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꿈의 신체적 원천
교양 있는 일반인에게 꿈의 문제에 관심을 불러일으켜 보려고, 그런 목적으로 그의 생각에는 꿈이 어떤 원천에서 생겨나느냐고 물어보면, 질문을 받은 사람은 대개 자기가 해답의 일부를 이미 확실히 쥐고 있다고 여긴다. 그는 탈이 나거나 더딘 소화(「꿈은 위장에서 나온다」), 우연히 취한 몸의 자세, 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이 꿈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곧바로 떠올리며, 이런 요인을 모두 헤아리고 나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는다는 것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듯하다.
꿈 형성에서 학술 문헌이 신체적 자극원의 몫으로 어떤 역할을 돌리는지는 첫 장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1장 (다)), 여기서는 그 검토의 결과를 되새기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본 대로 신체적 자극원은 세 가지로 나뉜다. 외부 대상에서 오는 객관적 감각 자극, 주관적 근거만 있는 감각 기관 내부의 흥분 상태, 그리고 내부에서 생겨나는 신체 자극이다. 또 우리는 저자들이 이런 신체적 자극의 원천을 앞세우느라 꿈의 심리적 원천을 뒷전으로 밀어내거나 아예 무시하려 한다는 것도 눈여겨보았다(1장 (다)).
이 몇 부류의 신체적 자극원을 두고 내세우는 주장들을 검토하면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이렇다. 감각 기관의 객관적 자극은, 잠자는 동안 우연히 가해지는 자극이든 잠든 정신생활에서도 차단할 수 없는 자극이든, 그 의의가 수많은 관찰로 확실히 확립되었고 실험으로도 확인되었다(1장 (다)). 주관적 감각 자극이 하는 역할은 입면 감각 이미지가 꿈속에 되돌아오는 것으로 증명되는 듯하다. 그리고 이런 꿈 이미지와 표상을 가장 넓은 의미의 내부 신체 자극으로 돌리는 일은 세세한 데까지 다 증명할 수는 없지만, 소화 기관과 비뇨 기관과 성 기관의 흥분 상태가 우리 꿈의 내용에 미치는 잘 알려진 영향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경 자극」과 「신체 자극」이 꿈의 신체적 원천일 테고, 여러 저자의 말대로라면 곧 꿈의 원천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여러 의문에 부딪혔으며, 그 의문들이 겨누는 것은 신체적 자극 이론이 옳으냐보다는 그 이론으로 충분하냐인 듯하다.
이 이론의 대표자들이 모두 이론의 바탕이 되는 사실들을, 특히 꿈 내용에서 별 어려움 없이 알아볼 수 있는 우연한 외적 신경 자극에 관한 사실을 아무리 확신했다 해도, 꿈의 풍부한 표상 내용을 외적 신경 자극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만은 그들 가운데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메리 휘턴 콜킨스 양[12]은 이 생각을 염두에 두고 여섯 주 동안 자기 꿈과 다른 한 사람의 꿈을 검토했는데, 외적 감각 지각이라는 요소를 증명할 수 있는 꿈은 13.2퍼센트에서 6.7퍼센트밖에 되지 않았고, 모은 꿈 가운데 기관 감각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은 두 사례뿐이었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짐작했을 법한 것을 여기서 통계가 확인해 준다.
「신경 자극 꿈」을 확실히 자리 잡은 하위 종으로 삼아 다른 형태의 꿈과 구별하자는 결정은 여러 번 내려졌다. 슈피타[64]는 꿈을 신경 자극 꿈과 연상 꿈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꿈의 신체적 원천과 꿈의 표상 내용을 잇는 고리를 증명하지 못하는 한, 이 해결책은 분명 만족스럽지 못한 채로 남았다.
외적 자극원이 충분히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는 첫째 반론 말고도, 이런 종류의 꿈 원천을 끌어들여서는 꿈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둘째 반론이 생긴다. 따라서 이 이론의 대표자들은 두 가지를 설명해야 한다. 첫째, 꿈속의 외적 자극은 왜 한 번도 그 참모습대로 인식되지 않고 으레 다른 것으로 오인되는가(1장 (다)의 자명종 꿈 참조). 둘째, 이렇게 잘못 인식된 자극에 대해 그것을 받아들이는 정신의 반응은 왜 그토록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바뀌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슈트륌펠[66]에게서, 정신은 잠자는 동안 외부 세계에서 돌아서 있기 때문에 객관적 감각 자극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여러 방향에서 오는 막연한 자극을 바탕으로 착각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자신의 말로는 이렇다(108쪽).
「잠자는 동안 외부나 내부의 신경 자극으로 말미암아 정신 속에 감각이나 감각 복합체나 느낌, 또는 일반적으로 어떤 심리적 과정이 생겨나 정신에 지각되자마자, 이 과정은 정신이 깨어 있을 때의 체험 범위에서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감각 이미지를, 곧 이전의 지각을, 꾸밈없는 그대로이든 거기에 딸린 심리적 가치와 함께이든 불러낸다. 이 과정은 말하자면 그런 이미지를 많든 적든 제 둘레에 모아들이는 듯하며, 신경 자극에서 비롯된 인상은 그 이미지들에서 심리적 가치를 얻는다. 깨어 있을 때의 사고를 두고 흔히 쓰는 말투를 빌려, 여기서도 정신이 잠자는 동안 신경 자극의 인상을 해석한다고들 한다. 이 해석의 결과가 이른바 신경 자극 꿈이다. 다시 말해 신경 자극이 재생의 법칙에 따라 정신생활에 제 작용을 미친다는 사실로 그 구성이 조건 지어지는 꿈이다.」
분트[76]의 견해도 본질적인 점에서는 모두 이 이론과 일치한다. 그의 말로는 꿈속의 표상은 아마 대부분 감각 자극, 특히 전신 감각의 자극에서 나온 결과이며, 그러므로 대개는 환상적인 착각, 아마 일부만 순수한 채 환각으로까지 높아진 기억 표상일 것이다. 이 이론에서 나오는 꿈 내용과 꿈 자극의 관계를 보여 주려고 슈트륌펠은 훌륭한 비유를 찾아냈다(84쪽). 그것은 마치 「음악을 모르는 사람의 열 손가락이 악기 건반 위를 헤매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 담긴 뜻은, 꿈이 심리적 동기에서 비롯되는 심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자극의 결과로 나타나며, 자극을 받는 장치가 달리는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결과가 심리적 증상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마이네르트가 강박 관념을 설명하려고 끌어온 유명한 비유, 곧 몇몇 숫자가 더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어서 두드러져 보이는 문자판의 비유도 비슷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체적 꿈 자극 이론이 아무리 널리 퍼지고 아무리 그럴듯해 보인다 해도, 그 약점을 보여 주기는 쉽다. 착각을 형성하게 하여 심리 장치에 해석을 부추기는 신체적 꿈 자극은 어느 것이든 그런 해석 시도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엄청나게 많은 서로 다른 표상을 통해 꿈 내용 속에서 표현될 수 있다. 그런데 슈트륌펠과 분트의 이론은 외적 자극과 그것을 해석하려고 선택된 꿈 표상 사이의 관계를 좌우하는 동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며, 그러니 자극이 「재생 활동을 하는 가운데 꽤 자주 하는」 「기묘한 선택」도 설명하지 못한다(립스, 『정신생활의 근본 사실(Grundtatsachen des Seelenlebens)』, 170쪽). 착각 이론 전체의 근본 가정, 곧 잠자는 동안 정신은 객관적 감각 자극의 참된 성질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라는 가정에 대해서도 다른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옛 생리학자 부르다흐[8]는 정신이 잠자는 동안에도 자기에게 닿는 감각 인상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그 올바른 해석에 따라 반응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보인다. 그 근거로 그는,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인상은 잠자는 동안의 무관심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것(유모와 아이), 그리고 하찮은 청각 인상보다는 제 이름에 더 확실하게 깨어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정신이 잠자는 동안에도 감각을 구별한다는 것을 전제한다(1장 (마)). 부르다흐는 이 관찰에서, 잠든 상태에서 가정해야 할 것은 감각 자극을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각 자극에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추론한다. 부르다흐가 1830년에 쓴 바로 그 논거가 나중에 1883년 립스의 저작에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다시 나타나는데, 거기서는 신체적 자극 이론을 공격하는 데 쓰인다. 이에 따르면 정신은 일화 속의 잠자는 사람과 비슷해 보인다. 그는 「자?」 하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지만, 다시 「그럼 10플로린만 빌려줘」 하는 말을 들으면 「나 자」라는 핑계 뒤로 숨는다.
신체적 꿈 자극 이론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도 보여 줄 수 있다. 관찰해 보면 외적 자극은, 내가 꿈을 꾸게 되면 그리고 꿈을 꾸는 즉시 꿈속에 나타나기는 해도, 나를 꿈꾸도록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잠자는 동안 받는 촉각 자극이나 압박 자극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로 반응할 수 있다. 그것을 그냥 넘겨 버리고 깨어난 뒤에야 다리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거나 팔이 눌려 있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도 있다. 병리학은 여러 종류의 강력한 감각 자극과 운동 자극이 잠자는 동안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는 예를 숱하게 보여 준다. 또 아픈 자극일 때 대개 그렇듯이, 잠자는 동안 말하자면 잠을 뚫고 감각을 지각하면서도 그 통증을 꿈의 짜임 속에 엮어 넣지 않을 수 있다. 셋째로, 자극을 없애려고 그 자극 때문에 깨어날 수도 있다. 네 번째로 가능한 반응으로서야 비로소 나는 신경 자극에 떠밀려 꿈을 꿀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들도 꿈 형성의 가능성 못지않게 자주 실현된다. 꿈을 꾸는 동기가 꿈의 신체적 원천 바깥에 있지 않다면 이럴 수는 없을 것이다.
방금 드러난, 신체적 자극으로 꿈을 설명하는 방식의 결함을 제대로 감안하여, 다른 저자들, 곧 셰르너[58]와 그에게 가세한 철학자 폴켈트[72]는 신체적 자극에서 다채로운 꿈 이미지가 생겨나게 하는 심리 활동을 좀 더 정확히 규정하려 했고, 그리하여 꿈의 본질을 다시 정신의 영역, 곧 심리 활동의 영역으로 옮겨 놓았다. 셰르너는 꿈 형성 과정에서 펼쳐지는 심리적 특성을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음미하며 열정적이고 생생하게 그려 냈을 뿐 아니라, 정신이 제 손에 들어온 자극을 다루는 원리를 알아맞혔다고도 생각했다. 셰르너에 따르면 꿈 활동은, 낮 동안 채워져 있던 족쇄에서 상상력이 풀려나 고삐가 늦추어지고 나면, 자극을 내보내는 기관의 성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애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꿈을 해석하는 길잡이로 일종의 해몽서를 얻게 되고, 이것으로 꿈 이미지에서 신체 감각과 기관의 상태와 자극의 상태를 추론해 낼 수 있다. 「그래서 고양이의 형상은 화나고 불만스러운 기분을, 매끄러운 밝은색 과자 한 조각의 형상은 벌거벗은 몸을 나타낸다. 꿈의 상상력은 인간의 몸 전체를 집으로, 몸의 개별 기관 하나하나를 집의 한 부분으로 그린다. 『치통 꿈』에서는 높다란 둥근 천장의 현관이 입에, 계단이 목구멍에서 소화관으로 내려가는 길에 대응한다. 『두통 꿈』에서는 파충류 같은 징그러운 거미로 뒤덮인 방의 천장이 머리 윗부분을 가리키도록 선택된다」(폴켈트, 39쪽). 「꿈은 같은 기관에 여러 가지 다른 상징을 쓴다. 그래서 숨 쉬는 허파는 불길로 가득 차 바람이 윙윙거리는 화덕에서, 심장은 속이 빈 궤짝과 바구니에서, 방광은 둥글거나 자루 모양인 물건이나 그 밖에 속이 빈 것이면 무엇에서든 제 상징을 찾는다. 특히 중요한 것은 꿈이 끝날 무렵 자극을 일으키는 기관이나 그 기능이 위장 없이, 그리고 대개는 꿈꾼 사람 자신의 몸에서 표현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치통 꿈』은 대개 꿈꾼 사람이 자기 입에서 이를 하나 뽑는 것으로 끝난다」(35쪽). 이 이론이 저자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 이론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내 생각에는 이 이론에도 내세울 만한 정당성이 조금은 있는데, 그것을 찾아보려는 뜻조차 없었다. 보다시피 이 이론은 고대인들이 쓰던 상징 표현에 의한 꿈 해석을 되살리는 셈이다. 다만 해석의 근거를 끌어올 원천을 인간의 몸에 한정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과학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해석 기법이 없으니 셰르너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 범위는 심하게 좁아질 수밖에 없다. 자극 하나가 꿈 내용 속에서 여러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더더욱, 꿈을 해석할 때 자의성이 끼어들 길은 조금도 막혀 있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셰르너의 동료인 폴켈트부터가 몸을 집으로 표현한다는 것만은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또 하나의 반론은, 여기서도 꿈 작업이 정신이 벌이는 쓸모없고 목적 없는 활동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문제의 이론에 따르면 정신은 자기가 다루는 자극을 두고 공상을 지어내는 것으로 만족할 뿐, 자극을 방출하는 것 같은 일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이 신체 자극을 상징화한다는 셰르너의 이론은 또 다른 반론에 큰 타격을 입는다. 이런 신체 자극은 언제나 있으며, 일반적인 가정에 따르면 정신은 깨어 있을 때보다 잠자는 동안 이 자극에 더 열려 있다. 그렇다면 정신이 왜 밤새 쉬지 않고 꿈을 꾸지 않는지, 왜 밤마다 모든 기관을 두고 꿈을 꾸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꿈 작업을 불러일으키려면 눈이나 귀나 이나 창자에서 특별한 자극이 나와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이 반론을 피하려 한다면, 이렇게 자극이 늘어난 것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에 부딪히는데, 그런 증명은 몇 안 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비행 꿈이 폐엽의 오르내림을 상징화한 것이라면, 슈트륌펠이 이미 지적했듯이 이 꿈을 훨씬 더 자주 꾸거나, 아니면 꿈을 꾸는 동안 호흡 기능이 두드러지게 강해진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경우, 그것도 무엇보다 그럴듯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디에나 늘 있는 내장 감각에 주의를 돌리게 하는 특별한 동기가 이따금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우리를 셰르너 이론의 범위 밖으로 데려간다.
셰르너와 폴켈트의 논의가 지닌 가치는, 설명이 필요하고 새로운 앎을 약속하는 듯한 꿈 내용의 여러 특징에 주의를 돌리게 한다는 데 있다. 꿈에 신체 기관과 그 기능의 상징화가 들어 있고, 꿈속의 물이 흔히 소변이 마렵다는 뜻이며, 남성 성기가 곧추선 막대기나 기둥 따위로 표현되는 일이 많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다른 꿈들의 흐릿함과 달리 시야가 몹시 생동하고 색채가 찬란한 꿈을 「시각 자극 꿈」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리치기 어렵다. 시끄러운 소리와 뒤엉킨 목소리가 담긴 꿈에서 착각 형성물이 한몫한다는 것을 반박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셰르너가 전하는 꿈, 곧 금발의 잘생긴 소년들이 다리 위에서 두 줄로 마주 서서 서로 덤벼들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꿈꾼 사람 자신이 다리 위에 앉아 턱에서 긴 이를 하나 뽑는 꿈, 또는 서랍 두 줄이 한몫을 하고 역시 이를 뽑는 것으로 끝나는 폴켈트의 비슷한 꿈처럼, 저자들이 무척 많이 전하는 이런 종류의 꿈 형성물을 보면 셰르너의 이론을 그 안에 든 진리의 알맹이를 찾아보지도 않은 채 쓸데없는 날조로 내버릴 수는 없다. 이제 우리 앞에는 치아 자극의 상징화로 여겨지는 것에 다른 종류의 설명을 붙여 주는 과제가 놓여 있다.
꿈의 신체적 원천에 관한 이론을 검토하는 내내, 나는 우리의 꿈 분석에서 끌어낼 수 있는 논거를 내세우지 않았다. 다른 저자들이 꿈을 연구하면서 쓰지 않은 방법으로, 꿈이 심리적 행위로서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소원이 꿈 형성의 동기를 제공하며, 전날의 체험이 꿈 내용의 가장 가까운 재료를 대 준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우리가 성공했다면, 이토록 중요한 연구 방법을 소홀히 하여 꿈을 신체 자극에 대한 쓸모없고 미심쩍은 심리적 반응으로 보이게 만드는 다른 꿈 이론은 따로 논평할 것도 없이 물리쳐도 된다. 그렇지 않다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지만, 전혀 다른 두 종류의 꿈이 있어서 한쪽은 우리 눈에만 띄었고 다른 쪽은 예전의 꿈 감식가들 눈에만 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제 남은 일은, 널리 통용되는 신체적 꿈 자극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쓰이는 사실들에 우리 자신의 꿈 이론 안에서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꿈 작업은 동시에 주어진 모든 꿈 자극을 하나의 통일된 전체로 가공할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세우면서, 우리는 이미 이 방향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이 장 (가)). 우리가 본 대로, 인상을 남길 만한 체험이 전날에서 둘 이상 남아 있으면 거기서 생기는 소원들은 한 꿈으로 합쳐진다. 마찬가지로 심리적 가치를 지닌 인상과 전날의 사소한 체험도, 둘을 이어 줄 표상만 있으면 꿈 재료 속에서 합쳐진다. 그러니 꿈은 잠든 정신 속에 현재적인 것으로 동시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꿈 재료를 분석한 바로는, 꿈 재료는 심리적 잔재와 기억 흔적의 모음이었고, 우리는 (최근의 재료와 유년기의 재료가 편애되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현재성이라는 성격을 인정해야 했다. 다만 그 현재성의 성질은 당시로서는 규정할 수 없었다. 이제 이런 현재적인 기억들에 감각이라는 형태의 새 재료가 보태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자극들 역시 현재적이기 때문에 꿈에 중요해지며, 다른 현재적인 심리 요소들과 합쳐져 꿈 형성의 재료를 이룬다. 달리 말하면, 잠자는 동안 나타나는 자극은 가공되어 소원 성취 속으로 들어가고, 그 소원 성취를 이루는 다른 구성 요소는 우리가 익히 아는 낮의 잔재다. 그러나 이렇게 합쳐지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잠자는 동안 신체 자극에 대해 한 가지가 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들었다. 이렇게 합쳐진 곳이라면 어디서든, 신체적 원천과 심리적 원천이라는 두 부류의 꿈 원천을 모두 표현해 줄 표상 재료를 꿈 내용을 위해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일 뿐이다.
꿈의 심리적 원천에 신체적 재료가 이렇게 더해진다고 해서 꿈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현재적인 재료가 꿈이 드러나는 모습을 어떻게 결정하든 상관없이, 꿈은 여전히 소원 성취다.
외적 자극이 꿈에 대해 지니는 의의를 달리 보이게 하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을 나는 기꺼이 여기서 다루겠다. 내 생각에, 잠자는 동안 강한 객관적 자극을 받는 개개의 경우에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조건 지어지는 개인적·생리적·우연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서 결정된다. 습관적인 것이든 우연한 것이든 잠의 깊이가 자극의 세기와 어우러져, 어떤 경우에는 자극을 억제하여 잠을 방해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깨어날 수밖에 없게 만들거나, 자극을 꿈의 짜임 속에 엮어 넣어 이겨 내려는 시도를 도울 것이다. 이런 조합이 여러 가지인 만큼, 외적인 객관적 자극은 사람에 따라 더 자주 표현되기도 하고 덜 자주 표현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잠을 아주 잘 자는 사람이고 잠을 방해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완강히 버티기 때문에, 외적인 자극 원인이 내 꿈에 섞여 드는 일은 무척 드물다. 반면 심리적 동기는 나를 무척 쉽게 꿈꾸게 하는 듯하다. 실제로 나는 통증을 주는 객관적 자극원을 증명할 수 있는 꿈을 단 하나만 적어 두었는데, 바로 이 꿈에서 외적 자극이 어떤 효과를 냈는지 살펴보면 배울 것이 무척 많을 것이다.
나는 회색 말을 타고 있는데, 처음에는 무언가에 그저 기대어 있을 뿐인 것처럼 머뭇머뭇 서툴게 탄다. 말에 올라탄 동료 P.를 만나는데, 그는 두꺼운 모직 양복을 입고 있다. 그가 무언가에 내 주의를 돌린다(아마 내 승마 자세가 나쁘다는 것이리라). 이제 나는 무척 영리한 그 말 위에서 점점 능숙해진다. 편안히 앉아 있고, 벌써 안장 위가 아주 제집 같다는 것을 알아챈다. 안장 대신 나는 일종의 깔개를 깔고 있는데, 그것이 말의 목과 엉덩이 사이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그렇게 나는 짐마차 두 대 사이로 힘겹게 말을 몰아 간다. 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간 뒤 나는 방향을 돌려 말에서 내리려 하는데, 처음에는 길가에 바싹 붙어 있는, 문이 열린 작은 예배당 앞에서 내리려 한다. 그러다 실제로는 그 첫 예배당 가까이에 서 있는 다른 예배당 앞에서 내린다. 호텔은 같은 거리에 있어서 말을 혼자 그리로 가게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차라리 말을 끌고 간다. 말을 탄 채 그곳에 도착하면 부끄러울 것만 같다. 호텔 앞에는 급사 하나가 서 있는데, 그는 누가 주운 내 쪽지를 내게 보여 주며 그것을 두고 나를 놀린다. 쪽지에는 밑줄이 두 번 그어진 「아무것도 먹지 말 것」이라는 말이 적혀 있고, 그다음에 (흐릿한) 둘째 문장이 「일하지 말 것」 비슷하게 적혀 있다. 동시에, 내가 어느 낯선 도시에 있고 거기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흐릿한 생각.
이 꿈이 통증 자극의 영향을 받아, 아니 오히려 그 강요를 받아 생겨났다는 것은 한눈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전날 나는 종기에 시달렸다. 종기 때문에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문을 받는 것 같았고, 마침내 음낭 밑동에 난 종기 하나가 사과만 하게 부풀어 올라 걸음을 뗄 때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을 안겨 주었다. 열이 나서 몸이 나른하고 입맛이 없는 데다, 그런데도 낮 동안 억지로 해낸 고된 일까지 통증과 한데 어울려 내 기분을 망쳐 놓았다. 나는 의사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해낼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병의 성질과 자리로 보아, 차라리 말 타기가 아닌 다른 일을 예상했을 법하다. 말 타기에는 내가 유난히 맞지 않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꿈이 나를 밀어 넣은 것이 바로 이 말 타기라는 활동이다.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호한 고통의 부정이다. 우선 나는 말을 탈 줄 모르고, 말 타는 꿈도 여느 때에는 꾸지 않으며, 말 등에 앉아 본 것은 딱 한 번, 그것도 안장 없이 앉았는데 그때도 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꿈에서 나는 회음부에 종기가 없다는 듯이 말을 탄다. 왜 그런가? 바로 종기 따위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묘사로 보면 내 안장은 나를 잠들 수 있게 해 준 찜질약이다. 이렇게 보살핌을 받은 덕에 잠든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아마 통증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통증 감각이 기척을 내며 나를 깨우려 하자, 꿈이 찾아와 달래듯 말했다. 「계속 자. 어차피 깨지 않을 테니까! 너한테는 종기 같은 건 아예 없어. 말을 타고 있잖아. 그런 자리에 종기가 났다면 말은 못 타!」 그리고 꿈은 성공했다. 통증은 숨죽었고, 나는 계속 잤다.
그러나 꿈은 병의 표상과 양립할 수 없는 표상에 끈질기게 매달려 종기를 「암시로 없애 버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서 꿈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환각성 광기처럼, 또는 손실로 재산을 날린 상인처럼 행동했다.1 꿈은 여기에 더해, 부정된 감각과 그 감각을 밀어내는 데 쓰인 이미지의 세부를 수단으로 삼아, 평소 정신 속에 현재적으로 있는 재료를 꿈 상황과 잇고 그 재료를 표현해 낸다. 나는 회색 말을 타고 있다 ― 말의 빛깔은 내가 시골에서 동료 P.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후추와 소금〔희끗희끗한 잿빛〕 옷차림과 꼭 맞아떨어진다. 양념이 센 음식이 종기증의 원인이라는 경고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어쨌든 병인론적 설명으로는 흔히 종기증을 떠올리게 하는 설탕보다 그편이 낫다. 내 친구 P.는 어느 여성 환자의 치료를 나 대신 맡은 뒤로 나를 상대로 즐겨 「높은 말을 탔다」〔거만하게 굴었다〕. 나는 그 환자를 데리고 대단한 묘기를 부렸지만(꿈에서 나는 처음에 곡마단 기수처럼 옆으로 걸터앉아 말을 탄다), 실은 그녀가 일요일에나 말을 타는 사람에 관한 일화 속의 말처럼 나를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끌고 다녔다. 그리하여 말은 한 부인 환자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되었다(꿈속에서 말은 무척 영리하다). 「여기 위는 아주 제집 같다」는 것은, 동료 P.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전까지 내가 그 환자의 집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를 가리킨다. 「안장에 단단히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요.」 이 도시의 대가급 의사들 가운데 나를 좋게 봐 주는 몇 안 되는 사람 하나가 얼마 전 바로 그 집안 일을 두고 내게 한 말이다. 그런 통증을 안고 하루 열 시간씩 정신 요법을 한 것도 묘기였다. 그러나 몸이 완전히 건강하지 않으면 유난히 힘든 내 일을 오래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꿈은 그럴 경우에 닥칠 수밖에 없는 처지를 가리키는 음울한 암시로 가득하다(신경쇠약 환자들이 가지고 다니다가 의사에게 내미는 그런 쪽지). 일도 없고 먹을 것도 없다. 더 해석해 보면, 꿈 작업이 말을 탄다는 소원 상황에서 아주 이른 유년기의 다툼 장면들로 가는 길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보인다. 그 다툼은 지금 영국에 살고 있고 더구나 나보다 한 살 위인 내 조카와 나 사이에 벌어졌을 것이 틀림없다. 그 밖에도 꿈 작업은 내 이탈리아 여행에서 요소들을 끌어들였다. 꿈속의 거리는 베로나와 시에나의 인상으로 합성되어 있다. 더 철저히 해석하면 성적인 꿈 사고에 이르게 되는데, 나는 이탈리아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한 여성 환자에게 저 아름다운 나라를 넌지시 가리키는 꿈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떠올린다(이탈리아 ― 독일어 gen Italien〔이탈리아로〕 ― Genitalien ― 생식기). 동시에 내 친구 P.보다 앞서 내가 의사로 드나들던 그 집과, 종기가 난 자리에 대한 언급도 들어 있다.
3장에서 든 꿈들 가운데에는 이른바 신경 자극의 가공을 보여 주는 예로 쓸 만한 것이 여럿 있다. 한껏 들이켜는 꿈이 그런 것이다. 이 꿈에서는 신체적 흥분이 꿈의 유일한 원천이고, 감각, 곧 갈증에서 생기는 소원이 꿈을 꾸는 유일한 동기인 듯하다. 신체적 흥분만으로 소원이 만들어질 수 있다면, 다른 단순한 꿈들에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밤에 뺨에서 냉각기를 벗어 던지는 아픈 여자의 꿈은, 통증을 주는 흥분에 소원 성취로 반응하는 특이한 방식을 보여 주는 한 예다. 환자는 자기 통증을 낯선 사람에게 떠넘김으로써 잠시나마 스스로를 통증을 못 느끼는 상태로 만드는 데 성공한 듯하다.
나의 세 파르카이 꿈은 분명 배고픔 꿈이지만, 음식에 대한 욕구를 어머니의 젖가슴을 향한 아이의 그리움으로 되돌리고, 그 해롭지 않은 욕망을 그렇게 드러내 놓고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 더 심각한 욕망의 겉옷으로 삼을 방도를 찾아냈다. 툰 백작 꿈에서 우리는 우연한 신체적 욕구가 정신생활에서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강하게 억제된 충동과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았다. 또 가르니에가 전하는 사례에서처럼 제1통령이 터지는 폭탄 소리를, 그 소리에 깨기 전에 전투 꿈 속에 끼워 넣을 때, 잠자는 동안 일어나는 감각에 심리 활동이 대체로 무엇을 위해 관여하는지가 유난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처음 맡은 큰 파산 사건에 깊이 매달려 있다가 그 뒤 어느 오후에 잠이 든 젊은 변호사도 위대한 나폴레옹과 똑같이 행동한다. 그는 파산 사건 때문에 알게 된 후샤틴(Hussiatyn ― 독일어 husten은 「기침하다」)의 G. 라이히라는 사람의 꿈을 꾸는데, 후샤틴이 자꾸만 더 그의 주의를 파고드는 바람에 결국 깨어나고, 기관지 카타르를 앓고 있는 아내가 심하게 기침하는 소리를 듣는다.
마침 잠을 아주 잘 자는 사람이기도 했던 나폴레옹 1세의 꿈을 졸린 의대생의 꿈과 견주어 보자. 이 학생은 하숙집 안주인이 병원에 가야 한다고 타이르며 깨우자, 곧 꿈으로 자신을 병원 침대에 눕혀 놓고는 다음과 같이 제 동기를 밝히며 계속 잔다. 내가 이미 병원 안에 있으면 거기 가려고 일어날 필요가 없겠지. 뒤의 꿈은 분명 편의 꿈이다. 잠자는 사람은 자기가 꿈을 꾸는 동기를 스스로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꿈꾸기 일반의 비밀 하나를 드러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꿈은 편의 꿈이다. 꿈은 깨어나는 대신 잠을 이어 가는 데 이바지한다. 꿈은 수면의 파수꾼이지 수면의 방해꾼이 아니다. 이 견해가 깨어남의 심리적 요인에 대해서도 옳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 밝히겠다. 그러나 객관적인 외적 흥분이 미치는 영향에 이 견해가 들어맞는다는 것은 여기서 벌써 증명할 수 있다. 정신은 감각이 강하고 또 정신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의미를 지녔는데도 그럴 수만 있다면 감각의 원인에 아예 관여하지 않는다. 아니면 꿈을 써서 이 자극을 부정한다. 아니면 셋째로, 자극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현재의 감각을 바라는 상황, 잠과 양립할 수 있는 상황의 한 구성 요소로 나타내 줄 자극 해석을 찾으려 한다. 현재의 감각은 그 현실성을 빼앗기 위해 꿈속에 엮여 들어간다. 나폴레옹은 계속 자도 된다. 그를 방해하려는 것은 아르콜레의 포성에 대한 꿈속의 회상일 뿐이다.2
의식적 자아를 멈추어 세우고 꿈 검열과 더불어 꿈에 제 몫을 보태는 수면 소원은, 그러므로 언제나 꿈 형성의 동기로 고려해야 하며, 성공한 꿈은 모두 이 소원의 성취다. 보편적이고 늘 있으며 변하지 않는 이 수면 소원이, 때로는 이것이 때로는 저것이 성취되는 다른 소원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나중에 따로 설명하겠다. 우리는 수면 소원에서, 슈트륌펠과 분트의 이론에 모자란 점을 채우고 외부 자극을 해석할 때 드러나는 엉뚱함과 변덕을 설명해 줄 요인을 찾아냈다. 잠든 정신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올바른 해석은 적극적인 관심을 뜻할 것이고, 잠을 끝내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해석 가운데에서도 신체적 소원의 절대적인 검열에 들어맞는 것만이 허용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건 나이팅게일이지 종달새가 아니야. 종달새라면 사랑의 밤은 끝이니까. 그 순간 가능한 흥분의 해석들 가운데에서, 정신 속에 도사리고 있는 소원의 가능성들과 가장 잘 이어질 수 있는 해석이 선택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확실하게 결정되어 있고, 변덕에 맡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못된 해석은 착각이 아니라, 굳이 말하자면 핑계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꿈 검열을 위해 전치를 통한 대체가 이루어지는 경우처럼, 정상적인 심리적 절차를 변형한 작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외부 신경 자극과 내부 신체 자극이 심리적 주의를 끌어당길 만큼 강하면, 그 자극은, 곧 그것이 깨어남이 아니라 꿈을 낳는 경우라면, 꿈 형성에서 하나의 고정점, 꿈 재료 속의 핵을 이룬다. 그리고 두 꿈 자극 사이에서 둘을 이어 줄 표상을 찾을 때와 비슷한 방식으로(앞을 보라) 이 핵에 알맞은 소원 성취를 찾게 된다. 그런 한에서는 여러 꿈에 대해, 신체적인 것이 그 꿈의 내용을 결정한다는 말이 옳다. 이 극단적인 경우에는 꼭 현재적이지는 않은 소원이 꿈 형성을 위해 일깨워진다. 그러나 꿈은 소원을 어떤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하는 일밖에 할 수 없다. 꿈은 말하자면, 지금 현재적인 상황을 수단으로 어떤 소원을 표현하고 성취할 수 있을지 찾아야 하는 과제 앞에 놓인다. 이 현재적인 재료가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성격의 것이라 해도 꿈 형성에 쓸모가 없지는 않다. 정신생활은 그 성취가 불쾌를 불러일으키는 소원까지도 거느리고 있다.3 이 말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두 심리적 심급과 그 사이에 있는 검열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우리가 들은 대로 정신생활에는 첫째 체계에 속하고 둘째 체계가 그 성취에 맞서는 억압된 소원이 있다. 이런 소원이 있다는 것은, 그런 소원이 예전에 있었다가 그 뒤에 없어졌다는 역사적인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정신신경증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억압 이론이 주장하는 것은, 그런 억압된 소원이 그것을 내리누르는 제지와 동시에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충동을 두고 「억제」라고 말할 때 언어는 진실을 알아맞힌 것이다. 그런 소원을 실현하는 심리 장치는 보존된 채 언제든 쓸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억제된 소원이 성취되는 일이 생기면, 둘째 체계(의식될 수 있는 체계)의 제지가 꺾였다는 것이 불쾌한 느낌으로 표현된다. 이 논의를 맺자면, 잠자는 동안 신체적 원천에서 나온 불쾌한 성격의 감각이 주어지면, 꿈 작업은 이 배치를 이용해 평소에는 억제되어 있는 소원의 성취를, 검열을 얼마간 유지한 채 표현한다.
이런 사정 때문에 여러 불안 꿈이 생길 수 있는 한편, 소원 이론에 불리한 꿈 형성물의 또 다른 계열은 다른 기제를 보여 준다. 꿈속의 불안은 정신신경증적 성질의 것일 수도 있고, 정신성적 흥분에서 비롯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뒤의 경우 불안은 억압된 리비도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 불안은 불안 꿈 전체와 마찬가지로 신경증 증상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우리는 꿈의 소원 성취 경향이 사라지는 경계선에 서게 된다. 그러나 다른 불안 꿈에서는 불안의 느낌이 신체적 원천에서 오고(예컨대 폐나 심장에 병이 있어 이따금 숨쉬기가 어려운 사람의 경우), 그러면 이 불안은 강력하게 억제된 소원이 꿈의 형태로 성취되도록 돕는 데 쓰인다. 그런 소원을 심리적 동기에서 꿈꾸었더라도 똑같이 불안이 풀려났을 것이다. 겉보기에 어긋나는 이 두 경우를 하나로 묶기는 어렵지 않다. 서로 긴밀하게 이어진 두 심리적 형성물, 곧 정동의 경향과 표상 내용 가운데 현재적으로 주어진 쪽이 꿈속에서 다른 쪽을 뒷받침한다. 때로는 신체에서 비롯된 불안이 억제된 표상 내용을 뒷받침하고, 때로는 억제에서 풀려나 성적 정동이 주는 추진력으로 나아가는 표상 내용이 불안의 방출을 돕는다. 앞의 경우에 대해서는 신체에서 비롯된 정동이 심리적으로 해석된다고 말할 수 있다. 뒤의 경우에는 모든 것이 심리적 기원을 지니지만, 억제되어 있던 내용이 불안에 들어맞는 신체적 해석으로 쉽게 대체된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길을 가로막는 어려움은 꿈과는 별 관계가 없다. 그 어려움은 이 점들을 논하다 보면 불안의 발생과 억압이라는 문제에 닿게 된다는 데서 생긴다.
몸에서 오는 느낌 전체는 틀림없이 내부에서 생기는 강력한 꿈 자극에 넣어야 한다. 그것이 꿈 내용을 대 줄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꿈 사고가 꿈 내용 속에서 표현에 쓰일 재료 가운데서 선택을 하도록 강요한다. 재료 가운데 제 성격에 맞는 부분은 손 닿기 쉬운 곳에 가져다 놓고 나머지는 내주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한다. 게다가 낮에서 넘어온 이 전신 감각은 아마 꿈에 중요한 심리적 잔재와 이어져 있을 것이다.
잠자는 동안 생기는 신체적 흥분원, 곧 수면 중의 감각이 유별나게 강하지 않다면, 내 판단으로는 그것이 꿈 형성에서 하는 역할은 최근의 것으로 남아 있지만 사소한 낮의 인상이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심리적 꿈 원천의 표상 내용과 합쳐질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만 꿈 형성에 끌려 들어가고, 그 밖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값진 재료처럼 어떻게 쓰일지를 스스로 정해 주는 대신, 필요할 때마다 얼마든지 쓰이는 값싸고 언제나 준비된 재료로 다루어진다. 예술 애호가가 예술가에게 희귀한 돌, 이를테면 오닉스 한 조각을 가져와 그것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돌의 크기와 색깔과 무늬가 거기에 어떤 흉상이나 어떤 장면을 표현할지 정하는 데 한몫한다. 반면 대리석이나 사암이 고르게 넉넉히 공급되는 경우라면 예술가는 제 마음속에서 모양을 갖추어 가는 착상만을 따른다. 내가 보기에는 이렇게 해야만, 유별나게 강조되지 않은 신체적 흥분에서 비롯되는 꿈 내용이 모든 꿈에, 그리고 밤마다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설명된다.
우리를 꿈 해석으로 되돌려 놓는 예 하나가 아마 내 뜻을 가장 잘 보여 줄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그토록 자주 꿈에 나오고 불안과 그토록 가까운 감각들, 곧 가로막히는 감각,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감각, 일을 끝내지 못하는 감각 따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나는 옷을 아주 제대로 입지 못한 채로 1층 거처에서 계단을 올라 위층으로 간다. 그러면서 층계를 한 번에 세 칸씩 뛰어넘고, 층계를 이렇게 빨리 오를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갑자기 하녀 하나가 계단을 내려오는 것이, 곧 내 쪽으로 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부끄러워 서둘러 달아나려 하는데, 이제 그 가로막히는 감각이 나타난다. 나는 층계에 달라붙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
분석: 꿈의 상황은 일상의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빈의 한 집에 나는 거처가 둘 있는데, 두 거처는 바깥 계단으로만 이어져 있다. 진료실과 서재는 조금 높여 지은 1층에 있고, 한 층 위에 살림방이 있다. 밤늦게 아래층에서 일을 마치면 나는 층계를 올라 침실로 간다. 꿈을 꾸기 전날 저녁 나는 실제로 조금 흐트러진 차림으로 이 짧은 길을 갔다. 곧 칼라와 넥타이와 커프스를 떼어 낸 채였다. 그러나 꿈에서는 이것이 좀 더 심하게 옷을 벗은 상태로 바뀌었는데, 그 정도는 여느 때처럼 분명하지 않다. 층계를 뛰어넘는 것은 내가 계단을 오르는 평소 방식이다. 게다가 이것은 꿈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소원 성취이기도 하다. 이 일을 거뜬히 해내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심장 활동이 괜찮다고 안심하곤 했기 때문이다. 또 내가 계단을 오르는 방식은 꿈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가로막히는 감각과 효과적인 대조를 이룬다. 증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꿈이 운동 행위를 완전하고 온전하게 수행되는 것으로 표현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내게 보여 준다. 꿈속의 비행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내가 올라가는 계단은 우리 집 계단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 계단을 알아보지 못한다.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비로소 그 계단이 가리키려는 곳을 알려 준다. 이 여자는 내가 피하 주사를 놓으러 하루 두 번 찾아가는 노부인의 하녀이며, 계단도 내가 그 집에서 하루 두 번 올라야 하는 계단과 아주 비슷하다.
이 계단과 이 여자는 어떻게 내 꿈에 들어왔을까? 옷을 다 입지 않아 부끄러워하는 것은 틀림없이 성적인 성격을 띤다. 그런데 내가 꿈에서 본 하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퉁명스러우며 조금도 매력이 없다. 이 물음들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일들을 불러낸다. 아침에 이 집을 왕진할 때면 나는 대개 목에 걸린 것을 뱉고 싶어지고, 그러면 뱉은 가래가 층계에 떨어진다. 두 층 어디에도 타구가 없기 때문인데, 계단의 청결은 내가 떠맡을 일이 아니라 타구를 갖다 두어 해결할 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정부는 역시 나이 지긋하고 퉁명스러운 사람으로 깔끔함에 대한 본능이 있는데, 이 문제를 달리 본다. 그녀는 내가 앞서 말한 제멋대로의 짓을 하는지 보려고 나를 노리고 기다리며, 그것을 확인하고 나면 그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내게 똑똑히 들린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 마주쳐도 늘 하던 인사를 하려 들지 않는다. 꿈을 꾸기 전날에는 하녀가 가정부의 입지를 거들어 주었다. 여느 때처럼 서둘러 환자를 보고 막 나오는데, 하녀가 곁방에서 나를 막아서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방에 들어오시기 전에 신발 좀 닦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붉은 양탄자가 선생님 발 때문에 또 온통 더러워졌어요.」 계단과 하녀가 내 꿈에 나타날 권리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내가 계단을 날아오르는 것과 계단에 침을 뱉는 것 사이에는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인두염과 심장병은 둘 다 흡연이라는 악덕에 대한 벌이라고들 한다. 물론 이 악덕 때문에 나는 이 집에서나 저 집에서나 가정부에게 그리 깔끔하다는 평판을 듣지 못하는데, 꿈은 이 두 집을 하나의 영상으로 녹여 합친다.
이 꿈을 더 해석하는 일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전형적인 꿈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미루어야겠다. 방금 인용한 꿈에서 잠정적인 결과로 적어 둘 것은 하나뿐이다. 행동이 제지되는 꿈 감각은 언제나 어떤 연관이 그것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일깨워진다는 것이다. 잠자는 동안 내 운동성의 어떤 특별한 상태가 이 꿈 내용의 원인일 수는 없다. 바로 한순간 전에 나는, 마치 이 사실을 확인해 주기라도 하듯, 층계를 가볍게 서둘러 오르는 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
1. 그리징어[31]의 해당 대목과 「방어 신경정신증」에 관한 나의 두 번째 논문에서 한 언급을 참조하라 ― 『히스테리 논문 선집』, A. A. 브릴 옮김.
2. 내가 이 꿈을 알게 된 두 출처는 꿈 내용에 대한 보고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3. 영역본은 「wishes the fulfilment of which brings forth pleasure」(성취가 쾌를 불러일으키는 소원)라 했으나, 바로 뒤에서 이 말이 「모순처럼 들린다」고 하고 다음 문단도 억제된 소원의 성취가 불쾌한 느낌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한다(7장 (마)의 같은 논지 참조). 뜻이 뒤집힌 곳으로 보아 「불쾌」로 옮겼다.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