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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바) 무의식과 의식 ―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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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꿈 과정의 심리학

(바) 무의식과 의식 ― 현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장 (마)의 심리학적 논의에서 우리가 그 존재를 가정하고 설명한 것은 장치의 운동 말단 가까이에 있는 두 체계가 아니라 두 종류의 과정 또는 정동 방출 방식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달라질 것은 없다. 미지의 실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다른 무언가로 보조 관념을 바꿀 수 있겠다고 판단될 때면, 우리는 언제든 그 보조 관념을 버릴 채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두 체계를 가장 조잡하고 뻔한 의미에서 심리 장치 안의 두 장소로 여기는 동안 잘못 생겨났을 법한 몇몇 견해를 바로잡아 보자. 그런 견해들은 「억압」과 「침투」라는 용어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니까 무의식적 표상이 나중에 의식에 침투하기 위해 전의식으로 전이되려고 애쓴다고 말할 때, 새로운 장소에 두 번째 표상이 생겨나 그대로 남아 있는 원래의 표상 곁에 마치 행간에 써넣은 글처럼 자리 잡는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또 의식으로 침투한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는 장소가 바뀐다는 생각은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피하려 한다. 전의식적 표상이 억압되고 이어서 무의식에 받아들여진다고 말할 때에는, 영토를 둘러싼 싸움이라는 생각에서 빌려 온 이런 비유에 이끌려, 한 심리적 장소에서 어떤 배열이 실제로 해체되고 다른 장소에서 새로운 배열로 대체된다고 가정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비유 대신 실제 사정에 더 잘 들어맞을 듯한 말을 쓴다. 곧 어떤 에너지 집중이 특정한 배열로 전치되거나 그 배열에서 거두어짐으로써, 심리적 형성물이 한 체계의 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그 지배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장소론적 표현 방식을 역동적 표현 방식으로 바꾸는 셈이니, 우리에게 움직이는 요인으로 보이는 것은 심리적 형성물이 아니라 그것의 신경 자극이다.

그렇지만 두 체계라는 직관적인 관념을 앞으로도 계속 활용하는 것이 알맞고 또 정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표상과 사고와 심리적 형성물은 대체로 신경계의 기관적 요소 속에 자리 잡게 할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 요소들 사이, 곧 저항과 통로가 그것들에 대응하는 상관물을 이루는 곳에 자리 잡게 해야 한다는 점만 기억한다면, 이런 표현 방식을 잘못 적용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내적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광선이 지나가면서 망원경 안에 맺히는 상이 그렇듯이 허상이다. 그러나 망원경에서 상을 그려 내는 렌즈에 해당하는 체계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 체계들은 그 자체로는 심리적인 데가 전혀 없으며, 우리의 심리적 지각으로는 결코 다가갈 수 없다. 이 비유를 이어 가자면, 두 체계 사이의 검열은 광선이 새로운 매질로 넘어갈 때 일어나는 굴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의 책임 아래 심리학을 해 왔다. 이제는 오늘날의 심리학을 지배하는 이론적 견해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이 우리의 이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따져 볼 때다. 립스의 권위 있는 말을 빌리면,1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문제는 심리학적 문제의 하나라기보다 심리학 그 자체의 문제다. 심리학이 「심리적인 것」은 곧 「의식적인 것」이며 「무의식적 심리 현상」은 뻔한 모순이라는 말풀이로 이 문제를 처리하는 한, 의사가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얻은 관찰을 심리학적으로 평가할 길은 막혀 있었다. 의사와 철학자는 무의식적 심리 과정이 「확증된 사실을 나타내는 적절하고도 충분히 정당한 표현」이라는 것을 둘 다 인정할 때에만 서로 뜻이 맞는다. 「의식은 심리적인 것의 필수 불가결한 성질이다」라는 주장을 의사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물리칠 수밖에 없다. 철학자들의 발언을 존중하는 마음이 아직 충분히 강하다면, 의사는 자기와 철학자들이 같은 대상을 다루지도, 같은 학문을 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신경증 환자의 정신생활을 한 번만 지혜롭게 관찰해 보아도, 꿈 하나만 분석해 보아도, 의사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심리적 현상이라는 이름을 거절하지 못할 가장 복잡하고 올바른 정신 작용이, 당사자의 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물론 의사가 이 무의식적 과정을 알게 되는 것은, 그 과정이 의식에 효과를 미쳐 전달이나 관찰이 가능해진 뒤의 일이다. 그러나 의식에 나타난 이 효과는 무의식적 과정과는 크게 다른 심리적 성격을 띨 수 있어서, 내적 지각은 하나를 다른 하나의 대리물로 도저히 알아볼 수 없다. 의사는 의식에 미친 효과에서 출발해 추론을 거쳐 무의식적 심리 과정까지 파고들어 갈 권리를 자기 몫으로 지켜야 하며, 그렇게 해서 의식에 미친 효과란 무의식적 과정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온 심리적 산물일 뿐이고, 무의식적 과정 자체는 그대로 의식된 적이 없으며, 의식에 조금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작용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식이라는 성질을 과대평가하던 데서 돌아서는 것이, 심리적인 것의 움직임을 올바로 통찰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 된다. 립스의 말대로, 무의식은 정신생활의 일반적 토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무의식은 의식적인 것이라는 작은 원을 제 안에 품고 있는 더 큰 원이다. 의식적인 것은 모두 무의식 속에 예비 단계를 두고 있지만, 무의식은 이 단계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심리적 활동으로서 온전한 가치를 주장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무의식이야말로 참된 심리적인 것이며, 그 내적 본성은 외부 세계의 실재만큼이나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외부 세계가 우리 감각 기관의 신호를 통해 불완전하게 전해지듯이 무의식도 의식의 자료를 통해 꼭 그만큼 불완전하게 우리에게 전해진다.

의식 생활과 꿈 생활을 맞세우던 오래된 대립을 버리고, 무의식적인 심리적인 것에 마땅한 자리를 내주면, 옛 저자들이 깊이 골몰했던 일련의 꿈 문제가 제쳐지게 된다. 그러면 꿈속에서 해낸 일로 우리의 감탄을 자아냈던 활동의 많은 부분은 이제 꿈의 몫이 아니라, 낮에도 활동하는 무의식적 사고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셰르너의 말대로 꿈이 몸을 상징화해 표현하며 노니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그것이 아마도 성적 충동에 굴복한 어떤 무의식적 공상들이 해낸 일이며, 이 공상들이 꿈에서만이 아니라 히스테리성 공포증과 그 밖의 증상에서도 표현된다는 것을 안다. 꿈이 낮의 활동을 이어 가 매듭짓고 값진 영감까지 드러내 준다면, 우리는 거기서 꿈의 위장만 떼어 내면 된다. 그 위장은 꿈 작업이 이룬 솜씨이자 마음 깊은 곳의 어두운 힘이 거들었다는 표시다(타르티니의 소나타 꿈에 나오는 악마 참조). 지적 과업 자체는 낮 동안 그런 과업을 모두 해내는 바로 그 심리적 힘들의 몫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는 지적·예술적 창작에서조차 그 의식적 성격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너무 강한 것 같다. 괴테나 헬름홀츠처럼 창작력이 누구보다 왕성했던 몇몇 사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실제로 그들 창작에서 가장 본질적이고 독창적인 부분은 영감의 형태로 찾아와 거의 완성된 채로 그들의 지각에 이르렀다고 한다. 모든 심리적 힘이 한데 뭉쳐 애쓴 다른 경우에 의식적 활동이 거들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의식적 활동이 자기가 끼어드는 곳마다 다른 모든 활동을 우리 눈에서 가려도 된다는 것은, 의식적 활동이 누리는, 몹시 남용되어 온 특권이다.

꿈의 역사적 의의를 따로 하나의 주제로 다룰 만한 가치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족장이 꿈에 떠밀려 대담한 일을 벌였고, 그 일이 성공해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고 하자. 이때 새로운 문제가 생기는 것은 꿈을 낯선 힘으로 여겨 더 친숙한 다른 심리적 힘들과 맞세우는 동안뿐이다. 꿈을, 낮에는 저항에 짓눌려 있다가 밤이면 깊은 정동의 원천에서 힘을 보강받을 수 있는 충동들의 표현 형식으로 보면 문제는 사라진다.2 그러나 고대인들이 꿈에 보인 큰 존중은 올바른 심리학적 짐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길들지 않은 것, 파괴할 수 없는 것에 바치는 경의이며, 꿈 소원을 대 주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는 저 마성적인 것에 바치는 경의다.

내가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심코 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은 철학자들의 무의식과도, 립스의 무의식과도 겹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용법에서 무의식은 그저 의식적인 것의 반대를 가리킬 뿐이다. 의식적인 과정 곁에 무의식적 심리 과정도 있다는 것, 이것이 뜨겁게 논박되고 힘차게 옹호되어 온 쟁점이다. 립스는 한층 더 나아간 이론을 내놓는다. 심리적인 것은 모두 무의식적인 것으로 존재하며, 그 가운데 일부가 의식적인 것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꿈과 히스테리성 증상 형성이라는 현상을 끌어온 것은 이 이론을 증명하려고 한 일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생활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이 이론이 옳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증된다. 우리가 정신병리적 형성물을 분석해서, 그것도 그 첫째 항인 꿈을 분석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무의식이 ― 따라서 심리적인 것이 ― 서로 떨어진 두 체계의 기능으로 나타나며, 정상적인 정신생활에서도 이미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심리학자들은 아직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 둘 다 심리학적 의미에서는 무의식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미에서는, 우리가 무의식계라고 부르는 첫째 것은 의식될 수도 없다. 반면 둘째 것을 우리가 「전의식계」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그 충동들이 일정한 규칙을 지키고 나면 의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전에 다시 한번 검열을 거쳐야 하겠지만, 그래도 무의식계와는 상관없이 이른다. 충동이 의식에 이르려면 바꿀 수 없는 일련의 사건, 곧 심급의 연쇄를 거쳐야 한다. 검열이 충동을 변형하는 데서 드러나는 이 사실 덕분에, 우리는 공간성에서 비유를 끌어올 수 있었다. 우리는 전의식계가 무의식계와 의식 사이의 칸막이와 같다고 말함으로써, 두 체계가 서로에 대해, 그리고 의식에 대해 맺는 관계를 기술했다. 전의식계는 의식으로 가는 길을 막을 뿐 아니라 수의적 운동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도 지배하며, 이동 에너지를 일정량 내보낼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일부를 주의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다.

최근의 정신신경증 문헌에서 크게 환영받는 초의식(superconscious)과 잠재의식(subconscious)이라는 구별도 우리는 멀리해야 하는데, 바로 그런 구별이 심리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의 등가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때 전능하여 다른 모든 것을 그늘 아래 두었던 의식에게, 우리의 서술에서 이제 어떤 역할이 남는가? 심리적 성질을 지각하는 감각 기관의 역할, 오직 그것뿐이다. 도식을 세우려는 우리 시도의 기본 착상에 따르면, 의식적 지각은 독립된 한 체계의 고유한 활동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으며, 이 체계에는 「의식계(Cons.)」라는 약칭이 알맞다. 우리는 이 체계가 기계적 특성에서 지각 체계와 비슷하다고, 따라서 성질에 반응해 흥분할 수 있으되 변화의 흔적을 간직하지 못한다고, 즉 기억이 없다고 생각한다. 지각 체계의 감각 기관들로 외부 세계를 향하고 있는 심리 장치는 의식계의 감각 기관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외부 세계이며, 이 감각 기관이 목적론적으로 정당화되는 근거는 바로 이 관계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장치의 구조를 지배하는 듯한 심급 연쇄의 원리와 다시 한번 마주친다. 흥분 상태의 재료는 두 방향에서 의식계 감각 기관으로 흘러드는데, 첫째는 지각 체계에서 오며 질적으로 규정된 지각 체계의 흥분은 의식적 지각에 이르기까지 아마 새로운 가공을 거칠 것이고, 둘째는 장치 자체의 내부에서 오며 장치 내부의 양적 과정은 일정한 변화를 겪자마자 쾌와 불쾌라는 질적 계열로 지각된다.

올바르고 매우 복잡한 사고 구조물이 의식의 협력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철학자들은, 의식에 어떤 기능을 부여해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들에게 의식은 이미 완성된 심리적 과정을 쓸데없이 되비추는 거울처럼 보였다. 우리의 의식계를 지각 체계에 빗대어 보면 이 곤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한 지각이, 들어오는 감각 흥분이 퍼져 나가는 통로 쪽으로 주의의 집중을 향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지각 체계의 질적 흥분은 심리 장치의 이동 가능한 양에 대해, 그 방출을 조절하는 조절기 구실을 한다. 그 위에 놓인 의식계의 감각 기관에도 같은 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 이 감각 기관은 새로운 성질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동 가능한 집중량을 이끌고 알맞게 배분하는 데 새로이 이바지한다. 또 쾌와 불쾌의 지각으로 심리 장치 안에서 집중이 흘러가는 경로에 영향을 미치는데, 심리 장치는 보통 무의식적으로, 양의 전치를 통해 작동한다. 처음에 집중의 전치를 자동으로 조절하는 것은 아마 불쾌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성질들을 의식하게 되면 둘째의, 더 섬세한 조절이 덧붙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 조절은 첫째 조절에 맞서기까지 할 수 있고, 장치가 본래 설계와는 반대로 불쾌의 방출과 결부된 것까지 집중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함으로써 장치의 작업 능력을 완성할 수 있다. 신경심리학에서 우리는, 장치의 기능 활동에서 감각 기관의 질적 흥분을 통한 이런 조절이 중요한 몫을 맡는다는 것을 배운다. 일차적 불쾌 원칙의 자동적 통제와 그에 따르는 정신 능력의 제한은 감각적 조절로 깨지는데, 이 조절 또한 다시 자동 기제다. 우리는 또 이런 것도 배운다. 억압은 본래 합목적적인 것이었으나 결국 제지와 심리적 지배를 해롭게 거부하는 데로 끝나고 마는데, 이 억압이 지각에서보다 회상에서 훨씬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회상에는 심리적 감각 기관의 흥분으로 집중이 늘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리쳐야 할 표상이 한 번 억압에 굴복해 의식되지 못했다면, 그 표상이 다른 기회에 억압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다른 이유로 의식적 지각에서 떨어져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치료가 이미 이루어진 억압의 되돌림을 이끌어 내려고 쓰는 실마리다.

의식계 감각 기관이 이동 가능한 양에 조절하는 영향을 미쳐 생겨나는 과잉 집중의 가치는, 목적론적 연관에서 볼 때 새로운 성질 계열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새로운 조절이 생겨나는 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인간이 동물보다 앞서는 점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새로운 조절이다. 정신 과정은 그 자체로는, 거기 따르는 쾌와 불쾌의 흥분을 빼면 아무 성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이 흥분은 사고를 어지럽힐 수 있으므로 제어해 두어야 한다. 인간에게서는 정신 과정에 성질을 입히기 위해 정신 과정이 언어 기억과 연합되는데, 언어 기억의 질적 잔재는 의식의 주의를 정신 과정 쪽으로 끌어오기에 충분하고, 이 주의가 다시 사고에 새로운 이동 에너지를 부여한다.

의식을 둘러싼 갖가지 문제는 히스테리성 정신 과정을 분석해야만 그 전체를 살펴볼 수 있다. 이 분석에서 우리는 전의식에서 의식의 집중으로 넘어가는 데에도 무의식계와 전의식계 사이의 검열과 비슷한 검열이 따른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검열 역시 일정한 양적 정도에 이르러야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므로, 강도 높은 사고 형성물 가운데 이 검열을 빠져나가는 것은 거의 없다. 의식에서 멀리 붙잡아 두는 일이든 제한을 받으며 의식에 침투하는 일이든, 있을 수 있는 경우는 모두 정신신경증 현상의 그림 속에 들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검열과 의식 사이의 긴밀하고 이중적인 연관을 가리킨다. 이런 일 두 가지를 보고하는 것으로 이 심리학적 논의를 마치려 한다.

몇 해 전 동료 의사와 함께 진찰하는 자리에서 만난 환자는 영리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가씨였다. 옷차림이 이상했다. 여자의 옷이란 보통 마지막 주름 하나까지 매만져져 있기 마련인데, 이 아가씨는 스타킹 한 짝이 흘러내려 있었고 블라우스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다. 그녀는 한쪽 다리에 통증이 있다고 호소하더니, 청하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가장 큰 호소는 그녀 자신의 말로 하면 이러했다. 몸속에 무언가가 박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것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온몸을 속속들이 떨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때로는 온몸이 뻣뻣해진다고 했다. 이 말을 듣자 함께 진찰하던 동료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그 호소가 무슨 뜻인지 너무나 뻔했다. 우리 둘 다 기이하게 생각한 것은 환자의 어머니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물론 어머니 자신도 딸이 묘사한 상황에 여러 번 놓였을 것이 틀림없다. 아가씨 쪽은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다. 알았다면 결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는 검열관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나머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의식 속에 머물렀을 공상 하나가 순진한 호소라는 가면을 쓰고 의식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예. tic convulsif〔경련성 틱〕, 히스테리성 구토, 두통 따위를 앓던 열네 살 소년의 정신분석 치료를 시작하면서, 나는 소년에게 눈을 감으면 영상이 보이거나 생각이 떠오를 것이라고 장담하고, 그것을 내게 알려 달라고 청했다. 소년은 영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나를 찾아오기 직전에 받은 마지막 인상이 그의 기억 속에 시각적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는 삼촌과 체커를 두고 온 참이었는데, 이제 그 체커판이 눈앞에 보였다. 그는 유리하거나 불리한 여러 형세며 두면 위험한 수들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했다. 그러더니 그는 체커판 위에 단검 한 자루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의 물건이었지만, 그의 공상 속에서 체커판 위로 옮겨 놓인 것이었다. 이어서 판 위에 낫 한 자루가 놓였고, 다음에는 큰 낫이 더해졌으며, 마침내 그는 멀리 떨어진 본가 앞에서 풀을 베는 늙은 농부의 모습을 보았다. 며칠 뒤 나는 이 일련의 영상이 무슨 뜻인지 알아냈다. 소년은 언짢은 집안 사정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내막은 이러했다. 엄격하고 괴팍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불행하게 살았고, 아버지가 아이를 가르치는 방법이란 위협이 전부였다. 그러다 아버지는 다정하고 여린 어머니와 헤어지고 재혼하여, 어느 날 젊은 여자를 새엄마라며 집에 데려왔다. 열네 살 소년의 병은 그 며칠 뒤에 터졌다. 이 영상들을 알아들을 수 있는 암시로 엮어 낸 것은 아버지에 대한 억제된 분노였다. 재료를 대 준 것은 신화에 대한 회상이었다. 낫은 제우스가 아버지를 거세할 때 쓴 바로 그 낫이었다. 큰 낫과 농부의 모습은 크로노스를 나타냈다. 제 자식들을 먹어 치우고, 제우스에게 그토록 불효막심한 복수를 당하는 난폭한 노인 말이다. 아버지가 결혼하자 소년에게는 아버지의 비난과 위협을 되돌려 줄 기회가 생겼다. 그 비난과 위협은 예전에 아이가 자기 성기를 가지고 놀았다고 해서 받은 것이었다(체커판, 금지된 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단검). 여기에는 오래전에 억압된 기억과 그 무의식적 잔재가 있으며, 이것들이 무의미한 영상으로 위장한 채 자기들에게 열려 있던 우회로를 따라 의식 속으로 숨어든 것이다.

그러므로 꿈 연구의 이론적 가치는, 그것이 심리학적 지식에 이바지하고 신경증을 이해할 준비를 해 준다는 데 있으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지금 정도의 지식만으로도 치유할 수 있는 형태의 정신신경증에서 좋은 치료 효과를 거두고 있는 터에, 심리 장치의 구조와 활동을 철저히 알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할지 누가 미리 내다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음을 알고 개개인의 성격에 숨은 특성을 찾아내는 데 이런 연구가 지니는 실천적 가치는 어떠냐고 누군가 물을지도 모른다. 꿈이 드러내 보이는 무의식적 충동은 정신생활 속 실제 힘의 값어치를 지니지 않는가? 지금은 꿈을 만들어 내지만 언젠가는 다른 것을 만들어 낼지도 모르는 억제된 소원의 윤리적 의미를 가볍게 여겨도 되겠는가?

나는 이 물음들에 답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꿈 문제의 이런 측면을 나는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다만 황제를 죽이는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신하 하나를 처형하게 한 로마 황제는 어쨌든 잘못했다고 나는 믿는다. 황제는 먼저 그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려고 애썼어야 했다. 십중팔구 그 꿈의 뜻은 겉보기와 달랐을 것이다. 설령 내용이 다른 꿈이 이런 불경죄의 의미를 지녔다 하더라도, 덕 있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실제 삶에서 저지르는 일을 꿈꾸는 데 만족한다는 플라톤의 말을 떠올리는 편이 옳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꿈에는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 소원에 현실성을 인정해야 하는지, 인정한다면 어떤 의미에서인지는 선뜻 말할 수 없다. 모든 과도적 사고와 중간 사고에는 당연히 현실성을 인정할 수 없다. 무의식적 소원이 그 마지막이자 가장 참된 표현에 이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다 하더라도, 심리적 현실에는 단 하나의 존재 형식만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사람의 성격을 판단해야 하는 실제적 필요에는 대개 행동과, 생각을 의식적으로 표현한 것만으로 충분하다. 무엇보다 행동을 첫째 자리에 놓아야 마땅하다. 의식에 침투하는 충동 가운데 많은 것이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정신생활의 실제 힘에 상쇄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충동이 가는 길에 흔히 아무런 심리적 장애물도 만나지 않는 것은, 그것들이 나중에 저항에 부딪히리라는 것을 무의식이 확신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의 미덕이 자랑스럽게 솟아오르는 저 숱하게 헤집힌 땅을 잘 알아 두면 배울 것이 많다. 사방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인간 성격의 복잡함은, 우리의 낡은 도덕철학이 바라는 대로 단순한 양자택일로 정리되는 일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래를 아는 데 꿈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그런 것은 물론 생각할 수도 없다.3 그 대신 「과거를 아는 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꿈은 어느 모로 보나 과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꿈이 미래를 보여 준다는 옛 믿음에도 진실이 전혀 없지는 않다. 꿈은 소원을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 앞에 나타내 보임으로써 분명 우리를 미래로 이끌지만, 꿈꾸는 사람이 현재로 받아들이는 이 미래는 파괴할 수 없는 소원이 저 과거를 닮게 빚어 놓은 것이다.

주

  1. 1. 「심리학에서의 무의식 개념」. 1897년 뮌헨에서 열린 제3회 국제 심리학 대회에서 한 강연.

  2. 2. 2장에 나온, 티로스 포위 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꾼 꿈(Σα-τυρος〔티로스는 네 것이다〕) 참조.

  3. 3. 에른스트 오펜하임 교수(빈)는 민속 자료를 들어, 민중조차 미래를 가리키는 해석을 기대하지 않고 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소원 충동과 욕구에서 나온 것이라고 아주 올바르게 짚어 내는 한 부류의 꿈이 있음을 내게 보여 주었다. 그는 머지않아 이 꿈들을 자세히 보고할 것인데, 이 꿈들은 대부분 「우스운 이야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