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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바) 부조리한 꿈 ― 꿈속의 지적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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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꿈 작업

(바) 부조리한 꿈 ― 꿈속의 지적 활동

지금까지 꿈을 해석하면서 우리는 꿈 내용에서 부조리라는 요소와 워낙 자주 마주쳤으므로, 그 원인과 의미를 따지는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다. 물론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꿈 연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꿈이란 위축되고 조각난 정신 활동이 만들어 낸 의미 없는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그 주된 논거를 대 준 것이 바로 꿈의 부조리였다.

나는 꿈 내용의 부조리가 겉보기에만 그럴 뿐, 꿈을 좀 더 철저히 살펴보면 곧바로 사라지는 견본들로 시작하겠다. 꿈꾼 사람의 죽은 아버지를 다루는 꿈이 몇 편 있는데, 처음에는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I. 다음은 여섯 해 전에 아버지를 여읜 한 환자의 꿈이다.

그의 아버지에게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다. 아버지는 야간열차를 타고 가다가 탈선 사고를 당했는데, 좌석들이 서로 맞붙으면서 그의 머리가 양옆으로 짓눌렸다. 꿈꾼 사람은 아버지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보는데, 왼쪽 눈썹 위에 상처가 세로로 뻗어 있다. 꿈꾼 사람은 아버지가 불행을 당했다는 데 놀란다(아버지는 이미 죽었으니까, 하고 꿈꾼 사람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덧붙인다). 아버지의 눈이 너무도 맑다.

꿈 비판에서 통용되는 기준대로라면 이 꿈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야 할 것이다. 처음에 꿈꾼 사람은 아버지의 불행을 그려 보는 동안 아버지가 이미 여러 해 전에 무덤에 들어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꿈이 더 진행되면서 이 기억이 되살아나, 그는 아직 꿈을 꾸는 중인데도 자기 꿈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분석은 이런 설명을 시도하는 것이 전혀 쓸모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꿈꾼 사람은 한 예술가에게 아버지의 흉상을 주문해 두었고, 꿈꾸기 이틀 전에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에게 사고를 당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이 흉상이다. 조각가는 그의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건네받은 사진들을 보며 작업하고 있다. 바로 꿈 전날, 효성스러운 아들은 집안의 늙은 하인을 작업실로 보냈다. 하인도 그 대리석 두상을 두고 자기와 같은 판단을, 곧 두상이 관자놀이에서 관자놀이까지 양옆으로 너무 좁게 나왔다는 판단을 내리는지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이제 이 꿈의 형성에 한몫한 기억들이 무더기로 뒤따른다. 꿈꾼 사람의 아버지에게는 사업 걱정이나 집안의 어려움에 시달릴 때마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자기에게는 너무 커져 버린 듯한 머리를 눌러 줄이려는 것 같았다. 우리의 꿈꾼 사람은 네 살 때, 권총이 잘못 발사되어 아버지의 두 눈이 시커멓게 그을리는 자리에 있었다(그의 눈이 너무도 맑다). 살아 있을 때 아버지는 생각에 잠기거나 슬플 때면, 꿈이 다친 자리를 보여 주는 바로 그곳에 깊은 주름이 졌다. 꿈에서 이 주름이 상처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은 꿈의 두 번째 계기를 가리킨다. 꿈꾼 사람은 어린 딸의 사진을 찍었는데, 건판이 손에서 떨어졌고, 주워 보니 금이 가 있었다. 그 금은 세로 고랑처럼 이마를 가로질러 눈두덩의 곡선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그때 그는 미신적인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 건판이 그의 손안에서 금이 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꿈의 부조리는 말로 나타내는 방식이 부정확한 데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그런 말투는 흉상이나 사진을 원래의 인물과 굳이 구별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그림을 두고 「아버지 잘 나오지 않았어?」 하고 말하곤 한다. 물론 이 꿈에서 부조리해 보이는 겉모습은 쉽게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경험을 두고 판단을 내려도 된다면, 이 부조리의 외양은 허용된 것이거나 바라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II. 다음은 내 꿈 가운데서 가져온, 아주 비슷한 또 하나의 예다(나는 1896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내 아버지는 죽은 뒤에 마자르인들 사이에서 정치 활동을 해 왔고, 그들을 하나로 뭉쳐 정치 단체를 만들었다. 여기에 곁들여 나는 작고 흐릿한 영상 하나를 본다. 의회에서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 긴 의자 하나나 둘 위에 서 있는 사람 하나와 그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 나는 그가 임종 때 가리발디를 무척 닮아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이 약속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 기쁘다.

이것은 분명 부조리하기 짝이 없다. 이 꿈을 꾼 것은 헝가리인들이 의회의 의사 방해〔obstruction〕로 무법 상태에 빠졌다가, 칼만 셸이 그들을 구해 낸 그 위기를 겪고 있던 무렵이었다. 꿈에서 본 장면이 그렇게 작은 영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소한 사정도 이 요소를 설명하는 데 의미가 없지 않다. 우리의 생각을 보통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실물 크기로 느껴지는 영상이 나온다. 그러나 내 꿈 영상은 삽화가 든 오스트리아 역사책의 본문에 끼워 넣은 목판화 한 점을 재현한 것으로, 프레스부르크 의회의 마리아 테레지아를, 곧 「Moriamur pro rege nostro〔우리의 왕을 위해 죽자〕」의 그 유명한 장면을 담은 판화다.1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꿈속의 내 아버지도 군중에게 둘러싸여 서 있다. 그러나 그는 긴 의자〔bench〕 하나나 둘 위에 서 있으니, 재판석〔bench〕의 재판관과 같다. (그가 그들을 하나로 뭉쳤다 ― 여기서 중간 다리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재판관이 필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아버지의 임종 자리를 둘러싸고 서 있던 우리는 실제로 그가 가리발디를 많이 닮아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사후(死後)에 체온이 올라서 두 뺨이 점점 더 붉게 빛났다…… 우리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잇게 된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허깨비 같은 광채 속에, 우리 모두를 굴복시키는 것 ― 저 비속한 것이 놓여 있었다.」

생각이 이렇게 드높아지고 나면 우리는 바로 이 「비속한 것」을 다루어야 할 채비를 하게 된다. 체온 상승이 사후의 일이었다는 특징은 꿈 내용의 「죽은 뒤에」라는 말에 대응한다. 아버지가 겪은 고통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마지막 몇 주 동안 찾아온 장의 완전한 마비(폐색〔obstruction〕)였다. 여기에는 온갖 불경한 생각이 이어져 있다. 나와 동갑인 한 남자는 아직 김나지움에 다닐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그때 나는 깊이 마음이 움직여 그에게 우정을 청했다. 그가 언젠가 비웃으며 한 친척 부인의 괴로움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그 부인의 아버지는 길에서 죽어 집으로 옮겨졌는데, 시신의 옷을 벗겨 보니 죽는 순간에, 또는 사후에 배변이 있었다는 것이다. 죽은 이의 딸은 이 추한 세부가 아버지에 대한 자기 기억을 더럽힌다는 것이 몹시 불행했다. 이제 우리는 이 꿈에 구현된 소원까지 파고들어 왔다. 죽은 뒤에 자기 아이들 앞에 깨끗하고 위대하게 서는 것, 누가 그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꿈의 부조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겉모습은 오로지, 전적으로 허용되는 말투 하나가 꿈에 충실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생겼을 뿐이다. 우리는 그런 말투를 쓸 때 그 부분들 사이에 어쩌다 존재하는 부조리를 무시하는 데 익숙하다. 여기서도 우리는 이 부조리의 외양이 바라던 것이며 일부러 빚어낸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2

III. 이제 인용하는 예에서 나는 꿈 작업이 재료 속에 아무런 계기도 없는 부조리를 일부러 지어내는 현장을 붙잡을 수 있다. 이 예는 휴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툰 백작을 만난 일로 꾸게 된 꿈에서 가져왔다. 「나는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가며, 기차역으로 몰고 가라고 이른다. 내가 자기를 지치게 하기라도 한 듯 마부가 이의를 달자, 나는 『물론 철도 선로 그 자체 위로는 자네와 함께 타고 갈 수 없네』 하고 말한다. 동시에 나는 보통은 기차를 타고 가는 거리를 이미 그와 함께 달려온 것 같다.」 이 뒤죽박죽이고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분석은 다음과 같이 풀어 준다. 그날 낮에 나는 도른바흐의 외진 거리로 가려고 말 한 필이 끄는 마차를 빌렸다. 그런데 마부는 길을 몰랐고, 그 선량한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내가 알아차리고 길을 가르쳐 줄 때까지 마냥 몰고 다녔다. 나는 길을 가르쳐 주면서 비꼬는 말도 몇 마디 아끼지 않았다. 이 마부에게서 생각의 흐름 하나가 내가 나중에 만나게 될 귀족 인사에게로 이어졌다. 지금은 이 말만 해 두겠다. 우리 같은 시민 계급의 평민들 눈에는 귀족이 마부석에 앉기를 좋아한다는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의 수레를 모는 것도 툰 백작이 아닌가? 그러나 꿈의 다음 문장은 내 아우를 가리키는데, 나는 아우를 말 한 필이 끄는 마차의 마부와 동일시한다. 나는 올해 아우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를 거절했는데(「물론 철도 선로 그 자체 위로는 자네와 함께 타고 갈 수 없네」), 이 거절은 아우가 늘 하던 불평에 대한 일종의 벌이었다. 내가 서둘러 이곳저곳을 돌게 하고 하루에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보게 해서, 이런 여행에서 으레 자기를 지치게 한다는 불평이었다(이 불평은 바뀌지 않은 채 꿈에 들어간다). 그날 저녁 아우는 나를 기차역까지 바래다주었는데, 역에 거의 다 와서 서부역의 국유 철도 구역에서 뛰어내렸다. 푸르커스도르프로 가는 기차를 타려는 것이었다. 나는 아우에게, 푸르커스도르프에 국유 철도가 아니라 서부 철도로 간다면 나와 조금 더 같이 있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꿈에서 내가 보통은 기차를 타고 가는 거리를 마차를 타고 간 것은 이렇게 해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나는 아우에게, 네가 국유 철도로 타고 가는 거리를 나와 함께 서부 철도로 타고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꿈의 혼란은 모두 내가 꿈에 「국유 철도」 대신 「마차」라는 낱말을 끼워 넣은 데서 빚어졌다. 물론 이 낱말은 마부와 내 아우를 한데 묶는 데 톡톡히 쓸모가 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꿈에서 내 설명으로도 좀처럼 바로잡히지 않는 듯한 무의미를 발견하는데, 이것은 앞서 한 내 말(「물론 철도 선로 그 자체 위로는 자네와 함께 타고 갈 수 없네」)과 거의 모순을 이룬다. 그러나 내게는 국유 철도를 말 한 필이 끄는 마차와 혼동할 까닭이 전혀 없으므로, 나는 꿈속의 이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 전체를 일부러 이렇게 빚어낸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이제 우리는 꿈속의 부조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거나 만들어 낸 동기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경우의 수수께끼는 이렇게 풀린다. 꿈속에서 나는 「타고 가기」(Fahren)와 관련해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꿈 사고 속에 표현을 요구하는 어떤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꿈의 다른 장면에 「안주인」으로 나오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는 총명한 부인의 집에서 어느 저녁 나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 두 개를 들었다. 모임의 다른 사람들은 답을 알고 있었으므로, 답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쓰는 나는 좀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Nachkommen」(뒤따라오다 ― 자손)과 「vorfahren」(앞서 타고 가다 ― 선조, 조상)이라는 낱말의 두 가지 뜻을 두고 노는 수수께끼 두 개였다. 그 수수께끼는 다음과 같다.

마부가 그것을 하네

주인의 분부를 받들어.

누구나 그것을 가졌고,

무덤 속에서 그것이 잠드네.

(조상.)

둘째 수수께끼의 절반이 첫째 것과 똑같다는 것이 헷갈렸다.

마부가 그것을 하네

주인의 분부를 받들어.

누구나 그것을 가진 것은 아니고,

요람 속에서 그것이 잠드네.

(자손.)

나는 툰 백작이 그토록 위풍당당하게 앞서 타고 가는(vorfahren) 것을 보았고, 귀족 나리들의 공로란 태어나는 수고를 했다(Nachkommen ― 자손이 되다)는 데 있다고 보는 피가로의 기분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두 수수께끼는 꿈 작업을 위한 중간 사고가 되었다. 귀족은 마부와 쉽게 혼동될 수 있고, 또 우리 고장에서는 예전에 마부를 매부〔brothers-in-law〕라고 불렀으므로, 압축 작업은 내 아우까지 같은 표현 속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배후에서 작용하던 꿈 사고는 이런 것이었다. 조상을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Vorfahren.) 차라리 나 자신이 조상이 되겠다. (Vorfahr.) 「무의미하다」는 이 판단 때문에 꿈속에 무의미가 들어 있다. 이제 꿈의 이 모호한 대목에 남은 마지막 수수께끼도 풀 수 있다. 곧 내가 이미 앞서 마부와 함께 달려왔다(vorher gefahren, vorgefahren)는 것이다.

그러므로 꿈 사고 속에 「그건 무의미하다」라는 판단이 요소 하나로 들어 있으면, 그리고 대체로 무의식적인 생각의 흐름 가운데 어느 하나에 경멸과 비판이 동기로 작용하면, 꿈은 부조리해진다. 이리하여 부조리는 꿈 작업이 모순을 표현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된다. 꿈 사고와 꿈 내용 사이에서 재료 속의 관계를 뒤집는 것이나, 운동이 가로막히는 감각을 이용하는 것도 그런 수단이다. 그러나 꿈속의 부조리를 그저 「아니」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오히려 꿈 사고의 성향을, 곧 모순과 함께 비웃음과 조롱을 드러내려는 성향을 재현하려는 것이다. 꿈 작업이 무언가 우스꽝스러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로지 이 목적을 위해서다. 여기서도 꿈 작업은 잠재 내용의 일부를 외현적 형태로 바꾸어 놓는다.3

사실 우리는 부조리한 꿈의 의미를 보여 주는 설득력 있는 예를 이미 만난 적이 있다. 분석 없이 해석한 그 꿈, 곧 바그너 공연이 아침 7시 45분까지 이어지고 탑 위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등등의 꿈(이 장 (라) 참조)은 분명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미친 세상이요 광기 어린 사회다. 무언가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얻지 못하고, 아무것에도 마음 쓰지 않는 사람이 그것을 가진다 ― 그리고 그녀는 이 말로 자기 운명을 사촌의 운명과 견주려 한다. 죽은 아버지에 관한 꿈들이 꿈속 부조리의 예를 가장 먼저 대 주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부조리한 꿈이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조건들이 여기에 전형적인 방식으로 한데 모여 있다. 아버지에게 속한 권위는 일찍부터 아이의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아버지가 내세운 엄격한 요구는 아이로 하여금 자기를 변명하려고 아버지의 약점 하나하나에 유난히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 생각 속에서, 특히 아버지가 죽은 뒤에 아버지라는 인물을 감싸는 경건한 마음은, 이 비판이 드러나 의식되지 못하게 막는 검열을 강화한다.

IV. 다음은 죽은 아버지에 관한 또 하나의 부조리한 꿈이다.

나는 고향 도시의 시의회에서 통지서 한 장을 받는데, 1851년에 내가 앓은 발작 때문에 병원에 수용될 수밖에 없었던 일의 비용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일을 웃음거리로 삼는다. 첫째로 1851년에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둘째로 그 통지서가 해당될 수도 있는 사람인 내 아버지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나는 옆방으로 아버지에게 가는데,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 일을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그해에 ― 1851년에 ― 한 번 술에 취해 갇히거나 수용되어야 했던 일을 떠올린다. T—— 상회에서 일할 때였다. 「그럼 아버지도 술을 마셨어?」 하고 나는 묻는다. 「그 뒤에 곧 결혼했어?」 나는 내가 1856년에 태어났다고 셈해 보는데, 그것이 내게는 곧바로 뒤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앞의 논의에 비추어, 우리는 이 꿈이 자기의 부조리를 끈질기게 내보이는 것을 꿈 사고 속에 유난히 격하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로 번역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만큼 더 놀랍게도, 이 꿈에서는 논쟁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아버지가 풍자의 과녁이 되는 인물로 지목되어 있다. 이런 공공연함은 꿈 작업에서 검열이 작용한다는 우리의 가정과 모순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중간에 끼워 넣은 인물일 뿐이고, 싸움은 다른 사람과 벌어지고 있으며, 그 사람은 단 한 번의 암시를 통해 꿈에 모습을 드러낸다. 꿈은 대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반항을 다루고 그 뒤에 아버지가 숨어 있는데, 여기서는 그 반대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을 나타내는 허수아비 노릇을 한다. 그래서 꿈은 평소에는 신성시되는 인물을 이처럼 공공연히 다룰 엄두를 낸다. 실제로 겨냥하는 것이 그가 아니라는 확실한 앎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꿈의 계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꿈을 꾼 것은, 판단이 틀림없다고 여겨지는 한 선배 동료가, 내 환자 하나가 그때 다섯 해째 나와 정신분석 작업을 이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못마땅함과 놀라움을 드러냈다는 말을 들은 뒤였다. 꿈의 첫머리 문장들은 이 동료가 한때 내 아버지가 더는 해낼 수 없던 의무를 떠맡았다는 사실(경비, 병원비)을 속이 훤히 비치는 위장으로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이 깨지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오해가 생길 때 아버지가 맡아 온 역할과 그가 예전에 해 온 일 때문에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감정의 갈등에 빠졌다. 이제 꿈 사고는 내가 더 진척을 보지 못한다는 비난에 몹시 분개하는데, 이 비난은 이 환자의 치료에서 다른 일들로까지 번져 나간다. 이 동료는 더 빨리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도 안단 말인가? 이런 종류의 상태는 대개 고칠 수 없고 평생 간다는 것을 그는 모른단 말인가? 평생에 비하면 네댓 해가 무엇인가? 더구나 치료를 받는 동안 환자의 삶이 그토록 한결 수월해졌는데 말이다.

이 꿈이 주는 부조리의 인상은 대체로, 꿈 사고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온 문장들이 이어 주는 연결 없이 줄줄이 꿰어져 있다는 데서 생긴다. 이를테면 나는 옆방으로 아버지에게 가는데, 운운 하는 문장은 앞의 문장들이 다루던 주제를 떠나, 내가 아버지에게 약혼 사실을 알렸을 때의 정황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그러니 꿈은 그때 노인이 보여 준 고결한 사심 없음을 내게 일깨우고, 그것을 다른 사람, 곧 새로 등장한 한 사람의 처신과 대비하려 한다. 이제 나는 꿈이 내 아버지를 웃음거리로 삼아도 되는 까닭을 알겠다. 꿈 사고 속에서 아버지는 그 공로를 온전히 인정받으며 다른 사람에게 본보기로 내세워지기 때문이다. 금지된 것에 관해서는 진실보다 오히려 거짓을 말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모든 검열의 본성이다. 다음 문장, 곧 아버지가 한 번 술에 취했고 그 때문에 갇혔던 일을 기억해 내는 문장도 실제로 내 아버지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 여기서 아버지가 가려 주는 인물은 다름 아닌 위대한 마이네르트다. 나는 크나큰 존경심을 품고 그의 발자취를 따랐지만, 나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잠시 너그럽더니 이내 노골적인 적대로 바뀌었다. 꿈은 그가 젊은 시절 클로로포름에 중독되어 그 때문에 요양원에 들어가야 했다고 스스로 한 말을 내게 떠올리게 한다. 꿈은 또 그가 죽기 얼마 전에 그와 겪은 두 번째 일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남성의 히스테리를 두고 그와 격렬한 지상 논쟁을 벌였는데, 그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런데 내가 마지막 병상에 누운 그를 찾아가 몸이 어떠냐고 묻자, 그는 자기 상태를 자세히 늘어놓더니 이런 말로 끝맺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언제나 남성 히스테리의 가장 멋진 증례 가운데 하나였지요.」 이리하여 그는, 나로서는 흐뭇하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완강하게 반대하던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내가 아버지로 마이네르트를 가릴 수 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다고 밝혀진 유사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꿈 사고에 나오는 한 조건문을 간략하지만 넉넉하게 표현한 데 근거한다. 그 조건문을 온전히 적으면 다음과 같다. 「물론 내가 둘째 세대라면, 곧 교수나 궁정 고문관의 아들이라면, 나는 더 빨리 진척했을 것이다.」 꿈에서 나는 이제 내 아버지를 궁정 고문관이자 교수로 만든다. 이 꿈에서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성가신 부조리는 1851년이라는 연도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1851년은 내게 1856년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다섯 해의 차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하다. 그러나 표현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꿈 사고의 이 생각이다. 네댓 해 ― 그것은 내가 처음에 말한 그 동료의 후원을 누린 기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내가 결혼하기 전에 신부를 기다리게 한 기간이기도 하고, 꿈 사고가 반갑게 붙잡는 우연의 일치로, 지금 내가 가장 좋은 환자 하나에게 치료를 끝내 주지 못한 채 기다리게 하고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다섯 해가 뭐란 말인가?」 하고 꿈 사고는 묻는다. 「내게 그건 시간이랄 것도 없다 ― 셈에 넣을 것도 못 된다. 내 앞에는 시간이 넉넉하다. 당신이 믿으려 하지 않던 것이 끝내 사실이 되었듯이, 나는 이 일도 해낼 것이다.」 게다가 51이라는 수는 세기의 수에서 떼어 놓고 보면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도 반대의 뜻으로 결정되어 있다. 그 때문에 이 수는 꿈에 되풀이해 나온다. 쉰한 살은 남자가 특히 위험에 노출되는 듯한 나이로, 나는 동료 여럿이 이 나이에 갑자기 죽는 것을 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오래 기다린 끝에 불과 며칠 전 교수로 임명된 사람도 있었다.

V. 숫자를 가지고 노는 또 하나의 부조리한 꿈은 다음과 같다.

내 지인 가운데 한 사람인 M. 씨가 어느 논문에서 다름 아닌 괴테에게, 우리 모두가 생각하기에 정당한 격렬함으로 공격을 받았다. M. 씨는 물론 이 공격에 짓밟혔다. 그는 어느 만찬 자리에서 이 일을 두고 몹시 원통해하지만, 이 개인적인 일로 괴테에 대한 자기의 존경심이 손상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나는 그럴 법하지 않아 보이는 연대 관계를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 한다. 괴테는 1832년에 죽었다. 그가 M.을 공격한 것은 물론 그보다 앞선 일이어야 하니, M. 씨는 그때 아주 젊은 사람이었다. 그가 18세였다는 것이 내게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 정확히 몇 년인지 모르고, 그래서 계산 전체가 흐릿해지고 만다. 게다가 그 공격은 「자연」이라는 제목이 붙은 괴테의 유명한 논문에 들어 있다.

이 꿈의 무의미를 정당화할 방도는 곧 찾게 될 것이다. 내가 만찬 자리에서 알게 된 M. 씨는 얼마 전 마비성 광기의 징후를 보이는 자기 형제를 진찰해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짐작은 맞았다. 이 방문에서 괴로웠던 것은, 대화에 그럴 계기가 전혀 없는데도 환자가 형제의 젊은 시절 장난을 들먹여 그를 망신시킨 일이었다. 나는 환자에게 태어난 해를 말해 보라고 했고, 기억력이 약해진 것을 드러내려고 간단한 계산을 몇 번 시켜 보았는데, 그는 이 시험을 모두 꽤 잘 통과했다. 이제 보니 꿈에서 내가 마비 환자처럼 행동하고 있다(나는 지금이 정확히 몇 년인지 모른다). 꿈의 다른 재료는 또 다른 최근의 원천에서 왔다. 내 친구인 한 의학 잡지 편집자가 베를린의 내 친구 Fl.의 최근 저서에 대한 몹시 호의적이지 않은, 「짓밟는」 비평을 자기 잡지에 받아 실었는데, 그 비평을 쓴 사람은 판단을 내릴 역량이 별로 없는 아주 젊은 평자였다. 나는 개입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편집자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는 그 비평을 받아 실은 것을 몹시 후회했지만, 바로잡겠다는 약속은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잡지와 관계를 끊었고, 사직 편지에서 이 일로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손상되지는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 꿈의 셋째 원천은 한 여자 환자가 들려준 이야기인데 ― 그때 내 기억에 아직 생생했다 ― 광란에 빠져 「자연, 자연」 하고 외친 그녀 형제의 정신 질환에 관한 것이었다. 담당 의사들은 그 외침이 괴테의 아름다운 논문을 읽은 데서 나왔으며, 환자가 자연 철학 공부로 과로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우리 고장에서는 교양이 덜한 사람들까지도 「자연」이라는 말을 쓸 때 담는 성적인 뜻을 생각했다. 그 불행한 남자가 나중에 자기 성기를 훼손했다는 사실은 내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광란의 발작이 일어났을 때 이 환자의 나이가 열여덟 살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받은 내 친구의 책이(「저자가 미친 것인지 우리가 미친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다른 한 비평가의 의견이었다) 삶의 시간 관계를 다루며 괴테의 수명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의미 있는 어떤 수의 배수로 돌린다고 말한다면, 내가 꿈에서 친구의 자리에 나 자신을 놓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것이다. (나는 연대 관계를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 한다.) 그러나 나는 마비 환자처럼 행동하고, 꿈은 부조리 속에서 흥청댄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 사고가 빈정거리며 말하듯이, 이런 뜻이다. 「물론 그는 바보요 미치광이이고, 당신은 더 잘 아는 천재겠지. 그런데 혹시 거꾸로가 아닐까?」 그런데 이 거꾸로가 꿈속에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괴테가 젊은이를 공격했다고 하는 점이 그렇다. 이것은 부조리하지만, 젊은 녀석이 불멸의 괴테를 공격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또 내가 괴테가 죽은 해부터 셈한다는 점이 그렇다. 나는 마비 환자에게는 그가 태어난 해부터 계산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모든 꿈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온 결과임을 보여 주겠다고 이미 약속했다. 그러니 이 꿈에서 내가 친구의 일을 내 일로 삼아 그의 자리에 나를 놓는다는 사실을 해명해야 한다. 깨어 있을 때의 사고에서 내가 지니는 이성적 확신만으로는 이렇게 하기에 모자란다. 그런데 열여덟 살 먹은 환자의 이야기와 그의 외침 「자연」을 두고 나온 갖가지 해석은, 내가 정신신경증의 성적 병인을 주장함으로써 대다수 의사들과 대립하게 된 일을 암시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 친구가 당한 것과 같은 비판을 너도 당할 것이고, 이미 어느 정도는 당했다.」 그러면 이제 꿈 사고 속의 「그」를 「우리」로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 둘이 바보야.」 mea res agitur〔내 일이 걸려 있다〕라는 것은 괴테의 짧고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논문이 언급된 데서 분명히 드러난다. 김나지움 졸업반에서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내가 자연 과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이 논문이 공개 강연에서 낭독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VI. 내 자아가 나오지 않는 또 다른 꿈에 대해서도 나는 그것이 이기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5장 (라)에서 짧은 꿈 하나를 이야기했다. 그 꿈에서 M. 교수는 「내 아들, 근시 ……」 하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내가 한몫을 맡는 다른 꿈의 예비 꿈일 뿐이라고 말해 두었다. 여기에 앞에서 빼 두었던 본꿈을 싣는다. 이 꿈은 그 부조리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낱말 형성을 설명해 보라고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로마시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 때문에 아이들이 피신해야 하고, 실제로 피신한다. 그다음 장면은 어느 문 앞에서 펼쳐지는데, 고풍스러운 양식의 두 짝 문이다(꿈을 꾸는 동안에도 나는 그것이 시에나의 포르타 로마나라는 것을 안다). 나는 우물 가장자리에 앉아 있고 몹시 슬프다. 거의 울 것 같다. 여성 인물 하나가 ― 유모, 수녀 ― 두 사내아이를 데리고 나와 그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넘겨주는데, 그 아버지는 내가 아니다. 둘 가운데 큰 아이는 분명 내 맏아들이고, 다른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사내아이를 데려온 여자가 아이에게 작별의 입맞춤을 청한다. 그녀는 빨간 코가 눈에 띈다. 아이는 입맞춤은 해 주지 않지만, 작별의 뜻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Auf Geseres」라고 말하고, 우리 둘에게(또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에게) 「Auf Ungeseres」라고 말한다. 나는 뒤의 말이 더 나은 쪽을 가리킨다는 생각이 든다.

이 꿈은 내가 극장에서 본 『새 게토(Das neue Ghetto)』라는 연극이 불러일으킨 생각의 얽힘 위에 세워져 있다. 유대인 문제, 제 조국을 줄 수 없는 내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 아이들이 토박이 시민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키우는 일에 대한 불안 ― 이 모든 특징을 여기에 딸린 꿈 사고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바빌론 물가에 앉아 울었다.」 시에나는 로마처럼 아름다운 분수로 이름난 곳이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아는 장소들 가운데서 로마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5장 (나) 참조). 시에나의 포르타 로마나 근처에서 우리는 불이 환하게 밝혀진 커다란 건물 하나를 보았는데, 알고 보니 마니코미오, 곧 정신병원이었다. 꿈을 꾸기 얼마 전, 나는 나와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 하나가 온갖 애를 써서 얻은 국립 정신병원의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Auf Geseres」라는 말과 ― 꿈 내내 이어지는 상황으로 보면 여기서는 「Auf Wiedersehen」(Au revoir)〔「다시 볼 때까지」라는 작별 인사〕가 나올 법하다 ― 그 말의 전혀 의미 없는 반대말 「Auf Ungeseres」다.

히브리어 학자들에게서 얻은 정보에 따르면, Geseres는 동사 goiser에서 나온 진짜 히브리어 낱말로, 「정해진 고난, 운명 지어진 재앙」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좋다. 유대인들이 쓰는 은어에서의 쓰임새로 보면 「울부짖음과 탄식」을 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Ungeseres는 내가 지어낸 말로, 먼저 내 주의를 끌지만 당장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Ungeseres가 Geseres보다 더 나은 쪽을 가리킨다는, 꿈 끝의 짧은 소견이 연상과 설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준다. 캐비아에도 같은 관계가 들어맞는다. 소금에 절이지 않은 것4이 절인 것보다 더 귀하게 여겨진다. 대중에게는 캐비아, 「고상한 취미」. 여기에는 우리 집 식구 한 사람을 두고 하는 농담 섞인 암시가 숨어 있다. 그녀는 나보다 젊으니, 나는 그녀가 내 아이들의 장래를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 집의 또 다른 식구인 훌륭한 유모가 꿈의 유모(또는 수녀)로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는 사실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소금에 절인 것과 절이지 않은 것이라는 짝과 Geseres ― ungeseres 사이에는 이어 주는 고리가 빠져 있다. 그 고리는 발효시킨 것과 발효시키지 않은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올 때, 곧 출애굽 때 빵을 발효시킬 겨를이 없었고, 그 일을 기려 오늘날까지도 부활절 때면 발효시키지 않은 빵을 먹는다. 분석의 이 대목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도 여기서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나는 부활절 휴가가 끝날 무렵 베를린에서 온 친구와 내가 우리에게 낯선 도시 브레슬라우를 거닐던 일을 떠올렸다.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내게 어느 거리로 가는 길을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고 나서 친구에게 말했다. 「저 꼬마가 커서는 자기를 이끌 사람을 고를 때 좀 더 눈이 밝았으면 좋겠어.」 얼마 뒤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헤롯 박사, 진료 시간…….」 나는 속으로 말했다. 「이 동료가 설마 소아과 의사는 아니겠지.」 그사이 내 친구는 좌우 대칭의 생물학적 의미에 관한 자기 견해를 펼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을 꺼냈다. 「우리가 키클롭스처럼 이마 한가운데 눈이 하나뿐이라면…….」 이것은 우리를 예비 꿈에 나온 교수의 말로 이끈다. 「내 아들, 근시.」 그리고 이제 나는 Geseres의 주된 원천에 이르렀다. 여러 해 전, 지금은 독자적인 사상가가 된 M. 교수의 이 아들이 아직 학교 걸상에 앉아 있던 시절, 그는 눈병에 걸렸는데 의사는 걱정스러운 병이라고 말했다. 의사의 생각으로는 병이 한쪽 눈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괜찮지만, 다른 쪽 눈으로 번지면 심각해질 것이었다. 병은 한쪽 눈에서는 아무 후유증 없이 나았다. 그러나 얼마 뒤 정말로 다른 쪽 눈에 그 증상이 나타났다. 겁에 질린 소년의 어머니는 한적한 시골 휴양지로 곧장 의사를 불렀다. 그러나 의사는 이 일에 대해 다른 견해를 취했다. 「무슨 『Geseres』를 이렇게 떠십니까?」 하고 그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한쪽이 나았으면 다른 쪽도 나을 겁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다.

이제 이것과 나 자신, 그리고 내게 소중한 이들 사이의 관계를 보자. M. 교수의 아들이 처음 공부를 배운 그 학교 걸상은 내 맏아들의 것이 되었다. 걸상은 맏아들의 어머니에게 선물로 들어온 것인데, 꿈에서 내가 작별의 말을 입에 담게 한 것이 바로 이 맏아들이다. 걸상이 이렇게 넘어온 데 결부될 수 있는 소원 하나는 이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학교 걸상은 아이가 근시가 되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막게끔 만들어졌다. 그래서 근시(그리고 그 뒤에는 키클롭스)와 좌우 양측성에 관한 논의가 나왔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데 대한 염려는 두 겹의 뜻을 지닌다. 몸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과 아울러 지적인 발달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도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꿈속 장면은 그 온갖 광기에도 바로 이 불안을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이는 한쪽에 작별의 말을 한 뒤, 균형을 잡으려는 듯 다른 쪽에 그 반대말을 외친다. 아이는 말하자면 좌우 대칭에 복종하여 행동하고 있다!

이처럼 꿈은 가장 부조리해 보이는 자리에서 가장 깊은 뜻을 지니는 일이 흔하다. 어느 시대에나 할 말은 있으나 제 몸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는 그 말을 할 수 없던 사람들은 기꺼이 광대의 방울 달린 모자를 썼다. 그 금지된 말이 겨냥한 듣는 이는, 그 말을 웃어넘길 수 있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분명 무언가 부조리한 것이라는 논평으로 스스로를 추켜세울 수 있을 때, 그 말을 더 쉽게 참아 넘겼다. 꿈은 실제로 바보 흉내를 내야 하는 연극 속의 왕자와 똑같이 움직인다. 그러니 햄릿이 참된 사정 대신 알아들을 수 없는 재담을 내세우며 자기 자신에 관해 한 말을 꿈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나는 북북서풍이 불 때만 미칠 뿐이라네. 바람이 남쪽에서 불면 매와 톱쯤은 구별할 줄 안다네.」5

그러므로 꿈의 부조리라는 문제에 대한 나의 해답은 이렇다. 꿈 사고는 결코 부조리하지 않다 ― 적어도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의 꿈에 속하는 꿈 사고는 그렇다. 그리고 꿈 사고 속의 비판과 조롱과 조소를 꿈 작업이 제 나름의 표현 방식으로 나타내야 할 때, 꿈 작업은 부조리한 꿈과 개별적으로 부조리한 요소를 지닌 꿈을 만들어 낸다. 다음으로 내가 보여 주려는 것은 이렇다. 꿈 작업은 무엇보다 앞서 말한 세 요인의 ― 그리고 아직 거론하지 않은 넷째 요인의 ―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꿈 작업이 해내는 일은 자기에게 정해진 세 조건을 지키면서 꿈 사고를 옮겨 놓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정신이 꿈속에서 모든 능력을 다해 작동하는가 아니면 그 일부만으로 작동하는가 하는 물음은 설득력을 잃으며 실제 사정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단이 내려지고 비판이 가해지고 사실이 인정되며, 꿈의 어느 한 요소에 대한 놀라움이 나타나고 논증과 설명이 시도되는 꿈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이런 일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반론에는 골라낸 예들을 들어 대응해야 한다.

내 대답은 이렇다. 꿈속에서 비판 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꿈 작업의 지적 성취로 볼 것이 아니라 꿈 사고의 재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그것은 완성된 구조물로서 꿈 사고에서 외현적 꿈 내용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깨어난 뒤 기억되는 꿈에 대해 내려지는 판단, 그리고 꿈을 재생할 때 일어나는 느낌조차도 상당 부분 잠재적 꿈 내용에 속하며, 꿈 해석에서 저마다 제자리에 맞춰 넣어야 한다.

I. 이것을 보여 주는 인상적인 예는 이미 하나 들었다. 한 여성 환자가 꿈이 너무 막연하다며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꿈에서 어떤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남편인지 아버지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꿈 조각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거름통」이 하나 등장하고, 이 거름통이 다음과 같은 회상을 불러일으킨다. 젊은 주부였을 때 그녀는 집에 자주 드나들던 젊은 친척 앞에서, 다음에는 새 거름통부터 장만해야겠다고 농담 삼아 말한 적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거름통 하나가 배달되어 왔는데, 은방울꽃이 가득 담겨 있었다. 꿈의 이 부분은 「네 거름에서 자란 게 아니다」라는 속담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6 분석을 끝까지 해 보면, 꿈 사고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젊은 시절에 들은 한 이야기의 여파라는 것이 드러난다. 한 처녀가 누가 진짜 아버지인지 분명하지 않은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꿈의 표현은 깨어 있을 때의 사고로 넘어가, 꿈 사고의 한 요소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꿈 전체에 대해 내리는 판단으로 표현되게 한다.

II. 비슷한 경우. 내 환자 한 사람이 스스로 흥미롭게 여기는 꿈을 꾼다. 깨어나자마자 곧 「그걸 의사에게 말해야지」 하고 혼잣말을 하니 말이다. 꿈을 분석해 보니, 그가 치료를 받는 동안 휘말려 들었으면서도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한 연애 관계를 더없이 뚜렷하게 암시하고 있다.7

III. 다음은 내가 직접 겪은 세 번째 예다.

나는 P.와 함께, 집과 정원이 나오는 어느 지역을 지나 병원으로 간다. 그러면서 이 지역을 이미 여러 번 꿈에서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길을 잘 모른다. P.가 모퉁이를 지나 어느 식당(정원이 아니라 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르쳐 준다. 거기서 나는 도니 부인을 찾는데, 그녀가 뒤편의 작은 방에서 아이 셋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그리로 가다가 도중에 흐릿한 사람 하나가 내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있는 것과 마주치고, 한동안 아이들과 함께 서 있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아이들을 거기 두고 갔다는, 아내에 대한 일종의 비난.

깨어나면서 나는 큰 충족감을 느끼는데, 그 까닭은 「그걸 이미 꿈꾼 적이 있다」는 생각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제 분석에서 알게 되리라는 데 있다.8 그러나 꿈의 분석은 이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분석이 보여 주는 것은 그 충족감이 꿈에 대한 내 판단이 아니라 잠재적 꿈 내용에 속한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내가 결혼해서 아이들을 얻었다는 데 대한 충족감이다. P.는 한동안 나와 함께 인생길을 걸었지만 그 뒤로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나를 멀찍이 앞질러 간 사람인데, 그의 결혼에는 아이가 없다. 이를 증명해 주는 꿈의 두 계기는 분석을 끝까지 해 보면 찾을 수 있다. 전날 나는 신문에서 도나 A——y 부인이라는 사람의 부고를 읽었는데(나는 이 이름으로 도니를 만든다),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아내가 들려준 바로는, 죽은 부인을 돌본 산파는 우리 막내 두 아들이 태어날 때 아내 자신을 돌보았던 바로 그 산파였다. 도나라는 이름이 내 눈길을 끈 것은 얼마 전 한 영국 소설에서 그 이름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꿈의 다른 계기는 꿈을 꾼 날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날은 내 맏아들의 생일 전날 밤이었는데, 이 아이는 시적 재능을 타고난 것 같다.

IV. 내 아버지가 죽은 뒤에 마자르인들 사이에서 정치적 역할을 했다는 부조리한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같은 충족감이 내게 남아 있었는데, 그 충족감은 꿈의 마지막 문장에 따르던 느낌이 이어진 데서 동기를 얻는다. 「나는 임종 때 그가 가리발디를 그토록 닮아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그것이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 기쁘다. (여기에 잊힌 뒷부분이 들어간다.)」 이제 나는 꿈의 이 빈틈에 들어갈 것을 분석에서 채워 넣을 수 있다. 그것은 내 둘째 아들에 대한 언급이다. 나는 이 아이에게 한 위대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그 인물은 소년 시절에, 특히 영국에 머무는 동안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면 이 이름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 나는 한 해를 기다려야 했고,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크나큰 충족감 속에 그 이름으로 아이를 맞았다. 아버지의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 생각 속에서 어떻게 자식들에게로 옮겨 가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살다 보면 이 갈망을 억제해야 할 때가 오는데, 그 억제가 이루어지는 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는 말도 쉽게 믿을 것이다. 이 어린 녀석이 이 꿈의 본문에 한자리를 얻은 것은, 옷을 더럽히는 똑같은 사고가 ― 아이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라면 얼마든지 용서될 만한 사고가 ― 그에게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Stuhlrichter」라는 암시(걸상 긴 의자〔stool-bench. stool에는 「대변」이라는 뜻도 있다〕 위의 재판관, 즉 재판장)와, 자기 아이들 앞에 위대하고 깨끗하게 서는 것이라는 꿈의 소원을 견주어 볼 수 있다.

V. 이제 나는 깨어 있을 때의 우리 사고 속에 간직되거나 거기로 옮겨지지 않고 꿈 자체 안에 머무는 판단의 표현을 찾아내야 하는데, 다른 목적으로 이미 인용한 꿈들에서 그런 예를 찾을 수 있다면 짐을 크게 덜 것이다. 괴테가 M. 씨를 공격하는 꿈에는 판단 행위가 꽤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럴 법하지 않아 보이는 연대 관계를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 한다. 이것은 괴테가 내가 아는 한 젊은이를 글로 공격했다는 무의미한 생각을 겨냥한 비판적 충동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가 18세였다는 것이 내게는 그럴듯해 보인다.」 이것은 꼭 둔한 머리로 해낸 계산의 결과처럼 들린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정확히 몇 년인지 모른다」는 꿈속의 불확실함이나 의심의 예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분석을 통해 안다. 꿈속에서 처음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판단 행위들은 달리 풀이될 수 있고, 그렇게 풀이하면 꿈을 해석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되는 동시에 부조리도 모두 사라진다. 「나는 연대 관계를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 한다」라는 문장으로 나는 실제로 삶의 연대 관계를 설명하려 애쓰는 내 친구의 자리에 나를 놓는다. 그러면 이 문장은 앞 문장들의 무의미에 이의를 다는 판단이라는 의미를 잃는다. 끼워 넣은 말 「그럴 법하지 않아 보이는」은 뒤따르는 「내게는 그럴듯해 보인다」와 한데 속한다. 나는 자기 형제의 병 이야기를 들려준 그 부인에게 거의 같은 말로 대답한 적이 있었다. 「『자연, 자연』이라는 외침이 괴테와 무슨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제게는 그럴 법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 외침이 부인도 아시는 그 성적인 뜻을 지녔다는 편이 훨씬 더 그럴듯해 보입니다.」 물론 여기서 판단이 내려지기는 했다. 그러나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꿈 사고가 기억해 내어 이용하는 어떤 기회에 내려진 것이다. 꿈 내용은 꿈 사고의 다른 조각과 마찬가지로 이 판단을 제 것으로 삼는다.

꿈에서 판단과 무의미하게 이어져 있는 숫자 18은, 실제 판단이 뜯겨 나온 맥락의 흔적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끝으로 「지금이 몇 년인지 확실히 모르겠다」는 나를 마비 환자와 동일시하는 일을 수행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 환자를 진찰하면서 실제로 이 점을 확인해 두었던 것이다.

꿈속의 이런 겉보기 판단 행위들을 풀 때에는 해석의 규칙 하나를 상기해 두는 것이 좋겠다. 꿈이 그 구성 부분들 사이에 지어낸 연관은 허울만 그럴듯하고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 무시해야 하며, 꿈 요소는 하나하나 따로 떼어 그 원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는 규칙이다. 꿈은 뭉쳐진 덩어리여서, 탐구하려면 그것을 요소들로 부수어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정들을 보면, 꿈속에는 이 겉보기 연관을 세우는 어떤 심리적 힘이, 다시 말해 꿈 작업이 얻어 낸 재료에 이차 가공을 가하는 힘이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이 힘이 드러난 모습들이다. 뒤에 우리는 이 힘을 꿈 형성에 관여하는 요인들 가운데 넷째 요인으로 보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VI. 이미 인용한 꿈들에서 비판 활동의 다른 예를 골라 보겠다. 시의회 통지서에 관한 부조리한 꿈에서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 뒤에 바로 결혼했어? 나는 내가 1856년에 태어났다고 셈해 보는데, 그것이 내게는 바로 뒤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영락없이 추론의 형식을 띠고 있다. 아버지는 1851년에 발작을 겪은 뒤 바로 결혼했다. 나는 맏아들이고 1856년에 태어났다. 그러니 이것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우리는 이 추론을 끼워 넣은 것이 소원 성취이며, 꿈 사고를 지배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은 취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4, 5년, 그건 시간이랄 것도 없다, 그건 계산에 넣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 추론의 사슬은 부분 하나하나가 내용으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꿈 사고에서 다른 방식으로 결정된다. 치료가 끝나면 바로 결혼하려는 것은, 내 동료가 그 끈기를 두고 불평하는 바로 그 환자다. 꿈에서 내가 아버지를 다루는 방식은 심문이나 시험을 떠올리게 하고, 그와 함께 대학 선생 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수강 등록을 받을 때마다 학생의 신상을 빠짐없이 받아 적곤 했다. 「자네는 언제 태어났나?」 1856년. 「Patre?〔아버지는?〕」 그러면 등록하는 학생은 아버지의 이름을 라틴어 어미를 붙여 대었고, 우리 학생들은 그 궁정 고문관이, 등록한 학생 자신의 이름만으로는 언제나 얻을 수 있지는 않았을 추론을 아버지의 이름에서 끌어낸다고 짐작했다. 그렇다면 꿈속에서 추론을 끌어내는 일은, 꿈 사고 속에 재료의 일부로 나타나는 추론을 끌어내는 일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하나 배운다. 꿈 내용에 추론이 나타나면, 그것은 어김없이 꿈 사고에서 온 것이다. 추론은 기억된 재료의 한 조각으로서 꿈 사고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일련의 꿈 사고를 논리적으로 이어 주는 고리 노릇을 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꿈속의 추론은 꿈 사고 속의 추론을 나타낸다.9

이 꿈의 분석은 여기서 좀 더 이어 가야 한다. 교수의 심문에는 대학생 명부(내가 다니던 시절에는 라틴어로 펴냈다)에 대한 기억이 이어져 있고, 또 내 학업 과정에 대한 기억도 이어져 있다. 의학 공부에 정해진 다섯 해는 여느 때처럼 내게는 모자랐다. 나는 그 뒤로도 몇 해 동안 태평하게 공부를 이어 갔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게으름뱅이로 통했고, 내가 과연 「끝마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다 나는 갑자기 시험을 치르기로 마음먹었고, 늦어지기는 했어도 「끝마쳤다」. 이것은 꿈 사고를 새로이 확인해 주는 것이다. 나는 그 꿈 사고를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항하듯 내민다. 「내가 시간을 들인다고 해서 당신들이 믿으려 하지 않더라도, 나는 결론(독일어로 Schluss. 끝이라는 뜻도 되고 결론, 곧 추론이라는 뜻도 된다)에 이를 것이다. 그런 일은 여러 번 있었다.」

이 꿈은 첫머리 부분에, 논증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운 문장을 여럿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논증은 전혀 부조리하지 않다. 깨어 있을 때의 사고에 속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꿈에서 나는 시의회 통지서를 웃음거리로 삼는다. 첫째로 1851년에 나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고, 둘째로 그것이 해당될 수도 있는 사람인 내 아버지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그 자체로 옳을 뿐 아니라, 내가 앞서 말한 그런 통지서를 받는다면 쓸 논거와 완전히 일치한다. 앞의 분석에서 우리는 이 꿈이 깊은 원한과 경멸에 찬 꿈 사고에서 솟아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해 검열의 동기가 아주 강하다고 가정해도 된다면, 꿈 작업이 꿈 사고 속에 들어 있는 본보기를 따라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한 흠잡을 데 없는 반박을 만들어 낼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석이 보여 주듯, 이 경우 꿈 작업에 주어진 과제는 자유롭게 본떠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꿈 작업은 꿈 사고에서 가져온 재료를 제 목적에 쓰도록 요구받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대수 방정식에 숫자 말고도 더하기 부호와 빼기 부호, 거듭제곱 부호와 근호가 들어 있는데, 누군가 이 방정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베끼면서 숫자와 함께 연산 부호까지 제 사본에 옮겨 적고 그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 논거는 다음과 같은 재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신신경증에 대한 내 해명의 바탕이 되는 가정 가운데 많은 것이 알려지자마자 의심과 조롱을 불러일으키리라고 생각하면 괴롭다. 이를테면 나는, 생후 두 번째 해의 인상이, 아니 첫해의 인상조차 나중에 병이 드는 사람들의 기질에 오래가는 흔적을 남기며, 이 인상들이 ― 물론 기억 때문에 크게 왜곡되고 과장되기는 하지만 ― 히스테리 증상의 최초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알맞은 자리에서 이것을 설명해 주면, 환자들은 그렇다면 자기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시기의 회상을 찾아보겠다고 나서며 그 설명을 흉내 내어 비꼬곤 한다. 여자 환자들의 가장 이른 성적 충동에서 아버지가 맡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역할을 밝혀 줄 때에도 비슷한 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내 예상에 딱 들어맞을 것이다. (5장 (라)의 논의 참조.) 그런데도 근거가 탄탄한 내 확신에 따르면 두 주장은 모두 옳다. 그 증거로 나는 몇 가지 예를 떠올린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죽었는데, 달리는 설명할 수 없는 나중의 사건들이, 그 아이가 그토록 일찍 자기 삶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간직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 예들이다. 나는 내 두 주장이 모두 추론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 추론의 타당성이 공격받으리라는 것을 안다. 반박당할까 봐 내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추론들의 재료를 꿈 작업이 반박할 수 없는 추론을 세우는 데 쓴다면, 이것은 소원 성취가 해낸 일이다.

VII. 지금까지 살짝 건드리기만 했던 한 꿈에서는, 꺼내려는 주제에 대한 놀라움이 첫머리에서부터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나이 든 브뤼케가 내게 무슨 과제인가를 준 것이 분명하다. 묘하게도 그 과제는 내 하반신, 곧 골반과 다리를 표본으로 만드는 일과 관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마치 해부실에서처럼 눈앞에 보지만, 내 몸이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고 공포의 흔적도 전혀 없다. 루이제 N.이 가까이 서서 내 곁에서 제 일을 하고 있다. 골반은 내장이 들어내져 있다. 그것을 위에서 본 모습이 보이다가 아래에서 본 모습이 보이다가 하고, 두 모습이 뒤섞인다. 두툼하고 살진 붉은 덩어리들이 보인다(꿈속에서도 나는 그것을 보고 치질을 떠올린다). 또 그 위에 놓인, 구겨진 주석박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골라내야 했다.10 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내 다리를 되찾아 시내를 지나는 길에 나섰는데, (피곤해서) 마차를 탔다. 놀랍게도 마차는 어느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대문이 열리며 마차를 통로로 들여보냈다. 그 통로는 끝에서 뚝 꺾여 있었고, 결국 더 나아가 탁 트인 바깥으로 이어졌다.11 마침내 나는 알프스 안내인과 함께 바뀌어 가는 풍경 속을 헤맸는데, 안내인은 내 짐을 날라 주었다. 그는 지친 내 다리를 생각해 얼마 동안 나를 업고 갔다. 땅은 질척거렸고, 우리는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다. 사람들이 땅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그 가운데 소녀도 하나 있었고, 인디언이나 집시 같았다. 그 전에 나는 미끄러운 땅 위에서 혼자 몸을 움직여 나아갔는데, 표본으로 만든 뒤인데도 그렇게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이 줄곧 놀라웠다. 마침내 우리는 열린 창문 하나로 끝나는 작은 나무집에 이르렀다. 여기서 안내인은 나를 내려놓고, 마련되어 서 있던 나무판자 두 장을 창턱에 걸쳐 놓았다. 창문에 가려면 건너야 하는 깊은 틈에 그렇게 해서 다리를 놓으려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내 다리 때문에 정말로 겁이 났다. 기대했던 건너가기 대신, 오두막 벽에 붙은 나무 긴 의자 위에 어른 남자 둘이 누워 있고, 그 곁에 잠든 아이 둘 같은 것이 있는 것이 보였다. 건너가기를 가능하게 해 주기로 되어 있는 것은 판자가 아니라 아이들인 것 같다. 나는 겁에 질린 생각을 안고 깨어났다.」

꿈 압축이 얼마나 풍부한지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이 꿈을 자세히 분석하려면 얼마나 많은 쪽을 채워야 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의 맥락에서는 이 꿈에서 꿈속 놀라움의 예 하나만 가져오면 된다. 「묘하게도」라는 삽입구에 나타나는 놀라움이다. 꿈의 계기부터 살펴보자. 그것은 꿈에서 작업을 거드는 이 부인, 루이제 N.의 방문이다. 그녀가 말한다. 「읽을 것 좀 빌려 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라이더 해거드의 『그녀(She)』를 내민다. 「묘한 책이지만 숨은 뜻으로 가득해요.」 하고 나는 그녀에게 설명하려 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 우리 감정의 불멸성――」 여기서 그녀가 내 말을 끊는다. 「그 책은 벌써 알아요. 직접 쓰신 건 없나요?」 「없어요. 제 불멸의 작품들은 아직 쓰이지 않았거든요.」 「그럼 우리한테 재미있게 읽힐 거라고 약속하신 그 이른바 최신 폭로라는 건 언제 내실 거예요?」 하고 그녀가 조금 빈정거리며 묻는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다른 누군가의 말을 대신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문다. 나는 꿈에 관한 이 저작 하나를 내는 데에도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생각한다. 이 책에서 나는 내 은밀한 성격을 그토록 많이 내보여야 한다. 「네가 아는 가장 좋은 것을 아이들에게 말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꿈에서 내가 하라는 명령을 받은, 나 자신의 몸을 표본으로 만드는 일은 내 꿈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자기 분석이다. 나이 든 브뤼케가 여기에 자리를 얻은 것은 아주 마땅하다. 학문 연구를 시작한 처음 몇 해 동안 나는 어떤 발견을 내버려 둔 적이 있는데, 그의 강력한 명령에 떠밀려서야 그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루이제 N.과 나눈 대화에서 출발하는 다른 생각의 흐름들은 너무 깊이 내려가 있어서 의식되지 못한다. 그 흐름들은 라이더 해거드의 『그녀』를 언급하면서 내 안에 깨어난 관련 재료를 거쳐 옆길로 빠진다. 「묘하게도」라는 논평은 이 책과,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책 『세계의 심장』에 해당하는 말이며, 꿈의 수많은 요소가 이 두 환상 소설에서 나왔다. 꿈꾼 사람이 업혀서 지나가는 질척거리는 땅, 가져온 판자로 건너야 하는 깊은 틈은 『그녀』에서 왔고, 인디언들과 소녀와 나무집은 『세계의 심장』에서 왔다. 두 소설 모두 여자가 일행을 이끌고, 둘 다 위험한 방랑을 다룬다. 『그녀』는 미지의 나라,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곳으로 가는 모험 여행을 다룬다. 꿈을 적어 둔 기록에서 찾은 메모에 따르면, 다리의 피로는 그 무렵 내가 실제로 느끼던 감각이었다. 틀림없이 여기에 걸맞게 지친 기분과 「내 다리가 앞으로 얼마나 더 나를 데려가 줄까?」 하는 의심 섞인 물음이 찾아왔다. 『그녀』의 모험은 일행을 이끌던 여자가 자기와 남들을 위해 불멸을 얻기는커녕 땅속 한가운데의 신비로운 불 속에서 죽음을 맞는 것으로 끝난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꿈 사고 속에 생겨났다는 것은 틀림없다. 「나무집」 또한 분명 관, 곧 무덤이다. 그러나 꿈 작업은 모든 생각 가운데 가장 원치 않는 이 생각을 소원 성취로 표현함으로써 걸작을 이루어 냈다. 나는 이미 한 번 무덤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르비에토 근처의 텅 빈 에트루리아 무덤이었다. 벽에 돌 긴 의자 두 개가 붙어 있는 좁은 방이었고, 그 위에 어른 두 사람의 해골이 눕혀져 있었다. 꿈속 나무집의 내부는 돌 대신 나무가 들어섰다는 것만 빼면 이것과 똑같아 보인다. 꿈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네가 그렇게 일찍 무덤에 누워야 한다면, 그 무덤이 이 에트루리아 무덤이기를.」 그리고 이렇게 끼워 넣음으로써 꿈은 가장 슬픈 기대를 정말로 바랄 만한 기대로 바꾸어 놓는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꿈이 반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쉽게도 정동에 딸린 표상뿐이고, 정동 자체는 대개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겁에 질린 생각」을 안고 깨어난다. 꿈이 내 생각을 ― 아버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아이들은 어쩌면 이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 표현할 수밖에 없게 된 뒤인데도 그렇다. 이 생각은 한 사람의 동일성이 이천 년에 걸친 여러 세대를 거치며 보존되는 그 묘한 소설을 새로이 암시한다.

VIII. 다른 꿈 하나의 맥락에도 꿈속에서 겪는 일에 대한 비슷한 놀라움의 표현이 있다. 그런데 이 놀라움은, 천재의 솜씨라 불러도 좋을 만큼 눈에 띄고 교묘하게 짜낸 설명 시도와 이어져 있다. 그래서 이 꿈에 흥미로운 특징이 달리 두 가지나 있지 않았더라도, 오로지 그 시도 때문에라도 꿈 전체를 분석해야 할 판이다. 나는 7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에 남부 철도를 타고 여행하고 있는데, 잠결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홀투른〔Hollthurn〕, 10분.」 나는 곧바로 해삼〔Holothurian〕을 ― 자연사 박물관을 ― 떠올리고, 여기가 용감한 사람들이 자기네 영주의 지배에 맞서 헛되이 저항했던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오스트리아의 반종교 개혁! 마치 슈타이어마르크나 티롤의 어느 곳인 것처럼. 이제 나는 이 사람들의 유해나 유품을 간직한 작은 박물관 하나를 또렷이 본다. 나는 내리고 싶지만 망설인다. 승강장에는 과일을 든 여자들이 서 있다. 그들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그 자세로 바구니를 권하듯 내민다. 나는 시간이 아직 남았는지 몰라 망설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 있다. 나는 갑자기 다른 칸에 와 있는데, 거기서는 가죽과 좌석이 너무 좁아서 등이 곧바로 등받이에 닿는다.12 나는 이것이 놀랍지만, 잠든 사이에 객차를 바꿔 탔을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 그 가운데 영국인 남매. 벽에 붙은 선반 위에 뚜렷이 보이는 책 한 줄. 나는 『국부론』을, 그다음에는 『물질과 운동』(맥스웰 지음)을 본다 ― 책들은 두툼하고 갈색 아마포로 제본되어 있다. 남자가 누이에게 실러의 책 한 권을 달라고 하면서, 그것을 잊고 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이 책들은 처음에는 내 것 같다가, 다음에는 남매의 것 같다. 이때 나는 오가는 말을 확인하고 거들려고 대화에 끼어들고 싶다――. 창문이 모두 닫혀 있어서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은 채 깨어난다. 기차는 마르부르크에 선다.

꿈을 적어 내려가는 동안, 내 기억이 빼 버리려 했던 한 부분이 떠오른다. 나는 어떤 작품을 두고 남매에게 「It is from ……」 하고 말하다가, 「It is by ……」 하고 스스로 고쳐 말한다. 남자가 누이에게 「그가 맞게 말했어.」 하고 한마디 한다.

꿈은 역 이름 하나로 시작하는데, 아마 그 이름 때문에 내가 반쯤 깨어났을 것이다. 그 이름은 마르부르크〔Marburg〕였는데, 나는 그것을 홀투른으로 바꾸어 놓았다. 역 이름을 처음 불렀을 때, 아니 어쩌면 두 번째로 불렀을 때 내가 마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들었다는 것은, 꿈에 실러가 언급된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실러는 마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슈타이어마르크의 마르부르크는 아니지만 말이다.13 그런데 이번 여행은 일등칸을 탔는데도 몹시 불쾌한 형편에서 이루어졌다. 기차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내 칸에서 나는 신사와 부인 한 쌍과 마주쳤는데, 지체 높은 사람들로 보였지만, 내가 끼어든 데 대한 못마땅함을 감출 만한 교양이 없었거나, 굳이 감출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내가 정중하게 인사를 해도 답례가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등을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도, 여자는 서둘러 자기 맞은편의 창가 자리를 우산으로 차지해 버렸다. 문은 곧바로 닫혔고, 창문을 여는 일을 두고 들으라는 듯한 말이 오갔다. 아마 나는 신선한 공기에 굶주린 사람으로 대번에 알아보였을 것이다. 무더운 밤이었고, 이렇게 사방이 막힌 칸 안의 공기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행을 다녀 본 경험으로 나는, 이렇게 배려 없고 주제넘은 행동이 찻삯을 일부만 치렀거나 아예 치르지 않은 사람들의 표지라고 믿게 되었다. 차장이 와서 내가 비싸게 산 표를 내보이자, 부인이 퉁명스럽게, 위협이라도 하듯 외쳤다. 「내 남편은 무임 승차권이 있어요.」 그녀는 풍채는 당당하나 표정이 뚱한 여자로, 나이는 여자의 아름다움이 시들기로 정해진 때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남자는 아무 말도 할 틈을 얻지 못한 채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나는 잠을 청했다. 꿈에서 나는 불쾌한 길동무들에게 무서운 복수를 한다. 꿈 전반부의 뚝뚝 끊긴 조각들 뒤에 어떤 모욕과 굴욕이 숨어 있는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 욕망이 충족되고 나자, 내 칸을 다른 칸으로 바꾸고 싶다는 두 번째 소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꿈은 장면을 몹시 자주, 그것도 그렇게 바꾸는 데 조금도 이의를 달지 않고 바꾸므로, 내가 기억 속에서 길동무들을 곧바로 더 유쾌한 사람들로 바꾸어 놓았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언가가 장면 바뀜에 이의를 달고 그 바뀜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경우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어떻게 갑자기 다른 칸에 오게 되었는가? 객차를 바꿔 탄 일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 설명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잠든 사이에 찻간을 떠났던 것이 틀림없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신경병리학자의 경험은 그런 예를 대 준다. 우리는 몽롱 상태에서 기차 여행을 하면서도 어떤 표시로도 자기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드러내지 않다가, 여정 중 어느 역에서 완전히 의식을 되찾고는 자기 기억에 난 빈틈에 놀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아직 꿈을 꾸는 중에, 내 경우가 그런 「Automatisme ambulatoire〔보행 자동증〕」의 하나라고 선언한다.

분석은 다른 해답을 허락한다. 꿈 작업이 한 일로 여겨야 한다면 나를 그토록 놀라게 하는 이 설명 시도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내 환자 한 사람의 신경증에서 베껴 온 것이다. 나는 5장 (라)에서, 교양이 높고 처신으로 보아 마음씨가 착한 한 남자 이야기를 이미 한 적이 있다. 그는 부모가 죽은 뒤 얼마 안 되어 자기에게 살인 성향이 있다고 자책하기 시작했고, 이 성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고 취해야 했던 예방 조치들 때문에 괴로워했다. 처음에는 거리를 걷는 일이 그에게 고통스러워졌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해명을 요구하도록 그를 몰아대는 강박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 누군가 뒤쫓는 그의 눈길에서 갑자기 벗어나기라도 하면, 괴로운 느낌이 남았고, 자기가 그 사람을 없애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았다. 이 강박 관념은 다른 여러 가지와 함께 카인 공상도 감추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형제」이니 말이다. 이 과제를 도저히 해낼 수 없었으므로, 그는 산책을 그만두고 네 벽 안에 갇혀 살았다. 그러나 바깥에서 저질러진 살인 사건의 소식은 신문을 통해 끊임없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고, 그의 양심은 의심의 모습을 하고서 그가 바로 그 살인자라고 줄곧 고발했다. 몇 주 동안 집을 떠난 적이 없다는 확신이 한동안 이런 고발에서 그를 지켜 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 자기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집을 나섰을 수도 있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때부터 그는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를 늙은 가정부에게 맡기면서, 자기가 달라고 하더라도 절대 손에 쥐여 주지 말라고 엄하게 일렀다.

그러니까 내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찻간을 바꿔 탔을지도 모른다는 설명 시도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설명은 꿈 사고의 재료에서 완성된 상태로 꿈에 옮겨졌고, 분명 나를 그 환자라는 인물과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그에 대한 기억은 손쉬운 연상으로 깨어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밤 기차 여행을 한 것은 몇 주 전 이 사람과 함께였다. 그는 병이 나은 상태였고, 나를 부른 자기 친척들이 있는 시골로 나를 데려가던 길이었다. 우리끼리 칸 하나를 차지했으므로 우리는 밤새 창문을 모두 열어 두었고, 내가 깨어 있는 동안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 온, 성적 재료와 이어진 아버지에 대한 적대적 충동이 그의 병의 뿌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그와 동일시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에게 그와 비슷한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꿈의 둘째 장면은 실은 짓궂은 공상 하나로 풀린다. 나이 지긋한 두 길동무가 내게 그토록 무례하게 군 것은, 내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이 작정한 대로 밤새 사랑의 표시를 주고받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공상이다. 그런데 이 공상은 이른 유년기의 한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아마 성적 호기심에 이끌려 부모의 침실에 들어갔다가, 아버지의 단호한 명령으로 쫓겨났다.

예를 더 늘어놓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들은 모두 이미 든 예들에서 우리가 배운 것을 확인해 줄 것이다. 곧 꿈속의 판단 행위는 꿈 사고 속에 있는 원형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개 그것은 어울리지 않는 연관 속에 끌어들인 부적절한 되풀이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마지막 예에서처럼, 아주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꿈속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사고 활동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심리 활동으로 주의를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활동은 꿈 형성에 늘 협력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협력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기원이 제각각이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꿈 요소들을 모순 없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한데 녹여 붙이려고 애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꿈에 나타나는 정동의 표현을 다루고, 그것을 분석이 꿈 사고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는 정동과 견주어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주

  1. 1. 유난히 작은 인물들이 가득한 꿈 하나를 어느 저자의 글에서 보았는지 잊어버렸다. 그 꿈의 원천은 꿈꾼 사람이 낮에 들여다본 자크 칼로의 판화 가운데 하나로 밝혀졌다. 이 판화들에는 아주 작은 인물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연작은 30년 전쟁의 참상을 다룬다.

  2. 2. 꿈에서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 행동하고 우리와 교섭하는 일이 잦다는 것은 지나친 놀라움을 불러일으켰고 기이한 설명들을 낳았는데, 그 설명들에서 꿈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꿈들의 설명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우리는 「만약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다면 이걸 보고 뭐라고 하실까?」 하고 생각할 일이 얼마나 잦은가. 꿈은 이 만약을 특정한 상황 속의 현재 시제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에게서 큰 유산을 물려받은 한 젊은이가,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 꾸지람을 들은 일을 계기로, 할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자기에게 셈을 따져 묻는 꿈을 꾼다. 우리가 꿈에 대한 저항으로 여기는 것, 곧 그 사람은 어쨌든 이미 죽었다는, 더 잘 아는 우리 지식의 반론은 실은 위안이다. 죽은 사람은 이런저런 일을 겪지 않고 갔으니 말이다. 또는 그가 이제 더는 참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 만족이다.

    죽은 친척이 나오는 꿈에서 보이는 또 다른 형태의 부조리는 어리석음과 부조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극단적인 거부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곧 사람들이 가장 생각지도 않은 것으로 보이게 하고 싶어 하는 억압된 생각을 표현한다. 이런 종류의 꿈은 꿈이 바라는 것과 현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릴 때에만 풀린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앓는 동안 곁에서 간호했고 그 죽음을 몹시 가슴 아파한 한 남자가, 얼마 뒤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다. 아버지는 다시 살아 있었고 여느 때처럼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이것이 이 꿈의 기묘한 점인데) 아버지는 그런데도 죽은 것이었다. 비록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런데도 죽은 것이었다」 뒤에 꿈꾼 사람의 소원 때문에, 그리고라는 말을 끼워 넣고, 「그러나 아버지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뒤에 꿈꾼 사람이 이런 소원을 품었다는 것을 덧붙이면 이 꿈을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를 간호하는 동안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자주 바란다. 즉 죽음이 마침내 아버지의 고통을 끝내 주었으면 하는, 정말로 연민 어린 욕망을 품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애도하는 동안, 바로 이 연민의 소원이 무의식적인 자책이 되었다. 마치 그 소원이 정말로 병자의 목숨을 줄이는 데 한몫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아버지에게 맞서는 이른 유년기의 충동들이 깨어나면서 이 자책을 꿈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꿈이 이토록 부조리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꿈의 유발 요인과 낮의 사고 사이에 하늘과 땅만큼 큰 대조가 있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정신 작용의 두 원리에 관한 정식화(Formulierungen über die zwei Prinzipien des seelischen Geschehens)」, 『연보』(블로일러·프로이트 엮음) 제3권 제1호, 1911 참조).

  3. 3. 여기서 꿈 작업은 우스꽝스럽다고 지목하는 생각을, 그 생각과 관련해 무언가 우스꽝스러운 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패러디한다. 하이네도 바이에른 왕의 엉터리 각운을 조롱하려 할 때 이와 비슷한 일을 한다. 그는 그보다 더 엉터리인 각운으로 조롱한다.

    「Herr Ludwig ist ein grosser Poet」〔루트비히 씨는 위대한 시인이라네〕

    「Und singt er, so stuerzt Apollo」〔그가 노래하면 아폴론이〕

    「Vor ihm auf die Knie und bittet und fleht,」〔그 앞에 무릎 꿇고 빌며 애원하네〕

    「『Halt ein, ich werde sonst toll oh!』」〔『그만두시오, 안 그러면 나 미치겠소!』〕

  4. 4. Geseres와 Ungeseres가 소금에 절인 것과 절이지 않은 것을 뜻하는 독일어 gesalzen, ungesalzen과 닮았고, 또 발효시킨 것과 발효시키지 않은 것을 뜻하는 독일어 gesauert, ungesauert와도 닮았다는 데 주목하라. ― 영역자 브릴의 주.

  5. 5. 이 꿈은 같은 밤에 꾼 꿈들은 기억 속에서 서로 떨어져 있더라도 같은 사고 재료에서 나온다는 일반 명제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게다가 내가 로마시에서 아이들을 구해 내는 꿈의 상황은 내 어린 시절에 속하는 한 일화를 가리키는 암시 때문에 왜곡되어 있다. 그 뜻은, 여러 해 전에 자기 아이들을 다른 땅으로 옮겨 심을 기회가 있었던 어떤 친척들을 내가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6. 6. 이 독일어 표현은 우리가 흔히 「그건 네 책임이 아니다」, 또는 「그건 네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 영역자 브릴의 주.

  7. 7.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동안 꾸는 꿈에 나오는 「그걸 의사에게 말해야지」라는 지시나 의도는, 꿈에 담긴 고백에 대한 커다란 저항에 어김없이 대응하며, 그 뒤에 꿈을 잊어버리는 일이 따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8. 8. 『철학 평론(Revue philosophique)』 여러 권에 걸쳐 폭넓게 논의된 주제다(꿈속의 기억 착오).

  9. 9. 이 결과는 논리적 관계의 표현에 관해 앞서 내가 한 진술(이 장 (다))을 여러 점에서 바로잡는다. 그 진술은 꿈 작업의 일반적인 조건을 기술했지만, 꿈 작업의 가장 섬세하고 가장 공들인 성취는 고려하지 않았다.

  10. 10. Stanniol〔주석박〕, 슈탄니우스(Stannius)에 대한 암시, 곧 어류의 신경계. 이 장 (마) 참조.

  11. 11. 내가 사는 공동 주택의 복도에서 다른 세입자들의 유모차가 서 있는 자리. 이것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로 중층 결정되어 있다.

  12. 12. 이 묘사는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꿈을 적어 내려가는 동안 떠오르는 바로 그 말로 꿈을 재현한다는 원칙을 따른다. 문구 자체가 꿈 표현의 일부다.

  13. 13. 실러는 여러 마르부르크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태어나지 않았고 마르바흐〔Marbach〕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을 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나 또한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것도 다른 자리에서 의도한 기만을 대신해 끼어드는 그런 오류(5장 (나) 참조) 가운데 하나이며, 그에 대한 설명은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Psychopathologie des Alltagslebens)』에서 시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