 쪽지를 보내, 훨씬 나아졌으며 가벼운 감기일 뿐이고 곧, 아주 곧 일터로 그를 보러 가겠다고 전했다. 그것을 읽으며 그의 심장은 아프게 뛰었다.

또 따뜻하고 밝은 날이었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그는 강기슭으로 일하러 나갔는데, 거기서는 설화석고를 빻았고 그것을 굽는 가마가 헛간에 있었다. 보내진 사람은 셋뿐이었다. 죄수 하나는 연장을 가지러 간수와 함께 요새로 갔고, 다른 하나는 장작을 마련해 가마에 넣기 시작했다. 라스콜니코프는 헛간에서 강기슭으로 나와 헛간 옆 통나무 더미에 앉아 넓고 인적 없는 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높다란 기슭에서 널따란 경치가 그의 앞에 펼쳐졌고, 건너편 기슭에서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으며, 햇빛에 잠긴 드넓은 초원에는 유목민의 천막들이 검은 점처럼 겨우 보였다. 저기에는 자유가 있었고, 저기에는 여기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저기에서는 시간 자체가 멈춰 선 듯했고, 아브라함과 그의 가축 떼의 시대가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만 같았다. 라스콜니코프는 앉아 바라보았고, 그의 생각은 백일몽으로, 관조로 흘러갔다.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으나 막연한 불안이 그를 들뜨게 하고 괴롭혔다. 별안간 그는 소냐가 제 곁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아직 아주 이른 시각이어서 아침의 냉기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녀는 낡고 허름한 부르누스3와 그 초록빛 숄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앓은 자취가 남아 야위고 창백했으나, 그녀는 반가운 웃음으로 그를 맞았고 다만 손만은 여느 때처럼 머뭇거리며 내밀었다.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 손을 내밀기를 머뭇거렸고, 더러는 그가 뿌리칠까 두려운 듯 아예 내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못마땅한 듯이 그녀의 손을 잡았고, 언제나 그녀를 만나는 것이 성가신 듯했으며, 더러는 그녀가 와 있는 내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이따금 그녀는 그 앞에서 몸을 떨었고 깊이 상심한 채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 두 사람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그녀를 흘끔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땅으로 떨구었다. 그들은 단둘이었고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 간수는 마침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리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별안간 무언가가 그를 움켜쥐어 그녀의 발치에 내던지는 것 같았다. 그는 울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았다. 처음 한순간 그녀는 몹시 놀라 낯빛이 하얘졌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떨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알아차렸고, 그녀의 눈에 끝없는 행복의 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가 무엇보다도 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는 것을 알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둘 다 창백하고 야위었다. 그러나 병들어 창백한 그 얼굴들은 새로운 미래의, 새 삶으로 들어가는 온전한 부활의 새벽빛으로 환했다. 그들은 사랑으로 새로워졌고, 저마다의 마음은 상대의 마음을 위한 끝없는 생명의 샘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며 참기로 했다. 그들 앞에는 아직 일곱 해가 남아 있었고, 그때까지 얼마나 끔찍한 괴로움과 얼마나 끝없는 행복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났고, 그것을 알았으며, 제 온 존재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 그녀는 오직 그의 삶 속에서 살 뿐이었다.

같은 날 저녁 막사가 잠겼을 때, 라스콜니코프는 널빤지 침상에 누워 그녀를 생각했다. 그날 그는 제 적이던 죄수들이 모두 저를 다르게 바라보는 것 같다고 느끼기까지 했고, 그가 먼저 말을 걸기도 했으며 그들도 다정하게 대꾸했다. 그는 이제 그것을 떠올리며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모든 것이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제가 얼마나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는지를 떠올렸다. 그는 창백하고 야윈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기억들이 이제는 그를 거의 괴롭히지 않았다. 그는 이제 얼마나 끝없는 사랑으로 그녀의 모든 고통을 갚아 주게 될지를 알고 있었다. 지난날의 온갖 고뇌가 다 무엇이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제 범죄와 판결과 옥살이까지도, 북받쳐 오르는 이 첫 감정 속에서는 이제 저와 아무 상관도 없는 바깥의 낯선 사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날 저녁 그는 무엇 하나 오래 생각할 수 없었고, 무엇 하나 의식해서 따져 볼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론의 자리에 삶이 들어섰고, 그의 의식 속에서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여물어 갈 것이었다.

그의 베개 밑에는 신약성경이 놓여 있었고, 그는 기계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은 소냐의 것이었으니, 그녀가 그에게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를 읽어 준 바로 그 책이었다. 처음에 그는 그녀가 신앙 문제로 저를 성가시게 하고 복음서 이야기를 꺼내며 책을 들이밀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녀는 그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고 성서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가 앓아눕기 얼마 전에 제 입으로 그 책을 청했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가져다주었다. 지금까지 그는 그것을 펼쳐 보지 않았다.

그는 지금 그것을 펼치지는 않았으나,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이제 그녀의 신념이 내 신념이 될 수는 없을까? 적어도 그녀의 감정, 그녀의 바람만이라도…….」

그녀 역시 그날 몹시 마음이 흔들렸고, 밤에 다시 앓아누웠다. 그러나 그녀는 어찌나 행복했는지, 그리고 그 행복이 어찌나 뜻밖이었는지 제 행복이 거의 두려울 지경이었다. 일곱 해, 겨우 일곱 해라니! 그들의 행복이 시작되던 무렵 어떤 순간에는 두 사람 다 그 일곱 해를 이레처럼 여길 채비가 되어 있었다. 새 삶이 거저 주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 그 값을 비싸게 치러야 하리라는 것, 그것이 커다란 애씀과 커다란 고통을 요구하리라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 한 인간이 차츰 새로워지는 이야기, 그가 차츰 거듭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이야기, 그가 알지 못하는 새 삶으로 들어서는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을 터이나, 우리의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주

  1. 1. 반 페니 ― 2분의 1페니에 해당하는 영국 동전. 저본은 여기서도 러시아 화폐가 놓일 자리에 영국 동전을 넣었다. 「반 페니짜리 철학자」는 값싸고 어설픈 사상가를 가리키는 영어 표현이다.

  2. 2. 사순절 ― 부활절에 앞선 금식 기간. 정교회에서는 대재기(大齋期)라 하며, 이 기간에 신자는 고해와 성찬을 받는다. 정교회의 부활절은 율리우스력으로 헤아리므로 서방 교회의 부활절과 날짜가 어긋나는 해가 많다.

  3. 3. 부르누스 ― 본디 북아프리카의 두건 달린 겉옷을 가리키는 말인데, 19세기 러시아에서는 그 모양을 본떠 만든 여성용 겉옷을 이렇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