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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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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권

1 그다음 우리는 아이올리아섬에 이르렀습니다. 불사의 신들이 아끼는 히포테스의 아들 아이올로스가 사는 곳으로, 바다 위를 떠다니는 섬이었는데, 섬 둘레는 깨뜨릴 수 없는 청동 성벽이 온통 감싸고 매끄러운 바위 절벽이 솟아 있었습니다. 그의 홀에는 자식이 열둘 있었는데, 딸이 여섯, 한창때의 아들이 여섯이었습니다. 그는 딸들을 아들들에게 아내로 주었습니다. 그들은 늘 사랑하는 아버지와 믿음직한 어머니 곁에서 잔치를 벌였고, 곁에는 먹을 것이 셀 수 없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낮이면 고기 굽는 냄새가 밴 집 안이 안뜰까지 떠들썩하게 울렸고, 밤이면 그들은 저마다 존귀한 아내 곁에서 담요를 덮고 구멍 뚫어 짠 침대에서 잤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도시와 아름다운 집에 이르렀습니다. 아이올로스는 한 달 내내 나를 정답게 대하며 일리오스와 아르고스인의 배와 아카이아인의 귀향을 하나하나 물었고, 나는 그에게 모든 것을 차례대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윽고 나도 길을 떠나게 해 달라고, 바래다 달라고 청하자 그는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바래다줄 채비를 해 주었습니다. 크로노스의 아들이 그를 바람지기로 삼아 마음대로 바람을 잠재우기도 일으키기도 하게 해 두었으니, 그는 아홉 살배기 소의 가죽을 벗겨 부대를 만들고 그 안에 울부짖는 바람들의 길을 묶어 가두었습니다. 그는 번쩍이는 은 끈으로 그 부대를 우묵한 배에 묶어 바람이 조금도 새어 나오지 못하게 하고, 나를 위해 서풍의 입김을 내보내 배들과 우리를 실어 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우리가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28 우리는 아흐레 동안 밤낮없이 배를 몰았고, 열흘째 되는 날 마침내 고향 땅이 눈앞에 나타났고, 가까이 다가가자 불을 지피는 사람들까지 보였습니다. 고향 땅에 더 빨리 닿으려고 나는 줄곧 돛 아랫줄을 손수 다루며 전우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았던 터라, 지친 나에게 그때 달콤한 잠이 찾아왔습니다. 전우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내가 기개 높은 히포테스의 아들 아이올로스에게서 금과 은을 선물로 받아 집으로 가져간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는 옆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38 "허, 이 사람은 어느 사람들의 도시와 땅에 가든 모두에게 사랑받고 대접받는구먼. 트로이에서 빼앗은 아름다운 보물도 잔뜩 싣고 가는데, 똑같은 길을 다 마치고도 우리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니 말일세. 이번에도 아이올로스가 정을 담아 이것을 선물로 주었네. 자, 어서 이게 무엇인지, 부대 안에 금과 은이 얼마나 들었는지 보세."

46 전우들이 이렇게 말하자 못된 생각이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부대를 풀자 바람이란 바람이 모두 튀어나왔고, 폭풍이 곧바로 그들을 낚아채 울부짖는 그들을 고향 땅에서 먼바다로 휩쓸어 갔습니다. 잠에서 깬 나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죽어 버릴까, 아니면 말없이 견디며 산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을까, 나무랄 데 없는 마음속으로 곰곰이 따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견디고 남았습니다. 나는 얼굴을 감싼 채 배 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배들은 사나운 폭풍에 실려 다시 아이올리아섬으로 떠밀려 갔고, 전우들은 신음했습니다.

56 우리는 뭍에 내려 물을 길었고, 전우들은 날랜 배들 곁에서 곧 저녁을 먹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맛보고 나자, 나는 전령 하나와 전우 하나를 데리고 아이올로스의 이름난 집으로 갔습니다. 가 보니 그는 아내와 자식들 곁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가 문설주 곁 문지방 위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놀라며 물었습니다.

64 "오디세우스, 어찌하여 다시 왔소? 어떤 못된 신이 당신을 덮쳤소? 우리는 당신이 고향과 집에, 어디든 당신이 바라는 곳에 닿도록 정성껏 보내 주지 않았소?"

67 그들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가슴이 쓰라린 채 그들 가운데서 말했습니다. "못된 전우들과 그 모진 잠이 나를 미혹에 빠뜨렸소. 벗들이여, 부디 바로잡아 주시오. 여러분에게는 그럴 힘이 있지 않소."

70 나는 이렇게 부드러운 말로 그들에게 매달렸지만, 그들은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72 "어서 이 섬에서 꺼져라, 살아 있는 자 가운데 가장 몹쓸 놈. 복된 신들에게 미움받는 사내를 보살피거나 바래다주는 것은 내 도리가 아니다. 꺼져라. 신들에게 미움받는 몸으로 여기 왔으니."

76 이렇게 말하고 그는 무겁게 신음하는 나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비통한 가슴을 안고 더 멀리 배를 몰았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 탓에 바래다주는 바람은 더는 나타나지 않았고, 고된 노질에 사내들의 마음이 지쳐 갔습니다. 우리는 엿새 동안 밤낮없이 배를 몰았고, 이레째 되는 날 라모스의 가파른 도시,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의 텔레필로스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는 양 떼를 몰고 들어오는 목자가 다른 목자를 부르면, 몰고 나가는 목자가 대답했습니다. 잠을 자지 않는 사내라면 그곳에서 소를 치고 또 은빛 양 떼를 쳐서 품삯을 두 몫이나 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밤의 길과 낮의 길이 서로 가까운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름난 포구에 들어갔습니다. 포구 양쪽으로 가파르게 솟은 바위가 죽 둘러쳐 있었고, 입구에는 앞으로 내민 곶 두 개가 서로 마주 보고 튀어나와 있어서 들어가는 길이 좁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양 끝이 휜 배들을 그 안으로 몰고 들어가, 우묵한 포구 안쪽에 서로 바짝 붙여 매어 두었습니다. 그 안에서는 크든 작든 물결이 이는 일이 없이 사방이 하얗게 잔잔했습니다. 나만 홀로 검은 배를 포구 밖 맨 끝자락에 세워 두고 바위에 밧줄을 맸습니다. 그리고 험한 바위 언덕에 올라가 망을 보았습니다. 거기서는 소가 일한 자취도 사람이 일한 자취도 보이지 않았고, 땅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우들을 보내 이 땅에서 빵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내들인지 알아 오게 했습니다. 두 사람을 뽑고 셋째로 전령을 딸려 보냈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내려, 수레들이 높은 산에서 도시로 나무를 실어 나르는 평평한 길을 따라갔습니다. 도시 앞에서 그들은 물을 길으러 나온 처녀, 라이스트리고네스족 안티파테스의 기품 있는 딸을 만났는데, 처녀는 사람들이 도시로 물을 길어 가는 샘, 맑은 물이 흐르는 아르타키아 샘으로 내려가던 길이었습니다. 전우들은 처녀 곁에 다가서서 이 사람들의 왕은 누구이며 누구를 다스리느냐고 물었고, 처녀는 곧바로 아버지의 지붕 높은 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들이 이름난 집에 들어가 보니 산꼭대기만 한 여인이 있었고, 그들은 그 여인을 보고 질겁했습니다. 여인은 곧 회의장에서 이름난 안티파테스, 제 남편을 불러왔는데, 그자는 전우들에게 비참한 파멸을 꾸몄습니다. 그는 곧바로 전우 하나를 움켜쥐어 끼니를 지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뛰쳐나와 달아나 배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도시 곳곳에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굳센 라이스트리고네스족이 여기저기서 셀 수 없이 몰려왔는데, 사람 같지 않고 거인족 같았습니다. 그들이 바위 위에서 사람이 겨우 들 만한 큰 돌을 던지자, 곧 배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죽어 가는 소리와 배들이 한꺼번에 부서지는 끔찍한 소리가 일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물고기처럼 꿰어 끔찍한 잔칫감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들이 깊은 포구 안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동안, 나는 허벅지 곁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뱃머리가 검푸른 배의 밧줄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곧 전우들을 재촉하며 재앙을 벗어나도록 노에 몸을 실으라고 일렀습니다. 그들은 죽을까 두려워 모두 힘껏 바닷물을 저어 젖혔습니다. 내 배는 다행히 머리 위로 드리운 바위들에서 벗어나 바다로 빠져나왔지만, 다른 배들은 모두 그곳에서 한꺼번에 부서졌습니다.

133 거기서 우리는 비통한 가슴을 안고 더 멀리 배를 몰았습니다. 죽음을 벗어나 기뻤지만 정다운 전우들을 잃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아이아이아섬에 이르렀습니다. 머리채 고운 키르케, 사람의 말을 하는 무서운 여신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키르케는 흉한 마음을 품은 아이에테스의 친누이로, 두 남매는 인간들에게 빛을 비추는 헬리오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어머니 페르세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말없이 배를 몰아 배 대기 좋은 포구의 뭍에 댔는데, 어떤 신이 우리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뭍에 내려 이틀 밤 이틀 낮을 누운 채 지침과 괴로움으로 속을 태웠습니다. 머리채 고운 새벽 여신이 셋째 날을 가져오자, 나는 창과 날카로운 칼을 들고 서둘러 배 곁을 떠나 둘러볼 만한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혹시 인간들이 일한 자취를 보거나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험한 바위 언덕에 올라가 망을 보니, 길 넓은 땅에서 빽빽한 덤불과 숲 사이로 키르케의 홀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불빛 어린 연기를 보자 나는 가서 알아볼까 하고 속으로도 마음으로도 곰곰이 따져 보았습니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먼저 날랜 배가 있는 바닷가로 가서 전우들에게 저녁을 먹이고 그다음에 그들을 보내 알아 오게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양 끝이 휜 배 가까이 갔을 때, 홀로 걷는 나를 어떤 신이 가엾게 여겨 뿔이 높은 큰 사슴 한 마리를 바로 내 길 위로 보내 주었습니다. 사슴은 햇볕의 기운에 지쳐 물을 마시려고 숲속 풀밭에서 강으로 내려오던 참이었습니다. 사슴이 강에서 나올 때 내가 등 한가운데 등뼈를 찌르자 청동 창이 몸을 꿰뚫고 나갔고, 사슴은 비명을 지르며 흙먼지 속에 쓰러져 목숨이 날아갔습니다. 나는 발로 딛고 서서 상처에서 청동 창을 뽑아 사슴을 땅에 뉘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덤불 가지와 버들가지를 꺾어 한 발쯤 되는 밧줄을 양쪽으로 잘 꼬아 엮은 다음, 그 무시무시한 짐승의 네 발을 한데 묶었습니다. 워낙 큰 짐승이라 한 손으로 어깨에 메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목에 둘러메고 창에 몸을 기댄 채 검은 배로 갔습니다. 나는 사슴을 배 앞에 내려놓고, 전우들 곁에 하나하나 다가서서 상냥한 말로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174 "벗들이여, 아무리 괴로워도 우리는 정해진 날이 오기 전에는 하데스의 집으로 내려가지 않을 걸세. 자, 날랜 배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는 동안 끼니를 챙기고 굶주림에 시달리지 마세."

178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곧 내 말에 따랐습니다. 그들은 거둘 것 없는 바닷가에서 얼굴의 덮개를 벗고 사슴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워낙 큰 짐승이었습니다. 실컷 눈으로 보고 나서 그들은 손을 씻고 영광스러운 잔치를 차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앉아서 한없이 많은 고기와 달콤한 술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그제야 우리는 파도치는 바닷가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의 새벽 여신이 나타나자, 나는 회의를 열어 모두에게 말했습니다.

189 "고생하는 전우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게. 벗들이여, 우리는 어디가 서쪽 어둠이고 어디가 새벽인지, 인간들에게 빛을 비추는 해가 어디서 땅 밑으로 지고 어디서 떠오르는지 알지 못하네. 자, 아직 무슨 꾀가 남아 있을지 서둘러 궁리해 보세. 나는 없다고 생각하네만. 험한 바위 언덕에 올라가 보니, 끝없는 바다가 화관처럼 둘러싼 섬이었네. 섬은 낮게 누워 있고, 한가운데에서 빽빽한 덤불과 숲 사이로 연기가 오르는 것을 이 눈으로 보았네."

198 내가 이렇게 말하자, 라이스트리고네스족 안티파테스가 저지른 짓과 사람을 잡아먹는 기개 높은 키클롭스의 폭력을 떠올린 그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굵은 눈물을 쏟으며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그러나 울며 슬퍼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203 나는 정강이받이를 잘 댄 전우들을 모두 두 무리로 나누어 세고, 양쪽에 우두머리를 하나씩 정했습니다. 한쪽은 내가 이끌고, 다른 쪽은 신을 닮은 에우릴로코스가 이끌었습니다. 우리는 청동 투구에 제비를 넣고 재빨리 흔들었고, 기개 높은 에우릴로코스의 제비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는 전우 스물두 명과 함께 울면서 길을 떠났고, 뒤에 남은 우리도 슬피 울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 안 사방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반들반들한 돌로 지은 키르케의 집을 찾아냈습니다. 그 둘레에는 산에 사는 늑대와 사자들이 있었는데, 키르케가 해로운 약을 먹여 홀려 놓은 짐승들이었는데, 짐승들은 사람들에게 덤벼들지 않고 도리어 긴 꼬리를 흔들며 둘레를 맴돌다 몸을 일으켰습니다. 개들이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 둘레를 꼬리 치며 맴돌 때가 있습니다. 주인은 늘 개들의 마음을 달래 줄 먹을 것을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꼭 그처럼 발톱이 억센 늑대와 사자들이 전우들 둘레를 꼬리 치며 맴돌았습니다. 전우들은 그 무시무시한 짐승들을 보고 겁에 질렸습니다. 그들은 머리채 아름다운 여신의 문간에 서서, 안에서 키르케가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키르케는 커다란 불멸의 베틀을 오가며 베를 짜고 있었습니다. 여신들의 솜씨답게 곱고 우아하고 빛나는 베였습니다. 사내들의 우두머리 폴리테스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전우들 가운데 내가 가장 아끼고 가장 믿음직하게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226 "벗들이여, 안에서 누군가 큰 베틀을 오가며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네. 바닥이 온통 그 소리로 울리는군. 여신인지 여인인지 모르겠네. 자, 어서 소리쳐 불러 보세."

229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소리쳐 불렀습니다. 키르케가 곧 나와서 번쩍이는 문을 열고 그들을 불러들였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모두 따라 들어갔습니다. 에우릴로코스만은 속임수가 있다고 짐작하고 밖에 남았습니다. 키르케는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 등받이 의자와 큰 의자에 앉히고, 치즈와 보릿가루와 노란 꿀을 프람노스 포도주에 섞어 주면서, 그들이 고향 땅을 아주 잊어버리도록 음식에 해로운 약을 섞었습니다. 키르케가 그것을 주자 그들이 들이켰고, 그러자 키르케는 곧바로 지팡이로 그들을 쳐서 돼지우리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도 목소리도 털도 생김새도 돼지가 되었지만, 정신만은 예전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울면서 갇혀 있었고, 키르케는 그들에게 땅바닥에서 자는 돼지들이 늘 먹는 도토리와 상수리와 산수유 열매를 던져 주었습니다.

244 에우릴로코스는 곧 날랜 검은 배로 돌아와 전우들의 소식과 그들의 쓰라린 운명을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큰 슬픔에 가슴이 꿰뚫려 아무리 애를 써도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으며 마음은 울음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모두 놀라 그에게 캐묻자, 그제야 그는 다른 전우들의 파멸을 낱낱이 이야기했습니다.

251 "빛나는 오디세우스, 당신이 이른 대로 우리는 덤불 사이로 걸어갔소. 골짜기 안 사방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반들반들한 돌로 지은 아름다운 집을 찾아냈소. 거기서 누군가 큰 베틀을 오가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는데, 여신인지 여인인지 몰랐소. 우리가 소리쳐 부르자 그 여인이 곧 나와서 번쩍이는 문을 열고 우리를 불러들였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모두 따라 들어갔소. 나는 속임수가 있다고 짐작하고 밖에 남았소. 그런데 그들은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고,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소. 나는 오랫동안 앉아서 지켜보았소."

261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은못 박은 커다란 청동 칼을 어깨에 둘러메고 활도 메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같은 길로 다시 앞장서라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두 손으로 내 무릎을 붙잡고 애원하며, 울부짖듯 내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266 "제우스가 기른 이여, 가기 싫은 나를 그리로 끌고 가지 말고 여기 남겨 두시오. 당신도 돌아오지 못하고 당신 전우들 가운데 누구 하나 데려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아오. 차라리 여기 있는 이들과 함께 서둘러 달아납시다. 아직은 사악한 날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270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에우릴로코스, 자네는 여기 이곳 우묵한 검은 배 곁에 남아 먹고 마시게. 나는 가겠네. 어쩔 수 없는 굳은 필연이 나를 몰아세우니."

274 이렇게 말하고 나는 배와 바다를 떠나 올라갔습니다. 신성한 골짜기를 지나 약을 많이 아는 키르케의 큰 집에 막 이르려 할 때, 황금 지팡이의 헤르메스가 집으로 가는 나와 마주쳤습니다. 수염이 막 돋기 시작한, 한창 아름다운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이름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281 "가엾은 사람, 이 땅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디를 이렇게 혼자 산등성이로 헤매고 다니느냐? 그대의 전우들은 저기 키르케의 집에서 돼지처럼 빽빽한 우리에 갇혀 있다. 그들을 풀어 주러 이리 오는 것이냐? 장담하건대 그대 자신도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이들처럼 거기 머물게 될 것이다. 자, 내가 그대를 재앙에서 건져 내고 구해 주마. 자, 이 좋은 약을 가지고 키르케의 집으로 가거라. 그대의 머리에서 사악한 날을 막아 줄 것이다. 키르케의 흉악한 꾀를 모두 일러 주마. 키르케는 그대에게 보리 음료를 만들어 주고 그 음식에 약을 탈 것이다. 그래도 그대를 홀리지는 못할 것이다. 내가 줄 이 좋은 약이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이제 하나하나 일러 주겠다. 키르케가 기다란 지팡이로 그대를 치거든, 그때 그대는 허벅지 곁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죽일 듯이 키르케에게 덤벼들어라. 그러면 키르케는 겁을 먹고 그대에게 함께 눕자고 청할 것이다. 그때는 여신의 잠자리를 마다하지 마라. 그래야 키르케가 그대의 전우들을 풀어 주고 그대도 보살펴 줄 것이다. 다만 복된 신들의 큰 맹세를 하라고 시켜라. 그대에게 다른 재앙이나 해를 꾸미지 않겠다고, 그대가 옷을 벗었을 때 그대를 비천하고 사내답지 못한 자로 만들지 않겠다고."

302 이렇게 말하고 아르고스를 죽인 신은 땅에서 약초를 뽑아 내게 주고 그 생김새를 보여 주었습니다. 뿌리는 검고 꽃은 젖처럼 하얬습니다. 신들은 그것을 몰리라고 부릅니다. 죽을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캐기는 어렵지만, 신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헤르메스는 숲이 우거진 섬을 지나 높은 올림포스로 떠났고, 나는 키르케의 집으로 갔는데, 가는 내내 내 가슴은 이리저리 들끓었습니다. 나는 머리채 아름다운 여신의 문간에 섰습니다. 거기 서서 소리쳐 부르자 여신이 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신은 곧 나와서 번쩍이는 문을 열고 나를 불러들였고, 나는 비통한 가슴을 안고 따라 들어갔습니다. 여신은 나를 데리고 들어가 은못 박은 아름다운 의자, 정교하게 꾸민 의자에 앉혔습니다. 발밑에는 발판이 있었습니다. 여신은 내가 마시도록 황금 잔에 보리 음료를 만들어 주고, 마음속으로 흉계를 품은 채 그 안에 약을 넣었습니다. 여신이 그것을 주어 내가 들이켰지만 나를 홀리지는 못하자, 여신은 지팡이로 나를 치며 이름을 부르며 말했습니다. "이제 돼지우리로 가서 다른 전우들 틈에 누워라."

321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허벅지 곁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죽일 듯이 키르케에게 덤벼들었습니다. 여신은 크게 비명을 지르며 내 칼 밑으로 파고들어 내 무릎을 붙잡고, 울부짖듯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325 "그대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고향은 어디고 부모는 누구냐? 이 약을 마시고도 홀리지 않다니 놀랍구나. 이 약을 마시고 이빨 울타리를 한번 넘긴 사람치고 견뎌 낸 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그대 가슴에는 홀릴 수 없는 마음이 들어 있구나. 그대가 바로 길도 재주도 많다는 오디세우스로구나. 트로이에서 날랜 검은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가 올 것이라고, 황금 지팡이의 아르고스를 죽인 신이 늘 내게 말했다. 자, 칼을 칼집에 넣어라. 그리고 우리 둘이 내 잠자리에 오르자. 잠자리와 사랑으로 몸을 섞고 서로 믿게 되도록."

336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키르케, 당신은 홀에서 내 전우들을 돼지로 만들어 놓고서 어떻게 나더러 당신에게 상냥하게 굴라고 하오? 이제 나를 여기 붙잡아 두고 흉계를 품은 채 방으로 들어가 당신 잠자리에 오르라니, 내가 옷을 벗으면 나를 비천하고 사내답지 못한 자로 만들려는 속셈이 아니오? 여신이여, 당신이 내게 다른 재앙이나 해를 꾸미지 않겠다고 큰 맹세를 해 주지 않는 한, 나는 당신 잠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소."

345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여신은 내가 시킨 대로 곧 맹세했습니다. 맹세를 다 마치자 그제야 나는 키르케의 더없이 아름다운 잠자리에 올랐습니다.

348 그사이 집 안에서는 시녀 넷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키르케의 집에서 시중드는 이들로, 샘과 숲과 바다로 흘러드는 신성한 강에서 태어난 이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의자마다 고운 자줏빛 깔개를 덮고 그 밑에는 아마포를 깔았습니다. 또 하나는 의자 앞에 은 식탁을 펴 놓고 그 위에 황금 바구니를 놓았습니다. 셋째는 은 술동이에 마음을 달게 하는 달콤한 포도주를 섞고 황금 잔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넷째는 물을 길어 와 큰 세발솥 밑에 불을 많이 지폈고, 물이 데워졌습니다. 번쩍이는 청동 솥에 물이 끓자, 그 시녀는 나를 욕조에 앉히고 큰 세발솥에서 물을 떠다 알맞게 섞어, 마음을 갉아먹는 지침이 내 팔다리에서 빠져나갈 때까지 머리와 어깨 위로 부어 씻겨 주었습니다. 시녀는 나를 씻기고 올리브기름을 발라 준 뒤 고운 외투와 윗옷을 입혀 주고서, 나를 데리고 들어가 은못 박은 아름다운 의자, 정교하게 꾸민 의자에 앉혔습니다. 발밑에는 발판이 있었습니다. 시녀가 손 씻을 물을 아름다운 황금 물병에 담아 와 은대야 위로 부어 손을 씻게 하고, 곁에 반들반들한 식탁을 펴 놓았습니다. 살림 맡은 점잖은 여인이 빵을 가져다 놓고, 있는 음식을 아낌없이 내어 여러 가지 찬을 곁들였습니다. 그러고는 먹으라고 권했지만 내 마음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나는 딴생각에 잠겨 앉아 있었고, 마음은 불길한 일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375 키르케는 내가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깊은 슬픔에 잠겨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곁에 다가서서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378 "오디세우스, 어찌하여 그렇게 벙어리처럼 앉아 속만 태우며 먹을 것에도 마실 것에도 손을 대지 않느냐? 또 무슨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두려워할 것 없다. 나는 이미 굳은 맹세를 했다."

382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대답했습니다. "키르케, 도리를 아는 사내라면 누가 전우들을 풀어 주고 제 눈으로 보기 전에 먹고 마실 생각을 하겠소? 당신이 정녕 기꺼이 먹고 마시라고 권한다면, 내 정다운 전우들을 풀어 주어 내 눈으로 보게 해 주시오."

388 내가 이렇게 말하자 키르케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홀을 가로질러 나가 돼지우리 문을 열고, 아홉 살배기 살진 돼지처럼 생긴 그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들이 마주 보고 늘어서자 여신은 그들 사이를 지나며 저마다에게 다른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그러자 존귀한 키르케가 앞서 준 해로운 약 때문에 돋았던 털이 그들의 팔다리에서 빠져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내가 되었는데, 전보다 더 젊고 훨씬 잘생기고 보기에도 더 컸습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저마다 내 손을 꼭 잡았습니다. 모두에게 그리움 섞인 울음이 북받쳐 올라 집 안이 무시무시하게 울렸고, 여신도 그들을 가엾게 여겼습니다.

400 여신 중에 고귀한 키르케가 내 곁에 다가서서 말했습니다.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이제 날랜 배가 있는 바닷가로 가거라. 먼저 배를 뭍으로 끌어올리고 재물과 배의 연장들을 모두 동굴에 갖다 두어라.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정다운 전우들을 데려오너라."

406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내 굳센 마음도 그 말에 따랐습니다. 나는 날랜 배가 있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가 보니 정다운 전우들이 날랜 배 곁에서 굵은 눈물을 쏟으며 가엾게 울고 있었습니다. 들에 사는 송아지들이 배불리 풀을 뜯고 외양간으로 돌아오는 무리 지은 어미 소들을 맞아 다 함께 마주 뛰어오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도 더는 송아지들을 붙잡아 두지 못하고, 송아지들은 쉴 새 없이 음매 울며 어미들 둘레를 뛰어다닙니다. 꼭 그처럼 전우들은 나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내게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마치 고향 땅, 자기들이 태어나 자란 거친 이타카의 도시에 돌아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들은 울부짖듯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419 "제우스가 기른 이여, 당신이 돌아오니 우리는 고향 땅 이타카에 닿은 것처럼 기쁘오. 자, 다른 전우들의 파멸을 들려주시오."

422 그들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부드러운 말로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배를 뭍으로 끌어올리고 재물과 배의 연장들을 모두 동굴에 갖다 두세. 그러고 나서 모두 서둘러 나를 따라오게. 키르케의 신성한 집에서 전우들이 먹고 마시는 모습을 보게 될 걸세. 그들에게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끝없이 넘쳐 나네."

428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곧 내 말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에우릴로코스만은 전우들을 모두 붙잡아 말리며 그들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431 "아, 가엾은 사람들이여, 우리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런 재앙을 바라는가? 키르케의 홀로 내려가자고? 그 여인은 우리 모두를 돼지나 늑대나 사자로 만들어 억지로 그 큰 집을 지키게 할 걸세. 키클롭스가 저지른 짓과 똑같이 말일세. 그때도 우리 전우들이 그자의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이 대담한 오디세우스가 함께 따라갔지. 그들도 이 사람의 무모한 짓 때문에 죽었네."

438 그가 이렇게 말하자 나는 속으로 곰곰이 따져 보았습니다. 그가 내 가까운 인척인데도, 튼튼한 허벅지 곁에서 날이 긴 칼을 뽑아 그의 머리를 쳐서 땅바닥에 떨어뜨릴까 했습니다. 그러나 전우들이 저마다 사방에서 상냥한 말로 나를 말렸습니다.

443 "제우스의 핏줄이여, 당신이 그렇게 하라면 이 사람은 여기 배 곁에 남아 배를 지키게 둡시다. 우리는 키르케의 신성한 집으로 이끌어 주시오."

446 이렇게 말하고 그들은 배와 바다를 떠나 올라갔습니다. 나의 무서운 꾸지람이 두려워 에우릴로코스도 우묵한 배 곁에 남지 않고 따라왔습니다.

449 그사이 키르케는 집 안에서 다른 전우들을 정성껏 씻기고 올리브기름을 발라 준 뒤 두툼한 외투와 윗옷을 입혀 주었습니다. 우리가 가 보니 그들은 모두 홀에서 즐겁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알아보자 그들은 슬피 울었고, 집 안이 온통 울음소리로 울렸습니다. 여신 중에 고귀한 키르케가 내 곁에 다가서서 말했습니다.

457 "이제 더는 그렇게 섧게 울지 마라. 그대들이 물고기 많은 바다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뭍에서 사나운 사내들이 그대들을 얼마나 해쳤는지 나도 다 안다. 자, 먹을 것을 먹고 포도주를 마셔라. 거친 이타카, 고향 땅을 처음 떠나올 때 같은 기운을 가슴에 다시 얻을 때까지. 지금 그대들은 지치고 기가 꺾여 늘 고된 떠돌이 길만 떠올리고, 마음이 즐거울 틈이 없다. 그대들은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으니."

466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우리 굳센 마음도 그 말에 따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 해를 다 채우도록 날마다 그곳에 앉아 한없이 많은 고기와 달콤한 술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한 해가 다 되어 계절이 돌고 달이 기울고 긴 날들이 다 지나가자, 정다운 전우들이 나를 불러내어 말했습니다.

472 "이상한 사람, 살아 돌아가 지붕 높은 집과 고향 땅에 닿는 것이 당신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이제는 고향 땅을 생각하시오."

475 그들이 이렇게 말하자 내 굳센 마음도 그 말에 따랐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온종일 앉아서 한없이 많은 고기와 달콤한 술로 잔치를 벌였습니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자 전우들은 그늘진 홀 여기저기서 잠이 들었습니다. 나는 키르케의 더없이 아름다운 잠자리에 올라 여신의 무릎을 잡고 애원했고, 여신은 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여신에게 날개 돋친 말을 건넸습니다.

483 "키르케, 나를 집으로 보내 주겠다던 약속을 지켜 주시오. 내 마음은 벌써 떠나고 싶어 안달하고, 다른 전우들의 마음도 그렇소. 당신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들은 내 둘레에서 울며 내 가슴을 갉아먹소."

487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여신 중에 고귀한 키르케가 곧 대답했습니다.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원하지 않는다면 이제 더는 내 집에 머물지 마라. 그러나 그대들은 먼저 다른 길을 다 가서 하데스와 무서운 페르세포네의 집에 이르러야 한다. 테베의 테이레시아스, 눈먼 예언자의 혼백에게 신탁을 물어야 한다. 그의 정신은 아직 흔들림이 없다. 죽은 그에게도 페르세포네가 슬기를 주어 혼자서만 생각할 수 있게 했고, 다른 이들은 그림자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496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나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울었고, 내 가슴은 더 살고 싶지도 햇빛을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울며 뒹굴다 지쳐서야 나는 여신에게 대답했습니다.

501 "키르케, 누가 이 길을 이끌어 주겠소? 검은 배를 타고 하데스에게 가 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소."

503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여신 중에 고귀한 키르케가 곧 대답했습니다. "제우스의 핏줄, 라에르테스의 아들, 재간 많은 오디세우스여, 배를 이끌어 줄 길잡이가 없다고 걱정하지 마라. 돛대를 세우고 흰 돛을 펴고 앉아 있으면 북풍의 입김이 배를 실어 갈 것이다. 배를 타고 오케아노스를 건너면 나지막한 바닷가와 페르세포네의 숲이 나온다. 키 큰 백양나무와 열매를 일찍 떨구는 버드나무가 자라는 곳이다. 거기 소용돌이 깊은 오케아노스 가에 배를 대고, 그대는 곰팡내 나는 하데스의 집으로 걸어가거라. 거기서 피리플레게톤강과, 스틱스강 물에서 갈라져 나온 코키토스강이 아케론강으로 흘러든다. 울부짖는 두 강이 만나는 곳에 바위가 하나 있다. 영웅이여, 내가 이르는 대로 그곳에 바짝 다가가서 가로세로 한 자쯤 되는 구덩이를 파고, 그 둘레에 모든 죽은 이를 위해 부어 바칠 것을 부어라. 먼저 꿀 섞은 우유를, 그다음에는 달콤한 포도주를, 셋째로는 물을 붓고 그 위에 흰 보릿가루를 뿌려라. 그리고 죽은 이들의 힘없는 머리들에게 간절히 빌며 약속해라. 이타카에 돌아가면 새끼 낳지 않은 소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홀에서 제물로 바치고 장작더미에 좋은 것들을 가득 쌓겠다고, 테이레시아스에게는 따로 그대들의 가축 가운데 가장 빼어난 온통 검은 숫양을 바치겠다고. 기도로 이름난 죽은 이들의 무리에게 빌고 나면, 숫양 한 마리와 검은 암양 한 마리를 에레보스1 쪽으로 머리를 돌려 제물로 잡고, 그대 자신은 강물 쪽으로 몸을 돌려 서 있어라. 그러면 죽은 이들의 혼백이 숱하게 몰려올 것이다. 그때 전우들을 재촉하여, 무자비한 청동에 목이 따여 누워 있는 양들의 가죽을 벗겨 불태우고 신들께, 굳센 하데스와 무서운 페르세포네께 기도하라고 일러라. 그대 자신은 허벅지 곁에서 날카로운 칼을 뽑아 들고 앉아, 테이레시아스에게 묻기 전에는 죽은 이들의 힘없는 머리들이 피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아라. 백성의 우두머리여, 그러면 곧 예언자가 와서 그대의 길과 뱃길의 길이와 귀향을, 물고기 많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갈지 일러 줄 것이다."

541 여신이 이렇게 말하자 곧 황금 옥좌의 새벽 여신이 찾아왔습니다. 키르케는 내게 외투와 윗옷을 입혀 주고, 님프 자신은 얇고 우아한 은빛 큰 겉옷을 걸치고, 허리에는 아름다운 황금 띠를 두르고, 머리에는 너울을 썼습니다. 나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전우들 곁에 하나하나 다가서서 상냥한 말로 그들을 재촉했습니다.

548 "이제 더는 누워서 달콤한 잠에 빠져 있지 말고 떠나세. 존귀한 키르케가 내게 길을 일러 주었네."

550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의 굳센 마음도 그 말에 따랐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나는 전우들을 모두 무사히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엘페노르라는 가장 어린 전우가 있었는데, 싸움에 아주 용감하지도 않고 생각이 그리 야무지지도 않은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술에 취해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어서 키르케의 신성한 집에서 전우들과 떨어져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전우들이 움직이는 왁자한 소리와 발소리를 듣자 그는 벌떡 일어났는데, 정신이 없어 긴 사다리로 돌아 내려가는 것을 잊고 지붕에서 곧장 거꾸로 떨어졌습니다. 목뼈가 부러졌고, 그의 혼백은 하데스로 내려갔습니다.

561 길을 떠나는 그들에게 나는 말했습니다. "자네들은 아마 사랑하는 고향 땅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키르케는 우리에게 다른 길을 정해 주었네. 하데스와 무서운 페르세포네의 집으로 가서 테베의 테이레시아스의 혼백에게 신탁을 물어야 하네."

566 내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며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그러나 울며 슬퍼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569 우리가 굵은 눈물을 쏟으며 비통한 마음으로 날랜 배가 있는 바닷가로 가는 동안, 키르케는 어느새 검은 배 곁으로 가서 숫양 한 마리와 검은 암양 한 마리를 매어 두었습니다. 여신은 우리 곁을 가볍게 지나쳐 갔습니다. 신이 원하지 않는데, 이리저리 오가는 신을 누가 제 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주

  1. 1. 에레보스(Erebos)는 땅 밑, 저승으로 이어지는 어둠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제물의 머리를 그 어둠 쪽, 곧 땅 밑으로 향하게 하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