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꿈 문제에 관한 학술 문헌1
이제부터 나는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심리학적 기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방법을 적용하면 모든 꿈이 의미를 지닌 심리학적 구조물로 드러나 깨어 있는 상태의 심리 활동 안에 그 자리를 지정해 끼워 넣을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려 한다. 나아가 꿈을 낯설고 모호하게 만드는 과정들을 해명하고, 그 과정들을 실마리 삼아, 서로 힘을 합치기도 하고 서로 맞서기도 하면서 꿈을 빚어내는 심리적 힘들의 본성을 밝혀내려 애쓸 것이다. 여기까지 해내면 내 연구는 끝난다. 그 지점에서 꿈의 문제는 더 넓은 문제들과 만나게 되고, 그 문제들의 해결은 다른 재료를 가지고 시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독자가 앞선 저자들의 업적과 꿈 문제를 둘러싼 오늘날 학계의 형편을 이미 알고 있다고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 논고를 써 나가는 동안 그것들로 되돌아갈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써 왔는데도 꿈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일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저자들이 하나같이 인정하는 바여서 개개인의 의견을 따로 인용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책 끝 문헌 목록에 실린 글들에서 우리 주제에 관한 시사적인 관찰과 흥미로운 재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꿈의 참된 본성에 관한 것이나 꿈의 수수께끼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결정적으로 풀어 주는 것은 거의 또는 전혀 없다. 교양 있는 일반인에게까지 전해진 것은 물론 그보다도 적다.
꿈을 심리학의 대상으로 다룬 최초의 책은 아리스토텔레스[1]의 것(『꿈과 꿈 해석에 관하여』)인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꿈이 신적인 성질은 아니지만 다이몬적인 성질을 지니며, 바르게 해석하기만 하면 실로 깊은 뜻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꿈 생활의 몇 가지 특성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꿈이 잠자는 동안 느끼는 사소한 감각을 커다란 감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을 알았다(「몸의 이 부분이나 저 부분이 조금만 따뜻해져도, 사람은 자기가 불 속을 걸어가며 뜨거움을 느낀다고 상상한다」). 이로부터 그는, 몸에 변화가 막 시작되어 낮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가더라도 꿈이 그 첫 징후를 의사에게 쉽게 누설해 줄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나는 준비가 모자라고 숙련된 도움도 얻지 못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논고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없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고대인들은 꿈을 꿈꾸는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신이 불어넣은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꿈 생활을 평가할 때 어느 시대에나 보이는 서로 대립하는 두 흐름이 고대에 이미 눈에 띄었다. 고대인들은 꿈꾼 사람에게 경고하거나 앞날을 알려 주려고 보낸 참되고 값진 꿈과, 그를 그릇된 길로 이끌거나 파멸로 몰아넣으려는 헛되고 거짓되고 공허한 꿈을 구별했다.2 고대인의 이 전(前)과학적인 꿈 관념은 분명 그들의 인생관 전반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들의 인생관은 마음속에서만 실재하는 것을 외부 세계에 실재로 투사하곤 했다. 게다가 이 관념은 아침에 꿈이 남긴 기억이 깨어 있는 생활에 주는 주된 인상도 설명해 주었다. 이 기억 속에서 꿈은 나머지 심리 내용과 견주어 볼 때 어딘가 낯선 것, 말하자면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꿈이 초자연적인 데서 비롯한다는 이론을 오늘날에는 따르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여긴다면 그 또한 잘못이다. 편협하고 신비주의적인 저자들은 모두 제쳐 두자. 한때 드넓었던 초자연의 영역에서 남은 잔재가 과학적 설명에 쓸려 나가기 전까지는, 그들이 그 잔재에 매달리는 것도 전적으로 정당하다. 그들 말고도, 모험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꺼리는 명민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꿈이라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대어 초인적인 힘이 존재하고 관여한다는 종교적 믿음을 세우기까지 하는 이들이 있다(하프너[32]). 몇몇 철학 학파, 이를테면 셸링 학파가 꿈 생활에 부여하는 타당성은 고대에 꿈의 신성(神性)이 의심받지 않던 일의 뚜렷한 메아리다. 꿈의 점술적인 힘, 곧 예언하는 힘에 관한 논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시도된 심리학적 설명이 쌓여 있는 재료를 감당해 내기에는 너무도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주장은 물리쳐야 한다고 아무리 강하게 느낀다 해도 말이다.
꿈 문제에 관한 우리의 학문적 지식은 그 역사를 쓰기가 무척 어렵다. 그 지식의 어떤 부분들이 아무리 값졌다 해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간 진보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뒤따르는 연구자들이 그 위에 계속 쌓아 올릴 수 있는, 확실한 성과로 다져진 토대는 세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 저자는 저마다 같은 문제를 처음부터 새로 붙잡는다. 내가 저자들을 연대순으로 따라가며 각자가 꿈의 문제에 관해 품은 견해를 개관한다면, 이 주제에 관한 지식의 현재 상태를 명료하고 완결된 그림으로 그려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아니라 주제를 따라 논의를 짜기로 했고, 꿈의 문제마다 그것을 풀기 위해 문헌에 나와 있는 재료를 인용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저기 널리 흩어져 있고 다른 주제의 문헌과도 얽혀 있는 이 문헌을 모두 섭렵하지는 못했으니, 내 서술에서 근본적인 사실이나 중요한 관점이 빠지지만 않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해 달라고 독자에게 청할 수밖에 없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저자는 잠과 꿈을 한데 묶어 다루는 쪽으로 이끌렸고, 거기에 더해 정신병리학의 유사한 상태들이나 환각, 환영 따위의 꿈 비슷한 상태들도 으레 함께 다루었다. 반면에 더 최근의 저작들에는 주제에 좀 더 바짝 붙어서 꿈 생활의 단 한 가지 물음만을 대상으로 삼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나는 이 변화가, 이처럼 어두운 문제에서는 세부 연구를 여럿 쌓아 가야만 해명과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의 표현이라고 본다. 내가 여기서 내놓으려는 것도 바로 그런 세부 연구, 그중에서도 특별히 심리학적인 성격의 연구다. 잠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생리학적 문제이므로3 나로서는 그것을 연구할 계기가 별로 없다. 심리 장치의 기능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바뀐다는 점도 잠의 특성에 포함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잠에 관한 문헌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꿈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부분적으로 서로 얽혀 있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로 이어진다.
(가) 꿈과 깨어 있는 상태의 관계
막 잠에서 깬 사람은 소박하게 이렇게 판단한다. 꿈은, 다른 세계에서 온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꿈꾼 사람을 다른 세계로 데려갔다는 것이다. 꿈의 현상을 세심하고 분별 있게 기술해 준 옛 생리학자 부르다흐[8]는 자주 인용되는 한 대목(474쪽)에서 이 확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깨어 있는 생활은 그 시련과 기쁨, 즐거움과 괴로움을 안은 채 되풀이되는 법이 없다. 오히려 꿈은 우리를 그런 것에서 벗어나게 하려 한다. 우리 마음이 온통 한 가지 일로 가득 차 있을 때에도, 깊은 슬픔이 가슴을 찢어 놓았거나 어떤 과제가 우리 정신의 힘을 송두리째 요구하고 있을 때에도, 꿈은 우리에게 전혀 낯선 것을 주거나, 현실에서 몇 가지 요소만 가져다 조합하거나, 아니면 그저 우리 기분의 가락에 끼어들어 현실을 상징으로 나타낼 뿐이다.」
L. 슈트륌펠[66]도 어디서나 마땅히 높이 평가받는 연구서 『꿈의 본성과 기원』(16쪽)에서 같은 취지로 말한다. 「꿈꾸는 사람은 깨어 있는 의식의 세계에 등을 돌린다」(17쪽). 「꿈속에서는 깨어 있는 의식의 질서 정연한 내용과 그 정상적인 움직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다」(19쪽). 「꿈속의 정신이 깨어 있는 상태의 규칙적이고 정상적인 내용과 경과에서 거의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압도적 다수의 저자는 꿈과 깨어 있는 생활의 관계를 이와 반대로 보았다. 이를테면 하프너[32]는 이렇게 쓴다(19쪽). 「무엇보다 꿈은 깨어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우리 꿈은 언제나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 의식 속에 있던 표상들과 결합한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꿈이 전날의 체험과 이어져 있는 실마리를 거의 언제나 찾아낼 수 있다.」 바이간트[75]는 앞에서 인용한 부르다흐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6쪽). 「꿈이 우리를 일상생활에서 풀어 주기는커녕 곧장 일상생활로 도로 이끌어 간다는 것을 자주 관찰할 수 있고, 아마 대다수의 꿈이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모리[48]는 간결한 공식으로 이렇게 말한다(56쪽). 「Nous rêvons de ce que nous avons vu, dit, désiré ou fait.」〔우리는 우리가 보고, 말하고, 바라고, 행한 것을 꿈꾼다.〕 예센[36]은 1855년에 펴낸 『심리학』(530쪽)에서 조금 더 자세히 말한다. 「꿈 내용은 개인의 인격에 따라, 나이와 성별과 신분과 교육과 습관에 따라, 그리고 지나온 삶 전체의 사건과 체험에 따라 많든 적든 정해진다.」
고대인들도 꿈 내용이 삶에 달려 있다는 점에 대해 같은 생각을 품었다. 라데슈토크[54]를 인용한다(139쪽).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로 진군하기에 앞서 좋은 조언을 듣고 그 결심을 거두었는데도 꿈이 되풀이하여 원정을 부추기자, 페르시아인의 옛 합리적 꿈 해석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아르타바노스는 꿈 영상에는 대개 깨어 있을 때 생각하던 것이 담긴다고 그에게 아주 적절하게 일러 주었다.」
루크레티우스의 교훈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제4권 959행)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Et quo quisque fere studio devinctus adhaeret,」〔저마다 대개 어떤 일에 마음이 묶여 매달려 있든,〕
「aut quibus in rebus multum sumus ante morati」〔우리가 앞서 어떤 일에 오래 머물렀든,〕
「atque in ea ratione fuit contenta magis mens,」〔그리하여 마음이 그 일에 더 골몰해 있었든,〕
「in somnis eadem plerumque videmur obire;」〔꿈속에서 우리는 대개 같은 일을 하는 듯 보인다.〕
「causidici causas agere et componere leges,」〔변호인은 소송을 변론하고 법조문을 짜는 듯하고,〕
「induperatores pugnare ac proelia obire,」〔장군은 싸우고 전투를 치르는 듯하다,〕 등등.
키케로(『예언에 관하여(De Divinatione)』 제2권)도 아주 비슷한 말을 하고, 훨씬 뒤에 모리도 같은 말을 한다.
「Maximeque reliquiae earum rerum moventur in animis et agitantur, de quibus vigilantes aut cogitavimus aut egimus.」〔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생각했거나 행한 일들의 잔재가 마음속에서 움직이며 요동친다.〕
꿈 생활과 깨어 있는 생활의 관계를 두고 이 두 견해가 드러내는 모순은 참으로 풀 길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여기서 F. W. 힐데브란트[35](1875)의 서술을 소개해 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는 꿈의 특성들은 대체로 「겉보기에 모순으로까지 번져 가는 일련의 대조」라고 부르는 것 말고는 달리 기술할 길이 없다고 본다(8쪽). 「이 대조 가운데 첫째는, 한편으로는 꿈이 참되고 실제적인 삶에서 엄격히 고립되고 격리되어 있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는 둘이 끊임없이 서로를 침범하며 늘 서로에게 기대고 있다는 점으로 이루어진다. 꿈은 깨어 있는 동안 체험하는 현실과 완전히 갈라져 있는 무엇이다. 현실의 삶과는 건널 수 없는 깊은 틈으로 갈라진 채 밀봉된 하나의 존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꿈은 우리를 현실에서 풀어 주고, 현실에 대한 정상적인 기억을 꺼 버리며, 우리를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삶 속에 데려다 놓는다. 그 삶은 근본적으로 현실과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힐데브란트는 이어서, 잠이 들 때 우리의 존재 전체가 그 모든 존재 형식과 함께 「보이지 않는 뚜껑문 아래로 꺼지듯」 사라진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꿈속에서 우리는 유폐된 나폴레옹에게 일품 모젤 포도주를 바치려고 세인트헬레나로 항해하고 있다. 전(前) 황제는 우리를 더없이 다정하게 맞아 주고, 깨어나면서 이 흥미로운 착각이 깨지면 우리는 거의 서운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이제 꿈의 상황을 현실과 견주어 보자. 꿈꾼 사람은 포도주 상인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는 바다 항해를 해 본 적이 없으며, 설령 그런 항해를 한다 해도 세인트헬레나는 그가 행선지로 고를 리 없는 곳이다. 꿈꾼 사람은 나폴레옹에게 아무런 호감도 없고, 오히려 애국심에서 우러난 강한 증오를 품고 있다. 끝으로 나폴레옹이 그 섬에서 죽었을 때 꿈꾼 사람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나폴레옹과 개인적으로 무슨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이처럼 꿈의 체험은 서로 완벽하게 들어맞으며 이어지는 두 시기 사이에 끼워 넣어진 낯선 무엇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하고 힐데브란트는 말을 잇는다. 「그 반대도 겉보기에 똑같이 참되고 옳다. 나는 이 격리 및 고립과 나란히, 그럼에도 가장 긴밀한 관계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다. 꿈은 무엇을 내놓든 그 재료를 현실에서, 그리고 이 현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정신생활에서 찾아낸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꿈이 아무리 기이해 보여도 결코 현실에서 떨어져 나갈 수는 없으며, 꿈의 가장 숭고한 구조물도 가장 익살맞은 구조물도 그 기본 재료를 언제나 외부 세계에서 우리가 눈으로 본 것에서, 아니면 전에 우리가 깨어 있을 때의 생각 어딘가에 자리 잡았던 것에서 빌려 와야 한다. 달리 말해 그 재료는 우리가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이미 체험한 것에서 가져온 것이어야 한다.」
주
1. 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00년까지.
2. 이와 달리 O. 그루페, 『그리스 신화와 종교사(Griechische Mythologie und Religionsgeschichte)』, 390쪽을 참조하라. 「꿈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현재(또는 과거)의 영향만 받았고 미래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주어진 표상이나 그 반대를, 이를테면 배고픔이나 배부름을 곧바로 만들어 내는 ἐνύπνια, 곧 insomnia와, 주어진 표상을 공상적으로 가공하는 φαντάσματα, 이를테면 가위눌림, 곧 ephialtes가 들었다. 둘째 부류는 이와 달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은 (1) 꿈속에서 받는 직접적인 예언(χρηματισμός, oraculum), (2)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예고(ὅραμα), (3) 상징적인 꿈, 곧 해석이 필요한 꿈(ὄνειρος, somnium)이다. 이 이론은 여러 세기 동안 이어져 왔다.」
3. 영역본은 이 자리를 「psychological problem」(심리학적 문제)이라 했으나, 바로 앞에서 저자가 「특별히 심리학적인 성격의 연구」를 내놓겠다고 하고 뒤따르는 양보절(「심리 장치의 기능 조건이 바뀐다는 점도 포함되어야 하겠지만」)과도 맞지 않는다. 독일어 원문(wesentlich physiologisches Problem)에 따라 「생리학적 문제」로 옮겼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