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권
1 그때 온 고을을 돌며 빌어먹는 거지 하나가 왔는데, 이타카 도시를 돌며 구걸하던 자로 게걸스러운 배로 쉬지 않고 먹고 마시는 데 이름이 나 있었다. 힘도 기운도 없었지만 겉보기에는 덩치가 아주 컸다. 그의 이름은 존귀한 어머니가 태어날 때 붙여 준 아르나이오스였지만, 누가 시키기만 하면 달려가서 말을 전해 주곤 했으므로 젊은이들은 모두 그를 이로스라고 불렀다.1 그가 와서 오디세우스를 그의 집에서 쫓아내려 들며 꾸짖고는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10 "늙은이, 문간에서 비켜라. 곧 발목을 잡혀 끌려 나가기 전에. 다들 나한테 눈짓하며 너를 끌어내라고 시키는 게 안 보이냐? 그래도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만. 자, 일어나라. 곧 우리 둘 사이의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번지기 전에."
14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나쁜 말을 하지도 않았네. 누가 자네에게 많이 집어 준다 해도 시샘하지 않네. 이 문지방은 우리 둘이 앉기에 넉넉하니, 자네가 남의 것을 두고 시샘할 까닭은 없지. 보아하니 자네도 나처럼 떠돌이인 모양인데, 복을 내려 주는 것은 신들이 하실 일일세. 주먹으로 나를 너무 도발하지는 말게. 나를 화나게 했다가는 내가 늙었어도 자네 가슴과 입술을 피투성이로 만들지 모르고, 그러면 자네가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의 홀로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테니 내일은 내가 더 편히 쉴 수 있겠지." 떠돌이 이로스가 화가 나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허, 이 게걸스러운 놈이 아궁이 지키는 할망구처럼 술술 잘도 지껄이는구나! 내가 이놈을 두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혼쭐을 내고, 남의 곡식을 먹어 치운 돼지의 이빨을 뽑듯이 이놈 턱에서 이빨을 모조리 땅바닥으로 쳐내 주마. 자, 이제 허리띠를 매라. 여기 이 사람들도 다 우리가 싸우는 꼴을 구경하게. 그런데 너 같은 늙은이가 어떻게 젊은 사내와 맞붙어 싸우겠느냐?"
32 이렇게 두 사람이 높다란 문 앞, 반들반들한 문지방 위에서 잔뜩 성이 나서 서로 으르렁거리자, 신성한 기운을 지닌 안티노오스가 그 소리를 듣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구혼자들에게 말했다.
36 "벗들이여,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네. 신께서 이 집에 이런 구경거리를 데려다주셨군. 저 나그네와 이로스가 주먹으로 붙어 보자고 서로 시비를 걸고 있네. 자, 어서 두 사람을 맞붙여 보세."
40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웃으며 벌떡 일어나, 누더기를 걸친 두 거지의 둘레로 모여들었고, 에우페이테스의 아들 안티노오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43 "거만한 구혼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게. 할 말이 있네. 여기 불 위에 염소 위장들이 놓여 있지. 저녁거리로 기름과 피를 가득 채워 올려 둔 것들일세. 두 사람 가운데 누구든 이겨서 더 센 쪽이 되면, 그 사람이 직접 일어나 이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고르게 하고, 앞으로도 늘 우리와 함께 먹게 하며, 다른 거지는 아무도 이 안에 들어와 빌어먹지 못하게 하세."
50 안티노오스가 이렇게 말하자 그 말이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속임수를 품고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52 "벗들이여, 늙은 사내가, 그것도 고난에 짓눌린 사내가 젊은 사내와 싸우기란 어림없는 일이지만, 못된 짓을 시키는 이 배가 나를 부추겨 매를 맞고 쓰러지게 하는구려. 자, 그러니 당신들 모두 굳게 맹세해 주시오. 누구도 이로스 편을 들어 무거운 주먹으로 나를 쳐서, 무모하게도 나를 저자의 힘에 꺾이게 하지 않겠다고 말이오."
58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그가 시킨 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들이 맹세를 다 마치자 신성한 힘을 지닌 텔레마코스가 다시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61 "손님, 당신 가슴과 굳센 마음이 저자를 물리치라고 부추긴다면, 다른 아카이아인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마시오. 누구든 당신을 치는 자는 여럿을 상대로 싸워야 할 것이오. 손님을 맞은 주인은 바로 나요. 그리고 왕인 안티노오스와 에우리마코스도 내 말에 찬성하오. 두 사람 모두 의젓한 사람들이니까."
66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옳다고 했다. 오디세우스가 누더기로 허리 아래를 동여매자 아름답고 커다란 넓적다리가 드러났고 넓은 어깨와 가슴과 억센 팔도 드러났는데, 아테나가 곁에 다가서서 백성의 목자의 팔다리를 더 굵게 키워 주었다. 구혼자들은 모두 몹시 놀랐다. 누군가는 옆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73 "이로스는 곧 이로스 아닌 이로스가 되어 제가 불러들인 재앙을 맞겠군. 저 늙은이가 누더기 밑으로 드러낸 넓적다리 좀 보게!"
75 그들이 이렇게 말하자 이로스는 마음이 몹시 뒤흔들렸지만, 일꾼들이 억지로 허리띠를 매어 주고 겁에 질린 그를 끌고 나왔다. 그의 팔다리에서 살이 덜덜 떨렸다. 안티노오스가 그를 나무라며 이름을 불러 말했다.
79 "이 허풍선이야, 고난에 짓눌린 이런 늙은이를 그토록 무서워하며 떤다면 차라리 지금 없어져 버리든지 아예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내 너에게 똑똑히 일러두마. 이 말은 꼭 이루어질 거다. 이자가 너를 이겨 더 센 쪽이 되면, 너를 검은 배에 태워 뭍으로, 모든 인간을 해치는 에케토스 왕에게 보내 버릴 테다. 그 왕은 무자비한 청동으로 네 코와 귀를 베어 내고, 네 불알을 뜯어내어 개들에게 날로 나눠 먹이라고 던져 줄 거다."
88 그가 이렇게 말하자 이로스는 팔다리가 더욱 떨렸다. 일꾼들이 그를 한가운데로 끌고 나왔고, 두 사람은 두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때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속으로 망설였다. 이자를 쳐서 그 자리에 쓰러뜨려 목숨이 떠나게 할까, 아니면 가볍게 쳐서 땅바닥에 뻗게만 할까. 이리저리 생각해 보니, 아카이아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볍게 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주먹을 치켜든다. 이로스가 오디세우스의 오른쪽 어깨를 친다. 오디세우스가 이로스의 귀 밑 목덜미를 쳐서 뼈를 안으로 부서뜨린다. 곧 이로스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먼지 속에 쓰러져 이를 딱딱 부딪치며 두 발로 땅을 걷어찬다. 당당한 구혼자들은 두 손을 치켜들고 죽도록 웃어 댔다. 오디세우스는 이로스의 발을 잡고 문간을 지나 안뜰과 주랑의 문까지 끌고 가서, 안뜰 담장에 그를 기대어 앉히고 손에 지팡이를 쥐여 주며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105 "여기 앉아서 돼지와 개나 쫓아라. 너처럼 비참한 놈이 나그네와 거지들의 왕 노릇을 하려 들지 마라. 더 큰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거든."
108 이렇게 말하고 그는 어깨에 군데군데 해진 볼품없는 자루를 걸쳤다. 자루에는 꼬아 만든 끈이 어깨걸이로 달려 있었다. 그가 문지방으로 돌아가 앉자, 구혼자들은 유쾌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112 "나그네, 제우스와 다른 불사의 신들이 네가 무엇보다 바라는 것, 네 마음에 드는 것을 주시기를! 네가 이 밑 빠진 놈이 고을에서 빌어먹고 다니지 못하게 해 주었으니, 우리는 곧 이놈을 뭍으로, 모든 인간을 해치는 에케토스 왕에게 데려갈 거다."
117 그들이 이렇게 말하자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그 길한 말에 기뻐했다. 안티노오스는 그의 앞에 기름과 피를 가득 채운 커다란 위장을 놓아 주었고, 암피노모스는 바구니에서 빵 두 덩이를 집어 그의 곁에 놓아 주고는, 황금 잔을 들어 그에게 축배를 건네며 말했다.
122 "어서 오시오, 나그네 어르신. 지금은 숱한 불행에 붙잡혀 있지만 앞으로는 복이 있기를 비오."
124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암피노모스, 당신은 정말 의젓한 사람 같구려. 당신 아버지도 그런 분이셨으니 말이오. 둘리키온의 니소스가 훌륭하고 부유한 분이라는 좋은 명성을 나도 들었소. 당신이 그분의 아들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말씨가 점잖은 사람 같구려. 그러니 내가 일러 주겠소. 잘 새겨듣고 귀 기울이시오. 땅 위에서 숨 쉬며 기어 다니는 모든 것 가운데 대지가 기르는 것으로 사람보다 더 연약한 것은 없소. 신들이 빼어남을 주시고 무릎이 힘차게 움직이는 동안에는, 사람은 앞으로 언젠가 재앙을 겪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소. 그러나 복된 신들이 비참한 일을 이루시면 그것마저 마지못해 꿋꿋한 마음으로 견뎌 내오.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의 마음이란, 인간과 신들의 아버지가 날마다 가져다주시는 그날그날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오. 나도 한때는 사람들 사이에서 복을 누릴 몸이었소. 그러나 힘과 기운에 기대어, 내 아버지와 형제들을 믿고 무모한 짓을 숱하게 저질렀소. 그러니 사람은 누구든 결코 도리를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신들이 주시는 선물이면 무엇이든 잠자코 받아 지녀야 하오. 그런데 내가 보니 구혼자들이 저렇게 무모한 짓을 꾸며 재산을 축내고 그 사내의 아내를 업신여기고 있지만, 내가 말하건대 그 사내는 이제 가족과 고향 땅에서 그리 오래 떨어져 있지 않을 것이오. 아주 가까이 와 있소. 부디 어떤 신이 당신을 몰래 집으로 데려가 주어, 그가 사랑하는 고향 땅에 돌아올 때 당신이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그가 이 지붕 아래로 들어오면, 구혼자들과 그 사람의 결판은 피를 보지 않고는 나지 않을 것이오."
151 이렇게 말하고 그는 신께 술을 따라 바친 뒤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고 나서, 그 잔을 백성을 이끄는 이의 손에 다시 돌려주었다. 암피노모스는 가슴이 시름에 잠긴 채 고개를 떨구고 집 안을 가로질러 갔다. 그의 마음은 벌써 재앙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아테나가 그마저 묶어 두어 텔레마코스의 손과 창에 힘으로 꺾이게 했다. 그는 일어났던 높은 의자로 돌아가 다시 앉았다.
158 빛나는 눈의 여신 아테나가 이카리오스의 딸, 사려 깊은 페넬로페의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을 넣어 주었다. 구혼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는 생각이었으니, 그리하여 구혼자들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전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게 하려는 여신의 뜻이었다. 페넬로페는 까닭 없이 웃음을 지으며 이름을 불러 말했다.
164 "에우리노메, 전에는 없던 일인데 내 마음이 구혼자들 앞에 나서고 싶어 하네. 저들이 밉기는 여전하지만. 그리고 내 아들에게 득이 될 말을 한마디 해 주고 싶네. 방자한 구혼자들과 늘 어울려 지내지 말라고 말일세. 저들은 말은 번드르르하게 하지만 뒤로는 못된 생각을 품고 있으니."
169 살림 맡은 여인 에우리노메가 말을 받았다. "그래요, 아가, 그 말씀은 모두 옳아요. 자, 가서 아드님께 그 말을 하시고 감추지 마세요. 하지만 먼저 몸을 씻고 두 뺨에 기름을 바르세요. 이렇게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은 채로 가지는 마세요. 끝도 없이 늘 슬퍼하는 것은 더욱 몹쓸 일이에요. 아드님은 벌써 그만한 나이가 되었잖아요. 아드님에게 수염이 나는 것을 보게 해 달라고 무엇보다 간절히 불사의 신들께 빌던 그 나이 말이에요."
177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말을 받았다. "에우리노메, 그이가 우묵한 배를 타고 떠난 뒤로 올림포스에 사는 신들이 내 아름다움을 앗아 가 버렸으니, 아무리 나를 아껴서 하는 말이라도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라는 말은 하지 말게. 그보다 아우토노에와 히포다메이아더러 이리 오라고 이르게. 홀에서 내 곁에 서 있게 말일세. 사내들 사이에 혼자 들어가지는 않겠네. 부끄러우니."
185 왕비가 이렇게 말하자 노파는 여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어서 오라고 재촉하러 홀을 지나 나갔다.
187 그때 빛나는 눈의 여신 아테나가 또 다른 생각을 해냈다. 여신은 이카리오스의 딸에게 달콤한 잠을 쏟아부었다. 페넬로페는 침상에 기대앉은 채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고 온 팔다리가 풀렸다. 그사이 여신 중에 고귀한 아테나는 아카이아인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도록 왕비에게 불멸의 선물을 내려 주었다. 여신은 먼저 고운 관을 쓴 키테라의 여신이 카리테스의 사랑스러운 춤판에 갈 때 바르는 암브로시아 같은 아름다움으로 왕비의 고운 얼굴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그리고 왕비를 보기에 더 크고 더 듬직하게 만들고, 톱으로 켠 상아보다 더 희게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해 놓고 여신이 떠나간 뒤, 하얀 팔의 시녀들이 소리를 내며 홀에서 다가오자 달콤한 잠이 왕비를 놓아주었고, 페넬로페는 두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201 "아, 몹시 괴로운 나를 부드러운 잠이 포근히 감싸 주었구나. 정결한 아르테미스께서 지금 당장 내게 이처럼 부드러운 죽음을 내려 주셨으면! 그러면 더는 마음속으로 슬퍼하며, 온갖 빼어남을 지녀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으뜸이던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다가 내 삶을 시들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206 이렇게 말하고 페넬로페는 반들거리는 위층 방에서 내려왔다. 혼자가 아니라 시녀 둘이 뒤따랐다. 여인 중에 고귀한 페넬로페는 구혼자들 앞에 이르자, 튼튼하게 지은 지붕을 받친 기둥 곁에 서서, 반들거리는 머릿수건을 두 뺨 앞으로 드리웠다. 믿음직한 시녀가 양옆에 하나씩 서 있었다. 구혼자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이 풀리고 사랑에 마음이 홀려, 저마다 왕비 곁에 누워 잠자리를 함께하기를 빌었고, 페넬로페는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에게 말했다.
215 "텔레마코스, 네 생각과 마음이 이제 굳건하지 못하구나. 어렸을 때는 오히려 속으로 더 꾀를 잘 굴리더니, 이제 다 자라 젊음이 한창이고 남의 고장 사람이 네 키와 생김새를 보면 부잣집 자식이라고 할 만한데도, 네 생각과 마음은 이제 도리에 맞지 않구나. 이 홀에서 이게 무슨 일이냐. 손님이 그렇게 욕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우리 집에 앉아 있던 손님이 이렇게 끔찍하게 끌려다니며 험한 꼴을 당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들 사이에서 너에게 수치와 치욕이 돌아갈 것이다."
226 의젓한 텔레마코스가 대답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노여워하시는 것을 언짢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좋은 일과 나쁜 일을 하나하나 다 압니다. 전에는 아직 어린아이였지요. 그러나 모든 일을 의젓하게 다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못된 생각을 품은 저자들이 여기저기 곁에 앉아서 저를 얼떨떨하게 만들고,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손님과 이로스의 싸움은 구혼자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힘이 더 셌습니다. 아버지 제우스와 아테나와 아폴론이시여, 부디 구혼자들이 지금 우리 집에서, 어떤 자는 안뜰에서, 어떤 자는 집 안에서 꺾여 고개를 떨구고 저마다 팔다리가 풀려 버리기를! 지금 저 이로스가 안뜰 문간에 앉아 술 취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거리고, 팔다리가 풀려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제 집이 어디든 돌아가지도 못하듯이 말입니다."
243 이렇게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에우리마코스가 페넬로페에게 말을 건넸다.
245 "이카리오스의 따님, 사려 깊은 페넬로페 님, 이아소스의 아르고스에 사는 아카이아인들이 모두 왕비님을 본다면, 내일 아침부터는 더 많은 구혼자들이 이 댁에서 잔치를 벌일 것입니다. 왕비님은 생김새와 키와 속에 지닌 고른 생각에서 여인들 가운데 으뜸이시니까요."
250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대답했다. "에우리마코스, 아르고스인들이 일리오스로 배를 타고 갈 때, 내 남편 오디세우스가 그들과 함께 떠날 때, 불사의 신들이 나의 빼어남과 얼굴과 몸매를 앗아 갔소. 그이가 돌아와 내 삶을 돌보아 준다면 내 명성은 그렇게 더 크고 더 아름다워질 것이오. 그러나 지금 나는 괴롭소. 어떤 신이 그토록 많은 재앙을 내게 몰아 보냈소. 그이는 고향 땅을 떠나던 날, 내 오른손 손목을 잡고 이렇게 말했소."
259 "'부인, 나는 정강이받이를 잘 댄 아카이아인들이 모두 트로이에서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소. 트로이인들도 싸움을 잘하는 사내들이라고 하니 말이오. 창을 던지고 화살을 쏘는 자들이며, 발 빠른 말이 끄는 전차에 오르는 자들이라 하오. 모두에게 똑같이 닥치는 전쟁의 큰 다툼도 그런 자들이 가장 빨리 결판을 내는 법이오. 그러니 신께서 나를 돌려보내 주실지, 아니면 내가 그곳 트로이에서 붙잡히고 말지 나는 모르겠소. 이곳 일은 모두 당신이 돌보시오. 홀에서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금처럼, 아니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는 더욱 마음 써 보살펴 주시오. 그러다 아들에게 수염이 나는 것을 보거든, 당신 집을 떠나 당신이 원하는 사람과 혼인하시오.'"
271 "그이가 이렇게 말했는데, 이제 그 일이 모두 이루어지고 있소. 저주받은 나에게, 제우스가 복을 앗아 간 나에게 끔찍한 혼인이 닥칠 밤이 오고야 말 것이오. 그런데 이 지독한 슬픔이 내 가슴과 마음에 사무치오. 구혼자들의 법도는 예전에 이렇지 않았소. 좋은 여인이나 부잣집 딸에게 구혼하려고 서로 다투는 사내들은 몸소 소와 살진 양을 끌고 와서 신부의 벗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빛나는 선물을 바치오. 남의 살림을 값도 치르지 않고 먹어 치우지는 않소."
281 왕비가 이렇게 말하며 구혼자들에게서 선물을 끌어내고 부드러운 말로 그들의 마음을 홀리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것을 꾀하자, 참을성 많은 고귀한 오디세우스는 기뻐했다.
284 에우페이테스의 아들 안티노오스가 왕비에게 말을 받았다. "이카리오스의 따님, 사려 깊은 페넬로페 님,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누구든 이리로 선물을 가져오려 하거든 받아 두십시오. 주는 것을 마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는 왕비님께서 아카이아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과 혼인하시기 전에는 저희 농토로도, 다른 어디로도 가지 않겠습니다."
290 안티노오스가 이렇게 말하자 그 말이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저마다 선물을 가져오라고 전령을 보냈다. 안티노오스에게는 전령이 더없이 아름다운 커다란 옷을 가져왔다. 수를 놓은 옷이었는데, 잘 휜 고리에 끼우는 황금 옷핀이 모두 열두 개 달려 있었다. 에우리마코스에게는 전령이 곧 공들여 만든 황금 목걸이를 가져왔다. 호박 구슬을 꿰어 해처럼 빛나는 목걸이였다. 에우리다마스에게는 시종 둘이 귀걸이 한 쌍을 가져왔다. 오디 같은 구슬이 세 알씩 달려 있어 아름다운 빛이 반짝였다. 폴릭토르의 아들 페이산드로스 왕의 집에서는 시종이 목장식을 가져왔다. 더없이 아름다운 장신구였다. 아카이아인들이 저마다 다른 아름다운 선물을 가져오자, 여인 중에 고귀한 페넬로페는 위층 방으로 올라갔고 시녀들이 그 더없이 아름다운 선물들을 들고 따라갔다.
304 구혼자들은 춤과 사랑스러운 노래에 빠져 즐기며 저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즐기는 동안 검은 저녁이 찾아왔다. 그들은 곧 홀 안에 불을 밝힐 화로 셋을 세우고, 그 둘레에 오래전에 베어 바싹 마른 데다 방금 청동으로 쪼갠 장작을 쌓고 그 사이사이에 횃불도 섞어 놓았다. 마음이 꿋꿋한 오디세우스의 하녀들이 번갈아 가며 불을 돋우었다. 그러자 제우스의 핏줄인,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몸소 하녀들에게 말했다.
313 "오래전에 떠나간 주인 오디세우스의 하녀들아, 존귀한 왕비께서 계신 방으로 가거라. 왕비 곁에서 물레가락을 돌리고, 방에 앉아 왕비를 즐겁게 해 드리든지 손으로 양털을 빗든지 해라. 이 사람들 모두에게는 내가 불빛을 비춰 주겠다. 이들이 아름다운 옥좌의 새벽 여신을 기다리려 한다 해도 나를 이기지는 못할 거다. 나는 참을성이 아주 많으니까."
320 그가 이렇게 말하자 하녀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뺨이 고운 멜란토가 그를 모질게 나무랐는데, 돌리오스가 낳은 딸로 페넬로페가 데려다 제 자식처럼 길러 주고 마음에 드는 노리개도 준 하녀였다. 그런데도 멜란토는 페넬로페의 슬픔을 마음에 두지 않고 에우리마코스와 정을 통하며 사랑을 나누었다. 멜란토가 욕설을 퍼부으며 오디세우스를 나무랐다.
327 "이 딱한 나그네야, 너는 정신이 나간 놈이로구나. 대장간이나 마을 쉼터에 가서 잘 생각은 하지 않고, 여기서 여러 사내 앞에서 겁도 없이 대담하게 말을 늘어놓다니.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갔든지, 아니면 네 생각이 늘 그 모양이라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지. 떠돌이 이로스를 이겼다고 우쭐해서 날뛰는 거냐? 이로스보다 나은 다른 놈이 곧 일어나서 억센 주먹으로 네 머리통을 두들기고 피투성이로 만들어 이 집에서 내쫓지나 않을지 조심해라."
337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멜란토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개 같은 것아, 네가 지껄인 말을 당장 텔레마코스에게 가서 일러바치겠다. 그러면 텔레마코스가 그 자리에서 너를 토막 내 버릴 거다."
340 이렇게 말하여 그가 여자들을 기겁하게 하자, 여자들은 그가 한 말이 참말이라고 여겨 집 안을 가로질러 달아났고 저마다 겁에 질려 팔다리가 풀렸다. 오디세우스는 타오르는 화로 곁에서 불을 밝히며 모든 사람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서는 다른 생각들이 꿈틀거렸다. 끝내 이루어지고야 말 생각들이었다.
346 아테나는 거만한 구혼자들이 마음 아픈 모욕을 아주 그만두게 하지는 않았다. 라에르테스의 아들 오디세우스의 가슴에 고통이 더 깊이 스며들게 하려 했다. 폴리보스의 아들 에우리마코스가 오디세우스를 빈정대며 그들 가운데서 먼저 말을 꺼내자, 동료들 사이에 웃음이 터졌다.
351 "이름 높은 왕비의 구혼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게. 가슴속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하겠네. 이 사내가 오디세우스의 집에 온 것은 신의 뜻이 없지 않네. 어쨌든 횃불 빛이 이자의 머리에서 나오는 것 같군.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으니 말일세."
356 이렇게 말하고 그는 도시를 무너뜨린 오디세우스에게 말을 걸었다. "나그네, 내가 너를 머슴으로 데려간다면 저 먼 들판 끝자락에서 품을 팔 생각이 있느냐? 품삯은 넉넉히 주마. 돌담을 쌓고 큰 나무를 심는 일이다. 그러면 거기서 한 해 내내 먹을 것을 대 주고, 옷도 입혀 주고, 발에 신을 신발도 주마. 하지만 너는 못된 짓만 배워 놔서 일하러 다닐 생각은 없고, 고을을 굽실거리며 돌아다니면서 빌어먹어 그 밑 빠진 배나 채우고 싶어 하지."
365 꾀 많은 오디세우스가 대답했다. "에우리마코스, 해가 긴 봄철 풀밭에서 우리 둘이 일로 겨루어, 나도 잘 휜 낫을 들고 당신도 그런 낫을 들고서 날이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굶은 채 일을 겨룬다면 좋겠소. 베어 낼 풀은 넉넉하니 말이오. 아니면 가장 좋은 소들, 털빛이 붉고 덩치가 크며 둘 다 꼴을 실컷 먹었고 나이도 같고 끄는 힘도 같아 그 힘이 만만치 않은 소들을 몰고 갈 수 있다면 좋겠소. 넉 마지기 밭에 흙덩이가 쟁기 아래 술술 갈라진다면, 내가 고랑을 끊김 없이 곧게 갈아 나가는지 당신이 보게 될 것이오. 또 크로노스의 아들께서 오늘 어디선가 전쟁을 일으키시고, 내게 방패 하나와 창 두 자루와 관자놀이에 꼭 맞는 온통 청동으로 된 투구가 있다면, 내가 맨 앞 싸움꾼들 사이에 섞여 싸우는 것을 당신이 보게 될 것이오. 그러면 내 배를 들먹이며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몹시 오만하고 마음이 모질구려. 몇 안 되는, 그것도 변변치 못한 자들과 어울리니 아마 스스로 크고 강한 사람인 줄 아는 모양이오. 오디세우스가 돌아와 고향 땅에 닿기만 한다면, 저 문이 아무리 넓다 해도 문간을 지나 밖으로 달아나는 당신에게는 금세 좁아질 것이오."
387 그가 이렇게 말하자 에우리마코스는 속에서 더욱 화가 치밀어 그를 노려보며 날개 돋친 말을 건넸다.
389 "이 가엾은 놈아, 네가 지껄이는 말의 값을 곧 치르게 해 주마. 여러 사내 앞에서 겁도 없이 대담하게 말을 늘어놓다니. 술에 취해 정신이 나갔든지, 아니면 네 생각이 늘 그 모양이라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지. 떠돌이 이로스를 이겼다고 우쭐해서 날뛰는 거냐?"
394 이렇게 말하고 그는 발판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에우리마코스가 무서워 둘리키온 사람 암피노모스의 무릎 곁에 주저앉았고, 에우리마코스가 던진 발판은 술 따르는 이의 오른손에 맞았다. 술 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지며 쨍그랑 울렸고, 술 따르는 이는 신음하며 먼지 속에 뒤로 벌렁 쓰러졌다. 구혼자들은 그늘진 홀 안에서 떠들썩하게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는 옆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401 "저 나그네가 여기 오기 전에 다른 데를 떠돌다가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우리 사이에 이런 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텐데. 이제 우리는 거지들 때문에 다투고 있으니, 좋은 잔치의 즐거움도 다 사라지겠군. 못난 것들이 이기는 판이니 말일세." 그때 신성한 힘을 지닌 텔레마코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이상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미쳤구려. 먹고 마신 것을 이제 속에 감추지도 못하는군. 어떤 신이 당신들을 부추기고 있소. 자, 실컷 먹었으니 마음이 내키거든 집으로 가서 잠자리에 드시오. 나는 아무도 내쫓지 않겠소."
410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입술을 깨물며, 텔레마코스가 대담하게 말하는 데 놀랐다. 그때 아레토스의 아들인 니소스 왕의 빛나는 아들 암피노모스가 그들 가운데서 말했다.
414 "벗들이여, 옳은 말을 들었으면 아무도 맞서는 말로 대들며 성내서는 안 될 걸세. 나그네도, 신 같은 오디세우스의 집에 있는 다른 종들도 아무도 떠밀지 말게. 자, 술 따르는 이가 잔마다 신께 바칠 몫을 조금씩 따르게 하세. 신께 술을 따라 바치고 집으로 가서 잠자리에 들도록 말일세. 나그네는 오디세우스의 홀에 남겨 두어 텔레마코스가 돌보게 하세. 그의 집으로 찾아왔으니 말일세."
422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그 말을 반겼다. 둘리키온에서 온 전령이자 암피노모스의 시종인 영웅 물리오스가 그들을 위해 술동이에 술을 섞어, 한 사람 한 사람 곁에 서서 잔을 채워 주었다. 그들은 복된 신들께 술을 따라 바친 뒤 꿀처럼 달콤한 포도주를 마셨다. 신께 술을 따라 바치고 마음껏 마시고 나자, 그들은 잠을 자러 저마다 제 집으로 돌아갔다.
주
1. 이로스(Iros, 그리스어 Ἶρος)는 신들의 말을 전하는 여신 이리스(Iris)의 이름을 사내 이름처럼 바꾼 별명이다. 누가 시키면 달려가 말을 전해 주던 심부름꾼이라 그렇게 불렸다. 18.73의 「이로스 아닌 이로스」는 원문 Ἶρος Ἄϊρος(Iros Airos)를 옮긴 것으로, 이름 앞에 부정의 접두사를 붙여 이제 심부름도 못 다닐 신세가 되리라고 비꼬는 말장난이다.