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장
칠월 초의 유난히 무더운 어느 저녁 무렵, 한 젊은이가 S 거리에 세 들어 사는 다락방에서 나와 망설이기라도 하는 듯 느릿느릿 K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계단에서 집주인 여자와 마주치는 일을 용케 피했다. 그의 다락방은 높다란 5층 집 지붕 밑에 있었고, 방이라기보다는 벽장에 가까웠다. 다락방과 식사와 시중을 대 주는 그 집주인 여자는 한 층 아래에 살았는데, 그는 밖에 나갈 때마다 그 여자의 부엌 앞을 지나야 했고 부엌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젊은이는 속이 뒤집히는 듯한 겁먹은 기분이 들었고, 그 때문에 얼굴을 찌푸리며 부끄러워했다. 그는 집주인 여자에게 갚을 길 없이 빚을 지고 있었고, 그 여자와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그가 겁이 많고 비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다만 얼마 전부터 그는 신경이 지나치게 곤두서서 건드리기만 해도 날이 서는 상태, 거의 심기증(心氣症)에 다다른 상태에 빠져 있었다. 자기 안으로 완전히 침잠해 버리고 동료들에게서 고립된 나머지 그는 집주인 여자뿐 아니라 그 누구와 마주치는 것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가난이 그를 짓뭉개고 있었으나, 제 처지에서 오는 걱정거리들은 근래 들어 그를 짓누르기를 그만두었다. 그는 실제로 중요한 일들을 챙기기를 그만두었고, 그럴 마음 자체를 잃어버렸다. 어떤 집주인이 무슨 짓을 하든 그에게 진짜 공포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계단에서 붙들려, 그 여자의 시시하고 뜬금없는 수다를, 돈을 내놓으라는 성가신 독촉과 으름장과 푸념을 억지로 듣고 서서, 핑계를 쥐어짜고 얼버무리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 아니, 그럴 바에는 고양이처럼 계단을 기어 내려가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빠져나가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이날 저녁에는 거리로 나서자 제 두려움이 뼈아프게 의식되었다.
「저런 일을 저질러 보겠다면서 이따위 사소한 것에 겁을 먹다니.」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흠…… 그래, 모든 것이 인간의 손안에 있건만 인간은 비겁함 때문에 그 전부를 흘려보낸다. 그건 공리(公理)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면 재미있겠군. 새로운 걸음을 내딛는 것, 새로운 말을 입 밖에 내는 것 ― 그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이 너무 많군. 내가 지껄이기만 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다.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지껄이는 것인지도 모르지. 지난 한 달 동안 굴속에 며칠씩 내리 드러누워 생각에 잠긴 채 지껄이는 법을 익혔다…… 『거인 잡는 잭』 따위를 생각하면서. 그런데 지금 내가 왜 거기로 가고 있지? 내게 그럴 능력이 있기나 한가? 이게 진지한 일이기는 한가? 조금도 진지하지 않다. 그저 나를 즐겁게 해 보려는 공상일 뿐이다. 장난감이지! 그래, 어쩌면 장난감인지도 모른다.」
거리의 열기는 지독했다. 숨 막히는 공기, 북새통, 사방에 널린 회반죽과 비계와 벽돌과 먼지, 그리고 여름에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그 특유의 페테르부르크 악취 ― 이 모든 것이 이미 한껏 곤두서 있던 젊은이의 신경을 괴롭게 건드렸다. 그 일대에 유난히 많은 선술집에서 풍겨 나오는 참을 수 없는 악취와, 평일인데도 쉴 새 없이 마주치는 술 취한 사내들이 이 역겨운 그림의 비참함을 완성했다. 더할 수 없이 깊은 혐오의 표정이 젊은이의 섬세한 얼굴에 한순간 번득였다. 덧붙여 두자면 그는 유난히 잘생긴 축이었고, 보통보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하고 몸매가 좋았으며, 아름다운 검은 눈과 짙은 갈색 머리칼을 지니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더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이 온통 텅 비어 버린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은 채 걸어갔다. 이따금 그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방금 스스로 실토한 그 혼잣말하는 버릇 탓이었다. 그런 순간이면 그는 제 생각이 이따금 뒤엉켜 있다는 것과 자기가 몹시 쇠약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다. 이틀 동안 그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였다.
그의 옷차림은 어찌나 형편없었는지, 남루한 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그런 누더기를 걸치고 거리에 나서는 것은 부끄러워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동네에서는 옷차림의 결함쯤은 좀처럼 놀랄 거리가 되지 못했다. 건초 시장이 가까운 데다 행실 나쁜 업소가 많고, 페테르부르크 한복판의 이 거리와 골목마다 장사치와 노동자 계층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탓에,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인간 유형이 하도 갖가지여서 아무리 괴상한 몰골이라도 놀라움을 자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젊은이의 마음속에는 쓰라림과 경멸이 어찌나 쌓여 있었던지, 젊음에 으레 딸리는 온갖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리에서만은 제 누더기를 가장 덜 신경 썼다. 아는 사람이나 옛 동급생과 마주칠 때는 이야기가 달랐다 ― 하기야 그는 언제라도 그들과 마주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무거운 짐말이 끄는 커다란 짐수레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던 술 취한 사내가 지나치면서 느닷없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그를 손가락질하고 「어이, 거기 독일 모자쟁이!」 하고 외쳤을 때 ― 젊은이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부들부들 떨며 제 모자를 움켜쥐었다. 그것은 치머만 가게에서 나온 키 높은 둥근 모자였으나, 완전히 닳아 빠지고 세월에 녹슨 듯 빛이 바랬으며, 온통 찢기고 얼룩진 데다, 챙이 떨어져 나가고 한쪽으로 더할 수 없이 꼴사납게 꺾여 있었다. 그러나 그를 덮친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는 당황해 중얼거렸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이게 제일 고약하다! 아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것이, 이런 하찮기 짝이 없는 사소한 것 하나가 계획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 그래, 내 모자는 너무 눈에 띈다……. 우스꽝스러우니까 눈에 띄는 거다……. 이런 누더기에는 챙모자를 써야 한다, 낡아 빠진 납작한 것이면 무엇이든 좋고, 이런 기괴한 물건은 안 된다. 아무도 이런 모자를 쓰지 않으니 멀리서도 대번에 눈에 띌 것이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그걸 기억하리라는 것, 그러면 그게 단서가 되리라는 것이다. 이런 일에는 되도록 눈에 덜 띄어야 한다……. 사소한 것,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아니, 언제나 모든 걸 망쳐 놓는 건 바로 그런 사소한 것들이다…….」
멀리 갈 것은 없었다. 하숙집 대문에서부터 몇 걸음인지를 그는 실제로 알고 있었다. 정확히 칠백삼십 걸음이었다. 언젠가 공상에 빠져 있을 때 세어 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는 그 공상을 믿지 않았고, 다만 그 끔찍하면서도 대담한 무모함으로 제 속을 들쑤시며 애를 태우고 있었을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는 그것을 달리 바라보기 시작했고, 제 무력함과 우유부단함을 비웃는 독백을 늘어놓으면서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끔찍한」 공상을 감행해야 할 위업으로 여기게 되었다 ― 정작 자신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 분명히 제 계획의 「예행연습」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흥분이 점점 더 격렬해졌다.
가슴이 내려앉고 신경이 떨리는 채로 그는 한쪽은 운하를, 다른 쪽은 거리를 면하고 있는 거대한 집으로 다가갔다. 이 집은 자잘한 셋방으로 쪼개어 세를 놓았고 온갖 부류의 일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재봉사, 자물쇠장이, 요리사, 이런저런 독일인, 되는대로 입에 풀칠을 하는 처녀들, 말단 서기 따위였다. 두 개의 대문과 두 개의 안마당으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그 건물에는 수위가 서넛 고용되어 있었다. 젊은이는 그들 가운데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은 것이 몹시 다행스러웠고, 곧장 오른쪽 문으로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미끄러져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그것은 어둡고 비좁은 뒷계단이었으나 그는 이미 익숙했고 길을 알았으며, 이 모든 주위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아무리 캐기 좋아하는 눈이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겁을 먹는데, 어쩌다 정말로 그 일을 하러 가게 된다면 어떻겠는가?」 4층에 이르렀을 때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서 그의 걸음은 어느 셋방에서 가구를 실어 내고 있던 인부들에게 막혔다. 그 방에는 관청에 다니는 독일인 서기와 그 가족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독일인이 지금 이사를 나가고 있는 것이고, 그러면 이 계단의 4층에는 노파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군.」 노파의 집 초인종을 누르면서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초인종은 구리가 아니라 양철로 만든 것처럼 희미하게 딸랑거렸다. 그런 집의 작은 셋방에는 언제나 그렇게 울리는 초인종이 달려 있다. 그는 그 종소리를 잊고 있었는데, 이제 그 독특한 딸랑거림이 무언가를 그에게 일깨우며 그것을 눈앞에 또렷이 불러내는 것 같았다……. 그는 흠칫했다. 이때쯤 그의 신경은 끔찍하게 곤두서 있었다. 잠시 뒤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노파가 그 틈으로 눈에 띄게 미심쩍어하며 방문객을 살폈고, 어둠 속에서 번득이는 작은 두 눈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층계참에 사람이 여럿 있는 것을 보고는 대담해져서 문을 활짝 열었다. 젊은이는 자그마한 부엌과 칸막이로 나뉜 어두운 현관으로 들어섰다. 노파는 말없이 그를 마주 보고 서서 캐묻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순 먹은 자그맣고 바싹 마른 노파로, 날카롭고 악의에 찬 눈과 뾰족하고 작은 코를 지니고 있었다. 빛깔이 바래고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에는 기름이 잔뜩 발려 있었고, 그 위에 수건 하나 쓰지 않았다. 닭다리처럼 보이는 가늘고 긴 목에는 플란넬 헝겊 같은 것이 둘려 매여 있었고, 더위에도 불구하고 어깨에는 세월에 누레진 털 빠진 모피 망토가 펄럭이며 걸려 있었다. 노파는 쉴 새 없이 기침을 하고 끙끙거렸다. 젊은이가 어지간히 야릇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던 모양인지, 그녀의 눈에 다시 불신의 빛이 어렸다.
「라스콜니코프라고 합니다, 학생입니다. 한 달 전에 여기 왔었습니다.」 좀 더 공손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서, 젊은이는 반쯤 허리를 굽히며 서둘러 중얼거렸다.
「기억하고말고요, 양반. 여기 오셨던 걸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요.」 노파는 또박또박 말하면서도 캐묻는 눈을 그의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또 같은 볼일로 왔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노파의 미심쩍어하는 태도에 조금 당황하고 놀라며 말을 이었다. 「저 여자는 늘 저런지도 모르지, 지난번엔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고.」 그는 언짢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노파는 망설이기라도 하듯 잠시 말이 없다가, 한쪽으로 비켜서서 방문을 가리키며 방문객을 제 앞으로 지나가게 하면서 말했다.
「들어오시지요, 양반.」
젊은이가 들어선 자그마한 방은 벽에 누런 벽지가 발려 있고 창가에 제라늄 화분과 모슬린 커튼이 놓여 있었는데, 마침 그 순간 지는 해가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때도 해가 이렇게 비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마치 우연처럼 라스콜니코프의 머릿속을 스쳤고, 그는 재빠른 눈길로 방 안의 모든 것을 훑으며 그 배치를 되도록 눈여겨보고 기억해 두려 했다. 그러나 방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가구는 하나같이 아주 낡은 누런 나무로 된 것들로, 커다랗게 휜 나무 등받이가 달린 소파, 소파 앞의 타원형 탁자, 두 창 사이에 놓인 거울 붙은 화장대, 벽을 따라 늘어선 의자들, 그리고 손에 새를 든 독일 처녀들을 그린, 누런 액자에 든 반 페니짜리 판화1 두세 점 ― 그게 전부였다. 구석에는 작은 이콘2 앞에 등불이 켜져 있었다. 모든 것이 아주 깨끗했다. 바닥도 가구도 반들반들 닦여 있었고, 무엇이나 윤이 났다.
「리자베타가 한 일이군.」 젊은이는 생각했다. 온 집 안에 먼지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이런 깔끔함은 심술궂은 늙은 과부의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생각했고, 또 하나의 자그마한 방으로 통하는 문에 드리운 무명 커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슬쩍 훔쳐보았다. 그 방에는 노파의 침대와 서랍장이 놓여 있었고, 그는 지금껏 한 번도 그 안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이 두 칸이 집의 전부였다.
「무슨 볼일이지요?」 노파는 엄하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와, 아까처럼 그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볼 수 있게 그 앞에 버티고 섰다.
「잡힐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뒷면에 지구가 새겨진 구식 납작 은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줄은 강철로 된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잡힌 물건은 기한이 지났어요. 그저께로 한 달이 찼지요.」
「한 달 치 이자를 더 가져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야 내 마음이지요, 양반. 기다리든 당장 잡힌 물건을 팔아넘기든.」
「이 시계에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알료나 이바노브나?」
「그런 시시한 걸 들고 오시니, 양반, 값이 나갈 게 있나요. 지난번엔 반지를 두고 2루블3을 드렸는데, 그건 보석상에서 새것을 1루블 반이면 살 수 있는 물건이지요.」
「4루블만 주십시오. 도로 찾아가겠습니다, 아버지 것이었습니다. 곧 돈이 좀 생길 겁니다.」
「1루블 반에 이자를 미리 떼고, 그래도 좋다면요!」
「1루블 반이라니요!」 젊은이가 소리쳤다.
「그럼 마음대로 하시지요.」 하고 노파는 시계를 그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젊은이는 그것을 받아 들었고, 어찌나 화가 났던지 그대로 나가 버릴 참이었다. 그러나 달리 갈 데가 없다는 것과 여기 온 데에는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 떠올라 곧 스스로를 억눌렀다.
「이리 내십시오.」 그가 거칠게 말했다.
노파는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찾더니 커튼 뒤 다른 방으로 사라졌다. 방 한가운데 혼자 남겨진 젊은이는 귀를 곤두세우고 엿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서랍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맨 위 서랍이로군.」 그는 헤아려 보았다. 「그러니까 열쇠는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전부 강철 고리 하나에 꿰어 한 묶음으로……. 그리고 거기에 다른 것들보다 세 배는 크고 홈이 깊게 파인 열쇠가 하나 있다. 그건 서랍장 열쇠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궤짝이나 금고가 있다는 얘기다…… 알아 둘 만하군. 금고 열쇠는 언제나 그렇게 생겼다…… 그런데 이게 다 얼마나 치사한 짓인가.」
노파가 돌아왔다.
「자, 손님. 한 달에 1루블당 10코페이카라고들 하니, 1루블 반에서 한 달 치를 미리 15코페이카 떼야 하지요. 그런데 지난번에 빌려 드린 2루블에 대해서도 같은 셈으로 미리 20코페이카를 물어야 해요. 그러니 모두 합쳐 35코페이카지요. 그럼 시계 값으로 1루블 15코페이카를 드려야 하는군요. 자, 여기 있어요.」
「뭐라고요! 이제 겨우 1루블 15코페이카라니!」
「그렇지요.」
젊은이는 따지지 않고 돈을 받았다. 그는 노파를 바라보며 자리를 뜨기를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무언가 말하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는 듯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
「하루 이틀 안에 다른 걸 가져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료나 이바노브나 ― 값나가는 물건입니다 ― 은으로 된 ― 담뱃갑인데, 친구한테서 돌려받는 대로……」 그는 당황해 말을 끊었다.
「그럼 그때 가서 이야기하지요, 손님.」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 늘 혼자 계십니까, 동생분은 같이 안 계시고요?」 그는 복도로 나서면서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투로 그렇게 물었다.
「그 애가 양반하고 무슨 상관이랍니까?」
「아, 별것 아닙니다, 그냥 여쭤본 겁니다. 너무 빠르시군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알료나 이바노브나.」
라스콜니코프는 완전히 정신이 흐트러진 채 밖으로 나왔다. 그 혼란은 점점 더 심해졌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는 무슨 생각에 문득 얻어맞기라도 한 듯 두세 번이나 우뚝 멈춰 서기까지 했다. 거리로 나서자 그는 소리쳤다. 「오, 하느님, 이 모든 게 얼마나 역겨운가! 그런데 내가, 내가 정말로……. 아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쓰레기 같은 소리다!」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어떻게 그런 흉악한 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내 마음이 이토록 더러운 짓까지 할 수 있다니. 그래, 무엇보다 더럽다, 구역질 난다, 역겹다, 역겹다! ― 그런데 꼬박 한 달을 나는…….」 그러나 어떤 말로도, 어떤 외침으로도 그의 동요를 다 담아낼 수는 없었다. 노파에게 가는 길에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괴롭히기 시작했던 극심한 혐오감은 이제 어찌나 높은 데까지 치솟았고 어찌나 뚜렷한 형체를 갖추었는지, 그는 이 비참함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보도를 걸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과 부딪쳤으며, 다음 거리에 이르러서야 겨우 제정신이 들었다. 둘러보니 그는 보도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로 들어가게 되어 있는 어느 선술집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취한 사내 둘이 문에서 나와, 서로 욕을 해 대며 서로를 부축한 채 층계를 올라왔다. 라스콜니코프는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곧장 층계를 내려갔다. 그때까지 그는 선술집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나, 지금은 어지럽고 타는 듯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차가운 맥주 한 잔이 간절했고, 갑작스러운 쇠약함을 먹지 못한 탓으로 돌렸다. 그는 어둡고 더러운 구석의 끈적거리는 작은 탁자에 앉아 맥주를 시키고는 첫 잔을 허겁지겁 들이켰다. 곧 속이 편해졌고, 생각이 맑아졌다.
「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그는 희망에 차서 말했다. 「걱정할 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몸이 탈이 난 것뿐이다. 맥주 한 잔에 마른 빵 한 조각 ― 그러면 단박에 머리가 튼튼해지고 생각이 맑아지고 의지가 굳어진다! 흥, 이게 다 얼마나 하찮은 일인가!」
그러나 이렇게 코웃음을 치면서도 그는 어느새 무서운 짐에서 별안간 풀려나기라도 한 듯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 안의 사람들을 다정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그에게는 이 한결 나아진 기분 또한 정상이 아니라는 어렴풋한 예감이 있었다.
그 시각 선술집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층계에서 마주친 취한 사내 둘 말고도, 사내 다섯쯤과 콘서티나를 든 처녀로 이루어진 한 무리가 같은 때에 나가 버린 참이었다. 그들이 나가자 방 안은 조용해지고 제법 텅 비었다. 아직 선술집에 남아 있는 사람은, 맥주 단지를 앞에 놓고 앉은, 취하기는 했으나 그리 심하지는 않은 장인(匠人)으로 보이는 사내와, 그 일행인, 잿빛 수염을 기르고 자락이 넓은 짧은 외투를 입은 덩치 크고 뚱뚱한 사내였다. 이 사내는 몹시 취해서 긴 의자 위에 잠들어 버렸는데, 이따금 잠결인 듯 움찔 깨어나서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손가락을 딱딱 튕기고 상체를 의자 위에서 들썩거리며 아무 뜻 없는 후렴을 흥얼거렸다. 이런 구절을 떠올려 보려고 애쓰면서.
「그이는 한 해 동안 아내를 고이 사랑했네 그이는 아내를 한 ― 한 해 동안 ― 고이 사랑했네.」
그러다 또 별안간 잠에서 깨어나서는,
「사람 붐비는 한길을 걸어가다가 옛날에 알던 그이를 만났다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흥에 어울려 주지 않았다. 말없는 일행은 이 모든 짓거리를 대놓고 적의와 불신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방에는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딘지 퇴직한 관청 서기처럼 보이는 사내였다. 그는 따로 떨어져 앉아 이따금 단지를 홀짝이며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역시 어떤 동요 속에 있는 듯했다.
주
1. 가넷은 러시아 화폐를 영국 동전으로 바꿔 옮겼다. 이 판화 값에는 영국 동전(반 페니)이 쓰였으나 같은 장 뒤쪽의 전당 거래에는 러시아 화폐인 루블·코페이카가 그대로 쓰여, 저본 안에서 두 화폐 체계가 뒤섞인다. 한국어판은 이를 고르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둔다.
2. 이콘 ― 정교회에서 그리스도·성모·성인을 그린 성화(聖畫). 러시아 가정에서는 방 한구석에 모셔 두고 그 앞에 등불을 켜 두는 것이 관습이었다.
3. 루블·코페이카 ― 제정 러시아의 화폐 단위. 1루블은 100코페이카다. 뒤에 노파가 매기는 「한 달에 1루블당 10코페이카」는 월 10퍼센트, 곧 연 120퍼센트의 이자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