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1장
두냐와 그 어머니를 만난 운명적인 자리가 있고 난 이튿날 아침은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정신이 번쩍 드는 영향을 끼쳤다. 몹시 불쾌한 일이기는 했으나,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환상적이고 믿기지 않는 일로만 보이던 것을 그는 조금씩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상한 허영심이라는 검은 뱀이 밤새도록 그의 가슴을 갉아먹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곧바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황달에 걸린 것이 아닌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건강은 아직까지 아무 탈이 없어 보였고, 요사이 제법 살이 오른 제 고결하고 말간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다른 신붓감을, 어쩌면 더 나은 신붓감까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한순간 정말로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제 지금 처지가 다시 떠오르자 그는 고개를 돌려 힘껏 침을 뱉었고, 그것이 그가 얹혀살고 있는 젊은 벗 안드레이 세묘노비치 레베쟈트니코프에게 빈정거리는 미소를 불러일으켰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 미소를 놓치지 않았고 곧바로 젊은 벗의 계정에 그것을 적어 넣었다. 요사이 그가 그 계정에 적어 넣은 것은 적지 않았다. 어제 그 자리의 결말을 안드레이 세묘노비치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의 분노는 갑절이 되었다. 그것이 성급함과 짜증 때문에 홧김에 저지른 두 번째 잘못이었다……. 게다가 그날 아침 내내 불쾌한 일이 꼬리를 물었다. 원로원1에 걸려 있는 제 소송에서까지 걸림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를 짜증 나게 한 것은 다가오는 혼인을 내다보고 빌려 제 돈으로 손을 보게 하던 그 셋집의 임자였다. 부유한 독일인 상인인 그 임자는 방금 서명한 계약을 깬다는 생각 자체를 들으려 하지 않았고,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사실상 새로 단장한 집을 돌려주는 것인데도 위약금을 한 푼도 깎지 않고 내놓으라고 우겼다. 마찬가지로 실내 장식업자들도 사 놓기는 했으나 아직 그 집으로 옮기지 않은 가구의 할부금을 단 1루블도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가구 때문에 혼인을 해야 한단 말인가?」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이를 갈았고, 그와 동시에 또 한 번 절망적인 희망이 번득였다. 「정말로 그 모든 것이 그렇게 돌이킬 수 없이 끝나 버린 것일까? 한 번 더 애를 써 보는 것이 정말 소용없는 일일까?」 두냐 생각이 그의 가슴에 관능적인 통증을 찔러 넣었다. 그 순간 그는 괴로움을 견디고 있었고, 만일 바라기만 해서 라스콜니코프를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었다면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곧바로 그 소원을 입 밖에 냈을 것이다.
「저들에게 돈을 주지 않은 것도 내 잘못이었어.」 레베쟈트니코프의 방으로 맥없이 돌아가며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어쩌자고 그렇게 유대인 노릇을 했을까? 그건 잘못된 절약이었어! 저들이 나를 제 섭리처럼 우러러보게 하려고 한 푼도 쥐여 주지 않고 붙잡아 두려 했는데, 그래, 저 꼴을 보란 말이지! 퉤! 혼수와 선물이며 자질구레한 장신구며 화장 상자며 패물이며 옷감이며 크노프 상회와 영국 상점에서 파는 그런 잡동사니에 천오백 루블쯤 썼더라면 내 처지가 더 나았을 테고…… 더 든든했을 텐데! 저들이 나를 그렇게 쉽게 내치지는 못했을 거야! 저들은 파혼하면 돈과 선물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여길 그런 부류이고, 그러기가 어려웠을 테지! 그리고 양심이 저들을 찔렀을 거야. 여태 그토록 너그럽고 자상했던 사람을 어떻게 내칠 수 있겠어?……. 흠! 내가 실수를 했어.」
그리고 다시 이를 갈며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스스로를 바보라고 불렀다 ― 물론 소리를 내지는 않고.
그는 전보다 갑절로 짜증이 나고 화가 난 채로 집에 돌아왔다. 지나는 길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추도연 준비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어제 그 이야기를 듣기는 했고 실은 초대를 받은 것 같기도 했으나, 제 걱정거리에 빠져 있느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묘지에 가 있는 동안 상을 차리느라 바쁜 리페베흐젤 부인에게 물어보고 그가 들은 바로는, 잔치는 굉장한 규모가 될 것이고 하숙인이 모두 초대받았으며 그 가운데는 죽은 이를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까지 끼어 있고, 전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 다툰 일이 있는데도 안드레이 세묘노비치 레베쟈트니코프까지 초대를 받았으며, 그 자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초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하숙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인 만큼 간절히 기다려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말리아 이바노브나 자신도 근래의 불쾌한 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격식을 갖추어 초대를 받았고, 그래서 준비에 몹시 바빴으며 거기서 진짜 즐거움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껏 차려입어 온통 새 검정 비단 차림이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모든 것이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한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그는 얼마쯤 생각에 잠긴 채 제 방으로, 아니 그보다는 레베쟈트니코프의 방으로 들어갔다. 라스콜니코프가 손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아침 내내 집에 있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이 신사를 대하는 태도는 이상했으나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의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된 날부터 그를 경멸하고 미워했으면서 동시에 그를 얼마쯤 두려워하는 듯했다. 페테르부르크에 닿으면서 그의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된 것이 단순히 인색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그것이 아마 가장 큰 목적이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그는 한때 제 피후견인이었던 안드레이 세묘노비치가 앞서 나가는 젊은 진보주의자로서 어떤 흥미로운 모임들에서 중요한 몫을 맡고 있으며 그 모임들이 하는 일이 시골에서는 전설처럼 이야기된다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그것이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두를 경멸하고 모두의 정체를 까발린다는 그 힘 있고 모르는 것이 없는 모임들은 오래전부터 그에게 묘하기는 하나 아주 막연한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물론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여느 사람들처럼 특히 페테르부르크에 무슨 진보주의자라는 것들이, 허무주의자라는 것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 낱말들이 지닌 뜻을 터무니없을 만큼 부풀리고 비틀어 놓고 있었다. 여러 해 전부터 그가 무엇보다도 두려워한 것은 정체가 까발려지는 일이었고, 제 사업을 페테르부르크로 옮긴다는 생각에 그가 끊임없이 불안해한 주된 까닭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어린아이가 더러 까닭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듯 그것을 두려워했다. 몇 해 전 제 길에 막 들어섰을 무렵 그는 제 후원자였던 지방의 제법 중요한 인물 둘이 무참하게 까발려진 사건 두 건을 겪은 일이 있었다. 한쪽은 공격받은 사람에게 큰 추문으로 끝났고 다른 한쪽은 하마터면 심각한 말썽으로 끝날 뻔했다. 그래서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페테르부르크에 닿는 대로 그 문제를 파고들어, 필요하다면 「우리 젊은 세대」의 환심을 사 둠으로써 앞일에 미리 손을 써 두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 일에서 그는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를 믿고 의지했고, 라스콜니코프를 찾아가기 전에 이미 요즘 도는 문구 몇 개를 주워 담아 두는 데 성공한 터였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가 그저 그런 얼간이라는 것을 그는 곧 알아챘으나, 그렇다고 해서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마음을 놓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진보주의자들이 죄다 그와 같은 바보라고 확신했다 한들 그의 불안이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가 그를 들볶아 대는 온갖 학설과 사상과 체계는 그에게 아무 관심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제 나름의 목적이 있었다 ― 그는 그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당장 알아내고 싶었을 뿐이다. 이 사람들에게 힘이 있는가 없는가? 그들에게서 두려워할 것이 있는가? 그들이 그의 어떤 사업을 까발릴 것인가? 그리고 지금 그들의 공격이 겨누고 있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그들이 정말로 힘이 있다면 그들에게 잘 보여 구슬려 둘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그들을 통해 무언가 얻어 낼 수는 없을까? 실로 수백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빈혈기가 있고 연주창을 앓는 자그마한 사내로, 제가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이상하게 아마빛이 도는 구레나룻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관리였고 거의 언제나 눈에 탈이 있었다. 마음씨는 제법 무른 편이었으나 말할 때는 자신만만하고 더러 지독히 우쭐거렸는데, 그 자그마한 몸집과 어울리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는 아말리아 이바노브나가 가장 존중하는 하숙인 가운데 하나였으니, 술에 취하는 일이 없고 방세를 꼬박꼬박 냈기 때문이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실제로 제법 어리석었다. 그가 진보의 대의와 「우리 젊은 세대」에 붙은 것은 열정에서였다. 그는 유행하는 사상에 달라붙어 그것을 속되게 만들어 버릴 뿐이고 아무리 진심으로 섬긴다 한들 저희가 섬기는 대의를 죄다 희화로 만들어 놓고 마는, 저 수많고 갖가지인 둔재들의 군단, 반쯤 살아 있는 유산아들, 우쭐거리고 어설프게 배운 멋쟁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레베쟈트니코프는 사람이 좋기는 했으나 그 역시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싫어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일은 양쪽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가 아무리 단순하다 한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저를 속여 넘기며 속으로 경멸하고 있다는 것과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푸리에2의 체계와 다윈의 학설을 그에게 풀어 보이려 애썼으나, 근래 들어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지나치게 빈정거리며 듣기 시작했고 심지어 무례하게 굴기까지 했다. 사실인즉 그는 레베쟈트니코프가 그저 그런 얼간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거짓말쟁이이기도 하며, 제 동아리 안에서조차 이렇다 할 연줄이 없고 그저 세 다리 건너 주워들은 것들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며, 게다가 머릿속이 너무나 뒤죽박죽이어서 십중팔구 제 선전 활동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짐작하기 시작한 터였다. 그런 자가 남의 정체를 까발리기는 무슨! 덧붙여 두어야 할 것은,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그 열흘 동안 안드레이 세묘노비치에게서 더없이 기이한 칭찬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안드레이 세묘노비치가 그를 두고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데 기부할 용의가 있다느니, 장차 제 아이들에게 세례를 주지 않을 용의가 있다느니, 두냐가 혼인한 지 한 달 만에 정부를 두더라도 묵인할 용의가 있다느니 하며 치켜세웠을 때 그는 항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제 칭찬을 듣는 것이 어찌나 즐거웠던지 그런 미덕조차 제 것으로 돌려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날 아침 5푼짜리 공채3를 얼마쯤 현금으로 바꿀 일이 있었고, 이제 탁자 앞에 앉아 지폐 뭉치를 세고 있었다. 돈이라고는 거의 만져 본 일이 없는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그 지폐 다발을 무심하게, 심지어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고 제 자신에게 시늉을 하며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안드레이 세묘노비치가 정말로 그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 있으리라고는 무엇으로도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납득시킬 수 없었을 터이고,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그대로 그 나름대로,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제게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며 어쩌면 젊은 벗에게 그가 아랫자리에 있다는 것과 둘 사이의 엄청난 차이를 일깨워 약 올릴 기회를 반기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속으로 쓰라려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도무지 믿기 어려울 만큼 건성이고 짜증스럽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니까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제가 좋아하는 화제인 새롭고 특별한 「공동체」의 창설을 놓고 이야기를 넓혀 가기 시작한 참이었다. 주판알 튀기는 소리 사이사이로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짤막한 대꾸에는 틀림없는, 그리고 무례한 빈정거림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인도적인」 안드레이 세묘노비치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언짢은 기분을 근래에 두냐와 틀어진 일 탓으로 돌렸고, 그 주제를 놓고 한바탕 논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그에게는 그 문제에 관하여 훌륭한 벗을 위로해 줄 만하고 그의 계발을 북돋우는 데 「틀림없이」 도움이 될 진보적인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저쪽에서…… 그 과부 쪽에서 무슨 잔치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지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가장 흥미로운 대목에 이른 안드레이 세묘노비치의 말을 불쑥 가로채며 물었다.
「아니, 모르셨어요? 그런 의식이란 걸 제가 어떻게 보는지는 어젯밤에 말씀드렸잖아요. 그리고 당신도 초대를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어제 그 부인하고 이야기하셨잖아요……」
「그 거지 같은 바보가 그 딴 바보, 라스콜니코프한테서 받은 돈을 죄다 이 잔치에 쏟아부으리라고는 본인으로서는 짐작도 못 했습니다. 방금 지나오면서 저쪽 준비하는 꼴을 보고 놀랐지요, 그 술들이라니! 여러 사람이 초대를 받았고요. 이건 도가 지나칩니다!」 이야기를 끌어 가는 데 무슨 속셈이 있어 보이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말을 이었다. 「뭐라고요? 본인도 초대를 받았다고요? 그게 언제였습니까? 기억에 없군요. 그렇지만 가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가겠습니까? 어제 지나는 길에 그 여자에게, 관리의 궁핍한 과부로서 한 해 치 봉급을 받아 낼 수도 있다는 말을 한마디 했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본인을 초대한 모양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헤헤헤!」
「저도 갈 생각은 없어요.」 레베쟈트니코프가 말했다.
「그러시겠지요, 그 여자를 두들겨 패 놓고서야. 망설일 만도 합니다, 헤헤!」
「누가 누구를 팼다고요?」 레베쟈트니코프가 당황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아니, 한 달 전에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를 두들겨 패지 않으셨습니까. 어제 그렇게 들었는데요…… 그러니까 그쪽 신념이라는 것이 고작 그 정도라는 이야기고…… 여성 문제라는 것도 그리 미덥지가 않다는 이야기지요, 헤헤헤!」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위로라도 받은 듯 다시 주판알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건 다 중상이고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늘 두려워하던 레베쟈트니코프가 소리쳤다. 「그런 일이 전혀 아니었어요, 전혀 달랐다고요. 잘못 들으신 거예요. 그건 모함이에요. 저는 그저 저를 지켰을 뿐이에요. 그 여자가 먼저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고 제 구레나룻을 죄다 잡아 뜯었어요……. 누구든 제 몸을 지키는 것쯤은 허락되는 일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리고 저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도 저에게 폭력을 쓰도록 놔두지 않아요, 그건 전제적인 행위니까요. 어쩌란 말이에요? 저는 그저 그 여자를 밀쳐 냈을 뿐이에요.」
「헤헤헤!」 루쥔이 계속 악의에 차서 웃었다.
「그쪽 기분이 나쁘니까 자꾸 그러시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말도 안 되고 여성 문제하고는 아무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에요! 모르시는군요. 저도 사실 여자가 모든 점에서, 힘에서까지(요즘 그렇게들 주장하니까요) 남자와 같다면 거기서도 평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물론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런 문제는 애초에 생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싸움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고 미래 사회에서 싸움이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싸움에서 평등을 찾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일 테니까요. 제가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아요…… 물론 싸움이 있기는 하지만…… 나중에는 없을 테고, 지금은 있지만…… 아이참! 당신하고 이야기하다 보면 어쩌면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는지! 제가 가지 않는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원칙에 따라 가지 않는 거예요, 추도연이라는 역겨운 인습에 한몫 끼지 않으려고요, 그래서라고요! 하기야 물론 그걸 비웃어 주러 갈 수도 있겠지요……. 거기 사제가 없다니 아쉽네요. 사제가 있다면 꼭 갈 텐데요.」
「그러니까 남의 상에 앉아서 그 상과 그쪽을 초대한 사람들을 모욕하시겠다는 거군요. 예?」
「모욕이 아니라 항의지요. 저는 좋은 뜻으로 그렇게 할 거예요. 간접적으로나마 계몽과 선전의 대의를 도울 수 있을 테니까요. 계몽과 선전을 위해 일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고, 어쩌면 모질수록 더 좋은 것이고요. 저는 씨앗 하나를, 생각 하나를 떨어뜨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씨앗에서 무언가가 자라날 수도 있고요. 제가 어떻게 그들을 모욕한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기분이 상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제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아시다시피 테레비예바는(지금 공동체에 들어와 있지요) 집을 나와서…… 제 몸을…… 바쳤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인습대로 살지 않겠다고, 자유로운 혼인에 들어선다고 알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어요. 그건 너무 모질다고, 부모를 좀 봐주어서 더 다정하게 썼어야 했다고들 했지요. 제가 보기엔 그건 다 터무니없는 소리이고 부드러울 필요가 없어요. 오히려 필요한 것은 항의예요. 바렌츠는 혼인한 지 일곱 해 만에 아이 둘을 버리고 남편에게 편지로 대놓고 말했어요. 『나는 당신과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공동체를 통하여 사회에 또 다른 조직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숨기고 나를 속여 온 당신을 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는 최근에야 그것을 마음 넓은 어떤 사람에게서 배웠고, 그에게 나를 주었으며 그와 함께 공동체를 세우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터놓고 말하는 것은 당신을 속이는 일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나를 되찾을 생각은 마십시오, 너무 늦었습니다.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 편지는 그렇게 써야 하는 거예요!」
「그 테레비예바라는 사람이 세 번째로 자유로운 혼인을 했다던 그 여자입니까?」
「아니에요, 사실은 두 번째예요! 그렇지만 네 번째면 어떻고 열다섯 번째면 또 어때요, 그런 건 다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아쉬워한 적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에요. 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제가 어떤 항의를 그분들에게 들이댔을까 하고 가끔 생각하거든요! 일부러 무슨 일을 저질렀을 거예요…… 본때를 보여 드렸을 거예요! 깜짝 놀라게 해 드렸을 거예요! 아무도 없다는 게 정말 아쉬워요!」
「깜짝 놀라게 한다! 헤헤! 자, 그건 마음대로 하시고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말을 가로챘다. 「대신 이것 하나만 말해 보십시오. 그 죽은 사람의 딸을, 그 가냘퍼 보이는 자그마한 것을 아십니까? 그 여자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실입니까, 아닙니까?」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제 생각에는, 그러니까 그건 제 개인적인 신념입니다만, 그것이 여성의 정상적인 상태예요. 왜 아니겠어요? 제 말은, distinguons4.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이 온전히 정상은 아니지요, 강제된 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미래 사회에서는 완전히 정상일 거예요, 자발적인 것이 될 테니까요. 지금 이대로도 그 여자는 아주 옳았어요. 그 여자는 고통을 겪고 있었고 그것이 그 여자의 자산이었으니까요, 말하자면 그 여자가 마음대로 처분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 자본이었지요. 물론 미래 사회에서는 자산이 필요 없어지겠지만, 그 여자가 맡은 몫은 다른 의미를, 이성에 맞고 그 여자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의미를 갖게 될 거예요. 소피야 세묘노브나 개인으로 말하자면, 저는 그 여자의 행위를 사회 조직에 대한 힘찬 항의로 보고 그 때문에 그 여자를 깊이 존경해요. 정말이지 그 여자를 볼 때마다 기쁩니다!」
「그 여자가 이 하숙에서 쫓겨나게 만든 것이 그쪽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레베쟈트니코프는 격분했다.
「그것도 중상이에요.」 그가 악을 썼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건 죄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지어낸 거예요, 알아듣지를 못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소피야 세묘노브나에게 수작을 건 적이 없어요! 저는 그저 그 여자를 계발하고 있었을 뿐이고, 전혀 사심 없이, 그 여자를 일으켜 항의하게 하려던 것이었어요……. 제가 바란 것은 그 여자의 항의뿐이었고, 소피야 세묘노브나는 어차피 여기 머무를 수 없었어요!」
「당신네 공동체에 들어오라고 청해 보셨습니까?」
「자꾸 웃으시는군요, 아주 온당치 못하게 말이에요, 한 말씀 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모르시는 거예요! 공동체에는 그런 역할이라는 것이 없어요. 공동체는 그런 역할이 없도록 세워지는 것이고요. 공동체 안에서 그런 역할은 본질적으로 바뀌어서, 여기서 어리석은 것이 거기서는 분별 있는 것이 되고, 지금의 조건에서 부자연스러운 것이 공동체 안에서는 더없이 자연스러운 것이 돼요. 모든 것이 환경에 달려 있어요. 모든 것이 환경이고 인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오늘까지도 소피야 세묘노브나와 사이가 좋은데, 그것이야말로 그 여자가 저한테 몹쓸 일을 당했다고 여긴 적이 없다는 증거예요. 저는 지금 그 여자를 공동체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요, 다만 아주, 아주 다른 바탕 위에서요. 뭐가 우스우세요? 우리는 우리 나름의, 더 넓은 바탕 위에 선 특별한 공동체를 세우려 하고 있어요. 우리는 신념에서 더 멀리 나아갔어요. 우리는 더 많이 거부해요! 그리고 그동안에도 저는 소피야 세묘노브나를 계속 계발하고 있고요. 그 여자는 아름다운, 아름다운 성품을 가졌어요!」
「그리고 그 고운 성품을 이용해 먹으신다는 거지요, 예? 헤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그 반대예요.」
「오, 그 반대라! 헤헤헤! 거참 묘한 말씀이군요!」
「믿어 주세요! 제가 왜 감추겠어요? 실은 저 자신도, 그 여자가 저를 대할 때 얼마나 수줍고 정결하고 현대적인지 이상할 지경이에요!」
「그래서 물론 그 여자를 계발하고 계시겠군요…… 헤헤! 그 정숙이라는 것이 죄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납득시키려 애쓰면서 말입니다?」
「전혀 아니에요, 전혀 아니라고요! 어쩌면 그렇게 거칠게, 그렇게 어리석게 ―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 계발이라는 낱말을 오해하실 수 있어요! 맙소사, 어쩌면 그렇게…… 아직도 투박하실 수가! 우리는 여성의 자유를 위해 애쓰고 있는데 당신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군요……. 정결이니 여성의 정숙이니 하는 일반적인 문제야 그 자체로 쓸모없는 것이고 실상 편견이라고 제쳐 두더라도, 저는 저를 대하는 그 여자의 정결을 온전히 받아들여요, 그건 그 여자가 정할 일이니까요. 물론 그 여자가 저를 원한다고 스스로 말해 준다면 저는 제가 무척 운이 좋다고 여길 거예요, 그 처녀를 아주 좋아하니까요. 그렇지만 지금 있는 그대로, 그 여자의 존엄을 저보다 더 존중해서 그 여자를 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저는 바라며 기다립니다, 그뿐이에요!」
「무얼 하나 선물하시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요. 그런 건 생각도 못 해 보셨을 테지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모르시는 거예요! 물론 그 여자는 그런 처지에 있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예요. 아주 다른 문제라고요! 당신은 그저 그 여자를 경멸하는 거예요. 경멸받아 마땅하다고 잘못 여기는 사실 하나를 보고서, 같은 인간을 인도적으로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거지요. 그 여자가 어떤 성품인지 모르시는 거예요! 다만 저로서는 근래 들어 그 여자가 책 읽기도 책 빌리기도 아주 그만두었다는 것이 아쉬워요. 전에는 제가 빌려주곤 했거든요. 또 아쉬운 것은, 항의하는 데 그만한 기운과 결단을 보이고도 ― 이미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지요 ― 스스로를 믿는 힘이, 말하자면 독립이 모자라서 어떤 편견과 어떤 어리석은 생각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그래도 어떤 문제들은 아주 잘 이해해요, 이를테면 손에 입 맞추는 문제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자가 여자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은 여자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불평등의 표시니까요. 우리가 그 문제로 토론을 했고 제가 그걸 그 여자에게 들려주었어요. 프랑스의 노동자 결사에 대한 이야기도 주의 깊게 들었고요. 지금은 미래 사회에서 방에 들어가는 문제를 설명해 주고 있어요.」
「그건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얼마 전에 이런 문제로 토론을 했어요. 공동체의 구성원은 남자든 여자든 다른 구성원의 방에 아무 때나 들어갈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있다고 결정했어요!」
「곤란한 때일 수도 있을 텐데요, 헤헤!」
레베쟈트니코프는 정말로 화가 났다.
「당신은 늘 불쾌한 것만 생각하는군요.」 그가 넌더리를 내며 소리쳤다. 「퉤! 우리 체계를 설명하면서 사생활 문제를 너무 일찍 꺼낸 것이 얼마나 분한지 몰라요! 그건 늘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어서, 이해하기도 전에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지요. 게다가 그걸 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퉤! 저는 체계에 대한 믿음이 단단해지기 전에는 초심자가 그 문제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주장해 왔어요. 그리고 좀 말씀해 보세요, 오물 구덩이에 대체 무엇이 그렇게 부끄럽다는 거예요? 저라면 어떤 오물 구덩이든 맨 먼저 나서서 치울 용의가 있어요. 게다가 그건 희생의 문제도 아니고 그저 노동이에요, 다른 어떤 노동에도 못지않은, 아니 라파엘로나 푸시킨의 일보다 훨씬 나은 명예롭고 유용한 노동이지요, 더 유용하니까요.」
「더 명예롭다, 더 명예롭다, 헤헤헤!」
「『더 명예롭다』는 게 무슨 말씀이에요? 저는 인간의 활동을 두고 그런 표현을 쓰는 걸 이해하지 못해요. 『더 명예롭다』느니 『더 고귀하다』느니 ― 그런 건 죄다 제가 거부하는 낡아 빠진 편견이에요. 인류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 명예로워요. 제가 아는 낱말은 하나뿐이에요. 유용하다! 얼마든지 비웃으셔도 좋지만 그게 사실이에요!」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마음껏 웃었다. 그는 돈 세기를 끝내고 치우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폐 얼마는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오물 구덩이 문제」는 이미 둘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우스운 것은 그것이 레베쟈트니코프를 정말로 화나게 하는 반면 루쥔은 재미있어했다는 점이고, 그 순간 그는 젊은 벗을 화나게 만들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어제 운이 나빴으니까 그렇게 기분이 상하고 성가시게 구는 거예요.」 「독립」이니 「항의」니 해도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맞서기를 감히 못 하고 여전히 지난날의 버릇이 남은 존경을 얼마쯤 지닌 채 그를 대하던 레베쟈트니코프가 불쑥 내뱉었다.
「그보다 이것부터 말해 보십시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거만하게 언짢은 낯으로 말을 가로챘다. 「혹시…… 아니 그보다, 그 젊은 사람더러 여기 잠깐 들러 달라고 청할 만큼 정말로 가까운 사이입니까? 다들 묘지에서 돌아온 모양이던데……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사람을, 그 젊은 사람을 좀 봐야겠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레베쟈트니코프가 놀라서 물었다.
「아, 그냥 그러고 싶습니다. 본인은 오늘이나 내일 여기를 떠날 참이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 이야기해 둘 것이 있어서…… 그런데 이야기하는 동안 그쪽이 자리에 있어도 좋습니다. 아니, 있는 편이 낫겠군요. 그러지 않으면 그쪽이 무슨 상상을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저는 아무 상상도 안 해요. 그저 물어봤을 뿐이고, 그 여자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불러오는 것쯤이야 아주 쉬운 일이지요. 지금 가겠습니다, 그리고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 마음 놓으세요.」
오 분 뒤 레베쟈트니코프가 소냐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는 몹시 놀란 채, 늘 그렇듯 수줍음에 짓눌린 채 들어왔다. 그녀는 이런 자리에서는 언제나 수줍어했고 낯선 사람을 언제나 두려워했으니, 어릴 적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심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그녀를 「정중하고 상냥하게」 맞았으나, 거기에는 그의 생각으로는 그만한 체면과 무게를 지닌 사람이 그녀처럼 젊고 흥미로운 것을 대할 때 어울리는, 얼마쯤 놀리는 듯한 허물없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서둘러 그녀를 「안심시키고」 탁자 앞 제 맞은편에 앉혔다. 소냐는 앉아서 둘레를 둘러보았다 ― 레베쟈트니코프를, 탁자 위에 놓인 지폐를, 그러고 나서 다시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그리고 그녀의 눈은 그에게 못 박힌 채 떨어지지 않았다. 레베쟈트니코프가 문 쪽으로 가려 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소냐에게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손짓하고 레베쟈트니코프를 붙들었다.
「라스콜니코프가 저기 있습니까? 왔습니까?」 그가 속삭이듯 물었다.
「라스콜니코프요? 네. 왜요? 네, 저기 있어요. 막 들어오는 걸 봤어요……. 왜요?」
「저, 본인이 특별히 청하건대 여기 우리와 함께 있어 주시고 본인을 이…… 젊은 여자와 단둘이 두지 말아 주십시오. 몇 마디만 나누면 되는 일입니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무슨 말을 만들어 낼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라스콜니코프가 무슨 말이든 옮기고 다니는 것은 본인이 바라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레베쟈트니코프가 요점을 알아챘다. 「네, 옳은 말씀이에요……. 물론 저 개인으로서는 불안해하실 까닭이 없다고 확신합니다만…… 그래도, 옳은 말씀이에요. 그럼요, 있겠습니다. 저기 창가에 서서 방해가 되지 않게 하지요……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소파로 돌아가 소냐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며 지극히 위엄 있는, 심지어 엄한 낯빛을 지었으니, 「부인, 착각일랑 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냐는 당혹감에 짓눌렸다.
「먼저, 소피야 세묘노브나, 존경하는 어머님께 본인의 사정을 말씀드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맞지요?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당신에게 어머니를 대신하는 분이니까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대단히 위엄 있게, 그러면서도 상냥하게 말을 꺼냈다.
그의 뜻이 우호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네, 그렇습니다. 어머니를 대신하는 분입니다.」 소냐가 겁먹은 듯 서둘러 대답했다.
「그러면 본인의 사과를 그분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피할 수 없는 사정으로 말미암아 본인은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게 되었고, 어머님의 고마운 초대에도 불구하고 추도연에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네…… 전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곧.」
그리고 소냐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요,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그녀의 순진함과 예법에 어두운 것을 보고 미소 지으며 그녀를 붙들었다. 「그리고 친애하는 소피야 세묘노브나, 본인에게만 관계되는 그만한 하찮은 일로 당신 같은 분을 본인이 감히 번거롭게 했으리라 여기신다면 본인을 잘 모르시는 것입니다. 본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소냐는 황급히 앉았다. 그녀의 눈은 탁자 위에 남아 있는 회색과 무지개빛 지폐5에 다시 한순간 머물렀으나 그녀는 얼른 눈길을 돌려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눈을 고정했다. 남의 돈을 쳐다보는 것이, 더구나 그녀로서는 끔찍하게 무례한 일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녀는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왼손에 쥐고 있는 금테 안경과 가운뎃손가락에 낀, 노란 보석이 박힌 묵직하고 몹시 아름다운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눈길을 돌렸고, 어디를 보아야 할지 몰라 끝내는 다시 표트르 페트로비치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더욱 위엄 있게 뜸을 들인 뒤 그가 말을 이었다.
「본인은 어제 지나는 길에 우연히 가엾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와 두어 마디를 나누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분이 처한 처지가 ―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상궤를 벗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네…… 상궤를 벗어난……」 소냐가 황급히 맞장구쳤다.
「아니면 더 간단하고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병이 든 것이지요.」
「네, 더 간단하고 알아듣기 쉽…… 네, 병이 든 것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러니 인간애에서, 그리고 말하자면 연민에서 본인은 그분의 불행한 처지를 내다보고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이 가난에 짓눌린 집안 전체가 이제 오로지 당신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소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그분께 연금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분이 저에게, 연금을 받아 주시기로 하셨다고 말했거든요. 그것이 사실입니까?」
「조금도 그런 일이 없고, 실상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본인은 그저 재직 중에 사망한 관리의 과부로서 임시 보조를 받을 수도 있다고 넌지시 비쳤을 뿐입니다 ― 그것도 후원자가 있을 때에나 말이지요…… 그런데 보아하니 돌아가신 부친께서는 근무 연한을 다 채우지도 못했고 근래에는 아예 관직에 있지도 않았더군요. 요컨대 무슨 희망이 있다 한들 대단히 덧없는 것이니, 그런 경우에는 보조를 청구할 근거 자체가 없어 어림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벌써 연금을 꿈꾸고 있다니, 헤헤헤!…… 앞서 나가는 부인이올시다!」
「네, 그렇습니다. 그분은 남을 잘 믿고 마음이 좋아서, 마음이 좋으니 무엇이든 다 믿어 버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런 분이라서…… 네…… 그분을 너그러이 보아주셔야 합니다.」 소냐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가려고 일어섰다.
「그런데 본인이 하려던 말씀은 아직 듣지 않으셨습니다.」
「네, 듣지 않았습니다.」 소냐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앉으십시오.」 그녀는 끔찍하게 당황했다. 그녀는 세 번째로 다시 앉았다.
「그 불행한 어린것들과 함께 있는 그분의 처지를 보건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힘이 닿는 한에서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힘이 닿는 한에서이지 그 이상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그분을 위하여 의연금을 모으거나 복권을 마련하거나 그 비슷한 것을, 곧 이런 경우에 벗들이나 심지어 남을 돕고자 하는 바깥사람들이 으레 마련하는 그런 것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인이 당신께 말씀드리려던 것이 바로 그것이니, 그것은 능히 될 수 있는 일입니다.」
「네, 네……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겁니다.」 소냐가 표트르 페트로비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오늘부터 시작해도 되겠고, 오늘 저녁에 의논해서 말하자면 기초를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곱 시에 본인에게로 오십시오. 레베쟈트니코프 씨도 우리를 거들어 주시리라 봅니다. 그런데 미리 일러 두어야 할 사정이 한 가지 있고, 소피야 세묘노브나, 본인이 감히 당신을 번거롭게 하여 여기까지 오시게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돈을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본인의 손에 쥐여 드릴 수는 없으며, 실상 그것은 위태로운 일입니다. 오늘의 추도연이 그 증거입니다. 그분에게는 내일 먹을, 말하자면 빵 한 조각도 없고…… 뭐, 신발이며 구두며 아무것도 없는데, 오늘 자메이카 럼주를 사들였고 게다가 마데이라주까지, 그리고…… 그리고 커피까지 산 모양입니다. 지나오면서 본인이 보았습니다. 내일이면 그것이 죄다 다시 당신에게 떨어질 테고 저들에게는 빵 한 조각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니, 본인의 생각으로는 그 불행한 과부가 그 돈을 알지 못하고 이를테면 당신만이 알도록 의연금을 모아야 합니다. 본인의 말이 옳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뿐이고, 한평생에 한 번인데……. 그분은 그렇게나 예를 다하고 싶어 하셨고, 그이를 기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분별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저는 정말, 정말…… 저들도 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갚아 주실…… 그리고 고아들이……」
소냐는 울음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점을 마음에 새겨 두십시오. 그리고 이제 당신 친족을 위하여 본인이 따로 내놓을 수 있는 적은 액수를 본인 개인의 것으로 받아 주시겠습니까. 본인의 이름이 이 일과 함께 오르내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 말하자면 본인에게도 나름의 걱정거리가 있는 터라 더는 못 합니다……」
그리고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조심스럽게 펼친 10루블짜리 지폐 한 장을 소냐에게 내밀었다. 소냐는 그것을 받아 들고 새빨개져서는 벌떡 일어나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작별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격식을 갖추어 그녀를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녀는 흥분하고 괴로워하며 마침내 방을 빠져나가, 당혹감에 짓눌린 채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에게로 돌아갔다.
그동안 내내 레베쟈트니코프는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창가에 서 있거나 방 안을 왔다 갔다 했다. 소냐가 나가자 그는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걸어가 엄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다 들었고 다 보았습니다.」 그가 마지막 동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건 명예로운 일이에요, 아니 제 말은, 인도적인 일이지요! 감사받기를 피하려 하셨지요, 제가 봤어요! 그리고 저는 사사로운 자선에 원칙적으로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악을 뿌리 뽑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니까요. 그래도 당신이 하신 일을 기쁘게 보았다는 것만은 인정해야겠어요 ― 그럼요, 그럼요, 마음에 듭니다.」
「그건 다 터무니없는 소리입니다.」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얼마쯤 당황하여 중얼거리고는 레베쟈트니코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니에요,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에요! 어제 당신처럼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도 남의 불행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비록 사회적으로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해도 ― 그래도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정말이지 당신에게서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어요, 표트르 페트로비치, 더구나 당신 생각대로라면 말이지요…… 아, 당신 생각이라는 게 당신에게 얼마나 걸림돌인지! 이를테면 어제 운이 나빴던 일로 얼마나 괴로워하고 계세요.」 표트르 페트로비치에게 애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 순박한 레베쟈트니코프가 소리쳤다. 「그리고 혼인이, 법률상의 혼인이 당신에게 무슨 소용이에요, 친애하고 고결한 표트르 페트로비치? 어째서 혼인의 그 합법성에 매달리세요? 자, 저를 때리셔도 좋지만 저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당신이 자유로운 것이, 당신이 인류에게 아주 버려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기뻐요, 정말로 기뻐요……. 자, 속엣말을 다 했습니다!」
「당신들의 그 자유로운 혼인에서 바보가 되어 남의 자식을 길러 주기는 싫으니까, 그래서 본인은 법률상의 혼인을 바라는 겁니다.」 루쥔이 무어라도 대답하려고 대꾸했다.
그는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아이라고요? 아이 이야기를 하셨군요.」 레베쟈트니코프가 나팔 소리를 들은 군마처럼 튀어 나갔다. 「아이는 사회 문제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지요,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아이 문제에는 다른 해법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아예 낳지 않겠다고 해요, 아이가 가족이라는 제도를 떠올리게 하니까요. 아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명예라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그건 제 약점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소름 끼치는, 군인다운, 푸시킨식 표현6은 미래의 사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게 대체 무슨 뜻이겠어요? 터무니없는 소리예요, 자유로운 혼인에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을 테니까요! 그건 법률상의 혼인이 낳는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고, 말하자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며 항의예요. 그러니 실상 굴욕이랄 것도 없지요…… 그리고 제가 만일, 터무니없는 가정입니다만, 법률에 따라 혼인하게 된다면 저는 오히려 그것을 기뻐할 거예요. 저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겠어요. 『여보, 나는 여태 당신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당신을 존경하오, 당신이 항의할 줄 안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웃으시는군요! 그건 당신이 편견에서 벗어날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아이참! 법률상의 혼인에서 속는 것이 어째서 불쾌한지 저는 이제 알아요, 그렇지만 그건 양쪽이 다 굴욕을 당하는 비루한 처지가 낳는 비루한 결과일 뿐이에요. 자유로운 혼인에서처럼 속임수가 드러나 있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돼요. 당신의 아내는 당신이 자기 행복을 가로막거나 새 남편 때문에 자기에게 앙갚음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김으로써 당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를 증명해 보일 뿐이에요. 제기랄! 저는 가끔 꿈을 꿉니다, 제가 혼인을 하게 된다면, 퉤! 그러니까 제가 장가를 들게 된다면, 법률에 따르든 아니든 마찬가지입니다만, 저는 아내가 스스로 정부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내에게 정부를 선물하겠어요. 『여보』 하고 말하겠어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바라는 것은 당신이 나를 존경하는 것이오. 자!』 제 말이 옳지 않아요?」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들으면서 킥킥거렸으나 그다지 흥겨워하지는 않았다. 실은 거의 듣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다른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고 마침내 레베쟈트니코프까지 그것을 알아챘다. 표트르 페트로비치는 들떠 보였고 두 손을 비볐다. 레베쟈트니코프는 나중에 이 모든 것을 떠올리고 곰곰이 되새겼다.
주
1. 루쥔이 걸어 둔 것은 민사 소송이다. 제정 러시아에서 민사·형사 사건의 최종 상소심은 원로원이 맡았다. 저본은 이를 영국 독자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옮겼다.
2. 샤를 푸리에(1772~1837)는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팔랑주라 부르는 생활·노동 공동체를 통해 사회를 고쳐 나가자고 주장했다. 1840년대 이후 러시아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3. 5푼짜리 공채 ― 해마다 5퍼센트의 이자가 붙는 러시아 국채. 1860년대에 널리 거래되던 무기명 증권으로 언제든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4. distinguons ― 프랑스어로 「구별해 봅시다」. 논의에서 개념을 갈라 따지자고 할 때 쓰는 스콜라 논법의 상투어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의 프랑스어가 몰락한 집안의 혈통을 내세우는 표지인 것과 달리 이 사람의 프랑스어는 배운 티를 내는 표지이므로, 본문에 뜻을 나란히 적지 않고 각주로만 밝힌다.
5. 제정 러시아의 지폐는 액면마다 빛깔이 달라 흔히 빛깔 이름으로 불렸다. 회색은 25루블권, 무지개빛은 100루블권을 가리킨다.
6. 푸시킨은 1837년 아내의 평판을 둘러싼 결투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그 뒤로 러시아에서 명예와 결투는 떼어 놓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