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꿈의 해석(사) 꿈속의 정동
차례
로그인

제6장 꿈 작업

(사) 꿈속의 정동

슈트리커[77]는 깊이 있는 지적 하나로, 꿈속의 정동 표현은 우리가 잠에서 깬 뒤 꿈 자체를 떨쳐 버릴 때 흔히 그러듯 가볍게 처리해 버릴 수 없다는 사실로 우리의 주의를 이끌었다. 「꿈에서 내가 강도를 두려워한다면, 강도는 확실히 상상의 것이지만 강도에 대한 두려움은 실제의 것이다.」 꿈에서 내가 기뻐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 느낌이 증언하는 바로는, 꿈에서 체험한 정동은 깨어 있는 생활에서 체험한 같은 강도의 정동과 조금도 다름없이 유효하다. 그리고 꿈은 우리의 실제 정신적 체험의 일부로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하는데, 그 요구는 표상 내용보다 정동 내용 때문에 더 힘차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둘을 갈라놓지 못한다. 정동을 표상 내용과 이어 놓지 않고서는 심리적으로 평가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정동과 표상이 종류나 강도에서 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깨어 있을 때의 우리 판단은 갈피를 잃는다.

꿈에서는 표상 내용에, 깨어 있을 때의 사고라면 반드시 따르리라고 기대할 정동의 영향이 따르지 않는다. 이 사실에 사람들은 언제나 놀라워했다. 슈트륌펠은 꿈속의 표상이 심리적 가치를 빼앗긴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꿈에는 그 반대의 예도 없지 않다. 정동이 생겨날 계기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내용에서 강렬한 정동의 표현이 나타나는 경우다. 꿈에서 나는 끔찍하거나 위험하거나 역겨운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두려움이나 혐오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반대로 해롭지 않은 것에 겁에 질리고 유치한 것에 기뻐할 때도 있다.

외현 내용에서 잠재 내용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꿈의 이 수수께끼는 아마 다른 어떤 꿈 문제보다도 더 갑작스럽고 더 완전하게 사라진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다. 수수께끼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석은 표상 내용은 전치와 대체를 겪었지만 정동은 바뀌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러니 꿈 왜곡으로 달라진 표상 내용이 온전히 남은 정동과 더는 맞지 않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석이 올바른 내용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고 나면 역시 놀랄 까닭이 없다.

저항하는 검열의 영향을 받은 심리적 콤플렉스에서는 정동이 굽히지 않는 구성 요소이며, 그 콤플렉스를 올바르게 보충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동뿐이다. 이런 사정은 꿈에서보다 정신신경증에서 한층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신신경증에서 정동은 적어도 그 질에 관한 한 언제나 옳다. 정동의 강도는 신경증적 주의가 옮겨 감으로써 오히려 커질 수도 있다. 히스테리 환자가 하찮은 일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놀라거나,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환자가 아무것도 아닌 일에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자책이 생겨나는 데 어리둥절해한다면, 두 사람은 모두 표상 내용을, 곧 하찮은 일이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이 표상 내용을 생각의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헛되이 맞서 싸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거꾸로 정동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정동에 속하되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억제된 표상을 찾아냄으로써 그들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정동 발생과 표상 내용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풀 수 없는 유기적 결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두 부분이 말하자면 땜질로 붙어 있을 뿐이어서 분석으로 서로 떼어 낼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꿈 해석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보여 준다.

먼저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마땅히 정동을 일으켜야 할 표상 내용에 정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분석이 그 까닭을 밝혀 주는 예다.

I. 꿈꾼 사람은 사막에서 사자 세 마리를 보는데, 그중 한 마리는 웃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사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뒤에 그녀는 사자들을 피해 달아났던 것이 틀림없다. 나무 위로 기어오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니 프랑스어 교사인 사촌이 나무 위에 벌써 올라가 있다, 등등.

이 꿈에 대해 분석이 내놓은 재료는 다음과 같다. 꿈꾼 사람의 영어 수업에 나온 한 문장이 이 꿈의 사소한 계기가 되었다. 「사자(lion)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갈기다.」 아버지는 얼굴을 갈기처럼 둘러싼 수염을 길렀다. 영어 선생님은 이름이 라이언스(Lyons) 양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가 뢰베(독일어 Loewe는 사자라는 뜻)의 발라드집을 보내 준 일도 있었다. 이것이 곧 세 마리 사자다. 그녀가 이 사자들을 두려워할 까닭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녀는 동료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 흑인 하나가 사냥개에게 쫓기다가 살려고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이어서 장난기 어린 기분에서 나온 조각들이 따라 나온다. 이를테면 『플리겐데 블레터(Die Fliegende Blaetter)』에 실린 사자 잡는 법이 그렇다. 「사막을 하나 가져다 체에 걸러라. 사자들이 남을 것이다.」 몹시 우습지만 그리 점잖지는 못한 일화도 하나 있다. 어떤 관리가 왜 상관의 환심을 사려고 좀 더 애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자기도 비집고 들어가려고 애써 보았지만 앞사람이 벌써 올라가 있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다. 꿈을 꾼 날 남편의 상관이 이 부인을 찾아왔다는 것을 알면 모든 것이 곧 이해된다. 그는 부인에게 무척 정중했고 손에 입을 맞추었는데, 그녀는 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거물」(독일어 Grosses Tier는 「큰 짐승」이라는 뜻)이고 그녀 나라의 수도에서 「사교계의 사자」 노릇을 하는 사람인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이 사자는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사자, 가면을 벗고 보니 소목장이 스너그였던 그 사자와 같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때 꿈속의 사자는 모두 그런 재료로 빚어져 있다.

II. 두 번째 예로는 언니의 어린 아들이 관 속에 죽어 누워 있는 것을 본 처녀의 꿈을 들겠다. 이제 덧붙여 말하자면, 이 처녀는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느끼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우리는 분석으로 알고 있다. 꿈은 사랑하는 남자를 다시 보고 싶다는 그녀의 소원을 감추었을 뿐이다. 정동은 소원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며, 소원을 감춘 겉모습에 맞추어져 있을 수는 없다. 슬퍼할 계기는 전혀 없었다.

여러 꿈에서 정동은 적어도, 본래 정동에 속하던 표상 내용을 대신한 그 표상 내용과는 이어진 채로 남아 있다. 다른 꿈에서는 콤플렉스의 해체가 더 멀리 나아간다. 정동은 자기에게 속한 표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듯이 보이고, 꿈속 다른 어딘가에서 꿈 요소들의 새로운 배열에 들어맞는 자리를 찾아낸다. 이것은 꿈의 판단 행위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된 것과 비슷하다. 꿈 사고에 의미 있는 추론이 있으면 꿈에도 추론이 하나 들어 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그 추론이 전혀 다른 재료로 옮겨 갈 수 있다. 이렇게 옮겨 가는 일은 드물지 않게 대립의 원칙에 따라 일어난다.

뒤에 말한 가능성을, 내가 더없이 철저하게 분석한 다음 꿈으로 보여 주겠다.

III. 바닷가의 성. 나중에는 성이 바다에 바로 닿아 있지 않고, 바다로 이어지는 좁은 운하 가에 있다. 어떤 P. 씨가 이 성의 성주다. 나는 그와 함께 창이 셋 달린 커다란 응접실에 서 있는데, 창 앞으로는 요새의 성가퀴 같은 벽의 돌출부들이 솟아 있다. 나는 수비대의 일원이며, 아마 자원한 해군 장교인 듯하다. 우리는 적의 전함이 들이닥칠까 두려워한다. 전쟁 중이기 때문이다. P. 씨는 떠날 작정이다. 그는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게 지시를 내린다. 그의 병든 아내가 아이들과 함께 위협받는 성 안에 있다. 포격이 시작되면 곧바로 큰 홀을 비워야 한다.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자리를 뜨려 한다. 나는 그를 붙잡고, 만일의 경우 어떤 방법으로 그에게 소식을 전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무언가 다른 말을 하더니 갑자기 쓰러져 죽는다. 아마 내가 쓸데없이 질문을 퍼부어 그에게 무리를 준 모양이다. 그의 죽음은 내게 더는 아무 인상도 주지 않는다. 그가 죽은 뒤 나는, 과부가 성에 남아야 할지, 총사령관에게 그의 죽음을 알려야 할지, 서열상 다음 지휘관으로서 성의 지휘를 넘겨받아야 할지 생각한다. 나는 이제 창가에 서서 지나가는 배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어두운 물 위를 쏜살같이 스쳐 가는 상선들인데, 몇 척은 굴뚝이 여럿 달렸고, 다른 배들은 갑판이 불룩하다 (이 갑판은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은 예비 꿈에 나오는 기차역들과 아주 비슷하다). 그때 아우가 내 곁에 서 있고, 우리 둘은 창밖으로 운하를 내다본다. 배 한 척을 보고 우리는 공포에 질려 외친다. 「전함이 온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내가 이미 알던 바로 그 배들이 돌아오는 것일 뿐이다. 이제 작은 배 한 척이 오는데, 기묘하게 잘려 있어서 폭의 한가운데에서 끝난다. 갑판 위에는 잔이나 소금 그릇 같은 묘한 물건들이 보인다. 우리는 마치 한목소리처럼 외친다. 「저건 아침 식사 배다.」

배들의 빠른 움직임, 물의 짙은 푸른빛, 연통의 갈색 연기,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몹시 긴박하고 음울한 인상을 자아낸다.

이 꿈의 장소들은 아드리아해로 떠났던 여러 번의 여행(미라마레, 두이노, 베네치아, 아퀼레이아)에서 가져와 짜맞춘 것이다. 꿈을 꾸기 몇 주 전 아우와 함께 아퀼레이아에 다녀온, 짧지만 즐거운 부활절 여행이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그 밖에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해전과, 그와 이어진 미국에 사는 내 친척들에 대한 걱정도 한몫을 한다. 이 꿈에서 정동은 두 군데에서 표출된다. 한 군데에서는 당연히 기대될 정동이 빠져 있다. 성주의 죽음이 내게 아무 인상도 주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강조되어 있다. 다른 한 군데, 전함들을 보는 자리에서 나는 공포에 질리고, 잠든 채로 공포의 온갖 느낌을 겪는다. 잘 짜인 이 꿈에서 정동은 눈에 띄는 모순이 하나도 생기지 않도록 분배되어 있다. 성주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공포에 질릴 까닭은 없고, 성의 지휘관인 내가 전함을 보고 놀라는 것은 걸맞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석해 보면 P. 씨는 다름 아닌 내 자아의 대리다(꿈속에서는 내가 그의 대리다). 갑자기 죽는 성주는 바로 나다. 꿈 사고는 내가 때 이르게 죽은 뒤 내게 소중한 이들이 맞을 앞날을 다룬다. 꿈 사고 가운데 이 밖에 불쾌한 생각은 찾아볼 수 없다. 전함을 본 장면에 붙어 있는 공포는 거기서 떼어 이 불쾌한 생각으로 옮겨 놓아야 한다. 거꾸로, 분석은 전함이 나온 꿈 사고의 영역이 더없이 즐거운 회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 준다. 한 해 전 베네치아에서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어느 날, 우리는 리바 스키아보니에 있는 우리 방 창가에 서서 푸른 석호를 내다보았는데, 그날은 석호가 여느 때보다 훨씬 부산했다. 영국 배들이 들어올 예정이었고, 성대하게 맞이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외쳤다. 「저기 영국 전함들이 온다!」 꿈속에서 나는 바로 이 말에 공포에 질린다. 꿈속의 말이 생활 속의 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본다. 이 말에 든 「영국」이라는 요소조차 꿈 작업이 놓치지 않았다는 것도 곧 보여 주겠다. 이렇게 나는 꿈 사고에서 꿈 내용으로 가는 길에 기쁨을 공포로 바꾸는데, 바로 이 변환으로 잠재적 꿈 내용의 일부를 표현한다는 것은 넌지시 비쳐 두는 데서 그쳐도 되겠다. 그러나 이 예는, 꿈 작업이 정동의 계기를 꿈 사고 속의 맥락에서 떼어 내어 꿈 내용 속 어디든 원하는 곳에 끼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기회에 곁들여 「아침 식사 배」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겠다. 이 배가 꿈에 나타나면서, 그때까지 이치에 맞게 이어지던 상황이 그토록 무의미하게 끝나 버린다. 꿈속의 이 물건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니 이제야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 배는 검은색이었고, 가장 넓은 폭에서 잘려 있었기 때문에 잘린 쪽 끝이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박물관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었던 물건과 아주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 물건은 검은 점토로 빚은, 손잡이가 둘 달린 네모난 잔이었는데, 그 위에 커피잔이나 찻잔 같은 것들이 놓여 있어서 요즘 우리가 쓰는 아침 식사 식기와 아주 비슷했다. 물어보니 에트루리아 귀부인의 화장 도구로, 연지와 분을 담는 작은 상자들이 딸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런 물건을 하나 집에 가져가 안주인에게 주면 나쁘지 않겠다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므로 꿈속의 이 물건은 「검은 화장」(독일어 toilette는 옷차림이라는 뜻), 곧 상복을 뜻하며, 죽음을 곧바로 가리킨다. 꿈속 물건의 다른 쪽 끝은 「조각배」(독일어 Nachen)를 떠올리게 한다. 문헌학자인 한 친구가 일러 준 바로는 이 말은 νέχυς〔시체〕라는 어근에서 왔으며, 선사 시대에는 이 조각배에 시신을 뉘어 바다가 묻어 주도록 떠나보냈다고 한다. 꿈에서 배들이 돌아오는 까닭도 이 사정과 이어져 있다.

「조용히, 건져 낸 조각배에 실려 노인은 항구로 흘러든다.」

이것은 난파(독일어 schiffbruch, 곧 배-깨짐, 즉 난파) 뒤에 돌아오는 항해이며, 아침 식사 배는 한가운데가 깨져 나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아침 식사」 배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을까? 전함에서 남겨 두었던 「영국」이 끼어드는 것이 바로 여기다. Breakfast〔아침 식사〕, 곧 단식(fast)을 깨뜨림(breaking). 깨뜨림은 다시 난파(Schiffbruch)에 속하고, 단식은 상복과 이어진다.

이 아침 식사 배에서 꿈이 새로 지어낸 것은 그 이름 하나뿐이다. 그 물건은 실제로 있었고, 내게 지난번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아퀼레이아의 음식을 믿을 수 없어서 괴르츠에서 먹을 것을 조금 챙겨 갔고, 아퀼레이아에서는 이스트라의 훌륭한 포도주를 한 병 샀다. 그리고 작은 우편 증기선이 메 운하(Canale delle Mee)를 지나 그라도 쪽으로, 쓸쓸히 펼쳐진 석호 속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동안 우리는 갑판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승객은 우리뿐이었다. 그 아침 식사는 이제껏 맛본 아침 식사 가운데 손꼽을 만큼 맛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침 식사 배」였고, 꿈은 더없이 즐거웠던 바로 이 기억 뒤에, 알 수 없는 불길한 앞날에 대한 가장 슬픈 생각들을 숨기고 있다.

정동이 자기를 생겨나게 한 표상군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꿈 형성 과정에서 정동에 일어나는 일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꿈 사고에서 외현적 꿈으로 가는 길에서 정동이 겪는 변화 가운데 유일한 것도 아니고, 가장 본질적인 것조차 아니다. 꿈 사고 속의 정동을 꿈속의 정동과 견주어 보면 곧바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꿈에 정동이 있는 곳이면 그 정동은 꿈 사고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 역은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체로 꿈은 자신이 가공되어 나온 심리적 재료보다 정동이 빈약하다. 꿈 사고를 재구성해 보면, 그 속에서는 더없이 강렬한 심리적 충동들이, 대개 자신과 날카롭게 대립하는 다른 충동들과 다투면서, 어김없이 자기를 관철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꿈으로 돌아가 보면 꿈은 흔히 무채색이고, 더 강렬한 정동의 가락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꿈 작업은 내 생각의 내용뿐 아니라 그 정동의 색조까지도 대수롭지 않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정동의 억제가 일어났다고 말해도 좋겠다. 식물학 연구서 꿈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꿈은, 내가 지금 하는 대로 행동하고 나에게, 오직 나에게만 옳다고 여겨지는 대로 삶을 꾸려 갈 자유를 달라는 열정적인 변론에 대응한다. 그 결과 나온 꿈은 대수롭지 않게 들린다. 나는 연구서를 썼다, 그것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채색 도판들이 실려 있고, 책마다 말린 식물이 딸려 있다. 전쟁터의 평온과도 같다. 전투의 소란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사정이 달리 돌아갈 수도 있다. 꿈에 생생한 정동 표현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많은 꿈이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반면 깊은 감정 없이 꿈 사고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란 결코 불가능하다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에 머물러 보자.

꿈 작업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 정동의 억제를 여기서 이론적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정동 이론과 억제의 기제를 더없이 세심하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두 가지 생각만 적어 두겠다. 나는 다른 여러 근거에서, 정동 발생을 운동 신경 자극이나 분비 신경 자극의 과정과 비슷한, 몸 안쪽을 향하는 원심적 과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수면 상태에서는 외부 세계를 향해 운동 충동을 내보내는 일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수면 중에는 무의식적 사고가 정동을 원심적으로 흥분시키는 일도 더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꿈 사고가 방출되는 동안 일깨워진 정동 충동은 그 자체가 약한 흥분일 것이고, 따라서 꿈에 들어오는 정동 충동도 더 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정동의 억제」는 결코 꿈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수면 상태의 결과일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 리는 결코 없다. 우리는 더 복잡한 꿈은 모두 심리적 힘들이 충돌한 끝에 나온 타협의 결과임이 드러났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한편으로 소원을 이루는 생각들은 검열의 반대와 싸워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자주 보았듯이 무의식적 사고에서도 생각의 흐름은 저마다 자기와 모순되는 반대편과 한 멍에를 메고 있다. 이 생각의 흐름들은 모두 정동을 띨 수 있으므로, 정동의 억제를 대립하는 것들이 서로에게 가하고 검열이 자기가 억제한 경향들에 가하는 제지의 결과로 본다면, 대체로 보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꿈의 왜곡이 꿈 검열의 첫 번째 결과였듯이, 정동의 제지는 그 두 번째 결과일 것이다.

꿈 내용의 정동의 색조가 대수롭지 않다는 것을 꿈 사고 속의 대조로 설명할 수 있는 꿈을 예로 하나 끼워 넣겠다. 이야기할 꿈은 다음과 같이 짧은데, 어느 독자든 역겨워하며 읽을 것이다.

IV. 조그만 둔덕 하나, 그 위에 야외 변소 같은 것. 아주 긴 의자가 있고, 그 끝에 커다란 변기 구멍이 나 있다. 뒤쪽 가장자리는 온통 크기도 제각각이고 신선한 정도도 제각각인 작은 똥 무더기로 빽빽이 덮여 있다. 의자 뒤에 관목 하나. 나는 의자 위에 오줌을 눈다. 긴 오줌 줄기가 모든 것을 깨끗이 헹궈 내고, 똥 자국들은 쉽게 벗겨져 구멍 속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끝에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이 꿈에서 나는 왜 역겨움을 느끼지 않았을까?

분석이 보여 주듯이, 더없이 즐겁고 충족감을 주는 생각들이 이 꿈의 형성에 함께 작용했기 때문이다. 분석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헤라클레스가 청소한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떠올린다. 내가 바로 이 헤라클레스다. 둔덕과 관목은 지금 내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아우스제의 것이다. 나는 신경증의 유년기 병인을 발견했고, 그렇게 해서 내 아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지켜 냈다. 긴 의자는(물론 구멍은 빼고) 한 여성 환자가 애정 어린 마음으로 내게 선물한 가구를 충실히 본떴다. 이것은 환자들이 나를 얼마나 떠받드는지를 떠올리게 한다. 인간 배설물의 박물관조차 덜 불쾌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내가 아무리 그것을 역겨워한다 해도, 그것은 아름다운 나라 이탈리아의 기념품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 나라의 작은 도시들에서는 변소가 이런 식으로밖에 갖추어져 있지 않다. 모든 것을 깨끗이 씻어 내는 오줌 줄기는 위대함을 틀림없이 암시한다. 걸리버가 릴리퍼트의 큰불을 끄는 것도 이런 식이다. 물론 그 때문에 그는 더없이 조그만 여왕의 노여움을 산다. 라블레 선생이 그린 초인 가르강튀아도 노트르담에 걸터앉아 오줌 줄기를 도시에 겨누며 이런 식으로 파리 사람들에게 앙갚음한다. 바로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나는 가르니에가 그린 라블레 삽화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이것 또한 내가 초인이라는 증거다! 노트르담의 전망대는 파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구석이었다. 한가한 오후면 나는 으레 그 성당의 탑에 올라가 괴물상과 악마 가면들 사이를 기어오르며 돌아다니곤 했다. 모든 배설물이 오줌 줄기 앞에서 그토록 빨리 사라지는 사정은 Afflavit et dissipati sunt〔그분이 바람을 부시니 그들이 흩어졌다〕라는 표어에 들어맞는다. 나는 언젠가 이 표어를 히스테리 치료법에 관한 장의 제목으로 삼을 생각이다.

이제 꿈의 계기를 보자. 무더운 여름 오후였다. 저녁에 나는 히스테리와 성도착의 관계에 관해 강의를 했는데, 내가 해야 했던 말이 모두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쳐 있었고, 이 어려운 일에서 조금도 즐거움을 찾지 못했으며, 인간의 오물을 이렇게 뒤적이는 일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보고, 그다음에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었다. 이런 기분으로 나는 강의실을 나와 카페로 갔다. 입맛을 잃었기에 바깥 공기를 쐬며 가벼운 요기라도 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따라왔다. 그는 내가 커피를 마시고 롤빵을 삼키는 동안 곁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하더니 내게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가 내게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지, 이제는 모든 것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것, 내가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즉 신경증 이론을 청소해 그 오류와 편견을 쓸어 냈다는 것, 한마디로 내가 아주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내 기분은 그의 찬가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역겨움과 싸웠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려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잠들기 전에 나는 라블레를 뒤적였고, C. F. 마이어의 『한 소년의 고난(Die Leiden eines Knaben)』이라는 단편을 읽었다.

꿈은 이런 재료에서 길어 온 것이고, 마이어의 소설은 어린 시절 장면들의 기억을 보탰다(툰 백작 꿈, 마지막 장면 참조). 역겨움과 짜증으로 물든 그날의 기분은, 꿈 내용의 재료를 거의 전부 대도록 허락받았다는 의미에서 꿈속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밤사이에 힘차고 과장되기까지 한 자기주장이라는 반대 기분이 깨어나 앞의 기분을 흩어 버렸다. 꿈은 같은 재료 안에 자기 비하와 과장된 자기주장의 표현을 함께 담을 수 있는 형태를 취해야 했다. 이 타협 형성물에서 모호한 꿈 내용이 나왔고, 대립하는 것들이 서로를 제지한 탓에 대수롭지 않은 정동의 가락도 나왔다.

소원 성취 이론에 따르면, 억제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쾌감을 주는, 자기를 드높이는 일에 관한 생각의 흐름이 역겨움이라는 반대편 생각들과 짝지어지지 않았다면 이 꿈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쾌한 것은 꿈으로 표현되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낮에 떠오른 고통스러운 생각은 소원 성취를 감싸 주는 외투 노릇을 할 때에만 꿈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수 있다. 꿈 작업은 꿈 사고 속의 정동을 받아들이거나 영으로 줄이는 것 말고도 또 다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꿈 작업은 정동을 그 반대로 바꿀 수 있다. 꿈의 요소는 모두 그 자체로도, 그 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다는 해석 규칙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처음부터 어느 쪽으로 적어야 할지는 결코 알 수 없고, 이 점은 오직 맥락만이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사정에 대한 어렴풋한 짐작이 분명 민간의 의식에도 스며들었다. 해몽서들은 해석할 때 반대의 원칙을 따르는 일이 아주 잦다. 이렇게 반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연상이 긴밀한 사슬로 이어져 있기 때문인데, 우리 생각 속에서 이 사슬은 어떤 사물의 표상을 그 반대의 표상 속에서 찾아낸다. 다른 모든 전치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검열의 목적에 봉사하지만, 소원 성취가 해내는 일인 경우도 많다. 소원 성취란 바로 반갑지 않은 것을 그 반대로 대체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꿈 사고의 정동도 표상과 마찬가지로 반대로 바뀐 채 꿈에 나타날 수 있으며, 이런 정동의 전도는 대개 꿈 검열이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꿈 검열을 설명할 때 흔히 드는 비유가 이미 보여 주었듯이, 정동의 억제와 전도는 사회생활에서도 쓸모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假裝)하는 데 쓸모가 있다. 내가 예의를 지켜야 할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그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해야 한다면, 내 생각의 문구를 누그러뜨리는 것보다 내 감정의 표현을 그에게 감추는 것이 거의 더 중요하다. 공손한 말을 하더라도 증오와 경멸이 담긴 눈길이나 몸짓을 곁들인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주는 효과는 거리낌 없이 그의 얼굴에 경멸을 내던졌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검열은 내게 감정을 억제하라고 명하며, 내가 가장의 기술에 능하다면 나는 위선적으로 반대 감정을 내보일 수 있다. 화내고 싶은 곳에서 웃고, 없애 버리고 싶은 곳에서 애정을 꾸며 보이는 것이다.

꿈 검열의 목적을 위해 정동을 이렇게 전도한 훌륭한 예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삼촌의 수염 꿈에서 나는 내 친구 R.에게 큰 애정을 느낀다. 꿈 사고가 그를 얼간이라고 꾸짖는 바로 그때, 그리고 그렇게 꾸짖기 때문에. 우리는 검열이 존재한다는 첫 증거를 바로 이 정동 전도의 예에서 끌어냈다. 여기서도 꿈 작업이 이런 반대 정동을 무에서 만들어 낸다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꿈 작업은 대개 그런 정동이 꿈 사고의 재료 속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오직 저항하는 충동의 심리적 힘으로만 그것을 강화해, 마침내 그 정동을 꿈 형성에 끌어들일 수 있는 지점까지 끌어올린다. 방금 말한 삼촌 꿈에서 애정 어린 반대 정동은 아마 유년기의 원천에서 나왔을 것이다(꿈의 뒷부분이 시사하듯이). 내 어린 시절 체험의 특이한 성격 탓에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내 모든 우정과 증오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이 장 (마)의 분석 참조).

「위선적인」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꿈의 부류가 하나 있는데, 이 꿈들은 소원 성취 이론을 혹독한 시험대에 올린다. 내가 이런 꿈에 주목하게 된 것은 M. 힐퍼딩 박사가 빈 정신분석학회에서 로제거가 보고한 꿈을 토론에 부쳤을 때였다. 그 꿈을 아래에 옮겨 싣는다.

로제거는 『숲의 고향(Waldheimat)』 제11권에 실린 이야기 「타향살이(Fremd gemacht)」 303쪽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대체로 잠을 잘 자는 편이었지만, 숱한 밤 안식을 잃기도 했다. 학생이자 문필가로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오랜 세월 그야말로 재단사다운 삶의 그림자를, 떼어 낼 수 없는 유령처럼 끌고 다녔다. 낮 동안 내가 그렇게 자주, 그렇게 생생하게 지난날을 생각하며 지냈다고는 할 수 없다. 속물의 허물을 벗고 나와 하늘과 땅에 덤벼드는 사람에게는 달리 생각할 거리가 있는 법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던 나는 밤에 꾸는 꿈을 두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무엇이든 곰곰이 생각하는 버릇이 들었을 때, 혹은 내 안의 속물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꿈을 꿀 때면 내가 언제나 재단 직공이었으며 언제나 장인의 작업장에서 아무 삯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 앉아 바느질하고 다림질하면서도, 나는 내가 더는 그곳 사람이 아니며 어엿한 도시 시민으로서 따로 돌볼 일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늘 휴가 중이었고 시골로 나가 있었으며, 그럴 때면 장인 곁에 앉아 그를 거들었다. 나는 자주 기분이 언짢았고, 더 좋고 더 쓸모 있는 일에 쓸 수도 있을 시간을 잃는 것이 아까웠다. 무언가가 치수에 맞지 않거나 정확하게 재단되지 않으면 장인의 꾸지람을 감수해야 했다. 침침한 작업장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 있다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리라 마음먹은 적도 많았다. 한번은 실제로 그렇게 말했지만 장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고, 다음번에 나는 다시 그의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깨어났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러고 나서 나는, 이 꿈이 또 비집고 들어오면 힘껏 떨쳐 버리고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리라 다짐했다. 『이건 망상일 뿐이야. 나는 침대에 누워 있고, 자고 싶어.』…… 그러고도 이튿날 밤이면 나는 또 재단 작업장에 앉아 있곤 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음울하도록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장인과 내가 알펠호퍼네, 곧 내가 도제 생활을 시작한 농부의 집에서 일하고 있을 때, 장인이 유난히 내 일솜씨를 못마땅해하는 일이 있었다. 『도대체 네 정신이 어디 가 있는 건지 좀 알아나 보자?』 하고 외치며 그는 어두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그저 호의로 그와 함께 있는 것뿐이라고 장인에게 설명하고 떠나 버리는 것이 가장 현명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인이 도제 하나를 들이고 나더러 작업대에서 그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명했을 때도 순순히 따랐다. 나는 구석으로 옮겨 앉아 계속 바느질을 했다. 같은 날 재단사가 또 하나 고용되었다. 그는 편협한 사람이었다. 열아홉 해 전에 우리 밑에서 일하다가 선술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호수에 빠진 체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앉으려 하자 그에게는 앉을 자리가 없었다. 내가 묻는 듯이 장인을 쳐다보자 그가 내게 말했다. 『너는 재단 일에 재주가 없다. 가도 좋다. 너는 이제 자유다.』 그때 내가 느낀 공포가 어찌나 압도적이었던지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의 잿빛이 사랑하는 내 집의 맑은 창으로 어렴풋이 비쳐 들었다. 예술품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품위 있는 책장에는 영원한 호메로스, 거대한 단테, 비길 데 없는 셰익스피어, 찬란한 괴테가 서 있었다 ― 모두 빛나며 불멸하는 이들이었다. 옆방에서는 잠에서 깨어 엄마와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맑고 작은 목소리가 울려 왔다. 나는 목가적으로 달콤하고, 평화로우며 시적이고 정신적인 그 삶, 내가 그토록 자주 그토록 깊이 인류의 관조적인 행복으로 그려 보았던 그 삶을 다시 찾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장인이 나를 내보내게 둘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그만두겠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 분했다.」

「그런데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장인이 『나를 내보낸』 그 밤 뒤로 나는 편히 쉴 수 있었다. 나는 더는 재단 일을 꿈꾸지 않았다. 아득한 과거에 놓인 이 체험, 소박함 속에서 참으로 행복했으면서도 내 삶의 훗날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이 체험을.」

I. 젊은 시절 재단 직공이었던 시인의 이 꿈, 곧 이 연작 꿈에서는 소원 성취가 지배하고 있음을 알아보기 어렵다. 즐거운 일은 모두 깨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났고, 꿈은 오래전에 잊힌 불행한 삶의 유령 같은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 비슷한 성격의 내 꿈들 덕분에 나는 이런 꿈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의사 시절 나는 오랫동안 화학 연구소에서 일했지만 그 까다로운 학문에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깨어 있을 때 나는 내 삶에서 결실 없이 끝난 이 한 토막, 참으로 부끄러운 이 일을 결코 떠올리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실험실에서 일하며 분석을 하고 거기서 이런저런 일을 겪는 따위의 꿈이 되풀이해 찾아오게 되었다. 시험 꿈과 마찬가지로 이 꿈들은 불쾌하고, 결코 아주 또렷하지 않다. 이 꿈 가운데 하나를 분석하다가 나는 「분석」이라는 낱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 낱말이 이 꿈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었다. 그사이에 나는 「분석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높이 칭찬받는 분석을 한다 ― 물론 정신분석이다. 그러자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깨어 있을 때 하는 이 분석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지 뽐내고 싶어질 때면, 꿈은 밤마다 내가 자랑스러워할 까닭이 없는 저 다른 분석들, 실패한 분석들을 내 앞에 들이밀었던 것이다. 이 꿈들은 이름난 시인이 된 재단사의 꿈처럼 벼락출세자의 처벌 꿈이다. 그러나 꿈이 어떻게 벼락출세자의 자만과 다투는 자기비판에 봉사하고, 금지된 소원의 성취 대신 이성적인 경고를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처음에는 지나친 야심의 공상이 꿈의 토대를 이루었지만, 그 대신 꿈 내용에 이른 것은 그 공상이 억제되고 무안을 당한 모습뿐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정신생활에는 이런 전도의 원인으로 돌릴 수 있는 마조히즘적 경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개개의 꿈을 좀 더 철저히 살펴보면 또 다른 요소를 알아볼 수 있다. 내 실험실 꿈들 가운데 하나의 흐릿한 곁가지 부분에서, 나는 마침 내 직업 경력에서 가장 암울하고 가장 성과 없던 해에 해당하는 나이였다. 아직 자리도 생계 수단도 없던 때였는데, 문득 보니 결혼할 수 있는 여자가 여럿이라 내가 골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젊어진 것이고, 더구나 그녀도 다시 젊어졌다. 이 힘든 세월을 모두 나와 함께 나눈 그 여인 말이다. 이렇게 해서, 늙어 가는 남자의 마음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소원 가운데 하나가 무의식적인 꿈의 유발 요인으로 드러났다. 다른 심리적 층위에서 허영심과 자기비판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싸움이 꿈 내용을 결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꿈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더 깊이 뿌리내린 젊음의 소원뿐이었다. 깨어 있을 때에도 사람은 이렇게 혼잣말을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아주 좋고, 한때는 참 힘든 시절이었지. 하지만 그때도 좋았어. 너는 아직 그렇게 젊었으니까.

시인이 보고한 꿈을 살펴볼 때는, 그가 거슬린다고 느끼고 본질적이지 않다고 여긴 세부를 보고에서 빼 버렸으리라고 가정해도 좋을 때가 많다. 그렇다면 그의 꿈은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내는 셈인데, 꿈 내용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이 있다면 쉽게 풀릴 수수께끼다.

O. 랑크는 그림 동화 「용감한 꼬마 재단사」, 곧 「한 방에 일곱」에 아주 비슷한 벼락출세자의 꿈이 이야기되어 있다는 데 내 주의를 돌려 주었다. 영웅이 되어 왕의 딸과 결혼한 재단사가 어느 날 밤 아내인 공주 곁에서 자기 생업에 관한 꿈을 꾸었다. 공주는 의심을 품고 이튿날 밤 무장한 호위병들을 세워 두어, 꿈속에서 하는 말을 엿듣고 꿈꾼 사람을 처치하게 했다. 그러나 꼬마 재단사는 미리 귀띔을 받았고, 자기 꿈을 바로잡을 줄 알았다.

꿈 사고의 정동이 정지되고 삭감되고 전도되어 마침내 꿈의 정동이 되기까지 거치는 과정의 복합체는, 완전히 분석된 꿈들을 알맞게 종합해 보면 잘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앞에서 논한 경우 가운데 몇 가지의 예가 되는, 꿈속 정동 흥분의 사례를 몇 가지 다루겠다.

나이 든 브뤼케가 나 자신의 골반을 표본으로 만들라는 기이한 과제를 내게 주는 꿈에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공포가 꿈 자체에는 빠져 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 의미에서 소원 성취다. 표본 만들기는 자기 분석을 뜻한다. 나는 꿈에 관한 책을 펴냄으로써 말하자면 이 자기 분석을 해내는 셈인데, 그 일이 내게는 몹시 불쾌해서 다 써 둔 원고의 인쇄를 벌써 한 해 넘게 미루어 왔다. 이제 이 거부감을 무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이 발동하고, 그 때문에 나는 꿈에서 공포(Grauen. 이 낱말은 머리가 센다는 뜻도 된다)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또 다른 (독일어) 뜻의 공포, 곧 머리가 세는 일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내 머리는 이미 빠르게 세어 가고 있고, 희끗해진 머리는 이제 더는 머뭇거리지 말라고 나를 일깨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꿈의 끝에서 이 생각은 그 고된 여정의 목적지에 이르는 일을 내가 아이들에게 맡겨야 하리라는 데서 표현을 얻는다.

충족감의 표현을 깨어난 직후의 순간으로 옮겨 놓는 두 꿈 가운데 한 꿈에서, 이 충족감은 「그것을 이미 꿈꾼 적이 있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알게 되리라는 기대에서 동기를 얻으며, 실제로는 내 첫아이의 탄생을 가리킨다. 다른 꿈에서는 「징조로 예고되었던 것」이 이제 일어나리라는 확신에서 동기를 얻는데, 이 뒤의 충족감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내가 느낀 것과 같은 충족감이다. 여기서는 꿈 사고를 지배하던 바로 그 정동이 꿈에도 남아 있다. 그러나 모든 꿈에서 과정이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두 분석을 조금만 살펴보면, 검열에 굴복하지 않는 이 충족감에, 검열을 두려워해야 하는 원천에서 오는 것이 덧붙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원천에서 끌어온 정동은,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비슷한 충족감의 정동으로 제 몸을 감싸지 않았다면, 말하자면 다른 정동의 뒤에 숨어 몰래 끼어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실제 꿈 견본에서는 이것을 보여 줄 수 없지만, 다른 영역에서 가져온 예 하나로 내 뜻을 알아듣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지어 보자. 내 가까이에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기쁘겠다는 강한 마음이 내 안에 일어난다고 하자. 그러나 내 본성의 도덕적인 부분은 이 마음에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악의 어린 소원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그가 당해서는 안 될 일을 당하면 그 일로 생긴 충족감을 억제하며, 억지로 유감의 말을 하고 유감스러운 생각을 한다. 누구나 이런 처지에 놓여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미운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마땅한 불행을 자초했다고 해 보자. 그러면 나는 그가 정당한 벌을 받았다는 충족감에 마음껏 고삐를 풀어 줄 수 있고, 이 일을 두고, 공정한 다른 많은 사람의 의견과 일치하는 의견을 말한다. 그러나 내 충족감이 남들의 것보다 더 강렬하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다른 원천에서, 곧 내 증오에서 덧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증오는 지금까지 내면의 검열에 가로막혀 정동을 풀어놓지 못했지만, 달라진 상황에서는 더는 가로막히지 않는다. 이 경우는 대체로 사회에서 흔히 보는 전형이다. 반감을 산 사람이나 인기 없는 소수파를 따르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가 그렇다. 그들이 받는 벌은 그들의 잘못에 상응하지 않고, 그들의 잘못 더하기 지금까지 힘을 쓰지 못하던, 그들을 향한 악의에 상응한다. 벌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만, 오래 묵은 억제가 자기 안에서 풀려나며 생기는 충족감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경우 정동은 그 질로 보면 정당하지만 그 양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한 가지 점에서 달래진 자기비판은 둘째 점을 검토하는 일을 너무도 쉽게 소홀히 한다. 일단 문을 열어 놓으면 처음에 들이려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오는 법이다.

신경증적 성격의 두드러진 특징, 곧 정동을 일으킬 수 있는 유발 요인이 질적으로는 정당하지만 양적으로는 지나친 결과를 낳는다는 특징도, 어쨌든 심리학적 설명을 허락하는 한에서는 이런 식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 지나침은 무의식에 머물러 지금까지 억제되어 온 정동의 원천들에서 온다. 이 원천들은 연상 속에서 현재적 유발 요인과 연결을 맺을 수 있고, 그리하여 나무랄 데 없고 허용된 정동의 원천이 열어 주는 배출구로 자기 정동을 풀어놓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제지하는 관계가 억제된 심리적 판단과 억제하는 심리적 판단 사이에서만 성립한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데 우리는 주의하게 된다. 두 판단이 협력하고 서로 강화해 병적인 정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똑같이 주목할 만하다. 독자는 심리 기제에 관한 이 암시들을 꿈속의 정동 표현을 이해하는 데 적용해 주기 바란다. 꿈에 나타나고 꿈 사고 속 제자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충족감이라도, 그 자리를 가리켜 보이는 것만으로 늘 완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대개는 꿈 사고 속에서 둘째 원천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검열의 압력이 가해지는 원천, 그 압력 아래에서라면 충족감이 아니라 반대 정동을 낳았을 원천이다. 그러나 이 원천은 첫째 원천이 있는 덕분에 자기의 충족 정동을 억제에서 풀어놓고, 다른 원천에서 솟는 충족감을 강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꿈속의 정동은 여러 지류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처럼, 그리고 꿈 사고의 재료에 비추어 중층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같은 정동을 내줄 수 있는 정동의 원천들은 꿈 작업 속에서 서로 합류해 그 정동을 만들어 낸다.1

「Non vixit〔그는 살지 않았다〕」가 중심점을 이루는 저 훌륭한 꿈을 분석하면 이 얽히고설킨 관계를 얼마간 들여다볼 수 있다(이 장 (마) 참조). 이 꿈에서 질이 서로 다른 정동 표현들은 외현 내용의 두 지점에 억지로 몰려 있다. 적대적이고 고통스러운 정동이(꿈 자체에는 「묘한 정동에 사로잡혀」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적수인 친구를 두 낱말로 없애 버리는 지점에서 겹친다. 꿈의 끝에서 나는 몹시 흐뭇해하며, 깨어 있을 때라면 부조리하다고 여길 가능성을 기꺼이 믿으려 한다. 곧, 한낱 소원만으로 치워 버릴 수 있는 revenants〔돌아온 망령〕가 있다는 것이다.

이 꿈의 계기는 아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계기는 본질적인 것이어서 꿈을 설명하는 데 큰 몫을 한다. 나는 베를린에 있는 친구(내가 F.라고 불러 온 친구다)2에게서, 그가 곧 수술을 받을 것이며 빈에 사는 그의 친척들이 그의 상태를 내게 알려 주리라는 소식을 받았다. 수술 뒤 처음 몇 차례 온 소식은 안심할 만한 것이 못 되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무엇보다 직접 그에게 가 보고 싶었지만, 그 무렵 나는 통증이 심한 병을 앓고 있어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꿈 사고에서 나는 내가 소중한 친구의 목숨을 걱정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그의 하나뿐인 누이가, 나와는 안면이 없던 사람이었지만, 더없이 짧게 앓고 일찍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꿈에서 F.는 자기 누이 이야기를 하며 말한다. 「45분 만에 누이는 죽었어.」) 나는 그의 체질도 누이보다 크게 튼튼하지는 않으리라고, 그래서 곧 훨씬 나쁜 소식을 받고 건강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게 되리라고, 그러고도 너무 늦게 도착해 두고두고 나 자신을 탓하게 되리라고 상상했음이 틀림없다.3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이 비난이 꿈의 중심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학창 시절의 존경하는 스승 브뤼케가 무시무시한 푸른 눈으로 쏘아보며 똑같은 일로 나를 꾸짖는 장면으로 표현되었다. 실제 장면에서 이렇게 벗어난 까닭은 곧 분명해질 것이다. 꿈은 그 장면 자체를 내가 겪은 모습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물론 꿈은 푸른 눈을 다른 사람에게 남겨 두지만, 소멸시키는 자의 역할은 내게 맡긴다. 이 전도는 분명히 소원 성취의 결과다. 친구의 목숨에 대한 걱정, 그에게 가 보지 않았다는 자책, 부끄러움(그는 여러 번 빈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병 때문이니 나는 용서받았다고 여기고 싶은 욕망 ― 이 모든 것이 정동의 폭풍을 이룬다. 그 폭풍은 잠결에도 뚜렷이 느껴지며, 꿈 사고의 구석구석에서 몰아쳤다.

그런데 꿈의 계기에는 정반대로 작용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수술 뒤 처음 며칠 동안 좋지 않은 소식과 함께, 이 일은 누구에게도 일절 말하지 말라는 당부도 받았는데, 그것이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 내 입이 무겁다는 것을 쓸데없이 믿지 못한다는 뜻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부탁이 친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서투름이나 지나친 소심함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비난이 내 마음을 몹시 언짢게 했다. 전혀 근거 없는 비난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듯이, 「뭔가 짚이는 데가 있는」 비난만이 사람을 짜증 나게 할 힘을 지닌다. 오래전에 나는, 서로 친하게 지내며 기꺼이 나를 벗으로 대해 주던 두 사람 사이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한 말을 아무 쓸데없이 고자질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일은 내 친구 F.의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때 들어야 했던 비난도 나는 잊지 않았다. 내가 그 사이에서 말썽을 일으킨 두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은 플라이슐 교수였다. 다른 한 사람은 요제프라고 불러도 되겠다. 꿈에 나오는 내 친구이자 적수인 P.도 이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두 꿈 요소, 곧 첫째로 드러나지 않게라는 말과, 둘째로 자기 일을 내가 P.에게 얼마나 언급했느냐는 Fl.의 물음은, 내가 아무것도 혼자 간직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비난을 현재에서 떼어, 내가 브뤼케의 실험실에서 지내던 시절로 옮겨 놓는 것은 바로 이 기억들이 섞여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의 소멸 장면에서 둘째 인물을 요제프라는 사람으로 바꿔 놓음으로써, 나는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첫째 비난뿐 아니라, 더 엄하게 억제된 둘째 비난, 곧 내가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는 비난까지 표현해 내는 데 성공한다. 이 꿈이 압축하고 대체하는 작업과 그 동기가 이제 분명해졌다.

아무것도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에 대한 내 분노는 원래 아주 하찮은 것이었지만, 수면 아래 깊숙이 흐르는 원천들에서 뒷받침을 받아, 실제로는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향한 적대적 정동의 불어난 물줄기가 된다. 이 뒷받침을 대 주는 원천은 어린 시절에서 찾을 수 있다. 또래들과 맺는 내 우정도 적대도 나보다 한 살 위인 조카와의 어린 시절 관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그 관계에서 우위에 선 쪽은 그였고, 나는 일찍부터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떨어질 줄 모르고 함께 살며 서로 사랑했고,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면서도 서로 치고받고 서로 일러바쳤다. 어떤 의미에서 내 친구들은 모두 이 첫 인물, 「일찍이 흐릿한 내 눈에 모습을 드러냈던」 인물의 화신이다. 그들은 모두 revenants다. 조카 자신도 소년 시절에 돌아왔고, 그때 우리는 카이사르와 브루투스를 연기했다. 절친한 친구와 미운 적은 내 감정 생활에 언제나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새로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드물지 않게 내 어린 시절의 이상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친구와 적이 한 사람 안에서 겹치기도 했다. 물론 내 가장 어린 시절에 그랬듯이 동시에 겹치거나 거듭 번갈아 가며 겹친 것은 아니다.

최근에 생긴 정동의 계기가, 방금 서술한 것 같은 연결을 거쳐 어린 시절의 계기로 거슬러 올라가, 정동의 효과를 키우려고 이 이전의 계기에서 자기를 대신할 것을 찾아내는 방식을 여기서 추적하지는 않겠다. 그런 연구는 무의식의 심리학에 속할 것이며, 신경증의 심리학적 해명에서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꿈 해석을 위해,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고, 또는 공상이 그런 기억을 지어낸다고 가정해 보자.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억이다. 두 아이가 어떤 물건 때문에 싸움을 벌인다 ― 그 물건이 무엇인지는, 기억이나 기억의 착각이 아주 분명한 물건을 염두에 두고 있기는 하지만, 정하지 않고 두겠다 ― 그리고 저마다 자기가 먼저 거기에 닿았으니 자기에게 먼저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둘은 주먹다짐을 벌인다. 힘이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이 넌지시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나는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나 스스로 오류를 알아차리고).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더 강한 쪽으로 남아 싸움터를 차지한다. 진 쪽은 내 아버지, 곧 자기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나를 일러바치고, 나는 아버지에게서 들어 알고 있는 말로 나를 변호한다. 「걔가 날 때렸으니까 나도 걔를 때렸어.」 이렇게 해서, 분석하는 동안 ― 지금 내가 아는 것으로는 나 자신도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지만 ― 내 주의에 억지로 밀려든 이 기억, 아니 아마도 공상은, 분수의 수반이 흘러드는 물줄기를 모으듯이 꿈 사고 속에 있는 정동의 흥분들을 모으는 꿈 사고의 중간 요소가 된다. 이 지점에서 꿈 사고는 다음과 같은 길을 따라 흘러간다. 「네가 나한테 자리를 비켜 줘야 했다니, 아주 꼴좋다. 왜 날 내 자리에서 밀어내려고 했어? 난 네가 필요 없어. 같이 놀 딴 애는 금방 찾을 거야」 운운. 그러면 이 생각들이 다시 꿈의 표현 속으로 이어져 들어가는 길이 열린다. 이런 「ôte-toi que je m’y mette〔비켜라, 내가 그 자리에 앉게〕」를 두고 나는 한때 작고한 친구 요제프를 나무라야 했던 적이 있다. 그는 브뤼케의 실험실에서 승진 순서로 내 다음 자리에 있었지만, 그곳의 승진은 아주 더뎠다. 두 조수는 누구도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은 조바심을 냈다. 내 친구는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 길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윗사람과는 아무런 끈으로도 묶여 있지 않았는데, 그 윗사람은 중병을 앓는 사람이었다.4 윗사람이 물러나기를 바라는 소원은 고약한 해석을 허락했다 ― 윗사람은 승진 말고 다른 일로도 물러날 수 있었으니까. 몇 해 전에는 자리가 비기를 바라는 똑같은 소원이 당연히 나에게서 더 강했다. 세상 어디서든 지위의 등급과 승진이 있는 곳이면 억제해야 할 소원들에게 문이 열린다. 셰익스피어의 할 왕자는 병든 아버지의 머리맡에서조차 왕관이 자기에게 어떻게 맞는지 보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꿈은 이 무자비한 소원을 두고 내가 아니라 그를 벌한다.5

「그가 야심을 품었기에 나는 그를 죽였노라.」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자리를 비켜 주기를 기다리지 못했으므로, 그 자신이 치워지고 말았다. 나는 대학에서 열린 그 다른 사람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직후에 이런 생각을 품는다. 그러므로 내가 꿈에서 느끼는 충족감의 일부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정당한 벌이다. 꼴좋게 됐다.

이 친구의 장례식에서 한 젊은이가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말을 했다. 「설교자가 마치 이 사람 하나 없으면 세상이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말하더군.」 과장 때문에 슬픔에 흠이 간 진실한 사람의 불쾌감이 그의 안에서 일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말에 꿈 사고가 이어진다. 「정말로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란 없다. 나는 벌써 몇 사람이나 무덤까지 배웅했던가.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 있다. 나는 그들 모두보다 오래 살았고, 싸움터는 내 차지다.」 그를 만나러 가 보면 친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순간에 이런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은 다음과 같이 더 나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보다 내가 오래 살아남아 기쁘다는 것, 죽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라는 것, 한때 공상 속 어린 시절 장면에서 그랬듯이 내가 싸움터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원천에서 오는, 싸움터가 내 차지라는 사실에 대한 이 충족감이 꿈에 나타나는 정동의 대부분을 덮고 있다. 나는 내가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것이 기쁘다 ― 나는 이 마음을, 아내에게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나는 파리로 이사 갈 거야」 하고 말하는 남편의 순진한 이기주의로 드러낸다. 그 하나가 내가 아니리라는 것은 내가 기대하기에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자기 꿈을 해석하고 보고하려면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함께 삶의 숨결을 나누는 모든 고귀한 영혼들 가운데 자기만이 유일한 악당임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revenants가 누군가 원하는 동안만 존재하며 소원 하나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긴다. 내 친구 요제프가 벌을 받은 것도 바로 이 일 때문이다. 그러나 revenants는 내 어린 시절 친구가 잇달아 입은 화신들이다. 나는 또 이 사람을 나 자신을 위해 거듭거듭 다른 사람으로 대신해 왔다는 사실에도 충족감을 느낀다. 이제 잃으려는 친구를 대신할 사람도 틀림없이 곧 찾아질 것이다.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동안 꿈 검열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왜 이토록 잔인한 이기심으로 물든 생각의 흐름에 가장 단호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거기 달라붙은 충족감을 깊은 혐오로 바꿔 놓지 않는가? 내 생각에 그것은, 나무랄 데 없는 다른 생각의 흐름들도 마찬가지로 충족감에 이르러, 금지된 유년기의 원천에서 오는 정동을 자기네 정동으로 덮어 주기 때문이다. 생각의 다른 층위에서 나는 그 성대한 제막식 자리에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는 소중한 친구를 참 많이 잃었다. 더러는 죽음으로, 더러는 우정이 깨져서. 그런데 그들을 대신할 사람을 찾았다는 것, 새 우정을 맺기가 쉽지 않은 나이에, 다른 이들이 해 줄 수 있었던 것보다 내게 더 큰 의미를 지니며 이제부터 언제까지나 곁에 둘 사람을 하나 얻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잃어버린 친구들을 대신할 사람을 찾았다는 충족감은 방해받지 않고 꿈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숨어, 유년기의 원천에서 온 적대적인 충족감이 몰래 끼어든다. 어린 시절의 애정이 오늘날의 정당한 애정을 강화하는 데 한몫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증오도 표현 속으로 길을 찾아 들어왔다.

그러나 그 밖에도 꿈에는, 충족감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또 다른 생각의 사슬을 뚜렷이 가리키는 곳이 있다. 내 친구는 오래 기다린 끝에 얼마 전 어린 딸을 얻었다. 나는 그가 일찍 잃은 누이를 얼마나 애통해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누이에게 품었던 사랑을 이 아이에게 옮겨 쏟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이 어린 딸이 마침내 그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잊게 해 주리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이 사슬도 잠재적 꿈 내용의 중간 사고들과 이어지고, 거기서 길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갈라져 나간다.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보라, 온통 revenants뿐이다. 잃어버린 것은 모두 돌아온다. 그리고 이제 꿈 사고의 모순된 요소들을 잇는 연상의 끈은 우연한 사정 하나로 더욱 단단히 조여진다. 내 친구의 어린 딸이 내 어린 시절의 여자 놀이 친구와 같은 이름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꼭 나와 동갑이었고, 내 가장 오랜 친구이자 적수의 누이였다. 나는 「파울리네」라는 이름을 충족감을 느끼며 들었고, 이 우연의 일치를 암시하려고 꿈에서 한 요제프를 다른 요제프로 바꿔 놓았으며, 플라이슐과 F.라는 두 이름의 소리가 비슷하다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이 지점에서 생각의 흐름 하나가 내 아이들의 이름 짓기로 이어진다.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그때그때의 유행을 따라 고를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추억을 기려 정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아이들의 이름은 아이들을 「revenants」로 만든다. 그리고 결국, 자식을 두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불멸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닌가?

꿈의 정동에 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 몇 마디만 덧붙이겠다. 정동의 성향, 곧 우리가 기분이라고 부르는 것이 잠든 사람의 마음속에 지배적인 요소로 자리 잡아, 꿈에서도 그에 걸맞은 기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기분은 낮의 체험과 생각의 결과일 수도 있고, 신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기분에는 그에 대응하는 생각의 사슬이 따를 것이다. 한 경우에는 이 표상 내용이 정동의 성향을 일차적으로 조건 짓고, 다른 경우에는 신체에서 비롯된 정동의 소인(素因)이 이 표상 내용을 이차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꿈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꿈 형성은 언제나, 소원 성취만을 표현할 수 있으며 자신의 심리적 추진력을 오직 소원에만 봉사하게 할 수 있다는 제한을 받는다. 실제로 있는 기분은 수면 중에 실제로 떠오르는 감각과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다(5장 (다) 참조). 그 감각은 무시되거나, 소원 성취를 뜻하도록 새로 해석된다. 수면 중의 불쾌한 기분은 힘찬 소원들을 발동시켜 꿈의 추진력이 되고, 꿈은 그 소원들을 이루어 주어야 한다. 기분이 달라붙어 있는 재료는 마침내 이루어진 소원을 표현하기에 알맞게 될 때까지 가공된다. 꿈 사고에서 불쾌한 기분이라는 요소가 강렬하고 지배적일수록, 가장 엄하게 억제되어 온 소원 충동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 더욱 확실하게 표현을 얻어 낼 것이다. 표현을 얻는 데 필요한 일 가운데 어려운 부분이 이미 이루어져 있음을 그 충동들이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 힘으로 만들어 내야 했을 혐오가 이미 실제로 있으니 말이다. 이 논의로 우리는 다시 불안 꿈의 문제에 닿는다. 불안 꿈은 꿈 작업의 영역을 경계 짓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주

  1. 1. 이와 견줄 만한 것으로, 나는 그 뒤에 「경향」 위트가 자아내는 비상한 쾌감 효과를 설명했다.

  2. 2. 영역본은 여기서 이 친구를 「F.」로 적지만, 이 장 (마)의 꿈 본문에서는 「Fl.」로 적었다. 영역본의 표기를 그대로 두었다. 뒤에서 말하는, 플라이슐과 F.라는 두 이름의 소리가 비슷하다는 것도 「Fl.」이라는 표기에 기대어 있다. ― 옮긴이.

  3. 3. non vixit 대신 non vivit〔그는 살아 있지 않다〕를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것은 무의식적 꿈 사고에서 나온 바로 이 공상이다. 「너는 너무 늦게 왔다. 그는 이제 살아 있지 않다.」 외현적 상황도 「non vivit」 쪽으로 기운다는 것은 이 장 (마)에서 이미 말했다.

  4. 4. 영역본은 이 대목을 「내 친구는 …… 중병을 앓는 사람이었다」로 적어, 중병을 앓던 사람이 친구인 것처럼 읽힌다. 그러나 독일어 원문에서 중병을 앓던 사람은 친구의 윗사람이고, 그 때문에 그가 물러나기를 바라는 소원이 「고약한 해석」을 허락한다. 영역본에는 그 사이의 한 문장(친구가 이따금 이 조바심을 소리 내어 드러냈다는 것)도 빠져 있다. 뜻이 바뀌는 곳이어서 원문에 따라 윗사람으로 옮겼다. ― 옮긴이.

  5. 5. 요제프라는 이름이 내 꿈에서 이토록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눈에 띄는 일이다(삼촌 꿈 참조). 나는 꿈속에서 이 이름을 지닌 사람들 뒤에 내 자아를 유난히 쉽게 숨길 수 있다. 성서에서 꿈 해석자의 이름이 요제프〔요셉〕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